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도 이런 대형석불이? 외국 안 가도 되겠네 1편

고려 전기시대 대형석불 테마 탐방... 가을 여행지로 여기 어떠세요?

 

14.09.30 15:51    최종 업데이트 14.09.30 15:51

 

 

 

 

 

천고마비의 계절인 가을. 산이나 들, 어디로든 떠나기 좋은 계절이다. 이제 곧 단풍철도 다가오지 않는가!

기왕 떠나는 여행, 테마를 가지고 떠나면 어떨까? 발 가는대로 떠나는 좌충우돌식의 여행도 좋지만 주제를 잡고 여행을 떠나보는 것이다. 산성(山城)기행, 폐사지 답사기행, 천주교 성지순례 등등... 이런 것들이 테마 여행이다.

이렇게 테마를 중심에 놓고 여행을 하다 보면 학습과 여행이 유기적으로 작동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산성 기행인 경우 '행주산성 → 서울성곽 → 공산성' 등으로 여행 일정을 계획 할 수 있다. 각 산성들을 탐방, 관찰한 후 서로 공통점과 차이점을 등을 살펴보는 것이다.

필자가 제안하는 테마 여행은 거대석불 탐방이다. 고려 전기시대에 집중적으로 제작된 거대한 석불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한때 필자는 거대한 석불들을 찾아다니며 '복'을 기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복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최소한 거대한 석불 앞에 섰을 때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바미안 석불에는 못 미치지만 그런 거대한 석불이 내 눈 앞에 떡하니 서 있으니 얼마나 든든하던지! 그래서 복스러운 함박웃음을 지었던 것이다.

한편 바미안 석불은 탈레반이 파괴해 지금은 흉물처럼 서 있지 않던가! 하지만 우리의 석불들은 천년의 세월을 꿋꿋이 견뎌내며 거리의 수호신처럼 서 있었다. 듬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돌미륵을 찾아 여행을 떠났었다.  

 

 

 


  


 
▲ 용미리마애이불입상 쌍미륵석불이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쌍둥 석불 형식이다. 왼쪽에 원립불을 쓰고 있는 상은 손에 연꽃을 들었는데 남성을 뜻한다. 오른쪽 방립불을 쓰고, 손을 합장한 상은 여성을 상징한다. 원립불은 말그대로 둥근 모자 형태이고, 방립모는 그에 비해 각이 진 모자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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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 쌍으로 들어오려나? 파주 용미리 쌍둥이 석불

 

 

먼저 소개할 석불은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용미리 쌍둥이 석불이다. 용미리, 용암사에 위치한 이 쌍둥이 석불의 공식명칭(문화재청)은 용미리마애이불입상이다. 이 석불은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어 대중교통으로도 편리하게 닿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서울에서 용미리로 가기 위해서는 혜음령이라는 고개를 넘어야 한다. 혜음령은 조선시대 한양에서 개성으로 넘어갈 때 거쳐야 했던 중요한 고개다. 그래서 혜음령 근처에는 벽제관이라는 역관(驛館)이 있었다. 그렇다. 용미리 일대는 한양에서 개성을 거쳐 평양, 의주로 향했던 의주대로가 있던 곳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곳을 내왕했고, 쌍미륵에게 복을 기원했던 것이다.

장지산 기슭에 자리 잡은 용미리 쌍미륵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제작되었다. 자연석을 몸통으로 삼아 조각을 새기고, 얼굴 부위는 따로 제작해 올렸다. 쌍미륵도 고려 전기시대의 다른 석불들처럼 인체 비례가 일치하지 않는다.

용미리 석불입상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남여 쌍미륵 형상이라 '다산(多産)'과 관련된 기원들을 많이 하러 온다고 한다. 즉,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부부들이 많이 와서 기원을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쌍미륵과 관련된 설화도 '잉태'와 관련이 있다.

그 전설로 들어가 보자. 고려 선종 때였다. 선종은 자식이 없어 원산궁주를 후궁으로 맞이했다. 하지만 원산궁주도 쉽게 잉태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날 궁주가 이상한 꿈을 꾼다.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 사람들이다.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

 


이런 내용의 꿈이었다. 꿈 이야기를 전해들은 선종은 장지산으로 사람을 보냈다. 그런데 궁주의 꿈처럼, 큰 바위 둘이 나란히 서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왕은 그 바위에다 미륵불을 조각하고, 그 옆쪽에 사찰을 세워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그런 정성이 전해졌는지 그해에 왕자인 한산후가 탄생했다고 한다.

고려 선종은 13대왕으로 1083년부터 1094년까지 왕위에 올랐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용미리석불입상도 고려 전기 때 제작된 것임이 유력해진다.

쌍미륵 앞에서 복을 기원하면 복이 두 배로 들어올까? 확실한 건 모르겠지만 쌍미륵 앞에 서면 함박웃음이 두 배로 지어질 것이다. 그렇게 웃다보면 복은 자연스럽게 들어올지 모른다. 



 
▲ 은진미륵 고려전기시대 제작된 대형 석불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관촉사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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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대 석불 '관촉사 은진미륵'

 

 

이제 거대 석불을 찾아 충남 지역으로 가보자. 다음으로 탐방할 곳은 충남 논산에 있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관촉사 석불은 관촉사 경내에 자리 잡고 있다. 관촉사는 반야산이라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위치해 있는데 그곳에 올라서면 가까이는 계백장군 혼이 살아있는 황산벌이 보이고, 멀리는 계룡산과 대둔산이 보인다.


