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선정 절벽소나무

 

 

 

 

 

 

* 요선암 돌개구멍

 

 

 

 

 

 

강원도 영월군 탐방은 계속이어졌다. 영월군 주천면의 허름한 모텔에서 1박을 한 후 다시 무릉도원면으로 이동했다. 주천면은 서부 영월의 중심지로 충북 제천시까지 들어가는 시내버스도 있다.

 

이번 탐방은 무릉도원면에 있는 요선정, 무릉리마애여래좌상, 돌개구멍계곡 일대에서 이루어졌다. 요선정이 자리잡고 있는 주천강 일대는 명소들이 많은 곳이다. 유명한 한반도지형과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가 바로 그것이다. 주천강은 평창강 혹은 서강이라고도 불리는데 영월읍에서 동강과 합수되어 남한강으로 흐른다. 강원도 남쪽 골짜기 곳곳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들이 동강과 서강으로 모여들었고, 이후 영월읍에서 동강과 서강이 합수되어 남한강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동강은 래프팅으로 유명한 그 동강을 말한다.

 

그렇게 주천강이 유유히 흐르는 곳에 요선정(邀仙亭)이 있으니 그뜻 그대로 신선이 노닐던 정자라고 할만하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는 요선정은 요선암이라고도 불린다. 요선정에 올라서면 절벽 위에 반쯤 누워있는 소나무를 볼 수 있다. 그 절벽 소나무 뒤로 펼쳐진 주천강의 모습은 절경중에 절경이라고 할만 하다. 아찔한 절벽 위에 걸쳐있는 소나무, 그리고 큰 계곡같은 강이 어우러지니 감탄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감탄사를 내뱉은 이 중에 양사언이라는 조선 중기 시대를 살아간 이도 있었다. 문인이자 서예가인 양사언은 조선 전기 4대 명필에 속할 정도로 글씨를 잘 썼다. 특히 초서를 잘 썼다고 한다. 그런 양사언이 평창군수 시절 이곳을 방문하여 요선암(邀僊岩)이라는 글씨를 요선정 아래 바위에 썼다. 그 글씨가 요선정의 유래가 된 것이다.

 

 

 

 

 

 

* 요선정과 석탑

 

 

 

 

 

 

 

양사언은 관직생활을 약 40년 정도 했는데 특이하게도 외관직, 즉 지방관을 주로 맡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평창군수, 철원군수,함흥부윤 등등... 일설에 의하면 풍류를 좋아하여 일부러 외관직을 자처했다고 한다. 그런 풍류객의 면모는 금강산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됐다. 회양군수 시절에 금강산을 자주 방문했던 양사언은 만폭동에 봉래풍악원화동천(逢萊楓岳元化洞天)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그 여덟글자는 지금도 남아있다.

 

참고로 조선 전기 4대 명필은 안평대군, 김구, 한호, 양사언이다. 한호는 그 유명한 한석봉이다. 양사언 선생이 어떤 위치에 있는 분인지 가늠이 되실 것이다. 그나저나 양사언 선생 글씨보러 금강산에 가고 싶다...ㅋ

 

요선정은 1913년에 건립됐으니 수백년의 세월을 버틴 정자는 아니다. 하지만 숙종, 영조, 정조 세 분의 각기 다른 임금께서 쓴 어제어필시문(御製御筆詩文)이 있는 뜻깊은 곳이다. 숙종은 유배지인 영월에서 죽음을 맞이한 단종을 복위시켰다. 이후 단종의 유배지에서의 행적을 살펴보다 시 하나를 지어 강원 감사에게 보냈는데 이 시가 주천현의 누각인 청허루에 현판으로 걸리게 된다.

 

안타깝게도 청허루는 불타게 된다. 이후 영조가 숙종의 어제시를 다시 쓰고, 거기에 더해 자신도 시를 써서 복원된 청허루에 걸게 했다. 또 이후 정조께서 두 선대왕의 어제시를 잘 간직하고자 하는 의미로 시를 써서 내려보내니 주천현 청허루에는 무려 세 분 임금의 어제시가 걸려있게 된 것이다.

 

그럼 왜 청허루에 있어야 할 어제시 세 편이 요선정에 있을까? 시간이 흘러 누각은 무너져 내렸고 어제시 세 편을 담아낼 새로운 둥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13년, 현 위치에 요선정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 무릉리마애여래좌상

 

 

 

 

 

 

 

* 무릉리마애여래좌상

 

 

 

 

 

사실 요선정 일대는 작은 암자가 있던 곳이다. 인근 무릉도원면 사자산에는 적멸보궁인 법흥사가 있다. 법흥사는 후기 신라시대에 선종 9산 선문 중에 하나인 사자산문의 근본도량이다. 사자산문을 열고 계승한 이는 철감국사 도윤과 징효대사 절중인데 그들이 요선정 일대를 자주 방문을 했다는 것이다. 법흥사의 부속 암자가 지금의 요선정 자리에 있었다는 뜻이다.

 

마애불 앞에 놓인 허름한 삼층석탑이 이곳에 암자가 있었다는 흔적을 대변해주고 있는 듯하다. 이제 시선을 돌려 무릉리마애여래좌상을 살펴보자. 사실 이 곳에는 요선정, 삼층석탑, 마애불이 오밀조밀하게 자리잡고 있다. 한 눈에 그 3개의 문화재가 다 들어올 정도로 촘촘히 들어서있다.

 

강원도에는 큰 사찰은 많지만 마애불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철원군 동송읍 금학산에 위치한 마애불과 무릉리마애불(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4호)이 문화재로 등록됐을 뿐이다. 그런 의미로 무릉리마애불은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는 얼핏보면 오리배처럼 보인다. 그런 바위 한쪽면에 약 3.5미터 크기로 석각을 해놓았다. 사람을 처음 볼 때 얼굴을 보듯 마애불도 얼굴을 비롯한 상체부터 보기 마련이다. 그런면에서 탐방객들은 시원시원한 마애불의 용안을 보게 된다. 무릉리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고부조高浮彫)로 조각되어 있는데 특히 얼굴 부분이 아주 도톰하게 묘사되어 있다. 눈,코,입이 아주 큼직큼직하다. 달덩이처럼 둥글게 표현된 얼굴 모습이 참으로 복스럽다.

 

하지만 무릉리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비례감이 떨어진다. 하체는 결가부좌를 했는데 상체보다 더 크게 묘사되어 있다. 바위 크기에 맞춰 석각을 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원래 하체를 크게 묘사하려는 의도로 그랬던 것인가? 어쨌든 복스럽게 그려진 얼굴을 보다 오버하듯 새겨진 하체를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오기까지 했다.

손은 아담하게 잘 묘사됐지만 발바닥은 곰발바닥처럼 아주 커다랗게 조각을 해놓은 것이다.

 

무릉리마애여래좌상은 독립된 통바위에 그려져 있어 그 전체적인 형상이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강한 인상까지 풍긴다. 하지만 전체적인 비례미를 고려하지 않아 균형감이 떨어진다. 그래서 개성미를 강조했던 고려 전기시대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 돌개구멍: 앗 사람이 빠져있나? 자연이 만들어놓은 신비한 형상이다.

 

 

 

 

 

 

요선정과 마애불 탐방을 마쳤으니 이제 돌개구멍을 보러 가자. 강가로 내려가면 되니 엎어지면 코닿을 곳이다. 돌개구멍이 있는 바위들을 보면 그 형태 하나하나가 다 특이하게 보인다. 큰 강이나 계곡에 있는 보통의 너럭바위들하고는 큰 차이가 난다. 너럭바위가 잔잔한 물길처럼 평평하게 다듬어졌다면 돌개구멍을 품은 바위들은 각양각색의 모습이다. 마치 전위 예술을 하고 있는 거 같다.

