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트레킹으로 밥먹고 삽니다_ 1편

- 나를 가이드라고 부르는 사람이 싫었다!

- 역사트레킹마스터(historytrekkingmaster)

내 스스로에게 붙인 명칭이다. 초창기에 붙인 명칭이니 거의 십 년 정도 된 거 같다. 이력서를 쓸 때마다 저 명칭을 기술했는데 인사담당자들은 거의 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역사트레킹은 대충 알겠는데 ‘역사트레킹마스터’는 감이 잘 안 온다는 뜻이었다. 하긴 나도 담당자에게 전화를 할 때는 이랬다.

“안녕하세요? 트레킹 강사 곽동운인데요.”

‘대장’이라는 명칭은 피하고 싶었다. 기존 산악회에서 통용되는 명칭을 쓰면 첨언할 필요 없이 다른 이들을 쉽게 납득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일이 대장이라는 명칭과는 어울리지도 않았을뿐더러 내가 누군가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것도 좀 닭살 돋았다.

어쨌든 난 역사트레킹마스터라는 낯설고도 긴 명칭을 직업란에 기재를 해왔다. 그리고는 항상 역사트레킹마스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이러쿵저러쿵 말을 덧붙여야 했다. 그 덧붙이는 말의 총량은 초창기 때와 비슷하다. 요즘도 사람들이 잘 모르니깐...

마스터(master), 아시다시피 ‘주인’이라는 뜻이다. 거기에 더해 ‘~숙달하다’, ‘~통달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역사트레킹마스터는 ‘주인’이라는 뜻보다는 ‘숙달하다’라는 의미로 쓰인다고 할 수 있다. 마스터는 전반적인 리딩은 물론, 적재적소에서 해설을 해야 한다. 입담이 좋아 청산유수처럼 해설을 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꼭 해설을 해야 한다. 왜? 역사트레킹이니깐! 돈을 받고 하는 트레킹이니깐!

 

* 인왕산 기차바위 인근에서 찍은 사진. 뒤쪽에 서대문 안산이 보인다.

역사트레킹마스터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주로 둘레길을 걷지만 역사트레킹도 엄연히 아웃도어 활동이다. 만 보 이상 걷고, 4시간 정도 소요되는 야외활동이다. 그래서 스트레칭이나 호흡법 같은 피지컬적인 요소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또한 야생동물로부터 수강생들을 보호하는 것도 마스터의 임무이다. 산책로에 뱀이 있으면 스틱으로 뱀을 치워버리고, 앞에 멧돼지가 나타나면 자신의 몸으로 ‘몸빵’을 해야 한다.

이것 말고도 상당히 중요한 임무가 있다. 피식 웃을 수도 있지만 무척 중요하다. 무엇이냐? 바로 화장실이다. 우리나라에서 대중트레킹을 향유하는 주요 계층은 40~60대 여성들이다. 실제로 내 강의인,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의 수강생 대부분은 중년 여성들이다. 그러다보니 화장실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내가 남자라 그런지 남성 수강생분들에게는 ‘알아서 하시라’고, 그냥 맡긴다. 실제로도 알아서 잘들 하신다. 하지만 여성 수강생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난 트레킹 중에 물을 많이 마시자는 주의다. 수강생들에게 물을 많이 들이켜게 했으니 응당 그에 대한 후속조치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답사를 갈 때 꼭 화장실 위치부터 체크한다. 화장실이 없는 곳은 아무리 좋은 길이라도 코스에서 제외시킨다.

리딩과 해설, 그리고 야생동물과 맞서기와 화장실 체크까지... 주인이 아니라 무슨 마당쇠같다. 그렇다. 난 수강생들에게 주인이 아니라 마당쇠 역할을 한다고 힘줘서 이야기한다.

이런 모습은 여행가이드와 외형적으로 같아 보인다. 여행가이드가 고객이 편하게 여행에 몰입할 수 있게 서포터를 해주듯, 역사트레킹마스터인 나는 수강생분들이 편하게 트레킹에 임할 수 있도록 마당쇠 역할을 해준다. 명칭만 다를 뿐 내용상으로는 많은 부분이 겹친다. 지금도 종종 나를 ‘가이드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예전에는 가이드라는 이름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개의치 않는다. 마스터든, 강사든, 가이드든 명칭이 중요한 게 아니라 트레킹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이후부터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은 것이다.

난 계속 직업란을 역사트레킹마스터(historytrekkingmaster)로 기재할 것이다. 그리고는 궁금한 표정을 짓고 있을 상대방에게 그 역할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덧붙일 것이다. 그런 첨언의 과정이 언제 끝날지는 모른다. 이 연재를 시작한 건 그 과정을 줄여보자는 의미에서 시작한 것도 있다.

하지만 내 직업을 제대로 기록해보자는 것이 본 연재의 가장 큰 목적이다. 어찌 보면 내 직업은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이다. 업무 분장이 명징하게 기재된 메뉴얼이 있는게 아니라 매뉴얼을 직접 만들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창작한다는 심정으로 내 일에 대해서 기록을 남겨보고 싶다. 풍광이 수려한 트레킹 코스를 알고 싶어 이 글을 클릭한 분들에게는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

 

추신. 그런 의미로 트레킹 코스에 대해서 알고 싶은 분들은 번지수를 잘못 찾으셨다. 트레킹 코스에 대해서 알고 싶은 분들은 링크를 클릭하시라!

 

 

필자는 종교다원주의자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후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미사에 참여했었는데 그때 큰 감흥을 느꼈었다. 사찰을 탐방하는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는 합장부터 하며 가람을 누볐다. 또한 간간이 교회도 갔고, 그 곳에서 이웃 사랑에 대해서 곱씹어 보기도 했다.

 

무속신앙도 빠질 수 없다. 친분이 있는 무속인이 있는데 작두를 아주 잘 탔다. 그 분 따라 작두잡이를 여러 번 해봤다. 작두잡이를 할 때는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되기에 입에다 ‘함’을 물린다. 작두굿은 유혈이 낭자하는 경우가 많기에 항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그렇게 작두굿은 종료가 되고 관객들은 한 명씩 차례로 공수를 받는다. 공수는 신이 무당의 입을 빌려 전하는 메시지이다.

그때서야 작두잡이들도 긴장감에서 해방이 되어 입에 문 함을 뱉어낸다. 침방울로 범벅이 된 함을 그냥 태울 것인가? 안 된다. 함을 열어봐야한다.

“앗싸 돈 들어있다! 작두잡이 값이다.”

* 인왕산 성곽길

● 바위산인 인왕산

이번에는 우리나라 무속 신앙의 메카 같은 곳을 향해 간다. 그곳은 인왕산에 있는 선바위다.

인왕산은 바위산이라 그런지 돌이 많기로 유명하다. 호랑이바위, 투구바위, 해골바위 등등... 독특한 형상을 한 바위들이 참 많다. 원래 인간은 자연이 빚어놓은 형상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다. 무생물에도 영혼이 있다는 애니미즘(animism)이 바위에도 투영되니 거석숭배문화가 발생했다. 인왕산 선바위는 그런 애니미즘적인 거석숭배문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선바위는 가로 7미터, 세로 10미터 정도로 인왕산의 남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규모가 큰 바위인데다 워낙 독특하게 생겨서 멀리서도 그 자태를 알아볼 수가 있다. 하지만 인왕산에 다른 바위들이 많은 터라 좀 자세히 봐야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

선바위를 비롯해 인왕산의 남서부 일대를 한 발짝 떨어서져 조망하고 싶다면 인왕산이 아닌 그 앞쪽에 있는 안산(鞍山)에 올라가보자. 안산은 무악재 고개를 사이에 두고 인왕산과 마주하고 있는 산이다. 서대문 형무소가 위치해있을뿐더러 유명한 안산자락길이 있어 도보여행자들의 발길을 불러 모으고 있는 산이다. 그 무악재에는 2017년에 무악재하늘다리가 놓여서 두 산을 연결하고 있다.

안산은 ‘편안한 안(安)’이 아닌 ‘안장 안(鞍)’을 쓴다. 산이 말 안장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 안장 형상을 제대로 인지하려면 인왕산, 그 중에서도 선바위 인근에서 바라봐야 한다. 가까이에서 봐야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있고, 반대로 멀리서 봐야 그 전체 틀거리를 알 수 있는 게 있다.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닌가? 상황에 따라 줌인 / 줌아웃을 적절히 해야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 선바위

 

 

● 선바위와 국사당

선바위를 한자로 쓰면 '선암(禪岩)'으로 '스님바위'라는 뜻이 된다. 승복을 입은 선승이 참선을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선바위를 자세히 보면 단일 암석이 아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붙어 있는데 이것을 두고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영혼이 나란히 깃들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렇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 보니 선바위는 예로부터 아이를 갖기 원하는 이들의 좋은 기도처였다고 한다. 쌍둥이 바위는 다산을 뜻하니까. 요즘같이 저출산 시대에는 ‘애국자 바위’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암석에서 치성을 드리는 것을 두고 거석숭배문화라고 한다. 이 거석숭배문화는 우리 민간신앙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선바위는 이런 거석숭배문화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바로 산악신앙이다.

우리 옛 선인들은 산을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였다. 물이 샘솟고, 과실과 약초들이 산재해 있으며, 연료인 나무들을 채취할 수 있으니 산은 인간에게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산을 마냥 좋은 것만 주는 존재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사나운 맹수들이나 험준한 지형이 항상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인 산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드렸다. 산에 사는 신령, 즉 산신령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산악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런 산악신앙은 우리 무속신앙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바위 아래에는 국사당(國師堂)이라는 신당이 있다. 이 국사당은 원래 남산에 있던 신당이었다.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395년(태조4), 이성계는 목멱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았다. 그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당이 세워졌는데 이것을 국사당, 또는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 불렀다.

이 목멱신사에서는 봄과 가을에 국가의 공식행사로 제례를 올렸다. 유교중심주의를 표방하며 건국된 조선에서조차도 산신령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렇게 목멱대왕을 모셨던 국사당은 192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일제가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세웠는데 자기들의 신궁 위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것이다. 국사당이 선바위 부근으로 옮겨오게 된 건, 인왕산이 무학대사의 기도처였기 때문이었다. 국사당(國師堂)에서 '국사(國師)'는 무학대사를 뜻한다.

“제가 예전에 작두 좀 탔습니다.”

국사당 앞에는 작두를 타는 단이 있는데 그 앞에서 좀 있어 보이려고 저런 멘트를 했었다.

 

“정말요? 무섭지 않았어요?”

“작두날이 날카롭지 않아요? 피 날 거 같은데.”

“아니 제가 탔다는 게 아니라... 전 작두잡이를 하면서요... 작두잡이 하면 돈도 입에다 물려줘요. 공수도 받고, 돈도 받고...”

돌아오는 반응은 항상 작두의 날만큼 매서웠다. 그럼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궁색해져 돈 타령으로 급히 마무리 할 수밖에...

 

 

* 국사당: 국사당에는 당연히 주차장이 없다. 그래서 제사 물품을 지게로 나른다. 최첨단 시대이지만 한편으로는 올드 스타일도 존재하는 법이다.

 

● 무학대사와 정도전, 그리고 선바위

선바위는 한양도성에서 직선거리로 3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두냐 마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 간에 격론이 오갔다. 불교세력을 대변했던 무학대사는 당연히 선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교세력을 대변했던 정도전은 이 스님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크게 반대했다. 선바위가 들어오면 도성 안에 불교가 융성해질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첨예하게 오갔던 격론은 이성계에 의해 결론이 났다. 선바위가 도성 밖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불심이 깊은 이성계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유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200년 안에 큰 전란이 있을 것이고, 국운이 기울 것이라는 큰 저주(?)를 내뱉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이 선바위를 두고 오갔다던 ‘무학대사 VS 정도전’ 간의 갈등은 정사가 아닌 야사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선바위를 두고 오갔던 두 사람의 갈등은 <조선왕조실록> 같은 공식적인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이런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일까? 선바위 논쟁이 입에서 입으로 흘러나왔던 건, 실제로 조선이 건국한 후 약 200년 뒤에 일어난 조일전쟁(임진왜란) 때문이었다. 당시의 민중들이 어떤 식으로든 전란에 대한 유학자들의 책임을 묻기 위해 선바위와 무학대사를 무대로 등판시켰다는 것이다. 도성을 버리고 떠난 왕과 사대부들에 대한 원망을 선바위와 무학대사에 기대어 풀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무속의 메카답게 오늘도 선바위에는 많은 이들이 와서 기도를 올린다. 아이를 낳게 해 줄 수 있는 바위라 그런지 확실히 여성들이 더 많다. 신엄마, 신딸로 보이는 무속인 무리들도 자주 보인다. 심지어는 외국인 여성도 와서 기원을 드리더라. 확실히 선바위의 기도빨이 좋긴 좋나보다. 그 여성 외국인은 무아지경에 빠진 듯 꽤 오랫동안 묵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선바위 앞에서 필자도 조심스럽게 합장을 하였다. 무슨 기원을 드렸을까? 로또대박? 역사트레킹이 잘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역사트레킹만큼은 정말 잘하고 싶으니까!

