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몬세라트: 돌산인 이곳에서 가우디는 큰 영감을 얻었다. 바르셀로나 인근에 위치함.

 

 

 

<재미난 스페인 8편> 5일 천하로 끝난 카탈루냐공화국

- 도대체 2017년에 카탈루냐에 무슨 일이?

 

스페인은 지역색이 강한 곳이다. 그래서 지방자치도 잘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카탈루냐는 지방자치를 뛰어넘어 스페인 중앙정부에서 독립을 하고자 한다. 마치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영국에서 분리돼 스코틀랜드 국가를 원하듯이, 카탈루냐 사람들은 독자적인 '카탈루냐 국가‘를 원하고 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카탈루냐 지역 일대를 여행하다보면 매우 정치적인 낙서들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 카탈루냐는 스페인이 아니다

- 스페인은 정치범을 붙잡고 있다

카탈루냐 사람들은 카탈루냐가 스페인 역사에 편입된 건 1700년대 이후였다고 주장한다. 불과 300여 년 전에는 독자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지역이기에 스페인 중앙지역인 카스티야와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역설한다.

 

 

 

* 바르셀로나: '스페인은 정치범을 붙잡고 있다'라는 낙서. 그걸 누군가가 지우고, '스페인 우선'이라는 내용으로 바꿔놓았다.

 

 

 

카탈루냐는 카탈란어라는 독자적인 언어가 있는데 예전에는 사용이 금지된 적이 있었다. 탄압이 가중될수록 그들의 카탈란어 사랑은 더 깊어갔다. 바르셀로나 인근 레우스(Reus) 출신인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도 카탈란어를 사랑했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1924년 9월이었다.

당시는 쿠데타로 집권한 프리모 데 리베라가 통치를 하던 독재정권 시기였는데 가우디는 카탈란어를 사용하다 경찰에 붙잡히게 된다. 경찰의 모욕과 탄압이 있었지만 가우디는 끝내 스페인어 사용을 거부했다. 카탈루냐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가우디의 굳은 심지가 돋보이는 사건이었다.

이런 흐름들은 실제적인 행위들로 도출됐다. 카탈루냐 공화국의 설립이 바로 그것이다. 역사적으로 카탈루냐 국가를 설립하려는 시도는 여러번 있었지만 번번이 좌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독립국가에 대한 열망은 꾸준히 발현되었고, 몇 해 전인 2017년에도 실행되기에 이른다.

2024년 8월 8일, 바르셀로나에서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일이 벌어졌다. 카를레스 푸지데몬(Carles Puigdemont)이라는 전 카탈루냐 자치정부 수반이 7년 만에 귀국했는데 깜쪽같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당시 푸지데몬은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카탈루냐를 위해 함께'라는 정당의 환영행사에 참여를 했었다. 이 행사에서 그는 카탈루냐 독립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하는 연설을 한다. 수많은 지지자들에 둘러싸여 연단에 오르고, 또 퇴장을 했다. 이후 준비된 자동차를 타고 모임장소에서 벗어났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가? 정치인이 연단에 올라 정치적인 발언을 하겠다는데...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푸지데몬은 여러 가지 혐의로 스페인 공안당국에 수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회합장소에서 벗어나 자택으로 간 것이 아니라 국경을 넘어 갔다. 수많은 지지자들이 블록 역할을 했고, 결국 그를 체포하기 위해 대기하던 경찰들은 허탕을 치고 만 것이다.

 

 

 

* 푸지데몬: 전 카탈루냐 자치정부 수반. 출처 Wikimedia Commons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스페인 중앙정부는 푸지데몬의 행동에 촉각을 세우게 됐는가? 2017년 10월이었다. 카탈루냐의 분리독립 여부를 묻는 주민투표가 있었고, 독립찬성으로 결과가 나온다. 이에 카탈루냐 국가가 선언됐고, 초대 국가수반으로 푸지데몬이 권좌에 오른다. 푸지데몬을 비롯한 독립파는 이를 카탈로냐 공화국(Republic of Catalonia)으로 칭했다.

바르셀로나를 수도로 삼은 카탈루냐공화국은 약 32만km²로 그 크기가 벨기에(약 30만km²) 보다 조금 더 크고, 인구는 약 700만 명 정도였다. 2022년 카탈루냐의 국내총생산(GDP)은 2,441억 달러로 2,558억 달러인 포르투갈에 좀 못 미치는 수준이다. 벨기에 정도의 땅 크기와 포르투갈 정도의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가 21세기에 출현을 했다면 유럽 역사가 새로 작성됐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결론을 알고 있다. 2017년에 등장한 카탈루냐공화국은 시작과 동시에 멸망했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카탈루냐공화국에 대해서 존재 자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더 이상할 정도다.

일련의 사태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알아보자. 분리독립을 가만히 보고 있을 중앙정부가 아니었다. 당시 스페인 총리였던 마리아노 라호이는 헌법을 발동하여 주동자였던 푸지데몬을 해임했다. 또한 반역죄와 배임 등의 죄목으로 수배령을 내렸다. 그는 자신의 고향을 등지고 벨기에로 망명하게 되고, 카탈로냐화국은 5일 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카탈루냐 공화국이 5일 천하로 끝난 후, 권력의 공백은 중앙정부가 메꾸게 된다. 스페인 중앙권력은 4개월 동안 까탈루냐를 직접 통치하게 된 것이다.

 

 

* 카탈루냐기: 카탈루냐어로 세녜라(Senyera)라고 부른다. 이 문양은 원래 아라곤 연합왕국의 표식이었다. 그래서 카탈루냐 뿐만 아니라 아라곤, 발렌시아 등 옛 아라곤 왕국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 에스텔라다(Estelada): 카탈루냐 독립세력들이 흔드는 깃발로 카탈루냐 민족주의를 상징한다. 비공식 깃발이다.

 

 

 

2017년 카탈루냐 독립 문제는 스페인을 넘어 전 유럽을 뒤흔들어 놓았던 일대 사건이었다. 푸지데몬의 망명, 중앙정부의 강경 대응 등으로 독립파들의 예봉은 꺾이게 된다. 하지만 그 불씨는 여전히 잠재해있었다.

7년이 흐른 2024년 8월, 푸지데몬은 자수를 하겠다는 조건으로 다시 카탈루냐 땅을 밟을 수 있게 됐다.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을 한 후 경찰에 연행되는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자수를 하지 않았고, 7년 전처럼 국경을 다시 넘어간 것이다.

분리독립은 경제문제와도 얽혀 있다. 만약 카탈루냐가 스페인의 다른 지역들보다 가난하다면? 물론 경제력 여부에 따라 독립운동의 향방이 결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돈이 다른 지역들보다 더 많이 걷히고 있다면 그 부분이 썩 내키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카탈루냐의 국내총생산(GDP)은 2022년 기준으로 스페인 전체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다. 이를 두고 분리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기여가 큼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는 그만큼의 혜택을 돌려주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스페인의 다른지역보다 더 많은 돈을 중앙정부에 보내지만 정작 카탈루냐로 돌아오는 재투자 비용은 그보다 더 적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손해를 보고 있다는 뜻이다.

 

 

 

* 사그리다파밀리아: 바르셀로나의 명물 사그리다파밀리아. 천재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를 했다.

 

 

 

이런 주장들은 경제위기와 맞물려 설득력을 얻게 됐다. 2010년경에 남부유럽에 경제위기가 닥치는데 해당되는 국가들의 앞 글자를 따니 PIGS가 됐다. 포르투갈(Portugal), 이탈리아(Italy), 그리스(Greece), 스페인(Spain). 필자가 다 좋아하는 국가들인데 어쩌다가 ‘돼지들’이라는 굴욕적인 멸칭을 얻게 됐을까... 어쨌든 이런 재정위기가 닥치자 카탈루냐 분리주의자들은 스페인 중앙정부의 무능을 왜 자신들이 짊어져야 하냐며 불만을 표출했다. 독립을 하여 독자적인 경제정책을 수행하면 더 잘 살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까지 2017년도에 있었던 카탈루냐공화국 사건을 중심으로 카탈루냐 문제에 대해 알아보았다. 지금이야 잠잠하지만 카탈루냐 문제는 언제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있다. 마치 경제위기가 언제든 다시 발생할 수 있는 것처럼...

남북이 갈린 분단국에 사는 이에게 카탈루냐 문제는 어떻게 다가올까? 굳이 누구의 편을 들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새겨진 감정은 있었다. 신기함!