그렇게 전망이 좋은 곳에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굽어보고 있던 것이다. 한편 관촉사 석불은 은진미륵이라고도 불린다. 원래 그 지역의 명칭이 '은진'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보물 제218호인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은 높이가 18m가 넘는 우리나라 최대의 석불이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제작하는 데 무려 36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최대이고 긴 세월 동안 제작된 터라, 관촉사 석불에도 흥미로운 설화가 스며 있었다. 어느 날 반야산에 큰 바위가 불쑥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에 고려 조정은 그 바위로 불상을 만들 것을 결정하고 당대 최고 고승이던 혜명 스님에게 그 일을 맡겼다. 고려 광종 19년(968)에 시작된 석불 건립은 목종 9년(1006)에 가서야 완성됐다. 석불 제작은 다리, 몸통, 머리 세 부분으로 나뉘어서 제작이 됐는데 각 부분이 다 완성된 후 큰 문제가 발생했다. 각 부분들이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터라 인력으로는 도저히 석불을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혜명 스님의 고민은 깊어 갔다. 그러던 차에 스님은 아이들이 진흙 불상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어 석불을 세웠다고 한다. 아이들도 다리, 몸통, 머리를 따로따로 제작하여 불상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그것을 독특한 방법으로 합체를 했던 것이다. 먼저 다리를 세우고 그 주위를 모래로 채우고는 물을 뿌려 주위를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 뒤 비탈을 만들어 몸통을 굴려서 올렸다.

그렇게 모래비탈을 이용해서 진흙 석불을 장난감 로봇 만들 듯 3단으로 합체했다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모방했고, 결국 18m가 넘는 엄청난 규모의 석불이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이렇듯 은진 미륵불은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명확한 석불이다.

관촉사 석불도 고려 전기시대 작품답게(?) 인체 비례가 맞지 않는다. 대신 신체 부위를 시원시원하게 표현하였다. 머리, 손, 발 등이 아주 굵직하게 표현되었다. 인체비율을 중시했던 석불들이 정교한 디테일을 강조했다면, 은진미륵은 선이 굵은 디테일로 표현됐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손가락, 발가락까지 시원시원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그런지, 관촉사 석불을 보고 있노라면 친근감이 밀려온다. 거대 석상에 압도된다기 보다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관촉사 일대도 예전에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었다. 옛 삼남대로가 이곳을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렇게 은진미륵은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서 있었다. 액운을 막아주고 마을의 안녕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 관촉사 은진미륵

 

 

 

* 관촉사 은진미륵

 

 

 

 

 

* 대조사 석불

 

 

 

* 대조사 석불

 

 

 

 

 

 

* 안동 이천동 석불

 

 

 

* 안동 이천동 석불

 

 

 

 

 

 

 

* 파주 용미리 쌍미륵

 

* 파주 용미리 쌍미륵

 

 

 

 

 

 

 

 

 

 

 

 

역사를 걷는 길, 공주역사둘레길 ___2편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공주역사둘레길', 제가 만들었습니다

 

 

 

 

50대 아줌마로 빙의(?)하다

"우금티에서 공산성까지 숲 길 따라 가는 길이 있나요? 저쪽 아래 도로길은 매연 때문에 별로라서요."

그렇게 계속 두드리니 틀이 잡히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밑그림이 그려졌다. 그때부터는 계속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녔다. 갔던 길을 계속가고, 오르락내리락 하고, 갑자기 장대같은 비를 만나고, 뱀하고 인사하고 등등.

강원도 영월, 경기도 안양 등 이미 10개 정도의 길을 개설한 경험이 있지만 그때보다 이번 '공산성-우금티'를 잇는 개척길이 훨씬 더 힘들었다. 100km 이상의 거리를 계속 헤집고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10km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100km 이상의 거리를 직접 조사하고 탐방해야 한다. 그래야 좋은 도보 여행길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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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학생태공원 가는 길 생태공원은 공주시의 수원지 일대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그 주변은 개발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원시림도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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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 개척은 좀 더 집중을 하고, 좀 더 잘해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갑오농민전쟁 120주기를 맞아 나름대로 일익을 담당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50대 아줌마로 빙의(?)까지 했을까. 도보여행길의 난이도를 통상 50대 여성에게 맞추는데 적절한 난이도를 유지하려고 하니, 필자가 50대 아줌마가 되어 버린 것이다. 갑자기 10살 이상 더 먹게 된 것이다. 성별도 바뀌고.

그렇게 되니 아쉽게도 봉수대터가 코스에서 빠지게 됐다. 우금티 동쪽편 봉우리에 위치한 봉수대터는 동학군이 점령하려다 실패한, 역사적 상징성이 강한 곳이기에 코스에 넣고 싶었다. 또 그곳에 올라서면 공주시가지를 내려볼 수 있기에 동학군의 행군로를 설명하기도 수월하다.

하지만 그 곳을 진입하려면 가파른 길을 올라야 하기에 누락시켰던 것이다. 빙의를 해서 그런지 가파른 길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입에서 '억!' 소리가 나왔다. 그것보다 더 가파른 산들을 올랐을 때도 그냥 힘들이지 않고 올랐었는데, 50대 아줌마로 변신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런 경사도에 민감하게 반응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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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동 성당 공주 구도심 국고개에 있는 중동 성당. 1937년에 세워진 중동성당은 가톨릭신자나 근대건축물에 관심있는 여행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것이다. 한편 중동성당은 내포지역에 자리잡은 천주교 성지들과 연계되는 중요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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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공주역사둘레길'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공산성과 우금티, 더불어 충청지역 동학군들이 몰살된 송장배미까지 연결하는 '공주역사둘레길'이란 도보 여행길이 생성됐다. 공주의 구도심에 산재한 역사유적들을 원형으로 둘러가기 때문에 공주역사둘레길이란 명칭을 붙인 것이다. 

공주역사둘레길은 앞서서 필자가 언급한 5가지 원칙을 기반을 두어 개척됐다. 특히 역사, 풍광, 생태 세 박자 맞아 떨어지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역사만 있고 풍광이나 생태적인 면이 떨어지는 트레킹 코스는 도보 여행객들에게 외면을 받기 때문이다.

