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들섬: 노들섬 잔디마당에서 한강철교를 바라본 모습. 아파트 사이로 새남터 성지가 보인다. 

 

 

이해가 안 가시겠지만 필자는 예전에 한참 한강에 미친(?)적이 있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되는 양수리를 제 집 드나들 듯 다녔었고, 백두대간 깊은 곳에 있는 한강의 발원지를 탐방하기도 했었다. 또한 서울에 놓인 한강 다리들을 직접 두 다리로 건너보며, 어느 다리가 건너기 편한가 평가를 내리기도 했었다. 직접 도보로 건넌 다리 중에 가장 빈번하게 발걸음을 한 건 한강대교였다. 63빌딩과 한강철교를 지나 한강대교에 들어섰고, 그 발걸음의 마지막에는 노들섬이 있었다.

근현대에 들어 서울이 역동적으로 변해갔듯 한강도 크게 변모하게 된다. 물줄기가 달라지기도 했는데 그렇게 되니 전에는 없던 섬들이 생기게 됐다. 이 글은 한강에 떠 있는 섬들, 그 중에서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섬들에 관한 이야기다. 노들섬부터 서래섬을 찍고 새빛섬까지, 직접 발로 담은 이야기이다.

 

● 한 때 한강에 미친(?) 사람의 한강 이야기

본격적인 섬이야기에 앞서 한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한 때 한강에 미친 사람의 한강 이야기다. 한강은 우리에게 젓줄과도 같은 존재였던 만큼 시대마다 다양한 이름으로도 불렸다. 고구려 장수왕때 만들어진 광개토대왕비에는 ‘아리수’라고 기재되어 있다. 서울시의 수돗물 명칭인 그 아리수다. 고려시대에는 ‘열수’라고 불렸는데 크고 긴 강물이 열을 지어 흐른다는 뜻이다. 지역적으로도 다른 이름을 갖기도 했다. 임진강과 합수되어 서해로 흐르는 한강 하류 일대는 ‘조강’이라고 불렸고, 경기도 여주 지역은 여강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서울에서도 지역에 따라 세부적인 명칭을 가지기도 했다. 뚝섬과 가까운 곳에 매봉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는데 그 일대의 한강은 동호(東湖)라고 불렸다. 서울의 동쪽에 위치해 있고, 호수처럼 잔잔해서 동호라는 명칭이 붙은 것이다. 지금은 그 위로 동호대교가 놓여 옥수동과 압구정동을 연결해주고 있다. 서강도 있다. 지금의 마포지역의 한강을 서강 혹은 서호(西湖)라고 칭했다. 동호대교처럼 서강 일대에는 서강대교가 놓여 있는데 다리 아래에는 유명한 밤섬이 자리잡고 있다.

동호, 서호가 있으면 남호(南湖)도 있지 않았을까? 있었다. 지금의 용산 일대를 남호 혹은 용산강이라고 불렀다. 그 용산강 일대에 한강대교가 자리잡고 있고, 그 한강대교 아래에 노들섬이 있다.

 

 

* 노들섬: 한강대교에서 노들섬 서쪽편을 바라본 모습. 노들섬의 자랑인 잔디마당이 펼쳐져 있다. 사진 오른쪽에 큰 원반 모양의 달빛노들이 보인다.

 

 

●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노들섬

춘삼월이 코 앞이었지만 날씨가 쌀쌀했다. 63빌딩을 지나 노량진쪽에서 한강대교로 진입했다. 그러자 강바람이 매섭게 분다. 역시 강바람은 한강다리에서 맞아야 한다.

그렇게 노들섬에 들어섰다. 노들섬은 1995년 이전에는 중지도(中之島)로 불렸다. 요즘도 연세가 지긋한 분들은 노들섬은 모르셔도 중지도는 다 아신다. 중지도 시절의 노들섬은 서울의 대표적인 강수욕장이었다. 1950~60년대 자료사진들을 보면, 지금의 해운대를 빰칠 정도로 물놀이객들의 천국이었다.

노들섬은 처음부터 섬이 아니었다. 강변에 있는 넓은 모래벌판이었다. 그 모래벌판이 워낙 넓어서 군사훈련도 하고, 처형장으로도 쓰이기도 했다. 그래서 인근에 천주교 성지인 새남터가 있는 것이다.

모래벌판이었던 곳에 다리가 놓였다. 한강철교가 1900년에 놓인 후 남은 자재들을 모아 한강인도교라 불리는 한강대교가 탄생하게 되니 그때가 1917년이었다. 이때부터 모래벌판은 인공섬의 형태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중지도라는 명칭도 일제강점기인 이때 붙여진 것이다.

노들섬은 196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한강개발계획에 의해 완전한 섬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주변에 있던 모래벌판이 사라진 대신 그 자리를 강물이 메우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즈음 노들섬의 소유권이 어떤 기업체로 넘어갔다는 점이다. 소유주가 개인으로 넘어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민들의 발걸음은 뜸해지게 됐다. 개인 소유였던 노들섬을 2005년에 서울시에서 매입하게 된다. 이후 많은 개발계획이 타진됐으나 계속 무산되고 말았다. 공지로 남아 있던 섬은 도시텃밭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 한강철교: 노량진쪽에서 한강철교 라인을 따라 남산을 바라보고 있다. 이 구간에만 키 큰 건물이 없어서 남산을 겨우 볼 수 있다.

 

 

 

쌀쌀했지만 노들섬에는 많은 이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예전보다 확실히 접근성도 좋아지고 휴식공간도 많아졌다. 이렇게 편의성이 높아지니 시민들의 발걸음이 많아지는 것이다.

섬이 다시 북적북적해진 건 지난 2019년 9월 28일부터다. 노들섬이 ‘음악을 매개로 한 복합문화기지’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노들섬의 자랑인 잔디마당을 둘러본 후 향긋한 커피향을 따라 노들서가로 입장했다. 그런데 라이브공연이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역시 ‘음악을 매개로 한 복합문화’ 공간이 맞았다.

다시 잔디마당으로 나오니 마침 한강철교 위로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용산역으로 가는 기차였는데 그 철길을 따라가니 새남터 성지도 보였다. 아름다운 한강의 풍광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장소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한강철교 자체도 역사적인 장소다. 1900년에 완공됐고, 한국전쟁 때인 1950년 6월에 폭파됐기 때문이다. 한강철교가 폭파됐을 때 한강대교도 같이 폭파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

노들섬은 노을 명소다. 생각 같아서는 노을까지 보고 싶었으나 서래섬과 새빛섬 탐방을 하기 위해 서둘러 섬을 빠져나왔다. 나오는 길에 달빛노들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달빛노들은 섬의 서쪽에 설치된 둥근 원반 형태의 시설물로 그 크기가 무려 약 12미터에 달한다. 인공으로 달빛을 비추기 위해 만들었는데 유람선을 타고 갈 때 보면 꽤나 이색적이라고 한다.

 

 

 

*서래섬:서래섬에서 바라본 한강과 남산.

 

 

 

● 인공적이지만 정다운 섬, 서래섬

동작대교를 지나 서래섬에 도착했다. 서래섬에 입도(?)하니 가까운 곳에 세빛섬과 반포대교가 아주 가깝게 보였다. 반포한강공원 지구에 온 것이다.

서초구 반포동 일대에는 ‘서래’라는 명칭이 낯설지 않다. 동작역 아래로 반포천이 흐르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 하여 ‘서래’라고 칭한 것이다. 실제로 반포천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다 한강을 앞두고 크게 휘돌아나간다. 그 반포천 인근에 프랑스인들이 많이 산다는 서래마을이 있다.

