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8편> 불암산이 부처님 산이라고? _ 불암산 역사트레킹

 

 

 

* 불암사 뒤편 마애삼존불: 12지상이 호위하듯 서 있다.

 

 

 

 

 

 

 

- 목적없이 그냥 트레킹을 하는 것이 좋으신가, 아니면 주제성이 확실한 테마트레킹이 좋으신가?

 

수강생들에게 이 질문을 던졌을 때 거의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테마트레킹이 좋다고 대답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계신분들은 어떤 것이 좋으신가?

 

역사트레킹은 역사를 중심에 둔 테마트레킹이다. 역사트레킹이 거듭될 때마다 점점 더 큰 욕심이 생겼는데 테마의 강도를 더 높이고 싶은 욕심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맨 처음 구체화한 것이 내사산(동: 낙산, 서: 인왕산, 남: 남산, 북: 북악산) 테마였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외사산(동: 아차산, 서: 덕양산, 남: 관악산, 북: 북한산)으로 확장시켰다. 내사산, 외사산의 테마가 종료되니 새로운 주제에 대한 갈증이 일어났다. 그러다 목탁을 치듯 무릎을 쳤다. 사찰이 있었던 것이다.

 

 

 

 

 

 

* 불암사 일주문

 

 

 

 

 

 

● 부처님의 형상을 한 불암산

 

이번에는 불암사 역사트레킹이다. 불암사는 불암산에 있는 사찰로 동불암(東佛巖)으로도 불리는 서울근교의 4대 명찰이다. 4대 명찰을 알기 쉽게 정리를 해보자. 동쪽 - 불암사, 서쪽 - 진관사, 남쪽 - 삼막사, 북쪽 - 승가사.

불암산 역사트레킹은 서쪽편인 서울시 노원구에서 시작하여 동쪽편인 경기도 남양주시로 넘어간다. 그러니 불암산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는 게 먼저다.

 

필암산이라고도 불리는 불암산(해발508미터)은 이웃한 수락산과 더불어 바위가 많은 산이다. 거북바위, 해골바위, 백바위 등등... 형형색색의 바위들이 자태를 뽐내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불암산이라는 명칭도 바위의 형상에서 도출됐다. 정상부 바위의 모습이 마치 송낙을 쓴 부처님의 모습처럼 보인다하여 불암산이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송낙이 뭐지? 어려운 명칭이 나왔으니 잠시 정리하고 가자. 송낙은 송라립(松蘿笠)이라고도 불리는데 주로 여승들이 쓰는 모자를 말한다. 이 송낙은 소나무의 겨우살이인 송라를 엮어서 만드는데 얼핏 보면 지푸라기로 만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모양은 전체적으로 고깔모자처럼 생겼으나 맨 윗부분은 두상에 맞춰져 평평하다.

 

이렇게 설명해도 감이 잘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럼 조각 피자를 생각해보시라. 먹음직스러운 조각 피자를 먹으려고 딱 준비를 했는데 누가 냉큼 한 입 베어 먹은 것이다. 조각 피자의 삼각뿔이 없어지고 마음은 아프고... 송낙을 쓴 부처님의 형상을 두드러지게 볼 수 있는 곳은 불암산의 동쪽편이다. 그러고 보면 불암산은 부처님 자체인 거 같다.

 

“불암산, 불암산 하는데 이 산이 최불암 산이에요?”

“그럴 수도 있어요. 최불암 선생이 이 산의 명예 산 주인이라고 하더라고요.”

“최불암 선생님은 좋겠어요.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프로그램도 하고, 산 주인도 하고요.”

“저도 정말 부러워요. 하하하”

 

 

 

 

 

 

* 불암사 가는길

 

 

 

 

 

 

 

● 불암산의 다른 이름, 필암산

 

불암산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마다 꼭 나왔던 말들이다. 물론 최불암 선생의 본명은 따로 있다. 최영한. 하지만 우리에게 최불암은 최불암이다. 송해 선생이 본명인 송복희가 아닌 송해로 우리에게 각인된 것처럼.

앞서 언급한 필암산(筆巖山)이라는 명칭도 살펴보자. 필(筆)자는 ‘붓필’인데 이 일대는 문방사우와 관련된 지명들이 나타난다. 인근에 있는 중랑구 묵동이 대표적이다.

 

묵동은 먹(墨)을 만드는 동네라고 하여 먹골로 불렸다. 먹골배가 생각나시나? 먹는다고 먹골배가 아니라 먹을 만든다고 먹골이었던 것이다.

 

노원구 월계동에는 ‘벼루연(硯)’자를 쓴 연촌(硯村)이 있었다. 이 곳은 ‘벼루말’이라고도 불렸는데 동네에 벼루처럼 생긴 연못이 있다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종이, 붓, 벼루, 묵. 문방사우(지필묵연) 중에 종이만 빼놓고는 다 나왔다. 기왕이면 종이와 관련된 지명까지 만들어서 완전체를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어쩌면 일부러 완전체를 만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든다. 문방사우와 관련된 지명을 배치했다면 종이지(紙)와 관련된 동네 이름을 빼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가 가장 먼저 나오니까. 그래서인지 모르겠으나 필, 묵, 연의 지명을 쓴 건 이 일대의 지기(地氣)를 꺾기 위한 풍수적인 의도였다는 설도 있다.

 

 

 

 

 

 

* 불암산

 

 

 

 

 

 

 

● 숲길이 좋은 불암산

 

서론이 길어졌다. 불암산 역사트레킹은 4호선 상계역에서 시작한다. 바위가 많은 산을 골산(骨山), 흙이 많은 산을 육산(肉山)이라고 부르는데 이에 따르면 불암산은 골산이다. 설악산이 대표주자로 많이 언급되듯이, 골산은 ‘악’자가 많이 따라붙는다. 치악산, 관악산, 월악산 등등... 이런 산들은 입에서 ‘악’ 소리가 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골산임에도 불암산은 어렵지 않게 탐방할 수 있다. 해발고도가 508미터로 그리 높지 않기도 하지만 딱히 ‘악’ 소리를 입에 달고 오르는 구간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역사트레킹은 정상을 가는 스타일이 아니라 ‘악’ 소리하고는 거리가 멀다.

 

현재 불암산의 서쪽은 서울둘레길 1코스(수락불암)에 포함되는데 완경사를 따라 걷는 길이 참 좋은 곳이다. 숲도 울창하고, 편의시설도 잘 갖춰져 있어 많은 이들이 콧노래를 부르며 걷는 곳이다. 숲이 우거진데다 흙길도 잘 정비되어있어 명품 숲길이라고 칭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그렇게 숲길을 따라 걷다 둘레길 전망대에 올라 불암산 정상쪽을 바라보자. 암반면이 노출된 암봉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바위들이 정말 매끈하지 않습니까? 저 위에서 쭈욱따라 미끄럼 타고 싶어요.”

“그래요. 말 나온 김에 시범을 보여주세요.”

 

재치 9단인 수강생들 앞에서는 농담도 조심해야한다. 그래서 재빨리 고개를 돌려 말했다.

 

“저기보세요. 저 높은 바위에 뭐가 매달려있어요. 그리고 또 움직여요.”

“정말 그러네요. 저거 사람이에요? 어떻게 저길 올라갔데요.”

 

그곳은 학도암장이다. 그렇게 움직이는 이들은 암벽등반을 하는 이들이다. 로프에 몸을 싣고 암벽을 타는 이들의 모습이 아슬아슬해 보인다. 하지만 너무 멋있어 보인다. 필자는 암벽을 탈 용기가 없다. 그냥 걷는 게 좋다. 그래서 트레킹을 한다. 참고로 학도암장 정상부에서 조금만 더 이동하면 신라 시대에 만든 불암산성을 만날 수 있다.

 

바위가 많은 산은 사람들을 상상의 날개를 펴게 만든다. 바위의 형상이 조금이라도 무언가와 비슷하다면 해당되는 이름이 붙게 된다. 해골바위, 거북바위, 범바위 등등... 거시기한(?) 바위도 있다. 남근석이나 여근석이 바로 그것이다. 불암산에도 남근석과 여근석이 있는데 그 모양새가 꽤 사실적이라는 게 중론이다.

 

더군다나 두 바위가 그리 멀지않은 곳에 위치하여 음양의 조화를 제대로 펼치고 있는 모양새다. 다른 지역에는 남근석만 있거나 반대로 여근석만 있어 음양의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도 많은데 불암산은 그걸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 천보사: 대웅전과 코끼리바위

 

 

 

 

 

 

 

 

● 하늘의 보물을 품은 천보사

 

이제 천보사 방면으로 이동한다. 불암산은 필암산 이외에도 천보산(天寶山)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천보산이라는 명칭은 세조가 지었다고 한다. 세조가 이 일대를 유람하다 아름다운 풍광에 매혹되어 천보산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물음표부터 떠오른다. 불암산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역에 ‘천보산’이라는 명칭을 가진 산이 두 개나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유명한 회암사지가 자리 잡고 있는 양주의 천보산이고, 다른 하나는 의정부의 북쪽에 위치한 천보산이다. 이 둘은 하나의 맥으로 연결되어 있긴 한데 그 거리가 상당히 멀리 떨어져있다.

 

해발고도도 다르다. 양주의 천보산이 432미터이고, 의정부 천보산이 337미터이다. 이미 기존에 천보산이라는 명칭을 가진 산이 있는데 굳이 세조가 또 천보산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는 이야기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가람을 품고 있는 산의 명칭이 어찌됐든 천보사는 그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사찰이다. 하늘의 보물을 품고 있는 있다는 뜻 아닌가.

 

천보사는 천연보궁(天然寶宮)이라고 불린다. 법당 뒤쪽에 병풍처럼 펼쳐진 코끼리바위가 부처님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병풍바위처럼 비교적 평평한 암석면에는 마애불을 그려 넣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창 선운사 마애불을 생각해보시라! 하지만 천보사는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자연암석을 부처님으로 보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천연보궁이라고 칭한다.

 

“여러분 눈을 크게 뜨고 한 번 바라보세요. 저 바위에 부처님이 깃들어 계신데요.”

“잘 안 보이는데요.”

“마음속에 불심이 없으셔서 그런 거에요. 불심이 있으면 보입니다.”

“곽작가님은 보이세요? 설명 좀 해주세요.”

“아니... 제가 사실은 제가 시력이 안 좋아서...”

“피이... 자기도 못 알아보면서.”

 

그랬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보더라도 부처님이 보이지 않더라. 물론 근래에 새겨놓은 석불좌상은 잘 보였다. 하지만 천연보궁에 깃든 부처님은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필자에게는 부처님을 알아볼 수 있는 불심이 없었던 것이다.

 

- 모든 돌은 그 내부에 조각상을 가지고 있으며, 그 모습을 찾아내는 것이 조각가의 일이다.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말이다. 이 말에 의하면 모든 바위는 부처 바위가 될 수 있다.한낱 중생도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하다. 천보사 코끼리바위에서 육안으로 부처님을 찾기보다는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게 더 좋을 거 같다. 아니면 바위에 ‘자비’ 두 글자를 그려 넣어도 좋을 것이다. 조각이든 글씨든 뜻이 통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거대한 코끼리 바위를 품고 있는 천보사는 그 자체로 절경이다. 그 아름다운 사찰에서 내려 보는 풍광도 아주 시원스럽다. 정말 말 그대로 하늘의 보물을 품고 있는 사찰이 맞다. 사찰을 떠나기 전에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천보사 5층 석탑을 꼭 보고 오자. 천보사의 역사가 짧지 않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천보사

 

 

 

 

 

 

 

● 서울이 4대 명찰, 불암사

 

이제 마지막 탐방지인 불암사(佛巖寺)로 향한다. 천보사에서 불암사까지는 산길로 연결이 되어 있다. 좁은 오솔길을 걷는 맛이 참 좋다. 그런데 좀 위험한 구간도 있으니 발걸음을 조심하자.

 

불암사는 지증대사가 후기 신라시대인 헌덕왕 16년(824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글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불암사는 서울 근교의 4대 명찰로 동불암이라고 불렸다. 서울 근교 4대 명찰은 세조의 명에 의해 지정된다.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재위 기간에 자신의 아들(의경세자)과 손자(인성대군)가 죽는 등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자신도 여러 가지 병치레를 했는데 금강산이나 오대산 같은 강원도 지역의 명산들에서 요양을 했기에 반드시 서울의 동쪽 지역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세조가 천보사의 명칭을 하사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세조는 그런 시련을 불심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그래서 도성밖 사방에 왕실의 발전을 기원하는 4대 명찰을 지정하게 된다. 동쪽 - 불암사, 서쪽 - 진관사, 남쪽 - 삼막사, 북쪽 - 승가사.

