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문경새재 고집한 이유


문경새재 역사트레킹... 전라도 지역 선비들도 넘으며 합격 기원



16.02.29 11:36 최종 업데이트 16.02.29 11:40


 











 
▲ 주흘관 문경새재 제1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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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씨가 다른 세 명의 장군이 지켰다'는 성삼(性三)재, '경사가 가팔라서 오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미시령(彌時嶺), '남쪽에 높은 고개'라는 남태령(南泰嶺), '밤에는 소들을 끌고 넘을 수 없다'는 우금(牛禁)티 등등... 우리땅은 산이 많은 만큼 그 산을 넘을 수 있게 해주는 고개도 많습니다. 그것을 부르는 이름도 다양했습니다. '재', '령', '치(티)'등으로 불리기도 했고, '여우고개'처럼 그냥 '고개'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고개를 넘는 이들의 사연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선비들은 청운의 꿈을 안고 고개를 넘었고, 보부상들은 장시를 찾아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종교인들은 포교를 위해 넘었겠지요. 이렇듯 고개는 많은 이들의 발자국을 담아낸 공간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풍부한 스토리텔링이 흘러나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룻밤의 사랑 이야기부터 귀신에 홀린 이야기까지... 여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고개를 하나 소개합니다. 그곳이 어디냐? 바로 문경새재입니다.
 



 
▲ 기도굴 초기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이 좁은 바위굴에서 미사를 드렸다. 탐방로에서 좀 떨어진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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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의 꿈을 안고 문경새재를 넘었던 선비들


새재는 '새들도 넘기 힘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한자로 풀면 조령(鳥嶺)이 됩니다. 제3관문, 즉 조령관이 위치한 곳의 해발 고도가 642m인 만큼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듯싶습니다. 서울남부를 지키고 서 있는 관악산의 정상고도가 629m이니, 조령의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물론 해발 1102m인 성삼재나 826m인 미시령 앞에서 높이를 말한다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겠지만...

문경새재는 영남대로(嶺南大路) 상에 놓여 있습니다. 조선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며, 전국을 'X'자 형태로 연결하는 도로망을 구축합니다. 그렇게 하여 6개의 대로(大路)가 탄생하게 되는데 영남대로도 그중 하나입니다. 수많은 고갯길을 제쳐두고 문경새재가 우리나라의 으뜸 고갯길로 꼽히는 이유도 문경새재가 영남대로 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문경(聞慶)이라는 지명 이름도 문경새재의 격을 높여주는 데 큰 일조를 했습니다. 과거를 보러 나서는 경북 영주나 강원도 삼척의 선비들은 가까운 죽령을 넘지 않았습니다. 경북 김천이나 성주 등지의 선비들도 추풍령을 넘지 않았습니다. 죽령은 '주욱 미끄러진다'라고 해서,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해서 기피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대신 '경사스런 소리를 듣는다'라는 뜻을 가진 '문경'이기에 과거길에 나서는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필수코스처럼 밟고 지나갔습니다. 심지어 전라도 지역의 선비들까지 문경새재를 넘으며 합격을 기원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큰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의 마음은 비슷한 거 같습니다. 조그만 징크스도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이렇듯 문경새재는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불러 모았고, 그로 인해 조선의 으뜸 고갯길로 자리매김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 길에 선 발자국들이 모두 다 좋은 걸음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 지름틀바우 기름을 짜는 도구인 '지름틀'과 유사하게 생겼다하여 '지름틀바우'라는 이름이 붙여진 바위. '지름틀'은 경상도 사투리다. 그런데 필자는 저 바위를 악어바위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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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과 조일전쟁(임진왜란)

1592년 4월 14일. 부산포에 왜군들이 상륙합니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입니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20만 명은 파죽지세로 북상합니다. 그러다 조령을 앞에 두고 잠시 숨고르기를 합니다. 당시 조령 앞에서 주춤했던 일본군은 고니시유키나와가 지휘하는 제1부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부대였습니다. 이들이 숨 고르기를 한 건 조령의 지세가 험준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당시 일본군들의 전투력이 뛰어났다고 하지만 낯선 곳에서 험한 지형지물을 만나면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고니시유키나와는 수차례에 걸쳐 조령을 정찰했다고 합니다. 자칫하다가는 자신의 부대가 큰 타격을 입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쾌재를 부릅니다. 그 험한 조령을 지키는 조선군 부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선군을 이끌었던 장수는 신립이었는데 그는 조령이 아닌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조령이 험준한 골짜기라면 탄금대는 기병전이 가능했던 개활지입니다.

이후의 이야기들은 잘 아실 겁니다.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크게 패배하고 맙니다. 조총으로 무장한데다 백병전까지 능한 일본군을 상대로 개활지에서 싸운다는 건 승산이 없는 게임임에 분명합니다. 그럼 왜 신립 장군은 조령이 아닌 탄금대를 선택했을까요? 신립하면 당대 최고의 무장이었는데...








 
▲ 조곡관 제2관문 조곡관. 임란이 발발한 지 2년 후인, 1594년에 만들어졌다. 앞에 보이는 다리는 조곡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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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이유는 기병술을 전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본군들이 보병 위주였기에 기병의 말발굽으로 찍어 누를 생각이었습니다. 보병은 기병의 공격에 취약한데다 신립 자신이 기병술에 능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탈영병 문제와 연락체계 문제였습니다. 산 중에서 진을 치다보면 시야가 가려질 테고, 그 틈을 타 병사들이 탈영을 할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훈련이 제대로 안 된, 오합지졸인 당시의 조선군이기에 산악보다는 개활지에서 진을 쳐야 그나마 연락체계가 제대로 작동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4월 26일, 고니시유키나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조령을 넘었고, 탄금대에서 조선 육군을 격파합니다. 탄금대 패배 소식을 전해들은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갔고, 5월 2일 일본군은 한양을 점령합니다.

만약 신립이 탄금대가 아닌 조령에서 일본군들의 북상을 막았다면 어땠을까요? 험준한 산악지형을 방패삼아 게릴라 전술을 취했다면 어떤 결과가 도출됐을까요? 한편 다음과 같은 시각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당시 동원된 병사들이 오합지졸인 농민군이라는데 의병에 참여한 이들도 제대로 훈련이 안 된 농민들이 주축이었습니다. 같은 오합지졸인데도 후자쪽은 승전보를 울렸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오합지졸을 '승리의 용사'로 만드는 것도 장수의 책무라는 겁니다.

역사에 가정법이 없다지만 문경새재 트레킹을 하다보면 그런 가정들이 끊임없이 떠오르더군요. 이 고지에 궁수들을 배치하고, 저쪽에서는 매복을 하고... 자신 스스로가 조령 방어 사령관이라고 생각하고, 가상으로 병력을 배치해보는 것도 문경새재 트레킹의 또다른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 조령원 새재에는 관리들의 숙박시설인 원이 세 곳이나 있었다. 동화원, 신혜원, 조령원이 바로 그곳이다. 이 조령원 터는 197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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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그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문경새재에 방어시설이 들어선 건 1594년의 일입니다. 충주 사람 신충원의 건의로 지금의 제2관문인, 조곡관(鳥嶺關)이 들어선 것입니다.  그 이후 숙종대에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 제1관문인 주흘관(主屹關)이 들어서게 됩니다.

그 세 개의 관문은 각기 다른 멋이 있습니다. 제1관문인 주흘관은 넓고 평평한 터에 세워져 있어 성곽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한 성문이라고 합니다.