위성사진을 보면 서래섬은 한강변 둑이 바둑판처럼 매끈하게 잘 다듬어졌다. 반대로 반포쪽은 산(山)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형태다. 이런 외형이 자연스럽지는 않다. 그렇다. 서래섬도 인공섬이다.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경조오부>라는 지도를 보면 지금의 반포에 기도(碁島)라는 섬이 보인다. 1960년대까지도 존재했던 기도는 한강종합개발이 시행되면서 그 형태가 사라지게 된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기도에 있던 돌들로 바둑돌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1986년, 제2차 한강종합개발사업(1982~86년)으로 서래섬이 태어났다. 하지만 처음부터 순산을 한 건 아니었다. 한강종합개발이 시행될 즈음에 일부에서는 홍수 예방에 더 적합하다는 이유로 서래섬을 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한강개발추진본부장이었던 이상연은 시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이곳에 섬을 만들기로 했고 실행에 옮긴다.

서래섬은 약 7천평 정도로 아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공섬이지만 정감있는 모습이다. 봄에는 유채꽃이, 가을에는 갈대밭이 펼쳐지니 계절마다 보여주는 색감이 달라서 좋다. 그런 배경물들이 없더라도 서래섬은 산책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다른 섬들과는 달리 산책로가 흙길로 되어있으니까.

서래섬에 입도를 하려면 약 50미터 정도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그 몇 십 미터 차이로 걷기에 퀄리티가 달라진다. 흙길을 밟으며 한강변을 산책하는 호사를 누리는 것이다. 참고로 서래섬은 3개의 다리로 진출입을 할 수 있다.

 

 

 

* 노들섬:  문화복합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노들섬.

 

 

● 세 개가 아닌 네 개의 인공섬, 세빛섬

서래섬에서 빠져나와 마지막 탐방지인 세빛섬으로 향했다. 세빛섬의 영어 명칭은 '플로팅 아일랜드(Floating Island)'다.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11년 5월에 탄생하였다. 애초 세빛섬은 3개의 빛이 내린다는 의미로 이름이 지어졌는데 처음에는 ‘세빛둥둥섬’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3개의 빛이라면 섬도 3개라는 뜻인가? 아니다. 정확히는 4개다. 처음에는 예빛섬이라는 대형스크린이 있는 미디어아트 섬이 2009년에 완공된다. 이후 가빛섬, 솔빛섬, 채빛섬이 2011년에 완공되어 현재의 외형을 갖추게 된다. 그러다 2014년 ‘세빛둥둥섬’에서 ‘세빛섬’으로 이름까지 개명하게 된다. 그간 세금 낭비라는 지적이 있었는데 ‘혈세가 둥둥 센다’는 부정적 이미지를 떨쳐버리고자 ‘둥둥’을 빼버렸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세빛섬이라고 하는데 딱 세빛섬이라고 꼬집을 수 있는 섬이 없다. 그냥 뭉뚱그려, 대표 이름으로 ‘세빛섬’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빛섬은 옆에 있는 반포대교나 그 아래 잠수교에서 바라보는게 가장 좋다. 조명이 켜진 세빛섬들 뒤로 관악산이 펼쳐져 있고, 그 위로 노을이 넘어가니 그 모습이 정말 장관이다.

이제까지 한강 중심부에 있는 섬들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나선 길이라 필자도 무척 신났다. 겨우 전철값으로 시원스러운 한강섬 트레킹을 할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던 것이다. 이야기거리도 많고 걷기에도 좋은 한강의 섬들, 여러분들도 그 발걸음에 동참하시면 참 좋겠다.

 

 

* 저자도: 성동구 옥수동에 있는 매봉산에서 뚝섬 부근을 바라본 모습. 중간쯤에 성수대교가 보인다. 성수대교를 중심으로 왼쪽이 뚝섬이고, 오른쪽이 압구정동이다. 성수대교 아래쪽 부근에 저자도가 있었다.

 

 

● 저자도와 잠실

한강의 섬 중에는 지금은 수면 아래로 사라진 전설적인 섬도 있다. 전설적인 섬? 무슨 아틀란티스 제국인가? 하여간 지금은 사라져 버린 그 섬은 저자도(楮子島)이다. ‘닥나무저(楮)’에서 보듯 종이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가 많아 저자도라고 불렸다. 이 섬은 옥수동 근처에 있다 하여 옥수동섬이라고도 칭했다. 중랑천이 한강에 합수되는 지점에 있었는데 인근에는 뚝섬도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존재 자체도 모르지만 저자도는 동서 길이가 2km에 면적이 약 35만평에 이를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다. 현재의 노들섬이 동서 길이가 약 700미터에 면적이 4만 5천평 정도이니 저자도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저자도는 선유도처럼 주위 풍광이 무척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래서 세종대왕께서도 뱃놀이를 즐기셨을 정도다. 그런 저자도도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사라지고 만다. 저자도의 모래를 퍼내서 압구정동에 아파트를 짓는데 사용한 것이다.

현재 서강대교 아래에 있는 밤섬도 1968년에 폭파되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퇴적물이 계속 쌓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저자도도 재탄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전설이 완성될지 모른다.

한강에는 섬이었다가 육지가 된 곳도 있다. 뽕나무밭으로 유명했던 잠실이 바로 그곳이다. 이렇게 말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 지금 어디를 봐서 잠실이 섬인가? 하지만 잠실은 1970년대 초반까지 잠실도(蠶室島)라고 불리던 섬이었다. 더군다나 부리도(浮里島)라는 작은섬도 거느리고 있었다. 행정구역도 강남이 아니라 강북에 위치해있었다. 강남지역의 옛 행정구역은 경기도 광주군 소속이 많았다. 이에 반해 잠실도는 한강 이북이었던 경기도 양주군 혹은 고양군에 속했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가 일어났다. 용산 일대까지 물에 잠기는 등, 서울은 직격탄을 맞게 된다. 이때 잠실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건기에는 육지와 붙어있던 섬의 북쪽에 새로운 물길이 난 것이다. 우기에만 섬이 됐던 잠실이 계절에 상관없이 섬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렇게 섬의 북쪽에 난 물길을 신천강이라고 불렀고, 남쪽의 물길은 송파강이라고 칭했다.

1971년, 잠실도는 을축년 때처럼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남쪽 물길이었던 송파강을 메워 잠실을 육지로 만든 것이다. 강의 남쪽과 붙게 되니 잠실은 한순간에 강남 지역이 됐다. 한편 메워진 송파강도 석촌호수로 물길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렇게 한강의 섬들은 저마다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퍼내도 퍼내도 끊이지 않을 거 같다. 그럼 한강섬들은 이야기 보물섬인가? 그 보물섬과 같은 곳을 찾아 오늘도 한강섬 트레킹에 나선다.

 

* 경조오부: 사진 오른쪽 하단에 '저자도'가 표시되어 있다. 하단 중앙에는 '기도'가 표시되었다.

 

 

* 잠실: 잠실의 변천사. 아래에 있는 송파강이 본류(메인)이었고, 위에 신천강이 지류(사이드)였다. 하지만 송파강을 메꿔 잠실섬이 육지화됐고, 지류였던 신천강이 메인이 되버린다. 사진은 인터넷을 참조했다.

 

 


 

@ 한강섬 트레킹

* 추천코스: 노들역 -> 한강대교 -> 노들섬 -> 동작대교 -> 서래섬 -> 세빛섬

* 길이: 약 6km

* 난이도: 하

* 교통편: 9호선 노들역에서 하차한 후, 한강대교에 진입함. 서래섬을 방문한 후에는 9호선 신반포역을 이동할 수 있음. 잠수교를 넘고 싶은 분은 경의중앙선 서빙고역을 이용할 수 있음.

