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화는 전편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의 두 번째 이야기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이란 제목에서처럼, 필자는 통상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상당히 도발적인 내용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산티아고’를 ‘지우개’로 지워버린 셈이 됐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작성한 건 산티아고 순례길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필자는 여전히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동경심이 있고, 기회가 닿는다면 계속 방문을 할 예정이다. 다른 순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길을 걸으며 많은 감흥을 얻었고, 큰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그만큼 필자도 ‘산티아고 앓이’를 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왜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이란 도발적인 글을 썼을까? 간단하다. 제대로 알고 가자는 의미에서 글을 썼다. 기왕 돈 들여, 시간 들여가는 길이라면 제대로 알고 가야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 더 알찬 트레킹을 할 수 있을 테니까.

 

* 피스테라 가는길

●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피스테라(Fisterra)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서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스페인의 땅끝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의 시신은 나룻배에 실려 에스파냐 땅에 닿게 됐는데 그 첫 번째 장소가 바로 피스테라였다고 한다.

많은 여행책자들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 어쨌든 그런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에다 땅끝이라는 지정학적인 의미가 더해진 곳이기에 피스테라는 순례여행이 아니더라도 꼭 한 번 방문해 볼 가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필자도 그렇게 피스테라를 향해 길을 떠났다. 피스테라로 가는 시작점은 산티아고 대성당이다. 대성당은 순례길의 종료점이기도 했지만 땅끝으로 가는 시작점이 되기도 했다.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곳을 보고 있자니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새삼스레 인생은 끝없는 여정이라는 말도 떠올랐다.

‘시작 할 때는 이게 언제 끝나나, 하고 막막해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마침표를 찍게 되고, 그러다 또 다른 시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예전 국내여행을 할 때도 그랬다. 시작할 때는 막막했지만 여행이 종료가 될 때는 성취감을 느끼는 동시에 이미 다음 여행의 경로를 머릿속으로 그리곤 했었다.

 

                        * 피스테라 위치: 구글 지도 변형

●해양과 산맥이 공존하는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

피스테라로 가는 길은 인적도 드물었지만 마을 자체도 듬성듬성 있었다. 조금은 척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개발이 덜 된 곳도 있었다.

피스테라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속한 갈리시아 지방은 스페인의 북서부에 위치해 있는데 서쪽으로는 대서양, 위쪽으로는 비스케이만에 둘러싸여 있다. 지형은 산지 형태를 띠고 있는데 험준한 산악지형이라기보다는 구릉형 산지가 층층이 쌓여있는 형태였다.

전편에도 언급했듯이 이 지역은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을 때도 그 침략의 사슬에서 벗어나 있던 곳이다.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온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은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고, 이에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반도의 서북부에서 아스투리아스(Asturias)를 건립하여 가톨릭 왕국의 재건에 나서게 된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서북부 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들어선다. 이곳은 첩첩산중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산악지형을 띠고 있기에 효과적인 방어가 가능했던 곳이다.

대서양에 가까워지는 만큼 기후변화가 더 심해졌다. 비가 더 심하게 오락가락했다. 우리나라 여름철 날씨도 변덕스럽지만 여기에 오면 명함도 못 내밀 것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호랑이가 장가’를 갈 정도였으니까. 그래서인지 무지개도 무척이나 많이 볼 수 있다. 평생 본 무지개보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본 무지개가 훨씬 더 많았을 정도였다.

 

 

* 피스테라 표지판

 

● 피스테라와 야고보

앞서 언급한 것처럼 피스테라는 스페인의 땅끝이다.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대개 그곳을 유럽대륙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피스테라를 소개하는 일부 책자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스테라는 필자가 반복해서 기술한대로 스페인의 땅끝이지 유럽 대륙의 땅끝은 아니다.

정확히 유럽 대륙의 땅끝은 호카 곶(Cabo de Roca)이다. 호카 곶은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서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깎아질 듯 서 있는 해안절벽이 일품인 곳이다.

육지에서 바다쪽으로 툭 튀어나온 지형을 말할 때 두 가지로 분류를 해서 말한다. 튀어나온 규모가 크면 ‘반도’가 되고, 작으면 ‘곶’이 된다. 유명한 포항의 호미곶을 연상하시면 될 것 같다. 북한 쪽에서는 장산곶이 유명하다.

피스테라에 대한 환상(?)을 한 가지 더 깨볼까 한다. 전편에 ‘야고보 성인은 이베리아반도에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서술했다. 그 서술을 따라가 보면, 야고보의 시신이 담긴 배가 예루살렘에서 피스테라까지 옮겨왔다는 이야기도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뻔한 당시의 항해 기술은 둘째 치고, 사역을 하지도 않은 곳에다 자신의 시신을 묻어 달라는 전도자는 없을 테니까.

 

 

*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그렇다면 피스테라가 왜 야고보와 연결이 됐을까? 아무래도 야고보의 존재를 더욱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피스테라가 동원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로마인들은 피스테라를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세상의 끝에서 야고보 성인의 시신이 도착하여 별들의 들판이라는 산티아고 콤프스텔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는 식으로 스토리텔링이 정리될 수 있겠다. 이런 전개 과정 자체가 여행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로마인들이 세상의 끝을 호카 곶으로 판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럼 호카 곶과 야고보가 서로 연결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환상이 다 깨졌다고 해도 피스테라는 그 자체로 무척 매력적인 곳이다. 넘실대는 파도와 해안절벽들을 따라 가다보면 땅끝 등대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대서양의 모습은 일품 중에 일품이다. 이곳의 노을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피스테라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자신의 신발이나 옷가지를 태워 대서양에 띄우는 의식을 행한다. 더 이상 갈 수 없으니 자신의 것들을 불태우는 것이다. 실제로 등대 근처 곳곳에는 순례자들이 태운 신발과 옷가지의 흔적들이 널려 있었다.

피스테라는 그런 장소였다. 무언가 의식을 행하거나 다짐을 하게 만드는 장소였다는 것이다. 마치 해남 땅 끝에 가면 무언가 마음을 다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필자도 대서양 바다를 보면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하루하루 잘 사는 것이 진정한 챔피언!’

난생 처음 보는 대서양 앞에서 다짐을 한 말치고는 무척 소박한가? 그래도 상관없다. 작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큰일도 못한다고 하지 않던가. 허상과도 같은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바로 앞에 있는 일들을 척척해내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라는 것이다. 지나간 과거를 괴롭게 되새기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억지로 끌어와서 현재를 낭비하지 말자는 뜻이기도 하다.

 

 

* cee: 피스테라를 가기 전에 만나는 cee라는 항국 도시. 매력적이다.

●남북한 순례자들이 함께 산티아고 길을 걷는다면?

순례길은 화합의 길이었다. 지역감정으로 유명한 마드리드, 카탈로니아, 바스크 사람들이 서로 정답게 트레킹을 하는 곳이 산티아고 순례길이었다. 스페인 내국인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앙숙이었던 아일랜드와 영국, 그리고 러시아와 에스토니아(발트3국) 청년들이 서로 의지를 하며 걷는 곳이 바로 순례길이었다. 도보여행을 하는데 국적이니 지역이니 하는 것들은 다 소용이 없을 테니까.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 그게 바로 순례길에 녹아 있는 정신일 것이다. 그런 정신들이 길 위에 뿌려지고, 뿌려지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사랑하는 것일테고.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북한 순례자들을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무척 흥미로울 것 같다. 남한과 북한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순례길을 걷는다면 그것 자체로 좋은 일일 될 것이다. 함께 격려하며 돕고, 먹을 것을 나누고... 힘들 때는 함께 아리랑도 부르고! 상상만으로도 참 흥미롭다.

 

 

 

* 피스테라 가는길

 

 

<트레킹은 생각창고>는 16편으로 종료가 됐다. 이제 두 편에 걸쳐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다. 필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통상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이미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들은 넘치고 넘치지 않았던가. 필자까지 거기에 더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간의 통념을 깨려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래서 제목도 저렇게 지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읽으신다면 그 환상이 깨질 수도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 산티아고 순례길

 

● 산티아고 순례길과 제주 올레길

제주 올레길은 우리나라 도보여행의 시발점이다. 2007년 제주 올레 1코스가 개척된 이후, 우리나라 도보여행길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다. 지금은 2만km 이상이 됐는데 이 길이는 지구 반지름에 필적할 정도로 엄청난 길이다. 이 제주 올레의 모태가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그런 면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우리나라의 도보여행에 엄청난 영향을 준 셈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영향력은 요즘도 식을 줄을 모르고 있다. 우리나라의 많은 도보여행자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탐방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순례길 걷기를 일생일대의 버킷리스트로 올려놓을 정도니까. 이렇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 꼭 한 번은 다뤄봐야 하지 않겠나?

 

* 산티아고 순례길

 

 

● 스페인 민중들 속에서 ‘부활’한 야고보

산티아고(Santiago)는 스페인어로 야고보를 뜻한다.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으로, 야고보와 요한은 둘 다 예수의 12제자였다. 야고보는 현재의 스페인(에스파냐)과 포르투갈이 위치해 있는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야고보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온다. 고된 사역길 이후에 다시 돌아온 고향이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금의환향’이 아닌 죽음의 그림자였다. 유대왕인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무시무시한 칼날이 그의 목을 내리쳤기 때문이다. 아그리파는 예수가 태어날 때, 베들레헴의 신생아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했던, 그 헤롯왕의 손자였다.

대대로 헤롯왕가들은 유대 땅에 그리스도교가 기반을 잡는 것을 싫어했던 모양이다. 결국 야고보는 기원후 44년 7월 25일에 참수를 당한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자가 나타난 것이다.

이후 야고보의 시신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배에 실려, 이베리아반도 북서부 지역으로 이동을 하게 됐다고 한다.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한만큼 그 곳에 뼈를 묻겠다는 유언이 있었고, 제자들이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부터 그 먼, 당시는 로마지배 하에 있던 이베리아반도까지 장거리 항해를 마다하지 않고 제자들은 돛을 올렸던 것이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지 않았다. 공인은커녕 탄압에 앞장섰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야고보와 관련된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져 갔다.

이후 야고보의 존재가 민중들 속에서 ‘부활’하게 된 시기는 8세기경이었다. ‘별들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에 있는 무덤중 하나가 별의 계시를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민중 속에서 널리널리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 계시가 실현이 된 것인지, 서기 813년경 성인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를 지배하고 있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2세는 그 무덤이 발견된 곳에 성당을 짓게 한다.

그렇게 하여 건립된 것이 산티아고 대성당이었다. 또 그 대성당이 위치한 곳에 도시가 들어섰는데 그 곳이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였다.

여기까지가 산티아고 카미노(camino: 스페인어로 ‘길’)에 녹아 있는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이다. 이런 내용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여행기뿐 아니라 스페인 관광청의 소개책자에도 기술되어 있다.

 

* 야고보 성인: 산티아고 대성당 외벽에 장식된 야고보 성인.

 

● 야고보의 제자들은 어떻게 그 먼 뱃길을 찾아갔을까?

산티아고 카미노를 걷는 사람들은 필그림(Pilgrim)이라고 불린다. 영어 풀이 그대로 순례자라는 뜻이다. 종교다원론자(?)인 필자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 짧게나마 필그림이 되었고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야고보 성인을 기리며 미사에도 참석했다. 대성당에서 드린 미사는 필자에게 무언가 모를 강한 영감을 심어주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또한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선한 감흥을 얻었지만 여행을 하기 전부터 품었던 근본적인 물음은 계속 풀리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그 물음은 계속 필자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진짜 산티아고 대성당에 사도 야고보가 묻혀 있는 게 맞는 거야? 야고보의 제자들은 스페인 땅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거지. 내비게이션이라도 있었던 건가? 그래 그들이 갔다고 치자. 그런데 굳이 지브롤터 해협을 돌아서 스페인 서부 지역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바로셀로나가 있는 스페인 동부 해안 쪽이 훨씬 더 가깝잖아.’

 

* 산티아고 대성당

●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다?

이 물음대로하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그 수많은 순례자들은 ‘사기’를 당한 셈이 다. 있지도 않은 야고보 무덤을 보기 위해 수 백 킬로에 달하는 길을 걷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자신의 버킷리스트로 등재한 사람들은 어떤가? 미래에 행할 ‘바보들의 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소중한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 멍청이들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은 더욱더 짙어져갔다. 그러다 『새 유럽의 역사』라는 책, 159쪽에 기술된 부분을 읽게 되었다.

사도 성 요한의 형제이자 에스파냐의 수호성인인 야곱이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프레데리크 들루슈 편, 윤승준 역, 『새 유럽의 역사』(까치)

이 서술에 의하면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을 확률이 농후해진다. 이외에도 서양의 중세사를 다룬 유명한 저서, 『서양중세사』에서도 야고보와 스페인에 대한 관계를 그저 ‘전설’ 수준으로 서술하였다.

애초 야고보가 에스파냐에 복음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의 유언도 성립될 수 없다. 가보지도 않은 땅에 자신의 주검을 묻어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사기를 당한 것일까? 존재하지도 않은 야고보의 행적을 쫓아,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는 바보들인가?

 

 

* 산티아고 순례길: 저렇게 평원길을 많이 걷는다.

 

● 국토회복운동에 구심점이 되어 준 야고보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된 시기는 9세기 초반 경이었다.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다. 611년,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래, 무슬림들은 포교를 위한 전쟁을 수행해나갔다.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한 그들은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반도까지 물밀 듯 쳐들어갔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 왕국은 이들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713년에 멸망한다. 이후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이베리아반도 북서쪽 산악지대로 도주했다가, 718년에 아스투리아스(Asturias) 왕국을 건립하게 된다.

스페인은 유럽 주요국들 중 유일하게 십자군전쟁에 참여를 하지 않은 나라였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십자군 전쟁(1096년 발발)이 일어났을 때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침탈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국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이런 국토회복운동을 레콘키스타(reconquista)라고 부른다. 국토회복운동은 이슬람세력이 침공했던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려 800년이나 지속됐는데 그런 국토회복운동의 중심에 야고보가 서게 된다.

국토회복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큰 구심점이 필요했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그 역할을 야고보에게 맡긴(?) 것이다. 12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를 했던 야고보였기에 그런 중책이 맡겨졌던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전설이 하나있다. 844년에 있은 클라비호 전투에서 백마를 탄 야고보가 나타나 이슬람 무어인들을 무찔렀다는 이야기다. 이후 야고보는 ‘무어인을 죽이는 산티아고(Santiago Matamoros)’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야고보는 스페인 사람들을 정신적, 종교적으로 하나로 묶어 이슬람 세력에 대한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야고보는 큰 구심점이 되어주었던 셈이다.

 

                         *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의 위치. 구글 지도 변형.

● 의심도 순례자들의 덕목일지 모른다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있냐, 없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려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한편 고생고생하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필자와 같은 의문을 한 번쯤 다 품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 당시 항해기술로 팔레스타인 땅에서 스페인까지 원거리 항해가 가능하겠어!’

 

필자는 그런 의심(?)들도 순례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에 하나로 판단한다. 덮어놓고 무조건 ‘믿어라, 믿어라’하면 맹목적인 신앙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의심하지 말라’라고 적혀 있지만, 그 의심이 합리적이라면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것이다. ‘왜’라는 물음 없이 교조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세뇌일 뿐이다. 그 세뇌가 통한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가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치자, 그럼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을 무슨 의미로 걷는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드실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마음으로 걸으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마음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걷는다면 산티아고가 있고, 없고의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가 될 테니까.

 

* 산티아고 순례길: 용서의 언덕에 선 필자.

ps. 이렇게 기존의 통념을 깨는 글을 쓰고 있지만 필자는 앞으로도 계속 산티아고 순례길을 방문할 생각이다. 왜?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매력 있는 길이니까. 실제로 필자는 2014년 첫 방문 이후, 2018년과 2019년 연이어 방문을 했었다. 그 시간이 참 뜻 깊었다.

어떤 식으로든 필자는 야고보 성인의 짐을 덜어드리고 싶다. 뜻하지도 않은 짐을 지고 있는 야고보 성인의 어깨를 가볍게 해드리고 싶어 이 글을 쓴 것이다.

 

- 나답게 산다

- 한 박자 늦어도 상관없어

- 내 마음의 종소리

-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제까지 <트레킹은 생각창고>에 실린 제목들이다. 나머지 제목들도 있지만 지면관계상 5개 정도만 가져와봤다.