 

 

 

 

* 카탈루냐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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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노스티아-산세바스티안: 아르굴산에서 바라본 시내와 콘차해변

 

 

<재미난 스페인 7편>

5억 명이 스페인어를 쓰고 있는데, 스페인어가 없다고?

명색히 필자가 역사트레킹 마스터 아닌가? 그래서인지 숲길트레킹을 무척 좋아한다. 겸사겸사 나무에 대한 지식을 넓히겠다고 숲학교에 등록한 적이 있었다.

"세상에 참나무는 없습니다. 딱 이게 참나무라고 찍어서 부를 수 있는 나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 전날에 참나무 장작으로 구운 삼겹살을 먹었는데... 그 말대로 하면 난 존재하지도 않는 나무로 고기를 구웠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말이 맞았다. 참나무라는 종은 없다. 참나무는 특정되는 나무가 아닌 참나무 종류를 모두 아우르는 통칭이다. 그룹을 연상하시면 좋을 듯싶다. 그룹명은 참나무이고, 보컬 갈참나무, 기타 굴참나무, 베이스 상수리나무, 드럼 졸참나무, 키보드 신갈나무, 퍼커션 떡갈나무... 여기서 언급된 여섯 나무를은 이른바 참나무 육형제라고 불린다. 그게 그 나무인 거 같아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분하기가 쉽지가 않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후였다. 스페인어가 배우고 싶어서 회화책도 사고, 동영상도 찾아보았다.

"세상에 스페인어는 없습니다. 애초에 스페인어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어요."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참나무 때처럼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동영상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골랐다.

현재 스페인어는 전세계 인구 중 약 5억명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다. 영어를 뛰어넘어 중국어 다음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다. 스페인 본국을 필두로 스페인의 옛 식민지였던 중남미 국가와 아프리카 적도에 있는 적도 기니 등 20개국이 사용을 한다. 참고로 적도 기니(Equatorial Guinea)는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1968년에 독립을 한다. 프랑스 식민지였다 1958년에 독립한 기니(Guinea)와는 구별되는 나라다. 적도 기니는 아프리카 주권국 중에서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스페인어는 미국에서도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히스패닉'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실텐데 히스패닉은 미국에서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주로 중남미 출신자들인데 그 수가 약 5천 만명이 넘는다. 그 수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스페인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마당에 스페인어가 없다고 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가!

 

 

 

* 도노스티아-산세바스티안: 바스크 이름인 도노스티아와 카스티야어인 산세바스티안이 병기됐다. 그나저나 맨홀 뚜껑이 사각형이다.

 

 

서기 711년, 북아프리카에 있던 이슬람 무어인들이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하였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 왕국은 무어인들의 무력 앞에 몰락하고 만다. 이후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고 불리는 국토회복운동이 1492년에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무려 800년이란 시간이 소요된다. 그 오랜기간 동안 이베리아반도 내에서는 여러 왕국들이 등장한다. 그 왕국들이 자리잡은 지역에서는 해당 지역의 색채가 강하게 묻어있는 언어가 분화, 발전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등장한 언어는 카스티야어,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 바스크어 등이다.

1479년, 이베리아반도 중앙에 위치한 카스티야왕국과 지금의 카탈루냐 지역에 위치한 아라곤왕국이 합쳐져 카스티야-아라곤 공동왕국이 형성된다. 이후 1492년, 마지막 이슬람 왕국이었던 그라나다 왕국이 멸망하면서 국토회복운동은 종료가 된다. 그해 콜롬버스는 신대륙을 찾아 돛을 올렸다.

스페인이 지금과 같이 통일된 형태를 갖춘 시기는 카를로스 1세(Carlos Ⅰ)가 즉위한 1516년 이후이다.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겸했는데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칼 5세(Karl Ⅴ)로 불렸다. 카를로스 1세의 아들은 그 유명한 펠리페 2세다.

카스티야왕국의 주도로 통일된 스페인왕국이 들어서자 자연스럽게 언어도 카스티야어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스페인이 어떤 나라인가? 그 어떤 유럽 국가들보다도 지역색이 강한 나라가 아니던가? 카스티야로 대변되는 중앙권력에 대한 반대 움직임은 이후로도 계속된다. 크게 4대 언어 권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권역은 민족적인 분포와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카스티야어: 약 74%

카탈루냐어: 12%

갈리시아어: 8%

바스크어: 1%

기타

지금은 중심어이지만 카스티야어도 예전에는 북부 지방의 방언 중 하나였다. 이후 12세기 경, 스페인의 중북부 지역에 카스티야-레온왕국이 들어서게 됐는데 그때 궁중언어로 사용됐다. 15세기 후반 카스티야왕국은 이후 아라곤왕국과 병합했고, 카스티야어는 명실상부한 스페인의 가장 중심이되는 언어로 자리매김한다.

 

 

 

* 사그라다 파밀리아: 건축가 가우디가 설계한 성가족성당(사그라다 파밀리아). 바르셀로나의 대표적인 건물이다.

 

 

 

카탈란어라고도 불리는 카탈루냐어는 동북쪽에 위치한 카탈루냐, 발렌시아, 발레아레스 제도에서 사용되고 있다. 동북쪽의 중심 도시는 그 유명한 바르셀로나이다. 발렌시아는 바르셀로나에서 남쪽으로 약 35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발레아레스 제도는 지중해에 있는 섬들인데 중심도시는 팔마이다. 발렌시아에서 약 280km 정도 떨어져 있다.

카탈루냐(Cataluña)는 프랑스와 근접해있어서 그런지 역사적으로 공유되는 점들이 꽤 많다. 언어도 그렇다. 카탈루냐어는 남부 프랑스에서 사용되는 프로방스어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카탈루냐어를 배운 이들 중에는 카탈루냐어가 카스티야어와 프랑스어를 섞어찌개를 한거 같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한다. 한편 위에 언급된 지역들 이외에도 피레네산맥에 있는 작은 나라 안도라도 카탈루냐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가예고(gallego)라고 불리는 갈리시아어는 이베리아반도 서북쪽에 위치한 갈리시아(Galicia) 지방에서 사용되는 언어다. 갈리시아는 포르투갈의 바로 위쪽에 위치해있는데 포르투갈의 건국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포르투갈이 갈리시아 백작령에서부터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갈리시아어는 포르투갈어의 조상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에우스카라(euskara)라고 불리는 바스크어는 바스크(Basque) 지방에서 사용된다. 바스크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에 있는 피레네 산맥 서쪽에 위치하는데 스페인은 물론 프랑스에도 바스크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유럽 지역은 보통 라틴어의 영향을 받아 로망스어군을 이룬다. 카스티야어, 카탈루냐어, 갈리시아어들 모두 로망스어군이다. 프랑스어, 포르투갈어도 로망스어군에 속한다. 하지만 바스크어는 로망스어군이 아닌 독자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다. 로망스어군이 사방으로 둘러쌓여 있지만 자신만의 고유성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를 두고 언어학상으로는 고립어라고 부른다.

바스크인들은 그들이 즐겨 쓰는 독특한 외형의 바스크베레모처럼 자신들만의 고유한 정체성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자부심의 토대를 이루는 것 중 하나가 바스크어이이다.

 

 

 

* 바르셀로나 지하철역: 카탈루냐광장역(plaça de catalunya). c자가 아닌 ç자다. 아래에 작은 갈고리가 달렸는데 이걸 두고 '세디유'라고 부른다. 발음이 〔프라카〕가 아닌 〔프라사〕가 된다.

 

 

 

여기서 각 언어를 비교해보자.

영어: hello / 카스티야어 hola / 카탈로냐어 hola / 갈리시아어 ola / 바스크어 kaixo

영어: plaza / 카스티야어 plaza / 카탈로냐어 plaÇa / 갈리시아 cadrado / 바스크 plaza

영어: see you later / 카스티야어 hasta luego / 카탈로냐어 fins després / 갈리시아어 vémonos despois / 바스크어 gero arte

영어: please / 카스티야어 por favor / 카탈로냐어 si us plau / 갈리시아어 por favor / 바스크어 mesedez

영어: how much? / 카스티야어 ¿Cuánto? / 카탈로냐어 quant? / 갈리시아어 canto? / 바스크어 zenbat?

영어: cheers! / 카스티야어 ¡salud! / 카탈로냐어 salut! / 갈리시아어 saude! / 바스크어 topa!

