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대학 사극 <고려거란전쟁>을 재미나게 보고 있다. 역시 사극은 퓨전 사극이 아니라

정통 사극이다. 퓨전 사극이 젊은 연기자들의 비주얼을 전면으로 드러낸다면 정통 사극은

노련함을 앞세운 중년 배우들의 불꽃 튀는 연기력이 돋보인다.

 

강감찬 역으로 최수종이 캐스팅됐다고, 또 수종이라는 지적이 있었는데... 최수종이 사극

연기에 진심이기에 캐스팅이 된 게 아닐까?

 

그래도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왜 강감찬 장군 역으로 최수종일까?

거란과의 3차 전쟁에서 거란군을 괴멸에 가까울 정도로 찍어눌렀던 강감찬 장군이었는데...

좀 더 강인한 얼굴을 한 연기자가 강감찬 장군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나?

 

이를테면 마동석?ㅋ

 

사실 강감찬 장군은 문관 출신이었다. 잠시 역사 시간을 생각해보자! 고려 시대 무관을 뽑는

과거 시험은 후기에나 실시됐다. 강감찬이 활약을 했던 고려 전기에는 문신을 뽑는 과거가

존재했을 뿐이다.

 

그러면 왜 문신 출신이면서 최전방에서 군대를 지휘한 것일까? 이렇게 문무를 겸비한 이들을

두고 출장입상(出將入相)이라고 말한다. 나가서는 장수요, 안에서는 재상의 역할을 하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말하는 것이다.

 

강감찬은 출장입상의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김종서, 권율, 이순신 장군 등도 출장입상형

인재들이다.

 

강감찬 장군은 관악산 낙성대에서 출생을 하셨다. 관악산은 필자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다. 그런 이야기를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10꼭지 '관악산 역사트레킹'편에 담아봤다.

드라마에 편승해서 이런식으로 숟가락을 올리는군~^^

 

 

 

 

 

● 문관 출신 최전방 사령관, 강감찬

 

강감찬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거 아세요. 강감찬 장군이 사실은 문신 출신이라는 거요.”

“정말요?”

“더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장군께서 나이 70에 최전방 사령관으로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귀주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둬서 거란 세력을 물리쳤고요.”

“아, 그렇군요!”

 

필자의 설명에 하나같이 참석자들은 놀랬다. <삼국지>의 황충 장군도 아니고, 고희의 나이에 최전방에서 칼을 휘둘렀다는 점이 놀라웠을 것이다. 더구나 상대편은 당시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거란족이 아닌가?

 

이야기를 좀 더 확장해 보자.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두고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고 칭하며 건국 초부터 강경 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거란이 선물로 준 낙타를 굶겨 죽인, 일명 만부교 사건도 발생하게 됐던 것이다.

 

거란은 요나라를 세우고 동북아에서 위세를 떨쳤다. 당시 요나라는 만리장성 부근에서 송나라와 대치를 하게 됐는데 한반도에 있는 고려에 대해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고려가 송나라와 손을 잡고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던 것이다. 강감찬 장군은 3차 침공 때 상원수가 되어 10만 거란군을 격퇴시켰고 그로 인해 고려는 전란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안국사 뜰 안에는 그런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삼층석탑이 서있다. 상륜부라고 불리는 맨 꼭대기는 무너져 내렸지만 나머지는 천 년 가까운 세월을 잘 버텨내고 있다. 이 탑은 원래 장군의 생가에 있던 것을 안국사가 만들어지면서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필자는 계속 ‘강감찬 장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강감찬은 문신 출신이었다. 한국사 시간을 곱씹어 보시라. 과거에서 무관을 뽑았던 건 고려 후기 이후였다. 고려 초기 사람이었던 강감찬은 당연히 문관 출신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강감찬은 문·무에 모두 능한 인재였던 것이다. 이를 두고 출장입상(出將入相)이라고 하는데 ‘나가서는 장수(將帥)요, 들어와서는 재상(宰相)이라’는 뜻이다.

 

도교에서는 문(文)을 관장하는 별을 문곡성(文曲星)이라고 칭한다. 문(文)이 뛰어난 사람을 두고도 문곡성이라는 말한다. 그런데 강감찬도 문곡성이라고 불렸다. 최전방 사령관이자 문곡성이었던 강감찬! 그렇게 많은 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인헌공 강감찬은 84세에 천수를 누리다 영면하셨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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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공영방송 5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라는 명칭에 걸맞게 수준 높은 영상미를 펼쳐보였다. <고려거란전쟁>은 <불멸의 이순신>, <태조 왕건> 등등...

수많은 명품 사극의 뒤를 이를 것인가? 아직은 극 초반이니 좀 두고봐야 할 것이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거란과 사이가 나빴다. 발해를 멸망시켰다하여 거란을 짐승으로 나라로 폄하했다. 고려가 건국했을 때 거란에서 선물로 낙타 50마리를 보냈는데 그 낙타를 굶겨죽이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고려거란전쟁>의 초반은 대량원군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다. 대량원군은 자신의 이모인 천추태후로부터 수많은 위협을 받는다. 하지만 그 위협들을 다 극복한 후 결국 왕으로 등극한다. 그가 바로 고려 8대왕 현종(재위 1010∼1031)이다.

극에도 나오듯이 대량원군은 강제로 승려가 됐는데 신혈사라는 곳에 은거하게 된다. 이 신혈사가 지금의 진관사다.

사찰 음식으로 유명한 그 진관사인데 진관 한옥마을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여행에세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의 11꼭지에는 '진관사 역사트레킹'이 기술되어 있다. 아래는 그 내용의 일부다. 사극 <고려거란전쟁>에 진관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스리슬쩍 숟가락을 올려본다~^^

 

 

 


 

 

 

 ● 기막힌 스토리가 숨어 있는 진관사

수도권 최대의 한옥마을인 은평 한옥마을을 지나 마지막 탐방지인 진관사로 향한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4대 명찰이 있다. 동쪽에 불암사, 남쪽에 삼막사, 북쪽에 승가사. 그럼 서쪽은? 진관사다. 천년 고찰인 진관사(津寬寺)는 고려 현종 때인 1010년에 만들어졌다. 고려 제8대 왕인 현종이 직접 창건한 이 절은 진관대사를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태조 왕건의 손자였던 현종, 즉 왕순은 어릴 적에는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왕건의 손녀였던 천추태후로부터 어릴 적부터 박해를 받은 왕순은 한때 강제로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천추태후가 그의 이모가 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당시 얽히고설킨 왕실혼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같은 왕건의 혈통이자 이모뻘의 천추태후로부터 살해위협까지 받게 된 건 그가 왕위계승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천추태후는 애인인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왕으로 등극시킬 셈이었다.

그런 천추태후의 마수가 진관사에까지 뻗치게 됐다. 원래 진관사 자리에는 신혈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진관이라는 승려가 홀로 수도를 하고 있었다. 승려가 홀로 거처하는 곳이라 천추태후 입장에서는 무언가 거사를 치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랬다. 천추태후는 신혈사에 자객을 보내 왕순을 죽일 셈이었다. 천추태후의 의도대로 왕순이 자객에 손에 비명횡사를 했다면, 현종도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진관사도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천추태후의 의도를 눈치 챈 진관은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굴을 파서 왕손을 숨기는 기지를 발휘한다. 수미단은 불상을 올려놓는 단을 말한다. 수미산은 불교에서 말하는 상상의 산을 말하는 것이고.

그렇게 진관에 의해 목숨을 건진 왕순은 3년 뒤, 개경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려 8대 왕 현종이다. 현종은 1010년, 신혈사 자리에 대가람을 세우고 진관 대사의 이름을 본 따서 사찰 이름을 지으니 그 사찰이 바로 지금의 진관사다.

조선시대 진관사는 사가독서제로 애용된 곳이다. 사가독서제란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정진하게 만든 제도로 세종시대에 처음 도입되었다. 풍광이 수려하고 계곡이 시원한 진관사라면 학문을 닦기에 제격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사가독서제로 진관사를 다년간 이들은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이었다.

진관사는 한국전쟁동안 많은 전각들이 소실된다. 그래서 지금의 진관사는 천년고찰의 웅장함이 묻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진관사는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모으고 있는 사찰이다. 진관사 숲길과 계곡을 걷다보면 몸도 마음도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 느낌들이 좋아서 발걸음들이 진관사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진관사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드디어 책이 나왔다. 발간일 2023년 9월 1일.

누구는 자신의 실물 책을 보면서 감격도 하고,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오프라인 서점 매대에 가서 은근 슬쩍 자신의 책을 중앙으로 옮겨놓기도 한단다. 하지만 필자는 별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앓던 이 하나가 빠진 것처럼 좀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원고를 건성으로 작성해서 그런가? 아니면 그동안 책을 많이 냈나?