이렇게 제목들만 놓고 보니 이 원고가 역사트레킹을 담고 있는 것이 맞나 할 정도로 트레킹이나 아웃도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트레킹 원고라면 올레길, 둘레길을 전면에 배치하는 게 일반적이다. 책표지는 수려한 풍광 속을 한들한들 걷고 있는 도보여행자의 원거리샷 사진이 빠지지 않고 장식한다.

그런점에서 <트레킹은 생각창고>는 통상적인 면에서 벗어나있다. 물론 ‘산티아고 순례길보다 동네 뒷산’ , ‘내 아웃도어의 베이스캠프 관악산’처럼 직접적으로 트레킹을 드러내는 제목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두 편에 불과할 뿐이다. 그 외에는 다 저런 식으로 트레킹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았다. 저런 제목들만 보면 명상이나 종교 코너로 분류될지 모른다. 책표지도 홀로 고독에 휩싸인 수행자의 모습이 담겨질 거 같다. 사진이 아닌 펜화로.

프롤로그에서도 언급했듯이 <트레킹은 생각창고>의 포지션은 ‘반반치킨’이다. 역사와 트레킹을 반반으로 했고, 사색을 양념장으로 삼았다. 트레킹을 하면서 곱씹었던 생각들을 해당 유적지의 역사와 매칭을 시켜서 풀어냈던 것이다. 걷다보면 생각들이 피어올랐고, 그것들을 담아내고자 했다. 막걸리 잔부터 돌리는 트레킹이 아니라 걷기를 통해 정신영역의 확장을 이루고 싶었던 것이다.

개똥철학이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상관없다. 필자는 이런 생각까지 한다.

 

‘위대한 철학은 걷기로부터 생성된다!’

 

 

* 원효봉

 

● 북한산성 역사트레킹의 몇 가지 포인트

벌써 마지막 여정이다. 이번편은 북한산성 역사트레킹이다. 북한산성 역사트레킹은 강의 커리큘럼에서 마지막으로 배치하곤 했었다. 그래서 본 원고의 마지막편도 북한산성 역사트레킹으로 마무리하려고 한다.

북한산성 역사트레킹은 몇 개의 탐방포인트를 가지고 있다.

 

1. 대서문과 중성문

2. 산영루

3. 북한산성계곡

4. 덕암사

진관사 역사트레킹, 화계사 역사트레킹을 통해 이미 북한산과 관련된 글을 소개했다. 이번편 북한산성 역사트레킹까지 합치면 벌써 3개나 된다. 북한산을 두고 아주 우려먹는다. 그만큼 북한산은 관악산과 더불어 서울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고마운 산이다. 필자에게는 직장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트레킹팀을 이끌고 역사트레킹을 행하니까.

다시 복기를 해보자. 화계사 역사트레킹이 북한산 동쪽편을 누볐다면, 진관사 역사트레킹은 서쪽편에서 행해졌다. 북한산성 역사트레킹도 서쪽편에서 행해지는데 진관사보다는 좀 더 북쪽에서 움직인다.

북한산은 일명 삼각산이라고 불린다. 만경대(800m), 백운대(837m), 인수봉(810m) 세 개의 봉우리가 삼각뿔의 형태를 지녔다고 하여 그렇게 불린 것이다. 저 세 개의 봉우리 이름이 잘 생각이 안 나서 ‘만백인’으로 앞 글자를 따서 외웠다. 머리가 나쁘면 이렇게 고생하는 거다. 높이에서 보이듯 북한산의 최고봉은 백운대다. 워낙 인수봉이 유명해서 가장 높은 봉우리고 알고 있는 분들이 계신데 그게 아니다.

삼각뿔은 동쪽편에 치우쳐있다. 지역으로 따지면 서울시 강북구 우이동 방면이다. 그 삼각뿔은 서울에서 보는 것보다는 경기도 파주나 고양쪽에서 보면 그 생김새가 두드러져 보인다. 예전 조선시대 때 개성에서 한양으로 오가는 이들은 삼각산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위치를 가늠했다고 한다. 참고로 파주 오두산 부근이 삼각산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 북한산: 원효봉쪽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고봉들.

● 한반도의 요충지 북한산

한반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북한산은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요충지였다. 이미 삼국시대부터 산성이 축성되기에 이른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북한산성은 1711년(숙종37)에 쌓은 성으로 북한산의 주요 봉우리를 연결해서 축성됐다. 성벽의 길이는 12.7km에 달한다.

백제시대에는 위례성의 북쪽 방어성으로 산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후 본격적인 삼국 항쟁시기에는 북한산을 두고 각국 간에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었다. 그 항쟁의 증거 중에 하나인 진흥왕 순수비가 북한산 비봉에 세워져있다.

정확히는 지금 비봉에 세워진 순수비는 진품이 아니고, 순수비가 세워져 있다는 것을 알리는 알림석이다. 진품은 훼손을 막기 위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참고로 비봉은 앞서 언급한 진관사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거리는 가깝지만 경사도는 상당히 가파르다. 답사에 참고하시라!

삼각뿔인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도 북한산성의 일부다. 그런데 그 삼각뿔에는 성벽이 없다. 성벽이 없는 게 당연한 게 그 험한 삼각뿔을 어떤 멍청한 군대가 기어 올라오겠나. 삼각뿔 자체가 워낙 험하니 인공적인 성벽이 없어도 된다는 것이다. 자연물 자체가 성벽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곳은 백운대 말고도 의상봉과 용암봉이 있다. 북한산 산행을 해보신 분들은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하실 수 있다.

반대의 경우도 있지 않은가? 지형이 너무 평탄하여 적들의 공격으로 취약한 곳도 있을 것이다. 그곳이 바로 북한산성의 서쪽 구간이다. 그래서 이곳은 중성문을 쌓아 이중 방어 구조를 만들었다. 즉, 대서문 -> 중성문 식이 된다.

대서문은 북한산성에 있는 14개의 성문 중 서쪽에 있는 성문을 말한다. 높은 고도에 위치해 있는 대동문, 대남문 등과 달리 대서문은 해발고도가 낮아 접근성이 매우 좋다. 북한산둘레길 코스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거리가 가까워, 둘레길과 묶어서 탐방할 수도 있다

 

* 대서문

● 총 맞은 성문?

중성문 밖은 외성, 중성문 안쪽은 내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중성문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 예전에 북한산성 행궁터가 있다. 행궁은 복원중이다. 이 중성문에 가보면 눈을 크게 뜨고 보셔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옆 수풀 속에 가려진 암문을 보셔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거 말고 중성문 육축에 쌓여 있는 총탄 자국을 보셨으면 한다.

육축은 문루 하부에 돌로 쌓은 부분을 말한다. 쉽게 말하면 성문에 쌓인 성돌인데 성문에 쌓인 돌이라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고, 정교하게 쌓였다. 그 부분이 총을 맞은 것인데 한국전쟁 때 피탄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이런 설명을 했었다.

“한국전쟁 때 지리산에서 빨치산이 활동을 했다는 건 잘 아실 테지요. 그런데 빨치산이 지리산에만 있었을까요. 북한산에는 없었을까요? 어쨌든 북한산도 한국전쟁 때 격전지였습니다. 이 총탄 자국이 그날의 참상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죠.”

 

* 중성문

* 중성문: 구멍이 난 성돌이 보인다.

● 풍류객들의 발걸음을 모은 산영루

북한산성 서쪽편은 길이 순해서 백운대를 가는 코스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힘들이지 않고 찰랑찰랑 걸을 수 있는데다 옆쪽으로는 시원하게 북한산성 계곡(북한천)이 흐르고 있어 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이다.

계곡이 있어서 이 코스는 여름에 많이 왔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렇게 트레킹을 행할 때마다 전날에 비가 내렸고, 덕분에 북한산성 계곡은 풍부한 유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지리산이나 설악산에 있는 계곡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북한산성 계곡은 나름 호평을 받는 계곡이다. 공룡알 같은 큰 바위도 많고, 선녀탕 같은 여울도 꽤 있다. 서울 인근에서 이렇게 시원한 계곡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할 일이다. 그렇게 찰랑찰랑 걷다보면 반환점인 산영루에 도착한다.

산영루(山映樓)는 태고사 계곡과 중흥사 계곡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세워진 누각이다. 자연 암반 위에다 키가 큰 장대석주를 세우고 거기에 누각을 올렸다. 산 그림자가 수면 위에 비친다는 의미의 산영루는 워낙 풍광이 수려하여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모았었다. 성호 이익, 추사 김정희 등등... 당대에 내로라하는 풍류객들은 이곳을 한 번쯤 다 다녀갔다. 다산 정약용 선생도 1794년 가을, 둘째형인 정약전 선생과 함께 이곳을 방문한 후 ‘산영루’라는 누각과 같은 이름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산영루지만 사람들이 잘 모르는 아픔이 있다. 산영루 앞에는 비석들이 서있는 비석거리가 있다. 북한산성과 관련하여 공로를 세운 이들의 공덕비가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잘 보면 몇몇의 비석은 깨지거나 큰 구멍이 나있다.

 

“아니 도대체 소중한 문화재에 누가 감히 이런...!”

트레킹팀의 시선을 끌기 위해 저런 멘트를 했다.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면서.

“누가 비석을 깨뜨리기라도 했나요? 드릴로 뚫었어요?”

“아니요. 이 비석들도 총 맞았어요. 한국전쟁 때 중성문처럼요.”

그러자 누군가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외적 방어하라고 산성 만들었더니 같은 민족끼리 치고받았네...”

산영루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망실됐다. 그러다 2014년에 복원이 되었다.

 

* 산영루

 

 

* 비석거리 비석: 곳곳에 총탄 자국이 있다.

 

 

● 풍광이 수려한 북한산계곡에서

“우리 북한산계곡에 와 있습니다. 정말 시원스럽지 않습니까?”

 

원효봉이 시원하게 바라다 보이는 계곡에서 필자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저기 성벽 구간, 무너진 성벽 구간이 보이시죠? 원래 이 곳에는 수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수문을 통해서 계곡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북한산성에는 대서문 같은 7개의 대문과 6개의 암문, 그리고 한 개의 수문이 있었다. 이를 두고 북한산성 14성문이라고 말한다. 대문과 암문은 복원이 되고 해서 실재하고 있지만 수문은 소실된 상태다. 수문도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망실됐다.

“아참, 북한산성은 포곡식 산성입니다. 포곡식이라는 건 계곡을 끼고 있는 산성이라는 뜻이죠. 성이 만들어지면 음용수 때문에 골치를 썩잖아요. 그런면에서 계곡을 끼고 있는 북한산성은 물 공급면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죠.”

“진짜 그랬겠네요.”

“하지만... 보시다시피 계곡이 있다 보니 풍수해에 취약해요. 그래서 저 앞에 수문이 떠내려가 버렸잖아요.”

 

의상봉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덕암사까지 탐방한 후 북한산성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된다. 덕암사의 대웅전은 자연 석굴에다 법당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덕암사 대웅전의 실내 천장은 돌로 되어 있다. 이 석굴에서 원효대사가 수도를 했다고 전해진다.

덕암사는 메인 탐방로에서 벗어나서 그런지 찾는 이들이 많지 않은데 북한산 마니아라면 한 번쯤은 방문해 볼만한 곳이다. 특히 덕암사에서 바라보는 의상봉의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다. 한편 덕암사는 아미타사라고도 불린다.

 

* 덕암사: 덕암사에서 바라본 의상봉

 

● 위대한 철학은 걷기로부터 생성된다!

 

북한산성 역사트레킹을 이 원고도 마감된다. 물론 에필로그편이 있긴 하지만... 트레킹을 행하다보면 좋은 생각들이 계속 떠오른다. 그런 생각들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래서 <트레킹은 생각창고>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런 생각들은 아름다운 풍광에서 더욱더 활성화된다. 북한산성 입구, 원효봉이 보이는 전망대도 그런 곳 중에 하나다. 그곳에 서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곳이 바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이야! 제대로 찾아온 거야.’

북한산의 암봉들이 보여주는 시원한 풍광으로 머리가 맑아진다. 그리고는 다시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위대한 철학은 걷기로부터 생성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걷는다.

 

* 북한산성 계곡

 


 

■ 북한산성 역사트레킹

1. 코스: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 대서문 ▶ 중성문 ▶ 산영루 ▶ 덕암사 ▶ 북한산성 계곡 ☞ 덕암사를 잠시 방문한 후 왔던 길로 돌아와, 다시 북한산성 계곡을 따라 하산하는 것이 좋다.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4시간(휴식시간 포함)

4. IN: 구파발역 ☞ 구파발역에서 북한산성 입구행 버스 탑승(약 15분간 이동) / OUT: 북한산성탐방지원센터

 

 

* 북한산성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곽작가’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글을 참 늦게 쓴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본인 이름 걸고 쓴 책다운 책이 없다. 물론 글을 빨리 쓴다고 좋은 건 아니다. 속필이 명필이 되는 경우는 흔하지가 않으니까. 그 느릿느릿한 글쓰기는 필자의 성격과 닮아 있다. 느긋한 문장에서는 빠릿빠릿함보다는 게으름이 잔뜩 묻어있다. 오후의 햇살 아래에서 배 쭉 깔고 단 잠에 빠져있는 누렁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필자는 의외로 꼼꼼하다는 소리도 많이 듣는다. 역사트레킹을 진행하려면 생각보다는 많은 지식이 필요로 한다. 그래서 지식노트를 만들었는데 우연하게 그 노트를 본 참가자 분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다.

 

“보기와는 다르게 참 꼼꼼하세요.”

 

사실 그런 꼼꼼함은 필자의 방어 기재다. 외부의 공격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에서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완벽주의. 그렇게 완벽주의에 물들어 있다 보니 삶이 진도가 안 나간다. 살다보면 앞뒤 안 재고, 확 치고 나갈 때도 분명 필요하다.

 

본성이 게으른데 완벽주의에까지 물들어 있으니 글을 빨리 못 쓰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다른 곳에 있다. 필자는 완벽주의자가 아니다. 완벽주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 완벽주의에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탈이 날 수밖에 없지!

 

 

 

 

 

 

* 정약용 선생 상

 

 

 

 

 

 

 

● 트레킹 강의명도 ‘섹시한 제목’이 필요하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역사트레킹도 제목을 잘 지어야한다. 눈에 확 띄는 ‘섹시한’ 제목으로 나가야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문화센터에서 트레킹 강의를 진행하는데 매학기 마다 제목 짓는 걸로 골머리를 썩어야했다.

 

수많은 쟁쟁한 강의들 사이에서 필자의 강의를 ‘잘 팔기’ 위해서는 제목으로 승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얼토당토않은 내용을 끌어다 쓸 수는 없었다. 내용성과 완전히 어긋나는 제목은 욕먹기 ‘딱’이기 때문이다.

 

“제 강의 커리큘럼 중에 가장 눈에 띄는 네이밍이 있나요?”

 

매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저렇게 물어보곤 했다. 그 중에서 단연 이 강의가 수강생들의 눈에 띄었던 것 같다.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이요!”

 

그렇다. 이번에는 경기도 남양주로 가본다.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 여유당: 정약용 선생 생가

 

 

 

 

 

 

 

● 2018년은 다산 정약용의 해배 200주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기 전에 2018년과 다산 정약용 선생과의 연관성에 대해서 잠시 언급해본다. 시간을 좀 돌려보자. 2018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였던 전남 강진에서 해배(解配)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해배’는 유배에서 풀려나는 것을 말한다. 정약용 선생은 1801년 11월에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1818년 10월에 고향인 마재(현 남양주)로 돌아온다.

 

정약용 선생은 유독 ‘18’이란 숫자와 연관이 많은 분이다. 유배를 18년 동안 당했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 18년을 더 사신 후에 돌아가셨다. 또 관직 생활도 18년 동안 하셨다.

 

정약용 역사트레킹은 능내역에서부터 시작된다. 능내역은 중앙선에 있던 간이역이었다. 중앙선은 2008년에 복선화가 됐고, 능내역은 더 이상 열차가 서지 않게 됐다. 폐역이 된 것이다. 하지만 능내역은 휴식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간이역의 색깔을 그대로 남겨두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공간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정취를 쫓아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능내역으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다.

 

단선철도 시절, 옛 중앙선의 일일 수송량보다 더 많은 인파가 주말이면 능내역 인근으로 몰려와 트레킹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한결같이 다 즐거운 표정들을 하고서. 그래서인지 어떤 참가자는 이런 말까지했다.

 

“여기는 정말 딴 세상 같아요. 다들 즐거워 보여요.”

