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엘로 클라우디아: 신전 건물임. 뒤쪽으로 모래 언덕이 보인다.

 

 

<재미난 스페인 20편> 바엘로 클라우디아

- 천사는 어디에나 있어요! 보살님도 어디에나 있고요!

충남 태안군에는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해변들이 즐비하다. 꽃지 해수욕장, 만리포 해수욕장, 청포대 해수욕장 등등... 신두리 해수욕장과 신두리 해안사구도 빼놓을 수 없다. 신두리 해수욕장은 화물차가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표면이 단단하다. 다른 해수욕장과 달리 모래나 개펄에 빠질 염려가 없다. 그래서 자동차 광고를 많이 찍었다. 붉게 물든 석양을 배경으로 바닷가를 스치듯 질주하는 자동차의 모습! 남자의 로망을 담아내기에, 충분한 장면이다.

그 옆에 있는 신두리 해안사구는 마치 모래사막처럼 보인다. 해안사구는 바람에 날려온 모래가 바닷가에 쌓여 모래 언덕을 이룬 것을 말한다. 신두리 해안사구는 규모가 무척 큰데다 원형 보존도 잘 되어 있어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널찍한 해수욕장과 해안사구가 어우러진 모습은 장관을 연출한다. 광활하게 느껴질 정도다.

스페인에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유적지들이 즐비하다. 그런 로마 유적지들 중에서 무척 인상적인 곳이 있었다. 바엘로 클라우디아(Conjunto Arqueológico Baelo Claudia) 유적이 바로 그곳이다. 바엘로 클라우디아는 이베리아반도의 최남단인 타리파에서 북서쪽으로 약 25km 정도 떨어진, 볼로니아(Bolonia)라는 동네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유적지의 명칭은 로마의 4대 황제 클라우디아에서 딴 것이다. 그렇다. 이곳은 클라우디아 황제가 건설한 도시다. 푸른 대서양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옛 로마의 유적지가 자리 잡고 있다.

 

 

 

* 수도교: 바엘로 클라우디아는 작은 도시이다. 약 5km 정도 떨어진 수원지에서 물을 끌어오기 수로가 만들어졌고, 그 수로 중 일부 구간이 수도교 형태로 이어졌다.

 

 

 

 

바엘로 클라우디아는 필자 같은 뚜벅이 여행자들이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타리파에서 갈 수 있는 대중교통은 없고, 택시도 잘 가지 않는 곳이었다. 시외버스가 인근을 지나기는 하는데 버스 하차장에서 내려 약 12km 정도를 걸어가야 했다. 산도 하나 넘어야 했다. 12km에 산까지 넘어야 한다면, 이건 너무 무모하지 않은가? 그 무모한 짓을 필자는 하고야 말았다.

바엘로 클라우디아에서 약 12km 떨어진, 크루세 파시나스라는 동네까지는 간간이 시외버스가 다녔다. 거기서 나가는 택시 하나 없을까, 나름 긍정적인 마인드로 스스로를 다독였다.

크루세 파시나스에 딱 내렸다. 그런데 무척 당혹스러웠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버스 정류장 표지판도 없는 곳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누군가가 버스에 탑승하고 있었다. 좀 머뭇거렸다. 바엘로 클라우디아가 있는 볼로니아쪽을 바라보니 산을 넘어가야 했다. 그때가 12시가 가까웠는데 자칫하면 3시를 넘길 수도 있었다. 하절기에는 3시가 입장 마감 시간이었다. 기껏 어렵게 가서 닫힌 문고리를 두들길 판이었다. 하지만 포기하란 법은 없다. 내가 내릴 때 버스에 남자 한 명이 탔는데 그 남자의 여자 친구가 내게 말을 걸었다.

"어디가세요? 볼로니아 가세요?"

"그래요. 볼로니아에 있는 바엘로 클라우디아에 갑니다."

"제가 볼로니아 살아요. 제 차로 같이 가요."

"~^^!"

그렇게 해서 히치하이킹을 하게 됐다. 그녀의 이름은 카타리나였다. 볼로니아에서 요가와 필라테스 강사로 활동한다고 했다. 차를 타고 지형을 둘러봤는데 아래쪽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경사도가 높았다. 한마디로 카타리나의 차를 타지 않았으면 오후 3시 안에 도착을 못 했을 것이다. 카타리나의 숙소는 볼로니아의 초입이라 바엘로 클라우디아와는 좀 떨어져 있었다. 정문 인근까지 데려다 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맙다는 말에 카타리나가 천사 이야기를 했다.

 

 

 

* 동쪽문: 바엘로 클라우디아는 성벽 안에 만들어졌다. 동문에서 해안사구를 방면을 바라본 모습.

 

 

 

"천사는 어디에나 있어요."

"저에게 천사는 카타리나에요!"

드디어 바엘로 클라우디아에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좀 의아했다. 공짜였기 때문이다. 세비야의 이탈리카도 무척 저렴했는데 이곳은 아예 공짜였으니까. 그래서인지 몰라도 둘 다 오후 3시에 관람을 종료한다. 다른 관광지에 비하면 빨리 문을 닫는 편이다.

이탈리카처럼 바엘로 클라우디아도 작은 도시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멀리서 식수를 끌어오는 작은 수도교도 있었고, 또 역시 폐허가 된 형태로 전시되고 있었다. 어설프게 복원하는 것보다 사람 손을 최소한으로 하고 관람하게 하는 방식이었다.

이곳이 이탈리카와 다른 점은 주위 풍광이었다. 배산임수(?)의 형식처럼 뒤로는 산이 둘러싸고 있고 앞으로는 대서양이 펼쳐져 있었다. ‘임수’가 무척 강력했다. 하여간 폐허가 된 로마시대 유적들이 주위 풍광과 어우러져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런 걸 두고 자연과 인공의 조화라고나 할까?

 

 

 

* 가룸을 만들었던 곳

 

 

 

바엘로 클라우디아는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가장 잘 보존된 로마유적지 중의 한 곳이다. 기원전 2세기경, 북아프리카 지역과의 무역을 위해 조성되었는데 융성한 시기는 클라우디아 황제(재위: 41년 1월 ~ 54년 10월) 때였다.

로마의 4대 황제였던 클라우디아는 이곳을 자신의 경제적 자금원으로 이용했다. 그러다 기원후 2세기 이후로는 몰락하기 시작한다. 대지진의 영향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바닷가 바로 옆에 있으니 쓰나미의 영향도 받았을 것이다. 이후로는 지브롤터 해협에서 암약하던 해적들의 표적이 되었다. 참고로 클라우디아의 전임자는 3대 칼리굴라였고, 후임자는 5대 네로였다. 아주 막강한 전·후임자를 두었다.

바닷가에 인접해 있는 만큼 바엘로 클라우디아는 어업이 발달했었다. 그중에서도 참치잡이가 성행했고, 소금도 생산되었다. 또한 가룸(garum)이라는 발효 조미료를 만들기도 했었다. 가룸은 일종의 생선 소스인데 로마시대 이전부터 만들어졌다. 그리스인들과 페니키아인들도 가룸을 가미하여 음식의 풍미를 살렸다.

 

 

 

 

* 신전: 뒤쪽으로 산이 병풍처럼 두루고 있다. 신전 한 편에는 13대 트라야누스 황제상이 있다.

 

 

 

실내에 있는 작은 박물관을 둘러본 후 광장 쪽으로 이동했다. 신전이 있는 곳이다. 외관적으로 가장 복원이 잘된 곳이 신전이었다. 블록을 쌓듯 둥근 돌로 쌓은 돌기둥들이 인상적이었다.

신전 너머를 보니 산 한 쪽이 모래로 뒤덮여 있었다. 모래가 바람을 타고 한 쪽에 쌓인 것이다. 해안사구였다. 그걸 보니 충남 태안의 신두리 사구가 생각났다. 바엘로 클라우디아에 오지 않았다면 이런 독특한 경관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로 카타리나가 정말 고마웠다.

정말 천사는 어디에나 있다. 다만 우리가 잘 인지하지 못할 뿐... 더불어 보살님도 어디에나 있다. 다만 우리가 잘 모를 뿐... 그런데 문제는 돌아오는 길이었다. 결국 25km를 걸었다. 쉬엄쉬엄 걸었더니 7시간 정도 걸린 거 같았다. 호스텔로 돌아가니 스태프가 좀 이상한 눈빛을 보내는 듯싶었다. 어쨌든 어려운 숙제 하나를 잘 끝낸 셈이다.

 

 

 

*지도: 바엘로 클라우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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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형경기장: 이탈리카에 있는 원형경기장. 2만 5천 명 정도가 입장할 수 있었다. 이탈리카 인구가 약 8천 명 정도이니 상당한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재미난 스페인 19편> 이탈리카

 

스페인에 세워진 최초의 로마 도시

 

유럽 여행을 하다 보면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관람료가 무척 저렴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창덕궁을 스페인에 가져다 놓으면 입장료가 얼마가 될까? 지금 내는 돈의 5~6배, 많으면 10배 정도까지 더 지불해야 될지 모른다. 스타벅스 커피 한 잔 값도 안 되는 돈으로 세계문화유산 창덕궁을 탐방할 수 있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돈도 아까워하는 사람이 있다. 어쨌든 한국보다 스페인의 문화유산 관람료는 월등히 비싸다. 그래도 가물에 콩이 나듯 아주 저렴한, 혹은 공짜로 답사를 할 수 있는 곳들도 있다. 이번에 소개할 이탈리카(Italica) 유적지가 바로 그런 곳이다. 관람료가 겨울 1.5유로였다. 우리나라 돈으로 약 2,300원 정도.

이탈리카는 세비야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으로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산티폰세(Santiponce)에 속한다. 명칭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탈리카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유적이다. 이탈리아반도 밖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로마 도시가 바로 이탈리카였다.

세비야에서 이탈리카까지 걸어갈까 하다가 초행길이고, 너무 덥기도 해서 그냥 시내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검색해보니 아르마스(armas)터미널 밖, 정류장에 산티폰세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참고로 아르마스 터미널은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가는 버스가 있을 정도로 큰 터미널이다.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안 오는 것이다. 알고 봤더니 터미널 내부 플랫폼에서 출발하고 있었다. 한여름 안달루시아의 햇살은 정말 강렬했다. 그 햇살을 바라보니 현기증이 일어났다. 결국 오후 늦게 이탈리카 정문 앞에 도착했다.

‘닫힘(cerrado)’

오후 3시를 겨우 넘은 시각인데 벌써 영업이 종료된 것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그 뜨거운 안달루시아의 여름 햇살을 맞으며 터벅터벅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갑자기 냉면이 생각났다. 먹을 수 없으니 더 간절했다. 다음날 재도전에 성공했다. 관람 마감 시간은 오후 3시까지였는데 적어도 1시간 이상 걸리니 이점을 참조해서 가시면 좋겠다.

 

 

* 로마 가옥들의 모자이크: 옛 로마인들의 미적 감각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탈리카는 제2차 포에니전쟁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도시이다. 포에니전쟁은 카르타고와 로마가 맞붙은 전쟁으로 총 3번에 걸쳐 일어나는데 그중 제2차 전쟁은 한니발 전쟁이라고 불렸다. 그만큼 한니발의 역할이 지대했던 전쟁이었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세 번의 전쟁에서 모두 다 패배했고, 결국 기원전 146년에 멸망하게 된다.

기원전 206년이었다. 2차 포에니전쟁이 시작된 지도 벌써 12년이 지났을 때였다. 세비야 인근, 일리파에서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군이 카르타고군을 크게 무찌른다. 한니발이 이탈리아 땅에서 연전연승했듯이 스피키오도 이베리아반도에서 연전연승했다.