이 책은 너무 늦게 나왔다. 첫 꼭지를 2013년에 썼으니 10년이나 걸려서 출간이 된 것이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초고를 쓴 지가 오래되서 그런지 중간에 상황이 확~ 바껴 다시 작성을 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 것이다.

예를 들면, 해당 부근에 지하철이 개통되면 그거에 맞춰 집합장소와 종결장소가 변경된다. 또한 그에 맞게 코스 자체도 변경된다. 코스가 바뀌니 원고를 재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크게 4번 정도 갈아 엎었다. 재작성 수준의 리라이팅을 4번씩이나 하다보니 나중에는 원고를 검수하는 것조차 신물이 날 정도였다.

사진은 또 어떻고! 시간이 길어지다보니까 사진도 크게 갈이를 해야했다. 탐방 사진이야 패션 사진처럼 유행을 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현재성을 유지해야 하니까.

거기서 거기인 트레킹 원고, 뭐하러 그렇게 갈아넣으며 작성하느냐고,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이 책을 쓰면서 햄스트링 건염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축구 선수나 걸리는 햄스트링을 트레킹하다가 걸린 것이다. 한편 이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린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어차피 가족이나 지인들의 주머니를 공략할 게 아닌가?

사실 이 책은 기성 출판사에서 여러번 퇴짜를 맞았다. 처음에는 퇴짜를 맞으니 얼얼했지만 나중에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 어차피 돈도 안 되는 책, 내가 출판사차려서 내가 만들어보자. 잘나도 내 원고, 못나도 내 원고가 아닌가!'

코로나가 한참 맹위를 떨치던 2021년 가을경에 역사트레킹북스라는 1인 출판사를 창간하게 된다. 그때 이미 원고의 90%가 준비되긴 했지만 사정이 있어 2023년 상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편집과 디자인작업이 끝나고 인쇄를 할 시기였는데 약 3주간의 공백이 생겼다. 편집 작업이 끝날 때가 8월 초순이었는데 이 시기에 인쇄소가 휴가 기간이었다. 인쇄업 특성상 휴가를 함께간다는 것이다. 어쨌든 한 번 맥이 끊기니 3주나 지체가 됐다. 역시 땡길때 땡겨야 하는 거다!

예전부터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이 있다.

'나무한테 미안한 짓은 하지 말자!'

인쇄소에 원고를 넘기면서 저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봤다.

서점과 계약을 하느라 판매 시기가 늦춰졌다. 끝날때까지 계속 늦춰졌다. 어쨌든 이제 교보문고, 알라딘, 예스24 같은 서점에서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을 구매할 수 있다. 10년 간의 노고가 이제 결실로 다가와야 하는 시기다. 그러고보니 곧 추석이네~

지금 다시 책을 응시했는데 역시 별 감흥이 없다. 첫 책인데도 그렇다. 그저 무언가 내 몸에서 툭툭 털려나가는 느낌이들 뿐이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허허로운 감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별 감흥은 없지만 이것만큼은 말하고 싶다.

이 책은 그저 앉아서 쓴 책이 아니다. 두 발로 빚은 책이다. 손은 그저 글씨를 옮겼을 뿐 발로 써 내려간 이야기들이다.

글에서 발냄새가 나나?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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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체육회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서울스포츠> 7+8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사진은 마땅한게 없어서 그냥 한강에서 찍은 사진들을 올려봅니다.

 

 

한강 백두대간 모래사장

금빛 모래가 펼쳐져 있던 한강의 강수욕장

필자는 한 때 한강에 미친 적이 있었다. 지금은 문화센터에서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그래서 다양한 연령대의 수강생들과 마주치는데 그 폭이 워낙 커서 종종 ‘3대가 같이 트레킹’을 한다고 표현하곤 했었다. 수강생 중 가장 어린 막내가 9살이었고, 가장 최고참은 84세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한 연령대와 만나다 보니 종종 귀중한 정보들을 공짜로 얻을 수도 있었다. 트레킹을 행하다보면 사람들이 술술 입을 여는데 녹취만 하지 않았지 마치 로드 인터뷰 같은 형태를 띠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구술 내용 중에는 텍스트 자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생생함 같은 것들도 있었다.

● 해수욕? 아니 강수욕

예전에 한강에서 트레킹을 진행했을 때였다. 용산쪽을 가리키면서 예전 서울 시민들은 해수욕이 아닌 강수욕(江水浴)을 즐겼다고 설명을 했었다. 젊은 수강생들은 거의 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강수욕’이 무엇이냐며 묻기부터 했다. 바다에서 하는 물놀이가 해수욕이라면 강물에서 하는 물놀이를 강수욕이라고 부른다는 해설을 마칠 즈음, 나이가 지긋한 수강생 A씨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강수욕 체험기를 풀어내셨다.

“그때는 여름만 되면 한강으로 물놀이하러 갔었어요. 노들강변에 모래사장이 기가 막히게 펼쳐졌거든요.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

그렇다. 변변한 냉방장치도 없었던 그 시절, 한강은 서울 시민들의 좋은 피서지였다. 사람들은 드넓은 모래사장에서 수영도 하고, 모래찜질도 하며 물놀이를 즐겼다. 당시의 사진들을 보면 동해안의 어느 해수욕장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한강이 물놀이 장소로 애용됐을까?

 

 

 

 

 

 

● 한강 백두대간 모래사장

해수욕이든 강수욕이든 모래사장이 있어야 입수(入水)를 할 수 있다. 거친 돌밭에서 물에 뛰어들었다가는 자칫 피투성이가 될 수도 있다. 물가에 있는 바위에서는 낚시를 하지 물놀이를 하지 않는 법이다.

하드웨어(?)로 보자면 한강은 아주 오래전부터 강수욕장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지금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예전 항공 사진을 보면 이게 한강이 맞나 싶을 정도로 드넓은 금빛 모래사장이 한강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 대표적으로 용산, 뚝섬, 광나루가 그런 곳이다.

이렇게 모래사장이 발달할 수 있었던 건 서울이 한강의 하류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태백산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금강산 내금강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양수리에서 합수되어 한강이 된다. 남한강이 375㎞, 북한강이 317㎞이니 강물이 흘러 오는 와중에 수 많은 퇴적물들도 함께 실어 온다. 그렇게 켜켜이 퇴적물이 쌓여 어떤 곳은 습지가 되고, 어떤 곳은 모래사장이 된다. 백두대간에서 떨어져 나온 돌덩어리가 강물 속에서 깎이고 깎여 모래가 되었고, 그 모래가 서울 한강변에 쌓였으니 ‘서울 한강 백두대간 모래사장’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거 같다.

그런데 당시 한강의 모습을 보면 강변 양쪽에 다 모래가 쌓이지는 않았다. 북쪽에 모래사장이 있으면 남쪽은 습지가 있는 식이다. 예를 들면, 지금의 한강대교의 북단인 용산구 이촌동에는 해운대 같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지만 이에 반해 남단인 노량진(鷺梁津)에는 모래사장이 발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량진은 물살이 빨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한자에도 좁은 해역을 뜻하는 ‘기장량(梁)’이 쓰였다. 이 한자는 명량(鳴梁), 견내량(見內梁), 칠전량(漆川梁) 등 좁고, 물살이 빠른 곳을 지칭할 때 쓰인다. 이런 차이가 나타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서울의 한강이 일직선이 아닌 W형태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굽이쳐 흐르는 구간은 원심력이 작용하여 물살이 강해 퇴적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반대쪽은 구심력으로 인해 퇴적물들이 층층이 쌓이게 된다.

물놀이에 대한 글에 지형과 퇴적에 대한 이야기를 한 필자에게 핀잔을 주시려나? 하지만 꼭 이 부분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당시의 한강 강수욕을 신기하게 보는 관점이 아닌 어떻게 강수욕을 할 수 있었는지를 따져보고 싶었다. 짠맛이 나는 바다모래가 아닌 금빛의 강모래에서 모래찜질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에 하며...

 

 

 

 

 

 

● 강수욕장을 기억하는 사람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서울은 급격하게 확장한다. 1960년대 이미 인구가 350만 명에 이른다. 드넓게 펼쳐진 한강의 모래사장을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수강생 A씨는 이렇게 회고를 했다.

“그때 전차를 타고 갔었을 거야. 어디서 왔는지 백사장에 사람들이 가득했어. 가족단위도 왔었고, 같은 또래들끼리도 왔었어요. 거기서 아이스께끼(아이스크림)도 팔고, 냉차도 팔고 그랬지. 그때 찬 거 먹고 배탈나서 아주 혼난적도 있어요.”

