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rge figure in a shelter: 거대 대피소라는 명칭의 작품. 게르니카와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대성당 인근에 있는 parque de los pueblos de Europa 공원에 있다. free palestine!

 

 

 

<재미난 스페인 13편> 스페인 내전과 게르니카

게르니카에서 <게르니카>를 봤다!

스페인에 대해서 잘 모를 때였다. 그래도 유럽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서 게르니카(Gernika)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1937년 스페인 내전 당시였다. 프랑코 군대를 돕기 위해 나치 독일의 공군기들이 게르니카를 폭격한다.

지도를 찾아보았다. 바르셀로나를 위시한 카탈루냐 지역을 쭈욱 훑어봤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프랑코 군대에 반대한 인민전선이 바르셀로나를 임시수도로 정할 만큼 카탈루냐 지역은 반 프랑코 정서가 강한 곳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게르니카도 카탈루냐 지역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바스크 지역에 있었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는 빌바오의 옆 동네가 바로 게르니카였다. 이게 무슨 창피인가...

스페인은 1898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그나마 남아있던 식민지들까지 잃게 된다. 미국에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괌을 넘겨줬고, 쿠바는 독립하게 된다.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에서 유럽 변방으로 완전히 몰락한 것이다. 그 이후로도 스페인은 내외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됐다.

1923년 9월에 바르셀로나에서 쿠데타가 일어난다. 그 유명한(?) 프란시스 프랑코가 군사 반란을 일으켰는가? 아니다. 미구엘 프리모 데 리베라(Miguel Primo de Rivera)라는 카탈루냐 주둔군 사령관이 군대를 동원했다. 총리에 오른 리베라는 독재 정치로 자유를 억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일정 정도 경제발전을 이루게 된다. 당시 왕이었던 알폰소 13세는 리베라의 독재 정치를 슬쩍 눈감아 주었다.

짧은 호황기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2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이 발생했고 그 여파가 대서양 건너 스페인에도 퍼지게 된다. 독재 정치에 대한 반감, 악화하는 경제상황 등등... 여러 악재가 겹쳐지자 리베라는 사임하게 된다. 이때가 1930년 1월이었다. 그는 프랑스로 망명을 하게 됐는데 사임을 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파리의 한 호텔에서 병사하게 된다.

 

 

 

* 게르니카대성당: 스페인 내전 이후로 복원됐다.

 

 

 

리베라가 집권하던 1920년대, 유럽에서는 파시즘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군사독재를 이끌던 리베라도 파시즘을 동경했다. 실제로 그는 이탈리아에 가서 당시 파시스트당을 이끌고 있던 베니토 무솔리니와 회담을 한다. 이때 리베라는 존경의 의미로 무솔리니에게 두체(duce)라고 칭하게 된다. 두체는 ‘총통’ 혹은 ‘수령’으로 쓰이기도 하고, ‘공작’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미구엘 프리모 데 리베라가 사망한 후, 3년 뒤인 1933년이었다. 그의 아들인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José Antonio Primo de Rivera)가 팔랑헤(Falange)라는 파시스트 정당을 결성한다.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는 팔랑헤를 통해서 자신의 아버지의 이념을 계승하려고 했다.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는데 이때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는 공화파 정부에 의해 체포됐다. 군사반란을 사주했다는 죄목이었는데 결국 그는 1936년 11월에 총살됐다.

팔랑헤의 유산은 군사반란의 지도자인 프랑코가 계승했다. 이념과 정책을 뒷받침해 줄 파시스트 정당을 발 밑에 두고 공화파 정부에 총부리를 겨누었던 것이다.

1931년 4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국왕 알폰소 13세가 이탈리아로 망명을 한 것이다. 같은 달에 있었던 선거에서 군주정 폐지를 선언한 좌파 세력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4월 14일에 제2공화국이 선언됐고, 알폰소 13세는 스페인을 떠나게 된다. 이로써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약 230년간의 통치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완전히 끝은 아니었다. 프랑코가 사망한 후 다시 부르봉 왕조가 부활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도 혼란이 멈추지 않았다. 1931년 좌파, 1933년 우파, 1936년에는 다시 좌파가 집권하게 된다. 이때 각각의 집권 세력들은 전임 정부의 정책들을 되돌려 놓았다. 예를 들면 당시 초미의 관심사였던 농지법은 ‘좌파정책 -> 우파정책 -> 좌파정책’으로 마치 실타래가 꼬이듯, 꼬이게 된다.

이런 혼란을 틈타 군부가 13년 만에 다시 쿠데타를 일으킨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 것인데 이때가 1936년 7월 17일이었다. 좌파 세력이 인민전선을 결성하여 선거에서 승리한 지 5개월이 지난 때였다. 동남아시아도 마찬가지인데 스페인 사례처럼 한 번 쿠데타가 일어나면 계속 일어나게 된다. 그러니 애초부터 그 뿌리를 싹 뽑아버려야 한다.

 

 

 

 

* 게르니카: 스페인 내전 당시의 모습을 담은 전시물들.

 

 

 

스페인 내전 초기에 군부는 남북 종심축으로 작전을 펼쳤다. 당시 아프리카 지역 사령관인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는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에 상륙하여 북쪽으로 진군했다. 반대로 나바라 주둔군 사령관인 에밀리오 몰라(Emilio Mola)는 북쪽인 팜플로나에서 남쪽 방향으로 진격했다.

남북으로 치고 오던 군사반란군들이 서로 연결됐고, 수도인 마드리드를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공화국 지지자들이 버티고 있던 마드리드는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프랑코는 마드리드를 남겨두고, 북부 지역 공세에 주력한다. 공화국의 세력 범위에 있던 북부 지역들이 차례차례 반란군들에게 함락됐다. 이 시기에 게르니카 학살도 발생하게 된다. 그때가 1937년 4월 26일이었다.

‘내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스페인 내전은 국제적이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프랑코 군대를 위해 참전했다. 반면 소련과 멕시코가 공화국군을 지원했다. 이와 별도로 세계 각국에서 온 의용병들이 국제여단이라는 이름으로 공화국을 위해 싸웠다. <동물농장>, <1984>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도 파시스트들과 싸우기 위해 총을 들었다. 조지 오웰은 전투 중에 총상을 입기도 했는데 그런 스페인 내전의 경험을 담아 <카탈루냐 찬가>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출간하게 된다.

조지 오웰 이외에도 앙드레 말로, 존 콘포드와 같은 문인들이 직접 참전했다. 또한 알베르 카뮈, 생텍쥐페리, 파블로 네루다, 루이 아라공,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공화국 정부에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은 게르니카에 중무장한 폭격기와 전투기를 보냈다. 폭격으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많은 시설물들이 파괴됐다. 당시 공화국 측에서는 1,600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평화로웠던 작은 도시가 한 순간에 지옥으로 변한 것이다.

그럼 왜 독일은 게르니카를 공습했을까? 새로 개발한 전략 무기들을 테스트하기 위해서였다. 신무기들의 파괴력을 확인하기 위해 무고한 게르니카 시민들을 희생시켰던 것이다. 게르니카 공습이 있고, 약 2년 뒤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 게르니카: 게르니카에서 본 피소의 <게르니카>. 원본은 마드리드에 있는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에 있다.

 

 

 

 

<게르니카>는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 중에 공화국의 요청으로 그린 작품이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에서 벌어진 만행을 화폭에 담아 전쟁의 비참함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그런데 당시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던 피카소는 프랑코가 집권하는 한 조국으로 <게르니카>를 보낼 수 없다며, 미국에 그림을 맡겨버렸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조국 스페인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돌려보낸다는 조건이었다.

40년 넘게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타향살이'를 했던 <게르니카>는 드디어 1982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영원할 거 같았던 프랑코의 철권통치도 1975년, 그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후 스페인은 발 빠르게 민주화로 나아갔다. 그림의 반환에 스페인 국민들은 크게 환호했다. 전세계 사람들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스페인이 오랜 독재체제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사회로 거듭났음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빌바오에서 게르니카로 향하는 전철을 탔다. 약 50분 정도 걸렸는데 바깥 풍광이 예뻐서 지루하지 않았다. 드디어 게르니카에 도착했다. 게르니카는 아담했지만 활기차 보였다. 현재의 게르니카에는 스페인 내전 당시의 상흔이 크게 남아있지 않았다. 거의 다 복구가 된 거 같았다. 사실 서울도 한국전쟁을 혹독히 겪었지만 지금 서울에 한국전쟁 때의 상흔이 남아있는 장소가 거의 없지 않은가? 대신 곳곳에 조형물을 설치하여 그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게 곳곳을 탐방하다 드디어 <게르니카> 벽화 앞에 서게 됐다. 드디어 <게르니카> 벽화를 내 두 눈으로 보게 됐다. 피카소가 그린 오리지널 <게르니카>는 마드리드에 있는 레이나 소피아 국립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고, 이 벽화는 오리지널을 복제한 것이다. 어쨌든 복제한 것이지만 게르니카에서 <게르니카>를 보게 됐다.

게르니카 대성당 위쪽에 유러파 공원이라는 곳이 있어 그곳을 찾아갔다. 대성당도 당시 폭격의 참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크게 훼손이 됐고 이후에 복구하게 된다. 그래서 아랫돌과 윗돌의 색깔이 다르다.

공원이 조용하고 쾌적해서 산책하기에 적당했다. 야외 조형물들도 세워져 있었는데 동네가 동네인만큼 모두 평화를 주제로 하고 있었다. 한적한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 보니 여행에서 온 피로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평화로운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게르니카에서 평화의 느낌을 받게 됐다.

 

 

 

 

 

* 유로파공원: 대성당 인근에 있다. 산책하기에 정말 좋았다. 이곳에서 평화에 대해서 곱씹어 보았다.

 

 

 

 

 

 

 

 

*게르니카 지도

 

 

 

 

 

* 성모천사성당(Church of Our Lady of the Angels)과 베르나드타워(Bernard So Tower): 성당과 타워는 인접해있지만 별개의 건물이다. 타워는 감옥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재미난 스페인 12편> 이비아

왜 프랑스 땅에 스페인 영토가 있어?

유럽을 여행할 때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고풍스러운 건축물도, 아름다운 자연환경도 아니었다. 바로 국경 넘기였다.

