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도> 배는 안 떴고, 난 섬을 돌아다녔네!

흑산도 구석구석 탐방하기!

 

2023년 1월 11일(수) ~17일(화)

흑산도에 있었던 시기이다. 안개와 풍랑으로 인해 예정했던 날짜보다 더 오래 흑산도에 머물렀고, 그에 따라 마음껏(?) 흑산도 여행을 하게된 것이다. 기록은 시간순이 아닌 해당 여행지를 중심으로 작성하였다.

*** 2023년 1월 14일 토요일.

홍도여행이 유람선 관광 중심이라면, 흑산도는 일주도로를 따라 포인트를 찍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관광택시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항상 돈이 문제가 아닌가... 주머니가 가볍고 하니 택시는 못 타고 발로 떼우기로 했다.

흑산도는 마을이 다 해안가에 접해있다. 섬 내부의 산들이 워낙 가팔라서 마을이 들어설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이날은 그런 산들 중 하나에 오르기로 했다. 홍도에서도 깃대봉을 올랐었는데 이번에도 또 산이다! 이러다 섬 산행에 맛들이겠다.

 

 

* 상라산 전망대: 전망대에서 흑산도 북동쪽을 바라본 모습.

 

 

 

* 흑산도: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다.

 

 

 

흑산도에서 유명한 산은 칠락산이다. 해발 271미터 정도로 서울 남산 정도의 높이다. 섬 내부에 해발 404미터의 문암산이 있지만 중심지인 예리와 진리의 진산 역할을 하는 산이라서 그런지 칠락산은 꽤 인기가 많다. 이날의 이동코스는 이렇다.

칠락산 -> 반달봉 -> 상라산(전망대) -> 12굽이길 -> 무심사지

이 코스는 섬의 서북쪽의 산악 구간을 탐방한다. 홍도 깃대봉처럼 흑산도의 산들도 녹음이 가득했다. 입춘이 아직 저멀리에 있는데 푸른 숲길을 걸을 수 있다니! 인적이 끊긴 겨울 푸른 숲길을 홀로 걷고 있자니 참 묘한 느낌이 들더라. 때마침 안개가 숲길에 깔리는데... 마치 엘프가 된 느낌? 똥배나온 엘프도 있나?ㅋ

흑산도의 자랑 상라산 전망대에서 섬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배를 타고 둘러보는 것과 위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래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풍광도 위쪽에서는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맛에 산에 오르고, 트레킹을 하고 그러는 것이다.

12굽이길 탐방을 끝으로 흑산도 섬 등산을 잘 마무리했다. 12굽이길을 직접 내려가 봤는데 그 경사도가 정말 한계령 빰칠 정도였다. 이곳을 직접 가봐야 흑산도 지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 12굽이길: 상라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12굽이길과 흑산도항.

 

 

 

마지막 탐방지는 12굽이길 시작점 부근에 있는 무심사지였다. 무심사는 신라 후기시대에 만들어진 사찰이었는데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관련있는 곳이다. 상라산이 있는 섬의 서북쪽에는 후기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상라산성이 있다. 흑산도가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다보니 성을 쌓아 감시와 방어를 했고, 무심사는 배후 사찰로 역할을 했다.

무심사지에 들어서니 거대한 팽나무가 크게 두 팔을 벌리듯 맞이하고 있었다. 그 자태가 의리의리해서 석탑과 석등이 좀 위축되게 보였다. 석탑과 석등은 팽나무의 보호(?) 아래 좀 방치된 느낌이었다. 그래도 섬 지역에서 불교문화재를 보는 것이 쉽지가 않아서 그런지 무척 반가웠다.

지금은 팽나무 울타리 안에 석탑과 석등이 있다. 하지만 분리를 해서 석등과 석등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으면 한다. 안타까운 이혼이 아니라 아름다운 제자리 찾기라고 생각하며.

 

 

 

* 무심사지: 거대한 팽나무가 석탑과 석등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 무심사지 석탑과 석등

 

 

 

*** 2023년 1월 15일 일요일.

빠르게 흑산도를 돌아보고 싶다면 관광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제일 좋은 방법은 섬 일주도로를 직접 걸어보는 것이다. 흑산도 일주도로는 약 25km정도이니 2번에 걸쳐 나눠 걷는 것이 좋다. 그런데 일주도로면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아닌가? 트레킹의 첫번째 원칙이 안전이라고 숱하게 강조하지 않았나? 안전에 위배되는 행위를 추천하고 있는 것인가?

맞다. 일주도로에서는 자동차와 경합하면서 걸어야 한다. 갓길도 아주 비좁다. 그럼에도 일주도로 걷기를 추천하는 이유가 있다. 차들이 별로 안 다니기 때문이다. 1월이 비수기여서 그럴 수도 있다. 어쨌든 이동하는 자동차들이 드문드문이어서 안전이 위협받을 일은 거의 없었다.

이날은 공영버스를 타고 면암 최익현 유배지에서 하차를 한 후 유배문화공원이 있는 사리마을까지 걸어갔다. 거리로는 약 5km 정도였다.

 

 

* 손암 정약전

 

 

 

면암 최익현은 대표적인 위정척사파로 불린다. 1876년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이 맺어지자 이에 반대하는데 그 때문에 흑산도로 유배를 오게 됐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직접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운다. 이때가 그의 나이 74세였다. 하지만 일본군에게 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6년 대마도에서 순국하고 만다. 최익현 유배지는 아주 단출하다. 비석과 바위의 각자가 전부였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 그냥 스쳐지나갈 거 같다.

이후 유배문화공원이 있는 사리마을로 향했다. 일주도로는 해안가를 끼고 돌아간다. 그래서 풍광이 일품이다. 자동차를 타고 갔으면 뜀뛰기하듯 보았을테지만 느긋하게 걷다 보니 시원한 풍광을 눈에 마음껏 담을 수 있었다.

흑산도에서 동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영산도라는 섬이 있는데 이 영산도를 걷는 내내 바라보면서 걸었다. 영산도의 해안선이 위풍당당하게 뻗어있었다. 반대편 영산도에서 흑산도를 바라보면 어떤 모습일까?

 

 

 

* 사촌서당: 정약전이 후학을 양성하던 곳.

 

 

 

목적지였던 사리마을 유배문화공원에 도착했다. 이틀전인 13일에 한 번 왔으니, 두번째 방문이다. 흑산도의 남쪽에 위치한 사리마을은 손암 정약전의 유배지였다. <자산어보>로 유명한 정약전 선생은 정약용 선생의 둘째형이다.

정약용과 마찬가지고 정약전도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귀향살이를 떠나게 된다. 처음에는 완도 본섬 바로 옆에 있는 신지도로 유배된다. 이 신지도는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지금은 완도 본섬은 신지대교로, 북쪽의 고금도와는 장보고대교로 연결되어 있다.

이후 정약전은 황사형 백서 사건에 연류가 됐고, 그것 때문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는다. 정약용도 마찬가지였다. 정약용의 첫번째 유배지는 전라도 강진이 아니라 경상도 포항 장기였다. 정약용도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강진으로 이배된 것이다.

이후 각자의 유배지로 떠나게 됐는데 전라도 나주까지는 함께 동행을 했다. 나주 율현골에서 형은 흑산도 인근 우이도로, 동생은 강진으로 각자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것이 그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1816년 손암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자산어보>가 1814년에 집필됐으니 딱 2년 후에 일이다.

잠깐! 흑산도가 아니라 우이도라는 지명이 나왔다. 우이도는 흑산도에서 서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행정구역상 현재 신안군 도초면 소속되어 있다. 흑산도보다 육지쪽에 훨씬 더 가까운 곳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정약전은 흑산도와 우이도를 오가며 유배생활을 했다. 물론 흑산도에서 생활한 기간이 더 길다. 우이도에서 유배 초반기를 보내다 1806년경 흑산도 사리마을로 옮기게 된다. 그러다 1815년 우이도로 다시 옮겨갔고, 그곳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 사리항: 작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다.

 

 

사리 마을은 흑산도 중심지에서 남쪽으로 약 10km정도 떨어져 있다. 사리마을은 일주도로의 남쪽 기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일주도로가 만들어지기까지 무려 25년이 걸렸다고 한다. 왜? 흑산도의 지형이 너무 험준하니까!