 

 

 

 
 

 

 

 

<역사트레킹공동체> 카페에서 함께 트레킹을~!

 

처음 역사트레킹을 한다고 했을 때 방향성을 어떻게 잡을지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트레킹과 역사를 함께 묶어서 가자는 건데 그 둘의 배합을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문제였다.

역사 vs 트레킹

좀 오버를 해서 이런 구도까지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쌩뚱맞다.

어쨌든 필자의 프로그램은 트레킹과 역사를 두 축으로 두고 진행됐다. 준비도 그에 맞게 했다.

해당 코스가 '역사'라는 테마에 부합한지, 걷기에 좋은 길인지... 10KM짜리 코스를 만드려고

100KM이상을 걸었고, 적절한 해설을 위해서 소책자에 준하는 자료를 준비했다. 교보재도 만들었다.

지금 그 교보재를 보면 좀 웃긴다...ㅋ

강의는 계속됐다. 단골 손님처럼 오시는 수강생분들도 계셨다. 정말 고마운 분들이다. 그렇게 연차가 쌓이다보니 데이터도 축적이 되더라.

"본 역사트레킹 강의에 참여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건강해지려고요!"

거의 모든 연령층에서 저런 말씀을 하셨다. 단골 수강생분들은 이구동성으로 그런 말씀을 하셨다. 상대적으로 젊은 30~40대 수강생들도 저런 말씀을 힘줘서 이야기했다.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필자의 역사트레킹 강의는 '건강', 두 글자로 귀결되었다. 그런 면에서 좀 의아하기도 했다.

'역사 vs 트레킹' 이런 구도도 생각을 했었는데... 크게 부각을 시키지 않았던 건강이 가장 큰 중심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요즘은 이동중에 행할 수 있는 건강법 등을 연구하고 있다. 거창하게 연구라고 하지만 방송이나 동영상을 검색하고 있는 것이다. 호흡법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근육을 어떻게 풀건지, 스트레칭은 어떻게 할 건지 등등.

트레킹 중에 술을 안 먹고, 담배 안 피면 알아서 건강해지니 금주, 금연은 꼭 지키자! 더불어 다른 운동처럼 트레킹도 꾸준히 해야 효과가 있는 법이다. 그러니 계획을 세워 꾸준히 해보자.

혼자 하기 어려우면 <역사트레킹 공동체> 카페에서 함께 트레킹을 해보는 것이 어떠신지~!


https://cafe.naver.com/trekkingmaster/389

 

<벚꽃만발> 4월 10일 월요일_ 서리풀공원 트레킹

올 해도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습니다. 봄하면 봄꽃들이죠!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제 곧 개나리를 필두로 해서 진달래와 벚꽃들이 만개를 할 것입니다. 세상이 또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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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맞아? 푸른숲에 꽃향기까지 퍼지네!

<홍도> 동백꽃 향을 맡으며 망망대해를 바라보다니!

2023년 1월 12일 목요일.

섬 여행은 쉽지가 않다. 이번 흑산도, 홍도 여행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절실히 느꼈다. 쉽지 않았던 만큼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시간들. 그 시간들을 잊지않기 위해 기록해본다.

흑산도는 목포에서 서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진 섬으로 행정적으로는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에 속한다.

홍도는 흑산도 본섬에서도 서쪽으로 약 20km 정도 더가야 한다. 그래서 목포에서 출발한 쾌속선이 흑산도를 거쳐 홍도까지 간다. 홍도(紅島)는 석양에 물든 섬의 모습이 붉은색으로 보인다하여 홍도라 불린다.

11일 저녁에 흑산도에 입도를 해서 1박을 한 후 다음날 아침에 홍도로 이동했다. 쾌속선으로 30분 거리. 두 섬 사이가 가까워서 그런지 흑산도와 홍도는 같이 묶어서 여행을 한다. 티켓팅을 할 때 직원이, 비수기라 홍도 주민분들이 단체로 여행을 갔다고했다. 그래서 밥 먹을 식당이 없을 거라고, 친절히 안내해주셨다. 어차피 배낭에 2끼 정도의 행동식은 항상 휴대를 하니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가난한 여행자들은 배낭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 홍도: 홍도의 중심지인 홍도 1구. 홍도 초등학교의 운동장이 보인다.

홍도에 입도를 하니 정말 섬 전체가 조용했다. 흑산도는 면사무소도 있고 일주도로도 있고 해서 좀 분주한 맛이 있는데 홍도는 주민들초자 섬밖에 있으니... 상황이 이러니 홍도 여행의 필수코스라는 유람선 투어는 생각도 못할 판이었다. 비수기라 식당이 문을 닫았는데 유람선이 출항을 하겠냐고!

잠깐 여기서 흑산도와 홍도를 비교를 해보자. 일반적으로 홍도와 흑산도를 묶어서 여행하기 때문에 두 섬의 크기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홍도의 크기는 6.4㎢이고 흑산도의 크기는 19.7㎢로 3배 정도 차이가 난다. 더군다나 홍도는 경사가 워낙 급해서 자동차가 다닐 수 없다. 그래서 지도앱을 봐도 로드뷰가 없다. 이에 비해 흑산도는 해안선을 따라가는 일주도로가 있고, 그 도로를 따라 공영버스도 운행된다.

이런 지형적인 여건 때문에 여행 방식도 달라진다. 홍도는 유람선을 타고 홍도 외곽을 도는 해상 관광이 주를 이룬다. 이에 비해 흑산도는 일주도로를 따라 주요 포인트를 찍는 방식으로 여행이 진행된다. 그래서 관광택시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홍도에 와서 유람선 투어를 하지 못하니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하기는 산으로 올라가야지!^^

 

 

* 깃대봉 가는길: 한 겨울에도 이렇게 푸른 숲길이다. 바닥에 동백꽃도 떨어져있다.

 

* 동백꽃

홍도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모습을 하고 있다. 마치 애벌레같은 모습이다. 섬의 ⅔ 지점에 중심지인 홍도 1구가 있고. 중앙부에는 깃대봉이라고 불리는 해발 365미터짜리 봉우리가 있다. 그 깃대봉을 넘어가면, 섬 서북쪽에 홍도 2구가 있다. 지금은 홍도 1구가 섬의 중심지이지만 처음 섬에 정착한 사람들은 홍도 2구에 닻을 내렸다고 한다.

그렇게 꿩대신 닭으로 깃대봉에 올랐다. 섬에 와서 산이라니! 그래 이 맛도 나쁘지는 않다.

중간중간에 전망대도 있고, 문화유적도 있어서 그런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코스다. 수풀 너머로 보이는 비경들은 놀라움을 선사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이 있었다. 바로 숲길이었다. 동백나무, 후박나무 등 푸른 잎으로 뒤덮힌 숲길이 눈 앞에 펼쳐지는게 아닌가? 지금 1월달 아닌가? 소한 지나서 대한으로 가고 있지 않나? 그렇게 홍도 깃대봉 숲길에서는 동장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황홀한 향취의 동백꽃이 붉게 만개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봤던 동백꽃들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이었다. 숲 전체에 알싸한 동백향이 은은히 흐르고, 수풀너머로 다도해의 비경이 펼쳐지니 마치 꿈길을 걷고 있는 듯했다. 이런 동백향을 홀로 마음껏 맡게 될 줄이야! 이러다 선녀같은 동백아가씨를 만나는 거 아니야?

정신차려!. 그러다 똥배 아저씨 만날라!

