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 Prob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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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여행을 하면서 별의별 일들을 다 겪는다. 그렇다. 여행이 우리 스케줄대로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 여행자들은 그때마다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까? 매번 짜증을 낼 것인가, 아니면 문제없다며쿨하게 넘길 것인가?


몇 해 전. 서울 촌놈인 난, 설레는 마음을 안고 유럽여행을 떠났다. 난생 처음 유럽에 가는 길이라 유럽스타일좀 낸다고 옷도 사고, 신발도 사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또 한 푼이라도 아낀다는 생각에 수수료가 저렴한 곳을 골라 환전을 하기도 하고, 여행 정보를 얻는다고 10시간 동안 꼼짝 않고 웹서핑을 하기도 했다. 그런 나를 보며 누구는 유럽여행 두 번 가면 어디 실려 가겠다고 질책을 하기도 했다. 하긴 그 말도 맞았다. 여행 준비에 골몰하는 바람에 난 두통약까지 복용해야 했으니까.

가을 하늘이 유난히도 청명했던 10월의 어느 날, 난 인천공항에서 파리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새로 산 옷과 신발을 신고 영자 신문을 넘기며 폼을 좀 잡아봤다. 또 목에 힘주며 환전한 유로화도 꺼내서 세워보기도 했다. 하지만 폼 잡는 것도 잠깐 그 순간이었다. ? 비행기를 타고 10시간 동안 기내에 갇혀 비행을 한다는 게 어디 만만한 일인가! 시간이 흘러갈수록 내 몸은 계속 축 늘어져갔다.

승무원들이 음료카트를 끌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음료 서비스 시간이었던 것이다. 내가 원래 술을 잘 못하지만 그날만큼은 음료카트에 실린 위스키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냥 한 잔 제대로 마시고 잠을 청하고 싶었다.

음로 하씨게써요?”



좀 어눌한 한국말로 내게 음료를 권하는 스튜디어스는 베트남 출신 여승무원이었다. 한국말은 어눌했지만 자태가 고운 미인이었다.

이쓰키로 할까요?”

덜컹. 난기류를 만났는지 비행기가 잠시 흔들렸다. 그래서 그 승무원의 말이 더 어눌하게 들렸다.

다시 덜컹. 나는 좀 겁이 났지만 승무원들은 그런 난기류들이 익숙한 듯 각자 자신의 일에 집중을 하는 듯했다.


, NO!"

하지만 이 말과 함께 그 승무원 손에 들려 있던 위스키 잔이 내게 엎어졌다. 앞서보다 더 큰 난기류에 기체가 더 심하게 요동쳤고, 그녀는 중심을 잃고만 것이다.


잔에 가득 담긴 위스키가 내 얼굴에 쏟아졌고, 난 상반신이 다 젖어버렸다. 옷 상의는 물론 팬티까지 싹 다 젖었다. 난 안경을 쓰는데 우산 없이 길거리에서 비를 맞듯, 내 안경 위로 위스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잠시 멍하게 지켜봐야 했다. 한마디로 난 위스키 샤워를 한 것이다.


미안해


당혹스러웠는지, 그 승무원은 어찌할 줄을 모르게 내게 반말을 했다.


내가 할게

그녀는 또 반말을 하며, 음료 카트 아래쪽에서 수건을 꺼내 내 얼굴에 들이대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수는 실수를 부르는 법이다. 수건을 들이대는 순간 그 승무원은 또 중심을 잃고 내 쪽으로 몸이 쏠렸는데, 그 틈에 수건이 들린 손이 내 얼굴을 강타하고 말았다.


정말 미안해, 미안해

그녀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의 연속된 실수로 고객의 소중한 여행을 망쳐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운이 좋았다. ? 나 같은 너그러운(?)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비행 중에 만난 난기류를 인력으로 막을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군다나 그 베트남 승무원이 일부러 실수를 하고 싶어서 실수를 했겠는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위스키에 혀를 살짝 다시어, 익살스럽게 맛보기를 할 정도로 난 큰 문제가 없었다.


“No, Problem!"









그렇게 난 확실하게 의사표현을 하고 그녀에 손에 들린 수건을 빼앗아 얼굴과 상의를 구석구석 닦았다. 그런 나의 침착한 모습에 그녀도 안도가 됐는지, 잔뜩 경직됐던 얼굴이 좀 풀렸던 것 같았다.


내 몸 구석구석을 한참동안 닦고, 안경도 닦았더니 나도 좀 정신이 들었다. 수건을 돌려줄 때 자세히 보니 그 수건 밑단에 고추장이 좀 묻어 있던 게 눈에 띄었다. 경황이 없던 승무원이 사용안한 마른 수건을 준다는 걸 이미 사용한 걸레를 준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지만 난 그것조차 쿨하게 넘겼다.


그런 우여곡절을 넘기며 난 샤를 드골에 무사히 도착했다. ‘위스키 샤워 사건이후, 그 베트남 승무원이 내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최고급 위스키를 건넸는데 그걸 한 잔 마셨더니 내내 좀 알딸딸했다.  내게만 제공된 특별한 술이었는데, 미녀 승무원이 권한 술잔이라 더 취기가 올랐던 걸까? 아니면 시차적응이 되지 않아서일까? 드골 공항에서 들려오는 프랑스어가 제대로 내 귀에 착착 감기는 느낌이었다. 마치 여기저기서 랩을 부르는 것처럼 들렸다.


출발부터 그런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있어서 그랬는지, 당시의 유럽여행은 정말 재미있었다. 어차피 여행을, 그것도 국내가 아닌 해외여행을 떠난다면 애초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때마다 짜증을 내고, 언성을 높일 것인가? 한 가지라도 더 느끼고 배운다는 자세로 여행길을 떠난다면 잠시 잠깐의 불편은 지혜롭게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일이 있을 때, 언성 높이지 말고 이렇게 한 번 외쳐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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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Prob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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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장을 정리하다가 2012년에 간행된 <하늘사랑 수기공모전> 모음집이 보이더군요. 몇 페이지를 넘기니 그 속에 제 이름이 적혀 있더군요.


최우수상!  제목은 No problem!


학교 다닐 때는 상장 하나 못 받아봤는데... 나이가 들고, 글을 쓰다보니 저렇게 상도 받아보네요. 그것도 가작이나 우수상이 아닌 최우수상이라니! 정말 학교 다닐 때는 성적이 바닥을 기었었는데... ㅋ


이제껏 공모전에서 여러번 상을 받았는데 아직까지는 1등은 못 해봤답니다. 물론 우수상이나 가작도 매우 훌륭한 것지요. 하지만 평생 1등을 한 번 못 해봐서 그런지 대상 한 번 타보는 것이 정말 소원 중에 소원이랍니다.


만약 1등상을 받는다면, 기왕이면 상금이 큰 대회에서 받고 싶네요. 짭잘하게 상금을 챙기게요. ^^;   


4년에 발간된 책자를 보면서 잠깐이나마 옛날 생각을 떠올려 봅니다. 위에 글은 원문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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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을 '무대'로 삼은 거창아시아1인극제



제9회 거창아시아1인극제 참관기


16.08.11 12:00  최종 업데이트 16.08.11 18:12

곽동운


             





    

 

▲ 양반춤 양반춤을 추고 있는 이삼헌. 뒤로 보이는 산이 삼봉산이다. 백두대간 삼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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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을 무대 배경으로 삼는다면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까요? 백두대간을 무대 일부로 끌어온 연극제가 있다면, 그 연극제는 어떤 멋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갈까요? 만약 그런 연극제가 있다면 풍류를 제대로 타는 연극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백두대간을 무대 배경으로 '쓴' 거창아시아1인극제

실제로 그런 연극제가 있었습니다. 지난 7월 29일부터 30일까지, 이틀에 걸쳐 삼봉산문화예술학교에서 개최된 제9회 거창아시아1인극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삼봉산문화예술학교의 다른 이름은 거창귀농학교입니다. 거창귀농학교는 백두대간인 삼봉산을 올려다 볼 수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1인극제의 무대 배경으로 백두대간 삼봉산이 쓰일(?) 수 있었던 겁니다. 

'거창아시아1인극제'가 9회째를 맞이했다고 기술했지만 '아시아1인극제'는 올해로 27회째입니다. 1988년 서울 바탕골 소극장에서 펼쳐진 '아시아1인극제'가 '거창아시아1인극제'의 전신이기 때문입니다.

바탕골에서 1회 대회를 치른 이후 '아시아1인극제'는 대만, 일본, 인도,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을 순회하며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그 이후 충남 공주에 있는 공주민속박물관이 주최가 되어 1인극제를 무대에 올리게 됩니다. 명칭도 바뀝니다. '공주아시아1인극제'로.



