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객' 퇴계 이황 선생이 이름 붙여준, 수승대


경남 거창 '수송대'를 '수승대'로 바꾼 퇴계 이황


16.03.21 15:50  최종 업데이트 16.03.21 15:50
    
곽동운(artpunk)            


    




이런저런 이유로 속세의 근심이 밀려올 때, 우리는 도피처를 찾아갑니다. 수려한 자연 속에 자신을 맡기며 잠시나마 세상 시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신선들이 산다는 무릉도원에서 시름을 달래면 좋겠지만 현실세계에서는 그 곳을 갈 수 없으니 '대타'를 찾아야겠지요. 여기 무릉도원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세상 시름을 달래며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가 어디냐?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에 위치한 '수승대(搜勝臺)'라는 곳입니다.





 
▲ 수승대 수승대 거북바위. 여름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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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의삼동이라고 불렸던 수승대 계곡

수승대는 널찍한 바위와 그 옆을 흐르는 맑은 물, 푸른 숲이 어우러져 일품 풍광을 자랑합니다. 그 물의 발원지는 덕유산이랍니다. 물과 바위와 숲이라... 그렇습니다. 수승대는 계곡 한복판에 있습니다. 정확히는 거북바위를 말합니다.


원학동(猿鶴洞)계곡이라고도 불리는 수승대는 거창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한 곳입니다. 거창을 방문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꼭 들러야 하는 곳이 바로 수승대라는 뜻이죠. 원학동 계곡은 함양의 화림동(花林洞) 계곡, 용추계곡이라는 명칭으로 더 유명한 심진동(尋眞洞) 계곡과 더불어 안의삼동(安義三洞)이라고 불렸습니다. 원학동, 화림동, 심진동이 안의 지방의 3대 계곡이라는 뜻입니다.


안의는 현재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으로, 면 단위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안의현이라 불리며 함양, 거창과 함께 그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합니다. 이후 행정구역이 개편됐고, 그래서 현재 수승대는 거창군 소속이 된 것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류를 논할 때, 흔히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여기서 '우 함양'을 '우 안의'로 바꿔도 될 만큼 안의 지역은 풍부한 선비문화를 창달했던 곳입니다. 수승대가 안의삼동이었던 만큼 수승대도 선비 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라는 건 자명한 일입니다. 그 명칭을 둘러싼 이야기부터 아주 선비적(?)이었답니다.






 
▲ 수승대 구연교. 이 다리를 이용하여 계곡 반대편, 요수정으로 넘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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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승대의 옛 이름 '수송대'

수승대의 옛날 명칭은 수송대(愁送臺)였습니다. 한자를 풀어보면 근심 수(愁), 보낼 송(送), 돈대 대(臺)입니다. 한자에서도 보이듯 수송대라는 명칭은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습니다. 보낼 송(送)자에서 보듯 '근심을 떨쳐낸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죠.


근심을 잊으려면 잊을 망(忘)를 썼겠지요. 풍류를 즐기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이는 이 아름다운 장소에, 왜 '근심'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명칭에 드리워져 있었을까요? 무슨 이유로?


원학동 계곡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였습니다. 백제는 나날이 쇠락해졌고, 반대로 신라는 점점 더 강성해질 무렵이었습니다. 백제 사신들은 신라 조정에 가서 수모를 당합니다. 심지어는 목숨을 잃고 영영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먼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술 한 잔 건네며 위로해 주었던 곳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국경과 가까운 곳에 풍광이 수려한 곳이 있으니, 그 곳에서 마지막(?)을 잘 챙겨 보내주었다는 것이죠. 그곳이 바로 수송대라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일대에서 백제와 신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갔다는 사실입니다. 원학동에서 동쪽으로 약 8㎞ 떨어진 곳에 거열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 산 정상부근에는 거열성이라는 산성이 있습니다.


삼국시대 말기, 거열성은 신라군에 의해 함락되기도 했고, 이후에는 백제 부흥 운동이 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일대는 백제와 신라의 격전장이었습니다.


그렇게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하지만 거북바위는 그 이후로도 약 천 년 동안 수송대라고 불리게 됩니다.





 
▲ 구연서원 거북바위 옆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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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류객(?) 이황이 지어준 '수승대'라는 이름


거북바위가 수승대(搜勝臺)라는 현재의 명칭을 얻게 된 건 퇴계 이황이 지은 시 한 수 때문이었습니다. 그 시를 수취한 이는 요수(樂水) 신권(愼權)이라는 분이었습니다. 신권 선생은 일찍부터 벼슬길을 마다하고 원학동 일대에서 후학들을 양성했습니다. 거북바위 옆쪽에 구연재(龜淵齋)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이를 두고 구연서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관수루라는 멋진 문루를 두고 있는 구연서원은 이후 구연서당 자리에 들어선 것입니다. 계곡의 반대편에는 요수정이라는 정자도 지었는데 요수정에 오르면 거북바위를 정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연과 학문을 벗 삼고 있던 신권 선생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안의지역을 유람하던 퇴계 이황 선생이 원학동을 방문하겠다는 전갈이 당도한 것입니다. 신권 선생은 요수정에서 한 상 차려 놓고 반가운 이의 발걸음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라는 퇴계 선생은 오지 않고, 편지 한 통이 전해지게 됩니다. 왕의 부름 때문에 급하게 한양으로 떠나야 했던 퇴계 선생이 보낸 서찰이었습니다. 그 서찰에는 원학동을 방문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은 시 한 수가 적혀 있었습니다.





