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목요일.

 

백패킹의 성지라고 불리는 여주 강천섬 일대를 탐방했다. 이전 포스팅에서 세종대왕릉과 신륵사를 기록했으니 경기도 여주만 이 근래에 세번째다. 그만큼 남한강을 품고 있는 여주가 아름답다는 뜻이고, 가볼 곳도 많다는 이야기이다.

 

강천섬이 우리들에게 다가온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4대강 사업이 있기 전까지 강천섬은 물이 불어나면 자취를 감췄다가 물이 빠지면 그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사실 지금도 한강 수계에 홍수가 발생하면 강천섬은 물 속에 잠길 수도 있다. 그래서 화장실 같은 시설도 침수가 예상될 시에는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이동식이다. 강천섬은 축구장 80개 정도의 넓이인데 화장살이 달랑 하나다. 그만큼 침수까지 고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뭐니뭐니해도 강천섬의 큰 매력은 수변을 보면서 한가롭게 트레킹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수변트레킹의 진수라고나 할까나... 잘 정비된 산책로, 잘 가꾸어진 나무들. 하지만 역시 아쉬운 달랑 하나 화장실...ㅋ

 

백패커들의 성지답게 평일인데도 많은 텐트들을 보았다. 필자는 유유히 그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이날 날씨가 정말 맑았는데 마치 가을하늘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진도 아주 예쁘게 잘 나왔다. 마치 사진을 득템한 느낌이었다.

 

봄날에 가을하늘을 만난 느낌이라고 할까? 언제 이런 멋진 강천섬 사진을 또 찍을 수 있겠어!

 

강천섬을 뒤로 하고 남한강을 따라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으로 향했다. 여주에서 만든 도보여행길인 여강길을 따라가면 원주시 부론면에 닿을 수 있기에 그렇게 갔는데... 간만에 야간 트레킹 좀 했다. 헤드랜턴도 안 가져갔는데 말야. 도 경계지역이라 그런가, 아주 깜깜했다. 가로등 하나가 아쉽더라.

 

뭐 별 수 있는가 트레킹하다보면 별의별 일이 다 있으니까! 그런 가변성이 트레킹의 매력 아니겠어~^^

 

 

 

ps. 강천섬은 2021년 6월부터 캠핑이 금지된다. 일부 그릇된 캠퍼들 때문에 캠핑의 성지가 날라가게 된 것이다.

 

 

 

 

 

 

 

 

 

 

 

 

 

 

 

 

 

 

 

 

 

 

 

 

 

* 신륵사 삼층석탑과 강월헌

 

 

 

 

 

 

 

 

2021년 3월 9일 화요일.

 

세종대왕릉 탐방 후기에 이어서 신륵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본다. 둘 다 같은 날 탐방을 했는데 후기는 따로 나눠서 쓴다. 보시다시피 여행을 다녀온지 한 달이 훌쩍 넘었는데 이제서야 쓴다. 이거 이렇게 게으름을 부려도 되는거야?^^

 

여주 여행을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세종대왕릉과 신륵사는 패키지로 묶인다. 그만큼 세종대왕릉과 신륵사는 여주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탐방지인 것이다. 신륵사는 세종대왕릉과 직선거리로 약 6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여강길이라는 도보여행길을 이용하여 걸어서 이동할 수 있다. 여강길은 여주시에서 만든 트레킹 코스로 여강은 남한강의 다른 이름이다.

 

신륵사(神勒寺)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연혁이 확실하지가 않아 좀 더 고증이 필요하다고 한다. 남한강변의 야트마한 언덕인 봉미산에 자리잡고 있는 신륵사는 강변 트레킹과 묶어서 진행할 수 있을 정도로 친 수변적이다. 유명한 삼층석탑과 그 옆에 있는 강월헌에서 바라보는 남한강의 모습은 정말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마음이 차분해진다고 할까. 강월헌은 나옹선사의 호를 따서 만든 정자다.

 

신륵사는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에서 탐방했던 사찰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큰 사찰이다. 대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입장료도 받는다. 3000원. 공짜로 사찰에 드나들다 돈을 내려니까 좀 머뭇거렸다. 왕릉 요금처럼 1000원으로 해주지. 더군다나 세종대왕릉은 500원이었는데...

 

 

 

 

 

 

 

 

* 신륵사 다층석탑: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신륵사가 큰 사찰이 된 건 고려 말에 활약했던 나옹선사가 이 신륵사에서 열반에 드셨기 때문이다. 나옹선사는 당대의 고승으로 지금 경기도 양주에 있는 회암사의 지주로 계셨다. 회암사에 계셨던 분이 왜 신륵사에서 숨을 거두셨을까? 당시 고려는 외적의 침략 등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비해 나옹선사의 명성 때문인지 회암사는 백성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고려 조정은 부담을 느꼈다. 회암사가 도읍지인 개성과 가까운 양주땅에 있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이에 고려 조정은 나옹선사를 멀리 밀양에 있는 사찰로 보내기로 한다. 왕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 나옹선사는 짐을 꾸려 길을 나서야했다. 고려시대에도 남한강은 조운로로써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그래서 나옹선사도 그 남한강 수계를 따라 충주로 간 후 영남지역으로 넘어가려고 했을 것이다.

 

이미 회암사를 나올 때부터 나옹선사는 병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병이 악화되어 신륵사에서 열반을 들었다. 강월루 옆에 있는 삼층석탑은 나옹선사의 다비식을 했던 곳에 세워졌다. 이 때문인지 나옹선사의 부도도는 신륵사에도 있고, 회암사지에도 있다. 참고로 회암사는 폐사됐기에 회암사지라는 명칭을 썼다.

 

조선이 건국됐고, 이후 세종대왕릉이 여주에 들어서면서 신륵사는 세종대왕릉(영릉)의 원찰이 된다. 왕실과 연관된 사찰이 되어 그런지 억불 정책하에서도 신륵사는 가람들을 보존할 수 있었다.

 

오랜 전통을 가진 사찰답게 신륵사는 아주 많은 문화재들을 보유하고 있다. 본당 앞에 있는 대리석으로 만든 다층석탑(보물225호), 남한강변에 우뚝 솟아 있는 벽돌로 만든 다층전탑(보물226호), 나옹선사 부도탑인 보제존자석종(보물228호) 등등...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마치 문화재 집산지 같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신륵사의 가장 큰 매력은 남한강이다. 경내에 앉아 남한강을 굽어보면 세상의 시름이 다 날아갈 거 같다. 사찰이 이렇게 수변과 잘 어울릴지 그 누구도 잘 몰랐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사찰은 산과 강, 그 어떤 자연하고도 서로 잘 어우러진다.

 

 

 

 

 

 

 

* 극락보전: 신륵사의 본당은 극락보전이다. 대웅전이 아니다.