 

* 선바위와 한양도성: 선바위의 뒷모습. 선바위가 한양도성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 눈내린 인왕산 성곽

 


■ 선바위

1. 코스: 안산자락길 ▶ 무악재하늘다리 ▶ 선바위 ▶ 국사당

2. 가는법: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하차한 후 선바위로 바로 올라갈 수 있음. 하지만 안산자락길을 좀 걸은 후 무악재하늘다리를 통해 선바위를 탐방하는 코스를 추천함. 길도 예쁘고 완만해서 부담없이 걸을 수 있음.

3. 같이 가면 좋을 곳: 인왕산 수성동계곡

* 선바위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만약 서울에 북한산이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쓸데없는 가정을 한 번 해본다. 북한산이 품고 있는 울창한 숲, 아름다운 풍광, 풍부한 문화유산 등등... 이런 것들이 사라진다면 서울은 정말 밋밋한 도시가 됐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그만큼 서울 사람들은 북한산의 덕을 제대로 보고 있는 셈이다. 이번편은 진관사에 대한 글인데 이 진관사도 북한산이 품고 있는 문화유산 중에 하나다.

* 진관사 극락교

● 삼각산이라 불렸던 북한산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북한산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북한산은 예전에 삼각산(三角山)이라는 명칭으로 더 많이 알려졌었다. 세 개의 봉우리가 삼각뿔처럼 생겼다하여 삼각산이라고 불린 것이다. 그 세 봉우리는 백운대(837m), 인수봉(810m), 만경대(800m)이다. 예전에 봉우리 이름을 외우려고, 앞 글자를 따서 ‘만백인’으로 외웠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백만인’이 더 잘 머릿속에 남을 거 같다. 한편 북한산의 정상은 인수봉이 아닌 백운대다. 인수봉이 유명해서 그런지 인수봉이 최정상인지 알고 계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지가 않다. 더군다나 인수봉은 일반 등산으로는 오르지 못하고 클라이밍 장비로 암벽 등반을 해야만 도달할 수 있다.

다른 산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북한산도 동서남북이 제각각이다. 삼각뿔이 자리 잡고 있는 동쪽은 높은 봉우리들이 장벽처럼 연이어 서 있다. 이에 비해 서쪽은 비교적 낮은 봉우리들이 올망졸망하게 늘어서 있다. 그렇게 동서간의 고도차이 때문인지 북한산의 물길은 동쪽보다는 서쪽이 더 완만하다. 계곡트레킹을 하기에도 서쪽편이 더 낫다.

이번에 탐방할 진관사도 북한산의 서쪽에 있다. 진관사를 가려면 3호선 구파발역에서 진관사행 시내버스를 타면 쉽게 도달할 수 있다. 15분 정도 타고 이동을 하는데 차창밖 풍경이 예뻐서 지루하지가 않다. 다른 방법도 있다. 6호선 독바위역에서 하차한 후 진관뉴타운 방면으로 북한산둘레길을 따라 걸으면 진관사에 도달할 수 있다. <진관사 역사트레킹>을 이렇게 행하는데 볼거리도 많고, 문화유산도 많아서 많은 이들에게 별표 5개를 받고 있다. 진짜다.

 

“와! 멋지네요. 서울에 이렇게 큰 한옥마을이 있었어요?”

“네 있었어요. 한옥하고 북한산하고 잘 어울리죠.”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진관한옥마을이 탐방객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진관한옥마을은 진관뉴타운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는데 수도권에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한옥마을이다.

* 진관사: 대웅전 앞에 쌍석등이 있다.

 

● 서울의 4대 명찰 진관사

진관사는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4대 명찰 중에 한 곳이다. 4대 명찰은 조선 세조 때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서쪽에 진관사, 동쪽에 불암사, 남쪽에 삼막사, 북쪽에 승가사를 지정하였다. 왕실의 번영을 위해 지정된 사찰들이었기에 이 사찰들은 명찰이라 불리며 승격이 높았다.

일주문과 불이문을 지나 진관사 경내로 들어가자. 초가지붕을 얹은 연지원에서 흘러나오는 향긋한 차향에 이끌리어 발걸음을 멈추지 말자. 바로 대웅전으로 이동하자.

 

“와, 좋네요. 무언가 탁 트인 느낌이에요.”

“뒤쪽에 있는 봉우리하고 대웅전하고 잘 어울려요.”

 

수강생들은 이구동성으로 감탄사를 외쳤다. 진관사는 계곡 지형에 위치해 있는데 대웅전 뒤쪽편의 봉우리는 비교적 아담하지만 상류쪽으로는 높은 봉우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 탁 트인 시야와 웅장한 모습을 동시에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대웅전 앞에서는 매번 이런 해설을 했었다.

“진관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인데요. 보시다시피 본당인 대웅전 앞에 탑이 없고, 대신 석등이 2개가 있어요. 통상적인 가람 구조에서 벗어난 형태에요.”

옛 사찰들은 본당 앞에 탑을 세웠다. 본당 하나에 탑이 하나있는 것을 1당 1탑이라고 한다. 1당 2탑도 있다. 말 그대로 하나의 본당 앞에 쌍탑이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진관사의 대웅전 앞에는 탑 대신에 쌍석등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 통상적인 가람 구조에서 벗어났다고 말한 것이다. 있어 보이려고, ‘에헴’하고 헛기침도 하면서 해설을 했지만...

“곽작가님, 우리 빨리 단체 사진 찍어요.”

해설 실력이 약하나? 꼭 그렇지는 않은데. 그래, 어차피 해설도 하고 사진도 찍어주고 그런 것이다. 참고로 ‘가람(伽藍)’은 승려가 모여 수행을 하는 장소를 말하는데 불교 사찰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 진관사

● 진관대사를 위해 세운 진관사

진관사(津寬寺)는 1010년, 고려 현종 2년 때에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신혈사로 불렸던 진관사는 고려 제8대 왕인 현종이 진관대사를 위해 직접 세운 절이라고 한다. 당시 왕위계승 1순위였던 현종은 어려서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불렸었다.

그런데 헌애왕태후로 불리기도 했던 천추태후(千秋太后)에게 미움을 받았다. 천추태후는 5대왕 경종의 부인이자 7대왕 목종의 어머니였는데 아들인 목종이 후사가 없자 자신의 다른 아들을 왕위에 앉힐 생각이었다. 당시 애인인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에 올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대량원군을 위협하는 천추태후의 검은 그림자는 더욱더 짙어져갔다.

원래 신혈사는 진관 스님이 홀로 수행을 하는 곳이었는데 천추태후는 강제로 대량원군을 이곳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사람들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외진 곳이니 자객을 보내기도 좋았을 터. 하지만 진관 스님은 이런 음모를 간파했고, 수미단에 굴을 파서 대량원군을 숨겨놓는 기지를 발휘했다. 수미단은 불상을 올려놓는 단을 말한다.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일컬어지는 상상속의 산인 수미산을 형상화한 것이다.

3년 뒤인 1009년에 대량원군은 개경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른다. 서북방을 지키던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등극시킨 것이다. 고진감래라고 천추태후의 탄압을 끝까지 견뎌냈기에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현종 때에는 2번에 걸쳐 거란이 침공을 해왔다.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거란의 2차 침입이 1010년에 있었고, 8년 후에는 3차 침입이 있었다. 2차 침입 때는 요나라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한 터라 현종은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을 가야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당하고만 있던 민족인가.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거란과의 전쟁 때는 강감찬 장군이 있었다. 1018년에 있은 3차 침입 때 강감찬 장군은 귀주에서 승전보를 울렸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귀주대첩이다.

진관사 이야기를 하다가 고려 초기 거란과의 항쟁까지 언급하게 됐다. 뭐 이러면서 하나라도 더 익히면 좋지 아니한가. 우리가 역사트레킹을 혹은 답사여행을 행하는 것도 현장에 직접 가서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하는 거니까.

진관사는 한국전쟁 때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는다. 빨치산이 지리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북한산에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나한전, 칠성각, 독성전은 전쟁의 참화를 피하게 된다.

* 진관사

● 일장기에 덧그린 태극기가 발견되다

2009년도였다. 오래된 칠성각을 해체복원하다 뜻밖의 문화재가 발견된다. 일장기 위에 태극문양을 덧그린 태극기가 발견된 것이다. 태극문양이 지금처럼 상하대칭이 아닌 좌우대칭으로 그려진 독특한 형태의 태극기였다. 이 태극기를 숨겨놓으신 분은 바로 백초월 스님이셨다.

일제강점기 당시 진관사에 주석하시던 백초월 스님은 한용운 스님, 박용성 스님과 함께 항일운동에 적극적이셨던 불교계 인사였다. 1944년 형무소에서 옥사하실 정도로 백초월 스님은 끝까지 항일 의지를 꺾지 않으셨던 분이다. 31운동 경, 일제 경찰에 잡혀가기 전에 숨겨놓은 태극기였으니 무려 90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온 태극기였다.

 

“삼각산이 조선이면 왜놈은 계란이다. 계란으로 삼각산을 아무리 친다한들 삼각산은 끄떡없다.”

 

백초월 스님의 어록이다. 구구절절이 옳으신 말씀이다. 전세계에 있는 계란을 다 친다고해도 북한산은 꿈쩍도 하지 않을 거다.

이렇게 하여 진관사 탐방은 종료된다. 좀 아쉬우시면 위쪽에 있는 진관사 계곡에 잠시 다녀오시는 것도 좋을 듯싶다. 나름대로 아기자기한 계곡이라 잠시 머리를 식히기에 딱인 곳이다.

북한산, 4대 명찰, 진관대사, 현종, 천추태후, 거란, 강감찬, 백초월 등등... 진관사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 거리들이 있다. 본 글에 언급하지 못한 유명한 진관사 수륙재도 있다. 그러니 가보면 좋다.

 

 

 


 

 

 

 

■ 진관사 탐방

1. 세부코스: 진관한옥마을 ▶ 진관사 ▶ 진관계곡

2. 가는법: 3호선 구파발역에서 진관사행 시내버스 탑승. 약 15분 정도 소요됨.

3. 같이 가면 좋을 곳: 기자촌 근린공원 / 화의군 묘역

* 진관사 탐방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 서울의 명소들을 탐방하는 <서울 그곳에 가다>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본 <서울 그곳에 가다>는 저의 주 종목인 <역사트레킹>에서 파생된 콘텐츠입니다. 기존에 작성했던 트레킹 원고들은 평균이 원고지 35매(200자 기준) 정도여서 읽는데 좀 불편했던게 사실입니다. 이에 좀 컴팩트한 분량의 원고를 작성해보기로 했답니다.

<서울 그곳에 가다>에서 탐방하는 장소들은 기존에 작성했던 트레킹 원고에서 이미 한 번 다뤄본 곳들이 대다수일 겁니다. 그럼 재활용이냐? 아닙니다. 재작성했습니다. 기존 트레킹 원고도 출간해보고 싶고, 본 <서울 그곳에 가다>도 출간해보고 싶어서요. 자기 표절도 표절아닙니까.

원고지 15~20매 정도로 분량이 그리 많지 않으니, <서울 그곳에 가다>를 많이 사랑해주세요. 서울의 명소들을 하나하나 소개해 드릴테니까요~^^

 


역사트레킹을 직업으로 삼다보니 서울 곳곳을 누비게 됐다. 그러면서 깨달았던 것이 하나 있다. 아니 실감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보시다시피 서울에도 산이 참 많아요.”