 
▲ 수승대 사진 오른편에 요수정이 있다. 소나무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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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에서 퇴계 선생은 어감이 좋지 않은 '수송대'를 '수승대(搜勝臺)'로 고치라고 권유합니다. 한자를 거칠게 풀어보면, '찾아다녔던 뛰어난 곳' 정도로 쓰일 수 있겠네요. 발음도 비슷하니 못 바꿀 이유도 없었겠지요. 그렇게 하여 거북바위는 퇴계 선생 덕분에 천 년 동안 간직해오던 부정적인 이름을 떨쳐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풍류를 즐기기에 딱 좋은 장소에 어울리는 '풍류 스토리텔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이야기를 입증이라도 하듯 거북바위에는 퇴계 선생의 시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외에도 거북바위에는 수많은 풍류객들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갔습니다.


이제 완연한 봄입니다. 소풍 가기 딱 좋은 계절이 다가온 거죠. 우리도 옛날 선비들처럼 산천이 수려한 곳에서 풍류를 즐겨볼까요? 근심을 떨쳐 보낼 수 있고, 찾아다녔던 멋진 곳인, 수승대에서 말이죠.





* 거북바위







■ 도움말

1. 서울에서 거창까지는 고속버스로 약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됨. 남부터미널이나 동서울터미널에서 거창행 버스를 탈 수 있음.


2. 거창읍내에서 수승대가 있는 위천면 면소재지까지는 시골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음. 면소재지에서 수승대까지는 걸어서 약 10분 정도 소요됨.


3. 거창읍내-위천면 시골버스 이동시간은 약 15분 정도임. 배차간격은 약 30분 정도임.


덧붙이는 글 | http://blog.daum.net/artpunk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삼천포로 빠졌더니... 기대 이상입니다 2편

사량도 행 배 놓치고 간 신수도... 남일대 코끼리바위 등 볼거리

 

 

 

 
▲ 신수도 바다낚시로 유명한 신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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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꿩 대신 닭'으로 택한 신수도... 하지만 꿩 이상이네


신수도(新樹島). 솔직히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래서 큰 기대도 안 하고 매표를 했다. '꿩 대신 닭'이라는 속담처럼, 그저 배 삯이 저렴한 '닭'이라고 생각하고 승선을 한 것이다.

인생도 그렇지만 여행에도 정답은 없다. 사람이 스케줄대로 살 수 없듯이 여행도 일정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한편 여행 일정이 틀어졌다고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빗나간 일정 와중에 생각지도 못한 보석을 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신수도의 방문이 그랬다. 만약 그날 신수도를 방문하지 않았다면 이 여행 기사도 쓰이지 않았을 것이다.

사천시 동서동에 속해있는 신수도는 면적이 1.0㎢로 여의도의 8분의 1일에 지나지 않는 작은 섬이다. 이렇듯 섬이 작아서 그런지 신수도는 무척 아담했다. 삼천포항에서 겨우 2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관광객들로 북적일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런 것이 신수도의 매력일지 모른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아 한적하게 섬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곳이 신수도였기 때문이다. 신수도는 큰 마을인 신수와 작은 마을인 대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두 곳을 연결하는 해안도로가 잘 닦여 있어 섬일주 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이었다.

 

 

 

 

 

 

▲ 신수도 신수도 방파제에서 낚시하는 낚시꾼들. 뒤로 보이는 다리는 삼천포대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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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수도 트레킹을 하다 보면 삼천포 일대에 펼쳐진 한려해상의 멋진 풍광들을 시원하게 관망할 수 있다. 왼쪽으로는 남해군과 연결된 삼천포대교, 북쪽으로는 삼천포 시내 일대, 오른쪽으로는 두둥실 떠있는 한려해상과 그 섬들.

신수도는 섬 트레킹 이외에도 바다낚시로 유명한 곳이다. 트레킹을 하다 보면 섬 곳곳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강태공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섬 서편에 있는 신수항 방파제는 낚시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곳이다. 신수항 방파제는 테라포트가 없어 보다 안전하게 낚시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수도 트레킹은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다. 삼천포-신수도간 여객선이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사이의 간격을 두고 운항되니 시간을 잘 맞추면 기다리는 시간 없이 바로 삼천포항으로 나올 수 있다.

 

 


 

 
▲ 남일대 해수욕장 남일대 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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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을 마시는(?) 남일대 코끼리바위


'꿩' 이상의 역할을 해준, 신수도 섬 일주를 마친 후 삼천포항 어시장을 탐방했다. 섬 일주로 기분이 상쾌해지니 얄밉게 보이던 갈매기들도 예뻐 보였다. 마침 어시장 일대에는 삼천포 수산물 축제가 한창 열리고 있었다. 싱싱한 수산물과 다양한 해상체험이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어시장 탐방을 마친 후 남일대 해수욕장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유명한 코끼리 바위를 보기 위해서 이동을 한 것이다. 코끼리바위는 우리나라에 여럿이 있다. 그 중 제일 유명한 건 울릉도에 있는 코끼리바위다. 통상 코끼리바위는 해안가나 섬에 분포되어 있는데 가파른 기암절벽이 오랫동안 파도와 해풍을 만나 절묘한 코끼리 형상으로 풍화된 것을 말한다.

 

 

 
▲ 코끼리바위 멀리서 본 코끼리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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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대 코끼리바위는 다른 코끼리바위들보다 접근성면에서 경쟁력(?)이 있다. 삼천포어시장에서 도보로 30분 정도만 걸어가면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천포시외버스터미널에서도 3k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아 택시를 타고 이동해도 부담스럽지가 않다.

바닷물을 다 마실 듯 큰 코를 드리운 형상의 남일대 코끼리바위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다. 멀리서 본 형상과 가까이에서 본 형상이 다르므로 기회가 된다면 꼭 근접해서 관찰하시길 권한다. 전형적인 판상절리(板狀節理) 지형이 풍화에 의해 해식아치(sea arch)를 이룬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재미가 상당하다. 그때 코끼리바위 인근으로 유람선이라도 지나간다면 손을 한 번 흔들어 주며 소리쳐 보자. 여기 남해바닷물을 마시는 코끼리가 한 마리가 있다고!  