▲ 나비와 소녀 극단 마네트의 김봉석이 '나비와 소녀'라는 마임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저 소녀의 옷이 걸쳐진 나무에 자석이 달린 종이 나비들이 붙여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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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와 같이 경남 거창에서 1인극제가 무대에 오르게 된 건 2007년부터였습니다. 백두대간 삼봉산이 올려다 보이는 거창귀농학교에서 무대가 펼쳐지니 그때부터는 '거창아시아1인극제'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모노드라마(monodrama)가 백두대간 아래에서 펼쳐졌고, 벌써 9회째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올해 대회는 작년에 비해 참가팀이 많았습니다. 이틀에 걸쳐 23개 팀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거기에 더해 관람객으로 참가한, 23개 팀에 등재되지 않았던 '국악소녀'가 특별출연 형식으로 무대에 올라 타령 한 곡조를 뽑아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연극제가 풍성해질 수 있었던 건, '한국민족춤협회' 회원들의 발걸음 때문이었습니다. 지난 3월 19일, 대학로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한 '한국민속춤협회' 회원들은 이번 거창아시아1인극제에 대거 참석했습니다. 우리 민속춤을 계승·발전시키고자 발족한 한국민속춤협회 회원들 덕택에 거창아시아1인극제도 한층 빛이 났던 것입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공연 프로그램을 소개해보겠습니다.







▲ 만신 서문정 마고당 서문정. 작두를 타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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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커피 때문에 장군님이 노하셨나?

이번 연극제는 만신 서문정(마고당)의 작두굿으로 시작했습니다. 21살 때 신내림을 받은 서문정은 서해안배연신굿 예능보유자인 김금화 선생에게서 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황해도를 위시한 서해안지역의 굿은 퍼포먼스가 강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인지 서문정의 작두굿도 그런 문법에 충실했습니다. 혀 위에 날카로운 식칼을 올려놓기도 했고, 큰 작두 위에서 두 발을 쿵쾅거리며 뛰기도 했습니다.

연극제 스태프로 참가한 저는 그 작두를 잡아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서문정이 작두를 타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지를 못했습니다.

그렇게 작두지기를 하다 보니 에피소드가 하나 발생했습니다. 작두지기도 굿에 참가한 일원이다 보니, 굿하는 동안만큼은 다른 잡스러운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집중해야 한다는 뜻이죠. 하지만 너무 더워서 그랬는지 작두지기를 하는 내내 저는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생각했습니다. 
   
'아이스커피 사 먹으려면 읍내까지 내려가야 되는데... 그래도 시원하게 한 잔 했으면 ...'

작두굿은 무사히 마쳤습니다. 관객들 호응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액운(?)이 끼었습니다. 제 휴대폰이 굿을 할 때 쓰이는 정화수에 완전히 젖었기 때문입니다. 시원하게 젖어서 전원이 나가버렸습니다.

'장군님이 노하셨나? 아직 할부도 많이 남았는데... 시원하게 물먹었네.'  



▲ 서예 퍼포먼스 서예 퍼포먼스를 펼친 김기상. 오른쪽에서 두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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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 퍼포먼스와 통영오광대 문둥춤

두 번째로 무대에 오른 작품은 신평 김기상 선생의 서예 퍼포먼스였습니다. 김기상 선생은 몽둥이 같은 큰 붓을 들고 일필휘지의 기운으로 획을 쳐나갔습니다. 그렇게 흰 천 위에 한 획 한 획이 이어지다보니 어느 순간 한 편의 작품이 탄생되더군요. 채 5분도 되지 않은 시간에 작품이 완성된 것입니다.

짧은 시간에 완성된 작품이었지만 미적으로는 무척 뛰어났습니다. 검은 선들에서 붉은 꽃들이 피어나와 꽃망울을 터뜨리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그런 아름다움 때문인지 김기상 선생의 작품은 다음날(30일) 공연 내내 무대 뒤편에 걸려 있었습니다. 배경막으로 쓰인 셈이죠.

이외에도 첫날 공연에는 이강용씨가 춘 문둥춤 공연이 상당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문둥춤은 통영오광대 놀이의 첫 번째 마당으로 덧빼기 춤의 정수라고 불립니다. 여기서 덧빼기는 장단을 말하는 것이죠.

문둥춤에서 광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한 맺힌 삶을 춤으로 승화하려 합니다. 통상적으로 이런 식으로 내용이 전개되면 극의 분위기가 무척 가라앉았을 겁니다. 하지만 문둥춤이 오광대놀이의 첫째마당 아닙니까. 비록 광대는 흉한 모습의 탈을 썼지만 입에서는 걸출한 입담을 쏟아냈습니다. 춤에 풍자와 해학을 담아 자신의 한을 승화시킨 것이죠.



▲ 문둥춤 문둥춤을 추고 있는 이강용.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꼬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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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혼: ​우리문화연구회 타악 연주팀. 타혼.





풍류를 탔던 양반춤

1인극제는 그 다음날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둘째 날(30일)은 우리문화연구회 '타혼'의 난타 공연으로 시작됐습니다. 쿵쾅거리는 북소리가 축제의 둘째 날이 시작됐음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장중한 북소리의 울림이 공연장 곳곳을 휘몰아친 후 백두대간을 향해 뻗어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더군요.

이어진 공연은 춤꾼 이삼헌의 양반춤이었습니다. 이삼헌씨는 원래 발레를 전공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한국 무용으로 '전공'을 전환한 후 지금까지 우리 전통춤을 추고 있다고 합니다. 서양무용과 한국무용을 두루 섭렵한 것이죠.

그런 이삼헌씨의 이력 탓인지 그가 추는 양반춤은 남다른 멋이 있더군요. 흰 한복을 입고 무대에 올라 부채를 펼치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백두대간 삼봉산이 펼쳐지니 풍류가 제대로 장단을 탔던 것이죠.



▲ 인형한마당 얼씨구 판타지 인형극 '얼씨구'를 공연중인 고규미. 2화 꽃의 환생을 연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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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와 소녀

인형극 공연과 마임 퍼포먼스도 펼쳐졌습니다. 극단 상사화의 고규미씨는 '인형한마당 얼씨구'를 통해 판타지 인형극을 선보였습니다. 인형극은 '1화 할아버지 얼씨구'와 '2화 꽃의 환생'으로 이루어졌는데 2화를 설명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람의 인생은 누구나 꽃처럼 오고 언젠가 꽃처럼 갑니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인생들이 꽃처럼 편안하고 행복하면 좋겠습니다.'

극단 마네트의 김봉석씨는 마임 퍼포먼스를 펼쳐주셨습니다. '나비와 소녀'라는 마임이었는데 정신대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공연이었습니다. 소녀의 옷이 걸린 나무의 등장으로 극은 시작됩니다. 그 옷을 걷어낸 자리에는 날갯짓을 하며 날아온 나비들이 자리를 잡습니다. 나비들이 꽉 들어차자 나무에 불이 밝혀집니다.

'나비를 좇는 소녀는 꿈을 꿉니다. 그러나 나무에 못이 박히듯 소녀의 몸은 상처로 얼룩지고 꿈은 무참히 깨집니다. 이제 살아있는 이들이 상처를 덮고 다시 소녀로 되돌려주려 합니다. 아름다운 나비의 꿈으로...'


▲ 나비와 소녀 마임 퍼포먼스 '나비와 소녀'를 펼치고 있는 김봉석. 나비가 날아온 나무에 보라색 등이 점등이 됐다.  뒤편 건물에는 동영상 프로젝트 빔을 쏘고 있다.



      



'나비와 소녀'에 대한 팸플릿의 소개글이었습니다. 관람객이 자석이 박힌 종이나비를 직접 나무에 붙여주는 등, 이 마임 퍼포먼스는 관객친화적인 공연이었습니다. 또한 위에 소개글처럼 많은 울림을 담은 공연이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첫째날 작두굿 공연을 한 만신 서문정은 이런 소감을 밝히더군요.

"공연을 보면서 죄책감을 느끼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보는 내내 죄스러운 마음이 들더군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임 공연을 보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아려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좋은 마임 퍼포먼스를 펼쳐주신 김봉석씨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아사라토 연주: ​아사라토를 연주하고 있는 일본인 켄토. 켄토는 이번 1인극제에 참여한 유일한 외국 국적자였다. 아사라토는 북아프리카 지역의 타악기인데, 호두만한 두 개의 물체를 부딪혀 소리를 낸다. 치고, 흔들고, 불고... 그렇게 소리를 낸다. 즉흥 공연이 가능하고, 다른 악기와 협연도 쉬운게 아사라토의 장점이다. 정식 공연이 끝나고 뒤풀이 자리에서 켄토의 즉흥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켄토는 아사라토 연주만 13년 째라고 한다. 저렇게 공연을 하며 전세계를 누빈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켄토도 풍류객인 것이다.