하지만 수크로(Sucro)항에 있던 로마 군인들이 처우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다. 일명 수크로 반란이 일어난 것인데 스피키오는 이 반란도 제압하고, 서남부 카디스로 이동해 카르타고의 잔당들을 소탕한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카르타고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것이다. 참고로 수크로는 현재 수에카(Sueca)로 불리는데 발렌시아에서 남쪽으로 약 35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이다.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느라 로마군은 지쳐갔다. 부상자도 속출했는데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형편이 못 됐다. 이에 스피키오는 군인들의 불만을 달래주기 위해 세비야 인근에 도시를 건설한다. 그곳이 바로 이탈리카였다. 군복무 시절에 부대 앞에서 보았던 군인아파트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이탈리카는 로마가 스페인에 만든 최초의 정착지였다.

 

 

 

* 원형극장: 이 통로를 따라 검투사들이 지상으로 올라갔다. 결투를 앞둔 검투사들은 어떤 생각을 품었을까?

 

 

 

이탈리카 입구에서 오른쪽을 보니 원형극장이 있었다. 이탈리카 원형극장은 2만 5천 명이 동시에 입장할 수 있다고 전해진다.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이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니 그 절반 수준이다. 그렇다고 이 원형극장이 다른 도시에 있는 원형극장에 비해서 작은 편이 아니었다. 타원형의 형태인 이탈리카 원형극장은 중심축 길이가 160m고, 경기장 한 가운데 지하공간이 있다. 이 지하공간 위로는 나무 덮개를 덮을 수 있게 만들었다.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있었지만 탐방 동선이 잘 짜여 있어서 관람하는 데 문제가 없었다. 혈투를 펼치기 전, 검투사들이 대기를 하고 있었던 지하공간에 가보았다. 습한 눅눅함이 감돌 뿐, 그 옛날 검투사(글레디에이터)들의 비장함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첨단 AI시대에 그런 고대시대의 감성을 찾고 있는게 좀 구닥다리인가?

로마의 최전성기는 5현제, 즉 5명의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였다. 네르바(12대), 트라야누스(13대), 하드리아누스(14대), 안토니누스 피우스(15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대)가 그들이다. 네르바가 기원후 96년에 집권했고, 아우렐리우스가 180년에 죽음을 맞이했으니 5현제의 치세 기간은 약 84년 정도가 된다. 이들 중 트라야누스(재위: 98~117년)와 하드리아누스(117~138년)가 이탈리카 출신이다. 처음에는 군인들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황제까지 배출한 도시가 된 것이다.

 

 

 

* 이탈리카 원형극장

 

 

 

트라야누스 황제 시절에 로마는 가장 큰 영토를 가지고 있었고, 후임 하드리아누스는 그런 제국의 유산들을 행정적으로 잘 관리하였다. 제국의 방비를 위해 하드리아누스 방벽(Hadrian's Wall) 같은 성벽 시설을 축조하기도 한다.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브리튼족을 막기 위해 영국 땅에 세운 긴 성벽을 말한다.

로마는 이베리아반도 점령지를 히스파니아(Hispania)로 불렀는데 처음에는 반도의 동남지역에 국한됐다. 이후 점령지를 점점 더 넓혀가 기원전 19년, 이베리아반도 전체를 장악하게 된다. 이때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는 히스파니아를 로마 제국에 편입시킨다. 이제 히스파니아는 식민지가 아닌 로마 제국의 동등한 구성원이 된 것이다.

이런 권리의 향상이 있었기에 속주였던 히스파니아에서 황제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5현제 중, 두 명의 황제가 탄생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일까? 그런 궁금증을 안고 가옥 지구로 향했다.

 

 

* 물고기잡이 모자이크: 사진 오른쪽 상단에 로마식 화장실이 있다.

 

 

 

로마가 만든 도시답게 대중목욕탕도 있었고, 빵집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원형경기장처럼 폐허로 남은 흔적들을 잘 갈무리하여 전시하는 방식이었다. 한쪽 편에 옛 화장실도 있었다. 돌에 엉덩이를 올려놓을 정도의 구멍이 뚫려 있고, 아래로는 물이 흘러 용변을 치우는 식으로 수세식 화장실이었다. 자세히 보니 엉덩이를 올려놓는 돌이 대리석이었다. 저기서 일을 치르면 쾌변을?

가옥들은 벽면이 다 허물어지고, 거의 바닥만 남아 있었다. 그 바닥에는 모자이크 장식이 정교하게 남아 있었다. 꽃, 새, 동물 같은 자연물부터 기호, 도형 같은 표식, 그리고 수렵 장면이나 신의 모습까지 그 형태도 다양했다. 집 바닥을 그런 형형색색의 모자이크를 장식했다니! 로마인들의 미적 감각이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특히 새들로 장식된 모자이크는 당장 갤러리에서 전시를 해도 될 만큼 뛰어난 감각이 느껴졌다.

이탈리카 탐방을 마치고 숙소가 있는 세비야로 돌아왔다. 스페인의 다른 관광지보다 월등하게 저렴한 입장료를 지불했지만 그 만족감은 기대 이상이었다. 그 만족감은 세비야에서도 이어졌다. 세비야에 있는 한국식당에서 오랜만에 김치찌개를 먹었기 때문이다. 탐방도 만족! 김치찌개도 만족!

 

* 새 모자이크: 당장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해도 될만큼 뛰어난 작품성을 나타내고 있다.

 

 

* 이탈리카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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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르타헤나: 컨셉시온성에서 바라본 풍광. 하단부에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극장이 보인다.

 

 

 

<재미난 스페인 18편> 카르타헤나

로마가 무서워했던 한니발, 그의 근거지 카르타헤나

 

가브리엘은 주정뱅이였다. 그를 만난 건 스페인 남부 카르타헤나(Cartagena)에 있는 한 오스탈(hostal)이었는데 그는 볼 때마다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호스텔(hostel)을 스페인에서는 오스탈이라고 부른다. 낯선 동양인이 신기했는지 필자를 앉혀두고 스페인어를 속사포처럼 구사하고 있었다.

대충 들어보니 자신은 카르타헤나 출신이고, 이 동네는 아주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로마보다도 먼저 페니키아인들이 정착지를 만들 정도로 카르타헤나는 중요한 지역이라고 했다. 가브리엘은 침을 튀기면서 열변을 토했지만 그가 하는 말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다. 또 필자는 카르타헤나 방문이 처음은 아니었다. 사정이 이러했지만 가브리엘이 민망하지 않게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베리아반도는 문명의 십자로였다. 그래서 많은 이민족들이 이베리아반도에 진출했다. 서고트족 이전까지 이베리아반도에 들어온 대표적인 세력은 페니키아, 그리스, 카르타고, 로마였다. 이들 중 페니키아가 큰 영향을 끼쳤다.

페니키아인들은 지금의 레바논 지역에 거점을 두고 지중해에서 활발하게 교역 활동을 했다. 페니키아인들은 이집트로 목재를 수출했고, 파피루스를 수입했다. 레바논에는 레바논 산맥이 있어 중동에 있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나무를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나무가 백향목이다. 레바논 소나무로 불리는데 현재 레바논 국기에도 표시되어 있다.

 

 

 

* 로마극장: 카르타헤나의 로마극장의 야경. 카르타고 시절은 물론 로마시대에도 카르타헤나는 무척 중요한 지역이었다.

 

 

 

파피루스는 비블로스(Byblos) 항구에서 배에 실려 그리스로 수출됐다. 이런 점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중계항의 이름을 따서 파피루스를 ‘비블로스’라고 칭했다. 바이블(bible)과 책(book)의 어원도 비블로스가 된다. 뿐만 아니라 유럽 여러 문자의 기원이 된 페니키아 알파벳도 비블로스에서 만들어져 그리스로 전해졌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페니키아의 비블로스 항구는 서구 문명의 모태였다고 할 수 있다. 비블로스는 현재 주바일로 불리고 있다.

페니키아인들은 기원전 1100년경부터 이베리아반도에서 상업활동을 했다. 그들은 향수, 염장(소금에 절인 생선), 귀금속 등을 팔았고, 금과 은 등을 사서 갔다. 페니키아가 쇠퇴하자 그 자리를 그리스인들이 채웠다. 그리스인들은 서남부의 해안선을 따라 정착촌을 만들었고, 이베리아인들에게 제련기술, 건축, 공예품과 같은 문물들을 전수해주었다. 이 당시에 스페인 고대문화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 만들어진다. 바로 <엘체의 여신상>이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814년, 지금의 북아프리카 튀니지에 세워진 나라이다. 페니키아 혈통인 카르타고는 작은 도시 국가에서부터 시작했지만, 차츰 페니키아의 식민지들을 병합해나갔다. 페니키아는 페르시아와 같은 중동지역의 국가들과 전쟁을 벌였는데, 이때 본국과 멀리 떨어져 있던 페니키아 식민지들은 무주공산이 되었고, 그 틈을 타고 카르타고가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카르타고가 지중해의 신흥강자로 등장한 것이다.

 

 

 

* 엘체의 여신상: 출처 위키커먼스

 

 

 

 

예전에 마피아들이 들끓었던,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은 지중해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다. 더군다나 튀니지의 카르타고와 시칠리아는 불과 200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 시칠리아에 로마인들이 들어와 지중해 무역을 하려고 했다. 카르타고가 느긋하게 이를 바라만 보고 있었을까? 지중해를 두고 펼쳐진 두 세력 간의 대결은 숙명과도 같았다.

기원전 264년, 1차 포에니(poeni) 전쟁이 발발했다. 페니키아인을 뜻하는 라틴어는 Poenicus인데 로마인들은 카르타고를 페니키아의 후예로 보았다. 그래서 카르타고와 로마와의 전쟁을 포에니 전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원전 241년, 23년간의 공방 끝에 로마가 승리를 했고,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에 대한 로마의 지배권을 인정한다.

카르타헤나 답사는 컨셉시온성(Castillo de la Concepción)에서부터 시작된다. 컨셉시온성은 구시가지의 언덕배기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카르타헤나가 얼마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카르타헤나항 입구를 좌청룡 우백호처럼 양 옆으로 산들이 서 있고, 그 가운데로 배가 오간다. 항아리처럼 항구 안쪽은 넓고, 물살은 잔잔하다. 입구를 지키는 산들이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카르타헤나항은 지금도 스페인 해군의 전략적 요충지로 잠수함의 모항으로까지 쓰이고 있다.

 

 

 

* 린테르나타워(Torre Linterna): 9세기 경에 제작된 탑으로 등대로 쓰였다. 또한 항구 일대를 감시하는 망루 역할도 했다.

 

 

 

이렇게 중요한 지역을 도시로 만든 인물은 하밀카르 바르카(Hamilcar Barca)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맹활약을 했던 한니발(Hannibal)이 그의 아들이다.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하밀카르 바르카도 1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로마군과 싸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명장이었다.

기원전 227년, 하밀카르 바르카는 북아프리카를 떠나 이베리아반도 동남부에 카르타헤나의 전신인 카르타고 노바(Carthago Nova)를 건설했다. 새로운 카르타고라는 뜻이다. 이곳은 방어에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인근에 은 광산도 있고, 곡물 생산에 유리한 경작지도 펼쳐져 있었다. 카르타고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하밀카르 바르카는 자신의 가문, 즉 바르카 가문이 이베리아반도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할 수 있게 큰 토대를 세웠다. 그는 와신상담하듯, 이베리아반도에서 로마와 맞설 군대를 키워나갔다.

로마 정복이라는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하밀카르 바르카가 죽는다. 권력은 그의 사위인 하스두르발에게로 넘어갔다. 하지만 하스두르발도 대업을 실행하지 못한 채 암살을 당하고 만다. 이제 드디어 한니발이 카르타노바의 최고 권력자로 오르게 됐다. 한니발은 자신 가문의 오랜 염원인 로마 정벌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해나갔다.

