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종교다원주의자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후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미사에 참여했었는데 그때 큰 감흥을 느꼈었다. 사찰을 탐방하는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는 합장부터 하며 가람을 누볐다. 또한 간간이 교회도 갔고, 그 곳에서 이웃 사랑에 대해서 곱씹어 보기도 했다.

 

무속신앙도 빠질 수 없다. 친분이 있는 무속인이 있는데 작두를 아주 잘 탔다. 그 분 따라 작두잡이를 여러 번 해봤다. 작두잡이를 할 때는 절대 말을 해서는 안 되기에 입에다 ‘함’을 물린다. 작두굿은 유혈이 낭자하는 경우가 많기에 항상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그렇게 작두굿은 종료가 되고 관객들은 한 명씩 차례로 공수를 받는다. 공수는 신이 무당의 입을 빌려 전하는 메시지이다.

그때서야 작두잡이들도 긴장감에서 해방이 되어 입에 문 함을 뱉어낸다. 침방울로 범벅이 된 함을 그냥 태울 것인가? 안 된다. 함을 열어봐야한다.

“앗싸 돈 들어있다! 작두잡이 값이다.”

* 인왕산 성곽길

● 바위산인 인왕산

이번에는 우리나라 무속 신앙의 메카 같은 곳을 향해 간다. 그곳은 인왕산에 있는 선바위다.

인왕산은 바위산이라 그런지 돌이 많기로 유명하다. 호랑이바위, 투구바위, 해골바위 등등... 독특한 형상을 한 바위들이 참 많다. 원래 인간은 자연이 빚어놓은 형상에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다. 무생물에도 영혼이 있다는 애니미즘(animism)이 바위에도 투영되니 거석숭배문화가 발생했다. 인왕산 선바위는 그런 애니미즘적인 거석숭배문화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선바위는 가로 7미터, 세로 10미터 정도로 인왕산의 남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규모가 큰 바위인데다 워낙 독특하게 생겨서 멀리서도 그 자태를 알아볼 수가 있다. 하지만 인왕산에 다른 바위들이 많은 터라 좀 자세히 봐야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

선바위를 비롯해 인왕산의 남서부 일대를 한 발짝 떨어서져 조망하고 싶다면 인왕산이 아닌 그 앞쪽에 있는 안산(鞍山)에 올라가보자. 안산은 무악재 고개를 사이에 두고 인왕산과 마주하고 있는 산이다. 서대문 형무소가 위치해있을뿐더러 유명한 안산자락길이 있어 도보여행자들의 발길을 불러 모으고 있는 산이다. 그 무악재에는 2017년에 무악재하늘다리가 놓여서 두 산을 연결하고 있다.

안산은 ‘편안한 안(安)’이 아닌 ‘안장 안(鞍)’을 쓴다. 산이 말 안장처럼 생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말 안장 형상을 제대로 인지하려면 인왕산, 그 중에서도 선바위 인근에서 바라봐야 한다. 가까이에서 봐야 제대로 알 수 있는 게 있고, 반대로 멀리서 봐야 그 전체 틀거리를 알 수 있는 게 있다.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닌가? 상황에 따라 줌인 / 줌아웃을 적절히 해야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 선바위

 

 

● 선바위와 국사당

선바위를 한자로 쓰면 '선암(禪岩)'으로 '스님바위'라는 뜻이 된다. 승복을 입은 선승이 참선을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선바위를 자세히 보면 단일 암석이 아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붙어 있는데 이것을 두고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영혼이 나란히 깃들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렇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 보니 선바위는 예로부터 아이를 갖기 원하는 이들의 좋은 기도처였다고 한다. 쌍둥이 바위는 다산을 뜻하니까. 요즘같이 저출산 시대에는 ‘애국자 바위’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암석에서 치성을 드리는 것을 두고 거석숭배문화라고 한다. 이 거석숭배문화는 우리 민간신앙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선바위는 이런 거석숭배문화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바로 산악신앙이다.