 







사드 반대 춤

거창아시아1인극제의 대미는 한국민족춤협회 이사장인 장순향 선생께서 해주셨습니다. 장순향 선생은 '사드(THAAD) 반대' 춤을 추셨습니다. 원래 선생께서는 산조춤을 추시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무대에 오르셨을 때는 '사드 반대'라는 큰 부채를 펼치며 춤사위를 펼쳤답니다.

선생도 처음부터 저 춤을 출 계획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공연을 바로 앞 둔 시점에 착상이 떠올라 즉흥적으로 춤을 추셨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순식간에 창작춤을 이끌었던 셈입니다. 

아시아1인극제가 열린 거창은 사드 배치 후보지인 성주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습니다. 사드 배치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인지 '사드 반대' 춤이 주는 의미가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 않더군요.

과연 우리나라에 사드가 필요한 것인지, 만약 그 사드 체계가 설치가 된 후에 실전에서 사드 미사일이 발사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한반도, 더 나아가 동북아 지역은 지도상에서 지워질지 모릅니다.

사드 반대 춤을 끝으로 이틀에 걸쳐 펼쳐진 제9회 거창아시아1인극제도 무사히 종료가 됐습니다. 백두대간 삼봉산을 배경 삼아서 그랬는지 춤사위는 더 멋들어졌고, 노랫가락은 더 흥에 겨웠습니다. 거창아시아1인극제가 풍류를 제대로 탔던 것이죠.







▲ 사드 반대 사드 반대 춤을 추고 있는 한국민족춤협회 이사장 장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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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머리'가 되도 좋아!


돌담 쌓기가 그렇게 어려울 줄이야~!




16.07.25 09:47 최종 업데이트 16.07.25 09:47

             곽동운(artpunk)             







     

 
▲ 돌담 완성된 돌담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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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은 정겹습니다. 돌담을 끼고 걷는 것만으로도 푸근함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돌담 쌓기는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우선 '손'이 많이 갑니다. 그렇게 만만치 않은 돌담 쌓기 작업을 해봤습니다. 저는 현재 거창귀농학교라는 곳에 기거하고 있는데 그곳의 외부 담벼락이 붕괴됐습니다. 그것을 수리하는 데 제가 '발품'을 팔았습니다.

돌담을 쌓으려면 황토 흙을 반죽해야 합니다. 밀가루 반죽하듯이 반죽해야 합니다. 그래야 찰기가 생기니까요. 황토를 손으로 반죽할 수는 없습니다. 발로 밟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굉장히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 황토반죽 작업을 제가 맡았습니다. 맨발로 황토를 밟는데 마치 늪에 발이 빠지는 느낌이 들더군요. 찰기 때문이죠. 그렇게 맨발로 하다 보니 흙 속에 숨어 있는 작은 돌들에 상처가 나기도 합니다. 장화를 신고 싶어도 장화를 신을 수가 없었습니다.

장화가 본드에 붙은 것처럼 반죽에서 안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한 발 떼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황토 반죽을 고무 대야에서 하는 이불 빨래 정도로 생각했다가 아주 큰 코 다쳤습니다.
 






 
▲ 무너진 돌담 무너진 저 돌담을 수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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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너진 돌담. 뒤쪽에서 본 모습







그렇게 반죽된 황토를 바르고 돌을 올렸습니다. 돌담에 쌓는 돌들은 계곡돌이라고 해서 좀 매끈한 녀석들을 쓰는 게 좋습니다. 그 계곡돌들을 층층이 쌓은 후 진흙으로 빈틈을 채우게 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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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기와를 올렸습니다. 동네의 돌담들은 그냥 돌만 올리지만 우리는 예전부터 기와까지 올렸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암키와를 올리고, 수키와를 덮고... 옛 우리조상들이 쌓았던 방식과 동일하게 돌담을 쌓게 된 것이죠.

돌담을 쌓다보니 옛날 성을 쌓았을 때의 모습들이 유추되더군요. 서울성곽 같은 경우, 우리가 보고 있는 성체는 조선 후기 이후에 중수한 것들입니다. 두부돌이라 불리는 거대한 장판석(長板石)이 그것들입니다. 하지만 조선 초기에는 잔석(殘石)이라 하여 크기도 작고, 형태도 울퉁불퉁한 돌들로 성체를 올렸습니다.


잔석들은 퍼즐 조각처럼 딱딱 들어맞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딱 들어맞지 않는 부분에는 황토가 들어갔습니다. 찰기가 살아있는 황토가 잔석들의 빈 공간을 채워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황토 흙도 성체의 일부분이었던 것입니다.







 

 
▲ 돌담 쌓기 반죽된 황토를 바르고 돌들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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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토 반죽. 저렇게 반죽을 하면 본드가 부럽지 않을 정도다.






그냥 벽돌에다 시멘트 발라서 올리면 작업은 편해질 테지요. 하지만 시멘트가 발린 벽돌담은 돌담처럼 정겨움을 주지 못합니다. 시멘트는 갈라지면 흉하게 보이지만 돌담은 갈라져도 그것 자체로 보기가 좋습니다.

돌담 작업을 하느라 제 옷은 황토로 뒤범벅이 돼버렸습니다. 옷이 완전히 진흙탕이 된 것이지요. 하지만 조상들의 작업 방식과 동일하게 돌담을 올렸다는 것만으로도 뿌듯한 일이었답니다.

돌담작업을 하다 보니 서울성곽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겹게 봐왔고, 수도 없이 탐방했던 서울성곽인데 눈앞에 돌담을 보니 불현듯 서울성곽이 그려지는 겁니다.

그러고 보면 저도 우리 돌문화에 깊게 빠진 듯합니다. 서울 성곽길을 걷고, 돌담길에 환호하며, 돌장승들을 탐방하는…. 그렇게 제 머릿속에는 '돌'들이 가득합니다. 우리 옛 조상들의 슬기와 자연미를 담고 있는 그런 '돌'들이 제 머릿속에는 가득한 것입니다. 그럼 제 머리는 '돌머리'인가요?
 






 
▲ 돌담 완성된 모습. 기와까지 올려진 돌담.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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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덕에 '미역국'을 마시다

 온라인 기사와 종이책... 대립적인 관계도 아닌데





▲ 브런치북 프로젝트 자신의 글을 종이책으로 만날 수 있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 공모전이다.




'브런치'를 아시나요? 브런치는 카카오에서 만든 글쓰기 플랫폼입니다. 글쓰기가 편할뿐더러, 작가와 독자들 간의 거리를 확 줄여주었다는 것이 장점인 플랫폼이죠.

브런치는 매년 두 차례에 걸쳐 <브런치북 프로젝트>라는 공모전을 개최합니다. 자신이 쓴 글이 종이책으로 발간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어, 수많은 지원자들이 공모전에 노크를 한다고 합니다.

저도 그 지원자들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글빨'을 발휘하며 지원을 했지요. 그런데 유의사항을 체크해보니 기운이 빠지더군요.

"전자책도 아니고 종이책인데... 왜 이런 조항이?"

유의사항 다섯 번째 조항 때문이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역사 트레킹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공모전에 도전했습니다. 해당 글들은 전부 다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들이었습니다. 그 기사들은 브런치뿐만 아니라 제 다음 블로그나 네이버 블로그에도 옮겨 놓았답니다. 조금이라도 제 글이 파급력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 그렇게 한 것이죠.

그런데 저만 이렇게 여기저기 온라인 매체에 옮기기를 할까요? 저한테만 무슨 저장 강박증(?)이 있어서 여기 저기 블로그에 자신의 글들을 심어 놓는 걸까요? 글 꽤나 쓴다는 분들은 자신만의 홈페이지나 블로그, 혹은 페이스북을 가지고 있습니다. 브런치 작가들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런 블로그나 페이스북에는 브런치에 담긴 글과 동일한 글들이 있을 겁니다.

여기서 '김칫국 마시는' 가정을 한 번 해보죠. 저처럼 <오마이뉴스>나 혹은 다른 온라인 신문에 기고한 글들을 모아 브런치 공모전에 도전한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죠. 그 사람들 중 상당수는 자신의 블로그나 페이스북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운이 좋았는지 그 사람은 수많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당당히 수상의 영광을 안게 됩니다. 이제 자신의 글을 종이책으로 만나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얼굴은 일그러지고 말 겁니다.