 

바위가 예술은 한다고?ㅋ

 

천연기념물 제543호로 지정되어 있는 요선암 돌개구멍은 포트홀(pot hole) 혹은 구혈(甌穴)이라고도 불린다. 그럼 왜 이런 형태가 도출됐을까? 하천에 있는 큰 바위에 작은 구멍이 생긴다. 그 구멍으로 작은 자갈이 담기는데 그 자갈이 깎기 역할을 한다. 자갈이 뱅글뱅글 돌면서 작은 구멍을 계속해서 깎아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깎인 돌은 평평한 작은 항아리 모양을 띄고 있다. 그래서 커피포트처럼 생겼다고 포트홀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런 돌개구멍은 쥐라기 시대에 생성된 지각작용 때문이라고 한다. 그 옛날 공룡이 뛰어놀고 다녔던 시기의 지각 작용이 지금까지 이어져 현대인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어디 찾아보면 공룡 발자국이 있을지 모른다. ㅋ

 

답사를 다닐 때 항상 다른 관광객들의 말에 목소리를 귀기울이는 편이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말이다.

 

"거대하지는 않은데... 우리나라는 참 아기자기해요."

"그게 바로 우리나라의 멋이잖아요."

 

필자의 생각하고 너무 똑같아서 이렇게 소리를 지를뻔 했다.

 

"맞아요. 제 생각이랑 똑같아요!"

 

 

 

 

 

* 돌개구멍

 

 

 

 

 

* 2021년 8월 11일에 탐방했음.

 

 

 

 

 

 

 

 

* 법흥사: 소나무숲

 

 

 

 

 

* 적멸보궁: 부도탑과 자장굴

 

 

 

 

 

 

2021년 8월 10일

 

충북 제천시 장락사지를 둘러본 후 강원도 영월군으로 넘어왔다. 영월은 예전에 참 많이 탐방을 했던 곳이다. 트레킹 코스를 기획한다고 여기저기 발길을 참 많이도 내디뎠었다. 2013년도에 행한 중부내륙 자전거여행 때는 아예 영월의 주요 포인트를 가로질러 갔었다. 당시 온라인 신문에 자전거여행기를 기고를 했는데 영월편의 제목이 이랬다.

 

- 트레킹으로 왔던 곳, 자전거로 다시왔네!

 

그동안 바빴었나? 약 7년 만에 다시왔다. 무엇하느라 그리 바빴는지... 탐방지는 무릉도원면 사자산에 있는 적멸보궁 법흥사(法興寺)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말한다.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는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이때가 선덕여왕 12년(643)이었다. 자장율사는 진신사리를 평창 오대산 상원사, 정선 태백산 정암사, 양산 영축산 통도사, 인제 설악산 봉정암, 영월 사자산 법흥사에 봉안한다. 이를 두고 5대 적멸보궁이라고 부른다.

 

유명해서 그런가? 사람들은 적멸보궁하면 5대 적멸보궁부터 떠올린다. 하지만 이외에도 적멸보궁은 더 있다. 대표적인 곳이 김제에 있는 금산사다. 자장율사 이후로도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계속 국내로 유입됐다는 말이다. 근래에도 유입되고 있다. 사찰들이 너도나도 적멸보궁을 내세우다보니, 도대체 석가모니의 사리는 얼마나되냐는 의문섞인 물음들도 함께 따라온다.

 

어쨌든 자장율사가 세운 5대 적멸보궁은 우리 불교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귀한 곳들이다. 한편 자장율사는 경주 황룡사9층목탑 건립을 주도하는 등 신라 불교 진흥에 큰 공헌을 하기도 했다.

 

자장율사가 처음 창건했을 때의 이름은 흥녕사였다. 이후 징효대사 절중이 이곳을 9산 선문 중에 하나인 사자산문의 근본도량으로 삼게 된다. 불교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신라 말기에 유행했던 구산선문에 대해서 한번쯤 들어보셨을 것이다. 구산선문은 경전 위주의 교종과는 달리 수행에 중심을 둔 선종의 9개 선문을 말한다. 한마디로 신라 말기에 9개의 선종 문파가 산을 중심으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사자산문은 사자산에 있다하여 그렇게 불린 것이다.

 

이후 흥녕사는 큰 화재를 당해 약 천 년동안 명백만 이어져왔다. 그러다 1902년에 비구니인 대원각 스님이 중건을 했고 이때 사찰 이름을 법흥사로 개칭하기에 이른다. 그러고보면 법흥사로 불린 기간은 100년 정도인 셈이다.

 

일주문을 지나 주차장에 들어서면 2층 누각으로 된 종루가 보인다. 그 옆쪽으로 안내문을 따라가면 적멸보궁이다. 키가 큰 전나무가 양 옆으로 펼쳐진 전나무 숲길을 따라가서 그런지 기분이 상쾌하다. 그렇게 전나무숲길을 따라 약 500미터 정도 오르면 적멸보궁에 도착한다.

 

법흥사 적멸보궁의 첫 인상은 소박함이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인 적멸보궁은 분명 화려한 건물은 아니었다. 큰 사찰의 전각들보다도 더 아담한 사이즈였다. 하지만 주위의 풍광과 어루러져서 그런지 허전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적멸보궁이 가지지 못한 화려함을 주위의 산 속 풍광이 채워주고 있다고나 할까?

 

 

 

 

 

* 법흥사

 

 

 

 

 

 

* 적멸보궁

 

 

 

 

 

 

 

적멸보궁 실내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는다. 대신 창문을 만들어 건물 뒤편 언덕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그 언덕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부도탑이 있기에 불상을 봉안하지 않는 것이다. 그 부도탑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3호인 영월 법흥사 부도이다. 이외에도 언덕에는 토굴도 있다. 자장율사가 수도를 했다고 전해지는 토굴이라 자장굴이라는 명칭도 있다. 지금은 앞쪽에 석축을 올려 사실상 입구가 막혔지만 그 안쪽은 성인 한 명이 가부좌를 틀고 수도하기에 넉넉한 공간이라고 한다.

 

적멸보궁 탐방을 마치고 다시 숲길을 내려가다 이런 생각이들었다.

 

'부처님 사리가 든 탑이면 국보가 되야 하지 않나? 적어도 보물이라도 되야 하잖아? 그런데 도지정 문화재라니... 무언가 좀 안 맞네...'

 

사실 그 부도탑은 어떤 스님의 사리탑이라고 한다. 어느 이름모를 스님의 부도탑이 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부도탑으로 알려졌는지 그 시기와 이유는 알려져있지 않다. 사람들은 속은 건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는 관련이 없는 부도탑을 바라보면서 괜히 합장을 하는 것인가?

 

이와 관련해서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영원토록 보전하기 위해 사자산 어딘가에 숨겨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말에 의거하면 사자산은 산 자체가 커다란 부도탑이 되는 것이다.

 

숲길을 내려와서 법흥사의 중심영역을 둘러봤다. 적멸보궁처럼 법흥사 경내도 크지 않다. 하지만 주위 산이 잘 감싼 모습을 하고 있어 보기가 좋았다. 그런데 경내 곳곳이 공사중이라 좀 어수선하기도 했다. 포크레인을 피해서 사진을 찍으려고 꽤나 애를 먹었다.

 

징효대사 절중의 탑비와 부도비까지 둘러본 후 건너편 소나무숲에 가서 법흥사를 전체적으로 다시 둘러봤다. 그렇게 사자산과 사찰 일대를 바라보니, 자장율사가 왜 이곳에 진신사리를 숨겨놓았는지 알 수 있을 거 같다. 그렇게 법흥사는 밀림의 왕으로 불리는 사자처럼 듬직한 사자산이 품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참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찾으러 다시 사자산에 가볼까?^^

 

글을 마치기 전에 법흥사가 있는 무릉도원면에 대해서 잠깐 언급해본다. 무릉도원면의 원래 명칭은 수주면이었다. 주민투표에 의해 2016년 11월 15일부터 무릉도원면으로 개칭을 했다. 2009년 영월군에 있는 서면이 한반도면으로 이름을 바꾼 후 관광객이 늘어난 전례를 따른 듯싶다. 비교적 근래에 변경되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비롯한 몇몇 자료들은 '수주면'으로 기재를 하고 있다.

