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타사 대적광전

 

 

 

 

 

2021년 7월 3일 토요일

 

설악산을 떠나 홍천에 도착했다. 같은 강원도라도 설악산, 태백산이 있는 영동지방과 경기도와 가까운 영서지방과는 확실히 차이가 난다. 영동지방이 우뚝 솟아있는 산봉우리 이미지라면 영서지방은 그보다는 부드러운 강물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아무래도 영서지방을 적시고 있는 북한강과 남한강 때문에 그런 이미지가 연상될터!

 

이날은 홍천의 명산인 공작산을 탐방했다. 정상을 간 것은 아니고... 그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수타사를 탐방한 것이다. 그리고 수타사 옆쪽에 조성되어 있는 공작산 산소길을 걸었다. 필자도 나이가 점점 먹어가니 산 정상을 가는 것보다 그 아래에서 노니는 것이 더 좋아진다. 그렇게 노닐다 사찰을 탐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수타사! 이름부터 군침이 돌지 않는가? 가뜩이나 필자는 짜장면을 좋아하는데... 특히 간짜장!

 

수타사(壽陀寺)는 목숨수(壽), 비탈질타(陀)에서 보듯 면발이 예술인 수타짜장하고는 관계가 없는 곳이다. 수타사(壽陀寺)는 셀 수 없는 정토세계의 무한한 수명을 뜻한다. 그런데 해당 명칭을 얻게 된 건 1811년(순조 11) 때이다. 홍천 공작산 수타사라하면 알 사람은 아는 유명한 사찰인데 그에 비해 명칭은 너무 늦게 자리잡은 것이다.

 

수타사는 공작산(887.4m)에 있다. 공작산! 이름부터 무언가 있어보이지 않는가? 공작산 일대는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일명 공작포란형 지형이다. 화려하고 큰 날개를 가진 공작이 알을 품고 있다니! 명당이 따로 없구나! 더군다나 그 사이로 비경을 품고 있는 수타계곡이 흐르고 있으니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천하 제일의 명당이라고 할 만 하다.

 

공작포란형 지형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동작동 국립묘지다. 서울 서달산 아래에 자리잡은 국립묘지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북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 아시겠지만 집을 짓는 양택이든 묘지를 쓰는 음택이든 남향을 선호하지 북향을 따르지는 않는다. 그럼 흉지에 국립묘지를 썼다는 것인가? 아니다. 아무리 북향이라도 서달산이 가지고 있는 공작포란형 지형 때문에 국립묘지는 명당이 된 것이다. 지형 자체가 가진 기운이 북향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다.

 

공작새의 화려한 날개짓처럼 웅장함을 드러내는 공작산은 영서지방의 명산으로 불린다. 그런 명산에 천년고찰인 수타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 일월사지 삼층석탑

 

 

 

 

 

 

* 흥회루

 

 

 

 

 

 

 

수타사는 후기 신라시대인 708년(성덕왕7)에 창건됐다. 원효대사가 창건주라고 전해지지만 원효께서는 이미 686년에 열반에 드셨으니 창건과 관련된 정황들은 좀 더 면밀하게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처음에는 일월사(日月寺)였다. 또한 위치도 현재보다 좀 더 위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실 공작산도 처음에는 우적산이라고 불렸다. 그러다 조선 중기인 1568년(선조2)에 현 위치로 이건을 하게 된다. 이때 일월사에서 수타사(水墮寺)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우적산도 이름이 바뀌어 공작산이 된다. 지금은 옛 일월사 터에는 삼층석탑만이 그 공간을 지키고 있다. 삼층석탑은 현재 2층과 3층 탑신부가 없는 상태다. 꼭대기 부분인 상륜부도 없다. 훼손이 많이 됐는데 온전한 형태였으면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 거 같다.

 

수타사 일대에 흐르고 있는 덕지천을 건너 사천왕문을 향한다. 그전에 앞쪽에 펼쳐진 연꽃밭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수타사 산소길로 이어지는 길인데 자꾸 몸이 그리고 향한다. 길이 얼마나 예뻤으면! 빨리 수타사 탐방하고 산소길을 걸어야겠다.

 

수타사의 사천왕문은 봉황문이라고 불린다. 그 봉황문을 지나면 흥회루가 나온다. 사찰의 중심 영역으로 들어갈 때는 2층으로 된 누각 아래로 난 문을 통해 입장한다. 그런 누각을 통상 보제루라고 하는데 수타사에서는 흥회루(興懷樓)라고 부른다. 봉황문도 그렇고, 흥회루도 그렇고... 수타사는 독특한 면이 있다.

 

흥회루를 자세히 살펴보면 더 독특하다. 통상적으로 보제루는 2층으로 되어있는데 흥회루는 단층이다. 그래서 아래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누각을 옆으로 둘러가야 한다. 이것도 좀 독특한 방식이다. 정5칸 측3칸으로 이루어진 흥회루는 조선 후기인 1658년(효종9)에 지어졌다. 이후 변형이 있었지만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2015년 8월 7일에 강원도유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되었다.

 

이제 흥회루를 지나 본전인 대적광전으로 가보자. 수타사는 본전이 대적광전인데 이곳에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있다. 정3칸 측3칸으로 지어진 대적광전은 1636년(인조14)에 공잠대사에 의해서 중창됐다. 조일전쟁으로 폐허가 된 수타사를 다시 일으켜세운 이가 바로 공잠대사인 것이다.

 

대적광전 앞에는 길쭉한, 빼빼로같은 석물이 하나 있다. 본전 건물 앞에는 석탑이 있거나 석등이 있기 마련인데 이렇게 빼빼로처럼 생긴 석물은 거의 보지 못하셨을 것이다. 이것은 물을 공양하기 위해 만든 석물이다. 맨 위를 둥글게 큰 그릇처럼 만들었는데 그곳에다 맑은 물을 올렸다는 것이다.

 

대적광전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기품이 있는 형상이다. 주위의 산세와도 서로 어우러진 모습이 눈길을 끈다. 이런 이유로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는 만큼 보물로의 격상도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

 

수타사를 나서기 전에 꼭 봐야할 문화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수타사 동종이다. 이 종은 조선 후기에 활약하신 사인 스님이 제작한 것으로 빼어난 조형미를 자랑한다. 사인 스님은 종을 만드는 주종장이었는데 주로 경기, 강원, 경상지역에서 종을 제작하셨다. 워낙 제작 기술이 뛰어나서 그런지 사인스님이 만든 종은 무려 8개가 보물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11-x호'와 같이 지정번호를 받았는데 수타사 동종은 11-3호이다.

 

서울 북한산 화계사에도 사인스님의 동종이 있다. 그 종은 보물 제11-5호다. 화계사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 동종을 보면서 이러쿵저러쿵 설명을 했었는데 수타사에서 또다른 사인스님 동종을 친견하게 되서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보호각 안에 있어서 시원하게 보지는 못했다. 그에 비해 화계사 동종은 종루에 걸려있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런 점에서는 화계사 동종이 실물을 친견하기에 낫다.

 

이렇게하여 공작산 수타사 탐방은 종료가 됐다. 경내가 크지는 않지만 참 아기자기한 사찰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사찰이 더 좋다.

 

이제는 산소길을 걸을 차례다. 왜 산소길이라는 명칭이 붙었는지 걸어보면 아실 것이다. 걷다보면 맑은 공기로 전해지는 청량감이 온 몸을 감싸앉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산소길을 걷는 이유다.

 

 

 

 

 

 

*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삼불이 아닌 단불로 모셔져있다.

 

 

 

 

 

 

 

 

* 대적광전: 물을 공양하기 위해 만든 석물

 

 

 

 

 

 

* 수타사 사인비구 동종

 

 

 

 

 

 

* 산소길

 

 

 

 

 

 

 

 

 

 

 

 

 

 

필자는 오랫동안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은 문화재답사와 트레킹을 결합시킨 프로그램으로 많은 이들의 호평을 받아왔다. 서울 곳곳에 숨어있는 명소들을 자신의 두 발로 탐방하고, 숲길체험까지 즐기니 좋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필자한테 돌 던지지 마라! 진짜 저런 평가를 받았으니까!^^

 

참가자분들은 문화재 탐방도 좋아했지만 특히 숲길 걷기에 열광을 하셨다. 그런 점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래서 한 가지 결론을 얻게 됐다. 숲에서 행하는 프로그램을 강화해보자! 온갖 생명들이 살아숨쉬는 숲길을 이용해보자! 그래서 태어났다.

 

- 역치사지(사트레킹으로 매예방하고 랑하고 혜롭게 살자)

 

아래는 역치사지와 관련된 일문일답이다.

 

질문자: 프로그램명이 흥미롭다. 역지사지가 아니고 역치사지?

 

필자: 그렇다. 사자성어 역지사지를 빗대서 만들어 보았다. 사트레킹으로 매예방하고 랑하고 혜롭게 살자. 사람들이 역지사지는 다 아니까 그것에 편승해서 만든 것이다. 요즘은 네이밍을 잘 지어야한다. 어쨌든.

 

질문자: 기존 역사트레킹 프로그램과 역치사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이게 가장 궁금하다.