 




▲ 브런치북 프로젝트 밑줄 친 유의사항 덕택(?)에 필자는 접수와 동시에 떨어졌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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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웹/앱 서비스에 중복 게재할 수 없습니다' 이 부분 때문입니다. 수상자는 부랴부랴 자신의 블로그나 페이스북에서 해당 글을 일일이 삭제, 혹은 숨김으로 돌려놓겠죠. 그런데 온라인 기사는 어떻게 할까요. 해당 언론사에 연락해서 기사 삭제 요청을 해야 하는 건가요?
                                                  
'다른 웹/앱 서비스에 중복 게재할 수 없습니다'라는 유의사항은 상당히 퇴행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에 역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온라인 신문에 연재된 글들이 종이책으로 많이 만들어졌고,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종이책이 발행됐다고 해당 연재기사가 삭제가 되나요? 그런 경우 본 적이 있습니까?

블로그 포스팅도 마찬가지입니다. 블로그에 작성된 글이 종이책으로 나왔다고 해도 지면화된 해당 포스팅이 사라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다른 웹/앱 서비스에 중복 게재할 수 없습니다', 이런 유의사항이 존재하는 한, 저 같은 경우는 수 백 편의 글을 작성한다고 해도 '미역국'만 마시게 됩니다. 공모전 진입이 원천봉쇄가 된다는 뜻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만 미역국을 마실까요? 저 말고도 브런치북 공모전에는 온라인 기사를 모아놓은 응모작들이 간간이 눈에 띄더군요.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글도 보였습니다. 참고로 공모전의 응모작들은 누구나 다 볼 수 있게 공개돼 있습니다. 그런 분들도 단서조항에 발목이 잡히는 걸까요? 아무리 양질의 글을 수 백 편을 쓴다고 해도 공모전 근처에도 못 가보는 건가요?

브런치의 한 이용자는 브런치에 중복게재에 대한 문의를 넣었습니다. 브런치팀은 "수상작으로 선정되면 중복게재는 할 수 없다"는 답변을 내놨습니다.






 브런치에 올라온 중복게재에 대한 문의 그리고 브런치팀의 답변.
ⓒ 브런치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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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미역국'을 마셨다'고, 그것 때문에 투정을 부리려고 이 글을 쓰는 건 아닙니다. 왜 종이책과 온라인 기사를 대립적인 관계로 묶어두는 공모전을 실시하는지가, 그저 의아해서 이 글을 쓰는 겁니다. 그것도 다른 곳에서 실시하는 공모전이었다면 이런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겁니다. 카카오가 무슨 회사입니까? 최첨단 온라인, 모바일 기업이 아닌가요?
                                                                  
지난 3월 31일이 브런치북 프로젝트 마감일이었습니다. 이 글은 일부러 공모전 마감일 이후에 작성했습니다. 이번까지는 그냥 지켜보자는 의미로 마감일 이후에 행동(?)을 취한 것이죠.

계속해서 미역국을 마시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브런치 프로젝트 공모전에 도전할 생각입니다.

여러 번 물을 먹었어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또다시 총선에 출사표를 던지는 출마자들처럼! 저도 그런 굳은 심정을 가지고 공모전에 도전할 생각입니다. 또 누가 아나요? 그 단서조항이 사라져서 저도 수상을 할지! 그때는 미역국 말고, 김칫국도 마시고 떡도 좀 먹고 그러고 싶네요.









갓 내림굿 받은 무당에게 덕담을 들었어요


입춘에 내림굿 받은 박영숙씨 이야기





16.02.23 15:05 최종 업데이트 16.02.23 15:05


  

           


주위에 아는 용한(?) 점쟁이가 있으십니까? 저는 이번 입춘에 한 명 생겼답니다. 제가 '박 보살'이라고 부르는, 일본에서 온 박영숙씨가 바로 그분입니다.

영숙씨는 일본에서 '돈 꽤나' 만진 분입니다. 어려서부터 어려운 형편에 놓였던 그녀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고진감래'라고, 그렇게 어려운 시기를 넘기니 물질적인 풍요가 따라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쿄에서 큰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임대업에 뛰어들었다고 하네요. 요즘 아무리 엔화 가치가 떨어졌다고 하지만 도쿄에서 임대업을 할 정도면 '돈 좀 굴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랬던 영숙씨는 지난 입춘(立春)에 신을 받았습니다. 내림굿을 한 것이지요. 여기서 한 가지! 과거에 '돈 좀 만진' 박 보살은 뭐가 아쉬워서 무당이 되기로 한 걸까요?

"17살께부터 신기(神氣)가 있었어요. 외할머니가 무속인이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그때는 잘 몰랐어요. 제가 무당이 된다는 걸 어디 상상이나 했겠어요?"

하지만 자신이 거부한다고 신기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걸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생채기가 날 뿐이죠. 그렇습니다. 신병(神病)에 시달리게 됩니다. 영숙씨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병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응급실에 실려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 내림굿 박영숙 내림굿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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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길도 혼자, 신의 길도 혼자

그래도 거기까지는 감수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운명의 잔'을 계속 거부하니, 그 잔이 결국 자기 자식에게로 향하게 됐다고 합니다. 자신이 거부하니 하나 있는 아들에게로 그 운명이 넘어갔다는 것이죠. 그 운명이라는 건, 좋은 뜻이 아니겠죠. 아들의 교통사고…. 이후 박 보살은 '운명의 잔'을 집어들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저는 인간의 길을 갈 때도 혼자였고, 신의 길을 갈 때도 혼자 갑니다!"


영숙씨가 이런 말을 한 건, 그녀가 고아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젖먹이였을 때부터 부모의 품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고아원에서 자랐고, 이름도 고아원에서 지어줬다고 합니다. 일본은 20년 전께 갔다고 하더군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이름조차도 고아원에서 지어줬다면, 부모에 대한 정보는 아예 없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외할머니가 무속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걸까요? 그건 그녀의 몸에 조상신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외할머니의 영혼이 박 보살의 몸에 들어온 것입니다. 인간의 길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두 사람이 신의 길에서 서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인생 스토리를, 더군다나 '신의 길을 갈 때도 혼자 간다'는 영숙씨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무언가 짠한 기분이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저도 동영상 담당 스태프로 참여하게 됐고, 현장 기록을 토대로 이렇게 기사까지 작성하게 됐습니다.





 
▲ 내림굿 제단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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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먼스가 강한 황해도 작두굿

박영숙씨의 내림굿은 2월 4일부터 5일까지, 이틀에 걸쳐 경남 거창군 고제면에 위치한 '아시아1인극협회 한국본부'에서 행해졌습니다. 연극제가 열렸던 소극장에 제단이 차려지고 굿이 거행된 것입니다. 악사가 동원되기는 하지만 굿도 1인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1인극제가 개최된 장소에서 굿이 거행되는 것이 어색해보이지 않습니다.

신굿, 신명굿, 강신제 등으로도 불리는 내림굿은 신령의 부름에 답하는 절차입니다. 더불어 신령을 정식으로 받아들여 '몸주'로 삼는 절차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매우 중요한 절차이기에 내림굿을 이끌어 줄 선배 무당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어머니' '신아버지'로 불리는 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영숙씨는 마고당이라 불리는 서문정을 신어미니로 모시게 됩니다. 마고당은 작두굿으로 유명한 무속인인데, 황해도 작두굿 계보를 잇고 있는 분이죠. 지금 황해도 땅이 휴전선 이북에 있는 만큼, 마고당의 위치는 매우 독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 보살이 마고당의 '신딸'이 된 만큼 이제 그녀도 황해도 작두굿 '줄'을 잡게 된 것입니다.

본격적인 내림굿 이전에 일반 재수굿 열두거리가 거행됩니다. 거기에 '허주굿'이라 불리는 잡귀를 씻어내는 굿까지 진행돼야 정식으로 내림굿이 거행됩니다. 이렇게 사전에 많은 굿들이 거행되니 1박 2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황해도 굿은 의복을 여러 번 갈아입고 칼춤을 추는 등, 화려함이 두드러집니다. 이에 대해 아시아1인극제 한국본부장인 한대수 선생은 황해도 굿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 황해도나 경기 이북 지역의 굿은 화려함, 즉 퍼포먼스적인 요소가 강조됩니다. 그래서 볼거리가 풍부한 면이 있습니다."

아무리 강신(降神)이 됐다지만 작두를 탄다는 건 두려운 일일 겁니다. 그건 영숙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심 작두가 무섭다며 말끝을 흐리더군요. 그렇다고 안 탈 수가 있을까요? 신을 받고 싶어서 받고, 안 받고 싶어서 안 받을 수가 없듯이, 작두도 타기 싫다고 안 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운명은 운명인 거죠!

