요즘은 기존 역사트레킹에 치매예방 활동을 추가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 역치사지

 

역지사지가 아니다. 역치사지다. 뜻은 이렇다.

 

- 역사트레킹으로 치매예방하고 사랑하고 지혜롭게 살자!

 

제목이 좀 낯간지러운가? 아니면 너무 억지스러운가? 그래도 제목이 귀에는 들어올거다.

우리가 잘 쓰는 역지사지라는 사자성어를 빗대서 네이밍을 했으니까.

 

그럼 역치사지는 기존 역사트레킹과 무엇이 다른가? 이 부분이 수강생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일 것이다.

역치사지는 숲속 활동을 강화했다. 정리를 해보면 이렇다.

 

1. 숲속 명상

2.기체조

3. 맨발걷기

 

기존 역사트레킹에서는 숲길 활동을 그리 활발히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숲길을 음미해서 걸어갔을 뿐이다.

트레킹의 취지에 맞게 이동에 충실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역치사지에서는 숲에서의 활동을 극대화한 것이다.

이 좋은 숲길에서 할 수 있는 걸 다 해본다는 뜻이다. 모든 생명이 살아숨쉬는 숲을 조금이라도 더 느껴보자는 것이다.

 

숲은 자연 그 자체이기에 숲에서는 치매나 우울증이 기승을 부릴 수가 없다. 그래서 정신 건강을 지키려면 반드시 숲과 친해져야한다. 그렇게 숲을 가까이에 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면역력이 증강될 것이다. 그래서 숲과 친한 사람들은 병원과 멀어진다고 하지 않나.

 

풍부한 숲속 활동을 통해 치매도 예방하고 우울증도 극복할 수 있는 역치사지! 역사트레킹이 이렇게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드릴란다.

 

 

 

 

 

ps. 역치사지 준비하느라 답사도 다시 다 가고 했는데... 코로나가 계속 기승을 부려 강의가 다시 개설될 수 있을지

불분명해졌어요. 실력발휘 좀 하려고 했는데... 이 넘의 코로나야 제발 좀 사라져라!!!

 

 

 

 

 

 

 

 

여행기도 늦게 올리고 이 소식도 늦게 올리고...^^

 

지난 2021년 5월 27일 목요일에 내 사연이 MBC <심야괴담회>에

소개되었다. 제목은 '안개 속의 하이힐'이다. 원래 제목은 '안개 속에서'였는데...

제작중에 바뀌었다. 바뀐 제목이 더 나은 거 같군.

 

배우이자 무속인이 정호근 님이 사연을 소개해줬는데 역시 배우라서 그런지

확실히 다르더군. 라디오 극장처럼 잘 재현해주셨다. 덕분에 1등을 했다.

뭐 3편 중에 1등이었지만... 그래도 1등도 해보고 얼마나 좋은가! 학교 다닐때는

맨발 꼴등만 했었는데 말야. 상금도 타니 더없이 좋다. 원천징수를 할 줄 알았는데

명시된 금액을 전부다 입금시켜줘서 너무 고마웠다...ㅋ

 

그러고보면 같은 시나리오를 두고도 누구는 수작을 만드는데 누구는 망작으로

쫑을 내버리기도 한다. 그게 바로 내공의 차이인가?ㅋ

 

 

 

#심야괴담회

 

 

 

 

*** 유튜브 링크를 거니까 한 번 관심있는 분들은 한 번 둘러봐주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07ANFmITUaU

 

 

 

 

 

 

 

 

* 두 기의 보물탑: 왼쪽편이 하리 3층석탑. 오른쪽편이 창리 3층석탑.

 

 

 

 

 

 

 

 

2021년 5월 28일 금요일

 

이날은 경기도 여주 영월루 일대를 탐방했다. 여주는 남한강이 유유히 중심부를 흐르고 있다. 그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세종대왕이 잠들어계신 영릉과 신륵사가 자리잡고 있다. 그 두 곳은 약 6km 정도 떨어져있는데 여주시에서 조성한 도보여행길인 여강길을 따라 이동할 수 있다.

 

강변을 따라 걷는 길은 시야는 트여서 좋은데 좀 밋밋한 감이 있다. 서울에서 한강을 걸어보시라. 시간이 흐를수록 좀 따분해질 것이다. 6km면 짧은 거리가 아니다. 그래서 중간에 좀 시야 전환을 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해보인다.

 

그런 역할을 영월루와 영월공원이 해준다. 영월공원은 여주대교 옆 언덕배기에 조성을 했는데 그 정상부에 영월루가 자리잡고 있다. 멀리서보면 언덕배기에 누각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다. 그렇다. 영월루 위에 올라서면 높은 위치에서 남한강 일대를 조망할 수 있게된다. 강 건너편에 있는 신륵사 관광지 일대도 한 눈에 들어온다. 강변길에서 보는 풍광과는 또다른 이미지가 펼쳐지는 것이다.

 

영월공원에 들어서면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린 벽화가 눈길을 끈다. 그런데 이 벽화는 도자기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세계도자기엑스포2001>을 맞이하여 세종대왕의 업적을 도자기 벽화로 그려낸 것이다. 상당히 이색적인 설치물이었다. 참고로 <세계도자기엑스포2001>은 2001년도에 경기도 여주, 이천, 광주에서 개최되었다. 3곳 다 도자기와 관련이 많은 도시들이다.

 

세종대왕의 일대기를 둘러본 후 영월루에 올라섰다. 원래 영월루는 여주군청의 정문이었다. 1925년에 군청 건물을 새로지을 때 당시 군수였던 신현태가 현재의 자리로 이건을 했다. 이건이라고는 하지만 새로 지을 정도로 손을 많이봤다고 한다. 현재는 경기도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어떻게 누각이 군청의 정문이 될 수 있을까, 하고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나만 궁금하나...ㅋ

 

 

 

 

 

 

 

 

* 영월루

 

 

 

 

 

 

 

 

 

 

 

 

* 남한강: 마암 일대에서 바라본 모습. 강 건너편이 신륵사 관광지구다.

 

 

 

 

 

 

 

격이 높은 사찰같은 곳을 생각해보자. 본당이 있는 중심지 앞에 누각이 있을 것이다. 이런 누각은 통상 1층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2층은 법회 장소로 쓰인다. 이런 본당앞 누각을 보통 보제루라고 부른다. 하지만 꼭 그 이름으로만 쓰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유명한 부석사 무량수전 앞의 누각은 안양루다. 서울의 명찰 진관사에서는 홍제루라고 부른다.

 

이렇게 누각 형식으로 문을 낸 것을 두고 누문이라고 칭한다. 같은 누문이지만 사찰과 관청은 좀 달랐다. 관청은 문짝이 달려있어 시간이 되면 문을 닫았고, 그 앞에 횃불을 밝히고 포졸들이 서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하지만 사찰은 부처님의 가피가 만방에 펼쳐지듯이 문짝이 달리지 않고 항상 오픈되어 있다.

 

영월루가 자리잡고 있는 언덕배기 아래에는 '마암'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 마암의 진면목을 관찰하려면 강 건너편이나 여주대교 중간쯤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잔잔한 강물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마암은 풍류객들의 발걸음을 모으기에 충분할 정도로 매력적인 모습이다.

 

영월루를 내려 오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기의 탑을 볼 수 있다. 두 기가 나란히 있어 얼핏보면 쌍둥이탑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보면 서로 다른 외형을 가진 탑임을 알 수 있다. 뭐 눈썰미가 없는 분이면 좀 시간이 걸리려나...ㅋ

 

먼저 하리 삼층석탑을 살펴보자. 하리 삼층석탑은 보물 제92호로 지정됐는데 1958년 11월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높이가 3.7미터에 달하는 하리 삼층석탑은 신라시대 석탑 양식을 계승한 탑으로 고려 후기에 만들어졌다. 1층 탑신부가 날씬하고 길죽한 것이 특징인데 아쉽게도 상륜부는 완전히 멸실된 상태다.

 

하리 삼층석탑을 조사하다가 흥미로운 점을 하나 발견했다. 기단부를 두고 책마다 다른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두산백과>는 기단을 2층 기단으로 설명하고 있고, <답사여행의 길잡이>라는 책에서는 1층 기단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하리 삼층석탑은 2층기단이 될 수 없어보인다. 단층 기단의 석탑인 것이다. 석탑 앞에 설치된 설명문에도 1층 기단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그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이 잘못 기술된 것인가?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여간 역사트레킹을 하다보면 이렇게 어긋난 것을 찾아보는 재미도 생긴다.

 

바로 옆에 있는 창리 삼층석탑을 살펴보자. 창리 삼층석탑도 하리 삼층석탑과 함께 1958년 11월에 이곳으로 이전된다. 보물 제91호로 지정되어 있는 창리 삼층석탑이야말로 기단부가 2층으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이 탑은 신라 석탑 양식에서 벗어나 좀 더 독특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1층 기단을 굄돌이 받치고 있는데 이 굄돌들은 단일 석재가 아니라 여러개의 돌로 이루어져있다. 그래서 얼핏보면 그 부분이 금이 간 것처럼 보인다. 하리 삼층석탑처럼 창리 삼층석탑도 상륜부가 다 멸실됐다. 아쉽다.