드디어 진격의 나팔이 울렸다. 한니발 부대가 로마의 보호 아래 있던 사군툼을 공격한다. 이 공격이 시발점이 되어 제2차 포에니 전쟁(BC 218~201)이 시작됐다. 사군툼은 현재 사군토(Sagunto)라고 불리는데 발렌시아에서 북쪽으로 약 30km 떨어져 있다.

 

 

 

* 로마 대 카르타고: 포에니 전쟁을 형상화한 기념품

 

 

 

한니발은 무려 10만 명이 넘는 병력을 이끌고 남부 프랑스를 거쳐 알프스산맥을 넘었다. 공격용 코끼리도 동원할 정도로 카르타고 군대는 위력이 대단했다. 이에 로마는 크게 당황한다. 코끼리까지 동원한 대규모의 병력이 이탈리아 땅에 침입했으니 크게 덜미를 잡힌 것이다. 물론 카르타고 군은 오랜 기간 행군을 하면서 많은 병력 손실이 있었다. 하지만 로마와 전투가 벌어지자 한니발은 큰 활약을 펼치며 연전연승을 했다. 많은 로마인들은 한니발에 대해서 공포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2차 포에니 전쟁에서도 로마는 카르타고에게 승리를 거둔다.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던 로마를 구한 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였다. 한니발이 그랬던 것처럼 스키피오도 허점을 노리는 전술을 펼친다.

이탈리아에 있는 한니발 군대를 제쳐두고 카르타고 노바를 공략한 것이다. 결국 한니발의 근거지이자 자원 줄이었던 카르타고 노바는 로마군에 의해 함락당한다. 이후 스키피오는 이베리아반도에 있는 카르타고 식민지들을 차례대로 점령해나갔다.

 

 

 

* 포에니 전쟁: 포에니 전쟁을 표현한 디오라마. 스페인 북부 하카에 있는 군 박물관에서 찍었다. 카르타고의 코끼리부대가 인상적이다.

 

 

카르타고는 이런 빈집털이(?) 전략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 세비야에서 북쪽으로 약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알카라 델 리오(Alcalá del Río)라는 평원이 있는데 이곳의 옛 지명은 일리파였다. 기원전 206년, 일리파에서 마고 바르카가 지휘하는 카르타고와 스키피오가 이끄는 로마가 맞붙는다. 마고 바르카는 한니발의 동생이었다. 그도 풍부한 실전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스키피오에게는 못 당했다. 일리파 전투에서 카르타고는 크게 패배했고, 이베리아반도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만다.

기원전 202년,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벌어진 자마 전투를 끝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종료가 된다.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은 크게 패배했고, 로마군에게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됐다.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삶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당대를 넘어 지금까지도 호명되는 영웅호걸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컨셉시온성은 그 자체로 훌륭한 전망대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정말 경이로울 정도였다. 카르타헤나의 일몰을 감상한 후 숙소에 갔더니, 역시나 가브리엘은 취해있었다. 필자가 아는 체를 하자, 가브리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페니키아인들의 전통 인사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서로 무릎을 들어서 우측으로 한 번, 죄측으로 한 번 부딪히는 방식이었다. 무슨 닭싸움 같았다. 서로의 무릎을 부딪치며 인사하는 방식이 존재하나? 주정뱅이의 취기 어린 행동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짜임새가 있어 보였다. 아직 가보지 못했는데 나중에 레바논에 가서 아무나 붙잡고 무릎 인사를 해봐야겠다. 잘못해서 필자가 ‘니킥’을 맞으면, 다 주정뱅이 가브리엘 때문이다!

 

 

 

* 카르타헤나 시청: 20세기 초반에 지어진 카르타헤나 시청 건물.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져 많은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 카르타헤나 지도

 

 

 

 

 

 

* 포르투: 포르투갈의 제2 도시인 포르투. 포르투갈의 어원이 되기도 한다. 사진에 보이는 다리는 포르투의 자랑인 동루이스 다리.

 

 

 

<재미난 스페인 17편> 포르투갈

- 포르투갈과 스페인, 비슷하지만 결이 다른 두 나라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후, 많은 사람들이 포르투로 이동한다. 순례길의 종착점인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포르투갈 포르투까지 약 230km 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아 부담 없이 이동할 수 있다. 산티아고콤포스텔라 버스터미널에서 티켓을 구매한 후, 이동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물어보았다. 약 4시간 30분 정도가 소요된다고 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직원은 무언가를 더 말해주는 듯했지만, 필자의 귀는 그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순례길에서의 피로가 가시지 않았는지 버스에 타자마자 잠이 들었다. 잠의 림프가 마법의 가루라도 뿌린 것처럼 맛있게 잠을 잤다. 얼마나 잤을까? 이쯤이면 포르투갈로 넘어왔을 테지. 스마트폰으로 시계를 봤다. 그런데 좀 이상한 거다. 1시간이 더 플러스 됐기 때문이다. 분명 오후 2시로 봤는데... 갑자기 3시가 돼버렸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포르투는 같은 위도상에 있는데 왜 시차가 생기는 거야...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서로 구별짓기를 하는 건가?

포르투갈은 1139년에 건국했는데 그 이전까지는 스페인과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로마의 점령, 서고트왕국, 이슬람 무어인들의 침공과 같은 역사적인 사건들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도루강(Douro)이나 테주강(Tejo)처럼 자연물도 함께 쓰고 있다. 도루강은 포르투에서 대서양으로 빠져나가는데 스페인에서는 두에로강(Duero)이라고 부른다.

테주강은 수도인 리스본을 거쳐 대서양에 합수되는데 스페인어로는 타호강(Tajo)이라고 부른다. 이렇듯 닮은 점이 많은 두 나라다. 한국사람들은 두 나라를 묶어서 여행하고, 가이드북은 두 나라를 묶어서 소개한다. 그렇다면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아무 문제 없는 형제 국가인가?

 

 

 

* 발견기념비: 리스본의 테주강변에 있다. 항해왕 엔히크 왕자, 사후 500년이 되던 1960년에 세워졌다. 엔히크 왕자는 포르투갈왕 주앙 3세의 아들로 포르투갈의 대항해 시대를 열게한 장본인이다.

 

 

 

11세기 말이었다. 이베리안반도 남쪽은 이슬람 세력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북쪽은 레온 왕국의 알폰소 6세(Alfonso VI, 1040~1109)가 통치하고 있었다. 용맹왕이라는 별칭이 붙은 알폰소 6세는 레온은 물론 카스티야왕국과 갈리시아왕국의 왕까지 겸임하고 있었다. 용맹왕이라는 별명처럼 알폰소 6세는 이슬람 세력과 연이어 전쟁을 벌이며 국토회복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때 엘시드(El Cid, 1043~1099)라고 불리는 걸출한 영웅이 나타나기도 했다. 엘시드는 이슬람 군대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모함을 받아 정처 없이 떠돌기도 했다. 말년에는 스페인 동부에 있는 발렌시아를 함락시키고, 실질적인 발렌시아의 군주로 자리매김했다. 당시 모로코 지역에서는 베르베르인 혈통의 알모라비데(almorávides)족이 흥기하고 있었다. ‘무라비트’라고도 불렸던 그들은 이베리아반도로 쳐들어왔는데 가톨릭 왕조의 군대들을 연이어 격파했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알모라비데족도 엘시드 군대에 의해 예봉이 꺾이게 된다. 알모라비데 군대가 발렌시아 인근 지역으로 진격했지만 엘시드 군대에 의해 패배했기 때문이다. 엘시드 군대는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알모라비데 군대를 물리쳤다. 이런 기적적인 승전보에 다른 가톨릭 왕조 군대들도 사기가 고양됐다. 사실 그 전투가 알모라비데 군대에 맞서 가톨릭 군대가 이룬 최초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 노란색전차: 수도 리스본의 상징중의 하나인 노란색 전차. 푸니쿨라라고도 불린다.

 

 

 

다시 알폰소 6세 이야기다. 알폰소 6세는 이슬람 왕국뿐만 아니라 같은 가톨릭 왕국들과도 전쟁을 벌여 영토를 확대해나갔다. 하지만 이슬람 세력들도 만만치 않았는데 1086년에 있은 사그라하스 전투에서 가톨릭 군대를 패퇴시킨다. 이에 알폰소 6세는 다른 가톨릭 왕조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됐는데, 이때 부르고뉴 공국이 화답했다. 부르고뉴 공국은 지금의 프랑스 동쪽편에 있는 공작령으로 프랑스 왕국의 방계 혈족이 다스리고 있었다. 머리가 아프신가? 어려운 지명 이야기보다 이해가 확 되는 단어가 있다. 부르고뉴 와인!

부르고뉴의 젊은 기사 라이문도와 엔히크가 참전했고, 열심히 싸웠다. 알폰소 6세는 용맹한 이 기사들을 사위로 삼는다. 딸인 우라카를 라이문도에게, 테레사를 엔히크에게 시집보낸다. 영지도 받게 되는데 라이문도에게 갈리시아 백작령을, 엔히크에게는 포르투갈 백작령이 주어졌다. 현재의 포르투갈의 북부 지역이 포르투갈 백작령의 영지였다.

포르투갈 백작이 된 엔히크는 자신의 영지를 독립국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1112년에 숨을 거둔다. 이때 3살 된 아들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아폰수 엔히크, 즉 포르투갈의 첫 번째 왕인 아폰수(Afonso I)였다. 하지만 너무 어렸기에 그의 어머니인 테레사가 섭정한다. 문제는 테레사가 친 카스티야 성향이었던 것이다. 결국 아폰수는 친 카스티야 세력들과 전쟁까지 벌여 그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후 1139년에 오리크에서 이슬람 군대를 상대로 크게 승리를 하기에 이른다.

 

 

* 아폰수1세: 포르투갈의 첫번째 왕인 아폰수1세의 상. 포르투갈 북부 기마랑이스성 앞에 서 있다.

 

 

 

이런 승리의 기운들을 발판삼아, 그는 포르투갈 왕국의 첫 번째 왕으로 즉위한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아폰수 1세의 등극에 카스티야의 알폰소 7세는 격분을 하고, 군대를 동원한다. 결국, 1143년 사모라 조약이 체결됐고 알폰소 7세는 포르투갈의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이렇게 독립국이 되는 것이 어렵다. 이후에도 아폰수 1세는 남쪽으로 계속 세력을 확장하기에 이르렀고, 1147년 10월에 잉글랜드군과 연합하여 리스본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같은 Afonso라는 로마자를 쓰는데 누구는 아폰수, 누구는 알폰소라고 기재를 하니 좀 어리둥절하다. 아폰수는 포르투갈식, 알폰소는 스페인식 표기이다. 참고로 아폰수 1세와 대립을 빚었던 카스티야의 알폰소 7세는 라이문도와 우라카의 아들이다. 한마디로 알폰소 7세와 아폰수 1세는 서로 사촌지간이다. 권력은 부모·자식 간에도 나누지 않는다는데 하물며 사촌지간에는 더욱더 나눌 수 없었을 것이다.

포르투갈에서는 스페인에서 독립한 날인, 12월 1일을 독립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 독립기념일의 기원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16세기 후반으로 시계를 되돌려야 한다.

1578년, 청년왕이었던 세바스티앙 1세(Sebastião I)가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모로코를 공격했다. 당시 모로코는 사드(Sa'd) 왕조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세바스티앙은 북아프리카에 가톨릭을 전파하겠다는 신념으로 원정을 나선 것이다. 하지만 지브롤터해협에서 남쪽으로 약 80km 정도 떨어진 알카세르키비르(Alcácer-Quibir) 전투에서 포르투갈군은 패하고, 세바스티앙도 전사하고 만다.

 

 

 

* 독립기념비: 리스본 중심가인 헤스타우라도르스 광장에 서 있다.

