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팜플로냐 도시성벽: 4개의 큰 홈은 대포가 거취되는 곳이다. 가운데 종처럼 생긴 공간은 초소다.

 

 

 

 

☞ 지난 2023년 12월 14일부터 2024년 1월 26일까지 스페인과 튀르키예를 여행했습니다. 여행은 크게 3단계로 나눠서 했는데 1단계는 산티아고 순례길, 2단계는 스페인 도시여행, 3단계는 튀르키예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이 포스팅들은 그 여행일지 노트를 토대로 작성됐습니다. 여행일지를 중심에 두고 작성된 포스팅이라 그렇게 재미진 포스팅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디테일한 정보를 가져다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인천공항

 

 

 

 

* 2023년 12월 14일 목요일: 1일차 / 서울 비

- 비행기가 12시 55분발이라 아침까지 컴퓨터 작업을 하고 집을 나섰다. 미리미리했어야 했는데... 하다보니 일이 많아져 시간에 쫒기는 형편이 됐음. 이러다 비행기를 못 타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오전을 분주하게 보냈음.

- 부모님께 인사하고 나오는데 비가 오고 있었음. 마드리드는 비가 안 왔으면 좋겠다.

- 약3년 만에 비행기를 타게 됐음. 정말 오랜만임. 신형 B-787 드림라이너를 탔음.

- 사실 전날 밤을 세우고, 작업까지 해서 몸이 무척 피곤했음. 그래서 나름대로 비행기에서 잘 잤음. 코 골고 잤나? 그렇게 자서 그런지 시차 적응에 어려움이 없었음.

- 인천공항에서 약 20분 정도 연착해서 그런지 마드리드 공항에 예상 시간보다 좀 늦게 도착했음. 서울은 비가 내렸지만 마드리드는 비가 오지 않았음. 4번째 스페인 여행이 시작됐음.

- 새벽 1시 15분발 심야버스를 타려고 마드리드 터미널4(T4)로 이동했음. 근데 이 버스가 팜플로냐(Pamplona)로 직접 가지 않아 중간에 Soria라는 곳에서 환승을 해야함. 한 새벽에 낯선 동네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음.

-T4 버스터미널에서 식사할 곳이 없어 첫 끼니부터 샌드위치로 떼웠음. 궁시렁대면서도 맛나게 먹었었음.

 

 

* 스페인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 터미널4에서 심야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배낭 무게가 대충 17kg 정도였음. 하지만 계속 줄어들었음.

 

 

 

 

 

* 2023년 12월 15일 금요일: 2일차 / 맑음(팜플로냐 비 온 뒤 갬)

- 새벽 1시 15분에 마드리드발 소리아(soria)행 버스에 탑승함. 이후 소리아에서 팜플로냐(pamplona)행 버스로 환승함. 피곤해서 그랬는지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았음. 대신 비행기에서도 버스에서도 계속 앉아 있다보니 허리가 눌리는 느낌이었음.

-팜플로냐 버스터미널에 내리니 오전 7시가 안 되는 시각이었음. 문을 연 바르(bar)가 있어 오랜만에 cafe con leche와 함께 빵을 먹었음. 역시 스페인은 커피와 빵이 맛남. bar를 스페인어에서는 '바'라고 하지 않고, '바르'라고 읽음. animal(동물) 같은 경우도 '애니멀'이 아니라 '아니말'로 읽음. 영어와 스페인어는 좀 다르다. 카페콘레체(cafe con leche)는 카페라떼를 말함. 레체(leche)가 우유를 뜻한다.

- 순례길을 걸으려면 순례자여권이 필요함. 그래서 팜플로냐 대성당 인근에 있는 알베르게 albergue Jesus y Maria에 갔음. 이곳에서는 순례자여권도 발급받고, 1박도 할 것임. 그런데 12시에 문을 연다고 했음. 알베르게는 순례자들의 숙소를 말함.

- 이렇게 된 거 팜플로냐 시내를 둘러보기로 했음. 나름대로 팜플로냐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그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 우연히 fortin o medialuna de san bartolome라는 작은 요새를 탐방했다. 이곳은 작은 정원이 딸려있었는데 순례길에서는 살짝 벗어나 있었다. 유명한 팜플로냐 요새(ciuadadela de pamplona)나 팜플로냐 구시가지 성벽하고도 다른 곳이었다.

- fortin o medialuna de san bartolom 옆쪽으로 작은 공원이 있는데 이곳에는 나무조각 같은 조형물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안내판을 봤더니 스페인내전 당시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조형물이었다. 얼핏봤을 때는 낙엽이 떨어져 있고 해서 그 위에 발을 올려놓고 신발끈을 묶으려고 했는데... 그랬으면 큰일날 뻔 했다.

- 이번에 처음 알게된 명소가 하나 더 있다. monument to the fueros라는 기념비이다. 이 길쭉한 조형물은 1893년 나바로의 푸에로법을 수호하기 위한 걸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monument to the fueros는 유명한 카스티요 광장(plaza del castillo)에서 불과 200여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카스티요 광장은 예전에도 몇 번 둘러봐서 익숙한 장소다. 이곳에는 헤밍웨이가 맛집 탐방하듯 자주 들르던 식당도 있다. 익숙한 곳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 인근에 중요한 기념탑이 있는 줄은 정말 몰랐다. 이걸 두고 등잔밑이 어둡다라고 말하는 것이겠지.

- 이미 두 번이나 팜플로냐에 왔으면서 이런 조형물의 존재자체도 몰랐다니! 아무래도 순례길만 허겁지겁 걷느라 그랬던 거 같다. 오늘은 몇 킬로를 걸어야 하나, 오늘은 어느 알베르게에서 자야 하나... 뭐 이런 고민들 때문에 다른 곳에 눈길을 주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솔직히 예전에는 이런 기념물들을 둘러볼 여유조차 없었다. 무슨 속도 경쟁하듯 너무 열심히 걸었던 거 같다.

-전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팜플로냐 도시성벽(city wall)도 자세히 둘러봤다. 도시성벽(city wall)은 앞서 언급한 팜플로냐 요새(ciuadadela de pamplona)와는 좀 다르다. 성벽 사진을 찍다가 보니 귀엽게(?) 생긴 초소가 눈에 들어온다. 초소를 영어로는 sentry box, 스페인어로는 garita라고 부른다. 스페인은 워낙 성이 많은 곳이라 다양한 모습의 초소(garita)의 모습이 존재한다. 그중 팜플로냐 시티월의 초소 모습은 꽤 잘 생긴(?) 편에 속한다.

- albergue Jesus y Maria에 도착해 크레덴셜과 1박 숙박비를 지불했다. 크레덴셜 2유로, 1박 숙박 11유로. 숙박비가 좀 오른 거 같다. 3년 전에는 8유로였던 거 같은데...

- 샤워를 하고 누가 남기고간 즉석 해물스파게티를 데워 먹었다. 침대에 누우니 딱 좋다. 3년 전에 왔을 때는 1층에서 묵었는데... 이제는 침대를 다 제거해서 1층은 빈 공간으로 남겨놨다. 왜지?

- 그런데 강력한 발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누구야? 너야? 도대체 누구 발냄새야! 내 발냄새였다. 알베르게에 나 혼자밖에 없었으니까...ㅋ 아무래도 신발에 물이 들어와서 그런거 같다. 하긴 오래신긴 했지. 고민 끝에 새 신발을 구매하기로 했다. 마침 데카트론 매장이 가까이에 있었다. 카스티요 광장에서 5분 정도의 거리였다. 어차피 바꿀 신발이었으니 과감히 바꾸기로 했다. 약 70유로.