 

불암사에는 보물 제591호 불암사경판이 전해 내려온다. 이중 <석씨원류(釋氏源流)>라는 책을 찍은 목판이 있는데 이 <석씨원류>는 조선 후기 불교의 대중적 확산에 공헌을 했다고 한다. <석씨원류>는 중국에서 간행된 책으로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제자들의 이야기를 담았는데 일반 민중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중간에 그림을 그려 넣었던 것이다.

 

이 책은 1631년(인조9년), 정두경이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 가져왔는데 승려 지습이 1673년에 불암사에서 판각했다. 이후 <석씨원류>가 퍼져나갔고, 사찰 건물의 내외부에 부처님의 행적을 담은 불화가 그려졌다고 한다. 글을 몰랐던 사람들에게 그림만큼 좋은 교화 도구도 없었을 것이다. 성당에 그려진 성화들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1989년 불암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게 된다. 태국에서 3과, 스리랑카에서 4과의 진신사리를 모셔와 진신사리보탑을 건립하게 된다.

 

- 머리에 송낙을 쓴 부처님의 형상

- 부처님의 행적을 담은 <석씨원류> 목판

- 부처님의 사리를 담은 사리탑

 

서울의 4대 명찰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만큼 귀한 것들이 많기에 동불암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이제 하산을 할 시간이다. 제월루 앞에 있는 천보산불암사사적비도 놓치지 말고 보고 가자. 사적비는 1731년(영조7년)에 만들어졌다. 1994년에 만들어진 일주문에도 천보산이라고 적혀 있다.

 

이렇게 하여 불암산 역사트레킹이 종료가 됐다. 좋은 숲길을 걸으며 귀한 문화유산을 만나서 그런지 마치 하늘에서 보물을 선물 받은 거 같다. 덕분에 즐겁게 역사트레킹을 행했다.

 

 

 

 

 

 

* 불암사

 

 

 

 

 


 

 

 

 

 

 

■ 불암산 역사트레킹

 

1. 코스: 전망대 ▶ 남근석 ▶ 여근석 ▶ 천보사 ▶ 불암사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4시간(휴식시간 포함)

4. IN: 지하철 4호선 상계역 1번 출구 / OUT: 불암사 ☞ 202번 버스종점에서 6호선 화랑대역으로 향하는 버스를 탈 수 있음.

 

 

 

 

 

* 불암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 삼천사 역사트레킹 지도

 

 

 

 

10월 17일 토요일.

 

이날은 새벽부터 분주했다. 새벽 4시경에 드디어 길고 길었던 프로젝트 하나가 종료됐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아침에 일어나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리딩하러 경복궁역으로 달려갔다. 새벽까지 그림을

그리고 아침에는 트레킹을 하러가니 누가보면 무슨 대단히 바쁜 사람인 줄 알겠다...ㅋ

 

그렇다. 그 프로젝트는 그림 그리기, 정확히는 트레킹 지도 그리기였다. 필자는 <트레킹은 생각창고>라는

브런치북을 간행했었다. <트레킹은 생각창고>에는 총 16편의 트레킹 코스와 그에 해당하는 지도 그림이

그려져있다.

 

지도를 그렸다고 하는데... 보시면 알겠지만 퀄리티가 높은 수준이 아니다. 그래그래 내 그림 솜씨 초딩이다.

그러니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좋겠다.^^ 이전 포스팅에도 언급을 했지만 해당 트레킹의 이동경로를 시각화시켜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차이가 아주 크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다. 하물며 낯선 필드에서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이동을 했는지를 알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아주 예전 원고에서는 지도를 그려넣지 못했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못난 그림 솜씨 때문이었다. 하지만 <트레킹은 생각창고>부터는 큰 맘 먹고 지도를 그려넣기 시작했다. 욕을 하려면 해라~ 뭐 그런 식으로 대차게 나간 것이다. 이렇게 확치고 나갈 때도 있는 법이다!

 

필자가 구식이라 그런지 지도를 수기로 그려넣었다. 집에 굴러다니는 A4 용지에다 볼펜 깍지를 낀 몽땅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다이소에서 구매한 3천원짜리 색연필로 색칠을 했다. 재료비가 거의 안 들었다. 그건 정말 좋았다. 돈 안 들어서...ㅋ

 

 

 

 

 

전송중...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그렇게 <트레킹은 생각창고>는 완료가 됐다. 하지만 생각해보니 16편 가지고는 원고의 절대량이 부족해보였다. 그래서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이라는 브런치 매거진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총 7편의 원고가 들어가 있다.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은 여름에 작성한 원고라 지도를 그려 넣기가 만만치가 않았다. 한 여름에는 팔에 땀이 배겨 A4 용지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고심 끝에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은 원고부터 다 작성하고 지도는 날씨가 선선해지면 몰아서 그리기로 했다. <트레킹은 생각창고> 때는 한 편 작성하면 바로 지도를 그렸던 터였다.

 

역시 일은 묵혀두면 부담감도 함께 쌓인다. 7편의 지도를 몰아서 그리려고 하니 부담감도 생기고 귀찮기도 했다. 그래서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은 지도 없이 갈까 하는 생각까지 들더라. 하지만 일을 시작했으면 완결을 봐야한다. 어차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각오를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매일 하루에 하나씩 지도를 그렸다. 이 지도가 책에 실릴 수 있을지 아닐지... 그저 내 블로그에만 존재하는 지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일단은 접어두고 계속 그렸다. 그게 내 역할이고 내 임무였으니까.

 

결국 10월 17일 새벽 4시경에 마지막 호암산 역사트레킹 지도까지 다 그렸다. 스캔까지 해서 브런치와 블로그에 올렸다. 아주 속이 다 후련하다. 무슨 작품 전시회 같은게 끝난 느낌이다. 오죽 후련했으면 그 새벽 시간에 옥상에 올라가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까!

 

작년 가을부터 이제까지 총 23편의 지도와 원고를 그렸고 작성했다. 만약 코로나 사태가 없었으면 그 정도의 결과물을 생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코로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나?ㅋ 코로나야 썩 물러가라!

 

이제 당분간은 지도를 그릴 일이 없을 거 같다. 한창 시즌이라 역사트레킹도 리딩해야 한다. 지금이 단풍트레킹 하기에 딱 좋은 계절이 아닌가. 소규모로 방역 수칙만 잘 지키면 언택트 시대에도 트레킹은 가능하다. 또 다른 프로젝트도 해야하니까 당분간 지도를 그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슬슬 손이 가려워지겠지. 어쩌면 나도 모르게 보물 지도를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그런 보물지도...ㅋ

 

 

 

 

 

 

 

* 태종이방원역사트레킹: 채색본과 완성본.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7편>

잘 알려지다시피 조선의 건국자들은 관악산의 화기를 두려워했다. 또한 호랑이 기운도 두려워했다. 경복궁과 관악산 사이에 한강이 있었지만 그 걷잡을 수 없는 기운들이 도강을 하여 도성 안으로 미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이번편은 관악산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다. 관악산에 대한 이야기는 <관악산 역사트레킹>편에서 언급을 했었다. 이번편은 관악산의 지산인 호암산에 대한이야기다. 그래서 부제도 <호암산 역사트레킹>이다.

호암산 역사트레킹은 1호선 석수역에서부터 시작한다. 1번 출구로 나오면 1번 국도가 나온다. 이 구간은 경수대로라고도 불리는데 안양시 석수동부터 수원시 권선구 대황교동까지의 거리를 경수대로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참고로 1번 국도는 전라남도 목포에서부터 평안북도 신의주까지 1,068km에 달한다. 남북이 통일되면 1번 국도를 따라 달려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다. 필자도 통일이 되면 큰 배낭에 텐트 짊어지고 북쪽으로 트레킹을 하러 갈 셈이다. 그날이 언제 올까? 하여간 빨리 왔으면 좋겠다.

석수역을 뒤로하면 서울둘레길 표식이 보인다. 여기는 서울둘레길 5코스 관악산삼성산 구간이다. 도보여행자들이 표식을 따라 산으로 향한다. 주택가를 지나면 둘레길 초입이 나오는데 트레킹팀은 좀 더 이동한다. 대한신학대학교라는 곳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무언가를 하고 출발한다. 스트레칭. 많이 걸으니 스트레칭은 필수다.

 

 

* 호암산 잣나무숲: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힐링하기에 딱이다.

● 호랑이 형상을 닮은 호암산

큰 산이라 그런지 관악산은 여러 지산을 거느리고 있다. 호암산도 그 지산 중에 하나다. 그 외에도 삼성산이 관악산의 지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금주산 혹은 금지산으로 불렸던 호암산(虎岩山)은 호(虎)자에서도 보이듯 산이 호랑이의 형상을 닮았다고 한다. 호암산은 서울 금천구의 주산으로 금천구와 관악산에 걸쳐있다. 호암산이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돌산인 관악산의 지산인 만큼 바위가 많다. 해발고도가 393미터라 그리 높지 않지만 곳곳에 펼쳐진 기암괴석들이 산행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저 바위가 무언가 있어 보이네요. 어떤 걸로 보이세요?”

“촛대바위인가요? 길쭉길쭉하네요.”

“길쭉하긴 한데요 촛대바위는 아니에요.”

“그럼 뭐죠...”

트레킹팀의 눈길을 사로잡는 바위가 나타났다. 바로 일명 사랑바위라고 불리는 신랑각시바위다. 신랑각시바위는 남녀 간의 사랑을 이루게 해준다하여 이 일대에서는 무척 유명한 바위로 통한다. 촛대바위처럼 늘씬한 암석 2개가 서로의 몸을 맞대고 입맞춤을 하는 형상이라 사랑바위라는 명칭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아랫부분은 단일 암석이다. 윗부분에 절단면이 생겨 바위가 두 개로 보이게끔 윤곽선이 생긴 것이다.

 

* 신랑각시바위

● 호암산판 로미오와 줄리엣, 신랑각시바위

명칭이 신랑각시바위인 만큼 그 속에 얽힌 이야기도 당연히 러브스토리다. 아랫마을에 선남선녀가 있었는데 그 둘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두 집안은 서로 철천지원수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여자 집안에서는 다른 집으로 시집보내려고 했고, 이에 낭자는 호암산으로 도망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총각은 낭자를 찾아다녔고 지금의 신랑각시바위가 있는 곳에서 낭자를 찾게 됐다. 둘은 서로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고 다짐했고, 그 소원을 달님에게 빌었다. 달님은 그 둘을 영원히 떨어지지 않게 그 자리에 서로를 마주보게 하는 바위로 만들었다.

남녀간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존재한다. 그 이야기들의 상상력은 끝이 없다. 나무에 투영하여 연리지(連理枝)를 그려내고, 상상의 동물인 비익조(比翼鳥)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신랑각시바위는 그런 상상력에 무속신앙까지 더해진다. 그 바위를 보고 간절히 기원을 드리면 선남선녀들이 혼인을 할 수 있고, 거기에 더해 아들까지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랑은 바위조차도 달리 보게 해주는 큰 힘이 있는 거 같다.

참고로 연리지는 뿌리가 각각 다른 나무들의 나뭇가지가 서로 엉킨 것을 말한다. 서로 하나로 엉켜 있어 하나의 나무처럼 보인다. 비익조는 암컷과 수컷이 각각 하나의 눈과 날개만 있는 상상속의 새다. 눈도 하나요, 날개도 하나라 서로 짝을 짓지 못하면 날 수가 없다.

신랑각시바위를 비롯한 많은 바위들은 그 자체로 전망대 역할을 해준다. 이곳에서는 이웃 동네인 경기도 광명시를 비롯해 안양시, 군포시가 내려다보인다. 풍광이 시원시원해서 그런 걸까. 신랑각시바위 옆 전망대를 바라보고 있으면 괜히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어진다. 그리고는 사랑에 빠지고 싶어진다.

* 한우물: 제1한우물이다. 저기서 수영을 하고 싶을까?

● 호암산성과 한우물

이제 트레킹팀은 한우물과 석구상을 향해 간다. 정상부 능선길을 따라 이동하는데 오르막내리막이 있긴 하지만 어렵지 않게 움직일 수 있다. 이 길은 앞서 언급한 서울둘레길 5코스와는 다른 길이다. 서울둘레길이 산 중턱을 따라간다면 ‘신랑각시바위 - 한우물’ 구간은 호암산의 정상부 산마루를 따라 이동한다.

한우물은 호암산성 안에 있는 시설로 제1한우물과 제2한우물로 나뉜다. 호암산성은 호암산 최정상 아래 능선에 쌓은 성으로 길이가 약 1,500미터에 달하는데 마름모꼴로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테뫼식은 산의 테두리를 둘러서 쌓았다는 의미다.