산 중 깊은 곳에 위치한 제2관문인 조곡관은 조곡교라는 다리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앞으로 계곡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죠. 조곡관의 계곡물은 적군의 침입을 방해하는 역할도 하지만 관광객들의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역할도 합니다. 그만큼 조곡관은 '비밀의 정원'인 것처럼 아름다운 관문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제3관문인 조령관은 조령 정상에 우뚝 솟아 있습니다. 조령관은 오랑캐를 막기 위해 세워져서 그런지 주흘관과 달리 북쪽을 향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렇게 외적 방비를 위해서 세워진 관문들이지만 딱히 그 기능대로 쓰인 적은 없었습니다. 대신 그 관문들 덕택에 다른 고개들보다 문경새재는 더 안전해졌지요. 시험 징크스 때문에 고집한 것도 있지만 다른 고개들보다 새재가 더 안전했기에 선비들의 발걸음이 문경으로 향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 조령관 제3관문인 조령관.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쪽을 향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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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봄에는 경사스러운 소식이 많기를!


북한의 핵실험과 로켓 발사, 개성공단 폐쇄, 테러방지법에 대한 논란 등등... 요즘 뉴스를 보면 너무나 안 좋은 소식들만 들려옵니다. 올 봄에는 문경(聞慶)이라는 말처럼, '경사스러운 소식'이 많이 들려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따뜻한 봄날에 좋은 소식을 기대하며, 문경새재를 한들한들 거닐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문경새재는 초보자들도 부담없이 즐길 수 있을 수 정도로 탐방로가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한들한들거리며 거닐어 볼 수 있을 겁니다. 마치 봄바람을 타고 나는 나비처럼요.







 
▲ 주흘관 제1관문 주흘관. 사진 오른쪽 중간 부분에 수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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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길박물관










● 트레킹 정보

1. 코스: 수옥정관광단지(괴산군) ▶ 제3관문 ▶ 제2관문 ▶ 제1관문 ▶ 옛길박물관 ▶ 문경새재 관리사무소

2. 이동거리: 약 9km

3. 소요시간: 3시간 30분 정도(휴식시간 포함)

4. 교통편: 수옥정관광단지는 수안보(충주)에서 접근하는 것이 편하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수안보 시외버스정류장까지 가는 시외버스가 있다. 수안보에서 수옥정관광단지까지는 7km 정도다. 버스가 다니긴 하지만 하루에 4편 밖에 없다. 택시를 타면 1만 원 정도가 든다.

5. TIP: 트레킹 종료점을 문경방면으로 한 것은 편의성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옥정에서 수안보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 4편뿐이다. 이에 비해 문경새재 입구에서 문경읍까지 가는 버스는 20분마다 있다. 또한 수안보는 터미널이 독립된 건물로 존재하지 않는다. 노상 정류장으로 되어 있다. 이에 비해 문경터미널은 아담한 독립 건물로 존재한다.













 

 

 

 

한국에도 이런 대형석불이? 외국 안 가도 되겠네 2

 

고려 전기시대 대형석불 테마 탐방...

가을 여행지로 여기 어떠세요?

 

14.09.30 15:51 최종 업데이트 14.09.30 15:51

 

 

 

 

 



 

 
▲ 대조사 석불 대조사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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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사찰에 10미터가 넘는 큰 석불이?

 

이제 충남 부여로 가보자. 부여군 임천면에는 대조사라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도 거대한 석불이 있다. 대조사는 부여 천도를 위한 밑돌 역할을 해주는 중요한 사찰이었다. 백제 성왕이 천도를 앞두고 직접 대조사의 창건을 명했다고 하는데, 사찰터를 지목한 사람은 유명한 백제의 고승 겸익이라고 한다.

현재의 대조사는 작은 사찰이다. 하지만 그렇게 작은 사찰에 10미터가 넘는 큰 석불이 있다. 바로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바로 그것이다. 대조사 석불도 고려 초기 작품이다. 그래서 정교성보다는 투박함이, 조화미보다는 개성이 넘쳤다. 얼핏 보면 우스꽝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 인체비례로 따지면 4등신에 가깝다고 한다.

은진미륵과 대조사 석불은 지리적으로 가깝게 위치해 있고, 또한 제작 시기나 규모가 유사하기 때문에 곧잘 같이 묶여 이야기된다. 또한 두 석상은 서로 비교가 되기도 한다. 은진 미륵이 뒷산과 좀 거리를 두고 평지 쪽으로 나와 있다면, 대조사 석불은 바로 옆쪽에 작은 언덕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 언덕에서 뻗어 나온 소나무 가지가 석불에 우산처럼 드리운 형상을 하고 있다.

한편 석불 앞에 있는 법당에는 불상이 없다. 법당의 창문을 열면 큰 석불이 시원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도포를 두른 안동 이천동 석불?

이제는 경북 안동으로 가보자. 안동 시내에서 북쪽으로 5km쯤 떨어진 곳에 가보면 제비원이라는 곳이 있고, 그 뒤쪽으로 이천동 석불이라는 거대한 석불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공원으로 바뀌었지만 제비원(燕飛院)은 사람들이 여행길에 쉬어가던 일종의 여관이었던 원(院)이었다.

영남에서 충청도나 한양으로 갈 때에는 안동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야 했는데 그 길목에 제비원이 있었다. 그렇게 사람의 왕래가 빈번했던 곳에 거대한 석불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멀리서 보았을 때 이천동 석불은 도포를 두른 모습이었다. 큰 도포를 두르고 얼굴을 불쑥 내민 형상이었다. 뒤쪽의 무성한 수풀과 어우러져서 그런지, 자신을 다 드러내지 않고 적당히 노출(?)한 모습이었다.

안동 이천동 석불도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든 석불이다. 용미리 쌍미륵처럼 몸통 부분과 머리 부분이 별개의 암석으로 제작된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몸통 부분, 즉 필자가 도포를 둘렀다고 지칭한 큰 바위 상단 중앙에 머리 부분을 조각한 별개의 돌을 얹었다는 것이다. 단지 머리 부분만 조각하여 올렸을 뿐인데도 자연석인 몸통 부분이 서로 어우러져 일체형의 거대한 석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석불 제작자의 지혜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대목이다.

 


 

 
▲ 이천동 석불 안동 이천동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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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장승 같은 고려 전기시대의 대형석불들

이제까지 고려 전기에 제작된 대형 석불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봤다. 그렇다면 왜 고려 전기시대 사람들은 이처럼 대형 석불들을 만들었을까? 당시는 고려왕조 창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호족들의 독특한 지방문화가 불교문화제에 투영된 시기였다. 활기차고 강건한 지방문화가 석불 건립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거대한 돌미륵을 탄생 시켰던 것이다.

그렇게 탄생된 대형 석불은 해당지역의 민간신앙까지 접목되어, 큰 장승을 세운 것처럼 형상화됐다. 거인 같은 미륵불이 마을입구나 왕래가 잦은 곳에 떡하니 서 있게 된 것이다. 요즘처럼 청명한 가을날. 전국에 산재한 돌미륵을 찾아 복을 기원해 보자. 그렇게 여행을 하다보면, 어쩌면 '복'된 테마 여행이 될 수도 있다. 여행도 하고, 유물답사도 할 수 있으니까!

 

 

 

※ 도움말 : 찾아가는 길

1. 용미리 쌍미륵: 서울 불광역에서 파주 광탄면행 버스에 탑승한 후 용암사에서 하차한다. 소요시간 약 50~60분 정도.

