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라고나 수도교

 

 

<핫한 유럽여행 3편> 숲 속에 숨어 있는 로마 수도교_ 타라고나

☞ 엄청 더웠던 지난 여름, 저는 유럽에 있었습니다. 2024년 6월 8일부터 8월 14일까지, 약 67일간 많은 나라를 탐방했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안도라, 모로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크로아티아, 헝가리, 튀르키에...

애초에는 포르투갈 순례길을 약 25일 정도 걷고, 나머지 기간을 배낭여행을 이어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름철 남유럽의 더위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일정을 다 배낭여행으로 소화했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도 여행의 묘미겠지요.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펜으로 노트에 적기도 했고, 스마트폰 메모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본 포스팅은 그 여행일지를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재밌지는 않습니다. 또한 가이드북 수준의 디테일한 정보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수도교: 수도교를 건설할 때의 상상도. 거대한 기중기를 이용하여 돌을 날랐다.

 

 

2024년 6월 12일 수요일: 5일차, 맑음

전날인 11일, 피레네 산맥에 있는 푸이그세르다에서 바로셀로나를 거쳐 타라고나(Tarragona)로 이동했다. 아직 본격적인 휴가 기간이 아님에도도 바로셀로나에는 만만한 객실이 없었다. 그래서 바로셀로나에서 1시간 거리에 있는 타라고나로 바로 이동했다. 타라고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져 있다.

바닷가에 접해 있는 타라고나는 이베리아반도에 정착한 로마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로 바르셀로나보다도 더 오래된 유서 깊은 곳이다. 옛 로마인들의 도시답게 타라고나에도 수도교가 있다. 수도교는 말 그대로 물이 흐르는 다리다. 용수 공급을 중시했던 로마는 점령지역 곳곳에 수도교를 건설했다. 그 중 하나인 타라고나 수도교를 찾아갔다.

타라고나 수도교는 페레레스 수도교가 정식 명칭인데 그 모습을 진귀하게 여긴 옛 사람들이 악마(The Ferreres Aqueduct, Pont del Diable) 수도교라고 별칭을 붙였다.

타라고나 중심가에서 수도교까지는 약 4km정도 떨어져 있다. 걸어갈만 하지만 그냥 시내버스를 탔다. 1.6유로(약 2300원). 버스 기사에게 현금박치기를 했다.

악마라는 명칭이 걸맞지 않게 수도교의 모습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수도교는 자연공원 안에 있었던터라 도심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세고비아 수도교하고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세고비아 수도교가 도심 구간을 걷다가 만난다면 타라고사 수도교는 숲길을 걷다가 딱~하고 만나게 된다.

타라고나 수도교는 당연히 그 기능이 정지됐다. 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길은 끊어졌지만 수도교가 워낙 튼튼한터라 그 위로 물 대신 사람이 다닐 수 있게 정비해 놓았다. 2천년 전 로마인들이 만든 건축물 위를 직접 걸어보았다. 고대인들이 만든 건축물 위를 넘나드는 호사를 누리다니!

수도교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모습은 또다른 장관이었다. 이렇게 수도교를 건널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된 건 이제 타라고나 시민들은 상수도를 끌어다 마시기 때문이다.

 

 

 

* 타라고나 수도교: 물길은 끊겼지만 그 위로 사람이 보행할 수 있다.

 

 

 

 

* 타라고나 수도교: 사진에서 보듯 사람들이 건너갈 수 있다.

 

 

 

수도교 탐방을 마친후 주변을 산책했다. 우리나라의 임도 같은 길이 순환형으로 되어 있어 걷기에 딱 좋았다. 그렇게 둘러보다 독특한 기념물을 만났다. 1811년의 영웅들(Monument als herois del 1811)이라는 조형탑이었다.

1811년에 나폴레옹 군대가 타라고나를 포위했는데 그 사건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리는 조형물이었다. 숲 속에 이런 조형물이 있다는 것이 무척 진기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이 일대가 매우 중요한 곳이라는 뜻일 것이다.

수도교 탐방을 마치고 해변가에 있는 로마시대 원형경기장 일대를 둘러보았다. 지중해 옆에 로마시대 유적지라... 눈이 호강했다. 바다와 어우러진 로마 유적이라! 타라고나는 곳곳이 다 명소인 듯싶었다.

ps. 유럽의 해수욕장들은 아주 시원시원하더라고요.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랐다는...ㅋ

 

 

 

* 1811년 영웅들 기념비(Monument als herois del 1811): 나폴레옹 군대의 타라고나 포위 공격을 막아낸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 타라고나 성벽: 로마시대 만들어진 도시성벽임. 성벽 안으로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다.

 

 

 

* 타라고나 원형경기장: 로마 원형경기장. 경기장 바로 옆이 지중해다.

 

 

 

* 타라고나 원형경기장

 

 

 

 

 

 

* 이비아 도심: 이비아성에서 바라본 모습

 

 

 

<핫한 유럽여행 2편> 왜 스페인 땅이 프랑스 영토에 있지?

☞ 엄청 더웠던 지난 여름, 저는 유럽에 있었습니다. 2024년 6월 8일부터 8월 14일까지, 약 67일간 많은 나라를 탐방했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안도라, 모로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크로아티아, 헝가리, 튀르키에...

애초에는 포르투갈 순례길을 약 25일 정도 걷고, 나머지 기간을 배낭여행을 이어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름철 남유럽의 더위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일정을 다 배낭여행으로 소화했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도 여행의 묘미겠지요.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펜으로 노트에 적기도 했고, 스마트폰 메모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본 포스팅은 그 여행일지를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재밌지는 않습니다. 또한 가이드북 수준의 디테일한 정보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성모천사성당(Church of Our Lady of the Angels)과 베르나드타워(Bernard So Tower): 성당과 타워는 인접해있지만 별개의 건물이다. 타워는 감옥으로도 쓰였다고 한다.

 

 

 

2024년 6월 10일 월요일: 3일차, 비

피레네 산맥에 자리잡은 작은 나라, 안도라에서 1박을 했다. 피레네에서 하룻밤을 보냈더니 얼굴에 생기가...?

이날은 이비아(Llivia)라는 곳을 탐방했다. 리비아? 북아프리카에 있는? 아니다. 이비아다. 그래도 안도라는 어찌해서 들어봤을테지만 이비아는 처음 들어본 분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이비아는 안도라에서 동쪽으로 약 50킬로 정도 떨어져 있다. 피레네산맥 동쪽 부분에 자리잡고 있다.

그럼 그 낯선 이비아에는 뭐하러 갔는가? 이비아의 독특한 위치 때문에 간 것이다. 가기가 쉽지 않은 곳인지를 알기에 일부러 여행 초기에 배치를 해서 찾아간 것이다.

이비아는 프랑스 영토 안에 있는 스페인 땅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적절한 예일지 모르겠지만... 바티칸을 생각해보시라! 이탈리아 로마에 바티칸이 둘러싸여 있지 않은가. 어쨌든 스페인에서 이비아로 가려면 프랑스 땅을 약 2킬로 정도 거쳐가야 한다. 이걸 두고 고립영토라고 부른다. 이게 참 재밌는게 어쨌든 국경을 넘는거라 스마트폰 통신사도 달라지게 된다.

안도라에서 스페인의 라세우두르젤(La Seu d'Urgell), 프이그세르다(Puigcerdà)라는 도시를 거쳐 이비아에 도착했다.

안도라공국 -> 라세우두르젤(스페인) -> 프이그세르다(스페인) -> 프랑스땅 -> 이비아(스페인)

뭐 이렇게 정리를 하니 좀 복잡해보인다. 하지만 거리가 그리 길지는 않았다. 약 70km 정도니까. 이비아는 부메랑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는데 크기가 약 12.9 km2 정도다. 서울의 금천구가 13km2, 동대문구가 14.2km2니 참고하시길...

이비아가 이렇게 프랑스 땅에 있는 고립 영토가 된 건 역사적 맥락들이 맞물려서 그런 것이다. 사실 이비아는 로마시대부터 그 중요성이 부각된 곳이다. 이름도 이곳에 주둔했던 로마의 장군인 율리아 리비카(Julia Lybica)에서 따온 것이다.

프이그세르다에서 출발한 버스를 타고 프랑스땅을 넘어 이비아로 갔다. 손님이 많이 없는건지 버스가 크지 않았다. 우리나라 마을버스만한 크기였다. 그래도 나름 국경을 넘는 버스인데 마을버스 수준이라니...ㅋ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비아 탐방의 정점인 이비아성(castell de Llivia)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았다. 이비아성은 상당 부분이 파괴되어 있지만 그 정상부에 올라서면 왜 이곳이 로마시대부터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는지 알게 될 것이다.

