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대학 사극 <고려거란전쟁>을 재미나게 보고 있다. 역시 사극은 퓨전 사극이 아니라

정통 사극이다. 퓨전 사극이 젊은 연기자들의 비주얼을 전면으로 드러낸다면 정통 사극은

노련함을 앞세운 중년 배우들의 불꽃 튀는 연기력이 돋보인다.

 

강감찬 역으로 최수종이 캐스팅됐다고, 또 수종이라는 지적이 있었는데... 최수종이 사극

연기에 진심이기에 캐스팅이 된 게 아닐까?

 

그래도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왜 강감찬 장군 역으로 최수종일까?

거란과의 3차 전쟁에서 거란군을 괴멸에 가까울 정도로 찍어눌렀던 강감찬 장군이었는데...

좀 더 강인한 얼굴을 한 연기자가 강감찬 장군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나?

 

이를테면 마동석?ㅋ

 

사실 강감찬 장군은 문관 출신이었다. 잠시 역사 시간을 생각해보자! 고려 시대 무관을 뽑는

과거 시험은 후기에나 실시됐다. 강감찬이 활약을 했던 고려 전기에는 문신을 뽑는 과거가

존재했을 뿐이다.

 

그러면 왜 문신 출신이면서 최전방에서 군대를 지휘한 것일까? 이렇게 문무를 겸비한 이들을

두고 출장입상(出將入相)이라고 말한다. 나가서는 장수요, 안에서는 재상의 역할을 하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를 말하는 것이다.

 

강감찬은 출장입상의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김종서, 권율, 이순신 장군 등도 출장입상형

인재들이다.

 

강감찬 장군은 관악산 낙성대에서 출생을 하셨다. 관악산은 필자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다. 그런 이야기를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10꼭지 '관악산 역사트레킹'편에 담아봤다.

드라마에 편승해서 이런식으로 숟가락을 올리는군~^^

 

 

 

 

 

● 문관 출신 최전방 사령관, 강감찬

 

강감찬 장군과 관련된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거 아세요. 강감찬 장군이 사실은 문신 출신이라는 거요.”

“정말요?”

“더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장군께서 나이 70에 최전방 사령관으로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귀주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둬서 거란 세력을 물리쳤고요.”

“아, 그렇군요!”

 

필자의 설명에 하나같이 참석자들은 놀랬다. <삼국지>의 황충 장군도 아니고, 고희의 나이에 최전방에서 칼을 휘둘렀다는 점이 놀라웠을 것이다. 더구나 상대편은 당시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거란족이 아닌가?

 

이야기를 좀 더 확장해 보자.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두고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고 칭하며 건국 초부터 강경 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거란이 선물로 준 낙타를 굶겨 죽인, 일명 만부교 사건도 발생하게 됐던 것이다.

 

거란은 요나라를 세우고 동북아에서 위세를 떨쳤다. 당시 요나라는 만리장성 부근에서 송나라와 대치를 하게 됐는데 한반도에 있는 고려에 대해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고려가 송나라와 손을 잡고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던 것이다. 강감찬 장군은 3차 침공 때 상원수가 되어 10만 거란군을 격퇴시켰고 그로 인해 고려는 전란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안국사 뜰 안에는 그런 강감찬 장군을 기리는 삼층석탑이 서있다. 상륜부라고 불리는 맨 꼭대기는 무너져 내렸지만 나머지는 천 년 가까운 세월을 잘 버텨내고 있다. 이 탑은 원래 장군의 생가에 있던 것을 안국사가 만들어지면서 현 위치로 옮겨온 것이다.

 

필자는 계속 ‘강감찬 장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만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강감찬은 문신 출신이었다. 한국사 시간을 곱씹어 보시라. 과거에서 무관을 뽑았던 건 고려 후기 이후였다. 고려 초기 사람이었던 강감찬은 당연히 문관 출신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강감찬은 문·무에 모두 능한 인재였던 것이다. 이를 두고 출장입상(出將入相)이라고 하는데 ‘나가서는 장수(將帥)요, 들어와서는 재상(宰相)이라’는 뜻이다.

 

도교에서는 문(文)을 관장하는 별을 문곡성(文曲星)이라고 칭한다. 문(文)이 뛰어난 사람을 두고도 문곡성이라는 말한다. 그런데 강감찬도 문곡성이라고 불렸다. 최전방 사령관이자 문곡성이었던 강감찬! 그렇게 많은 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인헌공 강감찬은 84세에 천수를 누리다 영면하셨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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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KBS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공영방송 50주년 특별기획 드라마'라는 명칭에 걸맞게 수준 높은 영상미를 펼쳐보였다. <고려거란전쟁>은 <불멸의 이순신>, <태조 왕건> 등등...

수많은 명품 사극의 뒤를 이를 것인가? 아직은 극 초반이니 좀 두고봐야 할 것이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거란과 사이가 나빴다. 발해를 멸망시켰다하여 거란을 짐승으로 나라로 폄하했다. 고려가 건국했을 때 거란에서 선물로 낙타 50마리를 보냈는데 그 낙타를 굶겨죽이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고려거란전쟁>의 초반은 대량원군에 대한 이야기로 전개되고 있다. 대량원군은 자신의 이모인 천추태후로부터 수많은 위협을 받는다. 하지만 그 위협들을 다 극복한 후 결국 왕으로 등극한다. 그가 바로 고려 8대왕 현종(재위 1010∼1031)이다.

극에도 나오듯이 대량원군은 강제로 승려가 됐는데 신혈사라는 곳에 은거하게 된다. 이 신혈사가 지금의 진관사다.

사찰 음식으로 유명한 그 진관사인데 진관 한옥마을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여행에세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의 11꼭지에는 '진관사 역사트레킹'이 기술되어 있다. 아래는 그 내용의 일부다. 사극 <고려거란전쟁>에 진관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스리슬쩍 숟가락을 올려본다~^^

 

 

 


 

 

 

 ● 기막힌 스토리가 숨어 있는 진관사

수도권 최대의 한옥마을인 은평 한옥마을을 지나 마지막 탐방지인 진관사로 향한다.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4대 명찰이 있다. 동쪽에 불암사, 남쪽에 삼막사, 북쪽에 승가사. 그럼 서쪽은? 진관사다. 천년 고찰인 진관사(津寬寺)는 고려 현종 때인 1010년에 만들어졌다. 고려 제8대 왕인 현종이 직접 창건한 이 절은 진관대사를 위해 세워졌다고 한다.

태조 왕건의 손자였던 현종, 즉 왕순은 어릴 적에는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왕건의 손녀였던 천추태후로부터 어릴 적부터 박해를 받은 왕순은 한때 강제로 승려가 되기도 하였다. 천추태후가 그의 이모가 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당시 얽히고설킨 왕실혼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같은 왕건의 혈통이자 이모뻘의 천추태후로부터 살해위협까지 받게 된 건 그가 왕위계승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천추태후는 애인인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왕으로 등극시킬 셈이었다.

그런 천추태후의 마수가 진관사에까지 뻗치게 됐다. 원래 진관사 자리에는 신혈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진관이라는 승려가 홀로 수도를 하고 있었다. 승려가 홀로 거처하는 곳이라 천추태후 입장에서는 무언가 거사를 치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랬다. 천추태후는 신혈사에 자객을 보내 왕순을 죽일 셈이었다. 천추태후의 의도대로 왕순이 자객에 손에 비명횡사를 했다면, 현종도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의 진관사도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천추태후의 의도를 눈치 챈 진관은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굴을 파서 왕손을 숨기는 기지를 발휘한다. 수미단은 불상을 올려놓는 단을 말한다. 수미산은 불교에서 말하는 상상의 산을 말하는 것이고.

그렇게 진관에 의해 목숨을 건진 왕순은 3년 뒤, 개경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려 8대 왕 현종이다. 현종은 1010년, 신혈사 자리에 대가람을 세우고 진관 대사의 이름을 본 따서 사찰 이름을 지으니 그 사찰이 바로 지금의 진관사다.

조선시대 진관사는 사가독서제로 애용된 곳이다. 사가독서제란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정진하게 만든 제도로 세종시대에 처음 도입되었다. 풍광이 수려하고 계곡이 시원한 진관사라면 학문을 닦기에 제격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사가독서제로 진관사를 다년간 이들은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이었다.

진관사는 한국전쟁동안 많은 전각들이 소실된다. 그래서 지금의 진관사는 천년고찰의 웅장함이 묻어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진관사는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모으고 있는 사찰이다. 진관사 숲길과 계곡을 걷다보면 몸도 마음도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런 느낌들이 좋아서 발걸음들이 진관사로 향하는 것이 아닐까?

 

 

*진관사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드디어 책이 나왔다. 발간일 2023년 9월 1일.

누구는 자신의 실물 책을 보면서 감격도 하고,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오프라인 서점 매대에 가서 은근 슬쩍 자신의 책을 중앙으로 옮겨놓기도 한단다. 하지만 필자는 별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앓던 이 하나가 빠진 것처럼 좀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원고를 건성으로 작성해서 그런가? 아니면 그동안 책을 많이 냈나?

이 책은 너무 늦게 나왔다. 첫 꼭지를 2013년에 썼으니 10년이나 걸려서 출간이 된 것이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초고를 쓴 지가 오래되서 그런지 중간에 상황이 확~ 바껴 다시 작성을 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 것이다.

예를 들면, 해당 부근에 지하철이 개통되면 그거에 맞춰 집합장소와 종결장소가 변경된다. 또한 그에 맞게 코스 자체도 변경된다. 코스가 바뀌니 원고를 재작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크게 4번 정도 갈아 엎었다. 재작성 수준의 리라이팅을 4번씩이나 하다보니 나중에는 원고를 검수하는 것조차 신물이 날 정도였다.

사진은 또 어떻고! 시간이 길어지다보니까 사진도 크게 갈이를 해야했다. 탐방 사진이야 패션 사진처럼 유행을 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현재성을 유지해야 하니까.

거기서 거기인 트레킹 원고, 뭐하러 그렇게 갈아넣으며 작성하느냐고,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이 책을 쓰면서 햄스트링 건염에 걸려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축구 선수나 걸리는 햄스트링을 트레킹하다가 걸린 것이다. 한편 이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린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어차피 가족이나 지인들의 주머니를 공략할 게 아닌가?

사실 이 책은 기성 출판사에서 여러번 퇴짜를 맞았다. 처음에는 퇴짜를 맞으니 얼얼했지만 나중에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면서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 어차피 돈도 안 되는 책, 내가 출판사차려서 내가 만들어보자. 잘나도 내 원고, 못나도 내 원고가 아닌가!'

코로나가 한참 맹위를 떨치던 2021년 가을경에 역사트레킹북스라는 1인 출판사를 창간하게 된다. 그때 이미 원고의 90%가 준비되긴 했지만 사정이 있어 2023년 상반기부터 본격적으로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편집과 디자인작업이 끝나고 인쇄를 할 시기였는데 약 3주간의 공백이 생겼다. 편집 작업이 끝날 때가 8월 초순이었는데 이 시기에 인쇄소가 휴가 기간이었다. 인쇄업 특성상 휴가를 함께간다는 것이다. 어쨌든 한 번 맥이 끊기니 3주나 지체가 됐다. 역시 땡길때 땡겨야 하는 거다!

예전부터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이 있다.

'나무한테 미안한 짓은 하지 말자!'

인쇄소에 원고를 넘기면서 저 말을 다시 한 번 곱씹어봤다.