"아, 좋다! 오늘처럼 기분 좋은 날은 처음이구나! 이 제자 그동안 길을 몰라 헤매였지만…. 오늘에서야 이 길을 가니, 기분이 정말 좋구나!"

천하대장군의 공수(무당에 신이 내려 신의 소리를 내는 일)가 영숙씨의 입을 타고 우렁차게 울려 퍼졌습니다. 영숙씨의 두 발은 날카로운 작둣날 위에 오른 상태였습니다. 신이 잘 강림했다는 뜻입니다. 내림굿이 성공했다는 뜻입니다.





 
▲ 내림굿 내림굿에 임하는 박영숙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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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에 들은 덕담

갓 내림굿을 받은 무당의 신기가 가장 좋다는 건 다들 아실 겁니다. 그래서 강신자(降神者)에게 공수를 받기 위해 사람들은 줄을 섭니다. 저도 줄을 섰습니다.

"2년 내에 좋은 일이 있을 거야. 그때까지만 참어!"

박 보살은 제게 그런 공수를 줬습니다. 얼핏 보면 2년만 지나면 성공한다는 뜻이니 좋은 거지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반론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제까지도 계속 참았는데, 또 2년을 참으라고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나 봅니다. 그 공수를 액면 그대로 풀면, 2년 안에 '고진감래'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까? 요즘 같이 '헬조선'이라는 말이 남발되는 세상에 2년 만 고생하면 된다는 말은 무척 희망적이지 않습니까? 2년 만 지나면 '파라다이스'를 만날 수도 있으니….

저는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천주교 성지 탐방을 할 것이고, 사찰 순례를 행할 것입니다. 또한 계속해서 우리나라의 무속신앙에 대해서도 공부할 것입니다. 왜? 저는 종교 다원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2년 만 고생하라'는 공수는 입춘에 들은 덕담 정도로 넘길 생각입니다. 맹신은 금물입니다. 공수만 믿고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있던 복도 달아날 테니까요. 그러고 보면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하루하루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공수도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자체가 복(福)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 아래사진은  박보살이 찍은 사진입니다. 박보살은 일월성신을 찍은 사진이라고 했고, 저는 UFO라고 했던 사진입니다. 일월성신이든 UFO든... 신기한 사진임에는 분명합니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우금티 고개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현장] '2015 우금티 예술제', 통한의 고개에서 본 '희망의 씨앗'

 

15.11.14 15:54   최종 업데이트 15.11.14 15:56

 

 

 

 

 

 

 
▲ 우금티 예술제 지게 상여가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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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오후 2시. 전국에 촉촉한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극심한 가을 가뭄을 꺾어줄 단비였지요. 저는 그날 우산을 받쳐 들고 충남 공주시 우금티 고개에 서있었습니다. '2015 우금티 예술제'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금티 전투. 벌써 12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60갑자로 치면, 두 갑자에다 또 한 해가 더해진 것입니다. 121년 전 그날, 그곳 우금티 고개에서는 통한의 피눈물들이 뿌려졌습니다. 빗발치는 일본군과 관군의 공세에 막혀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그곳에서 눈을 감아야 했던 2만여 명의 농민군들의 피눈물이 바로 그것입니다.  농민군들이 내세웠던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도 그 피눈물을 따라 흩뿌려지게 됩니다.

'2015 우금티 예술제'는 사단법인 '동학농민전쟁 우금티기념사업회'가 주관이 되어 진행됐습니다. 우금티를 넘지 못했던, 인내천 사상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던 수많은 농민군들의 통한을 달래주기 위해서 행해졌습니다.

 

 


 
▲ 지게상여 우금티예술제에 등장한 지게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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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제는 추모제례와 역사축제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추모제례는 농민군들의 한을 달래기 위한 의식이 진행됐는데 특이하게도 지게상여가 등장했더군요. 지게 두 개를 이어붙인 지게상여는 상여를 살 수 없었던 망자를 운구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그 옛날, 가난 때문에 상여조차 구할 수 없었던 이들이 이승과 하직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타고 갔던 것이 지게상여였습니다. 평생 동안 등짝에 걸쳐 메고 곡식과 땔감을 날랐던 그 지게에 자신을 실어 보냈던 것입니다. 


121년 전, 우금티에서 전사한 동학농민군들은 그런 초라한 지게 상여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시신은 버려졌고 내팽개쳐졌습니다. 살아난 자들에게는 '반역도'라는 낙인이 찍혀졌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장례는 꿈도 못 꾸었던 것입니다.

 

 



21세기 우금티 고개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 설문조사판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설문조사판이 설치되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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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제례가 영령들의 한을 달래주는 자리였다면, 역사축제는 미래 세대들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예술제에 모인 중·고등학생들은 농민군들의 뜻을 기억하면서도 '놀 건' 놀았습니다. 짚으로 만든 달걀꾸러미 체험, 벼훑이를 이용한 탈곡체험 등등...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자신의 소원을 적은 만장과 사발통문이었습니다.


'좋은 대학 가게해주세요!'
'이번에는 오빠들 콘서트 꼭 가고 말테야!'


위처럼 또래끼리 통용되는 생각들이 많이 적혀있더군요. 하지만 뜨거운 이슈를 담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한국사 국정교과서 OUT'


'헬조선'이라는 우울한 말이 그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극우 성향의 커뮤니티 일베 같은 사이트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그들이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의 희망의 씨앗도 그들 아닙니까?

121년 전, 갑오년의 우금티가 통한의 피눈물이 터져 나온 곳이라면 현재의 우금티는 새로운 희망이 싹 터 오르는 옥토와 같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인내천을 꿈꾸던 농민군들의 희생이 헛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겠죠. 그런 의미로 우리 아이들이 우금티에서 많은 역사체험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우금티 우금티에 세워진 조형물이 쓰러져 있다. 우금티에서 쓰러져 갔을 농민군들의 모습이 겹쳐져서 마음이 애잔해진다. 봄의 새싹처럼 힘껏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으면 좋겠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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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저는 2년 전에도 우금티 추모제례에 대해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그때 기사를 다시 살펴보니, 당시는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대해서 언급을 했더군요. 당시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얼마나 뜨거운 이슈였습니까?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각을 드러낸 교학사 교과서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반대를 했었죠.


2년이 지난 현재. 이제 교학사 교과서를 넘어 한국사가 국정 교과서가 되려고 합니다. 역사가 퇴보한다는 걸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내년 우금티 예술제 기사에서는 이런 안타까운 심정을 기사 말미에 적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의 씨앗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 우금티: 동학농민전쟁 시기 공주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해서 설명한 설명판.

 

 

 

 

* 우금티: 설명판을 보고 있는 학생. 

 

 

 


덧붙이는 글 | 우금티 예술제에서 자원봉사를 한 후, 그것에 대한 소감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만석중놀이를 볼 수 있는 거창아시아1인극제!

 

제26회 <거창아시아1인극제> 참관기

 

15.08.11 15:19  최종 업데이트 15.08.11 15:19

 

 

 

 

 

▲ 거창아시아1인극제 필자가 '이효리'라고 부른 자원활동가가 동네 어르신에게 잔치국수를 직접 말아드리고 있다. '이효리' 를 비롯하여 총 6명의 대학생 활동가가 열심히 맡은바 소임을 다해주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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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더웠다. 강렬한 햇살이 얼굴을 덮치듯 내리쬐었다.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땀이 안경에 튀어 시야가 흐려졌다. 가뜩이나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는데, 그래서 발걸음이 꼬이는데 앞까지 잘 안보이니...

"작년엔 비가 와서 공연 준비가 어려웠고, 올해는 폭염이 스태프들을 잡는구나!"

 

 

 

 

거창귀농학교에서 펼쳐지는 '거창아시아1인극제'

 


필자가 스태프로 참여한 행사는 올해로 26회째를 맞는 '거창아시아1인극제'다.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비슷한 시기에 개최되는 '거창국제연극제'와 구별되는 행사로 백두대간 삼봉산이 올려다 보이는 거창귀농학교에서 행해진다.

거창귀농학교는 삼봉산문화예술학교라고도 불리는데 폐교를 리모델링한 곳으로 거창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고제면에 위치해 있다. '거창국제연극제'가 수승대라는 명승지에서 개최되는 큰 규모의 연극제라면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거창 읍내에서도 20km 정도 떨어진, 궁벽진 곳에서 행해지는 행사라는 뜻이다.

공연장의 규모뿐만 아니라 행사비용도 비교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거창아시아1인극제'에 참여한 참가자들은 '거마금' 정도만 받고 공연을 진행했다.

