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Prob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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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별의별 일들을 다 겪는다. 그렇다. 여행이 우리 스케줄대로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여행자들은 그때마다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까? 매번 짜증을 낼 것인가, 아니면 문제없다며쿨하게 넘길 것인가?


몇 해 전. 서울 촌놈인 난, 설레는 마음을 안고 유럽여행을 떠났다. 난생 처음 유럽에 가는 길이라 유럽스타일좀 낸다고 옷도 사고, 신발도 사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또 한 푼이라도 아낀다는 생각에 수수료가 저렴한 곳을 골라 환전을 하기도 하고, 여행 정보를 얻는다고 10시간 동안 꼼짝 않고 웹서핑을 하기도 했다. 그런 나를 보며 누구는 유럽여행 두 번 가면 어디 실려 가겠다고 질책을 하기도 했다. 하긴 그 말도 맞았다. 여행 준비에 골몰하는 바람에 난 두통약까지 복용해야 했으니까.

가을 하늘이 유난히도 청명했던 10월의 어느 날, 난 인천공항에서 파리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새로 산 옷과 신발을 신고 영자 신문을 넘기며 폼을 좀 잡아봤다. 또 목에 힘주며 환전한 유로화도 꺼내서 세워보기도 했다. 하지만 폼 잡는 것도 잠깐 그 순간이었다. ? 비행기를 타고 10시간 동안 기내에 갇혀 비행을 한다는 게 어디 만만한 일인가! 시간이 흘러갈수록 내 몸은 계속 축 늘어져갔다.

승무원들이 음료카트를 끌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음료 서비스 시간이었던 것이다. 내가 원래 술을 잘 못하지만 그날만큼은 음료카트에 실린 위스키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냥 한 잔 제대로 마시고 잠을 청하고 싶었다.

음로 하씨게써요?”



좀 어눌한 한국말로 내게 음료를 권하는 스튜디어스는 베트남 출신 여승무원이었다. 한국말은 어눌했지만 자태가 고운 미인이었다.

이쓰키로 할까요?”

덜컹. 난기류를 만났는지 비행기가 잠시 흔들렸다. 그래서 그 승무원의 말이 더 어눌하게 들렸다.

다시 덜컹. 나는 좀 겁이 났지만 승무원들은 그런 난기류들이 익숙한 듯 각자 자신의 일에 집중을 하는 듯했다.


, NO!"

하지만 이 말과 함께 그 승무원 손에 들려 있던 위스키 잔이 내게 엎어졌다. 앞서보다 더 큰 난기류에 기체가 더 심하게 요동쳤고, 그녀는 중심을 잃고만 것이다.


잔에 가득 담긴 위스키가 내 얼굴에 쏟아졌고, 난 상반신이 다 젖어버렸다. 옷 상의는 물론 팬티까지 싹 다 젖었다. 난 안경을 쓰는데 우산 없이 길거리에서 비를 맞듯, 내 안경 위로 위스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잠시 멍하게 지켜봐야 했다. 한마디로 난 위스키 샤워를 한 것이다.


미안해


당혹스러웠는지, 그 승무원은 어찌할 줄을 모르게 내게 반말을 했다.


내가 할게

그녀는 또 반말을 하며, 음료 카트 아래쪽에서 수건을 꺼내 내 얼굴에 들이대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수는 실수를 부르는 법이다. 수건을 들이대는 순간 그 승무원은 또 중심을 잃고 내 쪽으로 몸이 쏠렸는데, 그 틈에 수건이 들린 손이 내 얼굴을 강타하고 말았다.


정말 미안해, 미안해

그녀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연속된 실수로 고객의 소중한 여행을 망쳐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운이 좋았다. ? 나 같은 너그러운(?)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비행 중에 만난 난기류를 인력으로 막을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그 베트남 승무원이 일부러 실수를 하고 싶어서 실수를 했겠는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위스키에 혀를 살짝 다시어, 익살스럽게 맛보기를 할 정도로 난 큰 문제가 없었다.


“No, Problem!"









그렇게 난 확실하게 의사표현을 하고 그녀에 손에 들린 수건을 빼앗아 얼굴과 상의를 구석구석 닦았다. 그런 나의 침착한 모습에 그녀도 안도가 됐는지, 잔뜩 경직됐던 얼굴이 좀 풀렸던 것 같았다.


내 몸 구석구석을 한참동안 닦고, 안경도 닦았더니 나도 좀 정신이 들었다. 수건을 돌려줄 때 자세히 보니 그 수건 밑단에 고추장이 좀 묻어 있던 게 눈에 띄었다. 경황이 없던 승무원이 사용안한 마른 수건을 준다는 걸 이미 사용한 걸레를 준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지만 난 그것조차 쿨하게 넘겼다.


그런 우여곡절을 넘기며 난 샤를 드골에 무사히 도착했다. ‘위스키 샤워 사건이후, 그 베트남 승무원이 내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최고급 위스키를 건넸는데 그걸 한 잔 마셨더니 내내 좀 알딸딸했다.  내게만 제공된 특별한 술이었는데, 미녀 승무원이 권한 술잔이라 더 취기가 올랐던 걸까? 아니면 시차적응이 되지 않아서일까? 드골 공항에서 들려오는 프랑스어가 제대로 내 귀에 착착 감기는 느낌이었다. 마치 여기저기서 랩을 부르는 것처럼 들렸다.


출발부터 그런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어서 그랬는지, 당시의 유럽여행은 정말 재미있었다. 어차피 여행을, 그것도 국내가 아닌 해외여행을 떠난다면 애초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때마다 짜증을 내고, 언성을 높일 것인가? 한 가지라도 더 느끼고 배운다는 자세로 여행길을 떠난다면 잠시 잠깐의 불편은 지혜롭게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일이 있을 때, 언성 높이지 말고 이렇게 한 번 외쳐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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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Prob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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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장을 정리하다가 2012년에 간행된 <하늘사랑 수기공모전> 모음집이 보이더군요. 몇 페이지를 넘기니 그 속에 제 이름이 적혀 있더군요.


최우수상!  제목은 No problem!


학교 다닐 때는 상장 하나 못 받아봤는데... 나이가 들고, 글을 쓰다보니 저렇게 상도 받아보네요. 그것도 가작이나 우수상이 아닌 최우수상이라니! 정말 학교 다닐 때는 성적이 바닥을 기었었는데... ㅋ


이제껏 공모전에서 여러번 상을 받았는데 아직까지는 1등은 못 해봤답니다. 물론 우수상이나 가작도 매우 훌륭한 것지요. 하지만 평생 1등을 한 번 못 해봐서 그런지 대상 한 번 타보는 것이 정말 소원 중에 소원이랍니다.


