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강변 걸으며 '소셜다이닝'하다

 

'집밥' 식구들과 '영월강변둘레길' 역사트레킹을 다녀와서

 

14.03.27 10:51  /  최종 업데이트 14.03.28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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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령포 가는 길 산보를 하듯, <역사트레킹> 참가자들이 즐겁게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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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강 필자의 '비밀화원'이었던 환상의 뷰포인트다. 여러명이서 같이 동행을 하니 이렇게 사진 찍어줄 사람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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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여행의 장점은 무엇일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여행을 하는 것이 단독여행의 장점일 것이다. 느긋하게 아름다운 풍광 속을 거닐다 보면 콧노래도 자연스럽게 입가에 울려 퍼진다.


그럼 단독여행의 단점은? 그 콧노래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토록 아름다운 풍광 속에 서 있지만 내 노래를 들어줄 사람도, 내 사진을 찍어줄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누구는 이렇게 훈수를 두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찍어달라고 하면 되잖아. 뭐가 그리 어려워?"

한국 사회에서 풍광이 수려하다는 것은 개발의 손길에서 벗어났다는 걸 의미한다. 인적이 드물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적이 거의 없으니 사진 찍어줄 사람도 없다. 오히려 인적을 찾는 것보다 고라니나 물떼새 같은 야생동물들을 찾는 게 훨씬 더 빠를지 모른다.

그렇게 풍광이 수려한 곳을 다녀온 후, 사진기를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발견된다. 사진에 필자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배낭이나 자전거가 필자를 대신할 때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햇빛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대신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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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돌: 선돌 전망대에 올라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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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밥' 식구들과 함께 떠난 '영월강변둘레길'


3월 22일 토요일. 봄바람이 살랑거리던 강원도 영월군의 선돌 앞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필자는 그들을 향해 이런 말을 전했다.

"영월까지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에 보이는 게 선돌이고, 그 뒤로는 서강이 흐르고 있어요.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 서강길을 따라 트레킹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일명 영월강변둘레길 역사트레킹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날 '영월강변둘레길' 역사트레킹에 참여를 했던 분들은 소셜다이닝 모임인 '집밥'을 통해 알게 된 분들이었다.

집밥? 외식을 하지 않고 집에서 밥 해먹는, 그 집밥? 아니다. 파편화된 사회에서 외롭게 끼니를 때워야 했던 1인 가구들이나 자취생들이, 같이 모여 식사를 하자는 의미에서 모임을 꾸렸는데 그 이름을 '집밥'이라고 네이밍을 한 것이다.

'소셜다이닝'이라는 말처럼 '집밥'에서는 음식을 테마로 많은 모임들이 생성됐다. 하지만 식사 모임 이외에도 각기 다른 테마를 가진 모임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 와중에 필자도 역사트레킹이란 테마를 들고 '집밥'에서 모임을 개설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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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돌 아슬아슬한 낭떠러지에 올라 선돌과 서강을 바라보고 있는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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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은 했지만 고민부터 앞섰다. 서울이 아닌 강원도 영월에서 진행해야 하는 모임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하는 트레킹이야 참가자들을 모집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강원도 영월에서 하는 트레킹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더군다나 영월강변둘레길은 필자가 직접 개척한 길이다. 이 길에 대한 인터넷 정보도 필자가 생산한 것 밖에 없다. 이 길을 이끌 수 있는 사람도 오직 필자뿐이다.


'듣도 보도 못한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사람만 믿고 영월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을 사람이 있을까? 또 영월강변둘레길을 뭐라고 설명하지?'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 무슨 일이든 너무 많이 고민을 하면 안 된다. 돌파할 때는 돌파를 해야 한다. 그래서, 그냥 '여럿이서 맛있게 식사를 하듯 영월 서강에서 재밌게 봄 소풍을 즐기자'라는 멘트를 남겨놓고 지켜보기로 했다. 기다리다 보면 좋은 소식이 있겠지.