현재 사리마을은 유배문화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 유배문화공원의 핵심은 사촌서당이다. 사촌서당은 복성재라고도 불렸는데 정약전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었다. 초가를 올려 복원을 해 놓았다.

유배문화공원을 찬찬히 걸으며 사리마을 일대를 둘러보았다. 돌담길이 정겹게 느껴진다. 날카롭게 서 있는 내 마음속의 철조망을 정겨운 돌담길에 잠시 내려놓았다. 돌담길이 망므도 정화시켜주네!

유배문화공원에서 나와 항구쪽으로 이동하다보면 황금색의 정약전 선생의 동상이 서있다. 좀 쌩뚱맞은 곳에 위치해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손암 선생 동상 하나 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나? 손암 선생이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유배생활에서 오는 참담함을 선생은 저 바다를 바라보면서 날려버렸을까? 바다는 말없이 철썩이고 있었다.

 

 


 

 

* 상라산전망대 트레킹

* 세부코스: 흑산면사무소 -> 반달봉(칠락산) -> 상라산(전망대) -> 12굽이길 -> 무심사지

* 길이: 약 6km

* 소요시간: 약 3시간 정도 -> 볼거리가 많으니 천천히 둘러보자

* 난이도: 중

* 교통편: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서 흑산도행 쾌속선을 탄다. 소요시간은 약 2시간. ​

* 참고: 흑산도행 쾌속선은 박스형태라 운항중에 선실 밖으로 나갈 수 없음. 그래서 멀미에 취약할 수밖에 없음. 배멀미가 심한 사람은 미리 약을 복욕하시는게 좋음.

 

 

 

겨울맞아? 푸른숲에 꽃향기까지 퍼지네!

<홍도> 동백꽃 향을 맡으며 망망대해를 바라보다니!

2023년 1월 12일 목요일.

섬 여행은 쉽지가 않다. 이번 흑산도, 홍도 여행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절실히 느꼈다. 쉽지 않았던 만큼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시간들. 그 시간들을 잊지않기 위해 기록해본다.

흑산도는 목포에서 서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진 섬으로 행정적으로는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에 속한다.

홍도는 흑산도 본섬에서도 서쪽으로 약 20km 정도 더가야 한다. 그래서 목포에서 출발한 쾌속선이 흑산도를 거쳐 홍도까지 간다. 홍도(紅島)는 석양에 물든 섬의 모습이 붉은색으로 보인다하여 홍도라 불린다.

11일 저녁에 흑산도에 입도를 해서 1박을 한 후 다음날 아침에 홍도로 이동했다. 쾌속선으로 30분 거리. 두 섬 사이가 가까워서 그런지 흑산도와 홍도는 같이 묶어서 여행을 한다. 티켓팅을 할 때 직원이, 비수기라 홍도 주민분들이 단체로 여행을 갔다고했다. 그래서 밥 먹을 식당이 없을 거라고, 친절히 안내해주셨다. 어차피 배낭에 2끼 정도의 행동식은 항상 휴대를 하니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가난한 여행자들은 배낭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 홍도: 홍도의 중심지인 홍도 1구. 홍도 초등학교의 운동장이 보인다.

홍도에 입도를 하니 정말 섬 전체가 조용했다. 흑산도는 면사무소도 있고 일주도로도 있고 해서 좀 분주한 맛이 있는데 홍도는 주민들초자 섬밖에 있으니... 상황이 이러니 홍도 여행의 필수코스라는 유람선 투어는 생각도 못할 판이었다. 비수기라 식당이 문을 닫았는데 유람선이 출항을 하겠냐고!

잠깐 여기서 흑산도와 홍도를 비교를 해보자. 일반적으로 홍도와 흑산도를 묶어서 여행하기 때문에 두 섬의 크기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홍도의 크기는 6.4㎢이고 흑산도의 크기는 19.7㎢로 3배 정도 차이가 난다. 더군다나 홍도는 경사가 워낙 급해서 자동차가 다닐 수 없다. 그래서 지도앱을 봐도 로드뷰가 없다. 이에 비해 흑산도는 해안선을 따라가는 일주도로가 있고, 그 도로를 따라 공영버스도 운행된다.

이런 지형적인 여건 때문에 여행 방식도 달라진다. 홍도는 유람선을 타고 홍도 외곽을 도는 해상 관광이 주를 이룬다. 이에 비해 흑산도는 일주도로를 따라 주요 포인트를 찍는 방식으로 여행이 진행된다. 그래서 관광택시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홍도에 와서 유람선 투어를 하지 못하니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기는 산으로 올라가야지!^^

 

 

* 깃대봉 가는길: 한 겨울에도 이렇게 푸른 숲길이다. 바닥에 동백꽃도 떨어져있다.

 

* 동백꽃

홍도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모습을 하고 있다. 마치 애벌레같은 모습이다. 섬의 ⅔ 지점에 중심지인 홍도 1구가 있고. 중앙부에는 깃대봉이라고 불리는 해발 365미터짜리 봉우리가 있다. 그 깃대봉을 넘어가면, 섬 서북쪽에 홍도 2구가 있다. 지금은 홍도 1구가 섬의 중심지이지만 처음 섬에 정착한 사람들은 홍도 2구에 닻을 내렸다고 한다.

그렇게 꿩대신 닭으로 깃대봉에 올랐다. 섬에 와서 산이라니! 그래 이 맛도 나쁘지는 않다.

중간중간에 전망대도 있고, 문화유적도 있어서 그런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코스다. 수풀 너머로 보이는 비경들은 놀라움을 선사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이 있었다. 바로 숲길이었다. 동백나무, 후박나무 등 푸른 잎으로 뒤덮힌 숲길이 눈 앞에 펼쳐지는게 아닌가? 지금 1월달 아닌가? 소한 지나서 대한으로 가고 있지 않나? 그렇게 홍도 깃대봉 숲길에서는 동장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황홀한 향취의 동백꽃이 붉게 만개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봤던 동백꽃들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숲 전체에 알싸한 동백향이 은은히 흐르고, 수풀너머로 다도해의 비경이 펼쳐지니 마치 꿈길을 걷고 있는 듯했다. 이런 동백향을 홀로 마음껏 맡게 될 줄이야! 이러다 선녀같은 동백아가씨를 만나는 거 아니야?

정신차려!. 그러다 똥배 아저씨 만날라!

 

 

* 청어미륵

그렇게 동백꽃 향기를 음미하며 걷고 있는데 청어미륵이라는 돌미륵 두 개를 만나게 됐다. 죽항마을 산길에 있다하여 죽항미륵이라고도 불리는 미륵이다. 사진에서도 보이듯 청어미륵은 매끈한 자연석을 미륵불로 모신 형태다. 통상적으로 미륵불이라고 하면 큰 돌을 잘 다듬어서 양각이든 음각이든 부처님의 형상을 새겨넣어 만든다. 혹은 돌장승처럼 마을 수호신 형태로 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청어미륵은 길죽한 돌 하나, 오목한 돌 하나를 올려놓고 남녀미륵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이름도 독특하다. 청어라니! 논산 관촉사에 있는 은진미륵처럼 동네 이름을 붙이는게 일반적인데 물고기인 청어를 접두어처럼 붙인 것이다. 역시 섬에 있는 미륵이라서 그런지 풍어(豊漁)와 관련된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있는 것이다.

 

 

* 홍도: 깃대봉 왼쪽 바다에 떠있는 바위섬들. 홍도 2구에서 가깝다.

 

 

* 깃대봉: 사진 왼쪽 중단부에 길게 늘어진 섬이 바로 흑산도다.

산길을 오를수록 숲은 더욱더 푸르렀다. 한겨울에 울창한 녹색숲을 볼 수 있다니! 이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정상에 다다르기 전에 숯가마터가 나타났다. 예전 홍도 주민들은 숯을 구워 지나가는 배에 판매하였다고 한다. 그 돈으로 쌀을 사고 소금도 샀다는 것이다. 망망대해가 끝없이 펼쳐진 섬 한가운데서 산골짜기에서나 보던 숯가마터의 흔적을 보니 좀 의아스러웠다. 달리말하면 홍도의 임산 자원이 풍부하다는 뜻일 것이다.