 

 

 

 

 

 

 

 

* 구룡루: 구룡루에서 바라본 극락보전

 

 

 

 

 

 

 

 

 

* 보제존자석종: 나옹선사의 부도탑이다. 오른쪽으로는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이 보인다. 이 아름다운 석등은 보물231호로 지정되어 있다.

 

 

 

 

 

 

 

 

* 신륵사 다층전탑: 전탑은 벽돌을 쌓아올린 탑을 말한다. 신륵사 다층전탑은 그 형상이 온전히 남은 전탑이기에 무척이나 소중한 문화재이다.

 

 

 

 

 

 

 

 

* 신륵사 삼층석탑과 다층전탑: 한 플레임으로 찍으려고 아주 용을 썼다. 너럭바위에 누워서 찍었는디... 누가 그 모습을 봤으면 바위에서 뒹굴거린다고...ㅋ

 

 

 

 

 

 

 

 

 

 

 

 

* 금선사: 본당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기암괴석. 늦게 핀 벚꽃과 뒤쪽의 기암괴석이 서로 어루러져 장관을 이룬다.

 

 

 

 

 

 

4월 13일 화요일.

성북50플러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네번째 강의가 실시된 날이다. 4강 제목은 '탕춘대성 역사트레킹'이다. 탕춘대성? 탕수육을 잘하는 중국집 이름이 아니니 오해 마시라!^^

 

강의 시작 전부터 조금 김이 빠졌었다. 수강생 중, 네 분이나 불참을 한다고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다. 강의를 진행하다보면 결석자도 생기고, 조기 퇴근자도 생기기 마련이다. 당연한 거다. 그런데 예전 20명 이상 참가를 했을 때는 서너명이 빠졌어도 그렇게 큰 티가 나지 않았었다. 그때는 은근슬쩍 결석자가 나오기를 바라기도 했었다. 집중력 있게 트레킹을 하려면 20명보다는 15~16명 정도가 더 나았으니까.

 

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총 수강생이 9명 밖에 되지 않으니 이번에는 티가 확 났다. 9명도 적은 인원인데 그 중에서 4명이 빠지니 확 줄어든 모양새였다. 다음에도 강의를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만약에 다시 50플러스에서 강의를 할 수 있다면 그때는 15명 정원을 꼭 채워서 행하고 싶다. 50플러스 강의의 장점은 들썩들썩이다. 문화센터나 마이리얼트립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들썩들썩함이 50플러스 강의의 매력인 것이다.

 

탕춘대성 역사트레킹은 홍제천에서 시작하는데 이동 순서는 이렇다.

홍지문(오간수문) -> 홍제천 -> 보도각백불 -> 북한산자락길 -> 탕춘대성 암문 -> 금선사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해주는 익성, 즉 날개성이다. 약 4km에 달하는데 서울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성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인근에 연산군이 노닐었던 탕춘대라는 곳의 이름을 따서 탕춘대성이라는 네이밍을 한 것이다. 홍지문은 그 탕춘대성의 문루였고 오간수문은 홍제천 물을 흐르게 하기 위해 세워진 수문이었다.

 

홍지문과 오간수문을 나온 트레킹팀은 홍제천을 따라 걷다가 흰색 옷을 입은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일명 보도각 백불이라고 불리는 마애불을 탐방하는 것이다. 고려시대 전기에 제작된 보도각 백불은 채색이 된 마애불이다. 이런 채색이 된 마애불은 쉽게 뵐 수가 없다. 그래서 합장을 하고 기원을 올렸다. 시주쌀 한 톨도 올리지 않았으면서 기원은 아주 구체적으로 올렸다. 그런데 기원이 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보도각 백불의 영험함을 몸소 체험한 것이다.

 

"여러분 무슨 기원을 올리셨습니까? 저는 기원이 바로 이루어졌습니다! 정말 용합니다. 보도각 백불!"

"아니 도대체 무슨 기도를 올렸기에... 혹시 로또?"

"아니요. 화장실이요. 전에 왔을 때는 화장실이 없어서 탐방할 때 항상 고민이었는데 바로 저기에 공공 화장실이 생겼어요! 정말 용해요!"

 

 

 

 

 

 

 

 

* 보도각백불: 인증샷. 보도각 백불께서 내 기원을 들어주셨다!

 

 

 

 

 

 

 

보도각 백불을 탐방한 후에는 북한산 자락길을 따라 이동을 하는데 이 길은 걷기에는 좋지만 딱 하나 아쉬운 것이 있었다. 화장실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여성 참가자가 많은 역사트레킹 프로그램 특성상 항상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오죽했으면 화장실 문제로 이 코스를 뒷전으로 미뤄둘 생각까지 했으니... 참고로 북한산 자락길은 유명한 북한산 둘레길과는 다른 길이다. 북한산 자락길은 서대문구에서 만든 길이다.

 

하여간 나의 기원은 이루어졌고, 탕춘대성 역사트레킹을 이제 무리없이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역시 기원은 언젠가는 이루어진다! 아자아자~

 

정조의 아들 순조와 관련된 설화가 있는 금선사 탐방으로 트레킹은 이어졌다. 전날 비가 많이 와서 금선사 계곡에는 물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는데 보기만 해도 시원했다. 그런 시원시원한 모습을 수강생분들도 만족해하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하여 탕춘대성 역사트레킹은 무사히 종료가 되었다. 탕춘대성 역사트레킹을 행하고 와서 그랬던 걸까? 은근히 짜장면이 땡기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맛있게 짜장면을 묵었다. 트레킹 후에 먹는 음식이 얼마나 맛나던가!^^

 

 

 

 

 

 

 

 

* 홍지문과 오간수문: 각도상 수문 세 개만 나왔다.

 

 

 

 

 

 

 

 

*탕춘대성: 좀 방치됐다. 복원 작업이 필요해보인다.

 

 

 

 

 

 

 

 

 

 

 

 

 

* 봉국사: 쌍탑이었으나 지금처럼 자리를 옮겼다.

 

 

 

 

 

 

4월 6일 화요일.

성북50플러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세번째 강의가 실시된 날이다. 3강 제목은 '산사가는 길 역사트레킹'이다. 제목만큼 산 길이 매력적인 곳이다. 산사가는 길 역사트레킹은 북악산 일대에서 진행된다. 정확히는 북악산의 북동쪽에서 북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동 순서는 아래와 같다.

정릉천 -> 봉국사 -> 북악스카이웨이 -> 산사길(숲길) -> 전망대 -> 국민대앞

트레킹팀이 가장 먼저 탐방한 곳은 정릉천이다. 트레킹팀이 걷는 구간은 비교적 상류 구간이라 수질이 깨끗하다. 천변을 걸어도 많은 물을 보고 걸어야 제맛이다. 1년 만에 다시 와서 그런가 그동안 천변 보행로가 많이 정비되었더라.