이비아는 분명 피레네 산맥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 일대는 큰 평원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이 피레네가 맞나 싶을 정도로 널찍한 공간이 있었던 것이다. 마치 피레네의 고봉들이 평원을 숨겨놓고 있는 형상이었다. 평원과 고봉들을 동시에 볼 수 있었던 꽤나 흥미로운 순간이었다. 그런 굉장한 풍광들이 이슬비와 함께 눈 앞에 펼쳐져 있으니... 뭐랄까 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다.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리다보니 이슬비가 폭우로 변했다. 매우 현실적이 됐다~ㅋ

ps. 지도에서 왼쪽은 안도라, 오른쪽은 이비아다. 둘 사이는 약 50킬로 정도 떨어져 있다.

 

#이비아피레네

#스페인이비아

#스페인고립영토

#안도라피레네

#스페인여행

 

 

 

* 이비아 타운

 

 

 

* 천사성모성당

 

 

 

* 천사성모성당

 

 

 

* 이비아성: 이비아성에서 바라본 모습. 스페인 방면이다.

 

 

 

* 이비아: 황소가 느긋하게 풀을 뜯고 있다.

 

 

 

* 이비아성: 겹성 형태를 띄고 있다.

 

 

 

 

 

 

*엔고르다니 다리 : 안도라의 수도인 안도라라베야에 있는 엔고르다니 다리(Pont d'Engordany). 발리라 오리엔트 강( valira d'orient) 위에 놓여져 있다. 보기만해도 아주 시원하다!

 

☞ 엄청 더웠던 지난 여름, 저는 유럽에 있었습니다. 2024년 6월 8일부터 8월 14일까지, 약 67일간 많은 나라를 탐방했습니다. 스페인, 포르투갈, 안도라, 모로코,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크로아티아, 헝가리, 튀르키에...

애초에는 포르투갈 순례길을 약 25일 정도 걷고, 나머지 기간을 배낭여행을 이어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름철 남유럽의 더위는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일정을 다 배낭여행으로 소화했답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것도 여행의 묘미겠지요.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펜으로 노트에 적기도 했고, 스마트폰 메모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본 포스팅은 그 여행일지를 옮긴 것입니다. 그래서 재밌지는 않습니다. 또한 가이드북 수준의 디테일한 정보도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안도라의 수도 안도라베야: 안도라는 작은 소국이지만 도시국가는 아니다.

 

 

 

* 2024년 6월 8일 토요일: 1일차, 맑음 / 2024년 6월 9일 일요일: 2일차, 맑음

인천공항에서 UAE 아부다비행 에티하드 항공을 탔다. 유럽은 여러번 가봤는데 갈때마다 국내항공사나 핀에어 같은 유럽 현지 항공사를 이용했다. 최신형 B787 드림라이너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생각보다는 좀 재미가 없었다. 오히려 예전에 대한항공에서 탔던 B787이 더 나았던 거 같다. 중동항공사여서 그런지 기내식도 나와는 안 맞았다. 그래도 그냥 주는대로 먹어야쥐~!

약 8시간 비행을 해 아부다비에 도착했다. 그런데 서울 촌놈이 비행기를 타서 그랬나? 비행중에 엄청난 두통에 시달렸다. 오죽했으면 승무원에게 두통약을 받아서 복용을 했을 정도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양 옆 좌석이 비어있었다는 것이다. 서울 촌놈 오랜만에 뱅기탔다고 티를 제대로 냈다.

이후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비행기로 환승했다. 아부다비에서 바르셀로나까지는 약 7시간 정도 소요됐는데 그때는 아주 멀쩡했다. 신나는 비행이었다. 같은 에티하드 항공 비행기인데 왜그리 차이가 났던지...

바르셀로나 국제공항에 내렸다. 그간 마드리드 국제공항은 많이 이용했지만 바르셀로나 공항은 처음이었다. 이후 바로셀로나 중앙역이라고 불리는 sant로 이동한 후 고속버스를 타고 안도라(Andorra)로 이동했다. 비행기에서 대충 15시간을 있다보니 고속버스를 타자마자 코를 골며 골아떨어졌다. 확실히 비행기보다는 고속버스가 자기에 좋은 듯하다. 덕분에 시차 적응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안도라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피레네 산맥에 소국으로, 그 면적이 서울보다도 더 작다.

안도라는 안도라공국이라고 불렸다. 공작령이라는 뜻으로 거칠게 말해 공작이 왕노릇 한다는 말이다. 공작은 새가 아니라 백작, 공작할 때 그 공작이다.

스페인에서 안도라로 입국(?)하려면 검문소를 지나야한다. 하지만 검문소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다. 대신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넘어가는 차들이 많았다. 버스 차창 밖으로 피레네의 산들이 위엄을 드러내며 따라 오고 있었다. 드디어 안도라에 도착했다.

피레네의 험준함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안도라는 그런 척박함을 이겨낸 듯이 보였다. 절벽 위에다 집을 짓고 마을을 지은 것이다. 지반 공사 하기도 힘들었을텐데... 스위스와 막상막하였다.

 

 

* 안도라: 북쪽으로는 프랑스, 남쪽으로는 스페인. 안도라의 위치를 말해준다.

 

 

* 안도라의 위치

 

 

안도라는 정치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형태를 띄고 있는 곳이다. 안도라는 프랑스의 대통령과 스페인의 카탈루냐 지방인, 우르헬 교구의 주교가 공동으로 최고 권력 수반을 이루고 있다. 안도라의 건국이 12세기였으니 그때는 프랑스 왕이었고, 지금은 대통령이 그 임무를 이어받는다. 이를 두고 입헌공동군주제라고 부른다. 입헌군주제도 아니고, 입헌공동군주제라니...! 물론 안도라에는 총리가 실질적으로 국정을 총괄하고 있다.

프랑스와 스페인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더군다나 피레네라는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아야했던 그들의 나름대로의 생존 방식이었을것이다.

올 초에 지중해 지브롤터를 탐방하고, 약 5개월 만에 피레네 안도라를 방문했다. 예전부터 벼르고 별렸던 버킷리스트를 올 상반기에만 두개나 지운 것이다. 오~ 속도 좋은데!

그런데 좀 아쉬웠다. 안도라공국이라는 예전의 명칭 때문에 살짝 중세풍의 도심 풍경을 기대했다. 하지만 현대적인 건물이 즐비했다. 사실 안도라는 거의 모든 품목이 무관세라서 쇼핑이 발달했다. 또한 카지노도 유명하다.

그런 아쉬움을 달래주는 우렁찬 목소리가 있었다. 바로 피레네에서 흘러오는 물소리였다. 지도상으로는 무슨 강이었는데... 그렇게 유속이 빠른 도심지 강물은 처음봤다. 하여간 지리산 대원사 계곡물 소리처럼 우렁찬 피레네 강물 소리에 귀가 다 시원해졌다. 시차에서 오는 피로감이 싹 다 날라가는 듯했다.

안도라는 1995년 우리나라와 정식으로 수교했다. 하지만 워낙 작은 나라이기에 독립된 외교공관이 있지 않고, 주 스페인 대사관이 공관 업무를 대행한다. 사실 안도라는 카탈루냐 지방과 많은 면에서 닮아 있었다.

고도가 높아서 그랬나? 안도라에서는 덥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역시 피레네 산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ㅋ

 

 

* 성 에스테베 성당(St. Esteve of Andorra Church): 12세기에 지어진 성당.

 

 

* 성 에스테베 성당: 왼쪽이 에스테베 성당이고, 오른쪽 건물은 외벽을 사진으로 처리했다.

 

 

* 안도라: 오리엔트강이 시원스럽게 물줄기를 뿜고 있다. 상류 부근이라서 그런지 계곡 같은 느낌이다.

 

 

 

* 안도라공국: 프랑스 왕과 스페인 우르헬 주교가 공동으로 통치하는 모습을 그린 조각품. 입헌공동군주제를 표현한 작품이다.

 

 

 

 

* 산티아고순례길

 

 

 

<재미난 스페인 5편> 산티아고 순례길

도대체 순례길이 무엇이기에!

 

 

"왜 순례길에 한국인들이 이렇게 많죠?"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을 때였다. 순례길의 종착점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의 외곽에 있는 산티아고 공항 부근을 걷고 있었다. 미국 알래스카에서 온 미국인 순례객 부부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얻어마셨다. 나이가 지긋하신 남편분이 보온병에서 차를 따르며 저렇게 물으셨던 것이다.

답을 좀 망설였다. 솔직히 필자 스스로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한국사람들은 여기를 왜 오는 거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는 또 뭐야?