드디어 깃대봉 정상에 올랐다. 확트인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저멀리 흑산도가 길게 늘어진 모습으로 바다위에 누워있었다.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가 서로 맞물린 풍광을 바라보며 마음껏 사진을 찍었다. 열심히 찍었다. 이런 환상적인 곳에서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 있다니! 어쩌면 이것도 정말 행운인 듯싶다. 셀카봉을 가져오길 잘 했어~^^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와 그 위에 둥둥 떠있는 것처럼 보이는 섬들의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2년 전에 다녀왔던 거문도가 연상되더라. 거문도도 홍도처럼 숨어있는 비경을 품고 있어서 그런 것이다. 둘 다 이쁘니 둘을 같이 묶어서 생각하는 것이지!

그렇게 해서 짧은 홍도 섬 산행(?) 여행을 마치고 다시 흑산도로 돌아왔다. 숙소에 도착하니 비가 내린다. 일정이 끝나고 비가 내리니 다행이지.


* 세부코스: 홍도여객선터미널 -> 흑산초등학교 -> 전망대 -> 청어미륵(죽항미륵) -> 숯가마터 -> 깃대봉

* 길이: 약 2.5km -> 지리적 여건상 원점회귀를 해야 함. 그래서 총 5km로 잡고 이동해야 함.

* 소요시간: 약 3시간 정도(왕복시간임)

* 난이도: 중

* 교통편: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서 홍도행 쾌속선을 탄다. 소요시간은 약 2시간 30분. 홍도에 내려서는 도보를 통해 이동해야 함. 홍도에는 자동차가 다닐 수 없음.

* 참고: 홍도행 쾌속선은 박스형태라 운항중에 선실 밖으로 나갈 수 없음. 그래서 멀미에 취약할 수밖에 없음. 배멀미가 심한 사람은 미리 약을 복욕하시는게 좋음.

 

* 홍도: 깃대봉쪽에서 바라본 홍도의 남쪽면.

 

 

* 깃대봉: 홍도 깃대봉 인증샷.

 

달맞이 하러 가자! 월류봉으로 달보러 가자!

<영동여행> 월류봉둘레길 따라가는 길, 월류봉에서 반야사까지

 

충북 영동하면 무엇이 생각나시나? 이웃 옥천과 더불어 포도 생산지로 유명하다보니 와인의 고장으로 영동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미감을 자극하는 와인처럼 영동에는 우리의 시각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풍광들도 정말 많다. 백두대간이 영동을 통과하기에 그런 풍광들이 펼쳐지는 것이다.

영동에서 가장 유명한 백두대간의 지명이 추풍령(秋風嶺 )과 민주지산(珉周之山)인데 그 둘의 고도차가 무려 1000미터에 달한다. 추풍령이 221미터이고, 민주지산이 1,241미터이다. 정말 흥미로운 대목이다. 참고로 추풍령은 민주지산에서 북동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백두대간중에서 가장 고도가 낮은 지점으로 불린다.

이런 영동에서도 가장 으뜸인 곳을 꼽으라면 월류봉(月留峰)이 가장 먼저 꼽힐 것이다. 월류봉은 달이 머물다 갈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곳이다. 그래서 많은 풍유객들이 음풍농월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깎아질 듯한 바위산 아래로 금강의 상류인 초강천이 힘차게 흐르고 있고, 그 위에 그림처럼 월류정이 자리잡고 있으니 당연히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 월류봉

 

 

 

월류봉은 해발 400미터로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굽이굽이 흐르는 초강천과 이웃한 석천이 어우러져 빼어난 산수(山水)의 조화를 뽐내는 곳이다. 월류봉은 영동군 황간면에 위치해있는데 여기서 황간이 어떤 곳인지 잠시 알아보자.

지금은 '면'이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황간은 황간현이었다. 그래서 지방관으로 현감이 파견되었는데 지금의 추풍령면과 황간면 등이 황간현의 영역이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황간현과 영동현이 합쳐져서 영동군이 된다.

월류봉에서 동남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황간역에서 내려 트레킹을 시작했다. 황간역은 작은 간이역이다. 하지만 황간역은 경부선이 개통할 때부터 만들어진 역이었다. 지금은 간이역으로 소박하게 변했지만 무려 백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역사인 것이다.

영동군은 일찍부터 경부선 철도가 들어서고,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영남을 잇는 추풍령의 존재자체가 영동군의 지리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지역에 철도와 도로가 놓이니 예전부터 인공적으로 교각들이 세워진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이렇다. 산이 깊은 만큼 물도 많이 흐르고, 그러다보니 굴다리같은 형태의 다리 시설물이 많이 건설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굴다리는 비상시에 대피소 역할을 해준다. 피난길을 떠난 이들에게 잠시나마 쉼터 역할을 해준다.

 

 

* 쌍굴다리: 월류봉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다.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1950년 7월 26일경,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 있는 쌍굴다리에도 그렇게 피난민들이 모여들었었다. 여기서 노근리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자. 한국전쟁 발발 이후 약 1달이 지났을 때였다. 피난민들은 고단한 발걸음으로 남쪽으로 이동해갔다. 그렇게 추풍령을 넘으면 영남이었다. 당시는 여름이라 비를 피하거나 햇빛을 막기위해 쌍굴다리로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그 쌍굴다리 위로는 지금도 경부선 기차가 달리고 있다. 참고로 노근리 쌍굴다리는 1934년에 건설되었다.

그런 피난민들에게 공중에서는 폭탄이 떨어지고, 땅에서는 기관총이 난사된다. 7월 26~29일까지, 3일에 걸쳐서 벌어진 노근리 학살로 인해 무고한 피난민 250~300명이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미군에 의해 벌어진 노근리 학살이다.

이 노근리 사건은 월간 <말>지 기자였던 오연호가 10년에 걸쳐 심층적으로 보도를 했었다. 하지만 국내외 언론들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1999년 9월 30일, 미국 AP통신에 의해 노근리 사건이 특종으로 보도되었다. 이때부터 노근리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큰 관심을 받게 된다. 이후 2001년 1월 12일에는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클린턴이 유감을 표하게 된다. 기왕 언론을 타려면 외신을 타야 되는 것인가? 오연호는 현재 <오마이뉴스>의 대표로 있다.

학살이 있었던 쌍굴다리 앞쪽으로는 현재 노근리평화공원이 있다. 시간이 되신다면 노근리평화공원과 쌍굴다리를 탐방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싶다. 평화공원에서 북동쪽으로 뾰족하게 보이는 봉우리가 바로 월류봉이다.

 

 

 

* 쌍굴다리: 아직도 현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월류봉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나라 산악지대를 감싸고 있는 하천들이 다 그렇듯 월류봉을 감싸고 도는 초강천도 감입곡류의 형태를 띄고 있다. 감입곡류천은 말그대로 하천이 굽이굽이 감싸고 돌아나간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천이 지형을 감아돌아 나가니 특이한 지형도 형성되는 것이다. 강원도 영월의 한반도 지형과 충북 옥천의 역한반도 지형이 바로 그것이다.

월류봉 중턱 아래쪽에 월류정이 있는데 그 월류정에서 감입곡류 형태를 명징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한반도 지형이나 역한반도 지형은 좀 떨어진 위쪽 전망대에서 관망하는 방면에 월류정은 근거리에서 관찰한다는 차이가 있다. 월류정은 가까이에서 바라보니 직접 물소리를 들을 수도 있어서 청각적으로도 만점이었다.

이렇게 빼어난 산수를 자랑하니 예로부터 이 일대를 한천팔경(寒泉八景)이라고 칭했다. 한천팔경은 제 1경 월류봉을 위시하여 사군봉(使君峯)·산양벽(山羊壁)·용연동(龍淵洞)·냉천정(冷泉亭)·화헌악(花獻岳)·청학굴(靑鶴窟)·법존암(法尊巖)으로 이루어져 있다. 월류봉의 여러 모습들을 다른 명칭으로 부른 것이 대부분이다.