그렇게 기다리다 보니 정말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대박(?)이 난 것이다. 모집마감이 됐다. 그렇게 많은 분들이 지원을 해주어서 재미나게 봄 소풍을 떠날 수 있게 됐다. 필자 혼자 쓸쓸하게 걸었던 서강길, 그 서강길이 북적북적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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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성대 3층석탑 12세기 경에 건립된, 낙성대 3층 석탑을 바라보고 있는 참가자들. 낙성대 3층석탑은 고려시대 건립된 탑으로 강감찬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한편 석탑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그래서 석탑은 대개 사찰이나 폐사지에 세워진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낙성대는 사찰이 아니다. 사찰이 아닌 곳에 석탑이 세워진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다. 그런 면에서 낙성대 3층 석탑은 강감찬 장군의 위상을 대변해주는 큰 징표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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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악산 참가자 중 한 분이 서울대 방면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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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엄홍길 대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키운 건 도봉산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히말라야니, 킬리만자로니 이런 산들이 아니라 동네 뒷산인 도봉산이 현재의 자신을 있게 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그 대목을 읽을 때 크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아웃도어를 즐기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베이스캠프가 하나씩 있을 것이다. 그 베이스캠프에서 잔뼈가 굵어지고, 더불어 '통'도 커진다. 똥개도 자기집 앞마당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는 말처럼 아웃도어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반은 먹고 들어갈, 그런 베이스캠프가 필요한 법이다.

그 말을 빗대서 생각해보면 엄홍길 대장의 베이스캠프는 도봉산이다. 그럼 필자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일까? 관악산이다. 동네 뒷산은 아니지만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 관악산이 베이스캠프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필자는 그곳을 활보하며 '다리통'을 늘렸고, '깡다구'도 키웠다.  

 

관악산과 관악산둘레길


봄기운이 스며들던 지난 8일. '관악산 둘레길 역사 트레킹'을 실시하려고 길을 나섰다. 3년 전, 관악산에도 둘레길이 개설됐는데 그 길을 탐방하고자 배낭을 꾸린 것이다. 소셜다이닝 모임인 '집밥'을 통해 모집된 참가자들과 함께해서 그랬는지, 이번 트레킹은 북적북적 거렸다.

2011년에 개통된 관악산 둘레길은 3개 코스로 구성되어 있고, 총 연장이 15km에 달한다. 관악산 둘레길도 최근 몇 년 사이에 급격히 늘어난 걷기 열풍의 일환으로 탄생되었다. 사실 이 길들은 기존에는 등산로로 쓰였다가 그 열풍을 타고 '관악산 둘레길'로 이름 붙여진 것이다. 북한산 둘레길도 마찬가지다. 기존의 등산로가 둘레길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이러한 변화들이 반갑다. 자신의 '보폭'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증설되는 것에는 반대한다. 그런 둘레길 개척 비용이 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충당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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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산 숲길 아직은 황량하지만 이제 곧 짙은 녹음으로 울창한 수림을 이룰 것이다. 왼쪽에 있는 나무들은 메타세쿼이어. 메타세쿼이어들이 울창해질 때 다시 한 번 이 길을 걸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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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의 위세 때문인지 관악산은 서울의 진산이 될 수 없었다. 하지만 강남 지역에서는 관악산이 최고일 것이다. 관악산 일대의 가치는 이미 삼국시대에서부터 형성되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은 한강 하류지역의 주도권을 잡게하기 위해 이 일대에서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고려시대에는 남경(지금의 서울)을 방어하기 위한 남쪽산으로 그 전략적 가치가 중시되었다.


이런 역사성 때문인지 관악산은 흥미로운 스토리텔링들이 넘쳐난다. 광화문에 해태상이 조각된 이유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방편이라는 이야기, 조선 태종이 셋째 세종에게 양위를 할 것을 눈치 챈 첫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이 도성을 빠져나와 왕좌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기 위해 수도를 했다는 연주대 이야기. 하지만 연주대(戀主臺)는 그 한자 이름에도 나타나듯이 왕좌에 대한 그리움이 넘쳐났던 공간이라는 이야기.