"한국은 스트레스 사회입니다. 그래서 힐링이 필요합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힐링을 합니다."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더듬더듬 이야기를 했는데 다행히 필자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떡이셨다. 이후로도 스페인을 여러번 갔었는데 갈 때마다 순례길을 걸었고, 그런 필자를 붙잡고 외국인들은 또 비슷한 질문을 했다. 왜 순례길을 걷는 한국 사람들이 많냐고?

그들이 보기에 필자는 전형적인(?) 한국인이 아닌 것처럼 여겨졌던 모양이다. 딱봐도 엄청 무거운 배낭을 메고, 단독으로 움직이며, 외국인들과도 스스럼없이 인사하는 모습이 여타 한국인들과는 다른 모습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답을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저런 물음들 속에는 순례길을 걷는 한국인들을 좀 언짢게 생각하는 의도가 숨어있다. 어떤 유럽에서 온 순례자는 필자에게 '한국인들이 꺼려진다'는 말을 직접 건네기도 했었다. 도대체 산티아고 순례길이 무엇이기에 이런 이야기들이 오가는 것인가? 왜 일부 한국인 순례자들은 그 먼 스페인 땅까지 가서 회피의 대상이 되는가?

 

 

 

* 순례길표식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처음 접하는 분들도 있을테니 산티아고 순례길의 연혁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자. 산티아고 순례길은 성 야고보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는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로 향하는 길을 말한다. 산티아고(Santiago)는 스페인어로 야고보를 뜻하는데 예수의 12제자 중에 한 명이었다. 야고보는 현재의 스페인(에스파냐)과 포르투갈이 위치해 있는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고향으로 돌아온 야고보는 헤롯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참수를 당하게 됐다. 12제자 중 첫 순교자가 야고보였던 것이다. 야고보에게도 제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스승의 시신을 돌로 만든 배에 실어 이베리아 반도로 향했다. 배 자체가 돌로 만든 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이베리아반도로 온 야고보의 유해는 9세기 초반에 발견되고, 그곳에 성당이 들어서니 그 성당이 바로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대성당인 것이다.

이후 교황 알렉산더 3세는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를 로마, 예루살렘과 함께 3대 성지로 선포한다. 이에 유럽 각국의 순례자들이 프랑스 땅을 거쳐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로 향했다. 초반 순례길이 번성했던 시기는 11~15세기였는데 당시 이베리아반도에서는 국토회복운동이 진행중이었다. 이베리안반도 내에 있던 그리스도교 국가들은 이슬람 무어인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것이다. 전쟁으로 인해 다른 유럽 국가들과 인적 교류가 끊길 수 있었음에도 순례길로 인해 명맥이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다 16세기에 불어닥친 종교전쟁 이후로 쇠퇴하고 만다. 약 400년간 조용했던 순례길이 다시 각광을 받게 된 건 1982년이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방문했기 때문이다. 또한 5년 후인, 1987년에 출간된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라는 책이 큰 인기를 끌면서 순례길은 더욱더 주목을 받게 된다.

스페인 정국의 변화 요인도 한 몫 했을 것이다. 1975년에 독재자인 프랑코가 사망하고, 이후 스페인은 민주화 과정에 놓이게 된다. 히틀러와 협력하여 참혹했던 스페인 내전을 일으킨 프랑코가 아닌가? 그런 프랑코 정권 하에서는 순례길을 걷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1980년, 일부 정치군인들이 구체제 회귀를 목표로 쿠데타를 일으키지만 신속하게 진압되고 만다. 그렇게 정치적인 위험 요인들이 제거됐기에 평화롭게 순례길을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

 

 

* 순례길의 종착점인 산티아고대성당

 

 

이렇게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모았던 순례길은 1993년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다. 파울로 코엘료가 걸었고,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길은 프랑스길이다. 프랑스 남부에 있는 생장피에드포드(Saint-Jean-Pied-de-Port)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약 800km를 걷는 길이다. 프랑스길 이외에도 북쪽길, 포르투갈길, 마드리드길 등등... 여러가지 순례길이 있는데 이들 모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종착점이다.

"한국인들은 영어를 잘 못하고, 부끄러움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스위스에서 온 처자가 한국인 순례객들은 왜 다른나라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냐라는 물음을 해서 저렇게 답을 해줬다. 필자도 한국인이라 한국인에 대한 변호를 자임한 것이다. 한마디로 한국인들이 꺼려진다는 뜻일 것이다. 당시는 겨울철이라 순례객 자체가 별로 없을 때인데도 한국인들을 콕 짚어 이야기를 한 게 좀 의아스럽기까지 했다. 혹시 그 스위스 처자는 한국인 순례객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일부 서양인들은 한국인 순례객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이 가진 역사와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 같다. 떼지어 다니고, 엄숙하지 못하고, 큰소리로 떠들고... 뭐 이런 이미지로 한국인들을 바라보는 듯하다. 이에 대해 필자는 이렇게 반박을 하고 싶다.

'니들은 안 그러냐? 니들도 큰 소리로 떠들고, 엄숙하지 못하잖아. 그리고 순례길이라면서 뭘 그렇게 연애를 하고 다녀! 알베르게에서 낯뜨거운 장면들은 지들이 다 하면서...'

여기서 알베르게는 순례자를 위한 숙소를 말한다. 알베르게는 기숙사 침대같은 2층 침대가 놓여 있다. 그 좁은 침대에 남녀가 쏙 들어가 있는 경우를 꽤 여러번 봤다. 좀 낯뜨거웠다.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순례길: 프랑길 말고도 다른 순례길도 많다. 하지만 역시 프랑스길이 가장 메인이 된다.

 

 

 

* 순례길누렁이: 순례길의 표식인 조가비를 달고 있는 누렁이. 순한 녀석이었다.

 

 

 

또 야고보가 산티아고 대성당에 잠들어 계신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일까? 야고보의 제자들이 돌로 만든 배에 시신을 실어 옮겼다고 하는데 그게 말이 되나? 그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지브롤터해협을 돌배로 건넜다는게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항해는 과학이자 기술이다. 그래서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이라는 말까지 오가는 것이다.

썩 달갑지 않은 대접을 받으면서도,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을수도 있다는 의문이 있으면서도 또 순례길에 발걸음을 하는 이유가 있다. 걸을수록 마음의 평화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마음의 평화가 세상의 평화로까지 확장되는 느낌까지 받았다. 전쟁의 공포가 사라지고, 화합의 악수가 건내지길 염원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의 진정한 정신이 아닐까?

  

 

* 순례자의 그림자

 

 

 

* 순례자동상

 

 

 

* 산티아고순례길: 프랑스길

 

 

<재미난 스페인 4편> 세고비아

돌기둥이 빚어낸 절대음감!

 

 

 

 

* 수도교

 

 스페인에 대해서 잘 모를 때였다. 당연히 스페인도 방문해 본 적이 없을 때였다. 그렇게 미디어를 통해서만 스페인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필자의 눈을 확 사로잡는 장소가 있었다. 정확히는 건축물이었는데 바로 세고비아의 수도교였다. 저 수도교를 꼭 보겠다고 다짐을 했었고, 결국에는 그 수도교를 직접 친견했다. 거기에 더해 수도교 앞 숙소에서 1박을 하기도 했다.

평생 그곳을 가보지는 않았지만, 이름만 들어도 친숙한 도시들이 있을 것이다. 영화 <카사블랑카> 때문에 유명해진 모로코의 카사블랑카, 희망봉이라고 불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타운 등등... 필자에게도 그런 도시가 있었다. 이번에 소개할 세고비아(Segovia)가 바로 그곳이다.

예전에 통기타가 하나 있었다. 지인한테 물려받은 것인데 아무리 조율해도 돌 긁어대는 소리가 났던 그런 통기타였다. 그래도 열심히 튕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음유시인까지는 못되더라도 좋아하는 후배 앞에서 폼 좀 잡아볼 생각이었다. 그때 튕기던 기타가 바로 '세고비아 기타'였다. 그런 기억 때문에 세고비아는 필자에게 전혀 낯선 도시가 아니었다.

세고비아 기타는 유명 기타리스트인 안드레스 세고비아(Andres Segovia)의 이름을 따서 상품명으로 삼았다. 안드레스 세고비아는 다른 악기용으로 작곡된 음악들을 기타 연주에 적합하게 편곡을 하는 등 현대 기타 연주의 대가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안드레스 덕택에 '세고비아 기타'가 명성을 얻게 됐고, 그 상품명 덕분에 세고비아라는 도시가 우리 귀에 익숙해진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세고비아에 가면 안드레아와 관련된 기타 박물관 같은 것이 있는 줄 알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도시 세고비아와 안드레 세고비아와는 별 관계가 없다. 그는 스페인 남부인 안달루시아 출신이고 데뷔도 안달루시아에서 했다. 그냥 그의 이름에 '세고비아'라는 도시 이름이 들어간 것뿐이다. <강철군화>의 저자 잭 런던처럼 그냥 사람 이름에 도시명이 포함된 것이다.