 

 

 

* 월류봉

 

 

 

월류봉은 서인의 거두이자, 인조부터 숙종 때까지 정계에 큰 영향력을 끼친 송시열과도 관계 깊은 곳이다. 우암 송시열은 작은 정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했는데 그곳이 바로 한천정사(寒泉精舍)라는 곳이다. 한천팔경이 바로 한천정사에서 나온 명칭이다. 원래는 냉천팔경이었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과 관련되서 가장 유명한 유적지는 충북 괴산에 있는 화양구곡이지만 한천정사도 사료적 가치가 꽤 높은 곳이다. 원래 이곳에는 송시열을 기리는 한천서원이 들어서있었다. 그러다 서원철폐령에 의해 서원이 철폐되었고, 이후 이 지역 선비들이 한천정사를 지어 송시열의 학문을 이어나갔다. 지금도 송우암 유허 비석과 함께 한천정사가 보존되어 있다.

이제 월류봉을 뒤로 하고 초강천의 지류인 석천(石川) 을 따라 반야사 방면으로 이동한다. 석천은 백화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가는데 그 상류에 반야사가 있다. 그 석천을 따라 월류봉 둘레길이 2021년에 개통된다. 석천은 한자명처럼 돌이 많은 하천인데 기암괴석들을 바라보며 걷는 맛이 있다.

경쾌한 물소리를 들으며 약 8km를 이동하다보니 어느새 둘레길의 종점 부근이다. 이제 마지막 탐방지인 반야사(般若寺)를 둘러볼 차례다. 반야사는 상원화상이 후기 신라시대인 720년(성덕왕19)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보다 약 50년 정도 앞선 문무왕 시절에 원효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상원은 의상대사의 십대 제자들 중에 한 명이다.

 

 

 

* 월류봉둘레길

 

 

 

* 월류봉둘레길

 

 

 

반야사는 조선 전기였던 세조 시대에 크게 중창된다. 피부병 때문에 고생을 하던 세조는 속리산에서 있던 신미대사를 만나러갔고, 이후 신미대사와 함께 반야사와 대웅전에서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속리산이 있는 충북 보은과 영동은 그리 멀지 않다.

신미대사는 세조가 깊이 신뢰하는 인물이었다. 세종대왕과도 인연이 깊었다. 그런 신미대사가 속리산 중턱에 있는 복천암에서 머무르고 있었고 세조가 그곳까지 찾아간 것이다. 속리산 복천암에서 세조는 3일 동안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런 기도가 통했던 것일까? 세조가 약사여래의 명을 받은 월광태자의 도움으로 피부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런 기적이 행해진 곳이 바로 속리산 목욕소이다.

반야사에 들어서면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는 돌무더지가 탐방객들의 눈길을 끈다. 돌무더지가 있는 곳은 바로 백화산인데 다른 곳은 다 풀숲으로 덮혀있지만 딱 그곳만 돌무더지로 노출되어 있다. 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상상력을 동원한 것이다. 호랑이 형상이라고.

 

 

 

 

 

* 반야사삼층석탑: 고려전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으로 200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뒤쪽에 미끈한 배롱나무가 보인다.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곳이라 그런지 영동군은 호랑이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다. 월류봉에서 가까운 황간면 소계리 성주골에는 호총이라 불리는 호랑이 무덤이 있고, 바로 옆동네인 매곡면 노천리 내동마을에는 호랑이 공덕비가 있다. 반야사의 호랑이 돌무더지도 이런 친호랑이(?)적인 동네의 분위기와 맥이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경내에 들어서면 속살을 드러내듯 미끈한 모습의 배롱나무가 보인다. 나무를 잘 탄다는 원숭이도 배롱나무에서는 떨어진다는데 그 말이 맞는 듯싶다. 아주 매끈하다. 배롱나무 아래에 있는 삼층석탑은 인근에 있는 탑벌이라는 곳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반야사 삼층석탑은 일부분이 새로 채워지기는 했지만 고려전기시대의 탑 형식을 잘 나타내고 있어 2003년에 보물로 지정됐다.

이제 마지막으로 반야사 문수전을 보러가자. 망경대(望景臺)라고 불리는 곳에 문수전이 있는데 약 10분 정도 올라가야 한다. 계단이 좀 많기는 하지만 올라갈만 하다. 드디어 문수전에 닿았다. 올라온 보람이 있다. 백화산 호랑이 돌무지는 더 잘 보였고, 석천은 물줄기를 뿜으며 굽이굽이 흐르고 있었다.

 

 

 

* 백화산 돌무지: 저 돌무지가 호랑이로 연상되시나? 호랑이 형상이 가장 명징하게 드러날 때는 눈이 온 뒤라고 한다. 아쉽게도 방문했을 때 눈이 오지 않았다.

 

 

 

문수전 아래쪽의 석천을 따로 영천(靈泉)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서 설화가 있다. 반야사 대웅전에서 참배를 마친 세조에게 문수보살이 나타난다. 문수보살은 절 위쪽에 있는 계곡으로 가서 몸을 씻으라고 한 후, '왕의 불심이 깊어 부처님의 자비가 따른다"라는 말과 함께 사라진다. 이에 흡족한 세조는 어필을 하사한다.

석천도 월류봉 아래 초강천처럼 감입곡류 하천이다. 그래서 휘돌아가는 부분은 물줄기의 속도가 약해진다. 그 구간에 속리산 목욕소만한 공간이 있다. 그곳이 바로 영천이다.

왕이 씻은 곳이니 왕탕인가? 그냥 선녀탕이 더 좋은 거 같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세조는 속리산 목욕소에서 월광태자를 만나는 기적을 맞이한다. 이후 반야사에서는 문수보살도 만난다. 문수보살은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오대산에서도 또 만난다. 한 번 만나기도 힘든 인물들을 여러번 만나는 것이다. 마치 한 번 맞기도 힘든 로또를 여러번 맞은 것이다.

왜 그렇게 세조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을까? 덕업이 많았던 세종께서 설화와 연결이 되시던가? 정조께서는 어떤가? 세조는 불교의 신앙적 대상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도덕적인 흠결을 메꾸려고 했던 거 같다. 참고로 약사여래는 병을 치유하는 부처님이고,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월광태자는 대가야의 마자막 왕으로 나라가 망한 뒤 월광사를 지어 그곳에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 석천: 반야사 문수전에서 바라본 석천. 저 아래에도 둘레길이 있다. 저 길을 따라가면 경북 상주시 모동면이 나온다.

 

 

 

불교에서 '반야'는 '인간이 진실한 생명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근원적인 지혜'를 뜻한다. 문수보살은 보살중에서 지혜를 수호한다.

불교 설화로 자신의 흠결을 덮을 수는 없다. 세조도 질병으로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 또 그렇게 어렵게 오른 용상에서 불과 13년 만에 내려오지 않았던가. 같이 묶어서 생각하는게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연산군이 12년, 광해군이 15년동안 보위에 있었으니 생각보다는 재위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던 것이다.

덕업은 쌓지 못하더라도 악업은 쌓지 말자! 요즘 필자가 곱씹고 있는 말이다. 나름 실천할 수 있는 '반야'같은 '지혜'로운 말이라고 생각한다. 아참 계속 곱씹고 있는 말이 또 있다.

- 세상은 넓고 트레킹할 곳은 많다!

 

 


 

 

* 세부코스: 월류봉 -> 한천정사 -> 원촌교 -> 목교 -> 반야교 -> 반야사

* 길이: 약 8km

* 소요시간: 약 3시간 30분 정도

* 난이도: 하

* 교통편: 황간역은 작은 간이역이라 기차 편수가 많지 않음. 황간역에서 월류봉까지는 약 2km 정도 떨어져 있음. 영동역은 좀 더 큰 역이라 기차 편수가 많음. 영동역에서 하차한 후 공영버스를 타고 황간역 부근으로 이동할 수 있음. 이때 중간에 노근리평화공원에서 하차할 수 있음. 영동역에서 노근리평화공원까지 약 25분 정도 소요됨.