영어: thank you / 카스티야어 gracias / 카탈로냐어 gracies / 갈리시아어 gracias / 바스크어 eskerrik asko

다른 언어보다도 바스크어가 확실히 두드러지게 구별된다. 한편 카스티야어에서 의문문과 감탄문을 한 번 보자. ¡salud!(건배!), ¿Cuánto?(얼마에요?). 다른 언어와 달리 거꾸로 뒤집어져 있는 느낌표와 물음표를 앞에 하나 더 써주어야 한다. 그래야 문장이 완성된다. 그나저나 건배 너무 많이 하지 말자. 돈이 너무 많이 나온다.

이런 지역 언어들은 1978년에 개정된 헌법에 따라 카스티야어와 함께 공식적인 위치를 부여받는다. 지도나 도로명 같은 공공문서에 카스티야어와 각 지역어가 동시에 기재된다. 예를 들어 바스크 지역에 있는 도노스티아(Donostia)라는 도시는 산세바스티안(San Sebastián)이라는 명칭을 동시에 기재한다. 도노스티아가 바스크어고, 산세바스티안이 카스티야 명칭이다.

앞서 참나무 육형제처럼 스페인의 지역어를 그룹으로 빗대서 생각해봤다. 리더는 카스티야어일 것이다. 그런데 나머지 멤버들이 만만치가 않다. 불화설이 계속나오고, 그룹을 탈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멤버도 있을 정도다. 리더 입장에서는 꽤 골치가 아플 것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내가 스페인어, 정확히는 카스티야어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 하나를 써본다.

¡yo soy peregrino!(나는 순례자입니다!)

종교, 철학을 떠나 우리는 모두 자신의 인생길에 순례자가 아니던가!

 

 

 

 

* 스페인의 지역어 분포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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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세타평원: 저런 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재미난 스페인 6편> 메세타평원

스페인 한복판에 탁자 고원이 있다고?

 

"오! 이 안개 좀 봐요. 엄청 짙어요."

"좀 음산하기까지 하네요. 한국 안개는 애교에요, 애교!"

짙은 안개가 너무나 자욱했다.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한기까지 파고드는 느낌이드니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한국에서 봤던 낭만적인(?) 안개하고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안개였다.

메세타고원(Meseta).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순례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마주쳐야 할 고원지대이다. 가도가도 끝이 없어보이는 드넓은 평야가 순례객들의 눈 앞에 펼쳐진다. 워낙 광활해서 한국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지평선을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렇게 광대한 평야가 펼쳐지니 시야는 확 트여서 좋다. 하지만 발걸음이 좀 위축된다.

메세타에 대한 악명(?)이 워낙 자자해서 그런 것이다. 지형 자체는 평평하니 체력적으로 힘들지는 않다. 하지만 그늘도 없는 평야를 신물이 날 정도로 걸어야 하니 정말 고역일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서 마을까지 거리도 꽤나 멀어서 밥 시간에 맞춰 식당에 들어가기가 정말 어려웠다. 그래서 메세타 구간에서는 꼭 도시락을 챙겨야했는데 문제는 걸터앉아 먹을만한 곳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벤치나 쉼터같은 휴식공간도 부족하다보니 거의 스탠딩으로 빵을 뜯어 먹었었다.

그 광활한 평야에 홀로 서서 빵을 뜯어먹으니 이것이 눈물 젖은 빵인가? 이때 눈치없는 매 한 마리가 '휘~' 소리를 내며 필자의 머리 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이걸 뺏어먹으려고? 빼앗길 수는 없지, 눈물 젖은 빵치고는 맛났으니까...

메세타에 대해서 더 알아보기 전에 간단한 스페인 회화를 한 번 해보자. 식당에서 주문을 할 때다.

A: ¿Tiene mesas?(띠에네 메사스: 테이블 있어요?)

B: Sí, ¿Cuantas personas?(시, 꾸안따스 페르소나스?: 네, 몇 명이세요?)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은 페르소나(사람)의 복수형인 페르소나스에 눈길이 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메세타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이다. A가 테이블이 있냐고 묻는데 mesas라고 말한다. 스페인어로 테이블을 mesa라고 부르는데 여기서는 복수형인 mesas라고 쓰고 있다. 메세타(meseta)는 테이블, 탁자를 뜻하는 mesa가 변형된 형태다. 한마디로 메세타 평원은 일명 '테이블 평원'인 것이다.

 

  

 

* 안개낀 메세타평원: 싸늘함이 전해진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스페인어라고 칭하는 언어는 까스띠야어다. 카스티야는 수도 마드리드를 중심으로한, 이베리아반도 중앙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카스티야어를 사용한다. 이에 비해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한 카탈탈루냐 지역은 카딸란어라는 지역어를 카스티야어와 함께 공용어로 사용한다. 이렇게 해당 지역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또 있다. 피레네산맥 부근에 위치한 바스크, 북서쪽에 자리잡은 갈리시아 등이다. 스페인이 워낙 지역색이 강하다보니 이렇게 각 지역의 지역어도 공식언어로 대접받고 있다.

메세타는 스페인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는데 그 넓이가 210,000km2 에 달한다. 한반도가 약 230,000km2이니 그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는데 스페인의 3/4 정도가 메세타에 속할 정도다. 이베리아반도 전체로 확장해보면 2/3가 된다.

고원이라는 명칭답게 평균고도는 약 660m로 꽤 높은 편이다. 한반도만한 면적의 고원지대가, 그것도 해발 600미터가 넘고 있으니 스페인의 평균 해발고도는 꽤 높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유럽국가들 중에서 스위스 다음으로 스페인이 해발고도가 가장 높다.

메세타는 서쪽을 제외한 동쪽, 남쪽, 북쪽이 모두 큰 산맥으로 둘러쌓여 있다. 동쪽에는 이베리코(Ibérico), 북쪽에는 칸타브리카(Cantábrica) 산맥이 두르고 있고, 남쪽에는 2중 장벽 형식으로 모레나(Morena)산맥과 베티카스(Béticas)산맥이 자리잡고 있다.

이베리코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몬카요(Moncayo / 해발 2,315미터), 칸타브리카 산맥에서는 토레세레도(Torre Cerredo / 해발 2,650미터), 모레나산맥에서는 바누에라스(Bañuelas / 해발 1,332미터)이다.

모레나와 함께 남쪽에 있는 베티카스산맥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는 물아센(Mulhacén)인데 그 높이가 무려 3,482미터에 달한다. 그렇다. 물아센은 이베리아반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베티카스산맥은 지맥 개념으로 시에라네바다산맥을 거느리고 있는데 물아센이 그 시에라네바다산맥에 위치해 있다. 시에라네바다산맥은 알함브라 궁전으로 유명한 그라나다(Granada)의 배후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그라나다에서 물아센이 가깝다는 것이다. 그라나다만큼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론다(Ronda)도 베티카스산맥의 서쪽 지역에 자리잡고 있다.

 

 

 

* 메세타평원: 안개 속의 돌다리. 역설적으로 안개와 어울리는 모습이다.

 

 

 

 

한편 메세타의 중심부에도 중앙(Central)산맥이 무려 600km에 걸쳐 동서 횡축으로 놓여져 있다. 중앙산맥은 국경을 넘어 포르투갈 동쪽지역까지 뻗어 있다. 이 중앙 산맥을 기준으로 메세타는 북쪽 메세타와 남쪽 메세타로 나뉜다. 카스티야의 행정구역도 나눠진다. 메세타 북쪽은 카스티야이레온(Castilla y León), 남쪽은 카스티야라만차(Castilla-La Mancha)로 분리된다.

외형적으로보면 평균 고도가 600미터에 달하는 그 자체로 고지대인 메세타를, 그보다 더 높은 산맥들이 담장을 치듯 두르고 있는 셈이다. 아직까지 이해가 잘 안 되신다면 강원도 양구군의 펀치볼 지형을 연상하시면 좋을 듯싶다. 펀치볼은 해발고도가 400~500미터 위치에 있는데 그 주위를 대암산, 도솔산, 대우산, 가칠봉 등의 1,000미터가 넘는 산들이 두르고 있다. 차이점은 메세타가 서쪽이 트여있는 형태라면 펀치볼은 동서남북이 다 둘러진 형태다.

수박 화채를 해먹기 좋은 둥그스러운 그릇을 영어로 펀치볼(Punchbowl)이라고 하는데 그곳 지형이 펀치볼처럼 생겼다하여 그렇게 이름이 불려진 것이다. 한국사람들이 붙인건 아니고 한국전쟁 때 양구에 주둔한 미군들에 의해 붙여졌다.

서쪽이 트여있는 지형이라 스페인의 주요 강들은 서쪽인 포르투갈 방향이나 남쪽으로 흐른다. 포르투로 흐르는 두에로강, 리스본으로 흐르는 타호강,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남쪽 국경을 형성하는 과디아나강, 스페인 남부를 흐르는 과달키비르강. 모두 다 대서양으로 흘러들어간다. 단 에브로강은 동쪽인 카탈루냐 지방으로 흘러 지중해가 된다.