수도교(aqueduct)를 품고 있는 세고비아는 마드리드에서 북쪽으로 약 60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래서 톨레도(Toledo)와 함께 마드리드 근교 여행지로 많은 이들이 방문하고 있다.

처음 세고비아를 방문했을 때였다. 버스를 잘못타서 밤 늦게 터미널에 내렸다. 그냥 숙소를 잡으러 갈까하다가 바로 수도교로 향했다. 야경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와! 정말 환상적이네!"

수많은 아치들로 이루어진 수도교의 장엄함이 화려한 조명 빛을 받아 그 위용을 더하고 있었다. 미디어에서나 보던 로마시대 때의 수도교를, 그것도 조명에 휩싸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필자의 눈을 확 사로잡는 광경이었다.

 

* 수도교의 야경

그런 장면에 매혹됐는지 상상력이 피어올랐다. 수도교의 아치에 리듬을 입혀본 것이다. 기둥을 타고 오르는 선율이 아치에서 곡선을 그린 후, 위층으로 올라가 3단 고음으로 울려퍼지는 그런 모습...

세고비아에 세고비아가 없다지만 필자에게는 수도교가 '절대음감'처럼 보였다. 시각의 청각화를 통한 음악 연상하기! 딱딱한 돌기둥을 보며 리듬감을 상상한 필자의 상상력이 과한 것일까? 돌기둥같은 돌아이?

- 로마인들의 기술력이 집약된 거대한 수도교

기둥: 120개

아치: 167개

관로: 25*30*30cm

총길이: 16,220km

최고높이: 28.10m

교량구간: 728m

수도교의 스펙이다. 수도교는 로마시대인, 기원 후 1~2세기에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당시 이베리아반도는 로마의 식민지였다. 로마인들은 곳곳에 식민도시를 세웠는데 세고비아도 그 중 하나였다. 정착지는 세워졌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세고비아는 넓은 평원에 자리 잡고 있는 터라 대규모로 용수를 공급할 수 있는 수원지와 거리가 멀었다. 수도교는 그런 고민의 산물이었다. 로마인들은 외곽에 있는 프리오 강(Rio Frio)에서부터 중심부까지 수로(水路)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무려 16km에 달하는 수로가 만들어졌다.

수도교는 그 수로의 교량구간이다. 즉 16km 송수관 중 728m 정도가 아치형 다리 위에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로마인들은 왜 수도교라는 교량을 만들었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냥 수로를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하물며 시멘트도 없던 시대에 그런 거대한 다리 구조물을 축조한다는 건 엄청난 공사였기 때문이다.

 

* 수도교

수도교를 잘 즐길 수 있는 곳은 아소구에호(Plaza del Azoguejo) 광장인데 그곳을 중심으로 양 옆쪽을 보면 왜 로마인들이 거대한 아치형 교각을 세웠는지 알 수 있다. 양 옆의 언덕으로 인해 광장은 협곡 형태를 띠게 된다.

이제껏 수로를 타고 온 물이 협곡으로 떨어지면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 것이다. 협곡을 넘어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인위적인 구조물을 연결하여 최종목적지까지 물을 도달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양편을 이으려고 하니 거대한 구조물이 나타났고, 교량 형식이니 아치가 놓여졌다. 또한 협곡의 높이가 있으니 복층까지 올려 졌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고비아의 수도교가 탄생됐던 것이고, 그 가치를 높이 사 198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되기에 이른다.

- 악마가 만든 수도교?

옛날 옛적에 이 거대한 교량은 악마의 구조물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접착제도 없이 큰 돌조각들이 무지개를 그리며 놓여 있으니, 눈앞에서 보고도 그런 의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와 관련해서 전설이 하나 있다.

매일같이 물 주전자를 들고 비탈진 길을 오르내려야 했던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일이 고된 나머지 소녀는 새벽닭이 울기 전까지 자신의 집까지 물길을 내주겠다는 악마의 유혹에 넘어갔고,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기에 이른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소녀는 비극적인 상황을 모면할 수 있게 열렬히 기도를 하게 된다.

그동안 악마는 수로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토네이도가 발생하여 일에 차질이 생기게 된다. 그러다 갑자기 새벽닭이 울게 됐는데 그때 악마는 돌조각 하나만을 세우지 못한 채 건축물을 다 완성시킨 상태였다. 돌조각 하나 때문에 거래는 무산됐지만, 수도교는 온전히 그 자리에 생성됐고 소녀의 영혼도 빼앗기지 않게 됐다.

소녀는 마법 같았던 지난밤의 일을 세고비아 시민들에게 실토하게 됐고, 이에 사람들은 아치를 통과한 물은 유황 성분이 제거된 성수라고 여기며 새로운 건축물을 기쁘게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전설에도 내포되어 있듯이 옛날 사람들 입장에서는 거대한 수도교가 경외적인 존재였을지 모른다.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축조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수도교가 자신들의 식수를 공급해주고 있으니, 그 존립 자체를 인간 영역 밖에서 끌어오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수도교를 두고 거대한 '마법덩어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세고비아 시민들은 19세기 중반까지 그 '마법덩어리'에서 물을 공급받았다.

 

 

* 수로: 정수장 인근에서 찍었다. 교량 구간이 끝나면 수로가 지면과 가까이에 위치하게 된다.

- 정수장 시설까지!

세고비아는 수도교를 중심으로 그 안쪽은 구시가지이고, 그 밖은 신시가지로 분류된다. 수로의 지상 구간은 신시가지쪽에 있다. 한 10분 정도를 걷다보니 정수장과 함께 드디어 지상구간이 나왔다. 전설에 유황이 제거됐다고 언급됐듯이 정수장도 수도교와 함께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정수는 이물질을 물에 침전하는 방식으로 행해졌다. 정수장에는 심도가 깊은 물탱크를 만들었는데 그 물탱크에 모래나 황 같은 불순물들을 침전시키고, 깨끗한 윗물만 빠져나가는 식으로 정수시스템을 만들었던 것이다. 간단한 구조였지만 그들의 지혜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지상 구간의 수로는 말 그대로 수로였다. 돌을 깎아내고 그 위에 25*30*30cm 규격의 홈을 파 내 관로를 삼은 것이다. 수도교의 맨 위 부분도 그렇게 관로가 놓여 있다. 고대 로마인들의 건축기술에 다시 한 번 감탄을 했던 대목이었다.

지상 구간을 탐방하다 길을 잃고 말았다. 궁금했던 것들이 풀려나가는 재미에 빠져 있다 보니 길을 잘못 든 것이다. 덕분에 세고비아의 신시가지를 갈지(之)자로 마구마구 돌아다녔다. 그렇게 다니다보니 수로가 시작되는 산을 더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산은 구아다라마(Guadarrama)산이었는데 당시가 11월경이라서 그랬는지 산봉우리에는 눈이 쌓여 있었다. 아름다운 설봉이었다.

전날에는 수도교에 상상력을 더했다면, 이날은 수도교를 더 면밀하게 탐구한 날이 됐다. 문화유적 앞에서 멋지게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그 문화유산에 상상력도 더해 보고, 더 꼼꼼히 관찰해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아니겠나!

 

* 구아다라마(Guadarrama)산: 구아다라마산에서 발원한 물이 수도교 위를 흘러갔다.

* 세고비아

 

 

 

 

* 타리파성: 타리파성에서 해안가 방면의 모습. 왼쪽 상단에 또다른 성이 하나 있다. 산타카탈리나성이다.

 

 

 

<재미난 스페인 3편> 타리파

땅끝마을에 해적이 나타났다!

 

"당연한 말인데요, 서울에도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가 있어요. 우백호는 인왕산이고, 좌청룡은 낙산입니다. 낙산공원으로 유명한 그 낙산이에요. 남주작은 관악산이고, 북현무는 북한산입니다. 좌청룡우백호가 서울 안쪽에 위치한다면, 남주작북현무는 외곽에 자리잡고 있는 셈이죠. 그렇게 각각의 방위를 지키는 네마리 동물을 사신수라고 부릅니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강의를 할 때 종종 저런 설명을 했었다. 서울의 공간적인 면을 알기 위해서는 서울의 동서남북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사신수와 함께 언급을 하면 흥미를 유발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학습효과는? 그게 참 쉽지가 않다. 필자가 열심히 지도를 그리는 이유가 있다.