 

그런 딴 세상 같은 능내역을 뒤로 하고 트레킹팀은 천주교 성지인 마재성지로 향했다. 마재성지는 능내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지만 그 주변 분위기는 능내역과는 완전히 다르다. 무척 차분했다. 성지는 성지였던 것이다.

 

 

 

 

 

 

 

 

* 능내역

 

 

 

 

 

 

 

● 정약종의 생가,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선생의 셋째형인 정약종의 생가다.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등... 일반적인 천주교 성지는 거의가 순교, 즉 신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 대대수지만 마재성지는 한 집안의 살림집이 성지가 된 독특한 사례다.

 

그럼 정약종은 누구인가?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용의 둘째형인 정약전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약종이란 이름 석 자는 처음 들어보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형이었다. 바로 위형이었다. 도교에 심취해있던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에 입문하게 된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진산사건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천주교를 멀리할 때도 그는 강건하게 신앙을 지켜냈다.

 

1791년(신해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사람이 제례를 거부하고 위폐를 불사른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의 파장으로 다산 선생도 벽파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된다. 신유박해(1801년) 이후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황사영의 백서(帛書)에도 ‘신해년 박해 이후에 형제나 친구들로서 여전히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정약종만 홀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듯 정약종의 신앙은 강건했다. 하지만 그런 정약종의 강건한 신앙을 그의 형제들은 환영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포교된 것이 아니라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 서학을 토대로 자생적으로 발전시켰다.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혁명적 도구로 천주신앙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상의 위폐를 불태운 진산 사건에 반발해 천주교를 떠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배교를 한 이들은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천주 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정약종이 계속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면 지킬수록 집안 형제들과의 사이는 멀어져갔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약종만 홀로 강 건너 분원리(현 광주시 남종면)에 살게 됐을 정도였다.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정약종은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를 하게 된다.

 

 

 

 

 

 

 

* 마재성지

 

 

 

 

 

 

 

● 정조대왕과 정약용

 

트레킹팀은 다산 정약용 생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마재성지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다.

 

여기서 잠깐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떠났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1799년 당시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를 하게 된다. 반대파였던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다.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 정약용이 1순위였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된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이다.

 

벽파는 꼼수를 쓰기에 이른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이다.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둘째형인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고향인 마현(현 능내리)으로 낙향하게 된다.

 

체제공과 정약용이란 ‘원투펀치’가 조정을 떠난 두 달 후,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정조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임금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크게 스스로를 책망했다고 한다. 그때가 1800년 6월이었다.

 

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된다. 1801년 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런 빌미로 이용됐다.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죽음에 이르게 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을 떠나야 했다.

 

 

 

 

 

 

 

* 거중기: 다산 생가 앞에 전시되어 있음.

 

 

 

 

 

 

● 신유박해로 유배길에 올라야했던 정약용

 

이때 셋째 정약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길에 나서게 된다. 처음 다산의 유배지는 경상도 포항 부근 장기였고, 정약전의 유배지는 전라도 완도 본섬 옆에 있는 신지도였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백사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약용은 포항보다 더 궁벽한 강진 땅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배되기에 이른다.

 

한편 강진에서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는 고정되지 않았다. 읍내에 있는 주막거리에 거처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다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다산초당이었던 것이다. 다산초당은 다산 선생이 1808년에서부터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그렇게 해배된 이후 다산 선생은 고향인 이 곳 마현으로 다시 오게 됐고,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에서 강진 시절에 마치지 못한 저술 작업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게 된다.

 

“다산 선생은 무려 500여 권의 서책을 저술한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강진에서의 18년 동안, 또 여유당에서의 18년 동안 다산 선생은 묵묵히 저술과 학술작업에 매진하셨습니다. 그런 다산 선생의 뜻을 배우고자 우리는 여기에 온 것입니다.”

 

나름대로 설명을 잘했는지 필자의 말에 환호를 하는 참가자도 있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몇 마디 더 설명을 보탰다.

 

“아참 다산 선생은 40세에 유배됐다가 58세에 여유당으로 오시게 됩니다. 그러다 76세에 돌아가십니다. 그때 기준으로는 무척 장수를 하신 셈이죠.”

 

다산생가를 떠나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 이후에도 필자는 트레킹팀과 함께 다산 선생과 정조대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파란만장한 다산 선생과 그의 형제들의 삶, 참된 목민관이었던 다산 선생의 애민 정신,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의 일대기 등등... 트레킹의 명칭이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이었던 만큼 다산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에 한 분은 집에 가서 다산 선생과 관련된 공부를 해야겠다고 필자에게 슬며시 말을 건넨 분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필자와 같은 사람은 두꺼운 역사책의 머리말을 읽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도서관이 아닌 아웃도어이지만, 필드에서 트레킹을 하며 사람들을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리딩’하기 때문이겠다.

 

 

 

 

 

 

 

* 다산생태공원

 

 

 

 

 

 

 

 

● 귀에 확 꽂히는 이름,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

 

여유당을 뒤로 한 트레킹팀은 자전거도로 옆에 놓인 인도를 따라 운길산 방면으로 나아갔다. 이 길은 옛 중앙선 철로였다. 중앙선이 복선화되면서 옛날 단선 구간을 리모델링하여 자전거도로와 인도로 변신시킨 것이다. 이 길은 아름다운 한강변을 옆에 끼고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자전거의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는 단점도 있다.

 

무섭게 페달을 밟아대는 일부 자전거족들이 이 구간에 많기에 항상 경각심을 가지고 걸어야한다. 하긴 필자도 예전에 자전거를 탔을 때, 특히 한강변을 달릴 때는 무식하게 페달을 밟았었다. 그래서 이런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자전거 폭주족이냐! 그 고물자전거로 애쓴다 애써!”

 

임진왜란 당시 변응성 장군이 지켰다는 마진산성(터) 탐방을 끝으로 정약용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된다. 마진산성은 야트막한 산인데 그곳에 올라서면 양수대교를 비롯한 양수리 일대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 양수대교: 마진산성 터에서 바라본 양수대교. 강 건너편이 양수리다.

 

 

 

 

 

 

 

●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제는 완벽주의의 허울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완벽하지도 않은 인간이 완벽주의로 위장을 하고 있으니 정체성에 혼란만 올 뿐이다. 더군다나 나답게 살기를 원한다면서 자신을 완벽주의로 방어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다.

 

이렇게 필자의 허울을 벗겨주시는데 정약용 선생의 역할이 컸다. 무슨 소리인가? 정약용 선생도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배에서 풀려나기 위해 당시 세도가문이었던 안동 김씨 쪽과 접촉했던 것, 제자들 중에 큰 사상가가 나타나지 않은 점 등이 바로 그것이다.

 

민족의 큰 스승인 정약용 선생도 이렇듯 개인적인 흠결이 있었다. 하물며 고만고만한 삶을 살고 있는 필자가 어설픈 완벽주의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었으니 그저 우스울 따름일 뿐!

 

필자는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쓸 것이다. 느릿느릿하게라도 꾸준히 쓸 것이다. 열심히 쓰다 글이 어느 정도 무루 익으면 과감하게 원고를 출판사에 보낼 것이다. 전에는 완벽한 원고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허울에 빠져있던 예전의 내 자신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세상에 완벽한 원고가 있을까? 그렇게 했다가는 평생 책 낼 생각은 하지도 말아야지. 완벽한 원고만 찾다가는 완벽하게 평생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어야 할 걸!”

 

 

 

 

 

 

 

* 다산생태공원: 청명한 가을날의 다산생태공원

 

 

 

 

 

 


 

 

 

 

 

■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

 

1. 코스: 능내역 ▶ 마재성지 ▶ 다산생가(정약용묘) ▶ 다산생태공원 ▶ 마진산성(터)

2. 이동거리: 약 10km

3. 예상시간: 4시간(휴식시간 포함)

4. IN: 팔당역 ☞ 팔당역에서 능내리행 버스 탑승(약 15분간 이동) / OUT: 운길산역

 

 

 

 

 

 

 

 

*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남양주정약용역사트레킹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언젠가 트레킹 리딩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홀로 트레킹을 했을 때는 타인의 시선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거창한(?) 직함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트레킹을 리딩하다보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더 짙게 다가오는 게 아닌가!

 

“곽 작가님, 좀 웃어요. 아침부터 찡그리고 있어요.”

 

역사트레킹은 주로 오전 10시 30분에 실시한다. 출근 시간을 피하고자 그 시간으로 정한 것이다. 좋아서 하는 역사트레킹이지만 얼굴에는 월요병에 걸린 회사원의 표정이 묻어났나보다.

 

사실 저런 말을 한 두 번 들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표정관리를 한다고 했는데도 저런 소리를 들었으니까...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그렇다, 리딩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그렇다 등등... 나름대로 변명도 해보았지만 말 그대로 변명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필자의 직업도 서비스업이 아닌가. 말이야 있어보이게 역사트레킹 마스터지 여행가이드와 별 차이가 없다. 서비스업종에 있는 사람이 얼굴을 찡그린다? 업계 관행으로 봤을 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오전에 찡그리던 모습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풀려간다. 어떻게 아느냐? 사진을 찍으면서 카메라 LCD창에 비쳐진 모습을 그때그때 체크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필자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가득해진다. 역시 필자는 트레킹 팔자인 거 같다. 좀처럼 웃을 일이 없다는 요즘인데 트레킹만 하면 함박웃음을 얼굴에 걸고 있으니...

 

 

 

 

 

* 남자하동계곡

 

 

 

 

 

 

 

● 과천골 역사트레킹

 

이번편에는 과천골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과천골 역사트레킹은 말 그대로 경기도 과천시 일원에서 행해진다. 앞선 프롤로그에서도 언급됐듯이 이 원고의 원래 명칭은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다. 필자와 대화를 주고받는 트레킹팀도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프로그램에서 모집하여 꾸려진 모임이다.

 

이번편 과천골 역사트레킹도 마찬가지고, 안양시에서 행한 정조대왕 역사트레킹도 경기도에서 행한다. 그렇다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란 명칭과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과천시나 안양시가 경기도에 있지 서울에 있는 게 아니니까.

 

도성을 관할했던 한성부는 도성뿐 아니라 성 밖 십리지역(4km)까지 그 행정 영역 안에 두었다. 이를 두고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칭했다. 필자는 성저십리 개념을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에 적용했는데 지금의 서울에서 반경 40km까지를 서울학개론의 범위로 삼은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자. 필자는 수도권 전철이 닿는 곳을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의 영역으로 삼았다.

 

 

 

 

● 역사트레킹 한국학개론?

 

지금이야 필자가 무명이기에 과천을 가든, 남양주를 가든, 춘천을 가든 서울학개론이란 명칭을 써도 누구 하나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다. 필자가 거물급(?)이 된다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에 과천골 역사트레킹이 포함된다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곽 작가님, 왜 과천시에서 트레킹을 했으면서 서울학개론이라고 하세요? 그 말이 틀린 거잖아요.”

“맞습니다. 그 명칭은 분명 틀린 거예요.”

“그럼 빨리 고쳐주세요. 이름은 제대로 써야지요! 경기도청에서도 난리에요.”

“그래서 바꿨습니다.”

“뭘로요?”

“역사트레킹 한국학개론!”

 

이런 대화가 현실화 됐으면 좋겠다. 필자라고 거물급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그날이 빨리 다가왔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교통정리용 설명이 길어졌다. 빨리 진도를 나가자.

 

과천골 역사트레킹의 시작은 우면산 남쪽 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소가 졸고 있다는 뜻의 우면산(牛眠山)은 해발 293m로, 이웃산인 관악산(632m)보다 훨씬 키가 작은 산이다. 해발이 높지 않은 산이라 그런지 관악산보다 오르기도 수월하고 코스도 짧다.

 

우면산의 북쪽은 서울 서초구이고, 남쪽은 과천시에 속하는데 확실히 남쪽면보다는 북쪽면이 편의시설이나 표식들이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우면산의 남쪽면은 방치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관리가 안 되어 있다. 편의시설도 전무하고 안내표식도 띄엄띄엄 있다. 그래서인지 우면산 남쪽면을 찾는 이들도 별로 없다. 무슨 이유일까? 우면산 남쪽면도 분명 좋은 트레킹 코스인데... 이유는 남태령과 관련 있다.

 

 

 

 

 

 

* 남태령옛길 표지석

 

 

 

 

 

 

 

● 남태령으로 개명한 여우고개

 

남태령(南泰嶺)은 관악산과 우면산 중간에 위치한 고개로 해발은 183m에 달한다. 우리나라에 워낙 해발이 높은 고개들이 많아 183m의 높이면 명함도 못 내미는 게 맞지만, 한자어에서도 보이듯 이 고개는 당당히 ‘남쪽의 큰 고개’로 명명되어 있다.

 

처음에 이 곳은 여우고개, 혹은 여시고개로 불렸다. 한자어 명칭도 ‘여우호’자를 써서 호현(狐峴)이라고 쓰이기도 했다. 그만큼 이 지역에는 여우가 많이 출몰했다고 한다. 그 옛날 관악산과 우면산의 울창한 수풀은 여우들이 서식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일대에서는 여우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우 굴들이 발견됐다. 그런 배경들 때문인지 이곳에는 천 년 묵은 여우가 사람을 홀리고 다녔다는 ‘전설의 고향’도 전승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곳은 왜 여우고개에서 남태령으로 개명을 하게 됐을까? 가장 유력한 설은 정조대왕 시대에 행했던 화산 능행차와 관련이 있다. 지난 정조대왕 역사트레킹편을 다시 복기하면서 읽어보자.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이장을 한 후, 정조대왕은 참배에 나섰다. 이를 ‘화산 능행차’라고 불렀다.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기 위해서 꼭 넘어야 했던 이 고개의 이름을 정조대왕께서 물으셨다. 이때 과천현의 이방이 여우고개라는 이름 대신 남태령이란 명칭으로 대답을 했다고 한다. 상감께서 행차하는 고개가 ‘여우고개’라는 요망스러운 이름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그런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여우고개가 토속적인 이름이기는 하지만 요망스러운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다. 더불어 고개의 명칭이 한 사람에 의해 급작스럽게 변경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정조대왕 이전 시대부터 여우고개가 아닌 남태령으로 불렸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한강 이남에는 정조대왕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혹시 남태령도 그에 편승된 것이 아닐까? 정조대왕과 관련된 스토리텔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남태령은 이미 보통 이상의 고개가 될 수 있으니까.

 

정조대왕이 남태령을 넘은 것은 5년 밖에 되지 않았다. 1794년 이후부터 능행차 노선이 시흥-안양 방면으로 변경됐기 때문이다. 남태령 길이 협소하다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과천에 김상로와 그의 형 김약로의 묘가 있어 일부러 남태령-과천 코스를 버렸다고 한다. 김상로는 영의정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사도세자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자이다.

 

현재 남태령에는 ‘과천루’라고 불리는 망루가 설치되어 있다. 남태령이 삼남지방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던 만큼 망루를 설치하여 감시를 했던 것이다. 과천루는 현재 과천 8경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지역의 명물이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많은 이들이 찾지는 않는다.

 

 

 

 

 

 

*과천루: 남태령망루라고도 불린다.

 

 

 

 

 

 

● 군대생활 생각나게 하는 남태령 참호와 벙커

 

천년 묵은 여우가 사람을 홀리고(?), 정조대왕이 능행차를 하러 다녔던 남태령. 현재 남태령에는 곳곳에 참호가 놓여 있다. 벙커도 있다. 남태령처럼 서울 인근에서 그렇게 많은 참호와 벙커들이 정열 되어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안보(?)시설들을 가로질러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우면산의 남쪽면이다. 그 참호와 벙커들을 파고,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군인아저씨들이 땀과 눈물을 흘렸을까! 그런 시설들을 무심히 지나치기는 했지만 필자도 군대 생활이 생각나서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렇게 우면산 남쪽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둘레길 여행자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전무하다. 팔각정은커녕 그 흔한 벤치조차도 찾기 어렵다. 화장실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런 이유 때문에 우면산 남쪽 숲길은 많은 이들이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 높아질 대로 높아진 도보여행자들의 눈높이로 보자면 이 코스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둘레길 트렌드에 맞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반전이 있기 마련이다!

 

- 이 숲길 정말 울창한데요.

- 서초구쪽 우면산은 가봤는데... 여기는 처음이에요. 그런데 여기가 더 좋아요.

- 숲길도 좋고 사람도 거의 없어서 걷기에 더 좋은 거 같아요.