 


 

 

노익장을 발휘한 문신 출신, 강감찬 장군


그런 관악산 스토리텔링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것은 고려시대 명장 강감찬 장군과 그의 생가인 낙성대(落星垈)일 것이다. 낙성대라는 의미에서도 보듯,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굳이 신화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역사적인 인물을 과도하게 칭송했다고 거부감을 드러내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군사정권 시절, 성역화 작업의 한 대상자였던 강감찬에 대해 외면하고 싶은 시각도 존재할 것이다. 참고로 현재의 낙성대는 1974년, 유신헌법이 한참 맹위를 떨칠 때 건립된 것이다.

"그거 아세요. 강감찬 장군이 사실은 문신 출신이라는 거요."
"정말요?"
"더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장군께서 나이 70에 최전방 사령관으로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귀주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둬서 거란 세력을 물리쳤고요."
"아,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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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감찬 장군 동상 2013년 여름경에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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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설명에 참석자들은 좀 놀라는 표정이었다. <삼국지>의 황충 장군도 아니고, 고희의 나이에 최전방에서 칼을 휘둘렀다는 점이 놀라웠을 것이다. 더구나 상대편은 당시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거란족들이 아닌가?


이야기를 좀 더 확장해 보자.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두고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고 칭하며 건국 초부터 강경 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거란이 선물로 준 낙타를 굶겨 죽인, 일명 만부교 사건도 발생하게 됐던 것이다.

거란은 요나라를 세우고 동북아에서 위세를 떨쳤다. 당시 요나라는 만리장성 부근에서 송나라와 대치를 하게 됐는데 한반도에 있는 고려에 대해 늘 신경을 곤두세웠다. 고려가 송나라와 손을 잡고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던 것이다. 강감찬 장군은 3차 침공 때 상원수가 되어 10만 거란군을 격퇴시켰고 그로 인해 고려는 전란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낙성대 3층 석탑 좀 보세요.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인데요. 12세기 경에 건립됐으니 천 년의 세월을 버틴 탑이라네요."
"아 그렇군요."
"탑이라는 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담아 놓는 조형물이잖아요. 그런데 강감찬 장군은 부처님도 아니고 유명한 고승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곳에 탑이 세워졌습니다. 아무래도 강감찬 장군의 위엄이 생각 이상으로 엄청났던 것 같아요."

일반적으로 탑이라 하면 불탑을 지칭한다. 이런 불탑은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제작된 터라 사찰이나 폐사지가 아닌 곳에 불탑이 세워진 경우는 거의 없다. 이를 다르게 이야기하면 강감찬 장군에 대한 고려인들의 흠모가 얼마나 열광적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인헌공 강감찬은 84세에 천수를 누리다 영면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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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산 성지 왼쪽부터 앵베르도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라고 쓰여 있는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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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 성지


낙성대를 뒤로 하고 본격적인 관악산 둘레길 역사트레킹이 시작됐다. 트레킹 팀은 서울대 입구를 지나 삼성산 성지로 향했다. 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으로 원효, 의상, 윤필 세 분의 성인이 움막을 짓고 수도에 정진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성산에 있는 삼막사(三幕寺)의 유래도 거기에서 나왔다.

그런 삼성산에 성지가 있는데 불교 성지가 아니라 천주교 성지다. 삼성산 성지는 기해박해(1839년) 때 효수를 당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를 성역화 시킨 것이다.

세도 가문이었지만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다. 하지만 뒤이어 집권한 풍양 조씨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에 앞장섰다. 그렇게 하여 발발한 것이 헌종 5년에 있었던 기해박해였다. 이로 인해 권력의 중심은 풍양 조씨로 넘어갔다. 그런 면에서 기해박해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의 권력투쟁의 부산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기해박해로 인해 앵베르도 주교(한국명: 범세형)와 모방, 샤스탕 신부 등이 새남터에서 목숨을 잃게 된다. 그들의 주검은 노고산(마포구 노고산동)을 거쳐 삼성산에 묻히게 된 것이다. 이후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역화 하였고 지금의 삼성산 성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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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산 성지 참가자 한 분이 삼성산 성지(천주교)에 있는 팻말을 촬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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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 성지는 조용히 사색하기 좋은 곳이다. 성지라서 그런지 다른 탐방객들도 목소리를 낮추고 주위를 경건하게 둘러보고 있었다. 삼성산 성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삼성산 숲이라는 소나무 군락지도 있는데 이곳도 사색하거나 시집을 꺼내 읽기 좋은 곳이다.