만약 1등상을 받는다면, 기왕이면 상금이 큰 대회에서 받고 싶네요. 짭잘하게 상금을 챙기게요. ^^;   


4년에 발간된 책자를 보면서 잠깐이나마 옛날 생각을 떠올려 봅니다. 위에 글은 원문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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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을 '무대'로 삼은 거창아시아1인극제



제9회 거창아시아1인극제 참관기


16.08.11 12:00  최종 업데이트 16.08.11 18:12

곽동운


             





    

 

▲ 양반춤 양반춤을 추고 있는 이삼헌. 뒤로 보이는 산이 삼봉산이다. 백두대간 삼봉산.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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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을 무대 배경으로 삼는다면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요? 백두대간을 무대 일부로 끌어온 연극제가 있다면, 그 연극제는 어떤 멋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갈까요? 만약 그런 연극제가 있다면 풍류를 제대로 타는 연극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백두대간을 무대 배경으로 '쓴' 거창아시아1인극제

실제로 그런 연극제가 있었습니다. 지난 7월 29일부터 30일까지, 이틀에 걸쳐 삼봉산문화예술학교에서 개최된 제9회 거창아시아1인극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삼봉산문화예술학교의 다른 이름은 거창귀농학교입니다. 거창귀농학교는 백두대간인 삼봉산을 올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1인극제의 무대 배경으로 백두대간 삼봉산이 쓰일(?) 수 있었던 겁니다. 

'거창아시아1인극제'가 9회째를 맞이했다고 기술했지만 '아시아1인극제'는 올해로 27회째입니다. 1988년 서울 바탕골 소극장에서 펼쳐진 '아시아1인극제'가 '거창아시아1인극제'의 전신이기 때문입니다.

바탕골에서 1회 대회를 치른 이후 '아시아1인극제'는 대만, 일본, 인도,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을 순회하며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그 이후 충남 공주에 있는 공주민속박물관이 주최가 되어 1인극제를 무대에 올리게 됩니다. 명칭도 바뀝니다. '공주아시아1인극제'로.



▲ 나비와 소녀 극단 마네트의 김봉석이 '나비와 소녀'라는 마임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저 소녀의 옷이 걸쳐진 나무에 자석이 달린 종이 나비들이 붙여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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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와 같이 경남 거창에서 1인극제가 무대에 오르게 된 건 2007년부터였습니다. 백두대간 삼봉산이 올려다 보이는 거창귀농학교에서 무대가 펼쳐지니 그때부터는 '거창아시아1인극제'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모노드라마(monodrama)가 백두대간 아래에서 펼쳐졌고, 벌써 9회째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올해 대회는 작년에 비해 참가팀이 많았습니다. 이틀에 걸쳐 23개 팀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거기에 더해 관람객으로 참가한, 23개 팀에 등재되지 않았던 '국악소녀'가 특별출연 형식으로 무대에 올라 타령 한 곡조를 뽑아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연극제가 풍성해질 수 있었던 건, '한국민족춤협회' 회원들의 발걸음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3월 19일, 대학로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한 '한국민속춤협회' 회원들은 이번 거창아시아1인극제에 대거 참석했습니다. 우리 민속춤을 계승·발전시키고자 발족한 한국민속춤협회 회원들 덕택에 거창아시아1인극제도 한층 빛이 났던 것입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공연 프로그램을 소개해보겠습니다.







▲ 만신 서문정 마고당 서문정. 작두를 타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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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커피 때문에 장군님이 노하셨나?

이번 연극제는 만신 서문정(마고당)의 작두굿으로 시작했습니다. 21살 때 신내림을 받은 서문정은 서해안배연신굿 예능보유자인 김금화 선생에게서 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황해도를 위시한 서해안지역의 굿은 퍼포먼스가 강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인지 서문정의 작두굿도 그런 문법에 충실했습니다. 혀 위에 날카로운 식칼을 올려놓기도 했고, 큰 작두 위에서 두 발을 쿵쾅거리며 뛰기도 했습니다.

연극제 스태프로 참가한 저는 그 작두를 잡아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서문정이 작두를 타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지를 못했습니다.

그렇게 작두지기를 하다 보니 에피소드가 하나 발생했습니다. 작두지기도 굿에 참가한 일원이다 보니, 굿하는 동안만큼은 다른 잡스러운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죠. 하지만 너무 더워서 그랬는지 작두지기를 하는 내내 저는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생각했습니다. 
   
'아이스커피 사 먹으려면 읍내까지 내려가야 되는데... 그래도 시원하게 한 잔 했으면 ...'

작두굿은 무사히 마쳤습니다. 관객들 호응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액운(?)이 끼었습니다. 제 휴대폰이 굿을 할 때 쓰이는 정화수에 완전히 젖었기 때문입니다. 시원하게 젖어서 전원이 나가버렸습니다.

'장군님이 노하셨나? 아직 할부도 많이 남았는데... 시원하게 물먹었네.'  



▲ 서예 퍼포먼스 서예 퍼포먼스를 펼친 김기상. 오른쪽에서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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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 퍼포먼스와 통영오광대 문둥춤

두 번째로 무대에 오른 작품은 신평 김기상 선생의 서예 퍼포먼스였습니다. 김기상 선생은 몽둥이 같은 큰 붓을 들고 일필휘지의 기운으로 획을 쳐나갔습니다. 그렇게 흰 천 위에 한 획 한 획이 이어지다보니 어느 순간 한 편의 작품이 탄생되더군요. 채 5분도 되지 않은 시간에 작품이 완성된 것입니다.

짧은 시간에 완성된 작품이었지만 미적으로는 무척 뛰어났습니다. 검은 선들에서 붉은 꽃들이 피어나와 꽃망울을 터뜨리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그런 아름다움 때문인지 김기상 선생의 작품은 다음날(30일) 공연 내내 무대 뒤편에 걸려 있었습니다. 배경막으로 쓰인 셈이죠.

이외에도 첫날 공연에는 이강용씨가 춘 문둥춤 공연이 상당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문둥춤은 통영오광대 놀이의 첫 번째 마당으로 덧빼기 춤의 정수라고 불립니다. 여기서 덧빼기는 장단을 말하는 것이죠.

문둥춤에서 광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한 맺힌 삶을 춤으로 승화하려 합니다. 통상적으로 이런 식으로 내용이 전개되면 극의 분위기가 무척 가라앉았을 겁니다. 하지만 문둥춤이 오광대놀이의 첫째마당 아닙니까. 비록 광대는 흉한 모습의 탈을 썼지만 입에서는 걸출한 입담을 쏟아냈습니다. 춤에 풍자와 해학을 담아 자신의 한을 승화시킨 것이죠.



▲ 문둥춤 문둥춤을 추고 있는 이강용.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꼬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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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혼: ​우리문화연구회 타악 연주팀. 타혼.