A씨는 지금의 이촌동, 즉 용산 노들 강수욕장에서 물놀이를 했는데 일설에 의하면 노들 모래사장은 세계 최대의 강수욕장이었다고 한다. 수강생 B씨는 뚝섬 유원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뚝섬유원지까지 궤도차를 타고 갔어요. 뚝섬이 좋은게 거기는 수영장도 있었어요. 백사장도 있었고, 아주머니들이 빨래도 했었고, 아참 거기는 나루터도 있었어요. 그때는 강남이 개발되기 전이라 다리가 없었거든. 동력선을 타면 봉은사까지도 갈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

궤도차는 전차의 일종인데 당시 동대문역에서 뚝섬을 거쳐 광나루까지 운행을 했었다. 전차역에 나루터까지 있었으니 당시 뚝섬은 교통의 요지였던 셈이다. 그러니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붐빌 수밖에. 자료를 찾아보니 뚝섬이 인기가 좋았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나무그늘 때문이었다.

다른 강수욕장들은 숲이 거의 없었지만 뚝섬 일대는 나무숲이 있어 천연의 파라솔 역할을 해주었다. 그런 자취가 남아서인지 뚝섬에는 현재 서울숲이 자리잡고 있다. 참고로 서울에서 전차는 1968년을 끝으로 운행을 종료했다.

 

 

 

 

● 생명력이 길지 않았던 강수욕장

한강의 강수욕은 생명력이 길지 않았다. 1950~1960년대까지 반짝 개장(?)을 했을 뿐이다. 앞으로 시기를 당겨보아도 기껏 일제강점기까지 연장할 수 있을 뿐이다. 아무래도 조선시대에는 강수욕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 한복은 수영을 하는데 적합한 복장이 아니다.

앞쪽 시기는 늘어날 수 있지만 뒤쪽은 고정되었다. 1970년대부터는 한강 개발로 인해 모래사장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강모래는 염분이 많은 바다모래보다 질이 더 좋아 훌륭한 건설자재로 쓰였다. 1980년대 한강종합개발이 대대적으로 진행되면서 한강 일대는 큰 공사장처럼 변했다. 강수욕장이 있던 모래사장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시멘트로 채워진 인공 제방들이 들어섰다. ‘한강 강수욕장’이라는 말도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뚝섬에서 조금만 배타고 들어가면 저자도라는 섬이 나와요. 거기도 백사장이 아주 넓었어요. 거기서도 물놀이를 재밌게 했지. 튜브랑 파라솔 빌려주는 행상도 있었고. 그런데 한강 개발한다고 모래를 퍼 올리더라고. 어느 순간 가보니 섬도 없어지고, 백사장도 없어졌어요. 그때 이후로는 한강에서 수영을 못 했지. 흙탕물이 돼서 물에 들어갈 생각을 못 했죠.”

B씨는 이렇게 아쉬워했다. 한강종합개발은 1986년에 종료됐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한강의 모습이 그때 골격을 갖추게 된다.

 

● 오리배는 페달을 굴리고, 카약과 패들보드는 노를 젓고

하지만 한강이 피서지로서의 매력을 상실한 건 아니었다. 강수욕이 사라지긴 했지만 물놀이용 보트는 계속 둥둥 떠 있었다. 노를 젓는 일반적인 보트도 있었고, 위에 가림막을 쳐서 햇빛이나 비를 막을 수 있는 보트도 있었다. 이후 보트들은 유람용 오리배로 바뀌게 된다. 1990년대 초반 오리배를 탔던 수강생 C씨는 이렇게 회고를 했다.

“한강에서 오리배 페달 좀 굴렸죠. 저희는 주로 여의도쪽에서 많이 탔는데 사실 오리배 타는게 주 목적이라기보다는 어떻게 연애 좀 해볼까 그게 더...”

성공했을까? C씨는 그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이제 그런 오리배들은 뒷전으로 물러 나고 2010년도 이후부터는 카약, 패들보드(sup) 같은 수상 아웃도어를 즐기는 이들이 한강에서 노를 저었다. 카약이 앉아서 노를 젓는다면 패들보드는 일어서서 노를 젓는 방식이다. 이전에 보트나 오리배가 유람의 목적이 강했다면 카약이나 패들보드는 레저에 운동까지 겸비한 활동이다. 그래서인지 카약이나 패들보드는 시작 전에 안전에 대한 강습을 받아야 한다. 페달부터 굴리는 오리배와는 많이 다르다.

 

 

 

● 한강의 수영장

한강의 물놀이에 대한 글을 쓰면서 야외수영장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서울 한강변에는 뚝섬, 여의도, 광나루, 망원, 잠실, 잠원 등 6개의 수영장과 난지, 양화 2곳에 물놀이장이 있다. 강수욕장보다는 못 하지만 한강의 수영장들은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다. 탁 트인 한강을 바라보며 헤엄을 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답답한 실내수영장은 범접할 수 없는 ‘한강뷰’를 배경삼아 물놀이를 할 수 있다는게 정말 매력이지 않은가?

그렇게 시원함을 선사한 수영장 중 일부가 노후화되어 간다. 이에 서울시는 현대적 기술과 감각을 적용하여 새로운 개념의 물놀이 공간을 선보일 예정이다. 일명 자연형 물놀이장이다. 자연형 물놀이장은 생태적인 의미를 더한 곳으로 자연친화적인 물놀이 공간이 될 예정이다. 2024년에 기존에 잠실수영장이 먼저 자연형 물놀이장으로 변신을 하고 광나루, 잠원, 망원까지 점차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 자연형 물놀이장이 어떤식으로 꾸며질지 궁금하다.

이제까지 한강의 물놀이에 대해서 정리해봤다. 일부는 수강생들의 입을 빌려 전개를 하기도 했다. 딱딱한 문헌 자료를 기반으로 하는 것보다 더 좋지 않은가?

이제 여름이다. 내친김에 수영복 입고 한강에 풍덩 해볼까? 그런데 불룩한 똥배가 앞을 가리고 있어서...

 


 

*** 글쓴이 곽동운은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있다. 현재 백화점 문화센터와 서울시50플러스에서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트레킹을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역사트레킹 공동체’를 꾸리고 싶어 한다.

 

 

 

 

 
 

 

 

 

한강 다리는 즐거운 놀이터

한강 다리가 이렇게 재밌는 곳이었어?

 

필자는 한 때 한강에 미쳤던(?) 적이 있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지난호에 한강의 섬에 대한 이야기를 기고했었다. 글을 잘 썼는지 이번에도 한강에 대한 이야기를 또 기고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 이 글은 한강에 미쳤던 사람의 두 번째 한강이야기다. 즐거운 놀이터가 되어주는 한강 다리 이야기.

오늘도 사람들은 한강을 분주하게 넘고 있다. 강남과 강북을 가르며 자연장벽이 될 수도 있는 한강을 현대인들은 손쉽게 건너고 있다. 그럼 언제부터 한강을 나룻배가 아닌 교량을 통해 건너갔을까? 1900년 한강철교가 부설되면서부터다. 1899년에 경인선이 개통됐는데 그때는 노량진역이 출발역이었다. 다음해에 한강철교와 함께 경성역이 준공됐고, 1900년 7월에 ‘경성역-인천역’까지 완전 개통을 하게 된다. 경성역은 나중에 서대문역으로 불렸는데 지금의 서울역과는 다른 곳이다.

 

 

* 동작대교: 동작대교 위로 넘어가는 노을. 서래섬 부근에서 촬영함.

 

 

 

한강철교는 기차만 다닐 수 있는 철도전용 다리였다. 지금이야 교통카드만 있으면 간편하게 전철을 타고 한강을 건널 수 있지만 구한말에 살았던 사람들이 손쉽게 티켓팅을 할 수 있었을까? 일반 사람들도 편리하게 한강을 넘을 수 있게 된 건 1917년부터였다. 이때 한강 인도교라 불렸던 한강대교가 개통됐다.

이후 서울은 확장을 거듭했고, 한강의 다리들도 더 많이 건설됐다. 그럼 서울의 한강에는 몇 개의 다리가 있을까? 총 27개다. 여기서 말하는 다리는 서울시와 연관을 맺는 다리를 말한다. 그래서 팔당대교(남양주시-하남시)처럼 경기도와 경기도를 잇는 다리들은 27개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런 다리를 두고 서울시에서는 ‘시계외 교량’이라고 부르는데 팔당대교, 김포대교 등 총 4개가 있다.

