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다리는 즐거운 놀이터

한강 다리가 이렇게 재밌는 곳이었어?

 

필자는 한 때 한강에 미쳤던(?) 적이 있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지난호에 한강의 섬에 대한 이야기를 기고했었다. 글을 잘 썼는지 이번에도 한강에 대한 이야기를 또 기고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 이 글은 한강에 미쳤던 사람의 두 번째 한강이야기다. 즐거운 놀이터가 되어주는 한강 다리 이야기.

오늘도 사람들은 한강을 분주하게 넘고 있다. 강남과 강북을 가르며 자연장벽이 될 수도 있는 한강을 현대인들은 손쉽게 건너고 있다. 그럼 언제부터 한강을 나룻배가 아닌 교량을 통해 건너갔을까? 1900년 한강철교가 부설되면서부터다. 1899년에 경인선이 개통됐는데 그때는 노량진역이 출발역이었다. 다음해에 한강철교와 함께 경성역이 준공됐고, 1900년 7월에 ‘경성역-인천역’까지 완전 개통을 하게 된다. 경성역은 나중에 서대문역으로 불렸는데 지금의 서울역과는 다른 곳이다.

 

 

* 동작대교: 동작대교 위로 넘어가는 노을. 서래섬 부근에서 촬영함.

 

 

 

한강철교는 기차만 다닐 수 있는 철도전용 다리였다. 지금이야 교통카드만 있으면 간편하게 전철을 타고 한강을 건널 수 있지만 구한말에 살았던 사람들이 손쉽게 티켓팅을 할 수 있었을까? 일반 사람들도 편리하게 한강을 넘을 수 있게 된 건 1917년부터였다. 이때 한강 인도교라 불렸던 한강대교가 개통됐다.

이후 서울은 확장을 거듭했고, 한강의 다리들도 더 많이 건설됐다. 그럼 서울의 한강에는 몇 개의 다리가 있을까? 총 27개다. 여기서 말하는 다리는 서울시와 연관을 맺는 다리를 말한다. 그래서 팔당대교(남양주시-하남시)처럼 경기도와 경기도를 잇는 다리들은 27개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이런 다리를 두고 서울시에서는 ‘시계외 교량’이라고 부르는데 팔당대교, 김포대교 등 총 4개가 있다.

한편 서울 강동구와 경기도 구리시를 잇는 고덕대교(가칭)가 올해 말 준공을 앞두고 있는 등 앞으로도 한강 다리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잠깐 교량의 종류에 대해서 알아보자. 교량의 종류는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순수도로교량
철도교량
철도도로병용교량
예) 마포대교
예) 당산철교
예) 동작대교

 

순수도로교량은 자동차가 다니는, 철도교량은 기차만 다니는 다리 형태로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교량 형태다. 이에 비해 철도도로병용교량은 자동차와 기차가 교량을 함께 쓰는 다리 형식으로 도시 지역에서만 나타난다. 인천공항을 오가는 영종대교를 제외하고 철도도로병용교량은 서울에만 존재한다.

 

 

 

* 동작대교: 자동차와 나란히 주행하는 4호선 전동차

 

 

 

● 동작대교: 지하철과 자동차가 함께 경주를 한다?

지면관계상 한강 다리를 일일이 다 언급할 수는 없고, 몇 개만 추려서 이야기 해본다. 첫 번째 다리는 동작대교다. 동작구 동작동과 용산구 이촌동을 잇는 동작대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도로병용교량이다. 푸른색 아치가 인상적인 동작대교는 1984년에 준공됐고, 그 다음해에 지하철 4호선이 개통한다. 동작대교 위로 푸른색으로 도장된 4호선 전동차들이 자동차들과 경주하듯 달리게 됐다. 전동차와 자동차가 한 공간에서 나란히 주행을 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무척 이색적이었다.

그래서 동작대교는 영화나 CF의 단골 다리로 등장했다. 미끄러지듯 전동차가 달리고, 그 옆으로는 자동차가 경쾌하게 주행을 하며, 그런 모습을 주인공이 미소지으며 지켜보고...

동작대교의 남단은 ‘동재기나루(銅雀津:동작진)’라고도 불렸던 동작나루가 있던 곳이다. 동작역 4번 출구에서 나오면 서울현충원으로 갈 수 있는데 중간에 이곳이 동작나루였다는 것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옛날 나룻배로 동작나루를 건넜던 사람들은 남태령으로 향했고, 과천에 당도할 수 있었다. 삼남(충청, 전라, 경상)지역으로 먼 길을 떠나야 했던 이들도 동작나루를 이용했었다.

 

 

* 동작대교: 동작대교 위에 있는 구름카페

 

 

 

동작나루는 정조대왕이 화성 능행차를 행하기 위해 건넌 곳이기도 했다. 왕이라 나룻배로 움직이시지 않고 임시로 배다리를 만들어 한강을 건너셨다. 배다리는 정약용 선생이 설계했다고 전해진다. 어쩌면 이 배다리가 동작대교의 시초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현재 동작대교가 놓인 자리는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이들이 오갔던 교통의 요지였던 셈이다.

그 수많은 발걸음에 필자도 빠질 수 없었다. 동작대교 남단에 있는 구름카페와 노을카페로 향했다. 구름카페는 동쪽, 노을카페는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동작역과 가까워서 접근성이 무척 좋다. 2009년에 오픈한 두 카페는 몇 년 전 재정비를 한 후 야경 명소로 재탄생했다. 한강은 당연하고, 남산은 물론 서울현충원을 품고 있는 서달산까지 파노라마로 볼 수 있으니 한강의 전망 ‘맛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여의도와 가까워서 그런지 서울세계불꽃축제를 편하게 볼 수 있는 명당(?)이라고 입소문이 자자하다.

참고) 구름카페 / 노을카페: 운영시간 매일 07:00 ~ 24:00 / 주차가능(유료)

 

 

 

* 반포대교: 달빛무지개분수

 

 

 

● 반포대교와 잠수교: 다리도 걷고, 달빛무지개분수도 감상하고

필자가 도보여행가라서 그런 것일까? 한강에 있는 다리들을 걸어서 넘기 편한 순서대로 분류를 한 적이 있었다.

1.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어야 한다.

2. 보행로가 넓어야 한다.

3. 연결 대중교통이 있으면 좋다.

이 원칙에 의거하면 가장 손쉽게 넘을 수 있는 다리는 잠수교다. 잠수교는 보행 공간이 넓어 자동차의 위협(?)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다. 또한 남단쪽인 서초구 반포한강공원에는 버스정류장이 있고, 북단쪽인 용산구 서빙고동에는 경의중앙선 서빙고역이 가깝게 자리잡고 있다. 더군다나 잠수교는 795m로 한강 다리 중에서는 가장 짧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잠수교는 걸어서 넘을 수 있는 최적화된 한강 다리임에 틀림없다.

아시다시피 잠수교는 위쪽에 반포대교가 놓여 있다. 복층형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형태는 아니었다. 1976년에 잠수교가 건설됐고, 6년 후인 1982년에 반포대교가 추가로 건설된다. 두 다리가 동시에 세트로 지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가 않다.

잠수교는 유사시 탱크나 장갑차가 통과하는 걸 염두에 두고 건설되었다. 그래서 교량의 높이를 낮게 만들었다. 이렇게 다리가 낮다 보니 비가 많이 오면 제일 먼저 ‘잠수’를 하게 된다. 홍수 시에 한강 수위를 나타내는 척도가 되어주는 것이다.

 

 

* 잠수교: 한강을 걸어서 넘기에 좋은 잠수교

 

 

 

 

이렇게 키가 낮은 잠수교는 2008년에 4차선에서 2차선으로 차로가 축소된다. 차로는 좁아졌지만 보행로는 넓어지게 된다. 걷기 친화적인 다리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때 윗층에 있는 반포대교도 달빛무지개분수가 설치되며 새롭게 변신하게 된다. 반포대교 상판에 조명과 함께 분수 시설이 설치되어 더위에 지친 시민들의 가슴을 적셔주게 된 것이다. 형형색색의 조명과 함께 시원한 물줄기가 뿜어질 때는 관람객들의 탄성이 한강변에 울리게 된다.

지난 4월 1일 토요일, 올 해 첫 달빛무지개분수가 가동된 날이었다. 잠수교를 탐방한 후 달빛무지개분수를 보기 위해 자리를 잡으러 갔다. 하지만 명당 자리는 이미 누군가가 돗자리를 펴고 있었다. 워낙 관람객들이 많다 보니 자리싸움이 치열했다. 그런 와중에 외국인들의 목소리가 많이 들렸다. 이미 달빛무지개분수는 외국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볼거리로 자리를 잡은 듯싶었다.

축제가 빠질 수가 없다. 작년에 '차 없는 잠수교 뚜벅뚜벅 축제'가 개최되었다. 잠수교를 보행 전용 다리로 바꿀 예정인데 그에 앞서 축제를 통해 미리 체험을 해보자는 것이다. 올해는 상·하반기 10회씩, 총 20회의 뚜벅뚜벅 축제가 개최될 예정이다.

작년에 한강달빛야시장도 반포한강공원 일원에서 진행됐다. 코로나로 인해 3년 만에 다시 등장한 야시장은 이전에는 ‘밤 도깨비 야시장’으로 불렸다. 40여 개의 푸드 트럭과 60여 개의 판매부스 등이 야행을 즐기는 시민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 반응이 너무 뜨거웠던지 한강달빛야시장이 열리자 강남 일대 교통이 마비가 됐을 정도였다.

 

참고) 달빛무지개분수: 운영기간 4~10월(11월 이후 휴업)

4~10월 12:00, 19:30, 20:00, 20:30, 21:00 (20분씩 가동)

7~8월 12:00, 19:30, 20:00, 20:30, 21:00, 21:30 (20분씩 가동)

 

 

 

 

 

* 청담대교: 서울생각마루(자벌레) 옆 청담대교. 7호선 전동차가 주행하고 있다.