아시다시피 스페인의 여름은 정말 뜨겁다. 당연히 스페인의 2/3를 차지하고 있는 메세타도 뜨겁다. 또한 건조하다. 하지만 겨울은 추운 편이다. 즉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크다는 뜻이다. 또한 지대 자체가 높다보니 겨울에는 짙은 안개가 매일같이 끼는 것이다. 필자가 순례길을 겨울에 많이 가서 그랬나? 메세타 구간에서는 거의 안개 속을 헤치며 걸었었다.

메세타지역은 인구가 희박한터라 마을들도 띄엄띄엄있다. 오랜시간 안개 속을 헤매며 외롭게 순례길을 걷는다고 생각해보라. 쉽게 발걸음이 안 떨어질 거다. 그래서 어떤 순례자들은 산티아고 순례길의 본 노선인 프랑스길에서 벗어나 지선인 북쪽길로 이동하기도 한다. 어떤이는 아예 버스나 기차로 메세타 구간을 점핑하기도 한다.

필자도 메세타를 겪어본 사람으로서 그 순례자들이 좀 이해가 된다. 하지만 안개 속을 헤치며 당당하게 걷는 것도 순례길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순례길에서 메세타 빼먹으면 재미없지!

 

 

 

* 메세타평원

 

 

 

 

* 메세타평원: 안개가 구름처럼 깔려있다.

 

 

 

 

 

* 지도: 메세타평원을 타나냄. 메세타는 표시된 지역보다 더 넓음. 박스처리로 대략적인 위치를 표시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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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몬세라트: 쪽에 보이는 건물은 성모 마리아 수도원(Abadia de Montserrat)이다.

 

 

 

☞ 엄청 더웠던 지난 여름, 저는 유럽에 있었습니다. 2024년 6월 8일부터 8월 14일까지, 약 67일간 많은 나라를 탐방했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안도라, 모로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크로아티아, 헝가리, 튀르키에...

애초에는 포르투갈 순례길을 약 25일 정도 걷고, 나머지 기간을 배낭여행을 이어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름철 남유럽의 더위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일정을 다 배낭여행으로 소화했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도 여행의 묘미겠지요.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펜으로 노트에 적기도 했고, 스마트폰 메모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본 포스팅은 그 여행일지를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재밌지는 않습니다. 또한 가이드북 수준의 디테일한 정보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몬세라트

 

 

 

<핫한 유럽여행 5편> 돌산의 기운이 팍팍 느껴지네! _몬세라토

2024년 6월 14일 금요일: 7일차, 맑음

전날 가우디의 생가인 레우스를 방문한 후 바르셀로나 몬주익 부근에 있는 숙소에 체크인 했다. 역시 바르셀로나는 바르셀로나다. 무슨넘의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지! 그 사람들의 대다수가 관광객들이다. 그래서인지 숙소 가격이 널뛰기를 하더라.

냄새나는 군대식 도미토리 베드 하나가 35유로를 받더라. 우리나라 돈으로 약 5만 2천원 정도다. 칸막이가 있는 벙커 베드도 아니고... 한 20유로를 예상했는데...

분노를 삼키며 몬세라트로 향했다. 몬세라트는 바르셀로나에서 북서쪽으로 약 60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데 이곳으로 가려면 교외선 전철을 탄 후, 다시 산악열차로 갈아타야 한다.

좀 복잡할 수 있지만 외곽노선과 산악열차를 조합해서 구매할 수 있어 그리 어렵지 않게 티켓팅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안내인들이 있어 티켓 구매를 도와줬다.

몬세라트는 한국말로 직역하자면 '세라트 산'이다. 스페인도 산이 많다. 피레네 산맥, 시에라네바다 산맥 등등...

몬세라트는 바르셀로나 여행의 필수 코스 같은 곳이다. 어쩌면 몬세라트는 한국 사람들한테 가장 유명한 스페인 산이 아닐까 한다. 그만큼 한국사람들이 바르셀로나를 많이 방문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난 6년 전 바르셀로나에 왔을 때 이곳을 지나쳤다. 그래서 이번 바르셀로나 탐방의 핵심을 몬세라트로 정하게 됐다.

산악열차를 타고 몬세라트역에 딱~하고 내리면, 둥그스름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진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얼핏보면 북한산의 인수봉 여럿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다. 물론 우리 인수봉이 더 이쁘게 생겼다~^^

몬세라트에는 성모 마리아 수도원이 있다. 깎아질듯한 절벽 위에 세워져 있는데 산 봉우리들과 어우러진 모습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이런 모습 때문인지 몬세라트는 가우디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옥수수 같은 몬세라트의 봉우리들이 바르셀로나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에 구현된 것이다.

전망대에서 왼쪽을 바라보니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시설물이 있고 그 아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국기봉인가? 아니다. 십자가 탑이었다. 그 위로도 계속 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임도 같은 길이었는데 약 30분은 더 올라가야 했다. 거기가 푸니풀라 종착점이 있다. 푸니쿨라는 산악열차와는 별개로 운영되는데 몬세라트의 윗부분까지 운행한다.

날씨가 화창해서 사진이 정말 잘 찍혔다. 하지만 정말 더웠다. 평소 때 같으면 걸어올라갔겠지만

이번에는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가기로 했다. 편도 약 11유로... 돈 벌레들! 푸니쿨라 타고 올라가니 더 멋진 풍광이 펼쳐졌다. 돈값을 하는 듯했다. 올라가지 않았으면 후회했을 빤헸다.

이렇게 멋진 곳이다보니 가우디가 몬세라트에서 영감을 얻게 됐던 것이다. 나도 이곳에서 기를 받은 느낌이다. 몬세라트의 돌산의 기운이 내게 확 다가오는 듯했다! 이제 멋진 결과물만 생산하면 되는건가!

ps. 우연히 주차장 아랫쪽을 걷다가 숲길 산책로에 진입하게 됐답니다. 몬세라트에 좋은 숲길이 있더라고요. 순례길하고도 연결되기도 하고요. 하여간 돌산의 기운도 받고 숲길도 알게 되서 참 좋았습니다.

 

 

 

* 몬세라트: 중앙에 산악열차 궤도가 보인다.

 

 

 

* 산 미구엘 철십자가 전망대(Creu de Sant Miquel): 또다른 풍광이 펼쳐진다.

 

 

 

 

 

* 몬세라트: 이렇게 천하의 절경이니 가우디가 좋아할 수밖에!

 

 

 

 

#몬세라트

#몬세라트수도원

#스페인여행

#바르셀로나근교여행

#재미난스페인

 

 

 

* 가우디: 가우디의 작업실을 복제했다. 가우디 기념관.

 

 

 

<핫한 유럽여행 4편> 어라? 가우디 생가가 이것밖에 안 돼? _레우스

☞ 엄청 더웠던 지난 여름, 저는 유럽에 있었습니다. 2024년 6월 8일부터 8월 14일까지, 약 67일간 많은 나라를 탐방했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안도라, 모로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크로아티아, 헝가리, 튀르키에...

애초에는 포르투갈 순례길을 약 25일 정도 걷고, 나머지 기간을 배낭여행을 이어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름철 남유럽의 더위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일정을 다 배낭여행으로 소화했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도 여행의 묘미겠지요.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펜으로 노트에 적기도 했고, 스마트폰 메모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본 포스팅은 그 여행일지를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재밌지는 않습니다. 또한 가이드북 수준의 디테일한 정보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프림장군 기마상(Estatua del General Prim): 프림 광장에 있다. 프림장군은 카탈루냐를 대표하는 진보적 군인으로 평가받는다. 남북전쟁 당시 링컨을 지지했으며, 크림 전쟁에서도 활동을 했다.

 

 

2024년 6월 13일 목요일: 6일차, 맑음

건축가 가우디를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건축에 문외한이라도 가우디가 설계한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대해서는 한 번쯤 들어보셨을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의 미학을 건축에 담은 건축가 가우디!

그런 가우디의 고향을 다녀왔다. 언뜻 가우디의 고향이 바르셀로나라고 생각하겠지만 그의 생가는 레우스(Reus)라는 곳에 있다. 레우스는 바르셀로나에서 남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져있는데 수도교가 있는 타라고나의 바로 옆동네다. 그래서 레우스와 타라고나, 두 도시는 시내버스값 정도로 오갈 수 있다.