서점과 계약을 하느라 판매 시기가 늦춰졌다. 끝날때까지 계속 늦춰졌다. 어쨌든 이제 교보문고, 알라딘, 예스24 같은 서점에서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을 구매할 수 있다. 10년 간의 노고가 이제 결실로 다가와야 하는 시기다. 그러고보니 곧 추석이네~

지금 다시 책을 응시했는데 역시 별 감흥이 없다. 첫 책인데도 그렇다. 그저 무언가 내 몸에서 툭툭 털려나가는 느낌이들 뿐이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허허로운 감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별 감흥은 없지만 이것만큼은 말하고 싶다.

이 책은 그저 앉아서 쓴 책이 아니다. 두 발로 빚은 책이다. 손은 그저 글씨를 옮겼을 뿐 발로 써 내려간 이야기들이다.

글에서 발냄새가 나나?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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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 체육회에서 발행하는 계간지 <서울스포츠> 7+8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사진은 마땅한게 없어서 그냥 한강에서 찍은 사진들을 올려봅니다.

 

 

한강 백두대간 모래사장

금빛 모래가 펼쳐져 있던 한강의 강수욕장

필자는 한 때 한강에 미친 적이 있었다. 지금은 문화센터에서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그래서 다양한 연령대의 수강생들과 마주치는데 그 폭이 워낙 커서 종종 ‘3대가 같이 트레킹’을 한다고 표현하곤 했었다. 수강생 중 가장 어린 막내가 9살이었고, 가장 최고참은 84세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한 연령대와 만나다 보니 종종 귀중한 정보들을 공짜로 얻을 수도 있었다. 트레킹을 행하다보면 사람들이 술술 입을 여는데 녹취만 하지 않았지 마치 로드 인터뷰 같은 형태를 띠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구술 내용 중에는 텍스트 자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생생함 같은 것들도 있었다.

● 해수욕? 아니 강수욕

예전에 한강에서 트레킹을 진행했을 때였다. 용산쪽을 가리키면서 예전 서울 시민들은 해수욕이 아닌 강수욕(江水浴)을 즐겼다고 설명을 했었다. 젊은 수강생들은 거의 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강수욕’이 무엇이냐며 묻기부터 했다. 바다에서 하는 물놀이가 해수욕이라면 강물에서 하는 물놀이를 강수욕이라고 부른다는 해설을 마칠 즈음, 나이가 지긋한 수강생 A씨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강수욕 체험기를 풀어내셨다.

“그때는 여름만 되면 한강으로 물놀이하러 갔었어요. 노들강변에 모래사장이 기가 막히게 펼쳐졌거든요.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

그렇다. 변변한 냉방장치도 없었던 그 시절, 한강은 서울 시민들의 좋은 피서지였다. 사람들은 드넓은 모래사장에서 수영도 하고, 모래찜질도 하며 물놀이를 즐겼다. 당시의 사진들을 보면 동해안의 어느 해수욕장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한강이 물놀이 장소로 애용됐을까?

 

 

 

 

 

 

● 한강 백두대간 모래사장

해수욕이든 강수욕이든 모래사장이 있어야 입수(入水)를 할 수 있다. 거친 돌밭에서 물에 뛰어들었다가는 자칫 피투성이가 될 수도 있다. 물가에 있는 바위에서는 낚시를 하지 물놀이를 하지 않는 법이다.

하드웨어(?)로 보자면 한강은 아주 오래전부터 강수욕장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지금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하지만 실제로 예전 항공 사진을 보면 이게 한강이 맞나 싶을 정도로 드넓은 금빛 모래사장이 한강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 대표적으로 용산, 뚝섬, 광나루가 그런 곳이다.

이렇게 모래사장이 발달할 수 있었던 건 서울이 한강의 하류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태백산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과 금강산 내금강에서 발원한 북한강이 양수리에서 합수되어 한강이 된다. 남한강이 375㎞, 북한강이 317㎞이니 강물이 흘러 오는 와중에 수 많은 퇴적물들도 함께 실어 온다. 그렇게 켜켜이 퇴적물이 쌓여 어떤 곳은 습지가 되고, 어떤 곳은 모래사장이 된다. 백두대간에서 떨어져 나온 돌덩어리가 강물 속에서 깎이고 깎여 모래가 되었고, 그 모래가 서울 한강변에 쌓였으니 ‘서울 한강 백두대간 모래사장’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거 같다.

그런데 당시 한강의 모습을 보면 강변 양쪽에 다 모래가 쌓이지는 않았다. 북쪽에 모래사장이 있으면 남쪽은 습지가 있는 식이다. 예를 들면, 지금의 한강대교의 북단인 용산구 이촌동에는 해운대 같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지만 이에 반해 남단인 노량진(鷺梁津)에는 모래사장이 발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량진은 물살이 빨랐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한자에도 좁은 해역을 뜻하는 ‘기장량(梁)’이 쓰였다. 이 한자는 명량(鳴梁), 견내량(見內梁), 칠전량(漆川梁) 등 좁고, 물살이 빠른 곳을 지칭할 때 쓰인다. 이런 차이가 나타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서울의 한강이 일직선이 아닌 W형태로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굽이쳐 흐르는 구간은 원심력이 작용하여 물살이 강해 퇴적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반대쪽은 구심력으로 인해 퇴적물들이 층층이 쌓이게 된다.

물놀이에 대한 글에 지형과 퇴적에 대한 이야기를 한 필자에게 핀잔을 주시려나? 하지만 꼭 이 부분을 정리해보고 싶었다. 당시의 한강 강수욕을 신기하게 보는 관점이 아닌 어떻게 강수욕을 할 수 있었는지를 따져보고 싶었다. 짠맛이 나는 바다모래가 아닌 금빛의 강모래에서 모래찜질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상상에 하며...

 

 

 

 

 

 

● 강수욕장을 기억하는 사람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서울은 급격하게 확장한다. 1960년대 이미 인구가 350만 명에 이른다. 드넓게 펼쳐진 한강의 모래사장을 채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수강생 A씨는 이렇게 회고를 했다.

“그때 전차를 타고 갔었을 거야. 어디서 왔는지 백사장에 사람들이 가득했어. 가족단위도 왔었고, 같은 또래들끼리도 왔었어요. 거기서 아이스께끼(아이스크림)도 팔고, 냉차도 팔고 그랬지. 그때 찬 거 먹고 배탈나서 아주 혼난적도 있어요.”

A씨는 지금의 이촌동, 즉 용산 노들 강수욕장에서 물놀이를 했는데 일설에 의하면 노들 모래사장은 세계 최대의 강수욕장이었다고 한다. 수강생 B씨는 뚝섬 유원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뚝섬유원지까지 궤도차를 타고 갔어요. 뚝섬이 좋은게 거기는 수영장도 있었어요. 백사장도 있었고, 아주머니들이 빨래도 했었고, 아참 거기는 나루터도 있었어요. 그때는 강남이 개발되기 전이라 다리가 없었거든. 동력선을 타면 봉은사까지도 갈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

궤도차는 전차의 일종인데 당시 동대문역에서 뚝섬을 거쳐 광나루까지 운행을 했었다. 전차역에 나루터까지 있었으니 당시 뚝섬은 교통의 요지였던 셈이다. 그러니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붐빌 수밖에. 자료를 찾아보니 뚝섬이 인기가 좋았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나무그늘 때문이었다.

다른 강수욕장들은 숲이 거의 없었지만 뚝섬 일대는 나무숲이 있어 천연의 파라솔 역할을 해주었다. 그런 자취가 남아서인지 뚝섬에는 현재 서울숲이 자리잡고 있다. 참고로 서울에서 전차는 1968년을 끝으로 운행을 종료했다.

 

 

 

 

● 생명력이 길지 않았던 강수욕장

한강의 강수욕은 생명력이 길지 않았다. 1950~1960년대까지 반짝 개장(?)을 했을 뿐이다. 앞으로 시기를 당겨보아도 기껏 일제강점기까지 연장할 수 있을 뿐이다. 아무래도 조선시대에는 강수욕을 자유롭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 한복은 수영을 하는데 적합한 복장이 아니다.

앞쪽 시기는 늘어날 수 있지만 뒤쪽은 고정되었다. 1970년대부터는 한강 개발로 인해 모래사장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강모래는 염분이 많은 바다모래보다 질이 더 좋아 훌륭한 건설자재로 쓰였다. 1980년대 한강종합개발이 대대적으로 진행되면서 한강 일대는 큰 공사장처럼 변했다. 강수욕장이 있던 모래사장은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시멘트로 채워진 인공 제방들이 들어섰다. ‘한강 강수욕장’이라는 말도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뚝섬에서 조금만 배타고 들어가면 저자도라는 섬이 나와요. 거기도 백사장이 아주 넓었어요. 거기서도 물놀이를 재밌게 했지. 튜브랑 파라솔 빌려주는 행상도 있었고. 그런데 한강 개발한다고 모래를 퍼 올리더라고. 어느 순간 가보니 섬도 없어지고, 백사장도 없어졌어요. 그때 이후로는 한강에서 수영을 못 했지. 흙탕물이 돼서 물에 들어갈 생각을 못 했죠.”

B씨는 이렇게 아쉬워했다. 한강종합개발은 1986년에 종료됐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한강의 모습이 그때 골격을 갖추게 된다.

 

● 오리배는 페달을 굴리고, 카약과 패들보드는 노를 젓고

하지만 한강이 피서지로서의 매력을 상실한 건 아니었다. 강수욕이 사라지긴 했지만 물놀이용 보트는 계속 둥둥 떠 있었다. 노를 젓는 일반적인 보트도 있었고, 위에 가림막을 쳐서 햇빛이나 비를 막을 수 있는 보트도 있었다. 이후 보트들은 유람용 오리배로 바뀌게 된다. 1990년대 초반 오리배를 탔던 수강생 C씨는 이렇게 회고를 했다.

“한강에서 오리배 페달 좀 굴렸죠. 저희는 주로 여의도쪽에서 많이 탔는데 사실 오리배 타는게 주 목적이라기보다는 어떻게 연애 좀 해볼까 그게 더...”

성공했을까? C씨는 그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이제 그런 오리배들은 뒷전으로 물러 나고 2010년도 이후부터는 카약, 패들보드(sup) 같은 수상 아웃도어를 즐기는 이들이 한강에서 노를 저었다. 카약이 앉아서 노를 젓는다면 패들보드는 일어서서 노를 젓는 방식이다. 이전에 보트나 오리배가 유람의 목적이 강했다면 카약이나 패들보드는 레저에 운동까지 겸비한 활동이다. 그래서인지 카약이나 패들보드는 시작 전에 안전에 대한 강습을 받아야 한다. 페달부터 굴리는 오리배와는 많이 다르다.

 

 

 

● 한강의 수영장

한강의 물놀이에 대한 글을 쓰면서 야외수영장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현재 서울 한강변에는 뚝섬, 여의도, 광나루, 망원, 잠실, 잠원 등 6개의 수영장과 난지, 양화 2곳에 물놀이장이 있다. 강수욕장보다는 못 하지만 한강의 수영장들은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다. 탁 트인 한강을 바라보며 헤엄을 칠 수 있기 때문이다. 답답한 실내수영장은 범접할 수 없는 ‘한강뷰’를 배경삼아 물놀이를 할 수 있다는게 정말 매력이지 않은가?