 

1년 만에 다시 찾은 봉국사도 변화가 있었다. 본당 앞에 있던 쌍탑 중에 하나가 자리를 이동했기 때문이다. 그 쌍탑을 보면서 예전에 이렇게 해설을 했었다.

 

"봉국사는 정릉의 원찰이지요. 보시다시피 본당 앞에 쌍탑이 있습니다. 이런 방식을 일당 쌍탑 가람이라고 하는데 서울에 있는 주요 사찰 중에 이런 방식을 쉽게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일당 쌍탑이라는 건, 사찰의 주 건물 앞에 두 개의 탑이 있다는 뜻이다. 통상적으로 일당 일탑 형식이 많은데 봉국사는 일당 쌍탑이라는 것이다. 한편 봉국사는 정릉의 원찰인데, 원찰은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은 사찰을 말한다.

 

​다시 쌍탑이야기. 예전에 있던 봉국사의 쌍탑 중 하나가 자리를 옮겼던 것이다. 그럼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종무소에 문의를 해봤더니 지반이 약해서 탑을 옮겼다고 한다. 탑 아래에 건물이 들어서 있는데 붕괴 위험이 있어 탑을 이건했다는 것이다. 봉국사도 나름 산 위에 있는 사찰이라 그런지 건물이 층층으로 지어져서 그랬다. 서울에서 쌍탑 가람을 보기가 힘든데... 좀 아쉬웠다.

 

이제 본격적으로 트레킹이 시작된다. 북악산 북사면 길은 숲길도 좋고, 인파도 드물어 걷기에 제격이다. 북악산 성곽길과는 다른 맛이 난다. 사실 계단이 많은 성곽길보다 이 숲길이 더 좋다. 성곽길 계단만 생각하면...^^

 

미세먼지가 짙게 끼어 좀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주 즐겁게 트레킹을 했다. 봄이 주는 계절감을 제대로 만끽한 트레킹이었다. 트레킹팀도 북악산 숲길에 만족하시는 분위기였다. 그렇지, 트레킹은 숲길이지!

 

 

 

 

 

 

* 봉국사: 사천왕문 앞에서 한 컷. 봉국사는 사천왕문과 종루가 함께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

 

 

 

 

 

 

 

* 천변풍경: 도시학자인 김란기 선생이 주인장으로 있는 천변풍경 카페. 이번에도 그냥 지나쳤음. 언젠가는 꼭 들러서 차 한 잔을 들이킬 생각임.

 

 

 

 

 

 

 

 

 

 

 

* 문인석

 

 

 

 

역사트레킹을 행하다보면 무덤도 많이 탐방한다. 왕이 모셔진 왕릉, 세자 혹은 세자빈이 잠들어 있는 원, 사적으로 지정된 사대부들의 묘.

 

그런 무덤들은 후손들이 부지런해서인지 아니면 사료적 가치가 뛰어나서인지 아무튼 잘 관리되어 있다. 왕릉의 숲길은 어떤가? 왕릉이 아니라 숲길을 걸으려고 일부러 티켓팅을 할 정도다.

 

4월 19일 월요일. 내시묘역이라 불리는 초안산을 탐방했다. 서대문 안산 말고 강북에 있는 초안산. 이곳은 궁인들과 상민들의 묘가 무려 천 여기에 달했다. 지형이 야트막하고 도성에서 가깝기에 그랬던 것이다. 초안산의 묘들은 서남쪽 방면으로 향한 것들이 많은데 아무래도 그 방향에 궁궐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런 듯하다.

궁인들은 죽어서도 궁궐을 향해 마음을 두고 있나보다.

 

후손이 없는 주인을 잃은 묘라서 그런가? 초안산의 분묘들은 훼손되고 방치됐다. 이런 모습들은 또다른 내시묘역이라고도 불리는 이말산 일대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이말산은 북한산 서쪽편의 작은산으로 무덤을 쓰기에 적당한 곳이다.

 

초안산 곳곳에 파손된 석물들이 방치되어 있다. 특히 목이 잘린 문인상을 여럿 목격했다. 어떤 것은 무언가로 내리친 것처럼 절단면이 비교적 예리하게 잘려있었다. 진짜 누군가 일부러 손상을 시켰다면 그건 명백한 범죄 행위다. 현행법으로 문화관리법 위반이다. 저승법으로는 천벌을 받을지 모른다.

 

차라리 집에 가져가지 왜 자르나!

 

앞서 언급한 이말산에도 버려지고 훼손된 석물들이 아주 많다. 그곳에도 예리하게 절단된 석물들이 꽤 많이 목격된다. 특히 문인석과 동자석의 훼손이 심했다. 도대체 목을 왜 자르나? 그것을 보니 갑자기 목잘린 단군상이 생각나더라.

 

 

 

 

 

 

* 석물: 상석, 비좌, 문인석. 얼핏봐도 오른쪽 문인석의 목 부분이 이상해보인다.

 

 

 

 

 

 

* 문인석: 왼쪽 문인석인데 어깨 부분이 실리콘으로 발라졌다. 실리콘을 바른 위쪽으로 잘려 나간 파편들이 보인다.

 

 

 

 

 

 

필자가 오버하며 생각한다고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떤 무덤가를 가보니 명확해졌다. 그 무덤에는 상석, 비석, 문인석 한쌍이 있었다. 문인석 한 쌍은 둘 다 머리가 잘렸는데 나중에 실리콘으로 발랐는지 목 부분이 지저분하게 접착되어 있었다.

 

그래서 상석과 비석 부분을 살펴보았다. 문인석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상석과 비석은 방치된 거 말고는 딱히 눈에 띄는 훼손은 없었다. 정확히는 비석은 비좌, 즉 받침대만 있었다. 하지만 그 비좌는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참고로 상석은 상돌이라고도 불리는데 네모나게 생긴 상이다. 돌로 만든 제사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문인석의 목 뒷부분을 살펴봤는데 무엇에 찢겨 나간 듯 큰 파편 조각이 잘려나갔다. 약하다는 석회암도 그렇게는 안 잘려나가겠다. 화강암으로 만든 동자석이 그렇게 약하다고 할 수 있나. 타인 무덤의 석물을 함부러 건들이지 마라. 그 석물들은 망자에게 속한 것들이니까...

 

버려진 무덤가를 탐방하다 보면 죽음에 대해서 곱씹어 보게 된다. 왕릉처럼 잘 관리되어 후세에게도 자주 회자되는 무덤들이 있는가 하면 죽어서까지도 버려지고 잊혀진 묘들도 있다.