우리 옛 선인들은 산을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였다. 물이 샘솟고, 과실과 약초들이 산재해 있으며, 연료인 나무들을 채취할 수 있으니 산은 인간에게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산을 마냥 좋은 것만 주는 존재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사나운 맹수들이나 험준한 지형이 항상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인 산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드렸다. 산에 사는 신령, 즉 산신령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산악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런 산악신앙은 우리 무속신앙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바위 아래에는 국사당(國師堂)이라는 신당이 있다. 이 국사당은 원래 남산에 있던 신당이었다.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395년(태조4), 이성계는 목멱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았다. 그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당이 세워졌는데 이것을 국사당, 또는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 불렀다.

이 목멱신사에서는 봄과 가을에 국가의 공식행사로 제례를 올렸다. 유교중심주의를 표방하며 건국된 조선에서조차도 산신령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렇게 목멱대왕을 모셨던 국사당은 192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일제가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세웠는데 자기들의 신궁 위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것이다. 국사당이 선바위 부근으로 옮겨오게 된 건, 인왕산이 무학대사의 기도처였기 때문이었다. 국사당(國師堂)에서 '국사(國師)'는 무학대사를 뜻한다.

“제가 예전에 작두 좀 탔습니다.”

국사당 앞에는 작두를 타는 단이 있는데 그 앞에서 좀 있어 보이려고 저런 멘트를 했었다.

 

“정말요? 무섭지 않았어요?”

“작두날이 날카롭지 않아요? 피 날 거 같은데.”

“아니 제가 탔다는 게 아니라... 전 작두잡이를 하면서요... 작두잡이 하면 돈도 입에다 물려줘요. 공수도 받고, 돈도 받고...”

돌아오는 반응은 항상 작두의 날만큼 매서웠다. 그럼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궁색해져 돈 타령으로 급히 마무리 할 수밖에...

 

 

* 국사당: 국사당에는 당연히 주차장이 없다. 그래서 제사 물품을 지게로 나른다. 최첨단 시대이지만 한편으로는 올드 스타일도 존재하는 법이다.

 

● 무학대사와 정도전, 그리고 선바위

선바위는 한양도성에서 직선거리로 3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두냐 마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 간에 격론이 오갔다. 불교세력을 대변했던 무학대사는 당연히 선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교세력을 대변했던 정도전은 이 스님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크게 반대했다. 선바위가 들어오면 도성 안에 불교가 융성해질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첨예하게 오갔던 격론은 이성계에 의해 결론이 났다. 선바위가 도성 밖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불심이 깊은 이성계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유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200년 안에 큰 전란이 있을 것이고, 국운이 기울 것이라는 큰 저주(?)를 내뱉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이 선바위를 두고 오갔다던 ‘무학대사 VS 정도전’ 간의 갈등은 정사가 아닌 야사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선바위를 두고 오갔던 두 사람의 갈등은 <조선왕조실록> 같은 공식적인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이런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일까? 선바위 논쟁이 입에서 입으로 흘러나왔던 건, 실제로 조선이 건국한 후 약 200년 뒤에 일어난 조일전쟁(임진왜란) 때문이었다. 당시의 민중들이 어떤 식으로든 전란에 대한 유학자들의 책임을 묻기 위해 선바위와 무학대사를 무대로 등판시켰다는 것이다. 도성을 버리고 떠난 왕과 사대부들에 대한 원망을 선바위와 무학대사에 기대어 풀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나라 무속의 메카답게 오늘도 선바위에는 많은 이들이 와서 기도를 올린다. 아이를 낳게 해 줄 수 있는 바위라 그런지 확실히 여성들이 더 많다. 신엄마, 신딸로 보이는 무속인 무리들도 자주 보인다. 심지어는 외국인 여성도 와서 기원을 드리더라. 확실히 선바위의 기도빨이 좋긴 좋나보다. 그 여성 외국인은 무아지경에 빠진 듯 꽤 오랫동안 묵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선바위 앞에서 필자도 조심스럽게 합장을 하였다. 무슨 기원을 드렸을까? 로또대박? 역사트레킹이 잘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역사트레킹만큼은 정말 잘하고 싶으니까!