레우스 기차역에서 내려 대성당 방향으로 이동했다. 중심지역인 메르카달광장(Plaça del Mercadal)에 다다르니 카사나바스라는 무척 인상적인 건물이 눈에 띈다. 그래 가우디의 생가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하지만 카사나바스는 가우디의 생가가 아니란다. 조금 뒤편에 박물관과 안내소(Gaudí Museum & Tourist Office)가 있기에 가서 또 물어봤다. 여기가 가우디 생가인가요?

또 아니란다. 그럼 도대체 가우디 생가는 어디란 말인가? 안내소에 문의하니 생가가 표시된 지도 한 장을 주었다. 그러면서 가봐야 별거 없다는... 말을 했다. 가보니 진짜 별거 없었다. 초라했다. 현재 개인 소유의 집으로 그냥 입간판만 세워져 있던 것이다. 입간판도 없었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서울 인왕산 수성동계곡 아래에 가면, 윤동주 시인의 하숙집이 있다. 그런데 그곳도 그냥 입간판만 붙어 있다. 개인 소유의 다세대 주택이라 당연히 출입을 할 수가 없다. 오히려 윤동주 하숙집이 외관상으로는 더 나아보일 정도로 가우디 생가는 방치되어 있었다.

가우디 생가라는 명칭의 끌림이 아쉬움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레우스에 온 김에 발자취를 남겨야할 거 같아 가우디 박물관을 방문했다. 11유로(약 1만7천원)를 주고 티켓팅을 했다. 오디오 가이드가 포함됐는데... 한국어는 없고 영어로 된 걸 제공받았다. 그 영어로 된 걸 다 알아...들었냐?ㅋ

전시는 좋았다. 전체적으로 가우디의 건축철학을 엿볼 수 있는 전시였다. 하지만 입장료가 다소 비싼 느낌이었다. 빨리 보면 10분 안에 다 볼 수 있을 정도로 공간 자체가 넓지 않았다.

그럼에도 인상적인 곳이 있었다. 가우디의 작업실을 복제해서 만든 코너였다. 작업실 한켠에 때묻은 침대도 놓여있었다. 참 소박하고 검소한 공간이었다. 작고 소박한 공간에서도 대작이 나왔던 것이다.

내 작업공간도 작은 밥상인데 대작이 나올 수 있는 거야?ㅋ

ps. 사그리다 파밀리아가 2026년에 완공된다는데... 스페인넘들을 믿으십니까?ㅋ

 

 

 

* 카사나바스: 1908년에 완공된 건물로 실내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현란한 기둥으로 장식된 클러스터가 인상적인 건물이다. 가우디가 설계한 것은 아니다. 루이스 도메네츠라는 건축가가 설계했다.

 

 

 

* 레우스 대성당

 

 

 

* 메르카달광장: 왼쪽 사각형 건물이 가우디 기념관이다.

 

 

 

* 가우디 생가: 오른쪽 갈색문이 출입문이다. 개인 소유 건물이라 출입할 수가 없다.

 

 

 

 

* 타라고나 수도교

 

 

<핫한 유럽여행 3편> 숲 속에 숨어 있는 로마 수도교_ 타라고나

☞ 엄청 더웠던 지난 여름, 저는 유럽에 있었습니다. 2024년 6월 8일부터 8월 14일까지, 약 67일간 많은 나라를 탐방했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안도라, 모로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크로아티아, 헝가리, 튀르키에...

애초에는 포르투갈 순례길을 약 25일 정도 걷고, 나머지 기간을 배낭여행을 이어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름철 남유럽의 더위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일정을 다 배낭여행으로 소화했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도 여행의 묘미겠지요.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펜으로 노트에 적기도 했고, 스마트폰 메모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본 포스팅은 그 여행일지를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재밌지는 않습니다. 또한 가이드북 수준의 디테일한 정보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수도교: 수도교를 건설할 때의 상상도. 거대한 기중기를 이용하여 돌을 날랐다.

 

 

2024년 6월 12일 수요일: 5일차, 맑음

전날인 11일, 피레네 산맥에 있는 푸이그세르다에서 바로셀로나를 거쳐 타라고나(Tarragona)로 이동했다. 아직 본격적인 휴가 기간이 아님에도도 바로셀로나에는 만만한 객실이 없었다. 그래서 바로셀로나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타라고나로 바로 이동했다. 타라고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져 있다.

바닷가에 접해 있는 타라고나는 이베리아반도에 정착한 로마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로 바르셀로나보다도 더 오래된 유서 깊은 곳이다. 옛 로마인들의 도시답게 타라고나에도 수도교가 있다. 수도교는 말 그대로 물이 흐르는 다리다. 용수 공급을 중시했던 로마는 점령지역 곳곳에 수도교를 건설했다. 그 중 하나인 타라고나 수도교를 찾아갔다.

타라고나 수도교는 페레레스 수도교가 정식 명칭인데 그 모습을 진귀하게 여긴 옛 사람들이 악마(The Ferreres Aqueduct, Pont del Diable) 수도교라고 별칭을 붙였다.

타라고나 중심가에서 수도교까지는 약 4km정도 떨어져 있다. 걸어갈만 하지만 그냥 시내버스를 탔다. 1.6유로(약 2300원). 버스 기사에게 현금박치기를 했다.

악마라는 명칭이 걸맞지 않게 수도교의 모습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수도교는 자연공원 안에 있었던터라 도심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세고비아 수도교하고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세고비아 수도교가 도심 구간을 걷다가 만난다면 타라고사 수도교는 숲길을 걷다가 딱~하고 만나게 된다.

타라고나 수도교는 당연히 그 기능이 정지됐다. 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길은 끊어졌지만 수도교가 워낙 튼튼한터라 그 위로 물 대신 사람이 다닐 수 있게 정비해 놓았다. 2천년 전 로마인들이 만든 건축물 위를 직접 걸어보았다. 고대인들이 만든 건축물 위를 넘나드는 호사를 누리다니!

수도교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또다른 장관이었다. 이렇게 수도교를 건널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된 건 이제 타라고나 시민들은 상수도를 끌어다 마시기 때문이다.

 

 

 

* 타라고나 수도교: 물길은 끊겼지만 그 위로 사람이 보행할 수 있다.

 

 

 

 

* 타라고나 수도교: 사진에서 보듯 사람들이 건너갈 수 있다.

 

 

 

수도교 탐방을 마친후 주변을 산책했다. 우리나라의 임도 같은 길이 순환형으로 되어 있어 걷기에 딱 좋았다. 그렇게 둘러보다 독특한 기념물을 만났다. 1811년의 영웅들(Monument als herois del 1811)이라는 조형탑이었다.

1811년에 나폴레옹 군대가 타라고나를 포위했는데 그 사건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리는 조형물이었다. 숲 속에 이런 조형물이 있다는 것이 무척 진기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이 일대가 매우 중요한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수도교 탐방을 마치고 해변가에 있는 로마시대 원형경기장 일대를 둘러보았다. 지중해 옆에 로마시대 유적지라... 눈이 호강했다. 바다와 어우러진 로마 유적이라! 타라고나는 곳곳이 다 명소인 듯싶었다.

ps. 유럽의 해수욕장들은 아주 시원시원하더라고요.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랐다는...ㅋ

 

 

 

* 1811년 영웅들 기념비(Monument als herois del 1811): 나폴레옹 군대의 타라고나 포위 공격을 막아낸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 타라고나 성벽: 로마시대 만들어진 도시성벽임. 성벽 안으로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다.

 

 

 

* 타라고나 원형경기장: 로마 원형경기장. 경기장 바로 옆이 지중해다.

 

 

 

* 타라고나 원형경기장

 

 

 

 

 

 

* 이비아 도심: 이비아성에서 바라본 모습

 

 

 

<핫한 유럽여행 2편> 왜 스페인 땅이 프랑스 영토에 있지?

☞ 엄청 더웠던 지난 여름, 저는 유럽에 있었습니다. 2024년 6월 8일부터 8월 14일까지, 약 67일간 많은 나라를 탐방했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안도라, 모로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크로아티아, 헝가리, 튀르키에...

애초에는 포르투갈 순례길을 약 25일 정도 걷고, 나머지 기간을 배낭여행을 이어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름철 남유럽의 더위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일정을 다 배낭여행으로 소화했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도 여행의 묘미겠지요.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펜으로 노트에 적기도 했고, 스마트폰 메모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본 포스팅은 그 여행일지를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재밌지는 않습니다. 또한 가이드북 수준의 디테일한 정보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성모천사성당(Church of Our Lady of the Angels)과 베르나드타워(Bernard So Tower): 성당과 타워는 인접해있지만 별개의 건물이다. 타워는 감옥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2024년 6월 10일 월요일: 3일차, 비

피레네 산맥에 자리잡은 작은 나라, 안도라에서 1박을 했다. 피레네에서 하룻밤을 보냈더니 얼굴에 생기가...?