- 이 선택 때문에 이 여행은 아주 큰 격변을 겪게 된다. 순간의 선택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도보여행 중에 신발을 바꾸는게 아닌데... 그런 기본중의 기본을 무시한 댓가가 아주 혹독했다!

- 성탄절 주간이라 그런지 팜플로냐 대성당에서 행사가 있었다. 무슨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의식이었는데 거리행진도 하고 그랬다. 하루 사이에 팜플로냐에서 다양한 경험을 한 거 같다. 팜플로냐의 속살을 봤다고 해야 하나?

 

 

* 스페인내전 조형물: memorial de los centros de detención이 공식 명칭이다. 직역하면 '시내 구금자들의 추모' 로 읽힐 수 있다. detención은 스페인어로 구금, 체포를 뜻한다. 이 조형물은 구글 지도에서도 검색이 안 된다.

 

 

 

* fortin o medialuna de san bartolome

 

 

 

* 팜플로냐 도시성벽: 방어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겹겹이 쌓은, 겹성 형태를 띄고 있다.

 

 

 

* 소몰이축제 조형물: 팜플로냐는 바스크 지역에 속한다. 이곳에서는 투우가 아닌 소몰이 축제가 열린다. 왜 그 순한 소를 화나게 하는지...

 

 

* monument to the fueros: 좀 어둡게 나왔다.

 

 

* 초소: 귀엽게 생겼다. 선물 가게 같기도 하다. 내가 군대 있을 때 들락거렸던 초소는 못 생겼었다.

 

 

 

 

KBS 대학 사극 <고려거란전쟁>을 재미나게 보고 있다. 역시 사극은 퓨전 사극이 아니라

정통 사극이다. 퓨전 사극이 젊은 연기자들의 비주얼을 전면으로 드러낸다면 정통 사극은

노련함을 앞세운 중년 배우들의 불꽃 튀는 연기력이 돋보인다.

 

강감찬 역으로 최수종이 캐스팅됐다고, 또 수종이라는 지적이 있었는데... 최수종이 사극

연기에 진심이기에 캐스팅이 된 게 아닐까?

 

그래도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왜 강감찬 장군 역으로 최수종일까?

거란과의 3차 전쟁에서 거란군을 괴멸에 가까울 정도로 찍어눌렀던 강감찬 장군이었는데...

좀 더 강인한 얼굴을 한 연기자가 강감찬 장군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나?

 

이를테면 마동석?ㅋ

 

사실 강감찬 장군은 문관 출신이었다. 잠시 역사 시간을 생각해보자! 고려 시대 무관을 뽑는

과거 시험은 후기에나 실시됐다. 강감찬이 활약을 했던 고려 전기에는 문신을 뽑는 과거가

존재했을 뿐이다.

 

그러면 왜 문신 출신이면서 최전방에서 군대를 지휘한 것일까? 이렇게 문무를 겸비한 이들을

두고 출장입상(出將入相)이라고 말한다. 나가서는 장수요, 안에서는 재상의 역할을 하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말하는 것이다.

 

강감찬은 출장입상의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김종서, 권율, 이순신 장군 등도 출장입상형

인재들이다.

 

강감찬 장군은 관악산 낙성대에서 출생을 하셨다. 관악산은 필자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다. 그런 이야기를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10꼭지 '관악산 역사트레킹'편에 담아봤다.

드라마에 편승해서 이런식으로 숟가락을 올리는군~^^

 

 

 

 

 

● 문관 출신 최전방 사령관, 강감찬

 

강감찬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거 아세요. 강감찬 장군이 사실은 문신 출신이라는 거요.”

“정말요?”

“더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장군께서 나이 70에 최전방 사령관으로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귀주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둬서 거란 세력을 물리쳤고요.”

“아, 그렇군요!”

 

필자의 설명에 하나같이 참석자들은 놀랬다. <삼국지>의 황충 장군도 아니고, 고희의 나이에 최전방에서 칼을 휘둘렀다는 점이 놀라웠을 것이다. 더구나 상대편은 당시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거란족이 아닌가?

 

이야기를 좀 더 확장해 보자.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두고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고 칭하며 건국 초부터 강경 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거란이 선물로 준 낙타를 굶겨 죽인, 일명 만부교 사건도 발생하게 됐던 것이다.

 

거란은 요나라를 세우고 동북아에서 위세를 떨쳤다. 당시 요나라는 만리장성 부근에서 송나라와 대치를 하게 됐는데 한반도에 있는 고려에 대해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고려가 송나라와 손을 잡고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던 것이다. 강감찬 장군은 3차 침공 때 상원수가 되어 10만 거란군을 격퇴시켰고 그로 인해 고려는 전란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안국사 뜰 안에는 그런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삼층석탑이 서있다. 상륜부라고 불리는 맨 꼭대기는 무너져 내렸지만 나머지는 천 년 가까운 세월을 잘 버텨내고 있다. 이 탑은 원래 장군의 생가에 있던 것을 안국사가 만들어지면서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필자는 계속 ‘강감찬 장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강감찬은 문신 출신이었다. 한국사 시간을 곱씹어 보시라. 과거에서 무관을 뽑았던 건 고려 후기 이후였다. 고려 초기 사람이었던 강감찬은 당연히 문관 출신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강감찬은 문·무에 모두 능한 인재였던 것이다. 이를 두고 출장입상(出將入相)이라고 하는데 ‘나가서는 장수(將帥)요, 들어와서는 재상(宰相)이라’는 뜻이다.

 

도교에서는 문(文)을 관장하는 별을 문곡성(文曲星)이라고 칭한다. 문(文)이 뛰어난 사람을 두고도 문곡성이라는 말한다. 그런데 강감찬도 문곡성이라고 불렸다. 최전방 사령관이자 문곡성이었던 강감찬! 그렇게 많은 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인헌공 강감찬은 84세에 천수를 누리다 영면하셨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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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공영방송 5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라는 명칭에 걸맞게 수준 높은 영상미를 펼쳐보였다. <고려거란전쟁>은 <불멸의 이순신>, <태조 왕건> 등등...

수많은 명품 사극의 뒤를 이를 것인가? 아직은 극 초반이니 좀 두고봐야 할 것이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거란과 사이가 나빴다. 발해를 멸망시켰다하여 거란을 짐승으로 나라로 폄하했다. 고려가 건국했을 때 거란에서 선물로 낙타 50마리를 보냈는데 그 낙타를 굶겨죽이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고려거란전쟁>의 초반은 대량원군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다. 대량원군은 자신의 이모인 천추태후로부터 수많은 위협을 받는다. 하지만 그 위협들을 다 극복한 후 결국 왕으로 등극한다. 그가 바로 고려 8대왕 현종(재위 1010∼1031)이다.

극에도 나오듯이 대량원군은 강제로 승려가 됐는데 신혈사라는 곳에 은거하게 된다. 이 신혈사가 지금의 진관사다.

사찰 음식으로 유명한 그 진관사인데 진관 한옥마을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여행에세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의 11꼭지에는 '진관사 역사트레킹'이 기술되어 있다. 아래는 그 내용의 일부다. 사극 <고려거란전쟁>에 진관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스리슬쩍 숟가락을 올려본다~^^

 

 

 


 

 

 

 ● 기막힌 스토리가 숨어 있는 진관사

수도권 최대의 한옥마을인 은평 한옥마을을 지나 마지막 탐방지인 진관사로 향한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4대 명찰이 있다. 동쪽에 불암사, 남쪽에 삼막사, 북쪽에 승가사. 그럼 서쪽은? 진관사다. 천년 고찰인 진관사(津寬寺)는 고려 현종 때인 1010년에 만들어졌다. 고려 제8대 왕인 현종이 직접 창건한 이 절은 진관대사를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태조 왕건의 손자였던 현종, 즉 왕순은 어릴 적에는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왕건의 손녀였던 천추태후로부터 어릴 적부터 박해를 받은 왕순은 한때 강제로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천추태후가 그의 이모가 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당시 얽히고설킨 왕실혼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같은 왕건의 혈통이자 이모뻘의 천추태후로부터 살해위협까지 받게 된 건 그가 왕위계승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천추태후는 애인인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왕으로 등극시킬 셈이었다.