 

* 선바위와 한양도성: 선바위의 뒷모습. 선바위가 한양도성을 응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 눈내린 인왕산 성곽

 


■ 선바위

1. 코스: 안산자락길 ▶ 무악재하늘다리 ▶ 선바위 ▶ 국사당

2. 가는법: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하차한 후 선바위로 바로 올라갈 수 있음. 하지만 안산자락길을 좀 걸은 후 무악재하늘다리를 통해 선바위를 탐방하는 코스를 추천함. 길도 예쁘고 완만해서 부담없이 걸을 수 있음.

3. 같이 가면 좋을 곳: 인왕산 수성동계곡

* 선바위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만약 서울에 북한산이 없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쓸데없는 가정을 한 번 해본다. 북한산이 품고 있는 울창한 숲, 아름다운 풍광, 풍부한 문화유산 등등... 이런 것들이 사라진다면 서울은 정말 밋밋한 도시가 됐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그만큼 서울 사람들은 북한산의 덕을 제대로 보고 있는 셈이다. 이번편은 진관사에 대한 글인데 이 진관사도 북한산이 품고 있는 문화유산 중에 하나다.

* 진관사 극락교

● 삼각산이라 불렸던 북한산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북한산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북한산은 예전에 삼각산(三角山)이라는 명칭으로 더 많이 알려졌었다. 세 개의 봉우리가 삼각뿔처럼 생겼다하여 삼각산이라고 불린 것이다. 그 세 봉우리는 백운대(837m), 인수봉(810m), 만경대(800m)이다. 예전에 봉우리 이름을 외우려고, 앞 글자를 따서 ‘만백인’으로 외웠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백만인’이 더 잘 머릿속에 남을 거 같다. 한편 북한산의 정상은 인수봉이 아닌 백운대다. 인수봉이 유명해서 그런지 인수봉이 최정상인지 알고 계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지가 않다. 더군다나 인수봉은 일반 등산으로는 오르지 못하고 클라이밍 장비로 암벽 등반을 해야만 도달할 수 있다.

다른 산들도 마찬가지겠지만 북한산도 동서남북이 제각각이다. 삼각뿔이 자리 잡고 있는 동쪽은 높은 봉우리들이 장벽처럼 연이어 서 있다. 이에 비해 서쪽은 비교적 낮은 봉우리들이 올망졸망하게 늘어서 있다. 그렇게 동서간의 고도차이 때문인지 북한산의 물길은 동쪽보다는 서쪽이 더 완만하다. 계곡트레킹을 하기에도 서쪽편이 더 낫다.

이번에 탐방할 진관사도 북한산의 서쪽에 있다. 진관사를 가려면 3호선 구파발역에서 진관사행 시내버스를 타면 쉽게 도달할 수 있다. 15분 정도 타고 이동을 하는데 차창밖 풍경이 예뻐서 지루하지가 않다. 다른 방법도 있다. 6호선 독바위역에서 하차한 후 진관뉴타운 방면으로 북한산둘레길을 따라 걸으면 진관사에 도달할 수 있다. <진관사 역사트레킹>을 이렇게 행하는데 볼거리도 많고, 문화유산도 많아서 많은 이들에게 별표 5개를 받고 있다. 진짜다.

 

“와! 멋지네요. 서울에 이렇게 큰 한옥마을이 있었어요?”

“네 있었어요. 한옥하고 북한산하고 잘 어울리죠.”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진관한옥마을이 탐방객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진관한옥마을은 진관뉴타운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는데 수도권에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한옥마을이다.

* 진관사: 대웅전 앞에 쌍석등이 있다.