 

 

* 청어미륵

그렇게 동백꽃 향기를 음미하며 걷고 있는데 청어미륵이라는 돌미륵 두 개를 만나게 됐다. 죽항마을 산길에 있다하여 죽항미륵이라고도 불리는 미륵이다. 사진에서도 보이듯 청어미륵은 매끈한 자연석을 미륵불로 모신 형태다. 통상적으로 미륵불이라고 하면 큰 돌을 잘 다듬어서 양각이든 음각이든 부처님의 형상을 새겨넣어 만든다. 혹은 돌장승처럼 마을 수호신 형태로 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청어미륵은 길죽한 돌 하나, 오목한 돌 하나를 올려놓고 남녀미륵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이름도 독특하다. 청어라니! 논산 관촉사에 있는 은진미륵처럼 동네 이름을 붙이는게 일반적인데 물고기인 청어를 접두어처럼 붙인 것이다. 역시 섬에 있는 미륵이라서 그런지 풍어(豊漁)와 관련된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있는 것이다.

 

 

* 홍도: 깃대봉 왼쪽 바다에 떠있는 바위섬들. 홍도 2구에서 가깝다.

 

 

* 깃대봉: 사진 왼쪽 중단부에 길게 늘어진 섬이 바로 흑산도다.

산길을 오를수록 숲은 더욱더 푸르렀다. 한겨울에 울창한 녹색숲을 볼 수 있다니! 이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다. 정상에 다다르기 전에 숯가마터가 나타났다. 예전 홍도 주민들은 숯을 구워 지나가는 배에 판매하였다고 한다. 그 돈으로 쌀을 사고 소금도 샀다는 것이다. 망망대해가 끝없이 펼쳐진 섬 한가운데서 산골짜기에서나 보던 숯가마터의 흔적을 보니 좀 의아스러웠다. 달리말하면 홍도의 임산 자원이 풍부하다는 뜻일 것이다.

드디어 깃대봉 정상에 올랐다. 확트인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저멀리 흑산도가 길게 늘어진 모습으로 바다위에 누워있었다.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가 서로 맞물린 풍광을 바라보며 마음껏 사진을 찍었다. 열심히 찍었다. 이런 환상적인 곳에서 마음껏 사진을 찍을 수 있다니! 어쩌면 이것도 정말 행운인 듯싶다. 셀카봉을 가져오길 잘 했어~^^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와 그 위에 둥둥 떠있는 것처럼 보이는 섬들의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2년 전에 다녀왔던 거문도가 연상되더라. 거문도도 홍도처럼 숨어있는 비경을 품고 있어서 그런 것이다. 둘 다 이쁘니 둘을 같이 묶어서 생각하는 것이지!

그렇게 해서 짧은 홍도 섬 산행(?) 여행을 마치고 다시 흑산도로 돌아왔다. 숙소에 도착하니 비가 내린다. 일정이 끝나고 비가 내리니 다행이지.


* 세부코스: 홍도여객선터미널 -> 흑산초등학교 -> 전망대 -> 청어미륵(죽항미륵) -> 숯가마터 -> 깃대봉

* 길이: 약 2.5km -> 지리적 여건상 원점회귀를 해야 함. 그래서 총 5km로 잡고 이동해야 함.

* 소요시간: 약 3시간 정도(왕복시간임)

* 난이도: 중

* 교통편: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서 홍도행 쾌속선을 탄다. 소요시간은 약 2시간 30분. 홍도에 내려서는 도보를 통해 이동해야 함. 홍도에는 자동차가 다닐 수 없음.

* 참고: 홍도행 쾌속선은 박스형태라 운항중에 선실 밖으로 나갈 수 없음. 그래서 멀미에 취약할 수밖에 없음. 배멀미가 심한 사람은 미리 약을 복욕하시는게 좋음.

 

* 홍도: 깃대봉쪽에서 바라본 홍도의 남쪽면.

 

 

* 깃대봉: 홍도 깃대봉 인증샷.

 

달맞이 하러 가자! 월류봉으로 달보러 가자!

<영동여행> 월류봉둘레길 따라가는 길, 월류봉에서 반야사까지

 

충북 영동하면 무엇이 생각나시나? 이웃 옥천과 더불어 포도 생산지로 유명하다보니 와인의 고장으로 영동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미감을 자극하는 와인처럼 영동에는 우리의 시각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풍광들도 정말 많다. 백두대간이 영동을 통과하기에 그런 풍광들이 펼쳐지는 것이다.

영동에서 가장 유명한 백두대간의 지명이 추풍령(秋風嶺 )과 민주지산(珉周之山)인데 그 둘의 고도차가 무려 1000미터에 달한다. 추풍령이 221미터이고, 민주지산이 1,241미터이다. 정말 흥미로운 대목이다. 참고로 추풍령은 민주지산에서 북동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백두대간중에서 가장 고도가 낮은 지점으로 불린다.

이런 영동에서도 가장 으뜸인 곳을 꼽으라면 월류봉(月留峰)이 가장 먼저 꼽힐 것이다. 월류봉은 달이 머물다 갈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곳이다. 그래서 많은 풍유객들이 음풍농월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깎아질 듯한 바위산 아래로 금강의 상류인 초강천이 힘차게 흐르고 있고, 그 위에 그림처럼 월류정이 자리잡고 있으니 당연히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 월류봉

 

 

 

월류봉은 해발 400미터로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굽이굽이 흐르는 초강천과 이웃한 석천이 어우러져 빼어난 산수(山水)의 조화를 뽐내는 곳이다. 월류봉은 영동군 황간면에 위치해있는데 여기서 황간이 어떤 곳인지 잠시 알아보자.

지금은 '면'이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황간은 황간현이었다. 그래서 지방관으로 현감이 파견되었는데 지금의 추풍령면과 황간면 등이 황간현의 영역이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황간현과 영동현이 합쳐져서 영동군이 된다.

월류봉에서 동남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황간역에서 내려 트레킹을 시작했다. 황간역은 작은 간이역이다. 하지만 황간역은 경부선이 개통할 때부터 만들어진 역이었다. 지금은 간이역으로 소박하게 변했지만 무려 백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역사인 것이다.

영동군은 일찍부터 경부선 철도가 들어서고,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영남을 잇는 추풍령의 존재자체가 영동군의 지리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지역에 철도와 도로가 놓이니 예전부터 인공적으로 교각들이 세워진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이렇다. 산이 깊은 만큼 물도 많이 흐르고, 그러다보니 굴다리같은 형태의 다리 시설물이 많이 건설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굴다리는 비상시에 대피소 역할을 해준다. 피난길을 떠난 이들에게 잠시나마 쉼터 역할을 해준다.

 

 

* 쌍굴다리: 월류봉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다.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1950년 7월 26일경,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 있는 쌍굴다리에도 그렇게 피난민들이 모여들었었다. 여기서 노근리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자. 한국전쟁 발발 이후 약 1달이 지났을 때였다. 피난민들은 고단한 발걸음으로 남쪽으로 이동해갔다. 그렇게 추풍령을 넘으면 영남이었다. 당시는 여름이라 비를 피하거나 햇빛을 막기위해 쌍굴다리로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그 쌍굴다리 위로는 지금도 경부선 기차가 달리고 있다. 참고로 노근리 쌍굴다리는 1934년에 건설되었다.

그런 피난민들에게 공중에서는 폭탄이 떨어지고, 땅에서는 기관총이 난사된다. 7월 26~29일까지, 3일에 걸쳐서 벌어진 노근리 학살로 인해 무고한 피난민 250~300명이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미군에 의해 벌어진 노근리 학살이다.

이 노근리 사건은 월간 <말>지 기자였던 오연호가 10년에 걸쳐 심층적으로 보도를 했었다. 하지만 국내외 언론들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1999년 9월 30일, 미국 AP통신에 의해 노근리 사건이 특종으로 보도되었다. 이때부터 노근리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큰 관심을 받게 된다. 이후 2001년 1월 12일에는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클린턴이 유감을 표하게 된다. 기왕 언론을 타려면 외신을 타야 되는 것인가? 오연호는 현재 <오마이뉴스>의 대표로 있다.