 

두 개의 탑까지 봤으면 영월공원 탐방이 종료된다. 영월루에서 시원한 남한강변도 보고, 보물로 지정된 두 개의 탑도 볼 수 있는 영월공원... 여주를 방문하실 기회가 있으시면 꼭 한 번 가보셨으면 좋겠다. 후회하지 않으실 것이다. 입장료도 없다...ㅋ

 

 

 

 

 

 

* 두 개의 탑

 

 

 

 

 

 

 

* 남한강

 

 

 

 

 

 

 

 

 

 

 

 

 

* 고달사지 석불대좌

 

 

 

 

 

 

 

 

2021년 5월 27일 목요일

 

3일간의 강원도 평창 오대산 일대 탐방을 마친후 경기도 여주로 향했다. 벼르고 있던 여주 고달사지를 찾아가려고 한 것이다. 아시분들은 아시겠지만 뚜벅이들에게 답사여행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해당 문화재가 읍내 근처에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니까. 하루에 서너편밖에 없는 시골버스를 놓쳤다가는... 택시를 타라고? 돈이 어딨어!

 

지도를 검색해보니 그나마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양동역에서 고달사지로 가는 버스편을 타는게 제일 나은 듯싶었다. 하지만 필자의 뜻대로 됐겠는가? 뭐 워낙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난터라 새삼스럽지도 않다. 결론적으로 말해 버스를 잘못타고 해서 2시간 이상을 걸었고, 고달사지에는 해가 진 이후에 도착했다. 그래서 사진들이 다 어둡게 나왔다. 이렇게 뚜벅이들은 문화재 답사하기가 어렵다.

 

내리는 곳을 지나쳐서 급하게 버스에 내렸다. 그런데 알고보니 필자가 탔던 버스는 원래부터 고달사지까지 가지 않는 버스였다. 가는 방향만 비슷할 뿐 하차해서 약 4km 이상을 걸어가야 했다. 혼자 궁시렁거리면서 방향을 다시잡고 이동을 했는데 옆쪽으로 무언가 보이는 것이다.

 

"앗! 버스를 잘 못 탄 이유가 있구만. 저걸 보려고 여기에 내리게 된 거였어!"

 

선돌이었다. 여주 석우리 선돌. 경기도 기념물 제132호로 지정된 석우리 선돌은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 알려졌다. 입석이라고 불리는 선돌은 옛 선인들의 신앙의 대상이었다. 이를 두고 거석숭배문화라고 부른다. 석우리 선돌이 자리잡고 있는 곳은 주위 산들이 완만하게 둘러져있고, 앞으로는 금당천이 흐르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예전부터 마을이 형성됐고, 그 주민들이 선돌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선돌 인근에는 마고 할멈이 물레질을 했다는 넓은 돌이 있는데 이 대석은 제단으로 쓰였을 거라고 추측된다.

 

석우리 선돌은 높이가 2.45미터라 그렇게 크지는 않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옛 선인들의 신앙의 대상을 만날 수 있어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선돌이 필자를 불렀나, 아니면 필자가 선돌을 불렀나... 한편 옛날 표지판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표지판에는 '여주군석우리선돌'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됐을 때가 1992년이었으니 '여주시'가 아니라 '여주군'으로 표기된 것이다. 여주군이 여주시로 승격된 시기는 2013년 6월이었다.

 

 

 

 

 

 

 

* 석우리 선돌

 

 

 

 

 

 

 

 

우여곡절 끝에 고달사지에 도착했다. 이미 해가 거의 진 상태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잘못하면 또 심령사진처럼 이상한 사진만 찍게될 거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고 산세도 가늠해보고... 이런 것도 없이 그냥 빠르게 셔터를 눌렀다. 큰 폐사지를 빠르게 움직이며 사진을 찍어댔다.

 

혜목산 아래 넓직하게 자리잡고 있던 고달사는 764년, 신라 경덕왕 23년에 창건됐다고 전해진다. 고달사는 남한강 물길과 가까이에 있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이곳의 관리를 위해 사찰의 건립을 하였는데 유명한 신륵사도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신륵사, 고달사, 법천사, 흥법사, 거돈사 등등... 남한강 수계에는 큰 사찰들이 들어섰고 고려시대에는 더 크게 번성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갔고 사찰들도 쇠락하기 시작했다. 현재 신륵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폐사되었다. 그래서 남한강 수계를 따라가면 폐사지들을 여럿 만날 수 있다. 폐사지 답사는 역사의 시간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여행이다. 하지만 폐사지라서 그런지 좀 쓸쓸하다. 가을 낙엽이 날릴때 행하면 아주 더 쓸쓸할 거다. ㅋ

 

고달사(高達寺)는 '도의 경지를 통한다'라는 뜻을 가졌다. 고달사에는 석조물들이 많았는데 모든 석물들은 석공 '고달'이 다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석공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죽는 줄도 모르고 석물 만들기에 매달렸다. 이윽고 석조물들은 다 완성됐고 고달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다. 이후 그는 도에 통달했으니, 이에 고달사가 됐다는 전설따라 삼천리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달사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석불대좌이다. 보물 제8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지 석불대좌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좌이다. 높이가 1.57미터인 고달사지 대좌는 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다른 석조대좌들이 원형이나 팔각형으로 되어 있는 것과 다른 면모다. 비교적 원형이 잘 갖추어져 있고 그 모양새가 세련돼 고달사지에서 가장 눈에 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보니 사각형 석불대좌는 강릉에 있는 안국사지에서도 보았다. 안국사지는 관음리 5층석탑이 있는 곳인데 이 폐사지에도 사각형 석불대좌가 있는 것이다. 안국사지의 석불대좌는 고달사지 대좌보다 규모는 작았고 세련미도 좀 떨어지긴 했다. 그래서인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데도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안국사지를 방문했을 때도 어두운 밤이었고, 고달사지를 방문했을 때도 해가 떨어진 뒤였고... 그래서 사진이 다 심령사진처럼 찍혔고...ㅋ

 

 

 

 

 

 

 

* 원종국사혜진탑비

 

 

 

 

 

 

 

정말 사진들이 엉망이라 사진을 내거는 게 좀 민망할 정도다. 그래도 보물 제6호로 지정된 원종국사혜진탑비는 좀 언급해야겠다. 옛날 고달사지 사진을 보면 원종국사혜진탑비는 현재의 모습처럼 생기지 않았다. 몸체라 불릴수 있는 비신 부분이 없었다. 그래서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 있었다. 몸체가 없었지만 워낙

귀부와 이수가 커서 그랬는지 마치 거북이 장갑차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2014년에 비신이 복제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사실 비신은 1915년에 넘어져 8조각으로 깨졌다고 한다. 무슨 조각 피자도 아닌데 8조각이나... 그렇게 훼손된 오리지널 비신은 이후 정비가 됐고, 경복궁을 거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종대사 찬유는 신라말에 태어나 고려 광종 때 입적을 하셨는데 그때 나이가 90세라고 한다. 광종은 그를 왕사라 삼았고, 그가 열반에 이르자 원종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달사는 원종대사 때 크게 중창이 됐던 것이다.

 

옛날 자료에는 고달사지 일대가 전부 논과 밭으로 나온다. 하긴 폐사지는 평평하니 곡식을 기르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고달사지 일대가 대대적으로 발굴되고, 답사지로 각광을 받게된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어떤 남자가 차에서 내려 말을 건냈다.

 

"별보러 오셨어요?"

"예, 별이요?"

"천문동호인 아니세요?"

"아닌데요. 저는 문화재 보러 왔는데요."

 

알고보니 고달사지 주차장이 별을 보는데 딱 좋은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날씨가 좋은 날에 천문동호인들이 간간이 와서 별을 본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고달사지는 아주 컴컴했다. 그 흔한 가로등 시설도 없었다. 그러니 별 보러오지.

 

"여기서 고달사지라고 폐사지의 메카같은 곳이에요. 그래서 저는 문화재 탐방하러 온 거죠."

"그렇군요. 저는 별 보는 거 좋아해서 가끔 이곳에 왔어요. 주차장도 넓어가지고 장비 세팅하기도 좋고 하니까요."

 

한 장소를 두고 서로가 다르게 이용을 했다. 그래도 폐사지에 왔으니 별보는 것보다는 문화재를 보는게 제격이 아니겠나!

 

후일담) 버스가 끊긴지 오래고 해서 신륵사 관광지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그곳에 가면 숙소가 있을 거 같아서. 약 10km 정도가 떨어져 있었는데 열심히 걸어갔다. 다행히 하천 뚝방길이 잘 되어 있어서 안전하게 갈 수 있었다.

 

알고보니 석우리 선돌 앞에 흐르고 있던 금당천을 따라 걷고 있었다. 석우리는 상류였고 신륵사 방향은 하류쪽이었다. 이 일대도 고달사지처럼 아주 컴컴했다. 하긴 인적도 드문 곳에 무슨 가로등이 있었겠는가! 그래서 금당천이 무척 고마웠다. 안전하게 갈 수 있게 뚝방길이 되어 있으니. 이름도 얼마나 이쁜가, 금당천!

 

그렇게 어두컴컴한 금당천을 따라 걷는데... 보름달이 너무 예쁜 것이다. 이날 보름달은 '슈퍼블러드문'이라고 대보름달이었다고 한다. 주위가 어두우니 보름달이 더 명징하게 보였던 것이다. 별 대신 달을 본 것이다.