 

 

 

● 청담대교: 자벌레가 있는 즐거운 놀이터

지하철을 타다 보면 선호하는 구간이 하나쯤 있기 마련이다. 누구는 북한산, 수락산, 불암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4호선 상계역 구간을 좋아하는 이도 있고, 누구는 여의도의 고층빌딩과 한강의 밤섬을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는 2호선 당산철교 구간을 선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7호선 청담대교 구간을 좋아한다. 특히 한강 남쪽인 지하 구간에서 청담대교로 진입하는 그 순간을 무척이나 즐긴다. 전동차가 어두운 지하 구간에서 청담대교로 나올 때 특유의 진동음이 발생되는데 그런 소음까지도 클라이맥스를 기다리는 배경음으로 들릴 정도다. 어두운 지하 구간에서 ‘딱’하고 나오자마자 넓은 한강이 펼쳐지는 거 자체가 아주 극적이기 때문이다.

청담대교는 아래층은 7호선 철로가 위층에는 차로가 있는 복합교량이다. 본교가 1999년 12월에, 접속교는 2001년 1월에 개통되었다. 이렇게 접속교 개통까지 언급한 이유는 청담대교가 자동차 전용도로로 보행이 불가한 교량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담대교는 동부간선도로상에 있으면서 분당-수서간 고속도로와 바로 연결된다.

같은 철도도로병용교량이지만 청담대교는 동작대교나 동호대교와는 다른 이미지이다. 동작대교와 동호대교가 철로를 가운데에 두고 차로가 좌우로 있는 구조라면 청담대교는 영종대교처럼 위아래로 층층이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동작대교에서는 전동차와 자동차가 나란히 주행하는 화면이 많이 그려진다.

그런 모습을 주인공이 미소지으며 바라보고 있고... 이에 비해 청담대교는 한강변에서 청담대교를 올려보는 모습이 많이 그려진다. 주인공이 청담대교를 배경으로 한강변을 바라보고 있고, 이때 마침 전동차가 지나가는 장면이 펼쳐진다. 배경음악은 도시 감각에 맞는 음악으로...

 

 

* 청담대교: 서울생각마루 전망대에서 바라본 청담대교. 전망대에서는 청담대교를 바로 옆에서 조망할 수 있다.

 

 

 

청담대교의 북단에는 뚝섬유원지역이 있고, 그 아래에는 뚝섬한강공원이 있다. 뚝섬유원지 시절부터 시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곳에는 길이가 200미터가 넘는 자벌레가 산다(?). 이 자벌레는 서울생각마루라는 복합공간으로 전망시설과 함께 각종 문화시설이 들어서 있다. 자벌레는 특이한 외형 때문에 셀카 명소로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고 청담대교를 넘었다. 어두운 터널에서 ‘딱’하고 한강으로 나왔을 때의 쾌감은 여전했다. 뚝섬유원지역에서 하차한 후 커피 한 잔을 들고 자벌레 앞에 가서 셀카를 찍었다. 이때 마침 청담대교로 전동차가 지나고 있었고 도시 감각의 음악이 들리고 있었다.

이렇게 한강 다리들은 콘크리트 구조물이라는 무거운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서고 있다. 거기에 재미까지 더해졌다. 한강 다리들이 이렇게 재밌는 곳이다. 시민들의 즐거운 놀이터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참고) 서울생각마루 운영시간: 평일 및 주말 10:00 ~ 21:00

휴관일: 매주 월요일 / 1월1일 / 설날 및 추석연휴

 

 

* 이 글은 서울시체육회에서 발간하는 격월간 <서울스포츠> 2023년 5~6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역사트레킹으로 밥먹고 삽니다_ 1편

- 나를 가이드라고 부르는 사람이 싫었다!

- 역사트레킹마스터(historytrekkingmaster)

내 스스로에게 붙인 명칭이다. 초창기에 붙인 명칭이니 거의 십 년 정도 된 거 같다. 이력서를 쓸 때마다 저 명칭을 기술했는데 인사담당자들은 거의 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역사트레킹은 대충 알겠는데 ‘역사트레킹마스터’는 감이 잘 안 온다는 뜻이었다. 하긴 나도 담당자에게 전화를 할 때는 이랬다.

“안녕하세요? 트레킹 강사 곽동운인데요.”

‘대장’이라는 명칭은 피하고 싶었다. 기존 산악회에서 통용되는 명칭을 쓰면 첨언할 필요 없이 다른 이들을 쉽게 납득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일이 대장이라는 명칭과는 어울리지도 않았을뿐더러 내가 누군가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것도 좀 닭살 돋았다.

어쨌든 난 역사트레킹마스터라는 낯설고도 긴 명칭을 직업란에 기재를 해왔다. 그리고는 항상 역사트레킹마스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이러쿵저러쿵 말을 덧붙여야 했다. 그 덧붙이는 말의 총량은 초창기 때와 비슷하다. 요즘도 사람들이 잘 모르니깐...

마스터(master), 아시다시피 ‘주인’이라는 뜻이다. 거기에 더해 ‘~숙달하다’, ‘~통달하다’라는 의미도 있다. 역사트레킹마스터는 ‘주인’이라는 뜻보다는 ‘숙달하다’라는 의미로 쓰인다고 할 수 있다. 마스터는 전반적인 리딩은 물론, 적재적소에서 해설을 해야 한다. 입담이 좋아 청산유수처럼 해설을 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꼭 해설을 해야 한다. 왜? 역사트레킹이니깐! 돈을 받고 하는 트레킹이니깐!

 

* 인왕산 기차바위 인근에서 찍은 사진. 뒤쪽에 서대문 안산이 보인다.

역사트레킹마스터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주로 둘레길을 걷지만 역사트레킹도 엄연히 아웃도어 활동이다. 만 보 이상 걷고, 4시간 정도 소요되는 야외활동이다. 그래서 스트레칭이나 호흡법 같은 피지컬적인 요소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또한 야생동물로부터 수강생들을 보호하는 것도 마스터의 임무이다. 산책로에 뱀이 있으면 스틱으로 뱀을 치워버리고, 앞에 멧돼지가 나타나면 자신의 몸으로 ‘몸빵’을 해야 한다.

이것 말고도 상당히 중요한 임무가 있다. 피식 웃을 수도 있지만 무척 중요하다. 무엇이냐? 바로 화장실이다. 우리나라에서 대중트레킹을 향유하는 주요 계층은 40~60대 여성들이다. 실제로 내 강의인,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의 수강생 대부분은 중년 여성들이다. 그러다보니 화장실 문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내가 남자라 그런지 남성 수강생분들에게는 ‘알아서 하시라’고, 그냥 맡긴다. 실제로도 알아서 잘들 하신다. 하지만 여성 수강생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난 트레킹 중에 물을 많이 마시자는 주의다. 수강생들에게 물을 많이 들이켜게 했으니 응당 그에 대한 후속조치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답사를 갈 때 꼭 화장실 위치부터 체크한다. 화장실이 없는 곳은 아무리 좋은 길이라도 코스에서 제외시킨다.

리딩과 해설, 그리고 야생동물과 맞서기와 화장실 체크까지... 주인이 아니라 무슨 마당쇠같다. 그렇다. 난 수강생들에게 주인이 아니라 마당쇠 역할을 한다고 힘줘서 이야기한다.

이런 모습은 여행가이드와 외형적으로 같아 보인다. 여행가이드가 고객이 편하게 여행에 몰입할 수 있게 서포터를 해주듯, 역사트레킹마스터인 나는 수강생분들이 편하게 트레킹에 임할 수 있도록 마당쇠 역할을 해준다. 명칭만 다를 뿐 내용상으로는 많은 부분이 겹친다. 지금도 종종 나를 ‘가이드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예전에는 가이드라는 이름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요즘은 개의치 않는다. 마스터든, 강사든, 가이드든 명칭이 중요한 게 아니라 트레킹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이후부터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은 것이다.

난 계속 직업란을 역사트레킹마스터(historytrekkingmaster)로 기재할 것이다. 그리고는 궁금한 표정을 짓고 있을 상대방에게 그 역할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덧붙일 것이다. 그런 첨언의 과정이 언제 끝날지는 모른다. 이 연재를 시작한 건 그 과정을 줄여보자는 의미에서 시작한 것도 있다.

하지만 내 직업을 제대로 기록해보자는 것이 본 연재의 가장 큰 목적이다. 어찌 보면 내 직업은 완료형이 아닌 진행형이다. 업무 분장이 명징하게 기재된 메뉴얼이 있는게 아니라 매뉴얼을 직접 만들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창작한다는 심정으로 내 일에 대해서 기록을 남겨보고 싶다. 풍광이 수려한 트레킹 코스를 알고 싶어 이 글을 클릭한 분들에게는 그저 죄송할 따름이다.

 

추신. 그런 의미로 트레킹 코스에 대해서 알고 싶은 분들은 번지수를 잘못 찾으셨다. 트레킹 코스에 대해서 알고 싶은 분들은 링크를 클릭하시라!

 

 

* 노들섬: 노들섬 잔디마당에서 한강철교를 바라본 모습. 아파트 사이로 새남터 성지가 보인다. 

 

 

이해가 안 가시겠지만 필자는 예전에 한참 한강에 미친(?)적이 있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되는 양수리를 제 집 드나들 듯 다녔었고, 백두대간 깊은 곳에 있는 한강의 발원지를 탐방하기도 했었다. 또한 서울에 놓인 한강 다리들을 직접 두 다리로 건너보며, 어느 다리가 건너기 편한가 평가를 내리기도 했었다. 직접 도보로 건넌 다리 중에 가장 빈번하게 발걸음을 한 건 한강대교였다. 63빌딩과 한강철교를 지나 한강대교에 들어섰고, 그 발걸음의 마지막에는 노들섬이 있었다.