호암산성의 축조 시기는 6~7세기경이었고, 한강유역을 차지한 신라가 쌓았다. 앞서 신랑각시바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호암산 일대에 서면 서쪽 지역들을 관찰하기가 용이하다. 안양천을 따라 펼쳐진 평지는 물론 그 뒤쪽에 있는 광명, 시흥까지 잘 관찰된다. 날씨가 좋으면 그보다 더 먼 서해바다까지 조망할 수 있다. 또한 양천을 비롯한 한강유역도 잘 보이니 호암산성은 한강 서남부의 요충지였던 것이다.

당시 신라로서는 서해바다를 통해 한반도로 침입했던 당나라를 막아내야 했다. 그러니 서해와 한강유역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었던 호암산에 축성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조일전쟁(임진왜란) 시기에도 조선군이 주둔하는 등 이후에도 호암산성의 전략적 가치는 여전했었다.

한우물은 그런 호암산성의 물 공급지였는데 산 정상부에 있는 ‘우물’치고는 상당히 크다. 동서로 22미터, 남북으로 12미터에 달하는데 작은 저수지처럼 보일 정도다. 물이 귀한 산정부에 큰 우물이 있다는 것이 신기해 보인다.

천정(天井)이라고도 불리는 한우물의 최초 축조 시기는 신라 시대로 보고 있다. 현재의 한우물은 조선 초기에 축조된 것인데 신라 시대에 만든 우물 위에다 축을 어긋나게 해서 올려쌓은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제1한우물이다. 제2한우물은 복원이 되지 않아서 그랬는지 자연상태의 늪지처럼 보인다. 석축이 둘러져있지 않으면 그냥 습지로 알고 넘어갔을 거 같다.

* 석구상

● 돌로 만든 개, 석구상

제2한우물에서 조금만 더 가면 돌로 만든 조형물이 있다. 재미삼아 트레킹팀에 물어본다.

“이거 조선시대 때 만든 건데요, 어떤 동물로 보이세요?”

“호랑이요.”

“양인가요.”

“돼지처럼 생겼어요. 돼지에요.”

호랑이에서 돼지까지 나왔다. 하지만 모두 땡.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석구상(石狗象)이다. 돌로 만든 개다.

이 돌로 만든 개는 예전에 해치상으로 오해를 받았다.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관악산 인근에 해치상을 만들어 놓았다는 도읍설화와 관련된 이야기 때문이었다. 아시다시피 해치는 화재와 재앙을 막는 상상의 동물이다.

하지만 이 석구상은 해치보다는 개에 가까운 형상이다. 아무리 해치가 상상 속의 동물이라지만 저런 형태의 해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시흥읍지> ‘형승조’편에도 돌로 만든 개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기록이 있다.

석구상은 집 지키는 개처럼 홀로 외롭게 호암산성 일대를 지키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지킴이 역할을 할 거 같다. 세월의 흔적을 비켜갔는지 석구상은 아직까지도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닳지가 않았다. 개사료 한 알 먹지도 않았는데 길이 1.7미터, 폭 0.9미터, 높이 1미터로 오통통하다. 그 모습이 참 듬직해 보인다.

서술 때문에 탐방 순서를 바꿨는데 호암산성 내에서의 탐방은 아래와 같다.

 

제2한우물 → 석구상 → 제1한우물(불영암)

호암산성 탐방을 마친 트레킹팀은 호압사를 향해간다. 그런 트레킹팀 앞에 울창한 잣나무 숲이 펼쳐진다. 그 길이가 약 1km에 달할 정도다. 워낙 숲이 울창한데다 편의시설까지 잘 갖추어져 있어, 일부러 멀리서도 이 잣나무숲을 보러올 정도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아예 트레킹팀 앞에서 이런 말까지 했었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우리 사실 이 잣나무 숲길 걸으러 온 거에요. 신랑각시바위나 석구상보다 이 숲이 더 좋아요.”

예전에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심어놓은 잣나무들이 이제는 사람들의 힐링을 위해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들은 나무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공짜로 받고 있다. 그러니 나무한테 고맙다는 말 정도는 건네자.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잣나무 삼림욕장에서 몸과 마음을 힐링한 트레킹팀은 이제 마지막 탐방지인 호압사로 향한다.

* 호압사 법고: 호랑이가 깔려있다.

● 호압사에서는 호랑이가 대접을 못 받는다

호압사(虎壓寺)는 호압(虎壓:호랑이를 누른다)이라는 한자어에도 나타나듯이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창건된 사찰이다. 이런 사찰을 두고 비보(裨補)사찰이라고 칭한다. 지형지세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사찰을 세웠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언급했지만 조선의 건국자들은 관악산의 화기와 호랑이 기운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그 기운들을 꺾어야했다. 호랑이는 꼬리를 밟으면 꼼짝을 못한다고 말이 있어 그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호압사를 짓게 한 것이다. 호압사의 법고는 호랑이 등 위에 올려져있다. 법고 밑에 호랑이가 깔려 있는 형상이다. 그렇듯 호압사는 철저하게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기획된 사찰이다.

호랑이가 다른 사찰에 가면 산신각에서 산신령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호압사에서는 대접이 완전히 꽝이다. 그러고보면 호랑이도 번지수를 잘 찾아가야 한다. 아무 곳이나 갔다가는 본전도 못 찾는다.

호압사 탐방을 끝으로 호암산 역사트레킹도 종료가 된다. 기암괴석, 잣나무 숲길, 한우물, 석구상, 호압사의 호랑이 등등... 호암산 역사트레킹과 연관된 키워드가 풍성하다. 이렇듯 호암산 역사트레킹은 아기자기한 멋이 넘치는 코스이다. 가보면 너무나 좋은 곳이다.

* 호암산: 기암괴석들을 만날 수 있다.


■ 호암산 역사트레킹

1. 코스: 신랑각시바위 ▶ 호암산성 ▶ 잣나무숲길 ▶ 호압사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4시간(휴식시간)

4. IN: 지하철 1호선 석수역 1번 출구 / OUT: 호압사 ☞ 호압사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2호선 신림역으로 갈 수 있음.

 

 

 

 

* 태종이방원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6편>

이번 편에는 센(?) 분을 만나러 간다. 부제부터 파워가 느껴지지 않는가? 태종 이방원 역사트레킹이니까!

태종 이방원 역사트레킹은 할미산이라고도 불리는 대모산 일대에서 진행된다. 대모산의 남쪽에서 시작해서 북쪽으로 넘어가 광평대군 묘역에서 종료가 된다. 산을 하나 넘어가는 형태지만 물리적으로 그리 어려운 코스는 아니다. 대모산의 해발고도가 293미터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상을 찍지도 않는다. 역사트레킹은 숲길을 찾아 산을 향해가지만 정상을 찍지는 않는다. 역사트레킹은 등산모임이 아니니까.

태종 이방원 역사트레킹의 첫 번째 탐방지는 헌인릉이 있는 강남구 내곡동이다. 하지만 트레킹팀은 지하철 3호선과 신분당선이 만나는 양재역에서 집합을 한 후 헌인릉행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헌인릉을 가보시면 알겠지만 여기가 강남이 맞나 싶을 정도로 좀 허한 느낌이다. 그 흔한 편의점 하나가 안 보인다. 길이 엇갈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예 양재역에서 함께 모여 이동하는 것으로 정했다. 버스를 약 20분 정도 타고 가는데 차창 밖 풍경이 지루하지 않아서 좋다.

 

● 자식 복이 없었던 정조

주차장을 지나 매표소로 향하는데 홍살문이 보이고 그 너머에 봉분이 보인다. 들어서자마자 태종 이방원이 잠든 헌릉을 마주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곳은 인릉이다. 인릉은 조선의 23대왕인 순조와 그의 부인인 순원왕후의 능이다. 이방원을 만나러왔는데 뜻밖에 인물부터 마주하게 된 것이다. 태강릉을 생각해보시라. 문정왕후가 잠든 태릉을 보러 왔는데 그의 아들인 명종이 잠든 강릉까지 탐방하지 않았던가.

순조는 정조의 차남으로 1790년에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수빈 박 씨였는데 성품이 온화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현빈(賢嬪)이라고 불렸다. 순조는 정조가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는데 그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성군이라 불리는 정조대왕이었지만 자식복은 무척이나 없었다. 총 5명의 부인으로부터 2남 2녀를 얻었는데 그마저도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어려서 죽게 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정비였던 효의왕후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어 후궁인 원빈 홍씨와 화빈 윤씨를 연이어 들이게 된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후사를 얻지 못한다.

그러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의빈 성씨를 후궁으로 맞이하게 된다. 의빈 성씨는 원래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자식같이 대하던 궁녀였었다. 성씨가 정조보다 1살 많았는데 10살 경에 입궁을 했으니 정조와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마주쳤던 것이다. 그러다 나이가 찼고 성숙한 여인으로 거듭났을 것이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선남선녀들이 한 공간에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법이다. 불꽃이 팍팍!

의빈 성씨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그 아들이 문효세자였다. 문효세자는 정조의 첫 번째 자식으로 1782년에 태어났다. 그러나 박복하게도 다섯 살도 안 된 1786년에 홍역을 걸려 요절을 한다. 자식을 먼저 보낸 아픔 때문인지 당시 임산부였던 의빈 성씨도 몇 개월 후에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나마 있던 딸인 옹주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마감한다. 연이어 이어진 부인과 자식들의 죽음에 정조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 인릉 정자각

 

● 농산 스님이 정조의 아들?

1787년(정조11)에 수빈 박씨가 후궁으로 간택된다. 하지만 바로 순조를 낳지는 못했다. 왕위를 계승할 후손이 없었으니 정조는 얼마나 마음이 타들어갔겠는가. 그런 상황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순조의 탄생과 관련하여 주술적인 이야기가 등장한다.

용파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용파 스님은 당시 부과되는 부역이 너무 과하여 불교계가 피폐해지자 이를 타파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오셨다. 학수고대한 끝에 임금을 만났으니 그가 바로 정조였다. 대왕 앞에 나가 자초지정을 설명하니 그 부역을 면하게 됐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걸렸다. 왕위를 이을 왕자를 낳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정조께서는 용파가 보통 승려가 아니었음을 알아보았고 그에게 후사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했던 것이다.

문제가 해결됐지만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임금과의 거래의 산물이니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용파 스님은 이 일이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삼각산(북한산) 금선사에 있는 농산 스님을 찾아갔다. 자초지정을 들은 농산 스님은 금선사에 있는 목정굴에서, 용파 스님은 수락산에 있는 내원암에서 300일 관음기도를 올리게 된다.

드디어 300일이 되던 날이었다. 이날 수빈 박씨는 한 스님이 나타나 음력 6월 18일에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일러주는 꿈을 꾸게 된다. 이때 금선사 목정굴에서 기도를 올리던 농산 스님이 가부좌를 튼 채로 열반에 들게 된다. 마침내 음력 6월 18일이 됐고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왕자 아기씨가 태어났다. 이를 두고 농산 스님이 환생을 하여 수빈 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이 설화로 따지면 농산 스님이 정조대왕이 아들이 된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어쨌든 왕위를 이을 왕자가 태어났고, 금선사에서는 매해 6월 18일에 순조의 탄신제를 올리고 있다. 더불어 금선사와 내원암은 정조 재위 기간에 크게 중창된다.

정조의 자식과 그의 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나열해봤다. 개혁군주였던 정조가 승하하자 조선은 급격하게 퇴보를 하게 된다. 세도정치로 인해 사회는 극심하게 혼탁해지고 민초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 정조대왕이 좀 더 길게 사셨으면...

- 순조가 좀 더 일찍 태어났으면...

 

순조가 11살이 아닌 좀 더 성장한 후에 왕위에 올랐으면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부질없지만 그런 상상을 해본다. 세도세력이 덜 맹위를 떨쳤을 거 같고, 서양 열강들과의 관계도 좀 더 슬기롭게 대처했을... 말 그대로 쓸데없는 역사적 가정인가? 하지만 아쉬운 것은 아쉬운 거다.

* 목정굴: 북한산 금선사에 있는 목정굴. 계곡 옆에 있어 여름철에는 무척 시원하다. 대모산이 아니라 북한산에 있다.

 

● 한 번 옮겨진 인릉

순조가 잠들어 있는 곳에서 그의 탄생이야기를 너무 길게 하였다. 자 이제 순조가 잠들어있는 인릉을 살펴보자. 원래 인릉은 1835년,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장릉(長陵) 곁에 모셔졌었다. 장릉은 인조의 능이다. 그러다 20년 후에 능지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이곳 헌릉 옆으로 천릉(遷陵)하게 된다. ‘옮길천(遷)’자에서도 보듯 천릉은 이장(移葬)을 뜻한다. 그래서 천장(遷葬)이라고도 부른다. 천릉을 해서 그런지 인릉의 비각 안에는 구표석과 신표석 2기가 있다.