 

필자: 기존 역사트레킹에서도 치매예방 효과가 확실히 있었다. 역사트레킹을 할 때마다 만 보 이상을 걸었으니까. 그것도 걷기 좋은 숲길을 걸었다. 길게는 90% 이상을 숲길만 걸은 적도 있다. 이렇게 서울에서도 걷기 좋은 숲이 많다. 그 숲을 이용하여 치매예방이나 스트레스 감소를 목적으로 한 숲 속 활동을 해보자는 것이다.

 

질문자: 좀 더 설명해달라.

 

필자: 역사트레킹을 행하며 숲 속에서 맨발걷기나 호흡명상 같은 활동을 해보는 것이다. 전통놀이도 할 생각이다. 윷놀이 말고 승경도놀이라고 벼슬살이 보드게임이 있는데 그것도 해볼 생각이다.

 

질문자: 정리하자면... 역사트레킹과 역치사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숲 속 활동의 유무라고 할 수 있나?

 

필자: 그렇다. 역사트레킹에서는 선과 선을 잇듯이 멈춤없이 계속 이동을 했다. 하지만 역치사지에서는 숲 속 활동이 행해지기에 이동과 멈춤이 수시로 반복된다. 그 멈추는 시간동안 트레킹팀은 자연과 함께할 것이다. 모든 생명이 살아숨쉬는 숲을 조금이라도 더 느껴보자는 것이다.

 

질문자: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 그런데 역치사지는 치매예방을 강조하는 모양새다. 굳이 그런 이유가 있나?

 

필자: 사실 역치사지는 딱 치매예방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우울증 감소나 스트레스 감퇴 같은 정신건강 향상에 더 퇴적화된 프로그램이다.

 

질문자: 그러면 왜 치매예방을 강조했나?

 

필자: 기존에 트레킹 참가자들의 연령대가 높았다. 그래서인지 그분들에게 치매는 공포 그 자체로 여겨지는 듯했다. 그런 공포의 사슬을 풀어드리고 싶었다. 숲과 흙길을 가까이 하는 이들에게는 치매나 중풍, 알츠하이머병 같은 질환들이 스며들여지가 줄어든다. 숲길 걷기가 보약인 셈인 것이다. 돈 안 드는 보약. 얼마나 좋은가!

 

질문자: 그래도 치매예방이 강조되다 보니 젊은층은 좀 다가서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필자: 그래서 '역사트레킹으로 치유하고 사랑하고 지혜롭게 살자'가 될 수도 있다. 치매를 치유로 바꿀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질문자: 꼼수 아닌가?

 

필자: 꼼수가 필요할 때도 있지!

 

질문자: 역치사지에 필요한 준비물 같은 것이 있는가? 몇 킬로 정도를 걷는가? 시간은?

 

필자: 기존 역사트레킹 코스를 그대로 이용한다. 약 7~8km를 4시간 정도 이동한다. 그러니 간식을 넉넉하게 싸오시라! 무거우면 필자가 들어드리겠다. 그리고 아주 맛나게 뺏어먹겠다.

 

질문자: 8킬로를 4시간 정도에 가면 너무 느리지 않나?

 

필자: 역사트레킹 자체가 느림보 트레킹이다.거기에 숲 속 활동까지 더해지니 더 느릴 것이다. 느린만큼 더 알찬 트레킹이 되게 프로그램을 세팅할 예정이다. 지루하면 안 되니까.

 

질문자: 유의사항 같은 것이 있나?

 

필자: 가끔가다보면 막걸리부터 꺼내시는 분들도 있는데 그러면 바로 퇴장이다. 역치사지에서는 음주금지, 흡연금지, 자연훼손금지다. 지킬건 지키면서 하자.

 

질문자: 당부할 것이 있는가?

 

필자: 숲 속 활동 할 때 모기 때문에 고생하실 것이다. 그러니 긴팔과 긴바지를 꼭 입으셔야 한다. 한 여름이라도 그렇게 하셔야한다. 또 벌레기피제도 준비를 해야한다. 명상을 하시려면 돗자리와 1인용 방석 같은 도구들도 준비하셔야 한다. 야외에서 활동하는터라 준비할게 많다.

 

숲길과 친해지다보면 자연스럽게 건강해질 것이다. 그게 바로 숲길의 매력이다. 그런 숲길에서 역치사지가 행해진다.

 

 

 

 

 

 

 

 

 

 

 

* 주전골계곡: 만물상

 

 

 

 

 

 

 

2021년 7월 2일 금요일

 

약 40일 만에 설악산 주전골에 다시왔다. 전날에는 천불동계곡, 이날은 주전골계곡.

이래저래 설악산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든다. 이것도 정말 복인 거 같다. 설악산의 비경들만 찾아나서고 있으니까. 어떤이는 태어나서 설악산을 한 번도 못 가본 이들도 있을텐데...

 

천불동계곡이 속초에서 접근한다면, 주전골계곡은 양양에서 접근한다. 주전골은 작은 천불동계곡이라고 불릴만큼 그 역시 천혜의 비경을 품고 있다. 좀 다른 것이 있다면 천불동계곡 입구보다는 주전골쪽이 좀 더 한적보인다. 주전골이 한계령과 가까워서 그럴 것이다.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 있으니 좀 더 한적함이 느껴지는 것일테지.

 

주전골과 관련된 내용은 링크를 건 지난 포스팅을 참조해주시면 좋겠다. 이번에는 그냥 사진 감상 위주로 봐주시면 좋을 듯하다. 계속봐도 좋은 사진들이다.

 

 

 

 

 

 

* 주전골계곡

 

 

 

 

 

 

 

 

*주전골계곡: 독주암

 

 

 

 

 

 

 

 

* 주전골계곡: 만경대

 

 

 

 

*주전골계곡: 선녀탕

 

 

 

 

* 양양 오색리 삼층석탑

 

 

 

 

 

 

 

*** 설악산 주전골에 대한 자세한 포스팅은 아래 링크글 클릭!!!

 

https://brunch.co.kr/@historytrekking/258

 

 

 

 

 

 

 

 

 

* 비선대: 미륵봉, 형제봉, 선녀봉

 

 

 

 

 

 

 

글이 넘쳐서 신흥사 포스팅을 이어서 적어본다. 앞선 신흥사 포스팅에서 필자의 마음속의 계곡은 단연 천불동계곡이라고 언급했다. 그만큼 필자에게 천불동계곡은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독특한 자태를 뽐내는 각양각색의 기암괴석들이 좌우로 펼쳐져있고 그 사이를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고 있으니...! 더군다나 설악산의 단풍은 너무나 아름답지 않은가! 그 천불동계곡 사이로 곱게 오색단풍이 든다고 생각해보시라. 장면 장면이 다 환상적인 풍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만약 설악산의 신선이 있다면 그 신선은 가을에는 낙엽을 밟으며 천불동계곡에서 노닐지 모른다. 기왕 노니는 거 선녀탕 근청에서 노닐 거 같다. 어깨빨 좋은 나뭇꾼과 경쟁을 하면서...ㅋ

 

천불동계곡은 골짜기 곳곳에 있는 기암괴석들이 마치 천 분의 부처님 같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또 천불동계곡은 설악골계곡이라고도 불린다. 지난 2013년 3월 11일에 명승 제101호로 지정되었는데 지리산의 칠선계곡,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국내 3대 계곡으로 불린다.

 

이렇게 강한 인상을 준 천불동계곡이었지만 사실 이번 방문을 제외하면 딱 한 번밖에 가지 못했다. 2000년대 중반쯤에 갔었던 거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나지도 않는다. 당시에 대청봉에서 일출까지 봤었는데 후기다운 후기를 기록하지 않았고, 그나마도 싸이월드에 기록해서... 해당 포스팅을 거의 방치했었다. 이래서 후기가 중요한 것이다. 제대로된 후기를 작성하지 않았으니 세월과 함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천불동계곡에서 큰 감흥을 받았다고 하면서 이제껏 두 번 밖에 방문을 하지 않았다니... 더군다나 후기다운 후기도 없다니... 설악산 마니아들에게 한소리 듣겠다!ㅋ

 

신흥사에서 빠져나와 숲에 들어서면 호젓하게 길을 걸을 수 있다. 숲길이 참 좋다. 그렇게 숲길을 걷다보면 와선대가 보인다. 마고선이라는 신선이 있었다. 필자 같으면 기를 쓰고 선녀탕 근처에서 노닐었을텐데 마고선은 와선대에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와선대에서 누워 설악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껏 즐겼다는 것이다.

 

 

 

 

 

 

* 천불동계곡

 

 

 

 

 

 

 

* 와선대

 

 

 

 

 

 

 

와선대를 넘어가면 계곡물은 더욱더 푸르러진다. 누가 일부러 청옥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물색깔이 아주 곱다. 비선대가 가까워지자 계곡은 폭이 좁아져 협곡이 되어갔고 숨겨져있던 비경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신흥사 일대가 초입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진정한 천불동계곡의 시작은 비선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비선대의 풍광은 옛 선인들의 마음도 요동치게 했나보다. 바위 곳곳에 각자가 새겨져 있다. 그중에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의 글씨도 있다. 한자로 쓰여있으니 잘 찾아봐야 한다.