학살이 있었던 쌍굴다리 앞쪽으로는 현재 노근리평화공원이 있다. 시간이 되신다면 노근리평화공원과 쌍굴다리를 탐방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싶다. 평화공원에서 북동쪽으로 뾰족하게 보이는 봉우리가 바로 월류봉이다.

 

 

 

* 쌍굴다리: 아직도 현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월류봉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나라 산악지대를 감싸고 있는 하천들이 다 그렇듯 월류봉을 감싸고 도는 초강천도 감입곡류의 형태를 띄고 있다. 감입곡류천은 말그대로 하천이 굽이굽이 감싸고 돌아나간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천이 지형을 감아돌아 나가니 특이한 지형도 형성되는 것이다. 강원도 영월의 한반도 지형과 충북 옥천의 역한반도 지형이 바로 그것이다.

월류봉 중턱 아래쪽에 월류정이 있는데 그 월류정에서 감입곡류 형태를 명징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한반도 지형이나 역한반도 지형은 좀 떨어진 위쪽 전망대에서 관망하는 방면에 월류정은 근거리에서 관찰한다는 차이가 있다. 월류정은 가까이에서 바라보니 직접 물소리를 들을 수도 있어서 청각적으로도 만점이었다.

이렇게 빼어난 산수를 자랑하니 예로부터 이 일대를 한천팔경(寒泉八景)이라고 칭했다. 한천팔경은 제 1경 월류봉을 위시하여 사군봉(使君峯)·산양벽(山羊壁)·용연동(龍淵洞)·냉천정(冷泉亭)·화헌악(花獻岳)·청학굴(靑鶴窟)·법존암(法尊巖)으로 이루어져 있다. 월류봉의 여러 모습들을 다른 명칭으로 부른 것이 대부분이다.

 

 

 

* 월류봉

 

 

 

월류봉은 서인의 거두이자, 인조부터 숙종 때까지 정계에 큰 영향력을 끼친 송시열과도 관계 깊은 곳이다. 우암 송시열은 작은 정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했는데 그곳이 바로 한천정사(寒泉精舍)라는 곳이다. 한천팔경이 바로 한천정사에서 나온 명칭이다. 원래는 냉천팔경이었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과 관련되서 가장 유명한 유적지는 충북 괴산에 있는 화양구곡이지만 한천정사도 사료적 가치가 꽤 높은 곳이다. 원래 이곳에는 송시열을 기리는 한천서원이 들어서있었다. 그러다 서원철폐령에 의해 서원이 철폐되었고, 이후 이 지역 선비들이 한천정사를 지어 송시열의 학문을 이어나갔다. 지금도 송우암 유허 비석과 함께 한천정사가 보존되어 있다.

이제 월류봉을 뒤로 하고 초강천의 지류인 석천(石川) 을 따라 반야사 방면으로 이동한다. 석천은 백화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가는데 그 상류에 반야사가 있다. 그 석천을 따라 월류봉 둘레길이 2021년에 개통된다. 석천은 한자명처럼 돌이 많은 하천인데 기암괴석들을 바라보며 걷는 맛이 있다.

경쾌한 물소리를 들으며 약 8km를 이동하다보니 어느새 둘레길의 종점 부근이다. 이제 마지막 탐방지인 반야사(般若寺)를 둘러볼 차례다. 반야사는 상원화상이 후기 신라시대인 720년(성덕왕19)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보다 약 50년 정도 앞선 문무왕 시절에 원효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상원은 의상대사의 십대 제자들 중에 한 명이다.

 

 

 

* 월류봉둘레길

 

 

 

* 월류봉둘레길

 

 

 

반야사는 조선 전기였던 세조 시대에 크게 중창된다. 피부병 때문에 고생을 하던 세조는 속리산에서 있던 신미대사를 만나러갔고, 이후 신미대사와 함께 반야사와 대웅전에서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속리산이 있는 충북 보은과 영동은 그리 멀지 않다.

신미대사는 세조가 깊이 신뢰하는 인물이었다. 세종대왕과도 인연이 깊었다. 그런 신미대사가 속리산 중턱에 있는 복천암에서 머무르고 있었고 세조가 그곳까지 찾아간 것이다. 속리산 복천암에서 세조는 3일 동안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런 기도가 통했던 것일까? 세조가 약사여래의 명을 받은 월광태자의 도움으로 피부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런 기적이 행해진 곳이 바로 속리산 목욕소이다.

반야사에 들어서면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는 돌무더지가 탐방객들의 눈길을 끈다. 돌무더지가 있는 곳은 바로 백화산인데 다른 곳은 다 풀숲으로 덮혀있지만 딱 그곳만 돌무더지로 노출되어 있다. 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상상력을 동원한 것이다. 호랑이 형상이라고.

 

 

 

 

 

* 반야사삼층석탑: 고려전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으로 200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뒤쪽에 미끈한 배롱나무가 보인다.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곳이라 그런지 영동군은 호랑이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다. 월류봉에서 가까운 황간면 소계리 성주골에는 호총이라 불리는 호랑이 무덤이 있고, 바로 옆동네인 매곡면 노천리 내동마을에는 호랑이 공덕비가 있다. 반야사의 호랑이 돌무더지도 이런 친호랑이(?)적인 동네의 분위기와 맥이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경내에 들어서면 속살을 드러내듯 미끈한 모습의 배롱나무가 보인다. 나무를 잘 탄다는 원숭이도 배롱나무에서는 떨어진다는데 그 말이 맞는 듯싶다. 아주 매끈하다. 배롱나무 아래에 있는 삼층석탑은 인근에 있는 탑벌이라는 곳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반야사 삼층석탑은 일부분이 새로 채워지기는 했지만 고려전기시대의 탑 형식을 잘 나타내고 있어 2003년에 보물로 지정됐다.

이제 마지막으로 반야사 문수전을 보러가자. 망경대(望景臺)라고 불리는 곳에 문수전이 있는데 약 10분 정도 올라가야 한다. 계단이 좀 많기는 하지만 올라갈만 하다. 드디어 문수전에 닿았다. 올라온 보람이 있다. 백화산 호랑이 돌무지는 더 잘 보였고, 석천은 물줄기를 뿜으며 굽이굽이 흐르고 있었다.

 

 

 

* 백화산 돌무지: 저 돌무지가 호랑이로 연상되시나? 호랑이 형상이 가장 명징하게 드러날 때는 눈이 온 뒤라고 한다. 아쉽게도 방문했을 때 눈이 오지 않았다.

 

 

 

문수전 아래쪽의 석천을 따로 영천(靈泉)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서 설화가 있다. 반야사 대웅전에서 참배를 마친 세조에게 문수보살이 나타난다. 문수보살은 절 위쪽에 있는 계곡으로 가서 몸을 씻으라고 한 후, '왕의 불심이 깊어 부처님의 자비가 따른다"라는 말과 함께 사라진다. 이에 흡족한 세조는 어필을 하사한다.

석천도 월류봉 아래 초강천처럼 감입곡류 하천이다. 그래서 휘돌아가는 부분은 물줄기의 속도가 약해진다. 그 구간에 속리산 목욕소만한 공간이 있다. 그곳이 바로 영천이다.

왕이 씻은 곳이니 왕탕인가? 그냥 선녀탕이 더 좋은 거 같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세조는 속리산 목욕소에서 월광태자를 만나는 기적을 맞이한다. 이후 반야사에서는 문수보살도 만난다. 문수보살은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오대산에서도 또 만난다. 한 번 만나기도 힘든 인물들을 여러번 만나는 것이다. 마치 한 번 맞기도 힘든 로또를 여러번 맞은 것이다.