풍류를 탔던 양반춤

1인극제는 그 다음날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둘째 날(30일)은 우리문화연구회 '타혼'의 난타 공연으로 시작됐습니다. 쿵쾅거리는 북소리가 축제의 둘째 날이 시작됐음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장중한 북소리의 울림이 공연장 곳곳을 휘몰아친 후 백두대간을 향해 뻗어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이어진 공연은 춤꾼 이삼헌의 양반춤이었습니다. 이삼헌씨는 원래 발레를 전공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한국 무용으로 '전공'을 전환한 후 지금까지 우리 전통춤을 추고 있다고 합니다. 서양무용과 한국무용을 두루 섭렵한 것이죠.

그런 이삼헌씨의 이력 탓인지 그가 추는 양반춤은 남다른 멋이 있더군요. 흰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올라 부채를 펼치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백두대간 삼봉산이 펼쳐지니 풍류가 제대로 장단을 탔던 것이죠.



▲ 인형한마당 얼씨구 판타지 인형극 '얼씨구'를 공연중인 고규미. 2화 꽃의 환생을 연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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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소녀

인형극 공연과 마임 퍼포먼스도 펼쳐졌습니다. 극단 상사화의 고규미씨는 '인형한마당 얼씨구'를 통해 판타지 인형극을 선보였습니다. 인형극은 '1화 할아버지 얼씨구'와 '2화 꽃의 환생'으로 이루어졌는데 2화를 설명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람의 인생은 누구나 꽃처럼 오고 언젠가 꽃처럼 갑니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인생들이 꽃처럼 편안하고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극단 마네트의 김봉석씨는 마임 퍼포먼스를 펼쳐주셨습니다. '나비와 소녀'라는 마임이었는데 정신대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공연이었습니다. 소녀의 옷이 걸린 나무의 등장으로 극은 시작됩니다. 그 옷을 걷어낸 자리에는 날갯짓을 하며 날아온 나비들이 자리를 잡습니다. 나비들이 꽉 들어차자 나무에 불이 밝혀집니다.

'나비를 좇는 소녀는 꿈을 꿉니다. 그러나 나무에 못이 박히듯 소녀의 몸은 상처로 얼룩지고 꿈은 무참히 깨집니다. 이제 살아있는 이들이 상처를 덮고 다시 소녀로 되돌려주려 합니다. 아름다운 나비의 꿈으로...'


▲ 나비와 소녀 마임 퍼포먼스 '나비와 소녀'를 펼치고 있는 김봉석. 나비가 날아온 나무에 보라색 등이 점등이 됐다.  뒤편 건물에는 동영상 프로젝트 빔을 쏘고 있다.



      



'나비와 소녀'에 대한 팸플릿의 소개글이었습니다. 관람객이 자석이 박힌 종이나비를 직접 나무에 붙여주는 등, 이 마임 퍼포먼스는 관객친화적인 공연이었습니다. 또한 위에 소개글처럼 많은 울림을 담은 공연이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첫째날 작두굿 공연을 한 만신 서문정은 이런 소감을 밝히더군요.

"공연을 보면서 죄책감을 느끼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보는 내내 죄스러운 마음이 들더군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임 공연을 보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좋은 마임 퍼포먼스를 펼쳐주신 김봉석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아사라토 연주: ​아사라토를 연주하고 있는 일본인 켄토. 켄토는 이번 1인극제에 참여한 유일한 외국 국적자였다. 아사라토는 북아프리카 지역의 타악기인데, 호두만한 두 개의 물체를 부딪혀 소리를 낸다. 치고, 흔들고, 불고... 그렇게 소리를 낸다. 즉흥 공연이 가능하고, 다른 악기와 협연도 쉬운게 아사라토의 장점이다. 정식 공연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켄토의 즉흥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켄토는 아사라토 연주만 13년 째라고 한다. 저렇게 공연을 하며 전세계를 누빈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켄토도 풍류객인 것이다.

 







사드 반대 춤

거창아시아1인극제의 대미는 한국민족춤협회 이사장인 장순향 선생께서 해주셨습니다. 장순향 선생은 '사드(THAAD) 반대' 춤을 추셨습니다. 원래 선생께서는 산조춤을 추시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무대에 오르셨을 때는 '사드 반대'라는 큰 부채를 펼치며 춤사위를 펼쳤답니다.

선생도 처음부터 저 춤을 출 계획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공연을 바로 앞 둔 시점에 착상이 떠올라 즉흥적으로 춤을 추셨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순식간에 창작춤을 이끌었던 셈입니다. 

아시아1인극제가 열린 거창은 사드 배치 후보지인 성주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습니다. 사드 배치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드 반대' 춤이 주는 의미가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더군요.

과연 우리나라에 사드가 필요한 것인지, 만약 그 사드 체계가 설치가 된 후에 실전에서 사드 미사일이 발사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한반도, 더 나아가 동북아 지역은 지도상에서 지워질지 모릅니다.

사드 반대 춤을 끝으로 이틀에 걸쳐 펼쳐진 제9회 거창아시아1인극제도 무사히 종료가 됐습니다. 백두대간 삼봉산을 배경 삼아서 그랬는지 춤사위는 더 멋들어졌고, 노랫가락은 더 흥에 겨웠습니다. 거창아시아1인극제가 풍류를 제대로 탔던 것이죠.







▲ 사드 반대 사드 반대 춤을 추고 있는 한국민족춤협회 이사장 장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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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머리'가 되도 좋아!


돌담 쌓기가 그렇게 어려울 줄이야~!




16.07.25 09:47 최종 업데이트 16.07.25 09:47

             곽동운(artpunk)             







     

 
▲ 돌담 완성된 돌담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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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은 정겹습니다. 돌담을 끼고 걷는 것만으로도 푸근함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돌담 쌓기는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우선 '손'이 많이 갑니다. 그렇게 만만치 않은 돌담 쌓기 작업을 해봤습니다. 저는 현재 거창귀농학교라는 곳에 기거하고 있는데 그곳의 외부 담벼락이 붕괴됐습니다. 그것을 수리하는 데 제가 '발품'을 팔았습니다.

돌담을 쌓으려면 황토 흙을 반죽해야 합니다. 밀가루 반죽하듯이 반죽해야 합니다. 그래야 찰기가 생기니까요. 황토를 손으로 반죽할 수는 없습니다. 발로 밟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굉장히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 황토반죽 작업을 제가 맡았습니다. 맨발로 황토를 밟는데 마치 늪에 발이 빠지는 느낌이 들더군요. 찰기 때문이죠. 그렇게 맨발로 하다 보니 흙 속에 숨어 있는 작은 돌들에 상처가 나기도 합니다. 장화를 신고 싶어도 장화를 신을 수가 없었습니다.