* 참고: 월류봉에서 반야사까지는 약 8km 정도임. 문제는 반야사에 공영버스가 다니지 않는다는 점임. 콜택시를 부르거나 왔던 길을 되돌아와야 함. 필자는 왔던길을 되돌아왔음. 그날 약 20km를 걸었음.

 

 

 

 

 

 

 

 

 

* 주전골계곡: 만물상

 

 

 

 

 

 

 

2021년 7월 2일 금요일

 

약 40일 만에 설악산 주전골에 다시왔다. 전날에는 천불동계곡, 이날은 주전골계곡.

이래저래 설악산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든다. 이것도 정말 복인 거 같다. 설악산의 비경들만 찾아나서고 있으니까. 어떤이는 태어나서 설악산을 한 번도 못 가본 이들도 있을텐데...

 

천불동계곡이 속초에서 접근한다면, 주전골계곡은 양양에서 접근한다. 주전골은 작은 천불동계곡이라고 불릴만큼 그 역시 천혜의 비경을 품고 있다. 좀 다른 것이 있다면 천불동계곡 입구보다는 주전골쪽이 좀 더 한적보인다. 주전골이 한계령과 가까워서 그럴 것이다.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 있으니 좀 더 한적함이 느껴지는 것일테지.

 

주전골과 관련된 내용은 링크를 건 지난 포스팅을 참조해주시면 좋겠다. 이번에는 그냥 사진 감상 위주로 봐주시면 좋을 듯하다. 계속봐도 좋은 사진들이다.

 

 

 

 

 

 

* 주전골계곡

 

 

 

 

 

 

 

 

*주전골계곡: 독주암

 

 

 

 

 

 

 

 

* 주전골계곡: 만경대

 

 

 

 

*주전골계곡: 선녀탕

 

 

 

 

* 양양 오색리 삼층석탑

 

 

 

 

 

 

 

*** 설악산 주전골에 대한 자세한 포스팅은 아래 링크글 클릭!!!

 

https://brunch.co.kr/@historytrekking/258

 

 

 

 

 

 

 

 

 

 

* 미륵전: 왼쪽으로는 금산사 오층석탑이 보인다. 오층석탑 옆에는 부처님의 사리탑이 있다.

 

 

 

 

 

 

 

* 금산사 당간지주: 보물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2021년 6월 12일 토요일.

 

전북 김제에 있는 금산사를 탐방하는 날이다. 전날 전주터미널 인근에서 1박을 했었는데 터미널 바로 앞에 금산사로 향하는 시내버스가 있었다. 전주가 익숙한 분들이면 전주터미널에서 금산사로 향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직선거리로 따지면 전주나 김제나 금산사까지 거기서 거기다.

 

금산사는 도립공원인 모악산에 위치해있는데 이 산은 전주, 완주 그리고 김제에 걸쳐있다. 지평선 축제가 있을 정도로 김제는 평야지대로 유명한 지역이다. 또한 전주와 완주도 평탄한 지형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해발 795미터인 모악산은 평지에 우뚝 솟아 있는 형상이다. 전남 영암에 가보면 국립공원인 월출산(810미터)이 있는데 이 월출산도 평지에 우뚝 솟아있다.

 

넓은 평야지대에 큰 산이 서있는 형상이라 그런지 모악산은 예로부터 이 지역 사람들에게 경외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랬다. 산이 내뿜는 강한 기운 때문인지 모악산은 계룡산과 함께 대표적인 민중신앙의 발생지로 꼽힌다. 실제로 1970년대까지 신흥종교 집단거주지가 있었을 정도로 이곳은 민속신앙의 집산지 역할을 했었다. 물론 지금은 많이 정비된 상태다.

 

그런 모악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어서일까?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성지같은 곳이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 때인 599년에 창건됐는데 그때는 작은 사찰에 불과했다. 그러다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율사에 의해 크게 중창되면서 이 지역의 중심 사찰로 자리잡게 된다. 이때 진표율사는 미륵장육상을 미륵전에 모셨는데 이는 법상종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다. 법상종은 교종계열로 미륵신앙을 중심에 둔 종파로 진표율사 그 자신이 개산조다.

 

머리가 아프다. 일상생활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 말들이 연이어 나오니 머리가 지끈거릴 수밖에... 또 미륵장육상은 무엇인가? 육개장 같은건가?ㅋ 거칠게 이야기하면 약 4.8미터짜리 미륵부처님 불상을 말하는 것이다. 장육상(丈六像)의 뜻을 더 알아보자. 통상적으로 불상을 만들 때 사람 키의 두 배인 16척으로 제작한다. 여기서 1척은 약 30cm이다. 그래서 '삼척동자도 다 안다'라고 했을 때는 강원도 삼척에 사는 꼬맹이가 아니라는 거다. 키가 90cm 정도 되는 꼬맹이도 다 아는데, 너만 모르냐 할 때 쓰는 말이다. 정리를 해보자.

 

1척= 30cm

1장= 10척

16척= 1장 6척

 

장육상은 이런 계산법에서 나온 것인데 신라의 세 가지 보물로까지 불렸던 경주 황룡사의 장육존상이 유명하다. 하지만 황룡사도 폐사되고 장육존상도 자취를 감추었다. 진표율사가 세운 미륵장육상도 마찬가지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 미륵전

 

 

 

 

 

 

금산사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미륵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궁예다. 하지만 견훤도 자신을 미륵이라고 칭하며 미륵신앙을 정치에 이용했다. 900년 견훤은 완산주로 도읍을 정했는데 완산주가 바로 전주와 완주 일대다. 미륵신앙의 성지인 금산사가 아주 가까운 곳에 후백제의 도읍지가 들어선 것이다.

 

하지만 권력은 참으로 비정한 법! 미륵신앙을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데 사용했던 견훤은 금산사에 감금되고 만다. 아들인 신검, 양검, 용검에 의해서. 스스로를 미륵이라고 칭한자가 미륵신앙의 본거지에 감금되고 만것이다.

 

이때가 후백제가 한참 고려와 항쟁을 벌이던 935년 3월이었다. 견훤은 아들이 10명이나 있었는데 그중 넷째 아들인 금강을 특별히 좋아했다. 그래서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첫번째 부인의 소생인 신검, 양검, 용검이 이를 알고 금강을 죽이고 만다. 또한 견훤을 금산사의 본전인 미륵전에 유폐시킨다. 이후 견훤은 고려로 도망치고 자신이 세운 후백제가 멸명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이 얼마나 황망한 일인가! 자신이 세운 나라가 망하는 광경을 직접 지켜보다니... 그런 충격 때문인지 후삼국이 통일된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견훤은 충남 논산에 있는 한 절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이때가 936년이었다.

 

 

 

 

 

 

* 대적광전: 오른쪽에 오층석탑이 보인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든다. 궁예와 견훤은 미륵신앙을 전면에 앞세우며 도탄에 빠져있는 백성들의 환심을 샀다. 그럼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어떤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나? 바로 도참사상이다. 미래의 길흉에 대한 예언을 믿는 사상이 바로 도참사상이다. 서구식으로 하면 노스트라다무스다.

 

금산사 중심영역에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나온다. 중앙에 대적광전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미륵전이 우람하게 서 있다. 이 미륵전이 금산사의 본전이면서 견훤이 감금된 장소다. 외관이 3층으로 이루어진 미륵전은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3층 법당이다. 그래서 국보 제62호로 지정되었다.

 

미륵전은 외관이 3층 형식으로 되어있지만 실내는 통층으로 되어 있다. 천장이 높다보니 이곳에는 큰 미륵불이 세워져 있는데 그 높이가 무려 11미터가 넘는다. 또한 좌우에 세워진 보살상도 8미터가 넘는다. 직접 실내에 들어가 불상을 보면 경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필자도 합장을 하고 공손하게 기원을 드렸다.

 

이렇듯 금산사는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 본전, 즉 메인 법당이기에 따로 대웅전은 없다. 대신 석가모니불은 미륵전의 반대편에 있는 대장전에 모셔져 있다.

 

 

 

 

 

 

 

* 대장전: 석가모니불이 모셔진 대장전. 그 앞에 석등이 서있다. 석등은 보물 제 828호로 지정되어 있다.