이날은 이비아(Llivia)라는 곳을 탐방했다. 리비아? 북아프리카에 있는? 아니다. 이비아다. 그래도 안도라는 어찌해서 들어봤을테지만 이비아는 처음 들어본 분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비아는 안도라에서 동쪽으로 약 50킬로 정도 떨어져 있다. 피레네산맥 동쪽 부분에 자리잡고 있다.

그럼 그 낯선 이비아에는 뭐하러 갔는가? 이비아의 독특한 위치 때문에 간 것이다. 가기가 쉽지 않은 곳인지를 알기에 일부러 여행 초기에 배치를 해서 찾아간 것이다.

이비아는 프랑스 영토 안에 있는 스페인 땅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적절한 예일지 모르겠지만... 바티칸을 생각해보시라! 이탈리아 로마에 바티칸이 둘러싸여 있지 않은가. 어쨌든 스페인에서 이비아로 가려면 프랑스 땅을 약 2킬로 정도 거쳐가야 한다. 이걸 두고 고립영토라고 부른다. 이게 참 재밌는게 어쨌든 국경을 넘는거라 스마트폰 통신사도 달라지게 된다.

안도라에서 스페인의 라세우두르젤(La Seu d'Urgell), 프이그세르다(Puigcerdà)라는 도시를 거쳐 이비아에 도착했다.

안도라공국 -> 라세우두르젤(스페인) -> 프이그세르다(스페인) -> 프랑스땅 -> 이비아(스페인)

뭐 이렇게 정리를 하니 좀 복잡해보인다. 하지만 거리가 그리 길지는 않았다. 약 70km 정도니까. 이비아는 부메랑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는데 크기가 약 12.9 km2 정도다. 서울의 금천구가 13km2, 동대문구가 14.2km2니 참고하시길...

이비아가 이렇게 프랑스 땅에 있는 고립 영토가 된 건 역사적 맥락들이 맞물려서 그런 것이다. 사실 이비아는 로마시대부터 그 중요성이 부각된 곳이다. 이름도 이곳에 주둔했던 로마의 장군인 율리아 리비카(Julia Lybica)에서 따온 것이다.

프이그세르다에서 출발한 버스를 타고 프랑스땅을 넘어 이비아로 갔다. 손님이 많이 없는건지 버스가 크지 않았다. 우리나라 마을버스만한 크기였다. 그래도 나름 국경을 넘는 버스인데 마을버스 수준이라니...ㅋ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비아 탐방의 정점인 이비아성(castell de Llivia)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비아성은 상당 부분이 파괴되어 있지만 그 정상부에 올라서면 왜 이곳이 로마시대부터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비아는 분명 피레네 산맥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 일대는 큰 평원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이 피레네가 맞나 싶을 정도로 널찍한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마치 피레네의 고봉들이 평원을 숨겨놓고 있는 형상이었다. 평원과 고봉들을 동시에 볼 수 있었던 꽤나 흥미로운 순간이었다. 그런 굉장한 풍광들이 이슬비와 함께 눈 앞에 펼쳐져 있으니... 뭐랄까 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다보니 이슬비가 폭우로 변했다. 매우 현실적이 됐다~ㅋ

ps. 지도에서 왼쪽은 안도라, 오른쪽은 이비아다. 둘 사이는 약 50킬로 정도 떨어져 있다.

 

#이비아피레네

#스페인이비아

#스페인고립영토

#안도라피레네

#스페인여행

 

 

 

* 이비아 타운

 

 

 

* 천사성모성당

 

 

 

* 천사성모성당

 

 

 

* 이비아성: 이비아성에서 바라본 모습. 스페인 방면이다.

 

 

 

* 이비아: 황소가 느긋하게 풀을 뜯고 있다.

 

 

 

* 이비아성: 겹성 형태를 띄고 있다.

 

 

 

 

 

 

*엔고르다니 다리 : 안도라의 수도인 안도라라베야에 있는 엔고르다니 다리(Pont d'Engordany). 발리라 오리엔트 강( valira d'orient) 위에 놓여져 있다. 보기만해도 아주 시원하다!

 

☞ 엄청 더웠던 지난 여름, 저는 유럽에 있었습니다. 2024년 6월 8일부터 8월 14일까지, 약 67일간 많은 나라를 탐방했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안도라, 모로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크로아티아, 헝가리, 튀르키에...

애초에는 포르투갈 순례길을 약 25일 정도 걷고, 나머지 기간을 배낭여행을 이어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름철 남유럽의 더위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일정을 다 배낭여행으로 소화했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도 여행의 묘미겠지요.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펜으로 노트에 적기도 했고, 스마트폰 메모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본 포스팅은 그 여행일지를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재밌지는 않습니다. 또한 가이드북 수준의 디테일한 정보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안도라의 수도 안도라베야: 안도라는 작은 소국이지만 도시국가는 아니다.

 

 

 

* 2024년 6월 8일 토요일: 1일차, 맑음 / 2024년 6월 9일 일요일: 2일차, 맑음

인천공항에서 UAE 아부다비행 에티하드 항공을 탔다. 유럽은 여러번 가봤는데 갈때마다 국내항공사나 핀에어 같은 유럽 현지 항공사를 이용했다. 최신형 B787 드림라이너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생각보다는 좀 재미가 없었다. 오히려 예전에 대한항공에서 탔던 B787이 더 나았던 거 같다. 중동항공사여서 그런지 기내식도 나와는 안 맞았다. 그래도 그냥 주는대로 먹어야쥐~!

약 8시간 비행을 해 아부다비에 도착했다. 그런데 서울 촌놈이 비행기를 타서 그랬나? 비행중에 엄청난 두통에 시달렸다. 오죽했으면 승무원에게 두통약을 받아서 복용을 했을 정도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양 옆 좌석이 비어있었다는 것이다. 서울 촌놈 오랜만에 뱅기탔다고 티를 제대로 냈다.

이후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비행기로 환승했다. 아부다비에서 바르셀로나까지는 약 7시간 정도 소요됐는데 그때는 아주 멀쩡했다. 신나는 비행이었다. 같은 에티하드 항공 비행기인데 왜그리 차이가 났던지...

바르셀로나 국제공항에 내렸다. 그간 마드리드 국제공항은 많이 이용했지만 바르셀로나 공항은 처음이었다. 이후 바로셀로나 중앙역이라고 불리는 sant로 이동한 후 고속버스를 타고 안도라(Andorra)로 이동했다. 비행기에서 대충 15시간을 있다보니 고속버스를 타자마자 코를 골며 골아떨어졌다. 확실히 비행기보다는 고속버스가 자기에 좋은 듯하다. 덕분에 시차 적응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안도라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피레네 산맥에 소국으로, 그 면적이 서울보다도 더 작다.

안도라는 안도라공국이라고 불렸다. 공작령이라는 뜻으로 거칠게 말해 공작이 왕노릇 한다는 말이다. 공작은 새가 아니라 백작, 공작할 때 그 공작이다.

스페인에서 안도라로 입국(?)하려면 검문소를 지나야한다. 하지만 검문소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다. 대신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넘어가는 차들이 많았다. 버스 차창 밖으로 피레네의 산들이 위엄을 드러내며 따라 오고 있었다. 드디어 안도라에 도착했다.

피레네의 험준함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안도라는 그런 척박함을 이겨낸 듯이 보였다. 절벽 위에다 집을 짓고 마을을 지은 것이다. 지반 공사 하기도 힘들었을텐데... 스위스와 막상막하였다.

 

 

* 안도라: 북쪽으로는 프랑스, 남쪽으로는 스페인. 안도라의 위치를 말해준다.

 

 

* 안도라의 위치

 

 

안도라는 정치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형태를 띄고 있는 곳이다. 안도라는 프랑스의 대통령과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방인, 우르헬 교구의 주교가 공동으로 최고 권력 수반을 이루고 있다. 안도라의 건국이 12세기였으니 그때는 프랑스 왕이었고, 지금은 대통령이 그 임무를 이어받는다. 이를 두고 입헌공동군주제라고 부른다. 입헌군주제도 아니고, 입헌공동군주제라니...! 물론 안도라에는 총리가 실질적으로 국정을 총괄하고 있다.

프랑스와 스페인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더군다나 피레네라는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아야했던 그들의 나름대로의 생존 방식이었을것이다.