그런 천추태후의 마수가 진관사에까지 뻗치게 됐다. 원래 진관사 자리에는 신혈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진관이라는 승려가 홀로 수도를 하고 있었다. 승려가 홀로 거처하는 곳이라 천추태후 입장에서는 무언가 거사를 치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랬다. 천추태후는 신혈사에 자객을 보내 왕순을 죽일 셈이었다. 천추태후의 의도대로 왕순이 자객에 손에 비명횡사를 했다면, 현종도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진관사도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천추태후의 의도를 눈치 챈 진관은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굴을 파서 왕손을 숨기는 기지를 발휘한다. 수미단은 불상을 올려놓는 단을 말한다. 수미산은 불교에서 말하는 상상의 산을 말하는 것이고.

그렇게 진관에 의해 목숨을 건진 왕순은 3년 뒤, 개경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려 8대 왕 현종이다. 현종은 1010년, 신혈사 자리에 대가람을 세우고 진관 대사의 이름을 본 따서 사찰 이름을 지으니 그 사찰이 바로 지금의 진관사다.

조선시대 진관사는 사가독서제로 애용된 곳이다. 사가독서제란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정진하게 만든 제도로 세종시대에 처음 도입되었다. 풍광이 수려하고 계곡이 시원한 진관사라면 학문을 닦기에 제격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사가독서제로 진관사를 다년간 이들은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이었다.

진관사는 한국전쟁동안 많은 전각들이 소실된다. 그래서 지금의 진관사는 천년고찰의 웅장함이 묻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진관사는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모으고 있는 사찰이다. 진관사 숲길과 계곡을 걷다보면 몸도 마음도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 느낌들이 좋아서 발걸음들이 진관사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진관사

 

 

 

 

 

* 화계사

 

 

 

2023년 10월 19일 목요일.

이제 완연한 가을이다. 평소 아웃도어 활동을 하지 않는 분이라도 가을에는 단풍을 따라 발걸음을 내딛는 분들이 많다. 그만큼 가을은 트레킹하기 딱~인 계절이다.

이날은 롯데문화센터 목요반 강의가 있었다. 코스는 화계사 역사트레킹이었다. 화계사는 북한산 동쪽에 있는 명찰로 많은 문화재들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구체적인 코스는 이렇다.

화계사 -> 삼성암 -> 빨래골 -> 북한산생태공원

집을 나설 때 가을비가 살짝내렸다. 단풍색을 짙어지게 만드는 가을비였다. 본 화계사 역사트레킹 코스는 딱 2년 만에 다시 행하는 코스였다. 그때도 가을이었다.

2년 만에 다시 간 화계사는 많이 변해있었다. 공사중이던 대웅전은 수리가 끝났고, 최근에 석불상이 하나 생겼다. 그 석불 앞은 화계사의 전경을 둘러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화계사에는 범종루에 사인비구라는 분이 제작한 범종이 걸려 있다. 사인비구는 조선 중기 시대에 활약한 분인데 종을 잘 만들었다. 이 분이 제작한 종 11개는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다.

화계사에는 조선 후기 시대에 만들어진 대웅전과 흥선대원군의 현판이 걸린 명부전이 있다. 그 명부전 안에 있는 시왕상 등의 조형물은 무학대사의 스승 나옹선사가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화계사 자체가 아름다운 곳인데 이렇게 문화재까지 다양하다.

트레킹팀은 이제 삼성암으로 향한다. 산길을 따라 올라가는데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 비가 온 뒤라서 흙냄새가 피어오른다. 낙엽과 함께 올라오니 흙냄새가 좀 쌉싸름하게 느껴진다. 약간 흐릿한 커피냄새라고 할까?

삼성암에 도착했다. 삼성암은 나반존자를 모시는 곳으로 3대 나반존자 성지로 불리는 곳이다. 나반존자는 중국이나 일본 불교에는 나타나지 않고 우리 불교에서만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나반존자는 독성각에서 모신다. 삼성암의 독성각은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그 주위가 아름다워 탐방객들의 눈길을 확 사로잡는다. 좀 외떨어져 있기에 조용히 기원을 드리기에도 좋은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삼성암 독성각은 기도빨이 좋기로 유명한 곳이다. 기가 정말 쎈~ 곳이다. 독성각에서 내려오니 무언가 '운기충천'하는 느낌이다! 좋았어!

트레킹팀은 빨래골을 지나 마지막 코스인 북한산생태숲을 탐방했다. 북한산생태숲은 숲속의 숲이라는 명칭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다. 산책로도 잘 정비되어 있고 편의 시설도 잘 갖춰져 있어 한 바퀴 둘러보는 것 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곳이다.

북한산생태숲 한바퀴를 끝으로 화계사 역사트레킹은 잘 종료가 됐다. 이날 오신 분들은 내 책,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을 구매하신 분들이었다. 얼마나 고맙던지!

 

 


 

이날도 책 이야기를 많이 했다. 독자들과 만나 트레킹도 하고, 책 이야기도 하고...

트레킹북토크를 한 것이다. 어쩌면 다른 작가들이 나를 부러워할지도 모르겠다...ㅋ

ps. 부러워할 거 없다. 책이 잘 안 팔리니까. 제발 손익분기점만이라도...ㅋ

 

 

 

*화계사 전경

 

 

 

* 삼성암

 

 

 

* 삼성암 독성각

 

 

 

 

2023년 10월 2일 월요일.

이날 목적지는 충북 단양. 트레킹 코스를 확정하러 왔다고,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했지만... 

그건 핑계였고 그냥 명절 연휴를 다 집에서 보내기 싫어 배낭을 둘러맸다. 이날 걸은 코스는 이렇다.

단양역 - 단양강잔도 - 시루섬의 기적조형물 - 적성대교 - 단성면 - 고수대교 - 고수동굴

중간에 시골버스로 점핑을 했는데 그걸 뺐는데도 약 20킬로를 걸었다. 다 평지길이라 20킬로가 그리 대단한건 아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긴 했다. 왼쪽 다리 근육이 올라온 것이다. 햄스트링이 재발한 듯하다.

전에 햄스트링 관련해서 병원을 찾았을 때다. 의사가 걷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다른 병원에서도 같은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트레킹 강사가 못 걷는다면 말이 되는 소리인가? 나는 뭘 먹고 사나?

현재의 단양 중심가는 신단양이라고 불린다. 원래는 단성면이 중심가였지만 충주댐이 건립된 후 옛 읍내 일부가 물에 잠기게 된다. 이에 단성면에서 중심지를 북쪽으로 6킬로 정도 떨어진 지금의 자리로 옮긴다.

시루섬의 기적 조형물은 최근에 새워졌다고 한다. 유명한 단양강 잔도와 만천하스카이워크에서 약 500미터 정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이 조형물은 1972년 단양 일대를 덮친 수해를 기억하기 위해 세워졌다. 그해 단양지역에 큰 수해가 났는데 주민들이 시루섬 인근에 있던 물탱크에 올라가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 무려 100명이 넘는 주민들이 13시간 정도를 버텨냈다고 한다.