'공주역사둘레길'은 금학생태공원이란 곳을 통과하는데 그 곳 배후면은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은 원시림이 관찰될 정도였다. 그래서 고라니, 삵, 뱀 같은 야생동물들도 꽤 많이 만났다. 트레킹 시에 이런 점들은 주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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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장배미 충청도 농민군들이 피를 흘렸던 곳이다. 그 농민군들은 전봉준 부대와는 다른 부대였다고 한다. 이 곳은 현재 연못 형태로 되어 있다. 비석에 무슨 그을음 같은게 번졌는지 무척 지저분하다. 그래서 그런가? 송장배미를 지날 때마다 마음이 썩 좋지 않았다. 버려졌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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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유적지들의 성격에 맞게 구획 설정도 해보았다. '금강교-공산성'은 백제구역, '중동성당-충남역사박물관-영명학교'는 근대구역, '금학생태공원-삼거리'는 생태구역, '우금티-송장배미'는 동학농민혁명구역 등으로 세분화 한 것이다. 각 구역에 따라 다양한 스토리텔링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이 부족한 도보여행객들이나 동학농민운동에 유달리 관심 있는 분들은 생태구역과 동학농민혁명 구역만 묶어서 트레킹을 할 수도 있다.

공주역사둘레길은 아직 지도상으로만 존재하는 길이다. 표식작업 등, 앞으로 시급히 보완을 해야 할 것들이 넘쳐나는 트레킹 코스다. 하지만 일단 제 궤도에 오르면 공주 여행을 더 풍부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렇게 1박 2일 여행 일정을 짤 수 있다. 첫째 날은 공주역사둘레길을 걷고, 둘째 날은 공주 읍내에서 버스로 30분 정도 떨어진 마곡사에 가는 것이다. 마곡사에 가서 김구 선생의 자취를 따라 산사트레킹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 알찬 1박 2일, 공주 역사 기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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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역사둘레길의 지도 공주 구도심의 역사유적들을 저런 식으로 둘러본다. 네이버지도를 편집해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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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붙임: 6월 하순경에 답사와 조사를 실시했고, 이후 서울로 상경하여 후속 작업을 실시했습니다. 기사 본문에 언급되어 있듯이 현재 공주역사둘레길은 지도상으로만 존재하는 길입니다. 이 도보여행길이 정식으로 개통되기 위해서는 표식작업 등의 사후 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올해는 우금티 전투 120주기입니다. 필자의 작은 바람은 우금티 추모제가 개최되기 전에 그러한 작업들이 완수되어,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주역사둘레길  트레킹을 해보는 것입니다. 

 

 

 

 

 

 

▲ 금학생태공원 <공주역사둘레길> 금학생태공원 구간에서는 생태탐방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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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 좋구먼! 인생 참 재밌게 살어!"

전국을 돌며 역사트레킹 코스를 '개척'하고 다니니, 만나는 사람마다 저런 소리를 툭툭 내던진다. 팔자가 좋기는… 남의 속도 모르면서! 한편 온라인에서는 상당히 날카로운 비판들이 가해진다.

'현재도 도보 여행길이 넘쳐나고 그러는데, 뭐하러 또 만드나?'
'4대강 사업 때 자전거길 만들어 놓았는데 이용객들도 별로 없잖아. 또 그렇게 되면 어쩌려고?'

 

 



장거리가 아닌 단거리, 역사라는 테마로, 읍내와 가까이

맞는 말이다. 현재 도보 여행길은 포화 상태다. 600개가 넘는 도보 여행길이 있고, 그 거리만 해도 2만km에 달한다. 2만km면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고도 남을 엄청난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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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 북쪽에 위치한 만하루와 연지. 오른쪽에 금강이 흐르고 있다. 뒤쪽으로는 금강대교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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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사이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도보 여행길은 몇몇 잘 나가는 길들을 제외하고는 역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자전거 도로와 함께 도매급으로 매도되는 실정이다. 2007년 제주 올레길 열풍 이후, 중앙 정부와 각 지자체에서 경쟁적으로 길을 개설했기에 부작용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그런 맹점들이 부각됐다.

필자는 그런 점들을 타산지석 삼아 역사트레킹을 실시하게 됐다. 그러다 보니 몇 가지 원칙들이 세워지게 됐다.

 

1. 무작정 걷는 것보다 역사라는 테마를 가지고 트레킹을 해보자.
2. 육체적으로 힘들면 절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15km 이내 단거리 코스로 만들자.
3. 가급적 포장도로는 피하자. 아스팔트 위를 걸으며 자동차들과 경합하는 도보여행은 할 필요가 없다.
4. 역사, 풍광, 생태 세 박자가 맞아 떨어지는 길을 개척해보자.
5. 시작점(IN)과 종료점(OUT), 둘 다 접근성을 높여보자. 가급적 종료점을 읍내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게 하여 귀경길이 편하게 하자.


 

원칙은 좋다. 하지만 위의 원칙들이 다 부합되는 도보 여행길을 개척하기란 쉽지가 않다. 특히 역사, 풍광, 생태 세 박자가 딱 맞아 떨어지는 길을 개설한다는 건 정말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더군다나 읍내와 가까운 곳에 개설돼야 한다는 조항까지 맞추려면 머리가 더 복잡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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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2006년 우금티 터널 개통 이후, 우금티는 벌판이 됐다. 동학농민군들은 왼쪽 도로 아래부분에서 많이 희생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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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과 우금티를 트레킹 코스로 연결하자

 



공주를 처음 방문했을 때 필자도 다른 여행객들처럼 공산성과 우금티를 탐방했다. 하지만 그때는 공주의 지형을 잘 몰라 그 두 곳을 각각 따로 방문했다. 그것도 자동차를 타고 이동을 했다. 도보 여행가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도로 교통에 의존하여 탐방을 했던 것이다.

'여기 우금티에서 공산성까지 멀어야 3~4km인데 공산성까지 트레킹을 통해서 갈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없나? 지도상으로 보면 있을 것도 같은데… 공산성과 우금티를 하나의 선으로 연결해서 트레킹 코스로 만들면 그게 진짜 역사트레킹인데… '

공주를 방문할 때마다 이런 고민들이 밀려왔다. 그래서 공주토박이 분들을 붙잡고 조언을 구했다.