왜 그렇게 세조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을까? 덕업이 많았던 세종께서 설화와 연결이 되시던가? 정조께서는 어떤가? 세조는 불교의 신앙적 대상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도덕적인 흠결을 메꾸려고 했던 거 같다. 참고로 약사여래는 병을 치유하는 부처님이고,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월광태자는 대가야의 마자막 왕으로 나라가 망한 뒤 월광사를 지어 그곳에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 석천: 반야사 문수전에서 바라본 석천. 저 아래에도 둘레길이 있다. 저 길을 따라가면 경북 상주시 모동면이 나온다.

 

 

 

불교에서 '반야'는 '인간이 진실한 생명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근원적인 지혜'를 뜻한다. 문수보살은 보살중에서 지혜를 수호한다.

불교 설화로 자신의 흠결을 덮을 수는 없다. 세조도 질병으로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 또 그렇게 어렵게 오른 용상에서 불과 13년 만에 내려오지 않았던가. 같이 묶어서 생각하는게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연산군이 12년, 광해군이 15년동안 보위에 있었으니 생각보다는 재위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던 것이다.

덕업은 쌓지 못하더라도 악업은 쌓지 말자! 요즘 필자가 곱씹고 있는 말이다. 나름 실천할 수 있는 '반야'같은 '지혜'로운 말이라고 생각한다. 아참 계속 곱씹고 있는 말이 또 있다.

- 세상은 넓고 트레킹할 곳은 많다!

 

 


 

 

* 세부코스: 월류봉 -> 한천정사 -> 원촌교 -> 목교 -> 반야교 -> 반야사

* 길이: 약 8km

* 소요시간: 약 3시간 30분 정도

* 난이도: 하

* 교통편: 황간역은 작은 간이역이라 기차 편수가 많지 않음. 황간역에서 월류봉까지는 약 2km 정도 떨어져 있음. 영동역은 좀 더 큰 역이라 기차 편수가 많음. 영동역에서 하차한 후 공영버스를 타고 황간역 부근으로 이동할 수 있음. 이때 중간에 노근리평화공원에서 하차할 수 있음. 영동역에서 노근리평화공원까지 약 25분 정도 소요됨.

* 참고: 월류봉에서 반야사까지는 약 8km 정도임. 문제는 반야사에 공영버스가 다니지 않는다는 점임. 콜택시를 부르거나 왔던 길을 되돌아와야 함. 필자는 왔던길을 되돌아왔음. 그날 약 20km를 걸었음.

 

 

 

 

 

 

 

 

 

 

지난 7월 18일 월요일.

 

 

서초50플러스센터 트레킹 강의를 끝으로 2022년 상반기 일정이 종료됐다.

 

매번 이렇게 한 회기가 종료될 때마다 성취감과 함께 아쉬움이 동시에 밀려온다. 강의 평가서에 기록된 외형적인 서술과는 다른 필자 스스로 느끼는 미흡함이 감돌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름이나 겨울같은 비수기일 때는 항상 자체 평가를 했었다.

 

개별적으로 행하는 일반 트레킹이야 성수기와 비수기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다. 하지만 일반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역사트레킹 강의는 성수기와 비수기가 확연히 갈린다. 당장 호우 경보가 발령됐는데 트레킹 강의를 진행할 수 있겠는가?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동상의 염려가 있는데 계속 강의를 할 수 있겠는가?

 

기상 상황이 안 좋을 경우에는 아예 문화센터에서 강의를 취소해달라고 연락이 온다. 트레킹을 하는데 목숨을 걸고 할 필요는 없으니까. 개별적으로 행하는 일반 트레킹과 수강생들과 함께하는 역사트레킹 강의를 좀 구별해서 기술해봤다.

 

다시 본론으로... 올 상반기는 코로나와 탈코로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 느낌이었다. 올 봄에 코로나가 팬더믹에서 엔데믹(풍토병화)으로 이행이 됐을 때 강의 섭외가 꽤 있었다. 마치 '보복소비', '보복여행'처럼... 야외수업에 관심이 많은 기획자들의 연락을 많이 받았다. 매번 이렇게 강의 의뢰가 많이 들어오면 참 좋겠는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코로나 이전에 강의를 수강하셨던 분들도 개별적으로 연락을 주셨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강의가 무척 그리웠다고 하셨다. 그 분이 직접 저런 말씀을 하셨다. 필자가 잘난척하려고 일부러 지어낸 말이 아니다. ^^

 

 

 

 

 

 

 

 

 

 

상황이 이렇게되니 할 일이 명확해졌다. 어떻게? 코로나 이전 상황으로 루틴을 회복하는 것이다. 요일별로 강의 일정을 고정시키고, 흩어졌던 수강생분들을 다시 묶어내는 작업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 작업들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작업들은 평생 어깨에 얹고 가야한다.

 

앞서 올해는 코로나와 탈코로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 느낌이라고 했다. 무슨 의미일까? 지난 6월 달에 <서초50플러스>에서 강의를 할 때였다. 트레킹에 목말라하신 분들이 많았는지 몇 시간도 안 되서 수강신청이 마감됐다. 보복 트레킹인가?

 

그런데 나중에 출석부를 보니 수강생 한 분이 옛날 수강생분이셨다. 반가운 마음에 개강일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 분은 개강일에 참석을 하지 못했다. 뒤늦게 코로나에 걸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코로나와 탈코로나가 혼재하는 상황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다시 코로나 환자수가 급증을 한다는데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우리는 이겨낼 것이다. 이제까지도 잘 버텨오지 않았나!

 

다가올 가을학기 때는 정말 눈코 뜰세없이 바쁘게 지냈으면 좋겠다. 물들어 올 때 노 저으라고... 열심히 트레킹 강의를 했으면 좋겠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은 현장에서 트레킹을 직접 행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래서 당연히 야외수업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아주 간간히 실내강의를 할 때가 있다.

 

그렇게 PPT를 올려놓고 실내강의를 하다보면 꾸벅꾸벅 조시는 분들을 마주하게 된다. 일부러 예쁜 풍경 사진도 걸어놓고 목소리도 좀 크게 높이는데도 졸음을 못 이겨하시는 분들이 계셨다.

 

실내강의도 잘 하고 싶은데 그게 말처럼 싶지가 않다. 그런 수강생분들을 목격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스쳐가기도 한다.

 

'내가 그 분들의 불면증을 치료하고 있는 건가?'

 

다른 문제도 있다. 실내강의 빈도가 아주 낮다보니 PPT를 오래도록 울거먹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몇 년 전에 썼던 PPT를 업데이트 하지 않고 계속 사용했던 것이다.

 

아무리 내가 현장 트레킹에 특화됐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아니라라는 생각이들었다. 실내강의를 들으시는 수강생분들도 소중한 시간을 투자해서 그 자리에 오시기 않던가. 강사들은 수강생분들의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 그런 존중과 예의가 없는 이들은 수강생 앞에 서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대면 강의를 못 했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더 반성과 분발이 필요했다. 그래서 PPT를 비롯해서 실내강의 자료들을 많이 손을 봤다. 사진도 좀 더 좋은 걸 배치하고, 자가 진단 테스트 항목도 만들어보았다.

 

'재미로 해보는 자신의 트레킹 레벨 지수'인데 이 포스팅을 읽어보시는 분들도 간단하게 한 번 해보시면 좋을 듯하다.