남쪽 안달루시아 지방에 있는 타리파(Tarifa)라는 곳에 갔는데 이곳이 스페인의 남쪽 땅끝마을이었다. 예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후 피스테라라는 곳을 방문했는데 그곳은 스페인의 서쪽 땅끝마을이었다. 여차저차해서 스페인의 남쪽과 서쪽의 땅끝마을을 탐방했던 것이다. 기왕이렇게 된 거 스페인의 동서남북을 땅끝에 초첨을 맞춰서 알아보았다. 사신수는 없어도 땅끝마을은 존재하니까.

일단 피스테라(Fisterra)부터 좀 더 살펴보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신 분들은 피스테라(Fisterra)에 대해서 잘 아실 것이다. 피스테라는 스페인의 서쪽 땅끝으로 순례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서 서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져 있다. 북쪽 땅끝은 바레스(Bares)라는 곳으로 피스테라에서 북동쪽으로 약 20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다. 비교적 거리가 가까운 바레스와 피스테라는 둘 다 갈리시아 지방에 속한다. 동쪽 땅끝은 크레우스(Creus)라는 곳이다. 정확히는 크레우스(Cap de Creus)곶인데 바로셀로나에서 북동쪽으로 약 160km 정도 떨어져 있다.

여기서 용어 정리를 해보자. 바다쪽으로 땅이 많이 튀어나온 지형을 두 가지로 나눠서 부른다. 크게 튀어나오면 '반도'가 되고, 작으면 '곶(串)'이 된다. 포항의 호미곶을 생각하시면 된다. 북한쪽에는 백령도와 마주하고 있는 장산곶이 유명하고 유럽쪽에서는 포르투갈의 호카곶이 유명하다. 호카곶은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맨 끝지점이다. 포르투갈의 서쪽 땅끝마을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곶은 영어로는 케이프(cape)로 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케이프타운(cape town)은 직역하면 '곶마을'이 될 거다.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에서는 카보(cabo)로 쓰는데 바로셀로나가 속해 있는 까딸루냐에서는 캅(cap)으로 적는다.

 

 

 

* 타리파섬: 흰색 등대가 보이는 곳이 타리파섬이다. 그 앞으로 타리파항이 있다. 모로코에서 출항한 배가 입항하고 있다.

 

 

 

다시 스페인 남쪽 땅끝마을인 타리파(Tarifa)에 대한 이야기다. 타리파는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카디스주에 속해 있는 도시다. 앞으로 지브롤터해협이 펼쳐져 있고, 그 건너로 북아프리카 모로코땅이 보이는 곳이다. 지브롤터에서 봤던 풍광하고는 또다른 모습이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북아프리카가 손에 잡힐 정도로 가까이보일 정도였다.

한편 타리파라는 지명은 711년 이베리아반도를 침공한 무어인 장군인 타리크 이븐 말릭(Tarif ibn Malik)의 명칭에서 나온 것이다. 무어인들이 북아프리카를 떠나 가장 먼저 도달한 곳에 타리크 장군의 이름을 따서 명칭을 붙인 것이다. 이렇듯 무어인들의 지배를 가장 오랫동안 받은 안달루시아 지방은 곳곳에 무어인들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타리파에는 구즈만 엘 부에노(Castillo de Guzman el Bueno)라고도 불리는 타리파성이 있다. 스페인어로 성을 카스티요(Castillo)라고 부른다. 워낙 스페인에 성이 많으니 앞으로도 '카스티요'에 대한 언급이 많을 것이다.

타리파가 스페인의 땅끝인만큼 타리파성은 스페인의 가장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더불어 유럽에서 가장 남쪽에 자리잡은 성이기도 하다. 북아프리카 모로코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15km 정도에 불과할 정도다.

타리파성은 960년에 무어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문명에 십자로상에 놓여 있다보니 타피라성은 지정학적으로 역사의 현장이 될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앞서 언급한 구즈만 엘 부에노도 그런 역사의 현장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1294년에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들은 무어인들까지 끌어들여 왕위를 쟁취하려고 했다. 레콩키스타, 즉 국토회복전쟁이 무색할 정도였다. 이때 구즈만 엘 부에노가 지키고 있던 타리파성이 격전지가 됐는데 반란군들은 성을 포위하며 항복을 요구했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반란군들은 구즈만의 아들을 포로로 잡고 있었고, 성을 포기하지 않으면 그 아들을 죽인다고 협박했었다.

 

 

 

*구즈만 엘 부에노상: 단검을 들고 있다.

 

 

 

이에 구즈만은 반란군측에 단검을 던지며, 그 단검으로 아들을 죽이라고 말했다. 아들이 아닌 국가를 선택한 것이다. 읍참마속보다도 더한 일이지 않은가? 만약 여러분들이 그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어떤 판단을...?

타리파성에 올라가면 타리파항이 바로 앞에 보인다. 타리파항에서는 모로코에 있는 탕헤르로 향하는 여객선을 탈 수 있다. 타리파항 너머로는 흰 등대가 우뚝 서 있는 타리파섬이 보이는데 육지와 워낙 가까워 이곳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타리파섬은 이베리안반도의 최남단이자 유럽의 최남단이기도 한다. 여러모로 의미가 큰 섬이지만 필자가 갔을 때는 쇠사슬로 문이 잠겨있었다. 알고보니 몇 년째 문이 잠겨 있다고 했다.

한 때 타리파섬은 해적들의 소굴이었다. 비좁은 지브롤터해협은 지정학적으로 중요한만큼 해적질을 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유럽 각국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약탈한 보물이 캐리비언 해적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면 타리파섬의 해적들은 통행세를 챙겼다. 어차피 길목을 차단하면 두고두고 보호비(?)를 뜯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캐나다 출신 역사학자 데이빗 데이는 자신의 저서인 <Smugglers and Sailors: The Customs History of Australia 1788-1901>(밀수업자와 선원: 호주의 관세 역사 1788~1901)에서 관세(tariff)의 어원이 타리파섬의 해적행위에서 기원한다고 언급했다. 15세기 이후 아메리카 및 인도로 가는 신항로가 개척되자 지중해 무역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유럽 각국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힘의 무게를 쏟게 된다. 지브롤터 인근 해역에 힘의 공백이 생긴 것이다. 해적들이 신날 일이었다.

해적들이 물러간 타리파는 현재 서핑족들의 천국이 되었다. 여름이면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서핑족들로 물반서핑족반이라고 할 정도다. 로스란세스 해변이 그 중심인데 대서양의 거친 파도가 계속 밀려들고 있었다. 서핑족들이 보기에는 물질하기 딱일 듯싶었다.

수영복도 없고 해서 필자는 그냥 모래사장을 걸었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온 몸을 휘감고 있었다. 무언가가 씻겨가는 느낌이었다. 이런 바람을 해남 땅끝탑에서도 맞은 적이 있었는데 바람을 맞으며 무언가 다짐을 했었다. 그 다짐들이 잘 이루어졌을까?

 

 

 

* 타리파성

 

 

 

 

* 유럽의 최남단: 타리파는 스페인의 땅끝이자 유럽의 최남단이기도 하다. 더 가고 싶어도 더 나아갈 수가 없다.

 

 

 

* 스페인의 동서남북 땅끝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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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브롤터암벽: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

 

 

 

<재미난 스페인 2편> 지브롤터

신화적 상상력을 뛰어넘는 먹방적 상상력!

 

 

지브롤터 VS 세우타

둘 중 어느 곳이 더 익숙한가? 당연히 지브롤터일 것이다. 지브롤터해협이란 지명이 워낙 유명하니까. 이에 비해 세우타는 새우탕과 발음만 비슷하지 처음 접하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런면에서 세우타보다는 지브롤터를 앞세우는 것이 맞다. 하지만 본 매거진의 명칭이 명색히 <재미난 스페인>이 아닌가? 아무리 인지도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하더라도, 스페인 땅이 아닌 지브롤터를 앞쪽에 배치할 수가 없었다.

세우타가 모로코 땅에 있는 스페인령 비지라면, 지브롤터는 스페인 땅에 있는 영국령 비지이다. 지브롤터는 우뚝 솟아있는 암벽이 인상적인데 이를 두고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고 칭한다. 이외에도 '자발 타리크'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타리크의 산'이라는 뜻으로 지브롤터의 어원이 됐다.

지브롤터에서 건너편 아프리카까지는 채 20km도 되지 않는다. 폭이 협소한 지브롤터해협을 두고 북쪽으로는 지브롤터, 남쪽으로는 세우타가 위치해 있는 것이다. 이런 지정학적인 중요성 때문에 고대시대부터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서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1700년, 스페인왕 까를로스 2세(Carlos II, 재위 1665-1700)가 사망한다. 그는 4살에 재위에 올랐는데 어려서부터 병약했고, 왕위를 이을 자식도 없었다. 카를로스 2세는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공 펠리페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루이 14세는 카를로스 2세의 매형이었다. 유명한 펠리페 2세를 포함한 16~17세기 스페인왕들은 합스부르크 혈통이었지만 이제 부르봉 왕가로 왕위가 넘어갈 판이었다. 프랑스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만든 태양왕 루이 14세! 루이 14세의 혈통이 스페인땅도 통치할 기세였다.