"뭐 하러 걸어가유? 차로 5분인디."
"공주대간이라고 그런 길이 있을 것도 같은디… 근디 그냥 잘 포장된 길 가지, 뭐하러 둘러둘러 가유."


대충 예상했던 반응들이었다. 각 지자체에서 앞다투어 도보 여행길을 개설했을 때 공주시에서 '공산성-우금티'를 직접 연결하는 트레킹 코스를 만들지 않은 걸 보면 무언가 큰 난관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 산딸기 여름이라 그런지 산딸기들이 지천으로 깔려있었다. 행동식이 부족해서 산딸기로 허기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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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갑오년의 농민군들이 가고자 했던 공주성(공산성)과 농민군들의 아픔이 서린 우금티를 연결하는 영광(?)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120주년이라 그런 도보 여행길의 개설은 더욱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작정 지도를 들고 공주의 구도심을 누볐다. 그리고 길 위에서 만난 분들 중, 연세가 있으신 분들을 붙잡고 계속 같은 물음을 던졌다.

 

 

 

 

 

 

 

 

▲ 우금티 대나무로 만든 조형물들이 쓰러져 있다.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쓰러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편치 않다.

 

 

 

 

 

 

 

                                                       우금티 고개에서 족구 한 판?  ___2편

 

 

 

 

 

---> 1편에 이어

 


황량한 우금티 벌판, 어떻게 채울까

1894년 11월. 동학농민군은 우금티에서 관군과 일본군 연합부대에 의해 크게 패배했다. 당시 동학농민군은 연합부대보다 병력이 훨씬 더 많았다. 하지만 죽창을 든 동학군은 개틀링 기관총 등 최신무기로 무장한 연합부대 앞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고 만다. '우금티 전투'가 아닌'우금티 학살'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동학농민군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던 것이다.

우금티 전투는 갑오동학농민전쟁의 최정점에 위치한 '하이라이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농민군의 역량이 총집결하여 대규모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농민군은 패배했고, 뒤이어 전봉준도 사로잡혀 한성으로 압송된다. 이렇게 갑오년의 뜨거운 함성이 메아리치는 우금티. 하지만 그 우금티를 바라보는 필자는 좀 엉뚱한 생각부터 들었다.

'음 여기서 족구 한 판 뜨면 재밌겠군!'

역사적인 장소를 두고 너무 불경한 말을 한 것인가? 사실 필자는 공주여행에서 우금티를 따로 추천하지 않는다. 왜? 너무 한적하기 때문이다. 우금티에 올라서면 이곳이 역사적인 장소가 맞나, 할 정도로 황량함이 몰아친다. 그 흔한 비석조차 없다. 예전에 세워졌던 조형물들은 쓰러져 있고, 여름이면 그 사이를 잡초들이 파고 들어가 무성하게 피어난다. 잡초가 파고 들어간 조형물들을 보고 있자니 그저 안타까움만 더 커질 뿐이다.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쓰러진 농민군들의 모습이 떠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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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대나무를 엮어 만든 조형물들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사이로 잡풀들이 파고 올라왔다.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갔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이 연상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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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혁명군위령탑 동학농민 혁명과 잘 어울리는 탑인가? 한편 이 탑은 건립된지 40년이 넘어서 그런지 무척 낡아보인다. 탑두의 빨간 벽돌은 그런대로 잘 붙어 있지만 탑신 부분의 벽돌은 제거가 됐고, 그 부분이 흉터처럼 남아있다. 좀 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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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고개 아래쪽에 세워진 동학혁명군위령탑은 더 형편없어 보인다. 유신시대에 건립된 탑이라 그런지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담아낼 수 있을지 의구심부터 앞서는 게 사실이다. 또한 건립된 지 오래되어 그런지, 탑이 무척 낡아 보이기까지 한다. 실제로 탑신 중간의 벽돌이 떨어져 나가 흉해 보인다.

현재 우금티를 가장 명징하게 드러낸 조형물(?)은 바로 우금티 터널이다. 2006년에 개통된 우금티 터널은 국도 40호선의 4차선 확장 반대 투쟁의 산물로 등장하였다. 우금티를 가로지르던 기존 2차선 도로가 4차선으로 확장되면, 우금티 고개는 원형이 손상될 게 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당시 공주지역 시민단체들은 도로 확장 반대를 주장하며 대안으로 터널형식을 제안하였고, 그것을 관철시켰던 것이다.

터널이 개통되었고 그 위로는 작은 벌판이 생겨났다. 일명 '우금티 벌판'.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곳은 그저 황량한 벌판일 뿐이다. 족구가 하고 싶어지는 그런 벌판인 것이다.

이 황량한 우금티 벌판을 무언가로 채워야 하지 않겠나? 언제까지 이런 역사적인 장소를 그저 쓸쓸한 공간으로 남겨둘 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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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터널 현재 우금티를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은 이 우금티 터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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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한 가지 제안을 해본다. 이 우금티 벌판에 돌로 만든 튼튼한 석상 조형물을 올려놓아 보자는 것이다. 큰 동상을 하나 세우자는 것이 아니다. 우금티를 못 넘은 동학농민군의 한을 담아 사람 크기의 동상들을 여러 개 세워보자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진시황의 병마용으로 보일 수 있는 동학농민군 동상들이 우금티 벌판을 '점령'하게 되는 것이다. 목숨을 걸고 넘고자 했던 우금티 고개를 돌이 되어서나마 넘게 되는 것이다.

역사는 책에서 배우는 것보다 직접 현장에 가서 배우는 것이 가장 좋다. 공산성이든 우금티든 한번 떠나보자. 공산성에서는 즐겁게 산성 트레킹을 해보고, 우금티에서는 갑오년 동학농민군의 결기를 느껴보자. 공산성에서는 백제시대를 떠올려 보고, 우금티에서는 구한말의 상황을 되새겨보자.