근현대에 들어 서울이 역동적으로 변해갔듯 한강도 크게 변모하게 된다. 물줄기가 달라지기도 했는데 그렇게 되니 전에는 없던 섬들이 생기게 됐다. 이 글은 한강에 떠 있는 섬들, 그 중에서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섬들에 관한 이야기다. 노들섬부터 서래섬을 찍고 새빛섬까지, 직접 발로 담은 이야기이다.

 

● 한 때 한강에 미친(?) 사람의 한강 이야기

본격적인 섬이야기에 앞서 한강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한 때 한강에 미친 사람의 한강 이야기다. 한강은 우리에게 젓줄과도 같은 존재였던 만큼 시대마다 다양한 이름으로도 불렸다. 고구려 장수왕때 만들어진 광개토대왕비에는 ‘아리수’라고 기재되어 있다. 서울시의 수돗물 명칭인 그 아리수다. 고려시대에는 ‘열수’라고 불렸는데 크고 긴 강물이 열을 지어 흐른다는 뜻이다. 지역적으로도 다른 이름을 갖기도 했다. 임진강과 합수되어 서해로 흐르는 한강 하류 일대는 ‘조강’이라고 불렸고, 경기도 여주 지역은 여강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서울에서도 지역에 따라 세부적인 명칭을 가지기도 했다. 뚝섬과 가까운 곳에 매봉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는데 그 일대의 한강은 동호(東湖)라고 불렸다. 서울의 동쪽에 위치해 있고, 호수처럼 잔잔해서 동호라는 명칭이 붙은 것이다. 지금은 그 위로 동호대교가 놓여 옥수동과 압구정동을 연결해주고 있다. 서강도 있다. 지금의 마포지역의 한강을 서강 혹은 서호(西湖)라고 칭했다. 동호대교처럼 서강 일대에는 서강대교가 놓여 있는데 다리 아래에는 유명한 밤섬이 자리잡고 있다.

동호, 서호가 있으면 남호(南湖)도 있지 않았을까? 있었다. 지금의 용산 일대를 남호 혹은 용산강이라고 불렀다. 그 용산강 일대에 한강대교가 자리잡고 있고, 그 한강대교 아래에 노들섬이 있다.

 

 

* 노들섬: 한강대교에서 노들섬 서쪽편을 바라본 모습. 노들섬의 자랑인 잔디마당이 펼쳐져 있다. 사진 오른쪽에 큰 원반 모양의 달빛노들이 보인다.

 

 

●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노들섬

춘삼월이 코 앞이었지만 날씨가 쌀쌀했다. 63빌딩을 지나 노량진쪽에서 한강대교로 진입했다. 그러자 강바람이 매섭게 분다. 역시 강바람은 한강다리에서 맞아야 한다.

그렇게 노들섬에 들어섰다. 노들섬은 1995년 이전에는 중지도(中之島)로 불렸다. 요즘도 연세가 지긋한 분들은 노들섬은 모르셔도 중지도는 다 아신다. 중지도 시절의 노들섬은 서울의 대표적인 강수욕장이었다. 1950~60년대 자료사진들을 보면, 지금의 해운대를 빰칠 정도로 물놀이객들의 천국이었다.

노들섬은 처음부터 섬이 아니었다. 강변에 있는 넓은 모래벌판이었다. 그 모래벌판이 워낙 넓어서 군사훈련도 하고, 처형장으로도 쓰이기도 했다. 그래서 인근에 천주교 성지인 새남터가 있는 것이다.

모래벌판이었던 곳에 다리가 놓였다. 한강철교가 1900년에 놓인 후 남은 자재들을 모아 한강인도교라 불리는 한강대교가 탄생하게 되니 그때가 1917년이었다. 이때부터 모래벌판은 인공섬의 형태를 나타내기 시작한다. 중지도라는 명칭도 일제강점기인 이때 붙여진 것이다.

노들섬은 196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한강개발계획에 의해 완전한 섬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주변에 있던 모래벌판이 사라진 대신 그 자리를 강물이 메우게 된 것이다. 문제는 이즈음 노들섬의 소유권이 어떤 기업체로 넘어갔다는 점이다. 소유주가 개인으로 넘어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시민들의 발걸음은 뜸해지게 됐다. 개인 소유였던 노들섬을 2005년에 서울시에서 매입하게 된다. 이후 많은 개발계획이 타진됐으나 계속 무산되고 말았다. 공지로 남아 있던 섬은 도시텃밭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 한강철교: 노량진쪽에서 한강철교 라인을 따라 남산을 바라보고 있다. 이 구간에만 키 큰 건물이 없어서 남산을 겨우 볼 수 있다.

 

 

 

쌀쌀했지만 노들섬에는 많은 이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예전보다 확실히 접근성도 좋아지고 휴식공간도 많아졌다. 이렇게 편의성이 높아지니 시민들의 발걸음이 많아지는 것이다.

섬이 다시 북적북적해진 건 지난 2019년 9월 28일부터다. 노들섬이 ‘음악을 매개로 한 복합문화기지’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노들섬의 자랑인 잔디마당을 둘러본 후 향긋한 커피향을 따라 노들서가로 입장했다. 그런데 라이브공연이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역시 ‘음악을 매개로 한 복합문화’ 공간이 맞았다.

다시 잔디마당으로 나오니 마침 한강철교 위로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용산역으로 가는 기차였는데 그 철길을 따라가니 새남터 성지도 보였다. 아름다운 한강의 풍광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장소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면 한강철교 자체도 역사적인 장소다. 1900년에 완공됐고, 한국전쟁 때인 1950년 6월에 폭파됐기 때문이다. 한강철교가 폭파됐을 때 한강대교도 같이 폭파가 되는 아픔을 겪었다.

노들섬은 노을 명소다. 생각 같아서는 노을까지 보고 싶었으나 서래섬과 새빛섬 탐방을 하기 위해 서둘러 섬을 빠져나왔다. 나오는 길에 달빛노들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달빛노들은 섬의 서쪽에 설치된 둥근 원반 형태의 시설물로 그 크기가 무려 약 12미터에 달한다. 인공으로 달빛을 비추기 위해 만들었는데 유람선을 타고 갈 때 보면 꽤나 이색적이라고 한다.

 

 

 

*서래섬:서래섬에서 바라본 한강과 남산.

 

 

 

● 인공적이지만 정다운 섬, 서래섬

동작대교를 지나 서래섬에 도착했다. 서래섬에 입도(?)하니 가까운 곳에 세빛섬과 반포대교가 아주 가깝게 보였다. 반포한강공원 지구에 온 것이다.

서초구 반포동 일대에는 ‘서래’라는 명칭이 낯설지 않다. 동작역 아래로 반포천이 흐르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 하여 ‘서래’라고 칭한 것이다. 실제로 반포천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다 한강을 앞두고 크게 휘돌아나간다. 그 반포천 인근에 프랑스인들이 많이 산다는 서래마을이 있다.

위성사진을 보면 서래섬은 한강변 둑이 바둑판처럼 매끈하게 잘 다듬어졌다. 반대로 반포쪽은 산(山)을 거꾸로 뒤집어 놓은 형태다. 이런 외형이 자연스럽지는 않다. 그렇다. 서래섬도 인공섬이다.

고산자 김정호가 제작한 <경조오부>라는 지도를 보면 지금의 반포에 기도(碁島)라는 섬이 보인다. 1960년대까지도 존재했던 기도는 한강종합개발이 시행되면서 그 형태가 사라지게 된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기도에 있던 돌들로 바둑돌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1986년, 제2차 한강종합개발사업(1982~86년)으로 서래섬이 태어났다. 하지만 처음부터 순산을 한 건 아니었다. 한강종합개발이 시행될 즈음에 일부에서는 홍수 예방에 더 적합하다는 이유로 서래섬을 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한강개발추진본부장이었던 이상연은 시민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이곳에 섬을 만들기로 했고 실행에 옮긴다.

서래섬은 약 7천평 정도로 아담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공섬이지만 정감있는 모습이다. 봄에는 유채꽃이, 가을에는 갈대밭이 펼쳐지니 계절마다 보여주는 색감이 달라서 좋다. 그런 배경물들이 없더라도 서래섬은 산책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다른 섬들과는 달리 산책로가 흙길로 되어있으니까.

서래섬에 입도를 하려면 약 50미터 정도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그 몇 십 미터 차이로 걷기에 퀄리티가 달라진다. 흙길을 밟으며 한강변을 산책하는 호사를 누리는 것이다. 참고로 서래섬은 3개의 다리로 진출입을 할 수 있다.

 

 

 

* 노들섬:  문화복합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노들섬.

 

 

● 세 개가 아닌 네 개의 인공섬, 세빛섬

서래섬에서 빠져나와 마지막 탐방지인 세빛섬으로 향했다. 세빛섬의 영어 명칭은 '플로팅 아일랜드(Floating Island)'다. ‘한강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011년 5월에 탄생하였다. 애초 세빛섬은 3개의 빛이 내린다는 의미로 이름이 지어졌는데 처음에는 ‘세빛둥둥섬’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3개의 빛이라면 섬도 3개라는 뜻인가? 아니다. 정확히는 4개다. 처음에는 예빛섬이라는 대형스크린이 있는 미디어아트 섬이 2009년에 완공된다. 이후 가빛섬, 솔빛섬, 채빛섬이 2011년에 완공되어 현재의 외형을 갖추게 된다. 그러다 2014년 ‘세빛둥둥섬’에서 ‘세빛섬’으로 이름까지 개명하게 된다. 그간 세금 낭비라는 지적이 있었는데 ‘혈세가 둥둥 센다’는 부정적 이미지를 떨쳐버리고자 ‘둥둥’을 빼버렸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세빛섬이라고 하는데 딱 세빛섬이라고 꼬집을 수 있는 섬이 없다. 그냥 뭉뚱그려, 대표 이름으로 ‘세빛섬’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빛섬은 옆에 있는 반포대교나 그 아래 잠수교에서 바라보는게 가장 좋다. 조명이 켜진 세빛섬들 뒤로 관악산이 펼쳐져 있고, 그 위로 노을이 넘어가니 그 모습이 정말 장관이다.