 

와선대에서 느긋하게 풍광을 즐기던 마고선이 신선이 되어 올라간 곳도 바로 비선대라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비선대 일대를 바라다보면 어디선가 신선이 쓰~윽하고 나타날 거 같은 느낌이들기도 한다. 고개를 들어 우뚝 솟아있는 미륵봉, 형제봉, 선녀봉을 보니 마고선이 하늘로 승천할 때 세 봉우리를 지나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들더라. 기왕 승천하는거 우뚝 솟은 봉우리 위로 올라가야 더 아름다운 승천이 될테니까.

 

미륵봉 중턱에는 자연굴인 금강굴이 있다. 원효대사가 수도를 했다고 전해지는 곳인데 길이가 약 18미터 정도된다. 금강굴에 올라서면 이제까지와는 다른 또다른 장관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설악산이다!

 

이렇게하여 비선대까지 가는 설악산신흥사 역사트레킹이 종료된다. 천불동계곡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기술을 했지만 사실 이 코스는 천불동계곡을 맛배기만 본다. 딱 초입인 비선대에서 종료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천불동계곡의 핵심부를 지나 대청봉까지 올라가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트레킹은 무리를 하지 않는다.

 

향성사지 삼층석탑 -> 설악소공원 -> 신흥사 -> 와선대 -> 비선대(금강굴)

 

편도로 약 6km 정도가 되는 코스다. 설악산의 특성상 그대로 왔던 길로 다시 돌아와야 하니 왕복 약 12km 정도가 될 것이다. 설악산이지만 이 구간은 순하니 길을 걷는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비선대를 넘어 천불동계곡의 핵심부를 보시려면 좀 각오를 하셔야 할 거다. 다리에 파스도 많이 뿌려야 할 거다...ㅋ

 

이제 곧 가을이다. 가을날의 천불동계곡! 생각만해도 몸이 아주 들썩거린다. 이렇게 산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들썩이게 한다. 아주 좋게!

 

 

 

 

 

 

 

* 천불동계곡: 숲길

 

 

 

 

 

 

 

*천불동계곡: 비선대 일원

 

 

 

 

 

 

 

 

 

 

* 신흥사: 비가 그친 후. 산 안개가 설악산 봉우리를 두르고 있다.

 

 

 

 

 

 

 

2021년 6월 30일 수요일

 

누구나 다 자신만의 계곡이 하나씩 있을 것이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기암괴석이 그려낸 갖가지 기이한 형상을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곳! 그곳에 들어서면 어느 순간 신선이 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비경을 간직한 곳! 필자에게는 설악산 천불동계곡이 바로 그런 곳이다. 무척 매력적인 다른 계곡들도 많이 다녀봤지만 그래도 역시 최고는 천불동계곡이었다.

 

그 천불동계곡 초입에 있는 신흥사(新興寺)에 대한 이야기다. 이 포스팅은 천불동계곡이 아닌 신흥사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천불동계곡 이야기하다 갑자기 신흥사로 바꾸다니... 이거 글쓰기가 왜이래!ㅋ

 

신흥사는 2번에 걸쳐 자리 이동을 했고, 역시 2번에 걸쳐 이름을 바꿨다. 그 첫번째 이름은 향성사였다. 향성사는 652년(진덕여왕6)에 자장율사가 개창을 했는데 중향성불국토(衆香城佛國土)라는 뜻을 따서 지은 것이다. '불국토'는 알겠는데 '중향성'이라는 말은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중국집 이름인가?ㅋ

 

중향성은 법기(法起)보살이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법기보살은 산스크리트어로 다르모가타(Dharmogata)로 불리우는데 한자에서도 보이듯 '불법을 세우는 보살'을 말한다. 불법, 합법할 때 그게 아니라 불도를 세운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요한 일을 하는 보살이 바로 법기보살이고, 그가 거처하는 곳이 중향성이라는 곳이다. 짜장면집이 아니고. 이렇듯 향성사는 법기보살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중향성은 금강산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 불교에서는 법기보살이 금강산에 거주한다고 말한다.

 

 

 

 

 

 

 

* 신흥사: 안개가 낀 설악산

 

 

 

 

 

 

 

향성사는 원래 지금의 켄싱턴스타호텔 앞에 위치해있었다. 현재의 신흥사에서 동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위치다. 그곳에는 지금도 향성사지 삼층석탑이 자리를 잡고 있다. 버스정류장 앞에 석탑이 있는데 집중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향성사지 삼층석탑 정류장은 버스종점 한 정거장 전이라 신흥사 매표소까지 그리 멀지 않다. 그래서 설악산신흥사 역사트레킹은 향성사지 삼층석탑에서 시작된다.

 

삼층석탑은 2층 기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높이가 약 4.3미터에 달한다. 상륜부가 훼손된 터라 온전히 보존이 됐다면 4.3미터 이상이 됐을 것이다. 9세기경에 제작된 삼층석탑은 후기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계승했다. 그래서 국보 443호로 지정되었다. 9세기경에 만들어졌으니 자장율사 시대에 만들어진게 아니다. 이 시기에는 향성사가 선정사로 불릴 때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신흥사는 두 번이나 이름이 바뀌었다. 향성사가 첫번째 이름이었고, 두번째가 선정사였다. 그렇게 이름이 바뀌게 된 건 향성사에 화재가 발생해 폐허가 됐기 때문이다. 개창한 지 40년이 지난 후였는데 이후 의상대사가 지금의 내원암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재건을 한다. 이때가 701년이었는데 재건을 하면서 사찰 이름을 선정사로 바꾼 것이다. 선정사는 이후 천년동안 번창하게 된다. 그러다 조일전쟁(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1642년(인조20)에는 또 화재가 발생해 경내 전체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 향성사지 삼층석탑

 

 

 

 

 

 

 

 

내원암은 현재의 신흥사에서 울산바위 방면으로 올라가는 길에 위치해 있다. 약 2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나저나 향성사지 삼층석탑은 자신의 이름이 맞는지 좀 의아스럽다. 의문점들을 적어본다.

 

1. 690년경에 향성사가 폐허가 됐다. 이후 향성사지에서 북쪽으로 3km 이상 떨어진 곳에 의상대사가 사찰을 재건함. 이때가 701년이었는데 이름을 선정사로 바꾸었음.

 

2. 9세기경에 삼층석탑을 만들었음. 그럼 선정사 삼층석탑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그것보다 더 의아한 것은 왜 이미 폐허가 된 곳에 석탑을 세웠을까? 가보시면 알겠지만 삼층석탑이 있는 곳과 신흥사는 같은 경내로 묶기에는 꽤 거리가 있다. 더군다나 당시는 더 먼 내원암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3. 그럼 향성사가 불에 타기 이전에 삼층석탑이 만들어진 것인가? 그럼 9세기에 만들어졌다는 건 잘못된 이야기인가? 그것도 아니면 다른 곳에 있다가 지금의 자리로 이건을 한 것인가?

 

4. 향성사 시절에 9층 석탑으로 만들어졌는데 지금처럼 3층만 남게됐다는 주장을 하는 자료도 있다. 그런데 기단이나 상승률을 고려해 볼 때 9층 석탑의 규모가 나올 수 없는 구조다. 목탑도 아닌 석탑으로 9층을 쌓는다? 석탑 한 두 번 보나!

 

아이고 머리가 아프다. 가뜩이나 머리도 안 좋은데...ㅋ 이렇게 석탑 하나로 다양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 우리 문화재는 스토리텔링의 보고 같은 곳이다.

 

향성사지 삼층석탑은 신라계 석탑중에서 가장 최북단에 위치한다는 지리적인 특색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버스에서 꼭 한 정거장 먼저 내려서 향성사지 삼층석탑을 보고 가자.

 

 

 

 

 

 

 

* 신흥사: 극락보전

 

 

 

 

 

 

 

* 신흥사: 통일대불

 

 

 

 

 

 

 

이제 신흥사를 향해 본격적으로 이동하자. 설악소공원과 설악케이블카를 지나가다보면 푸른색의 거대한 부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바로 신흥사 통일대불이다. 통일대불은 좌대 4.3미터, 좌대둘레 13미터 위에 만들어져 있다. 앉아있는 좌상이지만 그 높이가 14.6미터에 달한다. 여기에 머리 뒤에 장식된 두광까지 포함시키면 높이가 무려 17.5미터가 된다. 통일대불은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청동이 약 108톤 정도가 사용됐다고 한다.

 

거대한 불상이니 제작하는데도 오래 걸렸다. 1987년 8월부터 만들기 시작해 10년이 지난 1997년 10월 25일에 점안식(點眼式)을 거행한 것이다. 개안식(開眼式)으로도 불리우는 점안식은 불상에 눈을 그려넣는 것을 말한다. 눈을 그려넣음으로써 신앙의 대상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용의 눈을 그려넣는 화룡정점을 연상해보자. 그러고보면 점안식은 거칠게 말해 불교식 준공식인 셈이다.

 

통일대불 앞에서 경건하게 삼배를 한 후 신흥사 중심공간으로 향했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보제루가 나온다.

보통 큰 사찰에는 절의 중심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거대한 누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누각은 통상 1층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2층은 법회 장소로 쓰인다. 이런 누각을 보통 보제루라고 부른다. 하지만 꼭 그 이름으로만 불리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유명한 부석사 무량수전 앞의 누각은 안양루다. 서울의 명찰 진관사에서는 홍제루라고 부른다.