 

 

 

문제는 세바스티앙이 미혼이었다는 점이다. 결혼하지 않았으니 왕비도, 자식도 없었다. 이에 엔히크 1세(Henrique I)가 급히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엔히크 1세는 원래 성직자인데다 왕위에 오를 때 이미 나이가 66세였다. 그마저도 2년 뒤인 1580년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런 혼란을 틈타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의 왕위 계승자임을 주장했다. 알바 공작이 이끄는 스페인군이 침공했고, 결국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의해 병합된다. 이때부터 1640년까지, 포르투갈은 ‘60년간 포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이 기간 동안 포르투갈은 농업이 황폐해졌고, 흑사병 같은 전염병도 창궐하게 된다. 또한 해외식민지와 해군도 방치되고 있었다.

1640년 12월 1일, 스페인의 행태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던 포르투갈 귀족들이 행동에 나섰다. 총독궁을 습격한 것이다. 독립전쟁이 시작됐다. 이때 브라간사 공작이 주앙 4세가 되어, 포르투갈 왕위가 복원된다. 당시 스페인은 유럽의 신교도 국가들과 30년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또한 그 시기에 카탈루냐 지역에서 농민반란이 발생하여 대내외적으로 내홍에 휩싸였다. 전쟁은 오래 지속되었다. 무려 28년 동안 계속됐는데, 결국 1688년 리스본 조약에 의해 마침표를 찍게 된다.

리스본 중심부에 있는 헤스타우라도르스 광장에는 포르투갈의 독립을 기념하는 큰 조형물이 있다. 그리고 매년 12월 1일에는 독립기념일 행사가 펼쳐진다. 이렇듯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비슷한 듯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결이 다른 모습을 보인다. 같으면서도 구별되는 이런 모습들이 여행자들에게는 색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게 두 나라를 함께 여행하는 재미다.

 

 

* 거리축제: 리스본에서 만난 거리축제. 아줄레주로 장식된 의상이 인상적이다. 아줄레주는 포르투갈의 전통 공예품인, 푸른색 도자기를 말한다.

 

 

 

 

* 지도: 12세기 중반경의 이베리아반도 지도. 포르투갈의 건국 초기이다.

 

 

 

 

 

* 피스테라: 더 걷고 싶어도 더 걸을 수 없는 곳. 순례자들은 대서양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순례길을 되돌아 본다.

 

 

<재미난 스페인 16편> 갈리시아

스페인의 땅끝마을 피스테라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착점은 갈리시아(Galicia) 지역에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다. 약 800km의 순례길을 마친 순례자들은 비노(vino)잔을 기울이며 완주를 자축한다. 스페인에서는 와인을 비노라고 부른다. 이때 부지런한 순례자들은 다음 일정을 계획한다. 스페인의 서쪽 땅끝마을인 피스테라로 가는 사람도 있고, 국경을 넘어 포르투갈의 포르투로 가는 이들도 있다.

일단 서쪽으로 길을 잡아보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서쪽으로 약 90km를 가면 피스테라(Fisterra)가 나온다. 이곳을 스페인의 땅끝이라고 부르는데 순례길의 영향으로 다른 방위의 땅끝마을보다 훨씬 더 많이 알려진 곳이다. 참고로 북쪽 땅끝은 바레스(Bares), 동쪽 땅끝은 크레우스(Creus), 남쪽 땅끝은 타리파(Tarifa)다. 피스테라와 바레스는 둘 다 갈리시아 지역에 속하고, 크레우스는 카탈루냐, 타리파는 안달루시아 지역에 속한다.

순례길 본선 구간인 800km를 걷고도 성이 차지 않은, 혹은 에너지가 넘치는 순례자들은 피스테라까지 3일을 더 걸어간다. 그조차도 부족한 순례자는 피스테라에서 북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묵시아(Muxía)라는 어촌 마을까지 또 걷는다. 거의 900km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옛 로마인들은 이베리아반도 지역을 히스파니아(Hispania)라고 불렀는데 그중 피스테라를 세상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 세상의 끝에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 성인의 시신이 돌배에 실려 왔다. 이후 별들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발견됐고, 그 자리에 산티아고 대성당이 건립되니 유럽 각지에서 성지 순례를 오게 됐다. 이 스토리에 의거하면 피스테라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밑돌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 산티아고대성당

 

 

 

제자들이 돌배에 야고보의 시신을 실어 왔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석관을 말하는 듯싶다. 로마시대에는 돌로 만든 관, 즉 석관(石棺)을 많이 사용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든다. 그 먼 예루살렘 지역에서 그 험한 지브롤터 해협을 돌아 피스테라까지, 그들은 어떻게 올 수 있었을까? 더군다나 돌로 만든 배가 물에 뜰 수 있을까? 산티아고 순례길에 호감을 느끼고 계시는 분들에게는 이런 의문들이 좀 불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도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객관성은 순례자들에게도 필요한 덕목이니까...

갈리시아는 이베리아반도 북서쪽 모서리에 자리를 잡고 있다. 독자적인 언어와 고유한 풍습을 가지고 있는 터라 일각에서는 분리·독립을 요구하고 있다. 서쪽과 북쪽은 바다에 접해 있고, 내륙은 산지로 이루어졌는데 전체적으로 척박하다. 비도 많이 내리고, 습하다. 갈리시아 지역의 순례길을 걸을 때 소나기를 엄청 많이 만났는데 그때마다 우비를 썼다 벗었다를 반복했다. 그래도 그때 본 무지개들은 정말 예뻤다.

갈리시아는 산업이 발달하지 못했고, 아직도 농업이나 축산이 중심이다. 그래서 다른 지역에 비해 가난한 편이다. 갈리시아인들은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벗어나려고 고향을 떠나 유럽이나 남아메리카로 이주를 많이 했다. 가예고(gallego)는 ‘갈리시아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남아메리카 일부 지역에서 ‘가예고=스페인사람’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기에 이른다. 얼마나 많이 이주했으면 그런 도식이 생겼을까! 참고로 갈리시아의 이주민 후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쿠바에서 혁명을 일으켰던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생 라울 카스트로가 있다.

 

 

 

* 묵시아: 피스테라에서 북쪽으로 약 30km 떨어져 있다.

 

 

 

갈리시아는 서쪽으로는 대서양, 위쪽으로는 비스케이만에 면해 있다. 지도에서 그 해안선을 따라가다 보면 꽤 익숙한 윤곽선을 마주하게 된다.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다. 들쑥날쑥한 해안선이 마치 우리나라 서해와 남해를 보는 듯싶다. 얼핏 봤을 때 충남 태안과 서산의 모습이 연상될 정도다.

갈리시아 지역과 우리나라 서해, 남해의 복잡한 해안선을 두고 리아스(rias)식 해안이라고 부른다. 리아스식 해안은 과거에 육지로 되어있던 부분이 지각운동으로 인해 가라앉거나 해수면이 상승하여 나타난 해안선이다. 산이나 골짜기에 바닷물이 들어온 형태니, 외형적으로 해안선이 들쑥날쑥하며 복잡하게 생겼다.

섬들도 많은데 과거 산의 정상부였던 부분만 바닷물 위로 남아 섬이 됐다. 해안선이 복잡하고, 아기자기하다 보니 빼어난 자연경관을 선사한다. 우리나라의 한려해상 국립공원이나 다도해상 국립공원을 생각해보시라! 전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빼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곳들이다.

이런 리아스식 해안의 어원이 갈리시아 지역에서 나왔다. 스페인어로 리아(ria)는 ‘강의 하구’를 말하는데 이런 복잡한 해안을 말할 때 쓰인다. 뒤에 ‘s’가 붙어 복수형이 되어 리아스로 칭한다. 참고로 노르웨이에서 볼 수 있는 피오르(fjord) 지형도 매우 복잡한 해안선을 나타낸다. 피오르는 빙하에 의해 형성된 지형으로 바닷물이 U자 형태로 내륙 깊숙이 들어온 형태를 보인다. 갈리시아에 대해 알아보다가 세계지리까지 공부하게 됐다. 어쩌면 이것도 또다른 재미다.

 

 

* 피스테라: 0km 표지석. 뒤쪽으로 등대가 보인다.

 

 

 

피스테라로 가는 길은 인적이 드물었다. 겨울이라 그랬는지 순례자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을도 듬성듬성 있었다. 그런 만큼 지형은 척박해 보였다.

갈리시아를 위시한 스페인의 북부지역은 711년, 북아프리카의 무어인들이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했을 때도 미점령지로 남거나 그들의 지배를 비교적 짧게 받았다. 이슬람교도였던 무어인들에 맞서 그들은 718년, 아스투리아스(Asturias)왕국을 건립하여 가톨릭 국가 재건을 위한 구심점으로 삼게 된다. 이런 저항이 가능했던 밑바탕에는 북서부 지역의 험준함이 큰 몫을 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군은 아스투리아스 산맥의 험준한 지형을 잘 이용하여 722년, 코바동가 전투에서 이슬람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사실 서북부 지역은 로마도 가장 늦게 점령한 곳이다. 지형은 험준하고, 기후는 변덕스러우니 딱히 점령할 매력을 느끼지 못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의 원주민들이 로마의 영역으로 넘어와서 약탈해대니 아예 근원을 도려내고자 점령을 하게 됐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글 중에는 피스테라를 ‘세상의 끝’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표현은 잘못됐다. 피스테라는 스페인의 땅끝이지 세상의 땅끝은 아니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서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호카곶(Cabo de Roca)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은 유럽 대륙의 서쪽 끝으로 리스본과 가까워 한국인들도 많이 방문하는 곳이다. 해안절벽이 우뚝 서 있고 대서양의 세찬 파도가 장관을 이루는 곳이다. 호카곶이 바로 ‘세상의 끝’이다.

 

 

 

*호카곶: 포르투갈 리스본 인근에 있는 호카곶.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이다.

 

 

로마인들은 호카곶이 아닌 피스테라를 서쪽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 세상의 끝으로 첫 번재 순교자였던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들어왔고, 이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옮겨졌다고 이야기한다. 다른 일반적인 어촌 마을보다 피스테라로 들어온 것이 상징성이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만약 당시 사람들이 피스테라가 아닌 호카곶을 세상의 끝으로 생각했다면? 호카곶이 산티아고 순례길의 밑돌 역할을 했을까? 이런 상상을 해봤다.

피스테라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걷고 싶어도 더 이상 걸을 수가 없다. 그 앞에 대서양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순례자들은 기쁨 반, 아쉬움 반의 마음을 품고 땅끝 등대 아래로 향한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순례자들의 온 몸을 깨끗이 씻어주는 듯하다. 그 바람을 맞으며 무언가 다짐을 했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기에 순례에 사용했던 물품들을 등대 아래에 내려놓기도 한다. 신발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예전에는 불에 태우기도 했다는데 요즘은 환경 문제 때문에 그런 모습은 보기 어렵다고 한다.

오래전 국토종단을 끝내고 해남 땅끝마을에 갔을 때다. 그때도 바람이 많이 불었다. 대서양 못지않은 세찬 바람을 맞으면서 무언가 다짐을 했었다. 그렇게 땅끝마을들은 마음을 다잡게 해주는 곳이다.

 

 

 

 

* 순례자: 갈리시아 지역은 비가 많이 내린다. 그래서 우비를 썼다 벗었다를 자주해야 한다.

 

 

 

 

* 갈리시아지도

 

 

 

 

 

* 세비야대성당

 

 

 

<재미난 스페인 15편> 세비야

섞어찌개 같은 세비야

여행에도 궁합 같은 것이 있을까? 남여간의 사랑의 척도를 가늠하는 궁합이 여행지와 여행자간에도 존재할 수 있을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괜히 이상하게 끌리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그곳에 가면 좋은 일이 생기고, 신나는 일들이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스페인에도 그렇게 궁합이 맞는 도시가 있었다. 어디? 안달루시아 지역의 세비야(Sevilla)다. 세비야가 속한 안달루시아 지역은 남쪽에 있어서 그런지 스페인의 남도라고 불릴만 한 곳이다.