 

 

 

삼천포의 매력에 풍덩하고 빠지다


삼천포항 수산물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져 볼까요?'

부정적인 말도 재치 있게 받아 넘기는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바로 삼천포 사람들이다. 실제로 삼천포를 방문해 본 사람들은 삼천포의 매력에 풍덩하고 빠질 수밖에 없으니 그런 여유가 있을 수밖에... 필자도 그 사람 중 한 명이다.

'삼천포로 빠졌더니, 삼천포의 매력에 풍덩 빠졌습니다!'

 

 

 
▲ 코끼리바위 가까이에서 본 코끼리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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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말

 

1.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삼천포터미널까지 고속버스로 약 4시간 정도 소요된다.

2. '신수도 섬 일주 ▶ 삼천포어시장 ▶ 풍차공원 ▶ 남일대해수욕장 ▶ 코끼리 바위'를 묶어 도보여행을 할 수 있다.

3. 삼천포터미널에서 신수도행 선착장까지는 3km 남짓이므로 택시를 타도 부담이 없다. 마찬가지로 코끼리바위가 있는 남일대 해수욕장에서 터미널까지도 3km 정도다.

4. 시간을 잘 맞춘다면 당일치기 '삼천포 트레킹'을 할 수도 있다. 서울에서 한려해상까지 가, 당일로 섬과 해안가 트레킹을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라고 합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삼천포로 빠졌더니... 기대 이상입니다 1편

 

사량도 행 배 놓치고 간 신수도... 남일대 코끼리바위 등 볼거리

 

 

14.10.07 10:28 최종 업데이트 14.10.07 10:28

 

 

 

 

 

오래 전, 고등학교 때 일이다. 국어 선생님께서 수업 도중에 하소연을 하듯 목소리를 높이신 적이 있었다. 국어 선생님은 현직 수필가셨는데 자신이 발표한 에세이를 보고 삼천포 사람이 전화를 해서 강하게 항의를 했다며 운을 떼셨다.

"내용 중간에 있는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졌다'라는 표현이 거슬렸다는 거야. 그런데 그 에세이는 그냥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어. 사람과 사람의 관계. 특정 지역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없었다니까."

평소에는 좀 무뚝뚝하고 말소리가 작아, '졸음 대마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선생님이셨는데 그때만큼은 목소리에 강력한 '포스'가 방출되고 있었다. 그 항의 전화 때문에 심기가 무척 불편하셨던 것이다.

 

 

 


 
▲ 신수도 아름다운 신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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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때 필자는 삼천포가 어디 붙어 있는 줄도 몰랐다. 대신 '잘 나가다 삼천포로 빠진다'라는 말의 뜻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쨌든 선생님은 수업시간 내내 목소리를 높여 자신의 정당함을 역설하셨고, '수면보충'시간이었던 국어시간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수면보충 시간은 날려 버렸지만 그날 교훈을 하나 얻었던 셈이다. 나중에 삼천포에 갈 일이 있으면 이 말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으니까. 

 

 

 

 


헬리콥터도 타보고... 정말 잘 나갔다

 


지난 9월 26일. 그날 필자는 상당히 잘 나갔다(?). 난생 처음 헬리콥터를 타 봤기 때문이다. 경남 사천에 있는 한 항공기제작 업체에 초청되어, 국산 수리온 헬기에 시승했던 것이다. 예전부터 헬리콥터는 꼭 한 번 타보고 싶었는데 그 기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일반 비행기(고정익)는 여행 가느라 몇 번 타봤지만 헬리콥터(회전익)는 타 본 적이 없었다. 그럴 기회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사실 일반 시민들이 헬리콥터를 쉽게 탈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헬기 탑승은 필자의 '버킷 리스트' 중에 하나였다. 오죽했으면 군대에서 헬기 강습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부러워했을까!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헬리콥터를 타게 됐으니 '잘 나갔다'고 할 만하지 않은가?

버킷 리스트를 하나 해냈다는 기쁨을 뒤로 하고 그날 오후 삼천포로 향했다. 다음날 삼천포항에서 출발하는 사량도행 여객선을 타기 위해 미리 이동을 한 것이다. 사천시내에서 삼천포항까지는 약 20km 정도 떨어져 있다.

 

 

 
▲ 신수도 신수도항에서 경남 남해군 방면을 바라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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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포(三千浦)의 유래가 된 물길 삼천(三千)리

 


삼천포(三千浦)의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자. 삼천포의 근간이 된 삼천(三千)은 '물길 3000리'를 뜻한다. 고려 성종시대에 이 지역에 수세미 수취를 위한 통양창이 설치됐는데 개성에서부터 통양창까지 거리가 물길로 무려 3000리였다는 것이다. 개성에서 삼천포까지 직선거리는 약 400km 남짓이기에 육로로는 1000리 정도 되지만 남해안 일대와 서해안을 타고 가야 하는 조운로는 그보다 훨씬 더 먼 3000리였다. 그렇게 조운로의 물리적 거리가 삼천포의 유래가 됐다.

이후 삼천포는 진주, 고성, 사천 등 인근 여러 지역에 통합되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러다 1956년 시로 승격해 삼천포시가 된다. 하지만 1995년에는 사천군과 삼천포시가 합쳐져 통합 사천시로 행정개편이 이루어졌다.