 

트레킹팀은 저렇게 환호성을 외쳤다. 거의 한 시간 이상 이어진 울창한 숲길에 박수갈채를 보냈던 것이다. 특히 이곳은 완경사로 계속 이어지다보니 사색을 하면서 걷기에 ‘딱’이었던 것이다. 묵언수행을 하기에도 제격인 곳이었다.

 

 

 

 

 

 

* 용마골: 일명 너럭바위 계곡

 

 

 

 

 

 

● 너럭바위와 온온사

 

이제 트레킹팀은 우면산에서 관악산으로 넘어간다. 용담골이라는 곳을 통해 관악산에 진입을 하게 되는데 무척 흥미로운 풍광을 맞이하게 된다. 카펫이 깔려 있듯 너럭바위가 보기 좋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누가 일부러 깎아놓은 것처럼 평평한 너럭바위가 길이 돼주기도 했고, 의자가 돼주기도 했다.

 

그 위에다 식탁보를 깔면 밥상이 되기도 한다. 그랬다. 트레킹팀은 너럭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맛있게 식사를 했다. 노닐기 좋은 곳에서 배를 채웠으니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너럭바위 계곡을 지난 트레킹팀은 과천현의 옛 객사였던 온온사(穩穩舍)를 탐방하게 된다. 객사는 한마디로 관사를 말한다. 유명한 전주 객사를 떠올리시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1649년(인조27)에 창건된 이 건물은 정조대왕에 의해 ‘온온사’라는 특이한 이름을 갖게 된다. 잠깐 한자를 살펴보자. ‘평안할 온(穩)’자가 하나도 아닌 두 개나 들어가 있다. 정조대왕은 평화, 아름다움, 휴식이라는 개념들을 이름에 담고 싶으셨던 것 같다.

 

실제로 정조대왕은 화산 능행차를 하러가면서 과천현 객사에 머물렀는데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휴식하기에 좋았다고 하여 ‘온온사’라는 현판을 친필로 하사하셨다. 그 현판이 지금도 온온사에 잘 붙여져 있다.

 

지금이야 일대가 많이 개발이 되어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휴식하기에 좋은 곳’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온온사 뒤편 숲길은 꽤 아름답고 산보하기에 좋다는 것이다. 그 숲길을 따라 트레킹팀은 마지막 탐방지인 자하동 계곡으로 향했다. 드디어 추사 선생 글씨를 만나게 된다.

 

 

 

 

 

 

* 온온사

 

 

 

 

 

 

 

● 자하 신위 선생과 추사 김정희 선생

 

돌산인 관악산에도 경치가 아름다운 계곡이 있다. 이 계곡은 자하동이라고 불리는데 조선후기 시·서·화에 능했던 자하 신위(1769~1847) 선생의 호를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자하(紫霞) 신위 선생은 어려서부터 신동이라고 불렸는데 그런 소문을 듣고 정조대왕이 궁궐로 불러 크게 칭찬을 했을 정도였다. 신위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전편인 관악산 역사트레킹에서 한 번 언급했었다. 역시 복습한다는 생각으로 읽어보자.

 

시(詩)·서(書)·화(畫) 모두에 능한 사람을 시·서·화 삼절이라고 부르는데 그 칭호를 얻었던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당연한 말일 것이다. 시와 글씨와 그림, 이 세 가지를 모두 다 잘하기가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신위 선생은 참 대단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왜 관악산에 신위 선생의 호를 딴 계곡이 있는 것일까? 신동이었으며 시·서·화 삼절로 불리기까지 한 신위 선생과 관악산이 무슨 연관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늘 그렇듯 천재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다. 신위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게 된다. 지방토호들의 횡포에 의해 파직 당하고, 당쟁의 여파로 인해 파직 당한다. 이에 세상의 환멸을 느낀 자하 신위 선생은 관악산에 은거하게 된다. 그렇게 하여 관악산에는 자하동이란 명칭이 생긴 것이다. 참고로 과천에 있는 자하동은 ‘남자하동’이라 부르고, 서울대 옆에 있는 자하동은 ‘북자하동’이라고 불린다.

 

 

 

 

 

* 남자하동계곡

 

 

 

 

 

 

● 천재가 천재를 알아봤다!

 

과천의 남자하동 계곡 바위면에는 단하시경(丹霞詩境), 자하동문(紫霞洞門), 백운산인 자하동천(白雲山人 紫霞洞天),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등 4개의 바위글씨가 있다. 계곡을 따라 새겨진 이 바위글씨들은 예전에는 접근성이 많이 떨어졌다.

 

실제로 최근에 설치된 탐방데크와 흔들다리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문화재였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바위글씨들을 지나갔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알아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늦게나마 탐방시설들이 확충되어 바위글씨들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말 나온 김에 바위글씨에 대해서 살펴보자. 지면 관계상 단하시경(丹霞詩境) 하나만 이야기하겠다. 이 ‘단하시경’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글씨다. ‘단하’는 신위 선생의 다른 호로 추정되고, ‘시경’은 시흥을 불러일으키는 경지라는 뜻이다. 신위 선생이 관악산 계곡의 아름다움을 보고 지은 시를, 추사 김정희 선생이 ‘단하시경’이라는 바위글씨로 새겨 넣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추사 선생은 관악산에 은거했던 신위 선생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그런 돈독함이 ‘단하시경’이라는 바위글씨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추사 선생도 시·서·화 삼절이었다. 천재가 천재를 알아봤던 것이다.

 

자하동 계곡 탐방을 끝으로 과천골 역사트레킹도 종료가 된다. 트레킹 하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계곡물에 발 좀 담그고 바위에 새겨진 글씨도 감상해보자. 이런 것이 풍류 아니겠는가? 시·서·화에 능하지 않더라도 풍류는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법이지!

 

 

 

 

 

 

*단하시경(丹霞詩境) 각자바위

 

 

 

 

 

 

 

● 오늘도 즐겁게 역사트레킹해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 아니다. 타인과 끊임없이 호흡을 해야 벌어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시선에 익숙해져야한다. 어쩌면 즐겨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시선에 노출되는 것이 나답게 살기와 배치되지도 않는다. 물론 여기서의 타인의 시선은 갑질의 시선이 아니다.

 

타인의 시선을 받아들여 스스로의 모습을 더 멋지게 하면 좋은 일이 아닌가. 필자의 출근 장소는 트레킹 집합장소인데 해당 집합지에 미소를 띠며 도착하면 더 좋지 않겠는가.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즐겁게 역사트레킹해요!”

 

 

 

 

 

 

*과천향교

 

 

 

 

 

 


 

 

 

 

 

과천골 역사트레킹

 

1. 코스: 남태령망루(남태령옛길) ▶ 너럭바위계곡 ▶ 온온사 ▶ 남자하동계곡(과천향교)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하

5. In: 선바위역 3번 출구(지하철4호선) / Out: 과천역(지하철4호선)

 

 

 

 

 

 

* 과천골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이 글을 쓰고 있는 2020년 6월.

아직까지도 코로나바이러스-19(covid-19)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코로나가 발생했던 2019년 12월 경, 필자는 유럽여행 중이었는데 코로나 발병 사태를 보면서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냥저냥 하다가 종료될 줄 알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방문한 후, 유럽배낭 여행을 이어갔다. 가난뱅이 여행이었지만 무척 재미있었고 유익했다. 원하는 사진도 아주 많이 찍었다. 귀국이 가까워졌을 때는 상황이 좀 심각해졌지만 그래도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귀국행 비행기를 탔을 때는 국내생활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느라 나름 부푼 꿈을 꾸기도 했었다.

 

‘올해는 역사트레킹을 더 많이 해봐야지. 작년에 세팅한 코스들이 많으니까 회원들하고 더 재미나게 트레킹을 할 수 있을 거야!’

정말? 아직까지 2020년도에는 역사트레킹을 한 번도 실시한 적이 없다. 언제 다시 제대로 실시할 수 있을지 기약도 없다. 코로나가 이렇게 무서운 거다.

코로나 사태 이후 사람들은 거리를 두게 됐다. 사회적 거리두기, 생활 속 거리두기.

이번 편에 언급할 <트레킹은 생각창고>도 이와 관련이 있다. 정확히는 ‘아름다운 거리’다. beautiful street가 아니라 beautiful distance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전염병을 막기 위한 물리적 방편이라면 ‘아름다운 거리두기’는 사람과 사람과의 존중을 해치지 않기 위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꽤 오래전의 일이다. 공무원시험 준비를 할 때였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동갑내기를 만나게 됐다. 답답한 수험생 시절이었느니 간간이 티타임이나 하면서 수험 정보나 나눌 셈이었다. 수험생과 수험생이 만나서 친해지면 좋은 결과보다 안 좋은 결과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냉정하다고 그럴지 모르지만 필자의 스타일은 그랬다. 딱 커피 한 잔 나눌 수 있는 그런 관계... 하지만 그 동갑내기는 필자의 스타일과는 반대였다. 동갑이니까 다 친구라고 생각하는 그런 부류였다. 더군다나 답답한 수험생 시절에 만났으니 더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냥 친구도 아니고 진정한 친구.

딱 티타임 나누는 관계 VS 동갑이니까 진정한 친구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턱하고 가슴이 막힌다.

 

* 만안교

 

 

 

 

● 이제는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로

 

이번 편부터는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로 향한다. 이제까지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역사트레킹 한국학개론’으로 확장된다. ‘한국학개론’이 되어서 그런가? 첫 번부터 제목이 거창하다. 정조대왕 역사트레킹!

본격적인 내용전개에 앞서, 흥미로운 질문 두 가지! 서울 인근에 경주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연혁을 가진 사찰이 있다면? 또 그 사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조대왕 시대에 축조한 돌다리가 있다면?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분명 이런 물음에 흥미를 느끼실 것이다.

불국사보다 더 오래됐다는 사찰은 삼성산에 있는 삼막사라는 사찰이고, 정조대왕 시대에 축조된 다리는 만안교라는 석교(石橋)다. 이 두 장소는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여 이동할 수 있다. 또한 편리하게 전철을 타고 탐방을 할 수 있는데 수도권 전철 관악역에서 시작하여 관악역으로 종료할 수 있다. 물론 그렇게 하면 걷는 거리가 너무 많기에 다리가 아픈 분들은 중간에 시내버스를 타시라고 권한다.

본 코스를 <정조대왕 역사트레킹>이라고 네이밍을 했을 때 좀 망설였었다. 아무리 정조대왕의 흔적이 남은 곳을 탐방한다고 해도 코스 이름에 떡하니 정조대왕의 이름을 붙이다니! 그런데 아무리 머리를 써 봐도 그 이름보다 더 좋은 네이밍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욕을 먹더라도 그냥 <정조대왕 역사트레킹>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필자는 <태종이방원 역사트레킹> 코스도 가지고 있다. 기회가 된다면 <태종이방원 역사트레킹>도 소개할 예정이다. 어쨌든 왕의 이름을 떡하니 새겨 넣으니 해당 코스가 아주 강렬하게 느껴진다.

 

 

 

* 만안교: 만안교는 만들어진지 200년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현역으로 쓰이고 있다.

● 화산 능행차와 만안교(萬安橋)

정조대왕 역사트레킹은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관악역 1번 출구에서부터 시작된다. 1번 출구에서 나와 안양역 방면으로 약 500미터 정도를 걸어가면 만안교를 만날 수 있다.

1795년 축조된 만안교는 정조대왕의 화산 능행차를 위해 만들어졌다.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1789년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 영우원에서 수원 화산의 현륭원으로 이장을 한다. 그리고는 자주 참배에 나섰는데 이를 두고 ‘화산 능행차’라고 불렀다.

처음 능행차는 도성에서 동작나루를 거쳐 남태령을 넘는 길이었지만 이후 시흥과 안양을 거치는 길로 변경된다. 남태령 길이 협소하다는 지형적인 한계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다른 사정도 있었다. 과천 행차로에는 김상로와 그의 형 김약로의 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오화변(壬午禍變)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상로는 사도세자 처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해원하기 위해 떠나는 능행차 길에 사도세자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김상로 형제의 묘소를 지나는 것이 탐탁지 않았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임오화변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했던 사건을 말한다.

그래서 1794년 이후부터는 능행차 노선이 시흥과 안양 방면으로 변경된 것이다.

당시 왕의 행차 길에는 임시로 나무다리 등을 가설한 후, 행차가 끝난 뒤에는 철거 하는 방식이 반복됐다. 이에 정조는 그런 번거로움을 피하고, 인근 주민들이 평상시에도 안전하고 편리하게 하천을 넘을 수 있게 튼튼한 돌다리(石橋)를 건설하라고 왕명을 내린다.

석교의 축조에는 경기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수원․개성․강화 유수까지 동원될 정도로 큰 공사였지만 공사 기간은 3개월 정도였다. 그렇게 왕명으로 지어진 돌다리는 길이가 31.2m, 넓이가 8m에 달하는 큰 규모를 자랑하게 된다. 왕의 뜻대로 인근 백성들도 안심하고 하천을 건널 수 있는 튼튼한 돌다리가 놓이게 된 것이다. 이 다리를 두고 정조대왕은 만년동안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한다는 의미로 만안교(萬安橋)라는 이름을 직접 작명하였다.

 

 

* 관악산: 삼성산 정상 부근에서 바라본 관악산.

 

● 백성들을 위해 튼튼한 돌다리를 축조한 정조대왕

 

한편 원래 만안교는 지금의 자리보다 남쪽으로 200m 지점인 삼성천 위에 축조됐지만 1980년 국도 확장 공사시에 지금의 삼막천 위로 옮겨지게 됐다. 이 다리가 놓여 있는 안양시 만안구의 명칭은 만안교에서 유래된 것이다.

만안교는 무지개교라 불리는 홍예교다. 조선 후기에 축조된 홍예교 중에서 가장 큰 다리로 모두 7개의 아치가 놓여 있다. 판석과 장대석을 서로 맞물려 축조했는데 그 기법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불린다.

필자는 처음 만안교를 탐방했을 때 좀 색다른 느낌을 받았다. 4대문 밖, 그것도 한강 이남에 이렇게 정교하고 거대한 아치형 석교를 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 돌다리는 박물관에 갇혀 있는 죽은(?) 다리가 아니라 지금도 인근 주민들이 건너다니는 살아있는 ‘생활’ 다리였다는 점이다.

이제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진두지휘하는 화산 능행차를 볼 수 없고, 다리 주위로는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섰지만 정조대왕의 바람은 계속 이어지는 듯싶다. 인근 백성들이 ‘만년동안 편안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하는, 그런 애민 정신 말이다. 돌다리를 넘으면서 필자는 트레킹팀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조대왕 시대에 만들어진 역사적인 다리를 걷고 있습니다. 200년이란 시간이 흘렀어도 아직까지 튼튼한 돌다리를 넘고 있는 거죠.”

트레킹팀은 정조대왕의 애민 정신을 곱씹으며 튼튼한 돌다리를 씩씩하게 걸어 다음 코스인 삼막사 계곡으로 향했다.

 

 

* 삼막사

● 울창한 숲길, 삼막계곡

정조대왕 역사트레킹은 삼막천을 따라 이동을 한다. 삼막천은 삼성산에서 발원된 작은 하천으로 그 상류 위쪽에는 삼막사가 터를 잡고 있고, 그 하류에는 현재 만안교가 놓여 있다. 만안교를 지난 삼막천은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 안양천과 합수된다.

정조대왕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는 항상 여름경이었다. 그래서 땀방울이 눈앞을 가릴 정도로 흘러내렸다. 그때 필자도 지쳐갔고, 팀원들도 지쳐갔다. 하지만 삼막계곡에 들어서니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이 솟구쳤다. 계곡을 끼고 있는 숲길로 들어선 것이다.

아무리 강한 직사광선이 내려찐다고 해도 숲속에 있으면 탈진할 일이 없다. 숲속이 강력한 ‘썬크림’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한 여름이라도 숲 속에 있으면 탈진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원한 나무그늘에 있으면 원기가 회복된다. 이런 숲길을 걷는다면 한 여름 때양볕 아래에서도 트레킹을 마음껏 할 수 있을 듯싶었다. 1시간 정도 계곡 숲길을 따라 올라가니 드디어 삼막사에 도착했다.

 

* 삼막사

●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삼막사

 

삼막사는 677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원효, 의상, 윤필 3대사가 막(幕)을 치고 수행을 하다가 그 후에 절을 지으니, 그 절이 삼막사가 된 것이다. 삼성산의 명칭 유래도 마찬가지다. 원효, 의상, 윤필의 성인이 수도를 한 곳이라 하여 삼성산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이다.