 

 

 

 

 

 

* 부도탑

 

 

 

 

* 징효대사탑비: 보물 제612호

 

 

 

 

 

 

* 법흥사

 

 

 

 

 

 

 

 

 

*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2021년 8월 10일.

 

충북 제천시에 있는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을 탐방했다. 보물 제459호로 지정되어 있는 장락동 모전석탑은 그 높이가 무려 9.1미터에 달한다. 석탑이 서 있는 곳은 과거 창락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지금은 논밭으로 변했다. 탑 인근에서는 발굴작업을 행한 흔적을 보존하고 있었다. 주위가 평평하다보니 키가 큰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은 멀리서도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그 석탑처럼 내 키고 컸으면...ㅋ

 

보물 제459호로 지정되어 있는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은 점판암(粘板岩)을 다듬어 벽돌처럼 쌓아올렸다. 모전석탑(模塼石塔)이란 전탑을 모방해서 만든 탑을 뜻이다. 전탑은 벽돌을 구워만든 탑이다. 즉 자연석을 써서 만들었지만 벽돌탑 모양 비스무리하게 외형을 뽑은 탑을 말하는 것이다. 이 모전석탑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이한 탑 양식으로 후기 신라시대부터 고려 전기까지 만들어졌다.

 

 

 

 

 

*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벽돌모양을 흉내낸다고 했지만 아무 돌이나 가져다 쓸 수는 없었다. 높이 쌓아올릴 수 있는 평평한 형태의 암석이 필요했다. 그래서 점판암이 쓰인 것이다. 점판암은 넙쩍하게 쪼개지는 성질이 있는데 영어로는 slate라고 불린다. 평평하게 쪼개지니 기와처럼 지붕에 올리기도 했다. 평평하니 고기를 굽기에도 제격이었다...ㅋ

점판암으로 만든 문화재를 가까이서 보고 싶으면 김제 금산사에서 육각다층석탑을 친견하시라! 육각다층석탑은 보물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은 1층에 점판암이 아닌 화강암으로 4개의 기둥을 세웠다. 그중 남쪽과 북쪽에 돌문을 달아서 감실을 만들었다. 무거운 돌문을 열고 들어가면 성스러운 공간이 나올 것이다. 현재 남쪽문은 사라지고 북쪽문만 남아있다.

 

탑 주변에서는 발굴작업을 하고 난 후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이 주변의 평평한 논밭 일대가 다 예전 창락사의 경내라고 한다. 사찰이 꽤 컸을 거 같다.

 

탑 너머로 키 큰 아파트들이 들어선다. 이미 입주를 마친 아파트도 있고, 한참 건설중인 아파트도 있다.

예전같았으면 9미터짜리 칠층모전석탑이 이 동네에서 단연 1등이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석탑을 보며 방향을 잡았다면 이제는 아파트를 보며 길을 잡을까?

 

강원도 영월군 법흥사로 길을 잡았다. 카카오 지도를 보며 길을 잡았다...ㅋ

 

 

 

 

 

 

*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 수승대

 

 

 

 

 

우두산 y자형 출렁다리, 창포원 등등... 근래에 들어 경남 거창에는 주목받는 관광자원들이 많이 생겼다. 하지만 역시 거창하면 수승대다. 계곡을 따라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고 거대한 거북바위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곳이 바로 수승대다. 워낙 빼어난 풍광을 자랑해서 그런지 수승대에서는 여름에 국제연극제까지 펼쳐진다. 시원한 계곡이 흐르는 그곳, 명승 제53호로 지정되어 있는 거창 수승대 일대를 탐방해보자.

 

 

● 안의삼동이라고 불렸던 수승대 계곡

 

수승대는 널찍한 바위와 그 옆을 흐르는 맑은 물, 푸른 숲이 어우러져 일품 풍광을 자랑한다. 그 물의 발원지는 덕유산이다. 원학동(猿鶴洞)계곡이라고도 불리는 수승대는 거창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한 곳이다. 거창을 방문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꼭 들러야 하는 곳이 바로 수승대라는 것이다.

 

원학동 계곡은 함양의 화림동(花林洞) 계곡, 용추계곡이라는 명칭으로 더 유명한 심진동(尋眞洞) 계곡과 더불어 안의삼동(安義三洞)이라고 불렸다. 원학동, 화림동, 심진동이 안의 지방의 3대 계곡이라는 뜻이다. 안의는 현재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으로, 면 단위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안의현이라 불리며 함양, 거창과 함께 그 어깨를 나란히 했다다. 이후 행정구역이 개편됐고, 그래서 현재 수승대는 거창군 소속이 됐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류를 논할 때, 흔히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여기서 '우 함양'을 '우 안의'로 바꿔도 될 만큼 안의 지역은 풍부한 선비문화를 창달했던 곳이다. 수승대가 안의삼동이었던 만큼 수승대도 선비 문화와 궤를 같이 했다는 건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그 명칭을 둘러싼 이야기부터 아주 선비적이었다.

 

 

 

 

 

* 관수루: 구연서원의 정문

 

 

 

 

 

 

 

 

● 수승대의 옛 이름 '수송대'

 

수승대의 옛날 명칭은 수송대(愁送臺)였다. 한자를 풀어보면 근심 수(愁), 보낼 송(送), 돈대 대(臺)다. 한자에서도 보이듯 수송대라는 명칭은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다. 보낼 송(送)자에서 보듯 '근심을 떨쳐낸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학동 계곡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였다. 백제는 나날이 쇠락해졌고, 반대로 신라는 점점 더 강성해질 무렵이었다. 백제 사신들은 신라 조정에 가서 수모를 당했다. 심지어는 목숨을 잃고 영영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

기도 했다.

 

이렇듯 먼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술 한 잔 건네며 위로를 해 주었던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마침 국경과 가까운 곳에 풍광이 수려한 곳이 있으니, 그 곳에서 위로주를 건냈을 것이다. 그곳이 바로 거북바위로 유명한 수송대라는 거다.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하지만 확실한 건, 이 일대에서 백제와 신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갔다는 사실이다. 원학동에서 동쪽으로 약 8㎞ 떨어진 곳에 거열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 산 정상부근에는 거열성이라는 산성이 있다. 삼국시대 말기, 거열성은 신라군에 의해 함락되기도 했고, 이후에는 백제 부흥 운동이 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곳이기도 했다. 그만큼 이 일대는 백제와 신라의 격전장이었다. 그렇게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하지만 거북바위는 그 이후로도 약 천 년 동안 수송대라고 불리게 됐다.

 

 

 

 

 

 

* 요수정: 거북바위 건너편에 있다.

 

 

 

 

 

 

 

● 풍류객(?) 이황이 지어준 '수승대'라는 이름

 

거북바위가 수승대(搜勝臺)라는 현재의 명칭을 얻게 된 건 퇴계 이황이 지은 시 한 수 때문이었다. 그 시를 수취한 이는 요수(樂水) 신권(愼權)이라는 분이었다. 신권 선생은 일찍부터 벼슬길을 마다하고 원학동 일대에서 후학들을 양성했다. 거북바위 옆쪽에 구연재(龜淵齋)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이를 두고 구연서당이라고 불렀다.

 

관수루라는 멋진 문루를 두고 있는 구연서원은 이후 구연서당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계곡의 반대편에는 요수정이라는 정자도 지었는데 요수정에 오르면 거북바위의 또다른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그렇게 자연과 학문을 벗 삼고 있던 신권 선생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안의지역을 유람하던 퇴계 이황 선생이 원학동을 방문하겠다는 전갈이 당도한 것이다. 신권 선생은 요수정에서 한 상 차려 놓고 반가운 이의 발걸음을 기다렸다고 한다.

 

하지만 오라는 퇴계 선생은 오지 않고, 편지 한 통이 전해지게 된다. 왕의 부름 때문에 급하게 한양으로 떠나야 했던 퇴계 선생이 보낸 서찰이었다. 그 서찰에는 원학동을 방문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은 시 한 수가 적혀 있었다.