한편 서울 강동구와 경기도 구리시를 잇는 고덕대교(가칭)가 올해 말 준공을 앞두고 있는 등 앞으로도 한강 다리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잠깐 교량의 종류에 대해서 알아보자. 교량의 종류는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순수도로교량
철도교량
철도도로병용교량
예) 마포대교
예) 당산철교
예) 동작대교

 

순수도로교량은 자동차가 다니는, 철도교량은 기차만 다니는 다리 형태로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교량 형태다. 이에 비해 철도도로병용교량은 자동차와 기차가 교량을 함께 쓰는 다리 형식으로 도시 지역에서만 나타난다. 인천공항을 오가는 영종대교를 제외하고 철도도로병용교량은 서울에만 존재한다.

 

 

 

* 동작대교: 자동차와 나란히 주행하는 4호선 전동차

 

 

 

● 동작대교: 지하철과 자동차가 함께 경주를 한다?

지면관계상 한강 다리를 일일이 다 언급할 수는 없고, 몇 개만 추려서 이야기 해본다. 첫 번째 다리는 동작대교다. 동작구 동작동과 용산구 이촌동을 잇는 동작대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도로병용교량이다. 푸른색 아치가 인상적인 동작대교는 1984년에 준공됐고, 그 다음해에 지하철 4호선이 개통한다. 동작대교 위로 푸른색으로 도장된 4호선 전동차들이 자동차들과 경주하듯 달리게 됐다. 전동차와 자동차가 한 공간에서 나란히 주행을 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무척 이색적이었다.

그래서 동작대교는 영화나 CF의 단골 다리로 등장했다. 미끄러지듯 전동차가 달리고, 그 옆으로는 자동차가 경쾌하게 주행을 하며, 그런 모습을 주인공이 미소지으며 지켜보고...

동작대교의 남단은 ‘동재기나루(銅雀津:동작진)’라고도 불렸던 동작나루가 있던 곳이다. 동작역 4번 출구에서 나오면 서울현충원으로 갈 수 있는데 중간에 이곳이 동작나루였다는 것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옛날 나룻배로 동작나루를 건넜던 사람들은 남태령으로 향했고, 과천에 당도할 수 있었다. 삼남(충청, 전라, 경상)지역으로 먼 길을 떠나야 했던 이들도 동작나루를 이용했었다.

 

 

* 동작대교: 동작대교 위에 있는 구름카페

 

 

 

동작나루는 정조대왕이 화성 능행차를 행하기 위해 건넌 곳이기도 했다. 왕이라 나룻배로 움직이시지 않고 임시로 배다리를 만들어 한강을 건너셨다. 배다리는 정약용 선생이 설계했다고 전해진다. 어쩌면 이 배다리가 동작대교의 시초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현재 동작대교가 놓인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이들이 오갔던 교통의 요지였던 셈이다.

그 수많은 발걸음에 필자도 빠질 수 없었다. 동작대교 남단에 있는 구름카페와 노을카페로 향했다. 구름카페는 동쪽, 노을카페는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동작역과 가까워서 접근성이 무척 좋다. 2009년에 오픈한 두 카페는 몇 년 전 재정비를 한 후 야경 명소로 재탄생했다. 한강은 당연하고, 남산은 물론 서울현충원을 품고 있는 서달산까지 파노라마로 볼 수 있으니 한강의 전망 ‘맛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여의도와 가까워서 그런지 서울세계불꽃축제를 편하게 볼 수 있는 명당(?)이라고 입소문이 자자하다.

참고) 구름카페 / 노을카페: 운영시간 매일 07:00 ~ 24:00 / 주차가능(유료)

 

 

 

* 반포대교: 달빛무지개분수

 

 

 

● 반포대교와 잠수교: 다리도 걷고, 달빛무지개분수도 감상하고

필자가 도보여행가라서 그런 것일까? 한강에 있는 다리들을 걸어서 넘기 편한 순서대로 분류를 한 적이 있었다.

1.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2. 보행로가 넓어야 한다.

3. 연결 대중교통이 있으면 좋다.

이 원칙에 의거하면 가장 손쉽게 넘을 수 있는 다리는 잠수교다. 잠수교는 보행 공간이 넓어 자동차의 위협(?)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다. 또한 남단쪽인 서초구 반포한강공원에는 버스정류장이 있고, 북단쪽인 용산구 서빙고동에는 경의중앙선 서빙고역이 가깝게 자리잡고 있다. 더군다나 잠수교는 795m로 한강 다리 중에서는 가장 짧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잠수교는 걸어서 넘을 수 있는 최적화된 한강 다리임에 틀림없다.

아시다시피 잠수교는 위쪽에 반포대교가 놓여 있다. 복층형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형태는 아니었다. 1976년에 잠수교가 건설됐고, 6년 후인 1982년에 반포대교가 추가로 건설된다. 두 다리가 동시에 세트로 지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가 않다.

잠수교는 유사시 탱크나 장갑차가 통과하는 걸 염두에 두고 건설되었다. 그래서 교량의 높이를 낮게 만들었다. 이렇게 다리가 낮다 보니 비가 많이 오면 제일 먼저 ‘잠수’를 하게 된다. 홍수 시에 한강 수위를 나타내는 척도가 되어주는 것이다.

 

 

* 잠수교: 한강을 걸어서 넘기에 좋은 잠수교

 

 

 

 

이렇게 키가 낮은 잠수교는 2008년에 4차선에서 2차선으로 차로가 축소된다. 차로는 좁아졌지만 보행로는 넓어지게 된다. 걷기 친화적인 다리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때 윗층에 있는 반포대교도 달빛무지개분수가 설치되며 새롭게 변신하게 된다. 반포대교 상판에 조명과 함께 분수 시설이 설치되어 더위에 지친 시민들의 가슴을 적셔주게 된 것이다. 형형색색의 조명과 함께 시원한 물줄기가 뿜어질 때는 관람객들의 탄성이 한강변에 울리게 된다.

지난 4월 1일 토요일, 올 해 첫 달빛무지개분수가 가동된 날이었다. 잠수교를 탐방한 후 달빛무지개분수를 보기 위해 자리를 잡으러 갔다. 하지만 명당 자리는 이미 누군가가 돗자리를 펴고 있었다. 워낙 관람객들이 많다 보니 자리싸움이 치열했다. 그런 와중에 외국인들의 목소리가 많이 들렸다. 이미 달빛무지개분수는 외국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볼거리로 자리를 잡은 듯싶었다.

축제가 빠질 수가 없다. 작년에 '차 없는 잠수교 뚜벅뚜벅 축제'가 개최되었다. 잠수교를 보행 전용 다리로 바꿀 예정인데 그에 앞서 축제를 통해 미리 체험을 해보자는 것이다. 올해는 상·하반기 10회씩, 총 20회의 뚜벅뚜벅 축제가 개최될 예정이다.

작년에 한강달빛야시장도 반포한강공원 일원에서 진행됐다. 코로나로 인해 3년 만에 다시 등장한 야시장은 이전에는 ‘밤 도깨비 야시장’으로 불렸다. 40여 개의 푸드 트럭과 60여 개의 판매부스 등이 야행을 즐기는 시민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 반응이 너무 뜨거웠던지 한강달빛야시장이 열리자 강남 일대 교통이 마비가 됐을 정도였다.

 

참고) 달빛무지개분수: 운영기간 4~10월(11월 이후 휴업)

4~10월 12:00, 19:30, 20:00, 20:30, 21:00 (20분씩 가동)

7~8월 12:00, 19:30, 20:00, 20:30, 21:00, 21:30 (20분씩 가동)

 

 

 

 

 

* 청담대교: 서울생각마루(자벌레) 옆 청담대교. 7호선 전동차가 주행하고 있다.

 

 

 

● 청담대교: 자벌레가 있는 즐거운 놀이터

지하철을 타다 보면 선호하는 구간이 하나쯤 있기 마련이다. 누구는 북한산, 수락산, 불암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4호선 상계역 구간을 좋아하는 이도 있고, 누구는 여의도의 고층빌딩과 한강의 밤섬을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는 2호선 당산철교 구간을 선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7호선 청담대교 구간을 좋아한다. 특히 한강 남쪽인 지하 구간에서 청담대교로 진입하는 그 순간을 무척이나 즐긴다. 전동차가 어두운 지하 구간에서 청담대교로 나올 때 특유의 진동음이 발생되는데 그런 소음까지도 클라이맥스를 기다리는 배경음으로 들릴 정도다. 어두운 지하 구간에서 ‘딱’하고 나오자마자 넓은 한강이 펼쳐지는 거 자체가 아주 극적이기 때문이다.