관악산의 또다른 자랑인 메타세쿼이어 숲 탐방을 끝으로 관악산 둘레길 역사트레킹도 무사히 끝마칠 수가 있었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아직 봄기운이 스며들지 않아 겨울 산의 황량함이 배어 있었다는 점이다. 꽃망울이 터지길 바랐는데….

뒤풀이로 순두부찌개를 먹으며 우리 역사트레킹팀은 다음을 기약하였다. 트레킹을 하며 역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역사트레킹! 앞으로도 역사트레킹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도 한 번 참가해 보는 게 어떠신지? 최소한 필자와 함께 다니면 심심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만 잘하면 간식도 챙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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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산 성지 마리아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분의 모습을 촬영했다. 이 사진은 사전 답사때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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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타세쿼이어 관악산에도 저런 울창한 수림이 있다. 이 사진은 2012년 5월에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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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관악산둘레길은 1, 2, 3코스가 있고, 총 거리는 15km에 이른다.
2. 필자가 행한 <관악산 둘레길 역사트레킹>은 1, 2코스에서 이루어졌는데 좀 변형을 시켰다.
3. 역사트레킹코스:  낙성대역 ▶ 낙성대 ▶ 서울대입구 ▶헬기장 ▶ 삼성산 성지 ▶ 삼성산 성당
4. 이동거리: 약 8km / 약 3시간 30분 정도 소요 예상(쉬는 시간 포함)

 

 

 

 

 

 

 

 

청명한 가을날에 떠난 한강 역사트레킹

13.10.17 14:10l최종 업데이트 13.10.17 21:43l
곽동운(artpunk)             

 

---> 1편에 이어서

 

 

 

# 자신을 아낌없이 다 내주었던, 선유봉

과연 그럴까? 정말 한강에 볼거리가 없을까? 한강역사트레킹의 첫 번째 도착지는 선유도 공원이었다. 원래 선유도는 선유봉이라고 불렸던 해발 40m 정도의 봉우리였다. 강가 바로 옆 쪽에 우뚝 선 모습이 아름다워 예로부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고 한다. 중국 사신들도 조선에 오면 꼭 선유봉이 있는 양화 일대를 유람하고 돌아갔다고 할 정도였다.

겸재 정선도 선유도를 사랑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었다. 겸재는 양천 현감으로 있었던 1741년에 <양화환도> <금성평사> <소악후월> 등 3편의 진경산수화를 그려, 지금의 선유도 일대의 한강 유역을 사실감 넘치는 필치로 담아내었다.

특히 <양화환도>에서는 선유봉과 함께 잠두봉이라고 불렸던 지금의 절두산이 등장하고, 또한 그 잠두봉 아래에는 양화진(지금의 합정동)의 모습도 그려져 있다. 선유봉과 잠두봉 사이의 강물길을 느긋하게 나룻배로 건너고 있는 뱃사공의 모습도 화폭에 담겨 있어 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내 자신도 그 그림 속에 뛰어들어 신선놀음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 정도다.

그렇다. 선유봉(仙遊峰)은 신선이 노닌다는 봉우리였다. 그럼 왜 선유봉은 졸지에 선유도로 내려앉았는가? 선유도는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내주었다. 일제에 의해 여의도에 비행장이 들어설 무렵, 활주로를 닦고 제방을 쌓는다며 선유봉에서 채석을 한 것이다. 그렇게 선유봉은 채석장이 되어버렸고 봉우리는 점점 더 낮아져 갔다. 해방 이후에도 선유봉은 계속해서 채석장으로 이용되었는데 선유봉에서 캔 돌들은 지금의 강변북로 공사 등에 이용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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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샛강생태공원 한강 역사트레킹팀이 활기차게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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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깎이다보니 선유봉은 납작하게 되었고, 이후 한강이 개발되어 강폭이 넓어졌을 때 영등포 쪽과 분리되어 섬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후 1978년에는 서울 서남부권에 식수를 공급하는 정수장이 선유도에 들어서게 됐고, 그 정수장이 지난 2000년에 폐쇄되어 지금의 선유도 공원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그러고보면 선유도는 참 사연이 많은 섬이다. 깎이고, 부서지고, 졸지에 섬이 되어버리고.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선유도가 그렇게 아낌없이 내주었기에 지금이 서울 시민들은 느긋하게 '신선놀음'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날도 많은 사람들이 선유도에서 느긋하게 강바람을 맞으며 가을소풍을 즐겼다. 우리 역사트레킹팀도 간식을 먹으며 즐겁게 선유도를 탐방했다.