 

그 시에서 퇴계 선생은 어감이 좋지 않은 '수송대'를 '수승대(搜勝臺)'로 고치라고 권유한다. 한자를 거칠게 풀어보면, '찾아다녔던 뛰어난 곳' 정도로 쓰일 수 있겠네요. 발음도 비슷하니 못 바꿀 이유도 없었겠지요. 그렇게 하여 거북바위는 퇴계 선생 덕분에 천 년 동안 간직해오던 부정적인 이름을 떨쳐낼 수 있었던 것이다. 풍류를 즐기기에 딱 좋은 장소에 어울리는 '풍류 스토리텔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이야기를 입증이라도 하듯 거북바위에는 퇴계 선생의 시문이 새겨져 있다. 이외에도 거북바위에는 수많은 풍류객들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갔다. 그런 글씨들이 멋있어보여서 그랬는지 필자도 한 번 붓을 놀리고 싶었다. 하지만 문화재를 훼손하면 감방에 갈 수도 있다.

 

 

 

 

 

* 용암정: 숲길을 따라 수승대에서 약 1km 정도 이동을 하면 만날 수 있다.

 

 

 

 

 

 

근래에 들어 수승대의 명칭 변경 논란이 있었다. 2019년에 서울 성북동에 있는 성락원(명승 제35호)이 역사성 논란에 휩싸였는데 엉뚱하게 그 불똥이 수승대로 튄 것이다. 성락원 논란으로 인해 전국의 명승과 별서정원의 역사성을 전수조사를 했다고 한다. 그와 관련하여 관계자들이 삼국시대의 명칭인 수송대로 바꾸자는 의견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승대는 수승대였다. 굳이 수송대라는 옛 이름으로 돌릴 이유가 없었다. 거창 군민들은 반발을 했고 적극적으로 의견 제시를 했다고 한다. 결국 2021년 11월 10일, 문화재청은 현재의 수승대 명칭을 유지한다고 밝혔다.

 

수승대 일대는 보물로 지정된 농산리석조여래입상, 용암정, 모산재 등등... 다양한 문화재들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수승대를 감싸고 있는 성령산은 소나무숲길이 인상적인 곳이다. 계곡도 좋고, 문화재도 만날 수 있고, 숲길도 좋은 곳... 당장 가보자!

 

 

ps. 본 포스팅은 경상남도에서 주관하는 거창한달살기 프로그램을 행한 결과물입니다.

 

 

 

 

 

* 농산리석조여래입상: 보물 1436호로 지정되어 있는 농산리석불. 수승대에서 약 2km 정도 떨어져있다.

 

 

 

  

* 소나무숲길: 계곡을 끼고 걷는 길이다. 숲길이 짧다는게 단점이었다.

 

 

 

 

 

* 수승대

 

 

 

 

 

 

* 참고

 

1. 서울에서 거창까지는 고속버스로 약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됨. 남부터미널이나 동서울터미널에서 거창행 버스를 탈 수 있음.

2. 거창읍내에서 수승대가 있는 위천면까지 군내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음.

3. 거창읍내-위천면 시골버스 이동시간은 약 15분 정도임. 배차간격은 약 30분 정도임.

 

 

 

 

 

 

 

 

 
 

 

 

 

 

 

 

 

* 수타사 대적광전

 

 

 

 

 

2021년 7월 3일 토요일

 

설악산을 떠나 홍천에 도착했다. 같은 강원도라도 설악산, 태백산이 있는 영동지방과 경기도와 가까운 영서지방과는 확실히 차이가 난다. 영동지방이 우뚝 솟아있는 산봉우리 이미지라면 영서지방은 그보다는 부드러운 강물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아무래도 영서지방을 적시고 있는 북한강과 남한강 때문에 그런 이미지가 연상될터!

 

이날은 홍천의 명산인 공작산을 탐방했다. 정상을 간 것은 아니고... 그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수타사를 탐방한 것이다. 그리고 수타사 옆쪽에 조성되어 있는 공작산 산소길을 걸었다. 필자도 나이가 점점 먹어가니 산 정상을 가는 것보다 그 아래에서 노니는 것이 더 좋아진다. 그렇게 노닐다 사찰을 탐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수타사! 이름부터 군침이 돌지 않는가? 가뜩이나 필자는 짜장면을 좋아하는데... 특히 간짜장!

 

수타사(壽陀寺)는 목숨수(壽), 비탈질타(陀)에서 보듯 면발이 예술인 수타짜장하고는 관계가 없는 곳이다. 수타사(壽陀寺)는 셀 수 없는 정토세계의 무한한 수명을 뜻한다. 그런데 해당 명칭을 얻게 된 건 1811년(순조 11) 때이다. 홍천 공작산 수타사라하면 알 사람은 아는 유명한 사찰인데 그에 비해 명칭은 너무 늦게 자리잡은 것이다.

 

수타사는 공작산(887.4m)에 있다. 공작산! 이름부터 무언가 있어보이지 않는가? 공작산 일대는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일명 공작포란형 지형이다. 화려하고 큰 날개를 가진 공작이 알을 품고 있다니! 명당이 따로 없구나! 더군다나 그 사이로 비경을 품고 있는 수타계곡이 흐르고 있으니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천하 제일의 명당이라고 할 만 하다.

 

공작포란형 지형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동작동 국립묘지다. 서울 서달산 아래에 자리잡은 국립묘지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북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 아시겠지만 집을 짓는 양택이든 묘지를 쓰는 음택이든 남향을 선호하지 북향을 따르지는 않는다. 그럼 흉지에 국립묘지를 썼다는 것인가? 아니다. 아무리 북향이라도 서달산이 가지고 있는 공작포란형 지형 때문에 국립묘지는 명당이 된 것이다. 지형 자체가 가진 기운이 북향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다.

 

공작새의 화려한 날개짓처럼 웅장함을 드러내는 공작산은 영서지방의 명산으로 불린다. 그런 명산에 천년고찰인 수타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 일월사지 삼층석탑

 

 

 

 

 

 

* 흥회루

 

 

 

 

 

 

 

수타사는 후기 신라시대인 708년(성덕왕7)에 창건됐다. 원효대사가 창건주라고 전해지지만 원효께서는 이미 686년에 열반에 드셨으니 창건과 관련된 정황들은 좀 더 면밀하게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처음에는 일월사(日月寺)였다. 또한 위치도 현재보다 좀 더 위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실 공작산도 처음에는 우적산이라고 불렸다. 그러다 조선 중기인 1568년(선조2)에 현 위치로 이건을 하게 된다. 이때 일월사에서 수타사(水墮寺)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우적산도 이름이 바뀌어 공작산이 된다. 지금은 옛 일월사 터에는 삼층석탑만이 그 공간을 지키고 있다. 삼층석탑은 현재 2층과 3층 탑신부가 없는 상태다. 꼭대기 부분인 상륜부도 없다. 훼손이 많이 됐는데 온전한 형태였으면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 거 같다.

 

수타사 일대에 흐르고 있는 덕지천을 건너 사천왕문을 향한다. 그전에 앞쪽에 펼쳐진 연꽃밭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수타사 산소길로 이어지는 길인데 자꾸 몸이 그리고 향한다. 길이 얼마나 예뻤으면! 빨리 수타사 탐방하고 산소길을 걸어야겠다.

 

수타사의 사천왕문은 봉황문이라고 불린다. 그 봉황문을 지나면 흥회루가 나온다. 사찰의 중심 영역으로 들어갈 때는 2층으로 된 누각 아래로 난 문을 통해 입장한다. 그런 누각을 통상 보제루라고 하는데 수타사에서는 흥회루(興懷樓)라고 부른다. 봉황문도 그렇고, 흥회루도 그렇고... 수타사는 독특한 면이 있다.

 

흥회루를 자세히 살펴보면 더 독특하다. 통상적으로 보제루는 2층으로 되어있는데 흥회루는 단층이다. 그래서 아래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누각을 옆으로 둘러가야 한다. 이것도 좀 독특한 방식이다. 정5칸 측3칸으로 이루어진 흥회루는 조선 후기인 1658년(효종9)에 지어졌다. 이후 변형이 있었지만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2015년 8월 7일에 강원도유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되었다.