2. 논산 은진미륵: 논산 읍내에서 건양대행 버스에 탑승 후 관촉사에서 하차함. 읍내에서 관촉사까지는 도보로 약 40분 거리임.

약 3km 정도다. 그래서 택시를 타도 부담이 없음.

3. 대조사 석불: 부여군 읍내에서 임천행 버스 탑승. 임천면사무소에서 하차한 후 대조사로 이동. 면사무소에서 대조사까지는

도보로 20~30분 정도 소요됨.

4. 안동 이천동 석불: 안동 시내에서 제비원(연미사)행 버스 탑승. 시내에서 제비원까지는 약 5km 정도 떨어져 있음.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 작가라고 합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캠핑할 때 만난 밥도둑들___ 2편

예천 밥 '할매'와 검은 고양이


 


 

 
▲ 경북 예천의 삼막주막 예천에는 삼막주막이라는 유명한 주막터가 있다. 그 곳은 하천 세 곳이 만나는 곳이라 수로 교통의 요지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룻터가 생기고 주막거리가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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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편에 이어서
 

 

 

 

# 예천 '할매'가 주신 밥 한 그릇

 

 

 

2012년 7월 18일.

당시 필자는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하고 있었다. 경북 안동을 거쳐 내성천이 흐르는 예천군으로 향했을 때다. 유명한 회룡포를 가려고 열심히 페달을 밟아댔지만 서산으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기에 다음날을 기약하며 예천군 풍양면에 있는 작은 마을로 진입했다.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어 좀 불안했지만 다행히 마을회관 앞에 있던 오두막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조용한 시골마을에 낯선 여행객이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이슈'가 되는 걸까? 다음날 아침부터 '할매'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어디서 왔노?"
"밥은 묵고 다니나?"

할매들의 그런 관심이 고마웠다. 외로운 여행길을 도닥여주는 할머니들의 아름다운 관심들이었으니까. 그런데 할매들은 이구동성으로 식사문제를 물었다. 그러면서 옥수수나 고구마 같은 간식거리들을 주시기도 했다. 어떤 분들은 밑반찬까지 건네줄 정도였다.

"이거 괜히 제가 와서 마을분들한테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입으로는 그렇게 이야기를 했지만 손으로는 감사히 받았다. 애써 집에서 가져오신 귀한 음식을 그냥 돌려보낸다면 그것도 예의가 아니니까!

그런 할매중에는 아예 밥을 주신 분도 계셨다. 족히 2인분이 넘을 것 같은 밥을 그릇에 담아 전해주셨다. 보관을 잘 하라고 랩으로 잘 덮어주시기까지 했다. 정말 감사했다. 하지만 그때 필자는 아침을 막 먹었던 터라 밥그릇을 오두막 한편에 잘 놓아두었다.

"할머니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저녁 밥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요."

그렇게 감사를 표시한 후 간단히 짐을 꾸려 회룡포로 향할 준비를 했다. 전날은 비가 와서 그냥 텐트에서 대기를 했지만 그날은 햇살이 센 것 이외에는 자전거 타기 '딱' 좋은 날씨였다. 오두막 주위에다 묵혀 놓았던 빨래들을 널어놓고 출발했다. 

 

 

 





 

 
▲ 회룡포 색깔이 있는 벼를 심어 저렇게 논에다 '벼그림'을 그렸다. 논을 도화지 삼아 벼로 모양을 내다니, 정말 대단하다! 당시 내가 예천군을 방문했을 때는 <예천 곤충엑스포>를 앞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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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내 밥을 도둑질 했나?

 

 

 

회룡포로 향하는 길에는 유명한 삼강주막과 내성천이 있었다. 내성천의 금빛 모래에 경탄하며 회룡포를 향해 열심히 페달을 굴렸다. 삼강주막, 내성천, 회룡포 탐방까지 했더니 예정시간보다 훨씬 늦게 다시 텐트로 돌아왔다.

'아까 할머니가 주신 밥이 있었지. 그거 잡탕국에다 말아먹으면 되겠다. 따로 밥 하기 귀찮았는데 잘됐네!'

텐트로 돌아왔더니 좀 이상했다. 널어두었던 빨래는 한 쪽에 쌓아 있었고, 밥그릇은 내가 애초 놓았던 자리에서 빗겨나 있었다. 또 랩은 살짝 벗겨져 있고 누군가 한 숟가락 크게 떠먹은 듯 밥이 덜어져 있었다.

'동네 분들 중에 배고픈 분이 한 숟가락 드셨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누가 내 밥을 먹었지?'

그 순간 필자의 시야에 확 들어오는 물체가 하나 있었다.

'저 녀석이다! 저 녀석이 분명 내 밥을 훔쳐 먹었을 거야!'

시커먼 고양이 녀석이었다. 어제부터 내 텐트 근처를 기웃기웃 거린 녀석이었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대처했어. 대낮에도 밥도둑들이 들끓을 줄이야!'

길 닦아 놓으니 뭐가 먼저 지나간다고, 할매들이 나 먹으라고 한 밥을 정체불명의 고양이가 먼저 입을 댄 것이다. 분노(?)를 삭이며 나머지 밥을 잡탕국에다 말아서 맛있게 먹었다. 할매들이 주신 귀한 밥이니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먹었다. 처음에는 고양이가 입 댄 자리를 덜어내 버릴까 하다가 그것도 다 말아먹었다. 그날만큼은 그 고양이와 한솥밥 식구라고 생각하고 밥을 먹었던 것이다.

그 당시 검은 고양이는 억울했을지 모른다. 심증만 있지 확실한 물증이 있냐고 성토했을지 모른다. '시커먼 고양이가 나 혼자 뿐이냐!'며 앙칼지게 반론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녀석이 밥도둑이라는 사실은 움직일 수 없는 팩트였다. 그건 다음날 내게 밥을 주신 할매가 직접 말씀해주셨다. 

 

"이제 가려고?"

나는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내게 밥을 주신 할매가 다시 오셨다.

"예 이제 가려고요. 덕분에 밥도 잘 먹고 잘 쉬었다 갑니다. 근데 어제 제 빨래 걷어주셨죠? 안 그러셔도 됐는데... 정말 감사했습니다. "
"뭘 그거 가지고... 근데 어제 시커먼 고양이가 밥을 훔쳐 먹더라고."
"그렇죠. 고양이가 먹은 거 맞죠? 어쩐지 사람이 먹은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내 추측이 맞았던 것이다. 다음부터는 절대 밥도둑들에게 밥을 빼앗기지 말자고, 굳게 다짐을 하며 길을 나섰다. 하지만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 난 밥도둑들의 계속된 타깃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나도 먹고, 너도 먹자'라는 식으로 생각을 고쳐먹기도 했다.

이렇게 현지분들에게 환대를 받고, 또한 음식물을 빼앗기는 재미난 에피소드들이 있기에 여행은 항상 나를 설레게 한다. 그래서 또 배낭을 꾸리고 지도를 살펴보는 것이 아닐까? 이번에는 어떤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만나게 될까, 하는 기대를 가지며...

 

 

 

 
▲ 내성천 황금빛 모래사장이 아름다운 내성천. 내륙 하천에서 저렇게 고운 모래사장을 보기가 쉬운 일인가? 그런데 영주댐이 건설된다면 저런 금빛모래사장도 사라질지 모른다. 자연은 자연 그대로 두는 것이 가장 좋다.