 

정면7칸 측면2칸으로 만들어진 신흥사(神興寺) 보제루도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신흥사 보제루는 1644년(인조22)에 만들어졌는데 이 해에 드디어 신흥사라는 이름이 자리잡게 된다. 천년동안 번성하던 선정사가 1642년에 불 탄 후, 2년 뒤인 164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재건을 했고 드디어 신흥사라는 이름표가 생긴 것이다.

 

향성사 -> 선정사 -> 신흥사

 

무슨 사찰이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았는지... 신흥사 보제루는 강원도 시도문화재유형문화재 제 10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동네 팔각정처럼 사방이 다 오픈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971년에 분합문을 달아서 현재와 같은 구조로 변했다.

 

보제루에는 향성사 시절에 만든 범종이 있다. 무려 1400년 전에 만들어진 이 범종은 무게가 약 600kg 정도 된다. 1748년, 1758년, 1788년 세 번에 걸쳐 개주를 하기도 했다. '개주'는 활자나 주물, 즉 금속물을 다시 제작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화포는 대다수 청동으로 만들어졌는데 화포를 다시 만드는 것도 개주라 하였다. 활발하게 북방 개척에 나섰던 세종대왕 시기에 화포를 개주했다는 내용이 실록에 기재되기도 했다.

 

보제루 이야기하다 개주이야기까지. 얼핏 들으면 곗돈 모으는 계주 같다.ㅋ

 

 

 

 

 

 

 

 

* 신흥사: 보제루

 

 

 

 

 

 

 

* 신흥사: 극락보전. 왼쪽에 명부전이 보인다.

 

 

 

 

 

 

 

 

보제루를 지나 본전인 극락보전으로 가보자. 독특한 계단돌과 형형색색의 창살이 인상적인 극락보전이 탐방객들을 반길 것이다. 정면3칸, 측면3칸으로 이루어진 극락보전은 1648년(인조 25)에 만들어졌다. 이후 여러번 보수를 했지만 그래도 그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2018년 6월 4일에 보물 제1981호로 승격된다. 그 이전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14호였다. 검색을 해보니 아직까지도 몇몇 백과사전은 보물이 아닌 유형문화재로 표기하고 있었다. 문화재 데이터베이스는 좀 늦나?ㅋ

 

신흥사는 효종이 향로를 순종이 청동시루를 하사하는 등 조선왕실과 연계가 깊은 사찰이었다. 가신이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었다. 그래서 일반사찰과는 다른 모습의 형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극락보전 돌계단 옆을 보시라. 일반 태극이 아닌 삼태극이 있다. 삼태극은 조선왕릉의 정자각 돌계단에서 볼 수 있는 모양이다. 일반 사찰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모양이다.

 

삼태극 옆에 치우천왕처럼 생긴 귀면이나 아랫쪽에 조각된 용머리도 무척 인상적이다. 이렇게 장식된 부분을 계단의 소맷돌이라고 부른다. 신흥사 극락보전의 계단 소맷돌은 정말 멋지다! 이외에도 극락보전의 창살도 참 독특하다. 창살에 꽃 장식을 했는데 이걸 솟을빗꽃살이라고 부른다. 이름은 어렵지만 어쨌든 참 아름답다.

 

극락보전의 외관이 이렇게 아름다운만큼 실내에도 귀중한 보물이 모셔져 있다. 바로 신흥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다. 1651년에 제작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각승 무염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안정된 비례미와 세련된 기교미가 조화된 여래좌상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9월 5일에 보물 제 1721호로 지정된다.

 

이승을 떠난 이들의 명복을 비는 곳, 명부전을 둘러볼 차례다. 1737년(영조 13) 지어진 신흥사 명부전은 목조지장보살삼존상이 모셔져 있다. 1651년에 제작된 신흥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도 무염이 제작하였다. 기법이 뛰어나고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밝혀진 작품이기에 2012년 2월 22일에 보물 제1749호로 지정되었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나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둘 다 조각승 무염이 1651년에 제작했고, 1년의 간격을 두고 모두 보물로 승격됐다. 그만큼 조각승 무염의 예술미가 뛰어났다는 뜻일 거다.

 

 

 

 

 

 

 

* 신흥사: 명부전

 

 

 

 

 

 

 

 

신흥사 명부전도 외관이 독특한 면이 있다. 조선 후기인 1737년(영조 13)에 지어졌다고 전해지는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외형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보면 중앙의 문은 건물 높이에 맞게 큼직한데 좌우칸에 달린 문은 크기가 작다. 좌우칸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는 머리를 쿵하고 부딪히기 쉽상이다. 일부러 그랬을까? 일부러 그랬다. 안내문을 보니 아래를 둘러보자는 '하심(下心)'을 생각하며 명부전에 출입하라는 뜻이다. 하심은 자기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한다.

 

하심과 유사한 말로 조고각하(照顧脚下)도 많이 쓰인다. 자신의 발밑을 잘 보라는 뜻으로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기자신부터 돌아봐야 한다는 말이다. 하심이든 조고각하든 불가에서는 겸손과 겸양을 중시한다. 신흥사 명부전에서는 알아서 하심이 발휘될 거다. 그렇지 않으면 헤딩을 하는 것이고. 문 하나를 드나들면서도 삶의 지혜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빗줄기가 내리는 날에 신흥사를 탐방했다. 덕분에 산 안개를 걸친 설악산의 봉우리들을 볼 수 있었다. 신흥사의 한옥 지붕들과 엮어서 사진을 찍으니 한 편의 예술이 탄생하는 느낌이었다. 기암괴석과 그것을 두르고 있는 안개, 그것을 배경으로 해서 찍은 한옥들... 혹시 저기에 신선이 있는 거 아니야? 내가 사진찍고 내가 감탄하고!ㅋ

 

이제 신흥사를 벗어나 숲길로 들어선다. 오른쪽에 있는 울산바위가 자꾸 손짓을 하지만 천불동계곡으로 방향을 잡고 간다. 일단 신흥사 옆 숲길에 발을 디디면 천불동계곡 입구에 들어선 것이다.

 

글이 넘치니 천불동계곡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으로...

 

 

 

 

 

 

* 신흥사: 극락보전의 계단 소맷돌. 용머리가 인상적이다.

 

 

 

 

 

 

* 신흥사: 명부전. 중앙칸의 문보다 좌우측의 문이 높이가 낮다. 중앙은 부처님이나 스님이 출입하는 문이고, 좌우측 문은 일반 신도들이 드나드는 문이다. 하심을 생각하지 않고 들어가다가는 쿵하고 헤딩할지 모른다.

 

 

 

 

 

 

 

 

 

 

 

* 김삿갓: 화순남산공원에 있다. 공원중심부가 아닌 도로변에 있어 좀 아쉬웠다. 자동차를 피해가며 사진을 찍어야했다.

 

 

 

 

 

 

 

2021년 6월 15일 화요일

 

광주의 옆동네인 전남 화순군에 왔다. 화순에도 남산이 있는데 그곳에 올랐다. 얕은 언덕배기 높이의 남산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말그대로 남산공원.

 

화순에는 적벽을 탐방하려고 왔다. 적벽은 화순군 동복면 일대에 있는 깎아지는 절벽들을 말한다. 아름다운 수변과 어우러진 절벽의 모습이 마치 중국의 적벽보다 더 낫다고 했다. 중국의 적벽보다는 낫지만 딱히 표현할 이름이 없었는지 그냥 적벽으로 불리우게 됐다.

 

어쨌든 화순 적벽은 수많은 풍류객들의 발길을 모으게 했다. 그 중에는 김삿갓, 난고 김병연도 있었다. 김병연은 적벽이 좋았는지 그곳을 세 번이나 찾았다고 한다. 김삿갓이 누군가! 아웃도어계의 전설이 아니신가! 김삿갓의 발걸음을 따라 필자도 적벽으로 가려했지만... 비가 엄청내리더라. 결국 적벽대신에 남산공원에 오르게 됐다.

 

남산에서도 비를 많이 맞았다. 적벽에 갈 인연이 아니었던 거 같다. 하긴 적벽에 가려면 미리 신청을 해야하는데... 예약도 안 했으니...

 

화순 남산공원은 1970년에 조성됐다고 한다. 읍내 한복판에 있는 곳이라 화순 시가지 일대는 물론 무등산도 잘 보인다. 그렇게 남산공원 일대를 탐방했다. 그러다 아웃도어계의 레전드를 만나게 됐다.

 

김삿갓!

 

비록 조각상으로 만나뵙지만 무척이나 반가웠다. 대선배를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일이다. 김삿갓, 김병연은 적벽이 있는 화순군 동복면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래서 화순군도 김삿갓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남산공원에는 진각국사 혜심과 연담종사 유일의 유적비가 있다. 두 분 다 화순 출신의 승려들이다.

 

비가 그칠줄을 몰랐다. 그래 다음을 기약하자! 여행은 잠시 접어두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거야!

 

 

 

 

 

 

 

* 화순남산공원: 공덕비들이 들어서 있다.

 

 

 

 

 

 

 

* 화순남산공원: 왼쪽이 진각국사 혜심의 공덕비이고 오른쪽이 연담종사 유일의 공덕비이다.