그러나 당시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황제의 아들인 카를 대공이 왕위 계승권을 요구했다. 레오폴트 황제도 역시 카를로스 2세의 매형이었다. 정리하자면 첫번째 누이는 루이14세, 두번째 누이는 레오폴트 황제에 시집을 간 것이다. 어쨌든 프랑스가 더욱더 강성해지는 걸 두려워한 유럽의 주요국들은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를 두고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라고 부르는데 1701년부터 1714년까지 이어졌다.

 

 

 

 

* 넬슨제독상: 넬슨 제독은 트라팔가 해전에서 스페인-프랑스 함대에 맞서 큰 승리를 거두웠다. 트라팔가 해전은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 아니라 나폴레옹과의 전쟁 중(1805년)에 벌어졌다. 트라팔가와 지브롤터는 약 60km 정도 떨어져 있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에서 영국은 어느 편에 섰을까? 프랑스-스페인 연합의 반대편에 섰다. 전쟁이 한창 진행중이던 1704년에 영국은 지브롤터를 점령하게 된다. 유럽을 뒤흔든 전쟁은 1714년,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인해 일단락 됐고 스페인은 큰 영토의 손실을 입게 됐다.

왕위는 어떻게 됐을까? 루이 14세의 손자 앙주공이 스페인왕 펠리페 5세가 됐다. 대신 프랑스왕을 겸임할 수 없다는 조건이 걸렸다. 루이 14세가 간절히 원했던 프랑스와 스페인이 결합되는 연합왕국은 탄생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어쨌든 이때부터 스페인 왕실은 부르봉 왕가가 된다.

가까이에서 바라다보니 지브롤터 암벽은 삼각뿔 형태로 암반면이 노출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인왕산 역사트레킹이 생각났다.

"인왕산 치마바위쪽을 보세요. 암반면이 잘 노출됐죠? 계속 보시다보면 에너지 넘치는 돌산의 기운이 느껴질 겁니다!"

강의에 집중시키기 위해 저런 이야기를 했었는데 오히려 더 떠들썩해졌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돌산의 강한 기운 때문인가? 이곳 지브롤터는 세우타와 함께 헤라클레스(Heracles)가 괴력을 발휘했던 곳이다.

힘의 상징인 헤라클레스는 서양에서는 허큘리스라고도 불린다. 그는 제우스가 바람을 펴서 낳은 아들이라 제우스의 정실 부인인 헤라의 시기를 태어날 때부터 받게 된다. 헤라의 저주는 헤라클레스가 성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됐는데 급기야는 그가 광기에 휩싸이도록 만들었다. 미쳐버린 헤라클레스는 자신의 손으로 부인과 아이들을 죽이고 만다.

처자식을 죽인 죄를 씻기 위해서 그는 12가지 과업을 이행해야 했다. 그중 하나가 서쪽 바다에 있는 에리페리아라는 섬에 가서 게리온의 소를 빼앗아 오는 것이었다. 게리온은 머리가 3개, 몸통도 3개인 무시무시한 괴물이었다. 아무리 천하장사라고 하지만 만만치 않은 상대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게리온이 사는 에리페리아는 가기도 험난했다. 가는 길목에 험준한 아틀라스 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헤라클레스의 괴력이 발휘된다. 아틀라스 산맥의 산줄기를 지워버린 것이다. 이때 바다를 막고 있던 산맥이 둘로 갈라지면서 새로운 바닷길이 열린다. 그 바다가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지브롤터해협이었다. 둘로 갈라진 산 기둥은 하나가 유럽쪽 지브롤터이고, 또 하나가 아프리카쪽 세우타이다. 그 두 기둥은 스페인 국기에도 그려져 있다.

헤라클레스는 게리온을 때려잡았고, 그의 소를 끌고 갔다. 이후 나머지 과업들도 잘 마무리했는데 죽어서는 승천하여 올림포스의 신이 된다.

 

 

 

* 지브롤터 헤라클레스 기둥: 세우타에 있는 기둥상보다 못하다.

 

 

 

한편 그리스 신화를 통해 옛 그리스인들의 지리적 세계관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들은 서쪽으로는 아틀라스 산맥, 동으로는 캅카스 산맥까지를 인식 범위로 두고 있었다. 캅카스 산맥은 코카서스 지방에 있는데 그곳에는 프로메테우스가 있다고 전해진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전해줘 제우스의 미움을 사게 됐고, 벌로 독수리에 의해 심장이 쪼이는 형벌을 받게 된다. 나중에 헤라클레스가 그 독수리를 때려잡아 프로메테우스를 자유롭게 해 준다.

아틀라스 산맥에는 아틀라스가 우주를 떠받드는 형벌을 받고 있었다. 헤라클레스의 과업중에 아틀라스의 딸들이 지키는 황금사과를 얻어오라는 과제가 있었다. 이에 아틀라스는 우주를 떠받드는 일을 잠시 헤라클레스에게 맡기고 황금사과를 얻어온다.

케이블카를 타고 지브롤터 암벽 정상부에 올라섰다. 푸른빛의 지중해가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는데 왜 이곳이 전략적 요충지인지 알 수 있었다. 바다건너 북아프리카 모로코가 보였다. 스페인령 세우타도 보였다.

모로코가 세우타의 반환을 요구하듯이 스페인도 지브롤터의 반환을 요구한다. 프랑코 정권 시절인 1969년에는 경제적 고립을 노리고 국경을 봉쇄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은 주민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반환을 거부하고 있다. 실제로 2002년에 실시된 주민투표에서 영국령 잔류에 대한 비율이 98%가 나왔다. 지브롤터 주민들은 스페인의 정치적 혼란, 경제적 불확실성을 이유로 들어 잔류에 표를 던진 것이다.

수면 아래 가라앉아있던 지브롤터 갈등이 2016년,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말하는 브렉시트로 다시 부상했다. 지브롤터 주민들은 본국과는 달리 95%가 유럽연합 잔류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이에 스페인 정부는 공동주권을 주장하며 'EU 잔류'를 회유책으로 제시했다. 영국정부는 당연히 반발했다.

스페인 땅에 있는 영국령 지브롤터에서 모로코 땅에 있는 스페인령 세우타를 보고 있자니 묘한 감정이 든다. 자신의 기둥이 박힌 두 도시가 모두 영유권 분쟁에 휩싸여 있다니! 헤라클레스는 어떤 느낌을 가질까? 이건 신화적 상상력으로는 풀어낼 수 없는 일일테지...

답사를 열심히했더니 배가 고프다. 지브롤터 암벽이 삼각김밥처럼 보인다. 신화적 상상력은 빈약하더라도 먹방적 사고가 넘쳐나는 순간이다.

 

 

 

* 지브롤터해협 일대 지도

 

 

 

 

* 헤라클레스기둥: 세우타항 방파제에 있다. 왼쪽에 바다 건너 봉우리 두 개가 보인다. 지브롤터다.

 

 

 

<재미난 스페인 1편> 세우타

매운맛일줄 알았는데 섞인맛이었네!

 

'세우타? 새우탕이 아니고?'

처음 세우타(Ceuta)라는 지명을 들었을 때의 반응이었다. 평소에 워낙 새우탕 사발면을 좋아해서 저런 반응이 나온 것이다. 입맛을 다시며 스페인이 포함된 이베리아 반도 지도를 찾아보았다. 마드리드, 바로셀로나, 세비야, 빌바오 등등... 스페인 프로축구 프리메라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팀들의 연고지 위주로 찾아보았다. 없다. 그래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따라서 찾아보았다. 팜플로냐, 부르고스, 레온 등등... 역시 없다. 옆나라 포르투갈까지 샅샅이 찾아보았다. 하지만 도대체 눈에 안 보이는 것이다.

'니가 거기 왜 있어. 그러니까 찾기가 힘들지!'

세우타는 이베리아반도가 아닌 북아프리카에 위치해 있었다. 정확히는 모로코 땅 한 켠에 섬이 아닌 섬처럼 고립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렇게 한 나라의 영토이지만 다른나라 안에 있는 땅을 두고 비지(飛地)라고 부른다. 한자 '날비(飛)'가 쓰인 것처럼 본국과는 떨어져 있는 영토다. 참고로 비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있는 러시아 영토인 칼리닌그라드다.