 

 

 

 

 

 

 

 

 

 

 

 

 

캠핑할 때 만난 밥도둑들___ 1편

 

예천 밥 '할매'와 검은 고양이

 

14.08.09 14:46l최종 업데이트 14.08.09 14:46

 

 

 

 

 

 

 

 

 

 

 

▲ 추자도 필자는 저렇게 캠핑을 하고 다녔다. 저렇게 다녔으니 야생동물들에게 밥을 많이 빼앗기지... 이 곳은 추자도다. 2011년 여름에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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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다니면 캠핑도 많이 하겠다."

"그렇지 뭐."
"어디서 캠핑하는 게 좋냐? 그냥 강가 같은 데서 하는 게 좋냐, 아니면 정식 캠핑장 가서 하는 게 좋냐?"

여행을 많이 다니다보니 지인들이 이런저런 아웃도어 정보를 물어온다. 하지만 나는 속시원한 대답을 해줄 입장이 못 된다.

 

 

 

# 술판 벌이는 캠핑장보다는 궁벽진 곳에다 야영을...

 


그간 텐트를 쳤던 장소들은 공동묘지, 동네 야산, 마을회관 공터 등이었다. 정식 캠핑장을 잘 이용하지 못했던 건, 돈이 없어 그러기도 했지만 시끌벅적한 캠핑장이 싫어서 일부러 피하기도 했었다.

"위하여! 먹고 죽자!"
"피박에 쓰리고네! 거기다가 독박까지 썼어!"

다음날 가야 할 길이 멀고도 먼데 옆 텐트에서 이런 소리가 나면 그날은 잠을 다 잔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사람들이 오지 않는 궁벽진 곳에다 텐트를 구축했다. 조금 무섭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잘 만했다. 서울에서는 들을 수 없는 산새소리들을 벗 삼아 잠을 청하면 그만이었다. 샤워문제나 식수조달 문제가 걸리기는 했지만 궁벽진 곳에서의 캠핑은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었다.

하지만 내 캠핑은 매번 같은 방식으로 제동이 걸리곤 했었다. 사람이 제동을 건 게 아니었다. 동물들이 방해를 한 것이다. 녀석들은 항상 내 텐트 주위를 맴돌았다. 텐트 안에 있던 침낭에 느긋하게 누워있던 너구리, 내 텐트가 자기 집인양 열심히 거미줄을 치고 있던 왕거미 등등. 하지만 이 정도는 애교다. 너구리는 쫓아버리면 되고, 거미줄은 날려버리면 됐으니까.

 

 

 


 
▲ 경북 예천군 풍양면 풍양면 청운리에서 인심 좋은 '할매'들을 만났다. 저렇게 묵은 빨래들을 널어두고 회룡포를 다녀왔는데 할매가 빨래까지 거두워주셨다. 정말 몸둘 봐를 모를 정도로 감사했다. 그런 사람냄새나는 인심이 그리워 여행을 떠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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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잡탕국을 맛있게 먹던 누렁이

 

 

문제는 내 음식물을 노리는 녀석들이었다. 어차피 필자나 동물들이나 배고픈 건 매한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녀석들에게 내 음식을 빼앗길 수 없었다. 자비심을 베풀 수 없었다. 가뜩이나 가난뱅이 여행을 하는데 음식물까지 녀석들에게 빼앗겨 봐라. 얼마나 서글프겠는가!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만 녀석들에게 많이 빼앗겼다. 어느 동네에 갔을 때의 일이다. 나는 저녁을 준비할 때 다음날 아침밥까지 같이 준비한다. 그래야 아침 시간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도 저녁을 지어 먹고, 나머지 음식물이 담긴 코펠들을 한쪽 구석에 놔두었다. 그리고는 동네 한 바퀴를 걷고 왔다.

그런데 다시 텐트로 돌아올 때 어떤 누렁이 한 마리가 코펠에 고개를 쳐박고 맛있게 음식물을 먹고 있는 게 아닌가! 그 녀석이 먹고 있던 것은 잡탕국이었다. 몇몇 장거리 여행자들은 점심을 식당에서 해결한 후 먹고 남은 반찬들을 쓸어 담아온다.

그렇게 담아온 음식물들은 저녁시간에 라면과 어우러져 잡탕국이 된다. 이 잡탕국은 그날 점심에 어떤 반찬들을 쓸어 담았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데 얼큰할 때도 있고, 시원할 때도 있다. 그래서 잡탕국인 것이다. 다음날 아침에 먹을 것을 고려해 넉넉하게 준비를 했는데 그 누렁이 녀석이 아침용 잡탕국을 '짭짭'거리며 먹고 있었던 것이다.

"저 망할 녀석 같으니! 감히 내 아침 음식을 건드려!"

아쉽지만 나머지 잡탕국을 버려야 했다. 정체 모를 누렁이와 같은 음식을 먹기가 꺼림칙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일들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아예 텐트 안에다 남은 음식물이 담긴 코펠을 들여 놓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방법도 유용하지 않았다. 밤에 뒤척이며 자다가 코펠을 건드려 잡탕국이 침낭에 쏟아진 것이다. 가뜩이나 좁은 텐트에 코펠까지 들여놨다가 그렇게 낭패를 당한 것이다.

 

 

 

 


 

 

 

▲ 국제탈춤공연장: 안동 시내에 국제탈춤공연장이 있다. 그 입구에 하회탈 석상이 방문객들을 환영해 주고 있었다.

 

 

 

 

▲ 안동 이천동 석불: 망토를 두르고 수풀 속에서 그 앞을 지나는 중생들을 굽어 보시는 것 같다

 

 

 

 

 

안동 이천동 석불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든 석불이다. 몸통 부분과 머리 부분이 별개의 암석으로 제작된 독특한 형상을 갖고 있는 것이 이 석불의 특징이다. 몸통 부분, 즉 필자가 망토를 둘렀다고 지칭한 큰 바위 상단 중앙에 머리 부분을 조각한 별개의 돌을 얹었다는 것이다. 단지 머리 부분만 조각하여 올렸을 뿐인데도 자연석인 몸통 부분이 서로 어우러져 일체형의 거대한 석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석불 제작자의 지혜와 구성 감각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대목이다.

안동 이천동 석불은 고려 전기 작품이다. 파주 용미리마애이불입상(일명 파주 쌍미륵 석불)이나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등이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석상들이다. 이 시기에 세워진 석불들은 하나 같이 다 엄청난 크기들을 자랑하고 있다. 신체비례에 맞춰 정교함을 구현하는 방식이 아닌, 선이 굵은 방식으로 '키다리 아저씨' 같은 큰 석불을 조각했던 것이다. 일례로 대조사 석불은 인체비례로 따지면 4등신에 가깝고, 얼굴은 '얼큰이'다. 정교성보다는 투박함이, 조화미보다는 개성이 넘치는 석불들이 탄생했던 시기가 바로 고려 전기였던 것이다.

그럼 왜 고려 사람들은 선이 굵으면서 개성이 넘치는 큰 석불들을 제작했을까?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사람들보다 세공기술이 덜 해서 그런 식으로 석불을 제작했단 말인가? 고려 전기 시대에는 마을의 안녕에서부터 개인적 기복까지 다 받아주는 수호신과 같은 '키다리 아저씨'가 대표적인 석불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런 대형 석불들은 해당 지역의 민간 신앙이 접목된 형태라고 한다. 마치 큰 장승을 세운 것처럼 거인 같은 수호신이 마을 입구나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으니 해당 지역 사람들은 얼마나 든든했겠는가?