 

● 서울의 4대 명찰 진관사

진관사는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4대 명찰 중에 한 곳이다. 4대 명찰은 조선 세조 때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서쪽에 진관사, 동쪽에 불암사, 남쪽에 삼막사, 북쪽에 승가사를 지정하였다. 왕실의 번영을 위해 지정된 사찰들이었기에 이 사찰들은 명찰이라 불리며 승격이 높았다.

일주문과 불이문을 지나 진관사 경내로 들어가자. 초가지붕을 얹은 연지원에서 흘러나오는 향긋한 차향에 이끌리어 발걸음을 멈추지 말자. 바로 대웅전으로 이동하자.

 

“와, 좋네요. 무언가 탁 트인 느낌이에요.”

“뒤쪽에 있는 봉우리하고 대웅전하고 잘 어울려요.”

 

수강생들은 이구동성으로 감탄사를 외쳤다. 진관사는 계곡 지형에 위치해 있는데 대웅전 뒤쪽편의 봉우리는 비교적 아담하지만 상류쪽으로는 높은 봉우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 탁 트인 시야와 웅장한 모습을 동시에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대웅전 앞에서는 매번 이런 해설을 했었다.

“진관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사찰인데요. 보시다시피 본당인 대웅전 앞에 탑이 없고, 대신 석등이 2개가 있어요. 통상적인 가람 구조에서 벗어난 형태에요.”

옛 사찰들은 본당 앞에 탑을 세웠다. 본당 하나에 탑이 하나있는 것을 1당 1탑이라고 한다. 1당 2탑도 있다. 말 그대로 하나의 본당 앞에 쌍탑이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진관사의 대웅전 앞에는 탑 대신에 쌍석등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래서 통상적인 가람 구조에서 벗어났다고 말한 것이다. 있어 보이려고, ‘에헴’하고 헛기침도 하면서 해설을 했지만...

“곽작가님, 우리 빨리 단체 사진 찍어요.”

해설 실력이 약하나? 꼭 그렇지는 않은데. 그래, 어차피 해설도 하고 사진도 찍어주고 그런 것이다. 참고로 ‘가람(伽藍)’은 승려가 모여 수행을 하는 장소를 말하는데 불교 사찰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 진관사

● 진관대사를 위해 세운 진관사

진관사(津寬寺)는 1010년, 고려 현종 2년 때에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신혈사로 불렸던 진관사는 고려 제8대 왕인 현종이 진관대사를 위해 직접 세운 절이라고 한다. 당시 왕위계승 1순위였던 현종은 어려서 대량원군(大良院君)으로 불렸었다.

그런데 헌애왕태후로 불리기도 했던 천추태후(千秋太后)에게 미움을 받았다. 천추태후는 5대왕 경종의 부인이자 7대왕 목종의 어머니였는데 아들인 목종이 후사가 없자 자신의 다른 아들을 왕위에 앉힐 생각이었다. 당시 애인인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에 올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대량원군을 위협하는 천추태후의 검은 그림자는 더욱더 짙어져갔다.

원래 신혈사는 진관 스님이 홀로 수행을 하는 곳이었는데 천추태후는 강제로 대량원군을 이곳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사람들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외진 곳이니 자객을 보내기도 좋았을 터. 하지만 진관 스님은 이런 음모를 간파했고, 수미단에 굴을 파서 대량원군을 숨겨놓는 기지를 발휘했다. 수미단은 불상을 올려놓는 단을 말한다. 불교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일컬어지는 상상속의 산인 수미산을 형상화한 것이다.

3년 뒤인 1009년에 대량원군은 개경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른다. 서북방을 지키던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대량원군을 등극시킨 것이다. 고진감래라고 천추태후의 탄압을 끝까지 견뎌냈기에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현종 때에는 2번에 걸쳐 거란이 침공을 해왔다.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거란의 2차 침입이 1010년에 있었고, 8년 후에는 3차 침입이 있었다. 2차 침입 때는 요나라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한 터라 현종은 전라도 나주까지 피난을 가야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당하고만 있던 민족인가.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면 거란과의 전쟁 때는 강감찬 장군이 있었다. 1018년에 있은 3차 침입 때 강감찬 장군은 귀주에서 승전보를 울렸다.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귀주대첩이다.