삼천포에서 출항하는 사량도행 여객선을 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구 터미널에서 오전 6시(하계기준)에 출발하는 배편이 있고, 삼천포 신항에서 출항하는 오전 7시(하계기준) 배가 있다. 구터미널과 신항은 도보로 약 20분 정도 거리에 있다. 배편도 확인했으니 이제 다음날 사량도에 갈 일만 남았다.

'환상의 섬이라는 사량도에 가서 지리산에 오르는 거야. 내일 날씨도 무척이나 좋다는데 사량도 지리산에 올라가서 내륙에 있는 지리산을 바라보는 거야! 그럼 섬 지리산에서 내륙 지리산을 보는 거잖아. 정말 멋지겠군!'

 

 


 
▲ 신수도 신수도는 섬 일주 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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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꿎은 '삼천포'에게 화풀이를 해대다

 

9월 27일. 배를 타지 못했다. 배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늦잠을 잤더니만 배 시간을 놓친 것이다. 다음날 일정이 있어 그날 다시 서울로 상경을 해야 했기에 다음 배를 타기에는 무리였다.

'정말 잘 나가다... 첫날 헬기 탄 걸로 만족하고 그냥 바로 서울로 올라갔어야 했나...'

자신의 게으름은 모른척하고 애꿎은 '삼천포'에 화풀이를 한 것이다. 일기예보대로 날씨는 무척이나 청명했다. 바닷바람도 상쾌했다. 하지만 필자는 길을 잃은 사람처럼 안절부절 못하며 어시장 일대를 왔다 갔다 했다. 분위기 파악 못하는 갈매기 몇 마리가 새우깡을 달라는지 필자의 머리 위로 왔다 갔다 했다.

"이 배 어디로 가는 배예요? 혹시 사량도 가나요?"
"아니요. 이 배는 신수도 가는 배예요."
"신수도요? 거기가 어딘데요?"
"저기 바로 앞에 보이는 섬이에요. 여기서 10분밖에 안 걸려요."

어시장 근처에 풍차공원이 있어 그리로 향하다 항구 한 편에 정박해 있던 작은 여객선을 봤다. 이것저것 물어보니 신수도라는 섬을 오가는 배편이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섬이나 구경하고 가야겠다. 배 삯도 2천원 밖에 안 하니까...'

 

 

 

 

 

 

 

 삼천포와 관련된 기사를 작성해서 <오마이뉴스>에 송고했습니다.  뭐 여행섹션에 걸리면 좋겠다 싶었는데 전체 메인 기사에 걸리게 됐네요! 그런데 그 오마이뉴스기사가 다음 메인에도 걸렸네요. 다음 서브 메인에는 몇 번 걸린 적이 있었는데  탑메인에는 처음 걸려봅니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메인만 두 개가 걸렸네요~

 

앞으로도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겼으면 합니다! 여러분들도 좋은 일들이 가득하시길~!

 

 

 

 

 

 

 

 

 

 

 

 

 

차례상 사과의 붉은 빛깔, 이렇게 만들어진다 2편

일조량 높이기 위해 잎따기 작업도... 온 몸에 파스를 붙이며 한 사과 출하

 

14.09.08 16:37
최종 업데이트 14.09.08 16:37

 

 

 

 

---> 전편에 이어서

 

 

 

# 잎사귀 따다가 사과를 날려 먹기도...

색깔이 안 난 건 일조량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8월의 뜨거운 햇살이 스며들어야 백설공주가 먹었던, 그 빨간 사과처럼 홍로가 붉은 색을 띤다. 하지만 올해 8월은 일조량이 적었고, 그만큼 사과에 붉은 기운이 들지 않았다. 이런 '색깔의 문제' 때문에 농장주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떤 농장주는 하늘을 원망하기까지 했다.

색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농장주들은 갖은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색깔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뭐니 뭐니 해도 강한 햇살이 최고다. 하지만 그건 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그래서 '잎따기'를 해준다. 사과 주변에 달려있는 잎사귀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무성하게 감싸고 있는 잎사귀들을 제거함으로써 사과에 직접 도달하는 햇볕의 양을 높여주는 것이다.

 

 

 

▲ 홍로 색이 잘 든 홍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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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따기는 매해 수확에 앞서 꼭 진행되는 작업이다. 하지만 올해는 잎따기가 더 강화됐다고 한다. 색깔이 안 났던 만큼 잎사귀 제거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그런 잎사귀 제거가 필자의 첫 번째 사과작업이었다.

햇살을 더 잘 받도록 하기 위하여 열심히 잎사귀들을 제거했다. 그러다 애꿎은 가지도 몇 개 '제거'했다. 또한 알이 굵은 멀쩡한 사과들도 날려먹었다. 농장주의 시선이 싸늘했다. 

 

 

# 사과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색깔이 안 났다고 사과 따기를 계속 미룰 수는 없는 법! 농장주들은 8월 마지막 주를 기점으로 사과수확에 나섰다. 이제 고제면은 면 전체가 사과 수확에 매달리게 됐던 것이다. 필자는 매일 아침 마음을 다잡고 사과밭으로 향했다.

"열심히 일해서 사람들한테 누를 끼치지 않겠어. 내 명예를 지키겠어!"

하지만 저렇게 아침마다 한 다짐은 밤이 되면 달라졌다. 허리와 팔에 붙인 파스를 갈며 조용히 혼자말을 했다.

'내일 비가 왕창 와서 작업이나 취소됐으면...'

그만큼 사과 작업은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매일밤 숙소에 돌아와 허리와 팔다리를 주물러야 했을 정도로 고된 일이었다.

사과수확 작업에서 가장 고역이었던 건 컨테이너 박스를 옮기는 일이었다. 일단 사과나무에서 딴 사과는 일괄적으로 컨테이너 박스에 담기게 된다. 그렇게 쌓인 컨테이너를 화물차에 적재시키고 선별장으로 향했다. 선별장에서는 선별을 위해 컨테이너를 잘 쌓아 놓았다.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계속 컨테이너를 상차, 하차하는 것이 내 임무였던 것이다.