인릉은 순조와 함께 정비 순원왕후가 함께 묻힌 합장릉이다. 단릉과 같은 형식이라 단출한 모습을 띄고 있다. 옆에 있는 태종 이방원의 헌릉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차이가 난다. 소박해보일 정도다.

순조가 1834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재위 기간은 34년이나 됐다. 적지 않은 기간이다. 아버지 정조보다 10년이나 더 왕위에 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용상에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왕위는 손자인 헌종에게로 전해졌다.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던 아들 효명세자가 일찍 죽음을 맞이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간단한 퀴즈 하나.

 

“조선 역사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왕은 누구?”

단종이라고 많이 말씀하실 거 같은데 틀린 말이다. 답은 바로 헌종이다. 헌종은 8살 나이에 즉위하였다. 할아버지인 순조보다도 더 어린 나이에 용상에 오른 것이다. 참고로 단종은 12살에 즉위를 했다.

 

* 인릉: 옆에서 본 모습.

 

 

● 진짜 쎈 분을 만나러 간다!

 

이제 진짜 ‘쎈’분을 만나러 갈 차례다. 인릉에서 숲길을 따라 잠깐 걸으면 헌릉이 나온다. 헌릉 홍살문에 가기 전에 이런 멘트를 날렸었다.

 

“이제 진짜 센 분 만나러가니 옷 좀 잘 추스르세요.”

“네?”

“잘못하면 그 분한테 혼날 수도 있으니까요.”

“...”

농담 삼아 이런 말을 했지만 확실히 인릉보다는 헌릉을 탐방할 때 좀 더 긴장을 했던 거 같다. 기가 더 세게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조선 왕 중에서 가장 순(純)했던 왕을 만나고 뒤이어 가장 ‘쎈’ 왕을 알현하니 필자의 몸에서 기가 파도를 치는 느낌이었다.

헌릉은 조선의 3대 왕인 태종과 그의 정비인 원경왕후가 잠들어있는 곳이다. 인릉처럼 봉분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봉분이 나란히 안치된 쌍봉 형태로 이루어졌다. 대신 곡장은 트여있어 두 개의 봉분을 가지런히 감싸고 있다. 곡장은 무덤 뒤에 쌓은 낮은 담을 말한다.

헌릉에 먼저 무덤을 쓴 사람은 원경왕후 민씨였다. 원경왕후는 1420년(세종2)에 이곳에 묻히게 된다. 당시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상태였는데 원경왕후가 이승을 떠난 2년 후인 1422년(세종4)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고 헌릉에 묻히게 된다.

원경왕후는 1398년에 있었던 1차 왕자의 난 때 크게 도움을 주는 등 이방원이 권력을 쟁취하는데 큰 공헌을 한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태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외척세력을 제거하기에 이른다. 이 때문에 원경왕후의 남동생 4명은 죽음을 당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원경왕후도 폐위에 위기에 몰렸다. 트레킹팀에게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연산군 때처럼 세종대왕도 생모가 폐위가 됐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런 가정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요.”

어쨌든 극과 극을 달렸던 태종과 원경왕후는 현재는 나란히 누워 고이 잠들어 있다. 살아생전의 태종의 모습처럼 헌릉은 에너지가 넘쳐난다. 옆에 있는 인릉의 석물들이 소박한 모습이라면 헌릉의 석물들은 기개가 넘치는 모습이다.

* 헌릉: 정자각 방면에서 바라본 헌릉. 뒤로 대모산 정상부가 보인다.

● 원래 세종대왕의 능이 헌릉 옆이었다고?

 

이 헌릉 근처에 원래는 세종대왕도 묻혔었다. 효자였던 세종대왕은 헌릉 서편에 왕비였던 소헌왕후와 함께 합장되었다. 이를 두고 영릉(英陵)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현재 영릉은 경기도 여주시에 자리 잡고 있다. 경강선 세종대왕릉역에 내려서 탐방할 수 있다.

그럼 왜 영릉은 대모산에 있다가 저 멀리 여주땅으로 옮겨갔을까? 세종이 승하한 후 흉사가 연이어 일어난다. 문종이 일찍 숨을 거두고, 단종이 안타까운 일을 당한다.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세조도 그 흉사를 피해가지 못한다. 장남인 의경세자가 20살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모산의 영릉 자리가 나쁘다며 1469년(예종1)에 여주땅으로 천장하게 된 것이다.

헌릉의 서쪽에는 희릉(禧陵)도 있었다. 희릉은 중종의 제1계비였던 장경왕후의 능이다. <태릉 역사트레킹>편에서도 언급됐듯이 장경왕후는 1515년(중종10)에 아들을 낳다 산통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그때 낳은 아들이 인종이다. 인조 말고 인종. 장경왕후 이후 왕비가 된 이는 그 유명한 문정왕후이다. 이후 희릉은 풍수상 안 좋다는 의견이 있어 1537년(중종32)에 고양 서삼릉 능역으로 천장한다.

* 헌릉: 헌릉 바로 옆에서 찍은 모습. 화려한 석물들이 눈길을 끈다.

 

● 조선의 초기와 후기를 동시에 만나다!

 

태종 이방원은 함부로 자신의 옆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것 같다. 순조의 인릉이 들어선 것도 의아할 정도다. 철권 통치자와 유약한 통치자, 서로 잘 어울릴 거 같지 않은 동거를 뒤로 하고 헌인릉을 빠져나왔다.

대모산을 넘어 세종의 5남인 광평대군 묘역까지 탐방을 하면 태종이방원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된다. 이때 대모산 숲길을 걸어가는데 이 숲길도 정말 좋다. 명품 숲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종 이방원 역사트레킹이라고 해놓고선 순조를 비롯한 조선 후기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한 거 같다. 이방원의 네임 파워를 이용해 먹은 것이다. 꼼수를 썼다고 너무 질책하시지는 마시라. 이런 식으로라도 조선 후기 시대를 정리해보고 싶었다.

이렇듯 태종 이방원 역사트레킹에서는 조선 전기와 후기를 동시에 만나볼 수 있다. 또한 할머니 같은 대모산의 숲길도 태종 이방원 역사트레킹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중에 한 가지다. 그러니 안 가면 너무 섭섭할 거에요!

 


■ 태종이방원 역사트레킹

1. 코스: 헌인릉 ▶ 대모산숲길 ▶ 수서동가마터 ▶ 광평대군묘역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4시간(휴식시간 포함)

4. In: 지하철 3호선 양재역 9번 출구 / OUT: 광평대군묘역 ☞ 출발시 ‘헌인릉’행 버스탑승 / 약 15분 정도 소요됨.

 

 

 

 

* 태종이방원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5편>

“에이 그게 말이 되나요? 서울에, 그것도 강남과 가까운 곳에 무슨 지뢰밭이에요?”

필자가 우면산에서 지뢰밭이야기를 하면 항상 저런 반응을 듣게 된다. 이구동성이다. 어떤 참가자분은 필자를 무척이나 한심하게 쳐다보기도 했었다. 무슨 사기꾼 보듯이... 설마 거짓말을 할까. 지뢰밭이 있으니까 있다고 하지.

하긴 필자도 처음에는 설마 했었다. 강남을 품고 있는 우면산에 지뢰밭이 있다는 걸 쉽게 못 받아들이겠더라. 더군다나 아직까지도 미확인 지뢰지대까지 있다고 하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무슨 비무장지대로 트레킹을 하러 가는 거 같다. 우리 강남에 있는 우면산으로 트레킹 하러 가는 거 아닌가요? 강남스타일 트레킹이요!

* 우면산 숲길

● 소가 졸고 있는 모습을 한 우면산

서두부터 참 요란스럽다. 사실 우면산 역사트레킹도 참 재미난 코스다. 위험하지도 않다. 그럼 왜 저런 자극적인 에피소드로 글을 시작했는가? 방심을 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그랬다. 안전 없이 트레킹 없다.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다.

본격적인 트레킹에 앞서 우면산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자. 관암산이라고도 불린 우면산(牛眠山)은 소가 졸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래서인지 동서로 길게 뻗은 모습을 하고 있다. 남태령을 사이에 두고 있는 옆 산 관악산이 해발 632미터인데 비해 동서로 퍼져 있어서 그런지 우면산은 해발이 293미터이다. 관악산의 반도 못 미친다. 하지만 키가 작은 만큼 관악산보다는 오르기가 수월하다.

우면산 역사트레킹은 2호선 방배역 4번 출구에서 집합을 해 그 옆에 있는 청권사로 향한다. 4번 출구와 청권사까지는 약 50미터밖에 떨어져있지 않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첫 탐방지를 만나는 것이다.

* 효령대군 묘역으로 가는 길

● 효령대군을 모신 사당, 청권사

그럼 청권사(淸權祠)는 어떤 곳인가? 청권사는 세종대왕의 둘째형인 효령대군 이보를 기리는 사당과 함께 그와 후손의 묘가 있는 곳이다. 원래 효령대군의 묘는 임산원이라고 불렸었는데 1736년(영조12)에 왕명에 의해 경기감영이 사당을 짓게 됐다. 사당은 다음해에 완성됐고, 청권사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후 1789년(정조13)에 사액된다.

‘청권’이란 이름은 <논어> 미자편에서 유래했는데 ‘신중청폐중권(身中淸廢中權)’이란 말에서 따왔다. 명칭이 복잡한데 그 내막을 알려면 효령대군의 삶을 되짚어봐야 한다.

중국에서 은나라가 쇠락하고 주나라가 흥기할 때인 주나라 태왕 때였다. 태왕은 세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태백, 둘째 우중, 셋째 계력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중 계력이 창(昌)을 낳으니 성군으로서의 큰 자질이 보였다. 이를 알고 첫째 태백과, 둘째 우중은 몰래 도읍에서 빠져나와 멀리 도망간다. 이에 왕위는 셋째 계력으로 전해졌고, 마침내 그의 아들 창에게로 이어졌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 아닌가? 성군의 자질이 가득했던 셋째 아우를 위해 도성을 떠났던 첫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렇다. 세종대왕의 왕위를 위해 도성을 등졌던 효령대군은 주나라 태왕의 둘째 우중에 비견된다. 우중은 이후 청빈하게 살았기에 청도(淸道)에 맞았고, 스스로 왕위 계승을 깨끗이 포기했으니 권도(權道)에 맞았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신중청폐중권’이라 했고, 여기서 ‘청권사’의 명칭이 나온 것이다.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계력의 아들 창은 이후 주나라 문왕(文王)이 된다. 무왕(武王)의 아버지이자 강태공과의 일화로 유명한 그 문왕이다.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를 멸망시킨다.

 

“보세요. 주위는 다 아파트와 건물들인데 효령대군 묘만 녹음을 품고 있습니다. 효령대군 묘가 쉼표를 찍어주는 거 같아요.”

“오, 정말 그런 거 같아요. 쌤, 적절한 표현!”

청권사와 효령대군 묘는 묘지이지만 한편으로는 공원 같다. 유치원 꼬맹이들도 소풍을 올 정도로 효령대군과 그의 후손들은 넉넉하게 주위를 품고 있는 듯하다.

효령대군은 유교 국가 조선에서 불교의 진흥과 보전에 많은 애를 기울이셨다. 우중처럼 어진 성품을 지니고 많은 이들과 두루두루 교류를 하셨다. 불교에 심취했다고 성리학자들이 비판을 하긴 했지만 그런 비판에도 괘념치 않으신 듯싶다. 그렇게 덕업을 쌓으며 살아갔던 효령대군은 크게 장수를 하시다 돌아가신다. 91세에!

* 효령대군 묘: 효령대군 묘를 지키는 문인석. 문인석 뒤로 아파트가 병풍처럼 펼쳐진 모습이 이채롭다.

 

● 봉은사보다도 300년이나 앞서 건립된 대성사

이제 트레킹팀은 반대편 매봉재산으로 향한다. 매봉재산은 우면산의 지산인데 백석대학교 서울캠퍼스 옆으로 난 산책로로 진입할 수 있다. 매봉재산은 동네 뒷산 정도이지만 숲이 울창해서 삼림욕을 하기에 적당하다. 트레킹팀은 남부순환로를 지나 본격적으로 우면산에 진입한다. 트레킹팀 앞에 서울둘레길 표지가 나타난다. 이곳은 서울둘레길 4코스인데 트레킹팀은 대성사로 방향을 잡고 이동한다.

서울 강남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은 단연코 봉은사일 것이다. 어쩌면 조계사보다도 봉은사를 더 익숙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조계사의 일주문을 본 사람들보다 봉은사의 일주문을 본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봉은사가 코엑스 사거리 옆에 위치해 있어 오며가며 바라볼 수도 있으니까. 평지에 있는 사찰의 장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수월한 접근성은 산사가 주는 고즈넉함과는 배치된다. 소음에 시달리고 번잡하고... 우리가 기대하는 사찰은 그런 것이 아니니까.