진관사 이야기를 하다가 고려 초기 거란과의 항쟁까지 언급하게 됐다. 뭐 이러면서 하나라도 더 익히면 좋지 아니한가. 우리가 역사트레킹을 혹은 답사여행을 행하는 것도 현장에 직접 가서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하는 거니까.

진관사는 한국전쟁 때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는다. 빨치산이 지리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북한산에도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나한전, 칠성각, 독성전은 전쟁의 참화를 피하게 된다.

* 진관사

● 일장기에 덧그린 태극기가 발견되다

2009년도였다. 오래된 칠성각을 해체복원하다 뜻밖의 문화재가 발견된다. 일장기 위에 태극문양을 덧그린 태극기가 발견된 것이다. 태극문양이 지금처럼 상하대칭이 아닌 좌우대칭으로 그려진 독특한 형태의 태극기였다. 이 태극기를 숨겨놓으신 분은 바로 백초월 스님이셨다.

일제강점기 당시 진관사에 주석하시던 백초월 스님은 한용운 스님, 박용성 스님과 함께 항일운동에 적극적이셨던 불교계 인사였다. 1944년 형무소에서 옥사하실 정도로 백초월 스님은 끝까지 항일 의지를 꺾지 않으셨던 분이다. 31운동 경, 일제 경찰에 잡혀가기 전에 숨겨놓은 태극기였으니 무려 90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온 태극기였다.

 

“삼각산이 조선이면 왜놈은 계란이다. 계란으로 삼각산을 아무리 친다한들 삼각산은 끄떡없다.”

 

백초월 스님의 어록이다. 구구절절이 옳으신 말씀이다. 전세계에 있는 계란을 다 친다고해도 북한산은 꿈쩍도 하지 않을 거다.

이렇게 하여 진관사 탐방은 종료된다. 좀 아쉬우시면 위쪽에 있는 진관사 계곡에 잠시 다녀오시는 것도 좋을 듯싶다. 나름대로 아기자기한 계곡이라 잠시 머리를 식히기에 딱인 곳이다.

북한산, 4대 명찰, 진관대사, 현종, 천추태후, 거란, 강감찬, 백초월 등등... 진관사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 거리들이 있다. 본 글에 언급하지 못한 유명한 진관사 수륙재도 있다. 그러니 가보면 좋다.

 

 

 


 

 

 

 

■ 진관사 탐방

1. 세부코스: 진관한옥마을 ▶ 진관사 ▶ 진관계곡

2. 가는법: 3호선 구파발역에서 진관사행 시내버스 탑승. 약 15분 정도 소요됨.

3. 같이 가면 좋을 곳: 기자촌 근린공원 / 화의군 묘역

* 진관사 탐방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 서울의 명소들을 탐방하는 <서울 그곳에 가다>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본 <서울 그곳에 가다>는 저의 주 종목인 <역사트레킹>에서 파생된 콘텐츠입니다. 기존에 작성했던 트레킹 원고들은 평균이 원고지 35매(200자 기준) 정도여서 읽는데 좀 불편했던게 사실입니다. 이에 좀 컴팩트한 분량의 원고를 작성해보기로 했답니다.

<서울 그곳에 가다>에서 탐방하는 장소들은 기존에 작성했던 트레킹 원고에서 이미 한 번 다뤄본 곳들이 대다수일 겁니다. 그럼 재활용이냐? 아닙니다. 재작성했습니다. 기존 트레킹 원고도 출간해보고 싶고, 본 <서울 그곳에 가다>도 출간해보고 싶어서요. 자기 표절도 표절아닙니까.