 

 

 

 

 

▲ 안동 이천동 석불: 멀리서 보면 이천동 석불은 망토를 두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천동 석불은 몸통에 따로 제작한 머리를 올린 형상이다.

 

 

 

 

 

▲ 파주 용미리마애이불입상: 일명 파주용미리석불입상 또는 쌍미륵석불이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쌍둥 석불 형식을 띄고 있다. 왼쪽에 원립불을 쓰고 있는 상은 손에 연꽃을 들었는데 남성을 뜻한다고 한다. 오른쪽 방립불을 쓰고, 손을 합장한 상은 여성을 뜻한다고 한다. 원립불은 말그대로 둥근 모자 형태이고, 방립모는 그에 비해 각이 진 모자 형태라고 한다. 용미리마애이불입상은 보물 93호로 등록되어 있다.

 

 

 

 

 

# 파주 쌍미륵과 안동 이천동 석불

더불어 파주 쌍미륵은 잉태까지 '책임'져 준다고 하지 않던가? 파주 쌍미륵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남녀 쌍미륵 형상이라 잉태와 관련된 기도들이 많이 올려진다는 것이다. 즉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부부들이 많이 와서 기원을 드리고 간다고 한다. 실제로 이 쌍미륵과 관련된 설화도 잉태와 관련이 있었다.

파주 쌍미륵도 안동 이천동 석불처럼 자연석을 몸통으로 이용하였고, 얼굴 부위도 따로 제작하여 올렸다고 한다. 쌍미륵이 있는 용미사를 방문했을 때, 필자는 쌍미륵을 보면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경내에서 그것도 석불 앞에서 큰 소리를 내며 웃는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짓이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스님이었다. 누가 뒤에 있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웃었던 것이다.

"쌍석불을 보니까 좋네요. 그냥 보기만 해도 복이 오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불경한 짓을 했지만 웃음소리가 나쁘지 않게 들렸는지, 스님은 필자를 꾸짖지 않고 그냥 거처로 돌아가셨다. 필자는 그런 큰 웃음을 안동 이천동 석불 앞에서도 터뜨리고 만 것이다. 망토를 두른 듯한 모습이 재밌었고, 수풀 사이로 몸을 쑤욱 내민 듯한 모습도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하느라 심신이 다 지쳐있었지만 석불을 보고 있을 때만큼은 근심 걱정을 다 내려놓고 크게 웃었다.

그런 '불경'한 모습을 보고 어떤 불심이 깊은 분이 손가락질을 해댔지만 필자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마을의 수호신에게 안녕을 기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석불 앞에서 경망스럽게 '깔깔'거리며 웃었던 것은 예의에 어긋난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런 안동 이천동 석불이 준 큰 기쁨 덕택에 나는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계속 해서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천동 석불을 보기 위해 거의 20Km 이상을 돌아갔지만 200Km 이상을 갈 수 있는 에너지를 자연스럽게 충전시킨 느낌이었다.

 

 

 

 

# 인공적인 4대강 VS 자연적인 석불

 


글을 마치기 전에 4대강과 관련된 이야기를 잠깐 언급해 보겠다. 이미 실패한 정책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4대강에 대해서, 필자까지 나서서 왈가불가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필자가 스스로 느낀 감상 정도만 언급해 보겠다.

필자는 경북 안동에서부터 구미까지 낙동강 자전거도로를 타고 이동을 했다. 필자는 예전부터 국토를 종단하는 자전거 도로가 하나 개설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자전거도로든 도보여행길이든 무동력 여행을 하는 여행자들이 안전하게 이동을 할 수 있는 길이 개설됐으면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4대강의 부속시설로 만들어진 현재의 4대강 자전거도로 방식은 반대한다. 필자가 직접 주행을 한 결과 4대강 자전거도로는 안전성이 결여된 구간이 상당히 많았다. 4대강을 중심축에 두고 억지로 설계를 해서 그랬는지 급경사가 다반사였다. 기존의 산길과 농로길을 끌어 와서 4대강 자전거도로 탈바꿈을 시키느라 그런 무리수가 나왔던 것으로 판단된다. 급경사가 진 농로길은 굴곡이 심한 일반국도 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도로폭이 좁을뿐더러 안전시설물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를 가장 당혹시켰던 것은 강 중간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보였다. 그런 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아름다운 이곳에 이런 시설물이 있어야 하지? 굳이 이런 시설물이 여기 있을 필요가 있을까?'

자연석을 이용하여 석불을 제작함으로써 주위사물들과 혼연일체가 된 안동 이천동 석불을 보다 '쌩뚱맞게' 낙동강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입맛이 무척 씁쓸했다.

 

 ▲ 낙단보 경북 군위군에 위치한 낙단보다.

 

 

 

 

▲ 낙단보 경북 군위군에 위치한 낙단보다.

 

 

 

▲ 낙동강 낙동강 상류의 사진이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두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보를 쌓고, 콘크리트를 바르면서 4대강이 친환경적이라고 하면 그걸 누가 믿겠는가?

 

 

 

 

 

▲ 안동 이천동 석불

 

 

 

 

 * 안동 이천동 석불: 마치 수풀 속에서 세상을 굽어 보시는 듯한 형상이다.

 

 

 

 

 

2012년 7월 14일: 여행 31일차

# 안동 이천동 석불 앞에서 크게 웃어댔다!


누구는 여행을 직접 할 때보다 여행 계획을 꾸릴 때가 더 흥분된다고 한다. 지도를 보며 동선을 그리고 검색을 통해 탐방지에 대한 사전 정보를 습득하는 행위 자체가 즐겁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행 계획을 꾸리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한정된 시간과 뻔한 예산을 가진 가난뱅이 여행자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다녀보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느껴보고 싶으나 시간과 경비 제약 때문에 가보고 싶은 탐방지를 뺄 수밖에 없었던 아픔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가난뱅이 여행자들이라면 더 많은 뺄셈을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여행자들이 그렇듯, 필자도 절경과 유적지를 양대 축으로 삼아 여행 계획을 수립한다. 한편에서는 아름다운 풍광에 매혹되고, 또 한편에서는 찬란한 우리 문화유산에 감탄사를 내뱉는다는 말이다. 양대 축을 동시에 누리면 금상첨화겠지만 따로 따로 체험한다고 해도 큰 불만은 없다. 이번 여행기에 소개할 안동 이천동 석불은 후자 쪽에 속할 것이다. 이천동 석불은 감탄사를 유발시키는 훌륭한 우리의 문화유산이었던 것이다.

 

 

 

 

 ▲ 안동 이천동 석불: 이천동 석불이 있는 곳은 제비원이라는 하여, 조선시대 국영여관이 있었던 곳이다.

 즉 석불이 세워진 제비원 일대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교통의 요지였던 것이다.

 

 

 

 

* 안동 화회마을 보건진료소: 하회마을에서는 보건소도 한옥집이다.

 

 

 

 

한편 필자는 이천동 석불 앞에서 '깔깔깔'하고 연신 웃음보를 터뜨렸다. 석불 앞에서 경망스럽게 웃었더니,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필자를 보고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다. 그럼 필자는 왜 그렇게 부처님 앞에서 망동된 행동을 했던 것일까? 혹시 필자는 불교에 대한 존중심이 없던 것이 아닐까?