좀 사설이 길어졌다. 여기 봉은사보다 더 오래된 산 중 사찰이 있다. 트레킹팀의 탐방지인 대성사(大聖寺)가 바로 그곳이다. 봉은사가 794년(신라 원성왕 10)에 연회국사에 의해 창건된 것에 비하여 대성사는 384년(백제 침류왕 1)을 그 기원으로 두고 있으니 무려 400년이나 그 시기가 앞선다. 백제가 충남 공주(웅진)로 천도를 했을 때가 475년이니 대성사는 한성 백제시기의 지어진 사찰인 것이다. 한성 백제시기에 창건된 사찰이 서울 강남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여기 대성사는 무려 1700년 전에 만들어진 사찰이에요. 한국사책에 백제가 불교를 384년에 받아들였다고 적혀있는데요 그때 만들어진 백제 최초의 사찰이에요.”

“그게 정말이에요? 저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요.”

대성사가 백제 최초의 사찰이라는 게 놀라운 게 아니고, 대성사의 존재를 잘 모르는 분들이 대다수였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강남 지역에 거주하시는 분들도 대성사의 존재를 잘 모르셨다는 분들이 대다수였다.

* 대성사

 

● 1700년 전에 창건된 백제 최초의 사찰

 

그러니 대성사에 대해서 더 알아보자. 384년에 중국 동진을 통해서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로 들어온다. 이에 침류왕은 크게 환대하고 왕실에 머물게 했다. 서역과 중국 등 먼 길을 이동하느라 그랬는지 마라난타는 수토병에 걸려 고생을 하게 된다. 지금이야 편의점에서 손쉽게 생수를 사서 마실 수 있지만 예전에는 다른 지역에 가면 물이 안 맞는, 물갈이로 고생한 분들이 꽤나 많았다. 그 수토병이 물갈이다.

그렇게 수토병으로 고생을 했던 마라난타는 우면산 샘물을 마시고 치유가 된다. 이에 우면산에 초당을 짓고 수행을 하니 그곳이 바로 대성초당(大聖草堂)이 됐고, 대성사의 기원이 된 것이다. 그래서 대성사에는 백제 초전법륜성지(初轉法輪聖地)라는 설명이 꼭 따라 붙는다.

이렇게 놀라울 정도의 창건 배경을 가진 대성사지만 막상 그곳에 가보면 좀 허전한 느낌이다. 가람들도 근래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왜 그럴까? 대성사에는 삼일운동 당시 불교계를 대표했던 용성 스님이 계셨던 곳이다. 독립운동에 아지트로 쓰였다는 이유로 일제는 대성사에 불을 지른 것이다. 격노할 일이다. 이후 대성사는 한국전쟁 때 또 한 번 파괴가 되는 아픔을 겪는다.

대성사를 떠나기 전에 침류왕 이야기를 첨언해본다. 불교를 공인한 침류왕은 그 유명한 근초고왕의 손자였다.

근초고왕(재위 346~375) ☞ 근구수왕(375~384) ☞ 침류왕(384~385)

침류왕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재위 기간이 겨우 1년 정도다. 약 30년 가까이 보위에 오른 할아버지 근초고왕에 비해 너무 단명했다. 이와 관련해서 토착신앙을 중시하던 기존의 귀족세력이 불교를 공인한 침류왕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설이 있다. 왕위도 침류왕의 아들이 아닌 동생이 이어받게 된다. 그가 진사왕이다.

 

* 우면산 소망탑

 

● 끝까지 안전하게 트레킹합시다!

대성사를 벗어난 트레킹팀은 이제 우면산 소망탑을 향해서 이동한다. 숲길을 따라가는 길이라 참 좋다. 참나무 숲 구간이 있는데 향이 좋아 오래 머물고 싶을 정도다. 소망탑은 산 정상부 능선에 있어 오르막길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경사도가 아니니 역사트레킹의 취지에 맞게 느릿느릿 걷다보면 어느 순간 도착해있을 것이다.

소망탑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참 시원해서 좋다. 강남의 빌딩숲은 가깝게 보이고 멀리 북한산도 선명하게 보인다. 특히 이 소망탑 전망대는 강남과 가까이에 있어 야경보기 명소 중에 하나다.

소망탑에서 내려와 다시 방배역 방면으로 내려가면 우면산 역사트레킹이 종료된다. 하지만 내려오는 발걸음을 조심하시라! 지뢰밭이 있으니까. 우면산 정상 부근에는 군 기지가 있는데 그곳을 방어하기 위해서 1000여기의 지뢰를 매설했었다. 이후 여러 가지 이유로 지뢰의 효용성이 떨어지자 우면산의 지뢰도 제거가 된다. 하지만 10여기가 미확인 상태로 제거되지 못했다. 2011년도에 있었던 유명한 우면산 산사태로 인해 미확인 지뢰에 대한 공포심이 극에 달하게 됐다.

“지정된 탐방로만 다니시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

 

여러번에 걸쳐 우면산 트레킹을 행한 필자의 의견이다. 우면산에서는 꼭 지정된 곳으로만 다니자. 재밌게 우면산 역사트레킹을 행했으니 끝까지 안전을 지켜야 하는 법! 아울러 1997년 채택된 대인지뢰금지협약에 우리나라와 북한이 동시에 가입하지 않았는데 이참에 가입 좀 하자.

발효된 지 벌써 20년이 넘었는데 남북한은 아직까지도 가입을 하지 않고 있다. 대인지뢰는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는 잔인한 무기이다. 즐겁게 트레킹을 하는데 앞에 지뢰가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 지뢰지대 표시판


■ 우면산 역사트레킹

1. 코스: 효령대군묘(청권사) ▶ 매봉재산 ▶ 대성사 ▶ 우면산소망탑 ▶ 방배역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휴식시간 포함)

4. IN: 지하철 2호선 방배역 4번 출구 / OUT: 방배역 1번 출구 ☞ 우면산에서 다시 방배역으로 회귀할 수 있음.

 

 

* 우면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4편>

처음 남산 역사트레킹 코스를 기획했을 때가 기억난다.

‘다른 좋은 곳도 많은데 굳이 남산까지 할 필요가 있나...’

서울사람들에게 남산은 너무 당연한 곳이다. 너무 당연하다보니 서울 사람들은 굳이 남산을 찾아가지를 않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지방이나 외국여행객들은 서울에 와서 63빌딩, 한강 유람선, 남산타워를 필수적으로 여행한다. 그래서인지 남산 역사트레킹을 행한다고 공지했을 때 이런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남산 뻔하지 않아요? 거기에 트레킹을 할 만한 곳이 있어요?’

그 뻔함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려고 열심히 답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연한 곳치고는 꽤 많이 사전답사를 했었다. 그 노력이 통했을까?

*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중심부: 가까이는 북악산이 보이고, 멀리는 북한산이 보인다.

● 목멱대왕 남산

조선시대 남산은 목멱산(木覓山)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었는데 그 외에도 인경산, 종남산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남산은 키가 작은 산이다. 해발 265미터 정도이니 내사산(內四山) 중에서 세 번째로 작은 산이다. 복습해보자. 북악산(338미터), 인왕산(338미터), 남산(265미터), 낙산(125미터) 이중에서 남산이 뒤에서 두 번째다.

그렇게 야트마한 산이지만 남산은 조선시대 때 무척 귀한 대접을 받았었다. 궁궐에서 임금님이 보고 있는 산이라 하여 함부로 건물도 짓지 못하게 하고, 나무도 베지 못하게 했다. 그에 더해 목멱대왕(木覓大王)이라는 벼슬까지 내려진다. 해당 산의 산신령에게 관직을 주며 도성을 방어하라는 뜻이었다. 산신령을 도성방어에 끌어들이다니... 판타지 같은 소리인가? 산을 귀하게 여겼던 우리의 산악신앙은 유교 국가인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당시 북악산도 진국백(鎭國伯)이라는 작위를 받게 된다. 백(伯)이라고 하면 백작이다. 경복궁의 뒷산인 북악산에게는 제후의 작위를 준 것이다. 제후의 서열을 나눈 오등작은 이렇다.

공작 > 후작 > 백작 > 자작 > 남작

북악산의 지위와 비교해보면 ‘왕’ 칭호를 받은 남산이 얼마나 귀하게 대접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소중하게 관리를 한 곳이라 그런지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잘 조성될 수 있었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애국가 가사에 나올 정도로 남산의 소나무는 우리민족의 정기를 담아내는 하나의 표상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남산의 소나무들은 수난을 당하게 된다. 소나무를 함부로 잘라내고 그 자리에 아카시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이렇듯 남산은 일제강점기 때 엄청난 수난을 당하게 된다. 그 시초는 구한말로 올라간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 정부는 일본인 거류지로 남산 일대를 지정해주는데 궁궐에서 한 치라도 먼 곳을 지정하려고 그랬던 것이다. 그렇게 남산 일대는 일본인들이 자리를 잡게 됐고, 결국에는 조선 신궁도 만들어지게 된다.

 

* 남산의 야경

 

● 남산에도 둘레길이 있다

자 이제 길을 나서자. 복원된 ‘남산 위의 저 소나무’를 만나러가자. 남산 역사트레킹은 6호선 버티고개역에서부터 시작된다. 버티고개역이라는 명칭에도 나타나있듯이 트레킹팀이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버티고개이다. 버티고개는 그동안 차로로 끊겨져 있다 2012년 5월에 생태통로(생태다리)로 복원되었다. 버티고개와 관련된 이야기는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편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이제 트레킹팀은 국립극장을 앞을 통해 드디어 남산에 들어선다. 이때 트레킹팀 앞을 남산순환버스가 지나가고 있다. 어떤 분이 농담 삼아 이런 말을 하신다.

“저 버스 잡아타고 갈까요? 아니면 케이블카?”

“아니오. 버스나 케이블카보다 더 좋은 남산둘레길을 따라 갈 겁니다!”

그렇다. 남산에도 둘레길이 있다. 2015년 11월에 개통된 남산둘레길이 바로 그곳이다. 기존에 있던 북쪽 순환로와 남쪽 숲길을 연결하여 총 7.5km의 도보여행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북측 순환로는 아스팔트 포장이 된 곳을 걷기에 큰 공원을 걷는 느낌이라면, 남쪽 숲길은 말 그대로 숲길을 걷는 코스다. 서울중심부인 남산에 울창한 숲길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그래서인지 트레킹팀은 이구동성으로 이런 반응을 보였다.

“어, 남산에 이렇게 멋진 숲길이 있었어요? 우리가 아는 남산이 아니었어!”

남산둘레길은 북쪽 순환로 구간보다는 남쪽 숲길 구간이 걷기에도 좋을뿐더러 휴식 공간도 더 넉넉하다. 팔도소나무 단지와 야외식물원 등 볼거리도 풍성하고, 관악산 방면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도 있어서 좋다.

* 성곽과 소나무

 

● 성곽과 소나무

남산둘레길은 완경사라 초보자들도 어렵지 않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그렇게 한들한들 걷다보면 어느새 정상부에 다다른다. 그리고 앞에 나타난 성곽길을 보며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성곽 앞에 소나무 숲이 펼쳐지는데 그 모습에 감탄사가 나온 것이다.

“남산에 이런 소나무 숲이 있었어요? 성곽하고 소나무하고 너무 잘 어울려요!”

“그렇죠. 여기는 남산이 숨겨놓은 소나무 숲 같아요. 성곽하고 소나무하고 이렇게 잘 어울린답니다.”

성곽 바깥쪽에 소나무를 일정 간격으로 심어 솔밭을 만든 구간이다. 아래쪽에는 맥문동을 심어 운치를 더했다. 맥문동이 개화하는 여름철에 이 소나무 성곽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풍류객으로 변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몇 해 전 여름이었다. 소나기가 지나간 자리를 트레킹팀과 함께 걷고 있었다. 남산도 산이라고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물안개를 머금고 있는 푸른 소나무와 보랏빛을 뽐내고 있는 맥문동꽃, 그리고 그 뒤를 병풍처럼 지키고 있는 성곽이 어우러진 모습이란...! 트레킹팀은 무슨 사극이라도 찍는 느낌이었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를 물안개하고 성곽길하고 같이 만나네요.”

“쉿! 강사님 운치 깨지 말고, 쉿!”

그렇다. 풍류를 즐기는 걸 방해하면 안 된다. 분위기 파악을 했어야했는데... 참고로 남산에는 태조 이성계 시대에 쌓은 석성(石城) 구간이 아직 남아있다. 태조 시기 한양도성은 토성(土城)이 70%였고, 석성이 30% 정도였다. 태조 시기에는 자연석을 거의 다듬지 않고 그대로 쌓아올려 성돌이 무척 거칠다. 한양도성이 전부 석성으로 바뀐 시기는 세종 때였다.