수강생들에게 많이 했던 멘트다. 그렇다. 서울에는 북한산이나 관악산 말고도 산이 많다. 인왕산, 아차산, 청계산 등등... 그런 서울의 산을 찾아 떠난다. 산에 간다고 움찔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너무 걱정하시지 마시라. 필자도 산 정상부를 가는 것보다 둘레길 걷는 걸 더 선호하니까.

제목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이번에 탐방할 곳은 백사실계곡이다. 백사실계곡은 북악산의 북사면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 북악산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자.

서울 안쪽에는 4개의 산이 자리 잡고 있다. 북쪽 북악산, 동쪽 낙산, 서쪽 인왕산, 남쪽 남산. 이 산들을 연결하여 성을 쌓았더니, 한양도성 18.6km가 탄생했다. 이 산들은 안쪽에 있다하여 내사산(內四山)으로 불렸다.

* 백사실계곡: 초입에 자리잡은 현통사

● 이곳에 들어서면 도시의 번잡함이 사라진다!

청와대의 뒷산이라 그런지 북악산은 많은 부분이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개발이 제한되다보니 역설적으로 서울 같지 않은 구역도 존재한다.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명승 제36호 백사실계곡이 바로 그런 곳이다. 백사실계곡에 발길을 들여놓으면 울창한 수목원을 방문한 것처럼 싱그러움이 전해진다. 서울에서도 이런 숲 향기를 느긋하게 맡을 수 있다니!

필자는 백사실계곡을 ‘비밀의 화원’이라고 표현한다. 서울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광화문에서 불과 4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렇게 호젓한 곳이 자리 잡고 있으니,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매연과 소음, 끝없는 인파에 시달리다가도 이곳에 들어서면 갑자기 모든게 멈춰진 듯 그런 도시의 번잡함이 사라진다. 싹 다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다.

비밀의 화원답게 백사실계곡은 물도 1급수다. 그래서인지 1급수에서만 산다는 도롱뇽이 살고 있단다. 백사실계곡은 홍제천의 상류가 되는데 그 물길을 따라가면 굵직한 문화유산들을 만날 수 있다. 몇 가지를 알아보고 가자. 일단 유명한 세검정(洗劍亭)이 부암동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인조반정과 관련된 김류, 이귀 등이 거사를 모의한 후 이곳에서 칼을 씻으며 결의를 다졌다하여 세검(洗劍)이라는 명칭이 생겼고, 이곳에 정자가 들어서니 세검정이 된 것이다. 세검정은 백사실계곡 탐방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다.

세검정 인근에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의 어원이 된 탕춘대(蕩春臺) 터가 있다. 탕춘대는 연산군에 의해 1505년에 만들어졌는데 그는 이곳에 수각을 짓고 화끈하게 놀았다고 한다. 이때가 연산군 11년이었는데 다음해인 1506년, 중종반정에 의해 폐위된다. 과유불급이다. 놀아도 적당히 놀아야한다. 그러니 폐위가 되는 것이다. 참고로 수각(水閣)은 물가에 지어진 누각 혹은 정자를 말한다.

홍제천은 모래가 많다하여 사천(沙川)이라고도 불렸고, 불천이라고도 불렸다. 보도각 백불이라는 고려시대 만들어진 거대한 마애불 앞을 흐른다하여 불천(佛川)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정식 명칭이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인 보도각백불은 다른 마애불과 달리 호분으로 채색을 했다. 보기 드문 컬러풀한 마애불로 2014년 3월에 보물 제1820호로 승격됐다.

 

 

* 백사실계곡: 숲길의 가을

● 풍광이 수려한 백석동천

현통사 앞 너럭바위에서 멋지게 인증사진을 찍은 후 산책로를 따라 이동한다. 싱그러운 숲 향기를 맡으며 걷다보니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온다. 그렇게 걷다보면 큰 연못 자리를 끼고 있는 별서터가 나온다. 백석정, 백석실 혹은 백사실로 불렸던 이 건물은 전에는 오성대감 이항복 선생의 별서터였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2012년에 추사 김정희 선생이 그곳의 주인이었다는 문서가 발견됐고, 그에 따라 부암동 별서는 이항복 선생이 아닌 추사 김정희 선생의 소유물이라는 것이 정설이 되었다.

그 곳이 이항복 선생 소유든 김정희 선생 소유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조선 중기 때 인물인 이항복 선생이 부암동 별서터를 잘 사용했고, 이후 조선 후기를 살았던 추사 김정희 선생이 바톤을 이어받아 잘 이용했다고,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역시 숲을 거닐다보면 상상력도 풍부해진다.

이제 백석동천(白石洞天) 각자 바위를 보러가자. 예전에 이 일대는 백사골로 불렸었는데 주위에 흰 돌이 많았기 때문이다. 동천(洞天)이라는 명칭은 삼청동천, 청계동천처럼 풍광이 수려한 곳을 지칭할 때 붙는 말이다. ‘백석동천’을 거칠게 풀이해보면, 풍광이 아름다운 백석지역이라는 뜻이 된다.

어쨌든 이 일대가 비밀의 화원처럼 아름답다보니 어떤 풍류객이 ‘白石洞天’ 네 글자를 보기 좋게 각자를 해두었다. 이 백석동천 바위는 크기나 선명도면에서 다른 각자바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누구나 다 그 곳에 서면 카메라를 꺼내 든다.

“곽 작가님, 거기서 멀뚱하게 서 있지 말고 우리 사진 좀 찍어줘요.”

 

필자는 열심히 사진을 찍어준다.

각자바위에서 왼쪽으로 길을 잡으면 능금마을이라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능금이면 사과 아닌가? 서울에서 사과를 재배했었나? 그렇다. 지금은 아니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부암동 일대에는 사과밭이 많았다. 경림금(京林檎)이라고 불렸던 부암동 일대 사과는 제사상에 올라갈 정도로 찾는 이들이 많았었다. 부암동은 북소문인 창의문과 맞닿아있는데 가을 수확철만 되면 경림금을 구매하기 위한 행렬로 창의문밖이 들썩들썩 거렸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맛이었기에 창의문 밖이 들썩거리기까지 했을까? 이제는 능금밭은 찾아볼 수 없기에 입맛만 다시며 다시 숲길을 거닐었다.

이렇게 하여 백사실계곡 탐방을 마쳤다. 추사 선생의 별서터와 백석동천 각자바위, 거기에 울창한 숲길이 더해지니 이곳은 정말 서울 같지 않은 곳이다. 잘 간직하고 싶은 비밀의 화원이다. 이곳에 발자국을 들이면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싱그러운 나무향이 전해진다. 그런 자연의 향취에 빠지다보면 어느 순간 어깨춤을 추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걸 무아지경이라고 해야 하나? 숲에 가면 그렇게 좋은 기운을 받게 된다.

* 백석동천: 각자바위

 


 

 

■ 백사실계곡

1. 세부코스: 세검정(홍제천) ▶ 별서터 ▶ 각자바위 ▶ 능금마을 인근 숲길

2. 가는법: 3호선 경복궁역에서 상명대행 시내버스 탑승, 상명대 앞 하차. 약 10분 정도 소요됨.

3. 같이 가면 좋을 곳: <커피 프린스> 촬영지로 유명한 부암동 카페거리, 북악스카이웨이 산책로

 

 

* 백사실계곡 탐방지도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8편> 불암산이 부처님 산이라고? _ 불암산 역사트레킹

 

 

 

* 불암사 뒤편 마애삼존불: 12지상이 호위하듯 서 있다.

 

 

 

 

 

 

 

- 목적없이 그냥 트레킹을 하는 것이 좋으신가, 아니면 주제성이 확실한 테마트레킹이 좋으신가?

 

수강생들에게 이 질문을 던졌을 때 거의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테마트레킹이 좋다고 대답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계신분들은 어떤 것이 좋으신가?

 

역사트레킹은 역사를 중심에 둔 테마트레킹이다. 역사트레킹이 거듭될 때마다 점점 더 큰 욕심이 생겼는데 테마의 강도를 더 높이고 싶은 욕심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맨 처음 구체화한 것이 내사산(동: 낙산, 서: 인왕산, 남: 남산, 북: 북악산) 테마였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외사산(동: 아차산, 서: 덕양산, 남: 관악산, 북: 북한산)으로 확장시켰다. 내사산, 외사산의 테마가 종료되니 새로운 주제에 대한 갈증이 일어났다. 그러다 목탁을 치듯 무릎을 쳤다. 사찰이 있었던 것이다.

 

 

 

 

 

 

* 불암사 일주문

 

 

 

 

 

 

● 부처님의 형상을 한 불암산

 

이번에는 불암사 역사트레킹이다. 불암사는 불암산에 있는 사찰로 동불암(東佛巖)으로도 불리는 서울근교의 4대 명찰이다. 4대 명찰을 알기 쉽게 정리를 해보자. 동쪽 - 불암사, 서쪽 - 진관사, 남쪽 - 삼막사, 북쪽 - 승가사.

불암산 역사트레킹은 서쪽편인 서울시 노원구에서 시작하여 동쪽편인 경기도 남양주시로 넘어간다. 그러니 불암산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는 게 먼저다.

 

필암산이라고도 불리는 불암산(해발508미터)은 이웃한 수락산과 더불어 바위가 많은 산이다. 거북바위, 해골바위, 백바위 등등... 형형색색의 바위들이 자태를 뽐내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불암산이라는 명칭도 바위의 형상에서 도출됐다. 정상부 바위의 모습이 마치 송낙을 쓴 부처님의 모습처럼 보인다하여 불암산이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송낙이 뭐지? 어려운 명칭이 나왔으니 잠시 정리하고 가자. 송낙은 송라립(松蘿笠)이라고도 불리는데 주로 여승들이 쓰는 모자를 말한다. 이 송낙은 소나무의 겨우살이인 송라를 엮어서 만드는데 얼핏 보면 지푸라기로 만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양은 전체적으로 고깔모자처럼 생겼으나 맨 윗부분은 두상에 맞춰져 평평하다.

 

이렇게 설명해도 감이 잘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 조각 피자를 생각해보시라. 먹음직스러운 조각 피자를 먹으려고 딱 준비를 했는데 누가 냉큼 한 입 베어 먹은 것이다. 조각 피자의 삼각뿔이 없어지고 마음은 아프고... 송낙을 쓴 부처님의 형상을 두드러지게 볼 수 있는 곳은 불암산의 동쪽편이다. 그러고 보면 불암산은 부처님 자체인 거 같다.

 

“불암산, 불암산 하는데 이 산이 최불암 산이에요?”

“그럴 수도 있어요. 최불암 선생이 이 산의 명예 산 주인이라고 하더라고요.”

“최불암 선생님은 좋겠어요.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프로그램도 하고, 산 주인도 하고요.”

“저도 정말 부러워요. 하하하”

 

 

 

 

 

 

* 불암사 가는길

 

 

 

 

 

 

 

● 불암산의 다른 이름, 필암산

 

불암산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마다 꼭 나왔던 말들이다. 물론 최불암 선생의 본명은 따로 있다. 최영한. 하지만 우리에게 최불암은 최불암이다. 송해 선생이 본명인 송복희가 아닌 송해로 우리에게 각인된 것처럼.

앞서 언급한 필암산(筆巖山)이라는 명칭도 살펴보자. 필(筆)자는 ‘붓필’인데 이 일대는 문방사우와 관련된 지명들이 나타난다. 인근에 있는 중랑구 묵동이 대표적이다.

 

묵동은 먹(墨)을 만드는 동네라고 하여 먹골로 불렸다. 먹골배가 생각나시나? 먹는다고 먹골배가 아니라 먹을 만든다고 먹골이었던 것이다.

 

노원구 월계동에는 ‘벼루연(硯)’자를 쓴 연촌(硯村)이 있었다. 이 곳은 ‘벼루말’이라고도 불렸는데 동네에 벼루처럼 생긴 연못이 있다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종이, 붓, 벼루, 묵. 문방사우(지필묵연) 중에 종이만 빼놓고는 다 나왔다. 기왕이면 종이와 관련된 지명까지 만들어서 완전체를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어쩌면 일부러 완전체를 만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든다. 문방사우와 관련된 지명을 배치했다면 종이지(紙)와 관련된 동네 이름을 빼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가 가장 먼저 나오니까. 그래서인지 모르겠으나 필, 묵, 연의 지명을 쓴 건 이 일대의 지기(地氣)를 꺾기 위한 풍수적인 의도였다는 설도 있다.