필자에게 기존의 국경이란 절대 넘을 수 없는, 그런 공간이었다. 날카로운 철조망이 2단으로 쳐져 있고, 각종 감시장비가 빽빽이 운영되어 있던 곳. 긴장감, 살벌함, 매서움 등등... 이런 이미지가 뇌리에 박힐 수밖에 없었던 건, 필자가 군복무를 DMZ 부근에서 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철책선이 국경선이었고, 그 철책선은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금지된 선이었다.

전날 피레네산맥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 안도라에서 1박을 했다. 공기가 좋은 곳에서 잠을 잤더니 얼굴에 생기가 도는 듯했다. 물론 아침에 거울을 봤을 때는 어김없이 오징어(?)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왔지만...

이번에 탐방할 곳은 이비아(Llivia)라는 곳이다. 리비아? 북아프리카에 있는? 아니다. 영어로 읽으면 ‘리비아’가 맞지만 스페인어로는 ‘이비아’로 발음한다. 안도라는 어찌어찌해서 이름을 들어본 분들이 있을 테지만 이비아는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 대다수일 것이다. 이비아도 안도라처럼 피레네산맥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두 도시는 약 50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래서 두 지역을 묶어서 탐방할 수도 있다.

 

 

 

* 이비아: 이비아성에서 바라본 모습. 하단 중앙에 천사성모 성당이 보인다.

 

 

 

그런데 그 낯선 이비아에는 뭐하러 갔는가? 이비아의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갔다. ​이비아는 프랑스 영토 안에 있는 스페인 땅이다. 혹시 칼리닌그라드라는 지명을 들어보셨는가? 칼리닌그라드는 폴란드 동북쪽 국경과 면해 있는 곳으로 러시아의 고립 영토다. 바닷길을 제외하고, 칼리닌그라드에서 러시아 본토로 가려면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를 거쳐 가야 한다.

이렇듯 다른 나라에 둘러싸여서 본토와 외떨어진 영토를 고립 영토라고 부른다. 스페인에 둘러싸여 있는 영국령 지브롤터도 대표적인 고립 영토다. 또한 북아프리카 모로코 영토에 둘러싸인 세우타와 멜리야도 스페인의 고립 영토다.

그래도 칼리닌그라드와 지브롤터는 바다와 면해 있어 바닷길로 본토에 닿을 수 있다. 세우타와 멜리야도 마찬가지로 여객선을 타면 스페인 본토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비아는 무조건 프랑스 땅 2km를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다. 이게 참 재밌는 게 어쨌든 국경을 넘는 거라 스마트폰 통신사가 달라진다.

사실 이비아는 필자 같은 뚜벅이 여행자들이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그래서 일부러 여행 초기에 배치해서 찾아갔다. ​먼저 안도라에서 스페인의 라세우두르젤(La Seu d'Urgell)로 갔고, 다시 프이그세르다(Puigcerdà)라는 도시로 이동했다. 익숙하지 않은 지명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사실 필자도 두 도시의 이름을 발음하기가 버겁다. 차라리 ‘안도라’는 세글자로 떨어져서 발음하기가 편하기라도 하지... 이렇게 유명하지 않은 외국 답사지를 각인시키기가 쉽지 않다. 이런 어려움은 이 책을 쓰는 내내 필자의 어깨를 무겁게 내리눌렀다.

 

 

 

* 천사성모성당: 중심거리에서 바라본 성당의 종탑

 

 

 

긴장을 풀고 찬찬히 살펴보자. 라세우두르젤은 안도라 편에서 언급이 됐었다. 안도라는 입헌공동군주제라는 독특한 형태의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는데 프랑스 대통령과 스페인의 우르헬 교구의 주교가 그 공동군주들이다. 그 우르헬 교구가 있는 도시가 바로 라세우두르젤이다. 프이그세르다는 프랑스 국경과 맞닿아 있는데 이비아로 가기 위한 베이스캠프(?)로 제격인 곳이다.

안도라 -> 라세우두르젤 -> 프이그세르다 -> 프랑스영토(유흐 / 부흑-마담므) -> 이비아

복잡해 보이지만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았다. 총 이동 거리는 약 70km 정도이다. 스페인 영토인 프이그세르다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프랑스땅을 넘어 이비아로 갔다. 갈아탄 버스는 우리나라로 치면 마을버스만한 크기였다. 그래도 나름 국경을 넘는 버스인데 아주 소박하고 정감 있어 보였다. 프이그세르다에서 이비아까지 프랑스 영토내에서 직선으로 도로가 연결되는데 그 도로를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동네가 부흑-마담므(Bourg-Madame)이고, 서쪽에 있는 동네가 유흐(Ur)이다.

이비아의 지정학적인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세르다냐(Cerdaña)라는 지역을 알아야 한다. 스페인에 속한 이비아와 프이그세르다는 물론 프랑스령인 유흐와 부흑-마담므도 세르다냐에 속하기 때문이다. 세르다냐는 전체면적이 1,086㎢로 인천광역시(1,067㎢) 정도의 크기다. 지금은 남북이 갈려 있는데 남쪽은 스페인 영토로 바이샤 세르다냐(Baixa cerdanya)로 북쪽은 프랑스 영토로 알타 세르다냐(Alta cerdanya)로 불린다. 그 프랑스 세르다냐 지역 속에 스페인의 이비아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종교전쟁이라고 불렸던, 30년 전쟁이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결됐음에도 스페인과 프랑스는 계속 전쟁을 이어갔다. 그러다 1659년, 피레네조약에 의해서 종전을 하게 됐는데 이때 스페인은 세르다냐 북부지역을 프랑스에 넘겨주게 된다. 협정을 통해 프랑스는 북쪽 세르다냐의 33개 마을을 획득하게 됐다. 하지만 이비아는 제외되는데 스페인측에서 이비아가 ‘마을(village)’이 아닌 ‘도시(town)’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 이비아성: 많은 부분이 폐허로 남아 있다.

 

 

 

피레네조약을 통해 프랑스가 얻은 영토를 생각해보면 이비아는 작은 규모였다. 챙긴 전리품이 두둑한데 굳이 타운 하나 때문에 전쟁을 이어나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해서 이비아는 스페인영토로 남게 됐다.

이비아는 부메랑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크기가 약 12.9㎢ 정도로 서울의 금천구(13㎢)와 비슷한 규모다. 인구는 2023년 기준으로 약 1,500명 정도에 달한다. 행정구역은 카탈루냐 지역, 지로나 주에 속한다.

사실 이비아는 로마시대부터 그 중요성이 부각된 곳이었다. 이름도 이곳에 주둔했던 로마의 장군인 율리아 리비카(Julia Lybica)에서 따온 것이다. 이비아는 한때 세르다냐의 도읍지 역할을 했다.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중심가를 지나니 언덕을 향해 자리잡은 천사성모 성당이 보였다. 이 성당은 16세기에 완성됐는데 도시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풍채가 당당했다. 성당의 입구에는 베르나드타워라는 탑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탑이 있어 성당의 외형이 더 다채로워 보였다.

이비아 탐방의 정점인 이비아성(castell de Llivia)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비아성은 상당 부분 파괴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상부에 올라서니 주위 풍광을 한눈에 다 볼 수 있었다. 로마시대부터 오랫동안 왜 이곳이 요충지였는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 이비아: 평원을 피레네의 고봉들이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분명 피레네 산맥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 일대는 큰 평원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이 피레네가 맞나 싶을 정도로 널찍한 공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마치 피레네의 고봉들이 평원을 숨겨놓고 있는 형상이었다. 평원과 고봉들을 동시에 볼 수 있었던 꽤나 흥미로운 순간이었다. 그런 굉장한 풍광들이 이슬비와 함께 눈 앞에 펼쳐지고 있으니 약간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DMZ에서 보초를 설 때였다. 어둠이 거치고 여명이 밝아올 무렵, 철책선 건너편에서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소총에 힘을 꽉 쥐고, 초소를 나와 철책선 너머가 더 잘 보이는 곳으로 이동했다. 침투조인가? 아니었다. 멧돼지들이었다. 한 마리가 아니라 가족단위였다. 먹이를 찾아 철조망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나중에는 고라니들도 보였다. 말 그대로 DMZ은 야생동물들의 천국이었다. 야생동물들은 자유롭게 DMZ 일대를 누비는데 왜 인간들은 날카로운 철책선으로 금을 그어 서로를 분리시키는가?

국경 같지도 않은 국경을 마을버스로 넘으며 필자의 20대 시절을 되돌아봤다. 프랑스에 있는 스페인 고립영토 이비아에서.

 

 

*이비아 지도

 

 

 

 

 

 

 

* 안도라베야: 안도라의 수도 안도라베야

 

 

 

 

 

<재미난 스페인 11편> 입헌공동군주제? 그런 말도 있어?

피레네의 작은나라 안도라

바르셀로나 국제공항에 내렸다. 그간 마드리드 국제공항은 많이 이용했지만 바르셀로나 공항은 처음이었다. 서울도 그렇지만 바르셀로나의 여름도 만만치 않았다. 아니 무슨 6월 초순의 날씨가 이렇게 강렬한가! 이제껏 스페인, 포르투갈은 가을이나 겨울 시즌에만 와서 그랬는지 이베리아반도의 여름 맛(?)은 처음이었다. 한국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뜨거운 뙤약볕이었다!

이후 바르셀로나 중앙역 옆쪽에 있는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안도라(Andorra)로 이동했다. 총 비행시간이 16시간을 넘다 보니 버스를 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확실히 비행기보다는 버스가 잠자기에 딱이었다. 덕분에 시차 적응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안도라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피레네산맥에 있는 작은 나라다. 서울의 면적이 605㎢이고, 안도라가 468㎢이니 서울보다도 더 작은 곳이다. 인구는 2021년 기준으로 약 8만 명 정도에 달한다. 안도라의 공식 명칭은 안도라공국(Principality of Andorra)이다. 거칠게 말해 공작이 최고 수반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공작은 새가 아니라 백작, 공작할 때 그 공작이다.

그런데 왜 하필 안도라인가? 안도라와 스페인이 무슨 관계가 있나? 안도라는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방과 크게 연관을 맺고 있는 곳이다. 공용어로 카탈루냐어를 사용하고, 심지어 카탈루냐 지방에 속한 우르헬이라는 도시의 주교가 안도라의 공동 수반으로 봉직하고 있을 정도다.