세비야를 첫 방문했을 때는 새벽 시간이었다.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편도 9시간 짜리 심야버스를 타고 세비야 아르마스 버스터미널에 하차했었다. 그때가 1월경이라 출발지였던 리스본은 좀 쌀쌀했었다. 언제 엄동설한이 닥칠지 모르는 1월 달, 그것도 초행길 어두운 새벽 시간에 도착이라니! 하지만 세비야는 세비야였다.

스페인의 남도라 그런지 동장군은 찾아볼 수 없었고 동네가 왠지 모르게 아늑하게 느껴졌다. 터미널 옆쪽에 강변길이 있어 그 길을 따라 걸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강은 과달키비르강(Guadalquivir)이었다.

과달키비르강은 길이가 657km에 달하는데 스페인에서 5번째로 긴 강이다. 안달루시아 동북쪽에 있는 하엔주에서 발원한 과달키비르강은 코르도바를 거쳐 세비야로 흐른 후 카디스에서 대서양으로 합수된다. 리스본을 거쳐가는 타호강, 포르투를 거쳐가는 두에르강과 달리 과달키비르강은 스페인에서만 흐른다.

 

 

 

* 과달키비르강: 사진 오른쪽에 황금의탑(Torre del Oro)이 보인다. 1220년대 만들어진 탑. 과달키비르강에 딱 붙어 있다. 강 주변을 감시하는 탑으로 이용됐다. 이후 행정사무소, 감옥, 해군사령부 등등... 꽤 다양하게 쓰였다. 탑의 둘레가 4각이나 8각이 아닌 12각이다. 과달키비르강은 안달루시아 지역을 동서로 흐르는 강으로 그 길이가 657km에 달한다. 세비야에서 물길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면 코르도바가 나오고, 하류로 내려가면 카디스가 나온다. 과달키비르강은 카디스에서 대서양으로 합수된다. 스페인어로 oro는 황금이란 뜻이다.

 

 

 

세비야를 유유히 흐르고 있는 과달키비르강에는 타르테소스(Tartessos)라는 고대 문명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타르테소스? 무척 낯선 이름이다. 타르테소스는 이베리아반도의 원주민들과 페니키아 문명, 그리스 문명이 결합하여 형성된 왕국이었다. 기원전인 BC12세기경에 건립됐는데 왕이 통치하는 정치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이베리아반도 최초의 문명국가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700년대에 60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하던 타르테소스는 기원전 500년경, 페니키아 문명을 뒤이은 카르타고 세력들에 의해서 사라졌다.

고고학적 발굴들이 진행되면서 타르테소스 왕국은 수면으로 올라왔지만 아직도 명징하게 그 실체가 드러난 것은 아니다. 기록에 공백이 생긴다면 상상력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갈 수도 있다. 그리스 로마신화를 보면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처자식을 죽인 대가로 12개의 과업을 수행해야 했다. 그중 하나가 서쪽 바다에 떠 있는 에리페리아라는 섬에 가서 게리온의 소를 빼앗아 오는 것이었다.

성공했을까? 헤라클레스는 천하장사가 아니던가! 그런데 게리온을 두고 타르테소스의 왕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헤라클레스가 세비야를 만들었다는 설화도 있다. 이게 가능할까? 그리스 로마신화는 자생적으로 발생한 게 아니라 페니키아와 이집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헤라클레스와 세비야와는 관계는 신화적 상상력으로 남겨두자. 그렇지만 세비야 사람들의 헤라클레스에 대한 사랑은 그것대로 존중해주고 싶다. 누가 뭐라고 하든 세비야 사람들은 헤라클레스가 자신들의 도시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세비야 시청에는 헤라클레스의 조각상이 새겨져 있다.

시청에서 트램이 운행되는 방면으로 가다 보면 머큐리 분수가 나온다. 그 옆쪽으로 공간이 좀 있는데 플라멩코 거리공연이 자주 펼쳐지곤 한다. 역시 세비야는 세비야였다. 플라멩코를 길거리 공연으로 관람할 수 있다니!

 

 

* 플라멩코: 플라멩코의 고장답게 세비야에서는 거리공연도 펼쳐진다. 뒤쪽에 머큐리 분수가 보인다.

 

 

 

봄바람에 꽃잎이 흩날리듯 붉은색 플레어치마를 입은 여인들이 플라멩코 춤을 추고 있었다. 열정을 불태우듯 그녀들의 몸짓은 더욱더 강렬해져 갔다. 그런 춤사위를 보고 있자니 필자의 몸도 반응하기 시작했다. 허리를 흔들거리며 발을 굴렸다. 우리 사물놀이 판에 들어갔으면 어깨춤을 들썩였겠지만, 플라멩코를 보고 있었으니 하체가 먼저 반응하는 듯했다.

플라멩코(flamenco)가 출현한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은 민족의 용광로라고도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발자취를 남긴 곳이다. 타르테소스인들을 시작으로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카르타고인, 로마인, 유대인 등이 삶의 터전을 일구었다. 특히 페니키아, 그리스, 카르타고 같은 해양 세력들은 안달루시아의 긴 해안선을 따라 정착지를 만들어갔다. 이에 비해 이베리아반도 북쪽과 서쪽은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 이후로도 안달루시아에는 고트족과 이슬람족, 그리고 집시족들도 들어오게 된다. 플라멩코는 이런 안달루시아의 용광로 같은 문화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플라멩코는 여러 문화가 융합되어 발현된 것이다. 안달루시아 음악에 북아프리카 이슬람 문화가 녹아들었고, 거기에 가톨릭과 유대인들의 문화까지 더해지게 된다. 15세기 전후로 유입된 집시족들의 문화까지 가미가 되어 플라멩코라는 퍼즐이 완성되기에 이른다.

플라멩코는 춤, 노래, 연주로 구성된다. 노래와 연주는 음악으로 묶일 수 있으니, 크게 보면 춤과 음악으로 나눌 수 있다. 춤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신을 이용하여 추는 터라 퍼포먼스가 상당히 강렬하다. 에너지 소모가 강한지 공연 틈틈이 바나나를 먹는 장면이 목격될 정도였다. 음악은 칸테(Cante)라 불리는 노래와 기타연주가 기본인데 그 외에도 퍼커션 같은 타악기도 흥을 살리는 데 이용된다.

‘아름다우면서도 한스럽다! 정열적인 충격이었다!’

이게 플라멩코에 대한 감상평이었는데 필자만 이렇게 느낀 게 아니었다. 어떤 수강생분과 이야기를 했는데 그 분도 필자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고 말씀해주셨다.

 

 

* 세비야대성당: 트램길 옆 대성당

 

 

 

이제 트램 레일을 따라 세비야 성당으로 이동한다. 시청 서쪽에 누에바 광장이 있는데 이곳이 트램의 종점이다. 이곳에서 트램을 타고 세비야 광장으로 갈 수도 있지만 겨우 한 정거장 거리라 그냥 걸어갔다.

세비야대성당은 유럽에서 세 번째로 가장 큰 성당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1987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40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무려 100년이 훨씬 넘는 1528년에 완공이 됐는데 원래 자리에 있던 이슬람 모스크를 헐고 성당을 짓게 됐다.

국토회복운동이 벌어지는 동안 가톨릭 왕조 안에 사는 이슬람인들을 '무데하르(mudéjar)'라고 칭했고, 이들의 예술을 무데하르 양식이라고 불렀다. 세비야대성당의 동쪽편에는 무데하르 양식으로 만들어진 히랄다(giralda)라는 종탑이 있다. 이슬람 무어인들의 통치 시기에 모스크의 첨탑(minaret)으로 만들어졌다가 이후 성당의 종탑으로 변형된 것이다. 히랄다탑은 높이가 무려 105m에 달하는데 탑 최정상부에 풍향계를 든 여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히랄다(giralda)는 스페인어로 '바람개비' 혹은 '풍향계'를 뜻한다.

이제까지 거대한 용광로라는 시점으로 세비야 일대를 둘러봤다. 아침부터 사대문 일대를 분주히 오갔던 소설가 구보씨처럼 세비야의 구도심을 오갔는데도 빠진 탐방 포인트들이 많다. 그 점이 좀 아쉽다. 열심히 탐방을 했더니 배가 고프다. 무엇을 먹을까? 섞어찌개가 생각나네. 정확히는 잡탕찌개다. 필자도 여행에 도가 텄나 보다. 스페인 세비야에서 잡탕찌개를 끓이고 있으니...

옆에서 잡탕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그때 세비야와 궁합이 맞는 이유가 생각났다. 세비야는 많은 것이 섞인 잡탕찌개 같은 매력이 있는 곳이다. 내 여행이 잡탕찌개인 것처럼...

 

 

 

* 하랄다탑: 키가 큰 히랄다(giralda)탑이 보인다. 무어인들의 통치 시기에 모스크의 첨탑(minaret)으로 만들어졌다가 이후 기독교인들이 세비야를 탈환한 후에 성당의 종탑으로 변형된다. 약 100미터 높이로 처음에는 르네상스식으로 만들어졌다 뾰족뾰족한 고딕 양식으로 변경된다. 탑 최정상부에 풍향계를 든 여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히랄다(giralda)는 스페인어로 '바람개비' 혹은 '풍향계'를 뜻한다.

 

 

 

* 타르테소스: 타르테소스의 세력권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표시했다. 지명은 편의상 현재의 명칭으로 기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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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빌라성: 둥그런 타워가 도열하듯 서 있다. 푸른하늘과 흰구름, 그리고 제비들이 서로 어우러진 모습이다.

 

 

 

<재미난 스페인 14편> 아빌라성과 한양도성

성곽이 이렇게 예쁠 수가 있어?

한참 성곽 답사를 다닌 적이 있었다. 일단 집과 가까운 한양도성을 주로 탐방하며 ‘답사 근육’을 길렀다. 서울 안쪽에 있는 4개의 산을 둘러 만든 한양도성은 그 길이가 무려 18.6km에 달한다. 그 4개의 산은 북쪽 북악산, 서쪽 인왕산, 남쪽 남산, 동쪽 낙산이다. 낙산은 처음 들어보시는가? 일품 야경을 자랑하는 낙산공원이 있는 곳이 바로 낙산이다. 모두 다 산책하기에 좋은 산들이라 필자가 행하는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프로그램의 에이스 역할을 해주고 있다.

한양도성 트레킹이 종료가 되면 다음으로는 북한산성, 아차산성, 탕춘대성, 호암산성 같은 서울에 소재한 산성들을 탐방했었다. 이렇듯 서울의 성들을 탐방하면서 종종 이런 대화들을 했었다.

“서울에도 성이 꽤 많네요.”

“그렇죠. 우리나라로 넓혀보면 더 많아요. 무려 이천 개나 됩니다.”

“네? 이천 개요?”

“그래서 우리나라를 성의 나라라고도 부를 수 있답니다.”

이 대목에서 수강생분들은 한결같이 놀라는 표정을 지으신다. 우리나라에 이렇게 성들이 많이 축조된 건 역사적으로 전란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페인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성(城)이 많은 곳이다. 특히 중앙에 자리 잡은 카스티야(Castilla)는 명칭 자체가 ‘성’을 뜻하는 카스티요(castillo)에서 나온 것이다. 11세기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였던 부르고스(Burgos)도 이름 자체가 ‘성’이다. 카스티야 지역은 광활하게 펼쳐진 메세타 평원에 자리잡고 있다.

 

 

 

* 아빌라: 아빌라 외곽 지역을 바라본 모습. 아빌라는 스페인 중부지역에 있다.

 

 

 

지리적으로 방어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래서 곳곳에 성을 쌓아 방어력을 높이려 했다. 더군다나 카스티야가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에서 선봉장 역할을 했던 터라 더더욱 많은 수의 성을 축조할 수밖에 없었다.