 

 

 

 

 

 

* 불암산

 

 

 

 

 

 

 

● 숲길이 좋은 불암산

 

서론이 길어졌다. 불암산 역사트레킹은 4호선 상계역에서 시작한다. 바위가 많은 산을 골산(骨山), 흙이 많은 산을 육산(肉山)이라고 부르는데 이에 따르면 불암산은 골산이다. 설악산이 대표주자로 많이 언급되듯이, 골산은 ‘악’자가 많이 따라붙는다. 치악산, 관악산, 월악산 등등... 이런 산들은 입에서 ‘악’ 소리가 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골산임에도 불암산은 어렵지 않게 탐방할 수 있다. 해발고도가 508미터로 그리 높지 않기도 하지만 딱히 ‘악’ 소리를 입에 달고 오르는 구간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트레킹은 정상을 가는 스타일이 아니라 ‘악’ 소리하고는 거리가 멀다.

 

현재 불암산의 서쪽은 서울둘레길 1코스(수락불암)에 포함되는데 완경사를 따라 걷는 길이 참 좋은 곳이다. 숲도 울창하고,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 있어 많은 이들이 콧노래를 부르며 걷는 곳이다. 숲이 우거진데다 흙길도 잘 정비되어있어 명품 숲길이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그렇게 숲길을 따라 걷다 둘레길 전망대에 올라 불암산 정상쪽을 바라보자. 암반면이 노출된 암봉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바위들이 정말 매끈하지 않습니까? 저 위에서 쭈욱따라 미끄럼 타고 싶어요.”

“그래요. 말 나온 김에 시범을 보여주세요.”

 

재치 9단인 수강생들 앞에서는 농담도 조심해야한다. 그래서 재빨리 고개를 돌려 말했다.

 

“저기보세요. 저 높은 바위에 뭐가 매달려있어요. 그리고 또 움직여요.”

“정말 그러네요. 저거 사람이에요? 어떻게 저길 올라갔데요.”

 

그곳은 학도암장이다. 그렇게 움직이는 이들은 암벽등반을 하는 이들이다. 로프에 몸을 싣고 암벽을 타는 이들의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인다. 하지만 너무 멋있어 보인다. 필자는 암벽을 탈 용기가 없다. 그냥 걷는 게 좋다. 그래서 트레킹을 한다. 참고로 학도암장 정상부에서 조금만 더 이동하면 신라 시대에 만든 불암산성을 만날 수 있다.

 

바위가 많은 산은 사람들을 상상의 날개를 펴게 만든다. 바위의 형상이 조금이라도 무언가와 비슷하다면 해당되는 이름이 붙게 된다. 해골바위, 거북바위, 범바위 등등... 거시기한(?) 바위도 있다. 남근석이나 여근석이 바로 그것이다. 불암산에도 남근석과 여근석이 있는데 그 모양새가 꽤 사실적이라는 게 중론이다.

 

더군다나 두 바위가 그리 멀지않은 곳에 위치하여 음양의 조화를 제대로 펼치고 있는 모양새다. 다른 지역에는 남근석만 있거나 반대로 여근석만 있어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도 많은데 불암산은 그걸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 천보사: 대웅전과 코끼리바위

 

 

 

 

 

 

 

 

● 하늘의 보물을 품은 천보사

 

이제 천보사 방면으로 이동한다. 불암산은 필암산 이외에도 천보산(天寶山)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천보산이라는 명칭은 세조가 지었다고 한다. 세조가 이 일대를 유람하다 아름다운 풍광에 매혹되어 천보산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물음표부터 떠오른다. 불암산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역에 ‘천보산’이라는 명칭을 가진 산이 두 개나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유명한 회암사지가 자리 잡고 있는 양주의 천보산이고, 다른 하나는 의정부의 북쪽에 위치한 천보산이다. 이 둘은 하나의 맥으로 연결되어 있긴 한데 그 거리가 상당히 멀리 떨어져있다.

 

해발고도도 다르다. 양주의 천보산이 432미터이고, 의정부 천보산이 337미터이다. 이미 기존에 천보산이라는 명칭을 가진 산이 있는데 굳이 세조가 또 천보산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는 이야기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가람을 품고 있는 산의 명칭이 어찌됐든 천보사는 그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사찰이다. 하늘의 보물을 품고 있는 있다는 뜻 아닌가.

 

천보사는 천연보궁(天然寶宮)이라고 불린다. 법당 뒤쪽에 병풍처럼 펼쳐진 코끼리바위가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병풍바위처럼 비교적 평평한 암석면에는 마애불을 그려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창 선운사 마애불을 생각해보시라! 하지만 천보사는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자연암석을 부처님으로 보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천연보궁이라고 칭한다.

 

“여러분 눈을 크게 뜨고 한 번 바라보세요. 저 바위에 부처님이 깃들어 계신데요.”

“잘 안 보이는데요.”

“마음속에 불심이 없으셔서 그런 거에요. 불심이 있으면 보입니다.”

“곽작가님은 보이세요? 설명 좀 해주세요.”

“아니... 제가 사실은 제가 시력이 안 좋아서...”

“피이... 자기도 못 알아보면서.”

 

그랬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보더라도 부처님이 보이지 않더라. 물론 근래에 새겨놓은 석불좌상은 잘 보였다. 하지만 천연보궁에 깃든 부처님은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필자에게는 부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불심이 없었던 것이다.

 

- 모든 돌은 그 내부에 조각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모습을 찾아내는 것이 조각가의 일이다.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말이다. 이 말에 의하면 모든 바위는 부처 바위가 될 수 있다.한낱 중생도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다. 천보사 코끼리바위에서 육안으로 부처님을 찾기보다는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게 더 좋을 거 같다. 아니면 바위에 ‘자비’ 두 글자를 그려 넣어도 좋을 것이다. 조각이든 글씨든 뜻이 통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거대한 코끼리 바위를 품고 있는 천보사는 그 자체로 절경이다. 그 아름다운 사찰에서 내려 보는 풍광도 아주 시원스럽다. 정말 말 그대로 하늘의 보물을 품고 있는 사찰이 맞다. 사찰을 떠나기 전에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천보사 5층 석탑을 꼭 보고 오자. 천보사의 역사가 짧지 않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천보사

 

 

 

 

 

 

 

● 서울이 4대 명찰, 불암사

 

이제 마지막 탐방지인 불암사(佛巖寺)로 향한다. 천보사에서 불암사까지는 산길로 연결이 되어 있다. 좁은 오솔길을 걷는 맛이 참 좋다. 그런데 좀 위험한 구간도 있으니 발걸음을 조심하자.

 

불암사는 지증대사가 후기 신라시대인 헌덕왕 16년(824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글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불암사는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동불암이라고 불렸다. 서울 근교 4대 명찰은 세조의 명에 의해 지정된다.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재위 기간에 자신의 아들(의경세자)과 손자(인성대군)가 죽는 등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자신도 여러 가지 병치레를 했는데 금강산이나 오대산 같은 강원도 지역의 명산들에서 요양을 했기에 반드시 서울의 동쪽 지역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세조가 천보사의 명칭을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세조는 그런 시련을 불심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그래서 도성밖 사방에 왕실의 발전을 기원하는 4대 명찰을 지정하게 된다. 동쪽 - 불암사, 서쪽 - 진관사, 남쪽 - 삼막사, 북쪽 - 승가사.

 

불암사에는 보물 제591호 불암사경판이 전해 내려온다. 이중 <석씨원류(釋氏源流)>라는 책을 찍은 목판이 있는데 이 <석씨원류>는 조선 후기 불교의 대중적 확산에 공헌을 했다고 한다. <석씨원류>는 중국에서 간행된 책으로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제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는데 일반 민중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중간에 그림을 그려 넣었던 것이다.

 

이 책은 1631년(인조9년), 정두경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가져왔는데 승려 지습이 1673년에 불암사에서 판각했다. 이후 <석씨원류>가 퍼져나갔고, 사찰 건물의 내외부에 부처님의 행적을 담은 불화가 그려졌다고 한다. 글을 몰랐던 사람들에게 그림만큼 좋은 교화 도구도 없었을 것이다. 성당에 그려진 성화들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1989년 불암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게 된다. 태국에서 3과, 스리랑카에서 4과의 진신사리를 모셔와 진신사리보탑을 건립하게 된다.

 

- 머리에 송낙을 쓴 부처님의 형상

- 부처님의 행적을 담은 <석씨원류> 목판

- 부처님의 사리를 담은 사리탑

 

서울의 4대 명찰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만큼 귀한 것들이 많기에 동불암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이제 하산을 할 시간이다. 제월루 앞에 있는 천보산불암사사적비도 놓치지 말고 보고 가자. 사적비는 1731년(영조7년)에 만들어졌다. 1994년에 만들어진 일주문에도 천보산이라고 적혀 있다.

 

이렇게 하여 불암산 역사트레킹이 종료가 됐다. 좋은 숲길을 걸으며 귀한 문화유산을 만나서 그런지 마치 하늘에서 보물을 선물 받은 거 같다. 덕분에 즐겁게 역사트레킹을 행했다.

 

 

 

 

 

 

* 불암사

 

 

 

 

 


 

 

 

 

 

 

■ 불암산 역사트레킹

 

1. 코스: 전망대 ▶ 남근석 ▶ 여근석 ▶ 천보사 ▶ 불암사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4시간(휴식시간 포함)

4. IN: 지하철 4호선 상계역 1번 출구 / OUT: 불암사 ☞ 202번 버스종점에서 6호선 화랑대역으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음.

 

 

 

 

 

* 불암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 삼천사 역사트레킹 지도

 

 

 

 

10월 17일 토요일.

 

이날은 새벽부터 분주했다. 새벽 4시경에 드디어 길고 길었던 프로젝트 하나가 종료됐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아침에 일어나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리딩하러 경복궁역으로 달려갔다. 새벽까지 그림을

그리고 아침에는 트레킹을 하러가니 누가보면 무슨 대단히 바쁜 사람인 줄 알겠다...ㅋ

 

그렇다. 그 프로젝트는 그림 그리기, 정확히는 트레킹 지도 그리기였다. 필자는 <트레킹은 생각창고>라는

브런치북을 간행했었다. <트레킹은 생각창고>에는 총 16편의 트레킹 코스와 그에 해당하는 지도 그림이

그려져있다.

 

지도를 그렸다고 하는데... 보시면 알겠지만 퀄리티가 높은 수준이 아니다. 그래그래 내 그림 솜씨 초딩이다.

그러니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좋겠다.^^ 이전 포스팅에도 언급을 했지만 해당 트레킹의 이동경로를 시각화시켜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차이가 아주 크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다. 하물며 낯선 필드에서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이동을 했는지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아주 예전 원고에서는 지도를 그려넣지 못했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못난 그림 솜씨 때문이었다. 하지만 <트레킹은 생각창고>부터는 큰 맘 먹고 지도를 그려넣기 시작했다. 욕을 하려면 해라~ 뭐 그런 식으로 대차게 나간 것이다. 이렇게 확치고 나갈 때도 있는 법이다!

 

필자가 구식이라 그런지 지도를 수기로 그려넣었다. 집에 굴러다니는 A4 용지에다 볼펜 깍지를 낀 몽땅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다이소에서 구매한 3천원짜리 색연필로 색칠을 했다. 재료비가 거의 안 들었다. 그건 정말 좋았다. 돈 안 들어서...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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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트레킹은 생각창고>는 완료가 됐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16편 가지고는 원고의 절대량이 부족해보였다. 그래서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이라는 브런치 매거진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총 7편의 원고가 들어가 있다.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은 여름에 작성한 원고라 지도를 그려 넣기가 만만치가 않았다. 한 여름에는 팔에 땀이 배겨 A4 용지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고심 끝에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은 원고부터 다 작성하고 지도는 날씨가 선선해지면 몰아서 그리기로 했다. <트레킹은 생각창고> 때는 한 편 작성하면 바로 지도를 그렸던 터였다.

 

역시 일은 묵혀두면 부담감도 함께 쌓인다. 7편의 지도를 몰아서 그리려고 하니 부담감도 생기고 귀찮기도 했다. 그래서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은 지도 없이 갈까 하는 생각까지 들더라. 하지만 일을 시작했으면 완결을 봐야한다. 어차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각오를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매일 하루에 하나씩 지도를 그렸다. 이 지도가 책에 실릴 수 있을지 아닐지... 그저 내 블로그에만 존재하는 지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일단은 접어두고 계속 그렸다. 그게 내 역할이고 내 임무였으니까.