그렇게 살아있는 역사 지식을 쌓다보면 머릿속이 튼튼해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ps. 다음 편에는 공산성과 우금티를 직접 연결하여 트레킹을 할 수 있는 일명 '공주역사둘레길'에 대한 기사를 작성할 생각이다.

 

 

 

 

 

 

 

 

 

 

우금티 고개에서 족구 한 판?

[주장] 우금티에 동학농민군들의 동상을 세우자

14.07.07 11:13l최종 업데이트 14.07.07 11:50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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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 진남루. 진남루는 삼남길과 연결된다. 이 길을 따라가면 논산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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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 금서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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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는 경북 경주와 마찬가지로 땅만 파면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다. 그만큼 공주는 도시 자체가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공산성, 우금티, 무령왕릉, 석장리 유적, 황새울 성지 등등… 이들 중에서 무령왕릉을 제외하고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곳은 공산성과 우금티일 것이다. 실제로 이 두 장소는 공주를 대표하는 곳이다.


한편 공산성과 우금티는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관계에 대해서 알아보자.  

 



웅진성에서 산성공원까지, 공산성의 이름 변천사

앞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있고, 뒤로는 크고 작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현재의 공산성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475년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했을 때 이곳은 왕성(王城)이었고, 536년 사비(현 부여)로 천도했을 때는 북방성으로 불리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660년, 당나라 소정방에 의해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백제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때, 의자왕이 있던 곳도 사비성이 아닌 바로 이곳 공산성이었다. 당나라가 옛 백제땅에 세운 웅진도독부가 있던 곳도 공산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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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공산성은 산성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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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시기 공주는 신라 9주의 하나인 웅천주였고, 공산성의 이름도 웅천성으로 바뀌게 된다. 공산성이 지금과 같은 '공산성'으로 불리게 된 것은 고려시대 때부터였다. 940년(태조 23년)에 지방제도를 정비하게 되는데 웅천에서 공주(公州)로 명칭이 바뀌게 된 것이다.


이때 비로소 공산성(公山城)이라는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된다. 공(公)자형 산에 성이 축조됐다고 하여 공산성이 된 것이다. 공산성이 자리잡은 산은 '공산'이다. 변산반도의 '변산'처럼 '공산'도 한 글자 산이다.

공산성의 현재 모습은 조선시대에 그 틀이 잡혔다고 볼 수 있다. 1602년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했다. 이후 공주는 호서지방의 중심 고을이 되었고 공산성은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토성(土城)이었던 공산성이 튼튼한 석성(石城)으로 축조된 것도 조선시대였다.

한편 1624년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피신을 왔는데 그 이후로는 '쌍수산성(雙樹山城)'이라는 이름을 얻기도 했다. 인조는 성 안에 있는 나무 두 그루 아래에서 반란이 진압되길 손꼽아 기다린다. 그러다 이괄이 부하의 배신으로 참수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 나무 두 그루(쌍수)에 정삼품의 작위를 내린다. 그리하여 '쌍수산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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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성 금강에서 바라본 공산성 만하루. 파란색 천이 씌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공사중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은 2013년 11월 경에 찍은 사진이다. 필자가 올해 6월에 공산성을 방문했을 때도 만하루 일대는 공사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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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에는 공산성에 공원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곳에서는 각종 체육대회나 야유회가 개최되었다. 그래서 일제시대에는 산성공원(山城公園)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어 조선의 궁궐을 격하시켰듯 공산성에 공원을 만들어 그 위엄을 깎아내렸던 것이다.


공산성이 수많은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그 성을 둘러싼 역사가 '드라마틱' 했다는 뜻일 것이다. 현재의 공산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벽 일부가 내려앉아 등재까지는 가시밭길이다.

 



공주성, 동학농민군들이 가고자 했던 그 성

왕성, 웅천성, 쌍수산성 등등… 지금까지 공산성과 관련된 수많은 다른 이름들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빠진 명칭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공주성이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1894년 10월.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들은 논산을 출발하여 기세등등하게 북상하고 있었다. 그들이 점령하고자 했던 곳은 공주성이었다. 그렇다. 지금의 공산성인 공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진격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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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우금티전투가 있었던 우금티. 사진에서도 보이듯 무척 황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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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언급했듯이 당시 공주는 감영이 있던 충청지방의 중심지였다. 감영은 관찰사가 주재하던 곳으로 지금으로 치면 도청(都廳)소재지이다. 조선시대 크고 작은 변란이 있었지만 이괄의 난을 제외하고는 한 도(道)의 감영이 함락된 적은 없었다.


그래서 1894년 4월 27일, 동학농민군들이 전주성을 함락시켰을 때 조선 정부는 깜짝 놀라 '멘붕'에 빠졌다. 하지만 당시 조선정부는 이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결국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을 한다.

청나라는 조선정부의 공식적인 파병 요청을 받고 아산만에 출병을 한다. 이에 일본도 텐진조약을 빌미삼아 인천으로 군대를 급파하게 된다. 그나마 청나라는 출병 요청을 받았다지만 일본군은 왜 우리 땅에 들어왔나? 들어왔으면 전주성이 있는 남도로 진격을 해야지, 왜 인천으로 향했단 말인가?

뚱딴지같은 일본의 출병은 6월 하순에 있은 경복궁 점령으로 본색이 드러나게 된다. 그들은 조선사회의 평안을 위해 이 땅을 밟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평화유지군'이 아니라 그저'침략군'이었을 뿐이다. 경복궁 점령 이후,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나라군을 기습하여 청일전쟁을 벌인 것을 보면 그 침략야욕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뒤이어 발발한 청일전쟁에 대해 동학농민군은 크게 반발했다. 그래서 2차 봉기에 나서게 됐고 공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북상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우금티에서 관군(3천명)과 일본군(2천명)의 연합부대와 맞서게 된 것이다.