 

이제 흥회루를 지나 본전인 대적광전으로 가보자. 수타사는 본전이 대적광전인데 이곳에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있다. 정3칸 측3칸으로 지어진 대적광전은 1636년(인조14)에 공잠대사에 의해서 중창됐다. 조일전쟁으로 폐허가 된 수타사를 다시 일으켜세운 이가 바로 공잠대사인 것이다.

 

대적광전 앞에는 길쭉한, 빼빼로같은 석물이 하나 있다. 본전 건물 앞에는 석탑이 있거나 석등이 있기 마련인데 이렇게 빼빼로처럼 생긴 석물은 거의 보지 못하셨을 것이다. 이것은 물을 공양하기 위해 만든 석물이다. 맨 위를 둥글게 큰 그릇처럼 만들었는데 그곳에다 맑은 물을 올렸다는 것이다.

 

대적광전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기품이 있는 형상이다. 주위의 산세와도 서로 어우러진 모습이 눈길을 끈다. 이런 이유로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는 만큼 보물로의 격상도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

 

수타사를 나서기 전에 꼭 봐야할 문화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수타사 동종이다. 이 종은 조선 후기에 활약하신 사인 스님이 제작한 것으로 빼어난 조형미를 자랑한다. 사인 스님은 종을 만드는 주종장이었는데 주로 경기, 강원, 경상지역에서 종을 제작하셨다. 워낙 제작 기술이 뛰어나서 그런지 사인스님이 만든 종은 무려 8개가 보물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11-x호'와 같이 지정번호를 받았는데 수타사 동종은 11-3호이다.

 

서울 북한산 화계사에도 사인스님의 동종이 있다. 그 종은 보물 제11-5호다. 화계사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 동종을 보면서 이러쿵저러쿵 설명을 했었는데 수타사에서 또다른 사인스님 동종을 친견하게 되서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보호각 안에 있어서 시원하게 보지는 못했다. 그에 비해 화계사 동종은 종루에 걸려있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런 점에서는 화계사 동종이 실물을 친견하기에 낫다.

 

이렇게하여 공작산 수타사 탐방은 종료가 됐다. 경내가 크지는 않지만 참 아기자기한 사찰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사찰이 더 좋다.

 

이제는 산소길을 걸을 차례다. 왜 산소길이라는 명칭이 붙었는지 걸어보면 아실 것이다. 걷다보면 맑은 공기로 전해지는 청량감이 온 몸을 감싸앉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산소길을 걷는 이유다.

 

 

 

 

 

 

*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삼불이 아닌 단불로 모셔져있다.

 

 

 

 

 

 

 

 

* 대적광전: 물을 공양하기 위해 만든 석물

 

 

 

 

 

 

* 수타사 사인비구 동종

 

 

 

 

 

 

* 산소길

 

 

 

 

 

 

 

 

 

 

 

 

 

 

필자는 오랫동안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은 문화재답사와 트레킹을 결합시킨 프로그램으로 많은 이들의 호평을 받아왔다. 서울 곳곳에 숨어있는 명소들을 자신의 두 발로 탐방하고, 숲길체험까지 즐기니 좋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필자한테 돌 던지지 마라! 진짜 저런 평가를 받았으니까!^^

 

참가자분들은 문화재 탐방도 좋아했지만 특히 숲길 걷기에 열광을 하셨다. 그런 점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래서 한 가지 결론을 얻게 됐다. 숲에서 행하는 프로그램을 강화해보자! 온갖 생명들이 살아숨쉬는 숲길을 이용해보자! 그래서 태어났다.

 

- 역치사지(사트레킹으로 매예방하고 랑하고 혜롭게 살자)

 

아래는 역치사지와 관련된 일문일답이다.

 

질문자: 프로그램명이 흥미롭다. 역지사지가 아니고 역치사지?

 

필자: 그렇다. 사자성어 역지사지를 빗대서 만들어 보았다. 사트레킹으로 매예방하고 랑하고 혜롭게 살자. 사람들이 역지사지는 다 아니까 그것에 편승해서 만든 것이다. 요즘은 네이밍을 잘 지어야한다. 어쨌든.

 

질문자: 기존 역사트레킹 프로그램과 역치사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이게 가장 궁금하다.

 

필자: 기존 역사트레킹에서도 치매예방 효과가 확실히 있었다. 역사트레킹을 할 때마다 만 보 이상을 걸었으니까. 그것도 걷기 좋은 숲길을 걸었다. 길게는 90% 이상을 숲길만 걸은 적도 있다. 이렇게 서울에서도 걷기 좋은 숲이 많다. 그 숲을 이용하여 치매예방이나 스트레스 감소를 목적으로 한 숲 속 활동을 해보자는 것이다.

 

질문자: 좀 더 설명해달라.

 

필자: 역사트레킹을 행하며 숲 속에서 맨발걷기나 호흡명상 같은 활동을 해보는 것이다. 전통놀이도 할 생각이다. 윷놀이 말고 승경도놀이라고 벼슬살이 보드게임이 있는데 그것도 해볼 생각이다.

 

질문자: 정리하자면... 역사트레킹과 역치사지의 가장 큰 차이점은 숲 속 활동의 유무라고 할 수 있나?

 

필자: 그렇다. 역사트레킹에서는 선과 선을 잇듯이 멈춤없이 계속 이동을 했다. 하지만 역치사지에서는 숲 속 활동이 행해지기에 이동과 멈춤이 수시로 반복된다. 그 멈추는 시간동안 트레킹팀은 자연과 함께할 것이다. 모든 생명이 살아숨쉬는 숲을 조금이라도 더 느껴보자는 것이다.

 

질문자: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 그런데 역치사지는 치매예방을 강조하는 모양새다. 굳이 그런 이유가 있나?

 

필자: 사실 역치사지는 딱 치매예방을 위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우울증 감소나 스트레스 감퇴 같은 정신건강 향상에 더 퇴적화된 프로그램이다.

 

질문자: 그러면 왜 치매예방을 강조했나?

 

필자: 기존에 트레킹 참가자들의 연령대가 높았다. 그래서인지 그분들에게 치매는 공포 그 자체로 여겨지는 듯했다. 그런 공포의 사슬을 풀어드리고 싶었다. 숲과 흙길을 가까이 하는 이들에게는 치매나 중풍, 알츠하이머병 같은 질환들이 스며들여지가 줄어든다. 숲길 걷기가 보약인 셈인 것이다. 돈 안 드는 보약. 얼마나 좋은가!

 

질문자: 그래도 치매예방이 강조되다 보니 젊은층은 좀 다가서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필자: 그래서 '역사트레킹으로 치유하고 사랑하고 지혜롭게 살자'가 될 수도 있다. 치매를 치유로 바꿀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질문자: 꼼수 아닌가?

 

필자: 꼼수가 필요할 때도 있지!

 

질문자: 역치사지에 필요한 준비물 같은 것이 있는가? 몇 킬로 정도를 걷는가? 시간은?

 

필자: 기존 역사트레킹 코스를 그대로 이용한다. 약 7~8km를 4시간 정도 이동한다. 그러니 간식을 넉넉하게 싸오시라! 무거우면 필자가 들어드리겠다. 그리고 아주 맛나게 뺏어먹겠다.

 

질문자: 8킬로를 4시간 정도에 가면 너무 느리지 않나?

 

필자: 역사트레킹 자체가 느림보 트레킹이다.거기에 숲 속 활동까지 더해지니 더 느릴 것이다. 느린만큼 더 알찬 트레킹이 되게 프로그램을 세팅할 예정이다. 지루하면 안 되니까.

 

질문자: 유의사항 같은 것이 있나?

 

필자: 가끔가다보면 막걸리부터 꺼내시는 분들도 있는데 그러면 바로 퇴장이다. 역치사지에서는 음주금지, 흡연금지, 자연훼손금지다. 지킬건 지키면서 하자.

 

질문자: 당부할 것이 있는가?