 


 

 

 


 
▲ 만석중 만석중 인형. 목각인형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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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작은 산골짜기 연극제로 '쪼그라'들었지만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국내 유일의 모노드라마(monodrama) 축제다. 현재의 '거창아시아1인극제의 기원은 1988년, 서울 바탕골 소극장에서 펼쳐진 '아시아1인극제'에서 찾을 수 있다. 1회 대회를 치른 이후 '아시아1인극제'는 아시아 각국을 돌며 매해 개최되었다. 이후 1996년부터는 충남 공주에 있는 공주민속박물관이 주관이 되어 공연을 하게 된다. 이에 명칭도 '공주아시아1인극제'로 바뀌게 된다.

'아시아1인극제'가 현재의 체제로 자리를 잡은 건 2007년 이후부터였다. 거창의 진산인 삼봉산의 아래에 위치한 거창귀농학교에서 모노드라마 축제가 열리게 되니 이에 명칭도 '거창아시아1인극제'로 변하게 된 것이다.

 

 

 

 

 


 
▲ 만석중놀이 운심게작법을 추고 있는 연극인 한대수.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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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볼 수 없는 만석중놀이

 


지난 3월 5일. 리퍼트 주한미국 대사가 김기종 '우리마당' 대표의 피습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주한 미국 대사의 피습이란 미증유의 사건이 발생해서인지 당시 언론들은 김기종과 관련된 이력들을 앞 다투어 보도했다. 그런 보도들은 거의가 김기종의 기이한 행적들에 대해서 초점이 맞추어졌다. 문제는 그런 보도들로 인해 애꿎은 우리전통놀이까지 도매금으로 격하됐다는 점이다. 김기종은 '우리마당'이외에도 '만석중놀이보존회'의 대표직을 겸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만석중놀이까지 싸잡아 질타를 당했던 것이다.  

만석중놀이는 고려시대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나라의 전통 무언극이다. 개성 일대에서는 초파일을 전후하여 사찰 부근에서 그림자놀이가 펼쳐졌는데 이 놀이가 바로 만석중놀이다. 어두운 밤, 사찰 인근에 큰 광목천을 걸어 놓고 횃불을 피워 용, 잉어, 사슴 같은 종이 인형의 그림자가 비추게 하여 놀이를 진행했던 것이다.  알록달록한 색깔이 입혀진 인형들, 즉 십장생들이 그려진 인형들이 광목천에서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면서 이야기가 흘러간다.

만석중놀이의 주인공은 만석중이라는 나무 인형이다. 십장생 인형들이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만석중 인형은 '탕'하고 소리를 낸다. 이 소리는 만석중을 조종할 때 나는 소리로 만석중 인형의 조종은 다른 인형들과 마찬가지로 광대가 한다. 만석중 인형이 내는 '탕'하는 소리는 목탁 소리 같기도 하고, 죽비소리 같기도 하다. 어리석은 무지몽매함에서 벗어나 세상을 직시하라는 경고처럼 들리기도 한다.

 

 

 

 


 
▲ 만석중놀이 인형을 조종하고 있는 광대들. 인형의 색깔이 참 곱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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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중놀이의 대미는 운심게작법이라는 승무다. 용과 잉어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클라이맥스 단계에서 운심게작법이 펼쳐진다. 운심게작법을 끝으로 40여 분에 걸쳐 올려진 만석중놀이는 끝이 난다.

만석중놀이는 쉽게 볼 수 없는 공연이다. 무대 세팅의 번거로움은 둘째 치고, 이 놀이를 행할 광대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돈을 들고 대학로를 가 봐도, 국립극장을 가 봐도 '티켓'을 구할 수가 없다. 만석중놀이를 재연할 수 있는 광대들은 우리나라에서도 극히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운이 좋았는지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만석중놀이를 감상할 수 있었다. 올해는 아예 무대 뒤편에 시선을 두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십장생 인형들이 어떻게 조정되는지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실내 공연이었다면 어림없는 이야기겠지만 실외공연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스태프 아닌가? '거창아시아1인극제'의 스태프로 참여한 '특권'을 톡톡히 누렸던 셈이다.

 

 

 


 
▲ 황해도 작두굿 마고당 서문정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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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두 좀 타 봤수? 황해도 작두굿!

역시 사람의 취향은 제각각이었다. 필자는 만석중놀이에 방점을 찍어 시선을 고정시켰다면 대다수의 관객분들은 황해도 작두굿에 열광을 하는 분위기였다.

마고당 서문정이 행한 황해도 작두굿은 남한에서는 보기 드문 황해도 지역의 굿판이라고 한다. 요즘에는 작두를 타는 모습이 흔하게 보이지만 예전에는 꼭 그렇지 않았다. 통상 북쪽 지방인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작두굿이 많이 벌어졌고, 남쪽으로 갈수록 작두를 타는 무속인들이 적었다고 한다. 무당이라고 모두 작두를 타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황해도 작두굿은 고정형 작두만 이용하지 않고 이동식 작두도 사용했다. 그러니 다양한 변형방식도 등장했다. 서문정은 발뿐만 아니라 손목과 배, 심지어 목에까지 작두를 들이댔다. 작두 위에 목을 올려놓으니 마치 '기요틴(단두대)'에 머리가 오른 듯했다. 한 여름 밤에 호러쇼(?)가 펼쳐졌다고나 할까? 이렇게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내던졌으니 황해도 작두굿의 인기는 상당했다.

독자들 중에는 작두가 가짜가 아니냐고 의구심을 품으실 분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필자도 그런 의구심을 품었다. 그래서 눈을 크게 뜨고 작두의 상태를 관찰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가짜 작두가 아니었다. 나중에 뒤풀이에서 마고당 서문정 선생의 상처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온 몸이 상처 투성이었다. 발에도, 팔에도, 심지어 배와 목까지... 역시 세상에 그냥 되는 일은 없는 듯싶었다.

No pain, No gain!

 
▲ 전통공연예술단 난타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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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는 문화버스를 타고, 거창으로?

박일화 선생의 창작 춤 공연, 전통공연예술단의 타혼 공연 등이 이어졌고, 그렇게 26회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잘 마무리됐다. 달빛이 아름답게 쏟아지는 거창의 한 시골마을에서 행해진 모노드라마 축제는 내년을 기약하며 막을 내렸다.

"그래도 작년보다 관객이 더 많이 들었어요."

이 말이 참 고마웠다. 낮에 흘린 땀방울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니까. 내년 27회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즐기는 축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문화버스'가 와도 좋을 것 같다. 1박 2일로 연극제를 즐길 수 있는 문화버스 말이다. '문화버스'를 타고 와서 공연도 공짜로 보고, 공짜로 밥도 얻어  먹을 수 있다면 그거 훌륭한 여름휴가 아닌가?

 

 

 


 
▲ 창작무 박일화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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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가정법이 없다고? 그럼 역사에서 교훈을 찾자!

 

[리뷰] 영화 <암살>을 보고

 

15.07.28 14:10   최종 업데이트 15.07.28 14:11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줄거리가 담겨 있습니다.

 

한이 서려 있을수록 역사의 가정법은 더 왕성해진다


우리는 흔히들 말한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없다고. '한니발이 로마에 패배하지 않았다면', '광해군이 인조반정에 의해 축출되지 않았다면'... 아무리 간절하게 이런 가정들을 한다 해도 해당 사건들을 다른 식으로 돌이킬 수는 없다.

역사에서 가정법을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해당 역사를 쟁취하지 못한 이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도 그럴 것이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을 격퇴한 로마군이 뭐가 아쉬워서 역사의 가정법을 사용하겠는가? 능양군(인조) 세력들도 무엇하러 광해군 걱정을 하겠는가?

이렇듯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역사의 가정법은 해당 역사에서 소외된 이들, 혹은 그들에게 공감하는 후세의 몫으로 남게 된다. 역사의 가정법은 정통 역사서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소설이나 영화 같은 예술 분야에서 생명력을 얻게 된다. 해당 역사가 한이 서려 있으면 있을수록 가정법은 더욱더 왕성한 생명력을 얻게 된다.

영화 <암살>도 역사의 가정법을 스크린으로 옮겨 놓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에 대한 가정법? 친일매국노 척결에 대한 가정이다. 실제로 <암살>이 그려낸 장면들은 사실이 아니다. 영화에서처럼 1933년에 친일매국노 강인국(이경영 분)과 조선 주둔군 사령관 가와구치가 저격을 당하지 않는다. 사실 강인국과 가와구치라는 인물조차도 가공의 인물이다.