그날 뚝방길 걷기가 재밌었나보다. 아직까지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우연하게 인조반정과 관련이 있는 원두표의 묘도 확인해두었다. 원두표는 창의문을 도끼로 부수고 도성으로 처음 입성한 무장이었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 창의문 앞에서 항상 원두표이야기를 했었는데 그의 묘가 경기도 여주에 있는지는 처음 알았던 것이다.

 

나중에 기회가되면 금당천을 한 번 더 걸어보고 싶다. 야간에, 그것도 대보름달이 뜰 때 말이다. 요즘은 야간트레킹을 자제하려고 하는데 그래도 금당천은 야간에 걸어야 더 재밌게 걸을 수 있을 거 같다.

 

 

 

 

 

 

* 고달사지 석조

 

 

 

 

 

 

 

* 고달사지 승탑

 

 

 

 

 

 

 

 

* 원두표 묘지: 사진 오른쪽 상단에 달이 보인다. 사진으로 찍으니 작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말 큰 보름달이었다.

 

 

 

 

 

 

 

 

 

 

 

 

* 월정사 8각9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

 

 

 

 

 

 

 

 

* 전나무숲

 

 

 

 

 

 

 

2021년 5월 25일 화요일

 

전날 동해 두타산 무릉계곡 탐방을 한 후 오대산이 있는 평창으로 이동했다. 오대산이 있는 평창군 진부면으로 향했는데 오랜만에 KTX를 탔다. 동해역 -> 진부역까지 탑승했는데 생각보다는 요금이 비싸지 않았다. 저렴하게 KTX를 타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이다. 고속열차가 왜이리 느리지? 무궁화호랑 별 차이가 없네.

 

요금이 저렴한 이유가 있었다. 동해 -> 강릉 구간은 단선 철도다. 양방향 선로가 아니라 앞에서 기차가 오면 비켜줘야 하는 하나짜리 선로라는 것이다. 그러니 KTX가 느릿하게 운행됐던 것이다. 물론 강릉 이후 구간부터는 복선이라 KTX다운 속도로 내달렸다.

 

진부역에 내리니 밤 10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왜 평창군 진부면에 왔는가? 오대산에 가려고 왔다. 오대산이 가까워서 그런지 진부역의 다른 명칭은 오대산역이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오대산을 방문했다. 2014년 가을경에 방문하고 다시 왔으니 7년 만이다. 물론 2014년 이전에도 오대산을 방문했었는데 그때는 비로봉(1,565m)을 오르려고 왔었다. 이와 달리 2014년에는 선재길을 걸으려고 방문했다. 오대산 선재길이 2013년 10월경에 개통을 했는데 개설 1년만에 단풍의 명소로 입소문을 엄청 탄 것이다. 이에 필자도 단풍 구경을 갔던 것이다.

 

예전부터 오대산은 단풍의 명소로 손꼽이는 곳이었다. 그런 오대산에 계곡길을 따라 도보여행길인 선재길이 개설이되니 도보여행자들은 신이 날 수밖에! 가을이 깊어갈수록 선재길의 단풍도 더 깊은 빛깔을 내고 있었다. 맑은 계곡물과 어우러진 오색빛깔 단풍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 아름다워 눈물이 날 정도였다. 길을 걷고 있으니 근심걱정이 계곡물 위로 떠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이 얼마나 좋은가!

 

가을이 좋으면 다른 계절도 다 좋다. 봄여름가을겨울이 다 자신의 색깔을 가지고 스스로를 뽐내는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5월말에 왔으니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그래서 초록의 싱그러움을 한껏 기대하고 왔다. 과연 그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유유히 흐르는 오대천 계곡물, 그 사이로 퍼지는 싱그러운 피톤치드의 향...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1975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오대산은 다섯개의 대(臺)가 모여있는 곳이다. 중심인 중대(中臺)를 동대, 서대,남대,북대가 둥글게 두르고 있는 형상이다. 그래서 오대산(五臺山)이라 불린다. 중대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 연꽃잎이 감싸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하여 오대산은 천하 명당이라고 불린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 실록을 보관하던 오대산 사고도 있었다.

 

이렇게 오대산이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게 된 건 자장율사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장율사는 643년(선덕여왕12)에 당나라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가지고 귀국한 후 오대산에 진신사리를 모시는 절을 짓는다. 그곳이 바로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이다. 상원사 적멸보궁이라고 더 많이 알려진 곳이다. 한편 자장율사는 경주 황룡사9층목탑 건립을 주도하는 등 신라 불교 진흥에 큰 공헌을 했다.

 

오대산은 문수보살 신앙의 중심지로 불리고 있다.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에서 수도를 했고 그 자리에 월정사가 창건된 것이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화신으로 코끼리를 타고 다니시는 분인데 동자의 모습으로 현세계에 나타나신다고 한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조는 만났다고 한다. 등까지 밀어줬다고 한다. 오대산 선재길을 찬찬히 걸어가면서 관련된 이야기를 알아보자.

 

 

 

 

 

 

* 선재길

 

 

 

 

 

 

 

* 선재길

 

 

 

 

 

 

 

선재길은 2013년 가을에 개통된 도보여행길로 월정사와 상원사를 연결하는 트레일(오솔길)이다. 선재길은 스님들이 월정사와 상원사를 오갈 때 다니던 옛길이었다. 월정사가 643년, 상원사가 724년에 창건됐으니 길 자체가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길인 셈이다. 오대산은 산세가 그리 험하지 않다. 부드러운 흙산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선재길도 부드럽게 걸어갈 수 있다.

 

'선재'라는 말도 불교용어다. 동자인 선재는 지혜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표상으로 <화엄경>의 중심인물이다. 월정사를 창건한 자장율사는 선재동자의 구도행각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뒤뜰에 53그루의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53은 선재동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만난 선지자의 숫자였다. 정리를 해보면, 옛 스님들이 오가던 선재길을 걸으며 '나를 찾아보는' 깨달음의 시간을 가져보자는 것이다. 안내문에도 선재길을 걸으며 선재동자처럼 깨달음을 얻어 보라고 적혀 있었다.

 

그 깨달음을 찾아 본격적으로 선재길을 걸어보자. 첫번째 탐방지는 전나무숲으로 유명한 월정사다. 일주문을 지나면 월정사 전나무숲이 시작되는데 시내버스는 일주문을 지나친다. 그래서 월정사 정류장에서 내려 일주문 방향으로 역순으로 이동했다. 주차장에서 다리를 건너기 전에 주차장 방면 전나무 숲길로 접어들 수 있다. 이 숲길은 메인이 아니다. 메인 숲길은 하천 반대편에 있다. 한마디로 오대천을 사이에 두고 메인과 사이드 전나무숲이 있는 것이다.

 

일주문을 통과하니 더 울창한 전나무숲이 등장했다.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서 있는 전나무들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 전나무숲은 '천년의 숲'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약 1,700여 그루의 전나무에서 발산되는 알싸한 나무향이 탐방객의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준다. 전나무는 상록수라 사계절 내내 녹음을 유지하지 않던가. 꼿꼿함 속에 피어나는 푸르름을 사시사철 만끽할 수 있다니! 전나무숲이 주는 감동만으로도 월정사는 방문할 가치가 있는 곳이다.

 

전나무숲은 약 1km 정도에 달했다. 이후 사천왕문을 지나 월정사 중심영역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어째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보이지 않는다. 본전인 적광전도 연륜이 느껴지지 않았다. 월정사가 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아니었던가?

 

그렇다. 월정사의 전각들은 한국전쟁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수많은 전란으로 소실과 중건을 반복했던 월정사였다. 그러다 한국전쟁, 그 중에서도 1.4후퇴 당시 작전상의 이유로 국군이 월정사의 전각들을 불태웠다. 이렇게 전쟁이 무서운 것이다. 전쟁때문에 너무나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니까.

 

유명한 탄허 스님이 1964년에 본당인 적광전을 다시 짓는 것을 시작으로 월정사의 중건이 시작되었다. 오대산과 인연이 많으셨던 탄허 스님은 1983년. 세속 나이로 71세에 월정사 방산굴에서 속세과의 인연을 마감하셨다.

 

월정사 적광전은 좀 독특하다. 통상적으로 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이 본존불로 모셔지는데 월정사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찰에 가면 대웅전은 꼭 가본다. 그 대웅전에 모셔진 분이 석가모니불이다. 이 부분이 쉽게 다가오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사찰에는 무조건 대웅전이 있어야 하고 그곳에 모셔진 분이 최고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다. 이 부분은 나중에 한 번 쫘~악 한 번 설명해보겠다.

 

건물에서 느껴졌던 헛헛한 느낌은 월정사 팔각구층(8각9층)석탑과 보살상 앞에 가면 싹다 사라질거다. 높이 15.2미터의 이 거대한 석탑은 주위의 전각들을 호령하듯 절 마당 중심에 우뚝하게 솟아있다. 그 앞으로는 석조보살좌상이 인자한 미소를 품고 그윽하게 9층석탑을 바라보고 있다.

 

 

 

 

 

 

 

* 월정사 8각9층석탑

 

 

 

 

 

 

 

 

* 월정사 전나무숲: 전나무숲과 성황당

 

 

 

 

 

 

 

8각9층석탑은 말그대로 탑신이 8각형으로 되어 있다. 신라시대 대표적인 석탑인 석가탑을 생각해보자. 생일케이크 상자처럼 탑신이 네모꼴이다. 하지만 월정사 9층석탑은 표준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다각형으로 탑신부를 조각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제작된 석탑은 경천사지10층석탑과 원각사지10층석탑 등이 있다. 교과서에서 한 번 쯤 다보셨을 것이다. 혹시 보시면서 이런 생각들을 하셨을지 모른다.