장화가 본드에 붙은 것처럼 반죽에서 안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한 발 떼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황토 반죽을 고무 대야에서 하는 이불 빨래 정도로 생각했다가 아주 큰 코 다쳤습니다.
 






 
▲ 무너진 돌담 무너진 저 돌담을 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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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너진 돌담. 뒤쪽에서 본 모습







그렇게 반죽된 황토를 바르고 돌을 올렸습니다. 돌담에 쌓는 돌들은 계곡돌이라고 해서 좀 매끈한 녀석들을 쓰는 게 좋습니다. 그 계곡돌들을 층층이 쌓은 후 진흙으로 빈틈을 채우게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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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기와를 올렸습니다. 동네의 돌담들은 그냥 돌만 올리지만 우리는 예전부터 기와까지 올렸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암키와를 올리고, 수키와를 덮고... 옛 우리조상들이 쌓았던 방식과 동일하게 돌담을 쌓게 된 것이죠.

돌담을 쌓다보니 옛날 성을 쌓았을 때의 모습들이 유추되더군요. 서울성곽 같은 경우, 우리가 보고 있는 성체는 조선 후기 이후에 중수한 것들입니다. 두부돌이라 불리는 거대한 장판석(長板石)이 그것들입니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는 잔석(殘石)이라 하여 크기도 작고, 형태도 울퉁불퉁한 돌들로 성체를 올렸습니다.


잔석들은 퍼즐 조각처럼 딱딱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딱 들어맞지 않는 부분에는 황토가 들어갔습니다. 찰기가 살아있는 황토가 잔석들의 빈 공간을 채워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황토 흙도 성체의 일부분이었던 것입니다.







 

 
▲ 돌담 쌓기 반죽된 황토를 바르고 돌들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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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토 반죽. 저렇게 반죽을 하면 본드가 부럽지 않을 정도다.






그냥 벽돌에다 시멘트 발라서 올리면 작업은 편해질 테지요. 하지만 시멘트가 발린 벽돌담은 돌담처럼 정겨움을 주지 못합니다. 시멘트는 갈라지면 흉하게 보이지만 돌담은 갈라져도 그것 자체로 보기가 좋습니다.

돌담 작업을 하느라 제 옷은 황토로 뒤범벅이 돼버렸습니다. 옷이 완전히 진흙탕이 된 것이지요. 하지만 조상들의 작업 방식과 동일하게 돌담을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일이었답니다.

돌담작업을 하다 보니 서울성곽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겹게 봐왔고, 수도 없이 탐방했던 서울성곽인데 눈앞에 돌담을 보니 불현듯 서울성곽이 그려지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저도 우리 돌문화에 깊게 빠진 듯합니다. 서울 성곽길을 걷고, 돌담길에 환호하며, 돌장승들을 탐방하는…. 그렇게 제 머릿속에는 '돌'들이 가득합니다. 우리 옛 조상들의 슬기와 자연미를 담고 있는 그런 '돌'들이 제 머릿속에는 가득한 것입니다. 그럼 제 머리는 '돌머리'인가요?
 






 
▲ 돌담 완성된 모습. 기와까지 올려진 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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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표참관인증: 공직자 이름을 가렸다. 선거법 위반 소지가 있을지 모르니까... 








*고제면 투표소: 고제면 체육회관에 마련되었다.










* 목련: 필자가 좋아하는 목련. 저 흰 목련처럼 우리 정치도

더 맑고 고와졌으면 좋겠다. 고제중학교 분교 앞.









4월 8~9일은 사전 투표를 하는 날입니다.

저는 그 사전투표가 잘 진행되는지 감시(?)하러 왔답니다. 사전투표 참관인 자격으로 기표소에서 매의 눈(?)을 뜨고 있죠. 이 곳은 경남 거창군 고제면 투표소입니다.

사전투표는 기존 부재자투표제도의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지난 2014년 지자체 선거 때부터 제도화 됐다고 합니다.

부재자투표는 사전에 등록을 해야하는 등 번거로움이 있었는데 사전투표는 그런 절차가 생략되어 좀 더 편하게 투표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죠.

참관인인 저도 서울에 주소를 가지고 있지만 특별한 절차 없이 바로 투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신분증과 지문 확인절차로 전국 어디서나 투표가 가능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한가지! 여기가 농촌지역이라 그런지 지문이 없으신 노인분들도 계시더군요. 농사짓느라 손을 많이 써서 그렇게 된 것이죠. 그런 분들은 따로 이름을 적게 해서 확인을 하는 방법을 쓰더군요.

사전투표는 13일, 단 하루에 이루어지는 투표일을 늘려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즉 8일, 9일, 13일이 투표일이 되는 것이죠.

특별한 등록 절차가 없으니 선거권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아무 기표소나 들어가서 투표행위를 할 수 있어 무척 편리하다는 겁니다. 선거일 당일날의 번잡함도 피할 수 있어서 좋구요.

시골버스 기사님 같은 경우는 버스 운행을 잠시 멈추고 투표를 하시고 갔습니다. 투표소가 번잡하지 않으니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이죠.

지금 이 글은 오후 2시 경에 작성하고 있고 사전투표 종료시간은 오후 6시니, 아직 4시간 정도 남은 셈입니다.

사전투표가 필요한 분들은 좀 서두르셔야겠습니다.

단 신분증은 꼭 가져가세요!!!










이번 413 총선때, 거장군에서는 군수 선거도 함께 합니다. 보궐선거지요. 작년에 전임 군수가 대법원 확정판결로 군수직을 박탈됐기에 보궐선거가 시행되는 겁니다.

그래서 첫번째 사진처럼 거창군 일대 선거벽보는 두 줄로 나열됐지요. 윗줄은 국회의원 입후보자, 아랫줄은 군수 입후보자.

요즘 거창군의 핫 이슈는 교도소 문제입니다. 이 지역 시민단체들은 학교 앞에 들어서는 교도소에 일제히 반대하고 있죠.

이에 대해 거창군은 그 교도소를 법조타운이라고 명명하더군요. 교도소와 법조타운... 동일한 사항인데도 찬반측이 받아들이는 네이밍이 완전 다르다는 겁니다.

이걸 두고 네이밍 플레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전쟁에서 민간인들을 살상했을 때 이런 어려운 말을 하잖아요. 비전투적인 행위에 의한 부가적인 피해. 이 런 말들이 난무하다보면 해당행위에 대한 본질적인 직시가 어려워집니다.

이제 선거가 코 앞입니다. 자신의 한 표가 지역현안에 대해 본질적인 원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도록 책임감 있게 행사되어야겠습니다.