서두에서 필자는 삼막사가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연혁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다. 개창 시기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통상적으로 불국사의 창건은 751년으로 잡는다. 그러면 삼막사가 불국사보다 무려 70년 정도 앞선 연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유서가 깊어서인지 삼막사에는 수많은 선승들이 머무르며 수도에 정진했다. 신라 말에 도선국사, 고려시대에는 나옹선사,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와 사명대사, 서산대사가 이곳에서 수도를 했다. 특히 조선왕조 개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무학대사는 삼막사에서 새로운 왕조에 대한 융성을 기원했다고 한다.

유명한 선승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는 건, 달리 말하면 삼막사가 좋은 기운을 품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멀리서 삼막사를 봤을 때, 기운이 사방으로 트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삼막사는 정상부 능선 부근에 자리 잡고 있어, 그 곳에 올라서면 멀리 인천과 서해바다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데 그런 입지적 조건이 삼막사의 기운을 ‘쾌’하게 생성시키는 것 같았다. 이런 좋은 기운 때문인지 삼막사는 조선시대부터 남왈삼막(南曰三幕)으로 지칭됐다. 서울 남쪽의 수찰(首刹), 즉 우두머리 사찰이라는 뜻이다.

앞선 <진관사 역사트레킹>에서도 언급이 됐는데 삼막사는 진관사와 함께 서울을 지킨다. 다시 복습해본다. 남쪽 - 삼막사, 서쪽 - 진관사, 동쪽 - 불암사, 북쪽 - 승가사. 이를 두고 서울의 4대 명찰이라고 부른다.

삼막사에는 무학대사가 중수한 대웅전을 비롯하여 1880년(고종 17년)에 지어진 명부전과 그 다음해 지어진 칠성각 등의 당우(堂宇)들이 배치되어 있다. 또 고려중기 시대에 건립된 3층 석탑과 조선 후기시대에 제작된 아미타삼존불 등 다양한 문화재가 있다.

삼막사 아래에 있는 염불암 탐방을 끝으로 정조대왕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된다. 염불암은 안흥사라고도 불리는 사찰로 태조 왕건이 도승인 능정을 위해 936년에 창건한다. 936년이면 왕건이 후삼국 시대를 통일한 그 때이다. 염불암에는 600년 된 보리수가 있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 염불암

● 만안교 만큼의 아름다운 거리

 

동갑내기와의 갈등 때문에 필자는 준비했던 공무원 시험을 접었다. 꽤 오랫동안 준비를 했었는데 타의에 의해 그만 둔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동갑내기와의 트러블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 단짝이었던 친구 녀석하고도 금이 갔다.

굳이 여기서 구질구질하게 아픈 기억을 언급하지 않겠다. 어쩌면 지금의 직업인 역사트레킹을 하라는 신의 계시로 그런 일이 발생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좀 속이 편하다. 그만큼 필자에게는 그때의 일이 상당한 충격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당시의 일을 좀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됐다.

 

- 그때 좀 더 현명하게 굴었어야 됐는데

- 좀 더 맺고 끊음을 잘 표현했어야 했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이런 일이 또 발생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상대방의 영역이나 스타일을 존중하지 않고 팍 치고 들어오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처 하냐 이 말이다. 그렇다고 그런 사람들이 악당도 아니니까 문제지.’

아름다운 거리(beautiful distance)를 유지하면 된다. 코로나 방지를 위해서는 사회적 거리 유지, 서로간의 존중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는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면 된다.

그럼 그 아름다운 거리는 구체적으로 얼마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필자는 만안교 정도의 거리라고 생각한다. 평소에는 떨어져 있지만 언제든지 다리를 건너면 만날 수 있는 그런 거리... 그런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면 진짜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정조대왕 역사트레킹

1. 코스: 만안교 ▶ 삼막사 초소 ▶ 삼막계곡 ▶ 삼막사 ▶ 염불암 ▶ 안양예술공원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IN: 수도권 전철 관악역 1번 출구 / OUT: 안양예술공원 ☞ 안양예술공원에서 버스를 이용하여 관악역으로 이동함. 안양예술공원과 관악역은 버스로 5분 거리임.

*정조대왕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한때 필자의 제 3의 장소는 만화방이었다. 만화를 좋아해서라기보다는 만화방에서 먹는 라면이 일품이었기에 그곳을 즐겨찾기를 했었다. 삐거덕거리는 만화방 쇼파에 느긋하게 앉아 책장을 잡으려고 할 때였다. 항상 그 때였다. 콧속을 파고드는 그 진한 라면 냄새! 이 세상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도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옆 테이블의 라면 냄새! 그 냄새에 취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분명 만화방에 오기 전에 두둑하게 식사를 하고 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장님 라면 하나에 공기밥 추가요!”

미국의 사회학자인 레이 올든버그는 저서 <The Great Good Place>에서 제 3장소에 대한 개념을 제시했다. 집이 제 1장소라면, 직장은 제 2장소이다. 그렇다면 제 3장소는 무엇일까? 목적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리는 공간을 제 3의 장소라고 설명한다.

집과 직장에서 충족될 수 없는 본원적인 욕구를 제 3의 장소에서 사회적 교류를 통해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레이 올든버그는 이런 교류들을 ‘비공식적 공공생활’이라고 칭했고, 그런 교류들을 위한 필수적인 공간을 제 3의 장소라고 명명했다. 대표적인 제 3의 장소는 어디일까? 아마도 도서관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The Great Good Place>에서 제시한 제 3의 장소는 지역사회의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는 공간으로 시민참여를 증대시키는 공공장소의 성격이 짙다. 하지만 제 3의 장소를 굳이 공공영역에서만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서의 제 3의 공간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배불리 라면을 먹었던 만화방을 제 3의 장소로 언급한 것이다.

*화계사 일주문

 

● 흥선대원군과 화계사

이번편에는 화계사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화계사는 북한산 동쪽편에 있는 명찰이다. 경내가 크지는 않지만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고 주위 풍광이 수려하여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모으고 있는 곳이다.

원래 화계사는 고려 광종 때 창건된 보덕암이 그 시초였다. 이후 152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며 이름을 화계사로 고쳐 불렀다. 화계사는 조선 후기에 크게 그 사세를 확장하게 됐는데 그 시점이 흥선대원군의 집권기였다. 이후 궁(宮) 절’이라고 불릴 만큼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데 지금 남아있는 대웅전, 명부전, 대방 등이 모두 19세기 후반에 중건되거나 만들어진 것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명부전의 편액을 쓰는 등 화계사 곳곳에 그 흔적을 남겼다. 화계사 경내에는 까마귀가 돌을 쪼아서 물이 나오게 했다는 오탁천(烏啄泉)이라는 샘물이 있다. 흥선대원군은 이 샘물에서 피부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 화계사: 화계사 대웅전.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 명부전이다.

 

● 번잡한 화계사 범종루

일주문을 지나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큰 느티나무가 보이고, 그 옆으로 주차장이 있다. 주차된 차들 위쪽으로 범종루가 있는데 이곳이 화계사 탐방의 첫 번째 포인트다. 참고로 범종이 단층으로 이루어진 곳은 범종각(梵鐘閣)이고, 2층의 누각 형식으로 된 곳은 범종루(梵鐘樓)라고 부른다.

이곳의 범종루는 다른 사찰의 범종각이나 범종루보다 좀 더 번잡하게 보인다. 무언가 오밀조밀하게 밀집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번잡함을 이해하려면 먼저 불구사물(佛具四物)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불구사물은 범종각이나 범종루에 있는 범종, 법고, 운판, 목어 네 가지를 지칭한다. 법고는 북이고, 범종은 종이라 누구나 다 그 쓰임새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운판과 목어는 무엇일까? 먼저 대판(大版)이라고도 불리는 운판을 알아보자. 운판(雲版)은 구름운(雲)자에서 보듯 구름을 형상화하여 만든 것이다. 청동이나 철제로 만든 평판인데 두드리면 맑고 은은한 소리가 난다. 목어(木魚)는 어고(魚鼓) 또는 어판(魚板)으로도 불리는데 나무로 만든 물고기의 배를 파내고 그 부분을 두들겨서 소리를 낸다. 처음에는 그냥 물고기 형태가 많았다. 하지만 이후에는 몸은 물고기지만 머리는 용의 형상을 한 용두어신 형태가 대세로 자리를 잡아갔다.

통상적으로 불구사물은 각각 하나씩 있다. 하지만 화계사 범종루에는 범종이 두 개가 있고, 목어도 두 개가 있다. 그래서 트레킹팀에게 항상 숙제를 내준다.

“자 눈을 크게 뜨고, 범종 두 개와 목어 두 개를 찾아보세요! 특히 범종은 보물이에요.”

* 화계사 목어: 천년이 넘는 세월을 견디느라 많이 삭았다. 얼핏보면 무슨 외계인같다. 못 먹어서 바싹 마른...

● 2층에 걸려있는 사인비구의 동종

정확히는 보물 11-5이다. 11이면 11이지 왜 11-5인가? 그 이유를 알려면 화계사 범종을 제작한 사인비구에 대해서 언급해야 한다. 주종장이었던 사인비구는 조선 후기 숙종 시대에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승려였다. 그의 실력이 뛰어나서인지 그가 제작한 동종 8개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강화 동종만 1963년에 지정됐는데 이후 2000년에 나머지 7개가 일괄로 지정되어 총 8개가 된 것이다. 그중 화계사 동종은 보물 11-5로 지정받았다. 이 동종은 원래 경상북도 풍기(지금의 영주시) 희방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고종 때 이곳 화계사로 옮겨지게 된다.

화계사 동종은 무게가 300근으로 무게도 덜 나가고 크기도 작다. 1근이 0.6kg이니 300근이면 180kg 정도가 된다. 기계적으로 비교하는데 무리가 있지만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이 19톤이니 그 크기가 크지 않다는 것을 단 번에 아실 것이다. 화계사 동종은 범종루 2층에 걸려있고 지금은 타종을 하지 않는다. 대신 이후에 제작된 크기가 큰 범종이 타종을 한다. 2층에 걸려 있고, 크기도 작아서인지 사인비구의 동종을 단 번에 찾지 못하는 분들이 많았다.

목어도 좀처럼 단 번에 두 개를 다 확실하게 알아채시는 분들이 많지 않았다. 목어 중 하나가 삭아서 으스러질 거 같은 형태로 걸려 있기 때문이다. 으스러질 거 같은 나무덩어리가 걸려있어 그것이 목어인지 아닌지 분간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저거는 도대체 왜 저렇게 팍 삭았어요? 누가 일부러 썩은 나무라도 걸어놨어요?”

“저 목어가 천년을 버틴 목어라서 그래요. 화계사의 시초가 고려 광종 때 만든 보덕암이거든요. 그러니 저 나무토막은 천년을 버틴 거에요.”

화계사 범종루에 걸린 불구사물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를 해봤다. 아직도 할 말이 더 많지만 이쯤에서 줄이겠다. 나머지는 마지막에 이야기하겠다. 글 서두에 언급된 제 3공간과 관련해서 꼭 언급해야 할 게 있으니까.

* 화계사 범종: 사인비구가 만든 보물 11-5 동종은 어느 것일까? 큰 종일까? 아니다. 2층에 걸려 있는 작은종이다.

 

● 안 가보면 서운한 화계사 명부전

화계사를 빠져나오기 전에 꼭 명부전에 들러보자. 명부전은 저승세계인 유명계의 교주 지장보살께서 계신 곳이다. 지장보살은 그린톤으로 염색한 것처럼 녹색 민머리를 드러낸다. 그래서 보관을 쓴 다른 보살들과는 확연히 구분이 된다. 지장보살 옆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좌우로 협시한다.

그밖에도 사후세계에서 인간들의 죄의 경중을 심판하는 시왕(十王)이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염라대왕도 바로 그 시왕 중에 하나다. 열 명의 왕 중에 다섯 번째 왕이다. 영화 <신과 함께>를 보신 분이라면 지옥을 관장하는 열 명의 왕들이 눈에 그려질 것이다.

화계사 명부전이 이목을 끄는 것은 흥선대원군이 쓴 현판 때문만은 아니다. 그 안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과 시왕상이 더 주목을 받는다. 불상과 시왕상이 고려 말에 활동한 나옹화상이 조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옹화상이 누구인가? 바로 그 유명한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고려 말에, 그것도 나옹화상이 제작한 불상과 시왕상이 있으니 화계사 명부전을 빼놓고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삼성암 일주문: 현판에는 삼각산 삼성사라고 적혀 있다. 북한산이 바로 삼각산이다.

● 홀로 깨달은 나반존자

이제 화계사 경내를 빠져나와 숲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은 북한산둘레길 3코스인 흰구름길 구간에 속하는데 트레킹팀은 둘레길을 따라가지 않고 산 위쪽으로 올라간다. 인적이 드문 오솔길을 따라 구불구불 올라가는 재미가 있다. 그렇게 한참 올라가다보면 갑자기 차도가 나온다. 산길을 열심히 올라왔는데 갑자기 차도가 나와 좀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그렇게 다음 탐방지인 삼성암에 당도하게 된다.

북한산 칼바위능선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삼성암은 나반존자를 위해 지어진 사찰이다. 독성수(獨聖修) 또는 독성존자(獨聖尊者)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나반존자는 소승불교에서 중시되는 인물로 홀로 깨달음을 얻은 분이라고 한다. 우리 사찰에서 나반존자는 독성각에 모셔지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독립된 신앙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같은 대승불교인데도 우리와 중국, 일본과는 차이가 나는 것이다.

나반존자는 중국이나 일본 불교에서는 그 이름 자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로 불경에도 그 이름이 없고, 부처님 제자 중에도 그런 인물이 없다. 그렇다면 왜 유독 우리 불교에서만 나반존자가 등장할까? 이와 관련하여 나반존자가 단군을 모시는 우리 고유 민족신앙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단군신앙을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으로 연결하려고 한 것이다.

물론 이 설에 대한 반론도 있다. 너무 늦게 신앙화 됐다는 것이다. 독성각이 본격적으로 지어진 시기는 조선 후기인데 단군신앙은 4천년이 넘고,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도 1천 7백년 정도 된다. 단군이 나반존자라면 조선 후기가 아닌 훨씬 그 이전 시기에 불교 신앙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시기상으로 너무 늦었다.

어쨌든 나반존자를 모시는 독성 신앙은 우리 불교의 고유한 면이다. 우리 불교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니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삼성암은 이런 독성 기도 도량으로서 매우 중시되는 곳이다. 삼성암 말고도 경북 청도에 있는 운문사의 부속암자 사리암이 나반존자 기도도량으로 유명하다.

 

* 삼성암 독성각: 다른 계절도 좋지만 가을에 가면 더 좋은 곳이다. 조용히 기도를 하기에도 좋다.

● 불교에 녹아든 우리의 고유 신앙

독성각 말고도 칠성각과 산신각은 우리 불교에만 있는 전각이다. 칠성각은 수명의 신인 칠성신을 모신 곳이고, 산신각은 여러분들도 다 아는 산신령을 모신 곳이다. 이들 전각이 독성각, 칠성각, 산신각으로 따로따로 3개의 독립 건물로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세 곳이 하나로 뭉쳐지기도 한다. 그러면 삼성각(三聖閣)이 된다. 그래서 삼성각은 독성, 칠성, 산신 신앙이 함께 공존한다. 복잡하다. 그래서 트레킹팀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독성각, 칠성각, 산신각 이 3개는 우리 불교에만 있는 것이죠. 우리 민족신앙이 불교에 흡수되면서 이런 형태로 나타났어요. 그런데 그 전각을 하나로 뭉쳐놓으면 삼성각이 됩니다.”

“무슨 소리에요?”

사실 해설하는 필자도 머리가 복잡하다. 그래서 매우 단순한 방법으로 설명했다.

 

“독성각, 칠성각, 산신각 이 세 건물을 삼성각 하나로 퉁칩니다!”

나반존자와 독성신앙, 불교에 흡수된 민족신앙 등등... 풀어내야 할 것이 많아 머리가 복잡하다. 하지만 정작 삼성암에 들어서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삼성암이 칼바위 능선 쪽에 있다 보니 주위 풍광을 둘러볼 수 있는데 아래쪽 화계사에서 바라보는 풍광하고는 또 다른 멋이 난다. 독성각을 탐방하는 것도 잊지 말자. 삼성암에 왔으니 당연히 독성각에 가봐야 한다.