 

필자: 숲 속 활동 할 때 모기 때문에 고생하실 것이다. 그러니 긴팔과 긴바지를 꼭 입으셔야 한다. 한 여름이라도 그렇게 하셔야한다. 또 벌레기피제도 준비를 해야한다. 명상을 하시려면 돗자리와 1인용 방석 같은 도구들도 준비하셔야 한다. 야외에서 활동하는터라 준비할게 많다.

 

숲길과 친해지다보면 자연스럽게 건강해질 것이다. 그게 바로 숲길의 매력이다. 그런 숲길에서 역치사지가 행해진다.

 

 

 

 

 

 

 

 

 

 

 

* 주전골계곡: 만물상

 

 

 

 

 

 

 

2021년 7월 2일 금요일

 

약 40일 만에 설악산 주전골에 다시왔다. 전날에는 천불동계곡, 이날은 주전골계곡.

이래저래 설악산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든다. 이것도 정말 복인 거 같다. 설악산의 비경들만 찾아나서고 있으니까. 어떤이는 태어나서 설악산을 한 번도 못 가본 이들도 있을텐데...

 

천불동계곡이 속초에서 접근한다면, 주전골계곡은 양양에서 접근한다. 주전골은 작은 천불동계곡이라고 불릴만큼 그 역시 천혜의 비경을 품고 있다. 좀 다른 것이 있다면 천불동계곡 입구보다는 주전골쪽이 좀 더 한적보인다. 주전골이 한계령과 가까워서 그럴 것이다.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 있으니 좀 더 한적함이 느껴지는 것일테지.

 

주전골과 관련된 내용은 링크를 건 지난 포스팅을 참조해주시면 좋겠다. 이번에는 그냥 사진 감상 위주로 봐주시면 좋을 듯하다. 계속봐도 좋은 사진들이다.

 

 

 

 

 

 

* 주전골계곡

 

 

 

 

 

 

 

 

*주전골계곡: 독주암

 

 

 

 

 

 

 

 

* 주전골계곡: 만경대

 

 

 

 

*주전골계곡: 선녀탕

 

 

 

 

* 양양 오색리 삼층석탑

 

 

 

 

 

 

 

*** 설악산 주전골에 대한 자세한 포스팅은 아래 링크글 클릭!!!

 

https://brunch.co.kr/@historytrekking/258

 

 

 

 

 

 

 

 

 

* 비선대: 미륵봉, 형제봉, 선녀봉

 

 

 

 

 

 

 

글이 넘쳐서 신흥사 포스팅을 이어서 적어본다. 앞선 신흥사 포스팅에서 필자의 마음속의 계곡은 단연 천불동계곡이라고 언급했다. 그만큼 필자에게 천불동계곡은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독특한 자태를 뽐내는 각양각색의 기암괴석들이 좌우로 펼쳐져있고 그 사이를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고 있으니...! 더군다나 설악산의 단풍은 너무나 아름답지 않은가! 그 천불동계곡 사이로 곱게 오색단풍이 든다고 생각해보시라. 장면 장면이 다 환상적인 풍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만약 설악산의 신선이 있다면 그 신선은 가을에는 낙엽을 밟으며 천불동계곡에서 노닐지 모른다. 기왕 노니는 거 선녀탕 근청에서 노닐 거 같다. 어깨빨 좋은 나뭇꾼과 경쟁을 하면서...ㅋ

 

천불동계곡은 골짜기 곳곳에 있는 기암괴석들이 마치 천 분의 부처님 같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 또 천불동계곡은 설악골계곡이라고도 불린다. 지난 2013년 3월 11일에 명승 제101호로 지정되었는데 지리산의 칠선계곡, 한라산의 탐라계곡과 함께 국내 3대 계곡으로 불린다.

 

이렇게 강한 인상을 준 천불동계곡이었지만 사실 이번 방문을 제외하면 딱 한 번밖에 가지 못했다. 2000년대 중반쯤에 갔었던 거 같은데 정확하게 기억나지도 않는다. 당시에 대청봉에서 일출까지 봤었는데 후기다운 후기를 기록하지 않았고, 그나마도 싸이월드에 기록해서... 해당 포스팅을 거의 방치했었다. 이래서 후기가 중요한 것이다. 제대로된 후기를 작성하지 않았으니 세월과 함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천불동계곡에서 큰 감흥을 받았다고 하면서 이제껏 두 번 밖에 방문을 하지 않았다니... 더군다나 후기다운 후기도 없다니... 설악산 마니아들에게 한소리 듣겠다!ㅋ

 

신흥사에서 빠져나와 숲에 들어서면 호젓하게 길을 걸을 수 있다. 숲길이 참 좋다. 그렇게 숲길을 걷다보면 와선대가 보인다. 마고선이라는 신선이 있었다. 필자 같으면 기를 쓰고 선녀탕 근처에서 노닐었을텐데 마고선은 와선대에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와선대에서 누워 설악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껏 즐겼다는 것이다.

 

 

 

 

 

 

* 천불동계곡

 

 

 

 

 

 

 

* 와선대

 

 

 

 

 

 

 

와선대를 넘어가면 계곡물은 더욱더 푸르러진다. 누가 일부러 청옥색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물색깔이 아주 곱다. 비선대가 가까워지자 계곡은 폭이 좁아져 협곡이 되어갔고 숨겨져있던 비경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신흥사 일대가 초입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진정한 천불동계곡의 시작은 비선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비선대의 풍광은 옛 선인들의 마음도 요동치게 했나보다. 바위 곳곳에 각자가 새겨져 있다. 그중에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의 글씨도 있다. 한자로 쓰여있으니 잘 찾아봐야 한다.

 

와선대에서 느긋하게 풍광을 즐기던 마고선이 신선이 되어 올라간 곳도 바로 비선대라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비선대 일대를 바라다보면 어디선가 신선이 쓰~윽하고 나타날 거 같은 느낌이들기도 한다. 고개를 들어 우뚝 솟아있는 미륵봉, 형제봉, 선녀봉을 보니 마고선이 하늘로 승천할 때 세 봉우리를 지나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들더라. 기왕 승천하는거 우뚝 솟은 봉우리 위로 올라가야 더 아름다운 승천이 될테니까.

 

미륵봉 중턱에는 자연굴인 금강굴이 있다. 원효대사가 수도를 했다고 전해지는 곳인데 길이가 약 18미터 정도된다. 금강굴에 올라서면 이제까지와는 다른 또다른 장관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설악산이다!

 

이렇게하여 비선대까지 가는 설악산신흥사 역사트레킹이 종료된다. 천불동계곡에 대해서 강조하면서 기술을 했지만 사실 이 코스는 천불동계곡을 맛배기만 본다. 딱 초입인 비선대에서 종료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천불동계곡의 핵심부를 지나 대청봉까지 올라가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트레킹은 무리를 하지 않는다.

 

향성사지 삼층석탑 -> 설악소공원 -> 신흥사 -> 와선대 -> 비선대(금강굴)

 

편도로 약 6km 정도가 되는 코스다. 설악산의 특성상 그대로 왔던 길로 다시 돌아와야 하니 왕복 약 12km 정도가 될 것이다. 설악산이지만 이 구간은 순하니 길을 걷는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물론 비선대를 넘어 천불동계곡의 핵심부를 보시려면 좀 각오를 하셔야 할 거다. 다리에 파스도 많이 뿌려야 할 거다...ㅋ

 

이제 곧 가을이다. 가을날의 천불동계곡! 생각만해도 몸이 아주 들썩거린다. 이렇게 산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들썩이게 한다. 아주 좋게!

 

 

 

 

 

 

 

* 천불동계곡: 숲길

 

 

 

 

 

 

 

*천불동계곡: 비선대 일원

 

 

 

 

 

 

 

 

 

 

* 신흥사: 비가 그친 후. 산 안개가 설악산 봉우리를 두르고 있다.

 

 

 

 

 

 

 

2021년 6월 30일 수요일

 

누구나 다 자신만의 계곡이 하나씩 있을 것이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기암괴석이 그려낸 갖가지 기이한 형상을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곳! 그곳에 들어서면 어느 순간 신선이 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비경을 간직한 곳! 필자에게는 설악산 천불동계곡이 바로 그런 곳이다. 무척 매력적인 다른 계곡들도 많이 다녀봤지만 그래도 역시 최고는 천불동계곡이었다.