브런치 덕에 '미역국'을 마시다

 온라인 기사와 종이책... 대립적인 관계도 아닌데





▲ 브런치북 프로젝트 자신의 글을 종이책으로 만날 수 있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 공모전이다.




'브런치'를 아시나요? 브런치는 카카오에서 만든 글쓰기 플랫폼입니다. 글쓰기가 편할뿐더러, 작가와 독자들 간의 거리를 확 줄여주었다는 것이 장점인 플랫폼이죠.

브런치는 매년 두 차례에 걸쳐 <브런치북 프로젝트>라는 공모전을 개최합니다. 자신이 쓴 글이 종이책으로 발간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어, 수많은 지원자들이 공모전에 노크를 한다고 합니다.

저도 그 지원자들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글빨'을 발휘하며 지원을 했지요. 그런데 유의사항을 체크해보니 기운이 빠지더군요.

"전자책도 아니고 종이책인데... 왜 이런 조항이?"

유의사항 다섯 번째 조항 때문이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역사 트레킹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공모전에 도전했습니다. 해당 글들은 전부 다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들이었습니다. 그 기사들은 브런치뿐만 아니라 제 다음 블로그나 네이버 블로그에도 옮겨 놓았답니다. 조금이라도 제 글이 파급력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 그렇게 한 것이죠.

그런데 저만 이렇게 여기저기 온라인 매체에 옮기기를 할까요? 저한테만 무슨 저장 강박증(?)이 있어서 여기 저기 블로그에 자신의 글들을 심어 놓는 걸까요? 글 꽤나 쓴다는 분들은 자신만의 홈페이지나 블로그, 혹은 페이스북을 가지고 있습니다. 브런치 작가들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런 블로그나 페이스북에는 브런치에 담긴 글과 동일한 글들이 있을 겁니다.

여기서 '김칫국 마시는' 가정을 한 번 해보죠. 저처럼 <오마이뉴스>나 혹은 다른 온라인 신문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 브런치 공모전에 도전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죠. 그 사람들 중 상당수는 자신의 블로그나 페이스북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운이 좋았는지 그 사람은 수많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당당히 수상의 영광을 안게 됩니다. 이제 자신의 글을 종이책으로 만나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말 겁니다.

 




▲ 브런치북 프로젝트 밑줄 친 유의사항 덕택(?)에 필자는 접수와 동시에 떨어졌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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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웹/앱 서비스에 중복 게재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 때문입니다. 수상자는 부랴부랴 자신의 블로그나 페이스북에서 해당 글을 일일이 삭제, 혹은 숨김으로 돌려놓겠죠. 그런데 온라인 기사는 어떻게 할까요. 해당 언론사에 연락해서 기사 삭제 요청을 해야 하는 건가요?
                                                  
'다른 웹/앱 서비스에 중복 게재할 수 없습니다'라는 유의사항은 상당히 퇴행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에 역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온라인 신문에 연재된 글들이 종이책으로 많이 만들어졌고,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이책이 발행됐다고 해당 연재기사가 삭제가 되나요? 그런 경우 본 적이 있습니까?

블로그 포스팅도 마찬가지입니다. 블로그에 작성된 글이 종이책으로 나왔다고 해도 지면화된 해당 포스팅이 사라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다른 웹/앱 서비스에 중복 게재할 수 없습니다', 이런 유의사항이 존재하는 한, 저 같은 경우는 수 백 편의 글을 작성한다고 해도 '미역국'만 마시게 됩니다. 공모전 진입이 원천봉쇄가 된다는 뜻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만 미역국을 마실까요? 저 말고도 브런치북 공모전에는 온라인 기사를 모아놓은 응모작들이 간간이 눈에 띄더군요.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글도 보였습니다. 참고로 공모전의 응모작들은 누구나 다 볼 수 있게 공개돼 있습니다. 그런 분들도 단서조항에 발목이 잡히는 걸까요? 아무리 양질의 글을 수 백 편을 쓴다고 해도 공모전 근처에도 못 가보는 건가요?

브런치의 한 이용자는 브런치에 중복게재에 대한 문의를 넣었습니다. 브런치팀은 "수상작으로 선정되면 중복게재는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내놨습니다.






 브런치에 올라온 중복게재에 대한 문의 그리고 브런치팀의 답변.
ⓒ 브런치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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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미역국'을 마셨다'고, 그것 때문에 투정을 부리려고 이 글을 쓰는 건 아닙니다. 왜 종이책과 온라인 기사를 대립적인 관계로 묶어두는 공모전을 실시하는지가, 그저 의아해서 이 글을 쓰는 겁니다. 그것도 다른 곳에서 실시하는 공모전이었다면 이런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겁니다. 카카오가 무슨 회사입니까? 최첨단 온라인, 모바일 기업이 아닌가요?
                                                                  
지난 3월 31일이 브런치북 프로젝트 마감일이었습니다. 이 글은 일부러 공모전 마감일 이후에 작성했습니다. 이번까지는 그냥 지켜보자는 의미로 마감일 이후에 행동(?)을 취한 것이죠.

계속해서 미역국을 마시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브런치 프로젝트 공모전에 도전할 생각입니다.

여러 번 물을 먹었어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또다시 총선에 출사표를 던지는 출마자들처럼! 저도 그런 굳은 심정을 가지고 공모전에 도전할 생각입니다. 또 누가 아나요? 그 단서조항이 사라져서 저도 수상을 할지! 그때는 미역국 말고, 김칫국도 마시고 떡도 좀 먹고 그러고 싶네요.


















20대 총선을 8일 앞 둔 어제(4월 5일).


경남 거창에서 함양 안의면까지 갈 일이 있었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다 거창지역에 출마한 총선 후보자들의 걸개그림이 있어 찍어봤습니다. 더민주당 권문상과 새누리당 강석진, 유력주자 두 명의 사진만 찍었습니다. 버스정류장에 저 두 사람의 걸개그림이 유독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버스를 타고 함양군 안의면 화림동 계곡에 도착했습니다. 군 경계지역을 넘은 셈이죠. 세 번째 사진은 안의면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후보자를 담은 선거 벽보지요.

어! 그런데 여기도 아까 봤던 후보자들이 보이네요. 그렇습니다. 이 곳은 경남 거창 함양 합천 산청이 하나로 묶였답니다. 그래서 합천에 가도 산청에 가도 동일한 선거 벽보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곳도 요즘 한창 바쁘답니다. 비료주고 풀매고... 농번기라 손이 많이 필요하죠. 실제로 선거운동원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농사 짓기도 바쁜데 무슨 선거냐!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농번기니까 많이 바쁘죠. 그래도 할 건 해야겠죠.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 아닙니까? 아무리 바쁘더라도 꽃을 피울 건 피워야겠죠.