청담대교는 아래층은 7호선 철로가 위층에는 차로가 있는 복합교량이다. 본교가 1999년 12월에, 접속교는 2001년 1월에 개통되었다. 이렇게 접속교 개통까지 언급한 이유는 청담대교가 자동차 전용도로로 보행이 불가한 교량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담대교는 동부간선도로상에 있으면서 분당-수서간 고속도로와 바로 연결된다.

같은 철도도로병용교량이지만 청담대교는 동작대교나 동호대교와는 다른 이미지이다. 동작대교와 동호대교가 철로를 가운데에 두고 차로가 좌우로 있는 구조라면 청담대교는 영종대교처럼 위아래로 층층이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동작대교에서는 전동차와 자동차가 나란히 주행하는 화면이 많이 그려진다.

그런 모습을 주인공이 미소지으며 바라보고 있고... 이에 비해 청담대교는 한강변에서 청담대교를 올려보는 모습이 많이 그려진다. 주인공이 청담대교를 배경으로 한강변을 바라보고 있고, 이때 마침 전동차가 지나가는 장면이 펼쳐진다. 배경음악은 도시 감각에 맞는 음악으로...

 

 

* 청담대교: 서울생각마루 전망대에서 바라본 청담대교. 전망대에서는 청담대교를 바로 옆에서 조망할 수 있다.

 

 

 

청담대교의 북단에는 뚝섬유원지역이 있고, 그 아래에는 뚝섬한강공원이 있다. 뚝섬유원지 시절부터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곳에는 길이가 200미터가 넘는 자벌레가 산다(?). 이 자벌레는 서울생각마루라는 복합공간으로 전망시설과 함께 각종 문화시설이 들어서 있다. 자벌레는 특이한 외형 때문에 셀카 명소로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고 청담대교를 넘었다. 어두운 터널에서 ‘딱’하고 한강으로 나왔을 때의 쾌감은 여전했다. 뚝섬유원지역에서 하차한 후 커피 한 잔을 들고 자벌레 앞에 가서 셀카를 찍었다. 이때 마침 청담대교로 전동차가 지나고 있었고 도시 감각의 음악이 들리고 있었다.

이렇게 한강 다리들은 콘크리트 구조물이라는 무거운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서고 있다. 거기에 재미까지 더해졌다. 한강 다리들이 이렇게 재밌는 곳이다. 시민들의 즐거운 놀이터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참고) 서울생각마루 운영시간: 평일 및 주말 10:00 ~ 21: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 1월1일 / 설날 및 추석연휴

 

 

* 이 글은 서울시체육회에서 발간하는 격월간 <서울스포츠> 2023년 5~6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 노들섬: 노들섬 잔디마당에서 한강철교를 바라본 모습. 아파트 사이로 새남터 성지가 보인다. 

 

 

이해가 안 가시겠지만 필자는 예전에 한참 한강에 미친(?)적이 있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되는 양수리를 제 집 드나들 듯 다녔었고, 백두대간 깊은 곳에 있는 한강의 발원지를 탐방하기도 했었다. 또한 서울에 놓인 한강 다리들을 직접 두 다리로 건너보며, 어느 다리가 건너기 편한가 평가를 내리기도 했었다. 직접 도보로 건넌 다리 중에 가장 빈번하게 발걸음을 한 건 한강대교였다. 63빌딩과 한강철교를 지나 한강대교에 들어섰고, 그 발걸음의 마지막에는 노들섬이 있었다.

근현대에 들어 서울이 역동적으로 변해갔듯 한강도 크게 변모하게 된다. 물줄기가 달라지기도 했는데 그렇게 되니 전에는 없던 섬들이 생기게 됐다. 이 글은 한강에 떠 있는 섬들, 그 중에서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섬들에 관한 이야기다. 노들섬부터 서래섬을 찍고 새빛섬까지, 직접 발로 담은 이야기이다.

 

● 한 때 한강에 미친(?) 사람의 한강 이야기

본격적인 섬이야기에 앞서 한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한 때 한강에 미친 사람의 한강 이야기다. 한강은 우리에게 젓줄과도 같은 존재였던 만큼 시대마다 다양한 이름으로도 불렸다. 고구려 장수왕때 만들어진 광개토대왕비에는 ‘아리수’라고 기재되어 있다. 서울시의 수돗물 명칭인 그 아리수다. 고려시대에는 ‘열수’라고 불렸는데 크고 긴 강물이 열을 지어 흐른다는 뜻이다. 지역적으로도 다른 이름을 갖기도 했다. 임진강과 합수되어 서해로 흐르는 한강 하류 일대는 ‘조강’이라고 불렸고, 경기도 여주 지역은 여강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서울에서도 지역에 따라 세부적인 명칭을 가지기도 했다. 뚝섬과 가까운 곳에 매봉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는데 그 일대의 한강은 동호(東湖)라고 불렸다. 서울의 동쪽에 위치해 있고, 호수처럼 잔잔해서 동호라는 명칭이 붙은 것이다. 지금은 그 위로 동호대교가 놓여 옥수동과 압구정동을 연결해주고 있다. 서강도 있다. 지금의 마포지역의 한강을 서강 혹은 서호(西湖)라고 칭했다. 동호대교처럼 서강 일대에는 서강대교가 놓여 있는데 다리 아래에는 유명한 밤섬이 자리잡고 있다.

동호, 서호가 있으면 남호(南湖)도 있지 않았을까? 있었다. 지금의 용산 일대를 남호 혹은 용산강이라고 불렀다. 그 용산강 일대에 한강대교가 자리잡고 있고, 그 한강대교 아래에 노들섬이 있다.

 

 

* 노들섬: 한강대교에서 노들섬 서쪽편을 바라본 모습. 노들섬의 자랑인 잔디마당이 펼쳐져 있다. 사진 오른쪽에 큰 원반 모양의 달빛노들이 보인다.

 

 

●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노들섬

춘삼월이 코 앞이었지만 날씨가 쌀쌀했다. 63빌딩을 지나 노량진쪽에서 한강대교로 진입했다. 그러자 강바람이 매섭게 분다. 역시 강바람은 한강다리에서 맞아야 한다.

그렇게 노들섬에 들어섰다. 노들섬은 1995년 이전에는 중지도(中之島)로 불렸다. 요즘도 연세가 지긋한 분들은 노들섬은 모르셔도 중지도는 다 아신다. 중지도 시절의 노들섬은 서울의 대표적인 강수욕장이었다. 1950~60년대 자료사진들을 보면, 지금의 해운대를 빰칠 정도로 물놀이객들의 천국이었다.

노들섬은 처음부터 섬이 아니었다. 강변에 있는 넓은 모래벌판이었다. 그 모래벌판이 워낙 넓어서 군사훈련도 하고, 처형장으로도 쓰이기도 했다. 그래서 인근에 천주교 성지인 새남터가 있는 것이다.

모래벌판이었던 곳에 다리가 놓였다. 한강철교가 1900년에 놓인 후 남은 자재들을 모아 한강인도교라 불리는 한강대교가 탄생하게 되니 그때가 1917년이었다. 이때부터 모래벌판은 인공섬의 형태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중지도라는 명칭도 일제강점기인 이때 붙여진 것이다.

노들섬은 196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한강개발계획에 의해 완전한 섬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주변에 있던 모래벌판이 사라진 대신 그 자리를 강물이 메우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즈음 노들섬의 소유권이 어떤 기업체로 넘어갔다는 점이다. 소유주가 개인으로 넘어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민들의 발걸음은 뜸해지게 됐다. 개인 소유였던 노들섬을 2005년에 서울시에서 매입하게 된다. 이후 많은 개발계획이 타진됐으나 계속 무산되고 말았다. 공지로 남아 있던 섬은 도시텃밭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 한강철교: 노량진쪽에서 한강철교 라인을 따라 남산을 바라보고 있다. 이 구간에만 키 큰 건물이 없어서 남산을 겨우 볼 수 있다.

 

 

 

쌀쌀했지만 노들섬에는 많은 이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예전보다 확실히 접근성도 좋아지고 휴식공간도 많아졌다. 이렇게 편의성이 높아지니 시민들의 발걸음이 많아지는 것이다.

섬이 다시 북적북적해진 건 지난 2019년 9월 28일부터다. 노들섬이 ‘음악을 매개로 한 복합문화기지’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노들섬의 자랑인 잔디마당을 둘러본 후 향긋한 커피향을 따라 노들서가로 입장했다. 그런데 라이브공연이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역시 ‘음악을 매개로 한 복합문화’ 공간이 맞았다.