 

'이 탑들 정말 큰데! 커서 사진에 다 안 나와!'

 

기회가 되시면 탑돌이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 천천히 돌면서 9층석탑을 관찰하는 것이다. 석조보살의 은은한 미소와 아름다운 뒤태를 살펴보는 것도 잊지 말자. 또 석조보살-9층석탑-적광전이 일직선상으로 늘어서 있는 부분도 놓치지 말고 꼭 눈여겨 보자. 주위 산세와 어우러진 석탑과 보살상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보인다. 그렇게 고운 자태를 선사하는 8각9층석탑은 국보 제48호로 석조보살좌상은 보물 제1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제 본격적인 선재길 탐방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오대산은 단풍의 명소다. 그래서 선재길도 가을에 오면 제일 좋다. 선재길을 걸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걷다보면 오색찬란한 단풍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단풍을 바라보며 집착과 번뇌를 잊어버리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섶다리, 징검다리 같은 정겨움을 더하는 구조물들이 있었지만 선재길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계곡이다. 시원스레 물줄기를 뿜는 계곡길 주위로 울긋불긋하게 펼쳐진 단풍나무 숲을 지날 때의 매력이란! 그 매력에 빠지며 걷다보면 무아지경에 이를지 모른다. 맑은 계곡물 위로 붉은빛을 머금은 단풍잎 하나가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곳이 무릉도원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니까.

 

오대산 선재길은 약 9km 정도에 달하는데, 계곡을 끼고 있는 길치고는 경사도가 상당히 완만하다. 그래서 휴식시간을 갖는다고 해도 3시간 30분이면 완주가 가능하다. 필자는 넉넉히 아예 4시간을 잡고 이동했다. 계곡길이란 한계 때문에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에는 통행에 제한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지난 수해때 망실된 것으로 보이는 몇몇 시설물들은 아직까지 복구가 되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여름에 계곡을 끼고 걷는 길은 조심해야한다.

 

그렇게 선재길이 끝나는 지점에 상원사가 자리잡고 있다. 전통찻집 옆에 관대걸이 혹은 갓걸이라고 불리는 비석이있는데 이는 상원사 계곡에서 목욕을 했던 세조가 의관을 걸어두웠던 비석이라고 한다.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이후 피부병에 걸리고만다. 이에 오대산 상원사 계곡에 와서 목욕을 하게된다. 이때

숲에 있던 동자승을 불러 자신의 등을 밀게한다.

 

"어디 가서 임금의 몸을 씻겨주었다고 말하지 말거라."

"임금께서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직접 보았다고 말하지 마세요."

 

오대산이 문수보살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설화라고 할 수 있다. 그나저나 세조는 꽤나 호사를 누린 셈이다. 문수보살은 깨달음의 지혜를 품고 있는 분인데 그분한테 등을 밀게 했다니... 뜻하지 않게 VIP 서비스를 받은 것인가? 정작 문수보살을 그토록 친견하고했던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 상원사

 

 

 

 

 

 

상원사는 월정사와는 또다른 멋이 있다. 산 봉우리가 부드럽게 감싸고 있어 경내 안으로 들어가면 포근한 느낌이든다. 상원사 경내로 들어섰으면 상원사 동종부터 찾아보자. 725년에 만들어진 상원사 동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으로 국보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이 종은 안동에 있었는데 1469년(예종1)에 상원사로 옮겨왔다.

 

보호각 안에 있어 유리너머로 보아야 하지만 아름다운 그 자태는 가둘 수가 없어보인다. 특히 중심부에 새겨진 비천상의 흥겨운 연주는 주파수만 잘 맞추면 당장이라도 들을 수가 있을 거 같다. 혹시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주파수 대역으로 연주를 하시나? 참고로 비천(飛天)은 한자에서도 보이듯 날아다니는 천상인을 말한다.

 

상원사 동종이 제작됐을 때는 신라 성덕왕 24년이었는데 성덕대왕 신종(국보제29호)보다 46년이나 앞선 것이다. 성덕왕이 성덕대왕인가? 그렇다. 그리고 성덕대왕 신종은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 아실 것이다. 에밀레종!

 

중심지답게 상원사에서는 문수보살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 된다. 그 중심에는 국보 제221호로 지정된 목조문수동자좌상이 있다. 세조가 목격했다는 동자의 모습을 나무로 조각을 했다고 하는데 둥근 꼭지 두 개를 딴 머리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앳띈 동자의 모습이 맞긴하지만 한편으로는 후덕한 보살님의 낯빛도 묻어나온다.

 

목조문수동자좌상은 1466년(세조12)에 의숙공주가 봉헌을 했다고 전해진다. 의숙공주는 세조의 둘째 딸이다. 이렇게 봉헌자와 봉헌시기가 구체적으로 알려질 수 있었던 건 동자상 안에서 유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조사를 하다 그 안에서 서책, 기원문, 저고리 등등의 복장 유물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 유물들은 일괄로 보물 제793호로 지정되었다. 관대걸이를 비롯하여 동종, 목조문수동자좌상까지 상원사는 세조와 관련된 유물들이 참 많은 곳이다.

 

상원사가 높은 고지대에 있어서 그런지 전망대에서 주위를 둘러보는 느낌이든다. 주위가 아늑하다. 좋은 기운을 받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곳이 문수 신앙의 요람이자 천하 명당으로 불리는 것인가? 이렇게 좋은 기운을 받으며 걸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오대산 선재길이다.

 

 

 

 

 

 

* 상원사 동종

 

 

 

 

 

 

*상원사

 

 

 

 

 

 

 

 

 

 

*** 도움말

 

1. 오대산 선재길: 약 9km / 예상이동시간 3시간 30분 정도.

2. 동서울터미널에서 평창군 진부면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음. 소요시간 2시간 30분.

3. 진부면 공용터미널에서 월정사 입구까지 시골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음. 소요시간 약 25분.

4. 필자는 월정사 -> 상원사 방향을 추천함. 상원사가 버스 종점이기 때문임.

 

 

 

 

 

 

 

 

 

 

* 쌍폭포

 

 

 

 

 

 

 

2021년 5월 24일 월요일

 

전날 강릉에서 동해로 이동하여 숙박을 했다. 이날은 동해시의 자랑인 두타산 무릉계곡을 탐방하는 날이다.

도대체 얼마나 멋들어졌으면 무릉계곡(武陵溪谷)이라고 불렸을까! 명칭만으로도 풍유객들의 발걸음을 확 이끈다. 탐방 순서는 이렇다.

 

무릉반석(금란정) -> 삼화사 -> 학소대 -> 관음폭포 -> 쌍폭포 -> 용추폭포

 

무릉계곡은 두타산(1,352m)과 청옥산(1,403m)이 빚어놓은 천혜의 절경이다. 둘 다 해발고도가 천 미터가 넘는 험준한 산이라 자칫 무릉계곡도 난이도가 높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무릉계곡은 느긋하게 계곡 트레킹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풍경 하나하나가 다 아름답고 귀해서 일부러라도 발걸음 하나하나도 천천히 두고 싶은 곳이다. 그런 곳이기에 1977년 3월 17일에 국민관광지1호로 지정되었고, 이후 2008년 2월 5일에는 명승 제 37호로 지정되었다.

 

동해시내에서 무릉계곡으로 향하는 시내버스는 상당히 많다. 대신 시내권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이동시간은 30분 이상이 소요됐다. 잘 확인을 하고 이동을 하시기 바란다.

 

매표를 한 후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금란정과 무릉반석이라고 불리는 너럭바위다. 금란정은 금란계(金蘭契) 회원들이 세운 정자인데 좀 사연이 있는 건축물이다.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으로 이 지역의 향교가 폐쇄가 됐다. 이에 울분에 찬 유림들이 금란계를 조직한 후 모임 장소로 쓰일 수 있는 건물을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해방 이후에야 금란정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금란정은 북평에 있었다. 혹시 들어보셨을지도 모른다. 북평 5일장. 바로 그 북평에 금란정에 서 있었는데 1956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건을 했다. 북평은 동해항과 가까운데 직선거리로 약 2km도 되지 않는다.

예전 2012년도에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 강릉을 거쳐 동해로 이동을 했는데 북평에서 1박을 했었다. 숙소에서 잔 게 아니라 후미진 곳에서 텐트치고 잤었다. 그곳이 바로 북평 성당이었다. 성당 내에 공터같은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것이다. 관계자분에게 사정 말씀을 드렸을 때 필자를 좀 기특하게 보셨던 걸로 기억을 한다. 별로 안 기특한데...ㅋ

 

금란정을 지나 무릉반석을 보러갔다. 계곡의 너럭바위가 이렇게도 평평하고 크다니! 자연이 빚은 천연의 대운동장 같다. 한 천 명 정도가 동시에 앉아도 끄떡없을 거 같다. 높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주위를 감싸고 유유히 계곡물이 흐르고 있으니 누구나 다 풍유객이 될 수밖에... 그래서인지 무릉반석 곳곳에는 글씨가 새겨져있다. 풍유객들이 이런 평평한 바위를 그냥 지나쳤겠는가! 그렇게 흔적을 남긴 이 중에는 매월당 김시습 선생도 있었다. 또한 조선시대 명필 중에 한 명이었던 양봉래의 글씨도 있다. 양봉래는 '무릉선경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境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는 풍경과 지명에 딱 걸맞은 글씨를 남겼다.