 

 
1
일상생활에서도 걷기를 즐겨한다

2
트레킹화, 배낭, 스틱 같은 장비들이 있다

3
계단을 봐도 겁이 나지 않는다

4
트레킹에 대한 책들을 읽어봤다

5
우중트레킹의 매력을 알고 있다

6
나만의 트레킹 최애 장소가 있다

7
트레킹 프로그램이 있으면 무조건 신청한다

8
혼자서도 씩씩하게 둘레길을 탐방한다

9
산티아고순례길 혹은 파타고니아트레킹 같은 외국 트레일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10
다른 일정보다 트레킹 일정을 먼저 챙긴다

11
다음주는 어느 코스로 트레킹을 할지 벌써 설레인다

 

* 초급: 3개 

* 중급: 6개

 

* 고급: 9개

 

설문지를 10개로 만들기로 했는데 만들다보니 11개가 됐다. 한 번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체크해보시라.

뭐 돈 드는 것도 아닌데...ㅋ

 

이 트레킹 레벨이 자신의 건강 지수가 될 수도 있다. 트레킹을 꾸준히 하는 사람치고 건강이 나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포스팅해본다.

 

거리두기 해제, 실외마스크 착용 해제 등등...

 

이제 코로나 팬더믹에서 코로나 엔더믹(풍토병화)으로 전환이 되고 있다. 지긋지긋한 코로나 터널도 이제 끝나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중단됐던 강의들도 다시 재개되고, 새로운 강연 의뢰들도 들어오고 있다. 개인적으로 트레킹에 대한 문의를 해주시는 분들도 있을 정도다. 꽤 많은 분들이 연락을 주신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봇물이 터지는 형상이다. 그도 그럴것이 그동안 얼마나 답답하셨겠나! 근 3년 동안 발목이 잡혀 제대로 활동도 못하셨을테니까...

 

그렇게 행한 최근 강의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과천시육아종합지원센터라는 곳에서 행한 우면산 역사트레킹이었다. 우면산 일대는 꾸준히 트레킹을 해왔던 곳이라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의뢰 기관인 과천시육아종합지원센터라는 매우 의외였기 때문이다. 하여간 강의 의뢰를 해주셔서 감사했고, 잘 준비를 해서 무시히 강의도 잘 마쳤다.

 

또 꽤 흥미로운 트레킹 행사에도 발을 담그게 됐다. <서울트레킹>이란 행사의 리딩을 맡게 된 것이다. <서울트레킹>은 서울시 체육회에서 주관하는 행사로 2013년부터 시행됐다. 소규모로 진행하는 행사는 아니고 500명 정도 되는 인원이 함께 움직이는 대규모 행사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해당 코스에 대해서 안내를 하고 리딩을 한다.

 

남산 코스면 남산에 대해서, 북악산이면 북악산에 대해서...

 

무대 위에 올라 500명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떠들고, 또 그 500명을 이끌고 리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무거운 책임감이..! 책임감이 앞서기 보다는 아주 재미날 거 같다! 그렇다. 트레킹도 행사도 아주 재밌게 해야 한다. 물론 안전은 당연한 거고...

 

필자는 언제든 역사트레킹을 강의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많이들 연락주시길!^^

연락용 이메일은 본인의 프로필을 클릭하시면 된다.

 

ps. 5월, 7월, 9월, 11월까지 4번에 행사가 있어요. 서울트레킹 행사에 관심있는 분들! 많은 참가 부탁드립니다. 제가 열심히 리딩할게요.^^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서울트레킹 둘러보기 <- 클릭

 

 

 

 

 

 

 

 

 

 

 

 

 

 

* 의성 금성산 조문국 고분군

 

 

 

 

 

 

2021년 8월 12일.

 

경북 의성군 여행은 계속됐다. 의성군은 삼한시대의 소국인 조문국(召文國)이 있던 곳이다. 조문국? 좀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이전에 포스팅한 탑리 오층석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적지가 있어서 바로 가보았다. 탑리 오층석탑과 조문국 유적지는 같은 금성면 소재지에 있는데 자동차로 5분 정도면 닿을 수 있다. 필자는 뚜벅이라 그냥 걸어갔다.ㅋ

 

소문국이라고도 불리는 조문국은 금성면을 중심지로 삼았던 삼한시대의 소국이었다. 신라 벌휴이사금 2년( 185년)에 정복되는데 현재 조문국 왕족들의 무덤들이 금성면 일대에 군집해있다. 참고로 '이사금'은 초기 신라의 왕 칭호이다. 그 이후에 나타나는 '마립간'도 왕 칭호다.

 

조문국 왕족들의 무덤을 두고 '의성 금성산 고분군'이라고 칭한다. 이곳에는 경주에서 볼법한 큰 고분들이 16개나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고분은 높이가 8미터, 동서 길이가 40미터가 넘기도 한다. 금성산 고분군 말고도 의성 지역에는 큰 고분들이 더 있다고 하니 고대시대의 의성 지역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을 거 같다.

 

의성 금성산 고분군 중심에는 경덕왕릉이 있다. 신라 경덕왕? 경덕왕(景德王)은 신라시대의 제 35대(742~765) 왕으로 유교 통치체제를 강화한 인물이다. 그럼 진짜 신라 경덕왕의 능이 조문국 고분군에 있는 것인가?

 

 

 

 

 

* 의성 조문국 경덕왕릉

 

 

 

 

 

 

아니다. 신라 경덕왕의 능은 경주 남산 인근인 경주시 내남면에 위치해 있다. 신라의 왕이 굳이 경주가 아닌 의성에 묻힐 이유가 없지 않은가. 참고로 신라 경덕왕은 관제개편을 통해 당시 발호하던 귀족세력들을 억누르고 왕권강화를 행한 인물이다.

 

그럼 의성 금성산 고분군에 있는 경덕왕릉(景德王)은 누구의 능인가? 말 그대로 조문국의 경덕왕이 잠든 무덤이다. 정확히는 조문국의 경덕왕으로 추정되는 능이다. 그러고보면 조문국 경덕왕(景德王)이나 신라 경덕왕(景德王)이나 한자까지 똑같다. 그러니 헤깔리지...ㅋ

 

금성산 고분군에 있는 경덕왕릉은 왕릉치고는 무척이나 소박하다. 조선시대 권세가들의 무덤 정도로 꾸며졌다. 금성산 고분군은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걷기에 좋은 곳이다. 데이트 코스로도 많이 이용된다고 한다. 실제로 애정 표현을 과하게 하던 젊은 커플과 필자의 동선이 겹쳐져서 꽤나 애를 먹기도 했다. 어찌보면 이곳도 공동묘지인데 이런 곳에서 애정행각을 벌인다? 그러고보면 자신이 서 있는 공간도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곳이 천국도 되고 지옥도 되는 듯싶다.

 

예전 왕릉 답사를 하면서 느낀 점이 있었다. 소나무 숲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왕릉을 가면 세상의 번뇌가 싹 다 씻겨내려갔다. 그래서 한 때는 왕릉에 방점을 찍고 답사를 다닌 적이 있었다.

 

죽은자들의 공간에서 산 자들이 만끽하는 휴식과 명상. 그런 휴식과 명상은 다른 곳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 금성산 조문국 고분군

 

 

 

 

  

* 금성산 조문국 고분군

 

 

 

 

 

 

 

 

 

 

 

 

 

 

* 영월 선돌

 

 

 

 

 

 

필자는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있다. 대장 역할도 하고, 문화해설사 역할도 하는 것이 필자의 임무다.

 

이제까지는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란 프로그램명으로 주로 서울에서 트레킹을 행했다. 물론 종종 지역에 내려가 트레킹을 하기도 했지만 여러 사정이 있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사정이라는 것은 뻔한 것들이었다.