이제까지 한강 중심부에 있는 섬들을 둘러보았다. 오랜만에 나선 길이라 필자도 무척 신났다. 겨우 전철값으로 시원스러운 한강섬 트레킹을 할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던 것이다. 이야기거리도 많고 걷기에도 좋은 한강의 섬들, 여러분들도 그 발걸음에 동참하시면 참 좋겠다.

 

 

* 저자도: 성동구 옥수동에 있는 매봉산에서 뚝섬 부근을 바라본 모습. 중간쯤에 성수대교가 보인다. 성수대교를 중심으로 왼쪽이 뚝섬이고, 오른쪽이 압구정동이다. 성수대교 아래쪽 부근에 저자도가 있었다.

 

 

● 저자도와 잠실

한강의 섬 중에는 지금은 수면 아래로 사라진 전설적인 섬도 있다. 전설적인 섬? 무슨 아틀란티스 제국인가? 하여간 지금은 사라져 버린 그 섬은 저자도(楮子島)이다. ‘닥나무저(楮)’에서 보듯 종이의 원료가 되는 닥나무가 많아 저자도라고 불렸다. 이 섬은 옥수동 근처에 있다 하여 옥수동섬이라고도 칭했다. 중랑천이 한강에 합수되는 지점에 있었는데 인근에는 뚝섬도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존재 자체도 모르지만 저자도는 동서 길이가 2km에 면적이 약 35만평에 이를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했다. 현재의 노들섬이 동서 길이가 약 700미터에 면적이 4만 5천평 정도이니 저자도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저자도는 선유도처럼 주위 풍광이 무척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래서 세종대왕께서도 뱃놀이를 즐기셨을 정도다. 그런 저자도도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사라지고 만다. 저자도의 모래를 퍼내서 압구정동에 아파트를 짓는데 사용한 것이다.

현재 서강대교 아래에 있는 밤섬도 1968년에 폭파되어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퇴적물이 계속 쌓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저자도도 재탄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전설이 완성될지 모른다.

한강에는 섬이었다가 육지가 된 곳도 있다. 뽕나무밭으로 유명했던 잠실이 바로 그곳이다. 이렇게 말하면 대다수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 지금 어디를 봐서 잠실이 섬인가? 하지만 잠실은 1970년대 초반까지 잠실도(蠶室島)라고 불리던 섬이었다. 더군다나 부리도(浮里島)라는 작은섬도 거느리고 있었다. 행정구역도 강남이 아니라 강북에 위치해있었다. 강남지역의 옛 행정구역은 경기도 광주군 소속이 많았다. 이에 반해 잠실도는 한강 이북이었던 경기도 양주군 혹은 고양군에 속했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가 일어났다. 용산 일대까지 물에 잠기는 등, 서울은 직격탄을 맞게 된다. 이때 잠실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건기에는 육지와 붙어있던 섬의 북쪽에 새로운 물길이 난 것이다. 우기에만 섬이 됐던 잠실이 계절에 상관없이 섬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렇게 섬의 북쪽에 난 물길을 신천강이라고 불렀고, 남쪽의 물길은 송파강이라고 칭했다.

1971년, 잠실도는 을축년 때처럼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남쪽 물길이었던 송파강을 메워 잠실을 육지로 만든 것이다. 강의 남쪽과 붙게 되니 잠실은 한순간에 강남 지역이 됐다. 한편 메워진 송파강도 석촌호수로 물길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렇게 한강의 섬들은 저마다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퍼내도 퍼내도 끊이지 않을 거 같다. 그럼 한강섬들은 이야기 보물섬인가? 그 보물섬과 같은 곳을 찾아 오늘도 한강섬 트레킹에 나선다.

 

* 경조오부: 사진 오른쪽 하단에 '저자도'가 표시되어 있다. 하단 중앙에는 '기도'가 표시되었다.

 

 

* 잠실: 잠실의 변천사. 아래에 있는 송파강이 본류(메인)이었고, 위에 신천강이 지류(사이드)였다. 하지만 송파강을 메꿔 잠실섬이 육지화됐고, 지류였던 신천강이 메인이 되버린다. 사진은 인터넷을 참조했다.

 

 


 

@ 한강섬 트레킹

* 추천코스: 노들역 -> 한강대교 -> 노들섬 -> 동작대교 -> 서래섬 -> 세빛섬

* 길이: 약 6km

* 난이도: 하

* 교통편: 9호선 노들역에서 하차한 후, 한강대교에 진입함. 서래섬을 방문한 후에는 9호선 신반포역을 이동할 수 있음. 잠수교를 넘고 싶은 분은 경의중앙선 서빙고역을 이용할 수 있음.

 

 

 

 
 

 

 

<흑산도> 배는 안 떴고, 난 섬을 돌아다녔네!

흑산도 구석구석 탐방하기!

 

2023년 1월 11일(수) ~17일(화)

흑산도에 있었던 시기이다. 안개와 풍랑으로 인해 예정했던 날짜보다 더 오래 흑산도에 머물렀고, 그에 따라 마음껏(?) 흑산도 여행을 하게된 것이다. 기록은 시간순이 아닌 해당 여행지를 중심으로 작성하였다.

*** 2023년 1월 14일 토요일.

홍도여행이 유람선 관광 중심이라면, 흑산도는 일주도로를 따라 포인트를 찍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관광택시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항상 돈이 문제가 아닌가... 주머니가 가볍고 하니 택시는 못 타고 발로 떼우기로 했다.

흑산도는 마을이 다 해안가에 접해있다. 섬 내부의 산들이 워낙 가팔라서 마을이 들어설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이날은 그런 산들 중 하나에 오르기로 했다. 홍도에서도 깃대봉을 올랐었는데 이번에도 또 산이다! 이러다 섬 산행에 맛들이겠다.

 

 

* 상라산 전망대: 전망대에서 흑산도 북동쪽을 바라본 모습.

 

 

 

* 흑산도: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다.

 

 

 

흑산도에서 유명한 산은 칠락산이다. 해발 271미터 정도로 서울 남산 정도의 높이다. 섬 내부에 해발 404미터의 문암산이 있지만 중심지인 예리와 진리의 진산 역할을 하는 산이라서 그런지 칠락산은 꽤 인기가 많다. 이날의 이동코스는 이렇다.

칠락산 -> 반달봉 -> 상라산(전망대) -> 12굽이길 -> 무심사지

이 코스는 섬의 서북쪽의 산악 구간을 탐방한다. 홍도 깃대봉처럼 흑산도의 산들도 녹음이 가득했다. 입춘이 아직 저멀리에 있는데 푸른 숲길을 걸을 수 있다니! 인적이 끊긴 겨울 푸른 숲길을 홀로 걷고 있자니 참 묘한 느낌이 들더라. 때마침 안개가 숲길에 깔리는데... 마치 엘프가 된 느낌? 똥배나온 엘프도 있나?ㅋ

흑산도의 자랑 상라산 전망대에서 섬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배를 타고 둘러보는 것과 위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아래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풍광도 위쪽에서는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맛에 산에 오르고, 트레킹을 하고 그러는 것이다.

12굽이길 탐방을 끝으로 흑산도 섬 등산을 잘 마무리했다. 12굽이길을 직접 내려가 봤는데 그 경사도가 정말 한계령 빰칠 정도였다. 이곳을 직접 가봐야 흑산도 지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 12굽이길: 상라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12굽이길과 흑산도항.

 

 

 

마지막 탐방지는 12굽이길 시작점 부근에 있는 무심사지였다. 무심사는 신라 후기시대에 만들어진 사찰이었는데 장보고의 해상활동과 관련있는 곳이다. 상라산이 있는 섬의 서북쪽에는 후기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상라산성이 있다. 흑산도가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다보니 성을 쌓아 감시와 방어를 했고, 무심사는 배후 사찰로 역할을 했다.

무심사지에 들어서니 거대한 팽나무가 크게 두 팔을 벌리듯 맞이하고 있었다. 그 자태가 의리의리해서 석탑과 석등이 좀 위축되게 보였다. 석탑과 석등은 팽나무의 보호(?) 아래 좀 방치된 느낌이었다. 그래도 섬 지역에서 불교문화재를 보는 것이 쉽지가 않아서 그런지 무척 반가웠다.

지금은 팽나무 울타리 안에 석탑과 석등이 있다. 하지만 분리를 해서 석등과 석등이 제대로 자리를 잡았으면 한다. 안타까운 이혼이 아니라 아름다운 제자리 찾기라고 생각하며.

 

 

 

* 무심사지: 거대한 팽나무가 석탑과 석등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 무심사지 석탑과 석등

 

 

 

*** 2023년 1월 15일 일요일.

빠르게 흑산도를 돌아보고 싶다면 관광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제일 좋은 방법은 섬 일주도로를 직접 걸어보는 것이다. 흑산도 일주도로는 약 25km정도이니 2번에 걸쳐 나눠 걷는 것이 좋다. 그런데 일주도로면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아닌가? 트레킹의 첫번째 원칙이 안전이라고 숱하게 강조하지 않았나? 안전에 위배되는 행위를 추천하고 있는 것인가?