불빛 하나 없는 어둠속에서 주민들은 서로서로 팔짱을 끼고 모두가 하나가 되어 재난을 이겨낸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원 구조는 아니었다. 어떤 여인의 품에 있던 간난 아기가 질식사를 한 것이다. 공간이 너무 협소한데다 아이를 너무 세게 안았던 것이다. 재난 앞에 하나되는 모습! 이게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이 아닐까?

소양호의 춘천, 양수리의 양평처럼 어찌보면 단양도 물의 도시라고 할만 하다. 물론 행정구역으로는 '시'가 아닌 '군'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단양하면 산이나 동굴, 혹은 시멘트를 생각하지 물과 연관 짓지는 않는다. 참고로 단양지역의 남한강은 단양강이라고 부른다. 평창지역의 남한강을 평창강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강원도 양양이 핫플레이스로 뜨고 있는데 충북 단양도 그에 못지 않게 많은 이들이 발걸음을 하고 있다. 단양 여행의 장점은 터미널에서 내리자마자 멋진 풍광이 펼쳐진다는 점이다. 또한 읍내와 가까운 곳에서 트레킹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아웃이 읍내와 가까운 곳에서 이루어지니 버스나 택시 같은 연계교통편을 이용하기에 수월하다. 한마디로 뚜벅이들도 여행하기에 좋다는 것이다.

장시간 걸었더니 다리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눈은 아주 호강을 하고 있었다. 이게 단양 여행의 매력인가?ㅋ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드디어 책이 나왔다. 발간일 2023년 9월 1일.

누구는 자신의 실물 책을 보면서 감격도 하고,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오프라인 서점 매대에 가서 은근 슬쩍 자신의 책을 중앙으로 옮겨놓기도 한단다. 하지만 필자는 별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앓던 이 하나가 빠진 것처럼 좀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원고를 건성으로 작성해서 그런가? 아니면 그동안 책을 많이 냈나?

이 책은 너무 늦게 나왔다. 첫 꼭지를 2013년에 썼으니 10년이나 걸려서 출간이 된 것이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초고를 쓴 지가 오래되서 그런지 중간에 상황이 확~ 바껴 다시 작성을 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 것이다.

예를 들면, 해당 부근에 지하철이 개통되면 그거에 맞춰 집합장소와 종결장소가 변경된다. 또한 그에 맞게 코스 자체도 변경된다. 코스가 바뀌니 원고를 재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크게 4번 정도 갈아 엎었다. 재작성 수준의 리라이팅을 4번씩이나 하다보니 나중에는 원고를 검수하는 것조차 신물이 날 정도였다.

사진은 또 어떻고! 시간이 길어지다보니까 사진도 크게 갈이를 해야했다. 탐방 사진이야 패션 사진처럼 유행을 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현재성을 유지해야 하니까.

거기서 거기인 트레킹 원고, 뭐하러 그렇게 갈아넣으며 작성하느냐고,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이 책을 쓰면서 햄스트링 건염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축구 선수나 걸리는 햄스트링을 트레킹하다가 걸린 것이다. 한편 이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린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어차피 가족이나 지인들의 주머니를 공략할 게 아닌가?

사실 이 책은 기성 출판사에서 여러번 퇴짜를 맞았다. 처음에는 퇴짜를 맞으니 얼얼했지만 나중에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 어차피 돈도 안 되는 책, 내가 출판사차려서 내가 만들어보자. 잘나도 내 원고, 못나도 내 원고가 아닌가!'

코로나가 한참 맹위를 떨치던 2021년 가을경에 역사트레킹북스라는 1인 출판사를 창간하게 된다. 그때 이미 원고의 90%가 준비되긴 했지만 사정이 있어 2023년 상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편집과 디자인작업이 끝나고 인쇄를 할 시기였는데 약 3주간의 공백이 생겼다. 편집 작업이 끝날 때가 8월 초순이었는데 이 시기에 인쇄소가 휴가 기간이었다. 인쇄업 특성상 휴가를 함께간다는 것이다. 어쨌든 한 번 맥이 끊기니 3주나 지체가 됐다. 역시 땡길때 땡겨야 하는 거다!

예전부터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이 있다.

'나무한테 미안한 짓은 하지 말자!'

인쇄소에 원고를 넘기면서 저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봤다.

서점과 계약을 하느라 판매 시기가 늦춰졌다. 끝날때까지 계속 늦춰졌다. 어쨌든 이제 교보문고, 알라딘, 예스24 같은 서점에서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을 구매할 수 있다. 10년 간의 노고가 이제 결실로 다가와야 하는 시기다. 그러고보니 곧 추석이네~

지금 다시 책을 응시했는데 역시 별 감흥이 없다. 첫 책인데도 그렇다. 그저 무언가 내 몸에서 툭툭 털려나가는 느낌이들 뿐이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허허로운 감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별 감흥은 없지만 이것만큼은 말하고 싶다.

이 책은 그저 앉아서 쓴 책이 아니다. 두 발로 빚은 책이다. 손은 그저 글씨를 옮겼을 뿐 발로 써 내려간 이야기들이다.

글에서 발냄새가 나나?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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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곧 출간을 앞 둔 필자의 책이다. 첫 꼭지를 2013년에 작성했으니 10년 동안 공을 들인 원고다.

물론 초고를 쓴 다음에 손을 놓은 것은 아니고 이후 숱하게 수정을 했다. 크게 고친게 5번 정도된다.

뭐 그건 그렇고... 트레킹 책이다보니 지도가 빠질 수 없다. 그런데 처음에는 멋 모르고 네이버나 구글 지도를 변형해서 사용했다. 하지만 이게 말도 안 되는 행위다. 그냥 블로그에 올리는 정도면 모르겠으나, 출간을 하는 마당에 구글 지도를 변형해서 쓴다면 명백한 저작권 위반이다.

책을 편집해주는 에디터에게 따끔하게 한 소리를 먹었다. 저작권 위반으로 엮이면 아주 골치아파진다고, 저작권 위반 사항이 있는지 스스로도 점검해보라고... 그래서 블로그나 브런치에 올리는 지도도 저작권 위반 사항이 없는지 계속 게이트키핑(?)을 하고 있다. 뭐 블로그나 브런치에 올리는 포스팅까지 저작권으로 걸고 들어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해당 지도가 포함된 포스팅이 후원금을 받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여기에 올려진 지도들은 직접 수작업으로 그린 것이다. 어느 지역일까? 남아프리카공화국 일대를 그린 것이다.

직접 그리다보니 시간도 많이 걸리고, 손도 많이 간다. 하지만 직접 그리니 해당 지역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는 듯싶었다. 공을 들여 해당 지역을 자세히 살펴보니까...

그런데 트레킹 책이라면서 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서울학개론이라면서 그 먼 지구 반대편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갈 것인가?

트레킹에 대한 어원을 이야기하다보니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더해 영국과 네덜란드의 후예인 보어인들 간의 전쟁인, 보어전쟁에 대한 내용도 필수로 꼭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책 제목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임에도 남아공 지도를 필수적으로 그린 것이다.

예전 세계사책들은 지도가 상당히 풍부하게 실려있었다. 하지만 요즘 책들은 예전보다 지도의 내용이나 정밀성에서 많이 떨어진다. 책 내용 자체보다 지도보는 재미가 쏠쏠했는데... 요즘 세계사책들은 그런 재미가 확실히 반감 됐다.

사실 지도 그리기가 쉽지는 않다. 손이 많이 간다. 디자이너에게 제작의뢰를 하려고 하면 돈이 많이 든다. 그래서 구글이나 네이버 지도를 따 가지고 오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지도들을 그리느라 책작업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늦춰졌다. 하지만 여러장 그리다보니 재밌는게 아닌가?