그렇게 시원함을 선사한 수영장 중 일부가 노후화되어 간다. 이에 서울시는 현대적 기술과 감각을 적용하여 새로운 개념의 물놀이 공간을 선보일 예정이다. 일명 자연형 물놀이장이다. 자연형 물놀이장은 생태적인 의미를 더한 곳으로 자연친화적인 물놀이 공간이 될 예정이다. 2024년에 기존에 잠실수영장이 먼저 자연형 물놀이장으로 변신을 하고 광나루, 잠원, 망원까지 점차 확대할 계획이라고 한다. 자연형 물놀이장이 어떤식으로 꾸며질지 궁금하다.

이제까지 한강의 물놀이에 대해서 정리해봤다. 일부는 수강생들의 입을 빌려 전개를 하기도 했다. 딱딱한 문헌 자료를 기반으로 하는 것보다 더 좋지 않은가?

이제 여름이다. 내친김에 수영복 입고 한강에 풍덩 해볼까? 그런데 불룩한 똥배가 앞을 가리고 있어서...

 


 

*** 글쓴이 곽동운은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있다. 현재 백화점 문화센터와 서울시50플러스에서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트레킹을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역사트레킹 공동체’를 꾸리고 싶어 한다.

 

 

 

 

 
 

 

 

 

한강 다리는 즐거운 놀이터

한강 다리가 이렇게 재밌는 곳이었어?

 

필자는 한 때 한강에 미쳤던(?) 적이 있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지난호에 한강의 섬에 대한 이야기를 기고했었다. 글을 잘 썼는지 이번에도 한강에 대한 이야기를 또 기고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 이 글은 한강에 미쳤던 사람의 두 번째 한강이야기다. 즐거운 놀이터가 되어주는 한강 다리 이야기.

오늘도 사람들은 한강을 분주하게 넘고 있다. 강남과 강북을 가르며 자연장벽이 될 수도 있는 한강을 현대인들은 손쉽게 건너고 있다. 그럼 언제부터 한강을 나룻배가 아닌 교량을 통해 건너갔을까? 1900년 한강철교가 부설되면서부터다. 1899년에 경인선이 개통됐는데 그때는 노량진역이 출발역이었다. 다음해에 한강철교와 함께 경성역이 준공됐고, 1900년 7월에 ‘경성역-인천역’까지 완전 개통을 하게 된다. 경성역은 나중에 서대문역으로 불렸는데 지금의 서울역과는 다른 곳이다.

 

 

* 동작대교: 동작대교 위로 넘어가는 노을. 서래섬 부근에서 촬영함.

 

 

 

한강철교는 기차만 다닐 수 있는 철도전용 다리였다. 지금이야 교통카드만 있으면 간편하게 전철을 타고 한강을 건널 수 있지만 구한말에 살았던 사람들이 손쉽게 티켓팅을 할 수 있었을까? 일반 사람들도 편리하게 한강을 넘을 수 있게 된 건 1917년부터였다. 이때 한강 인도교라 불렸던 한강대교가 개통됐다.

이후 서울은 확장을 거듭했고, 한강의 다리들도 더 많이 건설됐다. 그럼 서울의 한강에는 몇 개의 다리가 있을까? 총 27개다. 여기서 말하는 다리는 서울시와 연관을 맺는 다리를 말한다. 그래서 팔당대교(남양주시-하남시)처럼 경기도와 경기도를 잇는 다리들은 27개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런 다리를 두고 서울시에서는 ‘시계외 교량’이라고 부르는데 팔당대교, 김포대교 등 총 4개가 있다.

한편 서울 강동구와 경기도 구리시를 잇는 고덕대교(가칭)가 올해 말 준공을 앞두고 있는 등 앞으로도 한강 다리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잠깐 교량의 종류에 대해서 알아보자. 교량의 종류는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순수도로교량
철도교량
철도도로병용교량
예) 마포대교
예) 당산철교
예) 동작대교

 

순수도로교량은 자동차가 다니는, 철도교량은 기차만 다니는 다리 형태로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교량 형태다. 이에 비해 철도도로병용교량은 자동차와 기차가 교량을 함께 쓰는 다리 형식으로 도시 지역에서만 나타난다. 인천공항을 오가는 영종대교를 제외하고 철도도로병용교량은 서울에만 존재한다.

 

 

 

* 동작대교: 자동차와 나란히 주행하는 4호선 전동차

 

 

 

● 동작대교: 지하철과 자동차가 함께 경주를 한다?

지면관계상 한강 다리를 일일이 다 언급할 수는 없고, 몇 개만 추려서 이야기 해본다. 첫 번째 다리는 동작대교다. 동작구 동작동과 용산구 이촌동을 잇는 동작대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도로병용교량이다. 푸른색 아치가 인상적인 동작대교는 1984년에 준공됐고, 그 다음해에 지하철 4호선이 개통한다. 동작대교 위로 푸른색으로 도장된 4호선 전동차들이 자동차들과 경주하듯 달리게 됐다. 전동차와 자동차가 한 공간에서 나란히 주행을 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무척 이색적이었다.

그래서 동작대교는 영화나 CF의 단골 다리로 등장했다. 미끄러지듯 전동차가 달리고, 그 옆으로는 자동차가 경쾌하게 주행을 하며, 그런 모습을 주인공이 미소지으며 지켜보고...

동작대교의 남단은 ‘동재기나루(銅雀津:동작진)’라고도 불렸던 동작나루가 있던 곳이다. 동작역 4번 출구에서 나오면 서울현충원으로 갈 수 있는데 중간에 이곳이 동작나루였다는 것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옛날 나룻배로 동작나루를 건넜던 사람들은 남태령으로 향했고, 과천에 당도할 수 있었다. 삼남(충청, 전라, 경상)지역으로 먼 길을 떠나야 했던 이들도 동작나루를 이용했었다.

 

 

* 동작대교: 동작대교 위에 있는 구름카페

 

 

 

동작나루는 정조대왕이 화성 능행차를 행하기 위해 건넌 곳이기도 했다. 왕이라 나룻배로 움직이시지 않고 임시로 배다리를 만들어 한강을 건너셨다. 배다리는 정약용 선생이 설계했다고 전해진다. 어쩌면 이 배다리가 동작대교의 시초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현재 동작대교가 놓인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이들이 오갔던 교통의 요지였던 셈이다.

그 수많은 발걸음에 필자도 빠질 수 없었다. 동작대교 남단에 있는 구름카페와 노을카페로 향했다. 구름카페는 동쪽, 노을카페는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동작역과 가까워서 접근성이 무척 좋다. 2009년에 오픈한 두 카페는 몇 년 전 재정비를 한 후 야경 명소로 재탄생했다. 한강은 당연하고, 남산은 물론 서울현충원을 품고 있는 서달산까지 파노라마로 볼 수 있으니 한강의 전망 ‘맛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여의도와 가까워서 그런지 서울세계불꽃축제를 편하게 볼 수 있는 명당(?)이라고 입소문이 자자하다.

참고) 구름카페 / 노을카페: 운영시간 매일 07:00 ~ 24:00 / 주차가능(유료)

 

 

 

* 반포대교: 달빛무지개분수

 

 

 

● 반포대교와 잠수교: 다리도 걷고, 달빛무지개분수도 감상하고

필자가 도보여행가라서 그런 것일까? 한강에 있는 다리들을 걸어서 넘기 편한 순서대로 분류를 한 적이 있었다.

1.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2. 보행로가 넓어야 한다.

3. 연결 대중교통이 있으면 좋다.

이 원칙에 의거하면 가장 손쉽게 넘을 수 있는 다리는 잠수교다. 잠수교는 보행 공간이 넓어 자동차의 위협(?)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다. 또한 남단쪽인 서초구 반포한강공원에는 버스정류장이 있고, 북단쪽인 용산구 서빙고동에는 경의중앙선 서빙고역이 가깝게 자리잡고 있다. 더군다나 잠수교는 795m로 한강 다리 중에서는 가장 짧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잠수교는 걸어서 넘을 수 있는 최적화된 한강 다리임에 틀림없다.

아시다시피 잠수교는 위쪽에 반포대교가 놓여 있다. 복층형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형태는 아니었다. 1976년에 잠수교가 건설됐고, 6년 후인 1982년에 반포대교가 추가로 건설된다. 두 다리가 동시에 세트로 지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가 않다.

잠수교는 유사시 탱크나 장갑차가 통과하는 걸 염두에 두고 건설되었다. 그래서 교량의 높이를 낮게 만들었다. 이렇게 다리가 낮다 보니 비가 많이 오면 제일 먼저 ‘잠수’를 하게 된다. 홍수 시에 한강 수위를 나타내는 척도가 되어주는 것이다.

 

 

* 잠수교: 한강을 걸어서 넘기에 좋은 잠수교

 

 

 

 

이렇게 키가 낮은 잠수교는 2008년에 4차선에서 2차선으로 차로가 축소된다. 차로는 좁아졌지만 보행로는 넓어지게 된다. 걷기 친화적인 다리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때 윗층에 있는 반포대교도 달빛무지개분수가 설치되며 새롭게 변신하게 된다. 반포대교 상판에 조명과 함께 분수 시설이 설치되어 더위에 지친 시민들의 가슴을 적셔주게 된 것이다. 형형색색의 조명과 함께 시원한 물줄기가 뿜어질 때는 관람객들의 탄성이 한강변에 울리게 된다.

지난 4월 1일 토요일, 올 해 첫 달빛무지개분수가 가동된 날이었다. 잠수교를 탐방한 후 달빛무지개분수를 보기 위해 자리를 잡으러 갔다. 하지만 명당 자리는 이미 누군가가 돗자리를 펴고 있었다. 워낙 관람객들이 많다 보니 자리싸움이 치열했다. 그런 와중에 외국인들의 목소리가 많이 들렸다. 이미 달빛무지개분수는 외국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볼거리로 자리를 잡은 듯싶었다.

축제가 빠질 수가 없다. 작년에 '차 없는 잠수교 뚜벅뚜벅 축제'가 개최되었다. 잠수교를 보행 전용 다리로 바꿀 예정인데 그에 앞서 축제를 통해 미리 체험을 해보자는 것이다. 올해는 상·하반기 10회씩, 총 20회의 뚜벅뚜벅 축제가 개최될 예정이다.

작년에 한강달빛야시장도 반포한강공원 일원에서 진행됐다. 코로나로 인해 3년 만에 다시 등장한 야시장은 이전에는 ‘밤 도깨비 야시장’으로 불렸다. 40여 개의 푸드 트럭과 60여 개의 판매부스 등이 야행을 즐기는 시민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 반응이 너무 뜨거웠던지 한강달빛야시장이 열리자 강남 일대 교통이 마비가 됐을 정도였다.

 

참고) 달빛무지개분수: 운영기간 4~10월(11월 이후 휴업)

4~10월 12:00, 19:30, 20:00, 20:30, 21:00 (20분씩 가동)

7~8월 12:00, 19:30, 20:00, 20:30, 21:00, 21:30 (20분씩 가동)

 

 

 

 

 

* 청담대교: 서울생각마루(자벌레) 옆 청담대교. 7호선 전동차가 주행하고 있다.