맞다. 일주도로에서는 자동차와 경합하면서 걸어야 한다. 갓길도 아주 비좁다. 그럼에도 일주도로 걷기를 추천하는 이유가 있다. 차들이 별로 안 다니기 때문이다. 1월이 비수기여서 그럴 수도 있다. 어쨌든 이동하는 자동차들이 드문드문이어서 안전이 위협받을 일은 거의 없었다.

이날은 공영버스를 타고 면암 최익현 유배지에서 하차를 한 후 유배문화공원이 있는 사리마을까지 걸어갔다. 거리로는 약 5km 정도였다.

 

 

* 손암 정약전

 

 

 

면암 최익현은 대표적인 위정척사파로 불린다. 1876년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이 맺어지자 이에 반대하는데 그 때문에 흑산도로 유배를 오게 됐다. 이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직접 의병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맞서 싸운다. 이때가 그의 나이 74세였다. 하지만 일본군에게 잡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6년 대마도에서 순국하고 만다. 최익현 유배지는 아주 단출하다. 비석과 바위의 각자가 전부였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 그냥 스쳐지나갈 거 같다.

이후 유배문화공원이 있는 사리마을로 향했다. 일주도로는 해안가를 끼고 돌아간다. 그래서 풍광이 일품이다. 자동차를 타고 갔으면 뜀뛰기하듯 보았을테지만 느긋하게 걷다 보니 시원한 풍광을 눈에 마음껏 담을 수 있었다.

흑산도에서 동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영산도라는 섬이 있는데 이 영산도를 걷는 내내 바라보면서 걸었다. 영산도의 해안선이 위풍당당하게 뻗어있었다. 반대편 영산도에서 흑산도를 바라보면 어떤 모습일까?

 

 

 

* 사촌서당: 정약전이 후학을 양성하던 곳.

 

 

 

목적지였던 사리마을 유배문화공원에 도착했다. 이틀전인 13일에 한 번 왔으니, 두번째 방문이다. 흑산도의 남쪽에 위치한 사리마을은 손암 정약전의 유배지였다. <자산어보>로 유명한 정약전 선생은 정약용 선생의 둘째형이다.

정약용과 마찬가지고 정약전도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귀향살이를 떠나게 된다. 처음에는 완도 본섬 바로 옆에 있는 신지도로 유배된다. 이 신지도는 명사십리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지금은 완도 본섬은 신지대교로, 북쪽의 고금도와는 장보고대교로 연결되어 있다.

이후 정약전은 황사형 백서 사건에 연류가 됐고, 그것 때문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는다. 정약용도 마찬가지였다. 정약용의 첫번째 유배지는 전라도 강진이 아니라 경상도 포항 장기였다. 정약용도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강진으로 이배된 것이다.

이후 각자의 유배지로 떠나게 됐는데 전라도 나주까지는 함께 동행을 했다. 나주 율현골에서 형은 흑산도 인근 우이도로, 동생은 강진으로 각자의 길을 떠나게 된다. 그것이 그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1816년 손암 정약전은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자산어보>가 1814년에 집필됐으니 딱 2년 후에 일이다.

잠깐! 흑산도가 아니라 우이도라는 지명이 나왔다. 우이도는 흑산도에서 서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행정구역상 현재 신안군 도초면 소속되어 있다. 흑산도보다 육지쪽에 훨씬 더 가까운 곳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정약전은 흑산도와 우이도를 오가며 유배생활을 했다. 물론 흑산도에서 생활한 기간이 더 길다. 우이도에서 유배 초반기를 보내다 1806년경 흑산도 사리마을로 옮기게 된다. 그러다 1815년 우이도로 다시 옮겨갔고, 그곳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 사리항: 작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다.

 

 

사리 마을은 흑산도 중심지에서 남쪽으로 약 10km정도 떨어져 있다. 사리마을은 일주도로의 남쪽 기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일주도로가 만들어지기까지 무려 25년이 걸렸다고 한다. 왜? 흑산도의 지형이 너무 험준하니까!

현재 사리마을은 유배문화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 유배문화공원의 핵심은 사촌서당이다. 사촌서당은 복성재라고도 불렸는데 정약전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었다. 초가를 올려 복원을 해 놓았다.

유배문화공원을 찬찬히 걸으며 사리마을 일대를 둘러보았다. 돌담길이 정겹게 느껴진다. 날카롭게 서 있는 내 마음속의 철조망을 정겨운 돌담길에 잠시 내려놓았다. 돌담길이 망므도 정화시켜주네!

유배문화공원에서 나와 항구쪽으로 이동하다보면 황금색의 정약전 선생의 동상이 서있다. 좀 쌩뚱맞은 곳에 위치해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손암 선생 동상 하나 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나? 손암 선생이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유배생활에서 오는 참담함을 선생은 저 바다를 바라보면서 날려버렸을까? 바다는 말없이 철썩이고 있었다.

 

 


 

 

* 상라산전망대 트레킹

* 세부코스: 흑산면사무소 -> 반달봉(칠락산) -> 상라산(전망대) -> 12굽이길 -> 무심사지

* 길이: 약 6km

* 소요시간: 약 3시간 정도 -> 볼거리가 많으니 천천히 둘러보자

* 난이도: 중

* 교통편: 목포여객선터미널에서 흑산도행 쾌속선을 탄다. 소요시간은 약 2시간. ​

* 참고: 흑산도행 쾌속선은 박스형태라 운항중에 선실 밖으로 나갈 수 없음. 그래서 멀미에 취약할 수밖에 없음. 배멀미가 심한 사람은 미리 약을 복욕하시는게 좋음.

 

 

 

 

달맞이 하러 가자! 월류봉으로 달보러 가자!

<영동여행> 월류봉둘레길 따라가는 길, 월류봉에서 반야사까지

 

충북 영동하면 무엇이 생각나시나? 이웃 옥천과 더불어 포도 생산지로 유명하다보니 와인의 고장으로 영동을 떠올리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미감을 자극하는 와인처럼 영동에는 우리의 시각을 자극하는 아름다운 풍광들도 정말 많다. 백두대간이 영동을 통과하기에 그런 풍광들이 펼쳐지는 것이다.

영동에서 가장 유명한 백두대간의 지명이 추풍령(秋風嶺 )과 민주지산(珉周之山)인데 그 둘의 고도차가 무려 1000미터에 달한다. 추풍령이 221미터이고, 민주지산이 1,241미터이다. 정말 흥미로운 대목이다. 참고로 추풍령은 민주지산에서 북동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백두대간중에서 가장 고도가 낮은 지점으로 불린다.

이런 영동에서도 가장 으뜸인 곳을 꼽으라면 월류봉(月留峰)이 가장 먼저 꼽힐 것이다. 월류봉은 달이 머물다 갈 정도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는 곳이다. 그래서 많은 풍유객들이 음풍농월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깎아질 듯한 바위산 아래로 금강의 상류인 초강천이 힘차게 흐르고 있고, 그 위에 그림처럼 월류정이 자리잡고 있으니 당연히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 월류봉

 

 

 

월류봉은 해발 400미터로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지만 굽이굽이 흐르는 초강천과 이웃한 석천이 어우러져 빼어난 산수(山水)의 조화를 뽐내는 곳이다. 월류봉은 영동군 황간면에 위치해있는데 여기서 황간이 어떤 곳인지 잠시 알아보자.

지금은 '면'이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황간은 황간현이었다. 그래서 지방관으로 현감이 파견되었는데 지금의 추풍령면과 황간면 등이 황간현의 영역이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황간현과 영동현이 합쳐져서 영동군이 된다.

월류봉에서 동남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황간역에서 내려 트레킹을 시작했다. 황간역은 작은 간이역이다. 하지만 황간역은 경부선이 개통할 때부터 만들어진 역이었다. 지금은 간이역으로 소박하게 변했지만 무려 백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역사인 것이다.

영동군은 일찍부터 경부선 철도가 들어서고, 경부고속도로가 통과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영남을 잇는 추풍령의 존재자체가 영동군의 지리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지역에 철도와 도로가 놓이니 예전부터 인공적으로 교각들이 세워진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이렇다. 산이 깊은 만큼 물도 많이 흐르고, 그러다보니 굴다리같은 형태의 다리 시설물이 많이 건설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굴다리는 비상시에 대피소 역할을 해준다. 피난길을 떠난 이들에게 잠시나마 쉼터 역할을 해준다.

 

 

* 쌍굴다리: 월류봉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다.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1950년 7월 26일경,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 있는 쌍굴다리에도 그렇게 피난민들이 모여들었었다. 여기서 노근리 사건에 대해서 알아보자. 한국전쟁 발발 이후 약 1달이 지났을 때였다. 피난민들은 고단한 발걸음으로 남쪽으로 이동해갔다. 그렇게 추풍령을 넘으면 영남이었다. 당시는 여름이라 비를 피하거나 햇빛을 막기위해 쌍굴다리로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그 쌍굴다리 위로는 지금도 경부선 기차가 달리고 있다. 참고로 노근리 쌍굴다리는 1934년에 건설되었다.

그런 피난민들에게 공중에서는 폭탄이 떨어지고, 땅에서는 기관총이 난사된다. 7월 26~29일까지, 3일에 걸쳐서 벌어진 노근리 학살로 인해 무고한 피난민 250~300명이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미군에 의해 벌어진 노근리 학살이다.

이 노근리 사건은 월간 <말>지 기자였던 오연호가 10년에 걸쳐 심층적으로 보도를 했었다. 하지만 국내외 언론들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다 1999년 9월 30일, 미국 AP통신에 의해 노근리 사건이 특종으로 보도되었다. 이때부터 노근리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큰 관심을 받게 된다. 이후 2001년 1월 12일에는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클린턴이 유감을 표하게 된다. 기왕 언론을 타려면 외신을 타야 되는 것인가? 오연호는 현재 <오마이뉴스>의 대표로 있다.