 

* 성곽과 소나무: 비 온 후의 모습

 

 

● 국사당과 봉수대

이제 국사당(國師堂)이 있던 자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국사당은 <인왕산 역사트레킹>에서 언급했으니 따로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 옛 국사당 자리는 지금 남산 팔각정 자리다. 마치 이곳이 한국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한국 사람들보다 더 많은 외국인들이 보인다. 남산이 외국인들의 필수 관광 코스임을 다시 한 번 느낀다.

팔각정 옆으로는 복원된 봉수대가 보인다. 경봉수(京烽燧)라고도 불린 남산 봉화는 매일 병조에 보고될 정도로 무척 중요한 통신 수단이었다. 적의 위협에 따라 하나에서 다섯까지 횃불을 올렸는데 정리하면 이렇다.

하나: 이상무

둘: 적이 나타남

셋: 적이 국경에 접근함

넷: 적이 국경을 침범함

다섯: 전투가 벌어짐

 

* 남산 팔각정: 옛 국사당 자리임.

 

 

● 서울 한복판에 제갈공명?

정상부에서 내려온 트레킹팀은 이제 북쪽 순환로를 따라 걷는다. 북쪽 순환로는 폭이 넓어서 좋기는 하지만 흙길이 아니라 걷는 맛이 좀 떨어진다. 이건 필자의 의견이 아니라 트레킹팀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렇게 걷다보면 남산한옥마을로 빠질 수도 있는데 트레킹팀은 와룡묘(臥龍廟)까지 가본다. 와룡묘라고 하니까 이런 질문들이 나온다.

“와룡묘요? 와룡묘라 하면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의 무덤이이에요?”

딩동댕~땡!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와룡이 제갈공명이라는 건 맞는 말이지만 무덤은 아니고 사당이다. 한자를 보시면 무덤묘가 아니라 사당묘(廟)다. 그렇다. 남산의 북서쪽에는 제갈공명을 기리는 와룡묘가 있다. 와룡묘에는 제갈공명과 함께 관운장의 석고상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단군상과 삼성각도 있다. 그러고 보면 와룡묘는 중국의 도교신앙을 한국스타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 서울 한복판에 왜 와룡묘가 있는 것일까? 와룡묘는 고종의 후궁이었던 엄귀비(순헌황귀비)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존의 질서체제가 뿌리째 흔들렸던 구한말, 사람들은 마음 둘 곳을 찾아야했다. 중국의 신령들까지 끌어올 정도로 당시는 다급했던 것이다. 와룡묘는 1924년에 큰 불로 소실됐던 전각들을 1934년에 복구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갈공명은 맹격(盲覡)이 숭상하는 신이다. 맹격은 눈이 먼 무당들을 말한다. 그래서인지 북쪽 순환로에는 눈이 불편한 분들을 자주 뵙는다. 아마도 와룡묘에 치성을 드리러 가시는 분들일 거다.

이렇게 하여 남산 역사트레킹이 종료됐다. 서울사람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남산. 외국인들도 가는 그 길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안 가면 너무 섭섭하지 않은가. 그러니 당연히 가봐야 하는 거다.

 

 

* 와룡묘


■ 남산 역사트레킹

1. 코스: 버티고개 ▶ 남산둘레길 ▶ 소나무숲(성곽길) ▶ 팔각정(옛 국사당) ▶ 와룡묘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휴식시간 포함)

4. IN: 지하철 6호선 버티고개역 3번 출구 / OUT: 와룡묘 ☞ 와룡묘에서 소파로(돈가스거리)로 내려와 명동역 방면으로 이동할 수 있음.

 

 

 

 

* 남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3편>

 

 

역사트레킹을 행하다보면 필연이든 우연이든 역사적 라이벌과 관련된 테마를 언급하게 된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에서 다룬 무학대사와 정도전, 즉 불교세력 VS 유교세력 간의 라이벌 대결이 좋은 예이다. 인물이 아닌 자연지형물 간의 대결도 있다. <낙산 역사트레킹>에서 서울의 좌청룡(낙산)과 우백호(인왕산) 간의 대결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정릉 역사트레킹도 라이벌과 관련이 있다. 누구와 누구 간의 라이벌일까?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 씨의 무덤이다. 일단 한 명은 나왔다. 그럼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 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정릉: 필자가 탐방했을 때는 비가 많이 온 다음이어서 그랬는지 봉분에 방수포를 덮었었다. 보시다시피 정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무척 단출하다. 뺄셈을 당한 것이다.

 

 

 

 

 

 

● 이성계의 총애를 받은 신덕왕후

 

트레킹 팀이 첫 번째로 탐방한 곳은 정릉(貞陵)이었다. 정릉은 신덕왕후 강 씨의 무덤이다. 황해도 곡산 출신인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이성계의 총애를 받게 된다. 1392년, 조선이 개국했을 때 태조의 옆에 서 있던 사람도 신덕왕후였다.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 씨가 그 전 해에, 조선의 개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결국 강 씨는 현비로 봉해져 조선의 첫 번째 왕비에 오르게 된다.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세자 책봉에 나서야했다. 현비였던 신덕왕후로서는 자신이 생산한 왕자를 세자의 자리에 앉히고 싶어 했다. 이성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그녀였기에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했으리라. 하지만 쟁쟁하게 버티고 있던 신의왕후 한 씨의 소생들이 문제였다. 방과(정종), 방원(태종) 등등... 신의왕후의 소생들은 조선 창업에 큰 공을 세운 이들이었다.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신덕왕후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정도전과 손을 잡게 된다. 정도전 입장에서도 이미 다 장성한데다 자기 주관이 뚜렷한 신의왕후 자제들보다는 아직 나이가 어린 강 씨의 소생이 세자가 되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재상중심의 왕도정치를 주창한 정도전이었으니까.

 

결국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었던 방석(의안대군)이 1392년 8월 20일에 세자로 책봉된다. 그해 7월 17일에 조선이 개국했으니 약 한 달 만에 세자가 책봉이 된 것이다. 이에 이방원(정안대군)은 격분한다.

 

“정릉은 조선왕조가 개국한 후 처음으로 능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왕릉들에 비해서는 좀 허술해 보이지 않나요? 봉분을 둘러싼 봉분석(병풍석)도 없고요.”

 

그 말대로 정릉은 능의 격식에 맞지 않게 무언가가 빠져있다. 여백의 미학이 아닌 인위적으로 뺄셈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뺄셈을 한 사람은 바로 태종 이방원이었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소생이 왕위에 등극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396년(태조5)에 눈을 감고 만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신덕왕후가 죽자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 현재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을 조성했다. 또한 흥천사라는 사찰을 지어 그녀의 명목을 빌었다. 이 흥천사를 두고 원찰(願刹)이라고 부르는데, 원찰은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진 사찰을 뜻한다. 정조대왕과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융건릉 인근에 있는 용주사도 원찰이다.

 

 

 

 

 

 

 

* 정릉: 봉분에서 정자각 및 부속건물들을 내려본 모습.

 

 

 

 

 

 

 

● 뺄셈을 당한 정릉

 

1398년 8월, 이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무인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불리는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정도전은 목숨을 잃게 된다. 세자였던 이방석도 목숨을 잃게 된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도성 안에 무덤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1409년(태종9)에 정릉을 지금의 위치인 성북동으로 이전시킨다. 본격적인 뺄셈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다음해에는 정릉의 봉분을 두르고 있던 석각신장 같은 석물들을 광통교 건설에 쓰게 했다. 광통교는 청계천에 있는 다리다.

 

능에서 가져온 귀한 석재들로 돌다리를 만드는 만큼 그것들을 제대로 이용했으면 좋았으련만 이방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부러 신장석을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광통교 하단을 보면 몇몇 신장석들은 머리가 바닥을 향해 있다. 이방원은 철저하게 신덕왕후를 짓밟았던 것이다.

 

“여기 이거 물구나무 선 거 같지 않나요?”

“진짜 그러네요.”

“청계천 복원할 때 뒤집어서 복원한 게 아니고, 광통교가 처음으로 만들어졌을 때부터 이렇게 물구나무를 세웠습니다. 광통교는 1410년, 태종 때 만들어졌지요. 이렇게 거꾸로 놓이게 된 건 제작자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됐다는 뜻이겠죠.”

“굳이 이렇게까지...”

“그나저나 이것들은 거의 600년 이상을 이렇게 거꾸로 세상을 보고 있었겠네요.”

 

이 대화들은 청계천 광통교를 탐방했을 때 이루어졌다. 이런 스토리텔링이 있기 때문에 정릉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광통교도 함께 탐방할 것을 추천한다.

 

신덕왕후의 능을 탐방한 후에는 정릉 숲길을 따라 걷는다. 정릉 자체보다 정릉 숲길이 더 좋다고 할 정도로 숲길이 참 빼어나다. 30분 정도 걸리는 코스가 있고 1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가 있는데 둘 다 좋다. 트레킹팀은 일부러 긴 코스를 걸었다.

 

이제 트레킹팀은 흥천사(興天寺)로 향한다. 정릉에서 나와 위쪽 주택가로 길을 잡으면 흥천사 표지판이 나온다. 왕릉의 정문을 통해 나오니 바로 주택가가 나오는 것도 정릉의 특징이다. 큰 주차장이 자리를 잡고 있는 동구릉이나 서오릉 같은 곳과는 차이가 확연하다. 숲길을 좋아하는 주민들은 아예 정릉 숲길에서 산책을 할 정도다. 정릉이 속해있는 성북구 주민들에게는 50% 할인이 적용된다. 성인 입장료가 1천 원이니 할인을 받으면, 500원으로 매일같이 정릉 숲길을 걷는 것이다. 무척 부럽더라.

 

 

 

 

 

 

 

* 석각신장: 청계천 광통교 교각 부분에 있는 석각신장. 머리 부분이 아래를 향하고 있다. 정릉의 봉분을 두루고 있던 병풍석이었는데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이상한 자세로 세워져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정릉의 봉분이 단출할 수밖에...

 

 

 

 

 

 

● 정릉의 원찰 흥천사

 

흥천사는 정릉의 원찰이다. 신덕왕후에 대한 그리움이 지극했던 태조 이성계였기에 원찰을 크게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흥천사는 1397년에 170여 칸의 대가람으로 탄생했고, 창건과 동시에 조계종의 본산이 된다. 1년 후에는 부처님 사리를 모신 사리각(舍利閣)도 만들어진다.

 

하지만 흥천사도 정릉처럼 우여곡절이 많았다. 흥천사는 정릉처럼 중구 정동에 세워졌다. 정릉이 현재의 자리인, 성북구로 옮겨진 후로도 계속 그 자리를 지키게 된다. 이때에는 원찰이 아닌 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는 왕실 사찰이 된다. 하지만 성종 이후에는 쇠락해졌고 1504년(연산군10)에는 큰 화재가 나서 사리각을 제외한 건물 전체가 불에 타는 아픔을 겪는다.

 

그러다 1510년(중종5)에는 남아있던 사리각까지 불타 없어진다. 이렇게 사찰이 쇠락하니 그 안에 있던 기물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중 대표적인 게 보물 1460호로 지정된 흥천사 동종이다. 이 동종은 현재 덕수궁에 전시되어 있다. 범종이 사찰이 아닌 궁궐에 있는 것이다.

 

흥천사는 1569년(선조2)에는 왕명에 의해 정동 생활을 마감하고 ‘함취정’이라는 정자터에 다시 세워진다. 이때는 이름을 바꿔 신흥사(新興寺)로 불렸다. 그러다 1669년(현종10)에 신덕왕후가 복권됐고, 1794년(정조18)에 지금의 자리인 성북구 돈암동으로 이전하여 중창된다.

 

신흥사에서 흥천사로 제 이름을 다시 찾게 된 건 1865년(고종2) 때였다. 흥선대원군은 대방을 짓고, 그 대방의 현판을 쓰는 등 흥천사의 중창에 큰 역할을 한다.

 

어렵지 않은가? 연도도 많이 나오고,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솔직히 정릉골 역사트레킹을 하면서 참 많이 애를 먹었다. 위에 저 내용을 트레킹팀 앞에서 해설을 했다고 생각해보시라! 가뜩이나 머리도 안 좋은데... 그래서 정리를 해본다.