이참에 수작업 지도 전문가로 나서볼까?^^

ps. 지도 1번은 보어전쟁시기인 1899~1902년 사이의 지도임. 남아공의 왼쪽 위에 있는 나미비아가 독일의 식민지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ps2. 지도 2번은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그 주변국이다.

 

 

 

*** 서울시 체육회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서울스포츠> 7+8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사진은 마땅한게 없어서 그냥 한강에서 찍은 사진들을 올려봅니다.

 

 

한강 백두대간 모래사장

금빛 모래가 펼쳐져 있던 한강의 강수욕장

필자는 한 때 한강에 미친 적이 있었다. 지금은 문화센터에서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그래서 다양한 연령대의 수강생들과 마주치는데 그 폭이 워낙 커서 종종 ‘3대가 같이 트레킹’을 한다고 표현하곤 했었다. 수강생 중 가장 어린 막내가 9살이었고, 가장 최고참은 84세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한 연령대와 만나다 보니 종종 귀중한 정보들을 공짜로 얻을 수도 있었다. 트레킹을 행하다보면 사람들이 술술 입을 여는데 녹취만 하지 않았지 마치 로드 인터뷰 같은 형태를 띠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구술 내용 중에는 텍스트 자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생생함 같은 것들도 있었다.

● 해수욕? 아니 강수욕

예전에 한강에서 트레킹을 진행했을 때였다. 용산쪽을 가리키면서 예전 서울 시민들은 해수욕이 아닌 강수욕(江水浴)을 즐겼다고 설명을 했었다. 젊은 수강생들은 거의 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강수욕’이 무엇이냐며 묻기부터 했다. 바다에서 하는 물놀이가 해수욕이라면 강물에서 하는 물놀이를 강수욕이라고 부른다는 해설을 마칠 즈음, 나이가 지긋한 수강생 A씨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강수욕 체험기를 풀어내셨다.

“그때는 여름만 되면 한강으로 물놀이하러 갔었어요. 노들강변에 모래사장이 기가 막히게 펼쳐졌거든요.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

그렇다. 변변한 냉방장치도 없었던 그 시절, 한강은 서울 시민들의 좋은 피서지였다. 사람들은 드넓은 모래사장에서 수영도 하고, 모래찜질도 하며 물놀이를 즐겼다. 당시의 사진들을 보면 동해안의 어느 해수욕장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한강이 물놀이 장소로 애용됐을까?

 

 

 

 

 

 

● 한강 백두대간 모래사장

해수욕이든 강수욕이든 모래사장이 있어야 입수(入水)를 할 수 있다. 거친 돌밭에서 물에 뛰어들었다가는 자칫 피투성이가 될 수도 있다. 물가에 있는 바위에서는 낚시를 하지 물놀이를 하지 않는 법이다.

하드웨어(?)로 보자면 한강은 아주 오래전부터 강수욕장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지금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예전 항공 사진을 보면 이게 한강이 맞나 싶을 정도로 드넓은 금빛 모래사장이 한강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 대표적으로 용산, 뚝섬, 광나루가 그런 곳이다.

이렇게 모래사장이 발달할 수 있었던 건 서울이 한강의 하류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태백산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금강산 내금강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양수리에서 합수되어 한강이 된다. 남한강이 375㎞, 북한강이 317㎞이니 강물이 흘러 오는 와중에 수 많은 퇴적물들도 함께 실어 온다. 그렇게 켜켜이 퇴적물이 쌓여 어떤 곳은 습지가 되고, 어떤 곳은 모래사장이 된다. 백두대간에서 떨어져 나온 돌덩어리가 강물 속에서 깎이고 깎여 모래가 되었고, 그 모래가 서울 한강변에 쌓였으니 ‘서울 한강 백두대간 모래사장’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거 같다.

그런데 당시 한강의 모습을 보면 강변 양쪽에 다 모래가 쌓이지는 않았다. 북쪽에 모래사장이 있으면 남쪽은 습지가 있는 식이다. 예를 들면, 지금의 한강대교의 북단인 용산구 이촌동에는 해운대 같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지만 이에 반해 남단인 노량진(鷺梁津)에는 모래사장이 발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량진은 물살이 빨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한자에도 좁은 해역을 뜻하는 ‘기장량(梁)’이 쓰였다. 이 한자는 명량(鳴梁), 견내량(見內梁), 칠전량(漆川梁) 등 좁고, 물살이 빠른 곳을 지칭할 때 쓰인다. 이런 차이가 나타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서울의 한강이 일직선이 아닌 W형태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굽이쳐 흐르는 구간은 원심력이 작용하여 물살이 강해 퇴적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반대쪽은 구심력으로 인해 퇴적물들이 층층이 쌓이게 된다.

물놀이에 대한 글에 지형과 퇴적에 대한 이야기를 한 필자에게 핀잔을 주시려나? 하지만 꼭 이 부분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당시의 한강 강수욕을 신기하게 보는 관점이 아닌 어떻게 강수욕을 할 수 있었는지를 따져보고 싶었다. 짠맛이 나는 바다모래가 아닌 금빛의 강모래에서 모래찜질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에 하며...

 

 

 

 

 

 

● 강수욕장을 기억하는 사람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서울은 급격하게 확장한다. 1960년대 이미 인구가 350만 명에 이른다. 드넓게 펼쳐진 한강의 모래사장을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수강생 A씨는 이렇게 회고를 했다.

“그때 전차를 타고 갔었을 거야. 어디서 왔는지 백사장에 사람들이 가득했어. 가족단위도 왔었고, 같은 또래들끼리도 왔었어요. 거기서 아이스께끼(아이스크림)도 팔고, 냉차도 팔고 그랬지. 그때 찬 거 먹고 배탈나서 아주 혼난적도 있어요.”

A씨는 지금의 이촌동, 즉 용산 노들 강수욕장에서 물놀이를 했는데 일설에 의하면 노들 모래사장은 세계 최대의 강수욕장이었다고 한다. 수강생 B씨는 뚝섬 유원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뚝섬유원지까지 궤도차를 타고 갔어요. 뚝섬이 좋은게 거기는 수영장도 있었어요. 백사장도 있었고, 아주머니들이 빨래도 했었고, 아참 거기는 나루터도 있었어요. 그때는 강남이 개발되기 전이라 다리가 없었거든. 동력선을 타면 봉은사까지도 갈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

궤도차는 전차의 일종인데 당시 동대문역에서 뚝섬을 거쳐 광나루까지 운행을 했었다. 전차역에 나루터까지 있었으니 당시 뚝섬은 교통의 요지였던 셈이다. 그러니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붐빌 수밖에. 자료를 찾아보니 뚝섬이 인기가 좋았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나무그늘 때문이었다.

다른 강수욕장들은 숲이 거의 없었지만 뚝섬 일대는 나무숲이 있어 천연의 파라솔 역할을 해주었다. 그런 자취가 남아서인지 뚝섬에는 현재 서울숲이 자리잡고 있다. 참고로 서울에서 전차는 1968년을 끝으로 운행을 종료했다.

 

 

 

 

● 생명력이 길지 않았던 강수욕장

한강의 강수욕은 생명력이 길지 않았다. 1950~1960년대까지 반짝 개장(?)을 했을 뿐이다. 앞으로 시기를 당겨보아도 기껏 일제강점기까지 연장할 수 있을 뿐이다. 아무래도 조선시대에는 강수욕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 한복은 수영을 하는데 적합한 복장이 아니다.