 

 



# 잠두봉이 왜 절두산으로 개명했나?

선유도를 이야기하면서 절두산을 언급하지 않는다면 안 될 것이다. 절두산은 한강역사트레킹의 루트는 아니었지만 그 중요성 때문에 따로 시간을 내서 설명을 했다. 앞서 말한 <양화환도>에서 절두산, 즉 잠두봉은 선유봉과 짝을 이루고 있다. 뽕나무가 많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잠두봉은 그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고 하여 용두봉이라고도 불렸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꼭 들렀다는 잠두봉이, 겸제 정선이 화폭으로 담아낼 정도로 비경을 자랑하던 잠두봉이 왜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었을까? 그것도 머리가 잘린다는 의미의 절두산(切頭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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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두산 성지 당산역 방면에서 찍은 사진이다. 절두산 성지 뒤로 북한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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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6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이루어진 병인박해 때문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음을 당한다. 이때 주교인 베르뇌를 포함한 9명의 프랑스인들이 처형을 당했는데 그들은 절두산이 아닌 새남터(현재의 용산구 이촌동)와 충남 보령 갈매못 등지에서 죽었다.

이 병인박해가 원인이 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자국의 선교사가 처형됐다는 소식에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의 로즈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프랑스 함대는 본격적인 공세에 앞서 정찰선을 파견하는데 그 정찰선이 한강 깊숙이까지 올라온 것이다. 양화진을 넘어 서강까지 침범을 하고 돌아간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이 가만히 있었겠는가? 아주 격분을 했다. 그러면서 '사악한 서양 세력의 흔적들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씻어내겠다'며 잠두봉에 새로운 처형지를 만든 것이다. 그렇게 하여 뽕나무들이 우거졌던 잠두봉은 머리가 떨어져 나간다는 뜻의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다.

약 150년 전, 그렇게 절두산은 수천 명의 천주교인들의 목이 잘려나간 비극의 땅이었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감시견처럼 서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갔다. 그 흐름은 흥선대원군도 어쩌지를 못했다. 현재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는 절두산 한쪽에 꿔다둔 보릿자루 마냥 껑뚱하게 서 있지만 절두산은 그 자체가 우리 천주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성지 중에 성지가 됐다.

서양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반대는 어느 정도 수긍이 가지만 사람들의 피로 그 흔적을 닦아낸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무슨 공포영화를 찍는 것도 아니고 사람 피로 무엇을 닦는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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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화비 절두산 성지 한 쪽 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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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병인양요에 대해서 프랑스인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더불어 그 콧대 높은 프랑스 함대가 왜 다시 조선을 침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도 들었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시대사적인 유추를 해보았다.