 

1. 1397년 정릉과 흥천사 만들어짐

2. 1409년 정릉, 성북동으로 천장됨

3. 1569년 흥천사가 신흥사로 이름을 바꿔 옛 함취정 자리에 들어섬

4. 1669년 신덕왕후 복권됨

5. 1794년 신흥사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 중창됨

6. 1865년 흥선대원군이 중창을 하고, 흥천사로 이름을 다시 고침

 

흥천사는 사찰 탐방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한 번 방문해 볼만한 곳이다. 본당인 극락전을 비롯해 대방, 명부전 등의 가람들이 조선 후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흥천사 대방의 겨울

 

 

 

 

 

 

 

● 이름값 하는 산사 가는 길

 

이제 트레킹팀은 북악스카이웨이의 동쪽편을 따라 걷는다. 차로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북악하늘길을 걷는 것이다. 계속 북악하늘길을 따라 걷다 북악골프연습장이 나오면 숲길로 들어선다. 이 숲길은 ‘산사 가는 길’이라는 도보여행길이다. 북악산 북쪽편에는 작은 사찰들이 많은데 그 사찰들을 연결한 길이다. 북악하늘길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차가 다니는 길이라 산사 가는 길보다 못하다. 산사 가는 길은 진짜 이름값을 한다. 직접 걸어보시길 권한다.

 

역사의 라이벌은 참 많이도 있었다. 싸움 구경이 재미나듯이, 역사가들에 의해 싸움 붙여진 라이벌들도 많을 것이다. 라이벌은 선의의 경쟁관계로 있어야 서로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상대방을 찍어 누르려는 라이벌은 비극만을 초래할 뿐이다. 특히 권력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는 더 그렇다. 도대체 권력이 무엇이기에!

 

 

 

 

 

 

 

* 흥천사의 본당 극락전

 

 

 

 

 

 

 

 

* 정릉 숲길

 

 

 

 

 

 


 

 

 

 

■ 정릉골 역사트레킹

 

1. 코스: 정릉 ▶ 흥천사 ▶ 북악하늘길 ▶ 산사가는길 ▶ 전망대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휴식시간 포함)

4. IN: 경전철 우이신설선 정릉역 2번 출구 / OUT: 국민대 ☞ 국민대에서 버스편을 이용하여 다시 정릉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 태릉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2편>

 

 

역사트레킹 리딩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불만 섞인 지적을 받게 된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필자에게 쏟아내는 욕구들도 다양했던 것이다. 역사트레킹을 시작하면서 팔자에도 없는 욕을 먹게 될 거라는 건 각오를 했다. 하지만 서로가 충돌하는 욕구들을 쏟아낼 때는 참 난감해진다.

 

- 코스의 물리적 난이도가 너무 높다 혹은 너무 낮다

- 이동 속도가 너무 빠르다 혹은 너무 느리다

- 해설의 수준이 너무 높다 혹은 너무 낮다

- 막걸리를 못 마시게 해서 너무 싫다

 

일부 수강생분들 중에는 엄청난 여행 경력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 엄청난 등산 경력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다. 그런 베테랑들에게 역사트레킹은 성이 안 찰 수도 있다. 7~8km 밖에 되지 않는 구간을 4시간에 이동을 하니 그 분들이 보기에 너무 느린 것이다. 평지 기준으로 보통 성인이 한 시간에 4km 정도를 이동하니 그 분들은 2시간 남짓이면 해당 코스를 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트레킹은 테마를 따라가는 느림보 트레킹입니다. 소걸음 걷듯이 아주 느긋하게 소풍 맞은 아이들처럼 그렇게 재밌게 걸을 겁니다.”

 

이렇게 사전에 계속 안내를 하지만 ‘너무 느리다’라는 컴플레인은 꾸준히 제기됐다. 그런 컴플레인을 제기했던 분들은 다음번 강의에서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그 불만이 다는 아닐 거다. 아무래도 막걸리를 못 마시게 해서 그런가...

 

 

 

 

 

 

* 이말산의 봄

 

 

 

 

 

 

● 이름도 독특한 이말산

 

이번에는 삼천사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삼천사 역사트레킹은 이말산(莉茉山)에서 시작된다. 이말산은 3호선 구파발역에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곳인데 산이라고 칭하지만 작은 언덕배기에 불과하다. 해발이 겨우 132미터 정도니까. 구파발역 옆에 있는 통일로를 건너가면 앵봉산으로 갈 수 있는데 앵봉산 남쪽에는 유명한 서오릉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반대로 구파발역에서 이말산을 계속 타고 가면 북한산 서쪽편이 나온다. 즉 이말산은 앵봉산과 북한산의 중간에 있는 작은 산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말산은 이름이 참 독특하다. 명칭이 독특해서인지 동명이산도 없다. 실제로 검색을 해봐도 구파발 이말산이 유일하다. 그럼 이말(莉茉)은 무슨 뜻일까? 재스민을 한자로 풀면 '이말'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이말산은 재스민이 만발한 산이라는 뜻이다. 이말산에 재스민이 많이 피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산에는 무언가가 확실히 많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무덤이다.

 

특히 이말산에는 내시를 비롯한 궁인들의 무덤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북한산의 지산인 이말산은 한양도성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지만 성저십리 밖이라 무덤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성저십리(城底十里)는 도성에서 십리(4km)까지의 거리를 뜻하는데 성저십리까지는 무덤을 쓰지 못하게 했다. 북한산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이말산은 해발이 높지 않은 산이라 무덤을 쓰기에 적당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의주로를 따라 비교적 편하게 당도할 수 있었으니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의주로는 지금의 통일로다.

 

삼천사 역사트레킹은 이전에 소개한 <진관사 역사트레킹>과 여러 면에서 겹쳐진다. 동쪽편과는 다른 북한산 서쪽편의 이야기, 거기에 잠들어 있는 궁궐사람들의 이야기 등등... 실제로 진관사와 삼천사는 북한산 응봉을 사이에 두고 서로 자리를 잡고 있다. 두 사찰 사이의 직선거리가 1km도 안 될 정도로 아주 가깝다. 그러니 이번편 삼천사 역사트레킹과 <진관사 역사트레킹>을 교차해서 살펴보시면 더욱더 좋을 것이다.

 

 

 

 

 

 

* 이말산: 주인을 잃은 석물들이 방치되어 있다.

 

 

 

 

 

 

● 죽어서까지 서럽다

 

거대한 암봉들이 우뚝우뚝 서있는 북한산은 골산(骨山)의 면모를 보인다. 이와 달리 해발 130미터 정도의 이말산은 육산(肉山)이라고 할 수 있다. 푸근한 동네 뒷산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현재 이 산의 무덤들은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다. 쓰러진 문인석, 뒹굴고 있는 묘비, 잘려나간 망주석 등등... 자신들의 '씨앗'을 남길 수 없었던, 그래서 후손들을 둘 수 없었던 내시들이었기에 그런 황량함이 더 애절하게 느껴진다. 물론 예전 내시들 중에는 양자를 드려 자신의 제사를 받들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양자도 후손을 둘 수 없는 이들이었기에 그 한계가 분명했던 것이다.

 

후손이 없는 무덤은 버려진 것과 다를 바 없다. 봉분은 깎여 나가 평평해지고, 그 주위에 세워둔 석물들은 쓰러진다. 그 중 잘 생긴 문인석은 누군가의 손에 들려 나가기도 한다. 한마디로 도둑을 맞는 것이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서러운데 더 서러운 일도 있다. 2010년을 전후로 해서 이말산 부근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 유명한 은평 뉴타운이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아파트 입주민들이 이곳에 있는 무덤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민원을 넣은 것이다. 아파트 창문을 열면 바로 무덤들이 보이니 무섭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들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뉴타운보다 무덤이 더 오래됐다. 그 무덤들이 먼저 들어섰고, 몇 백 년 후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뉴타운이 굴러온 돌인 것이다. 그리고 이말산에 있는 궁인들의 무덤은 그자체로 학술적인 가치가 있다.

 

 

 

 

 

 

 

* 문인석: 머리가 잘려나간 문인석. 누군가 일부러 머리 부분을 자른 것처럼 절단면이 반듯해보인다. 주인이 없는 무덤가라 그런지 문인석들도 크게 훼손됐다.

 

 

 

 

 

 

 

● 북한산의 고봉들이 반겨주는 삼천사

 

이제 트레킹팀은 삼천사로 향한다. 삼천사는 661년(문무왕1)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이웃한 진관사가 천년고찰이면서 서울의 4대 명찰로 불리지만 창건연대에서는 삼천사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진관사는 1010년, 고려 현종 때 건립됐으니 삼천사가 그보다 400년이나 앞서 세워진 것이다.

 

삼천사는 한때 3000명의 수도자가 불도를 닦았을 정도로 크게 융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수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크게 손상을 입는다. 한국전쟁 때도 크게 불에 타는데 지금의 전각들은 1960년대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다. 그때 복원을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터를 잡은 것이다. 오리지널 삼천사 터는 계곡을 따라 약 30분 정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현재의 삼천사에 들어서면 북한산 서쪽편의 고봉들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계곡을 따라 장군봉, 나한봉, 나월봉, 보현봉... 그 다음에 뭐였더라? 그렇게 우뚝우뚝 서있는 고봉들을 보고 있노라면 도심지 빌딩숲에 펼쳐진 인공의 스카이라인이 밋밋하게 여겨진다.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눈을 정화했다면 이제 부처님을 향해 갈 차례다. 삼천사에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마애불이 있는데 그 부처님을 만나 뵈러 가는 것이다. 보물 657호로 지정된 ‘서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을 뵈러 가는 것이다.

 

고려 전기시대에는 개성미가 넘치는 석불들이 많이 등장한다.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 안동 제비원 석불, 파주 용미리 쌍미륵 등등... 이 시기에 등장한 석불들은 거대한 사이즈를 자랑하는데 은진미륵 같은 경우는 약 18미터에 달할 정도다. 그렇게 어마어마하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불로 자리매김했다. 1등이라는 말이다.

 

돌장승같이 석불들이 큼직큼직하니 균형미나 비례미는 떨어졌다. 신체비율에 안 맞게 얼굴을 크게 부각하여 3~4등신으로 만들어진 석불도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개성미가 넘치게 된 건 그 당시 정치상황과 연관이 있다. 고려 전기시대에는 호족세력들이 지방에서 위세를 떨쳤는데 그런 사회상황이 석불 제작에도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 삼천사: 뒤쪽으로 북한산의 고봉들이 펼쳐져 있다.

 

 

 

 

 

 

 

● 같은 고려 전기에 제작됐지만 삼천사 마애불은 다르다

 

11세기경에 제작됐으니 삼천사 마애불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된 고려 전기에 제작된 석불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세련미와 균형미가 잘 갖추어졌다는 뜻이다. 격식을 파괴한 듯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이는 거대한 석불과는 차이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대웅전을 돌아 위쪽으로 올라가면 마애불을 만날 수 있다. 마애불(磨崖佛)은 벼랑애(崖) 자에서 보듯 바위에 새긴 불상을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은진미륵 같은 경우는 환조(丸彫) 형식의 석상으로 되어 있다. 좀 어렵다. 학창시절에나 배웠던 미술용어도 나오고, 그보다 더 어려운 한자도 나왔으니까. 트레킹팀도 어려워하셨다. 그래서 이렇게 설명을 했다. 해설을 질을 떨어뜨렸다고 하지 마시라. 오죽하면 그랬겠는가!

 

“마애불은 벽에다 그리는 그래피티라고 생각하시고요, 환조는 이순신 장군 동상 생각하세요. 물론 동상은 금은동 할 때 그 동으로 만들었어요. 석상은 돌, 그러니까 스톤이고요. 오케이?”

 

삼천사 마애불은 신체의 비례가 잘 표현됐고, 승각기 등의 법복이 잘 그려졌다. 약 3미터 정도인 삼천사 마애불은 양각, 음각, 부조까지 다양한 기법들이 조화롭게 잘 스며들어 있다. 양각과 음각은 아실 것이다. 그럼 부조는? 부조(浮彫)는 돋을새김이라고도 하는데 평면에 형상이 도드라지게 만든 것을 말한다. 삼천사 마애불의 얼굴 부분을 보시면 부조로 잘 조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애불 앞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는 넓은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치성을 드린다. 이곳 아래로는 삼천사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다리 형식으로 복개를 하여 부처님에게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게 됐다.

 

제작된 지 거의 천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삼천사 마애불은 별로 마모가 되지 않고 뚜렷하게 자신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석불 좌우에 뚫린 가구공(架構孔)에 당장이라고 목재를 끼워 지붕을 달 수 있을 정도로 가구공도 그 빤듯함을 유지하고 있다.

트레킹팀도 공손하게 합장을 하고 기원을 드렸다.

 

“여러분 무슨 기원을 올리셨나요? 어쨌든 소중한 기원이 잘 성취됐으면 좋겠네요.”

 

글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역사트레킹은 테마를 따라가는 느림보트레킹이다. 쭉쭉 치고 나가는 걸 좋아하시는 분들은 역사트레킹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의미로 삼천사 역사트레킹과 진관사 역사트레킹은 따로따로 행하셨으면 좋겠다. 느긋하게 따로따로 행하는 게 더 기억에 남을 테니까.

 

 

 

 

 

 

* 삼천사 마애불: 고려 전기시대 작품

 

 

 

 

 

 

 

* 삼천사 마애불: 천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음.