 

 

 

*성 에스테베 성당: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12세기에 지어졌다. 물론 그 이후로도 여러번 개축을 했다. 안도라베야에 있는 유서 깊은 건물이다.

 

 

 

한편 이 책의 제목이 <재밌는 스페인>이지만, 굳이 그 내용을 스페인으로만 한정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스페인, 포르투갈은 물론 영국령 지브롤터와 피레네산맥의 안도라까지... 이베리아반도 내에 있는 주권국가들이 모두 논의 대상 안에 포함된다.

​스페인에서 안도라로 입국(?)하려면 검문소를 지나야 한다. 안도라가 솅겐 조약에 미가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문소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대신 스페인에서 프랑스, 반대로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차들이 많았다. 졸다가 깨보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차창 밖으로 피레네산맥의 산들이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그랬는지 구례 읍내에서 공영버스를 타고 올라갔던 지리산 성삼재가 연상됐다. 피레네도 산 넘어 산, 지리산도 산 넘어 산... 다를 거 없이 참 좋구나!

약 4시간 만에 안도라베야(Andorra la Vella)에 도착했다. 다른 작은 나라들은 도시 국가 형태인 경우가 많지만 안도라는 안도라베야라는 수도가 따로 있다. 수도답게(?) 안도라베야에는 이 나라 인구의 ¼인, 약 2만 명이 거주한다.

피레네의 험준함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런 척박함을 이겨낸 듯이 보였다. 절벽 위에다 집을 짓고 마을을 지은 것이다. 안도라 사람들은 지반 공사하기도 어려운 땅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거주 기반이 스위스와 비슷해 보였다. 하긴 안도라베야는 해발 약 1,023미터에 위치해 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수도다.

 

 

 

*성 에스테베 성당: 왼쪽 건물이 성당이다. 오른쪽 건물은 리모델링 중인데 공사 가림막이 주위와 어울리게 만들어져 착시 효과를 내고 있다. 사진에서도 보이듯 뒤쪽에 있는 산은 민둥산이다. 안도라베야 일대의 몇몇 산들은 산사태를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안도라는 ​스페인과 프랑스라는 두 개의 큰 나라에 끼어있는 작은 나라다. 그래서인지 입헌공동군주제라는 아주 독특한 방식의 정치 체제로 운영된다. 입헌군주제는 알겠는데 입헌공동군주제라니! 안도라는 프랑스 대통령과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방인, 우르헬 교구의 주교가 공동으로 최고 권력 수반을 이루고 있다.

안도라의 건국이 13세기였으니, 중세 시기에 프랑스 측에서는 왕이 대표자였고, 현재는 대통령이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스페인 측에서는 계속해서 우르헬 교구의 주교가 대표자였다. 이를 두고 입헌공동군주제라고 부른다. 물론 안도라에는 현재 총리가 실질적으로 국정을 총괄하고 있다.

여기서 궁금한 게 있다. 스페인의 주교는 논외로 치고, 프랑스의 왕이 어떻게 공국의 수반이 될 수 있을까? 겸임하면 가능하다. 왕(king)이 공작(duke)도 겸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태양왕이라고 불린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국왕이자 안도라의 공작이 된다. 중세 시기였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배경지로 유명한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공국이 있었다. 바이킹이라고 불렸던 북유럽인들이 세운 노르망디 공국이었다. 그런데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은 영국에서는 국왕이었다. 정리하면 노르망디 공국의 수장은 프랑스에서는 공작, 영국에서는 왕이었던 것이다.

안도라는 1993년까지 헌법도 없었다. 규모가 작고, 인구도 적어서 헌법 없이도 통치가 가능했으리라. 1993년까지는 공동군주제였고, 이후로는 헌법이 제정되어 입헌공동군주제라는 현재와 같은 정치 체제로 발돋움 한 것이다. 그해에 UN에 가입하기도 했다.

 

 

 

* 입헌공동군주제: 입헌공동군주제를 표현한 청동판. 의회 건물로 쓰였던 카사 데 라 발(Casa de la Vall)의 한켠에 서 있다.

 

 

 

안도라의 기원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샤를마뉴 대제는 이슬람 무어인들의 북상을 막기 위해 피레네산맥 일대에 에스파냐 변경령을 설치한다. 에스파냐 변경령은 프랑스 남부 지역을 방어하는 마지노선 역할을 했다.

다수의 변경령이 설치가 됐는데 우르헬 백작령도 그중 하나였다. 우르헬 백작이었던 보렐 2세는 안도라의 통치권을 우르헬 교구로 넘겼다. 우르헬 교구는 말 그대로 가톨릭의 일개 교구일 뿐이었다. 실질적으로 지역의 방위를 할 수 있는 물리력이 필요했다. 이에 우르헬 교구는 통치권의 일부를 유력 가문에게 넘기게 됐고, 그 통치권은 돌고 돌아 결국에는 프랑스 남부의 푸아 백작이 행사하게 됐다. 1278년, 푸아 백작과 우르헬 주교는 합의에 의해 안도라의 공동통치자로 나서게 된다.

스페인 측은 가톨릭 교구이기에 그 주체가 변함이 없었지만, 프랑스 측은 세속 정치에 엮여있기에 부침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격변기에는 프랑스 측 공작이 공석이 되기도 했다. 또한 대혁명과 파리코뮌 같은 엄청난 대격변을 겪으며 봉건제를 폐지 시킨 프랑스인데, 정작 안도라에서는 공화국의 대통령이 공작이 되는 특이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정치 체제가 800년도 넘게 이어질 수 있었을까? 프랑스와 스페인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더군다나 피레네라는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안도라 사람들의 절박함이 그런 독특한 정치 체제를 만들고, 유지시킨 것이 아닐까?

 

* 안도라: 스페인과 프랑스에 끼어있는 안도라의 모습을 빗댄 것 같은 표지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안도라공국이라는 명칭 때문에 살짝 중세풍의 도심 풍경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안도라는 현대적인 건물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옛 건물들도 있었지만.

안도라는 쇼핑과 레저·스포츠산업이 발달했다. 거의 모든 품목이 무관세라서 쇼핑의 천국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고지대에 있고, 눈도 많이 내리다 보니 스키를 타러 오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카지노로도 유명한 곳이다.

상류라서 그런지 강물이 엄청난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발리라 오리엔트(valira d'orient)라고 불리는 강이었는데 그냥 계곡 같아 보였다. 어쨌든 그렇게 유속이 빠른 도심지 강물은 처음 봤는데 물소리가 아주 시원했다.

그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예전에 천왕봉을 다녀온 후 거닐었던 지리산 대원사 계곡이 떠올랐다. 전날 비가 와서 그랬는지 그때 대원사 계곡은 우렁찬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한참을 계곡에 앉아 물소리를 들었었다. 계곡물 소리가 번뇌와 집착들을 씻어주는 듯했다. 그날의 지리산 대원사 계곡물 소리처럼 우렁찬 피레네 강물 소리에 귀가 다 시원해졌다. 시차에서 오는 피로감이 싹 다 날아가는 듯했다.

피레네 강물 소리에 번뇌와 집착이 씻겨 내려갔던 것일까? 그날은 아주 잘 잤다. 바르셀로나처럼 덥지도 않았다. 역시 피레네산맥!

 

 

 

* 피레네의 강물: 우렁찬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번뇌와 집착들이 싹 다 씻겨나가는 듯했다.

 

 

 

 

* 안도라: 시각적 효과를 위해 원래 크기보다 더 크게 표기했다.

 

 

 

 

* 레리다성: 레리다성을 배경으로 현지인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아서 카메라에 담아보았다.

 

 

 

<재미난 스페인 10편> 스페인이지만 스페인이 아니다?

카탈루냐의 정체성 2부

 

스페인 동부 카탈루냐 지방의 예이다(Lleida)라는 도시를 방문했다. 예이다는 카탈루냐어 표기이고, 스페인어로는 레리다(Lérida)로 불리는데 바르셀로나에서 서쪽으로 약 16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

아릿따운 현지인 처자들이 고풍스러운 성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화려한 분위기가 풍기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오래된 건축물과 어우러져 마치 여신을 보는 듯했다. 그냥 지나갈 필자가 아니었다. 그녀들의 사진을 찍어주며 말을 걸었다.

“저 성이 예뻐요. 당신들도 예뻐요!”

수다성(Castle of the Suda), 혹은 왕성(Castle of the King)이라고 불리는 성이었는데 이곳은 주위를 압도할 정도로 웅장함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렇게 멋진 성이지만 곳곳에 역사의 상처들이 흉터처럼 남아 있었다. 특히 수다성은 1700년대 초반에 있었던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의 참화가 직접적으로 들이닥친 곳이다. 당시 카스티야에서 분리독립을 원했던 카탈루냐 사람들은 수다성을 근거지로 삼아 항쟁에 나섰다. 하지만 성은 함락됐고, 카탈루냐는 자치권이 박탈되어 스페인에 병합된다.

전편에 이어서 카탈루냐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됐는지 알아보자. 이전 편에서는 바르셀로나 백작령의 탄생, 아라곤 왕국의 건국과 아라곤 연합왕국으로의 발전 등 내재적인 요소에 방점이 찍혔다. 이번 편에서는 카탈루냐 반란과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라는 대내외적인 항쟁을 중심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 아라곤 휘장

 

 

 

1640년에 카탈루냐에서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반란을 일으킨다. 일명 ‘카탈루냐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전 유럽은 종교전쟁이라고 불리는 30년 전쟁(1618~1648년)의 수렁에 빠져 있었다. 스페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구교인 가톨릭편에 선 스페인은 신교측에 선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프랑스도 만만치 않은 가톨릭 국가인데 왜 신교측에 서냐 이 말이다.

부르봉 VS 합스부르크

이 도식 안에 해답이 있다. 당시 부르봉 가문의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가문들이 지배하는 나라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다. 동쪽으로는 신성로마제국, 남쪽으로는 스페인이 프랑스를 압박하는 형국이었다.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왕국들의 포위망을 벗어나야 했기에 신교측을 지지하며 전쟁에 나서게 된다.