 

 

 

 

 

 

 

 

 

 

 

 

 

 

 

 공주역사둘레길  

 

● 트레킹을 하며 공주의 역사를 탐방하다! 

 

 

 

 

 

 

 

 

 

지난 6월 하순경에 충남 공주를 일주일동안 방문을 했습니다. 작업실(?)이 있어 전에도 충남 공주는 자주 방문을 했었지만 이번에는 좀 특별한 작업을 행하기 위하여 일주일 정도 머무르게 되었답니다.

 

무슨 작업이었냐고요? 공주에 새로 역사트레킹 코스를 하나 개설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임무는 성공적으로 완료가 됐답니다. 즉 새로운 역사트레킹 코스가 하나 더 추가된 셈입니다.

 

사실 충남 공주도 경북 경주와 마찬가지로 땅만 파면 유물이 솓아져 나오는, 그런 고장입니다. 역사와 전통의 고장이라는 것입니다. 공산성, 무녕왕릉, 석장리 유적, 우금티, 금강 등등... 금강을 끼고 있는 공주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요충지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관찰사가 주재한 곳이기도 합니다. 동학농민군들이 우금티를 넘으려고 시도한 것도 공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1937년, 대전으로 도청이 이전하기 전까지 충남도청이 있던 곳도 충남 공주였습니다.

 

 

 

 

 

 

 

 

 

 

 

 

 

공주는 이렇게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역사유적이 풍부하게 남아 있는 곳입니다. 반가운 것은 그런 유적들이 도심에서 가깝게 위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 착안하여 이번에 일명 <공주역사둘레길>이라는 트레킹 코스를 개설해보았습니다. 아직 갓 태어나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는 못했지만 이 길은 풍부한 역사적 스토리텔링을 품고 있는데다 풍광까지 일품이어서, 많은이들에게 사랑을 받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길을 개척하고자 일주일 동안 100km 이상의 거리를 걸었습니다. 갔던길 다시 가고, 왔던 길 돌아오고, 그러다 길도 잃어 버리고...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다보니 좋은 길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물론 이 공주역사둘레길도 없던 코스를 제가 직접 땅파고, 롤러질을 해서 개척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길의 일부 구간은 공주대간이라고 불리는 등산로를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존의 등산로를 잘 이용하여 역사트레킹 코스를 개설한 것입니다.

 

공주역사둘레길을 통해, 예전에는 개별적으로 방문했던 공산성과 우금티를 트레킹을 통해 한 번에 갈 수 있게 됐습니다. 조금 길이가 길기는 하지만 공산성과 우금티를 트레킹을 통해 탐방하는 것 자체가 무척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아래는 공주역사둘레길의 세부구간입니다. 약 14km 정도 되고, 이동시간은 5시간 정도 소요될 것으로 보여집니다.

 

 

충남 관광안내판(신관동 고속버스터미널) ▶ 금강수변 ▶ 금강교 ▶ 공산성 ▶ 중동 성당

▶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 영명교 ▶ 소나무숲길 ▶ 삼문사 ▶ 감시초소 ▶ 금학생태공원 ▶ 우금티 ▶ 웅진동 ▶ 송장배미

 

 

 

 

 

 

 

 

 

 

 

 

 

 

 

 

 

 

 

 

 

 

 

 

 

 

 

 

 

 

 

 

 

 

 

 

 

 

 

 

 

 

 

 

*공산성

 

 

 

 

 

*공산성:진남루

 

 

 

* 우금티: 우금티터널

 

 

 

* 코스명: 공주역사둘레길

 

 

 

* 이동경로: 금강교 ▶ 공산성 ▶ 중동 성당 ▶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 영명교 ▶ 소나무숲길 ▶ 삼문사 ▶ 감시초소 ▶ 금학생태공원 ▶ 우금티 ▶ 웅진동 ▶ 송장배미

 

 

 

 

* 역사유적:

1. 공산성: 백제의 수도였고, 조선시대까지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공산성에 대한 설명

2. 중동성당과 영명학교: 공주지역의 근현대유적 중심으로 설명

3. 우금티과 송장배미: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설명.

 

 

 

 

* 특징: 고대 유적부터 근현대 유적까지, 트레킹을 통해 답사여행을 할 수 있다. 더불어 공주지역에 숨겨져 있는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할 수도 있는 명품트레킹 코스다.

 

 

 

 

* 이동거리: 약 14km

 

 

 

 

* 예상 소요시간: 약 5시간 (공산성 탐방, 휴식시간 포함)

 

 

 

 

* 난이도: 중 ☞ 일부 구간은 공주대간이라고 불리는 산길을 이용함. 경사도가 있는 구간도 있음.

 

 

 

 

* 방향찾기(표식물): 없음. 차후 표식작업 진행 예정.

 

 

 

 

* 이용불가 계절:

 

 

 

 

* 특이사항: 트레킹 중간에 고라니 같은 산 짐승들을 만날 수 있음. 주의를 요망함.

 

 

 

 

* 교통편:

1. 충남 공주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 기준으로 1시간 40분 정도 소요됨.

2. 공주역사둘레길은 IN과 OUT이 시내권에서 이루어짐. 그래서 트레킹 종료시 터미널로 이동하는 것이 용이함.