 

 

 

▲ 컨테이너 저 노란색 박스를 컨테이너라고 부른다. 저 컨테이너를 '들었다 놨다'했다. 아주 삭신이 다 쑤셨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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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었다 놨다'를 계속하다 보니 사람이 무척 단순해졌다. 컨테이너 중에는 사과가 덜 담긴 것들도 있었고, 많이 담긴 것들도 있었다. 적게 담긴 것에는 콧노래를 불렀고, 가득 담긴 것에는 속으로 욕을 해댔다. 컨테이너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콧노래와 욕을 번갈아 했던 것이다.

그렇게 '들었다 놨다'를 무한반복한 날은 밥숟가락도 잘 잡히지 않았다. 음식을 뜨다가 실제로 숟가락을 놓친 적도 있었다. 또한 펜을 잡기 힘든 날도 있었다. 작업일지를 작성하려다 손가락이 시큰거려 그만 둔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 직접 작업한 사과라 그건가? 더 맛있네!

그래도 버텼다. 매일밤 온 몸을 파스로 도배하며 버텼다. 사과 농장주들은 매년 이렇게 고되게 작업을 해왔는데... 겨우 이거 가지고...

그렇게 그렇게 버티다 보니 마침내 필자가 잡아두었던 서울 상경일이 다가왔다. 잘 버텼던 셈이다. 어떤 농장주는 필자에게 일당 이외에 사과 한 박스를 선물로 보내주셨다. 또 어떤 농장주는 다음해에도 꼭 같이 자기와 사과작업을 하자고 신신당부를 하셨다. 이런 반응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필자가 일을 못했던 건 아닌 것 같다. '들었다 놨다'의 역경을 뚫고 애초 다짐했던 명예를 사수했던 것이다.

추석 과일의 대명사 사과. 그 사과가 식탁, 혹은 차례상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번 사과작업은 그 땀과 눈물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곱씹어보는 좋은 시간이었다.

필자의 집 한 편에는 '들었다 놨다'하며 작업했던 사과들이 놓여 있다. 식사를 한 후 후식으로 베어 먹는 사과 맛이 좋다. 아삭아삭... 소리까지 맛있다. 내가 작업한 사과라서 더 맛있는 건가?

 


 

 
▲ 사과작업 사과작업을 하는 분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멀리 삼봉산 자락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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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차례상 사과의 붉은 빛깔, 이렇게 만들어진다 1편

 

일조량 높이기 위해 잎따기 작업도... 온 몸에 파스를 붙이며 한 사과 출하

 

14.09.08 16:37
최종 업데이트 14.09.08 16:37

 

 

 

 

 

 

 
 
▲ 수승대 트레킹 표지판 사과 캐릭터를 이용한 트레킹 표지판. 유명한 거창의 수승대 트레킹 코스를 알리는 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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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 좀 발랐다. 이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지금도 허리와 팔목이 욱신거린다. 손끝도 시려서 키보드가 부자연스럽게 터치된다. 이게 다 10여 일간의 사과작업 때문에 얻은(?) 증상이다.

지난 8월 21일. 필자는 전라북도 무주를 통해 경남 거창군 고제면으로 진입했다. 일명 '무진장'의 하나로 불리는 무주군은 백두대간인 덕유산과 삼봉산 등을 두고 거창군과 남북으로 맞닿아 있다. 그래서 무주 읍내에서 출발하는 무진장 시골버스를 타면 거창군 접경지역에 닿을 수 있다.

 

 

# 사과로 유명한 무주군 무풍면과 거창군 고제면


이렇게 두 지역이 인접해 있으니 특산품도 유사하다. 삼봉산 북쪽에 있는 무주군 무풍면과 남쪽에 있는 거창군 고제면 둘 다 사과가 특산품이다. 무주 무풍 사과의 명성을 잘 아실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거창군 고제 사과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일 분들이 많을 것이다. 어쩌면 '고제면'이라는 지명도 처음 들어보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행여나 이런 분들도 있을지 모른다.

"거창하면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데... 한국전쟁 때 일어난 거창 신원 민간인 학살은 알겠는데... 그나저나 거창이 사과 산지였어?"

 

 

 
▲ 사과 가로등 거창군 고제면에 위치한 사과테마파크의 가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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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거창은 사과 산지다. 그 거창 사과의 중심에 고제면이 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고제면에는 삼봉산이 자리잡고 있다. 해발 1254미터인 삼봉산은 거창의 주산으로 그 일대는 큰 일교차를 이용한 고랭지 농업이 발달해 있다. 그렇게 큰 일교차는 사과의 당도를 현격히 높여주는 '촉매제' 역할을 해준다.


그렇게 삼봉산 아래 자락에 위치한 거창군 고제면을 방문했던 건 사과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한참 손이 부족할 시기이기에 기꺼이 가서 손발 노릇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품삯은 받았다. 대신 일당 이상의 값어치를 해준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올해로 벌써 사과따기 3년 차! 농장주들한테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주겠어!'

 

 

# 무척 중요한 사과의 색깔


필자는 앞서 무주군 무풍면에서 시골버스를 타고 거창군 고제면으로 진입했다고 언급했다. 차창 밖으로나마 무풍면의 사과농장들을 관찰할 생각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관찰을 하다보니 좀 이상한 점이 발견됐다. 사과에 '색깔'이 안 났던 것이다. 색

깔? 무슨 색깔?