마지막 사진은 화림동 계곡에 있는 농월정이라는 정자입니다. 멋진계곡을 품고 있는 정자 옆에 예쁜 벚꽃이 피어있네요.









갓 내림굿 받은 무당에게 덕담을 들었어요


입춘에 내림굿 받은 박영숙씨 이야기





16.02.23 15:05 최종 업데이트 16.02.23 15:05


  

           


주위에 아는 용한(?) 점쟁이가 있으십니까? 저는 이번 입춘에 한 명 생겼답니다. 제가 '박 보살'이라고 부르는, 일본에서 온 박영숙씨가 바로 그분입니다.

영숙씨는 일본에서 '돈 꽤나' 만진 분입니다. 어려서부터 어려운 형편에 놓였던 그녀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고진감래'라고, 그렇게 어려운 시기를 넘기니 물질적인 풍요가 따라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쿄에서 큰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임대업에 뛰어들었다고 하네요. 요즘 아무리 엔화 가치가 떨어졌다고 하지만 도쿄에서 임대업을 할 정도면 '돈 좀 굴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랬던 영숙씨는 지난 입춘(立春)에 신을 받았습니다. 내림굿을 한 것이지요. 여기서 한 가지! 과거에 '돈 좀 만진' 박 보살은 뭐가 아쉬워서 무당이 되기로 한 걸까요?

"17살께부터 신기(神氣)가 있었어요. 외할머니가 무속인이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그때는 잘 몰랐어요. 제가 무당이 된다는 걸 어디 상상이나 했겠어요?"

하지만 자신이 거부한다고 신기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걸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생채기가 날 뿐이죠. 그렇습니다. 신병(神病)에 시달리게 됩니다. 영숙씨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병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응급실에 실려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 내림굿 박영숙 내림굿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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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길도 혼자, 신의 길도 혼자

그래도 거기까지는 감수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운명의 잔'을 계속 거부하니, 그 잔이 결국 자기 자식에게로 향하게 됐다고 합니다. 자신이 거부하니 하나 있는 아들에게로 그 운명이 넘어갔다는 것이죠. 그 운명이라는 건, 좋은 뜻이 아니겠죠. 아들의 교통사고…. 이후 박 보살은 '운명의 잔'을 집어들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저는 인간의 길을 갈 때도 혼자였고, 신의 길을 갈 때도 혼자 갑니다!"


영숙씨가 이런 말을 한 건, 그녀가 고아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젖먹이였을 때부터 부모의 품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고아원에서 자랐고, 이름도 고아원에서 지어줬다고 합니다. 일본은 20년 전께 갔다고 하더군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이름조차도 고아원에서 지어줬다면, 부모에 대한 정보는 아예 없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외할머니가 무속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걸까요? 그건 그녀의 몸에 조상신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외할머니의 영혼이 박 보살의 몸에 들어온 것입니다. 인간의 길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두 사람이 신의 길에서 서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인생 스토리를, 더군다나 '신의 길을 갈 때도 혼자 간다'는 영숙씨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무언가 짠한 기분이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저도 동영상 담당 스태프로 참여하게 됐고, 현장 기록을 토대로 이렇게 기사까지 작성하게 됐습니다.





 
▲ 내림굿 제단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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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먼스가 강한 황해도 작두굿

박영숙씨의 내림굿은 2월 4일부터 5일까지, 이틀에 걸쳐 경남 거창군 고제면에 위치한 '아시아1인극협회 한국본부'에서 행해졌습니다. 연극제가 열렸던 소극장에 제단이 차려지고 굿이 거행된 것입니다. 악사가 동원되기는 하지만 굿도 1인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1인극제가 개최된 장소에서 굿이 거행되는 것이 어색해보이지 않습니다.

신굿, 신명굿, 강신제 등으로도 불리는 내림굿은 신령의 부름에 답하는 절차입니다. 더불어 신령을 정식으로 받아들여 '몸주'로 삼는 절차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매우 중요한 절차이기에 내림굿을 이끌어 줄 선배 무당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어머니' '신아버지'로 불리는 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영숙씨는 마고당이라 불리는 서문정을 신어미니로 모시게 됩니다. 마고당은 작두굿으로 유명한 무속인인데, 황해도 작두굿 계보를 잇고 있는 분이죠. 지금 황해도 땅이 휴전선 이북에 있는 만큼, 마고당의 위치는 매우 독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 보살이 마고당의 '신딸'이 된 만큼 이제 그녀도 황해도 작두굿 '줄'을 잡게 된 것입니다.

본격적인 내림굿 이전에 일반 재수굿 열두거리가 거행됩니다. 거기에 '허주굿'이라 불리는 잡귀를 씻어내는 굿까지 진행돼야 정식으로 내림굿이 거행됩니다. 이렇게 사전에 많은 굿들이 거행되니 1박 2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황해도 굿은 의복을 여러 번 갈아입고 칼춤을 추는 등, 화려함이 두드러집니다. 이에 대해 아시아1인극제 한국본부장인 한대수 선생은 황해도 굿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 황해도나 경기 이북 지역의 굿은 화려함, 즉 퍼포먼스적인 요소가 강조됩니다. 그래서 볼거리가 풍부한 면이 있습니다."

아무리 강신(降神)이 됐다지만 작두를 탄다는 건 두려운 일일 겁니다. 그건 영숙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심 작두가 무섭다며 말끝을 흐리더군요. 그렇다고 안 탈 수가 있을까요? 신을 받고 싶어서 받고, 안 받고 싶어서 안 받을 수가 없듯이, 작두도 타기 싫다고 안 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운명은 운명인 거죠!

"아, 좋다! 오늘처럼 기분 좋은 날은 처음이구나! 이 제자 그동안 길을 몰라 헤매였지만…. 오늘에서야 이 길을 가니, 기분이 정말 좋구나!"

천하대장군의 공수(무당에 신이 내려 신의 소리를 내는 일)가 영숙씨의 입을 타고 우렁차게 울려 퍼졌습니다. 영숙씨의 두 발은 날카로운 작둣날 위에 오른 상태였습니다. 신이 잘 강림했다는 뜻입니다. 내림굿이 성공했다는 뜻입니다.





 
▲ 내림굿 내림굿에 임하는 박영숙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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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에 들은 덕담

갓 내림굿을 받은 무당의 신기가 가장 좋다는 건 다들 아실 겁니다. 그래서 강신자(降神者)에게 공수를 받기 위해 사람들은 줄을 섭니다. 저도 줄을 섰습니다.

"2년 내에 좋은 일이 있을 거야. 그때까지만 참어!"