 

 

 

* 후기:

 

 

 

 

 

* 중동 성당

 

 

 

 

 

* 영명학교

 

 

 

 

*측우기: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 산길: 금학생태공원 가는 길

 

 

 

 

 

* 금학생태공원

 

 

 

 

 

* 우금티

 

 

 

 

 

 

* 소나무 숲길

 

 

 

 

 

 

 

 

 

 

*우금티

 

 

 

 

 

 

 

 

 

* 우금티

 

 

 

 

 

 

 

 

 

 

 

 

 

 

농촌체험, 아이들은 이미 놀 준비가 돼 있다

아산 외암마을에서 행한 평가단 활동

 

14.03.03 14:02    최종 업데이트 14.03.03 17:53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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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암마을 설화산과 어우러진 초가집. 사진 중간 하단에 있는 누렁바둑이는 외암마을의 감시견(?)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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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암마을 외암마을은 설화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시냇물을 마을 안쪽으로 끌어왔다. 그렇게 끌어들인 물은 연못이나 빨래터로 사용되었다. 마을 주민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사진은 물래방아를 재현해 놓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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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뒤에 서 있는 설화(雪華)산 때문일까? 예안 이씨의 집성촌인 충남 아산, 외암마을의 첫 느낌은 '잘 생겼다'였다. 설화산이 외암마을을 든든하게 감싸주고 있는 모습은 풍수지리에 '풍'자도 모르는 사람도 이곳이 명당 마을이라는 걸 직감하게 될 것이다.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다. 여행객들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을 정도로 이곳은 산과 들판, 그리고 마을이 서로 '잘 생기게' 어우러진 곳이다. 어쩌면 역마살이 붙은 '노마드'들도 이 마을의 풍광을 보고 있노라면 고향생각에 젖어들어 수구초심(首丘初心)에 빠질지 모른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인 이 아늑한 마을을, 여행이 아닌 '비즈니스' 차원에서 방문했다고 하면 엇박자가 날 수도 있다. 이곳은 패스트푸드보다는 누룽지를 박박 긁어 먹고 싶은, 그런 느긋한 곳인데 업무 특성에 맞춰 날카로운 시선을 유지해야 한다면 무척 피곤한 일이 될 테니까.

 

 



농어촌 체험학습의 검열관(?)

지난 2월 20일, 필자는 농어촌공사가 주관하는 농촌체험학습평가단의 일원으로 외암마을 방문했다. 농촌체험학습의 주요 고객은 초등학생들이라 초등학교 교사들의 평가가 중시된다. 하지만 제3자적인 시각도 필요하기에 필자와 같은 여행프리랜서들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된다. 한편 평가를 수행한 교사분들의 자제들도 외암마을에 동행했는데 필자는 이 녀석들이 하는 행동들을 주시하며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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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암마을 연자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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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본업은 역사트레킹이지만 평소부터 농어촌 체험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터라 그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그렇게 업무라는 꼬리표(?)를 달고 외암 마을을 방문하니 후더분한 눈빛보다는 검열관과 같은 날카로운 눈매를 지녀야 했다. 한 박자 쉬어 가고 싶은 민속마을에서 검열관과 같은 냉철한 태도를 지녀야 했으니 무척 곤란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업무는 업무다. 밥벌이는 해야지. 그래서 농어촌 체험학습의 성과를 높일 수 있는 평가 요인들을 제시해본다.

 


1. 활동성
2. 결과물의 생성
3. 흥미성
4. 학습성

 


여기에 나열된 항목들은 체험학습의 참관 혹은 도우미로 참여했던 필자의 경험과 여타 다른 관계자들의 의견을 종합한 것이다. 각 항목별로 서열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모든 체험학습이 위에 제시된 요인들을 다 포함하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김치 담그기 같은 체험은 귀가할 때 자신이 담근 김치를 포장해 가지만 투호나 널뛰기 같은 전통놀이 체험은 결과물이 생성되지 않는다. 그저 놀이 참여자체가 무형의 결과물인 것이다.

활동성은 참가자 개개인이 체험의 주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앞 줄에 있는 몇 명만 행위에 참여를 하면 뒤에 선 아이들은 딴짓을 하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는 안 된다. 뒷줄에 있는 아이들도 참여를 하러 왔지 뒷짐 지고 있으려고 농촌에 온 건 아니니까.

결과물의 생성은 아이들에게 자신의 손으로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성취감을 줄 수 있다. 예를 들어 달걀꾸러미를 만드는 짚풀공예 체험에 참여한 아이들은 자신이 만든 결과물을 집으로 가져와 가족들에게 자랑을 할 것이다. 그럼 가족들은 칭찬을 할 것이고, 아이는 더욱더 성취감을 강화할 수 있다. 물론 달걀꾸러미를 엉망으로 만들면, 반대로 가족들에게 면박을 당할 수 있지만.

흥미성은 가장 중요한 요인일지 모른다. 고리타분한 체험활동을 교실 밖에서까지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신나는 일이라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해당 체험에 빠져 들어가기에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 흥미성을 돋우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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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암마을 외암마을 참판댁. 참판을 지낸 이정렬에게 조선 고종이 사액한 고택이다. 외암마을 참판댁은 중요민속자료 제195호로 등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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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평가를 내렸나?

그럼 필자는 외암마을에서 어떤 체험활동을 했고, 어떤 평가를 내렸나? 필자는 '냅킨을 이용한 핸드폰가방 만들기'와 '손두부 만들기'를 직접 체험했고, 그에 대한 평가를 했다. 냅킨에 그려진 캐릭터들을 잘라, 풀로 손가방에 붙이는 것이 핸드폰가방 만들기 체험이었다. 학창시절의 공작시간이 연상된 순간이었다. 손재주 없다고 무척 면박을 당했던 아픔도 떠올랐던 시간이었다.

손두부 만들기는 단골로 등장하는 체험활동 중에 하나다. 맷돌만 여러개 준비되어 있다면 손쉽게 아이들의 참여를 높일 수 있는 활동이다. 실제로 동행한 초등학생 아이들은 어처구니(맷돌 손잡이)를 돌리며 신나했다. 아이들에게는 어처구니를 돌리는 일 자체가 재미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이 돌린 맷돌 사이로 흘러나온 흰 비지가 흘러나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을 것이다. 어떤 녀석은 맷돌을 돌리며 손으로 비지를 찍어 먹기도 했다.