원고지 15~20매 정도로 분량이 그리 많지 않으니, <서울 그곳에 가다>를 많이 사랑해주세요. 서울의 명소들을 하나하나 소개해 드릴테니까요~^^

 


역사트레킹을 직업으로 삼다보니 서울 곳곳을 누비게 됐다. 그러면서 깨달았던 것이 하나 있다. 아니 실감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보시다시피 서울에도 산이 참 많아요.”

수강생들에게 많이 했던 멘트다. 그렇다. 서울에는 북한산이나 관악산 말고도 산이 많다. 인왕산, 아차산, 청계산 등등... 그런 서울의 산을 찾아 떠난다. 산에 간다고 움찔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너무 걱정하시지 마시라. 필자도 산 정상부를 가는 것보다 둘레길 걷는 걸 더 선호하니까.

제목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이번에 탐방할 곳은 백사실계곡이다. 백사실계곡은 북악산의 북사면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 북악산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자.

서울 안쪽에는 4개의 산이 자리 잡고 있다. 북쪽 북악산, 동쪽 낙산, 서쪽 인왕산, 남쪽 남산. 이 산들을 연결하여 성을 쌓았더니, 한양도성 18.6km가 탄생했다. 이 산들은 안쪽에 있다하여 내사산(內四山)으로 불렸다.

* 백사실계곡: 초입에 자리잡은 현통사

● 이곳에 들어서면 도시의 번잡함이 사라진다!

청와대의 뒷산이라 그런지 북악산은 많은 부분이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개발이 제한되다보니 역설적으로 서울 같지 않은 구역도 존재한다.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명승 제36호 백사실계곡이 바로 그런 곳이다. 백사실계곡에 발길을 들여놓으면 울창한 수목원을 방문한 것처럼 싱그러움이 전해진다. 서울에서도 이런 숲 향기를 느긋하게 맡을 수 있다니!

필자는 백사실계곡을 ‘비밀의 화원’이라고 표현한다. 서울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광화문에서 불과 4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렇게 호젓한 곳이 자리 잡고 있으니,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매연과 소음, 끝없는 인파에 시달리다가도 이곳에 들어서면 갑자기 모든게 멈춰진 듯 그런 도시의 번잡함이 사라진다. 싹 다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다.

비밀의 화원답게 백사실계곡은 물도 1급수다. 그래서인지 1급수에서만 산다는 도롱뇽이 살고 있단다. 백사실계곡은 홍제천의 상류가 되는데 그 물길을 따라가면 굵직한 문화유산들을 만날 수 있다. 몇 가지를 알아보고 가자. 일단 유명한 세검정(洗劍亭)이 부암동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인조반정과 관련된 김류, 이귀 등이 거사를 모의한 후 이곳에서 칼을 씻으며 결의를 다졌다하여 세검(洗劍)이라는 명칭이 생겼고, 이곳에 정자가 들어서니 세검정이 된 것이다. 세검정은 백사실계곡 탐방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다.

세검정 인근에는 탕춘대성(蕩春臺城)의 어원이 된 탕춘대(蕩春臺) 터가 있다. 탕춘대는 연산군에 의해 1505년에 만들어졌는데 그는 이곳에 수각을 짓고 화끈하게 놀았다고 한다. 이때가 연산군 11년이었는데 다음해인 1506년, 중종반정에 의해 폐위된다. 과유불급이다. 놀아도 적당히 놀아야한다. 그러니 폐위가 되는 것이다. 참고로 수각(水閣)은 물가에 지어진 누각 혹은 정자를 말한다.

홍제천은 모래가 많다하여 사천(沙川)이라고도 불렸고, 불천이라고도 불렸다. 보도각 백불이라는 고려시대 만들어진 거대한 마애불 앞을 흐른다하여 불천(佛川)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정식 명칭이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인 보도각백불은 다른 마애불과 달리 호분으로 채색을 했다. 보기 드문 컬러풀한 마애불로 2014년 3월에 보물 제1820호로 승격됐다.