#거인 같은 고려 전기시대 석불들

전편인 경북 봉화 여행기에서 필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처님을 만나 뵙고 왔다고 했다. 청량산에 있는 청량사에서 세상을 시원스럽게 굽어보시는 석불 좌상을 두고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 말에 빗대보자면 안동 이천동 석불은 세상을 즐겁게 해주시는 부처님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멀리서 보았을 때 이천동 석불은 망토를 두른 모습이었다. 큰 망토를 두르고 얼굴을 불쑥 내민 형상이었다. 그런 독특한 형상의 석불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런 엉뚱한 생각이 스쳐지나 갔다.


'부처님이 누더기 같은 도포를 두르고 불쌍한 중생들을 위해 고행의 길을 가시다 안동 이천동에서 석상이 되신 것이 아닐까?'


 

 

 

▲ 안동 이천동 석불: 멀리서 보면 이천동 석불은 망토를 두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천동 석불은 몸통에 따로 제작한 머리를 올린 형상이다.

 

 

 

 

* 도산서원: 안동을 방문하면 꼭 가봐야 할 곳이다.

 

 

 

 

 

▲ 청량산 청량폭포: 등산로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청량폭포가 있었다.

 

 

 

 

▲ 청량사: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 어제는 물귀신, 오늘은 고기귀신의 유혹에 넘어가다!

즐겁게 청량산 산행을 마치고 난 후, 필자가 다시 베이스캠프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 경이었다. 그런데 내 베이스캠프 옆쪽에 승용차와 함께 작은 텐트가 하나 쳐져 있었고, 수염을 기른 어떤 아저씨가 분주하게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삼겹살을 굽는지 고소한 냄새가 솔솔 내 코를 자극시켰다. 어제는 물귀신이 나를 유혹하더니만 오늘은 고기귀신이 나를 유혹하나?

"자전거여행 다니시나 봐요? 여기 와서 같이 식사 하시겠어요?"

서울에서 봉화군으로 귀농을 하셨다는 분이셨다. 자신도 젊었을 때 자전거여행을 많이 다녔던 터라 자전거 여행족들의 마음을 잘 안다고 했다.

"아참, 아까 저 아래에서 쓰레기를 줍던데..."
"그거요. 제가 먹은 건 아니고요. 그냥 보기 흉해서 제가 환경미화 좀 했죠."
"아, 역시 그랬구나! 진짜 자전거여행 하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단 말야."

별 뜻 없이 쓰레기를 주었을 뿐인데, 그 덕에 난 푸짐하게 삼겹살과 술을 얻어 마실 수 있었다. 착한 일을 해서 내가 상을 받았던 것일까? 그 귀농아저씨도 그날 같이 캠핑을 했다. 젊은 시절 캠핑을 자주했던 분이라 귀농 이후에도 종종 캠핑을 해오셨다고 한다.

 

 

 

 

 ▲ 청량산 도립공원 주자창: 필자가 청량산을 방문했을 때는 장마철이라 그랬는지 주자창이 텅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최고의 캠핑을 즐길 수가 있었다.

 

 

 

 

 

 

 * 청량사: 청량사는 경사면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지 계단이 많은 사찰이었다. 한편 청량사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사찰이었다. 잘 정돈된 사찰이라고 할까?

 

 

 

 

 

# 명당자리였던 청량산 베이스캠프

 

"그 팔각정 명당자리에요. 그 자리 내가 좋아하는 자리인데..."

알고 보니 내가 아저씨의 명당자리를 '선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량산 등반에서 오는 피로감에다 푸짐한 저녁 식사까지 대접받았더니 노곤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날은 자리에 눕자마자 그냥 눈이 감겼던 것 같다.

다음날.
그토록 예쁘게 안개가 낀 산을, 난 난생처음 보았다. 낙동강에서 피어오르는 안개가 청량산 봉우리들을 휘감고 있는 모습은 장관중의 장관이었다. 마치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맛에 강변 캠핑을 하는 거구나!

그렇게 진기하고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뒤로 하고 나는 계속 자전거여행을 이어갔다. 외롭고 힘든 길이었지만 아름다운 우리나라를 마음껏 느낄 수 있었으니, 난 행운아였던 셈이다.

 

 

 

 

▲ 차 한 잔: 청량사 같은 고즈넉한 사찰에서 느긋하게 차를 한 잔 마시고 싶다!  

 

 

 

 

 ▲ 청량사 청량사 석탑

 

 

 

 * 청량사 전통 찻 집: 저런 곳에서 풍경 소리를 들으며 차 한 잔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 청량사: 청량산 중턱에 있는 청량사. 사찰 한 가운데에는 석탑과 함께 부처님이 계셨다.

 

 

 

 

 

* 청량사: 보기만 해도 시원한 곳에 부처님이 계셨다!

 

 

 

 

 

# 청량산 베이스 캠프 완성

 

 

그러면서 손수 커피 한 잔을 타서 내게 건네주었다. 역시 아웃도어를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다르긴 다른 듯싶었다.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자칫하면 숙소도 못 잡고 노숙을 할 판이었는데 말이다. 시골 인심에 아웃도어 인심까지 더해진 행운이었다.

가로등 불빛에 의존하여 그 직원이 알려준 곳을 찾아갔다. 그 곳은 팔각정 같은 곳으로 나무 의자와 테이블을 설치해두고 있었다. 좋은 풍광을 바라보면서 도시락을 먹으면 딱 좋을 것 같은 장소인 듯싶었지만 내 시야는 가로등 불빛 너머를 넘지 못했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 주위 풍광만 지레짐작 할 수밖에 없었다. 난 서둘러 의자와 테이블을 한 쪽으로 몰아 텐트 칠 공간을 마련했다. 그것들이 돌처럼 무거워서 힘을 좀 쓴 후에야 그럭저럭 비가 들치지 않을 정도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야 드디어 나의 '청량산 베이스캠프'가 완성될 수 있었다.

 

 

▲ 청량산 하늘다리: 저 하늘다리를 건너는 것만으로도 스릴이 넘친다.

다리를 건널때 강력한 횡풍이 불면 그 스릴감은 공포감으로 바뀔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길!

 

 

 

▲ 청량산 하늘다리: 선학봉과 자란봉을 연결하는 청량산 하늘다리는 해발 800m 고도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바람이 세차게 분다. '바람의 계곡'에 하늘다리를 걸어놓은 셈이다

 

 

 

 

청량산 하늘다리에서 스릴을 즐기다!

다음날.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정신없이 잠에 빠져 있었는지 늦잠을 잔 것이다. 세면을 하고 난 후에 어제 내가 '물아일체'를 했던 곳을 찾아보았다. 기억을 더듬어 그 곳을 찾았는데, 자세히 보니 거기는 좀 움푹 파인 곳처럼 보였다. 선녀탕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충의 틀은 나왔다. 그래서 난 내식대로 이름을 지어보았다. 신선탕으로.