박 보살은 제게 그런 공수를 줬습니다. 얼핏 보면 2년만 지나면 성공한다는 뜻이니 좋은 거지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반론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제까지도 계속 참았는데, 또 2년을 참으라고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나 봅니다. 그 공수를 액면 그대로 풀면, 2년 안에 '고진감래'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까? 요즘 같이 '헬조선'이라는 말이 남발되는 세상에 2년 만 고생하면 된다는 말은 무척 희망적이지 않습니까? 2년 만 지나면 '파라다이스'를 만날 수도 있으니….

저는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천주교 성지 탐방을 할 것이고, 사찰 순례를 행할 것입니다. 또한 계속해서 우리나라의 무속신앙에 대해서도 공부할 것입니다. 왜? 저는 종교 다원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2년 만 고생하라'는 공수는 입춘에 들은 덕담 정도로 넘길 생각입니다. 맹신은 금물입니다. 공수만 믿고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있던 복도 달아날 테니까요. 그러고 보면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하루하루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공수도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자체가 복(福)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 아래사진은  박보살이 찍은 사진입니다. 박보살은 일월성신을 찍은 사진이라고 했고, 저는 UFO라고 했던 사진입니다. 일월성신이든 UFO든... 신기한 사진임에는 분명합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우금티 고개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현장] '2015 우금티 예술제', 통한의 고개에서 본 '희망의 씨앗'

 

15.11.14 15:54   최종 업데이트 15.11.14 15:56

 

 

 

 

 

 

 
▲ 우금티 예술제 지게 상여가 나가고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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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오후 2시. 전국에 촉촉한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극심한 가을 가뭄을 꺾어줄 단비였지요. 저는 그날 우산을 받쳐 들고 충남 공주시 우금티 고개에 서있었습니다. '2015 우금티 예술제'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금티 전투. 벌써 12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60갑자로 치면, 두 갑자에다 또 한 해가 더해진 것입니다. 121년 전 그날, 그곳 우금티 고개에서는 통한의 피눈물들이 뿌려졌습니다. 빗발치는 일본군과 관군의 공세에 막혀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그곳에서 눈을 감아야 했던 2만여 명의 농민군들의 피눈물이 바로 그것입니다.  농민군들이 내세웠던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도 그 피눈물을 따라 흩뿌려지게 됩니다.

'2015 우금티 예술제'는 사단법인 '동학농민전쟁 우금티기념사업회'가 주관이 되어 진행됐습니다. 우금티를 넘지 못했던, 인내천 사상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던 수많은 농민군들의 통한을 달래주기 위해서 행해졌습니다.

 

 


 
▲ 지게상여 우금티예술제에 등장한 지게상여.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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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제는 추모제례와 역사축제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추모제례는 농민군들의 한을 달래기 위한 의식이 진행됐는데 특이하게도 지게상여가 등장했더군요. 지게 두 개를 이어붙인 지게상여는 상여를 살 수 없었던 망자를 운구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그 옛날, 가난 때문에 상여조차 구할 수 없었던 이들이 이승과 하직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타고 갔던 것이 지게상여였습니다. 평생 동안 등짝에 걸쳐 메고 곡식과 땔감을 날랐던 그 지게에 자신을 실어 보냈던 것입니다. 


121년 전, 우금티에서 전사한 동학농민군들은 그런 초라한 지게 상여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시신은 버려졌고 내팽개쳐졌습니다. 살아난 자들에게는 '반역도'라는 낙인이 찍혀졌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장례는 꿈도 못 꾸었던 것입니다.

 

 



21세기 우금티 고개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 설문조사판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설문조사판이 설치되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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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제례가 영령들의 한을 달래주는 자리였다면, 역사축제는 미래 세대들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예술제에 모인 중·고등학생들은 농민군들의 뜻을 기억하면서도 '놀 건' 놀았습니다. 짚으로 만든 달걀꾸러미 체험, 벼훑이를 이용한 탈곡체험 등등...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자신의 소원을 적은 만장과 사발통문이었습니다.


'좋은 대학 가게해주세요!'
'이번에는 오빠들 콘서트 꼭 가고 말테야!'


위처럼 또래끼리 통용되는 생각들이 많이 적혀있더군요. 하지만 뜨거운 이슈를 담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한국사 국정교과서 OUT'


'헬조선'이라는 우울한 말이 그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극우 성향의 커뮤니티 일베 같은 사이트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그들이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의 희망의 씨앗도 그들 아닙니까?

121년 전, 갑오년의 우금티가 통한의 피눈물이 터져 나온 곳이라면 현재의 우금티는 새로운 희망이 싹 터 오르는 옥토와 같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인내천을 꿈꾸던 농민군들의 희생이 헛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겠죠. 그런 의미로 우리 아이들이 우금티에서 많은 역사체험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우금티 우금티에 세워진 조형물이 쓰러져 있다. 우금티에서 쓰러져 갔을 농민군들의 모습이 겹쳐져서 마음이 애잔해진다. 봄의 새싹처럼 힘껏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으면 좋겠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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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저는 2년 전에도 우금티 추모제례에 대해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그때 기사를 다시 살펴보니, 당시는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대해서 언급을 했더군요. 당시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얼마나 뜨거운 이슈였습니까?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각을 드러낸 교학사 교과서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반대를 했었죠.


2년이 지난 현재. 이제 교학사 교과서를 넘어 한국사가 국정 교과서가 되려고 합니다. 역사가 퇴보한다는 걸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내년 우금티 예술제 기사에서는 이런 안타까운 심정을 기사 말미에 적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의 씨앗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 우금티: 동학농민전쟁 시기 공주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해서 설명한 설명판.

 

 

 

 

* 우금티: 설명판을 보고 있는 학생. 

 

 

 


덧붙이는 글 | 우금티 예술제에서 자원봉사를 한 후, 그것에 대한 소감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공공장소에 울려퍼진 친일파 옹호론

 

 

높아진 목소리... 온라인 논쟁을 오프라인으로 옮겨온 듯

 

15.08.14 16:58   최종 업데이트 15.08.14 16:58

 

 

 

 

 

 

 
▲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걸린 대형 태극기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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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이 친일을 하고 싶어서 한 거겠어. 상황이 그래서 그런 거지."
"그건 아니죠. 시대상황으로 돌리기에는 친일파들이 나쁜 짓을 많이 했잖아요."
"상황을 이해해야지! 만약에 ○○씨가 일제시대에 살고 있어, 먹고 살아야 하잖아. 그럼 어떻게 하겠어? 일본놈들이랑 등 돌리고 살겠어? 그때 살았으면 그럴 수밖에 없는 거야. "
"선배님 말씀은 그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거의 다 친일파가 되야 한다는 말씀이잖아요. 그런데 그때 독립군은 뭐지요? 항일운동한 사람은 뭐가 되는 거죠?"