 

 

* 백사실계곡: 숲길의 가을

● 풍광이 수려한 백석동천

현통사 앞 너럭바위에서 멋지게 인증사진을 찍은 후 산책로를 따라 이동한다. 싱그러운 숲 향기를 맡으며 걷다보니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온다. 그렇게 걷다보면 큰 연못 자리를 끼고 있는 별서터가 나온다. 백석정, 백석실 혹은 백사실로 불렸던 이 건물은 전에는 오성대감 이항복 선생의 별서터였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2012년에 추사 김정희 선생이 그곳의 주인이었다는 문서가 발견됐고, 그에 따라 부암동 별서는 이항복 선생이 아닌 추사 김정희 선생의 소유물이라는 것이 정설이 되었다.

그 곳이 이항복 선생 소유든 김정희 선생 소유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조선 중기 때 인물인 이항복 선생이 부암동 별서터를 잘 사용했고, 이후 조선 후기를 살았던 추사 김정희 선생이 바톤을 이어받아 잘 이용했다고,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역시 숲을 거닐다보면 상상력도 풍부해진다.

이제 백석동천(白石洞天) 각자 바위를 보러가자. 예전에 이 일대는 백사골로 불렸었는데 주위에 흰 돌이 많았기 때문이다. 동천(洞天)이라는 명칭은 삼청동천, 청계동천처럼 풍광이 수려한 곳을 지칭할 때 붙는 말이다. ‘백석동천’을 거칠게 풀이해보면, 풍광이 아름다운 백석지역이라는 뜻이 된다.

어쨌든 이 일대가 비밀의 화원처럼 아름답다보니 어떤 풍류객이 ‘白石洞天’ 네 글자를 보기 좋게 각자를 해두었다. 이 백석동천 바위는 크기나 선명도면에서 다른 각자바위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누구나 다 그 곳에 서면 카메라를 꺼내 든다.

“곽 작가님, 거기서 멀뚱하게 서 있지 말고 우리 사진 좀 찍어줘요.”

 

필자는 열심히 사진을 찍어준다.

각자바위에서 왼쪽으로 길을 잡으면 능금마을이라는 표지판을 볼 수 있다. 능금이면 사과 아닌가? 서울에서 사과를 재배했었나? 그렇다. 지금은 아니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부암동 일대에는 사과밭이 많았다. 경림금(京林檎)이라고 불렸던 부암동 일대 사과는 제사상에 올라갈 정도로 찾는 이들이 많았었다. 부암동은 북소문인 창의문과 맞닿아있는데 가을 수확철만 되면 경림금을 구매하기 위한 행렬로 창의문밖이 들썩들썩 거렸다고 한다.

도대체 어떤 맛이었기에 창의문 밖이 들썩거리기까지 했을까? 이제는 능금밭은 찾아볼 수 없기에 입맛만 다시며 다시 숲길을 거닐었다.

이렇게 하여 백사실계곡 탐방을 마쳤다. 추사 선생의 별서터와 백석동천 각자바위, 거기에 울창한 숲길이 더해지니 이곳은 정말 서울 같지 않은 곳이다. 잘 간직하고 싶은 비밀의 화원이다. 이곳에 발자국을 들이면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싱그러운 나무향이 전해진다. 그런 자연의 향취에 빠지다보면 어느 순간 어깨춤을 추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걸 무아지경이라고 해야 하나? 숲에 가면 그렇게 좋은 기운을 받게 된다.

* 백석동천: 각자바위

 


 

 

■ 백사실계곡

1. 세부코스: 세검정(홍제천) ▶ 별서터 ▶ 각자바위 ▶ 능금마을 인근 숲길

2. 가는법: 3호선 경복궁역에서 상명대행 시내버스 탑승, 상명대 앞 하차. 약 10분 정도 소요됨.

3. 같이 가면 좋을 곳: <커피 프린스> 촬영지로 유명한 부암동 카페거리, 북악스카이웨이 산책로

 

 

* 백사실계곡 탐방지도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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