 

그 천불동계곡 초입에 있는 신흥사(新興寺)에 대한 이야기다. 이 포스팅은 천불동계곡이 아닌 신흥사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천불동계곡 이야기하다 갑자기 신흥사로 바꾸다니... 이거 글쓰기가 왜이래!ㅋ

 

신흥사는 2번에 걸쳐 자리 이동을 했고, 역시 2번에 걸쳐 이름을 바꿨다. 그 첫번째 이름은 향성사였다. 향성사는 652년(진덕여왕6)에 자장율사가 개창을 했는데 중향성불국토(衆香城佛國土)라는 뜻을 따서 지은 것이다. '불국토'는 알겠는데 '중향성'이라는 말은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중국집 이름인가?ㅋ

 

중향성은 법기(法起)보살이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법기보살은 산스크리트어로 다르모가타(Dharmogata)로 불리우는데 한자에서도 보이듯 '불법을 세우는 보살'을 말한다. 불법, 합법할 때 그게 아니라 불도를 세운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요한 일을 하는 보살이 바로 법기보살이고, 그가 거처하는 곳이 중향성이라는 곳이다. 짜장면집이 아니고. 이렇듯 향성사는 법기보살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중향성은 금강산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 불교에서는 법기보살이 금강산에 거주한다고 말한다.

 

 

 

 

 

 

 

* 신흥사: 안개가 낀 설악산

 

 

 

 

 

 

 

향성사는 원래 지금의 켄싱턴스타호텔 앞에 위치해있었다. 현재의 신흥사에서 동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위치다. 그곳에는 지금도 향성사지 삼층석탑이 자리를 잡고 있다. 버스정류장 앞에 석탑이 있는데 집중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향성사지 삼층석탑 정류장은 버스종점 한 정거장 전이라 신흥사 매표소까지 그리 멀지 않다. 그래서 설악산신흥사 역사트레킹은 향성사지 삼층석탑에서 시작된다.

 

삼층석탑은 2층 기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높이가 약 4.3미터에 달한다. 상륜부가 훼손된 터라 온전히 보존이 됐다면 4.3미터 이상이 됐을 것이다. 9세기경에 제작된 삼층석탑은 후기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계승했다. 그래서 국보 443호로 지정되었다. 9세기경에 만들어졌으니 자장율사 시대에 만들어진게 아니다. 이 시기에는 향성사가 선정사로 불릴 때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신흥사는 두 번이나 이름이 바뀌었다. 향성사가 첫번째 이름이었고, 두번째가 선정사였다. 그렇게 이름이 바뀌게 된 건 향성사에 화재가 발생해 폐허가 됐기 때문이다. 개창한 지 40년이 지난 후였는데 이후 의상대사가 지금의 내원암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재건을 한다. 이때가 701년이었는데 재건을 하면서 사찰 이름을 선정사로 바꾼 것이다. 선정사는 이후 천년동안 번창하게 된다. 그러다 조일전쟁(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1642년(인조20)에는 또 화재가 발생해 경내 전체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 향성사지 삼층석탑

 

 

 

 

 

 

 

 

내원암은 현재의 신흥사에서 울산바위 방면으로 올라가는 길에 위치해 있다. 약 2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나저나 향성사지 삼층석탑은 자신의 이름이 맞는지 좀 의아스럽다. 의문점들을 적어본다.

 

1. 690년경에 향성사가 폐허가 됐다. 이후 향성사지에서 북쪽으로 3km 이상 떨어진 곳에 의상대사가 사찰을 재건함. 이때가 701년이었는데 이름을 선정사로 바꾸었음.

 

2. 9세기경에 삼층석탑을 만들었음. 그럼 선정사 삼층석탑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그것보다 더 의아한 것은 왜 이미 폐허가 된 곳에 석탑을 세웠을까? 가보시면 알겠지만 삼층석탑이 있는 곳과 신흥사는 같은 경내로 묶기에는 꽤 거리가 있다. 더군다나 당시는 더 먼 내원암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3. 그럼 향성사가 불에 타기 이전에 삼층석탑이 만들어진 것인가? 그럼 9세기에 만들어졌다는 건 잘못된 이야기인가? 그것도 아니면 다른 곳에 있다가 지금의 자리로 이건을 한 것인가?

 

4. 향성사 시절에 9층 석탑으로 만들어졌는데 지금처럼 3층만 남게됐다는 주장을 하는 자료도 있다. 그런데 기단이나 상승률을 고려해 볼 때 9층 석탑의 규모가 나올 수 없는 구조다. 목탑도 아닌 석탑으로 9층을 쌓는다? 석탑 한 두 번 보나!

 

아이고 머리가 아프다. 가뜩이나 머리도 안 좋은데...ㅋ 이렇게 석탑 하나로 다양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 우리 문화재는 스토리텔링의 보고 같은 곳이다.

 

향성사지 삼층석탑은 신라계 석탑중에서 가장 최북단에 위치한다는 지리적인 특색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버스에서 꼭 한 정거장 먼저 내려서 향성사지 삼층석탑을 보고 가자.

 

 

 

 

 

 

 

* 신흥사: 극락보전

 

 

 

 

 

 

 

* 신흥사: 통일대불

 

 

 

 

 

 

 

이제 신흥사를 향해 본격적으로 이동하자. 설악소공원과 설악케이블카를 지나가다보면 푸른색의 거대한 부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바로 신흥사 통일대불이다. 통일대불은 좌대 4.3미터, 좌대둘레 13미터 위에 만들어져 있다. 앉아있는 좌상이지만 그 높이가 14.6미터에 달한다. 여기에 머리 뒤에 장식된 두광까지 포함시키면 높이가 무려 17.5미터가 된다. 통일대불은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청동이 약 108톤 정도가 사용됐다고 한다.

 

거대한 불상이니 제작하는데도 오래 걸렸다. 1987년 8월부터 만들기 시작해 10년이 지난 1997년 10월 25일에 점안식(點眼式)을 거행한 것이다. 개안식(開眼式)으로도 불리우는 점안식은 불상에 눈을 그려넣는 것을 말한다. 눈을 그려넣음으로써 신앙의 대상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용의 눈을 그려넣는 화룡정점을 연상해보자. 그러고보면 점안식은 거칠게 말해 불교식 준공식인 셈이다.

 

통일대불 앞에서 경건하게 삼배를 한 후 신흥사 중심공간으로 향했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보제루가 나온다.

보통 큰 사찰에는 절의 중심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거대한 누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누각은 통상 1층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2층은 법회 장소로 쓰인다. 이런 누각을 보통 보제루라고 부른다. 하지만 꼭 그 이름으로만 불리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유명한 부석사 무량수전 앞의 누각은 안양루다. 서울의 명찰 진관사에서는 홍제루라고 부른다.

 

정면7칸 측면2칸으로 만들어진 신흥사(神興寺) 보제루도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신흥사 보제루는 1644년(인조22)에 만들어졌는데 이 해에 드디어 신흥사라는 이름이 자리잡게 된다. 천년동안 번성하던 선정사가 1642년에 불 탄 후, 2년 뒤인 164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재건을 했고 드디어 신흥사라는 이름표가 생긴 것이다.

 

향성사 -> 선정사 -> 신흥사

 

무슨 사찰이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았는지... 신흥사 보제루는 강원도 시도문화재유형문화재 제 10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동네 팔각정처럼 사방이 다 오픈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971년에 분합문을 달아서 현재와 같은 구조로 변했다.

 

보제루에는 향성사 시절에 만든 범종이 있다. 무려 1400년 전에 만들어진 이 범종은 무게가 약 600kg 정도 된다. 1748년, 1758년, 1788년 세 번에 걸쳐 개주를 하기도 했다. '개주'는 활자나 주물, 즉 금속물을 다시 제작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화포는 대다수 청동으로 만들어졌는데 화포를 다시 만드는 것도 개주라 하였다. 활발하게 북방 개척에 나섰던 세종대왕 시기에 화포를 개주했다는 내용이 실록에 기재되기도 했다.