 

 

 

● 청담대교: 자벌레가 있는 즐거운 놀이터

지하철을 타다 보면 선호하는 구간이 하나쯤 있기 마련이다. 누구는 북한산, 수락산, 불암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4호선 상계역 구간을 좋아하는 이도 있고, 누구는 여의도의 고층빌딩과 한강의 밤섬을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는 2호선 당산철교 구간을 선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7호선 청담대교 구간을 좋아한다. 특히 한강 남쪽인 지하 구간에서 청담대교로 진입하는 그 순간을 무척이나 즐긴다. 전동차가 어두운 지하 구간에서 청담대교로 나올 때 특유의 진동음이 발생되는데 그런 소음까지도 클라이맥스를 기다리는 배경음으로 들릴 정도다. 어두운 지하 구간에서 ‘딱’하고 나오자마자 넓은 한강이 펼쳐지는 거 자체가 아주 극적이기 때문이다.

청담대교는 아래층은 7호선 철로가 위층에는 차로가 있는 복합교량이다. 본교가 1999년 12월에, 접속교는 2001년 1월에 개통되었다. 이렇게 접속교 개통까지 언급한 이유는 청담대교가 자동차 전용도로로 보행이 불가한 교량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담대교는 동부간선도로상에 있으면서 분당-수서간 고속도로와 바로 연결된다.

같은 철도도로병용교량이지만 청담대교는 동작대교나 동호대교와는 다른 이미지이다. 동작대교와 동호대교가 철로를 가운데에 두고 차로가 좌우로 있는 구조라면 청담대교는 영종대교처럼 위아래로 층층이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동작대교에서는 전동차와 자동차가 나란히 주행하는 화면이 많이 그려진다.

그런 모습을 주인공이 미소지으며 바라보고 있고... 이에 비해 청담대교는 한강변에서 청담대교를 올려보는 모습이 많이 그려진다. 주인공이 청담대교를 배경으로 한강변을 바라보고 있고, 이때 마침 전동차가 지나가는 장면이 펼쳐진다. 배경음악은 도시 감각에 맞는 음악으로...

 

 

* 청담대교: 서울생각마루 전망대에서 바라본 청담대교. 전망대에서는 청담대교를 바로 옆에서 조망할 수 있다.

 

 

 

청담대교의 북단에는 뚝섬유원지역이 있고, 그 아래에는 뚝섬한강공원이 있다. 뚝섬유원지 시절부터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곳에는 길이가 200미터가 넘는 자벌레가 산다(?). 이 자벌레는 서울생각마루라는 복합공간으로 전망시설과 함께 각종 문화시설이 들어서 있다. 자벌레는 특이한 외형 때문에 셀카 명소로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고 청담대교를 넘었다. 어두운 터널에서 ‘딱’하고 한강으로 나왔을 때의 쾌감은 여전했다. 뚝섬유원지역에서 하차한 후 커피 한 잔을 들고 자벌레 앞에 가서 셀카를 찍었다. 이때 마침 청담대교로 전동차가 지나고 있었고 도시 감각의 음악이 들리고 있었다.

이렇게 한강 다리들은 콘크리트 구조물이라는 무거운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서고 있다. 거기에 재미까지 더해졌다. 한강 다리들이 이렇게 재밌는 곳이다. 시민들의 즐거운 놀이터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참고) 서울생각마루 운영시간: 평일 및 주말 10:00 ~ 21: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 1월1일 / 설날 및 추석연휴

 

 

* 이 글은 서울시체육회에서 발간하는 격월간 <서울스포츠> 2023년 5~6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 노들섬: 노들섬 잔디마당에서 한강철교를 바라본 모습. 아파트 사이로 새남터 성지가 보인다. 

 

 

이해가 안 가시겠지만 필자는 예전에 한참 한강에 미친(?)적이 있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되는 양수리를 제 집 드나들 듯 다녔었고, 백두대간 깊은 곳에 있는 한강의 발원지를 탐방하기도 했었다. 또한 서울에 놓인 한강 다리들을 직접 두 다리로 건너보며, 어느 다리가 건너기 편한가 평가를 내리기도 했었다. 직접 도보로 건넌 다리 중에 가장 빈번하게 발걸음을 한 건 한강대교였다. 63빌딩과 한강철교를 지나 한강대교에 들어섰고, 그 발걸음의 마지막에는 노들섬이 있었다.

근현대에 들어 서울이 역동적으로 변해갔듯 한강도 크게 변모하게 된다. 물줄기가 달라지기도 했는데 그렇게 되니 전에는 없던 섬들이 생기게 됐다. 이 글은 한강에 떠 있는 섬들, 그 중에서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섬들에 관한 이야기다. 노들섬부터 서래섬을 찍고 새빛섬까지, 직접 발로 담은 이야기이다.

 

● 한 때 한강에 미친(?) 사람의 한강 이야기

본격적인 섬이야기에 앞서 한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한 때 한강에 미친 사람의 한강 이야기다. 한강은 우리에게 젓줄과도 같은 존재였던 만큼 시대마다 다양한 이름으로도 불렸다. 고구려 장수왕때 만들어진 광개토대왕비에는 ‘아리수’라고 기재되어 있다. 서울시의 수돗물 명칭인 그 아리수다. 고려시대에는 ‘열수’라고 불렸는데 크고 긴 강물이 열을 지어 흐른다는 뜻이다. 지역적으로도 다른 이름을 갖기도 했다. 임진강과 합수되어 서해로 흐르는 한강 하류 일대는 ‘조강’이라고 불렸고, 경기도 여주 지역은 여강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서울에서도 지역에 따라 세부적인 명칭을 가지기도 했다. 뚝섬과 가까운 곳에 매봉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는데 그 일대의 한강은 동호(東湖)라고 불렸다. 서울의 동쪽에 위치해 있고, 호수처럼 잔잔해서 동호라는 명칭이 붙은 것이다. 지금은 그 위로 동호대교가 놓여 옥수동과 압구정동을 연결해주고 있다. 서강도 있다. 지금의 마포지역의 한강을 서강 혹은 서호(西湖)라고 칭했다. 동호대교처럼 서강 일대에는 서강대교가 놓여 있는데 다리 아래에는 유명한 밤섬이 자리잡고 있다.

동호, 서호가 있으면 남호(南湖)도 있지 않았을까? 있었다. 지금의 용산 일대를 남호 혹은 용산강이라고 불렀다. 그 용산강 일대에 한강대교가 자리잡고 있고, 그 한강대교 아래에 노들섬이 있다.

 

 

* 노들섬: 한강대교에서 노들섬 서쪽편을 바라본 모습. 노들섬의 자랑인 잔디마당이 펼쳐져 있다. 사진 오른쪽에 큰 원반 모양의 달빛노들이 보인다.

 

 

●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노들섬

춘삼월이 코 앞이었지만 날씨가 쌀쌀했다. 63빌딩을 지나 노량진쪽에서 한강대교로 진입했다. 그러자 강바람이 매섭게 분다. 역시 강바람은 한강다리에서 맞아야 한다.

그렇게 노들섬에 들어섰다. 노들섬은 1995년 이전에는 중지도(中之島)로 불렸다. 요즘도 연세가 지긋한 분들은 노들섬은 모르셔도 중지도는 다 아신다. 중지도 시절의 노들섬은 서울의 대표적인 강수욕장이었다. 1950~60년대 자료사진들을 보면, 지금의 해운대를 빰칠 정도로 물놀이객들의 천국이었다.

노들섬은 처음부터 섬이 아니었다. 강변에 있는 넓은 모래벌판이었다. 그 모래벌판이 워낙 넓어서 군사훈련도 하고, 처형장으로도 쓰이기도 했다. 그래서 인근에 천주교 성지인 새남터가 있는 것이다.

모래벌판이었던 곳에 다리가 놓였다. 한강철교가 1900년에 놓인 후 남은 자재들을 모아 한강인도교라 불리는 한강대교가 탄생하게 되니 그때가 1917년이었다. 이때부터 모래벌판은 인공섬의 형태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중지도라는 명칭도 일제강점기인 이때 붙여진 것이다.

노들섬은 196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한강개발계획에 의해 완전한 섬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주변에 있던 모래벌판이 사라진 대신 그 자리를 강물이 메우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즈음 노들섬의 소유권이 어떤 기업체로 넘어갔다는 점이다. 소유주가 개인으로 넘어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민들의 발걸음은 뜸해지게 됐다. 개인 소유였던 노들섬을 2005년에 서울시에서 매입하게 된다. 이후 많은 개발계획이 타진됐으나 계속 무산되고 말았다. 공지로 남아 있던 섬은 도시텃밭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 한강철교: 노량진쪽에서 한강철교 라인을 따라 남산을 바라보고 있다. 이 구간에만 키 큰 건물이 없어서 남산을 겨우 볼 수 있다.

 

 

 

쌀쌀했지만 노들섬에는 많은 이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예전보다 확실히 접근성도 좋아지고 휴식공간도 많아졌다. 이렇게 편의성이 높아지니 시민들의 발걸음이 많아지는 것이다.

섬이 다시 북적북적해진 건 지난 2019년 9월 28일부터다. 노들섬이 ‘음악을 매개로 한 복합문화기지’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노들섬의 자랑인 잔디마당을 둘러본 후 향긋한 커피향을 따라 노들서가로 입장했다. 그런데 라이브공연이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역시 ‘음악을 매개로 한 복합문화’ 공간이 맞았다.

다시 잔디마당으로 나오니 마침 한강철교 위로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용산역으로 가는 기차였는데 그 철길을 따라가니 새남터 성지도 보였다. 아름다운 한강의 풍광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장소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한강철교 자체도 역사적인 장소다. 1900년에 완공됐고, 한국전쟁 때인 1950년 6월에 폭파됐기 때문이다. 한강철교가 폭파됐을 때 한강대교도 같이 폭파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

노들섬은 노을 명소다. 생각 같아서는 노을까지 보고 싶었으나 서래섬과 새빛섬 탐방을 하기 위해 서둘러 섬을 빠져나왔다. 나오는 길에 달빛노들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달빛노들은 섬의 서쪽에 설치된 둥근 원반 형태의 시설물로 그 크기가 무려 약 12미터에 달한다. 인공으로 달빛을 비추기 위해 만들었는데 유람선을 타고 갈 때 보면 꽤나 이색적이라고 한다.

 

 

 

*서래섬:서래섬에서 바라본 한강과 남산.

 

 

 

● 인공적이지만 정다운 섬, 서래섬

동작대교를 지나 서래섬에 도착했다. 서래섬에 입도(?)하니 가까운 곳에 세빛섬과 반포대교가 아주 가깝게 보였다. 반포한강공원 지구에 온 것이다.

서초구 반포동 일대에는 ‘서래’라는 명칭이 낯설지 않다. 동작역 아래로 반포천이 흐르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 하여 ‘서래’라고 칭한 것이다. 실제로 반포천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다 한강을 앞두고 크게 휘돌아나간다. 그 반포천 인근에 프랑스인들이 많이 산다는 서래마을이 있다.

위성사진을 보면 서래섬은 한강변 둑이 바둑판처럼 매끈하게 잘 다듬어졌다. 반대로 반포쪽은 산(山)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형태다. 이런 외형이 자연스럽지는 않다. 그렇다. 서래섬도 인공섬이다.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경조오부>라는 지도를 보면 지금의 반포에 기도(碁島)라는 섬이 보인다. 1960년대까지도 존재했던 기도는 한강종합개발이 시행되면서 그 형태가 사라지게 된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기도에 있던 돌들로 바둑돌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1986년, 제2차 한강종합개발사업(1982~86년)으로 서래섬이 태어났다. 하지만 처음부터 순산을 한 건 아니었다. 한강종합개발이 시행될 즈음에 일부에서는 홍수 예방에 더 적합하다는 이유로 서래섬을 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한강개발추진본부장이었던 이상연은 시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이곳에 섬을 만들기로 했고 실행에 옮긴다.