앞쪽 시기는 늘어날 수 있지만 뒤쪽은 고정되었다. 1970년대부터는 한강 개발로 인해 모래사장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강모래는 염분이 많은 바다모래보다 질이 더 좋아 훌륭한 건설자재로 쓰였다. 1980년대 한강종합개발이 대대적으로 진행되면서 한강 일대는 큰 공사장처럼 변했다. 강수욕장이 있던 모래사장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시멘트로 채워진 인공 제방들이 들어섰다. ‘한강 강수욕장’이라는 말도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뚝섬에서 조금만 배타고 들어가면 저자도라는 섬이 나와요. 거기도 백사장이 아주 넓었어요. 거기서도 물놀이를 재밌게 했지. 튜브랑 파라솔 빌려주는 행상도 있었고. 그런데 한강 개발한다고 모래를 퍼 올리더라고. 어느 순간 가보니 섬도 없어지고, 백사장도 없어졌어요. 그때 이후로는 한강에서 수영을 못 했지. 흙탕물이 돼서 물에 들어갈 생각을 못 했죠.”

B씨는 이렇게 아쉬워했다. 한강종합개발은 1986년에 종료됐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한강의 모습이 그때 골격을 갖추게 된다.

 

● 오리배는 페달을 굴리고, 카약과 패들보드는 노를 젓고

하지만 한강이 피서지로서의 매력을 상실한 건 아니었다. 강수욕이 사라지긴 했지만 물놀이용 보트는 계속 둥둥 떠 있었다. 노를 젓는 일반적인 보트도 있었고, 위에 가림막을 쳐서 햇빛이나 비를 막을 수 있는 보트도 있었다. 이후 보트들은 유람용 오리배로 바뀌게 된다. 1990년대 초반 오리배를 탔던 수강생 C씨는 이렇게 회고를 했다.

“한강에서 오리배 페달 좀 굴렸죠. 저희는 주로 여의도쪽에서 많이 탔는데 사실 오리배 타는게 주 목적이라기보다는 어떻게 연애 좀 해볼까 그게 더...”

성공했을까? C씨는 그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이제 그런 오리배들은 뒷전으로 물러 나고 2010년도 이후부터는 카약, 패들보드(sup) 같은 수상 아웃도어를 즐기는 이들이 한강에서 노를 저었다. 카약이 앉아서 노를 젓는다면 패들보드는 일어서서 노를 젓는 방식이다. 이전에 보트나 오리배가 유람의 목적이 강했다면 카약이나 패들보드는 레저에 운동까지 겸비한 활동이다. 그래서인지 카약이나 패들보드는 시작 전에 안전에 대한 강습을 받아야 한다. 페달부터 굴리는 오리배와는 많이 다르다.

 

 

 

● 한강의 수영장

한강의 물놀이에 대한 글을 쓰면서 야외수영장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서울 한강변에는 뚝섬, 여의도, 광나루, 망원, 잠실, 잠원 등 6개의 수영장과 난지, 양화 2곳에 물놀이장이 있다. 강수욕장보다는 못 하지만 한강의 수영장들은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다. 탁 트인 한강을 바라보며 헤엄을 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답답한 실내수영장은 범접할 수 없는 ‘한강뷰’를 배경삼아 물놀이를 할 수 있다는게 정말 매력이지 않은가?

그렇게 시원함을 선사한 수영장 중 일부가 노후화되어 간다. 이에 서울시는 현대적 기술과 감각을 적용하여 새로운 개념의 물놀이 공간을 선보일 예정이다. 일명 자연형 물놀이장이다. 자연형 물놀이장은 생태적인 의미를 더한 곳으로 자연친화적인 물놀이 공간이 될 예정이다. 2024년에 기존에 잠실수영장이 먼저 자연형 물놀이장으로 변신을 하고 광나루, 잠원, 망원까지 점차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 자연형 물놀이장이 어떤식으로 꾸며질지 궁금하다.

이제까지 한강의 물놀이에 대해서 정리해봤다. 일부는 수강생들의 입을 빌려 전개를 하기도 했다. 딱딱한 문헌 자료를 기반으로 하는 것보다 더 좋지 않은가?

이제 여름이다. 내친김에 수영복 입고 한강에 풍덩 해볼까? 그런데 불룩한 똥배가 앞을 가리고 있어서...

 


 

*** 글쓴이 곽동운은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있다. 현재 백화점 문화센터와 서울시50플러스에서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트레킹을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역사트레킹 공동체’를 꾸리고 싶어 한다.

 

 

 

 

 
 

 

 

 

한강 다리는 즐거운 놀이터

한강 다리가 이렇게 재밌는 곳이었어?

 

필자는 한 때 한강에 미쳤던(?) 적이 있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지난호에 한강의 섬에 대한 이야기를 기고했었다. 글을 잘 썼는지 이번에도 한강에 대한 이야기를 또 기고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 이 글은 한강에 미쳤던 사람의 두 번째 한강이야기다. 즐거운 놀이터가 되어주는 한강 다리 이야기.

오늘도 사람들은 한강을 분주하게 넘고 있다. 강남과 강북을 가르며 자연장벽이 될 수도 있는 한강을 현대인들은 손쉽게 건너고 있다. 그럼 언제부터 한강을 나룻배가 아닌 교량을 통해 건너갔을까? 1900년 한강철교가 부설되면서부터다. 1899년에 경인선이 개통됐는데 그때는 노량진역이 출발역이었다. 다음해에 한강철교와 함께 경성역이 준공됐고, 1900년 7월에 ‘경성역-인천역’까지 완전 개통을 하게 된다. 경성역은 나중에 서대문역으로 불렸는데 지금의 서울역과는 다른 곳이다.

 

 

* 동작대교: 동작대교 위로 넘어가는 노을. 서래섬 부근에서 촬영함.

 

 

 

한강철교는 기차만 다닐 수 있는 철도전용 다리였다. 지금이야 교통카드만 있으면 간편하게 전철을 타고 한강을 건널 수 있지만 구한말에 살았던 사람들이 손쉽게 티켓팅을 할 수 있었을까? 일반 사람들도 편리하게 한강을 넘을 수 있게 된 건 1917년부터였다. 이때 한강 인도교라 불렸던 한강대교가 개통됐다.

이후 서울은 확장을 거듭했고, 한강의 다리들도 더 많이 건설됐다. 그럼 서울의 한강에는 몇 개의 다리가 있을까? 총 27개다. 여기서 말하는 다리는 서울시와 연관을 맺는 다리를 말한다. 그래서 팔당대교(남양주시-하남시)처럼 경기도와 경기도를 잇는 다리들은 27개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런 다리를 두고 서울시에서는 ‘시계외 교량’이라고 부르는데 팔당대교, 김포대교 등 총 4개가 있다.

한편 서울 강동구와 경기도 구리시를 잇는 고덕대교(가칭)가 올해 말 준공을 앞두고 있는 등 앞으로도 한강 다리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잠깐 교량의 종류에 대해서 알아보자. 교량의 종류는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순수도로교량
철도교량
철도도로병용교량
예) 마포대교
예) 당산철교
예) 동작대교

 

순수도로교량은 자동차가 다니는, 철도교량은 기차만 다니는 다리 형태로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교량 형태다. 이에 비해 철도도로병용교량은 자동차와 기차가 교량을 함께 쓰는 다리 형식으로 도시 지역에서만 나타난다. 인천공항을 오가는 영종대교를 제외하고 철도도로병용교량은 서울에만 존재한다.

 

 

 

* 동작대교: 자동차와 나란히 주행하는 4호선 전동차

 

 

 

● 동작대교: 지하철과 자동차가 함께 경주를 한다?

지면관계상 한강 다리를 일일이 다 언급할 수는 없고, 몇 개만 추려서 이야기 해본다. 첫 번째 다리는 동작대교다. 동작구 동작동과 용산구 이촌동을 잇는 동작대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도로병용교량이다. 푸른색 아치가 인상적인 동작대교는 1984년에 준공됐고, 그 다음해에 지하철 4호선이 개통한다. 동작대교 위로 푸른색으로 도장된 4호선 전동차들이 자동차들과 경주하듯 달리게 됐다. 전동차와 자동차가 한 공간에서 나란히 주행을 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무척 이색적이었다.