그런데 신선탕 주변에 쓰레기가 눈에 띄는 게 아닌가! 누군가가 먹다 남은 술병과 안주거리들을 그대로 놓고 간 것이다. 어제밤에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난 좀 짜증이 났다. 자연은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와서 '유명관광지 티'를 내고 갔기 때문이었다. 어떤이들이 '유명관광지 티'를 내던 곳에서 난 좋다고 물아일체를 했던 것이다.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청량산까지 와서 등산을 하지 않고 그냥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전거와 텐트를 잘 놓아두고 등산 버전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등산을 하기 전에 신선탕 근처에 있는 쓰레기들을 수거하고 갔다. 내가 전날 물아일체를 했지만, 한편으로는 풍기문란도 했기에 그 벌로 환경미화를 자청했던 것이다. 내가 재미있게 즐겼던 만큼 남들도 재밌게 놀 수 있게 뒷정리를 깨끗이 하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청량산도 국립공원 클럽의 물망에 오를 정도로 절경을 뽐내는 산이다. 낙동강 상류와 어우러진 청량산의 모습은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또한 산 중턱에 있는 청량사에 가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처님도 만나 뵐 수 있다.

한편 청량산에는 하늘다리가 있다. 그 곳에 서면 자신의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산바람이 세게 분다. 스릴을 느끼고 싶지만 번지점프를 할 용기가 나지 않는 분들은 청량산 하늘다리를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필자가 구름다리를 통과할 때, 갑작스럽게 돌풍이 불었는데 '삐그덕' 소리를 내면서 다리가 요동을 쳤다. 스릴 만점이었다.

 

 

▲ 래프팅: 낙동강 상류는 물살이 급해 래프팅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실제로 청량산 도립공원 인근에는 래프팅 업체들이 산재해 있었다.

 

▲ 청량사 산들이 병풍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있지만 부처님이 계신 곳은 주위가 확 트여 있어, 풍광이 시원스럽다.

 

▲ 낙동강 낙동강은 청량산을 굽이쳐 흘러간다.

 

 

 

 

▲ 낙동강과 청량산: 필자가 봉화를 방문했을 때는 장마철이라 그랬는지 무척 유량이 풍부했다. 물소리가 아주 거세게 들렸다.

 

 

 

 

 

 

강변을 바라보면서 잠이 드는 것처럼 로맨틱한 '굿나잇'이 또 있을까? 나는 바다도 좋아하지만 강변에서의 하룻밤을 더 선호한다. 그 이유는 강변이 갖고 있는 아기자기함 때문이다. 난 광활한 망망대해를 인간의 한계를 일깨워 주는 각성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다독여 주는 입체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강물을 끌어와 농사를 짓고, 강촌으로 친구들과 즐겁게 모꼬지를 가고, 캔 맥주 하나 들고 홀로 한강에 나가 실연의 아픔을 강물에 실어 보내고...

이런 강변에 산이 어우러지면 그 입체성은 더욱더 강조될 것이다. 경쾌하게 흐르는 강물 소리에 산 새 소리가 어우러지면, 최소한 사운드면에서는 이미 무릉도원에 도달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 이번 여행기는 강변 캠핑에 대한 이야기이다. 필자는 백두대간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매일같이 텐트를 쳤다. 한계령 도로 정상에서 텐트를 쳤고, 울릉도 북면 천부항에도 쳤다. 또 수많은 초등학교와 폐교, 개활지에도 쳤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최고의 캠핑지에 대한 순위가 매겨졌다. 그럼 최고의 캠핑지 1순위는 어디일까.


 

 

 

 

▲ 청량산 베이스캠프: 낙동강가에 세운 청량산 베이스캠프. 청량산을 병풍 삼고, 낙동강 끌어 안을 수 있었던 최고의 캠핑지였다!

한편 저렇게 정자 아래에 텐트를 치니 밤새 비가 내려도 물난리를 겪을 일이 없었다.

 

 

 

 

* 청량산 도립공원 입구: 필자가 방문을 했을 때는 방문객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느긋하게 주차장에서 베이스캠프를 칠 수 있었다.

 

 

 

 

 

# 청량산에 만난 도립공원 직원

 

당시 나는 경북 봉화를 거쳐 안동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강원도 태백을 통해 봉화군으로 입성을 했는데, 내가 보기에 봉화는 행정상으로는 경상북도이지만 지형적으로는 강원도와 별반 다르지 않아보였다. 그렇게 험준한 지형을 가지고 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봉화지역은 '심산유곡'의 절경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명소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명호면에 있는 낙동강시발지공원에서부터 청량산 도립공원 입구까지의 길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병풍처럼 서 있는 청량산을 따라 낙동강이 시원하게 내달리는 모습은 장관 중에 장관이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 근처에 캠핑장이 있나요?"

나는 조금 다급한 목소리로 도립공원 관리사무소에 도움을 청했다. 낙동강과 청량산이 뽐내는 절경을 카메라로 담아내느라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몰랐고, 그러다 덜컥 일몰 시간을 맞았기 때문. 설상가상이라고 그때 빗줄기가 한 두 방울씩 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어, 여기는 근처에 캠핑장이 없는데... 여유가 있으면 민박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비수기라 민박 요금이 비싸지는 않을 텐데요."

자신도 아웃도어를 무척 좋아한다고 밝힌, 관리사무소의 한 젊은 직원은 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비수기에는 민박 요금이 비싸지 않다고 하지만, 내게는 비쌌다. 하루를 만 원으로 버텼던 내게 5만 원 짜리 펜션 숙박은 사치였기 때문이었다.

"아참, 이렇게 하면 되겠네요. 여기에서 쭈욱 가다보면 주차장이 나오는데 거기 보면 비를 막을 수 있는 오두막이 있거든요. 거기다가 텐트를 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장마철이라 사람도 거의 없으니까요."

 

 

 

 

* 청량산: 청량산의 최고봉인 장인봉에 올라 한 컷! 청량산은 유력한 국립공원 후보지 중에 한 곳이라고 한다. 


 

▲ 현포항 일대 북면 현포항. 이국적인 모습이 들 정도로 참 아름다운 풍광이다. 저런 곳에서 낙조를 본다면 더욱더 멋질 것 같다.

 

 

 

 

 

* 현포항: 정말 멋있다!

 

 

 

 

---> 전편에 이어서

 

 

 

 

 

# 주머니가 가벼운 여행자들을 위한 팁

 

필자는 2012년 6월 23일부터 29일까지 7일간 울릉도에 머물렀다. 6월 29일까지 쓴 비용은 29만7000원이었다. 이를 다시 울릉도에서만 지출한 비용을 계산해보니 19만6000원이었다. 여기에 강릉-울릉도 여객선 왕복요금인 9만8000원을 빼보니 9만8000원이 되었다. 즉 약 7일간 울릉도에 있으면서 9만8000원으로 여행을 한 것이다. 이 비용에는 태하 모노레일 비용, 섬목-저동 구간 배 삯, 울릉도 군내버스 비용 등이 다 포함된 것이다.

 

물론 필자는 텐트를 치고 밥을 지어 먹으며 여행을 하는 터라 위와 같은 저렴한 비용으로도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누구나 다 저렇게 가난뱅이처럼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주머니가 가벼운 여행자들을 위한 울릉도 탐방에 대한 팁을 드리려고 한다.

 

울릉도는 숙박이나 음식점의 90%가 울릉읍 저동-도동-사동에 밀집되어 있다. 그래서 읍내를 빠져나오면 호젓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다. 울릉도도 성수기 시즌에는 민박 잡기가 만만치 않다고 한다. 주머니가 가벼운 여행자들은 성수기 시즌을 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울릉도 중심가만 빠져나오면 텐트 칠 곳은 아주 많기에 캠핑 장비를 완비했다면 여름에도 느긋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다.

 

 

 

 

 

 

 

 

 * 천부항: 천부는 북면의 중심지이다. 천부에 면사무소와 함께 버스종점이 있기 때문이다. 울릉도 버스노선의 주선은 도동-천부 라인이다.