학살이 있었던 쌍굴다리 앞쪽으로는 현재 노근리평화공원이 있다. 시간이 되신다면 노근리평화공원과 쌍굴다리를 탐방해보시는 것도 좋을 듯싶다. 평화공원에서 북동쪽으로 뾰족하게 보이는 봉우리가 바로 월류봉이다.

 

 

 

* 쌍굴다리: 아직도 현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월류봉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나라 산악지대를 감싸고 있는 하천들이 다 그렇듯 월류봉을 감싸고 도는 초강천도 감입곡류의 형태를 띄고 있다. 감입곡류천은 말그대로 하천이 굽이굽이 감싸고 돌아나간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천이 지형을 감아돌아 나가니 특이한 지형도 형성되는 것이다. 강원도 영월의 한반도 지형과 충북 옥천의 역한반도 지형이 바로 그것이다.

월류봉 중턱 아래쪽에 월류정이 있는데 그 월류정에서 감입곡류 형태를 명징하게 확인할 수 있다. 한반도 지형이나 역한반도 지형은 좀 떨어진 위쪽 전망대에서 관망하는 방면에 월류정은 근거리에서 관찰한다는 차이가 있다. 월류정은 가까이에서 바라보니 직접 물소리를 들을 수도 있어서 청각적으로도 만점이었다.

이렇게 빼어난 산수를 자랑하니 예로부터 이 일대를 한천팔경(寒泉八景)이라고 칭했다. 한천팔경은 제 1경 월류봉을 위시하여 사군봉(使君峯)·산양벽(山羊壁)·용연동(龍淵洞)·냉천정(冷泉亭)·화헌악(花獻岳)·청학굴(靑鶴窟)·법존암(法尊巖)으로 이루어져 있다. 월류봉의 여러 모습들을 다른 명칭으로 부른 것이 대부분이다.

 

 

 

* 월류봉

 

 

 

월류봉은 서인의 거두이자, 인조부터 숙종 때까지 정계에 큰 영향력을 끼친 송시열과도 관계 깊은 곳이다. 우암 송시열은 작은 정사를 짓고 후학을 양성했는데 그곳이 바로 한천정사(寒泉精舍)라는 곳이다. 한천팔경이 바로 한천정사에서 나온 명칭이다. 원래는 냉천팔경이었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과 관련되서 가장 유명한 유적지는 충북 괴산에 있는 화양구곡이지만 한천정사도 사료적 가치가 꽤 높은 곳이다. 원래 이곳에는 송시열을 기리는 한천서원이 들어서있었다. 그러다 서원철폐령에 의해 서원이 철폐되었고, 이후 이 지역 선비들이 한천정사를 지어 송시열의 학문을 이어나갔다. 지금도 송우암 유허 비석과 함께 한천정사가 보존되어 있다.

이제 월류봉을 뒤로 하고 초강천의 지류인 석천(石川) 을 따라 반야사 방면으로 이동한다. 석천은 백화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가는데 그 상류에 반야사가 있다. 그 석천을 따라 월류봉 둘레길이 2021년에 개통된다. 석천은 한자명처럼 돌이 많은 하천인데 기암괴석들을 바라보며 걷는 맛이 있다.

경쾌한 물소리를 들으며 약 8km를 이동하다보니 어느새 둘레길의 종점 부근이다. 이제 마지막 탐방지인 반야사(般若寺)를 둘러볼 차례다. 반야사는 상원화상이 후기 신라시대인 720년(성덕왕19)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그보다 약 50년 정도 앞선 문무왕 시절에 원효가 창건했다는 설도 있다. 상원은 의상대사의 십대 제자들 중에 한 명이다.

 

 

 

* 월류봉둘레길

 

 

 

* 월류봉둘레길

 

 

 

반야사는 조선 전기였던 세조 시대에 크게 중창된다. 피부병 때문에 고생을 하던 세조는 속리산에서 있던 신미대사를 만나러갔고, 이후 신미대사와 함께 반야사와 대웅전에서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속리산이 있는 충북 보은과 영동은 그리 멀지 않다.

신미대사는 세조가 깊이 신뢰하는 인물이었다. 세종대왕과도 인연이 깊었다. 그런 신미대사가 속리산 중턱에 있는 복천암에서 머무르고 있었고 세조가 그곳까지 찾아간 것이다. 속리산 복천암에서 세조는 3일 동안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런 기도가 통했던 것일까? 세조가 약사여래의 명을 받은 월광태자의 도움으로 피부병이 나았다고 한다. 그런 기적이 행해진 곳이 바로 속리산 목욕소이다.

반야사에 들어서면 호랑이 형상을 하고 있는 돌무더지가 탐방객들의 눈길을 끈다. 돌무더지가 있는 곳은 바로 백화산인데 다른 곳은 다 풀숲으로 덮혀있지만 딱 그곳만 돌무더지로 노출되어 있다. 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상상력을 동원한 것이다. 호랑이 형상이라고.

 

 

 

 

 

* 반야사삼층석탑: 고려전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탑으로 200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뒤쪽에 미끈한 배롱나무가 보인다.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곳이라 그런지 영동군은 호랑이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다. 월류봉에서 가까운 황간면 소계리 성주골에는 호총이라 불리는 호랑이 무덤이 있고, 바로 옆동네인 매곡면 노천리 내동마을에는 호랑이 공덕비가 있다. 반야사의 호랑이 돌무더지도 이런 친호랑이(?)적인 동네의 분위기와 맥이 닿아있다고 할 수 있다.

경내에 들어서면 속살을 드러내듯 미끈한 모습의 배롱나무가 보인다. 나무를 잘 탄다는 원숭이도 배롱나무에서는 떨어진다는데 그 말이 맞는 듯싶다. 아주 매끈하다. 배롱나무 아래에 있는 삼층석탑은 인근에 있는 탑벌이라는 곳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반야사 삼층석탑은 일부분이 새로 채워지기는 했지만 고려전기시대의 탑 형식을 잘 나타내고 있어 2003년에 보물로 지정됐다.

이제 마지막으로 반야사 문수전을 보러가자. 망경대(望景臺)라고 불리는 곳에 문수전이 있는데 약 10분 정도 올라가야 한다. 계단이 좀 많기는 하지만 올라갈만 하다. 드디어 문수전에 닿았다. 올라온 보람이 있다. 백화산 호랑이 돌무지는 더 잘 보였고, 석천은 물줄기를 뿜으며 굽이굽이 흐르고 있었다.

 

 

 

* 백화산 돌무지: 저 돌무지가 호랑이로 연상되시나? 호랑이 형상이 가장 명징하게 드러날 때는 눈이 온 뒤라고 한다. 아쉽게도 방문했을 때 눈이 오지 않았다.

 

 

 

문수전 아래쪽의 석천을 따로 영천(靈泉)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서 설화가 있다. 반야사 대웅전에서 참배를 마친 세조에게 문수보살이 나타난다. 문수보살은 절 위쪽에 있는 계곡으로 가서 몸을 씻으라고 한 후, '왕의 불심이 깊어 부처님의 자비가 따른다"라는 말과 함께 사라진다. 이에 흡족한 세조는 어필을 하사한다.

석천도 월류봉 아래 초강천처럼 감입곡류 하천이다. 그래서 휘돌아가는 부분은 물줄기의 속도가 약해진다. 그 구간에 속리산 목욕소만한 공간이 있다. 그곳이 바로 영천이다.

왕이 씻은 곳이니 왕탕인가? 그냥 선녀탕이 더 좋은 거 같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가지 짚고 넘어가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세조는 속리산 목욕소에서 월광태자를 만나는 기적을 맞이한다. 이후 반야사에서는 문수보살도 만난다. 문수보살은 강원도 평창군에 있는 오대산에서도 또 만난다. 한 번 만나기도 힘든 인물들을 여러번 만나는 것이다. 마치 한 번 맞기도 힘든 로또를 여러번 맞은 것이다.

왜 그렇게 세조와 관련된 설화들이 많을까? 덕업이 많았던 세종께서 설화와 연결이 되시던가? 정조께서는 어떤가? 세조는 불교의 신앙적 대상들을 끌어들여 자신의 도덕적인 흠결을 메꾸려고 했던 거 같다. 참고로 약사여래는 병을 치유하는 부처님이고,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월광태자는 대가야의 마자막 왕으로 나라가 망한 뒤 월광사를 지어 그곳에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 석천: 반야사 문수전에서 바라본 석천. 저 아래에도 둘레길이 있다. 저 길을 따라가면 경북 상주시 모동면이 나온다.

 

 

 

불교에서 '반야'는 '인간이 진실한 생명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근원적인 지혜'를 뜻한다. 문수보살은 보살중에서 지혜를 수호한다.

불교 설화로 자신의 흠결을 덮을 수는 없다. 세조도 질병으로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 또 그렇게 어렵게 오른 용상에서 불과 13년 만에 내려오지 않았던가. 같이 묶어서 생각하는게 적절할지 모르겠으나 연산군이 12년, 광해군이 15년동안 보위에 있었으니 생각보다는 재위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던 것이다.

덕업은 쌓지 못하더라도 악업은 쌓지 말자! 요즘 필자가 곱씹고 있는 말이다. 나름 실천할 수 있는 '반야'같은 '지혜'로운 말이라고 생각한다. 아참 계속 곱씹고 있는 말이 또 있다.

- 세상은 넓고 트레킹할 곳은 많다!