 

 

 

 

 

 

 

* 삼화사: 철조노사나좌불

 

 

 

 

 

 

 

* 삼화사3층석탑

 

 

 

 

 

 

 

이제 삼화사(三和寺)를 보러가자. 신라 자장율사에 의해 건립된 삼화사는 그 창건 시기가 642년(선덕여왕 11)에 이른다. 삼화사는 흑연대(黑連臺) 혹은 삼공사(三公寺)으로도 불렸는데 이와 관련하여 각기 다른 창건설화가 있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율사가 동해안 일대를 두루 다니다 두타산에 이르러 절을 지으니 그것이 바로 흑연대라는 것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사찰이라하면 '~사', '~암', '~정사'로 끝나야 하는데 '~대'로 끝나니까. 이에 약사불삼형제의 이야기가 있다. 병을 치유해주는 약사부처님이 삼형제로 오셨다는 이야기인데 SF 어드벤처같은 스토리지만 잠깐 언급해본다.

 

약사삼불인 백(伯)·중(仲)·계(季) 삼형제가 멀리 이국에서 무릉계곡으로 들어온다. 삼형제는 각기 색깔이 다른 연꽃을 들고 왔는데 첫째는 흑련(黑蓮), 둘째는 청련(靑蓮), 셋째는 금련(金蓮)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후 삼형제가 머무른 곳은 각각 흑련대, 청련대, 금련대가 됐다. 자장율사가 흑련대를 창건했다는 이야기는 약사불 삼형제 중 첫째의 스토리와 서로 맞물린다.

 

두번째는 삼공사와 관련된 이야기다. 불교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신라 말기에 유행했던 구산선문에 대해서 한번쯤 들어보셨을 것이다. 구산선문은 경전 위주의 교종과는 달리 수행에 중심을 둔 선종의 9개 선문을 말한다. 한마디로 신라 말기에 9개의 선종 문파가 산을 중심으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수행하기에는 산이 딱이지 않은가.

 

구산선문 중 사굴산파를 연 범일국사라는 분이 계시다. 범일국사가 개창한 굴산사는 강릉에 위치해있는데 도보여행길인 강릉바우길 6구간을 걷다보면 닿을 수 있다. 강릉바우길 6구간의 다른 명칭은 '굴산사지가는길'인데 네이밍에서도 보이듯 현재 굴산사는 폐사가되었다. 그래도 그곳에 가보면 굴산사지 당간지주가 우뚝하게 서서 도보여행자들을 반겨준다.

 

범일국사가 무릉계곡에 사찰을 창건하니 그곳이 바로 삼공사였다. 고려 건국 이후 삼공사는 드디어 삼화사(三和寺)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름을 바꾼 이는 왕건이었다. 왕건이 삼공사에서 후삼국의 통일을 기원하였고 이후 '세 나라를 하나로 화합시킨 영험한 절'이라는 뜻의 삼화사로 개칭을 한 것이다.

 

그렇게 좋은 뜻을 가진 삼화사지만 아픔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계곡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서 그런지 홍수 피해를 입기도 했고, 화재를 당해 다시 고쳐짓기도 했다. 1907년도에는 방화에 의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사찰이야 목조건물이 대대수라 화재에 항상 취약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하지만 방화라니! 누가 감히 천년고찰에 불을 질렀단 말인가!

 

일제가 불을 질렀다. 1907년이었다. 동해안 지역에서 활동했던 의병들이 삼화사에서 도움을 받게된다. 이에 일본군은 삼화사를 불태워버린 것이다. 이런 만행을 저지르다니! 부처님이 노할 일이다. 산길로 한 시간 정도 올라가면 두타산성이 있는데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이 지역 의병들의 거점이라고 하니 삼화사 일대는 일본과 연관이 많이 곳이라고 할 수 있다.

 

 

 

 

 

* 두타산 무릉계곡 숲길

 

 

 

 

 

 

 

* 학소대

 

 

 

 

 

 

 

삼화사의 시련은 여기가 끝이아니다. 사실 삼화사는 1977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을 했다. 원래 자리는 동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인데 이곳에 시멘트 공장이 들어서게 되어 옮기게 된 것이다. 수많은 시련을 견뎌냈던 천년고찰이 시멘트 공장에 밀려나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사천왕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가면 본전인 적광전이 있고 그 앞에 3층 석탑이 보인다. 보물 제1277호로 지정되어 있는 삼화사 3층석탑인데 이 탑도 사연이 많다. 1977년 시멘트 공장을 피해 삼화사가 이전을 했을 때 함께 이동을 한다. 하지만 터를 잘못 잡았는지 그 뒤 20년 후인 1997년에 현재의 자리로 다시 이건을 한다.

두 번이나 자리를 옮겨서 그런가? 현재의 자리가 제자리인 거 같다. 높이 4.8미터짜리 3층석탑이 본당 앞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보니 중심이 꽉 잡힌 느낌이다.

 

후기 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니 3층석탑도 천 년의 시간을 버틴 셈이다. 삼화사 석탑은 좀 특이한 점이 있다. 석재가 석회암이다. 우리나라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화강암이 아닌 석회암으로 석탑을 쌓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1977년도 삼화사가 이전을 했던 일을 생각해보시라. 시멘트 생산한다고 천년고찰을 이전을 시키지 않았던가. 시멘트의 원료가 바로 석회암이다.

 

석재의 특성상 화강암보다 석회암이 더 풍화에 취약하다. 삼화사 3층석탑도 마찬가지다. 군데군데 훼손이 됐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는 큰 훼손없이 잘 드러나있다. 상륜부인 찰주 부분이 두드러져 보이는데 꺾인 찰주에 걸린 보주 하나가 인상적이다. 찰주는 탑의 상륜부에 장식물들을 꽂기 위해 세운 쇠로 만든 기둥이다. 마치 피뢰침처럼 생겼다. 보주는 상륜부를 구성하는 장식물로 찰주에 쏙 끼어넣는다. 잘 연상이 안되면 여의주를 생각하시면 된다. 삼화사 3층석탑의 찰주에는 보주 하나가 달랑 하나 걸려있다. 얼핏보면 까치밥처럼 보인다.

 

이제 본당인 적광전에 가보자. 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곳이다. 꼭 대웅전이 사찰의 본당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극락전이 본당이 될 수도 있고, 약사전이 본전이 될 수도 있다. 부처님은 한 분만 계시는게 아니니까. 불교는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지 않은가.

 

삼화사 적광전에는 보물 제1292호로 지정된 철조노사나좌불이 있다. 은은한 미소를 짓는 부처님을 잘 표현됐다. 어떤 솜씨좋은 이가 만들었을까. 구부리기도 쉽지 않은 거친 질감의 철로 저렇게 멋진 작품을 만들 수 있다니. 그저 감탄사가 나올 뿐이다. 한편 노사나불은 비로자나불의 다른 이름이다.

 

삼화사를 나오면 본격적으로 무릉계곡을 걷게 된다. 두타산과 청옥산이 품고 있는 곳이라 그런지 무릉계곡 일대에는 폭포가 많다. 관음폭포, 쌍폭포, 용추폭포 등등... 기암괴석들도 만날 수 있다. 학소대, 병풍바위, 만물상 등등... 울창한 계곡숲길을 따라가면서 만나는 폭포는 탐방객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 기암괴석들은 눈을 즐겁게 한다.

 

무릉계곡 탐방은 쌍폭포와 용추폭포에서 절정에 이른다. 부드럽게 완경사로 이어진 탐방로를 따라가다 쌍폭포를 만나고, 이후 용추폭포에 다다른다. 힘차게 쏟아지는 폭포수 소리를 눈을 감고 들어본다. 귓전을 때리는 폭포 소리에 속이 다 시원해진다. 유량이 많으면 더 경쾌한 소리를 감상할 수 있으니 비가 온 뒤에 무릉계곡을 탐방하면 더 다이나믹할 거 같다.

 

이렇게하여 신선놀음같던 두타산 무릉계곡 트레킹이 끝이났다. 원점회귀형 코스라 왔던 길을 다시 돌아와야 하지만 그것조차도 좋다. 워낙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라 올라가는 길도 내려가는 길도 모두 다 즐겁기 때문이다. 그냥 가기가 아쉬울 정도다. 이참에 그냥 무릉도원에서 자리깔고 신선이나 되볼까?ㅋ

 

 

 

 

 

 

* 용추폭포

 

 

 

 

 

 

* 쌍폭포: 쌍폭포중 계단식으로 낙수되는 폭포.

 

 

 

 

 

 

*관음폭포

 

 

 

 

 

 

* 무릉반석

 

 

 

 

 

 

*** 두타산 무릉계곡 가는법

1. 동해시내나 동해역 인근 버스정류장에서 무릉계곡행 시내버스탑승

2. 동해역 기준으로 이동시간은 약 20~30분 정도 소요됨. 배차간격은 약 30분 정도임.