 

 

무풍면과 마찬가지로 고제면에서 생산되는 사과는 홍로라는 품종이다. 홍옥과는 다른 품종인 홍로는 차례상에 오르는 사과로 추석을 앞두고 수확을 한다. '홍동백서'할 때 '홍'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홍로인 것이다. 한가위 차례상은 햅쌀과 햇과일 등 그해 가을걷이로 얻어진 재료들을 올려야 하기에, 추석 직전에 출하되는 홍로는 자연스럽게 차례상에 오르는 과일 품목 1순위에 속한다.

 
▲ 홍로 홍로는 새빨간 사과다. 한 여름 일조량을 풍부하게 받아야 빨게진다. 사진에 등장한 사과는 색이 아직 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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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차례상에 올려지는 과일이기에 홍로는 출하시기가 명확하다. 이를 다르게 이야기하면 모든 생산 역량을 추석이라는 한계 시간에 맞춰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추석을 넘겨 생산이 된다면 그만큼 시장에서의 가치는 감소될 수 있다. 사람들이 택배로 받아볼 수 있게 최소한 추석 연휴 이틀 전에는 작업을 완료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홍로는 시간에 쫓기며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 품종이다.

 

 

 

 

 


 

 

 

 

 

 

그 옛날의 블록버스터, 만석중놀이___ 2편

빗줄기가 소품으로 쓰인 거창아시아1인극제

 

 

 

 

---> 전편에 이어서

 

 

 

 

현재진행형인 사건들을 다룬 작품들

비가 계속 오고 있었지만 공연은 시작되었다. 천만 다행인 것은 빗줄기가 그리 세지 않았다는 점이다. 무대는 촉촉이 젖어 있었고, 관객들은 우산을 받쳐 들었다.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1인극이 바탕이 되지만 다인극도 함께 무대에 오른다. 이번에는 경기민요나 난타퍼포먼스, 만석중놀이 같은 다인극이 자리를 빛내주었다. '우리문화연구회'에서 진행한 난타퍼포먼스는 우리에게 익숙한 난타와는 좀 다른 묘미가 있었다. 장고, 꽹과리 같은 민속 악기들이 가미되어 독특한 울림을 주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난타와 민속악기와의 만남은 색다른 '퓨전사운드'를 선사했다.

현재의 시대상황을 담은 공연도 있었다. 마임 전문가 김봉석이 연기한 '휴먼 에볼루션'이라는 작품은 자본과 경쟁의 노예가 된 인간들의 모습과 세월호 참사에 대한 추모를 담은 작품이다.'휴먼 에볼루션'은 주인공이 만 원짜리 지폐를 허공에 뿌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때 주인공은 '미친놈'처럼 발광을 한다. 돈 때문에 주인공이 돌아버린 것이다.

조옥형이 연기한 '첨탑 위 꽃과 나비'라는 작품도 현재진행형인 사건을 다룬 것이다. 바로 밀양송전탑에서 투쟁하고 있는 '밀양 할매'들에 대한 이야기를 1인극으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첨탑 위 꽃과 나비'에서 조옥형은 넘어지고, 뒹구는 몸개그(?)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넘어지고 뒹구는 모습이 밀양에서는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 첨탑 위 꽃과 나비 작품명 '첨탑 위 꽃과 나비'. 조옥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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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의 '블록버스터', 만석중놀이

<거창아시아1인극제>의 대미는 만석중놀이가 장식했다. 만석중놀이는 부처님오신날을 전후로 하여 사찰 인근에서 실시된 우리나라의 전통 그림자극이다. 만석중놀이는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음(중요무형문화재 3호)', 유랑광대들의 '발탈(중요무형문화재 79호)' 등과 함께 전통인형극으로 공연되었으나 1920년대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일제는 만석중놀이가 조선인들의 단결을 도모하는 선전수단이 될 것을 우려했다. 일제는 만석중놀이를 금지시켰고, 그래서 결국 사라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1983년, 각고의 노력 끝에 심우성 선생에 의해 다시 재현되었다.

만석중놀이의 기원은 고려시대 개성 지방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사찰에서는 민중교화와 포교의 목적으로 그림자놀이를 이용하였다. 초파일을 전후하여 사찰 인근에 넓은 광목천을 펼쳐놓고 횃불을 이용하여 그림자놀이를 했던 것이다. 마땅한 유희거리가 없었던 그 옛날, 어두운 밤 중 횃불에 비쳐진 십장생, 용, 잉어 등의 그림자들은 당시 백성들에게는'블록버스터 영화'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 이유를 들어 심우성 선생은 만석중놀이를 우리의 원초적 영화라고 평가했다.

 

 


 

 
▲ 만석중놀이 여의주를 두고 용과 잉어가 다투는 장면에서 '운심게작법'을 추고 있는 한대수 거창귀농학교 교장. 귀농학교 교장이면서 연극인인 한대수 선생은 전통 민속무의 대가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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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중이라는 큰 나무 인형은 막의 한편에 서 있다 십장생들이 움직일 때마다 가슴과 머리를 손과 발로 탕탕 친다. 이 소리는 마치 죽비소리처럼 들리는데 어리석음을 스스로 깨닫는다는 의미로 울려 퍼지는 것이다. 천년 묵은 용과 잉어가 나타나 여의주를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는 절정 부분에서는 한 승려가 막 앞에 나타나 승무를 춘다. 이 춤은 운심게작법이라는 불교 의식무로 나비춤과 바라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만석중놀이에 쓰인 무대는 높이가 5m, 폭은 7m에 달했다. 그래서 작은 소극장에서는 공연을 하기가 힘들다. 무대의 크기도 있고 하니 만석중놀이는 <거창아시아1인극제>처럼 실외극으로 공연되는게 가장 좋을 듯싶다.

 

빗줄기도 소품이 될 수 있을까?