 

결국 10월 17일 새벽 4시경에 마지막 호암산 역사트레킹 지도까지 다 그렸다. 스캔까지 해서 브런치와 블로그에 올렸다. 아주 속이 다 후련하다. 무슨 작품 전시회 같은게 끝난 느낌이다. 오죽 후련했으면 그 새벽 시간에 옥상에 올라가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까!

 

작년 가을부터 이제까지 총 23편의 지도와 원고를 그렸고 작성했다. 만약 코로나 사태가 없었으면 그 정도의 결과물을 생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코로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나?ㅋ 코로나야 썩 물러가라!

 

이제 당분간은 지도를 그릴 일이 없을 거 같다. 한창 시즌이라 역사트레킹도 리딩해야 한다. 지금이 단풍트레킹 하기에 딱 좋은 계절이 아닌가. 소규모로 방역 수칙만 잘 지키면 언택트 시대에도 트레킹은 가능하다. 또 다른 프로젝트도 해야하니까 당분간 지도를 그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슬슬 손이 가려워지겠지. 어쩌면 나도 모르게 보물 지도를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그런 보물지도...ㅋ

 

 

 

 

 

 

 

* 태종이방원역사트레킹: 채색본과 완성본.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7편>

잘 알려지다시피 조선의 건국자들은 관악산의 화기를 두려워했다. 또한 호랑이 기운도 두려워했다. 경복궁과 관악산 사이에 한강이 있었지만 그 걷잡을 수 없는 기운들이 도강을 하여 도성 안으로 미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이번편은 관악산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다. 관악산에 대한 이야기는 <관악산 역사트레킹>편에서 언급을 했었다. 이번편은 관악산의 지산인 호암산에 대한이야기다. 그래서 부제도 <호암산 역사트레킹>이다.

호암산 역사트레킹은 1호선 석수역에서부터 시작한다. 1번 출구로 나오면 1번 국도가 나온다. 이 구간은 경수대로라고도 불리는데 안양시 석수동부터 수원시 권선구 대황교동까지의 거리를 경수대로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참고로 1번 국도는 전라남도 목포에서부터 평안북도 신의주까지 1,068km에 달한다. 남북이 통일되면 1번 국도를 따라 달려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다. 필자도 통일이 되면 큰 배낭에 텐트 짊어지고 북쪽으로 트레킹을 하러 갈 셈이다. 그날이 언제 올까? 하여간 빨리 왔으면 좋겠다.

석수역을 뒤로하면 서울둘레길 표식이 보인다. 여기는 서울둘레길 5코스 관악산삼성산 구간이다. 도보여행자들이 표식을 따라 산으로 향한다. 주택가를 지나면 둘레길 초입이 나오는데 트레킹팀은 좀 더 이동한다. 대한신학대학교라는 곳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무언가를 하고 출발한다. 스트레칭. 많이 걸으니 스트레칭은 필수다.

 

 

* 호암산 잣나무숲: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힐링하기에 딱이다.

● 호랑이 형상을 닮은 호암산

큰 산이라 그런지 관악산은 여러 지산을 거느리고 있다. 호암산도 그 지산 중에 하나다. 그 외에도 삼성산이 관악산의 지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금주산 혹은 금지산으로 불렸던 호암산(虎岩山)은 호(虎)자에서도 보이듯 산이 호랑이의 형상을 닮았다고 한다. 호암산은 서울 금천구의 주산으로 금천구와 관악산에 걸쳐있다. 호암산이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돌산인 관악산의 지산인 만큼 바위가 많다. 해발고도가 393미터라 그리 높지 않지만 곳곳에 펼쳐진 기암괴석들이 산행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저 바위가 무언가 있어 보이네요. 어떤 걸로 보이세요?”

“촛대바위인가요? 길쭉길쭉하네요.”

“길쭉하긴 한데요 촛대바위는 아니에요.”

“그럼 뭐죠...”

트레킹팀의 눈길을 사로잡는 바위가 나타났다. 바로 일명 사랑바위라고 불리는 신랑각시바위다. 신랑각시바위는 남녀 간의 사랑을 이루게 해준다하여 이 일대에서는 무척 유명한 바위로 통한다. 촛대바위처럼 늘씬한 암석 2개가 서로의 몸을 맞대고 입맞춤을 하는 형상이라 사랑바위라는 명칭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아랫부분은 단일 암석이다. 윗부분에 절단면이 생겨 바위가 두 개로 보이게끔 윤곽선이 생긴 것이다.

 

* 신랑각시바위

● 호암산판 로미오와 줄리엣, 신랑각시바위

명칭이 신랑각시바위인 만큼 그 속에 얽힌 이야기도 당연히 러브스토리다. 아랫마을에 선남선녀가 있었는데 그 둘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두 집안은 서로 철천지원수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여자 집안에서는 다른 집으로 시집보내려고 했고, 이에 낭자는 호암산으로 도망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총각은 낭자를 찾아다녔고 지금의 신랑각시바위가 있는 곳에서 낭자를 찾게 됐다. 둘은 서로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고 다짐했고, 그 소원을 달님에게 빌었다. 달님은 그 둘을 영원히 떨어지지 않게 그 자리에 서로를 마주보게 하는 바위로 만들었다.

남녀간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존재한다. 그 이야기들의 상상력은 끝이 없다. 나무에 투영하여 연리지(連理枝)를 그려내고, 상상의 동물인 비익조(比翼鳥)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신랑각시바위는 그런 상상력에 무속신앙까지 더해진다. 그 바위를 보고 간절히 기원을 드리면 선남선녀들이 혼인을 할 수 있고, 거기에 더해 아들까지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랑은 바위조차도 달리 보게 해주는 큰 힘이 있는 거 같다.

참고로 연리지는 뿌리가 각각 다른 나무들의 나뭇가지가 서로 엉킨 것을 말한다. 서로 하나로 엉켜 있어 하나의 나무처럼 보인다. 비익조는 암컷과 수컷이 각각 하나의 눈과 날개만 있는 상상속의 새다. 눈도 하나요, 날개도 하나라 서로 짝을 짓지 못하면 날 수가 없다.

신랑각시바위를 비롯한 많은 바위들은 그 자체로 전망대 역할을 해준다. 이곳에서는 이웃 동네인 경기도 광명시를 비롯해 안양시, 군포시가 내려다보인다. 풍광이 시원시원해서 그런 걸까. 신랑각시바위 옆 전망대를 바라보고 있으면 괜히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어진다. 그리고는 사랑에 빠지고 싶어진다.

* 한우물: 제1한우물이다. 저기서 수영을 하고 싶을까?

● 호암산성과 한우물

이제 트레킹팀은 한우물과 석구상을 향해 간다. 정상부 능선길을 따라 이동하는데 오르막내리막이 있긴 하지만 어렵지 않게 움직일 수 있다. 이 길은 앞서 언급한 서울둘레길 5코스와는 다른 길이다. 서울둘레길이 산 중턱을 따라간다면 ‘신랑각시바위 - 한우물’ 구간은 호암산의 정상부 산마루를 따라 이동한다.

한우물은 호암산성 안에 있는 시설로 제1한우물과 제2한우물로 나뉜다. 호암산성은 호암산 최정상 아래 능선에 쌓은 성으로 길이가 약 1,500미터에 달하는데 마름모꼴로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테뫼식은 산의 테두리를 둘러서 쌓았다는 의미다.

호암산성의 축조 시기는 6~7세기경이었고, 한강유역을 차지한 신라가 쌓았다. 앞서 신랑각시바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호암산 일대에 서면 서쪽 지역들을 관찰하기가 용이하다. 안양천을 따라 펼쳐진 평지는 물론 그 뒤쪽에 있는 광명, 시흥까지 잘 관찰된다. 날씨가 좋으면 그보다 더 먼 서해바다까지 조망할 수 있다. 또한 양천을 비롯한 한강유역도 잘 보이니 호암산성은 한강 서남부의 요충지였던 것이다.

당시 신라로서는 서해바다를 통해 한반도로 침입했던 당나라를 막아내야 했다. 그러니 서해와 한강유역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었던 호암산에 축성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조일전쟁(임진왜란) 시기에도 조선군이 주둔하는 등 이후에도 호암산성의 전략적 가치는 여전했었다.

한우물은 그런 호암산성의 물 공급지였는데 산 정상부에 있는 ‘우물’치고는 상당히 크다. 동서로 22미터, 남북으로 12미터에 달하는데 작은 저수지처럼 보일 정도다. 물이 귀한 산정부에 큰 우물이 있다는 것이 신기해 보인다.

천정(天井)이라고도 불리는 한우물의 최초 축조 시기는 신라 시대로 보고 있다. 현재의 한우물은 조선 초기에 축조된 것인데 신라 시대에 만든 우물 위에다 축을 어긋나게 해서 올려쌓은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제1한우물이다. 제2한우물은 복원이 되지 않아서 그랬는지 자연상태의 늪지처럼 보인다. 석축이 둘러져있지 않으면 그냥 습지로 알고 넘어갔을 거 같다.

* 석구상

● 돌로 만든 개, 석구상

제2한우물에서 조금만 더 가면 돌로 만든 조형물이 있다. 재미삼아 트레킹팀에 물어본다.

“이거 조선시대 때 만든 건데요, 어떤 동물로 보이세요?”

“호랑이요.”

“양인가요.”

“돼지처럼 생겼어요. 돼지에요.”

호랑이에서 돼지까지 나왔다. 하지만 모두 땡.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석구상(石狗象)이다. 돌로 만든 개다.

이 돌로 만든 개는 예전에 해치상으로 오해를 받았다.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관악산 인근에 해치상을 만들어 놓았다는 도읍설화와 관련된 이야기 때문이었다. 아시다시피 해치는 화재와 재앙을 막는 상상의 동물이다.

하지만 이 석구상은 해치보다는 개에 가까운 형상이다. 아무리 해치가 상상 속의 동물이라지만 저런 형태의 해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시흥읍지> ‘형승조’편에도 돌로 만든 개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기록이 있다.

석구상은 집 지키는 개처럼 홀로 외롭게 호암산성 일대를 지키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지킴이 역할을 할 거 같다. 세월의 흔적을 비켜갔는지 석구상은 아직까지도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닳지가 않았다. 개사료 한 알 먹지도 않았는데 길이 1.7미터, 폭 0.9미터, 높이 1미터로 오통통하다. 그 모습이 참 듬직해 보인다.

서술 때문에 탐방 순서를 바꿨는데 호암산성 내에서의 탐방은 아래와 같다.

 

제2한우물 → 석구상 → 제1한우물(불영암)

호암산성 탐방을 마친 트레킹팀은 호압사를 향해간다. 그런 트레킹팀 앞에 울창한 잣나무 숲이 펼쳐진다. 그 길이가 약 1km에 달할 정도다. 워낙 숲이 울창한데다 편의시설까지 잘 갖추어져 있어, 일부러 멀리서도 이 잣나무숲을 보러올 정도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아예 트레킹팀 앞에서 이런 말까지 했었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우리 사실 이 잣나무 숲길 걸으러 온 거에요. 신랑각시바위나 석구상보다 이 숲이 더 좋아요.”

예전에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심어놓은 잣나무들이 이제는 사람들의 힐링을 위해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들은 나무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공짜로 받고 있다. 그러니 나무한테 고맙다는 말 정도는 건네자.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잣나무 삼림욕장에서 몸과 마음을 힐링한 트레킹팀은 이제 마지막 탐방지인 호압사로 향한다.

* 호압사 법고: 호랑이가 깔려있다.

● 호압사에서는 호랑이가 대접을 못 받는다

호압사(虎壓寺)는 호압(虎壓:호랑이를 누른다)이라는 한자어에도 나타나듯이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창건된 사찰이다. 이런 사찰을 두고 비보(裨補)사찰이라고 칭한다. 지형지세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사찰을 세웠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언급했지만 조선의 건국자들은 관악산의 화기와 호랑이 기운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그 기운들을 꺾어야했다. 호랑이는 꼬리를 밟으면 꼼짝을 못한다고 말이 있어 그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호압사를 짓게 한 것이다. 호압사의 법고는 호랑이 등 위에 올려져있다. 법고 밑에 호랑이가 깔려 있는 형상이다. 그렇듯 호압사는 철저하게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기획된 사찰이다.