이때 프랑스 국경과 인접한 카탈루냐 지방에 많은 부역이 부과됐는데 카탈루냐인들은 이에 반감이 거셌다. 이에 카탈루냐인들은 스페인 왕실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고, 반대로 프랑스의 루이 13세에게는 도움을 청하게 된다. 프랑스-카탈루냐 연합군이 조직된 것이다.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으로 인해 마침내 30년 전쟁은 마무리됐다. 하지만 스페인과 프랑스는 베스트팔렌조약 이후로도 전쟁을 계속했다. 한편 카탈루냐인들은 프랑스 군대에 대해서 불만을 갖게 됐다. 나중에는 스페인 왕실보다 더 지긋지긋해 했다. 1652년, 이런 갈등을 틈타 카스티야의 펠리페 4세는 바르셀로나를 공격했다. 카탈루냐인들은 펠리페 4세를 왕으로 섬기기로 했고, 펠리페 4세는 카탈루냐에 자치를 약속한다.

스페인-프랑스 사이의 전쟁은 1659년, 피레네조약에 의해 마침표를 찍는다. 피레네조약으로 인해 스페인은 로세욘(Roussillon)과 세르다냐(Cerdanya) 일부 등을 프랑스에게 넘기게 된다. 이곳들은 피레네 산맥에 있는 북부 카탈루냐 지역이다. 카탈루냐는 피레네조약으로 인해 북부 권역을 프랑스에 빼앗긴 셈이다.

 

 

 

* 페르피냥 르 카스티예탑: 페르피냥은 프랑스 남동부에 있는 도시로 북부 카탈루냐권에 속한 도시다. 1659년, 스페인과 프랑스가 맺은 피레네조약 이후로 프랑스 영토가 된다. 르 카스티예탑은 14세기 경에 성문시설로 만들어졌는데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한편, 1640년에 또 다른 반란도 있었다. 바로 포르투갈의 반란이다. 포르투갈은 1580년에 자치를 조건으로 스페인에 병합되는데 당시 스페인 왕인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 왕위를 겸임하게 된다. 60년간 이어진, 스페인-포르투갈의 이베리아 연합(Unión ibérica)이 결성된 것이다.

처음에는 포르투갈의 기존 체제가 존중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포르투갈은 주기만 하는 존재가 됐고, 이에 신물이 난 포르투갈의 귀족 세력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됐다. 1640년, 브라간사 공작이 주앙 4세로 등극하여 포르투갈 왕이 된 것이다. 스페인은 30년 전쟁에 온 정신이 쏠려있던 터라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할 수 없었다. 결국 이 전쟁은 무려 28년 동안 지속됐고, 1668년 리스본 조약에 의해 종결지어진다.

17세기를 넘어 18세기가 됐다. 1700년 11월이었다. 합스부르크가 혈통인 스페인왕 카를로스 2세가 사망한다. 카를로스 2세는 근친혼의 피해자(?)였는데 어려서부터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무나 병약했다. 국정운영도 당연히 제대로 되지 않았다. 탐욕스러운 정치인들의 꼭두각시가 됐고, ‘백치왕’이라는 별명까지 붙게 됐다.

자식이 없이 죽은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Felipe de Anjou)공 펠리페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유언을 남긴다. 루이 14세가 그의 매형이었기에 가능한 유언이었다. 절대왕정을 이룩한 루이 14세의 혈통이, 프랑스의 부르봉 가문이 스페인의 국왕까지 겸할 태세였다. 이를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니었다. 카를 대공이 왕위 계승권을 요구했는데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황제의 아들이었다. 레오폴트 황제도 카를로스 2세의 매형이었기에 그런 요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앙주공은 즉위를 하여 마드리드로 입성을 하고, 펠리페 5세가 된다. 이에 유럽 주요국들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왕국이 등장하는 것을 극도로 꺼리며 합스부르크 세력을 지지하게 된다. 또 이런 도식이 등장하게 됐다.

부르봉 VS 합스부르크

1701년, 결국 터질 게 터졌다. 부르봉 왕조로 엮인 스페인, 프랑스 군대에 대항하여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제국을 비롯해 합스부르크를 지지하는 영국,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의 국가들이 서로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를 두고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1701~1714년)’이라고 부른다.

그럼 카탈루냐는 어떤 세력을 지지했을까?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를 지지하게 된다. 마드리드가 속한 카스티야 지방과는 다른 선택이었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전쟁이 이어지다, 1713년에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어 국가들 간의 전쟁은 종결이 된다. 이 조약으로 인해 펠리페 5세는 프랑스 왕위를 겸임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 레리다성: 수다성이라고도 불리는 레리다성. 레리다성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의 주요 전장 중 한 곳이었다. 레디다는 카탈루냐 서부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카탈루냐 지방에서는 화약 냄새가 계속해서 퍼져나가고 있었다. 국가간의 전쟁은 종료가 됐지만 카탈루냐는 계속해서 합스부르크가를 지지하고 있었다. 이에 펠리페 5세는 바르셀로나를 함락시키고, 카탈루냐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스페인 왕위전쟁의 여파는 카탈루냐인들에게는 치명타와 같았다. 독자적인 제도와 권한을 중앙정부에 몰수당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카탈루냐어까지 사용이 금지되기에 이른다. 폭넓게 누리고 있었던 자치를 잃어버리고 중앙집권체제로 종속된 것이다. 이 부분은 같은 아라곤 연합왕국을 이루고 있던 아라곤 지방, 발렌시아 지방, 마요르카 지방도 마찬가지였다.

참고로 이베리아반도의 최남단에 있는 지브롤터가 영국령이 된 계기도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때문이었다. 지브롤터는 1704년에 영국에 의해 점령됐고, 이후 1713년부터 영국령이 되었다.

카탈루냐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페인에 편입된 건 불과 300년 전의 일이라고 말한다. 그 300년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종료 시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최근 300년을 제외하고는 스페인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고 주장한다. 다른 정체성으로 독자적인 주권을 누렸다는 것이다. 그런 정서는 아직까지도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2017년에 있는 ‘카탈루냐 공화국’ 사건이 그 단적인 예이다.

수다성을 느긋하게 둘러보았다. 더운 여름날이라 땀을 한 바가지 쏟아냈지만 즐겁게 답사를 했다. 역사의 현장을 탐방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너무 더웠다. 시원한 냉커피가 간절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한여름에도 커피는 뜨겁게 마신다. 커피는 얼음 동동 띄운 커피가 제 맛이야!

 

 

* 산타마드로나 성벽(Muralla de Santa Madrona): 바르셀로나를 방어하기 위해 만든 성벽. 구도심에 있다. 산타마드로나 성벽에 있는 산타마드로나 성문.

 

 

 

* 1450년경 이베리아반도: 아직 남쪽에는 이슬람 그라나다 왕국이 존재하고 있다. 그라나다 왕국은 1492년에 멸망하고, 레콘키스타(제정복운동)는 종료된다.

 

 

 

 

* 사라고사: 피에드라 다리에서 바라본 필라르 성모 대성당과 라세오 성당. 피에드라 다리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다리임. 강 건너 왼쪽이 라세오 성당, 오른쪽이 필라르 성모 대성당임.

 

 

 

<재미난 스페인 9편> 카탈루냐는 스페인이 아니다?

카탈루냐의 정체성 1부

 

이전 글에서도 계속 언급했듯이 카탈루냐 사람들은 자신들이 스페인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을 한다. 그들이 말하는 정체성의 시초는 서기 801년, 바르셀로나 백작령에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711년, 북아프리카에 있던 이슬람 무어인들이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했고, 서북쪽 일부를 제외한 이베리아반도를 전부 다 차지하게 된다. 이에 그치지 않고 무어인들은 피레네산맥을 넘어 현재의 프랑스 영토까지 욕심을 내게 된다. 당시 프랑스 지역은 프랑크 왕국이 있었고, 메로빙거 왕조가 통치했다.

결국 732년에 프랑크 왕국 중서부에 위치해 있는 투르와 푸아티 지역에서 크게 전투가 벌어졌다. 투르-푸아티 전투에서 프랑크군은 무어인들에게 대승을 거둔다. 이때 사령관이 카를 마르텔이었다. 이후 카를 마르텔의 아들인 피핀이 751년에 메로빙거 왕조를 폐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다. 카롤링거 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카롤링거 왕조 시기에도 이슬람 세력은 지속적으로 피레네 지역을 위협했다. 계속된 전투 중에 영웅도 출현하고, 그런 영웅을 드높이는 서사시도 탄생하게 된다. 그렇게 나타난 서사시가 바로 <롤랑의 노래>다. ‘롤랑의 노래’는 샤를마뉴의 조카인 롤랑의 영웅담을 담은 중세 유럽의 대표적인 영웅 서사시로 불린다. 실제로 <롤랑의 노래>는 778년, 프랑크 왕국 샤를마뉴의 이베리아 원정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 바르셀로나대성당: 가우디가 설계한 유명한 사그라다 파밀리아와는 다른 성당이다.

 

 

 

8세기가 가고, 9세기로 넘어왔다. 801년 4월이었다. 이 당시도 프랑크 왕국은 샤를마뉴 대제가 통치하고 있었다. 이때 그의 아들 루트비히 1세가 이끄는 군대가 바르셀로나를 점령했다. 바르셀로나는 약 80년간 지속된 이슬람 무어인들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듯 피레네산맥과 인접해 있는 이베리아반도 동북쪽, 칸타브리카산맥이 있는 서북쪽은 이슬람 세력의 지배를 받지 않거나 비교적 짧게 받게 된다.

남부 안달루시아의 그라나다는 이슬람 세력의 마지막 수도였으니, 700년 이상 아랍의 영향을 받게 된다. 몇백 년 동안 지배를 받은 곳과 불과 몇십 년 정도만 받은 곳은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이슬람 통치 기간의 차이도 카탈루냐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직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바르셀로나를 위시한 카탈루냐 일대는 프랑크 왕국의 변경 지역이 되었다. 이 변경 지방을 방위하기 위해 베라라는 사람이 바르셀로나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이것이 바로 바르셀로나 백작령이라고 불리는 에스파냐 변경령의 시초다. 이런 역사적 형성과정이 있었기에 바르셀로나 백작령은 프랑크 왕국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카탈루냐어가 프랑스어와 유사한 점이 많은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카롤링거 왕조는 바르셀로나 이외에도 여러 곳에 백작령을 두었다. 백작령들은 피레네산맥을 중심으로 남쪽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곳들이 이슬람 군대의 북상을 막아주는 완충지 역할을 했다. 프랑스 본토에 대한 이슬람 군대들의 직접적인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방패막이가 필요했던 것이다.