서래섬은 약 7천평 정도로 아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공섬이지만 정감있는 모습이다. 봄에는 유채꽃이, 가을에는 갈대밭이 펼쳐지니 계절마다 보여주는 색감이 달라서 좋다. 그런 배경물들이 없더라도 서래섬은 산책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다른 섬들과는 달리 산책로가 흙길로 되어있으니까.

서래섬에 입도를 하려면 약 50미터 정도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그 몇 십 미터 차이로 걷기에 퀄리티가 달라진다. 흙길을 밟으며 한강변을 산책하는 호사를 누리는 것이다. 참고로 서래섬은 3개의 다리로 진출입을 할 수 있다.

 

 

 

* 노들섬:  문화복합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노들섬.

 

 

● 세 개가 아닌 네 개의 인공섬, 세빛섬

서래섬에서 빠져나와 마지막 탐방지인 세빛섬으로 향했다. 세빛섬의 영어 명칭은 '플로팅 아일랜드(Floating Island)'다.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11년 5월에 탄생하였다. 애초 세빛섬은 3개의 빛이 내린다는 의미로 이름이 지어졌는데 처음에는 ‘세빛둥둥섬’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3개의 빛이라면 섬도 3개라는 뜻인가? 아니다. 정확히는 4개다. 처음에는 예빛섬이라는 대형스크린이 있는 미디어아트 섬이 2009년에 완공된다. 이후 가빛섬, 솔빛섬, 채빛섬이 2011년에 완공되어 현재의 외형을 갖추게 된다. 그러다 2014년 ‘세빛둥둥섬’에서 ‘세빛섬’으로 이름까지 개명하게 된다. 그간 세금 낭비라는 지적이 있었는데 ‘혈세가 둥둥 센다’는 부정적 이미지를 떨쳐버리고자 ‘둥둥’을 빼버렸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세빛섬이라고 하는데 딱 세빛섬이라고 꼬집을 수 있는 섬이 없다. 그냥 뭉뚱그려, 대표 이름으로 ‘세빛섬’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빛섬은 옆에 있는 반포대교나 그 아래 잠수교에서 바라보는게 가장 좋다. 조명이 켜진 세빛섬들 뒤로 관악산이 펼쳐져 있고, 그 위로 노을이 넘어가니 그 모습이 정말 장관이다.

이제까지 한강 중심부에 있는 섬들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나선 길이라 필자도 무척 신났다. 겨우 전철값으로 시원스러운 한강섬 트레킹을 할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던 것이다. 이야기거리도 많고 걷기에도 좋은 한강의 섬들, 여러분들도 그 발걸음에 동참하시면 참 좋겠다.

 

 

* 저자도: 성동구 옥수동에 있는 매봉산에서 뚝섬 부근을 바라본 모습. 중간쯤에 성수대교가 보인다. 성수대교를 중심으로 왼쪽이 뚝섬이고, 오른쪽이 압구정동이다. 성수대교 아래쪽 부근에 저자도가 있었다.

 

 

● 저자도와 잠실

한강의 섬 중에는 지금은 수면 아래로 사라진 전설적인 섬도 있다. 전설적인 섬? 무슨 아틀란티스 제국인가? 하여간 지금은 사라져 버린 그 섬은 저자도(楮子島)이다. ‘닥나무저(楮)’에서 보듯 종이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가 많아 저자도라고 불렸다. 이 섬은 옥수동 근처에 있다 하여 옥수동섬이라고도 칭했다. 중랑천이 한강에 합수되는 지점에 있었는데 인근에는 뚝섬도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존재 자체도 모르지만 저자도는 동서 길이가 2km에 면적이 약 35만평에 이를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다. 현재의 노들섬이 동서 길이가 약 700미터에 면적이 4만 5천평 정도이니 저자도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저자도는 선유도처럼 주위 풍광이 무척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래서 세종대왕께서도 뱃놀이를 즐기셨을 정도다. 그런 저자도도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사라지고 만다. 저자도의 모래를 퍼내서 압구정동에 아파트를 짓는데 사용한 것이다.

현재 서강대교 아래에 있는 밤섬도 1968년에 폭파되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퇴적물이 계속 쌓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저자도도 재탄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전설이 완성될지 모른다.

한강에는 섬이었다가 육지가 된 곳도 있다. 뽕나무밭으로 유명했던 잠실이 바로 그곳이다. 이렇게 말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 지금 어디를 봐서 잠실이 섬인가? 하지만 잠실은 1970년대 초반까지 잠실도(蠶室島)라고 불리던 섬이었다. 더군다나 부리도(浮里島)라는 작은섬도 거느리고 있었다. 행정구역도 강남이 아니라 강북에 위치해있었다. 강남지역의 옛 행정구역은 경기도 광주군 소속이 많았다. 이에 반해 잠실도는 한강 이북이었던 경기도 양주군 혹은 고양군에 속했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가 일어났다. 용산 일대까지 물에 잠기는 등, 서울은 직격탄을 맞게 된다. 이때 잠실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건기에는 육지와 붙어있던 섬의 북쪽에 새로운 물길이 난 것이다. 우기에만 섬이 됐던 잠실이 계절에 상관없이 섬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렇게 섬의 북쪽에 난 물길을 신천강이라고 불렀고, 남쪽의 물길은 송파강이라고 칭했다.

1971년, 잠실도는 을축년 때처럼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남쪽 물길이었던 송파강을 메워 잠실을 육지로 만든 것이다. 강의 남쪽과 붙게 되니 잠실은 한순간에 강남 지역이 됐다. 한편 메워진 송파강도 석촌호수로 물길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렇게 한강의 섬들은 저마다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퍼내도 퍼내도 끊이지 않을 거 같다. 그럼 한강섬들은 이야기 보물섬인가? 그 보물섬과 같은 곳을 찾아 오늘도 한강섬 트레킹에 나선다.

 

* 경조오부: 사진 오른쪽 하단에 '저자도'가 표시되어 있다. 하단 중앙에는 '기도'가 표시되었다.

 

 

* 잠실: 잠실의 변천사. 아래에 있는 송파강이 본류(메인)이었고, 위에 신천강이 지류(사이드)였다. 하지만 송파강을 메꿔 잠실섬이 육지화됐고, 지류였던 신천강이 메인이 되버린다. 사진은 인터넷을 참조했다.

 

 


 

@ 한강섬 트레킹

* 추천코스: 노들역 -> 한강대교 -> 노들섬 -> 동작대교 -> 서래섬 -> 세빛섬

* 길이: 약 6km

* 난이도: 하

* 교통편: 9호선 노들역에서 하차한 후, 한강대교에 진입함. 서래섬을 방문한 후에는 9호선 신반포역을 이동할 수 있음. 잠수교를 넘고 싶은 분은 경의중앙선 서빙고역을 이용할 수 있음.

 

 

 

 
 

 

 

<흑산도> 배는 안 떴고, 난 섬을 돌아다녔네!

흑산도 구석구석 탐방하기!

 

2023년 1월 11일(수) ~17일(화)

흑산도에 있었던 시기이다. 안개와 풍랑으로 인해 예정했던 날짜보다 더 오래 흑산도에 머물렀고, 그에 따라 마음껏(?) 흑산도 여행을 하게된 것이다. 기록은 시간순이 아닌 해당 여행지를 중심으로 작성하였다.

*** 2023년 1월 14일 토요일.

홍도여행이 유람선 관광 중심이라면, 흑산도는 일주도로를 따라 포인트를 찍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관광택시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항상 돈이 문제가 아닌가... 주머니가 가볍고 하니 택시는 못 타고 발로 떼우기로 했다.

흑산도는 마을이 다 해안가에 접해있다. 섬 내부의 산들이 워낙 가팔라서 마을이 들어설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이날은 그런 산들 중 하나에 오르기로 했다. 홍도에서도 깃대봉을 올랐었는데 이번에도 또 산이다! 이러다 섬 산행에 맛들이겠다.

 

 

* 상라산 전망대: 전망대에서 흑산도 북동쪽을 바라본 모습.

 

 

 

* 흑산도: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다.

 

 

 

흑산도에서 유명한 산은 칠락산이다. 해발 271미터 정도로 서울 남산 정도의 높이다. 섬 내부에 해발 404미터의 문암산이 있지만 중심지인 예리와 진리의 진산 역할을 하는 산이라서 그런지 칠락산은 꽤 인기가 많다. 이날의 이동코스는 이렇다.

칠락산 -> 반달봉 -> 상라산(전망대) -> 12굽이길 -> 무심사지

이 코스는 섬의 서북쪽의 산악 구간을 탐방한다. 홍도 깃대봉처럼 흑산도의 산들도 녹음이 가득했다. 입춘이 아직 저멀리에 있는데 푸른 숲길을 걸을 수 있다니! 인적이 끊긴 겨울 푸른 숲길을 홀로 걷고 있자니 참 묘한 느낌이 들더라. 때마침 안개가 숲길에 깔리는데... 마치 엘프가 된 느낌? 똥배나온 엘프도 있나?ㅋ

흑산도의 자랑 상라산 전망대에서 섬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배를 타고 둘러보는 것과 위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래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풍광도 위쪽에서는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맛에 산에 오르고, 트레킹을 하고 그러는 것이다.

12굽이길 탐방을 끝으로 흑산도 섬 등산을 잘 마무리했다. 12굽이길을 직접 내려가 봤는데 그 경사도가 정말 한계령 빰칠 정도였다. 이곳을 직접 가봐야 흑산도 지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 12굽이길: 상라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12굽이길과 흑산도항.

 

 

 

마지막 탐방지는 12굽이길 시작점 부근에 있는 무심사지였다. 무심사는 신라 후기시대에 만들어진 사찰이었는데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관련있는 곳이다. 상라산이 있는 섬의 서북쪽에는 후기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상라산성이 있다. 흑산도가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다보니 성을 쌓아 감시와 방어를 했고, 무심사는 배후 사찰로 역할을 했다.

무심사지에 들어서니 거대한 팽나무가 크게 두 팔을 벌리듯 맞이하고 있었다. 그 자태가 의리의리해서 석탑과 석등이 좀 위축되게 보였다. 석탑과 석등은 팽나무의 보호(?) 아래 좀 방치된 느낌이었다. 그래도 섬 지역에서 불교문화재를 보는 것이 쉽지가 않아서 그런지 무척 반가웠다.

지금은 팽나무 울타리 안에 석탑과 석등이 있다. 하지만 분리를 해서 석등과 석등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으면 한다. 안타까운 이혼이 아니라 아름다운 제자리 찾기라고 생각하며.

 

 

 

* 무심사지: 거대한 팽나무가 석탑과 석등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 무심사지 석탑과 석등

 

 

 

*** 2023년 1월 15일 일요일.

빠르게 흑산도를 돌아보고 싶다면 관광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제일 좋은 방법은 섬 일주도로를 직접 걸어보는 것이다. 흑산도 일주도로는 약 25km정도이니 2번에 걸쳐 나눠 걷는 것이 좋다. 그런데 일주도로면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아닌가? 트레킹의 첫번째 원칙이 안전이라고 숱하게 강조하지 않았나? 안전에 위배되는 행위를 추천하고 있는 것인가?