호랑이가 다른 사찰에 가면 산신각에서 산신령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호압사에서는 대접이 완전히 꽝이다. 그러고보면 호랑이도 번지수를 잘 찾아가야 한다. 아무 곳이나 갔다가는 본전도 못 찾는다.

호압사 탐방을 끝으로 호암산 역사트레킹도 종료가 된다. 기암괴석, 잣나무 숲길, 한우물, 석구상, 호압사의 호랑이 등등... 호암산 역사트레킹과 연관된 키워드가 풍성하다. 이렇듯 호암산 역사트레킹은 아기자기한 멋이 넘치는 코스이다. 가보면 너무나 좋은 곳이다.

* 호암산: 기암괴석들을 만날 수 있다.


■ 호암산 역사트레킹

1. 코스: 신랑각시바위 ▶ 호암산성 ▶ 잣나무숲길 ▶ 호압사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4시간(휴식시간)

4. IN: 지하철 1호선 석수역 1번 출구 / OUT: 호압사 ☞ 호압사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2호선 신림역으로 갈 수 있음.

 

 

 

 

* 태종이방원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6편>

이번 편에는 센(?) 분을 만나러 간다. 부제부터 파워가 느껴지지 않는가? 태종 이방원 역사트레킹이니까!

태종 이방원 역사트레킹은 할미산이라고도 불리는 대모산 일대에서 진행된다. 대모산의 남쪽에서 시작해서 북쪽으로 넘어가 광평대군 묘역에서 종료가 된다. 산을 하나 넘어가는 형태지만 물리적으로 그리 어려운 코스는 아니다. 대모산의 해발고도가 293미터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상을 찍지도 않는다. 역사트레킹은 숲길을 찾아 산을 향해가지만 정상을 찍지는 않는다. 역사트레킹은 등산모임이 아니니까.

태종 이방원 역사트레킹의 첫 번째 탐방지는 헌인릉이 있는 강남구 내곡동이다. 하지만 트레킹팀은 지하철 3호선과 신분당선이 만나는 양재역에서 집합을 한 후 헌인릉행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헌인릉을 가보시면 알겠지만 여기가 강남이 맞나 싶을 정도로 좀 허한 느낌이다. 그 흔한 편의점 하나가 안 보인다. 길이 엇갈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예 양재역에서 함께 모여 이동하는 것으로 정했다. 버스를 약 20분 정도 타고 가는데 차창 밖 풍경이 지루하지 않아서 좋다.

 

● 자식 복이 없었던 정조

주차장을 지나 매표소로 향하는데 홍살문이 보이고 그 너머에 봉분이 보인다. 들어서자마자 태종 이방원이 잠든 헌릉을 마주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곳은 인릉이다. 인릉은 조선의 23대왕인 순조와 그의 부인인 순원왕후의 능이다. 이방원을 만나러왔는데 뜻밖에 인물부터 마주하게 된 것이다. 태강릉을 생각해보시라. 문정왕후가 잠든 태릉을 보러 왔는데 그의 아들인 명종이 잠든 강릉까지 탐방하지 않았던가.

순조는 정조의 차남으로 1790년에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수빈 박 씨였는데 성품이 온화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현빈(賢嬪)이라고 불렸다. 순조는 정조가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는데 그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성군이라 불리는 정조대왕이었지만 자식복은 무척이나 없었다. 총 5명의 부인으로부터 2남 2녀를 얻었는데 그마저도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어려서 죽게 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정비였던 효의왕후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어 후궁인 원빈 홍씨와 화빈 윤씨를 연이어 들이게 된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후사를 얻지 못한다.

그러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의빈 성씨를 후궁으로 맞이하게 된다. 의빈 성씨는 원래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자식같이 대하던 궁녀였었다. 성씨가 정조보다 1살 많았는데 10살 경에 입궁을 했으니 정조와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마주쳤던 것이다. 그러다 나이가 찼고 성숙한 여인으로 거듭났을 것이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선남선녀들이 한 공간에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법이다. 불꽃이 팍팍!

의빈 성씨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그 아들이 문효세자였다. 문효세자는 정조의 첫 번째 자식으로 1782년에 태어났다. 그러나 박복하게도 다섯 살도 안 된 1786년에 홍역을 걸려 요절을 한다. 자식을 먼저 보낸 아픔 때문인지 당시 임산부였던 의빈 성씨도 몇 개월 후에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나마 있던 딸인 옹주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마감한다. 연이어 이어진 부인과 자식들의 죽음에 정조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 인릉 정자각

 

● 농산 스님이 정조의 아들?

1787년(정조11)에 수빈 박씨가 후궁으로 간택된다. 하지만 바로 순조를 낳지는 못했다. 왕위를 계승할 후손이 없었으니 정조는 얼마나 마음이 타들어갔겠는가. 그런 상황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순조의 탄생과 관련하여 주술적인 이야기가 등장한다.

용파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용파 스님은 당시 부과되는 부역이 너무 과하여 불교계가 피폐해지자 이를 타파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오셨다. 학수고대한 끝에 임금을 만났으니 그가 바로 정조였다. 대왕 앞에 나가 자초지정을 설명하니 그 부역을 면하게 됐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걸렸다. 왕위를 이을 왕자를 낳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정조께서는 용파가 보통 승려가 아니었음을 알아보았고 그에게 후사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했던 것이다.

문제가 해결됐지만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임금과의 거래의 산물이니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용파 스님은 이 일이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삼각산(북한산) 금선사에 있는 농산 스님을 찾아갔다. 자초지정을 들은 농산 스님은 금선사에 있는 목정굴에서, 용파 스님은 수락산에 있는 내원암에서 300일 관음기도를 올리게 된다.

드디어 300일이 되던 날이었다. 이날 수빈 박씨는 한 스님이 나타나 음력 6월 18일에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일러주는 꿈을 꾸게 된다. 이때 금선사 목정굴에서 기도를 올리던 농산 스님이 가부좌를 튼 채로 열반에 들게 된다. 마침내 음력 6월 18일이 됐고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왕자 아기씨가 태어났다. 이를 두고 농산 스님이 환생을 하여 수빈 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이 설화로 따지면 농산 스님이 정조대왕이 아들이 된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어쨌든 왕위를 이을 왕자가 태어났고, 금선사에서는 매해 6월 18일에 순조의 탄신제를 올리고 있다. 더불어 금선사와 내원암은 정조 재위 기간에 크게 중창된다.

정조의 자식과 그의 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나열해봤다. 개혁군주였던 정조가 승하하자 조선은 급격하게 퇴보를 하게 된다. 세도정치로 인해 사회는 극심하게 혼탁해지고 민초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 정조대왕이 좀 더 길게 사셨으면...

- 순조가 좀 더 일찍 태어났으면...

 

순조가 11살이 아닌 좀 더 성장한 후에 왕위에 올랐으면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부질없지만 그런 상상을 해본다. 세도세력이 덜 맹위를 떨쳤을 거 같고, 서양 열강들과의 관계도 좀 더 슬기롭게 대처했을... 말 그대로 쓸데없는 역사적 가정인가? 하지만 아쉬운 것은 아쉬운 거다.

* 목정굴: 북한산 금선사에 있는 목정굴. 계곡 옆에 있어 여름철에는 무척 시원하다. 대모산이 아니라 북한산에 있다.

 

● 한 번 옮겨진 인릉

순조가 잠들어 있는 곳에서 그의 탄생이야기를 너무 길게 하였다. 자 이제 순조가 잠들어있는 인릉을 살펴보자. 원래 인릉은 1835년,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장릉(長陵) 곁에 모셔졌었다. 장릉은 인조의 능이다. 그러다 20년 후에 능지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이곳 헌릉 옆으로 천릉(遷陵)하게 된다. ‘옮길천(遷)’자에서도 보듯 천릉은 이장(移葬)을 뜻한다. 그래서 천장(遷葬)이라고도 부른다. 천릉을 해서 그런지 인릉의 비각 안에는 구표석과 신표석 2기가 있다.

인릉은 순조와 함께 정비 순원왕후가 함께 묻힌 합장릉이다. 단릉과 같은 형식이라 단출한 모습을 띄고 있다. 옆에 있는 태종 이방원의 헌릉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차이가 난다. 소박해보일 정도다.

순조가 1834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재위 기간은 34년이나 됐다. 적지 않은 기간이다. 아버지 정조보다 10년이나 더 왕위에 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용상에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왕위는 손자인 헌종에게로 전해졌다.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던 아들 효명세자가 일찍 죽음을 맞이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간단한 퀴즈 하나.

 

“조선 역사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왕은 누구?”

단종이라고 많이 말씀하실 거 같은데 틀린 말이다. 답은 바로 헌종이다. 헌종은 8살 나이에 즉위하였다. 할아버지인 순조보다도 더 어린 나이에 용상에 오른 것이다. 참고로 단종은 12살에 즉위를 했다.

 

* 인릉: 옆에서 본 모습.

 

 

● 진짜 쎈 분을 만나러 간다!

 

이제 진짜 ‘쎈’분을 만나러 갈 차례다. 인릉에서 숲길을 따라 잠깐 걸으면 헌릉이 나온다. 헌릉 홍살문에 가기 전에 이런 멘트를 날렸었다.

 

“이제 진짜 센 분 만나러가니 옷 좀 잘 추스르세요.”

“네?”

“잘못하면 그 분한테 혼날 수도 있으니까요.”

“...”

농담 삼아 이런 말을 했지만 확실히 인릉보다는 헌릉을 탐방할 때 좀 더 긴장을 했던 거 같다. 기가 더 세게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조선 왕 중에서 가장 순(純)했던 왕을 만나고 뒤이어 가장 ‘쎈’ 왕을 알현하니 필자의 몸에서 기가 파도를 치는 느낌이었다.

헌릉은 조선의 3대 왕인 태종과 그의 정비인 원경왕후가 잠들어있는 곳이다. 인릉처럼 봉분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봉분이 나란히 안치된 쌍봉 형태로 이루어졌다. 대신 곡장은 트여있어 두 개의 봉분을 가지런히 감싸고 있다. 곡장은 무덤 뒤에 쌓은 낮은 담을 말한다.

헌릉에 먼저 무덤을 쓴 사람은 원경왕후 민씨였다. 원경왕후는 1420년(세종2)에 이곳에 묻히게 된다. 당시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상태였는데 원경왕후가 이승을 떠난 2년 후인 1422년(세종4)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고 헌릉에 묻히게 된다.

원경왕후는 1398년에 있었던 1차 왕자의 난 때 크게 도움을 주는 등 이방원이 권력을 쟁취하는데 큰 공헌을 한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태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외척세력을 제거하기에 이른다. 이 때문에 원경왕후의 남동생 4명은 죽음을 당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원경왕후도 폐위에 위기에 몰렸다. 트레킹팀에게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연산군 때처럼 세종대왕도 생모가 폐위가 됐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런 가정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요.”

어쨌든 극과 극을 달렸던 태종과 원경왕후는 현재는 나란히 누워 고이 잠들어 있다. 살아생전의 태종의 모습처럼 헌릉은 에너지가 넘쳐난다. 옆에 있는 인릉의 석물들이 소박한 모습이라면 헌릉의 석물들은 기개가 넘치는 모습이다.

* 헌릉: 정자각 방면에서 바라본 헌릉. 뒤로 대모산 정상부가 보인다.

● 원래 세종대왕의 능이 헌릉 옆이었다고?

 

이 헌릉 근처에 원래는 세종대왕도 묻혔었다. 효자였던 세종대왕은 헌릉 서편에 왕비였던 소헌왕후와 함께 합장되었다. 이를 두고 영릉(英陵)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현재 영릉은 경기도 여주시에 자리 잡고 있다. 경강선 세종대왕릉역에 내려서 탐방할 수 있다.

그럼 왜 영릉은 대모산에 있다가 저 멀리 여주땅으로 옮겨갔을까? 세종이 승하한 후 흉사가 연이어 일어난다. 문종이 일찍 숨을 거두고, 단종이 안타까운 일을 당한다.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세조도 그 흉사를 피해가지 못한다. 장남인 의경세자가 20살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모산의 영릉 자리가 나쁘다며 1469년(예종1)에 여주땅으로 천장하게 된 것이다.