 

 

 

 

 

 

 

 

 

* 정동심곡바다부채길

 

 

 

 

 

 

 

2021년 5월 23일 일요일 / 여행 5일차

 

이전 포스팅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날 관음리5층석탑 탐방을 너무 늦은 시각에 했다. 그러다보니 숙소에 거의 밤 12시경에 들어갔다. 이러니까 여행이 노동이 되버리는거지... 이것도 팔자인가?ㅋ

 

이날은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을 탐방하러 갔다. 바다부채길은 강릉시 강동면에 위치해있는데 정동진과 심곡항 사이에 있다하여 정동심곡 바다부채길로 불린다. 2017년 6월에 개통된 바다부채길은 아름다운 해상 비경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곳이다.

 

강릉시내에서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을 가려면 강릉역에서 정동진역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게 좋다. 하지만 기차가 많이 있지 않다. 차선책으로 남대천강릉교 정류장에서 정동진역행 버스를 타보자. 배차간격이 약 40분 정도라 시간을 잘 맞춰어야 한다. 만약 시간이 좀 엇나가면 인근에 있는 월하거리에 가서 주점부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하긴 배차간격 40분이면 양호한 거지. 하루에 버스가 4번 들어가는 곳을 탐방했을 때를 생각해봐!ㅋ 이 버스는 마을112번인데 강릉역에서도 탈 수 있다.

 

 

 

 

 

* 부채바위

 

 

 

 

 

정동진역으로 유명한 정동진은 해안단구로도 유명하다. 정동진의 해안단구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 437호(2004년 4월 9일)로 지정되었다. 정동진 해안단구는 면적이 넓고, 보존상태가 좋아 천연기념물이 된 것이다.

 

해안단구(海岸段丘)에 대해서 조금만 더 알아보자. 해안단구는 파식, 즉 파도에 의해서 침식이 된 평평한 지형을 말한다. 한자 구(丘)는 '언덕구'다. 이런 평평한 부분이 해수면 아래에 있다 지각작용으로 인해 지금처럼 수면 위로 올라와 해안단구가 된 것이다. 지각이 올라오는 건 '융기'라고 말한다. 올라오는 것과 달리 물이 빠져서 해안단구가 형성되기도 한다. 바닷물이 빠졌다는 것이다. 하여간 지구는 살아있다. 올라오거나 내려오거나 하니...ㅋ

 

넓은 지형이 드러나서 그런지 정동진 해안단구에는 대형 크루즈선도 올려져있다. 여객선의 외형으로 만들어진 썬크루즈리조트를 말하는 것이다. 급경사였다면 이런 형식의 리조트를 건설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릉을 갈 때마다 항상 그 리조트에서 숙박을 하고 싶었는데... 현실은? 항상 싸구려 여관이었지...ㅋ

 

본격적으로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을 가보자. 바다부채길은 파도가 치는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이 매력이다. 파도가 세게치면 옷에 짠물이 튀기기도 할 정도다. 그런만큼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파도가 거세게 치는 날에는 입장이 불가능하다. 또한 2020년 태풍으로 망실된 심곡 부근 탐방로가 복구가 되지 않아 부채바위까지만 개방이됐다. 2021년 5월 현재의 이야기다. 조속히 복구가 되어 전 구간 탐방이 됐으면 좋겠다.

 

철썩철썩 파도가 치는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다.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은 파도를 좋아하는 사람이 걸으면 좋을 거 같다. 전 구간이 평탄하고, 데크로 만들어져 있어 걷는데 무리가 없다. 하지만 정동매표소 입구 구간의 계단은 '헉' 소리가 난다. 다리에 근육 좀 생길거다...ㅋ

 

ps.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이 좋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속초 외옹치 바다향기로를 더 선호한다. 왜? 외옹치 바다향기로는 공짜니까.

 

 

 

 

 

 

* 정동진 해안단구: 지형이 평평하여 그 위에 썬크루즈리조트가 만들어져있다.

 

 

 

 

 

 

* 정동진역

 

 

 

 

 

 

 

*정동심곡바다부채길: 투구바위. 사진 상단 왼쪽에 있는 바위가 투구바위다.

 

 

 

 

 

 

 

* 정동심곡바다부채길

 

 

 

 

 

 

 

* 정동심곡바다부채길

 

 

 

 

 

 

 

* 정동심곡바다부채길: 정동진 해안단구. 평평한 지형이 드러나보인다.

 

 

 

 

 

 

 

*** 정동심곡 바다부채길 가는법

 

1. 기차: 강릉역에서 정동진역행 기차를 이용. 약 15분 정도 소요됨.

2. 시내버스: 마을112번 탑승(남대천강릉교 정류장 혹은 강릉역정류장)

3. 정동진역에서 썬크루즈리조트 방면으로 걸어감. 약 30~40분 정도 소요됨.

 

 

 

 

 

 

 

 

 

 

* 강릉관음리5층석탑: 심령사진이 아님.

 

 

 

 

 

 

 

2021년 5월 22일 토요일 / 여행 4일차

 

전날 양양에서 강릉으로 이동을 했다. 느그적거렸더니 벌써 오후가 되어버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강도가 낮은(?) 과업을 수행하기로 했다. 강릉 시내권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성산면 관음리5층석탑을 탐방하러 가기로 했다. 지도 검색을 해보니 강릉버스터미널에서 약 5km 정도 떨어져있었다. 5킬로면 쉬엄쉬엄 가더라도 2시간 정도 아닌가! 그래 오늘은 좀 놀면서 탐방하자.

 

관음리5층석탑에 대해서 검색을 하다가 이곳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는 블로그 글을 읽었다. 강릉에 거주하시는 어떤 시민기자가 작성한 기사였는데 그런 글을 쓰셔서 좀 의아했었다.

 

'시내권에서 직선거리로 5킬로 밖에 안 되는 곳이 접근이 어렵다고?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 말이 맞았다. 관음리5층석탑을 찾는데 엄청 고생을 했다. 길을 헤매서 약15km 정도를 걸었던 거 같다. 마지막에는 철조망도 넘어야했다. 10kg가 넘는 배낭을 메고 짧은 다리로 철조망을 넘으려니...ㅋ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했냐? 일단 현지 시민들이 관음리5층석탑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필자한테 그런곳이 있냐고 되묻더라. 그리고 관음리 일대가 상당히 외졌다. 시내권과 가까울 뿐이지 민가도 띄엄띄 엄 있었고 버스편도 몇 편 없었다.

 

강릉남대천에 진입해서 뚝방을 걸었다. 좀 돌아가더라도 뚝방길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이날따라 갑자기 폭염이 몰려왔는지 엄청나게 덥더라. 5월 1일에 설악산 일대에 폭설이 내렸었는데 언제 그랬냐는듯이 20일 만에 초여름 날씨로 변하다니! 이것도 기후변화 때문에 그런 것인가?

 

그렇게 걷다보니 더위를 먹었나? 관음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온 것이다.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이때부터 머리가 찡해지기 시작했다. 대신 다리는 아주 빨라졌다. 지도를 계속 체크를 하는데 계속 뱅뱅거리며 같은 지점을 도는 느낌이 들었다. 막판에는 현지분이 알려주신 철조망을 넘기까지했다. 그렇게 그렇게 관음리5층석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주 늦은 시각에...!

 

관음리5층석탑이 서 있는 자리는 안국사지라고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에는 석탑말고도 돌로 만든 대좌가 있다. 이 대좌에는 예전에 석불이 올려져 있었을 것이다.

 

관음리5층석탑은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가 3.3미터인데 5층 석탑치고는 크기가 작은 편이다. 안타깝게도 5층 탑신 부분이 결실되어 있다. 그래서 크기가 작은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 늦은 시각에 도착해서 그랬는지 사진들이 무슨 심령사진같다. 심야괴담회용 사진인가? 주위에는 불빛 하나 없더라. 대신 산짐승들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계속 들리고... 뭐 이렇게 늦은 시각에 답사를 할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늦게 가면 좋은 사진을 찍기는 어렵지. 카메라가 별로 안 좋으니까.

 

그래도 막판에는 운이 좀 뜨였다. 근처에 사시는 분이 트럭으로 터미널까지 픽업을 해주셨다. 얼마나 고맙던지! 만약 그렇게 안 됐다면 새벽까지 걸어갔을지도 몰라. 택시비 때문에...ㅋ

 

 

 

 

 

 

* 강릉관음리5층석탑

 

 

 

 

 

 

 

* 석불대좌

 

 

 

 

 

 

 

 

 

 

 

 

* 선녀탕: 보다시피 선녀는 없고 아저씨만...

 

 

 

 

 

 

 

2021년 5월 21일 금요일 / 여행 3일차

 

전날 오전에 양양 낙산사를 방문한 후 오후에는 선림원지를 탐방하려고 했다. 선림원지는 유명한 미천골에 자리잡고 있는 폐사지인데... 가보니 미천골 휴양림이 일대 공사중이었다. 휴양림을 통과해야 선림원지를 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선림원지는 가보지도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했다. 덕분에 터벅터벅 한 15km 정도 걸은 것 같다.

 

늦은 시간에 양양 읍내로 돌아왔는데 돈도 아낄겸 2만 5천원 짜리 여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휴~ 눈이 높아진 건가? 전에는 실내에서만 자도 감지덕지한 적이 있었다. 뭐 가난뱅이 여행자들은 그 말이 무엇인지 잘 알 것이다. 하지만 2만 5천원 짜리 여관은 정말 딱 그 수준이었다.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우울하고... 성인방송도 안 나오고...ㅋ

 

전날 선림원지 답사 실패를 만회하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우울한 마음을 씻겨줄 장소가 필요했다. 그렇게해서 오색약수로 유명한 남설악산 주전골 계곡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 오색약수 입구

 

 

 

 

 

 

 

양양 읍내에서 오색약수로 향하는 1시간에 한 대 꼴로 있는데 시골버스치고는 배차량이 많은 편에 속한다.