세우타는 지중해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지브롤터(Gibraltar)해협에 위치해 있다.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쪽으로는 영국령 지브롤터가 있고, 북아프리카쪽으로는 세우타가 있는 것이다. 지브롤터 해협은 좁은 곳은 폭이 20km가 안 될 정도다. 대서양과 지중해가 교차하고, 유럽과 아프리카가 손에 닿을 듯 바라다보이니 지브롤터해협 일대가 얼마나 중요하겠나! 지정학적인 눈을 가지지 않은 사람도 딱보면 알 정도일 거다.

그런 세우타에 항구를 건설한 이들은 카르타고인들이었다. 카르타고인들은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로마와 전쟁을 벌이는데 그게 바로 포에니 전쟁이다. 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그 유명한 한니발이 활약한다. 한니발이 기세를 올렸지만 카르타고는 포에니 전쟁에서 패배한다. 세우타도 로마의 세력권 안에 놓이게 된다.

대륙과 대륙이 만나는 문명의 교차점이어서 그랬나? 세우타는 반달족들이 쳐들어 오기도 했고, 비잔틴제국이 점령하기도 했다. 북아프리카가 이슬람화가 된 이후에는 아랍인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더불어 711년, 이베리아반도에 이슬람 무어인들이 침공하여 서고트 왕국을 무너뜨리게 된다. 이때부터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그리스도교 왕국들은 레콩키스타(reconquista)라고 불리는 국토회복운동에 나선다.

15세기가 됐고 대항해 시대가 열렸다. 먼저 돛을 높이 달고 대서양으로 향한 건 스페인이 아니라 포르투갈이었다. 당시 스페인 남부에는 이슬람 무어인들의 나라가 계속해서 항전하고 있었다. 그 유명한 그라나다 왕국이 바로 그것이다. 콜럼버스가 스페인 왕의 지원을 받아 대서양으로 향한 때가 1492년이었다. 이 해에 그라나다 왕국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사라지게 된다. 레콩키스타도 종료된다.

1415년 세우타는 포르투갈에 의해 점령된다. 세우타 공략에는 항해왕 엔히크(Henrique)가 앞장섰는데 그는 포르투갈왕 주앙 1세의 셋째 아들이었다. 포르투갈은 세우타를 통해 북아프리카에서의 세력 확장에 나서게됐다. 대항해시대의 서막이 열리게 된 것이다. 참고로 엔히크는 '항해왕'이었지만 진짜 왕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다음 왕위는 첫째 아들인 두아르테가 이어받았다.

 

 

 

* Royal Walls: 직역하면 '왕립장벽'이 될 것이다. 애초 이 성벽은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후 스페인이 세우타를 점령했고, 왕립장벽도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 계속 보강되었다. 성체에 여기저기 탄환의 흔적들이 있다. 보기만해도 참 치열하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카르타고는 왜 나왔고, 레콩키스타는 또 무엇인가? 더군다나 스페인 땅이라면서 포르투갈 항해왕은 왜 또 불쑥나왔는가?

익숙지 않은 지명에 낯선 이름까지... 세계사 공부를 제대로 안 했던 값을 제대로 치르고 있다. 그래도 세우타로 가는 여객선은 지브롤터 해협을 시원스럽게 내달리고 있었다. 객실밖으로 나갔더니 그 유명한 지브롤터 암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1578년이었다.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 1세(Sebastião I)가 모로코인들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만다. 당시 세바스티앙 1세의 나이가 24살이었는데 결혼을 하지 않아 왕비도 없었고, 후사도 없었다.

1580년, 이런 권력 공백을 틈타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을 병합하기에 이른다. 이후로 세우타는 스페인의 통치하에 놓인다. 60년간의 합병을 뒤로 하고, 1640년에 포르투갈이 스페인에서 독립했을 때도 세우타는 계속 스페인령으로 남게 된다.

미끄러지듯 여객선이 세우타항에 들어선다. 그런데 방파제 끝단 부분을 보니 기둥 두 개를 들고 서있는 헤라클레스(Heracles)상이 보였다. 좀 작았다. 이게 전부인가? 육중한 몸매에 천하장사의 기운을 가진 헤라클레스의 동상을 기대했는데... 아니었다. 알고보니 세우타의 중심지역에 큰 동상이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스페인의 국기를 보면 기둥 두 개가 들어가있는데 그게 바로 헤라클레스가 들고 서 있는 기둥들이다.

세우타말고도 모로코땅에는 멜리야(Melilla)라는 스페인의 비지가 하나 더 있다. 멜리야도 지정학적으로 무척 중요한 곳에 위치해있다. 스페인이 영국으로부터 지브롤터의 반환을 요구하듯이 모로코는 스페인에게 세우타와 멜리야의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까지 세우타에 대해서 이야기해봤다. 처음에는 새우탕면처럼 얼큰한 맛을 기대했는데 온갖 재료가 뒤섞인 잡탕면을 먹은 느낌이다. 대륙이 교차하고 해양이 연결된 문명의 십자로여서 그런 풍미가 발현됐을 것이다. 매운맛이든 섞인맛이든 맛나게 즐겨보자 배고프면 여행도 잘 안되는 법이니까!

 

 

 

 

* 세우타 헤라클레스 기둥: 이게 진짜 헤라클레스 기둥 조형물이다. 세우타항 방파제에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하다.

 

 

 

* 이베리아반도 지도: 글씨를 제외하고 직접 손으로 그렸다.

 

 

 

 

 

 

 

 

 

* 아야소피야: 성소피아 대성당으로도 불리는 곳이다.

 

 

 

☞ 지난 2023년 12월 14일부터 2024년 1월 26일까지 스페인과 튀르키예를 여행했습니다. 여행은 크게 3단계로 나눠서 했는데 1단계는 산티아고 순례길, 2단계는 스페인 도시여행, 3단계는 튀르키예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이 포스팅들은 그 여행일지 노트를 토대로 작성됐습니다. 여행일지를 중심에 두고 작성된 포스팅이라 그렇게 재미진 포스팅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디테일한 정보를 가져다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아야소피야: 그리스정교회 성당 시절에 설치된 모자이크. 모스크로 개조된 뒤에는 모자이크 위에 회칠을 해서 모자이크가 보이지 않게 됐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흘러 회칠은 벗겨졌고, 모자이크는 다시 세상에 나타났다.

 

 

 

* 2024년 1월 25일 목요일: 43일차 / 흐림

- 전날에는 블루모스크만 탐방했고 그 맞은편에 있는 아야소피아를 탐방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날은 마음먹고 아야소피아를 향해갔다. 그런데 입장료가 무려 25유로였다. 우리돈으로 약 3만 7천원 정도였다. 탐방 시간이 1시간 남짓인 거에 비해 비싼 편이다. 더군다나 녹색카페트가 깔린 1층에는 갈 수도 없었다. 그곳은 무슬림 신자들만 갈 수 있다고 했다.

- 아야소피야는 처음 그리스정교회 성당으로 지어졌다. 이후 모스크로 개조를 하게 된다. 또 박물관으로 이용되기도 했는데 지금은 다시 모스크 기능을 하고 있다. 아야소피아는 '성소피아 대성당'으로도 알려져 있다.

- 아야소피아는 애초 동로마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그리스정교회 성당이었다. 첫 삽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절인 326년에 떴다. 하지만 큰 돔 형식의 기하학적으로 뛰어난 건축물로 태어난 건 537년, 유스티아나누스 1세 황제 시절이다.

- 이후 1453년 경, 투르크가 이스탄불을 정복하자 성소피아 성당은 모스크로 개조된다. 이때 내부 장식물들에 회칠이 칠해진다. 당시 성당 내부에는 뛰어난 모자이크 장식들이 있었는데 그 모자이크들이 회칠로 덮혀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고, 그 회칠도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칠이 벗겨지니 긴 세월동안 잠들어 있었던 모자이크들이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아무리 덧칠을 한다고 해도 아름다운 작품들은 언젠가는 다시 빛을 내기 마련이다.

- 아야소피아 탐방 이후로는 궐하네공원을 누볐다. 궐하네공원(Gülhane Park)은 직역하면 '장미집 공원'이라는 뜻이다. 장미가 예쁘게 피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떠들썩한 이스탄불에서 한가롭게 산책할 수 있는 딱 좋은 곳이다. 궐하네공원 바로 담장 넘어가 톱카프궁전이다. 톱카프궁전은 정말 아름다운 곳인데... 입장료가 무려 45유로... 우리 돈으로 6만 7천원! 에잇~ 돈 없어!ㅋ

- 그 궐하네공원 끝부분에 가면 고트 기둥(column of goths)이 있다. 543년 유스티아누스 1세 때 만들어진 고트 기둥은 고트족에 대한 승리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유스티아누스 1세? 그렇다. 아야소피아를 만들게 한 그 유스티아누스 1세다. 유스티아누스는 법전을 만들고, 영토확장에 나서는 등 옛로마의 부활을 꿈꾸던 동로마제국의 황제였다.