당시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의 통치기였다. 그 시절 전 유럽은 신흥강국으로 발돋움한 프로이센에 대해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그 중 프랑스는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나라 중에 하나였다. 아니나다를까 몇 년 후 프랑스와 프로이센간에는 전쟁이 벌어졌고, 그 파장으로 독일 지방은 통일된 국가를 이루게 됐다. 즉 1866년경, 프랑스는 동방의 조선에 물리력을 집중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 숨어 있는 진주,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이런 필자의 설명을 뒤로하고 한강역사트레킹팀은 여의도 샛강생태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샛강생태공원은 1997년 9월 경에 우리나라 최초로 조성된 생태공원이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트레킹 코스나 자전거도로가 닦인 것은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앞쪽의 한강이 보기 좋게 정비가 됐다면, 뒤쪽의 샛강은 그렇지 못했다. 생태탐방로나 나무데크 같은 시설이, 또 자전거 도로 같은 인프라가 갖추어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S라인을 강조하며 여의도와 신길역을 연결하는 샛강도보교가 개통된 지도 겨우 1년 남짓 밖에 되지 않았다. 정확히는 2011년 4월 12일에 개통했다고 한다. 역으로 말하면 샛강의 접근성은 최근에 와서야 좋아졌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샛강생태공원이 무슨 대단한 절경을 품고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샛강은 상당히 매력적인 공간이다. 여의도의 고층건물과 습지가 서로의 배경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여의도라는 서울에서도 알아주는 첨단 구역에 샛강생태공원이라는 허파와도 같은 공간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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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샛강생태공원 샛강생태공원은 억새가 많은 곳이다. 그 억새들을 배경으로 한 컷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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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합시다, 역사트레킹! 

한강 역사트레킹의 다음 탐방지는 중지도에 있는 노들 텃밭이다. 한강대교가 걸터 있는 중지도에 도시형 텃밭이 들어섰는데 그 곳이 우리의 마지막 방문지였던 노들텃밭이었다. 그곳은 2012년에 첫 농사를 지었는데 63빌딩을 비롯한 여의도의 고층 빌딩을 바라보며 농사를 짓는 이색적인 곳이다. 도심지 한복판에 한가롭게 허수아비들이 들어서 있는 모습도 흥미롭다. 노들 텃밭에는 오두막도 많은데 그곳에서 먹는 새참과 간식은 꿀맛일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한강 역사트레킹은 무사히 마무리됐다. 무슨 여복(?)이 터졌는지 모르겠지만 필자를 빼고는 모두 젊은 처자들이 이번 트레킹에 참여를 했다. 그것도 5명씩이나. 그런 5명의 재기발랄한 젊은 처자들과 함께 4시간 정도를 걸었더니 아주 상쾌했다. 물론 그들을 리딩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긴 했지만 그 정도는 마스터의 숙명이라고 생각하고 감수를 했다. 

앞으로도 역사트레킹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역사트레킹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주말에 마땅히 할 일이 없으면 애꿎은 방바닥만 긁지 말고 필자와 함께 역사트레킹에 나서 보는게 어떤가? 필자가 유머 감각이 뛰어나지는 않다. 그래서 '이승만은 세종대왕과 같다'와 같은 '빵' 터지는 개그콘서트를 펼치지는 못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일본 우익의 주장을 고스란히 담은 후소사 역사교과서나 요즘 한참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교학사 역사교과서보다 훨씬 더 양질의 콘텐츠를 제공할 것을 확실히 보장한다. 말만 잘하면 필자가 밥도 사줄 수 있다.

 

 

 

 

 

 

 

 

 

 

청명한 가을날에 떠난 한강 역사트레킹

13.10.17 14:10l최종 업데이트 13.10.17 21:43l
곽동운(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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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고층건물들과 습지가 서로 어우러진 모습이 상당히 이채로운 곳이다. 올 여름에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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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끊어진 다리

"그게 정말이에요? 저 한강대교가 폭파됐었다고요? 그게 언젠데요?"

누군가 놀란 듯 큰 목소리로 필자에게 물었다. 나머지 팀원들은 조용히 숨을 죽이고 필자의 입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국전쟁 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끊은 주체가 인민군이 아닌 우리 국군이었다는 점입니다. 인민군의 남하를 막겠다고 다리를 폭파시킨 거죠. 전쟁 때는 일부러 시설물을 파괴해서 적군의 행군 속도를 늦추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강대교 폭파는 문제가 아주 많았어요. 다리 절단으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기 때문이죠."

 


"무슨 피해가 있었는데요?"