헌릉의 서쪽에는 희릉(禧陵)도 있었다. 희릉은 중종의 제1계비였던 장경왕후의 능이다. <태릉 역사트레킹>편에서도 언급됐듯이 장경왕후는 1515년(중종10)에 아들을 낳다 산통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그때 낳은 아들이 인종이다. 인조 말고 인종. 장경왕후 이후 왕비가 된 이는 그 유명한 문정왕후이다. 이후 희릉은 풍수상 안 좋다는 의견이 있어 1537년(중종32)에 고양 서삼릉 능역으로 천장한다.

* 헌릉: 헌릉 바로 옆에서 찍은 모습. 화려한 석물들이 눈길을 끈다.

 

● 조선의 초기와 후기를 동시에 만나다!

 

태종 이방원은 함부로 자신의 옆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것 같다. 순조의 인릉이 들어선 것도 의아할 정도다. 철권 통치자와 유약한 통치자, 서로 잘 어울릴 거 같지 않은 동거를 뒤로 하고 헌인릉을 빠져나왔다.

대모산을 넘어 세종의 5남인 광평대군 묘역까지 탐방을 하면 태종이방원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된다. 이때 대모산 숲길을 걸어가는데 이 숲길도 정말 좋다. 명품 숲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종 이방원 역사트레킹이라고 해놓고선 순조를 비롯한 조선 후기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한 거 같다. 이방원의 네임 파워를 이용해 먹은 것이다. 꼼수를 썼다고 너무 질책하시지는 마시라. 이런 식으로라도 조선 후기 시대를 정리해보고 싶었다.

이렇듯 태종 이방원 역사트레킹에서는 조선 전기와 후기를 동시에 만나볼 수 있다. 또한 할머니 같은 대모산의 숲길도 태종 이방원 역사트레킹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중에 한 가지다. 그러니 안 가면 너무 섭섭할 거에요!

 


■ 태종이방원 역사트레킹

1. 코스: 헌인릉 ▶ 대모산숲길 ▶ 수서동가마터 ▶ 광평대군묘역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4시간(휴식시간 포함)

4. In: 지하철 3호선 양재역 9번 출구 / OUT: 광평대군묘역 ☞ 출발시 ‘헌인릉’행 버스탑승 / 약 15분 정도 소요됨.

 

 

 

 

* 태종이방원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5편>

“에이 그게 말이 되나요? 서울에, 그것도 강남과 가까운 곳에 무슨 지뢰밭이에요?”

필자가 우면산에서 지뢰밭이야기를 하면 항상 저런 반응을 듣게 된다. 이구동성이다. 어떤 참가자분은 필자를 무척이나 한심하게 쳐다보기도 했었다. 무슨 사기꾼 보듯이... 설마 거짓말을 할까. 지뢰밭이 있으니까 있다고 하지.

하긴 필자도 처음에는 설마 했었다. 강남을 품고 있는 우면산에 지뢰밭이 있다는 걸 쉽게 못 받아들이겠더라. 더군다나 아직까지도 미확인 지뢰지대까지 있다고 하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무슨 비무장지대로 트레킹을 하러 가는 거 같다. 우리 강남에 있는 우면산으로 트레킹 하러 가는 거 아닌가요? 강남스타일 트레킹이요!

* 우면산 숲길

● 소가 졸고 있는 모습을 한 우면산

서두부터 참 요란스럽다. 사실 우면산 역사트레킹도 참 재미난 코스다. 위험하지도 않다. 그럼 왜 저런 자극적인 에피소드로 글을 시작했는가? 방심을 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그랬다. 안전 없이 트레킹 없다.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다.

본격적인 트레킹에 앞서 우면산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자. 관암산이라고도 불린 우면산(牛眠山)은 소가 졸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래서인지 동서로 길게 뻗은 모습을 하고 있다. 남태령을 사이에 두고 있는 옆 산 관악산이 해발 632미터인데 비해 동서로 퍼져 있어서 그런지 우면산은 해발이 293미터이다. 관악산의 반도 못 미친다. 하지만 키가 작은 만큼 관악산보다는 오르기가 수월하다.

우면산 역사트레킹은 2호선 방배역 4번 출구에서 집합을 해 그 옆에 있는 청권사로 향한다. 4번 출구와 청권사까지는 약 50미터밖에 떨어져있지 않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첫 탐방지를 만나는 것이다.

* 효령대군 묘역으로 가는 길

● 효령대군을 모신 사당, 청권사

그럼 청권사(淸權祠)는 어떤 곳인가? 청권사는 세종대왕의 둘째형인 효령대군 이보를 기리는 사당과 함께 그와 후손의 묘가 있는 곳이다. 원래 효령대군의 묘는 임산원이라고 불렸었는데 1736년(영조12)에 왕명에 의해 경기감영이 사당을 짓게 됐다. 사당은 다음해에 완성됐고, 청권사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후 1789년(정조13)에 사액된다.

‘청권’이란 이름은 <논어> 미자편에서 유래했는데 ‘신중청폐중권(身中淸廢中權)’이란 말에서 따왔다. 명칭이 복잡한데 그 내막을 알려면 효령대군의 삶을 되짚어봐야 한다.

중국에서 은나라가 쇠락하고 주나라가 흥기할 때인 주나라 태왕 때였다. 태왕은 세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태백, 둘째 우중, 셋째 계력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중 계력이 창(昌)을 낳으니 성군으로서의 큰 자질이 보였다. 이를 알고 첫째 태백과, 둘째 우중은 몰래 도읍에서 빠져나와 멀리 도망간다. 이에 왕위는 셋째 계력으로 전해졌고, 마침내 그의 아들 창에게로 이어졌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 아닌가? 성군의 자질이 가득했던 셋째 아우를 위해 도성을 떠났던 첫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렇다. 세종대왕의 왕위를 위해 도성을 등졌던 효령대군은 주나라 태왕의 둘째 우중에 비견된다. 우중은 이후 청빈하게 살았기에 청도(淸道)에 맞았고, 스스로 왕위 계승을 깨끗이 포기했으니 권도(權道)에 맞았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신중청폐중권’이라 했고, 여기서 ‘청권사’의 명칭이 나온 것이다.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계력의 아들 창은 이후 주나라 문왕(文王)이 된다. 무왕(武王)의 아버지이자 강태공과의 일화로 유명한 그 문왕이다.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를 멸망시킨다.

 

“보세요. 주위는 다 아파트와 건물들인데 효령대군 묘만 녹음을 품고 있습니다. 효령대군 묘가 쉼표를 찍어주는 거 같아요.”

“오, 정말 그런 거 같아요. 쌤, 적절한 표현!”

청권사와 효령대군 묘는 묘지이지만 한편으로는 공원 같다. 유치원 꼬맹이들도 소풍을 올 정도로 효령대군과 그의 후손들은 넉넉하게 주위를 품고 있는 듯하다.

효령대군은 유교 국가 조선에서 불교의 진흥과 보전에 많은 애를 기울이셨다. 우중처럼 어진 성품을 지니고 많은 이들과 두루두루 교류를 하셨다. 불교에 심취했다고 성리학자들이 비판을 하긴 했지만 그런 비판에도 괘념치 않으신 듯싶다. 그렇게 덕업을 쌓으며 살아갔던 효령대군은 크게 장수를 하시다 돌아가신다. 91세에!

* 효령대군 묘: 효령대군 묘를 지키는 문인석. 문인석 뒤로 아파트가 병풍처럼 펼쳐진 모습이 이채롭다.

 

● 봉은사보다도 300년이나 앞서 건립된 대성사

이제 트레킹팀은 반대편 매봉재산으로 향한다. 매봉재산은 우면산의 지산인데 백석대학교 서울캠퍼스 옆으로 난 산책로로 진입할 수 있다. 매봉재산은 동네 뒷산 정도이지만 숲이 울창해서 삼림욕을 하기에 적당하다. 트레킹팀은 남부순환로를 지나 본격적으로 우면산에 진입한다. 트레킹팀 앞에 서울둘레길 표지가 나타난다. 이곳은 서울둘레길 4코스인데 트레킹팀은 대성사로 방향을 잡고 이동한다.

서울 강남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은 단연코 봉은사일 것이다. 어쩌면 조계사보다도 봉은사를 더 익숙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조계사의 일주문을 본 사람들보다 봉은사의 일주문을 본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봉은사가 코엑스 사거리 옆에 위치해 있어 오며가며 바라볼 수도 있으니까. 평지에 있는 사찰의 장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수월한 접근성은 산사가 주는 고즈넉함과는 배치된다. 소음에 시달리고 번잡하고... 우리가 기대하는 사찰은 그런 것이 아니니까.

좀 사설이 길어졌다. 여기 봉은사보다 더 오래된 산 중 사찰이 있다. 트레킹팀의 탐방지인 대성사(大聖寺)가 바로 그곳이다. 봉은사가 794년(신라 원성왕 10)에 연회국사에 의해 창건된 것에 비하여 대성사는 384년(백제 침류왕 1)을 그 기원으로 두고 있으니 무려 400년이나 그 시기가 앞선다. 백제가 충남 공주(웅진)로 천도를 했을 때가 475년이니 대성사는 한성 백제시기의 지어진 사찰인 것이다. 한성 백제시기에 창건된 사찰이 서울 강남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여기 대성사는 무려 1700년 전에 만들어진 사찰이에요. 한국사책에 백제가 불교를 384년에 받아들였다고 적혀있는데요 그때 만들어진 백제 최초의 사찰이에요.”

“그게 정말이에요? 저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요.”

대성사가 백제 최초의 사찰이라는 게 놀라운 게 아니고, 대성사의 존재를 잘 모르는 분들이 대다수였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강남 지역에 거주하시는 분들도 대성사의 존재를 잘 모르셨다는 분들이 대다수였다.

* 대성사

 

● 1700년 전에 창건된 백제 최초의 사찰

 

그러니 대성사에 대해서 더 알아보자. 384년에 중국 동진을 통해서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로 들어온다. 이에 침류왕은 크게 환대하고 왕실에 머물게 했다. 서역과 중국 등 먼 길을 이동하느라 그랬는지 마라난타는 수토병에 걸려 고생을 하게 된다. 지금이야 편의점에서 손쉽게 생수를 사서 마실 수 있지만 예전에는 다른 지역에 가면 물이 안 맞는, 물갈이로 고생한 분들이 꽤나 많았다. 그 수토병이 물갈이다.

그렇게 수토병으로 고생을 했던 마라난타는 우면산 샘물을 마시고 치유가 된다. 이에 우면산에 초당을 짓고 수행을 하니 그곳이 바로 대성초당(大聖草堂)이 됐고, 대성사의 기원이 된 것이다. 그래서 대성사에는 백제 초전법륜성지(初轉法輪聖地)라는 설명이 꼭 따라 붙는다.

이렇게 놀라울 정도의 창건 배경을 가진 대성사지만 막상 그곳에 가보면 좀 허전한 느낌이다. 가람들도 근래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왜 그럴까? 대성사에는 삼일운동 당시 불교계를 대표했던 용성 스님이 계셨던 곳이다. 독립운동에 아지트로 쓰였다는 이유로 일제는 대성사에 불을 지른 것이다. 격노할 일이다. 이후 대성사는 한국전쟁 때 또 한 번 파괴가 되는 아픔을 겪는다.

대성사를 떠나기 전에 침류왕 이야기를 첨언해본다. 불교를 공인한 침류왕은 그 유명한 근초고왕의 손자였다.

근초고왕(재위 346~375) ☞ 근구수왕(375~384) ☞ 침류왕(384~385)

침류왕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재위 기간이 겨우 1년 정도다. 약 30년 가까이 보위에 오른 할아버지 근초고왕에 비해 너무 단명했다. 이와 관련해서 토착신앙을 중시하던 기존의 귀족세력이 불교를 공인한 침류왕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설이 있다. 왕위도 침류왕의 아들이 아닌 동생이 이어받게 된다. 그가 진사왕이다.

 

* 우면산 소망탑

 

● 끝까지 안전하게 트레킹합시다!

대성사를 벗어난 트레킹팀은 이제 우면산 소망탑을 향해서 이동한다. 숲길을 따라가는 길이라 참 좋다. 참나무 숲 구간이 있는데 향이 좋아 오래 머물고 싶을 정도다. 소망탑은 산 정상부 능선에 있어 오르막길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경사도가 아니니 역사트레킹의 취지에 맞게 느릿느릿 걷다보면 어느 순간 도착해있을 것이다.