 

평소 문인석을 듬직해 해서 그런가 목 잘린 문인석을 바라보고 있으니 정말 씁쓸하다. 하지만 어떤 문인석은 봉분이 다 사라져 자신의 임무도 끝났지만 아직까지도 꿋꿋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새로운 임무까지 부여받은 듯싶었다. 누군가가 복을 빌며 복 쌀알을 올려놨으니까. 그 문인석 얼굴을 보니 아주 해맑은게 복스러운 얼굴이었다. 누구라도 그 앞에서 서면 미소를 지을 것이다. 그 문인석의 새로운 임무처럼 세상의 복밭에 결실이 많이많이 맺었으면 좋겠다.

 

 

 

 

 

 

 

 

* 초안산 숲길

 

 

 

 

 

 

 

 

* 문인석: 목이 잘렸다. 내 무덤의 문인석도 아닌데... 마음이 아프다.

 

 

 

 

 

 

 

 

 

 

 

* 문인석: 후더분한 표정이 마음에 드는 문인석.

 

 

 

 

 

 

 

 

 

* 문인석: 복 쌀알이 올려져 있다. 세상의 복밭에 좋은 결실이 많이 맺어졌으면...

 

 

 

 

 

 

 

 

 

 

 

* 문인석: 이스턴섬의 모아이 석상 부럽지 않은 문인석들. 초안산 비석골 근린공원에 전시되어 있다.

 

 

 

 

 

 

 

 

 

 

 

 

 

3월 30일 화요일.

 

성북50플러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두번째 강의가 실시된 날이다. 2강은 서대문 안산 일대를 탐방했다. 이동 순서는 아래와 같다.

 

서대문형무소 -> 안산자락길 -> 전망대 -> 능안정 -> 봉원사 -> 메타세쿼이아숲길 -> 연희숲속무대 -> 홍제폭포

 

서대문 안산 일대는 역사트레킹의 단골 메뉴 같은 곳이다. 진짜 여러번 탐방을 했다. 강의에 참여하신 분들도 필자를 따라서 이미 발걸음을 여러번 하신 분들도 있을 정도였다. 무슨 말이냐? 본 성북50플러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강의에는 필자를 따라서 강의를 신청하신 분들이 반 이상이다. 그럼 필자는 팬덤을 이끌고 다니는건가?^^

 

그렇게 눈 감고 갈 수 있는 서대문 안산이라 새로울 게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시건방이었다. 천년 고찰 봉원사에서는 '불우리' 혹은 '노주석'이라고도 불리는 정료대를 보았고, 메타세쿼이아 숲에서는 연두빛의 파릇파릇한 새순을 보았다.

 

그리고 트레킹팀을 감탄하게 만든 연희숲속무대의 벚꽃길! 통상적으로 4월 초순에 피는 벚꽃이라 3월 하순에 갔으니 그저 맛만 보겠구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올해는 벚꽃이 일찍 펴서 이날 연희숲속무대는 온통 다 꽃 천지였다. 쉽게 볼 수 없다는 능수벚꽃까지 만개를 했으니 정말 환상적이었다.

 

안산을 너무 잘 알아서 그랬나? 중간에 시건방을 떨어 매끄럽지 않은 일이 발생했는데 연희숲속무대에서 꽃을 보며 다 털어버렸다. 트레킹팀들 모두 다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휴~ 다행이었어!^^

 

잘 아는 길이라고 시건방을 떨지 말자. 매너리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아직 부족함이 많지 않은가? 아직까지 갈 길이 아주 멀구나!

 

ps. 1강 후기는 성북50에 동영상으로 올려져 있어 따로 작성하지 않았음. 2강부터 계속 작성할 예정임.

 

 

 

 

 

 

 

 

* 정료대: 불우리, 노주석이라고도 불린다. 서울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석물인데 봉원사에 있더라. 여기서 잠깐! 서울 강남에 있는 봉은사가 아니다. 봉원사다. 

 

 

 

 

 

 

 

 

 

 

* 세종대왕릉

 

 

 

 

 

 

 

2021년 3월 9일 화요일.

 

이날은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과 신륵사를 탐방했다. 한 달도 더 넘은 여행기를 이제서야 작성한다. 너무 게을렀어...ㅋ

 

여주는 세종대왕께서 먹여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곳곳에 세종대왕의 이름을 끌어와 네이밍을 했더라. 세종여주병원, 세종도서관... 하물며 훈민정음 한글교회라는 곳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피식하며 생각이 들더라.

 

"이 도시는 아직도 세종대왕께서 통치하고 있는 게 아닐까?"

 

세종대왕께서 잠들어 계시는 영릉(英陵)은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1446년 세종의 부인이었던 소헌왕후가 숨을 거두자 헌릉 서쪽편에 능을 마련한다. 헌릉은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이 묻힌 곳인데 강남구와 서초구에 걸쳐 있는 대모산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효자였던 세종은 아버지와 가까운 곳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래서 소헌왕후의 능에 자신의 수릉(壽陵)을 마련한다. 수릉은 살아있을 때 미리 봐두는 임금의 무덤을 말한다.

 

우리 옛 풍습에는 윤달에 수릉을 미리 봐두거나 수의(壽衣)를 만들면 장수한다는 속설이 있다. 미리 무덤가를 마련하고, 죽을 때 입을 옷을 만들어놓으면 오래산다니... 윤달이 가져다주는 독특함이라고 해야 하나?ㅋ

 

세종대왕은 실제로 대모산, 즉 헌릉 서쪽편에 묻히게 된다. 최근에 크게 언론에 오르내린 서초구 내곡동이 바로 그곳이다. 소헌왕후와 합장을 했는데 조선 왕릉 중에서는 최초의 합장릉이었다. 영릉은 1450년에 들어선다. 지금은 그곳에 국가기관이 들어서 있어서 일반인들은 접근을 할 수가 없다.

 

세종대왕은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잠들어 있는 헌릉 옆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평안함은 19년 후인 1469년(예종 1년) 깨어지고 만다. 세종이 승하하고 난 후 연이어 안 좋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문종이 재위 2년 4개월 만에 숨을 거두고, 뒤를 이은 단종도 세조에 의해 사약을 받게 된다.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도 불행을 피하지는 못했다. 장남이었던 의경세자가 20살의 나이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도 잦은 병치레를 겪어야 했다.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기세등등하게 왕좌에 오른 세조였지만 재위 기간은 13년에 불과했다.

 

그렇게 흉사가 거듭되자 영릉은 예종 원년에 멀리 여주땅으로 천릉(遷陵)을 하게 된 것이다. ‘옮길천(遷)’자에서도 보듯 천릉은 이장(移葬)을 뜻한다. 천장(遷葬)이라고도 부른다. 세종대왕의 능을 옮겼지만 흉사는 멈추지를 않았다. 예종이 재위 13개월 만에 숨을 거두웠기 때문이다. 예종은 세조의 장남이었던 의경세자의 아들이었다.