 


"사전 예고 없이 폭파가 실시돼서 당시 다리를 건너던 피난민들이 많이 죽었어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더 황당한 일은 다리가 끊기기 몇 시간 전까지,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힘찬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는 겁니다."
"그럼 대통령이 서울에 남아 있었는데 다리를 끊었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에 없었어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수뇌부들은 멀리 대전까지 피난을 간 상태였습니다. 미리 녹음했던 음성으로 계속 돌려 됐던 거죠. 그래서 실제로 그 방송 내용을 믿고 피난을 안 간 사람도 있었다고 하네요. 웃기는 거죠. 자신들만 살겠다고 도망을 간 건 그렇다 쳐도 왜 거짓말을 합니까? 서울에 있지도 않으면서 서울에 있다고 구라쳐서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고."

필자의 설명이 끝나자 분위기는 한층 더 가라앉았다. 그래서 영화 이야기로 방향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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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역사트레킹의 코스 당산역 ->선유도공원 -> 샛강생태공원 -> 노들텃밭(한강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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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컴투 동막골>이라는 영화 기억나시죠? 그 영화에서 신하균이 육군 소위로 나오잖아요. 영화에서 신하균은 탈영을 하고 자살까지 시도를 했는데 그게 다 죄책감 때문에 그랬더라고요. 피란민들이 몰려든 다리를 폭파시켰는데 담당자가 신하균이었던 거죠. 그래서 신하균은 죄책감에 시달렸던 거고요. 그 부분은 한강대교 폭파에서 모티브를 따온 게 아닌가 하네요."

씁쓸한 적막감이 바람에 실려 온 듯 우리 한강 역사트레킹팀을 크게 흔들고 지나간 듯싶었다. 누군가 소리 낮춰 이야기 내뱉었다.

"아픈 우리 현대사네요."

 


"그렇죠.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당시 찍은 사진들을 보니까 마치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연상되더군요. 상판이 떨어져 나가서 강물에 둥둥 떠 있고요…."

 


# 한강에 뭐 볼 게 있는가?

10월 13일 오후. 가을날의 한강은 청명함이 더해가고 있었다. 일요일 오후의 느긋함을 만끽하려는 듯 한강시민공원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여유가 흘러넘쳤다. 우리 한강역사트레킹 팀의 얼굴 표정에서도 그런 청명한 가을 날씨가 살아 숨쉬는 듯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리팀은 진지함까지 묻어 있었다. 하나라도 더 배워가려는 듯 필자의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런 진지함이 부담으로 작용했는지 필자의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거 괜히 버벅대서 팩트 전달이 꼬이는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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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역사트레킹 여복이 터졌나? 필자만 뺴고 모두 젊은 처자들이었다. 이 분들 덕분에 재미난 역사트레킹을 할 수 있었다. 뒤에 보이는 곳이 선유도와 양화대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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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역사트레킹 마스터다. 이 직함은 우리나라에서는 필자가 처음으로 사용했다. 즉, 국내에서는 유일무이한 직함이라는 것이다. 역사트레킹 마스터는 역사 유물 앞에서는 유홍준 선생이 되어야 하고, 필드에서는 엄홍길 대장이 되어야 한다. 또 직접 트레킹 코스도 개척해야 하기에 손발이 무척 분주한 직업이다.

이렇게 보면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게 무척 대단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지적인 면과 아웃도어적인 면이 동시에 부각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빛 좋은 개살구'였다. 그동안 그 직함에 어울리는 활동이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역사트레킹 마스터라고 그냥 폼만 잡고 다녔던 것이다.

그랬다. 그간 필자의 손발은 무척 한가했다. 또한 필자가 주인장으로 있는 역사트레킹 카페도 파리만 날렸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얼마전 위즈돔이라는 지식 공유 사이트에 <한강역사트레킹>이라는 코너를 하나 개설했다. 운이 좋았는지 코너는 매진이 되었고, 10월 13일에 역사트레킹의 첫 항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강에 무슨 볼거리라 있다고, 거창하게 '역사트레킹'을 하냐는 비아냥거림이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한강이야 산책하고, 운동하는 그러는 곳이잖아. 그렇게 친숙한 곳에 '한강역사트레킹'이라는 거창한 명칭을 붙이는 거 오버 아니야? 괜히 있어 보이려고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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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화대교 선유도공원에서 바라본 양화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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