맞다. 일주도로에서는 자동차와 경합하면서 걸어야 한다. 갓길도 아주 비좁다. 그럼에도 일주도로 걷기를 추천하는 이유가 있다. 차들이 별로 안 다니기 때문이다. 1월이 비수기여서 그럴 수도 있다. 어쨌든 이동하는 자동차들이 드문드문이어서 안전이 위협받을 일은 거의 없었다.

이날은 공영버스를 타고 면암 최익현 유배지에서 하차를 한 후 유배문화공원이 있는 사리마을까지 걸어갔다. 거리로는 약 5km 정도였다.

 

 

* 손암 정약전

 

 

 

면암 최익현은 대표적인 위정척사파로 불린다. 1876년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이 맺어지자 이에 반대하는데 그 때문에 흑산도로 유배를 오게 됐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직접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운다. 이때가 그의 나이 74세였다. 하지만 일본군에게 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6년 대마도에서 순국하고 만다. 최익현 유배지는 아주 단출하다. 비석과 바위의 각자가 전부였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 그냥 스쳐지나갈 거 같다.

이후 유배문화공원이 있는 사리마을로 향했다. 일주도로는 해안가를 끼고 돌아간다. 그래서 풍광이 일품이다. 자동차를 타고 갔으면 뜀뛰기하듯 보았을테지만 느긋하게 걷다 보니 시원한 풍광을 눈에 마음껏 담을 수 있었다.

흑산도에서 동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영산도라는 섬이 있는데 이 영산도를 걷는 내내 바라보면서 걸었다. 영산도의 해안선이 위풍당당하게 뻗어있었다. 반대편 영산도에서 흑산도를 바라보면 어떤 모습일까?

 

 

 

* 사촌서당: 정약전이 후학을 양성하던 곳.

 

 

 

목적지였던 사리마을 유배문화공원에 도착했다. 이틀전인 13일에 한 번 왔으니, 두번째 방문이다. 흑산도의 남쪽에 위치한 사리마을은 손암 정약전의 유배지였다. <자산어보>로 유명한 정약전 선생은 정약용 선생의 둘째형이다.

정약용과 마찬가지고 정약전도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귀향살이를 떠나게 된다. 처음에는 완도 본섬 바로 옆에 있는 신지도로 유배된다. 이 신지도는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지금은 완도 본섬은 신지대교로, 북쪽의 고금도와는 장보고대교로 연결되어 있다.

이후 정약전은 황사형 백서 사건에 연류가 됐고, 그것 때문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는다. 정약용도 마찬가지였다. 정약용의 첫번째 유배지는 전라도 강진이 아니라 경상도 포항 장기였다. 정약용도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강진으로 이배된 것이다.

이후 각자의 유배지로 떠나게 됐는데 전라도 나주까지는 함께 동행을 했다. 나주 율현골에서 형은 흑산도 인근 우이도로, 동생은 강진으로 각자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것이 그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1816년 손암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자산어보>가 1814년에 집필됐으니 딱 2년 후에 일이다.

잠깐! 흑산도가 아니라 우이도라는 지명이 나왔다. 우이도는 흑산도에서 서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행정구역상 현재 신안군 도초면 소속되어 있다. 흑산도보다 육지쪽에 훨씬 더 가까운 곳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정약전은 흑산도와 우이도를 오가며 유배생활을 했다. 물론 흑산도에서 생활한 기간이 더 길다. 우이도에서 유배 초반기를 보내다 1806년경 흑산도 사리마을로 옮기게 된다. 그러다 1815년 우이도로 다시 옮겨갔고, 그곳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 사리항: 작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다.

 

 

사리 마을은 흑산도 중심지에서 남쪽으로 약 10km정도 떨어져 있다. 사리마을은 일주도로의 남쪽 기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일주도로가 만들어지기까지 무려 25년이 걸렸다고 한다. 왜? 흑산도의 지형이 너무 험준하니까!

현재 사리마을은 유배문화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 유배문화공원의 핵심은 사촌서당이다. 사촌서당은 복성재라고도 불렸는데 정약전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었다. 초가를 올려 복원을 해 놓았다.

유배문화공원을 찬찬히 걸으며 사리마을 일대를 둘러보았다. 돌담길이 정겹게 느껴진다. 날카롭게 서 있는 내 마음속의 철조망을 정겨운 돌담길에 잠시 내려놓았다. 돌담길이 망므도 정화시켜주네!

유배문화공원에서 나와 항구쪽으로 이동하다보면 황금색의 정약전 선생의 동상이 서있다. 좀 쌩뚱맞은 곳에 위치해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손암 선생 동상 하나 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나? 손암 선생이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유배생활에서 오는 참담함을 선생은 저 바다를 바라보면서 날려버렸을까? 바다는 말없이 철썩이고 있었다.

 

 


 

 

* 상라산전망대 트레킹

* 세부코스: 흑산면사무소 -> 반달봉(칠락산) -> 상라산(전망대) -> 12굽이길 -> 무심사지

* 길이: 약 6km

* 소요시간: 약 3시간 정도 -> 볼거리가 많으니 천천히 둘러보자

* 난이도: 중

* 교통편: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서 흑산도행 쾌속선을 탄다. 소요시간은 약 2시간. ​

* 참고: 흑산도행 쾌속선은 박스형태라 운항중에 선실 밖으로 나갈 수 없음. 그래서 멀미에 취약할 수밖에 없음. 배멀미가 심한 사람은 미리 약을 복욕하시는게 좋음.

 

 

 

겨울맞아? 푸른숲에 꽃향기까지 퍼지네!

<홍도> 동백꽃 향을 맡으며 망망대해를 바라보다니!

2023년 1월 12일 목요일.

섬 여행은 쉽지가 않다. 이번 흑산도, 홍도 여행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절실히 느꼈다. 쉽지 않았던 만큼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시간들. 그 시간들을 잊지않기 위해 기록해본다.

흑산도는 목포에서 서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진 섬으로 행정적으로는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에 속한다.

홍도는 흑산도 본섬에서도 서쪽으로 약 20km 정도 더가야 한다. 그래서 목포에서 출발한 쾌속선이 흑산도를 거쳐 홍도까지 간다. 홍도(紅島)는 석양에 물든 섬의 모습이 붉은색으로 보인다하여 홍도라 불린다.

11일 저녁에 흑산도에 입도를 해서 1박을 한 후 다음날 아침에 홍도로 이동했다. 쾌속선으로 30분 거리. 두 섬 사이가 가까워서 그런지 흑산도와 홍도는 같이 묶어서 여행을 한다. 티켓팅을 할 때 직원이, 비수기라 홍도 주민분들이 단체로 여행을 갔다고했다. 그래서 밥 먹을 식당이 없을 거라고, 친절히 안내해주셨다. 어차피 배낭에 2끼 정도의 행동식은 항상 휴대를 하니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가난한 여행자들은 배낭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 홍도: 홍도의 중심지인 홍도 1구. 홍도 초등학교의 운동장이 보인다.

홍도에 입도를 하니 정말 섬 전체가 조용했다. 흑산도는 면사무소도 있고 일주도로도 있고 해서 좀 분주한 맛이 있는데 홍도는 주민들초자 섬밖에 있으니... 상황이 이러니 홍도 여행의 필수코스라는 유람선 투어는 생각도 못할 판이었다. 비수기라 식당이 문을 닫았는데 유람선이 출항을 하겠냐고!

잠깐 여기서 흑산도와 홍도를 비교를 해보자. 일반적으로 홍도와 흑산도를 묶어서 여행하기 때문에 두 섬의 크기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홍도의 크기는 6.4㎢이고 흑산도의 크기는 19.7㎢로 3배 정도 차이가 난다. 더군다나 홍도는 경사가 워낙 급해서 자동차가 다닐 수 없다. 그래서 지도앱을 봐도 로드뷰가 없다. 이에 비해 흑산도는 해안선을 따라가는 일주도로가 있고, 그 도로를 따라 공영버스도 운행된다.

이런 지형적인 여건 때문에 여행 방식도 달라진다. 홍도는 유람선을 타고 홍도 외곽을 도는 해상 관광이 주를 이룬다. 이에 비해 흑산도는 일주도로를 따라 주요 포인트를 찍는 방식으로 여행이 진행된다. 그래서 관광택시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홍도에 와서 유람선 투어를 하지 못하니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기는 산으로 올라가야지!^^

 

 

* 깃대봉 가는길: 한 겨울에도 이렇게 푸른 숲길이다. 바닥에 동백꽃도 떨어져있다.

 

* 동백꽃

홍도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모습을 하고 있다. 마치 애벌레같은 모습이다. 섬의 ⅔ 지점에 중심지인 홍도 1구가 있고. 중앙부에는 깃대봉이라고 불리는 해발 365미터짜리 봉우리가 있다. 그 깃대봉을 넘어가면, 섬 서북쪽에 홍도 2구가 있다. 지금은 홍도 1구가 섬의 중심지이지만 처음 섬에 정착한 사람들은 홍도 2구에 닻을 내렸다고 한다.

그렇게 꿩대신 닭으로 깃대봉에 올랐다. 섬에 와서 산이라니! 그래 이 맛도 나쁘지는 않다.

중간중간에 전망대도 있고, 문화유적도 있어서 그런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코스다. 수풀 너머로 보이는 비경들은 놀라움을 선사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이 있었다. 바로 숲길이었다. 동백나무, 후박나무 등 푸른 잎으로 뒤덮힌 숲길이 눈 앞에 펼쳐지는게 아닌가? 지금 1월달 아닌가? 소한 지나서 대한으로 가고 있지 않나? 그렇게 홍도 깃대봉 숲길에서는 동장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황홀한 향취의 동백꽃이 붉게 만개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봤던 동백꽃들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숲 전체에 알싸한 동백향이 은은히 흐르고, 수풀너머로 다도해의 비경이 펼쳐지니 마치 꿈길을 걷고 있는 듯했다. 이런 동백향을 홀로 마음껏 맡게 될 줄이야! 이러다 선녀같은 동백아가씨를 만나는 거 아니야?

정신차려!. 그러다 똥배 아저씨 만날라!

 

 

* 청어미륵

그렇게 동백꽃 향기를 음미하며 걷고 있는데 청어미륵이라는 돌미륵 두 개를 만나게 됐다. 죽항마을 산길에 있다하여 죽항미륵이라고도 불리는 미륵이다. 사진에서도 보이듯 청어미륵은 매끈한 자연석을 미륵불로 모신 형태다. 통상적으로 미륵불이라고 하면 큰 돌을 잘 다듬어서 양각이든 음각이든 부처님의 형상을 새겨넣어 만든다. 혹은 돌장승처럼 마을 수호신 형태로 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청어미륵은 길죽한 돌 하나, 오목한 돌 하나를 올려놓고 남녀미륵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이름도 독특하다. 청어라니! 논산 관촉사에 있는 은진미륵처럼 동네 이름을 붙이는게 일반적인데 물고기인 청어를 접두어처럼 붙인 것이다. 역시 섬에 있는 미륵이라서 그런지 풍어(豊漁)와 관련된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있는 것이다.

 

 

* 홍도: 깃대봉 왼쪽 바다에 떠있는 바위섬들. 홍도 2구에서 가깝다.

 

 

* 깃대봉: 사진 왼쪽 중단부에 길게 늘어진 섬이 바로 흑산도다.