- 475년경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했다. 그러니 543년이면 서로마 제국 멸망 후 60년도 훨씬 더 넘는 세월이 지난 것이다. 하지만 유스티아누스는 고트족과의 전쟁을 벌이며 옛 로마 영토의 회복을 꿈꾸었다. 참고로 그 고트족 중, 서고트족은 스페인의 민족적 근간이다.

- 궐하네공원 탐방을 끝으로 이스탄불 명소 탐방도 거의 끝이 났다. 26일 금요일에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안전하게 돌아가면 된다. 이제 여행도 끝이나는구나. 그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지!

 

 

 

* 블루모스크: 아야소피아의 맞은편에 있다. 블루모스크와 아야소피아는 다른 건물이다.

 

 

 

* 블루모스크: 블루모스크의 돔형 천장.

 

 

 

 

* 2024년 1월 26일 금요일: 44일차 / 흐림

- 진짜 마지막날이다. 그런데 비행기 시간이 오후 9시 50분경이었다. 그래서 이스탄불 대학교로 향향했다. 검색을 해보니 캠퍼스 안에 바예지드탑이 있던 것이다. 이 바예지드탑은 화재감시탑으로 이용됐고, 이제는 날씨를 알려주는 조명 시설이 설치됐다고 한다.

- 바예지드탑을 본 후 바로 옆에 있는 그랜드바자르를 향해갔다. 역시 갔더니 우리나라 재래시장 같은 곳이었다. 대신 규모는 상당한 거 같았다. 미로처럼 얽혀있어서 출입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굳이 오래있을 이유가 없어 다시 호스텔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스태프들과 인사를 하고 공항버스를 타러 Aksaray역 부근으로 이동했다.

- 공항버스를 기다리는데 빗방울이 또 떨어진다. 1월의 튀르키예는 정말 우기가 맞나 보다. 6일 있으면서 비를 안 맞은 날이 딱 하루였으니...

- 이스탄불 공항이 신공항이라서 그런가? 보안검색이 대단히 까다로웠다. 비행기를 탈 때까지 총 3번에 걸쳐 짐 검사를 받아야 했다.

- 이제 진짜 여행이 끝날 때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는 해프닝이 많았다. 왕물집, 감기몸살, 바가지, 교통사고, 가스누출... 그런 것들을 겪었지만 퉁하고 넘겼다.

- 그것도 여행의 일부니까!

앞으로 냉혹한 현실이 내 앞을 가로막겠지. 그때마다 이런 말을 하며 퉁하고 넘길 것이다.

- 그래 그것도 삶의 일부야!

*** 1월 27일 오전 11시경 인천공항 도착함. 여행 종료. 그런데 귀국하자마자 다시 비행기표 검색하고 있는 나...ㅋ

 

 

 

* 고트기둥: 543년, 유스티아누스 1세 때 만들어졌다.

 

 

 

 

* 바예지드탑: 이스탄불 대학교 안에 설치되어 있다. 술탄마호메트광장에서 이스탄불 대학교가 있는 베야지드광장까지는 약 5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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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스포루스 해협: 보스포루스 대교

 

 

 

☞ 지난 2023년 12월 14일부터 2024년 1월 26일까지 스페인과 튀르키예를 여행했습니다. 여행은 크게 3단계로 나눠서 했는데 1단계는 산티아고 순례길, 2단계는 스페인 도시여행, 3단계는 튀르키예 여행이었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여행일지를 기록했습니다. 이 포스팅들은 그 여행일지 노트를 토대로 작성됐습니다. 여행일지를 중심에 두고 작성된 포스팅이라 그렇게 재미진 포스팅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디테일한 정보를 가져다 주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여행일지를 객관화 하는 작업은 분명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이렇게 쌓이고 쌓인 것이 개인의 역사가 되고, 더 나아가 모두의 지식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 여객선에서 바라본 보스포루스 해협

 

 

 

* 2024년 1월 23일 화요일: 41일차 / 맑음

- 숙소를 옮겼다. 술탄 광장 인근에 있는 cheer hostel. 큰 순둥이 개가 떡하니 반겨주는 곳이었다. 개 이름은 '저먼'이었다. 이곳에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스태프가 있다는 후기가 있어서 옮긴 것이다. 진짜 경기도 의정부에서 생활을 했다는 스태프가 있었다. 덕분에 한국어로 썰 좀 풀었다. 물론 그 스태프가 한국어를 잘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조식 포함 15유로에 순한 개도 있고, 한국어도 쓸 수 있으니 잘 옮긴 듯하다.

- 이스탄불 구도심의 중심 지역은 술탄 광장이다. 술탄 광장에는 아야소피아, 블루모스크,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콘스탄틴 오벨리스크, 뱀형상 청동상 등등... 수많은 문화 유산이 산재해 있다. 새로 옮긴 호스텔에서 술탄 광장까지는 걸어서 5분도 안 걸렸으니 잘 옮긴 셈이다.

- 전날에는 10분 짜리 정기선을 타고 보스포루스해협을 일대를 누볐지만 이날은 아예 여객선을 타고 보스포루스 해협 안쪽으로까지 가보기로 했다. 요금이 65리라로 생각보다는 저렴했다. 시간은 왕복 2시간 정도였는데 보스포루스 대교 뿐만 아니라 파티흐 술탄 메흐메트 다리까지 가는 여객선이었다.

- 이날은 날씨가 좋았다. 이스탄불에 올 때부터 계속 비를 맞았는데 이날은 하늘이 청명했다. 그래서 사진도 잘 나왔다. 진짜 예전부터 와보고 싶었던 보스포루스 해협 일대를 잘 둘러본 거 같다.

- cheer hostel은 도리토리 호스텔이었다. 그런데 밤에 추운 것이다. 그 전에 홀에서 여행일지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때가 1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그런데 누군가 스태프에게 지금 가스 배관에서 가스가 세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있는데 갑자기 가스 냄새가 확 올라오는 것이다. 인근 공사장에서 가스관을 잘못 건드렸다. 아니 왜 밤중에 공사를 하며, 또 한다면 조심히 잘하지 왜 가스배관을 건드려서 동네 사람들을 공포에 빠뜨리는 것인가?

덕분에 이날은 아주 춥게 잤다...ㅋ

- 갑자기 가스폭발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래서 내가 묵는 방에 들어가 위험상황임을 알리고 가방을 챙겨나왔다. 다른 호텔, 호스텔 사람들도 잠옷 차림으로 밖으로 나왔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동네에 가스 누출 사고라니...!

 

 

 

* 테오도시우스 오벨리스크

 

 

 

* 콘스탄틴 오벨리스크

 

 

 

 

* 2024년 1월 24일 수요일: 42일차 / 흐림

- 숙소가 아야소피아와 아주 가까웠다. 그래서 이날은 아야소피야를 보러갔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이다. 분명 입장료가 있는 걸로 아는데 공짜로 들어간 것이다. 알고 보니 그곳은 아야소피아가 아니라 블루모스크였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가 블로모스크의 정식 명칭인데 내외관 모두 깔끔하고 정갈한 분위기였다. 옆에 있는 블루모스크를 아야소피아로 착각해 열심히 탐방했던 것이다.

- 시간이 남아서 해안가로 다시 한 번 나갔다. 그런데 그 와중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식당을 찾고 있었는데 뭔가 뒤에서 '빡'하고 내 왼쪽팔을 때렸던 것이다. 자동차 사이드미러였다. 그나마 다행인건 내가 팔짱을 낀 자세를 하고 있었고, 옷을 두껍게 입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이스탄불 구도심의 교통상황은 엉망 그 자체다. 자동차, 트렘, 오토바이, 사람이 뒤엉켜서 정신이 없을 정도다.

- 그런 혼란스러운 곳에서 제대로 당한 것이다. 운전자는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 하고 가벼렸다. 확 사이드미러를 부셔버릴까 보다! 바가지에, 가스누출에, 교통사고까지...! 이스탄불이 이렇게 익사이팅한 곳인가?

- 호스텔에 돌아오니 한국말을 하는 현지 스태프가 대신 사과를 하더라. 그 스태프가 사고를 낸 것도 아닌데 말야...

 

 

 

* 보스포루스 해협: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는 러시아 국기를 단 화물선.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빼앗은 크림반도가 있다.

 

 

 

* 치어스 호스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스태프가 숙박객의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순둥이 개, 저먼이 그 모습이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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