다시 잔디마당으로 나오니 마침 한강철교 위로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용산역으로 가는 기차였는데 그 철길을 따라가니 새남터 성지도 보였다. 아름다운 한강의 풍광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장소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한강철교 자체도 역사적인 장소다. 1900년에 완공됐고, 한국전쟁 때인 1950년 6월에 폭파됐기 때문이다. 한강철교가 폭파됐을 때 한강대교도 같이 폭파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

노들섬은 노을 명소다. 생각 같아서는 노을까지 보고 싶었으나 서래섬과 새빛섬 탐방을 하기 위해 서둘러 섬을 빠져나왔다. 나오는 길에 달빛노들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달빛노들은 섬의 서쪽에 설치된 둥근 원반 형태의 시설물로 그 크기가 무려 약 12미터에 달한다. 인공으로 달빛을 비추기 위해 만들었는데 유람선을 타고 갈 때 보면 꽤나 이색적이라고 한다.

 

 

 

*서래섬:서래섬에서 바라본 한강과 남산.

 

 

 

● 인공적이지만 정다운 섬, 서래섬

동작대교를 지나 서래섬에 도착했다. 서래섬에 입도(?)하니 가까운 곳에 세빛섬과 반포대교가 아주 가깝게 보였다. 반포한강공원 지구에 온 것이다.

서초구 반포동 일대에는 ‘서래’라는 명칭이 낯설지 않다. 동작역 아래로 반포천이 흐르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 하여 ‘서래’라고 칭한 것이다. 실제로 반포천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다 한강을 앞두고 크게 휘돌아나간다. 그 반포천 인근에 프랑스인들이 많이 산다는 서래마을이 있다.

위성사진을 보면 서래섬은 한강변 둑이 바둑판처럼 매끈하게 잘 다듬어졌다. 반대로 반포쪽은 산(山)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형태다. 이런 외형이 자연스럽지는 않다. 그렇다. 서래섬도 인공섬이다.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경조오부>라는 지도를 보면 지금의 반포에 기도(碁島)라는 섬이 보인다. 1960년대까지도 존재했던 기도는 한강종합개발이 시행되면서 그 형태가 사라지게 된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기도에 있던 돌들로 바둑돌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1986년, 제2차 한강종합개발사업(1982~86년)으로 서래섬이 태어났다. 하지만 처음부터 순산을 한 건 아니었다. 한강종합개발이 시행될 즈음에 일부에서는 홍수 예방에 더 적합하다는 이유로 서래섬을 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한강개발추진본부장이었던 이상연은 시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이곳에 섬을 만들기로 했고 실행에 옮긴다.

서래섬은 약 7천평 정도로 아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공섬이지만 정감있는 모습이다. 봄에는 유채꽃이, 가을에는 갈대밭이 펼쳐지니 계절마다 보여주는 색감이 달라서 좋다. 그런 배경물들이 없더라도 서래섬은 산책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다른 섬들과는 달리 산책로가 흙길로 되어있으니까.

서래섬에 입도를 하려면 약 50미터 정도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그 몇 십 미터 차이로 걷기에 퀄리티가 달라진다. 흙길을 밟으며 한강변을 산책하는 호사를 누리는 것이다. 참고로 서래섬은 3개의 다리로 진출입을 할 수 있다.

 

 

 

* 노들섬:  문화복합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노들섬.

 

 

● 세 개가 아닌 네 개의 인공섬, 세빛섬

서래섬에서 빠져나와 마지막 탐방지인 세빛섬으로 향했다. 세빛섬의 영어 명칭은 '플로팅 아일랜드(Floating Island)'다.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11년 5월에 탄생하였다. 애초 세빛섬은 3개의 빛이 내린다는 의미로 이름이 지어졌는데 처음에는 ‘세빛둥둥섬’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3개의 빛이라면 섬도 3개라는 뜻인가? 아니다. 정확히는 4개다. 처음에는 예빛섬이라는 대형스크린이 있는 미디어아트 섬이 2009년에 완공된다. 이후 가빛섬, 솔빛섬, 채빛섬이 2011년에 완공되어 현재의 외형을 갖추게 된다. 그러다 2014년 ‘세빛둥둥섬’에서 ‘세빛섬’으로 이름까지 개명하게 된다. 그간 세금 낭비라는 지적이 있었는데 ‘혈세가 둥둥 센다’는 부정적 이미지를 떨쳐버리고자 ‘둥둥’을 빼버렸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세빛섬이라고 하는데 딱 세빛섬이라고 꼬집을 수 있는 섬이 없다. 그냥 뭉뚱그려, 대표 이름으로 ‘세빛섬’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빛섬은 옆에 있는 반포대교나 그 아래 잠수교에서 바라보는게 가장 좋다. 조명이 켜진 세빛섬들 뒤로 관악산이 펼쳐져 있고, 그 위로 노을이 넘어가니 그 모습이 정말 장관이다.

이제까지 한강 중심부에 있는 섬들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나선 길이라 필자도 무척 신났다. 겨우 전철값으로 시원스러운 한강섬 트레킹을 할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던 것이다. 이야기거리도 많고 걷기에도 좋은 한강의 섬들, 여러분들도 그 발걸음에 동참하시면 참 좋겠다.

 

 

* 저자도: 성동구 옥수동에 있는 매봉산에서 뚝섬 부근을 바라본 모습. 중간쯤에 성수대교가 보인다. 성수대교를 중심으로 왼쪽이 뚝섬이고, 오른쪽이 압구정동이다. 성수대교 아래쪽 부근에 저자도가 있었다.

 

 

● 저자도와 잠실

한강의 섬 중에는 지금은 수면 아래로 사라진 전설적인 섬도 있다. 전설적인 섬? 무슨 아틀란티스 제국인가? 하여간 지금은 사라져 버린 그 섬은 저자도(楮子島)이다. ‘닥나무저(楮)’에서 보듯 종이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가 많아 저자도라고 불렸다. 이 섬은 옥수동 근처에 있다 하여 옥수동섬이라고도 칭했다. 중랑천이 한강에 합수되는 지점에 있었는데 인근에는 뚝섬도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존재 자체도 모르지만 저자도는 동서 길이가 2km에 면적이 약 35만평에 이를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다. 현재의 노들섬이 동서 길이가 약 700미터에 면적이 4만 5천평 정도이니 저자도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저자도는 선유도처럼 주위 풍광이 무척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래서 세종대왕께서도 뱃놀이를 즐기셨을 정도다. 그런 저자도도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사라지고 만다. 저자도의 모래를 퍼내서 압구정동에 아파트를 짓는데 사용한 것이다.

현재 서강대교 아래에 있는 밤섬도 1968년에 폭파되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퇴적물이 계속 쌓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저자도도 재탄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전설이 완성될지 모른다.

한강에는 섬이었다가 육지가 된 곳도 있다. 뽕나무밭으로 유명했던 잠실이 바로 그곳이다. 이렇게 말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 지금 어디를 봐서 잠실이 섬인가? 하지만 잠실은 1970년대 초반까지 잠실도(蠶室島)라고 불리던 섬이었다. 더군다나 부리도(浮里島)라는 작은섬도 거느리고 있었다. 행정구역도 강남이 아니라 강북에 위치해있었다. 강남지역의 옛 행정구역은 경기도 광주군 소속이 많았다. 이에 반해 잠실도는 한강 이북이었던 경기도 양주군 혹은 고양군에 속했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가 일어났다. 용산 일대까지 물에 잠기는 등, 서울은 직격탄을 맞게 된다. 이때 잠실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건기에는 육지와 붙어있던 섬의 북쪽에 새로운 물길이 난 것이다. 우기에만 섬이 됐던 잠실이 계절에 상관없이 섬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렇게 섬의 북쪽에 난 물길을 신천강이라고 불렀고, 남쪽의 물길은 송파강이라고 칭했다.

1971년, 잠실도는 을축년 때처럼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남쪽 물길이었던 송파강을 메워 잠실을 육지로 만든 것이다. 강의 남쪽과 붙게 되니 잠실은 한순간에 강남 지역이 됐다. 한편 메워진 송파강도 석촌호수로 물길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렇게 한강의 섬들은 저마다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퍼내도 퍼내도 끊이지 않을 거 같다. 그럼 한강섬들은 이야기 보물섬인가? 그 보물섬과 같은 곳을 찾아 오늘도 한강섬 트레킹에 나선다.

 

* 경조오부: 사진 오른쪽 하단에 '저자도'가 표시되어 있다. 하단 중앙에는 '기도'가 표시되었다.

 

 

* 잠실: 잠실의 변천사. 아래에 있는 송파강이 본류(메인)이었고, 위에 신천강이 지류(사이드)였다. 하지만 송파강을 메꿔 잠실섬이 육지화됐고, 지류였던 신천강이 메인이 되버린다. 사진은 인터넷을 참조했다.