 


제가 집필실(?)로 이용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한 대학교의 휴게실이 바로 그곳입니다. 글 쓸 공간이 없어 도서관으로, 카페로 옮겨 다녀야 하는 글쟁이들보다는 제 처지가 훨씬 나을 겁니다. 와이파이도 빵빵 터지고, 에어컨도 시원한 공간에서 물건들을 '쫘악' 펼쳐놓고 글을 쓰니까요.  

하지만 휴게실은 휴게실입니다. 통닭 시켜 먹는 이들,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이들... 식사 시간이 되면 휴게실은 맛있는 음식 냄새로 채워집니다. 그러면 글이 잘 안 써집니다. 저도 배가 고프니까요. 그래도 후각을 혼란시키는 음식 냄새는 그나마 낫습니다. 문제는 역시 청각을 혼동시키는 것입니다.

 

 

 

나의 '집필실'인, 어느 대학의 휴게실에서

 

 

이 대학은 오픈 대학교입니다. 그래서 학우들의 연령대가 아주 다양합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20살부터 백발이 성성한 분들까지... 주축은 50~60대 학우들이 이루더군요. 그래서 대화의 내용도 일반 대학생들이 하는 말들과는 많이 차이가 납니다. 일반 대학생들이 스펙과 취업 걱정으로 대화 내용을 채운다면, 이곳의 학우들은 자신의 아파트 값이 어떤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에 대한 문제들을 입에 올립니다.

부동산이나 건강 문제들은 거의 비슷한 결론으로 달려가는 가더군요. 딱히 첨예하게 부딪힐 부분도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하나라도 더 정보공유를 하려고 '코드'를 맞추더군요. 하지만 정치 문제가 나오면 양상은 달라집니다. 서로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서로 갈등을 빚고 얼굴을 붉히기까지 합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서 그런지 요즘에는 광복, 일제청산, 이승만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들리더군요. 하여간 그렇게 첨예한 이야기들이 대화 테이블에 오르면 저도 본의 아니게 그 대화에 '참여'하게 됩니다. 휴게실이 지하에 위치해 있어 조금만 목소리를 높여도 그 소리가 다 제 귀에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는 제 몸은 노트북 앞에 있지만 마음은 그 대화 테이블에 앉게(?) 됩니다. '동석'하기 싫은데 '동석'하게 되는 겁니다. 한마디로 글쓰기 작업은 잠시 중단을 하게 되는 것이죠.

"요즘 사람들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뭐라뭐라 안 좋게 이야기를 하지만, 난 이승만에 대해서 달리 봐야 한다고 봐. 그때 정부를 안 세웠으면 어떻게 되겠어. 한반도가 적화가 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지."
"그럼 이승만 세력이 친일파 중용한 거랑 반민특위 해산한 거랑은 어떻게 보십니까?"

 

 

 

 

 

 


온라인 논쟁을 옮겨 놓은 것 같은 휴게실 논쟁

 
▲ 소녀상 위안부소녀상. 일본대사관 앞.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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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서두에 언급한 대화는 그렇게 계속 이어졌습니다. 총 네 분이서 이런 대화를 나누셨는데 나이가 많으신 분은 이승만과 친일파에 대해서 옹호를 하는 입장이었고, 상대적으로 젊은 분은 그에 대해서 반박을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때는 나라가 새로 세워졌어. 당연히 인재가 필요하잖아. 그럼 누가 그 일을 하겠어? 일제시대에 일 좀 했다고 그 사람들을 안 쓸 수 있겠어."
"그게 바로 친일파들이 주로 주장하는 내용 아닙니까..."
"위쪽으로는 공산당이 꽈리를 틀고 있었고, 그래서 실제로 전쟁도 났잖아. 그런데 인재는 필요했고.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니깐!"
"그게 바로 전형적인 그들의 주장이라니까요!"

 


이미 서로의 목소리는 높아졌고, 주장은 계속해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 대화에 깊숙이 '참여'를 하게 됐습니다. 당장이라도 몸을 이끌고 그 테이블에 가서 식민지근대화론과 같은 친일 옹호론을 격파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친일 문제를 반박하는 분에게는 좀 더 내공을 쌓아 친일 옹호론을 꼼짝 못하게 하라고 조언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마음만으로 그렇게 한 것이지요.

이 분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일제 잔재청산과 관련하여 온라인에서 '피터지게' 싸우는 댓글들이 생각났습니다. 어쩌면 휴게실에서의 대화들은 온라인에서 오가는 논쟁들을 오프라인으로 옮겨놓은 거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실제로 나이가 많았던 분의 논리는 인터넷에서 친일을 옹호하는 댓글의 내용과 거의 일치했으니까요. 대신 잘 아는 동아리 멤버들이었기에 서로 예의는 지키는 모습이었습니다. 나중에는 2학기 수강신청에 대해서 서로 '코드'를 맞추더군요.

 

 


원죄론과 친일론

전 그 대화를 보면서, 친일을 옹호하는 측이 '우리안의 친일', 즉 '친일의 범위 확장'에 전력을 기울인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생계형 친일과 악질 친일을 하나로 묶어버려,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서 생계를 꾸리던 모든 이들에게 '원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일제 잔재는 전부 아니면 전무 형식으로 프레임이 형성되겠지요. 당연한 일이겠지만 신생 독립국에서 전무가 가능하겠습니까?

이렇듯 '친일 범위의 확장'은 악질 매국노들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것이죠. 윤동주도 창씨개명을 했고, 북한도 정권 수립 초기에 친일파가 몇몇 요직에 기용됐다, 그러니  일왕에게 혈서를 쓰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 되겠냐?, 하는 식이 되어 버립니다.

휴게실에서 어깨너머로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신다고 질책하실 분들이 있을 겁니다. 나이 드신 분이 큰 의중 없이 흘린 말에 과도한 해석을 한다고 타박하실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보고자 합니다. 친일매국노들의 뿌리가 깊은 만큼 자신들을 지키는 논리도 상당하다는 것을요. 그 논리가 타당한지 개연성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파급력이 중요한 것이겠죠. 그 파워가 중요한 것이겠죠. 대학교 휴게실이라는 공공장소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친일매국행위를 옹호하는 논리들이 입에 오르고 있다면 그 파워는 상당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추신) 지난 12일,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서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습니다. 전직 총리라는 한계가 있지만 분명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비해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인 박근령씨는 일본 우익들이 좋아할 말들을 일본에서 쏟아내고 왔습니다.

 

두 사람의 행위를 보면 참 많은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광복절을 앞두고 동생이 망동된 행동을 했는데도 사과 한 마디 없는 대통령을 보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사태의 경중을 인지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어쨌든 15일은 광복절입니다. 이날만큼은 태극기를 가슴에 새겨보고, 경건하게 보내야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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