그렇다면 필자는 어떤 평가를 내렸나? 솔직히 위에 언급된 체험학습들은 도시에서도 할 수 있다. 외암마을에서만 할 수 있는 체험은 아닌 것이다. 이야기를 확장해 보자. 다른 마을의 체험학습 리스트들을 보면 중복되는 활동들을 여러 개 발견할 수 있다. 깍두기 만들기, 한지공예, 김치 담그기 등 마치 우리나라 어느 관광지를 가도 똑같은 기념품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이 체험학습 시장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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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암마을 외암마을의 참판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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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 스타일'과 '내고향 6시'

그럼 필자는 검열관과 같은 날카로운 눈매로 낙제점을 주었는가? 아니다. 후한 점수를 주었다. 필자는 아이들이 대도시를 벗어나 흙과 전통문화에 접할 수 있는 것 자체를 중시한다. 점점 더 벌어지는 도시와 농어촌의 간극을, 미흡하지만 이런 체험활동을 통해서라도 채워야 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1만 1천 킬로가 떨어진 뉴욕의 일상은 '뉴요커 스타일'로 끊임없이 소비되지만, 불과 고속버스로 2~3시간 걸리는 우리 농어촌의 일상은 '내고향 6시' 정도로만 편성될 뿐이다. 도시인들에게는 오히려 우리의 농어촌보다 미국 대도시의 사람들과 더 많이 닮아 있을지 모른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고, 타블릿PC로 자료를 검색하고, 보안카드를 찍고 사무실로 출근하고... 이번 체험에 동행했던 초등학생 아이들의 부모 세대, 즉 대도시에서 나고 자란 지금의 30~40대들도 리스트에 나열된 체험활동 리스트들이 익숙지 않을 것이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그들이 짚신을 잘 만들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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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부만들기 아이들은 어처구니를 열심히 돌리며 두부를 만들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선행학습이 아니고 노는 것이다. 아이들은 놀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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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놀 준비가 되어있다!

체험활동에 참가한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아이들은 놀 준비가 되어있다!'

접착제를 붙인 듯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스마트폰을 뒤로 하고 열심히 체험활동에 빠져든 아이들의 모습에서 그런 말들이 읽혀졌다. 

필자가 부족하지만 농어촌체험학습을 옹호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해당마을의 재방문율이 바로 그것이다. 학교에서 체험활동을 한 아이들이 가정으로 돌아가 해당마을에 대해 입소문을 내면, 부모들은 아이 손을 붙잡고 그 마을을 방문하여 숙박을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가족들과 함께 1박을 하며 체험활동의 여운을 되새기게 될 것이다. 이런 식의 재방문율의 증가는 농촌 소득증대에도 큰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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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핸드폰가방 필자가 만든 핸드폰 가방. 나름대로 수작이라고 자평해본다. 독자들의 후덕한 평가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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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암마을은 여러번 방문해도 좋다. 앞서 언급했듯이 설화산이 잘 품어주고 있는 이 민속마을은 정겨움이 넘치는 곳이기 때문이다. 초가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면 아이들보다 아빠가 더 신날지 모른다. 느긋하게 초가집에서 1박을 한 후, 아이들과 함께 외암마을의 자랑인 돌담길을 따라 동네 한바퀴를 산책한다면 상쾌함이 더할 것이다.

필자도 외암마을을 재방문을 할 생각이다. 그때는 날카로운 검열관의 눈매가 아닌 '수구초심'의 감흥에 젖어 있는 눈으로 이 민속마을 곳곳을 탐방할 생각이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설화산에도 올라 풍수지리적인 시각으로 외암마을을 바라볼 생각이다. 그러려면 풍수지리 책도 몇 권 보고 가야겠지. 그럼 풍수지리 체험학습이 되는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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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담길 돌담길은 외암마을의 또다른 자랑거리이다. 전통가옥과 어우러진 돌담은 산책의 동반자가 되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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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외암마을은 아산시내에서 약 7km 정도 떨어져 있다.


2. 교통편: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아산행 고속버스 이용(약 1시 30분 소요 / 배차간격 30분) ▶ 강당골행 시내버스 탑승(약 40분 소요 / 배차간격 40분)

 
3. 입장시간: 9시~17시 30분(동절기: 17시)


4. 문의전화: 041) 541-0848

 

 

 

 

* 외암마을: 외암마을은 설화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시냇물을 마을 안쪽으로 끌어왔다.

 그렇게 끌어들인 물은 연못이나 빨래터로 사용되었다.

마을 주민들의 지혜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사진은 물래방아를 재현해 놓은 곳이다.

 

 

 

 

 

* 외암마을: 연자방아

 

 

 

*외암마을: 돌담길은 외암마을의 또다른 자랑이다. 전통가옥과 어우러진 돌담은 산책 동반자다.

 

 

 

 

 

* 외암마을: 유명한 외암마을의 참판댁이다.

 

 

 

 

* 외암마을: 외암마을 참판댁

 

 

 

 

 

* 외암마을: 외암마을 참판댁. 참판을 지낸 이정렬에게 조선 고종이 사액한 고택이다.

외암마을 참판댁은 중요민속자료 제195호로 등재되어 있다.

 

 

 

 

* 마루: 요즘은 기와집 자체를 보기 힘든터라 저렇게 마루에 걸터 앉은 모습도 보기가 쉽지 않다.  

 

 

 

 

 

* 외암마을: 멍석과 물지개

 

 

 

 

 

* 설화산: 설화산이 감싸고 있는 외암마을은 '잘 생긴' 동네다.

 

 

 

 

* 외암마을: 설화산과 어우러진 초가집. 사진 중간 하단에 있는 누렁바둑이는 외암마을의 감시견(?)이라고 한다.  

 

 

 

 

* 두부만들기: 아이들은 어처구니를 열심히 돌리며 두부를 만들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선행학습이 아니고 노는 것이다. 아이들은 놀 준비가 되어 있다!

 

 

 

 

* 핸드폰가방: 필자가 만든 핸드폰 가방. 나름대로 수작이라고 자평해본다.

공작 시간에 들었던 '손 재주 없다'라는 말을 극복할 정도로 수작인가? 독자들의 후덕한 평가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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