마드리드에서 약 1시간 30분 정도 기차를 타고 아빌라(Ávila)로 이동했다. 아빌라는 마드리드에서 약 11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그곳에 아빌라성(Walls of Ávila)이 있다. 아빌라성은 중세시대에 축조되어 구도심을 감싸고 있는데 그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다. 그래서 198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우리나라 성들도 그렇지만 스페인의 성들도 훼손되어 방치된 곳들이 많다. 도심지의 확장이라는 불가피한 상황에 직면하면 성체부터 훼손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스페인의 성들은 사방이 뚫려있는 평지성들이 대부분이라 도시가 확장하려면 필연적으로 성곽을 깨고 나가야 한다. 하지만 아빌라성은 지금도 성문을 닫고 농성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채가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사실 아빌라는 두 번째 방문이었다. 처음 방문했을 때는 어떻게 성채가 축조됐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서양의 성들은 주로 협축법으로 성채를 쌓는데 아빌라성도 협축법으로 제작되었다. 직접 올라가서 좁은 성곽길을 걸어보았다. 성곽길을 걷는데 돈을 받네! 우리 한양도성은 공짜인데!

아빌라 성처럼 평지에 만들어진 성은 협축법(夾築法)으로 축조된다. 협축법은 성벽을 큰 담장처럼 높게 쌓아 성 안팎을 확연하게 구분한다. 높은 담장처럼 쌓다 보니 위에서 내려다보면 성곽길은 좁을 수밖에 없다. 외형상 성 안쪽도 낭떠러지, 성 바깥쪽도 낭떠러지처럼 보인다. 주로 평지에 만들어진 유럽의 도시성벽들이 협축법으로 만들어졌는데 중국의 만리장성과 충북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도 협축법으로 제작되었다.

 

 

 

*아빌라성: 협축법으로 만들어졌다.

 

 

 

 

이와 달리 한양도성은 편축법(片築法)으로 축성되었다. 편축법은 한쪽만 성체를 쌓은 것을 말하는데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의 지형 조건에 부합되는 축성 방식이다. 협축법으로 쌓인 성들이 안쪽과 바깥쪽 모두 다 낭떠러지라면 편축법은 바깥쪽만 낭떠러지다. 한쪽만 쌓으니 돈도 덜 들고, 공기도 단축된다. 얼마나 좋은가.

또한 편축법은 지형과 합치되는 방식이기에 성체가 자연의 일부로 녹아든 형상을 보인다. 편축법은 산자락을 이용하여 축조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지 주로 산성의 형태로 나타난다. 대표적으로 남한산성, 북한산성이 그 예이다.

아빌라성 안쪽으로는 구도심이 자리 잡고 있다. 시간도 늦고 해서 아예 1박을 하기로 했다. 성북동 성곽마을을 탐방했을 때 ‘성곽을 벗삼아 하룻밤을 보내면 참 좋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장소는 달라졌지만 어쨌든 성곽마을에서 잠을 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잠이 들 무렵 빗소리가 들렸다.

스페인 중부지방의 하늘이 청명하게 드러났다. 성곽 트레킹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아빌라성은 한순간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처음 축조됐을 때는 1090년이었고, 12세기경에 방어에 적합한 성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로도 계속 성을 쌓았는데 그 시기가 14세기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 아빌라성: 성곽의 형태를 나타낸 조형물

 

 

아빌라성은 길쭉한 사각형처럼 생겼는데 총 길이가 약 2,500m에 달한다. 특이하게도 아빌라 대성당이 성곽 외벽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한마디로 대성당의 외벽이 아빌라성의 성채 일부를 담당하고 있다는 뜻이다. 성 안의 넓이는 약 9만 3천 평 정도 된다. 문은 9개가 있는데 이들 중 성 빈센트 문(Puerta de San Vicente)과 알카사르 문(Puerta del Alcazar)이 확연히 눈에 띈다. 이들 문 양 옆에는 측면 타워가 나란히 붙어 있어 문의 격조을 높여주고 있다. 그 쌍둥이 측면 타워는 높이가 무려 20m에 달한다.

88개에 달하는 반원형 타워도 연이어 늘어서 있다. 누렁이가 코를 내밀 듯, 둥그스름한 타워의 모습에서 입체감이 느껴졌다. 선을 긋듯 성채가 일직선으로만 세워졌다면 교도소 담장과 다를 바 없이 밋밋했을 것이다. 그렇게 타워의 볼륨감이 아빌라성을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다. 더군다나 한양도성에서는 연이어 늘어선 타워를 볼 수 없기에 더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성벽의 높이는 평균 12m 정도인데 6~7m 사이인 한양도성에 비하면 훨씬 더 높은 셈이다. 12m 높이의 성벽을 어떻게 오른단 말인가! 더군다나 필자처럼 똥배가 나온 사람은...

 

 

 

* 아빌라성: 성 안쪽에서 바라본 모습. 협축법으로 지어져서 성곽길 양 옆은 낭떨어지가 된다.

 

 

 

 

아빌라성과 한양도성을 계속 묶어서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다. 둘 다 시티월(city wall)이기 때문이다. 시티월은 도시성벽이라고 불리는데 왕족이나 귀족들이 거주하는 캐슬(castle), 요새로 불리는 포트레스(fortress), 성채라 불리는 시타델(citadel)과는 좀 다른 개념이다. 성벽 안과 밖을 엄격하게 구분하기 위해 만들었기에 캐슬이나 포트레스, 시타델보다는 크기가 더 크다. 도시를 둘러싸는 만큼 기본적으로 사각형 형태를 띤다. 물론 지형을 따라 만드니 형태가 싹뚝 떨어지지는 않는다.

참고로 시타델은 ‘작은 도시’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육각형의 별모양으로 축성된다. 시티월이 성벽을 한 겹으로 두른 형태라면 시타델은 겹겹이 쌓아 올린 겹성 형태다. 그래서 방어력이 훨씬 더 증강되었다. 시타델 안에 마을을 짓기도 하지만 주로 도시 외곽이나 혹은 도시와 별도로 세운다. 시티월의 방어력이 부족하다면 별도의 시타델이 함께 축성되는 식이다.

순례길에서 첫 번째로 만나는 대도시인 팜플로나에는 구도심을 시티월이 감싸고 있고, 별도로 육각형의 시타델이 있다. 팜플로나 시타델이 순례길 바로 옆에 있지만 다음 목적지로 가는 길이 바뻐서인지 순례객들은 그냥 지나쳐간다. 그 모습이 좀 안타까웠다. 저 좋은 걸 그냥 지나치다니!

아빌라성의 길이가 2,500m라 약 30~40분이면 한 바퀴를 다 돌 수 있다. 한양도성은 18.6km이라 순성을 제대로 하려면 10시간 정도가 필요하다. 밥 시간은 둘째치고, 북악산과 인왕산 성곽길이 상당히 난코스이기 때문이다. 산을 꽤 잘 타는 사람들도 북악산 성곽길의 계단에서는 숨을 가쁘게 몰아쉴 정도다.

비가 온 뒤라 하늘은 더없이 맑고 푸르렀다. 느긋하게 성곽 트레킹을 하며 사진을 찍었다. 둥글둥글한 타워들이 사열하듯이 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흰구름과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성곽이 이렇게 예쁠 수가 있어? 우리 한양도성도 예뻐!

 

 

 

* 알카사르 문(Puerta del Alcazar): 양 옆에 측면 타워가 있어 문의 격조를 높여주고 있다.

 

 

 

* 아빌라 지도

 

 

 

 

 

 

* Large figure in a shelter: 거대 대피소라는 명칭의 작품. 게르니카와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대성당 인근에 있는 parque de los pueblos de Europa 공원에 있다. free palestine!

 

 

 

<재미난 스페인 13편> 스페인 내전과 게르니카

게르니카에서 <게르니카>를 봤다!

스페인에 대해서 잘 모를 때였다. 그래도 유럽역사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서 게르니카(Gernika)에서 일어난 학살사건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1937년 스페인 내전 당시였다. 프랑코 군대를 돕기 위해 나치 독일의 공군기들이 게르니카를 폭격한다.

지도를 찾아보았다. 바르셀로나를 위시한 카탈루냐 지역을 쭈욱 훑어봤다.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프랑코 군대에 반대한 인민전선이 바르셀로나를 임시수도로 정할 만큼 카탈루냐 지역은 반 프랑코 정서가 강한 곳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게르니카도 카탈루냐 지역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바스크 지역에 있었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있는 빌바오의 옆 동네가 바로 게르니카였다. 이게 무슨 창피인가...

스페인은 1898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그나마 남아있던 식민지들까지 잃게 된다. 미국에 푸에르토리코, 필리핀, 괌을 넘겨줬고, 쿠바는 독립하게 된다.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제국에서 유럽 변방으로 완전히 몰락한 것이다. 그 이후로도 스페인은 내외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됐다.

1923년 9월에 바르셀로나에서 쿠데타가 일어난다. 그 유명한(?) 프란시스 프랑코가 군사 반란을 일으켰는가? 아니다. 미구엘 프리모 데 리베라(Miguel Primo de Rivera)라는 카탈루냐 주둔군 사령관이 군대를 동원했다. 총리에 오른 리베라는 독재 정치로 자유를 억압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일정 정도 경제발전을 이루게 된다. 당시 왕이었던 알폰소 13세는 리베라의 독재 정치를 슬쩍 눈감아 주었다.

짧은 호황기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29년, 미국에서 경제 대공황이 발생했고 그 여파가 대서양 건너 스페인에도 퍼지게 된다. 독재 정치에 대한 반감, 악화하는 경제상황 등등... 여러 악재가 겹쳐지자 리베라는 사임하게 된다. 이때가 1930년 1월이었다. 그는 프랑스로 망명을 하게 됐는데 사임을 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아 파리의 한 호텔에서 병사하게 된다.

 

 

 

* 게르니카대성당: 스페인 내전 이후로 복원됐다.

 

 

 

리베라가 집권하던 1920년대, 유럽에서는 파시즘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군사독재를 이끌던 리베라도 파시즘을 동경했다. 실제로 그는 이탈리아에 가서 당시 파시스트당을 이끌고 있던 베니토 무솔리니와 회담을 한다. 이때 리베라는 존경의 의미로 무솔리니에게 두체(duce)라고 칭하게 된다. 두체는 ‘총통’ 혹은 ‘수령’으로 쓰이기도 하고, ‘공작’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미구엘 프리모 데 리베라가 사망한 후, 3년 뒤인 1933년이었다. 그의 아들인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José Antonio Primo de Rivera)가 팔랑헤(Falange)라는 파시스트 정당을 결성한다.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는 팔랑헤를 통해서 자신의 아버지의 이념을 계승하려고 했다.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는데 이때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는 공화파 정부에 의해 체포됐다. 군사반란을 사주했다는 죄목이었는데 결국 그는 1936년 11월에 총살됐다.

팔랑헤의 유산은 군사반란의 지도자인 프랑코가 계승했다. 이념과 정책을 뒷받침해 줄 파시스트 정당을 발 밑에 두고 공화파 정부에 총부리를 겨누었던 것이다.

1931년 4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국왕 알폰소 13세가 이탈리아로 망명을 한 것이다. 같은 달에 있었던 선거에서 군주정 폐지를 선언한 좌파 세력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4월 14일에 제2공화국이 선언됐고, 알폰소 13세는 스페인을 떠나게 된다. 이로써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약 230년간의 통치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완전히 끝은 아니었다. 프랑코가 사망한 후 다시 부르봉 왕조가 부활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도 혼란이 멈추지 않았다. 1931년 좌파, 1933년 우파, 1936년에는 다시 좌파가 집권하게 된다. 이때 각각의 집권 세력들은 전임 정부의 정책들을 되돌려 놓았다. 예를 들면 당시 초미의 관심사였던 농지법은 ‘좌파정책 -> 우파정책 -> 좌파정책’으로 마치 실타래가 꼬이듯, 꼬이게 된다.