 

 

 

 

 

 

 

 

* 화순남산공원

 

 

 

 

 

 

 

 

 

* 구장군폭포

 

 

 

 

 

 

 

* 구장군폭포

 

 

 

 

 

 

 

2021년 6월 14일 월요일

 

전날 광주에서 밤늦게 전라북도 순창으로 이동을 했다. 유명한 강천산 일대를 탐방하기 위해서였다.

읍내에 늦게 도착해서 모텔을 잡았는데 5만원이었다. 좀 움찔했다. 주중, 그것도 월요일인데 5만원이라...

뭐 주인장에게 물어보니 다른 모텔도 다 그 가격이라고 한다.

 

주머니가 가벼운 배낭여행자들이라면 차라리 유스퀘어광주터미널 인근 숙소에서 1박을 하고 순창으로 이동하는 것도 좋을 거 같다. 광주터미널 인근 숙소는 주중에 2만 5천원이었다. 광주시내에서 순창읍내까지는 거리가 가까워서 버스로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또 광주에서 강천산입구까지 직행 버스도 있다. 물론 자주는 없지만...

 

터미널 인근이라 주위가 유흥가 분위기가 나지만 가성비가 괜찮은 숙소가 있다. 돈 없는 배낭여행자들은 환락가에서도 잘 수 있어야 하고 공동묘지에서도 잘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배낭여행자의 모습이다. ^^

 

용천산이라고도 불리는 강천산은 그 경관이 매우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특히 가을철 단풍 여행지로 손꼽히는데 그 풍광이 아름다워서 그랬는지 '호남의 소금강'이라고 불릴 정도다. 여기서도 또 금강산이 소환된다.^^ 어쨌든 강천산은 해발 고도가 583미터로 크지 않은 산이지만 명산이 지니고 있어야 할 아이템들은 다 갖추고 있다. 바위, 폭포, 계곡, 숲길, 역사 등등... 그래서 1981년, 우리나라 최초로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해발 600미터도 안 되는 산이지만 강천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바로 폭포다. 탐방자들의 시선을 확 사로잡는 거대한 폭포 6개가 강천산 계곡을 따라 줄지어 자리잡고 있다. 돌산이 폭포를 어떻게 용출하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병풍폭포

 

 

 

 

 

 

 

 

*남근석

 

 

 

 

 

 

 

매표소를 지나면 가장 먼저 병풍폭포를 만나게 된다. 병풍바위에 물을 흘려보내 병풍폭포가 되었다. 그렇다. 병풍폭포는 인공폭포다. 인공폭포지만 높이 40미터에서 쏟아져내리는 물줄기가 이색적이다. 높이가 있다보니 물줄기가 잘 늘어나는 피자치즈처럼 길다란 형상을 보인다. 병풍바위는 강천사에 가기 전에 만나는데 이 바위를 지나는 사람은 병풍바위의 위엄있는 모습 때문인지 자신의 죄를 참회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밑을 지나는 이들은 다 순수해진다나 뭐래나...^^

 

병풍바위를 지나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계곡 숲길이 시작된다. 계곡의 시원한 물줄기와 울창한 숲을 따라 흙길을 걸을 수 있어서 좋다. 거북바위나 남근석 같은 특이한 형상의 바위들을 관찰하는 것도 또다른 재미다. 특히 남근석은... 음... 참 거시기하다.ㅋ

 

그렇게 숲길을 걷다보면 삼인대라는 표지가 눈에 들어온다. 순창삼인대에는 비석이 세워져있고, 그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비각이 세워져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7호인 순창삼인대비의 비문을 읽어보면 조선 중종시대에 일어난 일들이 언급되어 있다. 필자가 그 어려운 한자들을 다 읽어냈을까?ㅋ

 

1506년(연산군12)에 연산군을 몰아내고 성종의 둘째 아들인 진성대군을 왕으로 옹립하게 된다. 유명한 중종반정이다. 이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진성대군의 부인인 신씨의 아버지가 그 문제의 원인이었다. 신씨의 아버지인 신수근이 연산군의 처남이었던 것이다. 연산군 치하에서 좌의정으로 있던 신수근이 반정군에 의해 제거된다. 이때 왕으로 등극한 진성대군은 신씨 부인을 그대로 왕후로 삼을 생각이었다. 이런 말을 하면서.

 

"조강지처인데 어찌 버릴 수 있겠소!"

 

하지만 조강지처를 버리게 된다. 반정세력들이 신씨의 왕후 옹립을 강력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신씨가 왕후가 된다면 왕을 또 바꿔버리겠다는 소문이 궁궐 내에서 나돌 정도였다. 결국 신씨는 궁궐에서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금슬이 좋은 부부여서 그랬는지 중종은 경복궁 옆 인왕산을 보며 신씨를 그리워했고, 이를 안 신씨는 궁궐을 향해 시집갈 때 입은 다홍치마를 흔들어댔다고 한다. 인왕산 정상부는 치마바위라고 불리우는데 중종과 신씨(단경왕후)에 대한 이야기가 지명에 묻어있는 것이다.

 

 

 

 

 

 

* 순창삼인대

 

 

 

 

 

 

 

* 강천산숲길

 

 

 

 

 

 

 

그런데 삼인대랑 단경왕후, 신씨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신씨가 궁궐을 나간 후 왕비가 된 이는 장경왕후였다. 장경왕후는 중종과의 사이에서 인종을 낳는다. 인조말고 인종이다. 인종은 중종 다음으로 왕위에 오르는데 조선의 왕들 중에서 가장 재위 기간이 짧았다. 9개월이었다.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은 후 산후통에 시달리다 6일 만에 숨을 거둔다. 이때가 1515년(중종10)이었다. 중전의 자리가 공석이 되자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나게 된다. 담양부사 박상, 순창군수 김정, 무안현감 유옥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상소문을 올리기로 했고, 그 결의의 뜻으로 강천산 계곡의 한 나뭇가지에 자신의 관인을 걸었다. 세 명이 자신의 관인(직인)을 걸었다고 해서 삼인대라는 불리는 것이다.

 

삼인대의 결의는 성공을 했을까? 장경왕후 다음에는 그 유명한 문정왕후가 중전의 자리에 올랐다. 그렇다고 삼인대의 결의가 완전히 실패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1740년(영조20)에 신씨가 단경왕후로 복위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년 후인 1744년(영조24)에 지금의 비석이 세워지게 된다.

 

이제 천년고찰인 강천사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천년고찰이라는데 많이 허한 느낌이다. 강천사는 887년(진성여왕1)에 도선국사에 의해 창건된다. 이후 중창을 거듭하며 큰 사찰로 변모한다. 하지만 조일전쟁(임진왜란)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그래서 사찰 건물들은 근래에 지은 것들이다.

 

 

 

 

 

 

 

* 강천사 대웅전과 오층석탑

 

 

 

 

 

 

* 강천사 오층석탑

 

 

 

 

 

 

 

그나마 대웅전 앞에 있는 오층석탑이 강천사의 옛 시간을 담아내고 있는 듯하다. 길쭉한 모양의 오층석탑은 전라북도 유영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려 후기인 1316년(충숙왕3)에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탑에 손상이 많다. 지붕돌인 옥개석 곳곳이 깨져있다. 누가 소중한 문화재에 손을 댔는가! 총탄 자국이다. 강천사 오층석탑은 한국전쟁 때 총탄을 맞아 훼손됐다. 그러고보면 강천사에는 아직까지도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 듯하다. 이처럼 전쟁은 문화재에도 막대한 악영향을 끼친다. 그러니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빨간 페인트로 칠해진 강천산 구름다리를 건넌 후, 구장군폭포를 향해간다. 구장군폭포는 강천산 탐방의 절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장군폭포는 삼한시대 전쟁에서 패한 아홉명의 장군이 자결을 하려다 마음을 고쳐먹고 있는 힘껏 다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다. 구장군폭포는 그 스케일에서 이전에 봤던 폭포들을 앞도한다. 높이 120미터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은 보기만해도 정말 시원할 정도니까.

하지만 구장군폭포도 앞서 언급한 병풍폭포처럼 인공폭포다. 2005년도에 인공폭포가 조성됐다고 한다.

 

자연폭포가 아니어서 좀 아쉬운 점이 있었다. 하지만 거대한 암반면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인공이어도 시원시원했다. 그런 시원시원한 맛에 많은 이들이 구장군폭포 아래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필자도 무척 즐거웠다.

 

이렇게하여 강천산 탐방이 종료가 됐다. 사실 강천산은 단풍이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그래서 가을이면 단풍을 보려고 많은 이들이 강천산을 찾는다. 너무 많이 찾아서 정신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필자는 강천산을 여름에 간 것이다. 여름에 가도 좋네! 역시 명산은 명산이야!

 

 

 

 

 

 

 

* 구장군폭포

 

 

 

 

 

 

* 강천산 구름다리

 

 

 

 

 

 

 

 

 

 

 

 

* 약사암: 본전인 대웅전과 삼층석탑

 

 

 

 

 

 

 

2021년 6월 13일 일요일

 

이날은 광주광역시에 있는 무등산 일대를 탐방했다. 정확히는 광주 동구에 있는 증심사와 약사암을 방문했다. 뭐 정상까지 가고 싶었지만 워낙 공사가 다망하다보니...^^ 그래도 천 년 고찰을 동시에 두 개나 방문을 했다. 무등산에 온 보람이 있었다.