그래서 동작대교는 영화나 CF의 단골 다리로 등장했다. 미끄러지듯 전동차가 달리고, 그 옆으로는 자동차가 경쾌하게 주행을 하며, 그런 모습을 주인공이 미소지으며 지켜보고...

동작대교의 남단은 ‘동재기나루(銅雀津:동작진)’라고도 불렸던 동작나루가 있던 곳이다. 동작역 4번 출구에서 나오면 서울현충원으로 갈 수 있는데 중간에 이곳이 동작나루였다는 것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옛날 나룻배로 동작나루를 건넜던 사람들은 남태령으로 향했고, 과천에 당도할 수 있었다. 삼남(충청, 전라, 경상)지역으로 먼 길을 떠나야 했던 이들도 동작나루를 이용했었다.

 

 

* 동작대교: 동작대교 위에 있는 구름카페

 

 

 

동작나루는 정조대왕이 화성 능행차를 행하기 위해 건넌 곳이기도 했다. 왕이라 나룻배로 움직이시지 않고 임시로 배다리를 만들어 한강을 건너셨다. 배다리는 정약용 선생이 설계했다고 전해진다. 어쩌면 이 배다리가 동작대교의 시초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현재 동작대교가 놓인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이들이 오갔던 교통의 요지였던 셈이다.

그 수많은 발걸음에 필자도 빠질 수 없었다. 동작대교 남단에 있는 구름카페와 노을카페로 향했다. 구름카페는 동쪽, 노을카페는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동작역과 가까워서 접근성이 무척 좋다. 2009년에 오픈한 두 카페는 몇 년 전 재정비를 한 후 야경 명소로 재탄생했다. 한강은 당연하고, 남산은 물론 서울현충원을 품고 있는 서달산까지 파노라마로 볼 수 있으니 한강의 전망 ‘맛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여의도와 가까워서 그런지 서울세계불꽃축제를 편하게 볼 수 있는 명당(?)이라고 입소문이 자자하다.

참고) 구름카페 / 노을카페: 운영시간 매일 07:00 ~ 24:00 / 주차가능(유료)

 

 

 

* 반포대교: 달빛무지개분수

 

 

 

● 반포대교와 잠수교: 다리도 걷고, 달빛무지개분수도 감상하고

필자가 도보여행가라서 그런 것일까? 한강에 있는 다리들을 걸어서 넘기 편한 순서대로 분류를 한 적이 있었다.

1.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2. 보행로가 넓어야 한다.

3. 연결 대중교통이 있으면 좋다.

이 원칙에 의거하면 가장 손쉽게 넘을 수 있는 다리는 잠수교다. 잠수교는 보행 공간이 넓어 자동차의 위협(?)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다. 또한 남단쪽인 서초구 반포한강공원에는 버스정류장이 있고, 북단쪽인 용산구 서빙고동에는 경의중앙선 서빙고역이 가깝게 자리잡고 있다. 더군다나 잠수교는 795m로 한강 다리 중에서는 가장 짧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잠수교는 걸어서 넘을 수 있는 최적화된 한강 다리임에 틀림없다.

아시다시피 잠수교는 위쪽에 반포대교가 놓여 있다. 복층형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형태는 아니었다. 1976년에 잠수교가 건설됐고, 6년 후인 1982년에 반포대교가 추가로 건설된다. 두 다리가 동시에 세트로 지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가 않다.

잠수교는 유사시 탱크나 장갑차가 통과하는 걸 염두에 두고 건설되었다. 그래서 교량의 높이를 낮게 만들었다. 이렇게 다리가 낮다 보니 비가 많이 오면 제일 먼저 ‘잠수’를 하게 된다. 홍수 시에 한강 수위를 나타내는 척도가 되어주는 것이다.

 

 

* 잠수교: 한강을 걸어서 넘기에 좋은 잠수교

 

 

 

 

이렇게 키가 낮은 잠수교는 2008년에 4차선에서 2차선으로 차로가 축소된다. 차로는 좁아졌지만 보행로는 넓어지게 된다. 걷기 친화적인 다리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때 윗층에 있는 반포대교도 달빛무지개분수가 설치되며 새롭게 변신하게 된다. 반포대교 상판에 조명과 함께 분수 시설이 설치되어 더위에 지친 시민들의 가슴을 적셔주게 된 것이다. 형형색색의 조명과 함께 시원한 물줄기가 뿜어질 때는 관람객들의 탄성이 한강변에 울리게 된다.

지난 4월 1일 토요일, 올 해 첫 달빛무지개분수가 가동된 날이었다. 잠수교를 탐방한 후 달빛무지개분수를 보기 위해 자리를 잡으러 갔다. 하지만 명당 자리는 이미 누군가가 돗자리를 펴고 있었다. 워낙 관람객들이 많다 보니 자리싸움이 치열했다. 그런 와중에 외국인들의 목소리가 많이 들렸다. 이미 달빛무지개분수는 외국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볼거리로 자리를 잡은 듯싶었다.

축제가 빠질 수가 없다. 작년에 '차 없는 잠수교 뚜벅뚜벅 축제'가 개최되었다. 잠수교를 보행 전용 다리로 바꿀 예정인데 그에 앞서 축제를 통해 미리 체험을 해보자는 것이다. 올해는 상·하반기 10회씩, 총 20회의 뚜벅뚜벅 축제가 개최될 예정이다.

작년에 한강달빛야시장도 반포한강공원 일원에서 진행됐다. 코로나로 인해 3년 만에 다시 등장한 야시장은 이전에는 ‘밤 도깨비 야시장’으로 불렸다. 40여 개의 푸드 트럭과 60여 개의 판매부스 등이 야행을 즐기는 시민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 반응이 너무 뜨거웠던지 한강달빛야시장이 열리자 강남 일대 교통이 마비가 됐을 정도였다.

 

참고) 달빛무지개분수: 운영기간 4~10월(11월 이후 휴업)

4~10월 12:00, 19:30, 20:00, 20:30, 21:00 (20분씩 가동)

7~8월 12:00, 19:30, 20:00, 20:30, 21:00, 21:30 (20분씩 가동)

 

 

 

 

 

* 청담대교: 서울생각마루(자벌레) 옆 청담대교. 7호선 전동차가 주행하고 있다.

 

 

 

● 청담대교: 자벌레가 있는 즐거운 놀이터

지하철을 타다 보면 선호하는 구간이 하나쯤 있기 마련이다. 누구는 북한산, 수락산, 불암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4호선 상계역 구간을 좋아하는 이도 있고, 누구는 여의도의 고층빌딩과 한강의 밤섬을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는 2호선 당산철교 구간을 선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7호선 청담대교 구간을 좋아한다. 특히 한강 남쪽인 지하 구간에서 청담대교로 진입하는 그 순간을 무척이나 즐긴다. 전동차가 어두운 지하 구간에서 청담대교로 나올 때 특유의 진동음이 발생되는데 그런 소음까지도 클라이맥스를 기다리는 배경음으로 들릴 정도다. 어두운 지하 구간에서 ‘딱’하고 나오자마자 넓은 한강이 펼쳐지는 거 자체가 아주 극적이기 때문이다.

청담대교는 아래층은 7호선 철로가 위층에는 차로가 있는 복합교량이다. 본교가 1999년 12월에, 접속교는 2001년 1월에 개통되었다. 이렇게 접속교 개통까지 언급한 이유는 청담대교가 자동차 전용도로로 보행이 불가한 교량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담대교는 동부간선도로상에 있으면서 분당-수서간 고속도로와 바로 연결된다.