 

 


 

@ 한강섬 트레킹

* 추천코스: 노들역 -> 한강대교 -> 노들섬 -> 동작대교 -> 서래섬 -> 세빛섬

* 길이: 약 6km

* 난이도: 하

* 교통편: 9호선 노들역에서 하차한 후, 한강대교에 진입함. 서래섬을 방문한 후에는 9호선 신반포역을 이동할 수 있음. 잠수교를 넘고 싶은 분은 경의중앙선 서빙고역을 이용할 수 있음.

 

 

 

 
 

 

 

 

* 남산탑곡마애불상군: 바위의 동쪽편이다. 사진 왼쪽에 삼층석탑이 보인다.

 

 

 

<경주> 득템한 느낌이야! 이런 사진을 찍다니!

- 계림숲부터 남산 마애불까지 걷고, 찍고

 

 

* 2022년 12월에 경주를 다녀왔습니다. 그중 12월 21일에 행한 경주 여행을 약식으로 스케치한 기행문입니다.

이번 경주 여행의 중심축은 황리단길과 첨성대였다. 아침에 황리단과 첨성대를 보고 출근(?)했다 저녁에 다시 황리단과 첨성대를 찍고 퇴근(?)하는 식이었다. 그러고보니 황리단길만 거의 왕복 4회 정도 한 거 같다. 누가보면 경주 시민인 줄 알겠다.

이날은 경주여행의 마지막날로 계림숲을 시작으로 월정교를 넘어 경주 남산 일대를 탐방지로 삼았다. 구체적인 코스는 이렇다.

계림숲 -> 경주향교 -> 월정교 -> 상서장 ->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 -> 남산탑곡마애불상군 -> 국립경주박물관

얼핏보면 상당한 거리를 이동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계림숲, 월정교, 경주향교는 하나로 묶일만큼 서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있다. 계림숲은 신라 건국초기부터 조성된 숲으로 경주 김씨의 시조 김일지의 탄생 설화를 품고 있는 유서깊은 숲이다. 그러고보니 거의 조성된지 거의 이천년 정도된 숲이다. 그래서일까, 계림숲에 입장할 때의 느낌이 무언가 달랐다.

 

 

* 계림숲

 

 

 

* 월정교

 

 

 

월정교는 경주 중심부와 남산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남천 위에 놓여진 다리이다. 경덕왕 19년(760년)에 만들어졌는데 지금의 다리는 2009년에 복원을 한 것이다. 거대한 누각식으로 만든 월정교는 야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첨성대와 함께 야경투어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고운 최치원의 숨결이 살아있는 상서장을 탐방한 후 드디어 경주 남산에 들어섰다. 최치원은 신라말 3최라 불릴 정도로 천재적인 인물이었다. 12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18살에 과거시험 합격하게 된다. 이후 29살까지 당나라에서 관직 생활을 하다 고국인 신라로 돌아오게 된다.

최치원은 6두품이었다. 금의환향을 했지만 그의 신분적 한계는 명백했다. 당시 신라는 지방 호족세력들의 발호로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때 최치원은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조를 올려 당시의 폐단을 바로 잡고자 했다. 하지만 진골 출신들의 견제로 인해 그의 의견은 묵살된다. 이후 그는 야인이 되어 세상을 등지게 된다.

그 시무 10조를 작성했던 곳이 바로 상서장이었다. 상서장의 앞쪽에는 고운대라는 바위가 있는데 최치원의 호를 따서 이름을 지은 바위다. 최치원은 고운대에 올라 왕성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 고운대: 상서장 입구 옆쪽에 있다.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과 남산탑곡마애불상군을 탐방할 차례다. 경주 남산은 불국토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불교 유적들을 품고 있는 곳이다.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은 큰 바위에 인공적으로 감실을 파고 그곳에 부처상을 조각을 했다. 할매부처, 감실부처라고도 불린다. 감실은 불상이나 신위 등을 모시는 공간을 말한다.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은 높이가 1미터 정도로 크지는 않지만 신라 불교의 초기 유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는 단단한 화강암이 많은 지역이라 바위에 무언가를 새기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에 비해 유럽의 조각가들은 좀 수월했을 것이다. 왜? 그 지역은 화강암보다는 좀 무른 석회암 재질이 많으니까!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을 뒤로 하고 호젓한 산길을 따라 내려갔더니 차도가 나왔다. 그 길 위에 표지판이 있었고, 그 표지를 따라 남산탑곡마애불상군을 탐방하러 갔다. 남산탑곡마애불상군은 옥룡암이라는 사찰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

 

 

*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

 

 

 

* 남산탑곡마애불상군

 

 

 

'마애불상군'이라는 명칭처럼 수많은 조각들이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통상적으로 마애불은 부처님 한 분을 조각하거나 좌우 협시불을 더 조각하는게 일반적이다. 한마디로 많아야 세 분 정도를 새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탑곡마애불상군은 바위에 다양하게 새겨 넣었다. 바위를 동서남북으로 잘 활용하여 각 면마다 불교 문물을 새겨 넣은 것이다.

부처님 형상은 물론 탑과 괴수들도 보인다. 탑? 그렇다. 바위에 탑도 새겨져 있다. 9층과 7층, 두 개나 새겨져 있다. 바위에 새겨져 있으니 마애탑인 것이다. 바위에 탑을 새길 수 있냐고 물으실 수도 있는데... 바위에 종을 새긴 경우도 있다. 그건 마애종이다. 서울 관악산 옆에 삼성산이라고 있는데 그곳에 마애종이 있다. 김중업 건축박물관 인근에 있다.

바위를 동서남북으로 활용을 해서 그런지 남산탑곡마애불상군은 사면불이라고도 불린다. 삼층석탑이 있는 곳이 남쪽인데 오른쪽의 계단을 따라 올라갈 수 있다. 북쪽, 동쪽, 서쪽의 조각상들은 올려봐야 하는데 남쪽의 조각상들은 올려보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게 다른 점이다.

동서남북을 돌면서 엄청나게 사진을 많이 찍었다. 이날 아침에 눈과 비가 섞여왔는데 그 여파로 남산 일대는 물안개가 머금고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신령스러운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귀한 문화재를 보고 있는데 물안개까지 살짝 끼다니...!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 배낭이 대신 인증을 해주고 있다. 부처님을 모신 마애불이 있다하여 이 일대 골짜기는 '불곡'이라고 부른다.

 

 

 

* 남산탑곡마애불상군: 바위 북쪽이다. 여기에 탑이 그려져 있다. 탑이 그려진 바위가 있다하여 이 일대 골짜기는 '탑곡'이라고 불린다.

 

 

 

* 남산탑곡마애불상군: 바위의 남쪽면이다. 이 불상군 앞쪽에는 족구장만한 공간이 있고, 한쪽편에 삼층석탑이 서 있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은 현장에서 트레킹을 직접 행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래서 당연히 야외수업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아주 간간히 실내강의를 할 때가 있다.

 

그렇게 PPT를 올려놓고 실내강의를 하다보면 꾸벅꾸벅 조시는 분들을 마주하게 된다. 일부러 예쁜 풍경 사진도 걸어놓고 목소리도 좀 크게 높이는데도 졸음을 못 이겨하시는 분들이 계셨다.

 

실내강의도 잘 하고 싶은데 그게 말처럼 싶지가 않다. 그런 수강생분들을 목격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스쳐가기도 한다.

 

'내가 그 분들의 불면증을 치료하고 있는 건가?'

 

다른 문제도 있다. 실내강의 빈도가 아주 낮다보니 PPT를 오래도록 울거먹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몇 년 전에 썼던 PPT를 업데이트 하지 않고 계속 사용했던 것이다.

 

아무리 내가 현장 트레킹에 특화됐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아니라라는 생각이들었다. 실내강의를 들으시는 수강생분들도 소중한 시간을 투자해서 그 자리에 오시기 않던가. 강사들은 수강생분들의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 그런 존중과 예의가 없는 이들은 수강생 앞에 서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대면 강의를 못 했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더 반성과 분발이 필요했다. 그래서 PPT를 비롯해서 실내강의 자료들을 많이 손을 봤다. 사진도 좀 더 좋은 걸 배치하고, 자가 진단 테스트 항목도 만들어보았다.

 

'재미로 해보는 자신의 트레킹 레벨 지수'인데 이 포스팅을 읽어보시는 분들도 간단하게 한 번 해보시면 좋을 듯하다.