 

 


 
▲ 포스터 영화 암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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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자가 더 무서운 법이다


필자는 스크린에서 보이는 내용이 명백히 허구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2시간 동안 팝콘도 먹지 않으며 열심히 집중할 수 있었다. 필자도 최동훈 감독이 제시하는 역사적 가정법에 크게 공감했다는 뜻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서슴없이 민족까지 팔아먹는 강인국은 탐욕적인 친일매국노의 캐릭터를 대변했다. 소설 <꺼삐딴 리>의 이인국 박사의 이름을 옮겨온 듯한 강인국은 자신의 이익과 배치된다면 서슴없이 가족들에게도 총질을 해대는 인물이었다.

이와 달리 염석진(이정재 분)은 김구 선생의 표현처럼 '어떨 때는 선비 같고, 어떨 때는 깡패 같은' 다층적인 면을 보인다. 극 중에서 염석진은 김구의 총애를 받으며 임시정부 경무국 대장 직위를 맡고 있지만 실제로는 일제의 밀정이었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강인국은 처음부터 매국노였고, 염석진은 독립운동을 하다 밀정이 된 변절 매국노라고 할 수 있겠다. 원래 변절자가 더 무서운 법이다. 자신의 변절 행위를 지우기 위해 더 '임팩트' 있는 모습을 보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염석진은 암살 임무를 띠고 경성으로 떠난 안옥윤(전지현 분)과 속사포, 최덕삼 등을 제거하기 위해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을 고용한다. 안옥윤 팀은 염석진이 직접 소환했다. 염석진은 자신이 직접 '소환'한 암살팀을 죽이기 위해 킬러들까지도 몰래 '픽업'한 것이다.

 

 



 
▲ 백범 김구 남산에 있는 김구 선생 동상. 청소를 안 했는지 곳곳에 푸른색 곰팡이가 끼어 있었다. 지난 7월 19일에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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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가정법이 없다면, 역사에서 교훈을 찾자


<암살>은 '민족주의적' 시각을 털어낸 후 본다고 해도 수작이 될 만했다. 이정재와 하정우의 불꽃 튀기는 연기 대결만으로도 영화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을 테니까. 더군다나 영감(오달수 분), 속사포(조진웅 분), 황덕삼(최덕문 분) 등의 감초 연기는 관객들을 쉴 새 없이 웃게 하였다.

광복을 맞이하는 순간, 김구 선생과 김원봉(조승우 분) 선생이 서로 술잔을 기울이는 장면이 나온다. 약산 김원봉은 잔에 술을 채우며 이런 말을 남겼다.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필자는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 김구와 김원봉, 두 거물에다 단재 신채호 선생까지 술자리에다 합석시키는 것이다. 물론 단재 선생은 1936년에 돌아가셨으니 그 세 분이 1945년도에 자리를 같이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억지로 단재 선생까지 소환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반민특위에 불려 나온 염석진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오히려 역정을 낸다. 거기에 더해 안옥윤이 "왜 배신을 했느냐"고 묻자 이렇게까지 답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일본이 빨리 망할 줄은 몰랐으니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닌가? 그렇다. 소설가 이광수, 시인 서정주가 광복 이후에 실제로 내뱉은 궤변이다. 이렇게 궤변을 내뱉었어도 그들은 잘살았다. 그와 달리 독립운동가들은 찬밥 신세에다 모욕감까지 느껴야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김원봉이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시라. 실제로 김원봉은 그렇게 당했다. 독립군을 고문했던 악질 노덕술에게 해방 후 조국에서 수모를 겪었다.

글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역사서에는 가정법이 들어설 수 없다. 하지만 역사의 가정법은 예술의 영역에서 계속 생명력을 이어 나갈 것이다. 한편 그런 방식은 한풀이식의 자기 위안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에서 가정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서 교훈을 찾으면 된다. 자리에 동석하신 신채호 선생의 명언에서 역사적인 교훈을 얻는 것이다. 그래야 친일매국노들이 염석진처럼 적반하장을 하지 않을 테니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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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이 '친일매국노'냐고요?

 

청년들의 역사 인식 수준 안타까워

 

15.06.16 11:23   최종 업데이트 15.06.16 17:22

 

곽동운(artpunk)

 

 

 

 

 

 

 

 

 
▲ 서시 윤동주 문학관 뒤편, 시인의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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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이야 모두 다 아실 테죠. 유명한 서시도 잘 아실 거고요."


자하문이라고도 불리는 창의문 인근에는 윤동주 문학관이 있고, 그 뒤편으로는 시인의 언덕이 조성되어 있다. 지난 5월말 필자는 그 언덕에서 역사트레킹 참가자들에게 윤동주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윤동주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보다는 국문학에 가깝기에 짧게 설명을 한 후 다음 코스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괜히 서시를 통째로 외워보라고 짓궂게 구는 참가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빨리 이동하는 게 상책이었다.

"서시만큼 유명한 참회록도 아시죠? 참회록은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한 후 스스로에게 느낀 자괴감을 시어로 풀어낸 것이라 합니다."

이 정도로 설명을 마친 후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설명을 듣던 참가자 한 분이 불현 듯 이런 말을 건넸다.

"창씨개명을 했다면 친일파가 아닌가요?"

 

 

 

시인 윤동주가 친일매국노?


잠깐 발걸음이 꼬였다. 윤동주 시인이 친일파라는 소리를 듣다니! 하늘에 있을 시인은 무척 억울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비교적 젊은 사람들, 또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의 역사 지식수준이 '꽝'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필자는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있다. 그간 역사트레킹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고, 많은 유적지들을 탐방했다. 역사트레킹이 제주 올레를 정점으로 한 걷기열풍의 부산물, 혹은 편승물이라는 조롱과 질책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름대로 그 안에서 보람도 찾았고, 재미도 느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처음부터 트레킹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중간에 코스를 잊어버려 참가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고, 저질(?) 체력인 참가자들의 보폭을 고려하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해당 유적에 대한 설명이었다. 즉 필자의 역사 실력이었다. 트레킹의 참가자들이 주로 젊은층들이라 그들의 날카로운 질문 공세가 예상됐었다. 그래서 이런 걱정까지 하게 됐다.

"이거 내 역사 실력이 확 드러나는 거 아니야? 학교 다녔을 때도 역사 점수 안 나왔었는데..."

저런 자조의 말이 괜히 나왔던 게 아니었다. 실제로 필자는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그래서 학술서적보다는 대중서적을 읽으며 역사에 대해서 지식을 쌓았다. 그렇다고 학벌이 좋냐?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장점으로 내세울 수 있는 건 20년 가까이 종이신문을 꾸준히 읽은 것과 국제정치에 관심이 많다는 점이었다. 그런 장점들까지 끌어들이고서야 겨우 참가자들 앞에 설 수 있었다. 한국사에서 바닥을 치면, 세계사로 넘어가고, 그것도 역부족이다 싶으면 국제정치로 도망치자(?)는 게 전략이었다. 어쨌든 초창기에는 실력이 '뽀록'날까봐 무척 조심스럽게 행동을 했었다. 

하지만 두어 번 역사트레킹을 진행하다 보니 역사 실력에 대한 고민은 싹 사라지게 됐다. 오히려 너무 느긋했다. 나중에는 말장난까지 하면서 참가자들을 농락(?)할 정도였다. 이런 극적인 변화는 왜 일어난 것일까? 밑천이 드러날 걸 초조해하던 마스터가 참가자들을 농락하기까지 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런 극적인 변화는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사람들의 역사 지식이 '꽝'인 것에 토대를 두고 있다. 참가자들이 역사 지식에 무지하다면 그만큼 필자의 '구라'가 통할 여지가 크다는 뜻이 된다. 

- 조선총독부가 무엇을 하는 곳이고,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 모른다.
- 서대문형무소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른다.
- 동학군을 이끌던 전봉준 부대가 어디서 패배를 했는지 어디를 가고자 했는지 모른다.

필자를 당혹스럽게 했던 참가자들의 발언들을 모아봤다. '이 정도면 당연히 알겠지' 하는 필자 나름대로 그어놓은 상식선은 저런 발언들로 인해 여실히 깨지게 됐다. 상황이 이러하니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거 사기 쳐도 되겠는데... 그래서 그런가. 권력자들은 똑똑하지 않은 국민들을 선호하는 건가?'

 

 

 


윤동주를 괴롭게 했던 창씨개명, 그리고 참회록

 
▲ 시인의 언덕 윤동주 문학관 뒤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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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윤동주 시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1941년 겨울, 윤동주는 '히라누마 도슈'라는 창씨명을 얻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윤동주 개인의 의사가 아닌 창씨개명이었다는 점이다. 집안 자체에서 행해진 것이지 윤동주가 직접 행정기관에 찾아가 창씨개명 서류에 도장을 찍은 게 아니었다는 뜻이다. 의도하지 않은 자신의 창씨개명에 대해서 윤동주는 '참회록'에서 자괴감을 드러내게 된다.