 

광주는 여러번 방문했었다. 배낭여행 뿐아니라 예전 자전거여행을 행했을 때도 여러번 방문했었다. 광주 시내로 들어갔다가 길을 헤매인 것이 기억난다. 원래 자전거여행이나 장거리도보여행을 할 때는 대도시의 중심지는 피해야 한다. 길을 헤매일 수도 있고, 자동차들로 인해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도시는 경유지 개념으로 방문해서 그랬는지 그곳에 자리잡은 산들도 그렇게 눈길을 주지 않았었다. 광주의 무등산, 대구의 팔공산, 부산의 금정산 등등... 하지만 이제는 대도시의 큰 산들도 좀 다녀볼 생각이다. 지역의 산들이 주는 매력이 있듯이 도시의 산들이 주는 매력도 있기 때문이다.

 

서론이 길어졌다. 광주 지하철을 타고 학동증심사역에서 하차를 했다. 증심사까지 시내버스를 탈까 하다 그냥 하천변을 걷기로 했다. 증심사천. 3km정도였는데 무등산을 바라보면서 걸으니 걸을만 했다.

 

해발 1,187미터인 무등산(無等山)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산 혹은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라는 뜻이다. 1972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2013년에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 그런 무등산에 천년고찰인 증심사(證心寺)가 자리잡고 있다.

 

증심사는 후기 신라시대인 860년(헌안왕4)에 철감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후 여러번의 중창이 있었다. 한국전쟁 때 큰 피해를 입어 대다수의 전각들이 불탔다. 지금의 건물들은 1971년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다.

산 중에 있는 사찰이라 그런지 산지가람형을 띄고 있었다. 일주문부터 아주 가파르게 올라갔다. 그렇게 산을 깎아 단을 쌓고 건물을 올려야 했으니 사찰 경내가 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무등산을 대표하는 사찰이라는데 그 명성에 비해서는 좀 아담할 정도였다.

 

 

 

 

 

 

 

 

 

 

* 증심사 오백전: 오백전과 삼층석탑. 오백전은 조선시대 만들어졌고, 석탑은 후기 신라시대에 제작됐다.

 

 

 

 

 

 

 

 

 

*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

 

 

 

 

 

 

 

증심사에서 눈여겨 볼 문화재들은 대웅전 뒤편에 몰려있다. 먼저 1609년(광해군2)에 지어진 오백전을 살펴보자. 정면 3칸 측면 3칸인 이 오백전은 오백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세종 시기였던 1443년,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김방은 자신의 사제를 털어 증심사를 중창한다. 이때 오백나한상을 봉안하게 된다. 막돌허튼층 쌓기로 높은 단을 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올려 오백전을 지었다.

 

무슨 말인가? 막돌허튼층 쌓기는 무엇이고? 두리기둥은 또 무엇인가? 외계어인가?ㅋ 막돌허튼층 쌓기는 다듬지 않은 막돌을 층층이 쌓았다는 것이다. 막돌로 쌓아 올리니 층계가 확 드러나지 않고 불규칙하게 쌓이게 된다. 막돌허튼층 쌓기라고 막돌로만 쌓지는 않는다. 막돌과 막돌 사이에 찐득찐득한 진흙을 채워넣기도 한다. 호박돌로 쌓아 올린 돌담을 생각해보시라. 본드보다 더 강력한 진흙으로 돌과 돌을 붙여놓았다.

 

그럼 두리기둥은 무엇인까? 배흘림기둥은 들어봤는데 두리기둥은? 두리기둥은 원형, 즉 둥근기둥을 말한다. 배흘림기둥이 같은 원형기둥이면서 중간 부분이 똥배처럼 불쑥나왔다면 두리기둥은 똥배없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동일하게 통원형 스타일을 유지한다.

 

막돌허튼층 쌓기, 두리기둥... 평소에 거의 쓰지 않는 말들을 사용하다보니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이렇게 또 알아가는 재미도 있지 않은가!^^

 

다시 오백전 이야기. 오백전에 봉안된 오백나한상들은 제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다른 점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것이다. 그럼 시간이 너무 오래걸리나?

 

오백전 앞에는 후기 신라시대에 세워진 증심사 삼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2단 기단으로 이루어진 삼층석탑은 높이가 3.2미터로 좀 아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증심사 삼층석탑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보물이 아닌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백전도 조선 후기 한옥 양식을 지녔음에도 보물이 아닌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13호 지정되어 있다.

 

이외에도 오백전 옆에는 고려시대에 만든 오층석탑과 조선시대 만든 칠층석탑이 있다. 그러고보니 증심사에는 신라, 고려, 조선 등 각기 다른 시대의 탑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자 이제 오백전 옆에 있는 비로전으로 눈을 돌려보자. 이곳에 또 귀한 문화재가 있다.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철조비로자나불이 바로 그것이다. 철조비로자나불은 원래 옛 전남도청 자리에 있던 대황사에 있었다가 1934년에 지금의 증심사로 옮겨졌다. 이때 조선시대에 만든 칠층석탑도 함께 옮겨왔다. 대황사는 조선 말기에 폐사가 됐다고 한다.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은 전체적으로 늘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얼굴도 작게 표현되어 있다. 워낙 우리나라 불상, 보살상들이 후덕한 모습을 많이 하고 있는터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의 모습이 좀 낯설 수도 있을 것이다.

 

높이 90cm의 이 불상은 재료의 성분이 거침없이 드러난 것처럼 전체가 초코렛빛깔을 띄고 있다. 그 검은 빛깔 마디마디에 새겨진 선과 선이 정교함으로 가득차 있다.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은 철로 튼튼하게 만들어서 그런지 천 년의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보존 상태가 상당히 좋다. 그래서 보물 제 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증심사 탐방은 참 유익했다. 메인 등산로 곁에 있는 사찰인데도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아 호젓한 사찰 탐방을 할 수 있었다. 이제 무등산 중턱부에 있는 약사암을 향해 간다.

 

증심사 일대는 예로부터 차밭이 유명했다. 증심사에서 차 공양을 위해 재배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경영을 하다 광복 후에 허백련이라는 분이 인수하였는데 그는 고유의 차를 재배하는 등 차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등산로에 차 향이 풍기는 것도 같고...^^

 

 

 

 

 

 

 

* 증심사 대웅전

 

 

 

 

 

 

 

* 증심사 오층석탑과 칠층석탑

 

 

 

 

 

 

 

 

무등산 약사암은 증심사에서 약 1km 정도 올라가면 닿을 수 있다. 약사암도 증심사를 세운 철감선사 도윤이 개창한 사찰인데 처음에는 인왕사라고 불렀다. 이후 고려 예종 때 혜조국사 담진이 중창을 하면서 약사암으로 이름을 고쳤다.

 

약사암에서 가장 주목해서 볼 문화재는 보물 제600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조여래좌상이다. 약사암 석조여래좌상은 9세기인 후기 신라시대에 제작되었다. 석불 양식은 석굴암 석불에서 정점을 찍게 된다. 이후에는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개성이 살아있는 형식으로 변모해 간다. 아무래도 신라후기에서 고려 초기에는 지방호족 세력들이 강성해지는데 그런 사회상이 반영된 것일테지. 약사암 석조여래좌상도 그런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목재 건물에 돌로 만든 석불이 주존불로 모셔져 있어 좀 독특해보였다. 돌로 만든 대좌도 있고 해서 석조여래좌상은 수미단에 올려져 있지 않았다. 중간에 단을 싹뚝 잘라서 홈을 만들고 그 안에 석조여래좌상을 모셨다. 그것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하긴 그 무거운 석불을 나무로 만든 수미단에 올려놓는다고 생각해보라. 올려놓는 순간 우루르 무너질 것이다. 앞서 언급한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도 그렇고 약사암 석조여래좌상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불상이 아니어서 더 눈길이 간다. 이 귀중한 문화재들을 볼 수 있으니 필자는 행운아인가?^^;

 

본전 건물을 나오니 무등산 새인봉이 한 눈에 들어왔다. 새인봉은 봉우리가 옥새처럼 생겼다하여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본전 앞에는 약사암 삼층석탑이 사찰의 중심을 잡고 있다. 후기 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아직 문화재지정이 안 됐다. 문화재지정이 안 됐다고 하더라도 삼층석탑은 그 존재만으로도 소중하다. 천 년의 세월을 약사암과 함께 했으니까.

 

새인봉과 어우러진 약사암의 모습이 참으로 정겹다. 대도시에 있는 사찰이 이렇게나 호젓할 수 있다니!

다음에 무등산을 가면 증심사와 약사암을 또 방문할 생각이다. 그때는 정상도 한 번 찍고 오는거야?ㅋ

 

 

 

 

 

 

 

 

*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수미단에 홈을 내서 봉안했다.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 미륵전: 왼쪽으로는 금산사 오층석탑이 보인다. 오층석탑 옆에는 부처님의 사리탑이 있다.

 

 

 

 

 

 

 

* 금산사 당간지주: 보물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2021년 6월 12일 토요일.

 

전북 김제에 있는 금산사를 탐방하는 날이다. 전날 전주터미널 인근에서 1박을 했었는데 터미널 바로 앞에 금산사로 향하는 시내버스가 있었다. 전주가 익숙한 분들이면 전주터미널에서 금산사로 향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직선거리로 따지면 전주나 김제나 금산사까지 거기서 거기다.