 

 


 

 

* 세부코스: 월류봉 -> 한천정사 -> 원촌교 -> 목교 -> 반야교 -> 반야사

* 길이: 약 8km

* 소요시간: 약 3시간 30분 정도

* 난이도: 하

* 교통편: 황간역은 작은 간이역이라 기차 편수가 많지 않음. 황간역에서 월류봉까지는 약 2km 정도 떨어져 있음. 영동역은 좀 더 큰 역이라 기차 편수가 많음. 영동역에서 하차한 후 공영버스를 타고 황간역 부근으로 이동할 수 있음. 이때 중간에 노근리평화공원에서 하차할 수 있음. 영동역에서 노근리평화공원까지 약 25분 정도 소요됨.

* 참고: 월류봉에서 반야사까지는 약 8km 정도임. 문제는 반야사에 공영버스가 다니지 않는다는 점임. 콜택시를 부르거나 왔던 길을 되돌아와야 함. 필자는 왔던길을 되돌아왔음. 그날 약 20km를 걸었음.

 

 

 

 

 

* 남산탑곡마애불상군: 바위의 동쪽편이다. 사진 왼쪽에 삼층석탑이 보인다.

 

 

 

<경주> 득템한 느낌이야! 이런 사진을 찍다니!

- 계림숲부터 남산 마애불까지 걷고, 찍고

 

 

* 2022년 12월에 경주를 다녀왔습니다. 그중 12월 21일에 행한 경주 여행을 약식으로 스케치한 기행문입니다.

이번 경주 여행의 중심축은 황리단길과 첨성대였다. 아침에 황리단과 첨성대를 보고 출근(?)했다 저녁에 다시 황리단과 첨성대를 찍고 퇴근(?)하는 식이었다. 그러고보니 황리단길만 거의 왕복 4회 정도 한 거 같다. 누가보면 경주 시민인 줄 알겠다.

이날은 경주여행의 마지막날로 계림숲을 시작으로 월정교를 넘어 경주 남산 일대를 탐방지로 삼았다. 구체적인 코스는 이렇다.

계림숲 -> 경주향교 -> 월정교 -> 상서장 ->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 -> 남산탑곡마애불상군 -> 국립경주박물관

얼핏보면 상당한 거리를 이동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계림숲, 월정교, 경주향교는 하나로 묶일만큼 서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있다. 계림숲은 신라 건국초기부터 조성된 숲으로 경주 김씨의 시조 김일지의 탄생 설화를 품고 있는 유서깊은 숲이다. 그러고보니 거의 조성된지 거의 이천년 정도된 숲이다. 그래서일까, 계림숲에 입장할 때의 느낌이 무언가 달랐다.

 

 

* 계림숲

 

 

 

* 월정교

 

 

 

월정교는 경주 중심부와 남산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남천 위에 놓여진 다리이다. 경덕왕 19년(760년)에 만들어졌는데 지금의 다리는 2009년에 복원을 한 것이다. 거대한 누각식으로 만든 월정교는 야경이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첨성대와 함께 야경투어 명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고운 최치원의 숨결이 살아있는 상서장을 탐방한 후 드디어 경주 남산에 들어섰다. 최치원은 신라말 3최라 불릴 정도로 천재적인 인물이었다. 12살에 당나라로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18살에 과거시험 합격하게 된다. 이후 29살까지 당나라에서 관직 생활을 하다 고국인 신라로 돌아오게 된다.

최치원은 6두품이었다. 금의환향을 했지만 그의 신분적 한계는 명백했다. 당시 신라는 지방 호족세력들의 발호로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때 최치원은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조를 올려 당시의 폐단을 바로 잡고자 했다. 하지만 진골 출신들의 견제로 인해 그의 의견은 묵살된다. 이후 그는 야인이 되어 세상을 등지게 된다.

그 시무 10조를 작성했던 곳이 바로 상서장이었다. 상서장의 앞쪽에는 고운대라는 바위가 있는데 최치원의 호를 따서 이름을 지은 바위다. 최치원은 고운대에 올라 왕성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 고운대: 상서장 입구 옆쪽에 있다.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과 남산탑곡마애불상군을 탐방할 차례다. 경주 남산은 불국토라고 불릴 정도로 수많은 불교 유적들을 품고 있는 곳이다.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은 큰 바위에 인공적으로 감실을 파고 그곳에 부처상을 조각을 했다. 할매부처, 감실부처라고도 불린다. 감실은 불상이나 신위 등을 모시는 공간을 말한다.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은 높이가 1미터 정도로 크지는 않지만 신라 불교의 초기 유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는 단단한 화강암이 많은 지역이라 바위에 무언가를 새기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에 비해 유럽의 조각가들은 좀 수월했을 것이다. 왜? 그 지역은 화강암보다는 좀 무른 석회암 재질이 많으니까!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을 뒤로 하고 호젓한 산길을 따라 내려갔더니 차도가 나왔다. 그 길 위에 표지판이 있었고, 그 표지를 따라 남산탑곡마애불상군을 탐방하러 갔다. 남산탑곡마애불상군은 옥룡암이라는 사찰 위쪽에 자리잡고 있다.

 

 

*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

 

 

 

* 남산탑곡마애불상군

 

 

 

'마애불상군'이라는 명칭처럼 수많은 조각들이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통상적으로 마애불은 부처님 한 분을 조각하거나 좌우 협시불을 더 조각하는게 일반적이다. 한마디로 많아야 세 분 정도를 새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탑곡마애불상군은 바위에 다양하게 새겨 넣었다. 바위를 동서남북으로 잘 활용하여 각 면마다 불교 문물을 새겨 넣은 것이다.

부처님 형상은 물론 탑과 괴수들도 보인다. 탑? 그렇다. 바위에 탑도 새겨져 있다. 9층과 7층, 두 개나 새겨져 있다. 바위에 새겨져 있으니 마애탑인 것이다. 바위에 탑을 새길 수 있냐고 물으실 수도 있는데... 바위에 종을 새긴 경우도 있다. 그건 마애종이다. 서울 관악산 옆에 삼성산이라고 있는데 그곳에 마애종이 있다. 김중업 건축박물관 인근에 있다.

바위를 동서남북으로 활용을 해서 그런지 남산탑곡마애불상군은 사면불이라고도 불린다. 삼층석탑이 있는 곳이 남쪽인데 오른쪽의 계단을 따라 올라갈 수 있다. 북쪽, 동쪽, 서쪽의 조각상들은 올려봐야 하는데 남쪽의 조각상들은 올려보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게 다른 점이다.

동서남북을 돌면서 엄청나게 사진을 많이 찍었다. 이날 아침에 눈과 비가 섞여왔는데 그 여파로 남산 일대는 물안개가 머금고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신령스러운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귀한 문화재를 보고 있는데 물안개까지 살짝 끼다니...!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 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 배낭이 대신 인증을 해주고 있다. 부처님을 모신 마애불이 있다하여 이 일대 골짜기는 '불곡'이라고 부른다.

 

 

 

* 남산탑곡마애불상군: 바위 북쪽이다. 여기에 탑이 그려져 있다. 탑이 그려진 바위가 있다하여 이 일대 골짜기는 '탑곡'이라고 불린다.

 

 

 

* 남산탑곡마애불상군: 바위의 남쪽면이다. 이 불상군 앞쪽에는 족구장만한 공간이 있고, 한쪽편에 삼층석탑이 서 있다.

 

 

 

 

 

 

 

 

 

지난 7월 18일 월요일.

 

 

서초50플러스센터 트레킹 강의를 끝으로 2022년 상반기 일정이 종료됐다.

 

매번 이렇게 한 회기가 종료될 때마다 성취감과 함께 아쉬움이 동시에 밀려온다. 강의 평가서에 기록된 외형적인 서술과는 다른 필자 스스로 느끼는 미흡함이 감돌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름이나 겨울같은 비수기일 때는 항상 자체 평가를 했었다.

 

개별적으로 행하는 일반 트레킹이야 성수기와 비수기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다. 하지만 일반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역사트레킹 강의는 성수기와 비수기가 확연히 갈린다. 당장 호우 경보가 발령됐는데 트레킹 강의를 진행할 수 있겠는가? 기온이 영하로 떨어져 동상의 염려가 있는데 계속 강의를 할 수 있겠는가?

 

기상 상황이 안 좋을 경우에는 아예 문화센터에서 강의를 취소해달라고 연락이 온다. 트레킹을 하는데 목숨을 걸고 할 필요는 없으니까. 개별적으로 행하는 일반 트레킹과 수강생들과 함께하는 역사트레킹 강의를 좀 구별해서 기술해봤다.

 

다시 본론으로... 올 상반기는 코로나와 탈코로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 느낌이었다. 올 봄에 코로나가 팬더믹에서 엔데믹(풍토병화)으로 이행이 됐을 때 강의 섭외가 꽤 있었다. 마치 '보복소비', '보복여행'처럼... 야외수업에 관심이 많은 기획자들의 연락을 많이 받았다. 매번 이렇게 강의 의뢰가 많이 들어오면 참 좋겠는데...!

 

그뿐만이 아니었다. 코로나 이전에 강의를 수강하셨던 분들도 개별적으로 연락을 주셨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강의가 무척 그리웠다고 하셨다. 그 분이 직접 저런 말씀을 하셨다. 필자가 잘난척하려고 일부러 지어낸 말이 아니다. ^^

 

 

 

 

 

 

 

 

 

 

상황이 이렇게되니 할 일이 명확해졌다. 어떻게? 코로나 이전 상황으로 루틴을 회복하는 것이다. 요일별로 강의 일정을 고정시키고, 흩어졌던 수강생분들을 다시 묶어내는 작업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 작업들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작업들은 평생 어깨에 얹고 가야한다.

 

앞서 올해는 코로나와 탈코로나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 느낌이라고 했다. 무슨 의미일까? 지난 6월 달에 <서초50플러스>에서 강의를 할 때였다. 트레킹에 목말라하신 분들이 많았는지 몇 시간도 안 되서 수강신청이 마감됐다. 보복 트레킹인가?