 

보제루 이야기하다 개주이야기까지. 얼핏 들으면 곗돈 모으는 계주 같다.ㅋ

 

 

 

 

 

 

 

 

* 신흥사: 보제루

 

 

 

 

 

 

 

* 신흥사: 극락보전. 왼쪽에 명부전이 보인다.

 

 

 

 

 

 

 

 

보제루를 지나 본전인 극락보전으로 가보자. 독특한 계단돌과 형형색색의 창살이 인상적인 극락보전이 탐방객들을 반길 것이다. 정면3칸, 측면3칸으로 이루어진 극락보전은 1648년(인조 25)에 만들어졌다. 이후 여러번 보수를 했지만 그래도 그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2018년 6월 4일에 보물 제1981호로 승격된다. 그 이전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14호였다. 검색을 해보니 아직까지도 몇몇 백과사전은 보물이 아닌 유형문화재로 표기하고 있었다. 문화재 데이터베이스는 좀 늦나?ㅋ

 

신흥사는 효종이 향로를 순종이 청동시루를 하사하는 등 조선왕실과 연계가 깊은 사찰이었다. 가신이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었다. 그래서 일반사찰과는 다른 모습의 형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극락보전 돌계단 옆을 보시라. 일반 태극이 아닌 삼태극이 있다. 삼태극은 조선왕릉의 정자각 돌계단에서 볼 수 있는 모양이다. 일반 사찰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모양이다.

 

삼태극 옆에 치우천왕처럼 생긴 귀면이나 아랫쪽에 조각된 용머리도 무척 인상적이다. 이렇게 장식된 부분을 계단의 소맷돌이라고 부른다. 신흥사 극락보전의 계단 소맷돌은 정말 멋지다! 이외에도 극락보전의 창살도 참 독특하다. 창살에 꽃 장식을 했는데 이걸 솟을빗꽃살이라고 부른다. 이름은 어렵지만 어쨌든 참 아름답다.

 

극락보전의 외관이 이렇게 아름다운만큼 실내에도 귀중한 보물이 모셔져 있다. 바로 신흥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다. 1651년에 제작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각승 무염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안정된 비례미와 세련된 기교미가 조화된 여래좌상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9월 5일에 보물 제 1721호로 지정된다.

 

이승을 떠난 이들의 명복을 비는 곳, 명부전을 둘러볼 차례다. 1737년(영조 13) 지어진 신흥사 명부전은 목조지장보살삼존상이 모셔져 있다. 1651년에 제작된 신흥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도 무염이 제작하였다. 기법이 뛰어나고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밝혀진 작품이기에 2012년 2월 22일에 보물 제1749호로 지정되었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나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둘 다 조각승 무염이 1651년에 제작했고, 1년의 간격을 두고 모두 보물로 승격됐다. 그만큼 조각승 무염의 예술미가 뛰어났다는 뜻일 거다.

 

 

 

 

 

 

 

* 신흥사: 명부전

 

 

 

 

 

 

 

 

신흥사 명부전도 외관이 독특한 면이 있다. 조선 후기인 1737년(영조 13)에 지어졌다고 전해지는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외형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보면 중앙의 문은 건물 높이에 맞게 큼직한데 좌우칸에 달린 문은 크기가 작다. 좌우칸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는 머리를 쿵하고 부딪히기 쉽상이다. 일부러 그랬을까? 일부러 그랬다. 안내문을 보니 아래를 둘러보자는 '하심(下心)'을 생각하며 명부전에 출입하라는 뜻이다. 하심은 자기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한다.

 

하심과 유사한 말로 조고각하(照顧脚下)도 많이 쓰인다. 자신의 발밑을 잘 보라는 뜻으로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기자신부터 돌아봐야 한다는 말이다. 하심이든 조고각하든 불가에서는 겸손과 겸양을 중시한다. 신흥사 명부전에서는 알아서 하심이 발휘될 거다. 그렇지 않으면 헤딩을 하는 것이고. 문 하나를 드나들면서도 삶의 지혜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빗줄기가 내리는 날에 신흥사를 탐방했다. 덕분에 산 안개를 걸친 설악산의 봉우리들을 볼 수 있었다. 신흥사의 한옥 지붕들과 엮어서 사진을 찍으니 한 편의 예술이 탄생하는 느낌이었다. 기암괴석과 그것을 두르고 있는 안개, 그것을 배경으로 해서 찍은 한옥들... 혹시 저기에 신선이 있는 거 아니야? 내가 사진찍고 내가 감탄하고!ㅋ

 

이제 신흥사를 벗어나 숲길로 들어선다. 오른쪽에 있는 울산바위가 자꾸 손짓을 하지만 천불동계곡으로 방향을 잡고 간다. 일단 신흥사 옆 숲길에 발을 디디면 천불동계곡 입구에 들어선 것이다.

 

글이 넘치니 천불동계곡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으로...

 

 

 

 

 

 

* 신흥사: 극락보전의 계단 소맷돌. 용머리가 인상적이다.

 

 

 

 

 

 

* 신흥사: 명부전. 중앙칸의 문보다 좌우측의 문이 높이가 낮다. 중앙은 부처님이나 스님이 출입하는 문이고, 좌우측 문은 일반 신도들이 드나드는 문이다. 하심을 생각하지 않고 들어가다가는 쿵하고 헤딩할지 모른다.

 

 

 

 

 

 

 

 

 

 

 

* 김삿갓: 화순남산공원에 있다. 공원중심부가 아닌 도로변에 있어 좀 아쉬웠다. 자동차를 피해가며 사진을 찍어야했다.

 

 

 

 

 

 

 

2021년 6월 15일 화요일

 

광주의 옆동네인 전남 화순군에 왔다. 화순에도 남산이 있는데 그곳에 올랐다. 얕은 언덕배기 높이의 남산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말그대로 남산공원.

 

화순에는 적벽을 탐방하려고 왔다. 적벽은 화순군 동복면 일대에 있는 깎아지는 절벽들을 말한다. 아름다운 수변과 어우러진 절벽의 모습이 마치 중국의 적벽보다 더 낫다고 했다. 중국의 적벽보다는 낫지만 딱히 표현할 이름이 없었는지 그냥 적벽으로 불리우게 됐다.

 

어쨌든 화순 적벽은 수많은 풍류객들의 발길을 모으게 했다. 그 중에는 김삿갓, 난고 김병연도 있었다. 김병연은 적벽이 좋았는지 그곳을 세 번이나 찾았다고 한다. 김삿갓이 누군가! 아웃도어계의 전설이 아니신가! 김삿갓의 발걸음을 따라 필자도 적벽으로 가려했지만... 비가 엄청내리더라. 결국 적벽대신에 남산공원에 오르게 됐다.

 

남산에서도 비를 많이 맞았다. 적벽에 갈 인연이 아니었던 거 같다. 하긴 적벽에 가려면 미리 신청을 해야하는데... 예약도 안 했으니...

 

화순 남산공원은 1970년에 조성됐다고 한다. 읍내 한복판에 있는 곳이라 화순 시가지 일대는 물론 무등산도 잘 보인다. 그렇게 남산공원 일대를 탐방했다. 그러다 아웃도어계의 레전드를 만나게 됐다.

 

김삿갓!

 

비록 조각상으로 만나뵙지만 무척이나 반가웠다. 대선배를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한 일이다. 김삿갓, 김병연은 적벽이 있는 화순군 동복면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그래서 화순군도 김삿갓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남산공원에는 진각국사 혜심과 연담종사 유일의 유적비가 있다. 두 분 다 화순 출신의 승려들이다.

 

비가 그칠줄을 몰랐다. 그래 다음을 기약하자! 여행은 잠시 접어두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거야!

 

 

 

 

 

 

 

* 화순남산공원: 공덕비들이 들어서 있다.

 

 

 

 

 

 

 

* 화순남산공원: 왼쪽이 진각국사 혜심의 공덕비이고 오른쪽이 연담종사 유일의 공덕비이다.

 

 

 

 

 

 

 

 

* 화순남산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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