프랑크 왕국 입장에서 보자면 에스파냐 변경령은 말 그대로 변방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정치군사적인 영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백작령들은 본국과는 다른 정체성을 함양해 나갔다. 백작령들은 카롤링거 왕조가 쇠퇴하고, 더 나아가 멸망했던 10세기경에는 예속관계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하기에 이른다.

이런 백작령들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건 바르셀로나 백작령이었다. 다른 백작령들을 병합해나가며 우두머리 역할을 자임하게 된다. 이에 따라 바르셀로나는 중심지로 우뚝서게 되고, 카탈루냐 정체성의 구심점 역할을 하게 된다.

 

 

 

* 필라르성모 대성당: 사라고사에 있는 필라르성모 대성당. 앞에 보이는 강이 에브로강이다. 사라고사는 아라곤 연합왕국의 수도였다.

 

 

 

이베리아반도 북부에 하카(Jaca)라는 도시가 있다. 피레네산맥의 아랫동네라 주위 풍광이 수려한 곳이다. 1035년, 이곳 하카에서 아라곤 왕국이 탄생했다. 아라곤 왕국의 초대왕인 라미로 1세(Ramiro I)는 이웃 나라인 팜플로나 왕국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아버지는 팜플로나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안초 3세(Antso III)였다.

안초 3세가 죽자 그의 아들들이 각각의 영지를 물려받는데 라미로 1세는 아라곤 백작령을 상속받게 됐다. 이에 라미로 1세는 백작 신분에 만족하지 않고 스스로 왕을 자처하게 된다. 이때가 1035년이었다. 참고로 팜플로나 왕국은 12세기에 나바라 왕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하카의 중심지 뒤로는 피레네산맥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데 방어에 이점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대외로 진출하기에는 제약이 많은 지형이다. 필자가 하카 시내를 직접 방문한 후에 느낀 소감이다. 그래서인지 아라곤 왕국은 이후 우에스카(1096년), 사라고사(1118년)로 잇달아 천도하게 된다. 특히 사라고사는 평원지대로 에브로강이라는 큰 강을 끼고 있는 도시다.

 

 

 

* 팜플로나성: 팜플로나 왕국의 아라곤 백작령이 아라곤 왕국의 시초였다.

 

 

 

하카나 우에스카보다는 훨씬 더 개방적인 공간에 위치해 있다. 현재 사라고사(Zaragoza)는 스페인 5대 도시에 속할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참고로 스페인어로 ‘j’는 ‘ㅎ’로 발음되서 하카가 되고, ‘z’는 ‘ㅅ’로 발음되어 사라고사가 됐다.

작은 소국에서 시작한 아라곤 왕국은 1137년에 아라곤 연합왕국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당시 바르셀로나 백작령을 통치하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는 아라곤 왕국의 왕위 계승자인 페트로닐라와 약혼한다. 당시 페트로닐라는 1살이었다. 누가봐도 정략적인 혼인동맹이다. 실제 결혼은 1150년, 페트로닐라가 14살이 되던 해에 행해진다.

연합 당시에 아라곤보다는 바르셀로나가 더 부유했지만 왕국의 명칭은 아라곤으로 정해진다. 아라곤 연합왕국은 중앙집권적인 정치 체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바르셀로나 백작령이 위치했던 까탈루냐 지방의 정치와 행정은 독자적으로 운영됐고, 14세기 이후로는 카탈루냐 왕자령(principado de Cataluña)으로 불리게 된다.

 

 

 

* 하카성: 하카는 아라곤 지방 북부에 위치한 도시다. 하카에는 산 페드로성이라고도 불리는 하카성이 있다. 하카는 아라곤 왕국의 초기 시대 수도였는데 피레네산맥 아래에 위치해 있어 방어에 용이했다. 사진 오른쪽에도 피레네산맥이 보인다.

 

 

 

이베리아반도 중앙에 카스티야 왕국이 버티고 있어서일까? 아라곤 연합왕국은 지중해로 눈길을 돌렸다. 하나하나 영토를 늘려갔는데 15세기 중반에는 그 범위가 지중해 전체에 이를 정도로 큰 해상왕국을 이루었다. 명실상부한 유럽의 강대국으로 등극한 것이다.

711년부터 700년 넘게 이어져 온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고 불리는 국토회복운동이 드디어 1492년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이슬람 무어인들이 물러간 것이다. 레콩키스타의 마침표를 찍은 주역들이 있었는데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이사벨 1세 여왕과 아라곤 연합왕국의 페르난도 2세였다. 두 사람은 1469년 결혼을 했고, 두 왕국은 공동왕국을 이루게 됐다. 국토회복운동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공로로 그들은 교황 알렉산더 6세로부터 ‘가톨릭 공동왕’이라는 칭호를 선사 받게 됐다.

 

 

 

* 이베리아반도지도: 13세기 초반 지도이다. 당시 남쪽은 이슬람 알모아데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동쪽 카탈루냐 지방을 보면 현재의 스페인-프랑스 국경과는 다른 모습이다.

 

 

 

 

* 몬세라트: 돌산인 이곳에서 가우디는 큰 영감을 얻었다. 바르셀로나 인근에 위치함.

 

 

 

<재미난 스페인 8편> 5일 천하로 끝난 카탈루냐공화국

- 도대체 2017년에 카탈루냐에 무슨 일이?

 

스페인은 지역색이 강한 곳이다. 그래서 지방자치도 잘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카탈루냐는 지방자치를 뛰어넘어 스페인 중앙정부에서 독립을 하고자 한다. 마치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영국에서 분리돼 스코틀랜드 국가를 원하듯이, 카탈루냐 사람들은 독자적인 '카탈루냐 국가‘를 원하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카탈루냐 지역 일대를 여행하다보면 매우 정치적인 낙서들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 카탈루냐는 스페인이 아니다

- 스페인은 정치범을 붙잡고 있다

카탈루냐 사람들은 카탈루냐가 스페인 역사에 편입된 건 1700년대 이후였다고 주장한다. 불과 300여 년 전에는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지역이기에 스페인 중앙지역인 카스티야와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한다.

 

 

 

* 바르셀로나: '스페인은 정치범을 붙잡고 있다'라는 낙서. 그걸 누군가가 지우고, '스페인 우선'이라는 내용으로 바꿔놓았다.

 

 

 

카탈루냐는 카탈란어라는 독자적인 언어가 있는데 예전에는 사용이 금지된 적이 있었다. 탄압이 가중될수록 그들의 카탈란어 사랑은 더 깊어갔다. 바르셀로나 인근 레우스(Reus) 출신인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도 카탈란어를 사랑했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1924년 9월이었다.

당시는 쿠데타로 집권한 프리모 데 리베라가 통치를 하던 독재정권 시기였는데 가우디는 카탈란어를 사용하다 경찰에 붙잡히게 된다. 경찰의 모욕과 탄압이 있었지만 가우디는 끝내 스페인어 사용을 거부했다. 카탈루냐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가우디의 굳은 심지가 돋보이는 사건이었다.

이런 흐름들은 실제적인 행위들로 도출됐다. 카탈루냐 공화국의 설립이 바로 그것이다. 역사적으로 카탈루냐 국가를 설립하려는 시도는 여러번 있었지만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독립국가에 대한 열망은 꾸준히 발현되었고, 몇 해 전인 2017년에도 실행되기에 이른다.

2024년 8월 8일, 바르셀로나에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일이 벌어졌다. 카를레스 푸지데몬(Carles Puigdemont)이라는 전 카탈루냐 자치정부 수반이 7년 만에 귀국했는데 깜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당시 푸지데몬은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카탈루냐를 위해 함께'라는 정당의 환영행사에 참여를 했었다. 이 행사에서 그는 카탈루냐 독립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하는 연설을 한다. 수많은 지지자들에 둘러싸여 연단에 오르고, 또 퇴장을 했다. 이후 준비된 자동차를 타고 모임장소에서 벗어났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가? 정치인이 연단에 올라 정치적인 발언을 하겠다는데...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푸지데몬은 여러 가지 혐의로 스페인 공안당국에 수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회합장소에서 벗어나 자택으로 간 것이 아니라 국경을 넘어 갔다. 수많은 지지자들이 블록 역할을 했고, 결국 그를 체포하기 위해 대기하던 경찰들은 허탕을 치고 만 것이다.

 

 

 

* 푸지데몬: 전 카탈루냐 자치정부 수반. 출처 Wikimedia Commons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스페인 중앙정부는 푸지데몬의 행동에 촉각을 세우게 됐는가? 2017년 10월이었다. 카탈루냐의 분리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가 있었고, 독립찬성으로 결과가 나온다. 이에 카탈루냐 국가가 선언됐고, 초대 국가수반으로 푸지데몬이 권좌에 오른다. 푸지데몬을 비롯한 독립파는 이를 카탈로냐 공화국(Republic of Catalonia)으로 칭했다.

바르셀로나를 수도로 삼은 카탈루냐공화국은 약 32만km²로 그 크기가 벨기에(약 30만km²) 보다 조금 더 크고, 인구는 약 700만 명 정도였다. 2022년 카탈루냐의 국내총생산(GDP)은 2,441억 달러로 2,558억 달러인 포르투갈에 좀 못 미치는 수준이다. 벨기에 정도의 땅 크기와 포르투갈 정도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21세기에 출현을 했다면 유럽 역사가 새로 작성됐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결론을 알고 있다. 2017년에 등장한 카탈루냐공화국은 시작과 동시에 멸망했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카탈루냐공화국에 대해서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더 이상할 정도다.

일련의 사태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알아보자. 분리독립을 가만히 보고 있을 중앙정부가 아니었다. 당시 스페인 총리였던 마리아노 라호이는 헌법을 발동하여 주동자였던 푸지데몬을 해임했다. 또한 반역죄와 배임 등의 죄목으로 수배령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고향을 등지고 벨기에로 망명하게 되고, 카탈로냐화국은 5일 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카탈루냐 공화국이 5일 천하로 끝난 후, 권력의 공백은 중앙정부가 메꾸게 된다. 스페인 중앙권력은 4개월 동안 까탈루냐를 직접 통치하게 된 것이다.