 

능을 옮긴다고 불길한 일들이 없어지겠는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결국 사람의 문제다. 아무리 천하제일 명당에다 이장을 하고, 용한 무당에게 굿을 시키더라도 사람이 못 됐으면 흉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나쁜놈이 나쁘게 되는게 세상 이치 아닌가! 인생사 자업자득, 인과응보!

 

 

 

 

 

 

 

* 세종대왕상

 

 

 

 

 

 

 

여기서 다른 왕릉들의 위치를 살펴보자. 거의 수도권을 벗어나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단종이 묻힌 강원도 영월에 있는 장릉은 예외다. 경종이 묻혀 있는 의릉 같은 경우에는 성북구에 자리잡고 있는데 한양도성에서 직선거리로 4km도 되지 않는다.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신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정릉은 그보다도 더하다. 3km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울을 중심으로 왕릉이 자리잡고 있는 이유는 왕들의 능행차 때문이었다. 능행차는 하룻길이 원칙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도세자를 만나러 갔던 정조대왕의 화산 능행차가 1박 2일이었듯, 꼭 원칙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지금은 경강선으로 편하게 전철을 타고 갈 수 있다해도 여주는 멀긴 멀다. 걸어서 하루에 다녀올 수 없는 길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었다. 뱃길이 있지 않은가! 여주에는 남한강이 흐르고 그 물결을 타고 가면 하루 안에 한양에 닿을 수 있다. 육로든 수로든 하루거리면 되지 않은가. 어쨌든 뱃길로 하루거리라 왕릉을 쓰기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거 꼼수 아닌가? 어째 구렁이가 스리슬쩍 담 넘어 가는 거 같다.^^

 

세종대왕의 능답게 영릉(英陵)은 다른 왕릉들보다 더 큰 규모를 자랑한다. 500미터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또다른 영릉(寧陵)과 비교를 해보면 바로 알게 된다. 영릉(寧陵)은 제17대왕 효종과 부인 인선왕후의 능이다. 이 영릉도 천릉을 했는데 원래는 구리시 동구릉에 있었다. 세종대왕릉이나 효종의 능이나 둘 다 자리 이동을 한 셈이다.

 

영릉(寧陵)은 봉분이 두 개인 쌍릉 형식인데 좌우가 아닌 위아래로 봉분이 늘어서 있다. 무척 독특한 형식인데 경종의 능인 희릉도 위아래식으로 되어 있다. 이와 달리 세종대왕의 영릉(英陵)은 합장릉이다. 그래서 외형적으로는 단릉과 유사하다.

 

세종대왕릉은 규모가 크기에 시간을 두고 천천히 둘러보는 것이 좋다. 능 입구에는 세종대왕 시기에 발명된 각종 발명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니 그것들을 관찰해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 또 효종의 능까지 숲길로 연결되어 있으니 꼭 같이 탐방해보자. 왕릉의 숲길을 한들한들 걸어보는 것이다.

 

세종대왕도 만나고, 왕릉 숲길도 걷고...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 세종대왕릉: 능 바로 옆까지 올라갈 수 있어 석물들을 관찰하기에 좋다.

 

 

 

 

 

 

* 세종대왕릉

 

 

 

 

 

 

 

 

 

 

* 효종릉: 사람들이 많이 찾는 세종대왕릉에 비해 한적하다.

 

 

 

 

 

 

 

 

* 재실: 영릉(효종의 능)에 있는 재실이다. 영릉 재실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지난 2007년에 보물 1532호로 지정되었다.

 

 

 

 

 

 

* 영릉(寧陵): 효종의 능인 영릉은 좌우가 아닌 상하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사진 왼쪽의 봉분이 효종의 능이고, 오른쪽이 왕비인 인선왕후의 능이다.

 

 

 

 

 

 

 

 

 

 

 

 

* 하늘재 표지석

 

 

 

 

 

 

전편 <충주미륵대원지>에 이어서...

 

미륵대원지 옆으로는 큰 마방터가 있다. 이전편에도 언급했듯이 미륵대원은 원(院)을 겸하고 있었다. 옛 통신교통 수단인 역원이 있었다는 건, 그 앞으로 길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 미륵대원지 앞으로는 하늘재라는 고갯길이 있다.

 

계립령 혹은 지릅재라고도 불리는 하늘재는 신라 아달라 이사금(왕) 때인 서기 156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보니 하늘재는 문헌상으로 전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이 됐다. 1900년도 더 지난 아주 오래전에 고갯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현재 하늘재를 중심으로 미륵대원지가 있는 곳은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이고, 반대편은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다. 하늘재를 두고 한쪽은 미륵신앙을 받들고, 반대편은 관음신앙을 중시하는 모양새다. 그러고보면 하늘재는 불교 문화 전파에 중요한 행로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마방터를 둘러 본 후 하늘재 표지석 앞에 있는 3층 석탑과 불두(부처님 머리)를 친견했다. 불두만 있는 것은 아무래도 석불을 만드려다 사정상 중지가 된 것 같았다. 얼핏봤을 때는 이스턴섬에 있는 모아이 석상처럼 보였다. 아니면 제주도의 돌하루방루방처럼 보이던가...^^

 

3층 석탑의 위치도 좀 애매했다. 하늘재 표지석 인근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은 마방터 외곽이라 미륵대원지와는 거리가 좀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땅의 기운을 채우기 위한 비보의 의미로 세웠다는 게 중론이라고 한다.

 

 

 

 

 

* 3층석탑: 고려시대 만들어졌다. 하늘재 표지석 인근에 서 있다.

 

 

 

 

 

 

* 불두: 오른쪽에 불두가 있다.

 

 

 

 

 

 

 

자 이제 본격적인 하늘재 트레킹에 나서보자. 입구에서 하늘재 정상까지는 약 2km 정도인데 경사도가 급하지 않아 트레킹 초심자들도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울창한 숲길 사이를 걷다보면 어느 순간 콧노래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만큼 걷기도 편하고 탐방로도 잘 정비되어 있다. 옆쪽으로는 계곡물도 흐르고 있어 나름 여름에도 시원하게 걸을 수 있을 거 같다.

 

하늘재를 가다보면 '연아 닮은' 소나무가 있으니 한 번 눈여겨 보자. 김연아가 피겨 스케이팅을 하는 모습과 닮았다고 그런 명칭을 붙였는데... 정말 닮았나? 판단은 여러분의 몫이다.