 

 

 

 

 

 

 

* 금강계단: 왼쪽에 석종형 사리탑이 보인다. 오른쪽에 오층석탑이 우뚝 서있다.

 

 

 

 

 

 

1500년 전에 창건된 금산사에는 수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일일이 다 설명할 수 없으니 사진으로 대신하겠다. 그래도 몇가지 문화재들은 잠깐 언급하겠다.

 

먼저 방등계단이라고도 불리는 금강계단이다. 보물 제26호로 지정된 금산사 금강계단은 부처님의 사리탑이 있는 곳이다. 그렇다. 금산사도 유명한 양산 통도사처럼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진 적멸보궁이다. 2층 계단으로 이루어진 금산사 금강계단은 진표율사가 처음 만들었고, 이후 여러번 다시 세웠다고 한다. 1층이 약 12미터이고, 2층은 약 8미터 정도다. 2층 한가운데 석종형의 사리탑이 모셔져 있다. 석종형이라하면 돌을 범종 형태로 깎은 것을 말한다.

 

금강계단 옆에는 보물 제25호인 금산사 오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통상적으로는 금강계단 앞에는 석등이 서 있다. 통도사 금강계단에도 석등이 서있다. 하지만 금산사 금강계단에는 고려시대에 만든 오층석탑이 우뚝하게 서있다. 그래서인지 부처님의 사리가 있는 석종형 사리탑보다 우뚝선 오층석탑에 먼저 눈길이 간다. 사리탑은 낮게 깔려있어 한 눈에 안 들어오고 높게 서 있는 오층석탑은 한 눈에 들어오니 그럴 수밖에... 두드러진 것만 보려하는 한낱 시력 안 좋은 어리석은 중생이여! 그 불쌍한 중생이 바로 접니다. 제가 시력이 안 좋아서리...ㅋ

 

금강계단과 오층석탑은 미륵전과 대적광전 사이에 있다. 송대라고 불리는 이 작은 언덕에 올라서면 금산사의 중심영역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둘러보고 있는데 저 아래 희안하게 생긴 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금산사 육각다층석탑이다. 보물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는 육각다층석탑은 특이하게도 점판암으로 만들어져있다. 점판암은 넙쩍하게 쪼개지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슬레이트라고도 불리며 기와로 쓰이기도 한다.

 

통상적으로 우리나라 석탑들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사각형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육각다층석탑은 그 법칙에서 벗어났다. 얼핏보면 맛나는 초코케이크를 층층이 쌓은 것처럼 보인다. 좀 앙증맞아 보일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높이도 2.18미터로 그리 높지가 않다. 갑자기 달달한 게 땡기네...ㅋ

 

이제까지 모악산에 있는 금산사를 탐방해 보았다. 사찰 하나에 이렇게 많은 문화재와 이야기가 숨쉬고 있다니! 그런 문화재와 이야기를 따라 오늘도 길을 나서는 거야! 아자아자~

 

 

 

 

 

 

 

* 금산사 육각다층석탑

 

 

 

 

 

 

* 금산사: 금강계단 쪽에서 내려본 모습. 육각다층석탑과 석련대가 보인다. 석련대는 보물 제 23호로 지정되어 있다.

 

 

 

 

 

 

*노주석: 대적광전과 대장전 사이에 위치해 있다. 아마도 석등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그냥 노주석으로 불린다.

 

 

 

 

 

ps. 앞으로도 미륵불을 칭하는 자는 많이 나올 거 같다. 미래불인 미륵불은 현세에 아직 출현하지 않으셨으니까. 세상이 혼탁할수록 자신을 '살아있는 미륵'이라고 칭하는 이들은 계속 등장할 수밖에 없다. 혼란한 세상에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니까. 그 심리를 귀신같이 이용해먹는 인간들도 분명 있으니까. 그런 사기꾼의 속셈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한다. 아래의 꽁트처럼 말이다.

 

"내가 살아있는 미륵이다!"

"됐다. 공양간에 밥이나 묵으러 가자!"

"내가 살아있는 미륵이래도! 내 관심법으로...!"

"배고파 죽겠다니까... 지가 미륵이면 사람들 밥부터 챙겨줘야지! 나 간다."

"..."

 

 

 

 

 

 

 

 

 

* 두 기의 보물탑: 왼쪽편이 하리 3층석탑. 오른쪽편이 창리 3층석탑.

 

 

 

 

 

 

 

 

2021년 5월 28일 금요일

 

이날은 경기도 여주 영월루 일대를 탐방했다. 여주는 남한강이 유유히 중심부를 흐르고 있다. 그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세종대왕이 잠들어계신 영릉과 신륵사가 자리잡고 있다. 그 두 곳은 약 6km 정도 떨어져있는데 여주시에서 조성한 도보여행길인 여강길을 따라 이동할 수 있다.

 

강변을 따라 걷는 길은 시야는 트여서 좋은데 좀 밋밋한 감이 있다. 서울에서 한강을 걸어보시라. 시간이 흐를수록 좀 따분해질 것이다. 6km면 짧은 거리가 아니다. 그래서 중간에 좀 시야 전환을 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해보인다.

 

그런 역할을 영월루와 영월공원이 해준다. 영월공원은 여주대교 옆 언덕배기에 조성을 했는데 그 정상부에 영월루가 자리잡고 있다. 멀리서보면 언덕배기에 누각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다. 그렇다. 영월루 위에 올라서면 높은 위치에서 남한강 일대를 조망할 수 있게된다. 강 건너편에 있는 신륵사 관광지 일대도 한 눈에 들어온다. 강변길에서 보는 풍광과는 또다른 이미지가 펼쳐지는 것이다.

 

영월공원에 들어서면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린 벽화가 눈길을 끈다. 그런데 이 벽화는 도자기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세계도자기엑스포2001>을 맞이하여 세종대왕의 업적을 도자기 벽화로 그려낸 것이다. 상당히 이색적인 설치물이었다. 참고로 <세계도자기엑스포2001>은 2001년도에 경기도 여주, 이천, 광주에서 개최되었다. 3곳 다 도자기와 관련이 많은 도시들이다.

 

세종대왕의 일대기를 둘러본 후 영월루에 올라섰다. 원래 영월루는 여주군청의 정문이었다. 1925년에 군청 건물을 새로지을 때 당시 군수였던 신현태가 현재의 자리로 이건을 했다. 이건이라고는 하지만 새로 지을 정도로 손을 많이봤다고 한다. 현재는 경기도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어떻게 누각이 군청의 정문이 될 수 있을까, 하고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나만 궁금하나...ㅋ

 

 

 

 

 

 

 

 

* 영월루

 

 

 

 

 

 

 

 

 

 

 

 

* 남한강: 마암 일대에서 바라본 모습. 강 건너편이 신륵사 관광지구다.

 

 

 

 

 

 

 

격이 높은 사찰같은 곳을 생각해보자. 본당이 있는 중심지 앞에 누각이 있을 것이다. 이런 누각은 통상 1층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2층은 법회 장소로 쓰인다. 이런 본당앞 누각을 보통 보제루라고 부른다. 하지만 꼭 그 이름으로만 쓰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유명한 부석사 무량수전 앞의 누각은 안양루다. 서울의 명찰 진관사에서는 홍제루라고 부른다.

 

이렇게 누각 형식으로 문을 낸 것을 두고 누문이라고 칭한다. 같은 누문이지만 사찰과 관청은 좀 달랐다. 관청은 문짝이 달려있어 시간이 되면 문을 닫았고, 그 앞에 횃불을 밝히고 포졸들이 서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하지만 사찰은 부처님의 가피가 만방에 펼쳐지듯이 문짝이 달리지 않고 항상 오픈되어 있다.

 

영월루가 자리잡고 있는 언덕배기 아래에는 '마암'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 마암의 진면목을 관찰하려면 강 건너편이나 여주대교 중간쯤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잔잔한 강물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마암은 풍류객들의 발걸음을 모으기에 충분할 정도로 매력적인 모습이다.