25분 가량 이동을 하는데 차창밖 풍광이 아름다워 지루하지가 않다. 그냥 시내버스만 타도 신나는 여행이 된다. 사실 이 길은 국도 44호인데 이 길을 따라 가면 한계령을 넘어 인제군에 닿을 수 있다. 그러니 차창밖 풍광이 아름답지! 버스에서 내리면 우뚝 솟아있는 기암괴석들이 병풍처럼 여러분의 시야에 들어올 것이다.

 

- 온 몸을 감싸듯 강렬하게 전해지는 돌산의 딴딴한 기운! 그 기운에 흠뻑젖어 보는거다!

 

그렇다. 설악산은 누가뭐래도 우리나라 제일의 골산이다. 바위산이다. 독특한 형상을 자랑하는 바위들을 보고 있자면 마치 자신이 신선이 되는 느낌을 받을 정도다. 그만큼 설악산이 발산하는 아우라가 굉장하다는 것이다.

 

오색약수터 -> 성국사(오색석사) -> 독주암 -> 선녀탕 -> 용소폭포 -> 용소폭포탐방로

 

약 3.2km 로 정도되는 코스인데 지형특성상 원점회귀를 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약 6.4km로 정도된다. 돌산, 즉 '악'자 들어가는 산은 보기는 멋있는데 직접 탐방하려면 겁부터 난다. 하지만 이 코스는 길이 순하다. 정식 명칭이 <오색주전골 자연관찰로>인데 둘레길 수준이다.

 

트레커는 오색약수를 가장 먼저 만난다. 주전골 계곡은 잘 모르더라도 오색약수는 누구나 다 한 번쯤은 다 들어보았을 것이다. 오래전 이 인근에 오색석사(五色石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 사찰은 성국사로도 불렸다. 그 사찰의 승려가 계곡 너럭바위 위에서 용출되는 샘물을 발견했기에 오색약수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경내에 다섯 가지 색의 나무가 있다하여 오색석사라는 이름을 가졌다는데 아무래도 알록달록한 단풍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오색약수가 있는 곳은 단풍으로 유명한 설악산이니까!

 

계곡 너럭바위 위로 뿜어져나와서 그런지 오색약수는 우리가 생각하는 약수터의 모습이 아니다. 경사면 한쪽에 배관 같은 구멍이 있고, 그 사이로 졸졸졸 물이 흘러나오는 통상적인 약수터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가지도 걸려있고, 주인대신 석유통 같은 물통이 줄을 서 있는...ㅋ

 

계곡과 구별되지 않는 구조라서 그런지 오색약수는 비가 많이 오면 계곡물에 잠기게 된다. 실제로 2006년도에 비가 많이 와서 오색약수가 훼손됐다. 지금의 모습은 그 이후에 복원한 것이고, 2011년도에는 천연기념물 제529호로 지정된다. 참고로 오색약수는 두 개의 구멍에서 뿜어져나온다. 또 인근에는 오색온천이 용출되어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 물론 선녀들처럼 노천에서 즐길 수는 없고, 욕실을 갖춘 숙박시설에 들어가야한다.

 

눈이 많이 와도 오색약수의 형태는 구별이 안 될 거 같다. 설악산도 눈이 많이 오기로 유명하지 않은가. 눈이 많이 왔을 때 오색약수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 주전골계곡

 

 

 

 

 

 

* 주전골계곡

 

 

 

 

 

 

 

이제 본격적인 주전골 탐방에 나선다. 초입부터 돌산의 계곡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거북바위. 공룡알 바위 등등... 형태도 제각각인 바위들이 트레커들을 반긴다. 원시림 같은 때묻지 않은 계곡의 숲이 있어 더 기분 좋은 길이다. 그렇게 걷다보면 성국사에 도달할 수 있다.

 

성국사는 오색약수의 어원이 되어준 오색석사의 다른 이름이다. 주전골의 어원도 이 사찰에서 나왔다고 한다. 오색석사에 있던 어떤 중이 엽전을 위조했다하여 이 일대가 '주전골'이라고 불리게됐다는 것이다. 오색약수도 그렇고 이 사찰에서 많은 것들이 뻗어나왔던 거 같다.

 

성국사는 도의선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도의선사는 신라 말기 구산선문 중 하나였던 가지산문을 창시했던 고승이다. 구산선문은 경전 위주의 교종과는 달리 수행에 중심을 둔 선종의 9개 선문을 말한다. 한마디로 신라 말기에 9개의 선종 문파가 산을 중심으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그중 도의선사는 장흥의 가지산문에서 선종 불교의 진흥을 위해 힘썼다는 것이다.

 

사실 울산 언양에 있는 가지산이 훨씬 더 유명하다. 영남알프스에 포함되니까. 하지만 도의선사가 세운 가지산문은 전라남도 장흥군에 있다. 착오가 없으시길.

 

숲길에서 잠깐 벗어나 성국사 경내로 들어가보자. 계곡 안쪽에 있는 성국사는 작은 사찰로 좀 허전해보인다. 살짝 폐사지의 느낌도 전해진다. 이런 성국사에 양양 오색리 3층 석탑이 우뚝 서 있다. 3층 석탑은 전형적인 신라 말기시대 석탑으로 한적한 경내에서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보물 제497호로 지정된 3층 석탑은 무너져있던 것을 1971년에 복원을 했다.

 

2중 기단 위에 3층짜리 탑신석이 올려진 석탑은 상층 기단부분과 1층 탑신 부분이 조화를 이루는 모양새다. 아래쪽에 네모난 택배 상자 같은 부분은 상층 기단이다. 탑신이 아니다. 4층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자. 2층 탑신은 급격히 줄어들어 상승감이 엇박자를 내는 모습이다. 오래된 탓인지 옥개석의 모서리 부분은 훼손된 부분이 많다. 그리고 3층 위쪽 상륜부도 훼손되어 있다.

 

양양 오색리 3층석탑의 가장 큰 매력은 주위의 산들과 어우러져있다는 것이다. 빽빽하게 숲이 들어선 산 중에 공터처럼 성국사가 자리잡고 있고, 그 한쪽편에 3층석탑이 있으니 자연이 빚은 아름다움에 사람의 인공미가 가미된 모습이다. 이 둘이 너무 잘 어울린다. 원래 둘이 하나였던 거 같다.

 

이 밖에도 성국사에는 돌사자 같은 석재들이 남아 있다. 한쪽 편에는 또다른 탑의 잔해물들이 있다. 예전에는 다른탑도 서 있었던 것이다.

 

 

 

 

 

* 양양 오색리 3층석탑

 

 

 

 

 

 

 

* 독주암: 가운데 있는 바위가 독주암이다. 한 명 정도는 앉을 수 있을 거 같은데.

 

 

 

 

 

 

경내를 벗어나 걷다보니 계곡 한쪽편에 독주암이라 불리는 큰 바위가 보인다. 혼자 앉아 있기도 비좁다하여 독주암이라 불리는데 이 바위는 주전골 최고의 비경이라고 불린다. 독특한 아우라를 풍기듯 계곡 옆에 우뚝 서 있는 독주암은 그 자체로 절경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2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은 곳에 이렇게 멋진 풍광이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을 정도다. 우뚝 솟아있는 바위들에 넋을 잃었다. 장가계 부럽지 않을 정도다.

 

아무리 완경사라고 하지만 계곡길은 계곡길이다. 바위도 많고 잔돌도 많다. 이 길을 걸으시려면 운동화보다는 트레킹화 이상을 신으셨으면 한다. 어떤 분들은 구두를 신고 오시기도 하던데 좀 위태로워보였다. 계곡이니만큼 미끄러운 구간이 많다.

 

길을 계속가다보니 선녀탕이 보였다. 선녀탕은 탐방로에서 벗어나 그 바로 앞까지 갈 수 있다. 선녀가 있을까 하고 바로 앞까지 갔지만... 사진에서 보이듯 어떤 아자씨만 있었다. 분풀이는 나뭇꾼에게 해야겠다. 요즘은 나뭇꾼도 가스보일러 때나?ㅋ

 

물감을 풀어놓은 듯 에머랄드색의 물빛이 참 매력적으로 보인다. 선녀들이 은밀하게 노닐만 하다. 그런 에머랄드 빛깔은 마지막 탐방지인 용소폭포에서도 만날 수 있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수가 귀를 정화시켜준다. 용이 노닐만한 곳이다.

 

이렇게하여 주전골 계곡 탐방을 마쳤다. 눈이 호강하고, 귀가 맑아지는 트레킹이었다. 또 공기는 얼마나 좋은가. 한 1년쯤 젊어진 거 같았다. 그래서인지 3.2km를 걷는동안 필자는 계속 어깨춤을 추웠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계속 미친놈처럼 어깨를 들썩였던 것이다. 이런 느낌은 인근에 있는 천불동계곡에서도 느껴본 적이 있다.

 

- 어떤 느낌?

- 신선이 된 느낌!