 

드디어 하늘재 정상에 도착했다. 해발이 525미터다. 출발점 고도가 높아서인지 겨우 2km를, 그것도 순하게 이동했는데 그 높이에 닿은 것이다. 하늘재에 닿으니 시야가 넓어졌다. 옆쪽으로 암반면이 드러난 포암산이 반겨주고 있었다. 역시 돌산은 보는 것만으로도 매력적이다. 물론 거기를 올라가면 힘들지...^^

 

우리나라 최초의 고갯길이라 그런지 당연히 산신각이 있었다. 간단히 합장을 하고 찬찬히 그림을 살펴보는데... 중국풍이었다. 기왕 그리는 거 산신령님은 우리풍으로 그리는게 맞지 않나? 호랑이도 백두산 호랑이로 그려야 제 맛이지. 호랑이가 뱅골 호랑이였던 거 같았다...ㅋ

 

상주쪽으로 넘어갔다. 도를 넘은 것이다. 그런데 상주쪽 하늘재는 아스팔트 길이었다. 더이상 걸을 이유가 없었다. 단전된 느낌이었다. 인근에 있는 문경새재는 그렇게나 잘 관리를 하면서... 사람들은 흙길, 숲길을 걸으려고 하지 아스팔트를 걸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당연한 것이다.

 

하늘재는 조령, 즉 문경새재가 개통되면서 그 위치를 상실해간다. 문경새재는 조선 초기 서울에서 동래까지 영남대로가 만들어지면서 함께 개통이 된 것이다.

 

삼국 항쟁기에는 온달 장군이 '계립령 서쪽이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돌아오지 않겠다'고 할만큼 전략상으로 무척 중요했던 곳. 고려 후기 공민왕이 홍건적들의 침입을 피해 몽진을 할 때 넘었던 그 고개. 망국의 한을 품은 신라의 마의태자와 덕주공주도 눈물의 발걸음을 했을 그 하늘재!

 

이렇듯 이 땅의 고개는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분주했고, 그 발걸음들은 수많은 이야기거리들을 길 위로 뿌려댔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있는 발걸음을 미륵리석조여래입상은 큰바위 얼굴처럼 묵묵히 지켜보고 계셨겠지!

 

 

 

 

 

 

* 마방터

 

 

 

 

 

 

 

* 하늘재

 

 

 

 

 

 

 

* 연아 닯은 소나무

 

 

 

 

 

 

 

 

* 하늘재: 정상석

 

 

 

 

 

 

 

* 포암산

 

 

 

 

 

 

 

 

 

 

 

 

 

 

 

* 미륵리5층석탑

 

 

 

 

 

 

 

2021년 3월 8일 월요일.

 

이날은 충청북도 충주에 있는 미륵대원지와 계립령을 탐방하러 갔다. 이 답사기는 3월 31일에 작성하고 있으니 거의 20일 만에 정리하고 있는 셈이다. 필자가 게으른 것도 있지만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다. ^^

 

미륵대원지는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에 자리잡고 있다. 정확히는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이다. 서울에서 수안보까지 다이렉트로 도착하는 시외버스를 타면 가장 좋다. 하지만 그 버스편이 많지가 않다. 수안보의 명성이 예전만 못한 것이다. 차선책이 있다. 동서울이나 강남터미널에서 충주터미널까지 가는 시외버스를 타는 것이다. 생각보다 버스편이 꽤 많아서 좋다. 이후 충주터미널에서 수안보행 시내버스를 탄다. 수안보행 시내버스도 적은편이 아니다. 어쨌든 수안보는 미륵대원지를 가기 위한 전진 기지가 되는 셈이다.

 

2016년이었다. 당시 필자는 <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이라는 곳에서 시행하는 프로그램에 강사로 참여를 하고 있었다. 보건, 위생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트레킹을 리딩하는 것이었다. 문경새재 트레킹을 리딩하는 것이었는데 다른 교육 프로그램보다 필자의 트레킹 강의가 훨씬 더 인기가 많았다. 수강생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우천시에도 우비를 뒤집어 쓰고 문경새재를 누볐던 것이 기억이 난다. 당시 강사료도 짭짭했는디...ㅋ

 

갑자기 이렇게 문경새재에 대해서 언급하는 건 이유가 있다. 문경새재의 전진 기지도 수안보이기 때문이다. 수안보에서 미륵리 방면으로 가면 미륵대원지가 나오고, 괴산군 연풍면 연풍리 방면으로 가면 문경새재가 나온다. 문경새재를 두고 충북 괴산군 쪽에서는 연풍새재라고 부른다.

 

미륵대원지든 문경새재든 둘 다 아름다운 곳이다. 국내여행을 좋아하시고 트레킹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두 곳 모두 방문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륵대원지는 하늘재라고도 불리는 계립령이 있어 이 둘을 묶어 트레킹을 할 수 있다.

 

수안보에서 미륵대원지까지는 약 1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주머니가 가벼운 뚜벅이가 택시를 타다니! 그래도 시간 관계상 어쩔 수 없었다. 중간에 월악산 국립공원을 지나가는데 눈이 호강할 정도로 아름다운 숲길이 펼쳐져 있었다. 그 울창한 숲길에는 인적도 없고 차편도 드문드문이라 참 묘한 느낌이 들더라.

 

미륵대원지에 들어섰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향을 향하고 있다는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을 친견할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드디어 이곳에 왔구나!

 

'에이~ 이게 뭐야!'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공사중이었다. 공사장 가림막 넘어 곁눈질로 친견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 유일의 북향 석불을 보러왔더니만 곁눈질이라니!

 

 

 

 

 

 

 

*미륵대원지: 미륵대원지에 있는 대표적인 석물들을 한 컷에 담아보았다. 미륵리5층석탑, 미륵리석등,미륵리사각석등.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는 충북과 경북을 잇는 하늘재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로 원(院)을 겸하고 있는 특별한 형태의 절이었다. 원은 공적인 임무를 띈 관리나 상인들에게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는 공공 숙소를 말한다. 원은 대개 말을 다루는 역(驛) 인근에 설치하였다. 이를 두고 역원(驛院)제도라고 불렀다. 역원은 30리마다 세워졌는데 중앙의 행정력을 지방까지 빠르게 전달하는 첨병 역할을 했다. 조치원, 퇴계원이 바로 그 역원이었다. 그래도 가장 유명한 지명은 어디? 이태원이다. 우리가 아는 그 이태원! 이태원이 원래 클럽이 즐비한 곳이 아니었다니깐~!^^

 

보물 제96호인 충주미륵리석조여래입상은 미륵대원의 본존불이었다. 미륵리석불도 고려 초기에 만들어져서 그런가? 키가 엄청 크시다. 무려 10.6미터에 달하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불인 관촉사 은진 미륵이 약 18미터에 달하는 거에 비하면 작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10미터가 넘는 큰 석불이 산 중에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다. 실제로 석불 뒤편에 올라서면 가까이로는 북바위산 일대가, 멀리는 월악산의 영봉 일대가 보인다. 그 광경을 보면 석불이 북향을 향하는게 아니라 주위 산들을 굽어보시는 거 같더라.

 

물론 이런 장면은 사진 속에서 봤다. 지금은 공사중이니까...