 

영월루를 내려 오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기의 탑을 볼 수 있다. 두 기가 나란히 있어 얼핏보면 쌍둥이탑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보면 서로 다른 외형을 가진 탑임을 알 수 있다. 뭐 눈썰미가 없는 분이면 좀 시간이 걸리려나...ㅋ

 

먼저 하리 삼층석탑을 살펴보자. 하리 삼층석탑은 보물 제92호로 지정됐는데 1958년 11월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높이가 3.7미터에 달하는 하리 삼층석탑은 신라시대 석탑 양식을 계승한 탑으로 고려 후기에 만들어졌다. 1층 탑신부가 날씬하고 길죽한 것이 특징인데 아쉽게도 상륜부는 완전히 멸실된 상태다.

 

하리 삼층석탑을 조사하다가 흥미로운 점을 하나 발견했다. 기단부를 두고 책마다 다른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두산백과>는 기단을 2층 기단으로 설명하고 있고, <답사여행의 길잡이>라는 책에서는 1층 기단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하리 삼층석탑은 2층기단이 될 수 없어보인다. 단층 기단의 석탑인 것이다. 석탑 앞에 설치된 설명문에도 1층 기단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그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이 잘못 기술된 것인가?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여간 역사트레킹을 하다보면 이렇게 어긋난 것을 찾아보는 재미도 생긴다.

 

바로 옆에 있는 창리 삼층석탑을 살펴보자. 창리 삼층석탑도 하리 삼층석탑과 함께 1958년 11월에 이곳으로 이전된다. 보물 제91호로 지정되어 있는 창리 삼층석탑이야말로 기단부가 2층으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이 탑은 신라 석탑 양식에서 벗어나 좀 더 독특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1층 기단을 굄돌이 받치고 있는데 이 굄돌들은 단일 석재가 아니라 여러개의 돌로 이루어져있다. 그래서 얼핏보면 그 부분이 금이 간 것처럼 보인다. 하리 삼층석탑처럼 창리 삼층석탑도 상륜부가 다 멸실됐다. 아쉽다.

 

두 개의 탑까지 봤으면 영월공원 탐방이 종료된다. 영월루에서 시원한 남한강변도 보고, 보물로 지정된 두 개의 탑도 볼 수 있는 영월공원... 여주를 방문하실 기회가 있으시면 꼭 한 번 가보셨으면 좋겠다. 후회하지 않으실 것이다. 입장료도 없다...ㅋ

 

 

 

 

 

 

* 두 개의 탑

 

 

 

 

 

 

 

* 남한강

 

 

 

 

 

 

 

 

 

 

 

 

* 낙산사 홍련암: 의상대에서 바라본 홍련암.

 

 

 

 

 

 

 

 

2021년 5월 20일 목요일 / 여행 2일차

 

어제는 밤 11시를 넘어 속초에 도착했으니 실질적인 여행의 시작은 이날부터였다. 이날 탐방한 곳은 양양에 있는 낙산사였다. 낙산사는 속초해수욕장에서 그리 멀지 않다. 시내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다. 속초에서 양양까지 가는 시내버스가 있다. 본격적인 탐방에 앞서 빗방울이 좀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 쯤이야.

 

일주문을 통과한 뒤 숲길이 나왔다. 소나무 숲길이었는데 습한 날씨 때문이었는지 솔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탐방로를 따라 걷다보면 거대한 규모의 낙산사와 마주하게 된다. 잘 정돈된 길, 수많은 참배객들... 이런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낙산사의 화려한 면모만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하지만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국내 유명 사찰중에 낙산사만큼 큰 부침이 많은 절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화재와 파괴, 약탈이 있었다. 그렇게 많은 곤경이 있었음에도 폐사가 안 된 것이 오히려 신기할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비교적 근래인 2005년까지 고초를 겪었을까나!

 

2005년도에 발생한 산불 때문에 낙산사가 전소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봤던 것이다. 강풍에 날라온 불씨가 화마로 변해 귀중한 가람들을 싹 다 태워버린 것이다. 당시 뉴스 화면으로 그 장면을 봤었는데 필자도 큰 충격을 받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 온 국민이 큰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었다.

 

 

 

 

 

 

* 해수관음입상

 

 

 

 

 

 

 

* 낙산사 가는길

 

 

 

 

 

 

 

 

671년(신라문무왕 11),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된 낙산사는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 유명한 곳이다. 낙산사일주문에는 '오봉산낙산사'라고 적혀있는데 이 오봉산이 낙산이라고도 불린다. 낙산은 샨크리스타어인 보타락가(補陀落伽)의 준말인데 관음보살이 정주하는 산이라고 한다. 낙산 이야기가 나왔으니 스리슬쩍 서울의 좌청룡인 낙산이 생각난다. 낙산사가 낙산(洛山)이고 서울의 좌청룡 낙산(駱山)이다. 한자가 다르다.

 

의상대사는 이곳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였고, 관음보살의 명에 따라 관음상을 빚게되는데 그것이 낙산사의 기원이 된다.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만나기 위한 과정을 보면 좀 의아할 정도다. 기도를 하는 중에 용궁의 무리와 하늘의 무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했고, 동해의 용이 솟아올라 여의주를 건네주었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낙산사가 3대 관음성지라면 이런 스토리텔링 정도는 품고있어도 상관없을 거 같다.

 

우리나라의 3대 관음성지는 강화군 석모도 보문사, 경남 남해군 보리암, 그리고 낙산사이다. 그러고보니 서해, 남해, 동해에 3대 관음성지가 있다. 이를 두고 더 정확히는 해수관음 성지라고 하는데 관음보살이 사는 곳이 바닷가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하여 우리나라의 관음성지도 해안가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사찰 탐방을 해보자. 낙산사의 중심인 원통보전과 그 앞에 있는 7층석탑을 살펴보자. 보시면 아시겠지만 원통보전은 근래에 새롭게 지은 건물이다. 2005년 산불로 인해 본당인 원통보전은 전소가 됐다. 하지만 빠르게 복구하여 2007년에 다시 복원을 하게 된다.

 

대화재가 휩쓸고갔지만 불행중 다행인 점도 있었다. 원통보전에 모셔져 있던 보물 제1326호 건칠관음보살좌상이 화마를 피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 건칠관음보살좌상은 인근에 있는 설악산 영혈사에서 모셔온 관음상이라고 한다.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고려 후기 양식을 잘 지니고 있다하여 2003년에 보물 1326호로 지정된다. 여기서 건칠은 옻나무 칠을 말한다.

 

원통보전 앞에는 7층 석탑이 우뚝 서 있다. 7층이라서 그런지 높이가 무려 6미터를 넘는다. 6미터 20센티다. 원통보전이 전소됐을 때 석탑도 고열로 인해 큰 충격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단단한 돌이기 때문에 그 원형이 훼손되지 않았다. 마치 거대한 폐사지에 우뚝 선 석탑들처럼 7층 석탑은 끝까지 낙산사를 지켰던 것이다. 7층 석탑은 애초 3층석탑으로 만들어졌다가 낙산사가 대대적으로 중창됐던 1467년(세조13)에 지금처럼 7층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3층을 7층으로 높였다는 것인데 참 특이한 경우다.

 

1468년 경에 낙산사는 대대적으로 중창된다. 그 1467년에 세조가 낙산사를 방문했는데 그에 대한 결과로 중수가 이루어진 것이다. 7층 석탑을 비롯하여 낙산사에는 그 때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원통보전을 둘러싸고 있는 별꽃무늬 담장과 홍예문이 바로 그것들이다. 별꽃무늬 담장은 처음에는 '원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기와와 진흙을 쌓아 올렸는데 담장 자체가 하나의 조형물처럼 보일 정도로 인상적이다.