한편 당시는 중일전쟁이 이미 발발한 상태였고, 태평양전쟁까지 일어났다. 일제의 침략 야욕이 극에 달할 때였다. 식민지 조선에도 총동원령이 내려져 식량이 배급되기에 이르게 된다. 이때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서는 창씨개명이 필수였다고 한다. 그런 생존과 직결된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에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을 모두 '친일 매국노'로 분류한다는 건 적절하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반민특위에서도 창씨개명 자체를 친일행위로 보지 않았다.

윤동주 시인은 일본 황군을 화끈하게 격려하고 '일본이 이렇게 빨리 망할 줄은 몰랐다'고 궤변을 늘어놓은 시인 서정주나 소설가 이광수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를 했기 때문이다. 윤동주가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청년층의 역사 인식 미비도 큰 문제


함께 장시간을 걸으며 동고동락한 참가자들을 폄하하는 내용을 작성하는 터라 필자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다. 하지만 젊은층의 역사 인식이 생각보다 미비하다는 점을 꼭 알리고 싶었다. 청소년층의 역사 인식이 심각하다, 그래서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지만 20~30대 청년층의 역사 인식도 만만치 않게 수준이 낮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 부족한 역사인식을 무엇으로 채워줘야 할까? 역사, 교양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해줘야 할 것이다. 역사교양 강의의 확대, 역사체험 학습의 다변화 등등... 적어 놓고 보니 뻔한 대답이다.

그런 뻔한 것들이 쌓이다보면 내공이 된다. 그 내공은 역사 인식이 빈약한 정치인들을 솎아낼 수 있는 거름체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놈이 그놈이다.'

이렇게 싸잡아 묶어버리는 언어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놈' 중에서도 덜 나쁘고, 덜 때가 묻은 사람들을 솎아낼 수 있는 내공이 생긴다는 뜻이다. 그럼 역사를 현실에서 써먹게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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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중놀이는 영화의 기원이 될 수 있다!

 

 전통그림자극 '만석중놀이'까지 폄훼... 일제의 탄압으로 명맥 끊겨

 

15.03.13 10:22    
최종 업데이트 15.03.13 10:22

 

 

 

 

  

피습을 당했음에도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마크 리퍼트 대사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에서 보인 미국 정부와 미국언론의 태도도 차분해 보였다. 굳이 '테러'라는 어휘를 선택하지 않고, '공격'이라는 말로 사태를 설명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피습을 가한 김기종의 행위는 그게 테러든 공격이든 비판받아 마땅하다. 오랜 시간 사회와 격리가 불가피할 정도로 그의 행위는 우리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김기종씨가 '우리마당'과 '만석중놀이보존회'의 대표를 맡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두 단체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지금의 영화가 개성의 인형극에서 비롯됐다는 황당한 주장이 펼쳐졌지만, 자금 지원은 끊기지 않았습니다." (중략) "개성에서 유래한 무언 인형극인 '만석중놀이'가 일제 때문에 왜곡됐다며 희한한 논리를 댑니다."
- [단독] '김기종 주도 행사' 영진위서 두 차례 지원, <채널 A> 2015년 3월 6일자

 


이 보도를 보지 않았다면 필자는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김기종이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지원금을 받았다는 점, 그런데 그 지원이 적절치 않다는 점이 이 보도의 큰 골자였다. 한마디로 왜 김기종에게 정부가 돈을 지급했느냐는 물음이었다. 여타 다른 매체들도 이런 비슷한 내용의 뉴스를 생산해냈다.

필자가 우려를 표시한 부분은 김기종을 비판하기 위해 그가 발을 담그고 있었던 만석중놀이까지 끌어와 희화화시켰다는 점이다.

실제로 만석중놀이는 일제의 탄압으로 1920년대 그 명맥이 끊겼다. 그러다 문화운동판 관계자들의 혼신의 노력으로 인해 1983년 다시 빛을 보게 된 전통 그림자 인형극이다. 어렵게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민속극이 한 사람의 그릇된 행동으로 인해 그 파편을 뒤집어썼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 만석중놀이 운심게작법이란 승무를 추고 있는 연극인 한대수 선생. 운심게작법은 만석중놀이의 절정 부분에서 올려진다. 2014년 8월 <거창아시아1인극제>에서 공연된 만석중놀이를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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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그림자 인형극 만석중놀이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 만석중놀이에 대해서 설명해 보겠다. 만석중놀이의 기원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성 일대에서는 초파일을 전후해 민중 포교와 교화를 목적으로 그림자놀이가 행해졌다. 그림자놀이를 한다는 건 어두운 밤중에 놀이가 진행된다는 뜻이다.

넓게 펼쳐 놓은 광목천 뒤로 횃불을 피우고 그 사이로 용, 잉어, 사슴 같은 인형들을 조종하여 그림자가 광목천에 투영되게 하는 방식으로 놀이가 진행된다. 만석중놀이에 등장하는 인형들은 색이 입혀졌는데 그 때문에 빛에 투영된 그림자들에도 색감이 묻어난다.

만석중놀이의 주인공은 단연 만석중이라는 큰 나무 인형이다. 만석중은 십장생들이 등장할 때마다 가슴과 머리를 탕탕 쳐, 큰 소리를 낸다. 이 소리는 둔탁하지만 그 여운은 귓전을 맴돈다. 죽비소리처럼 무지몽매한 어리석음에서 깨어나라는 따끔한 질책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여의주를 두고 천년 묵은 용과 잉어가 다투는 절정 부분에서는 그림자가 아닌 승려가 막 앞에 나와 승무를 춘다. 이 춤은 운심게작법이라는 의식무다. 이처럼 만석중놀이는 대사 한마디 없는 무언극이지만 '버라이어티'하다. 요즘으로 치면 '블록버스터'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이 있어 밤에도 심심할 틈이 없지만, 호롱불을 켜고 지냈던 그 옛날에 마땅한 오락거리가 있었겠는가? 그런 면에서 색깔을 띤 그림자가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만석중놀이는 많은 이들을 불러 모으기에 손색이 없는 무대였다.

한편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음(중요무형문화재 3호), 유랑광대들의 발탈(중요무형문화재 79호)같은 인형극들이 대낮에 장터에서 이루어진 것에 비해 만석중놀이는 사찰에서, 그것도 한밤중에 공연이 이루어졌으니 공연장의 '공기'부터가 달랐을 것이다.

 


 
▲ 만석중놀이 인형들에 색깔을 입혀서 그런지 투영된 그림자에도 색감이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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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중놀이는 영화의 기원이 될 수 있다


일제는 만석중놀이에 대해 탄압을 가하였다. 놀이를 통해 조선인들이 단결을 도모하고, 선전수단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는 의심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석중놀이는 1920년대 그 명맥이 끊기게 된다.

유럽에서 영화가 태동을 할 때, 당시의 관계자들은 동아시아에서 발달한 그림자극에서 중요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이 이론에 입각하자면 만석중놀이도 영화의 기원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민속극의 대가인 심우성 선생은 만석중놀이를 우리 영화의 원형이라고 평가를 할 정도였다. 심우성 선생은 1983년, 각고의 노력 끝에 만석중놀이를 다시 재연한 원로 민속연극인이다.

이런 내용들을 놓고 보면 앞서 언급한 <채널 A>의 보도는 김기종을 깎아내리기 위해 만석중놀이까지 도매금으로 떠넘긴 보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만석중놀이가 김기종의 전유물도 아닐뿐더러 영화의 기원이라는 부분은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이지 '황당하다'는 평가로 폄하할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일제에 의해 만석중놀이의 명맥이 끊긴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보도에서는 그 본질보다는 김기종의 발언 방식에 초점을 맞춰 '희한하다'는 식으로 희화화 시켰다.

필자는 그 보도를 보면서 <채널A> 기자가 만석중놀이의 '만'자나 알고 취재를 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일제의 탄압에 의해 수십 년 동안 그 명맥이 사라졌다 이제서야 겨우 자리를 잡고 있는 우리 전통 민속극을 김기종을 비판하기 위해 싸잡아 끌어내는 모습에 참담함이 느껴졌다.

 



 
▲ 만석중놀이 사진 오른쪽에 서 있는 것이 만석중인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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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종은 당연히 욕을 먹어야 한다. 그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중죄를 지었다. 하지만 김기종을 비판하기 위해 만석중놀이까지 같이 끌어내리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행위다. 마치 리퍼트 대사를 위문하기 위해 동원된 부채춤과 석고대죄가 적절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외교관 피습이라는 전대미문의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더불어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어렵게 재조명된 우리 전통문화가 싸잡혀서 폄하되지도 말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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