 

 

* 카탈루냐기: 카탈루냐어로 세녜라(Senyera)라고 부른다. 이 문양은 원래 아라곤 연합왕국의 표식이었다. 그래서 카탈루냐 뿐만 아니라 아라곤, 발렌시아 등 옛 아라곤 왕국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 에스텔라다(Estelada): 카탈루냐 독립세력들이 흔드는 깃발로 카탈루냐 민족주의를 상징한다. 비공식 깃발이다.

 

 

 

2017년 카탈루냐 독립 문제는 스페인을 넘어 전 유럽을 뒤흔들어 놓았던 일대 사건이었다. 푸지데몬의 망명, 중앙정부의 강경 대응 등으로 독립파들의 예봉은 꺾이게 된다. 하지만 그 불씨는 여전히 잠재해있었다.

7년이 흐른 2024년 8월, 푸지데몬은 자수를 하겠다는 조건으로 다시 카탈루냐 땅을 밟을 수 있게 됐다.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을 한 후 경찰에 연행되는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자수를 하지 않았고, 7년 전처럼 국경을 다시 넘어간 것이다.

분리독립은 경제문제와도 얽혀 있다. 만약 카탈루냐가 스페인의 다른 지역들보다 가난하다면? 물론 경제력 여부에 따라 독립운동의 향방이 결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돈이 다른 지역들보다 더 많이 걷히고 있다면 그 부분이 썩 내키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카탈루냐의 국내총생산(GDP)은 2022년 기준으로 스페인 전체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다. 이를 두고 분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기여가 큼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는 그만큼의 혜택을 돌려주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스페인의 다른지역보다 더 많은 돈을 중앙정부에 보내지만 정작 카탈루냐로 돌아오는 재투자 비용은 그보다 더 적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손해를 보고 있다는 뜻이다.

 

 

 

* 사그리다파밀리아: 바르셀로나의 명물 사그리다파밀리아.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를 했다.

 

 

 

이런 주장들은 경제위기와 맞물려 설득력을 얻게 됐다. 2010년경에 남부유럽에 경제위기가 닥치는데 해당되는 국가들의 앞 글자를 따니 PIGS가 됐다. 포르투갈(Portugal), 이탈리아(Italy), 그리스(Greece), 스페인(Spain). 필자가 다 좋아하는 국가들인데 어쩌다가 ‘돼지들’이라는 굴욕적인 멸칭을 얻게 됐을까... 어쨌든 이런 재정위기가 닥치자 카탈루냐 분리주의자들은 스페인 중앙정부의 무능을 왜 자신들이 짊어져야 하냐며 불만을 표출했다. 독립을 하여 독자적인 경제정책을 수행하면 더 잘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까지 2017년도에 있었던 카탈루냐공화국 사건을 중심으로 카탈루냐 문제에 대해 알아보았다. 지금이야 잠잠하지만 카탈루냐 문제는 언제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다. 마치 경제위기가 언제든 다시 발생할 수 있는 것처럼...

남북이 갈린 분단국에 사는 이에게 카탈루냐 문제는 어떻게 다가올까? 굳이 누구의 편을 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새겨진 감정은 있었다. 신기함!

 

 

 

 

* 카탈루냐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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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노스티아-산세바스티안: 아르굴산에서 바라본 시내와 콘차해변

 

 

<재미난 스페인 7편>

5억 명이 스페인어를 쓰고 있는데, 스페인어가 없다고?

명색히 필자가 역사트레킹 마스터 아닌가? 그래서인지 숲길트레킹을 무척 좋아한다. 겸사겸사 나무에 대한 지식을 넓히겠다고 숲학교에 등록한 적이 있었다.

"세상에 참나무는 없습니다. 딱 이게 참나무라고 찍어서 부를 수 있는 나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 전날에 참나무 장작으로 구운 삼겹살을 먹었는데... 그 말대로 하면 난 존재하지도 않는 나무로 고기를 구웠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말이 맞았다. 참나무라는 종은 없다. 참나무는 특정되는 나무가 아닌 참나무 종류를 모두 아우르는 통칭이다. 그룹을 연상하시면 좋을 듯싶다. 그룹명은 참나무이고, 보컬 갈참나무, 기타 굴참나무, 베이스 상수리나무, 드럼 졸참나무, 키보드 신갈나무, 퍼커션 떡갈나무... 여기서 언급된 여섯 나무를은 이른바 참나무 육형제라고 불린다. 그게 그 나무인 거 같아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분하기가 쉽지가 않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후였다. 스페인어가 배우고 싶어서 회화책도 사고, 동영상도 찾아보았다.

"세상에 스페인어는 없습니다. 애초에 스페인어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어요."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참나무 때처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동영상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골랐다.

현재 스페인어는 전세계 인구 중 약 5억명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다. 영어를 뛰어넘어 중국어 다음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다. 스페인 본국을 필두로 스페인의 옛 식민지였던 중남미 국가와 아프리카 적도에 있는 적도 기니 등 20개국이 사용을 한다. 참고로 적도 기니(Equatorial Guinea)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1968년에 독립을 한다. 프랑스 식민지였다 1958년에 독립한 기니(Guinea)와는 구별되는 나라다. 적도 기니는 아프리카 주권국 중에서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스페인어는 미국에서도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히스패닉'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실텐데 히스패닉은 미국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주로 중남미 출신자들인데 그 수가 약 5천 만명이 넘는다. 그 수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스페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마당에 스페인어가 없다고 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 도노스티아-산세바스티안: 바스크 이름인 도노스티아와 카스티야어인 산세바스티안이 병기됐다. 그나저나 맨홀 뚜껑이 사각형이다.

 

 

서기 711년, 북아프리카에 있던 이슬람 무어인들이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하였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 왕국은 무어인들의 무력 앞에 몰락하고 만다. 이후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고 불리는 국토회복운동이 1492년에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무려 800년이란 시간이 소요된다. 그 오랜기간 동안 이베리아반도 내에서는 여러 왕국들이 등장한다. 그 왕국들이 자리잡은 지역에서는 해당 지역의 색채가 강하게 묻어있는 언어가 분화, 발전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등장한 언어는 카스티야어,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 바스크어 등이다.

1479년, 이베리아반도 중앙에 위치한 카스티야왕국과 지금의 카탈루냐 지역에 위치한 아라곤왕국이 합쳐져 카스티야-아라곤 공동왕국이 형성된다. 이후 1492년, 마지막 이슬람 왕국이었던 그라나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국토회복운동은 종료가 된다. 그해 콜롬버스는 신대륙을 찾아 돛을 올렸다.

스페인이 지금과 같이 통일된 형태를 갖춘 시기는 카를로스 1세(Carlos Ⅰ)가 즉위한 1516년 이후이다.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겸했는데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칼 5세(Karl Ⅴ)로 불렸다. 카를로스 1세의 아들은 그 유명한 펠리페 2세다.

카스티야왕국의 주도로 통일된 스페인왕국이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언어도 카스티야어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스페인이 어떤 나라인가? 그 어떤 유럽 국가들보다도 지역색이 강한 나라가 아니던가? 카스티야로 대변되는 중앙권력에 대한 반대 움직임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크게 4대 언어 권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권역은 민족적인 분포와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카스티야어: 약 74%

카탈루냐어: 12%

갈리시아어: 8%

바스크어: 1%

기타

지금은 중심어이지만 카스티야어도 예전에는 북부 지방의 방언 중 하나였다. 이후 12세기 경, 스페인의 중북부 지역에 카스티야-레온왕국이 들어서게 됐는데 그때 궁중언어로 사용됐다. 15세기 후반 카스티야왕국은 이후 아라곤왕국과 병합했고, 카스티야어는 명실상부한 스페인의 가장 중심이되는 언어로 자리매김한다.

 

 

 

* 사그라다 파밀리아: 건축가 가우디가 설계한 성가족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 바르셀로나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카탈란어라고도 불리는 카탈루냐어는 동북쪽에 위치한 카탈루냐, 발렌시아,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사용되고 있다. 동북쪽의 중심 도시는 그 유명한 바르셀로나이다. 발렌시아는 바르셀로나에서 남쪽으로 약 3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발레아레스 제도는 지중해에 있는 섬들인데 중심도시는 팔마이다. 발렌시아에서 약 280km 정도 떨어져 있다.

카탈루냐(Cataluña)는 프랑스와 근접해있어서 그런지 역사적으로 공유되는 점들이 꽤 많다. 언어도 그렇다. 카탈루냐어는 남부 프랑스에서 사용되는 프로방스어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카탈루냐어를 배운 이들 중에는 카탈루냐어가 카스티야어와 프랑스어를 섞어찌개를 한거 같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한다. 한편 위에 언급된 지역들 이외에도 피레네산맥에 있는 작은 나라 안도라도 카탈루냐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가예고(gallego)라고 불리는 갈리시아어는 이베리아반도 서북쪽에 위치한 갈리시아(Galicia) 지방에서 사용되는 언어다. 갈리시아는 포르투갈의 바로 위쪽에 위치해있는데 포르투갈의 건국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포르투갈이 갈리시아 백작령에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갈리시아어는 포르투갈어의 조상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에우스카라(euskara)라고 불리는 바스크어는 바스크(Basque) 지방에서 사용된다. 바스크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에 있는 피레네 산맥 서쪽에 위치하는데 스페인은 물론 프랑스에도 바스크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유럽 지역은 보통 라틴어의 영향을 받아 로망스어군을 이룬다. 카스티야어,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들 모두 로망스어군이다. 프랑스어, 포르투갈어도 로망스어군에 속한다. 하지만 바스크어는 로망스어군이 아닌 독자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다. 로망스어군이 사방으로 둘러쌓여 있지만 자신만의 고유성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를 두고 언어학상으로는 고립어라고 부른다.

바스크인들은 그들이 즐겨 쓰는 독특한 외형의 바스크베레모처럼 자신들만의 고유한 정체성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자부심의 토대를 이루는 것 중 하나가 바스크어이이다.

 

 

 

* 바르셀로나 지하철역: 카탈루냐광장역(plaça de catalunya). c자가 아닌 ç자다. 아래에 작은 갈고리가 달렸는데 이걸 두고 '세디유'라고 부른다. 발음이 〔프라카〕가 아닌 〔프라사〕가 된다.

 

 

 

여기서 각 언어를 비교해보자.