 

모객의 문제, 전세버스 대절의 문제 등등... 더군다나 코로나까지...

 

그럼에도 항상 서울학개론을 넘어 <역사트레킹 한국학개론>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도 이렇게 가볼 곳이 많은데 전국으로 눈을 돌리면 어떻겠는가? 더군다나 그렇게 아름다운 곳을 자신의 두 발로 탐방하면 더 좋지 않은가? 적절하게 해설이 가미가 된다면 더더욱 좋은 것이고!

 

많은 곳을 여행했다고 자부하지만 필자도 낯선 곳을 가면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 길 찾기의 어려움

- 불편한 교통편

- 길동무에 대한 갈망

- 적절한 해설에 대한 갈증

- 치안문제(야생동물 포함)

 

치안문제는 맨마지막에 언급을 했지만 여성분들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한 항목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치안은 사람들과의 문제만은 아니다. 야생동물과의 조우도 포함된다. 멧돼지, 들개, 뱀, 벌 등등... 아웃도어 활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이런 문제들이 상당히 버겁게 느껴진다.

 

그런 와중에 리딩자가 그 길이 초행길이라고 하면? 코미디 같은가? 믿기 어려우실테지만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

 

 

 

 

 

* 영월 서강

 

 

 

 

 

 

* 영월 청령포

 

 

 

 

 

 

어쨌든 그런 제약들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주저하게 만든다. 그렇게 주저함이 반복되면 '이불밖은 위험해' 스타일로 고착되고 만다.

 

저런 난관들을 뚫을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좋은 트레킹 프로그램에 참여를 하면 되는 것이다. 필자가 문화센터 강의를 하면서 만난 분들, 특히 중년 여성들은 검증된 트레킹 프로그램에 대한 갈망이 대단하셨다.

 

- 강사가 경력이 되는지 아닌지

- 해당 코스가 좋은지 아닌지

- 함께 참여하시는 분들이 매너가 좋은지 아닌지

- 강사가 해설뿐만 아니라 마당쇠 역할도 하는지

 

강사의 마당쇠 역할이 무엇인지 좀 의아하실 것이다. 말 그대로 트레킹 강사가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하는 것을 말한다. 뭐 먹고 살려면 마당쇠 역할도 해야한다. 필자가 그렇다. 마당쇠 역할도 한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사실 이 포스팅은 필자의 <강원도 영월 역사트레킹>을 홍보하기 위해 작성됐다. 얼마전에 위드플이라는 시니어세대들을 위한 여행 플래폼이 만들어졌는데 필자도 <역사트레킹 한국학개론>을 런칭을 했다.

 

불건전한 산악회처럼 막걸리판부터 벌이는 모임이 아닌 제대로된 트레킹 모임을 진행해볼 생각이다. 우리나라에 가볼 곳이 얼마나 많은가? 그 좋은 곳들을 많이많이 가볼 생각이다. 그 첫 출발이 바로 <강원도 영월 역사트레킹>이다.

 

- 세상은 넓고 트레킹을 할 곳도 많다! 가보면 안다. 너무 좋다는 걸!

 

 

ps. 작성하고 보니 광고글이네요. 3월 22일에 행하는 <강원도 영월 역사트레킹>에 참여하시고 싶으신 분들은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3월8일에는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 ,4월 5일에는 <문경새재 역사트레킹>도 진행합니다.

 

 

*** 3월 22일 강원도 영월 서강 역사트레킹 참가신청!

 

 

 

 

 

 

 

 

* 탑리오층석탑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일대를 여행한 후 다음 탐방지인 경북 의성군으로 향했다.

 

주천면에서 충북 제천역으로 이동한 후, 경북 의성군 금성면 탑리역으로 가는 무궁화호 기차를 탔다. 탑리역에 정차하는 기차가 많지 않은데 운 좋게 탈 수 있었다.

 

탑리역은 성 모양으로 외관을 꾸몄다. 인근에 금성산성이 있어 그 형상을 옮겨놓은 것이다. 탑리역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탑리리 오층석탑이 있으니, 석탑으로 외관을 꾸미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그리고 성 모양도 우리나라의 산성이 아닌 외국의 캐슬처럼 보였다.ㅋ

 

탑리역은 소박하지만 옛 정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하지만 의성군 금성면 일대의 인구 감소로 인해 하루에 상행 5편, 하행 5편만 운행된다. 지역 여행을 행하다보면 지역소멸이라는 말이 실감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서울로만 집중되고 있는 이런 상황이 과연 맞는 일인가?"

 

중앙과 지역이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탑리 오층석탑을 탐방하러 갔다가 국토균형발전까지 생각해봤다.

석양이 지기 시작해서 서둘러 오층석탑을 친견하러 갔다. 골목을 돌아 오층석탑 앞에 섰다.

 

"와!"

 

높이 9.6미터의 석탑이 눈 앞에 펼쳐지니 감탄사가 나올 수밖에... 더군다나 석탑은 높은 토단 위에 쌓여 있어 더 높아보였다. 마치 배구선수 김연경이 하이힐을 신고 있는 모습이랄까? 참고로 토단은 흙으로 쌓은 높은 단을 말한다.

 

탑리 오층석탑은 외형이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는 석탑으로 후기 신라시대에 조성됐다. 전탑(塼塔)처럼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 형식의 탑이다. 거기에 목조탑 형식도 가미했다. 우리나라 석탑 양식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로 국보 제77호로 지정되어 있다.

 

 

 

 

 

 

 

* 탑리오층석탑: 탑리 오층석탑은 높은 토단 위에 서 있어 키가 더 커 보인다.

 

 

 

 

 

 

뜻풀이를 해보자. 전탑(塼塔)은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한다. 흙을 구워 벽돌을 잘 만들었던 중국에서 유행했던 방식이다. 그럼 모전석탑은 무엇인가? 모전석탑(模塼石塔)은 전탑을 모방해서 만든 탑을 뜻이다. 즉 벽돌이 아닌 자연석을 써서 만들었지만 벽돌탑 모양 비스무리하게 외형을 뽑은 탑을 말하는 것이다. 이 모전석탑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이한 탑 양식으로 후기 신라시대부터 고려 전기까지 만들어졌다.

 

탑리 오층석탑은 지붕돌이라고 불리는 옥개석이 층층으로 쌓였있다. 계단처럼 층계를 이룬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전탑양식이다. 감실이 있는 1층은 아주 크게 만들었으나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드는 모습이다. 감실은 불상이나 신위, 성체 등을 모셔두는 공간을 말한다. 현재 탑리 오층석탑에서는 그 공간이 비어있다.

감실에 문이 달리지도 않았고, 빈 공간이 나름 아늑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

 

지나가는 길고양이들에게! 실제로 석탑 인근에는 길고양이들이 많이 오갔다.

 

이렇게하여 의성군 금성면 탑리 오층석탑 답사를 무사히 마쳤다. 현장에 너무 늦게 도착해서 좀 정신없이 사진을 찍었던 거 같다. 그래서 사진이 좀 안 이쁘게 나왔다. 그게 좀 아쉽지만 그 핑계대고 또 한 번 갈 수 있지 않은가?^^

 

ps. 일상생활에서 잘 안 쓰는 용어들이 나와서 좀 어려우신가? 어렵지만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것도 답사여행의 또다른 재미이다. 모전석탑에 대해서는 이전에 작성한 장락동 모전석탑에 작성한 포스팅이 있으니 참고해주시면 좋겠다. 충북 제천시 장락동에 있는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은 보물 제4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포스팅 클릭

 

 

 

 

 

 

 

* 탑리오층석탑: 1층 탑신에 감실이 있다. 아무래도 동네 고양이들의 안식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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