생각해보니 화계사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는 항상 가을이었다. 알록달록한 단풍들이 바람을 타고 경내에 흩날릴 때의 모습들이 그려진다. 그런 산사의 풍광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고즈넉하게 만든다. 그런 감흥에 취하다보면 불자가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할 것이다.

* 빨래골: 빨래골 계곡

● 내 마음 속에 종소리가 울린다!

숲 속의 숲이라 불릴 수 있는 북한산 생태 숲 탐방을 끝으로 화계사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된다. 생소한 불교 용어들이 많이 언급되어 머리가 복잡해지는 느낌이다. 자 그럼 다시 제 3의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글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만화방은 한 때 필자의 제 3의 장소였다. 만화방에서 맡는 라면 냄새는 필자를 무아지경에 빠뜨릴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만화방에 가지 않는다. 굳이 만화방 라면 냄새가 아니더라도 무아지경에 빠질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종소리다. 산사의 범종소리.

서양종이 경쾌한 소리를 낸다면 동양종은 장엄한 소리가 난다. 그래서 서양종은 아침에 들으면 좋고 동양종은 석양이 지는 저녁 경에 들으면 인상적이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갈 때 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범종 소리를 들으신 적이 있으실 것이다.

필자의 머릿속에 뭉쳐있던 번뇌들은 범종 소리를 타고 저 멀리로 사라져간다. 내 마음 속에 종소리가 울린다.

개인의 제 3의 공간을 굳이 물리적인 영역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제 3의 공간이 후각의 영역이 될 수도 있고, 청각의 영역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어떻게 쉼표를 찍느냐다. 제 3의 공간에서는 제대로 좀 기분을 전환해보자. 쉼표를 제대로 찍고 나오는 곳이 바로 제 3의 공간이니까.

 

 

 


 

■ 화계사 역사트레킹

1. 코스: 화계사 ▶ 삼성암 ▶ 빨래골 ▶ 북한산생태숲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IN: 경전철 우이신설선 화계역 2번 출구 / OUT: 북한산생태숲

 

 

*화계사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주로 저런 멘트는 좋은 뜻으로 쓰이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발화자의 얼굴 표정을 생각해보라. 가끔가다 저 멘트에 이런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했다!”

 

이 말까지 나왔다면 그 주위 상황이 어떨지 짐짓 상상이 되실 것이다. 대화에 참여한 사람들의 표정은 심각하거나 화가나 있고, 그 주변의 공기는 아주 무거워서 착 가라앉아 있을 것이다. 그런 대화경험이 없으신 분들은 저런 멘트가 나오는 드라마의 해당 장면을 생각해보시라. 심상치 않은 배경음악이 흐르고, 배우들의 눈빛에는 불꽃이 튀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그 대상자가 아니기를 빌어야 하나? 하지만 그 대상자가 나라면? 내 자신이 잘 안 변하고, 고쳐 쓸 수 없을 정도로 꽉 막힌 사람이라고 지인들의 입에 오르내린다면... 정말 난감할 것이다. 필자도 몇 년 전까지 ‘사람은 잘 안 변한다’라는 말에 한 표를 던졌었다. 어쩌면 지인들 입에 오르내리던 그 사람이 본 필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데 몇 수십 년을 사는 인간이 안 변할 수 있냐 이 말이다. 바뀌는 부분이 본질적인 파트냐 가변적인 파트냐 이런 논의는 둘째 치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주위가 변하는데 사람이 그에 따라 안 변할 수가 없잖아!”

 

 

* 선유도: 선유교에서 바라본 모습

● 자신을 아낌없이 다 내주었던, 선유봉

이번편은 한강 역사트레킹이다. 지난 4편에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을 소개를 했는데 4편과는 다른 내용이다. 지역적으로 보자면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은 한강의 동쪽편을 기술했다. 이에 비해 이번 편은 한강의 서쪽편을 기술했다. 4편과 이번 편을 서로 비교해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지 모른다.

처음 한강 역사트레킹을 행했을 때 사람들 반응은 신통치가 않았다.

“한강이야 산책하고, 운동하는 그러는 곳이잖아요. 그렇게 친숙한 곳에 <한강역사트레킹>이라는 거창한 명칭을 붙이는 거 오버 아니에요? 괜히 있어 보이려고 말이에요.”

과연 그럴까? 정말 한강이 그저 그런, 무색무취의 공간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다. 그래서 이번 편은 한강에 대한 독자들의 변화를 이끌려고 한다.

한강 역사트레킹의 첫 번째 도착지는 선유도 공원이다. 원래 선유도는 선유봉이라고 불렸던 해발 40m 정도의 봉우리였다. 강가 바로 옆쪽에 우뚝 선 모습이 아름다워 예로부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고 한다. 중국 사신들도 조선에 오면 꼭 선유봉이 있는 양화 일대를 유람하고 돌아갔다고 할 정도였다.

겸재 정선도 선유도를 사랑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겸재는 양천 현감으로 있었던 1741년에 <양화환도>, <금성평사>, <소악후월> 등 3편의 진경산수화를 그려, 지금의 선유도 일대의 한강 유역을 사실감 넘치는 필치로 담아내었다.

특히 <양화환도>에서는 선유봉과 함께 잠두봉이라고 불렸던 지금의 절두산이 등장하고, 또한 그 잠두봉 아래에는 양화진(지금의 합정동)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선유봉과 잠두봉 사이의 강물길을 느긋하게 나룻배로 건너고 있는 뱃사공의 모습도 화폭에 담겨져 있어 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내 자신도 그 그림 속에 뛰어들어 신선놀음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 정도다.

그렇다. 선유봉(仙遊峰)은 신선이 노닌다는 봉우리였다. 그럼 왜 선유봉은 졸지에 선유도로 내려앉았는가? 선유도는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내주었다. 일제에 의해 여의도에 비행장이 들어설 무렵, 활주로를 닦고 제방을 쌓는다며 선유봉에서 채석을 한 것이다. 그렇게 선유봉은 채석장이 되어버렸고 봉우리는 점점 더 낮아져 갔다.

해방 이후에도 선유봉은 계속해서 채석장으로 이용되었는데 선유봉에서 캔 돌들은 지금의 강변북로 공사 등에 이용됐다고 한다. 그렇게 깎이다보니 선유봉은 납작하게 되었고, 이후 한강이 개발되어 강폭이 넓어졌을 때 영등포쪽과 분리되어 섬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후 1978년에는 서울 서남부권에 식수를 공급하는 정수장이 선유도에 들어서게 됐고, 그 정수장이 지난 2000년에 폐쇄되어 지금의 선유도 공원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선유도는 참 사연이 많은 섬이다. 깎이고, 부서지고, 졸지에 섬이 되어버리고...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선유도가 그렇게 아낌없이 내주었기에 지금이 서울 시민들은 느긋하게 ‘신선놀음’을 할 수 있게 됐다. 선유봉의 변화로 서울 사람들이 좋은 휴식처를 얻게 된 셈이다.

 

* 척화비: 절두산 성지 안에 있다

● 잠두봉이 왜 절두산으로 개명했나?

선유도를 이야기하면서 절두산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안 될 것이다. 절두산은 한강역사트레킹의 루트는 아니었지만 그 중요성 때문에 빠질 수 없는 곳이다.

앞서 말한 <양화환도>에서 절두산, 즉 잠두봉은 선유봉과 짝을 이루고 있다. 뽕나무가 많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잠두봉은 그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고 하여 용두봉이라고도 불렸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꼭 들렀다는 잠두봉이, 겸제 정선이 화폭으로 담아낼 정도로 비경을 자랑하던 잠두봉이 왜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었을까? 그것도 머리가 잘린다는 의미의 절두산(切頭山)으로.

1866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이루어진 병인박해 때문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음을 당한다. 이때 주교인 베르뇌를 포함한 9명의 프랑스인들이 처형을 당했는데 그들은 절두산이 아닌 새남터(현재의 용산구 이촌동)와 충남 보령 갈매못 등지에서 죽었다.

이 병인박해가 원인이 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자국의 선교사가 처형됐다는 소식에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의 로즈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프랑스 함대는 본격적인 공세에 앞서 정찰선을 파견하는데 그 정찰선이 한강 깊숙이까지 올라온 것이다. 양화진을 넘어 서강까지 침범을 하고 돌아간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아주 격분을 했다. 그러면서 ‘사악한 서양 세력의 흔적들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씻어내겠다’며 잠두봉에 새로운 처형지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하여 뽕나무들이 우거졌던 잠두봉은 머리가 떨어져 나간다는 뜻의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다.

약 150년 전, 그렇게 절두산은 수 천 명의 천주교인들의 목이 잘려나간 비극의 땅이었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감시견처럼 서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갔다. 그 흐름은 흥선대원군도 어쩌지를 못했다. 현재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는 절두산 한쪽에 꿔다둔 보릿자루 마냥 껑뚱하게 서있지만 절두산은 그 자체가 우리 천주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성지 중에 성지가 됐다.

서양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반대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가지만 사람들의 피로 그 흔적을 닦아낸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무슨 공포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사람피로 무엇을 닦는다는 말인가?

한편 병인양요에 대해서 프랑스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더불어 그 콧대 높은 프랑스 함대가 왜 다시 조선을 침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시대사적인 유추를 해보았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통치기였다. 그 시절 전 유럽은 신흥강국으로 발돋움한 프로이센에 대해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그 중 프랑스는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나라 중에 하나였다. 아니나다를까 몇 년 후 프랑스와 프로이센간에는 전쟁이 벌어졌고, 그 파장으로 독일 지방은 통일된 국가를 이루게 됐다. 즉 1866년 경, 프랑스는 동방의 조선에 물리력을 집중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 잠두봉: 선유도 방면에서 바라본 모습. 뒤쪽에 북한산이 우뚝 서 있다. 여기서 보이는 북한산은 남쪽이다.

 

● 숨어 있는 진주,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이런 필자의 설명을 뒤로 하고 한강 역사트레킹팀은 여의도 샛강생태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샛강은 여의도 남쪽과 영등포구 신길동 쪽을 흐르는 작은 강으로 한강의 지류다. 그곳에 샛강생태공원이 조성되어있다. 샛강생태공원은 1997년 9월 경에 우리나라 최초로 조성된 생태공원이다.

샛강생태공원이 무슨 대단한 절경을 품고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샛강은 상당히 매력적인 공간이다. 여의도의 고층건물과 습지가 서로의 배경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여의도라는 서울에서도 알아주는 첨단 구역에 샛강생태공원이라는 녹지 공간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샛강생태공원에는 여의도와 1호선 신길역을 연결하는 샛강다리가 세워져있다. 샛강다리는 항해하는 돛단배를 형상화시켰는데 S라인, 곡선미가 두드러진다. 샛강의 푸른 수목들과 그 뒤에 우뚝 솟아 있는 여의도의 빌딩들이 샛강다리와 서로 어우러져 무척 이국적인 분위기를 나타낸다. 그래서인지 이 샛강다리에서는 광고나 영상 촬영 장소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자 이제 마지막 탐방지인 한강철교를 보러가자. 철길을 걷는게 아니라 63빌딩 앞에서 한강철교를 바라보는 것이다.

 

* 샛강생태공원

 

● 끊어진 다리

 

“그게 정말이에요? 저 한강대교가 폭파됐었다고요? 그게 언젠데요?”

수강생 중 한 분이 놀란 듯 큰 목소리로 필자에게 물었다.

“한국전쟁 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끊은 주체가 인민군이 아닌 우리 국군이었다는 점입니다. 인민군의 남하를 막겠다고 다리를 폭파시킨 거죠. 전쟁 때는 일부러 시설물을 파괴해서 적군의 행군 속도를 늦추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강대교 폭파는 문제가 아주 많았어요. 다리 절단으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기 때문이죠.”

생각보다 한강철교와 한강대교에 대한 스토리를 알고 있는 수강생들이 많지 않았다. 한강철교는 1900년에 일제에 의해 건설됐고, 그 옆에 있는 한강대교는 1917년에 건설됐다. 한강인도교라고도 불렸던 한강대교는 1917년에 완공이 됐는데 한강철교가 건설되고 남은 자재들로 건설이 됐다. 이런 기본적인 스토리들을 이야기한 후 한강대교 폭파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전 예고 없이 폭파가 실시돼서 당시 다리를 건너던 피난민들이 많이 죽었어요. 수 백명의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더 황당한 일은 다리가 끊기기 몇 시간 전까지,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힘찬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는 겁니다.”

“그럼 대통령이 서울에 남아 있었는데 다리를 끊었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에 없었어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수뇌부들은 멀리 대전까지 피난을 간 상태였습니다. 미리 녹음했던 음성으로 계속 돌려 됐던 거죠. 그래서 실제로 그 방송 내용을 믿고 피난을 안 간 사람도 있었다고 하네요. 웃기는 거죠. 자신들만 살겠다고 도망을 간 건 그렇다 쳐도 왜 거짓말을 합니까? 서울에 있지도 않으면서 서울에 있다고 구라쳐서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고...”

이 부분까지 언급하면 주변의 공기는 아주 무거워서 착 가라앉아있었다. 전쟁이 일어난 것도 두려운데 피난민들이 떠밀려가던 다리를 국군이 폭파를 시켰다니! 수강생들, 특히 청년 수강생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어떤 수강생은 너무 충격이었는지 필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볼 정도였다. 너무 쳐다보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한강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마다 이런 피드백으로 받았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의 경제발전을 ‘한강의 기적’이라는 표현을 하며 칭송을 했지만 정작 한강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 한강철교: 63빌딩 부근에서 바라본 모습.

● 너무나 많은 변화를 겪었던 한강

 

혹시 산태극과 수태극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가? 산태극과 수태극은 풍수리지에서 길지의 요건으로 꼽히는데 산줄기와 물줄기가 서로 어울려 태극 문양을 나타내는 것을 뜻한다. 청계천이 서울의 내수구였다면, 한강은 서울의 외수구였다. 내사산이 산태극이라면 내수구∙외수구가 수태극이다.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를 한 건 그곳이 길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에도 당연히 산태극과 수태극이 있었다. 물론 한양으로 천도를 한 것이 풍수지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상교통로서의 한강의 가치가 매우 컸기 때문에 천도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산태극이었던 내사산이 많은 변화를 겪은 것처럼 수태극도 큰 변화를 겪게 됐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풍수지리가 희미해지고 대신 부동산 신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을 때 더욱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한강은 많은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한강은 사람들과 멀어지게 됐다.

시간이 흘렀다. 변화도 있었다. 필자는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강이 산책하고, 운동하는 그런 곳이어서 좋다. 한강이 친숙한 곳이어서 좋다. 옛 선인들처럼 풍류를 즐길 수는 없지만 많은 아픔을 겪고 다시 사람들 품으로 돌아온 한강이 참 좋다.

세상이 변한만큼 한강도 변했다. 수도 서울에 있는 강이니 변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무엇이야? 한강과 서울사람들과의 관계다. 그 둘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한강이 있기에 서울이 있을 수 있다.

 

* 샛강생태공원

● 변화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람은 잘 안 변해!”

사람은 정말 안 변할까? 필자의 경우는 확실히 변했다. 여가활동 같은 가변적인 파트뿐만 아니라 생활습성이나 종교 영역 같은 본질적인 영역까지 변했다. 변화의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나이를 먹어서 그럴 수도 있고, 직업상으로 그럴 수도 있다. 아니면 세상의 변화에 순응해서 그럴 수도 있고.

혹자는 저 말 뜻이 사람의 근원적인 부분, 즉 성품 같은 것이라고 지칭한다. 가변적인 파트나 본질적인 파트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부분을 지칭하며, 그것이 안 변한다고 힘주어 이야기를 한다.

이런 의문이 든다. 그렇게 힘주어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에서 정작 자신의 근원적인 부분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솔직히 자기 자신의 성품에 대해서 딱 이렇다 하고,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세상에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안 변한다고, 스스로를 가둬놓을 필요가 없다. 반면 주위변화에 촉각을 세우며 계속해서 변신을 할 필요도 없다.

필자는 변화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그 사이에서 중심을 잘 잡고 싶다. 최소한 트레킹을 하며 사색을 할 때는 중심을 잡았던 거 같다. 또 트레킹에 대한 칭송으로 글을 마친다.