영어: hello / 카스티야어 hola / 카탈로냐어 hola / 갈리시아어 ola / 바스크어 kaixo

영어: plaza / 카스티야어 plaza / 카탈로냐어 plaÇa / 갈리시아 cadrado / 바스크 plaza

영어: see you later / 카스티야어 hasta luego / 카탈로냐어 fins després / 갈리시아어 vémonos despois / 바스크어 gero arte

영어: please / 카스티야어 por favor / 카탈로냐어 si us plau / 갈리시아어 por favor / 바스크어 mesedez

영어: how much? / 카스티야어 ¿Cuánto? / 카탈로냐어 quant? / 갈리시아어 canto? / 바스크어 zenbat?

영어: cheers! / 카스티야어 ¡salud! / 카탈로냐어 salut! / 갈리시아어 saude! / 바스크어 topa!

영어: thank you / 카스티야어 gracias / 카탈로냐어 gracies / 갈리시아어 gracias / 바스크어 eskerrik asko

다른 언어보다도 바스크어가 확실히 두드러지게 구별된다. 한편 카스티야어에서 의문문과 감탄문을 한 번 보자. ¡salud!(건배!), ¿Cuánto?(얼마에요?). 다른 언어와 달리 거꾸로 뒤집어져 있는 느낌표와 물음표를 앞에 하나 더 써주어야 한다. 그래야 문장이 완성된다. 그나저나 건배 너무 많이 하지 말자. 돈이 너무 많이 나온다.

이런 지역 언어들은 1978년에 개정된 헌법에 따라 카스티야어와 함께 공식적인 위치를 부여받는다. 지도나 도로명 같은 공공문서에 카스티야어와 각 지역어가 동시에 기재된다. 예를 들어 바스크 지역에 있는 도노스티아(Donostia)라는 도시는 산세바스티안(San Sebastián)이라는 명칭을 동시에 기재한다. 도노스티아가 바스크어고, 산세바스티안이 카스티야 명칭이다.

앞서 참나무 육형제처럼 스페인의 지역어를 그룹으로 빗대서 생각해봤다. 리더는 카스티야어일 것이다. 그런데 나머지 멤버들이 만만치가 않다. 불화설이 계속나오고, 그룹을 탈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멤버도 있을 정도다. 리더 입장에서는 꽤 골치가 아플 것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내가 스페인어, 정확히는 카스티야어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 하나를 써본다.

¡yo soy peregrino!(나는 순례자입니다!)

종교, 철학을 떠나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인생길에 순례자가 아니던가!

 

 

 

 

* 스페인의 지역어 분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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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세타평원: 저런 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재미난 스페인 6편> 메세타평원

스페인 한복판에 탁자 고원이 있다고?

 

"오! 이 안개 좀 봐요. 엄청 짙어요."

"좀 음산하기까지 하네요. 한국 안개는 애교에요, 애교!"

짙은 안개가 너무나 자욱했다.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한기까지 파고드는 느낌이드니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한국에서 봤던 낭만적인(?) 안개하고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안개였다.

메세타고원(Meseta).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주쳐야 할 고원지대이다. 가도가도 끝이 없어보이는 드넓은 평야가 순례객들의 눈 앞에 펼쳐진다. 워낙 광활해서 한국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지평선을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렇게 광대한 평야가 펼쳐지니 시야는 확 트여서 좋다. 하지만 발걸음이 좀 위축된다.

메세타에 대한 악명(?)이 워낙 자자해서 그런 것이다. 지형 자체는 평평하니 체력적으로 힘들지는 않다. 하지만 그늘도 없는 평야를 신물이 날 정도로 걸어야 하니 정말 고역일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서 마을까지 거리도 꽤나 멀어서 밥 시간에 맞춰 식당에 들어가기가 정말 어려웠다. 그래서 메세타 구간에서는 꼭 도시락을 챙겨야했는데 문제는 걸터앉아 먹을만한 곳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벤치나 쉼터같은 휴식공간도 부족하다보니 거의 스탠딩으로 빵을 뜯어 먹었었다.

그 광활한 평야에 홀로 서서 빵을 뜯어먹으니 이것이 눈물 젖은 빵인가? 이때 눈치없는 매 한 마리가 '휘~' 소리를 내며 필자의 머리 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이걸 뺏어먹으려고? 빼앗길 수는 없지, 눈물 젖은 빵치고는 맛났으니까...

메세타에 대해서 더 알아보기 전에 간단한 스페인 회화를 한 번 해보자. 식당에서 주문을 할 때다.

A: ¿Tiene mesas?(띠에네 메사스: 테이블 있어요?)

B: Sí, ¿Cuantas personas?(시, 꾸안따스 페르소나스?: 네, 몇 명이세요?)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은 페르소나(사람)의 복수형인 페르소나스에 눈길이 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메세타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이다. A가 테이블이 있냐고 묻는데 mesas라고 말한다. 스페인어로 테이블을 mesa라고 부르는데 여기서는 복수형인 mesas라고 쓰고 있다. 메세타(meseta)는 테이블, 탁자를 뜻하는 mesa가 변형된 형태다. 한마디로 메세타 평원은 일명 '테이블 평원'인 것이다.

 

  

 

* 안개낀 메세타평원: 싸늘함이 전해진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스페인어라고 칭하는 언어는 까스띠야어다. 카스티야는 수도 마드리드를 중심으로한, 이베리아반도 중앙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카스티야어를 사용한다. 이에 비해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한 카탈탈루냐 지역은 카딸란어라는 지역어를 카스티야어와 함께 공용어로 사용한다. 이렇게 해당 지역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또 있다. 피레네산맥 부근에 위치한 바스크, 북서쪽에 자리잡은 갈리시아 등이다. 스페인이 워낙 지역색이 강하다보니 이렇게 각 지역의 지역어도 공식언어로 대접받고 있다.

메세타는 스페인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는데 그 넓이가 210,000km2 에 달한다. 한반도가 약 230,000km2이니 그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는데 스페인의 3/4 정도가 메세타에 속할 정도다. 이베리아반도 전체로 확장해보면 2/3가 된다.

고원이라는 명칭답게 평균고도는 약 660m로 꽤 높은 편이다. 한반도만한 면적의 고원지대가, 그것도 해발 600미터가 넘고 있으니 스페인의 평균 해발고도는 꽤 높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유럽국가들 중에서 스위스 다음으로 스페인이 해발고도가 가장 높다.

메세타는 서쪽을 제외한 동쪽, 남쪽, 북쪽이 모두 큰 산맥으로 둘러쌓여 있다. 동쪽에는 이베리코(Ibérico), 북쪽에는 칸타브리카(Cantábrica) 산맥이 두르고 있고, 남쪽에는 2중 장벽 형식으로 모레나(Morena)산맥과 베티카스(Béticas)산맥이 자리잡고 있다.

이베리코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몬카요(Moncayo / 해발 2,315미터), 칸타브리카 산맥에서는 토레세레도(Torre Cerredo / 해발 2,650미터), 모레나산맥에서는 바누에라스(Bañuelas / 해발 1,332미터)이다.

모레나와 함께 남쪽에 있는 베티카스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물아센(Mulhacén)인데 그 높이가 무려 3,482미터에 달한다. 그렇다. 물아센은 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베티카스산맥은 지맥 개념으로 시에라네바다산맥을 거느리고 있는데 물아센이 그 시에라네바다산맥에 위치해 있다. 시에라네바다산맥은 알함브라 궁전으로 유명한 그라나다(Granada)의 배후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그라나다에서 물아센이 가깝다는 것이다. 그라나다만큼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론다(Ronda)도 베티카스산맥의 서쪽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 메세타평원: 안개 속의 돌다리. 역설적으로 안개와 어울리는 모습이다.

 

 

 

 

한편 메세타의 중심부에도 중앙(Central)산맥이 무려 600km에 걸쳐 동서 횡축으로 놓여져 있다. 중앙산맥은 국경을 넘어 포르투갈 동쪽지역까지 뻗어 있다. 이 중앙 산맥을 기준으로 메세타는 북쪽 메세타와 남쪽 메세타로 나뉜다. 카스티야의 행정구역도 나눠진다. 메세타 북쪽은 카스티야이레온(Castilla y León), 남쪽은 카스티야라만차(Castilla-La Mancha)로 분리된다.

외형적으로보면 평균 고도가 600미터에 달하는 그 자체로 고지대인 메세타를, 그보다 더 높은 산맥들이 담장을 치듯 두르고 있는 셈이다. 아직까지 이해가 잘 안 되신다면 강원도 양구군의 펀치볼 지형을 연상하시면 좋을 듯싶다. 펀치볼은 해발고도가 400~500미터 위치에 있는데 그 주위를 대암산, 도솔산, 대우산, 가칠봉 등의 1,000미터가 넘는 산들이 두르고 있다. 차이점은 메세타가 서쪽이 트여있는 형태라면 펀치볼은 동서남북이 다 둘러진 형태다.

수박 화채를 해먹기 좋은 둥그스러운 그릇을 영어로 펀치볼(Punchbowl)이라고 하는데 그곳 지형이 펀치볼처럼 생겼다하여 그렇게 이름이 불려진 것이다. 한국사람들이 붙인건 아니고 한국전쟁 때 양구에 주둔한 미군들에 의해 붙여졌다.

서쪽이 트여있는 지형이라 스페인의 주요 강들은 서쪽인 포르투갈 방향이나 남쪽으로 흐른다. 포르투로 흐르는 두에로강, 리스본으로 흐르는 타호강,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남쪽 국경을 형성하는 과디아나강, 스페인 남부를 흐르는 과달키비르강. 모두 다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간다. 단 에브로강은 동쪽인 카탈루냐 지방으로 흘러 지중해가 된다.

아시다시피 스페인의 여름은 정말 뜨겁다. 당연히 스페인의 2/3를 차지하고 있는 메세타도 뜨겁다. 또한 건조하다. 하지만 겨울은 추운 편이다. 즉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크다는 뜻이다. 또한 지대 자체가 높다보니 겨울에는 짙은 안개가 매일같이 끼는 것이다. 필자가 순례길을 겨울에 많이 가서 그랬나? 메세타 구간에서는 거의 안개 속을 헤치며 걸었었다.