올 초에 지중해 지브롤터를 탐방하고, 약 5개월 만에 피레네 안도라를 방문했다. 예전부터 벼르고 별렸던 버킷리스트를 올 상반기에만 두개나 지운 것이다. 오~ 속도 좋은데!

그런데 좀 아쉬웠다. 안도라공국이라는 예전의 명칭 때문에 살짝 중세풍의 도심 풍경을 기대했다. 하지만 현대적인 건물이 즐비했다. 사실 안도라는 거의 모든 품목이 무관세라서 쇼핑이 발달했다. 또한 카지노도 유명하다.

그런 아쉬움을 달래주는 우렁찬 목소리가 있었다. 바로 피레네에서 흘러오는 물소리였다. 지도상으로는 무슨 강이었는데... 그렇게 유속이 빠른 도심지 강물은 처음봤다. 하여간 지리산 대원사 계곡물 소리처럼 우렁찬 피레네 강물 소리에 귀가 다 시원해졌다. 시차에서 오는 피로감이 싹 다 날라가는 듯했다.

안도라는 1995년 우리나라와 정식으로 수교했다. 하지만 워낙 작은 나라이기에 독립된 외교공관이 있지 않고, 주 스페인 대사관이 공관 업무를 대행한다. 사실 안도라는 카탈루냐 지방과 많은 면에서 닮아 있었다.

고도가 높아서 그랬나? 안도라에서는 덥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역시 피레네 산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ㅋ

 

 

* 성 에스테베 성당(St. Esteve of Andorra Church): 12세기에 지어진 성당.

 

 

* 성 에스테베 성당: 왼쪽이 에스테베 성당이고, 오른쪽 건물은 외벽을 사진으로 처리했다.

 

 

* 안도라: 오리엔트강이 시원스럽게 물줄기를 뿜고 있다. 상류 부근이라서 그런지 계곡 같은 느낌이다.

 

 

 

* 안도라공국: 프랑스 왕과 스페인 우르헬 주교가 공동으로 통치하는 모습을 그린 조각품. 입헌공동군주제를 표현한 작품이다.

 

 

 

 

* 산티아고순례길

 

 

 

<재미난 스페인 5편> 산티아고 순례길

도대체 순례길이 무엇이기에!

 

 

"왜 순례길에 한국인들이 이렇게 많죠?"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을 때였다. 순례길의 종착점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의 외곽에 있는 산티아고 공항 부근을 걷고 있었다. 미국 알래스카에서 온 미국인 순례객 부부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얻어마셨다. 나이가 지긋하신 남편분이 보온병에서 차를 따르며 저렇게 물으셨던 것이다.

답을 좀 망설였다. 솔직히 필자 스스로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한국사람들은 여기를 왜 오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는 또 뭐야?

"한국은 스트레스 사회입니다. 그래서 힐링이 필요합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힐링을 합니다."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더듬더듬 이야기를 했는데 다행히 필자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떡이셨다. 이후로도 스페인을 여러번 갔었는데 갈 때마다 순례길을 걸었고, 그런 필자를 붙잡고 외국인들은 또 비슷한 질문을 했다. 왜 순례길을 걷는 한국 사람들이 많냐고?

그들이 보기에 필자는 전형적인(?) 한국인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던 모양이다. 딱봐도 엄청 무거운 배낭을 메고, 단독으로 움직이며, 외국인들과도 스스럼없이 인사하는 모습이 여타 한국인들과는 다른 모습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답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저런 물음들 속에는 순례길을 걷는 한국인들을 좀 언짢게 생각하는 의도가 숨어있다. 어떤 유럽에서 온 순례자는 필자에게 '한국인들이 꺼려진다'는 말을 직접 건네기도 했었다. 도대체 산티아고 순례길이 무엇이기에 이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것인가? 왜 일부 한국인 순례자들은 그 먼 스페인 땅까지 가서 회피의 대상이 되는가?

 

 

 

* 순례길표식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처음 접하는 분들도 있을테니 산티아고 순례길의 연혁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자. 산티아고 순례길은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는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길을 말한다. 산티아고(Santiago)는 스페인어로 야고보를 뜻하는데 예수의 12제자 중에 한 명이었다. 야고보는 현재의 스페인(에스파냐)과 포르투갈이 위치해 있는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고향으로 돌아온 야고보는 헤롯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참수를 당하게 됐다. 12제자 중 첫 순교자가 야고보였던 것이다. 야고보에게도 제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스승의 시신을 돌로 만든 배에 실어 이베리아 반도로 향했다. 배 자체가 돌로 만든 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이베리아반도로 온 야고보의 유해는 9세기 초반에 발견되고, 그곳에 성당이 들어서니 그 성당이 바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인 것이다.

이후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를 로마, 예루살렘과 함께 3대 성지로 선포한다. 이에 유럽 각국의 순례자들이 프랑스 땅을 거쳐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로 향했다. 초반 순례길이 번성했던 시기는 11~15세기였는데 당시 이베리아반도에서는 국토회복운동이 진행중이었다. 이베리안반도 내에 있던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이슬람 무어인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다른 유럽 국가들과 인적 교류가 끊길 수 있었음에도 순례길로 인해 명맥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다 16세기에 불어닥친 종교전쟁 이후로 쇠퇴하고 만다. 약 400년간 조용했던 순례길이 다시 각광을 받게 된 건 1982년이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또한 5년 후인, 1987년에 출간된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라는 책이 큰 인기를 끌면서 순례길은 더욱더 주목을 받게 된다.

스페인 정국의 변화 요인도 한 몫 했을 것이다. 1975년에 독재자인 프랑코가 사망하고, 이후 스페인은 민주화 과정에 놓이게 된다. 히틀러와 협력하여 참혹했던 스페인 내전을 일으킨 프랑코가 아닌가? 그런 프랑코 정권 하에서는 순례길을 걷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1980년, 일부 정치군인들이 구체제 회귀를 목표로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신속하게 진압되고 만다. 그렇게 정치적인 위험 요인들이 제거됐기에 평화롭게 순례길을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 순례길의 종착점인 산티아고대성당

 

 

이렇게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모았던 순례길은 1993년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다. 파울로 코엘료가 걸었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길은 프랑스길이다. 프랑스 남부에 있는 생장피에드포드(Saint-Jean-Pied-de-Port)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약 800km를 걷는 길이다. 프랑스길 이외에도 북쪽길, 포르투갈길, 마드리드길 등등... 여러가지 순례길이 있는데 이들 모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종착점이다.

"한국인들은 영어를 잘 못하고,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스위스에서 온 처자가 한국인 순례객들은 왜 다른나라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냐라는 물음을 해서 저렇게 답을 해줬다. 필자도 한국인이라 한국인에 대한 변호를 자임한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인들이 꺼려진다는 뜻일 것이다. 당시는 겨울철이라 순례객 자체가 별로 없을 때인데도 한국인들을 콕 짚어 이야기를 한 게 좀 의아스럽기까지 했다. 혹시 그 스위스 처자는 한국인 순례객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일부 서양인들은 한국인 순례객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이 가진 역사와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 같다. 떼지어 다니고, 엄숙하지 못하고, 큰소리로 떠들고... 뭐 이런 이미지로 한국인들을 바라보는 듯하다. 이에 대해 필자는 이렇게 반박을 하고 싶다.

'니들은 안 그러냐? 니들도 큰 소리로 떠들고, 엄숙하지 못하잖아. 그리고 순례길이라면서 뭘 그렇게 연애를 하고 다녀! 알베르게에서 낯뜨거운 장면들은 지들이 다 하면서...'

여기서 알베르게는 순례자를 위한 숙소를 말한다. 알베르게는 기숙사 침대같은 2층 침대가 놓여 있다. 그 좁은 침대에 남녀가 쏙 들어가 있는 경우를 꽤 여러번 봤다. 좀 낯뜨거웠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순례길: 프랑길 말고도 다른 순례길도 많다. 하지만 역시 프랑스길이 가장 메인이 된다.

 

 

 

* 순례길누렁이: 순례길의 표식인 조가비를 달고 있는 누렁이. 순한 녀석이었다.

 

 

 

또 야고보가 산티아고 대성당에 잠들어 계신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일까? 야고보의 제자들이 돌로 만든 배에 시신을 실어 옮겼다고 하는데 그게 말이 되나? 그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지브롤터해협을 돌배로 건넜다는게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항해는 과학이자 기술이다. 그래서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이라는 말까지 오가는 것이다.