만석중놀이는 40여 분이나 상연됐지만 지루할 틈이 없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방해물이기보다는 오히려 또 하나의 소품처럼 느껴졌다. 막 뒤에서 인형을 조정하고 있던 배우들은 '수중전'을 치르느라 고생을 했겠지만 그림자놀이를 지켜보는 관객입장에서는 빗줄기가 주는 나름대로의 '소품' 효과를 즐겼을지 모른다.

그렇게 제25회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무사히 종료가 됐다. 무대에 오른 배우들은 수중전을 치루기는 했지만 관객들은 부슬부슬 내린 빗줄기조차도 연극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인 듯싶었다. 밤 10시가 넘어 끝났는데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분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여름 야외 공연에서는 빗줄기도 하나의 좋은 소품으로 쓰일 수 있을 듯싶다. 물론 억수같이 퍼붓는 장대비는 사절이고. 어쨌든 그렇게 비가 소품으로 쓰이면 하늘도 공동 기획자로 이름이 오르게 되는 건가?

 


 

 
▲ 조갑녀류 승무 작품명 '조갑녀류 승무'. 서정숙이 춘 춤이다. 여성 공연자가 춘 승무를 오랜만에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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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의 블록버스터, 만석중놀이___ 1편 

 

빗줄기가 소품으로 쓰인 거창아시아1인극제

 

14.08.07 11:04  최종 업데이트 14.08.07 11:04

 

 

 

 

 

 

 
▲ 만석중놀이 우리나라 전통 그림자극인 만석중놀이. 막 오른편에 만석중 인형이 서 있다. 용과 해 인형이 함께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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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경남 거창군 고제면 거창귀농학교.

12호 태풍 나크리의 영향 때문인지 비가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그나마 바람이 거세게 불지 않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래도 사람들은 내심 불안해하고 있었다. 스텝으로 참여를 했던 필자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러다가 공연은커녕 물폭탄 맞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올해로 25회를 맞은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그렇게 시작부터 삐꺼덕거렸다. 야외공연은 아웃도어 활동만큼이나 날씨가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이렇듯 올해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공연 자체가 무산될 위기에 놓일 뻔했다.

 



공주에서 거창으로, 아시아1인극제의 이동

<아시아1인극제>는 민속극의 대가인 심우성 선생의 주관으로 1988년, 서울에서 1회 대회가 개최됐다. 첫 대회 이후부터는 아시아 각국을 돌며 공연이 이어졌다. 그러다 1996년, 충남 공주에 공주민속박물관이 들어서고 아시아1인극제도 그 곳에 둥지를 틀게 된다. 이때부터는 명칭도 <공주아시아1인극제>가 된다.

아시아1인극제가 <거창아시아1인극제>로 또 한 번 옷을 갈아입게 된 건 2007년이었다. 거창귀농학교의 다른 이름은 삼봉산문화예술학교인데 그 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아시아1인극제는 거창에서 개최되고 있다.

 



 

 
▲ 극강을 넘어서다 작품명 '극강을 넘어서다'. 민족무예단 삼족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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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극의 영어 명칭은 'monodrama'다. 즉, 무대에 오른 한 명의 배우가 각양각색의 극중 인물상들을 풀어내듯 연기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1인극이라고 하면 판소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1인극은 배우 홀로 무대에 오르기에 다인극보다는 극적인 갈등 전개나 대립과정이 두드러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1인극은 연극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배우 1인이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 식의 전위적인 모습은 모든 것을 주관했던 제사장의 무속무와 그 뿌리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아시아1인극제에는 쟁쟁한 명사들이 무대에 올라 자리를 빛내주었다. 판소리의 거장 박동진 명창이 <진국명산>을 전해주었다. 공옥진 여사의 <심청전>도 무대에 올려졌다. 그 외에도 내로라하는 아시아 각국의 수많은 공연자들이 아시아1인극제의 무대를 수놓았다.

하지만 올해는?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비 때문만은 아니었다. 돈도 문제였다. 그렇다. 또 돈이 문제였다. 2014년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아시아'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국내파'들로만 꾸려졌다. 더욱이 초청된 국내파들은 공연료도 받지 않고 재능기부를 해주었다. 자금이 없으니 아시아 각국의 재능 있는 연극인들을 초청하지 못했던 것이다.

문제는 올해만 그런 것이 아니고 작년에도 그랬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내년에도 또 자금난에 허덕일지 모른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시아1인극제'가 '우리나라1인극제'로 아예 굳어져 버릴지 모른다는 염려가 앞선다.

 

 


 

 

 
▲ 난타공연 우리문화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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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거창군 고제면: 고제면은 사과 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앞에 보이는 산은 백두대간 삼봉산의 줄기다.  

 

 

 

 

 

 

 

 

이 포스팅은 지난 8월 1일, 경남 거창군 고제면에서 행해진 <제25회 거창아시아1인극제>에 대한 사진포스팅입니다.    저는 <제25회 거창아시아1인극제>에 스태프로 참여를 했습니다. 당일 비가 내려서 공연자들은 수중전을 치러야했고, 스태프들도 애를 먹었답니다. 하지만 공연은 무사히 끝났습니다. 아쉬움이 남는 자리였지만 그런 만큼 내년에는 <거창아시아1인극제>가 더 크게 활성화 될 수 있게 더 활발히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 경기민요

 

 

 

 

 

 

* 난타공연: 우리문화연구회

 

 

 

 

 

* 극강을 넘어서다: 민족무예단 삼족오.

 

 

 

 

 

* 첨탑 위 꽃과 나비: 조옥형

 

 

 

 

* 조갑녀류 승무: 서정숙

 

 

 

 

 

 

* 만석중놀이: 여의주를 두고 용과 잉어가 다투는 장면에서  '운심게작법'을 추고 있는

 한대수 거창귀농학교 교장. 귀농학교 교장이면서 연극인인 한대수 선생은 민속

전통무의 대가로 불리고 있다. 