메세타지역은 인구가 희박한터라 마을들도 띄엄띄엄있다. 오랜시간 안개 속을 헤매며 외롭게 순례길을 걷는다고 생각해보라. 쉽게 발걸음이 안 떨어질 거다. 그래서 어떤 순례자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의 본 노선인 프랑스길에서 벗어나 지선인 북쪽길로 이동하기도 한다. 어떤이는 아예 버스나 기차로 메세타 구간을 점핑하기도 한다.

필자도 메세타를 겪어본 사람으로서 그 순례자들이 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안개 속을 헤치며 당당하게 걷는 것도 순례길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순례길에서 메세타 빼먹으면 재미없지!

 

 

 

* 메세타평원

 

 

 

 

* 메세타평원: 안개가 구름처럼 깔려있다.

 

 

 

 

 

* 지도: 메세타평원을 타나냄. 메세타는 표시된 지역보다 더 넓음. 박스처리로 대략적인 위치를 표시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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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몬세라트: 쪽에 보이는 건물은 성모 마리아 수도원(Abadia de Montserrat)이다.

 

 

 

☞ 엄청 더웠던 지난 여름, 저는 유럽에 있었습니다. 2024년 6월 8일부터 8월 14일까지, 약 67일간 많은 나라를 탐방했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안도라, 모로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크로아티아, 헝가리, 튀르키에...

애초에는 포르투갈 순례길을 약 25일 정도 걷고, 나머지 기간을 배낭여행을 이어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름철 남유럽의 더위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일정을 다 배낭여행으로 소화했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도 여행의 묘미겠지요.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펜으로 노트에 적기도 했고, 스마트폰 메모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본 포스팅은 그 여행일지를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재밌지는 않습니다. 또한 가이드북 수준의 디테일한 정보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몬세라트

 

 

 

<핫한 유럽여행 5편> 돌산의 기운이 팍팍 느껴지네! _몬세라토

2024년 6월 14일 금요일: 7일차, 맑음

전날 가우디의 생가인 레우스를 방문한 후 바르셀로나 몬주익 부근에 있는 숙소에 체크인 했다. 역시 바르셀로나는 바르셀로나다. 무슨넘의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지! 그 사람들의 대다수가 관광객들이다. 그래서인지 숙소 가격이 널뛰기를 하더라.

냄새나는 군대식 도미토리 베드 하나가 35유로를 받더라. 우리나라 돈으로 약 5만 2천원 정도다. 칸막이가 있는 벙커 베드도 아니고... 한 20유로를 예상했는데...

분노를 삼키며 몬세라트로 향했다. 몬세라트는 바르셀로나에서 북서쪽으로 약 60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곳으로 가려면 교외선 전철을 탄 후, 다시 산악열차로 갈아타야 한다.

좀 복잡할 수 있지만 외곽노선과 산악열차를 조합해서 구매할 수 있어 그리 어렵지 않게 티켓팅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안내인들이 있어 티켓 구매를 도와줬다.

몬세라트는 한국말로 직역하자면 '세라트 산'이다. 스페인도 산이 많다. 피레네 산맥, 시에라네바다 산맥 등등...

몬세라트는 바르셀로나 여행의 필수 코스 같은 곳이다. 어쩌면 몬세라트는 한국 사람들한테 가장 유명한 스페인 산이 아닐까 한다. 그만큼 한국사람들이 바르셀로나를 많이 방문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난 6년 전 바르셀로나에 왔을 때 이곳을 지나쳤다. 그래서 이번 바르셀로나 탐방의 핵심을 몬세라트로 정하게 됐다.

산악열차를 타고 몬세라트역에 딱~하고 내리면, 둥그스름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진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얼핏보면 북한산의 인수봉 여럿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다. 물론 우리 인수봉이 더 이쁘게 생겼다~^^

몬세라트에는 성모 마리아 수도원이 있다. 깎아질듯한 절벽 위에 세워져 있는데 산 봉우리들과 어우러진 모습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이런 모습 때문인지 몬세라트는 가우디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옥수수 같은 몬세라트의 봉우리들이 바르셀로나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에 구현된 것이다.

전망대에서 왼쪽을 바라보니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시설물이 있고 그 아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국기봉인가? 아니다. 십자가 탑이었다. 그 위로도 계속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임도 같은 길이었는데 약 30분은 더 올라가야 했다. 거기가 푸니풀라 종착점이 있다. 푸니쿨라는 산악열차와는 별개로 운영되는데 몬세라트의 윗부분까지 운행한다.

날씨가 화창해서 사진이 정말 잘 찍혔다. 하지만 정말 더웠다. 평소 때 같으면 걸어올라갔겠지만

이번에는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가기로 했다. 편도 약 11유로... 돈 벌레들! 푸니쿨라 타고 올라가니 더 멋진 풍광이 펼쳐졌다. 돈값을 하는 듯했다. 올라가지 않았으면 후회했을 빤헸다.

이렇게 멋진 곳이다보니 가우디가 몬세라트에서 영감을 얻게 됐던 것이다. 나도 이곳에서 기를 받은 느낌이다. 몬세라트의 돌산의 기운이 내게 확 다가오는 듯했다! 이제 멋진 결과물만 생산하면 되는건가!

ps. 우연히 주차장 아랫쪽을 걷다가 숲길 산책로에 진입하게 됐답니다. 몬세라트에 좋은 숲길이 있더라고요. 순례길하고도 연결되기도 하고요. 하여간 돌산의 기운도 받고 숲길도 알게 되서 참 좋았습니다.

 

 

 

* 몬세라트: 중앙에 산악열차 궤도가 보인다.

 

 

 

* 산 미구엘 철십자가 전망대(Creu de Sant Miquel): 또다른 풍광이 펼쳐진다.

 

 

 

 

 

* 몬세라트: 이렇게 천하의 절경이니 가우디가 좋아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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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우디: 가우디의 작업실을 복제했다. 가우디 기념관.

 

 

 

<핫한 유럽여행 4편> 어라? 가우디 생가가 이것밖에 안 돼? _레우스

☞ 엄청 더웠던 지난 여름, 저는 유럽에 있었습니다. 2024년 6월 8일부터 8월 14일까지, 약 67일간 많은 나라를 탐방했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안도라, 모로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크로아티아, 헝가리, 튀르키에...

애초에는 포르투갈 순례길을 약 25일 정도 걷고, 나머지 기간을 배낭여행을 이어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름철 남유럽의 더위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일정을 다 배낭여행으로 소화했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도 여행의 묘미겠지요.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펜으로 노트에 적기도 했고, 스마트폰 메모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본 포스팅은 그 여행일지를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재밌지는 않습니다. 또한 가이드북 수준의 디테일한 정보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프림장군 기마상(Estatua del General Prim): 프림 광장에 있다. 프림장군은 카탈루냐를 대표하는 진보적 군인으로 평가받는다. 남북전쟁 당시 링컨을 지지했으며, 크림 전쟁에서도 활동을 했다.

 

 

2024년 6월 13일 목요일: 6일차, 맑음

건축가 가우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건축에 문외한이라도 가우디가 설계한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대해서는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의 미학을 건축에 담은 건축가 가우디!

그런 가우디의 고향을 다녀왔다. 언뜻 가우디의 고향이 바르셀로나라고 생각하겠지만 그의 생가는 레우스(Reus)라는 곳에 있다. 레우스는 바르셀로나에서 남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져있는데 수도교가 있는 타라고나의 바로 옆동네다. 그래서 레우스와 타라고나, 두 도시는 시내버스값 정도로 오갈 수 있다.

레우스 기차역에서 내려 대성당 방향으로 이동했다. 중심지역인 메르카달광장(Plaça del Mercadal)에 다다르니 카사나바스라는 무척 인상적인 건물이 눈에 띈다. 그래 가우디의 생가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하지만 카사나바스는 가우디의 생가가 아니란다. 조금 뒤편에 박물관과 안내소(Gaudí Museum & Tourist Office)가 있기에 가서 또 물어봤다. 여기가 가우디 생가인가요?

또 아니란다. 그럼 도대체 가우디 생가는 어디란 말인가? 안내소에 문의하니 생가가 표시된 지도 한 장을 주었다. 그러면서 가봐야 별거 없다는... 말을 했다. 가보니 진짜 별거 없었다. 초라했다. 현재 개인 소유의 집으로 그냥 입간판만 세워져 있던 것이다. 입간판도 없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서울 인왕산 수성동계곡 아래에 가면, 윤동주 시인의 하숙집이 있다. 그런데 그곳도 그냥 입간판만 붙어 있다. 개인 소유의 다세대 주택이라 당연히 출입을 할 수가 없다. 오히려 윤동주 하숙집이 외관상으로는 더 나아보일 정도로 가우디 생가는 방치되어 있었다.

가우디 생가라는 명칭의 끌림이 아쉬움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레우스에 온 김에 발자취를 남겨야할 거 같아 가우디 박물관을 방문했다. 11유로(약 1만7천원)를 주고 티켓팅을 했다. 오디오 가이드가 포함됐는데... 한국어는 없고 영어로 된 걸 제공받았다. 그 영어로 된 걸 다 알아...들었냐?ㅋ

전시는 좋았다. 전체적으로 가우디의 건축철학을 엿볼 수 있는 전시였다. 하지만 입장료가 다소 비싼 느낌이었다. 빨리 보면 10분 안에 다 볼 수 있을 정도로 공간 자체가 넓지 않았다.

그럼에도 인상적인 곳이 있었다. 가우디의 작업실을 복제해서 만든 코너였다. 작업실 한켠에 때묻은 침대도 놓여있었다. 참 소박하고 검소한 공간이었다. 작고 소박한 공간에서도 대작이 나왔던 것이다.

내 작업공간도 작은 밥상인데 대작이 나올 수 있는 거야?ㅋ

ps. 사그리다 파밀리아가 2026년에 완공된다는데... 스페인넘들을 믿으십니까?ㅋ

 

 

 

* 카사나바스: 1908년에 완공된 건물로 실내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현란한 기둥으로 장식된 클러스터가 인상적인 건물이다. 가우디가 설계한 것은 아니다. 루이스 도메네츠라는 건축가가 설계했다.

 

 

 

* 레우스 대성당

 

 

 

* 메르카달광장: 왼쪽 사각형 건물이 가우디 기념관이다.

 

 

 

* 가우디 생가: 오른쪽 갈색문이 출입문이다. 개인 소유 건물이라 출입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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