 

금산사는 도립공원인 모악산에 위치해있는데 이 산은 전주, 완주 그리고 김제에 걸쳐있다. 지평선 축제가 있을 정도로 김제는 평야지대로 유명한 지역이다. 또한 전주와 완주도 평탄한 지형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해발 795미터인 모악산은 평지에 우뚝 솟아 있는 형상이다. 전남 영암에 가보면 국립공원인 월출산(810미터)이 있는데 이 월출산도 평지에 우뚝 솟아있다.

 

넓은 평야지대에 큰 산이 서있는 형상이라 그런지 모악산은 예로부터 이 지역 사람들에게 경외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랬다. 산이 내뿜는 강한 기운 때문인지 모악산은 계룡산과 함께 대표적인 민중신앙의 발생지로 꼽힌다. 실제로 1970년대까지 신흥종교 집단거주지가 있었을 정도로 이곳은 민속신앙의 집산지 역할을 했었다. 물론 지금은 많이 정비된 상태다.

 

그런 모악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어서일까?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성지같은 곳이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 때인 599년에 창건됐는데 그때는 작은 사찰에 불과했다. 그러다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율사에 의해 크게 중창되면서 이 지역의 중심 사찰로 자리잡게 된다. 이때 진표율사는 미륵장육상을 미륵전에 모셨는데 이는 법상종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다. 법상종은 교종계열로 미륵신앙을 중심에 둔 종파로 진표율사 그 자신이 개산조다.

 

머리가 아프다. 일상생활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 말들이 연이어 나오니 머리가 지끈거릴 수밖에... 또 미륵장육상은 무엇인가? 육개장 같은건가?ㅋ 거칠게 이야기하면 약 4.8미터짜리 미륵부처님 불상을 말하는 것이다. 장육상(丈六像)의 뜻을 더 알아보자. 통상적으로 불상을 만들 때 사람 키의 두 배인 16척으로 제작한다. 여기서 1척은 약 30cm이다. 그래서 '삼척동자도 다 안다'라고 했을 때는 강원도 삼척에 사는 꼬맹이가 아니라는 거다. 키가 90cm 정도 되는 꼬맹이도 다 아는데, 너만 모르냐 할 때 쓰는 말이다. 정리를 해보자.

 

1척= 30cm

1장= 10척

16척= 1장 6척

 

장육상은 이런 계산법에서 나온 것인데 신라의 세 가지 보물로까지 불렸던 경주 황룡사의 장육존상이 유명하다. 하지만 황룡사도 폐사되고 장육존상도 자취를 감추었다. 진표율사가 세운 미륵장육상도 마찬가지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 미륵전

 

 

 

 

 

 

금산사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미륵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궁예다. 하지만 견훤도 자신을 미륵이라고 칭하며 미륵신앙을 정치에 이용했다. 900년 견훤은 완산주로 도읍을 정했는데 완산주가 바로 전주와 완주 일대다. 미륵신앙의 성지인 금산사가 아주 가까운 곳에 후백제의 도읍지가 들어선 것이다.

 

하지만 권력은 참으로 비정한 법! 미륵신앙을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데 사용했던 견훤은 금산사에 감금되고 만다. 아들인 신검, 양검, 용검에 의해서. 스스로를 미륵이라고 칭한자가 미륵신앙의 본거지에 감금되고 만것이다.

 

이때가 후백제가 한참 고려와 항쟁을 벌이던 935년 3월이었다. 견훤은 아들이 10명이나 있었는데 그중 넷째 아들인 금강을 특별히 좋아했다. 그래서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첫번째 부인의 소생인 신검, 양검, 용검이 이를 알고 금강을 죽이고 만다. 또한 견훤을 금산사의 본전인 미륵전에 유폐시킨다. 이후 견훤은 고려로 도망치고 자신이 세운 후백제가 멸명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이 얼마나 황망한 일인가! 자신이 세운 나라가 망하는 광경을 직접 지켜보다니... 그런 충격 때문인지 후삼국이 통일된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견훤은 충남 논산에 있는 한 절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이때가 936년이었다.

 

 

 

 

 

 

* 대적광전: 오른쪽에 오층석탑이 보인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든다. 궁예와 견훤은 미륵신앙을 전면에 앞세우며 도탄에 빠져있는 백성들의 환심을 샀다. 그럼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어떤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나? 바로 도참사상이다. 미래의 길흉에 대한 예언을 믿는 사상이 바로 도참사상이다. 서구식으로 하면 노스트라다무스다.

 

금산사 중심영역에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나온다. 중앙에 대적광전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미륵전이 우람하게 서 있다. 이 미륵전이 금산사의 본전이면서 견훤이 감금된 장소다. 외관이 3층으로 이루어진 미륵전은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3층 법당이다. 그래서 국보 제62호로 지정되었다.

 

미륵전은 외관이 3층 형식으로 되어있지만 실내는 통층으로 되어 있다. 천장이 높다보니 이곳에는 큰 미륵불이 세워져 있는데 그 높이가 무려 11미터가 넘는다. 또한 좌우에 세워진 보살상도 8미터가 넘는다. 직접 실내에 들어가 불상을 보면 경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필자도 합장을 하고 공손하게 기원을 드렸다.

 

이렇듯 금산사는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 본전, 즉 메인 법당이기에 따로 대웅전은 없다. 대신 석가모니불은 미륵전의 반대편에 있는 대장전에 모셔져 있다.

 

 

 

 

 

 

 

* 대장전: 석가모니불이 모셔진 대장전. 그 앞에 석등이 서있다. 석등은 보물 제 828호로 지정되어 있다.

 

 

 

 

 

 

 

* 금강계단: 왼쪽에 석종형 사리탑이 보인다. 오른쪽에 오층석탑이 우뚝 서있다.

 

 

 

 

 

 

1500년 전에 창건된 금산사에는 수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일일이 다 설명할 수 없으니 사진으로 대신하겠다. 그래도 몇가지 문화재들은 잠깐 언급하겠다.

 

먼저 방등계단이라고도 불리는 금강계단이다. 보물 제26호로 지정된 금산사 금강계단은 부처님의 사리탑이 있는 곳이다. 그렇다. 금산사도 유명한 양산 통도사처럼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진 적멸보궁이다. 2층 계단으로 이루어진 금산사 금강계단은 진표율사가 처음 만들었고, 이후 여러번 다시 세웠다고 한다. 1층이 약 12미터이고, 2층은 약 8미터 정도다. 2층 한가운데 석종형의 사리탑이 모셔져 있다. 석종형이라하면 돌을 범종 형태로 깎은 것을 말한다.

 

금강계단 옆에는 보물 제25호인 금산사 오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통상적으로는 금강계단 앞에는 석등이 서 있다. 통도사 금강계단에도 석등이 서있다. 하지만 금산사 금강계단에는 고려시대에 만든 오층석탑이 우뚝하게 서있다. 그래서인지 부처님의 사리가 있는 석종형 사리탑보다 우뚝선 오층석탑에 먼저 눈길이 간다. 사리탑은 낮게 깔려있어 한 눈에 안 들어오고 높게 서 있는 오층석탑은 한 눈에 들어오니 그럴 수밖에... 두드러진 것만 보려하는 한낱 시력 안 좋은 어리석은 중생이여! 그 불쌍한 중생이 바로 접니다. 제가 시력이 안 좋아서리...ㅋ

 

금강계단과 오층석탑은 미륵전과 대적광전 사이에 있다. 송대라고 불리는 이 작은 언덕에 올라서면 금산사의 중심영역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둘러보고 있는데 저 아래 희안하게 생긴 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금산사 육각다층석탑이다. 보물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는 육각다층석탑은 특이하게도 점판암으로 만들어져있다. 점판암은 넙쩍하게 쪼개지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슬레이트라고도 불리며 기와로 쓰이기도 한다.

 

통상적으로 우리나라 석탑들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사각형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육각다층석탑은 그 법칙에서 벗어났다. 얼핏보면 맛나는 초코케이크를 층층이 쌓은 것처럼 보인다. 좀 앙증맞아 보일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높이도 2.18미터로 그리 높지가 않다. 갑자기 달달한 게 땡기네...ㅋ

 

이제까지 모악산에 있는 금산사를 탐방해 보았다. 사찰 하나에 이렇게 많은 문화재와 이야기가 숨쉬고 있다니! 그런 문화재와 이야기를 따라 오늘도 길을 나서는 거야! 아자아자~

 

 

 

 

 

 

 

* 금산사 육각다층석탑

 

 

 

 

 

 

* 금산사: 금강계단 쪽에서 내려본 모습. 육각다층석탑과 석련대가 보인다. 석련대는 보물 제 23호로 지정되어 있다.

 

 

 

 

 

 

*노주석: 대적광전과 대장전 사이에 위치해 있다. 아마도 석등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그냥 노주석으로 불린다.

 

 

 

 

 

ps. 앞으로도 미륵불을 칭하는 자는 많이 나올 거 같다. 미래불인 미륵불은 현세에 아직 출현하지 않으셨으니까. 세상이 혼탁할수록 자신을 '살아있는 미륵'이라고 칭하는 이들은 계속 등장할 수밖에 없다. 혼란한 세상에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니까. 그 심리를 귀신같이 이용해먹는 인간들도 분명 있으니까. 그런 사기꾼의 속셈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한다. 아래의 꽁트처럼 말이다.