 

 

 

 

 

 

 

* 용소폭포

 

 

 

 

 

 

 

*만경대: 사진 중앙 상단에 있는 것이 만경대다. 설악산에는 여러 만경대가 있다. 이 주전골 만경대는 47년동안 페쇄됐다 2016년에 다시 개방됐다. 하지만 가을철에만 개방한다고 하니 탐방을 원하시는 분들은 꼭 확인을 하셔야한다.

 

 

 

 

 

 

 

 

* 주전골: 만물상

 

 

 

 

 

 

 

*** 남설악 주전골 가는법

 

1. 서울 경부터미널에서 양양행 고속버스 탑승. 약 2시간 소요됨.

2. 양양버스터미널에서 오색약수행 시내버스 탑승. 약 25분 정도 소요됨. 배차시간은 1시간에 1대 정도임.

3. 코스는 3.2km이나 지형 특성상 왔던 길을 다시 와야하는 왕복 코스임. 그래서 6.4km 정도됨. 정류장에서 이동하는 것까지 포함해서 총 7km 정도 예상함.

4.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오색약수행 시외버스도 있음. 하지만 편수가 많지 않음.

 

 

 

 

 

 

 

 

 

* 낙산사 홍련암: 의상대에서 바라본 홍련암.

 

 

 

 

 

 

 

 

2021년 5월 20일 목요일 / 여행 2일차

 

어제는 밤 11시를 넘어 속초에 도착했으니 실질적인 여행의 시작은 이날부터였다. 이날 탐방한 곳은 양양에 있는 낙산사였다. 낙산사는 속초해수욕장에서 그리 멀지 않다. 시내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다. 속초에서 양양까지 가는 시내버스가 있다. 본격적인 탐방에 앞서 빗방울이 좀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 쯤이야.

 

일주문을 통과한 뒤 숲길이 나왔다. 소나무 숲길이었는데 습한 날씨 때문이었는지 솔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탐방로를 따라 걷다보면 거대한 규모의 낙산사와 마주하게 된다. 잘 정돈된 길, 수많은 참배객들... 이런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낙산사의 화려한 면모만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하지만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국내 유명 사찰중에 낙산사만큼 큰 부침이 많은 절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화재와 파괴, 약탈이 있었다. 그렇게 많은 곤경이 있었음에도 폐사가 안 된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비교적 근래인 2005년까지 고초를 겪었을까나!

 

2005년도에 발생한 산불 때문에 낙산사가 전소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봤던 것이다. 강풍에 날라온 불씨가 화마로 변해 귀중한 가람들을 싹 다 태워버린 것이다. 당시 뉴스 화면으로 그 장면을 봤었는데 필자도 큰 충격을 받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 온 국민이 큰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었다.

 

 

 

 

 

 

* 해수관음입상

 

 

 

 

 

 

 

* 낙산사 가는길

 

 

 

 

 

 

 

 

671년(신라문무왕 11),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낙산사는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 유명한 곳이다. 낙산사일주문에는 '오봉산낙산사'라고 적혀있는데 이 오봉산이 낙산이라고도 불린다. 낙산은 샨크리스타어인 보타락가(補陀落伽)의 준말인데 관음보살이 정주하는 산이라고 한다. 낙산 이야기가 나왔으니 스리슬쩍 서울의 좌청룡인 낙산이 생각난다. 낙산사가 낙산(洛山)이고 서울의 좌청룡 낙산(駱山)이다. 한자가 다르다.

 

의상대사는 이곳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였고, 관음보살의 명에 따라 관음상을 빚게되는데 그것이 낙산사의 기원이 된다.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한 과정을 보면 좀 의아할 정도다. 기도를 하는 중에 용궁의 무리와 하늘의 무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했고, 동해의 용이 솟아올라 여의주를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낙산사가 3대 관음성지라면 이런 스토리텔링 정도는 품고있어도 상관없을 거 같다.

 

우리나라의 3대 관음성지는 강화군 석모도 보문사, 경남 남해군 보리암, 그리고 낙산사이다. 그러고보니 서해, 남해, 동해에 3대 관음성지가 있다. 이를 두고 더 정확히는 해수관음 성지라고 하는데 관음보살이 사는 곳이 바닷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하여 우리나라의 관음성지도 해안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사찰 탐방을 해보자. 낙산사의 중심인 원통보전과 그 앞에 있는 7층석탑을 살펴보자. 보시면 아시겠지만 원통보전은 근래에 새롭게 지은 건물이다. 2005년 산불로 인해 본당인 원통보전은 전소가 됐다. 하지만 빠르게 복구하여 2007년에 다시 복원을 하게 된다.

 

대화재가 휩쓸고갔지만 불행중 다행인 점도 있었다.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던 보물 제1326호 건칠관음보살좌상이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건칠관음보살좌상은 인근에 있는 설악산 영혈사에서 모셔온 관음상이라고 한다.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고려 후기 양식을 잘 지니고 있다하여 2003년에 보물 1326호로 지정된다. 여기서 건칠은 옻나무 칠을 말한다.

 

원통보전 앞에는 7층 석탑이 우뚝 서 있다. 7층이라서 그런지 높이가 무려 6미터를 넘는다. 6미터 20센티다. 원통보전이 전소됐을 때 석탑도 고열로 인해 큰 충격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단단한 돌이기 때문에 그 원형이 훼손되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폐사지에 우뚝 선 석탑들처럼 7층 석탑은 끝까지 낙산사를 지켰던 것이다. 7층 석탑은 애초 3층석탑으로 만들어졌다가 낙산사가 대대적으로 중창됐던 1467년(세조13)에 지금처럼 7층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3층을 7층으로 높였다는 것인데 참 특이한 경우다.

 

1468년 경에 낙산사는 대대적으로 중창된다. 그 1467년에 세조가 낙산사를 방문했는데 그에 대한 결과로 중수가 이루어진 것이다. 7층 석탑을 비롯하여 낙산사에는 그 때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원통보전을 둘러싸고 있는 별꽃무늬 담장과 홍예문이 바로 그것들이다. 별꽃무늬 담장은 처음에는 '원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기와와 진흙을 쌓아 올렸는데 담장 자체가 하나의 조형물처럼 보일 정도로 인상적이다.

 

담장이라고 하면 안과 밖을 나누는 분리의 의미인데 별꽃무늬 담장은 그 모습이 정겨워서 그런지 안과 밖을 서로 조화시켰다고나 할까? 물론 근래에 복원을 해서 너무 반듯한 모습이지만 도시의 공구리만 보다 정겨운 토담을 보니 정말 반갑더라. 별꽃무늬 담장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곽의 문루가 연상되는 홍예문은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했을 때 절 입구에 만든 문이다. 홍예문은 26개의 큰 돌로 이루워졌는데 당시 강원도가 26개의 고을로 이루어졌고, 그에 맞게 각 고을에서 석재를 가져와 돌로 무지개문을 만들었다. 문루는 1963년에 만들어졌는데 대화재 당시에 타버렸고, 최근에 다시 복원을 했다. 홍예문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밖에도 세조와 관련된 문화재로 낙산사 동종이 있다. 1469년 예종 1년에 제작된 동종은 조선 초기 형식을 잘 담고 있어 보물 479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대화재 당시에 용해가 되어 문화재에서 지정해제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 참고로 예종은 세조의 둘째 아들인데 재위 기간이 불과 13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

 

이제 해수관음입상을 보러가자. 사실 많은 이들이 이 해수관음상을 뵈러 낙산사를 방문한다. 비교적 근래인 1977년에 세워진 관음상은 그 무게가 무려 270톤에 높이가 16미터에 달한다. 전라북도 익산의 채석장에서 가져온 석재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규모가 있다보니 만드는데만 5년이 걸렸다고 한다.

 

확트인 동해바다를 배경으로 우뚝하게 서 있는 관음상 앞에 서니 저절로 합장을 하게 됐다. 내륙쪽으로는 명산인 설악산이 보이고 관음상 주위로는 파도가 넘실대고 있으니 이 아름다운 풍광 자체만으로도 관음보살의 자비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필자도 자리를 깔고 삼배를 올렸다. 간절하게 기원을 하면서... 무슨 기원을 올렸을까?^^

 

이후 조선 후기에 세워진 해수관음공중사리탑(보물 제 1723호)과 홍련암, 의상대 탐방을 끝으로 낙산사 탐방을 종료했다. 홍련암과 의상대는 명승 제27호로 지정될 정도로 너무 유명하기에 놓치는 분들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해수관음공중사리탑은 메인 탐방로에서 살짝 벗어나 있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사리탑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보물 찾기하듯 사리탑을 찾아보면 좋을 듯하다.

 

이렇게하여 낙산사 탐방은 종료가 됐다. 그냥 간단하게 스케치 형식으로 여행기를 작성하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또 분량이 넘쳤다. 하긴 낙산사를 그냥 단순하게 훑고 지나간다는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볼려면 제대로 보고 작성할려면 제대로 작성해야지!

 

 

 

 

 

 

* 원통보전과 7층석탑

 

 

 

 

 

 

 

 

* 원통보전

 

 

 

 

 

 

 

*7층석탑과 별꽃무늬 담장

 

 

 

 

 

* 해수관음상: 필자의 배낭이 인증샷을 대심해 줌.

 

 

 

 

 

 

 

* 낙산사: 2005년 화재 피해를 곱씹어 보는 전시장.

 

 

 

 

 

 

 

* 낙산사 홍예문

 

 

 

 

 

 

 

 

* 해수관음공증사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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