 

 

 

 

* 만석중놀이: 만석중놀이보존회. 막 오른편에 서 있는 만석중 인형.

용과 해 인형이 함께 등장했다.

 

 

 

 

 

 

 

 

 

* 마임: 조명과 함께 모닥불이 소품으로 쓰였다. 마임의 소품으로 모닥불이 이용되는 건 처음 보았다.

그만큼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품격 높은 공연을 많이 선보인다.

 

 

 

 

 

 

# '다시 서야 할 아시아1인극제'

그렇다. 돈이 문제였다. 오죽했으면 여름에 수박을 쪼개먹던 큰 평상 4개를 붙여서 무대를 만들 정도였을까. 또한 손·발이 턱없이 부족하여 필자와 같은 고급인력(?)이 화장실 청소를 하며 자원활동을 해야 했다. 필자는 계획했던 '여름 정기투어'를 잠시 접어두기까지 했다. 그러다 뒷마무리까지 마친 후, 8월 6일에서야 서울로 귀가할 수 있었다.

사실 2013년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칫 했으면 아시아1인극제의 명맥이 끊길 뻔했다. 그런 상황을 반영하듯 이번 대회의 부제는 '다시 서야할 아시아1인극제'였다. 그렇지만 십시일반이라고 공연자들이 무료공연을 펼치고, 뜻있는 분들이 격려금을 전달해 주셔서 어려운 상황에서나마 대회를 잘 마칠 수가 있었다.

지역의 문화행사가 돈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면 큰 문제일 것이다. 지원금의 유·무에 의해서 대회 개최의 유·무가 결정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지역문화 행사에 대한 안정적인 지원과 관심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된다.

 

 

 

 

 

 

* 무대: 돈이 없어서 큰 평상 4개를 붙여서 무대를 만들었다. 큰 느티나무가 뒷배경으로 쓰인터라 환상적인 모습이 연출됐다. 야간 조명이 무대 뒤 나무들을 비추었을 때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전화위복이라고 환상적인 무대 덕택인지 모르겠지만 올해<거창아시아1인극제>는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그런 의미에서, 입장료는커녕 오히려 동네 분들에게 돼지고기와 막걸리를 대접하는 <거창아시아1인극제>에 대한 안정적인 예산 집행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면소재지에 짜장면집 하나 없는 '깡촌'에서 마을 주민들이 언제 그런 수준 높은 문화예술 활동을 접할 수 있겠는가! 소외지역 문화행사 지원 차원에서라도 적절한 지원금은 반드시 집행되어야 할 것이다.

기왕 돈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가지 더 언급하고 가겠다.
2012년 <거창아시아1인극제>에서는 부대행사로 거창·함양지역의 다문화 가정들의 1박 2일 캠프가 개최됐었다. 참가자들은 국적도 다양하고, 피부색도 조금 다르긴 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 중요한가! 그저 축제를 재밌게 즐기면 그만 아니던가! 그래서 그런지 꼬맹이들의 장난 때문에 거창귀농학교의 운동장은 떠들썩했다. 그들의 엄마인 이주여성들도 조금은 느긋한 모습이었다. 공연을 즐기며 하룻밤 야영을 할 수 있다는 게 좋았던지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 거창아시아1인극제

 

 

 

 

당시에는 아시아 각국에서 온 공연자들이 자국의 전통무를 공연했었다. 필리핀에서 온 공연자들이 필리핀 이주 여성들 앞에서 공연을 펼쳤고, 인도네시아 온 공연자들이 인도네시아 이주 여성들 앞에서 춤사위를 펼쳤다. 이주 여성들의 표정은 무척 진지했다. 낯선 곳에서 자국의 전통무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큰 감흥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공연중에 눈물을 훔치던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 돈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괜히 쓸데없는 토목 공사 하느라 세금 낭비하지 말고 이런 문화축제에 쓰면 얼마나 좋겠는가!

 

 

 

 

 

 

 

*거창귀농학교

 

 

 

 

 

 

 

 

# <고제 사과길>

앞서도 언급했듯이 거창군 고제면은 홍로 사과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8월 말 경에 가보면 '새빨간' 사과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멀리서보면 마치 녹색의 그라운드에 빨간색 점들이 뿌려진 것처럼 보인다. 녹색과 빨간색이 서로의 배경색이 되어 시각적으로 장관을 이루는 것이다.

필자가 누군가? 역사트레킹 마스터 아닌가! 자원활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트레킹 코스를 하나 개척해보았다. 약 6km 정도 되는 짧은 코스인데 사과와 관련된 도보여행길이다. 이름하여 <고제 사과길>이다. 이 길을 걸으면 탐스러운 사과와 함께 백두대간 삼봉산의 아름다운 풍광도 감상할 수 있다.

이제 추석이 한 달 남짓 남았다. 그럼 사과 수확 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음에 사과 작업하러 거창귀농학교에 갈 때는 '뺑끼'를 쓰지 않고 일을 좀 열심히 할 생각이다. 특히 화장실 청소에 역점을 둘 것이다. 그럼 이모님에게 이런 소리를 듣지 않을까?

'곽 작가. 조단조단 일 잘 하네. 이 막걸리 한 잔 묵고 하그래!'

 

 

 

 

 

 

 

 

* 거창군 고제면: 고제면은 전형적인 산촌 마을의 모습을 보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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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제 사과길>: 거창아시아1인극제 자원활동을 마친 후, 돌아오는 길에 <고제 사과길>이라는 트레킹 코스를 하나 개척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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