같은 철도도로병용교량이지만 청담대교는 동작대교나 동호대교와는 다른 이미지이다. 동작대교와 동호대교가 철로를 가운데에 두고 차로가 좌우로 있는 구조라면 청담대교는 영종대교처럼 위아래로 층층이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동작대교에서는 전동차와 자동차가 나란히 주행하는 화면이 많이 그려진다.

그런 모습을 주인공이 미소지으며 바라보고 있고... 이에 비해 청담대교는 한강변에서 청담대교를 올려보는 모습이 많이 그려진다. 주인공이 청담대교를 배경으로 한강변을 바라보고 있고, 이때 마침 전동차가 지나가는 장면이 펼쳐진다. 배경음악은 도시 감각에 맞는 음악으로...

 

 

* 청담대교: 서울생각마루 전망대에서 바라본 청담대교. 전망대에서는 청담대교를 바로 옆에서 조망할 수 있다.

 

 

 

청담대교의 북단에는 뚝섬유원지역이 있고, 그 아래에는 뚝섬한강공원이 있다. 뚝섬유원지 시절부터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곳에는 길이가 200미터가 넘는 자벌레가 산다(?). 이 자벌레는 서울생각마루라는 복합공간으로 전망시설과 함께 각종 문화시설이 들어서 있다. 자벌레는 특이한 외형 때문에 셀카 명소로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고 청담대교를 넘었다. 어두운 터널에서 ‘딱’하고 한강으로 나왔을 때의 쾌감은 여전했다. 뚝섬유원지역에서 하차한 후 커피 한 잔을 들고 자벌레 앞에 가서 셀카를 찍었다. 이때 마침 청담대교로 전동차가 지나고 있었고 도시 감각의 음악이 들리고 있었다.

이렇게 한강 다리들은 콘크리트 구조물이라는 무거운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서고 있다. 거기에 재미까지 더해졌다. 한강 다리들이 이렇게 재밌는 곳이다. 시민들의 즐거운 놀이터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참고) 서울생각마루 운영시간: 평일 및 주말 10:00 ~ 21: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 1월1일 / 설날 및 추석연휴

 

 

* 이 글은 서울시체육회에서 발간하는 격월간 <서울스포츠> 2023년 5~6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역사트레킹으로 밥먹고 삽니다_ 1편

- 나를 가이드라고 부르는 사람이 싫었다!

- 역사트레킹마스터(historytrekkingmaster)

내 스스로에게 붙인 명칭이다. 초창기에 붙인 명칭이니 거의 십 년 정도 된 거 같다. 이력서를 쓸 때마다 저 명칭을 기술했는데 인사담당자들은 거의 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역사트레킹은 대충 알겠는데 ‘역사트레킹마스터’는 감이 잘 안 온다는 뜻이었다. 하긴 나도 담당자에게 전화를 할 때는 이랬다.

“안녕하세요? 트레킹 강사 곽동운인데요.”

‘대장’이라는 명칭은 피하고 싶었다. 기존 산악회에서 통용되는 명칭을 쓰면 첨언할 필요 없이 다른 이들을 쉽게 납득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일이 대장이라는 명칭과는 어울리지도 않았을뿐더러 내가 누군가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것도 좀 닭살 돋았다.

어쨌든 난 역사트레킹마스터라는 낯설고도 긴 명칭을 직업란에 기재를 해왔다. 그리고는 항상 역사트레킹마스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이러쿵저러쿵 말을 덧붙여야 했다. 그 덧붙이는 말의 총량은 초창기 때와 비슷하다. 요즘도 사람들이 잘 모르니깐...

마스터(master), 아시다시피 ‘주인’이라는 뜻이다. 거기에 더해 ‘~숙달하다’, ‘~통달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역사트레킹마스터는 ‘주인’이라는 뜻보다는 ‘숙달하다’라는 의미로 쓰인다고 할 수 있다. 마스터는 전반적인 리딩은 물론, 적재적소에서 해설을 해야 한다. 입담이 좋아 청산유수처럼 해설을 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꼭 해설을 해야 한다. 왜? 역사트레킹이니깐! 돈을 받고 하는 트레킹이니깐!

 

* 인왕산 기차바위 인근에서 찍은 사진. 뒤쪽에 서대문 안산이 보인다.

역사트레킹마스터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주로 둘레길을 걷지만 역사트레킹도 엄연히 아웃도어 활동이다. 만 보 이상 걷고, 4시간 정도 소요되는 야외활동이다. 그래서 스트레칭이나 호흡법 같은 피지컬적인 요소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또한 야생동물로부터 수강생들을 보호하는 것도 마스터의 임무이다. 산책로에 뱀이 있으면 스틱으로 뱀을 치워버리고, 앞에 멧돼지가 나타나면 자신의 몸으로 ‘몸빵’을 해야 한다.

이것 말고도 상당히 중요한 임무가 있다. 피식 웃을 수도 있지만 무척 중요하다. 무엇이냐? 바로 화장실이다. 우리나라에서 대중트레킹을 향유하는 주요 계층은 40~60대 여성들이다. 실제로 내 강의인,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의 수강생 대부분은 중년 여성들이다. 그러다보니 화장실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내가 남자라 그런지 남성 수강생분들에게는 ‘알아서 하시라’고, 그냥 맡긴다. 실제로도 알아서 잘들 하신다. 하지만 여성 수강생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난 트레킹 중에 물을 많이 마시자는 주의다. 수강생들에게 물을 많이 들이켜게 했으니 응당 그에 대한 후속조치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답사를 갈 때 꼭 화장실 위치부터 체크한다. 화장실이 없는 곳은 아무리 좋은 길이라도 코스에서 제외시킨다.

리딩과 해설, 그리고 야생동물과 맞서기와 화장실 체크까지... 주인이 아니라 무슨 마당쇠같다. 그렇다. 난 수강생들에게 주인이 아니라 마당쇠 역할을 한다고 힘줘서 이야기한다.

이런 모습은 여행가이드와 외형적으로 같아 보인다. 여행가이드가 고객이 편하게 여행에 몰입할 수 있게 서포터를 해주듯, 역사트레킹마스터인 나는 수강생분들이 편하게 트레킹에 임할 수 있도록 마당쇠 역할을 해준다. 명칭만 다를 뿐 내용상으로는 많은 부분이 겹친다. 지금도 종종 나를 ‘가이드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예전에는 가이드라는 이름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개의치 않는다. 마스터든, 강사든, 가이드든 명칭이 중요한 게 아니라 트레킹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이후부터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은 것이다.

난 계속 직업란을 역사트레킹마스터(historytrekkingmaster)로 기재할 것이다. 그리고는 궁금한 표정을 짓고 있을 상대방에게 그 역할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덧붙일 것이다. 그런 첨언의 과정이 언제 끝날지는 모른다. 이 연재를 시작한 건 그 과정을 줄여보자는 의미에서 시작한 것도 있다.

하지만 내 직업을 제대로 기록해보자는 것이 본 연재의 가장 큰 목적이다. 어찌 보면 내 직업은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이다. 업무 분장이 명징하게 기재된 메뉴얼이 있는게 아니라 매뉴얼을 직접 만들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창작한다는 심정으로 내 일에 대해서 기록을 남겨보고 싶다. 풍광이 수려한 트레킹 코스를 알고 싶어 이 글을 클릭한 분들에게는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

 

추신. 그런 의미로 트레킹 코스에 대해서 알고 싶은 분들은 번지수를 잘못 찾으셨다. 트레킹 코스에 대해서 알고 싶은 분들은 링크를 클릭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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