 

"내가 살아있는 미륵이다!"

"됐다. 공양간에 밥이나 묵으러 가자!"

"내가 살아있는 미륵이래도! 내 관심법으로...!"

"배고파 죽겠다니까... 지가 미륵이면 사람들 밥부터 챙겨줘야지! 나 간다."

"..."

 

 

 

 

 

 

 

 

* 성주사지 : 본당터를 중심으로 4개의 탑이 보인다.

 

 

 

 

 

 

 

2021년 6월 11일 금요일.

 

이날은 충남 보령시에 있는 성주사지를 탐방한 날이다. 탐방한 지 두 달이나 지나서 후기를 작성하다니...ㅋ

 

성주사! 후기 신라시대 대표적인 선종 사찰로 불렸던 곳. 하지만 지금은 폐사지가 되어 허허로움이 갈대처럼 나붓기는 곳. 한편 경북 성주군과 이름이 비슷하기에 성주사도 그곳에 있지 않나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곳. 사실 필자가 그랬다. 성주사지라고 하니 경북 성주군부터 생각한 것이다. 맛있는 성주 참외를 떠올리면서...^^

 

답사를 한 날은 무척 무더웠다. 그런 날은 인근에 있는 대천 해수욕장에서 머드팩을 하는게 훨씬 남는 장사일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무거운 배낭을 메고 성주사지가 있는 성주면으로 향했다. 보령 시내에서 성주면사무소 입구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약 15분 정도 소요됐다. 면사무소 입구에서 성주사지까지는 약 1km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어렵지 않게 걸어갈 수 있다. 성주사지 바로 앞까지 가는 버스 노선도 있지만 자주있지 않다.

 

성주천을 따라 이동을 하다보면 넓게 펼쳐져있는 성주사지가 나타난다. 성주산과 만수산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데 그 품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서해안에 있는 산들이 그렇듯 해발고도가 높지 않은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이 옛 절터의 뒷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성주사의 원래 이름은 오합사였다. 백제 법왕이 왕자 시절인 599년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때는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원찰로 오합사가 창건된 것이다. 한편 백제 법왕은 같은 해인 599년에 제29대 왕으로 등극한다. 그리고는 그 다음해인 600년에 승하하고 만다. 직전 28대 혜왕도 재위 기간이 딱 1년이었다. 598년에서 599년.

 

오합사가 성주사로 이름이 바뀌게 된 건 신라 후기였다. 성주사(聖住寺)의 의미를 풀어보면 '성인이 거주하는 절'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성인은 무염국사를 지칭한다. 태종 무열왕의 8대손인 무염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드러냈다. 아홉살 때에는 해동신동으로 불렸을 정도다. 무염은 22살 때인 821년(헌강왕13)에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 이후 무려 20년 동안이나 중국 일대를 다니며 자비를 실천했는데 이를 두고 '동방의 대보살'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다.

 

무염이 유학을 했을 당시 중국에는 경전을 중심으로 한 교종에서 벗어나 수행을 강조하는 선종이 유행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무염도 현실의 상황에서 벗어난, 중앙 귀족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던 교종을 비판했다.

 

 

 

 

 

*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그가 중국에서 귀국했을 때 보령 지역의 호족인 김양에 의해 오합사의 주지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때 신라에서는 구산선문이 크게 번성하게 된다. 구산선문은 경전 위주의 교종과는 달리 수행에 중심을 둔 선종의 9개 선문을 말한다. 한마디로 신라 말기에 9개의 선종 문파가 산을 중심으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그중 무염은 선승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더불어 그가 주지로 주석하는 성주사도 구산선문의 대표적인 사찰로 주목받게 된다.

 

그런 무염의 업적을 기리고자 성주사터 한편에는 큰 비석이 세워져있다. 비각으로 보호되고 있는 이 비석은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이다. 대낭혜는 무염의 시호이고, 백월보광은 탑호이다. 줄여서 낭혜화상탑비라고도 불린다. 국보 제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후기 신라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높이가 무려 4.55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한 비석에는 무염과 관련된 5천여 자의 글자가 새겨져있다.

 

한편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하나다. 사산비명은 최치원이 지은 비석문 가운데 사료적 가치가 높은 4개를 묶어서 만든 책이다. 그럼 그 대상인 4개는 무엇인가? 아참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가 그중 하나라고 했지.

 

1. 진감선사대공령탑비(국보 제47호): 지리산 쌍계사

​2. 지증대사적조탑비(국보 제 315호): 경북 문경 봉암사

3. 대숭복사비: 경주 대숭복사터

4.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

 

대숭복사비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3개의 비문이 다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데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니 사산비명을 주제삼아 탐방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신라 말기 비운의 천재였던 최치원의 자취를 따라서... 성주사터에 왔으니 벌써 한 곳은 다녀온 셈이다.

 

이제 절의 중심부였던 곳으로 향해가보자. 총 4개의 탑이 눈길을 확 사로잡을 것이다. 하나는 오층석탑이고, 나머지 3개는 삼층석탑이다. 삼층석탑은 열을 지어 서 있고, 오층석탑은 그것들과는 외떨어져 있다. 오층석탑과 삼층석탑 사이에는 본당 건물터가 있다.

 

하나도 아닌 4개의 탑이 한 곳에 집중적으로 서 있다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건물 하나에 탑 하나를 두고, 사찰의 가람배치에서 1당 1탑이라고 한다. 탑이 두 개면 1당 2탑이라고 한다. 1당 3탑까지는 들어봤는데 1당 4탑은...? 하여간 우뚝 서 있는 4개의 탑이 있어 그런지 성주사지는 그 어떤 폐사지보다 덜 쓸쓸해보인다.

 

탑들을 둘러보기 전에 본당터부터 살펴보자. 이 본당터 가운데에는 연꽃무늬로 새겨진 석조대좌가 있는데 오랜 시간이 흘러서인지 사각형의 석조대좌는 군데군데가 훼손되었다. 외형이 훼손되었지만 그래도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보았다. 아니 건축학적 상상력인가? 이 석조대좌에는 큰 불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 불상은 석불이 아닌 철불이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들고 나갔다는 것이다. 이런 괴씸한!

 

 

 

 

 

* 성주사지 오층석탑

 

 

 

 

 

 

 

오층석탑은 6.6미터로 성주사지에 남은 문화재들중에서 가장 높다. 오층석탑은 성주사지의 기준점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처럼 본당터 앞에 우뚝 서 있다. 2중 기단 위에 5개의 탑신이 올려져있는데 1층 탑신이 두드러지게 길쭉하지만 탑 전체가 늘씬한 상승감을 자랑하며 균형있게 층층을 이루고 있다. 안타깝게도 꼭대기 부분인 상륜부는 훼손이 됐다.

 

성주사지 오층석탑은 신라 후기에 제작되었는데 2층 기단과 1층 탑신 사이에 괴임돌이 받혀졌다. 이렇게 괴임돌이 받혀지는 형식은 신라시대 석탑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형태다. 아무래도 오층석탑을 만든 석공은 시대를 앞서간 아티스트가 아니었을까... 성주사지 오층석탑은 보물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제 열을 지어 서 있는 세 개의 탑을 살펴보자. 얼핏보면 세 쌍둥이 탑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보면 각 탑의 높이가 제각각이다. 서탑은 4미터, 중간탑은 3.7미터, 동탑은 4.6미터이다. 이 세 탑은 건너편 오층석탑처럼 2층 기단과 1층 탑신 사이에 괴임돌이 따로 받혀진 형태다. 그런데 이 세 개의 탑의 1층 탑신에는 무언가가 조각되어 있다. 문틀모양과 문고리 장식을 새겨넣은 것이다. 탑에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독특함 때문인지 세 개의 탑은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서탑은 제47호, 중간탑은 제20호, 동탑은 제2021호이다. 동탑은 2019년도에 승격됐는데 이전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였다.

 

한편에 서 있는 석불입상도 친견했다. 훼손이 심해 시멘트로 보수되어 있는 석불은 좀 어눌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좀 더 친근한 모습이었다. 마을에서는 미륵불로 불린다고 한다. 오랜동안 이곳에 서 있으면서 성주사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석불일텐데... 그렇게 묵묵하게 이 터를 지켜준 석불 앞에서 크게 몸을 숙여 합장을 하였다.

 

성주사지도 폐사지이기에 허허로움이 탐방 내내 느껴졌지만 그래도 석불도 있고, 석탑도 4개나 있어서 그나마 덜 외로운 느낌이었다. 뒤쪽에 둘러져 있는 성주산도 압도하는게 아니라 아늑해 보이고... 그렇게 성주사지 탐방이 종료가 됐다.

 

 

 

 

 

* 세 개의 탑

 

 

 

 

 

 

 

* 성주사지 석불입상

 

 

 

 

 

 

 

 

* 세 개의 석탑: 사진 가운데 하단부에 석불입상이 보인다.

 

 

 

 

 

 

 

* 본당터 석조계단: 오리지널 석조 계단을 1986년에 누가 들고 갔다고 한다. 그 무거운 걸 가져가다니! 이 문화재 도둑놈아! 현재 계단은 옛 사진을 근거로 복원한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