산길을 오를수록 숲은 더욱더 푸르렀다. 한겨울에 울창한 녹색숲을 볼 수 있다니! 이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정상에 다다르기 전에 숯가마터가 나타났다. 예전 홍도 주민들은 숯을 구워 지나가는 배에 판매하였다고 한다. 그 돈으로 쌀을 사고 소금도 샀다는 것이다. 망망대해가 끝없이 펼쳐진 섬 한가운데서 산골짜기에서나 보던 숯가마터의 흔적을 보니 좀 의아스러웠다. 달리말하면 홍도의 임산 자원이 풍부하다는 뜻일 것이다.

드디어 깃대봉 정상에 올랐다. 확트인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저멀리 흑산도가 길게 늘어진 모습으로 바다위에 누워있었다.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가 서로 맞물린 풍광을 바라보며 마음껏 사진을 찍었다. 열심히 찍었다. 이런 환상적인 곳에서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 있다니! 어쩌면 이것도 정말 행운인 듯싶다. 셀카봉을 가져오길 잘 했어~^^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와 그 위에 둥둥 떠있는 것처럼 보이는 섬들의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2년 전에 다녀왔던 거문도가 연상되더라. 거문도도 홍도처럼 숨어있는 비경을 품고 있어서 그런 것이다. 둘 다 이쁘니 둘을 같이 묶어서 생각하는 것이지!

그렇게 해서 짧은 홍도 섬 산행(?) 여행을 마치고 다시 흑산도로 돌아왔다. 숙소에 도착하니 비가 내린다. 일정이 끝나고 비가 내리니 다행이지.


* 세부코스: 홍도여객선터미널 -> 흑산초등학교 -> 전망대 -> 청어미륵(죽항미륵) -> 숯가마터 -> 깃대봉

* 길이: 약 2.5km -> 지리적 여건상 원점회귀를 해야 함. 그래서 총 5km로 잡고 이동해야 함.

* 소요시간: 약 3시간 정도(왕복시간임)

* 난이도: 중

* 교통편: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서 홍도행 쾌속선을 탄다. 소요시간은 약 2시간 30분. 홍도에 내려서는 도보를 통해 이동해야 함. 홍도에는 자동차가 다닐 수 없음.

* 참고: 홍도행 쾌속선은 박스형태라 운항중에 선실 밖으로 나갈 수 없음. 그래서 멀미에 취약할 수밖에 없음. 배멀미가 심한 사람은 미리 약을 복욕하시는게 좋음.

 

* 홍도: 깃대봉쪽에서 바라본 홍도의 남쪽면.

 

 

* 깃대봉: 홍도 깃대봉 인증샷.

 

달맞이 하러 가자! 월류봉으로 달보러 가자!

<영동여행> 월류봉둘레길 따라가는 길, 월류봉에서 반야사까지

 

충북 영동하면 무엇이 생각나시나? 이웃 옥천과 더불어 포도 생산지로 유명하다보니 와인의 고장으로 영동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미감을 자극하는 와인처럼 영동에는 우리의 시각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풍광들도 정말 많다. 백두대간이 영동을 통과하기에 그런 풍광들이 펼쳐지는 것이다.

영동에서 가장 유명한 백두대간의 지명이 추풍령(秋風嶺 )과 민주지산(珉周之山)인데 그 둘의 고도차가 무려 1000미터에 달한다. 추풍령이 221미터이고, 민주지산이 1,241미터이다. 정말 흥미로운 대목이다. 참고로 추풍령은 민주지산에서 북동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백두대간중에서 가장 고도가 낮은 지점으로 불린다.

이런 영동에서도 가장 으뜸인 곳을 꼽으라면 월류봉(月留峰)이 가장 먼저 꼽힐 것이다. 월류봉은 달이 머물다 갈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곳이다. 그래서 많은 풍유객들이 음풍농월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깎아질 듯한 바위산 아래로 금강의 상류인 초강천이 힘차게 흐르고 있고, 그 위에 그림처럼 월류정이 자리잡고 있으니 당연히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 월류봉

 

 

 

월류봉은 해발 400미터로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굽이굽이 흐르는 초강천과 이웃한 석천이 어우러져 빼어난 산수(山水)의 조화를 뽐내는 곳이다. 월류봉은 영동군 황간면에 위치해있는데 여기서 황간이 어떤 곳인지 잠시 알아보자.

지금은 '면'이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황간은 황간현이었다. 그래서 지방관으로 현감이 파견되었는데 지금의 추풍령면과 황간면 등이 황간현의 영역이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황간현과 영동현이 합쳐져서 영동군이 된다.

월류봉에서 동남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황간역에서 내려 트레킹을 시작했다. 황간역은 작은 간이역이다. 하지만 황간역은 경부선이 개통할 때부터 만들어진 역이었다. 지금은 간이역으로 소박하게 변했지만 무려 백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역사인 것이다.

영동군은 일찍부터 경부선 철도가 들어서고,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영남을 잇는 추풍령의 존재자체가 영동군의 지리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지역에 철도와 도로가 놓이니 예전부터 인공적으로 교각들이 세워진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이렇다. 산이 깊은 만큼 물도 많이 흐르고, 그러다보니 굴다리같은 형태의 다리 시설물이 많이 건설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굴다리는 비상시에 대피소 역할을 해준다. 피난길을 떠난 이들에게 잠시나마 쉼터 역할을 해준다.

 

 

* 쌍굴다리: 월류봉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다.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1950년 7월 26일경,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 있는 쌍굴다리에도 그렇게 피난민들이 모여들었었다. 여기서 노근리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자. 한국전쟁 발발 이후 약 1달이 지났을 때였다. 피난민들은 고단한 발걸음으로 남쪽으로 이동해갔다. 그렇게 추풍령을 넘으면 영남이었다. 당시는 여름이라 비를 피하거나 햇빛을 막기위해 쌍굴다리로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그 쌍굴다리 위로는 지금도 경부선 기차가 달리고 있다. 참고로 노근리 쌍굴다리는 1934년에 건설되었다.

그런 피난민들에게 공중에서는 폭탄이 떨어지고, 땅에서는 기관총이 난사된다. 7월 26~29일까지, 3일에 걸쳐서 벌어진 노근리 학살로 인해 무고한 피난민 250~300명이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미군에 의해 벌어진 노근리 학살이다.

이 노근리 사건은 월간 <말>지 기자였던 오연호가 10년에 걸쳐 심층적으로 보도를 했었다. 하지만 국내외 언론들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1999년 9월 30일, 미국 AP통신에 의해 노근리 사건이 특종으로 보도되었다. 이때부터 노근리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큰 관심을 받게 된다. 이후 2001년 1월 12일에는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클린턴이 유감을 표하게 된다. 기왕 언론을 타려면 외신을 타야 되는 것인가? 오연호는 현재 <오마이뉴스>의 대표로 있다.

학살이 있었던 쌍굴다리 앞쪽으로는 현재 노근리평화공원이 있다. 시간이 되신다면 노근리평화공원과 쌍굴다리를 탐방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싶다. 평화공원에서 북동쪽으로 뾰족하게 보이는 봉우리가 바로 월류봉이다.

 

 

 

* 쌍굴다리: 아직도 현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월류봉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나라 산악지대를 감싸고 있는 하천들이 다 그렇듯 월류봉을 감싸고 도는 초강천도 감입곡류의 형태를 띄고 있다. 감입곡류천은 말그대로 하천이 굽이굽이 감싸고 돌아나간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천이 지형을 감아돌아 나가니 특이한 지형도 형성되는 것이다. 강원도 영월의 한반도 지형과 충북 옥천의 역한반도 지형이 바로 그것이다.

월류봉 중턱 아래쪽에 월류정이 있는데 그 월류정에서 감입곡류 형태를 명징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한반도 지형이나 역한반도 지형은 좀 떨어진 위쪽 전망대에서 관망하는 방면에 월류정은 근거리에서 관찰한다는 차이가 있다. 월류정은 가까이에서 바라보니 직접 물소리를 들을 수도 있어서 청각적으로도 만점이었다.

이렇게 빼어난 산수를 자랑하니 예로부터 이 일대를 한천팔경(寒泉八景)이라고 칭했다. 한천팔경은 제 1경 월류봉을 위시하여 사군봉(使君峯)·산양벽(山羊壁)·용연동(龍淵洞)·냉천정(冷泉亭)·화헌악(花獻岳)·청학굴(靑鶴窟)·법존암(法尊巖)으로 이루어져 있다. 월류봉의 여러 모습들을 다른 명칭으로 부른 것이 대부분이다.

 

 

 

* 월류봉

 

 

 

월류봉은 서인의 거두이자, 인조부터 숙종 때까지 정계에 큰 영향력을 끼친 송시열과도 관계 깊은 곳이다. 우암 송시열은 작은 정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했는데 그곳이 바로 한천정사(寒泉精舍)라는 곳이다. 한천팔경이 바로 한천정사에서 나온 명칭이다. 원래는 냉천팔경이었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과 관련되서 가장 유명한 유적지는 충북 괴산에 있는 화양구곡이지만 한천정사도 사료적 가치가 꽤 높은 곳이다. 원래 이곳에는 송시열을 기리는 한천서원이 들어서있었다. 그러다 서원철폐령에 의해 서원이 철폐되었고, 이후 이 지역 선비들이 한천정사를 지어 송시열의 학문을 이어나갔다. 지금도 송우암 유허 비석과 함께 한천정사가 보존되어 있다.

이제 월류봉을 뒤로 하고 초강천의 지류인 석천(石川) 을 따라 반야사 방면으로 이동한다. 석천은 백화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가는데 그 상류에 반야사가 있다. 그 석천을 따라 월류봉 둘레길이 2021년에 개통된다. 석천은 한자명처럼 돌이 많은 하천인데 기암괴석들을 바라보며 걷는 맛이 있다.

경쾌한 물소리를 들으며 약 8km를 이동하다보니 어느새 둘레길의 종점 부근이다. 이제 마지막 탐방지인 반야사(般若寺)를 둘러볼 차례다. 반야사는 상원화상이 후기 신라시대인 720년(성덕왕19)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보다 약 50년 정도 앞선 문무왕 시절에 원효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상원은 의상대사의 십대 제자들 중에 한 명이다.

 

 

 

* 월류봉둘레길

 

 

 

* 월류봉둘레길

 

 

 

반야사는 조선 전기였던 세조 시대에 크게 중창된다. 피부병 때문에 고생을 하던 세조는 속리산에서 있던 신미대사를 만나러갔고, 이후 신미대사와 함께 반야사와 대웅전에서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속리산이 있는 충북 보은과 영동은 그리 멀지 않다.

신미대사는 세조가 깊이 신뢰하는 인물이었다. 세종대왕과도 인연이 깊었다. 그런 신미대사가 속리산 중턱에 있는 복천암에서 머무르고 있었고 세조가 그곳까지 찾아간 것이다. 속리산 복천암에서 세조는 3일 동안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런 기도가 통했던 것일까? 세조가 약사여래의 명을 받은 월광태자의 도움으로 피부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런 기적이 행해진 곳이 바로 속리산 목욕소이다.

반야사에 들어서면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는 돌무더지가 탐방객들의 눈길을 끈다. 돌무더지가 있는 곳은 바로 백화산인데 다른 곳은 다 풀숲으로 덮혀있지만 딱 그곳만 돌무더지로 노출되어 있다. 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상상력을 동원한 것이다. 호랑이 형상이라고.