 

담장이라고 하면 안과 밖을 나누는 분리의 의미인데 별꽃무늬 담장은 그 모습이 정겨워서 그런지 안과 밖을 서로 조화시켰다고나 할까? 물론 근래에 복원을 해서 너무 반듯한 모습이지만 도시의 공구리만 보다 정겨운 토담을 보니 정말 반갑더라. 별꽃무늬 담장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성곽의 문루가 연상되는 홍예문은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했을 때 절 입구에 만든 문이다. 홍예문은 26개의 큰 돌로 이루워졌는데 당시 강원도가 26개의 고을로 이루어졌고, 그에 맞게 각 고을에서 석재를 가져와 돌로 무지개문을 만들었다. 문루는 1963년에 만들어졌는데 대화재 당시에 타버렸고, 최근에 다시 복원을 했다. 홍예문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밖에도 세조와 관련된 문화재로 낙산사 동종이 있다. 1469년 예종 1년에 제작된 동종은 조선 초기 형식을 잘 담고 있어 보물 479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대화재 당시에 용해가 되어 문화재에서 지정해제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 참고로 예종은 세조의 둘째 아들인데 재위 기간이 불과 13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

 

이제 해수관음입상을 보러가자. 사실 많은 이들이 이 해수관음상을 뵈러 낙산사를 방문한다. 비교적 근래인 1977년에 세워진 관음상은 그 무게가 무려 270톤에 높이가 16미터에 달한다. 전라북도 익산의 채석장에서 가져온 석재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규모가 있다보니 만드는데만 5년이 걸렸다고 한다.

 

확트인 동해바다를 배경으로 우뚝하게 서 있는 관음상 앞에 서니 저절로 합장을 하게 됐다. 내륙쪽으로는 명산인 설악산이 보이고 관음상 주위로는 파도가 넘실대고 있으니 이 아름다운 풍광 자체만으로도 관음보살의 자비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필자도 자리를 깔고 삼배를 올렸다. 간절하게 기원을 하면서... 무슨 기원을 올렸을까?^^

 

이후 조선 후기에 세워진 해수관음공중사리탑(보물 제 1723호)과 홍련암, 의상대 탐방을 끝으로 낙산사 탐방을 종료했다. 홍련암과 의상대는 명승 제27호로 지정될 정도로 너무 유명하기에 놓치는 분들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해수관음공중사리탑은 메인 탐방로에서 살짝 벗어나 있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냥 지나치기에는 사리탑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다. 보물 찾기하듯 사리탑을 찾아보면 좋을 듯하다.

 

이렇게하여 낙산사 탐방은 종료가 됐다. 그냥 간단하게 스케치 형식으로 여행기를 작성하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또 분량이 넘쳤다. 하긴 낙산사를 그냥 단순하게 훑고 지나간다는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볼려면 제대로 보고 작성할려면 제대로 작성해야지!

 

 

 

 

 

 

* 원통보전과 7층석탑

 

 

 

 

 

 

 

 

* 원통보전

 

 

 

 

 

 

 

*7층석탑과 별꽃무늬 담장

 

 

 

 

 

* 해수관음상: 필자의 배낭이 인증샷을 대심해 줌.

 

 

 

 

 

 

 

* 낙산사: 2005년 화재 피해를 곱씹어 보는 전시장.

 

 

 

 

 

 

 

* 낙산사 홍예문

 

 

 

 

 

 

 

 

* 해수관음공증사리탑

 

 

 

 

 

 

 

 

 

 

 

 

5월 19일 목요일. 여행1일차

 

이날은 부처님오신날이었다. 부처님의 자비가 만방에 퍼지던 이날, 난 속초로 떠나는 심야버스에 몸을 실었다. 사진에서도 보이듯 난 야간에 속초 해수욕장 일대를 배회했다.

 

올 봄은 이상하리만큼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예 나쁜 일들만 생긴 것도 아니었다. 어려운 와중에 성북50플러스에서 강의를 할 수 있었다. 또 간간이 마이리얼트립을 통해서도 트레킹을 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의아할 정도로 만족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의무감으로 하고, 그렇게 시간을 떼운다는 느낌이었다.

 

거의 똑같은 강의 준비, 토씨 하나 정도가 다른 비스무리한 해설 등등... 매너리즘이라고 해야 하나? 강의가 그러니 생활 자체도 재미가 없지! 꼭 코로나 때문만도 아니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울증이었던 것 같다. 하여간 진이 빠질 정도로 당시 내 머리는 엉켜있었다. 이러다가는 숨이 넘어갈 거 같다는 생각이들었다.

 

그렇게 굴복할 수는 없는 법! 인생의 파도가 칠 때는 진짜 파도를 보러가야 한다. 그래서 심야 버스를 타고 속초 해수욕장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항상 짊어지고 다니는 낡은 배낭을 메고서...

 

그렇게 나의 강원도 여행이 다시 시작되었다.

 

 

 

 

 

 

 

 

 

 

 

 

 

 

 

 

5월 11일 화요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지난 8주간 진행되었던 성북50플러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의 마지막 강의(8강)가 실시된 날이었다. 마지막 강의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이다.

 

성북50플러스에서 진행했던 이번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은 좀 어렵게 잡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아시다시피 코로나의 여파로 오프라인 강의가 직접적인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기회였기에 좀 더 잘 하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발동이 안 걸렸다고나 할까?

 

강의 평가는 잘 나왔지만 스스로에게는 불만이었다. 내 자신에게 학점을 매기자면... B학점 정도 될까?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의 이동 노선은 이렇다.

 

홍제천 -> 세검정 -> 백사실계곡 -> 별서터 -> 능금마을 -> 북악스카이웨이 -> 북악팔각정 -> 성북동

 

백사실계곡은 가을이 가장 예쁘다. 하지만 여름날의 백사실계곡도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다. 전날 비가 와서 그런지 졸졸졸 계곡물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울창한 숲터널에서 피톤치드를 팍팍 맡다보니 몸이 확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사실 이 날은 좀 더웠다. 거의 30도에 육박할 정도로 직사광선이 내려쬐고 있었다. 하지만 전날 비가 내리고 해서 대기는 무척 맑았다. 가시거리가 좋아서 사진 찍기에도 딱이었다. 북악팔각정에서 북한산 일대의 사진을 찍으니 바로 일품 풍경 사진이 되더라.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은 무사히 종료가 됐다. 더불어 성북50플러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도 종강이 됐다. 사고없이 무사히 잘 완료가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종강은 했지만 우리들의 발걸음은 계속된다. 우리들은 앞으로도 계속 길을 걸을 것이다! 아주 힘차게!

 

 

 

 

 

 

 

 

 

 

 

 

 

 

 

 

 

 

5월 4일 화요일.

 

- 우르릉쾅쾅쉐쉐쉐

 

집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요란한 천둥번개가 내리쳤다. 성북50플러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일곱번째 강의가 실시된 날인데 날씨가 이걸 어쩌나!

 

7강은 아차산 역사트레킹이다. 이상스럽게 아차산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마다 비가 내렸다. 물론 맑은 날도 있었지만 그래도 비가 온 적이 더 많았다. 그래도 어쩌랴! 비가 와도 강의는 진행되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트레킹팀이 모였을 때는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하지만 불순한 날씨 때문에 세 분이나 결석을 하셨다. 이 길을 함께 걸으면 좋았을 것을... 아차산 역사트레킹의 이동순서는 이렇다.

 

아차산생태공원 -> 아차산성 -> 아차산보루군(정상) -> 긴고랑길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트레킹을 하는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아니다.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다. 아차산 코스는 정상부에서 그늘이 없는 개활지를 만난다. 그래서 직사광선을 그대로 맞아야 한다. 하지만 이날은 직사광선 걱정없이 아주 느긋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다른 등산객들도 별로 없었다. 아차산 코스는 서울둘레길 2코스에 속하는데 그 풍광이 아름다워 주중에도 사람들이 아주 많이다닌다. 주말에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 하지만 아침에 비가 와서 그랬는지 인적이 확 끊긴 느낌이었다. 또 평소에는 못보던 장면도 볼 수 있었다. 비가 온 후라 물안개가 피어났는데 그 광경이 아주 멋있었다.

 

- 우리가 아차산을 전세낸 거 같아요!

 

하행 코스인 긴고랑길에서 누군가 그렇게 말씀을 하셨다. 그렇다. 우리는 아차산을 전세낸 듯 마음껏 아차산을 즐겼다. 비 온 후, 신선함이 가득한 아차산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긴고랑길에서 그렇게 했는데 나무가 무성한 곳에서 크게 숨을 들이마시니 가슴이 확트이는 느낌이었다.

 

- 이렇게 좋은 곳에서 숨을 크게 쉬니까 우리 몸이 젊어지는 거 같지 않나요? 한 1년쯤 젊어진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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