 

 
1
일상생활에서도 걷기를 즐겨한다

2
트레킹화, 배낭, 스틱 같은 장비들이 있다

3
계단을 봐도 겁이 나지 않는다

4
트레킹에 대한 책들을 읽어봤다

5
우중트레킹의 매력을 알고 있다

6
나만의 트레킹 최애 장소가 있다

7
트레킹 프로그램이 있으면 무조건 신청한다

8
혼자서도 씩씩하게 둘레길을 탐방한다

9
산티아고순례길 혹은 파타고니아트레킹 같은 외국 트레일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10
다른 일정보다 트레킹 일정을 먼저 챙긴다

11
다음주는 어느 코스로 트레킹을 할지 벌써 설레인다

 

* 초급: 3개 

* 중급: 6개

 

* 고급: 9개

 

설문지를 10개로 만들기로 했는데 만들다보니 11개가 됐다. 한 번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체크해보시라.

뭐 돈 드는 것도 아닌데...ㅋ

 

이 트레킹 레벨이 자신의 건강 지수가 될 수도 있다. 트레킹을 꾸준히 하는 사람치고 건강이 나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 의성 금성산 조문국 고분군

 

 

 

 

 

 

2021년 8월 12일.

 

경북 의성군 여행은 계속됐다. 의성군은 삼한시대의 소국인 조문국(召文國)이 있던 곳이다. 조문국? 좀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이전에 포스팅한 탑리 오층석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적지가 있어서 바로 가보았다. 탑리 오층석탑과 조문국 유적지는 같은 금성면 소재지에 있는데 자동차로 5분 정도면 닿을 수 있다. 필자는 뚜벅이라 그냥 걸어갔다.ㅋ

 

소문국이라고도 불리는 조문국은 금성면을 중심지로 삼았던 삼한시대의 소국이었다. 신라 벌휴이사금 2년( 185년)에 정복되는데 현재 조문국 왕족들의 무덤들이 금성면 일대에 군집해있다. 참고로 '이사금'은 초기 신라의 왕 칭호이다. 그 이후에 나타나는 '마립간'도 왕 칭호다.

 

조문국 왕족들의 무덤을 두고 '의성 금성산 고분군'이라고 칭한다. 이곳에는 경주에서 볼법한 큰 고분들이 16개나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고분은 높이가 8미터, 동서 길이가 40미터가 넘기도 한다. 금성산 고분군 말고도 의성 지역에는 큰 고분들이 더 있다고 하니 고대시대의 의성 지역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을 거 같다.

 

의성 금성산 고분군 중심에는 경덕왕릉이 있다. 신라 경덕왕? 경덕왕(景德王)은 신라시대의 제 35대(742~765) 왕으로 유교 통치체제를 강화한 인물이다. 그럼 진짜 신라 경덕왕의 능이 조문국 고분군에 있는 것인가?

 

 

 

 

 

* 의성 조문국 경덕왕릉

 

 

 

 

 

 

아니다. 신라 경덕왕의 능은 경주 남산 인근인 경주시 내남면에 위치해 있다. 신라의 왕이 굳이 경주가 아닌 의성에 묻힐 이유가 없지 않은가. 참고로 신라 경덕왕은 관제개편을 통해 당시 발호하던 귀족세력들을 억누르고 왕권강화를 행한 인물이다.

 

그럼 의성 금성산 고분군에 있는 경덕왕릉(景德王)은 누구의 능인가? 말 그대로 조문국의 경덕왕이 잠든 무덤이다. 정확히는 조문국의 경덕왕으로 추정되는 능이다. 그러고보면 조문국 경덕왕(景德王)이나 신라 경덕왕(景德王)이나 한자까지 똑같다. 그러니 헤깔리지...ㅋ

 

금성산 고분군에 있는 경덕왕릉은 왕릉치고는 무척이나 소박하다. 조선시대 권세가들의 무덤 정도로 꾸며졌다. 금성산 고분군은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걷기에 좋은 곳이다. 데이트 코스로도 많이 이용된다고 한다. 실제로 애정 표현을 과하게 하던 젊은 커플과 필자의 동선이 겹쳐져서 꽤나 애를 먹기도 했다. 어찌보면 이곳도 공동묘지인데 이런 곳에서 애정행각을 벌인다? 그러고보면 자신이 서 있는 공간도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곳이 천국도 되고 지옥도 되는 듯싶다.

 

예전 왕릉 답사를 하면서 느낀 점이 있었다. 소나무 숲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왕릉을 가면 세상의 번뇌가 싹 다 씻겨내려갔다. 그래서 한 때는 왕릉에 방점을 찍고 답사를 다닌 적이 있었다.

 

죽은자들의 공간에서 산 자들이 만끽하는 휴식과 명상. 그런 휴식과 명상은 다른 곳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 금성산 조문국 고분군

 

 

 

 

  

* 금성산 조문국 고분군

 

 

 

 

 

 

 

* 탑리오층석탑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일대를 여행한 후 다음 탐방지인 경북 의성군으로 향했다.

 

주천면에서 충북 제천역으로 이동한 후, 경북 의성군 금성면 탑리역으로 가는 무궁화호 기차를 탔다. 탑리역에 정차하는 기차가 많지 않은데 운 좋게 탈 수 있었다.

 

탑리역은 성 모양으로 외관을 꾸몄다. 인근에 금성산성이 있어 그 형상을 옮겨놓은 것이다. 탑리역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탑리리 오층석탑이 있으니, 석탑으로 외관을 꾸미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그리고 성 모양도 우리나라의 산성이 아닌 외국의 캐슬처럼 보였다.ㅋ

 

탑리역은 소박하지만 옛 정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하지만 의성군 금성면 일대의 인구 감소로 인해 하루에 상행 5편, 하행 5편만 운행된다. 지역 여행을 행하다보면 지역소멸이라는 말이 실감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서울로만 집중되고 있는 이런 상황이 과연 맞는 일인가?"

 

중앙과 지역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탑리 오층석탑을 탐방하러 갔다가 국토균형발전까지 생각해봤다.

석양이 지기 시작해서 서둘러 오층석탑을 친견하러 갔다. 골목을 돌아 오층석탑 앞에 섰다.

 

"와!"

 

높이 9.6미터의 석탑이 눈 앞에 펼쳐지니 감탄사가 나올 수밖에... 더군다나 석탑은 높은 토단 위에 쌓여 있어 더 높아보였다. 마치 배구선수 김연경이 하이힐을 신고 있는 모습이랄까? 참고로 토단은 흙으로 쌓은 높은 단을 말한다.

 

탑리 오층석탑은 외형이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는 석탑으로 후기 신라시대에 조성됐다. 전탑(塼塔)처럼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 형식의 탑이다. 거기에 목조탑 형식도 가미했다.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로 국보 제77호로 지정되어 있다.

 

 

 

 

 

 

 

* 탑리오층석탑: 탑리 오층석탑은 높은 토단 위에 서 있어 키가 더 커 보인다.

 

 

 

 

 

 

뜻풀이를 해보자. 전탑(塼塔)은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한다. 흙을 구워 벽돌을 잘 만들었던 중국에서 유행했던 방식이다. 그럼 모전석탑은 무엇인가? 모전석탑(模塼石塔)은 전탑을 모방해서 만든 탑을 뜻이다. 즉 벽돌이 아닌 자연석을 써서 만들었지만 벽돌탑 모양 비스무리하게 외형을 뽑은 탑을 말하는 것이다. 이 모전석탑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이한 탑 양식으로 후기 신라시대부터 고려 전기까지 만들어졌다.

 

탑리 오층석탑은 지붕돌이라고 불리는 옥개석이 층층으로 쌓였있다. 계단처럼 층계를 이룬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전탑양식이다. 감실이 있는 1층은 아주 크게 만들었으나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이다. 감실은 불상이나 신위, 성체 등을 모셔두는 공간을 말한다. 현재 탑리 오층석탑에서는 그 공간이 비어있다.

감실에 문이 달리지도 않았고, 빈 공간이 나름 아늑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

 

지나가는 길고양이들에게! 실제로 석탑 인근에는 길고양이들이 많이 오갔다.

 

이렇게하여 의성군 금성면 탑리 오층석탑 답사를 무사히 마쳤다. 현장에 너무 늦게 도착해서 좀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던 거 같다. 그래서 사진이 좀 안 이쁘게 나왔다. 그게 좀 아쉽지만 그 핑계대고 또 한 번 갈 수 있지 않은가?^^

 

ps. 일상생활에서 잘 안 쓰는 용어들이 나와서 좀 어려우신가? 어렵지만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것도 답사여행의 또다른 재미이다. 모전석탑에 대해서는 이전에 작성한 장락동 모전석탑에 작성한 포스팅이 있으니 참고해주시면 좋겠다. 충북 제천시 장락동에 있는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은 보물 제4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포스팅 클릭

 

 

 

 

 

 

 

* 탑리오층석탑: 1층 탑신에 감실이 있다. 아무래도 동네 고양이들의 안식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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