 

 

 

* 산태극수태극: 고산자 김정호 선생이 작성한 수선전도에다 산태극과 수태극을 임의적으로 그려보았다. 서울의 산태극은 C자 형식을 드러내는데 동쪽에 있는 낙산 부근이 지대가 낮아서이기 때문이다. 지대가 낮으니 당연히 청계천의 물길이 낙산이 있는 동대문 쪽으로 빠지는 것이다. 이와 달리 수태극은 c자가 거꾸로된 형상이다. 그래서 산태극과 수태극이 서로 맞물리는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런 산태극수태극을 두고 명당이라 하지 않겠오!^^; 참고로 수선전도에서 '수선'을 한양을 뜻한다. 옛날 한양의 다른 뜻으로 수선이라는 말을 썼다는 것이다.

 


■ 한강 역사트레킹

 

1. 코스: 선유도공원 ▶ 양화대교 ▶ 샛강생태공원 ▶ 한강철교앞(63빌딩)

2. 이동거리: 약 9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In: 지하철 2,9호선 당산역 4번 출구 / Out: 63빌딩 ☞ 63빌딩에서 지하철 5호선 여의나루역을 이용하여 귀가할 수 있음.

 

 

* 한강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한동안 자전거여행을 많이 다녔었다. 고물자전거에 바리바리 짐들을 싣고 페달을 밟았었다. 자전거무게에 짐무게까지 더해지면 거의 40kg 이상 정도 될 듯싶었다. 그때는 여행이 좋아서 떠난 것이 아니었다. 떠밀려서 떠났다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될 거다.

필자는 항상 한 박자가 늦었다. 대학도 한 박자 늦게 들어갔고, 사회생활도 한 박자 늦게 시작했다. 연예는 더 늦게 했다. 물론 지금은 솔로지만... 고물자전거로 국토종단 여행을 행했는데 대학 때 못해본 국토종단을 삼십대 중반 시기에 처음 해본 것이다.

당시 필자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공무원 시험 준비도 한 박자 늦게 시작했다. 안 돌아가는 머리로 두꺼운 수험서를 보는 게 참 막막했었다. 봄에는 시험을 보고 여름에는 짐을 싸서 여행을 떠났다. 그 기간이 무려 4년 정도나 됐다. 장수생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공무원 시험을 그만두는 것도 한 박자 늦었던 것이다.

도피성 여행인지라 여행 자금이 넉넉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법! 그래서 자전거 앞 뒤로 짐을 잔뜩 실어야했다. 없는 살림에 무언가 부족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짐은 늘어났고, 자전거도 육중해졌다.

“미쳤군요!”

여행 중에 만난 어떤 외국인이 웃으면서 했던 말이다. 그 외국인 눈에도 필자가 무척 신기했을 것이다. 폼이 하나도 안 나는 자전거, 일명 철TB에다 짐을 덕지덕지 싣고 장거리여행을 하고 있으니... 그렇게 좌충우돌 여행은 계속됐는데 그러다보니 국토종단 4회, 국토횡단 2회를 행하게 됐다. 한 박자 늦게 국토여행을 시작했지만 횟수는 차곡차곡 더 많이 쌓았던 것이다.

사실 이 때의 자전거여행이 현재의 필자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의 두 발은 페달에서 내려와 트레일(trail:오솔길)을 걷게 됐다. 페달을 굴리면서 굵어진 허벅지로 트레일을 마음껏 걸어 다녔다. 자전거여행 때 행복속도 11km로 주행을 했는데 그 개념을 트레킹을 할 때도 적용했다. 행복속도 3.3km로 걷기.

* 진관사 역사트레킹

 

● 서쪽과 동쪽이 다른 북한산

이번편에는 진관사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진관사 역사트레킹은 지하철 6호선 독바위역에서 집합을 하는데 독바위역은 출구가 하나밖에 없다. 그래서 1번 출구밖에 없다.

진관사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 항상 불광사 앞에 있는 소공원에서 스트레칭을 했었다. 그리고는 항상 이런 멘트도 했었다.

“불광사를 다녀왔는데요, 우리가 서 있는 동네가 불광동이에요. 사찰 이름을 따서 동네 이름이 지어졌어요. 안양사가 있어서 안양시라는 동네 이름이 붙여진 것처럼요.”

진관동도 마찬가지다. 진관사가 있어서 진관동이라는 동네 이름이 생긴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진관사 역사트레킹은 사찰의 이름에서 따 온 동네들을 두 곳이나 지나간다. 스트레칭을 끝내고 길을 나설 때 이런 멘트도 했었다.

“불광동 하시면 뭐가 생각나세요? 불광동 휘발유?”

 

하지 말았어야 했나. 썰렁함에 기름을 부은 것 같았다.

진관사 역사트레킹은 북한산둘레길 8구간 구름정원길과 9구간 마실길을 따라 걷게 된다. 불광사를 빠져나오면 넓게 펼쳐진 도시 텃밭을 만나게 된다. 그 뒤로는 북한산 선림봉이 널찍한 암반면을 드러내며 자리 잡고 있다. 선림봉은 400미터가 되지 않는 봉우리인데 북한산 서쪽에 위치해있다.

북한산은 일명 삼각산이라고 불린다. 백운대(837m), 인수봉(810m), 만경대(800m) 세 개의 봉우리가 삼각뿔의 형태를 지녔다고 하여 그렇게 불린 것이다. 그런데 그 삼각뿔은 동쪽편에 치우쳐있다. 지역으로 따지면 강북구 우이동 방면에 삼각뿔이 펼쳐져있다. 그에 비해 선림봉, 그리고 진관사의 뒤쪽 봉우리인 응봉은 북한산의 서쪽편에 자리 잡고 있다.

같은 북한산이라고 해도 삼각뿔이 있는 동쪽편과 진관사가 있는 서쪽편은 좀 차이가 난다. 동쪽편은 거대한 봉우리들이 장벽처럼 늘어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면, 서쪽편은 비교적 낮은 봉우리들이 올망졸망하게 늘어서 있다. 같은 북한산이라고 해도 서쪽과 동쪽을 비교해가면서 탐방해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것이다.

* 문인석: 원래 두 개가 한 쌍인데 도굴 때문에 하나만 남았다. 문인석 옆에서 필자가 해설을 하고 있다. 얼핏보면 문인석은 돌하르방 같아보인다.

● 이거 돌하르방이에요?

 

진관사 역사트레킹은 북한산의 서쪽편을 집중적으로 탐방한다. 북한산 둘레길을 기반으로 걷기 때문에 난이도가 어렵지도 않다. 숲길을 따라 걷기 좋은 길을 가다보니 참가자들은 흥얼거리며 콧노래를 부른다. 그러다 갑자기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 이거 뭐에요? 돌하르방인가?”

 

홀로 서 있는 문인석(文人石)을 두고 그렇게 물은 것이다. 쌍으로 있어야 할 문인석이 홀로 외떨어져 있으니 돌하르방으로 착각을 하신 거 같다. 그럼 왜 거기 문인석이 있는 것일까?

불광동에서 진관동으로 향하는 북한산둘레길 8구간 구름정원길 곳곳에서는 주인 잃은 석물들이 방치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조선시대 내시와 궁녀들의 무덤들이 산재해 있는데 그들의 무덤에 세워진 석물들이 방치된 것이다. 그들 궁인들은 후손이 없기에 그들의 묘소는 황폐화됐고, 석물들도 버려졌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성저십리라 하여 도성 밖 십리까지는 무덤을 쓰지 못하게 했다. 십리는 약 4km 정도에 달하는데 불광동 일대의 북한산은 도성에서 4km 이상 떨어져있던 것이다. 도성에서 십리 이상 벗어나 있고, 산세도 그리 험하지 않으니 무덤을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 앞으로 의주대로가 펼쳐져 있으니 교통도 편리했다. 인근에 이말산이라고 불리는 야트막한 산이 있는데 이곳에도 수많은 내시와 상궁들의 묘지가 있다. 그래서인지 근처에 있는 북한산둘레길 10구간은 아예 명칭이 내시묘역길이다.

 

* 문인석: 이말산에 있는 문인석. 저 둘이 한 쌍이 아니다. 각기 다른 무덤을 지켰던 문인석을 한 자리에 모아 둔 것이다. 도굴 때문에 친구(?)를 잃은 각기 다른 문인석 둘을 한 곳에 모아두워서 한 쌍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

 

● 똥강아지가 내시를 만들었다?

궁인들은 재산 모으기와 무덤을 꾸미는데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후손이 없으니 다른 방면으로 에너지를 쏟은 것이다. 그래서 무덤가에 세우는 석물들이 화려했다. 여느 사대부들의 무덤가에 세워진 석물들과 비교해 봐도 결코 뒤지지 않았다.

정교하게 새겨진 문인석들을 보고 있자면 어느 왕릉의 문인석이 연상될 정도였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석물들은 후에 도난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인이 없는 석물들을 다른 사람들이 들고 나간 것이다. 그래서 홀로 남은 문인석들을 이 코스에서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문석인이라고도 불리는 문인석은 둘이 한 쌍으로 무덤을 지킨다. 무인석도 마찬가지로 한 쌍으로 이루어져있다.

 

“내시가 됐던 경우가 몇 가지 있습니다. 예전에는 꼬맹이들이 똥을 싸고 똥강아지들에게 엉덩이를 내밀었어요. 꼬맹이는 똥강아지에게 비데를 받았고, 똥강아지는 별미를 즐긴 셈이죠. 그러다 똥강아지가 엉뚱하게도 꼬맹이의 거기를 앙하고 물어버립니다.”

트레킹팀은 주로 여성들이 많지만 필자는 꼭 저 해설을 한다. 똥강아지 흉내를 내면서 혀도 날름거린다. 그런 필자를 한심하게 보는 참가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저 설명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저렇게 액션을 취해야 더 생동감 있게 와 닿지 않겠는가.

저것 말고도 내시가 되는 경우가 있었다. 예전에는 밤에 화로를 많이 썼는데 화로가 넘어져 성불구가 되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한편 자신의 아들을 궁궐로 보내기 위해서 일부러 성불구자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궁인들의 무덤도 키가 큰 소나무들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못생긴 소나무가 무덤을 지킨다고 했나? 그렇다면 이 소나무들은 파수꾼 역할을 제대로 못한 셈이다. 그래도 솔내음은 언제나 좋다.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좋다.

 

* 화의군 묘

● 의리남이었던 화의군과 금성대군

소나무 숲길을 따라 내려오면 진관동이다. 앞에 한옥마을이 펼쳐지는데 유명한 은평 한옥마을이다. 한옥마을을 지나면 마지막 탐방지인 진관사에 다다른다. 진관사를 가기 전에 잠깐 화의군 묘역에 가보자.

세종대왕은 슬하에 자녀들이 참 많았다. 무려 18남 4녀를 두었으니 다산의 상징이라고도 할 만 하다. 하지만 세종대왕보다 더 많은 자식을 둔 왕이 있었다. 바로 세종의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었다. 태종은 슬하에 12남 17녀를 두었으니 조선 왕조에서 가장 많은 자녀를 둔 왕이었다.

다시 화의군 이야기. 화의군은 세종대왕의 아홉 번째 아들이었다. 서자 중에서는 첫 번째였다. 화의군은 학문에 조예가 깊었는데 아버지 세종대왕을 도와 한글창제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화의군은 분명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똑똑히 기억해야 할 건 그가 의리남이었다는 것입니다. 단종과 관련하여 많은 종친들이 수양대군에 편에 서게 되는데 화의군은 끝까지 절의를 지켰습니다. 진정한 의리남이었죠.”

화의군 묘역 앞에서 꼭 저런 해설을 했다. 역사 인물을 해설할 때 가장 좋은 장소는 해당 인물의 묘지 앞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산 자는 해당 묘지를 바라보며 그의 삶을 곱씹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456년, 사육신에 의해 단종 복위운동이 일어났는데 화의군이 이에 연루됐다하여 전라도 금산(현재는 충남 금산)으로 유배된다. 이때 세종대왕의 6남 금성대군도 경상도 순흥에 같은 죄목으로 유배된다. 이미 금성대군은 삭녕(철원과 연천의 옛 지명)에 유배되었다 순흥으로 왔으니 정확히는 이배(移配)가 된 것이다. 순흥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다.

다음해인 1457년,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단종을 복위시키려했으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고 만다. 결국 금성대군은 처형된다. 이때 화의군도 아들과 함께 사사된다. 끝까지 절의를 지키다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수양대군 세력과 적당히 타협을 했으면 순탄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화의군과 금성대군은 스스로 가시밭길을 걸었다. 진정한 의리남이 아닌가!

화의군 묘역과 멀지 않은 곳인, 구파발역 부근에 금성당이라는 금성대군을 모신 신당이 있다. 서울에서 흔하게 볼 수 없는 신당인데 현재는 샤머니즘박물관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그러고보면 은평구 진관동 일대는 세종대왕과도 연관이 깊은 곳이다.

* 진관사: 진관사에 있는 전통찻집. 독특하게 초가를 올렸다.

 

● 기막힌 스토리가 숨어 있는 진관사

 

수도권 최대의 한옥마을인 은평 한옥마을을 지나 마지막 탐방지인 진관사로 향한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4대 명찰이 있다. 동쪽에 불암사, 남쪽에 삼막사, 북쪽에 승가사. 그럼 서쪽은? 진관사다. 천년 고찰인 진관사(津寬寺)는 고려 현종 때인 1010년에 만들어졌다. 고려 제8대 왕인 현종이 직접 창건한 이 절은 진관대사를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태조 왕건의 손자였던 현종, 즉 왕순은 어릴 적에는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왕건의 손녀였던 천추태후로부터 어릴 적부터 박해를 받은 왕순은 한때 강제로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천추태후가 그의 이모가 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당시 얽히고설킨 왕실혼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같은 왕건의 혈통이자 이모뻘의 천추태후로부터 살해위협까지 받게 된 건 그가 왕위계승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천추태후는 애인인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왕으로 등극시킬 셈이었다.

그런 천추태후의 마수가 진관사에까지 뻗치게 됐다. 원래 진관사 자리에는 신혈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진관이라는 승려가 홀로 수도를 하고 있었다. 승려가 홀로 거처하는 곳이라 천추태후 입장에서는 무언가 거사를 치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랬다. 천추태후는 신혈사에 자객을 보내 왕순을 죽일 셈이었다. 천추태후의 의도대로 왕순이 자객에 손에 비명횡사를 했다면, 현종도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진관사도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천추태후의 의도를 눈치 챈 진관은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굴을 파서 왕손을 숨기는 기지를 발휘한다. 수미단은 불상을 올려놓는 단을 말한다. 수미산은 불교에서 말하는 상상의 산을 말하는 것이고.

그렇게 진관에 의해 목숨을 건진 왕순은 3년 뒤, 개경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려 8대 왕 현종이다. 현종은 1010년, 신혈사 자리에 대가람을 세우고 진관 대사의 이름을 본 따서 사찰 이름을 지으니 그 사찰이 바로 지금의 진관사다.

조선시대 진관사는 사가독서제로 애용된 곳이다. 사가독서제란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정진하게 만든 제도로 세종시대에 처음 도입되었다. 풍광이 수려하고 계곡이 시원한 진관사라면 학문을 닦기에 제격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사가독서제로 진관사를 다년간 이들은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이었다.

진관사는 한국전쟁동안 많은 전각들이 소실된다. 그래서 지금의 진관사는 천년고찰의 웅장함이 묻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진관사는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모으고 있는 사찰이다. 진관사 숲길과 계곡을 걷다보면 몸도 마음도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 느낌들이 좋아서 발걸음들이 진관사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 진관사: 북한산과 어우러진 진관사.

 

● 한 박자 늦어도 좋은 역사트레킹

- 느리게 걷기

- 나를 돌아보는 시간

이런 표현들은 트레킹과 잘 어울린다. 굳이 빨리 걸을 필요가 없지 않는가. 천천히 유유자적하게 걷다보면 몸도 튼튼해지고, 머리도 맑아진다.

그런데 역사트레킹은 시간이 더 걸린다. 해설하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더 소요될 수밖에 없다. 해설하다가 말문이 막히면 아재 개그라도 해야 된다. 필자 혼자서 트레킹을 하면 행복속도 3.3km를 유지하지만 역사트레킹을 리딩할 때는 시간당 약 2.2km로 이동한다. 일반적으로 성인은 1시간에 4km 정도를 이동할 수 있기에 시간당 2.2km는 좀 많이 느린 편이다. 확 치고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역사트레킹 팀을 거북이 팀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글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필자는 이제껏 계속해서 한 박자 느린 삶을 살아왔다. 일부러 그렇게 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이런 걸 팔자라고 해야 하나? 한 박자 느린 삶을 살았으니 역사트레킹과 궁합이 잘 맞는 것도 팔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필자의 삶은 한 박자 늦을 거 같다. 사람이 쉽게 변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한 박자 늦는 만큼 그 안을 차곡차곡 채우고 싶다. 느릿느릿 걸어도 소걸음인 것처럼...