 

 

 

 

 

 


 

 

 

 

■ 삼천사 역사트레킹

1. 코스: 이말산 ▶ 진관근린공원 ▶ 삼천사 ▶ 삼천사계곡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휴식시간 포함)

4. IN: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 / OUT: 진관한옥마을 ☞ 삼천사계곡까지 탐방한 후 은평한옥마을에서 버스편을 이용하여 다시 구파발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 삼천사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1편>

 

 

 

 

* 철도공원

 

 

 

 

 

 

간단한 퀴즈로 시작해본다.     

 

- 태릉선수촌을 모르시는 분?    

 

없을 것이다. 두 번째 문제.   

  

- 그럼 태릉이 뭐하는 곳인지 아시는 분?     

 

문제를 못 맞히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 태릉 옆에 강릉도 있는데 강릉은 뭐하는 곳인지 아시는 분?     

 

일단 죄송하다. 독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책은 덮지 마시라. 정답은 아셔야 할 것 아닌가.     

 

 

 

 

* 옛 화랑대역: 역사트레킹 팀

 

 

 

 

 

 

● 커피 한 잔이 어울리는 간이역, 옛 화랑대역     

 

그렇다. 이번에는 태릉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태릉 역사트레킹은 철길을 걸으며 시작한다. 진짜는 아니고, 지금은 폐선이 된 경춘선 옛 철길을 걸으며 시작하는데  약 5분 정도 걷다보면 옛 화랑대역에 도착할 수 있다.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자리 잡고 있는 옛 화랑대역은 거대도시 서울과는 어울리지 않게 작고 아담한 간이역이다. 가을 낙엽이 떨어질 때는 커피 한 잔과 시집 한 권을 들고 서성이는 여인의 뒷모습이 그려지는 그런 곳이다. 

 

화랑대역은 1939년에 개통된 경춘선의 한 역으로 상업운영을 시작한다. 하지만 처음 역이 들어섰을 때는 화랑대역이 아닌 태릉역이었다. 그러다 1958년 화랑대역으로 이름이 바뀐다. 바로 옆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역명이 변경된 것이다. 육군사관학교의 별칭이 화랑대다. 

 

목조건물로써 약 80년의 세월을 거친 옛 화랑대역은 좀 특이한 외형을 가지고 있다. 좌우가 다른 비대칭 삼각형 형태의 지붕이 바로 그것이다. 정면에서 봤을 때 왼쪽보다 오른쪽이 더 길게 내려왔다. 일반적인 목조 간이역은 책을 뒤집어 놓은 박공지붕 형태를 취한다. 맞배지붕이라고도 불리는 박공지붕은 좌우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 보통이나 옛 화랑대역은 오른쪽이 쭈욱 더 내려와 있는 것이다. 건축용어로는 이어내림지붕이라고 말한다. 이런 독특한 모양을 갖춘 옛 화랑대역은 2006년에 국가등록문화재(300호)로 지정된다.  

 

2010년 경춘선은 복선화됐고, 옛 화랑대역은 더 이상 기차가 달리지 않는 역이 된다. 폐역이 된 것이다. 하지만 화랑대역이라는 명칭이 아직도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건 지난 2000년에 개통된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이다. 경춘선과 지하철 6호선은 다른 노선이다. 

 

기차가 달리지 않자 사람들의 발걸음도 끊겼다. 그러다 다시 옛 화랑대역을 사람들이 찾게 된다. 2018년에 철도테마공원인 화랑대 철도공원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의 기차들이 선로에서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청춘의 시절로 돌아간 듯 기차를 배경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모두 다 행복한 표정이다. 달리지 못하는 그저 전시된 기차지만 이미 그들은 그 기차를 타고 춘천으로 떠난 것 같았다. 필자는 답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물어봤다.      

 

“여러분 행복하세요?”

“네! 당연하죠!”     

 

그렇게 행복한 옛 화랑대역에서 달콤한 커피 한 잔 마시고 다시 발걸음을 이어갔다. 이제 트레킹팀은 경춘선 옛 철길을 따라 태릉으로 향한다. 옛 화랑대역에서 태릉까지는 화랑천이라고도 불리는 묵동1천을 따라 걷는다. 작은 하천이지만 물과 함께 걸어서 참 좋은 길이다. 

 

일반적으로 서울에 있는 옛 철길들은 고층 빌딩에 둘러싸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옛 경의선 철길을 생각해보시면 된다. 도심지가 확장되니 기존에 있던 지상 철길 구간은 지하화 되고, 나중에는 공원으로 꾸며진다. 그래서 기차처럼 길쭉한 형태의 공원이 들어서는 것이다. 그런 철길 공원은 도심지에 폐철로가 있다는 점 이외에는 다른 공원들과 차이점이 별로 없다. 소음과 인파들 때문에 걷는 맛도 덜하다. 

 

하지만 화랑천을 끼고 걷는 옛 경춘선 철길 구간은 고독을 씹으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걷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소음도 별로 들리지 않고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다. 그렇게 호젓하게 걷다보면 태릉에 도착한다.      

 

 

 

 

*옛 화랑대역: 사진에서도 보이듯 지붕이 비대칭이다.

 

 

 

 

 

 

● 태릉을 알려면 중종시대를 알아야 한다     

 

태릉이 뭐하는 곳인지 몰라도 태릉선수촌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태릉은 1565년에 들어섰고, 선수촌은 1966년에 개촌 했으니 무려 400년이나 앞서 능이 조성된 것이다. 그래서 태릉(泰陵)이 뭐하는 곳인지 모른다고 하면 문정왕후가 크게 노여워하실지 모른다. 그렇다. 태릉에는 중종의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께서 잠들어 계신다. 

 

태릉에 들어서기 전에 입간판을 먼저 살펴보자. 태강릉이라고 적혀있다. 태릉에 왔는데 강릉? 강원도 강릉? 아니다. 강릉은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과 그의 부인 인순왕후가 묻힌 곳이다. 이로써 앞서 제시한 퀴즈들의 답이 얼추 언급됐다. 퀴즈를 풀었다고 여기서 책을 덮으시면 섭섭하다. 이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태릉에 들어서면 의리의리한 그 넓이에 혀를 내두르실 것이다. 불암산 남쪽에 위치한 태릉은 단일릉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의리의리한 능역을 통해서 주인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위세를 실감할 수 있을 정도다. 

 

윤지임의 딸인 문정왕후는 열일곱의 나이인 1517년(중종12)에 중종의 셋째 부인이 된다. 1515년에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가 왕자를 낳은 후 산후통증으로 죽음을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장경왕후가 낳은 왕자는 이후 인종이 된다. 남한산성에서 굴욕을 당한 인조 말고 인종. 

 

좀 어렵다. 이 부분에서 교통정리 좀 들어간다. 일단 용어 정리부터. 문정왕후는 제2계비, 장경왕후는 제1계비이라고 했는데 그럼 계비의 정확한 뜻은 무엇인가? 계비(繼妃)는 ‘임금이 다시 장가가서 얻은 부인’이다. 새어머니를 계모라고 부르듯이 왕의 새로운 부인을 계비라고 부른다. 

 

그럼 중종은 문정왕후, 장경왕후 이전에도 부인이 있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있었다. 단경왕후가 바로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이다. 중종이 조강지처라고 칭할 정도로 중종과 단경왕후는 금슬이 좋았다. 하지만 단경왕후의 아버지인 신수근이 연산군의 매부였기에 중종반정 세력들은 단경왕후를 폐서인으로 만들어 궁궐에서 쫓아냈다. 

 

신하들에 의해 왕으로 세워진 중종이었기에 그렇게 자신의 조강지처를 떠나보내야 했던 것이다. 이후 단경왕후는 평생 중종만을 그리워하다 삶을 마감한다. 경복궁 옆에 있는 인왕산에는 단경왕후가 치마를 흔들며 중종을 그리워했다는 치마바위가 있다.      

 

단경왕후(1739년 복위) - 장경왕후 문정왕후      

 

중종의 여인들이 이들 뿐이겠는가.  오죽했으면 ‘여인천하’라는 사극까지 있었을까.      

 

 

 

 

* 태릉: 정자각

 

 

 

 

 

 

● 문정왕후는 중종 옆에 묻히지 못했다     

 

다시 태릉이야기. 앞서도 언급했지만 태릉의 능역은 크지만 단릉이다. 문정왕후 홀로 잠들어 계신다. 아들인 명종 재위시절 약 20년 동안 큰 권력을 휘두른 문정왕후가 아닌가? 그렇다면 지아비인 중종 곁에 묻혀 있는 것이 맞지 않나?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생산했을 때는 1534년이었다. 입궁을 한지 무려 17년 만에 왕자를 출산한 것인데 30대 후반인 나이에 낳았으니 그때 당시의 기준으로는 노산이었다.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왕자를 생산했음에도 문정왕후의 앞길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이미 세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 세자는 앞서 언급한 장경왕후가 낳은 인종이었다. 

 

왕통을 이을 세자가 있는 마당에 중전의 몸에서 또 다른 적자(嫡子)가 탄생을 했다는 건 왕위계승과 관련하여 정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수 있게 된다. 인조반정의 원인이 되었던 광해군의 인목대비 유폐와 영창대군 사사를 생각해보시라. 

 

1544년 문정왕후의 지아비인 중종이 숨을 거둔다. 왕위는 인종이 잇게 됐다. 그런데 인종은 재위 9개월 만에 죽음을 맞이한다. 이를 두고 야사에서는 문정왕후가 자신의 아들인 경원대군을 왕으로 삼으려고 인종을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쨌든 경원대군이 1545년 왕위를 이어받아 조선 13대왕, 명종으로 등극한다. 이때 명종의 나이 12살이었다. 그러니 실제적으로 권력은 누가 휘둘렀을까?

 

중종은 죽고 나서 장경왕후와 함께 고양 서삼릉에 묻혔다. 그러다 명종 17년(1562) 지금의 자리가 길지라 하여 천장(遷葬)된다. 아버지 성종이 묻힌 선릉(강남구 삼성동) 옆으로 옮겨온 것이다. 사후에 자신의 지아비인 중종 옆에 묻히고자 문정왕후가 그렇게 한 것이다.   

 

그렇게 공을 들였지만 문정왕후는 지아비와 함께 묻히지 못한다. 옮긴 중종의 능이 지대가 낮아 여름철에 비가 오면 그 일대가 다 잠겼기 때문이다. 결국 문정왕후는 중종과 멀리 떨어진 불암산 남쪽에 잠들게 된다. 홀로!    

 

 

 

 

* 연결숲길: 태강릉 연결 숲길.

 

 

 

 

 

 

● 태릉과 강릉을 연결하는 숲길을 따라     

 

자 이제 명종과 그의 비 인순왕후의 능이 있는 강릉을 향해 가보자. 강릉은 태릉과 언덕을 사이에 두고 배치되어 있는데 그 두 곳을 연결하는 숲길이 참 좋다. 말 그대로 왕릉의 숲이다. 산책로도 잘 정돈되어 있고, 나무들도 잘 가꾸어져 있다.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숲길이다. 산책로가 시원시원하고 널찍해서 그런지 언뜻 문경새재 길 분위기도 났다.

 

태릉에 비해 강릉은 무척 단출하다. 능역이 무척 소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명종은 죽어서까지도 문정왕후의 품에서 못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문정왕후가 1565년에 생을 마감했고, 명종은 1567년에 숨을 거두었다. 명종은 12살에 왕위에 올라 22년 간 용상에 앉아있었지만 실제로 그의 치세 기간은 문정왕후 사후 2년이라고 불릴 정도로 재위 기간 내내 어머니의 치마폭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자식 사랑도 적당히 해야 한다. 과유불급!

 

그렇게 태강릉을 탐방한 트레킹팀은 산 중 호수인 제명호를 만나게 된다. 제명호는 미국인 선교사가 만든 인공호수인데 불암산 중턱부에 위치해 있어 산과 물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모습을 선사한다. 크지 않은 호수지만 그저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호수에 비친 불암산 봉우리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다.

철도테마공원에서 행복해지고, 태강릉 숲길 힐링하고, 제명호에서 물에 비친 불암산을 바라보고. 아~ 좋다! 태릉 역사트레킹!          

 

 

 

 

 

* 강릉: 강릉의 참도

 

 

 

 

 


 

 

 

■ 태릉 역사트레킹

 

1. 코스: 옛 화랑대역 ▶ 경춘선철길 ▶ 태릉 ▶ 태강릉 연결숲길 ▶ 강릉 ▶ 제명호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4시간(휴식시간 포함) 

4. IN: 6호선 화랑대역 / OUT: 삼육대학교 ☞ 삼육대학교 앞에서 6호선 화랑대역 방면으로 시내버스를 타고 갈 수 있음.                    

  

 

 

 

* 태릉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