썩 달갑지 않은 대접을 받으면서도,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을수도 있다는 의문이 있으면서도 또 순례길에 발걸음을 하는 이유가 있다. 걸을수록 마음의 평화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음의 평화가 세상의 평화로까지 확장되는 느낌까지 받았다. 전쟁의 공포가 사라지고, 화합의 악수가 건내지길 염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의 진정한 정신이 아닐까?

  

 

* 순례자의 그림자

 

 

 

* 순례자동상

 

 

 

* 산티아고순례길: 프랑스길

 

 

 

 

* 타리파성: 타리파성에서 해안가 방면의 모습. 왼쪽 상단에 또다른 성이 하나 있다. 산타카탈리나성이다.

 

 

 

<재미난 스페인 3편> 타리파

땅끝마을에 해적이 나타났다!

 

"당연한 말인데요, 서울에도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있어요. 우백호는 인왕산이고, 좌청룡은 낙산입니다. 낙산공원으로 유명한 그 낙산이에요. 남주작은 관악산이고, 북현무는 북한산입니다. 좌청룡우백호가 서울 안쪽에 위치한다면, 남주작북현무는 외곽에 자리잡고 있는 셈이죠. 그렇게 각각의 방위를 지키는 네마리 동물을 사신수라고 부릅니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강의를 할 때 종종 저런 설명을 했었다. 서울의 공간적인 면을 알기 위해서는 서울의 동서남북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신수와 함께 언급을 하면 흥미를 유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학습효과는? 그게 참 쉽지가 않다. 필자가 열심히 지도를 그리는 이유가 있다.

남쪽 안달루시아 지방에 있는 타리파(Tarifa)라는 곳에 갔는데 이곳이 스페인의 남쪽 땅끝마을이었다. 예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후 피스테라라는 곳을 방문했는데 그곳은 스페인의 서쪽 땅끝마을이었다. 여차저차해서 스페인의 남쪽과 서쪽의 땅끝마을을 탐방했던 것이다. 기왕이렇게 된 거 스페인의 동서남북을 땅끝에 초첨을 맞춰서 알아보았다. 사신수는 없어도 땅끝마을은 존재하니까.

일단 피스테라(Fisterra)부터 좀 더 살펴보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신 분들은 피스테라(Fisterra)에 대해서 잘 아실 것이다. 피스테라는 스페인의 서쪽 땅끝으로 순례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서 서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져 있다. 북쪽 땅끝은 바레스(Bares)라는 곳으로 피스테라에서 북동쪽으로 약 20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다. 비교적 거리가 가까운 바레스와 피스테라는 둘 다 갈리시아 지방에 속한다. 동쪽 땅끝은 크레우스(Creus)라는 곳이다. 정확히는 크레우스(Cap de Creus)곶인데 바로셀로나에서 북동쪽으로 약 160km 정도 떨어져 있다.

여기서 용어 정리를 해보자. 바다쪽으로 땅이 많이 튀어나온 지형을 두 가지로 나눠서 부른다. 크게 튀어나오면 '반도'가 되고, 작으면 '곶(串)'이 된다. 포항의 호미곶을 생각하시면 된다. 북한쪽에는 백령도와 마주하고 있는 장산곶이 유명하고 유럽쪽에서는 포르투갈의 호카곶이 유명하다. 호카곶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맨 끝지점이다. 포르투갈의 서쪽 땅끝마을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곶은 영어로는 케이프(cape)로 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cape town)은 직역하면 '곶마을'이 될 거다.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에서는 카보(cabo)로 쓰는데 바로셀로나가 속해 있는 까딸루냐에서는 캅(cap)으로 적는다.

 

 

 

* 타리파섬: 흰색 등대가 보이는 곳이 타리파섬이다. 그 앞으로 타리파항이 있다. 모로코에서 출항한 배가 입항하고 있다.

 

 

 

다시 스페인 남쪽 땅끝마을인 타리파(Tarifa)에 대한 이야기다. 타리파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카디스주에 속해 있는 도시다. 앞으로 지브롤터해협이 펼쳐져 있고, 그 건너로 북아프리카 모로코땅이 보이는 곳이다. 지브롤터에서 봤던 풍광하고는 또다른 모습이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북아프리카가 손에 잡힐 정도로 가까이보일 정도였다.

한편 타리파라는 지명은 711년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한 무어인 장군인 타리크 이븐 말릭(Tarif ibn Malik)의 명칭에서 나온 것이다. 무어인들이 북아프리카를 떠나 가장 먼저 도달한 곳에 타리크 장군의 이름을 따서 명칭을 붙인 것이다. 이렇듯 무어인들의 지배를 가장 오랫동안 받은 안달루시아 지방은 곳곳에 무어인들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타리파에는 구즈만 엘 부에노(Castillo de Guzman el Bueno)라고도 불리는 타리파성이 있다. 스페인어로 성을 카스티요(Castillo)라고 부른다. 워낙 스페인에 성이 많으니 앞으로도 '카스티요'에 대한 언급이 많을 것이다.

타리파가 스페인의 땅끝인만큼 타리파성은 스페인의 가장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더불어 유럽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잡은 성이기도 하다. 북아프리카 모로코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15km 정도에 불과할 정도다.

타리파성은 960년에 무어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문명에 십자로상에 놓여 있다보니 타피라성은 지정학적으로 역사의 현장이 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앞서 언급한 구즈만 엘 부에노도 그런 역사의 현장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1294년에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들은 무어인들까지 끌어들여 왕위를 쟁취하려고 했다. 레콩키스타, 즉 국토회복전쟁이 무색할 정도였다. 이때 구즈만 엘 부에노가 지키고 있던 타리파성이 격전지가 됐는데 반란군들은 성을 포위하며 항복을 요구했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반란군들은 구즈만의 아들을 포로로 잡고 있었고, 성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 아들을 죽인다고 협박했었다.

 

 

 

*구즈만 엘 부에노상: 단검을 들고 있다.

 

 

 

이에 구즈만은 반란군측에 단검을 던지며, 그 단검으로 아들을 죽이라고 말했다. 아들이 아닌 국가를 선택한 것이다. 읍참마속보다도 더한 일이지 않은가? 만약 여러분들이 그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어떤 판단을...?

타리파성에 올라가면 타리파항이 바로 앞에 보인다. 타리파항에서는 모로코에 있는 탕헤르로 향하는 여객선을 탈 수 있다. 타리파항 너머로는 흰 등대가 우뚝 서 있는 타리파섬이 보이는데 육지와 워낙 가까워 이곳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타리파섬은 이베리안반도의 최남단이자 유럽의 최남단이기도 한다. 여러모로 의미가 큰 섬이지만 필자가 갔을 때는 쇠사슬로 문이 잠겨있었다. 알고보니 몇 년째 문이 잠겨 있다고 했다.

한 때 타리파섬은 해적들의 소굴이었다. 비좁은 지브롤터해협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만큼 해적질을 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유럽 각국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약탈한 보물이 캐리비언 해적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면 타리파섬의 해적들은 통행세를 챙겼다. 어차피 길목을 차단하면 두고두고 보호비(?)를 뜯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캐나다 출신 역사학자 데이빗 데이는 자신의 저서인 <Smugglers and Sailors: The Customs History of Australia 1788-1901>(밀수업자와 선원: 호주의 관세 역사 1788~1901)에서 관세(tariff)의 어원이 타리파섬의 해적행위에서 기원한다고 언급했다. 15세기 이후 아메리카 및 인도로 가는 신항로가 개척되자 지중해 무역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유럽 각국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힘의 무게를 쏟게 된다. 지브롤터 인근 해역에 힘의 공백이 생긴 것이다. 해적들이 신날 일이었다.

해적들이 물러간 타리파는 현재 서핑족들의 천국이 되었다. 여름이면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서핑족들로 물반서핑족반이라고 할 정도다. 로스란세스 해변이 그 중심인데 대서양의 거친 파도가 계속 밀려들고 있었다. 서핑족들이 보기에는 물질하기 딱일 듯싶었다.

수영복도 없고 해서 필자는 그냥 모래사장을 걸었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온 몸을 휘감고 있었다. 무언가가 씻겨가는 느낌이었다. 이런 바람을 해남 땅끝탑에서도 맞은 적이 있었는데 바람을 맞으며 무언가 다짐을 했었다. 그 다짐들이 잘 이루어졌을까?

 

 

 

* 타리파성

 

 

 

 

* 유럽의 최남단: 타리파는 스페인의 땅끝이자 유럽의 최남단이기도 하다. 더 가고 싶어도 더 나아갈 수가 없다.

 

 

 

* 스페인의 동서남북 땅끝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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