만약 북면 일대에서 해안도로 걷기를 하신다면 천부항은 꼭 방문하시게 될 것이다.

 

 

 

* 관음도: 울릉도의 또다른 자랑거리인 관음도다. 사진에서도 보듯 현재 관음도는 다리로 울릉 본섬과 연결이 되어 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본인이 관음도 입구에 다다랐을 때는 관음도에 진입을 할 수 없었다. 입구는 공사중이었는데, 관리자가 없었다.  

 

 

 

 

 

 

# 버스와 도보를 결합한 여행이 울릉도 여행으로 제격!

 

울릉도의 해안은 그 자체가 명품이다. 그래서 울릉도의 일주도로를 걷는 것만으로도 좋은 여행이 될 수 있다. 일주도로가 해안가를 끼고 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주도로를 걷는 여행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모든 일주도로가 걷기에 편한 것은 아니다. 길을 가다보면 입출입이 한 곳인 단방향 터널이 나온다. 그런 터널을 걸어서 넘어가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필자는 자전거를 타고 터널을 넘었는데, 어찌나 차들이 빨리 다니는지 등 뒤에서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울릉도에는 단방향 터널이 여러 곳이 있는데, 신호를 잘 받으면 한 번에 여러 터널을 쉽게 건널 수 있는 구조였다. 반면 신호를 놓치면 상당히 오래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터널에서 차들이 빨리 지나갔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도보로 터널을 지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해안가 걷기는 북면 일대가 최적이었다. 내가 시시포스 놀이를 했던 항목령을 넘으면 북면 현포항이 나온다. 이곳부터 섬목까지는 걷기도 좋고, 풍광도 멋있다. 그 길을 따라가면 코끼리 바위나 삼선암, 관음도 같은 멋진 풍광을 시원스럽게 볼 수 있다.

 

울릉도는 버스 운행이 자주 있는 터라 버스와 도보를 결합하는 여행을 하면 좋을 것 같다. 버스가 1시간에 한 대 꼴로 있는데 시골버스치고는 상당히 자주 운행하는 편이다. 중요 관광지를 둘러보고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다음 관광지를 둘러보고 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여행 중에 만난 대학생들은 이런 방식으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버스 요금도 상당히 저렴한 편이다. 울릉도 시내버스의 기점인 도동 읍사무소 입구에서 북면 면사무소 소재지인 천부까지 거리는 30Km가 넘는다. 여행일지를 찾아보니, 6월 26일(여행13일차)에 나는 천부항 인근에 텐트와 자전거를 주차해 놓고 도동까지 버스를 타고 이동을 했다. 앞서 언급한 '일몰 관광버스'를 이용했던 것이다. 당시 왕복요금으로 3000원 정도를 지불했으니 무척 저렴하게 여행했던 셈이다.

 

다른 지역의 시골버스 같은 경우는, 30Km 이상 이동했으면 편도 요금만 3000원이 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울릉도 버스-도보를 결합한 방식으로 여행을 한다면 굳이 렌터카를 이용하지 않고도 재미난 여행을 할 수 있을 듯싶다. 물론 이런 방식은 단독이거나 소규모 팀으로 움직여야 가능할 것이다.

 

걷기를 하다 식사를 못할 경우도 생길 것이다. 울릉도의 경우 면소재지 정도에 가야 식당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자전거여행 중에 거의 매일 5끼를 먹었다. 영양보충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그 중에 3식은 시리얼과 두유로 해결을 했다. 우유보다는 두유가 보관하기가 편하고 유통기간이 길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렇게 식사를 하니 무척 간편했다. 또 시리얼과 두유를 섭취하면 영양공급 문제가 해결이 되는 장점도 있었다.

 

 

기왕 하는 여행, 맛집도 다니고 그래야 하지 않냐고? 맛집 기행도 있는데, 그렇게 하면 무슨 재미냐고? 혼자 몸으로 식당에 들어가면 식당 주인이 별로 안 좋아한다. 서울이야 혼자 밥먹는 사람도 많지만 유명관광지는 단체손님 위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그냥 눈치 보면서 밥먹는 것보다 시리얼로 때우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한 끼 식사 정도는 그런 식의 행동식을 섭취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맛집 너무 좋아하지 마라. 남이 맛있다고 해도 나한테는 별로일 수 있는 게 음식이다. 음식 맛이라는 건 매우 주관적인 개념 아니겠는가?

 

전쟁 때는 주먹밥 먹고도 전투를 잘 했다고 하지 않던가! 주먹밥보다는 두유나 우유에 시리얼 둥둥 띄어서 먹는 게 더 맛있을 것이다. 가난뱅이 여행자라면 이런 정도는 감수를 해줘야지!

 

 

 

 

 * 관음도: 석포전망대에서 찍었다.

 

 

 

▲ 석포전망대에서 본 관음도: 석포전망대에서 본 관음도이다. 석포전망대에 오르면 저런 멋진 풍광들을 볼 수 있다.

한편 관음도에는 다리가 놓였지만, 필자가 입구에 갔을 때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관음도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다.  

 

 

 

* 관음도의 다리: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건물은 관음도 입도 편의를 위해 마련된 엘레베이터다. 하지만 내가 갔을 때는 공사중이었다.

 

 

 

 

* 소라계단: 태하모노레일 옆으로는 소라계단이 있다. 소라계단을 타고 올라가면 해안산책로가 나온다. 전편에 나온 소라계단을 다른 각도에서 찍어보았다.

 

 

 

 

 

* 나리분지 가는 길: 나리분지는 울릉도 유일의 평지 구간이다. 나리분지를 가기 위해서는 또 꾸불꾸불한 길을 올라가야 한다.

 

 

 

 

* 나리분지를 알리고 있는 표지판: 나리분지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천부에서 버스를 타야 한다. 물론 난 그냥 걸어 올라갔다.

 

 

 

 

* 나리분지: 울릉도 유일의 평지라 그런지 경작지가 잘 마련되어 있었다.

 

 

 

 

 

* 울릉도의 투막집: 투막집은 울릉도의 기후조건과 섬 안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많은 강우와 강설이 내리는 기후 조건이 울릉도에서 투막집을 짓고 살게 했던 것이다.

 

 

 

 

 

*울릉도의 우데기

 

 

 

* 나리분지 캠핑장: 나리분지 캠핑장은 울릉도 유일의 공식 캠핑장이다. 캠핑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시원하게 삼림욕을 할 수 있다.

 

 

▲ 북면 석포 인근의 해안가: 석포 인근에는 삼선암이나 딴바위 같은 큰 바위들이 해안도로 주변에 위치해 있다.

사진에 나오는 '물개바위'도 석포 일대에서 볼 수 있다. '물개바위' 뒤편으로 보이는 섬은 관음도이다.

석포전망대에서 보는 관음도의 풍광은 일품이었다. 한편 '물개바위'는 필자가 임의적으로 네이밍을 해 본 것이다.

 

 

 

 

 * 저동항: 울릉도여행을 마치고 다시 백두대간자전거여행을 하기 위해 저동항으로 돌아왔다. 사진 중앙에 있는 배를 타고 다시 강릉항으로 되돌아 갔다.

 

 

 

▲ 태하 산책길에서 서면 태하 모노레일 인근에는 소라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을 타고 오르면 해안산책길을 만날 수 있다.

바위투성이 길을 걸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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