 

미륵대원은 석굴사원이다. 거대한 암석을 쪼개서 굴 형식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석굴 사원이다.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감실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거대한 충주미륵리석조여래입상을 모신 것이다. 처음에는 지붕 역할을 하는 목조 건축물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되는데 지금은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돌들이 석불에 둘러져 있으니 석굴사원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더불어 공사 이전에는 뒤편까지 올라갈 수 있어 석불이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시선에는 월악산 영봉 일대가 보이는 것이고.

 

하지만 지금은 공사중이라 석불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미륵리 석불의 강한 기운을 느끼고파 한걸음에 달려왔는데... 그런 아쉬움은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에 투영할 수밖에 없었다. 꿩대신 닭이라고 해야 하나?

 

보물 제95호인 미륵리 오층석탑은 높이가 6미터에 달한다. 바로 뒤에 있는 석불도 크고 석탑도 크다. 얼핏보면 6층 석탑같은 이 석탑의 기단은 자연석에 가까워보인다. 앞쪽에 있는 돌거북처럼 그 자리에 있던 자연석을 다듬어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탑신과 옥개석을 올려 지금의 석탑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1층 탑신은 기단처럼 아주 거대하지만 2층 탑신은 확 줄어든 모습이 정교성을 떨어뜨린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뒤에 있는 석불도 디테일은 떨어지니까. 필자는 그런 덜 정교하고 더 순박한 불교 미술도 좋아한다. 정교한 것은 정교한대로 투박한 것은 투박한대로 눈길이 가는게 우리들의 시선이 아니겠는가.

 

 

 

 

 

 

* 미륵리석조여래입상: 옛날 사진을 필자의 카메라로 찍었음.

 

 

 

 

 

 

 

미륵리사각석등, 미륵리석등, 거북바위, 온달장군 공기돌 등등... 미륵대원지는 협소한 공간에 문화재들이 오밀조밀하게 뭉쳐있고, 옆쪽으로는 새로 지은 절이 있어서 그런지 다른 폐사지와는 달리 분주함이 느껴졌다. 다른 페사지에서 느꼈던 허허로움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띄엄띄엄이지만 계속해서 탐방객들이나 기도객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그곳에 문화해설사가 배치되었을까!

 

다른 페사지에도 보물이나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있다. 국보급 문화재를 품고 있는 페사지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도 어김없이 허허로움이 강하게 밀려든다. 넓디넓은 공간에 덩그러이 남아 있는 석조물들이 세상사의 흥망성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 같아서다.

 

하지만 미륵대원지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으니 폐사지의 느낌이 덜하다는 것이다. 역시 사람이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폐사가 된 것도 사람 때문이겠지만 그 곳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도 사람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끈 것은 누가뭐래도 미륵리 석불이다. 다른 폐사지에는 석불이 없으니 덜 할 수밖에 없지만 미륵대원지에는 석불이 있으니 발걸음이 분주할 수밖에... 그렇게 필자의 발걸음을 이끈 것도 미륵리 석불 때문이었지.

 

미륵대원지 옆쪽으로는 넓은 마방터와 3층 석탑, 또 불두(부처님 머리)가 있다. 그 옆쪽으로는 하늘재 입구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 거북바위: 미륵대원지의 마스코트 같은 거북바위. 형태를 봐서는 당연히 등에 비석을 올려놓았을 거 같은데 인근에서 비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 이 형태가 최종결과물인 셈이라 더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 미륵리석조여래입상과 5층석탑: 빨리 공사가 끝나길 기원해본다.

 

 

 

 

 

 

* 미륵리석등

 

 

 

 

 

 

 

 

* 미륵리사각석등

 

 

 

 

 

 

 

 

* 공기돌: 온달장군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기돌. 그럼 온달장군은 헤라클라스인가? 충북 일대에는 온달장군과 관련된 설화가 아주 많이 있다.

 

 

 

 

 

 

 

* 미륵대원지 가는법

 

1. 동서울터미널에서 수안보행 시외버스 탑승. 편수가 많지 않음. 약 2시간 40분 소요. 이후 미륵대원지행 시내버스 탑승. 거리는 약 11km임.

 

2. 서울강남터미널이나 동서울터미널에서 충주터미널행 고속버스(시외버스) 탑승. 이후 미륵대원지행 시내버스 탑승. 미륵대원지행 시내버스는 충주시내에서 출발하고 수안보를 경유함. 충주버스터미널에서 미륵대원지까지는 약 33km임.

 

 

 

 

 

 

 

 

 

* 법천사지에서 거돈사지 가는 길

 

 

 

 

 

 

*** 지난 1월 31일부터 2월 5일까지, 6일간 강원도 일대를 탐방했다. 잘 간직하기 위해 기록한다. 디테일한 것보다는 스케치 정도 수준이다. 탐방 순서는 이렇다.

 

인제 ☞ 속초 ☞ 양양 ☞ 강릉 ☞ 평창 ☞ 원주

 

 

 

 

 

 

 

 

* 법천사지 당간지주

 

 

 

 

 

 

 

 

2021년 2월 5일 금요일.

 

강원도 동계여행의 마지막 날. 이날은 원주에 있는 폐사지 여행으로 테마를 잡았다. 남한강변을 끼고 있는 원주 일대에는 예전에 큰 사찰들이 번창을 했었다. 하지만 이후 억불정책, 전란 등으로 인해 사찰들은 폐사가 된다. 이날은 그렇게 폐사가 된 법천사지와 거돈사지를 찾아나섰다. 이 두 곳은 모두 원주시 서쪽에 위치한 부론면에 자리잡고 있다.

 

먼저 부론면 법천리에 있는 법천사지를 찾았다. 법천사(法泉寺)는 한자에도 보이듯 '진리가 샘물과 같이 솟는다'라는 뜻을 가졌다. 남한강을 따라 강원, 충청, 경기의 물산들이 이동을 했던 이 일대에는 흥원창이라는 큰 조창이 있었다. 고려시대 13개 조창 중에 하나로 설치된 흥원창은 조선시대에도 계속 그 기능이 이어져 마포 일대에 있던 경창까지 세곡과 공물들을 수송했다. 그런 남한강 수계를 이용한 조창과 그에 따른 물산의 집산은 이 일대에 큰 사찰들이 자리잡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물적 동력이었을 것이다.

 

먼저 당간지주를 찾아보았다. 법천사지도 다른 페사지들처럼 허허벌판에 있는터라 평지에 우뚝 서 있는 당간지주에 첫 시선을 모을 수밖에 없다. 사찰이 융성했을 때도 지금처럼 사찰이 망했어도 당간지주는 사람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사실 당간지주가 없었다면 좀 헤맸을 것이다.