■ 진관사 역사트레킹

1. 코스: 불광사 ▶ 내시묘 ▶ 화의군묘 ▶ 은평한옥마을 ▶ 진관사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In: 지하철 6호선 독바위역 1번 출구 / Out: 진관사 ☞ 진관사를 탐방한 후 은평한옥마을에서 버스편을 이용하여 3호선 구파발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 진관사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난 남들과 달라!”

 

이런 광고에서 나올법한 워딩을 외치면 나답게 살기가 가능할까? 필자는 1970년대에 태어나 199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X세대라는 칭호를 받으며 청년기를 보냈다. 군사정권이 물러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개혁적인 분위기가 고조될 때였다. 1990년대 즈음에 ‘남들과 달라’를 강조한 광고들이 참 많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화장품이나 패션 제품들이 앞장을 섰다. 필자도 X세대 타령을 하면서 ‘난 남들과 달라’를 외치고 다녔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나답게 살기는 남들과 헤어스타일이 다르다고, 남들과 다른 패션스타일을 입는다고 되는게 아닐 것이다. 외모로 그것이 가능하다면 모델들은 모두 다 나답게 살기의 달인일 테니까.

 

나답게 살기가 어려운 것은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명료하지 않기 때문이다. 눈에 확 잡히는 것이면 그에 맞게 계획을 세울 수도 있고, 무 자르듯이 확 결단을 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답게 사는 것은 그런 가시적인 접근으로 도달될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무소유가 가시적인 면이 있다. 인연이 다 된 책들이 사라진, 책장의 여백들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나답게 살기가 명료하지 않다면 세상의 이치로 끌어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6하 원칙으로 접근해보는 것이다. 필자는 전편에서 ‘역사트레킹을 할 때만큼은 나답게 산다’라고 기술했다. 그런데 디테일하게는 6하 원칙 중 공간(where)로 접근을 했었다.

 

 

 

 

 

*관악산: 남산타워에서 바라본 관악산. 정상부를 향해 불꽃이 타올라가는 모습이다. 그래서인지 관악산은 화기가 많은 산이라고 불렸다.

 

 

 

 

 

 

● 누구나 자신만의 베이스캠프가 있기 마련이다

 

아웃도어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자신만의 베이스캠프가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필자도 그런 베이스캠프가 하나 있다. 그곳에서 체력을 키웠고, 정신을 단련했고, 스스로의 위치를 점검했다. 필자의 언어 사용이 조금 의아하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베이스캠프면 ‘전진기지로써 물자를 저장해 두는 고정적인 시설’이 아닌가? 그곳을 근거 삼아 고지 정복을 하는 것이고. 그런데 왜 정신을 단련하고, 자신의 위치를 점검하는가?

 

오해 없기 바란다. 여기서 필자는 ‘베이스캠프’라는 말을 사전적 의미로 쓰지 않았다. ‘베이스캠프’를 굳이 물리적 공간으로 한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심리적인 공간으로서의 베이스캠프도 존재한다는 말이다. 뭐 비빌 언덕이라고도 칭할 수도 있겠다.

서론이 길어졌다. 그럼 필자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일까? 제목에 나와 있다시피 관악산이다.

 

 

 

● 서울의 남주작 관악산

 

관악산(冠岳山)은 한자에도 보이듯 ‘악(岳)’자가 붙은 산이다. 예로부터 경기 5악(五岳)으로 불릴 정도로 산세를 과시했었다. 경기 5악은 개성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 그리고 관악산을 말한다. 등산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관악산을 제외하고 언급된 4개의 산들이 어떤 산들인지 잘 아실 것이다. 한마디로 쟁쟁한 산들이다. 물론 개성의 송악산은 휴전선 이북에 있으니 지금은 마음대로 갈 수 없다. 어쨌든 옛 선인들이 바라보는 관악산이 어땠는지 알아볼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이 건국된 후 관악산은 한양의 외사산(外四山) 중 하나가 되었다. 한양의 외곽을 감싸는 네 개의 산을 말하는 외사산은 다음과 같다. 북쪽의 북한산, 동쪽의 아차산, 남쪽의 관악산, 서쪽의 덕양산이 바로 그것이다. 덕양산은 지금의 행주산성을 말한다. 그렇게 외사산에서 남쪽에 위치한 관악산은 한양의 남주작이 되었다. 북현무는 북한산이고.

 

외사산이 나왔으니 내사산(內四山)도 이야기를 해보자. 전편에서 계속 언급을 했지만 복습한다는 생각으로 다시 기술해본다. 내사산은 서울 안쪽을 감싸고 있는 4개의 산을 말한다. 북쪽의 북악산, 남쪽의 남산, 서쪽의 인왕산, 동쪽의 낙산이 바로 그것이다. 낙타산이라고도 불렸던 낙산은 유명한 이화동 벽화마을을 품고 있는 산이다. 이 내사산을 연결하여 18.6km 한양도성이 만들어졌다.

 

관악산이 서울의 남주작이고, 북한산이 북현무라면 좌청룡 우백호는 어느 산인가? 서울의 좌청룡은 낙산이고, 우백호는 인왕산이다. 이것도 전편에서 다 언급을 했었다. 복습한다는 마음으로 기술을 해봤다.

 

 

 

 

 

*관악산: 서울대에서 바라본 정상부.

 

 

 

 

 

 

● 관악산의 화기를 어떻게 막을꼬?

 

다시 관악산 이야기로. 당연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서울을 대표하는 산은 북한산이다. 그래서 관악산은 서울의 ‘진산’이 될 수는 없었다. 높이만 봐도 그렇다. 북한산이 832미터이고, 관악산이 628미터이다. 하지만 한강 이남 지역만 놓고 보자면 관악산은 단연 최고의 산일 것이다.

 

관악산 일대의 가치는 이미 고대시대에서부터 형성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한강 하류지역의 주도권을 잡기하기 위해 이 일대에서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고려시대에는 남경(지금의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남쪽산으로 그 전략적 가치가 중시되었다.

 

이런 풍부한 역사성 때문인지 관악산은 스토리텔링의 보고와도 같은 곳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조선의 건국과 관련이 있다. 조선은 철저하게 풍수지리학에 의거하여 건국된 나라였다. 그럼 조선의 건국자들은 관악산을 어떻게 보았을까? 필자처럼 아웃도어의 베이스캠프처럼 생각했을까?

 

조선 건국에 나선 이들은 관악산을 화기(火氣)가 강한 산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중간에 한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화가 도성 안으로 미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었다. 2008년도에 복원된 숭례문(崇禮門)을 보자. 현판이 세로로 쓰여 있다. 숭(崇)을 불꽃이 타오르듯이 길게 늘여 썼다. 례(禮)는 남쪽을 뜻하는데 오행으로는 ‘불’을 의미한다. 정리하자면 맞불을 놓아 관악산의 화기를 억제시킨다는 의미다.

 

지금은 광화문 앞에 놓인 해태상도 관악산의 화기와 연관이 있다고 한다. 원래 해태상은 지금의 세종문화회관과 정부종합청사 사이에 있던 사헌부 앞에 놓여 있었다. 해태는 사악한 이들을 잡아먹는 상상의 동물이었는데 물을 상징하기도 했다. 그래서 해태상은 관원들의 심기일전을 돕기도 했고 화기를 막기도 했던 것이다. 아이들의 놀이기구가 되기도 했다. 옛 구한말 때 사진을 보면 해태상 위로 아이들이 올라가서 재밌게 놀고 있었다.

 

 

 

 

* 낙성대 3층석탑: 낙성대가 있는 관악산이 옛 백제땅에 속해서 그런지, 백제시대 탑의 영향을 받았다. 사진에서 보이듯 본 탑은 상륜부가 훼손되어 있다.

 

 

 

 

 

● 진짜 낙성대는 어디?

 

관악산 역사트레킹은 낙성대에서부터 시작된다. 낙성대(落星垈)는 한자를 그대로 풀어보면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 집’이란 뜻이다. 이곳은 고려시대 때 거란을 크게 무찔렀던 강감찬 장군이 태어나신 곳이다. 현재 생가 터는 주택가 한복판에 있어서 그런지 한눈에 그 위치가 파악이 되지는 않는다.

 

그 생가 터에서 약 300미터 정도 올라가면 거기에 안국사(安國祠)라는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 나온다. 장군이 거란을 물리치고 받은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라는 호를 따서 네이밍을 했다.

 

“이 안국사가 1974년에 만들어졌는데요.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가 낙성대라고 생각해요. 아까 주택가에 숨어 있는 곳이 강감찬 장군이 진짜 태어난 장소이고, 이곳은 이후에 강감찬 장군의 사당이 들어선 곳이죠.”

“예?”

“그런데 이 안국사가 규모가 있고, 더군다나 이 안국사 일대를 낙성대공원이라고 명명한 거에요. 그러니 착각을 하는 것이죠.”

 

낙성대를 올 때마다 반복적으로 이런 설명을 한다. 하지만 필자가 표현을 못해서 그런지 설명을 들으신 분들 중에도 계속 착각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하긴 어리둥절할 만하다. 필자도 똑같이 그랬으니까.

 

 

 

 

 

* 안국사: 강감찬 장군을 모신 사당

 

 

 

 

 

 

● 문관 출신 최전방 사령관, 강감찬

 

강감찬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거 아세요. 강감찬 장군이 사실은 문신 출신이라는 거요.”

“정말요?”

“더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장군께서 나이 70에 최전방 사령관으로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귀주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둬서 거란 세력을 물리쳤고요.”

“아, 그렇군요!”

 

필자의 설명에 하나같이 참석자들은 놀랬다. <삼국지>의 황충 장군도 아니고, 고희의 나이에 최전방에서 칼을 휘둘렀다는 점이 놀라웠을 것이다. 더구나 상대편은 당시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거란족이 아닌가?

 

이야기를 좀 더 확장해 보자.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두고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고 칭하며 건국 초부터 강경 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거란이 선물로 준 낙타를 굶겨 죽인, 일명 만부교 사건도 발생하게 됐던 것이다.

 

거란은 요나라를 세우고 동북아에서 위세를 떨쳤다. 당시 요나라는 만리장성 부근에서 송나라와 대치를 하게 됐는데 한반도에 있는 고려에 대해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고려가 송나라와 손을 잡고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던 것이다. 강감찬 장군은 3차 침공 때 상원수가 되어 10만 거란군을 격퇴시켰고 그로 인해 고려는 전란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안국사 뜰 안에는 그런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삼층석탑이 서있다. 상륜부라고 불리는 맨 꼭대기는 무너져 내렸지만 나머지는 천 년 가까운 세월을 잘 버텨내고 있다. 이 탑은 원래 장군의 생가에 있던 것을 안국사가 만들어지면서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필자는 계속 ‘강감찬 장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강감찬은 문신 출신이었다. 한국사 시간을 곱씹어 보시라. 과거에서 무관을 뽑았던 건 고려 후기 이후였다. 고려 초기 사람이었던 강감찬은 당연히 문관 출신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강감찬은 문·무에 모두 능한 인재였던 것이다. 이를 두고 출장입상(出將入相)이라고 하는데 ‘나가서는 장수(將帥)요, 들어와서는 재상(宰相)이라’는 뜻이다.

 

도교에서는 문(文)을 관장하는 별을 문곡성(文曲星)이라고 칭한다. 문(文)이 뛰어난 사람을 두고도 문곡성이라는 말한다. 그런데 강감찬도 문곡성이라고 불렸다. 최전방 사령관이자 문곡성이었던 강감찬! 그렇게 많은 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인헌공 강감찬은 84세에 천수를 누리다 영면하셨다.

 

 

* 강감찬 장군 기마상: 장군의 발이 너무 숏다리다. 말은 잘 표현했는데...

 

 

 

 

 

● 무학대사가 세운 자운암

 

강감찬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해 좀 해주셨으면 한다. ‘내 아웃도어의 베이스캠프’인 관악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 관악산이 낳은 한국 최고의 위인 중에 한 분인 강감찬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이제 트레킹팀은 서울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가다 서울대 캠퍼스 안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렇게 트레킹팀은 자운암을 향해간다.

 

서울대에 대해서는 굳이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1975년 서울대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한 후 형성된 고시촌은 잠깐 언급해보자. 조선시대 관악산은 벼슬산으로 불렸다.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온 이들은 산세가 수려하다는 이유로 관악산에 있는 절에 기거를 하며 과거 준비에 몰두를 했다. 조선시대에도 관악산은 ‘고시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고시촌에서 붙어나간 이들이 많았기에 관악산이 자연스럽게 벼슬산이라는 애칭을 얻은 것이다.

 

다시 자운암 이야기. 자운암은 무학대사가 1396년에 창건했다. 600년이 넘는 고찰이지만 경내가 큰 사찰은 아니다. 이 절은 이름이 한 번 바뀐다. 창건 당시의 이름은 자운암(紫雲庵)이었지만 1734년(영조13)에 대효선사가 자운암(慈雲庵)으로 이름을 바꾼다. ‘紫’에서 ‘慈’로 한자명이 바뀐 것이라 한글 발음은 동일하다.

 

또 본전도 바뀐다. 자운암의 본전은 원래 관음보살을 모신 관음전이었다. 그러다 1976년 보륜 스님이 석가모니 불상을 세우고, 이름도 대웅전으로 고치게 된다. 아시다시피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곳을 말한다. 이곳에는 성종 임금이 자신의 어머니 소혜왕후를 위해 만들어 봉안한 위패가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또한 경내 뒤쪽에는 거대한 마애불이 있다.

 

그런데 2019년 가을경에 방문했을 때 자운암의 건물들은 철거가 되어있었다. 대웅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들이 다 망실되었다. 소송에 걸려서 그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예상하지 못한 광경을 지켜보니 좀 당황스러웠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원만히 문제가 해결이 되었으면 좋겠다.

 

 

 

 

* 자운암: 무학대사가 세운 자운암

 

 

 

 

 

● 당신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입니까?

 

트레킹팀은 이제 자하동 계곡을 걷게 된다. 이곳은 북자하동 계곡인데 사람들에게는 ‘서울대 옆 계곡’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는 곳이다. 자하동이란 명칭은 산 건너편 경기도 과천 쪽에도 존재한다. 그 곳은 남자하동 계곡이다.

 

조선 후기 시절에 시·서·화 삼절에 능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분이 바로 자하 신위 선생이다. 신위 선생은 관악산에 은거를 했는데 남·북 자하동 모두 신위 선생의 호인 ‘자하’를 따서 명명한 것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신위 선생을 존경을 했다. 그래서인지 과천 남자하동 계곡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세긴 것으로 추정되는 ‘紫霞(자하)’라는 석각글씨가 있다.

 

북자하동 계곡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계곡 폭이 비교적 좀 넓고, 유량도 풍부해서 그런 것이다. 필자도 어렸을 때 이곳에서 물놀이를 많이 했었다. 그러고 보니 관악산은 필자의 베이스캠프이자 놀이동산이었던 셈이다.

 

이제까지 관악산 역사트레킹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필자의 베이스캠프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설명식의 좀 딱딱한 글이 된 거 같다. 좀 어깨에 힘이 들어간 거 같다. 어쨌든 필자의 베이스캠프를 독자들에게 알렸으니 그것으로 만족한다.

 

 

* 북자하동 계곡: 서울대 계곡이라고 더 많이 불리는 계곡.

 

 

 

 

 

 

● 나답게 살기가 어렵다? 그럼 좀 단순화시키자

 

- 글쓰기의 정답이 없듯이, 나답게 살기에 정답도 없어요!

 

이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만병통치약처럼 ‘정답이 없다’라는 말이 너무 난무한다고 여겨진다.

나답게 살기가 명료하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일 것이다. 하긴 그것이 쉽다면 누구나 다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겠지. 어렵다면 좀 단순화시키자. 6하 원칙 같은 것에 대입하여 자신만의 것을 생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where에 맞춰 베이스캠프를 도출했듯이 누군가는 when에 맞춰 명상의 시간 같은 것을 도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만의 무언가를 찾아가다보면 나답게 사는 삶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 관악산 역사트레킹

 

1. 코스: 강감찬생가 ▶ 낙성대공원 ▶ 자운암 ▶ 관악산계곡(북자하동) ▶ 관악산호수공원 ▶ 관악산입구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In: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3번 출구 / Out: 관악산입구

 

 

 

 

 

* 관악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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