이런 혼란을 틈타 군부가 13년 만에 다시 쿠데타를 일으킨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 것인데 이때가 1936년 7월 17일이었다. 좌파 세력이 인민전선을 결성하여 선거에서 승리한 지 5개월이 지난 때였다. 동남아시아도 마찬가지인데 스페인 사례처럼 한 번 쿠데타가 일어나면 계속 일어나게 된다. 그러니 애초부터 그 뿌리를 싹 뽑아버려야 한다.

 

 

 

 

* 게르니카: 스페인 내전 당시의 모습을 담은 전시물들.

 

 

 

스페인 내전 초기에 군부는 남북 종심축으로 작전을 펼쳤다. 당시 아프리카 지역 사령관인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는 남부 안달루시아 지역에 상륙하여 북쪽으로 진군했다. 반대로 나바라 주둔군 사령관인 에밀리오 몰라(Emilio Mola)는 북쪽인 팜플로나에서 남쪽 방향으로 진격했다.

남북으로 치고 오던 군사반란군들이 서로 연결됐고, 수도인 마드리드를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공화국 지지자들이 버티고 있던 마드리드는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에 프랑코는 마드리드를 남겨두고, 북부 지역 공세에 주력한다. 공화국의 세력 범위에 있던 북부 지역들이 차례차례 반란군들에게 함락됐다. 이 시기에 게르니카 학살도 발생하게 된다. 그때가 1937년 4월 26일이었다.

‘내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스페인 내전은 국제적이었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프랑코 군대를 위해 참전했다. 반면 소련과 멕시코가 공화국군을 지원했다. 이와 별도로 세계 각국에서 온 의용병들이 국제여단이라는 이름으로 공화국을 위해 싸웠다. <동물농장>, <1984>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도 파시스트들과 싸우기 위해 총을 들었다. 조지 오웰은 전투 중에 총상을 입기도 했는데 그런 스페인 내전의 경험을 담아 <카탈루냐 찬가>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출간하게 된다.

조지 오웰 이외에도 앙드레 말로, 존 콘포드와 같은 문인들이 직접 참전했다. 또한 알베르 카뮈, 생텍쥐페리, 파블로 네루다, 루이 아라공,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등... 수많은 예술가들이 공화국 정부에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나치 독일은 게르니카에 중무장한 폭격기와 전투기를 보냈다. 폭격으로 인해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많은 시설물들이 파괴됐다. 당시 공화국 측에서는 1,600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평화로웠던 작은 도시가 한 순간에 지옥으로 변한 것이다.

그럼 왜 독일은 게르니카를 공습했을까? 새로 개발한 전략 무기들을 테스트하기 위해서였다. 신무기들의 파괴력을 확인하기 위해 무고한 게르니카 시민들을 희생시켰던 것이다. 게르니카 공습이 있고, 약 2년 뒤에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 게르니카: 게르니카에서 본 피소의 <게르니카>. 원본은 마드리드에 있는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에 있다.

 

 

 

 

<게르니카>는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 중에 공화국의 요청으로 그린 작품이다. 피카소는 게르니카에서 벌어진 만행을 화폭에 담아 전쟁의 비참함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그런데 당시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던 피카소는 프랑코가 집권하는 한 조국으로 <게르니카>를 보낼 수 없다며, 미국에 그림을 맡겨버렸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조국 스페인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돌려보낸다는 조건이었다.

40년 넘게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타향살이'를 했던 <게르니카>는 드디어 1982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영원할 거 같았던 프랑코의 철권통치도 1975년, 그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후 스페인은 발 빠르게 민주화로 나아갔다. 그림의 반환에 스페인 국민들은 크게 환호했다. 전세계 사람들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스페인이 오랜 독재체제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사회로 거듭났음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빌바오에서 게르니카로 향하는 전철을 탔다. 약 50분 정도 걸렸는데 바깥 풍광이 예뻐서 지루하지 않았다. 드디어 게르니카에 도착했다. 게르니카는 아담했지만 활기차 보였다. 현재의 게르니카에는 스페인 내전 당시의 상흔이 크게 남아있지 않았다. 거의 다 복구가 된 거 같았다. 사실 서울도 한국전쟁을 혹독히 겪었지만 지금 서울에 한국전쟁 때의 상흔이 남아있는 장소가 거의 없지 않은가? 대신 곳곳에 조형물을 설치하여 그때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렇게 곳곳을 탐방하다 드디어 <게르니카> 벽화 앞에 서게 됐다. 드디어 <게르니카> 벽화를 내 두 눈으로 보게 됐다. 피카소가 그린 오리지널 <게르니카>는 마드리드에 있는 레이나 소피아 국립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고, 이 벽화는 오리지널을 복제한 것이다. 어쨌든 복제한 것이지만 게르니카에서 <게르니카>를 보게 됐다.

게르니카 대성당 위쪽에 유러파 공원이라는 곳이 있어 그곳을 찾아갔다. 대성당도 당시 폭격의 참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크게 훼손이 됐고 이후에 복구하게 된다. 그래서 아랫돌과 윗돌의 색깔이 다르다.

공원이 조용하고 쾌적해서 산책하기에 적당했다. 야외 조형물들도 세워져 있었는데 동네가 동네인만큼 모두 평화를 주제로 하고 있었다. 한적한 공원에서 산책을 하다 보니 여행에서 온 피로가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평화로운 느낌도 들었다. 그렇게 게르니카에서 평화의 느낌을 받게 됐다.

 

 

 

 

 

* 유로파공원: 대성당 인근에 있다. 산책하기에 정말 좋았다. 이곳에서 평화에 대해서 곱씹어 보았다.

 

 

 

 

 

 

 

 

*게르니카 지도

 

 

 

 

 

* 몬세라트: 돌산인 이곳에서 가우디는 큰 영감을 얻었다. 바르셀로나 인근에 위치함.

 

 

 

<재미난 스페인 8편> 5일 천하로 끝난 카탈루냐공화국

- 도대체 2017년에 카탈루냐에 무슨 일이?

 

스페인은 지역색이 강한 곳이다. 그래서 지방자치도 잘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카탈루냐는 지방자치를 뛰어넘어 스페인 중앙정부에서 독립을 하고자 한다. 마치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영국에서 분리돼 스코틀랜드 국가를 원하듯이, 카탈루냐 사람들은 독자적인 '카탈루냐 국가‘를 원하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카탈루냐 지역 일대를 여행하다보면 매우 정치적인 낙서들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 카탈루냐는 스페인이 아니다

- 스페인은 정치범을 붙잡고 있다

카탈루냐 사람들은 카탈루냐가 스페인 역사에 편입된 건 1700년대 이후였다고 주장한다. 불과 300여 년 전에는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지역이기에 스페인 중앙지역인 카스티야와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한다.

 

 

 

* 바르셀로나: '스페인은 정치범을 붙잡고 있다'라는 낙서. 그걸 누군가가 지우고, '스페인 우선'이라는 내용으로 바꿔놓았다.

 

 

 

카탈루냐는 카탈란어라는 독자적인 언어가 있는데 예전에는 사용이 금지된 적이 있었다. 탄압이 가중될수록 그들의 카탈란어 사랑은 더 깊어갔다. 바르셀로나 인근 레우스(Reus) 출신인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도 카탈란어를 사랑했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1924년 9월이었다.

당시는 쿠데타로 집권한 프리모 데 리베라가 통치를 하던 독재정권 시기였는데 가우디는 카탈란어를 사용하다 경찰에 붙잡히게 된다. 경찰의 모욕과 탄압이 있었지만 가우디는 끝내 스페인어 사용을 거부했다. 카탈루냐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가우디의 굳은 심지가 돋보이는 사건이었다.

이런 흐름들은 실제적인 행위들로 도출됐다. 카탈루냐 공화국의 설립이 바로 그것이다. 역사적으로 카탈루냐 국가를 설립하려는 시도는 여러번 있었지만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독립국가에 대한 열망은 꾸준히 발현되었고, 몇 해 전인 2017년에도 실행되기에 이른다.

2024년 8월 8일, 바르셀로나에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일이 벌어졌다. 카를레스 푸지데몬(Carles Puigdemont)이라는 전 카탈루냐 자치정부 수반이 7년 만에 귀국했는데 깜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당시 푸지데몬은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카탈루냐를 위해 함께'라는 정당의 환영행사에 참여를 했었다. 이 행사에서 그는 카탈루냐 독립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하는 연설을 한다. 수많은 지지자들에 둘러싸여 연단에 오르고, 또 퇴장을 했다. 이후 준비된 자동차를 타고 모임장소에서 벗어났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가? 정치인이 연단에 올라 정치적인 발언을 하겠다는데...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푸지데몬은 여러 가지 혐의로 스페인 공안당국에 수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회합장소에서 벗어나 자택으로 간 것이 아니라 국경을 넘어 갔다. 수많은 지지자들이 블록 역할을 했고, 결국 그를 체포하기 위해 대기하던 경찰들은 허탕을 치고 만 것이다.

 

 

 

* 푸지데몬: 전 카탈루냐 자치정부 수반. 출처 Wikimedia Commons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스페인 중앙정부는 푸지데몬의 행동에 촉각을 세우게 됐는가? 2017년 10월이었다. 카탈루냐의 분리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가 있었고, 독립찬성으로 결과가 나온다. 이에 카탈루냐 국가가 선언됐고, 초대 국가수반으로 푸지데몬이 권좌에 오른다. 푸지데몬을 비롯한 독립파는 이를 카탈로냐 공화국(Republic of Catalonia)으로 칭했다.

바르셀로나를 수도로 삼은 카탈루냐공화국은 약 32만km²로 그 크기가 벨기에(약 30만km²) 보다 조금 더 크고, 인구는 약 700만 명 정도였다. 2022년 카탈루냐의 국내총생산(GDP)은 2,441억 달러로 2,558억 달러인 포르투갈에 좀 못 미치는 수준이다. 벨기에 정도의 땅 크기와 포르투갈 정도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21세기에 출현을 했다면 유럽 역사가 새로 작성됐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결론을 알고 있다. 2017년에 등장한 카탈루냐공화국은 시작과 동시에 멸망했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카탈루냐공화국에 대해서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더 이상할 정도다.

일련의 사태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알아보자. 분리독립을 가만히 보고 있을 중앙정부가 아니었다. 당시 스페인 총리였던 마리아노 라호이는 헌법을 발동하여 주동자였던 푸지데몬을 해임했다. 또한 반역죄와 배임 등의 죄목으로 수배령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고향을 등지고 벨기에로 망명하게 되고, 카탈로냐화국은 5일 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카탈루냐 공화국이 5일 천하로 끝난 후, 권력의 공백은 중앙정부가 메꾸게 된다. 스페인 중앙권력은 4개월 동안 까탈루냐를 직접 통치하게 된 것이다.

 

 

* 카탈루냐기: 카탈루냐어로 세녜라(Senyera)라고 부른다. 이 문양은 원래 아라곤 연합왕국의 표식이었다. 그래서 카탈루냐 뿐만 아니라 아라곤, 발렌시아 등 옛 아라곤 왕국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 에스텔라다(Estelada): 카탈루냐 독립세력들이 흔드는 깃발로 카탈루냐 민족주의를 상징한다. 비공식 깃발이다.

 

 

 

2017년 카탈루냐 독립 문제는 스페인을 넘어 전 유럽을 뒤흔들어 놓았던 일대 사건이었다. 푸지데몬의 망명, 중앙정부의 강경 대응 등으로 독립파들의 예봉은 꺾이게 된다. 하지만 그 불씨는 여전히 잠재해있었다.

7년이 흐른 2024년 8월, 푸지데몬은 자수를 하겠다는 조건으로 다시 카탈루냐 땅을 밟을 수 있게 됐다.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을 한 후 경찰에 연행되는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자수를 하지 않았고, 7년 전처럼 국경을 다시 넘어간 것이다.