 

길이가 약 4미터 정도 되는 법천사지 당간지주는 후기 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별다른 장식없이 소박한 외형을 드러내고 있는 당간지주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20호이다. 좀 거시기하지 않은가? 천년의 세월을 넘긴 문화재가, 더군다나 비교적 외형이 잘 보전된 당간지주가 도지정 문화재라는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연히 보물일 줄 알았는데 말야.

 

당간지주를 뒤로 하고 지광국사탑비를 보러 갔다. 원주 출신인 지광국사는 속명이 원해린이었다. 승통, 왕사, 국사 등의 큰 칭호들을 받은 지광국사는 당대 제일의 고승이었다. 1058년(문종12)에 국사에 오른 그는 1070년에 법천사에서 열반에 든다. 법천사는 지광국사가 출가를 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탑비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전체 높이가 4.5미터에 달하는 지광국사탑비는 정교한 조각 솜씨가 돋보이는 문화재다. 비신을 받히고 있는 용같은 거북이는 당장이라도 발걸음을 뗄 것처럼 힘에 넘친다. 하지만 그래봐야 거북이 걸음이지...ㅋ

 

맨 상단의 이수 부분은 또 어떤가. 탑의 상륜부처럼 보주를 장식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비신 옆쪽에 용을 새겨놓았다. 비신 옆쪽에 조각을 새겨놓는 비석은 그리 흔한게 아니다.

 

그 규모나 정교함 때문인지 지광국사탑비는 국보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탑비와 함께 지광국사탑(국보 101호)이 있었는데 지금은 부재중이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일본인이 가져갔다가 3년 후에 다시 돌려받아 경복궁 뜰에 전시하였다. 그러다 보존처리를 위해 대전시에 있는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이전됐다. 언론 보도를 보니 이제 곧 있으면 진짜 원래 제자리인 법천사지로 돌아올 예정이란다.

 

지광국사탑이 돌아온다면 다시 한 번 법천사지로 가야하나? 안 갈 수가 없잖아!^^

 

좀 높은 곳으로 올라가 법천사지 일대를 둘러보았다. 황량한 벌판 위에 전각터와 행랑터가 눈에 들어왔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건물을 지어볼까? 옛 법천사는 분명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옛 영광은 사라지고 이제 쓸쓸한 터만 남아 있다. 그 적막한 터 위로 겨울 바람이 슬쩍 지나간다. 다시 옷깃을 부여잡고 거돈사지로 이동을 한다.

 

 

 

 

 

 

* 지공국사현묘탑비

 

 

 

 

 

 

 

* 지공국사현묘탑비: 비신 옆면에 용이 새겨져 있다.

 

 

 

 

 

 

 

* 법천사지

 

 

 

 

 

 

 

거돈사지(居頓寺址)는 부론면 정산리에 있는데 법천사지와는 약 4km 정도 떨어져 있다. 두 곳은 원주역사문화길이라는 도보여행길로 연결되어 있어 트레킹 행할 수 있다. 포장된 농로길과 비포장길을 걷는 것이라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당간지주가 법천사지의 길잡이였다면 거돈사지에서는 삼층석탑(보물 제750호)이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높이 5.4미터에 달하는 거돈사지 삼층석탑은 안에 흙을 채운 토단 위에 세워져 그 높이가 더 두두러진다. 1층 비신은 길쭉한데 갑자기 2층부터는 확 줄어드는게 눈에 띈다. 또 탑 앞에 있는 배례석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탑 자체에는 딱히 화려한 장식이 없다. 대신 후기 신라시대 양식을 잘 계승한 탑이다.

 

3층 석탑 뒤로는 본당 건물터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 큰 돌들이 쌓여진 것이 보인다. 이것은 돌로 만든 불대좌이다. 불대좌면 불상을 놓는 곳이 아닌가? 그런데 왜 건물 중간에 있었을까? 예전에는 본존불이 모셔진 본당 건물은 일반 신도에게 개방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본존불을 본당 중앙에 안치해도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조선시기에는 본당도 일반 신도들이 와서 종교활동을 행하게 됐고 불대좌는 건물 후미로 자리를 잡게 된다. 공간 효율성면에서 당연한 위치변동이었다. 이후 불대좌는 수미단으로 바뀌게 된다.

 

건물 한 가운데 떡하니 있는 거대한 불대좌만 남아 있다는 건 누군가 그 위에 있는 불상을 가져갔다는 뜻인가? 원래 있어야 하는 것의 부재를 지켜봐야 하는 게 폐사지 여행의 본질이다. 그런 부재감을 계속 확인해서 그런가? 폐사지 여행은 항상 허전함이 그림자처럼 뒤따라 다닌다. 그런 허전함 허허로움도 여행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 거돈사지 3층석탑

 

 

 

 

 

 

 

 

* 불대좌

 

 

 

 

 

 

 

 

석축 위쪽에 있는 원공국사탑을 보러갔다. 원공국사는 법명이 지종이었는데 고려 광종 때 큰 활약을 했던 승려였다. 이후 1018년 현종 때 거돈사에서 입적을 했다. 그 원공국사를 기리는 탑이 세원진 것이다.

 

-찰칵찰칵

 

사진을 찍으며, 피식 웃었다. 사실 거돈사지에 있는 원공국사탑은 가짜다. 오리지널은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데 진짜 원공국사탑은 보물 제 190호로 지정되어 있다. 북한산 비봉에 있던 진흥왕 순수비 사례와 유사하다. 오리지널은 보존을 위해 박물관에 있고, 원래 그 자리에는 카피본을 세운 것이다.

어쨌든 카피본이지만... 원공국사승묘탑은 고려시대 대표적인 팔각 부도탑으로 그 외형이 참 멋스럽다.

 

마지막으로 원공국사탑비를 보았다. 보물 제78호인 원공국사탑비는 법천사지에 있는 지광국사탑비보다는 소박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비석을 받치고 있는 귀부, 즉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은 역시나 특이하게 생겼다. 거북이의 귀가 커다랗고 독특해서 얼핏보면 해마처럼 보인다. 또 얼굴은 어떤가. 손오공처럼 보인다. 언발란스한데 이상하게 합쳐놓으니 서로 잘 어울린다. 우리 선조들의 해학미가 잘 녹아있어서 그런 것일까?

 

이렇게하여 원주 부론면 법천사지, 거돈사지 탐방이 종료가 됐다. 아울러 강원도 동계여행도 무사히 종료가 됐다. 얼음트레킹(아침가리골)에서부터 바람트레킹(선자령), 폐사지 탐방까지... 여러모로 참으로 유익한 여행이었다. 하지만 여행 내내 동장군과 옥신각신 했다는...ㅋ

 

 

 

 

 

*원공국사승묘탑: 카피본

 

 

 

 

 

 

 

 

 

 

* 원공국사승묘탑비

 

 

 

 

 

 

 

* 거돈사지 3층석탑: 배낭이 대신 인증샷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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