소망탑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참 시원해서 좋다. 강남의 빌딩숲은 가깝게 보이고 멀리 북한산도 선명하게 보인다. 특히 이 소망탑 전망대는 강남과 가까이에 있어 야경보기 명소 중에 하나다.

소망탑에서 내려와 다시 방배역 방면으로 내려가면 우면산 역사트레킹이 종료된다. 하지만 내려오는 발걸음을 조심하시라! 지뢰밭이 있으니까. 우면산 정상 부근에는 군 기지가 있는데 그곳을 방어하기 위해서 1000여기의 지뢰를 매설했었다. 이후 여러 가지 이유로 지뢰의 효용성이 떨어지자 우면산의 지뢰도 제거가 된다. 하지만 10여기가 미확인 상태로 제거되지 못했다. 2011년도에 있었던 유명한 우면산 산사태로 인해 미확인 지뢰에 대한 공포심이 극에 달하게 됐다.

“지정된 탐방로만 다니시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

 

여러번에 걸쳐 우면산 트레킹을 행한 필자의 의견이다. 우면산에서는 꼭 지정된 곳으로만 다니자. 재밌게 우면산 역사트레킹을 행했으니 끝까지 안전을 지켜야 하는 법! 아울러 1997년 채택된 대인지뢰금지협약에 우리나라와 북한이 동시에 가입하지 않았는데 이참에 가입 좀 하자.

발효된 지 벌써 20년이 넘었는데 남북한은 아직까지도 가입을 하지 않고 있다. 대인지뢰는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는 잔인한 무기이다. 즐겁게 트레킹을 하는데 앞에 지뢰가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 지뢰지대 표시판


■ 우면산 역사트레킹

1. 코스: 효령대군묘(청권사) ▶ 매봉재산 ▶ 대성사 ▶ 우면산소망탑 ▶ 방배역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휴식시간 포함)

4. IN: 지하철 2호선 방배역 4번 출구 / OUT: 방배역 1번 출구 ☞ 우면산에서 다시 방배역으로 회귀할 수 있음.

 

 

* 우면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4편>

처음 남산 역사트레킹 코스를 기획했을 때가 기억난다.

‘다른 좋은 곳도 많은데 굳이 남산까지 할 필요가 있나...’

서울사람들에게 남산은 너무 당연한 곳이다. 너무 당연하다보니 서울 사람들은 굳이 남산을 찾아가지를 않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지방이나 외국여행객들은 서울에 와서 63빌딩, 한강 유람선, 남산타워를 필수적으로 여행한다. 그래서인지 남산 역사트레킹을 행한다고 공지했을 때 이런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남산 뻔하지 않아요? 거기에 트레킹을 할 만한 곳이 있어요?’

그 뻔함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려고 열심히 답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연한 곳치고는 꽤 많이 사전답사를 했었다. 그 노력이 통했을까?

*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중심부: 가까이는 북악산이 보이고, 멀리는 북한산이 보인다.

● 목멱대왕 남산

조선시대 남산은 목멱산(木覓山)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었는데 그 외에도 인경산, 종남산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남산은 키가 작은 산이다. 해발 265미터 정도이니 내사산(內四山) 중에서 세 번째로 작은 산이다. 복습해보자. 북악산(338미터), 인왕산(338미터), 남산(265미터), 낙산(125미터) 이중에서 남산이 뒤에서 두 번째다.

그렇게 야트마한 산이지만 남산은 조선시대 때 무척 귀한 대접을 받았었다. 궁궐에서 임금님이 보고 있는 산이라 하여 함부로 건물도 짓지 못하게 하고, 나무도 베지 못하게 했다. 그에 더해 목멱대왕(木覓大王)이라는 벼슬까지 내려진다. 해당 산의 산신령에게 관직을 주며 도성을 방어하라는 뜻이었다. 산신령을 도성방어에 끌어들이다니... 판타지 같은 소리인가? 산을 귀하게 여겼던 우리의 산악신앙은 유교 국가인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당시 북악산도 진국백(鎭國伯)이라는 작위를 받게 된다. 백(伯)이라고 하면 백작이다. 경복궁의 뒷산인 북악산에게는 제후의 작위를 준 것이다. 제후의 서열을 나눈 오등작은 이렇다.

공작 > 후작 > 백작 > 자작 > 남작

북악산의 지위와 비교해보면 ‘왕’ 칭호를 받은 남산이 얼마나 귀하게 대접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소중하게 관리를 한 곳이라 그런지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잘 조성될 수 있었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애국가 가사에 나올 정도로 남산의 소나무는 우리민족의 정기를 담아내는 하나의 표상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남산의 소나무들은 수난을 당하게 된다. 소나무를 함부로 잘라내고 그 자리에 아카시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이렇듯 남산은 일제강점기 때 엄청난 수난을 당하게 된다. 그 시초는 구한말로 올라간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 정부는 일본인 거류지로 남산 일대를 지정해주는데 궁궐에서 한 치라도 먼 곳을 지정하려고 그랬던 것이다. 그렇게 남산 일대는 일본인들이 자리를 잡게 됐고, 결국에는 조선 신궁도 만들어지게 된다.

 

* 남산의 야경

 

● 남산에도 둘레길이 있다

자 이제 길을 나서자. 복원된 ‘남산 위의 저 소나무’를 만나러가자. 남산 역사트레킹은 6호선 버티고개역에서부터 시작된다. 버티고개역이라는 명칭에도 나타나있듯이 트레킹팀이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버티고개이다. 버티고개는 그동안 차로로 끊겨져 있다 2012년 5월에 생태통로(생태다리)로 복원되었다. 버티고개와 관련된 이야기는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편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이제 트레킹팀은 국립극장을 앞을 통해 드디어 남산에 들어선다. 이때 트레킹팀 앞을 남산순환버스가 지나가고 있다. 어떤 분이 농담 삼아 이런 말을 하신다.

“저 버스 잡아타고 갈까요? 아니면 케이블카?”

“아니오. 버스나 케이블카보다 더 좋은 남산둘레길을 따라 갈 겁니다!”

그렇다. 남산에도 둘레길이 있다. 2015년 11월에 개통된 남산둘레길이 바로 그곳이다. 기존에 있던 북쪽 순환로와 남쪽 숲길을 연결하여 총 7.5km의 도보여행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북측 순환로는 아스팔트 포장이 된 곳을 걷기에 큰 공원을 걷는 느낌이라면, 남쪽 숲길은 말 그대로 숲길을 걷는 코스다. 서울중심부인 남산에 울창한 숲길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그래서인지 트레킹팀은 이구동성으로 이런 반응을 보였다.

“어, 남산에 이렇게 멋진 숲길이 있었어요? 우리가 아는 남산이 아니었어!”

남산둘레길은 북쪽 순환로 구간보다는 남쪽 숲길 구간이 걷기에도 좋을뿐더러 휴식 공간도 더 넉넉하다. 팔도소나무 단지와 야외식물원 등 볼거리도 풍성하고, 관악산 방면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도 있어서 좋다.

* 성곽과 소나무

 

● 성곽과 소나무

남산둘레길은 완경사라 초보자들도 어렵지 않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그렇게 한들한들 걷다보면 어느새 정상부에 다다른다. 그리고 앞에 나타난 성곽길을 보며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성곽 앞에 소나무 숲이 펼쳐지는데 그 모습에 감탄사가 나온 것이다.

“남산에 이런 소나무 숲이 있었어요? 성곽하고 소나무하고 너무 잘 어울려요!”

“그렇죠. 여기는 남산이 숨겨놓은 소나무 숲 같아요. 성곽하고 소나무하고 이렇게 잘 어울린답니다.”

성곽 바깥쪽에 소나무를 일정 간격으로 심어 솔밭을 만든 구간이다. 아래쪽에는 맥문동을 심어 운치를 더했다. 맥문동이 개화하는 여름철에 이 소나무 성곽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풍류객으로 변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몇 해 전 여름이었다. 소나기가 지나간 자리를 트레킹팀과 함께 걷고 있었다. 남산도 산이라고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물안개를 머금고 있는 푸른 소나무와 보랏빛을 뽐내고 있는 맥문동꽃, 그리고 그 뒤를 병풍처럼 지키고 있는 성곽이 어우러진 모습이란...! 트레킹팀은 무슨 사극이라도 찍는 느낌이었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를 물안개하고 성곽길하고 같이 만나네요.”

“쉿! 강사님 운치 깨지 말고, 쉿!”

그렇다. 풍류를 즐기는 걸 방해하면 안 된다. 분위기 파악을 했어야했는데... 참고로 남산에는 태조 이성계 시대에 쌓은 석성(石城) 구간이 아직 남아있다. 태조 시기 한양도성은 토성(土城)이 70%였고, 석성이 30% 정도였다. 태조 시기에는 자연석을 거의 다듬지 않고 그대로 쌓아올려 성돌이 무척 거칠다. 한양도성이 전부 석성으로 바뀐 시기는 세종 때였다.

 

* 성곽과 소나무: 비 온 후의 모습

 

 

● 국사당과 봉수대

이제 국사당(國師堂)이 있던 자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국사당은 <인왕산 역사트레킹>에서 언급했으니 따로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 옛 국사당 자리는 지금 남산 팔각정 자리다. 마치 이곳이 한국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한국 사람들보다 더 많은 외국인들이 보인다. 남산이 외국인들의 필수 관광 코스임을 다시 한 번 느낀다.

팔각정 옆으로는 복원된 봉수대가 보인다. 경봉수(京烽燧)라고도 불린 남산 봉화는 매일 병조에 보고될 정도로 무척 중요한 통신 수단이었다. 적의 위협에 따라 하나에서 다섯까지 횃불을 올렸는데 정리하면 이렇다.

하나: 이상무

둘: 적이 나타남

셋: 적이 국경에 접근함

넷: 적이 국경을 침범함

다섯: 전투가 벌어짐

 

* 남산 팔각정: 옛 국사당 자리임.

 

 

● 서울 한복판에 제갈공명?

정상부에서 내려온 트레킹팀은 이제 북쪽 순환로를 따라 걷는다. 북쪽 순환로는 폭이 넓어서 좋기는 하지만 흙길이 아니라 걷는 맛이 좀 떨어진다. 이건 필자의 의견이 아니라 트레킹팀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렇게 걷다보면 남산한옥마을로 빠질 수도 있는데 트레킹팀은 와룡묘(臥龍廟)까지 가본다. 와룡묘라고 하니까 이런 질문들이 나온다.

“와룡묘요? 와룡묘라 하면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의 무덤이이에요?”

딩동댕~땡!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와룡이 제갈공명이라는 건 맞는 말이지만 무덤은 아니고 사당이다. 한자를 보시면 무덤묘가 아니라 사당묘(廟)다. 그렇다. 남산의 북서쪽에는 제갈공명을 기리는 와룡묘가 있다. 와룡묘에는 제갈공명과 함께 관운장의 석고상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단군상과 삼성각도 있다. 그러고 보면 와룡묘는 중국의 도교신앙을 한국스타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 서울 한복판에 왜 와룡묘가 있는 것일까? 와룡묘는 고종의 후궁이었던 엄귀비(순헌황귀비)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존의 질서체제가 뿌리째 흔들렸던 구한말, 사람들은 마음 둘 곳을 찾아야했다. 중국의 신령들까지 끌어올 정도로 당시는 다급했던 것이다. 와룡묘는 1924년에 큰 불로 소실됐던 전각들을 1934년에 복구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갈공명은 맹격(盲覡)이 숭상하는 신이다. 맹격은 눈이 먼 무당들을 말한다. 그래서인지 북쪽 순환로에는 눈이 불편한 분들을 자주 뵙는다. 아마도 와룡묘에 치성을 드리러 가시는 분들일 거다.

이렇게 하여 남산 역사트레킹이 종료됐다. 서울사람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남산. 외국인들도 가는 그 길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안 가면 너무 섭섭하지 않은가. 그러니 당연히 가봐야 하는 거다.

 

 

* 와룡묘


■ 남산 역사트레킹

1. 코스: 버티고개 ▶ 남산둘레길 ▶ 소나무숲(성곽길) ▶ 팔각정(옛 국사당) ▶ 와룡묘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휴식시간 포함)

4. IN: 지하철 6호선 버티고개역 3번 출구 / OUT: 와룡묘 ☞ 와룡묘에서 소파로(돈가스거리)로 내려와 명동역 방면으로 이동할 수 있음.

 

 

 

 

* 남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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