분리독립은 경제문제와도 얽혀 있다. 만약 카탈루냐가 스페인의 다른 지역들보다 가난하다면? 물론 경제력 여부에 따라 독립운동의 향방이 결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돈이 다른 지역들보다 더 많이 걷히고 있다면 그 부분이 썩 내키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카탈루냐의 국내총생산(GDP)은 2022년 기준으로 스페인 전체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다. 이를 두고 분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기여가 큼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는 그만큼의 혜택을 돌려주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스페인의 다른지역보다 더 많은 돈을 중앙정부에 보내지만 정작 카탈루냐로 돌아오는 재투자 비용은 그보다 더 적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손해를 보고 있다는 뜻이다.

 

 

 

* 사그리다파밀리아: 바르셀로나의 명물 사그리다파밀리아.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를 했다.

 

 

 

이런 주장들은 경제위기와 맞물려 설득력을 얻게 됐다. 2010년경에 남부유럽에 경제위기가 닥치는데 해당되는 국가들의 앞 글자를 따니 PIGS가 됐다. 포르투갈(Portugal), 이탈리아(Italy), 그리스(Greece), 스페인(Spain). 필자가 다 좋아하는 국가들인데 어쩌다가 ‘돼지들’이라는 굴욕적인 멸칭을 얻게 됐을까... 어쨌든 이런 재정위기가 닥치자 카탈루냐 분리주의자들은 스페인 중앙정부의 무능을 왜 자신들이 짊어져야 하냐며 불만을 표출했다. 독립을 하여 독자적인 경제정책을 수행하면 더 잘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까지 2017년도에 있었던 카탈루냐공화국 사건을 중심으로 카탈루냐 문제에 대해 알아보았다. 지금이야 잠잠하지만 카탈루냐 문제는 언제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다. 마치 경제위기가 언제든 다시 발생할 수 있는 것처럼...

남북이 갈린 분단국에 사는 이에게 카탈루냐 문제는 어떻게 다가올까? 굳이 누구의 편을 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새겨진 감정은 있었다. 신기함!

 

 

 

 

* 카탈루냐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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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노스티아-산세바스티안: 아르굴산에서 바라본 시내와 콘차해변

 

 

<재미난 스페인 7편>

5억 명이 스페인어를 쓰고 있는데, 스페인어가 없다고?

명색히 필자가 역사트레킹 마스터 아닌가? 그래서인지 숲길트레킹을 무척 좋아한다. 겸사겸사 나무에 대한 지식을 넓히겠다고 숲학교에 등록한 적이 있었다.

"세상에 참나무는 없습니다. 딱 이게 참나무라고 찍어서 부를 수 있는 나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 전날에 참나무 장작으로 구운 삼겹살을 먹었는데... 그 말대로 하면 난 존재하지도 않는 나무로 고기를 구웠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말이 맞았다. 참나무라는 종은 없다. 참나무는 특정되는 나무가 아닌 참나무 종류를 모두 아우르는 통칭이다. 그룹을 연상하시면 좋을 듯싶다. 그룹명은 참나무이고, 보컬 갈참나무, 기타 굴참나무, 베이스 상수리나무, 드럼 졸참나무, 키보드 신갈나무, 퍼커션 떡갈나무... 여기서 언급된 여섯 나무를은 이른바 참나무 육형제라고 불린다. 그게 그 나무인 거 같아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분하기가 쉽지가 않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후였다. 스페인어가 배우고 싶어서 회화책도 사고, 동영상도 찾아보았다.

"세상에 스페인어는 없습니다. 애초에 스페인어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어요."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참나무 때처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동영상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골랐다.

현재 스페인어는 전세계 인구 중 약 5억명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다. 영어를 뛰어넘어 중국어 다음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다. 스페인 본국을 필두로 스페인의 옛 식민지였던 중남미 국가와 아프리카 적도에 있는 적도 기니 등 20개국이 사용을 한다. 참고로 적도 기니(Equatorial Guinea)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1968년에 독립을 한다. 프랑스 식민지였다 1958년에 독립한 기니(Guinea)와는 구별되는 나라다. 적도 기니는 아프리카 주권국 중에서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스페인어는 미국에서도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히스패닉'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실텐데 히스패닉은 미국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주로 중남미 출신자들인데 그 수가 약 5천 만명이 넘는다. 그 수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스페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마당에 스페인어가 없다고 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 도노스티아-산세바스티안: 바스크 이름인 도노스티아와 카스티야어인 산세바스티안이 병기됐다. 그나저나 맨홀 뚜껑이 사각형이다.

 

 

서기 711년, 북아프리카에 있던 이슬람 무어인들이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하였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 왕국은 무어인들의 무력 앞에 몰락하고 만다. 이후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고 불리는 국토회복운동이 1492년에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무려 800년이란 시간이 소요된다. 그 오랜기간 동안 이베리아반도 내에서는 여러 왕국들이 등장한다. 그 왕국들이 자리잡은 지역에서는 해당 지역의 색채가 강하게 묻어있는 언어가 분화, 발전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등장한 언어는 카스티야어,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 바스크어 등이다.

1479년, 이베리아반도 중앙에 위치한 카스티야왕국과 지금의 카탈루냐 지역에 위치한 아라곤왕국이 합쳐져 카스티야-아라곤 공동왕국이 형성된다. 이후 1492년, 마지막 이슬람 왕국이었던 그라나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국토회복운동은 종료가 된다. 그해 콜롬버스는 신대륙을 찾아 돛을 올렸다.

스페인이 지금과 같이 통일된 형태를 갖춘 시기는 카를로스 1세(Carlos Ⅰ)가 즉위한 1516년 이후이다.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겸했는데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칼 5세(Karl Ⅴ)로 불렸다. 카를로스 1세의 아들은 그 유명한 펠리페 2세다.

카스티야왕국의 주도로 통일된 스페인왕국이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언어도 카스티야어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스페인이 어떤 나라인가? 그 어떤 유럽 국가들보다도 지역색이 강한 나라가 아니던가? 카스티야로 대변되는 중앙권력에 대한 반대 움직임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크게 4대 언어 권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권역은 민족적인 분포와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카스티야어: 약 74%

카탈루냐어: 12%

갈리시아어: 8%

바스크어: 1%

기타

지금은 중심어이지만 카스티야어도 예전에는 북부 지방의 방언 중 하나였다. 이후 12세기 경, 스페인의 중북부 지역에 카스티야-레온왕국이 들어서게 됐는데 그때 궁중언어로 사용됐다. 15세기 후반 카스티야왕국은 이후 아라곤왕국과 병합했고, 카스티야어는 명실상부한 스페인의 가장 중심이되는 언어로 자리매김한다.

 

 

 

* 사그라다 파밀리아: 건축가 가우디가 설계한 성가족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 바르셀로나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카탈란어라고도 불리는 카탈루냐어는 동북쪽에 위치한 카탈루냐, 발렌시아,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사용되고 있다. 동북쪽의 중심 도시는 그 유명한 바르셀로나이다. 발렌시아는 바르셀로나에서 남쪽으로 약 3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발레아레스 제도는 지중해에 있는 섬들인데 중심도시는 팔마이다. 발렌시아에서 약 280km 정도 떨어져 있다.

카탈루냐(Cataluña)는 프랑스와 근접해있어서 그런지 역사적으로 공유되는 점들이 꽤 많다. 언어도 그렇다. 카탈루냐어는 남부 프랑스에서 사용되는 프로방스어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카탈루냐어를 배운 이들 중에는 카탈루냐어가 카스티야어와 프랑스어를 섞어찌개를 한거 같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한다. 한편 위에 언급된 지역들 이외에도 피레네산맥에 있는 작은 나라 안도라도 카탈루냐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가예고(gallego)라고 불리는 갈리시아어는 이베리아반도 서북쪽에 위치한 갈리시아(Galicia) 지방에서 사용되는 언어다. 갈리시아는 포르투갈의 바로 위쪽에 위치해있는데 포르투갈의 건국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포르투갈이 갈리시아 백작령에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갈리시아어는 포르투갈어의 조상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에우스카라(euskara)라고 불리는 바스크어는 바스크(Basque) 지방에서 사용된다. 바스크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에 있는 피레네 산맥 서쪽에 위치하는데 스페인은 물론 프랑스에도 바스크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유럽 지역은 보통 라틴어의 영향을 받아 로망스어군을 이룬다. 카스티야어,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들 모두 로망스어군이다. 프랑스어, 포르투갈어도 로망스어군에 속한다. 하지만 바스크어는 로망스어군이 아닌 독자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다. 로망스어군이 사방으로 둘러쌓여 있지만 자신만의 고유성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를 두고 언어학상으로는 고립어라고 부른다.

바스크인들은 그들이 즐겨 쓰는 독특한 외형의 바스크베레모처럼 자신들만의 고유한 정체성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자부심의 토대를 이루는 것 중 하나가 바스크어이이다.

 

 

 

* 바르셀로나 지하철역: 카탈루냐광장역(plaça de catalunya). c자가 아닌 ç자다. 아래에 작은 갈고리가 달렸는데 이걸 두고 '세디유'라고 부른다. 발음이 〔프라카〕가 아닌 〔프라사〕가 된다.

 

 

 

여기서 각 언어를 비교해보자.

영어: hello / 카스티야어 hola / 카탈로냐어 hola / 갈리시아어 ola / 바스크어 kaixo

영어: plaza / 카스티야어 plaza / 카탈로냐어 plaÇa / 갈리시아 cadrado / 바스크 plaza

영어: see you later / 카스티야어 hasta luego / 카탈로냐어 fins després / 갈리시아어 vémonos despois / 바스크어 gero arte

영어: please / 카스티야어 por favor / 카탈로냐어 si us plau / 갈리시아어 por favor / 바스크어 mesedez

영어: how much? / 카스티야어 ¿Cuánto? / 카탈로냐어 quant? / 갈리시아어 canto? / 바스크어 zenbat?

영어: cheers! / 카스티야어 ¡salud! / 카탈로냐어 salut! / 갈리시아어 saude! / 바스크어 topa!

영어: thank you / 카스티야어 gracias / 카탈로냐어 gracies / 갈리시아어 gracias / 바스크어 eskerrik asko

다른 언어보다도 바스크어가 확실히 두드러지게 구별된다. 한편 카스티야어에서 의문문과 감탄문을 한 번 보자. ¡salud!(건배!), ¿Cuánto?(얼마에요?). 다른 언어와 달리 거꾸로 뒤집어져 있는 느낌표와 물음표를 앞에 하나 더 써주어야 한다. 그래야 문장이 완성된다. 그나저나 건배 너무 많이 하지 말자. 돈이 너무 많이 나온다.

이런 지역 언어들은 1978년에 개정된 헌법에 따라 카스티야어와 함께 공식적인 위치를 부여받는다. 지도나 도로명 같은 공공문서에 카스티야어와 각 지역어가 동시에 기재된다. 예를 들어 바스크 지역에 있는 도노스티아(Donostia)라는 도시는 산세바스티안(San Sebastián)이라는 명칭을 동시에 기재한다. 도노스티아가 바스크어고, 산세바스티안이 카스티야 명칭이다.

앞서 참나무 육형제처럼 스페인의 지역어를 그룹으로 빗대서 생각해봤다. 리더는 카스티야어일 것이다. 그런데 나머지 멤버들이 만만치가 않다. 불화설이 계속나오고, 그룹을 탈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멤버도 있을 정도다. 리더 입장에서는 꽤 골치가 아플 것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내가 스페인어, 정확히는 카스티야어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 하나를 써본다.

¡yo soy peregrino!(나는 순례자입니다!)

종교, 철학을 떠나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인생길에 순례자가 아니던가!

 

 

 

 

* 스페인의 지역어 분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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