 

 

 

 

 

* 반야사삼층석탑: 고려전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으로 200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뒤쪽에 미끈한 배롱나무가 보인다.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곳이라 그런지 영동군은 호랑이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다. 월류봉에서 가까운 황간면 소계리 성주골에는 호총이라 불리는 호랑이 무덤이 있고, 바로 옆동네인 매곡면 노천리 내동마을에는 호랑이 공덕비가 있다. 반야사의 호랑이 돌무더지도 이런 친호랑이(?)적인 동네의 분위기와 맥이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경내에 들어서면 속살을 드러내듯 미끈한 모습의 배롱나무가 보인다. 나무를 잘 탄다는 원숭이도 배롱나무에서는 떨어진다는데 그 말이 맞는 듯싶다. 아주 매끈하다. 배롱나무 아래에 있는 삼층석탑은 인근에 있는 탑벌이라는 곳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반야사 삼층석탑은 일부분이 새로 채워지기는 했지만 고려전기시대의 탑 형식을 잘 나타내고 있어 2003년에 보물로 지정됐다.

이제 마지막으로 반야사 문수전을 보러가자. 망경대(望景臺)라고 불리는 곳에 문수전이 있는데 약 10분 정도 올라가야 한다. 계단이 좀 많기는 하지만 올라갈만 하다. 드디어 문수전에 닿았다. 올라온 보람이 있다. 백화산 호랑이 돌무지는 더 잘 보였고, 석천은 물줄기를 뿜으며 굽이굽이 흐르고 있었다.

 

 

 

* 백화산 돌무지: 저 돌무지가 호랑이로 연상되시나? 호랑이 형상이 가장 명징하게 드러날 때는 눈이 온 뒤라고 한다. 아쉽게도 방문했을 때 눈이 오지 않았다.

 

 

 

문수전 아래쪽의 석천을 따로 영천(靈泉)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서 설화가 있다. 반야사 대웅전에서 참배를 마친 세조에게 문수보살이 나타난다. 문수보살은 절 위쪽에 있는 계곡으로 가서 몸을 씻으라고 한 후, '왕의 불심이 깊어 부처님의 자비가 따른다"라는 말과 함께 사라진다. 이에 흡족한 세조는 어필을 하사한다.

석천도 월류봉 아래 초강천처럼 감입곡류 하천이다. 그래서 휘돌아가는 부분은 물줄기의 속도가 약해진다. 그 구간에 속리산 목욕소만한 공간이 있다. 그곳이 바로 영천이다.

왕이 씻은 곳이니 왕탕인가? 그냥 선녀탕이 더 좋은 거 같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세조는 속리산 목욕소에서 월광태자를 만나는 기적을 맞이한다. 이후 반야사에서는 문수보살도 만난다. 문수보살은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오대산에서도 또 만난다. 한 번 만나기도 힘든 인물들을 여러번 만나는 것이다. 마치 한 번 맞기도 힘든 로또를 여러번 맞은 것이다.

왜 그렇게 세조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을까? 덕업이 많았던 세종께서 설화와 연결이 되시던가? 정조께서는 어떤가? 세조는 불교의 신앙적 대상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도덕적인 흠결을 메꾸려고 했던 거 같다. 참고로 약사여래는 병을 치유하는 부처님이고,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월광태자는 대가야의 마자막 왕으로 나라가 망한 뒤 월광사를 지어 그곳에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 석천: 반야사 문수전에서 바라본 석천. 저 아래에도 둘레길이 있다. 저 길을 따라가면 경북 상주시 모동면이 나온다.

 

 

 

불교에서 '반야'는 '인간이 진실한 생명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근원적인 지혜'를 뜻한다. 문수보살은 보살중에서 지혜를 수호한다.

불교 설화로 자신의 흠결을 덮을 수는 없다. 세조도 질병으로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 또 그렇게 어렵게 오른 용상에서 불과 13년 만에 내려오지 않았던가. 같이 묶어서 생각하는게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연산군이 12년, 광해군이 15년동안 보위에 있었으니 생각보다는 재위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던 것이다.

덕업은 쌓지 못하더라도 악업은 쌓지 말자! 요즘 필자가 곱씹고 있는 말이다. 나름 실천할 수 있는 '반야'같은 '지혜'로운 말이라고 생각한다. 아참 계속 곱씹고 있는 말이 또 있다.

- 세상은 넓고 트레킹할 곳은 많다!

 

 


 

 

* 세부코스: 월류봉 -> 한천정사 -> 원촌교 -> 목교 -> 반야교 -> 반야사

* 길이: 약 8km

* 소요시간: 약 3시간 30분 정도

* 난이도: 하

* 교통편: 황간역은 작은 간이역이라 기차 편수가 많지 않음. 황간역에서 월류봉까지는 약 2km 정도 떨어져 있음. 영동역은 좀 더 큰 역이라 기차 편수가 많음. 영동역에서 하차한 후 공영버스를 타고 황간역 부근으로 이동할 수 있음. 이때 중간에 노근리평화공원에서 하차할 수 있음. 영동역에서 노근리평화공원까지 약 25분 정도 소요됨.

* 참고: 월류봉에서 반야사까지는 약 8km 정도임. 문제는 반야사에 공영버스가 다니지 않는다는 점임. 콜택시를 부르거나 왔던 길을 되돌아와야 함. 필자는 왔던길을 되돌아왔음. 그날 약 20km를 걸었음.

 

 

 

 

 

* 남산탑곡마애불상군: 바위의 동쪽편이다. 사진 왼쪽에 삼층석탑이 보인다.

 

 

 

<경주> 득템한 느낌이야! 이런 사진을 찍다니!

- 계림숲부터 남산 마애불까지 걷고, 찍고

 

 

* 2022년 12월에 경주를 다녀왔습니다. 그중 12월 21일에 행한 경주 여행을 약식으로 스케치한 기행문입니다.

이번 경주 여행의 중심축은 황리단길과 첨성대였다. 아침에 황리단과 첨성대를 보고 출근(?)했다 저녁에 다시 황리단과 첨성대를 찍고 퇴근(?)하는 식이었다. 그러고보니 황리단길만 거의 왕복 4회 정도 한 거 같다. 누가보면 경주 시민인 줄 알겠다.

이날은 경주여행의 마지막날로 계림숲을 시작으로 월정교를 넘어 경주 남산 일대를 탐방지로 삼았다. 구체적인 코스는 이렇다.

계림숲 -> 경주향교 -> 월정교 -> 상서장 ->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 -> 남산탑곡마애불상군 -> 국립경주박물관

얼핏보면 상당한 거리를 이동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계림숲, 월정교, 경주향교는 하나로 묶일만큼 서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있다. 계림숲은 신라 건국초기부터 조성된 숲으로 경주 김씨의 시조 김일지의 탄생 설화를 품고 있는 유서깊은 숲이다. 그러고보니 거의 조성된지 거의 이천년 정도된 숲이다. 그래서일까, 계림숲에 입장할 때의 느낌이 무언가 달랐다.

 

 

* 계림숲

 

 

 

* 월정교

 

 

 

월정교는 경주 중심부와 남산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남천 위에 놓여진 다리이다. 경덕왕 19년(760년)에 만들어졌는데 지금의 다리는 2009년에 복원을 한 것이다. 거대한 누각식으로 만든 월정교는 야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첨성대와 함께 야경투어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고운 최치원의 숨결이 살아있는 상서장을 탐방한 후 드디어 경주 남산에 들어섰다. 최치원은 신라말 3최라 불릴 정도로 천재적인 인물이었다. 12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18살에 과거시험 합격하게 된다. 이후 29살까지 당나라에서 관직 생활을 하다 고국인 신라로 돌아오게 된다.

최치원은 6두품이었다. 금의환향을 했지만 그의 신분적 한계는 명백했다. 당시 신라는 지방 호족세력들의 발호로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때 최치원은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조를 올려 당시의 폐단을 바로 잡고자 했다. 하지만 진골 출신들의 견제로 인해 그의 의견은 묵살된다. 이후 그는 야인이 되어 세상을 등지게 된다.

그 시무 10조를 작성했던 곳이 바로 상서장이었다. 상서장의 앞쪽에는 고운대라는 바위가 있는데 최치원의 호를 따서 이름을 지은 바위다. 최치원은 고운대에 올라 왕성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 고운대: 상서장 입구 옆쪽에 있다.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과 남산탑곡마애불상군을 탐방할 차례다. 경주 남산은 불국토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불교 유적들을 품고 있는 곳이다.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은 큰 바위에 인공적으로 감실을 파고 그곳에 부처상을 조각을 했다. 할매부처, 감실부처라고도 불린다. 감실은 불상이나 신위 등을 모시는 공간을 말한다.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은 높이가 1미터 정도로 크지는 않지만 신라 불교의 초기 유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는 단단한 화강암이 많은 지역이라 바위에 무언가를 새기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에 비해 유럽의 조각가들은 좀 수월했을 것이다. 왜? 그 지역은 화강암보다는 좀 무른 석회암 재질이 많으니까!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을 뒤로 하고 호젓한 산길을 따라 내려갔더니 차도가 나왔다. 그 길 위에 표지판이 있었고, 그 표지를 따라 남산탑곡마애불상군을 탐방하러 갔다. 남산탑곡마애불상군은 옥룡암이라는 사찰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

 

 

*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

 

 

 

* 남산탑곡마애불상군

 

 

 

'마애불상군'이라는 명칭처럼 수많은 조각들이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통상적으로 마애불은 부처님 한 분을 조각하거나 좌우 협시불을 더 조각하는게 일반적이다. 한마디로 많아야 세 분 정도를 새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탑곡마애불상군은 바위에 다양하게 새겨 넣었다. 바위를 동서남북으로 잘 활용하여 각 면마다 불교 문물을 새겨 넣은 것이다.

부처님 형상은 물론 탑과 괴수들도 보인다. 탑? 그렇다. 바위에 탑도 새겨져 있다. 9층과 7층, 두 개나 새겨져 있다. 바위에 새겨져 있으니 마애탑인 것이다. 바위에 탑을 새길 수 있냐고 물으실 수도 있는데... 바위에 종을 새긴 경우도 있다. 그건 마애종이다. 서울 관악산 옆에 삼성산이라고 있는데 그곳에 마애종이 있다. 김중업 건축박물관 인근에 있다.

바위를 동서남북으로 활용을 해서 그런지 남산탑곡마애불상군은 사면불이라고도 불린다. 삼층석탑이 있는 곳이 남쪽인데 오른쪽의 계단을 따라 올라갈 수 있다. 북쪽, 동쪽, 서쪽의 조각상들은 올려봐야 하는데 남쪽의 조각상들은 올려보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게 다른 점이다.

동서남북을 돌면서 엄청나게 사진을 많이 찍었다. 이날 아침에 눈과 비가 섞여왔는데 그 여파로 남산 일대는 물안개가 머금고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신령스러운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귀한 문화재를 보고 있는데 물안개까지 살짝 끼다니...!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 배낭이 대신 인증을 해주고 있다. 부처님을 모신 마애불이 있다하여 이 일대 골짜기는 '불곡'이라고 부른다.

 

 

 

* 남산탑곡마애불상군: 바위 북쪽이다. 여기에 탑이 그려져 있다. 탑이 그려진 바위가 있다하여 이 일대 골짜기는 '탑곡'이라고 불린다.

 

 

 

* 남산탑곡마애불상군: 바위의 남쪽면이다. 이 불상군 앞쪽에는 족구장만한 공간이 있고, 한쪽편에 삼층석탑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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