 

그런데 나중에 출석부를 보니 수강생 한 분이 옛날 수강생분이셨다. 반가운 마음에 개강일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 분은 개강일에 참석을 하지 못했다. 뒤늦게 코로나에 걸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코로나와 탈코로나가 혼재하는 상황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다시 코로나 환자수가 급증을 한다는데 걱정이 앞선다.

 

하지만 우리는 이겨낼 것이다. 이제까지도 잘 버텨오지 않았나!

 

다가올 가을학기 때는 정말 눈코 뜰세없이 바쁘게 지냈으면 좋겠다. 물들어 올 때 노 저으라고... 열심히 트레킹 강의를 했으면 좋겠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은 현장에서 트레킹을 직접 행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래서 당연히 야외수업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아주 간간히 실내강의를 할 때가 있다.

 

그렇게 PPT를 올려놓고 실내강의를 하다보면 꾸벅꾸벅 조시는 분들을 마주하게 된다. 일부러 예쁜 풍경 사진도 걸어놓고 목소리도 좀 크게 높이는데도 졸음을 못 이겨하시는 분들이 계셨다.

 

실내강의도 잘 하고 싶은데 그게 말처럼 싶지가 않다. 그런 수강생분들을 목격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스쳐가기도 한다.

 

'내가 그 분들의 불면증을 치료하고 있는 건가?'

 

다른 문제도 있다. 실내강의 빈도가 아주 낮다보니 PPT를 오래도록 울거먹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몇 년 전에 썼던 PPT를 업데이트 하지 않고 계속 사용했던 것이다.

 

아무리 내가 현장 트레킹에 특화됐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아니라라는 생각이들었다. 실내강의를 들으시는 수강생분들도 소중한 시간을 투자해서 그 자리에 오시기 않던가. 강사들은 수강생분들의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 그런 존중과 예의가 없는 이들은 수강생 앞에 서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대면 강의를 못 했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더 반성과 분발이 필요했다. 그래서 PPT를 비롯해서 실내강의 자료들을 많이 손을 봤다. 사진도 좀 더 좋은 걸 배치하고, 자가 진단 테스트 항목도 만들어보았다.

 

'재미로 해보는 자신의 트레킹 레벨 지수'인데 이 포스팅을 읽어보시는 분들도 간단하게 한 번 해보시면 좋을 듯하다.

 

 
1
일상생활에서도 걷기를 즐겨한다

2
트레킹화, 배낭, 스틱 같은 장비들이 있다

3
계단을 봐도 겁이 나지 않는다

4
트레킹에 대한 책들을 읽어봤다

5
우중트레킹의 매력을 알고 있다

6
나만의 트레킹 최애 장소가 있다

7
트레킹 프로그램이 있으면 무조건 신청한다

8
혼자서도 씩씩하게 둘레길을 탐방한다

9
산티아고순례길 혹은 파타고니아트레킹 같은 외국 트레일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10
다른 일정보다 트레킹 일정을 먼저 챙긴다

11
다음주는 어느 코스로 트레킹을 할지 벌써 설레인다

 

* 초급: 3개 

* 중급: 6개

 

* 고급: 9개

 

설문지를 10개로 만들기로 했는데 만들다보니 11개가 됐다. 한 번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체크해보시라.

뭐 돈 드는 것도 아닌데...ㅋ

 

이 트레킹 레벨이 자신의 건강 지수가 될 수도 있다. 트레킹을 꾸준히 하는 사람치고 건강이 나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포스팅해본다.

 

거리두기 해제, 실외마스크 착용 해제 등등...

 

이제 코로나 팬더믹에서 코로나 엔더믹(풍토병화)으로 전환이 되고 있다. 지긋지긋한 코로나 터널도 이제 끝나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중단됐던 강의들도 다시 재개되고, 새로운 강연 의뢰들도 들어오고 있다. 개인적으로 트레킹에 대한 문의를 해주시는 분들도 있을 정도다. 꽤 많은 분들이 연락을 주신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봇물이 터지는 형상이다. 그도 그럴것이 그동안 얼마나 답답하셨겠나! 근 3년 동안 발목이 잡혀 제대로 활동도 못하셨을테니까...

 

그렇게 행한 최근 강의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과천시육아종합지원센터라는 곳에서 행한 우면산 역사트레킹이었다. 우면산 일대는 꾸준히 트레킹을 해왔던 곳이라 전혀 문제가 없었지만... 의뢰 기관인 과천시육아종합지원센터라는 매우 의외였기 때문이다. 하여간 강의 의뢰를 해주셔서 감사했고, 잘 준비를 해서 무시히 강의도 잘 마쳤다.

 

또 꽤 흥미로운 트레킹 행사에도 발을 담그게 됐다. <서울트레킹>이란 행사의 리딩을 맡게 된 것이다. <서울트레킹>은 서울시 체육회에서 주관하는 행사로 2013년부터 시행됐다. 소규모로 진행하는 행사는 아니고 500명 정도 되는 인원이 함께 움직이는 대규모 행사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해당 코스에 대해서 안내를 하고 리딩을 한다.

 

남산 코스면 남산에 대해서, 북악산이면 북악산에 대해서...

 

무대 위에 올라 500명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떠들고, 또 그 500명을 이끌고 리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무거운 책임감이..! 책임감이 앞서기 보다는 아주 재미날 거 같다! 그렇다. 트레킹도 행사도 아주 재밌게 해야 한다. 물론 안전은 당연한 거고...

 

필자는 언제든 역사트레킹을 강의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많이들 연락주시길!^^

연락용 이메일은 본인의 프로필을 클릭하시면 된다.

 

ps. 5월, 7월, 9월, 11월까지 4번에 행사가 있어요. 서울트레킹 행사에 관심있는 분들! 많은 참가 부탁드립니다. 제가 열심히 리딩할게요.^^ 아래 링크를 클릭해주세요.

 

 

 

서울트레킹 둘러보기 <- 클릭

 

 

 

 

 

 

 

 

 

 

 

 

 

 

* 의성 금성산 조문국 고분군

 

 

 

 

 

 

2021년 8월 12일.

 

경북 의성군 여행은 계속됐다. 의성군은 삼한시대의 소국인 조문국(召文國)이 있던 곳이다. 조문국? 좀 생소한 이름일 것이다. 이전에 포스팅한 탑리 오층석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적지가 있어서 바로 가보았다. 탑리 오층석탑과 조문국 유적지는 같은 금성면 소재지에 있는데 자동차로 5분 정도면 닿을 수 있다. 필자는 뚜벅이라 그냥 걸어갔다.ㅋ

 

소문국이라고도 불리는 조문국은 금성면을 중심지로 삼았던 삼한시대의 소국이었다. 신라 벌휴이사금 2년( 185년)에 정복되는데 현재 조문국 왕족들의 무덤들이 금성면 일대에 군집해있다. 참고로 '이사금'은 초기 신라의 왕 칭호이다. 그 이후에 나타나는 '마립간'도 왕 칭호다.

 

조문국 왕족들의 무덤을 두고 '의성 금성산 고분군'이라고 칭한다. 이곳에는 경주에서 볼법한 큰 고분들이 16개나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고분은 높이가 8미터, 동서 길이가 40미터가 넘기도 한다. 금성산 고분군 말고도 의성 지역에는 큰 고분들이 더 있다고 하니 고대시대의 의성 지역의 위상이 어떠했는지 가늠해볼 수 있을 거 같다.

 

의성 금성산 고분군 중심에는 경덕왕릉이 있다. 신라 경덕왕? 경덕왕(景德王)은 신라시대의 제 35대(742~765) 왕으로 유교 통치체제를 강화한 인물이다. 그럼 진짜 신라 경덕왕의 능이 조문국 고분군에 있는 것인가?

 

 

 

 

 

* 의성 조문국 경덕왕릉

 

 

 

 

 

 

아니다. 신라 경덕왕의 능은 경주 남산 인근인 경주시 내남면에 위치해 있다. 신라의 왕이 굳이 경주가 아닌 의성에 묻힐 이유가 없지 않은가. 참고로 신라 경덕왕은 관제개편을 통해 당시 발호하던 귀족세력들을 억누르고 왕권강화를 행한 인물이다.

 

그럼 의성 금성산 고분군에 있는 경덕왕릉(景德王)은 누구의 능인가? 말 그대로 조문국의 경덕왕이 잠든 무덤이다. 정확히는 조문국의 경덕왕으로 추정되는 능이다. 그러고보면 조문국 경덕왕(景德王)이나 신라 경덕왕(景德王)이나 한자까지 똑같다. 그러니 헤깔리지...ㅋ

 

금성산 고분군에 있는 경덕왕릉은 왕릉치고는 무척이나 소박하다. 조선시대 권세가들의 무덤 정도로 꾸며졌다. 금성산 고분군은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걷기에 좋은 곳이다. 데이트 코스로도 많이 이용된다고 한다. 실제로 애정 표현을 과하게 하던 젊은 커플과 필자의 동선이 겹쳐져서 꽤나 애를 먹기도 했다. 어찌보면 이곳도 공동묘지인데 이런 곳에서 애정행각을 벌인다? 그러고보면 자신이 서 있는 공간도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곳이 천국도 되고 지옥도 되는 듯싶다.

 

예전 왕릉 답사를 하면서 느낀 점이 있었다. 소나무 숲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왕릉을 가면 세상의 번뇌가 싹 다 씻겨내려갔다. 그래서 한 때는 왕릉에 방점을 찍고 답사를 다닌 적이 있었다.

 

죽은자들의 공간에서 산 자들이 만끽하는 휴식과 명상. 그런 휴식과 명상은 다른 곳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 금성산 조문국 고분군

 

 

 

 

  

* 금성산 조문국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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