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리산: 정렴치에서 찍은 사진이다. 지리산에서는 태풍 '무이파'를 만났다.  자전거에 걸린 노란색 깃발이 강풍에 날라갈 것 같다!  사진 촬영 기능이 고장이 나서 동영상에서 찍은 걸 사진으로 뽑아내었다. 그만큼 여러면에서 애로점이 많은 여행이었다. 그나마 무위파 때문에 디카는 완전히 망가져 지리산 이후로는 사진이 남는게 없다. 태풍을 맞으니 디카, 자전거속도계, 휴대전화 등 모든 전자기기가 고장이 났던 것이다. 역시 자연재해 앞에 인간은 그저 초라한 존재일 뿐!

 

 

 

 

"이거 뭐야? 여기 텐트가 왜있어?"
"왜 그래요? 거기 뭐가 있어요?"

"응. 누가 여기서 야영을 하나봐. 아무튼 깜짝 놀랐네!"

깜짝 놀란 건 오히려 나다. 당신의 오줌 소리에 단잠을 깼기 때문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왜 내 텐트 옆에다 노상방뇨를 하는 것인가? 비타민을 복용했는지 그 남자의 소변 냄새는 참 '거시기'했다. 나는 억울했지만 그래도 꾹 참아야 했다. 팔자려니 해야지 별 수 있겠는가. 이게 다 돈이 없어서 벌어진 일인데 어쩌겠는가.

누구는 캠핑을 자연 속에서 누리는 '웰빙'이라고 표현하지만 나에게는 그저 '하룻밤 보내기'에 불과했을 뿐이다. 매일 같이 야영지를 물색하는 것이 곤욕이었고 그저 하룻밤을 버티는 것이 최선이었다. 누구는 나에게 이렇게 툭 질문을 내던질지 모른다.

"캠핑장 가면 되잖아. 요즘 캠핑장이 얼마나 싸고 좋은데..."

 

 

 

 

 

 

 

* 순천만: 요즘은 일반 민박보다는 한옥 팬션이 인기가 좋다고 한다. 한적한 시골에서 전통 가옥 체험도 하니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필자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그저 텐트에 비가 안 세고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 것만으로 감지덕지였으니까.

 

 

 

 

 

무척 공포스러웠던 새벽의 폭우



2011년 여름. 나는 제2차 국토종단자전거여행을 했다. 서울에서 시작된 여정은 충남을 거쳐 전북, 그리고 지리산으로 이어졌다. 위의 '텐트 노상방뇨' 에피소드도 그때 발생했다.

7월, 장마철 한복판에 행했던 여행이었던 터라 웬만한 비는 맞을 각오를 했다. 하지만 비도 비 나름이다. 수인한계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적당량의 비는 찌는 듯한 더위를 날려주는 청량제가 되지만 엄청난 폭우는 여행객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더군다나 나처럼 여행 중 매일같이 텐트생활을 해야 하는 자전거여행자들에게, 물폭탄과 같은 폭우는 정말 지긋지긋한 '악귀'와도 같은 존재다. 돈이 없어 싸구려 텐트를 들고 다녀야 했던 나에게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새벽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나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마치 호러영화에서 핏방울이 주인공 머리 위로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그런 엄청난 공포!

그만큼 나의 텐트는 방수가 안 됐고 비가 오는 날, 특히 새벽에 비가 오는 날은 비상이 걸렸다.

'이거 오늘도 좋게 잠자기는 땡이구만!'

이런 상황이니 캠핑장에 간들 달라질 것은 없었다. 캠핑장에서 비를 맞나, 야산 같은 곳에서 비를 맞나 결론은 같았다. 그 다음날은 수해복구에 나서야 했던 것이다. 한편 자전거여행이나 장거리도보여행을 해보신 분들은 생각보다 캠핑장 찾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잘 아실 것이다. 여행이라는 것이 그렇다. 마음먹은 것처럼 딱딱 안 맞아 떨어진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 수도 있고, 일정이 변경될 수도 있는 게 여행이다. 그래서 장거리 무동력여행을 하실 분들은 공동묘지에서도 잘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시고 떠나시는 게 차라리 속 편하실 것이다.

 

 

 

 

 

 

 * 평택: 평택에서는 저렇게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지낼 수가 있었다.

 

 

 

 

 

충남 서산에서 맞은 물폭탄

'텐트 노상방뇨' 에피소드도 전북 전주에 있는 한 공원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늦은 시각까지 야영지를 못 찾다가 한적한 공원이 있기에 눈을 딱 감고 텐트를 쳤던 것이다. 다행히 그날은 비를 안 맞았지만 웬 낯선 남자의 노상방뇨 세례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에피소드는 그렇게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캠핑을 하다보면 일상생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갖가지 에피소드들이 자연스럽게 피어오르기 때문이다.

2011년 여행 당시 나는 충남 서산에서 제대로 물폭탄을 맞았다. 해미읍성을 탐방한 후 기포리라는 곳에 베이스캠프를 꾸렸을 때였다. 저녁을 지어먹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수많은 별들이 펼쳐져 있는 게 아닌가? 가끔 별똥별도 떨어지고.

'이야 별 뜬 거 보니까 비가 안 오겠네. 푸하핫! 오늘은 편하게 잘 수 있겠어!'

하지만 여행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딱 맞아 떨어지겠나? 그날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단순히 지나가는 소나기가 아니었다. 거의 2~3시간에 걸쳐 양동이로 쏟아 붓듯이 억수같은 비가 내렸다. 텐트 안에도 빗물이 흘러 넘쳤고, 그날 밤 나는 뜬 눈으로 지새워야 했다. 자기 전에 봤던 그 초롱초롱한 별들이 정말 미웠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어차피 젖은 옷가지 등은 햇볕에 말리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텐트의 위쪽 폴대에 금이 갔다. 예비 폴대도 없던 터라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제발 지리산까지만 버텨라. 서울 가면 정말 멋진 텐트로 바꿔주마!'

하지만 그건 나만의 기원이었을 뿐이다. 날이 갈수록 폴대의 금은 더 깊어졌고 텐트의 모양은 점점 더 엉망이 되어 갔다. 원래 삼각형이 되어야 할 텐트가 형태를 잃고 주저앉은 것이다. 그래서 어떤 날은 지붕 부분이 내 얼굴에 내려 앉아 깜짝 놀라 잠에서 깨기도 했다. 마치 비닐로 만든 관 속에 내가 누워 있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은 텐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됐다. 새로운 텐트를 하나 구매를 해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돈이 문제였다. 누구는 방수력이 빵빵한 텐트를 구매하고 싶지 않겠나?

 

 

*** 원래는 8월 14일에 2013년 여름정기 투어를 떠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정에 생겨서 하루를 미뤄 8월 15일에 떠납니다.

그러고보니 광복절에 여행을 떠나네요!

 

 

 

 

 

 

 

 

 

 

 

 

 

 

 

 

 

 

 

 

 

 

 

 

 

 

 

 

 

 

 

 

 

 

 

 

 

 

 

 

 

 

 

 

 

 

 

 

 

 

 

 

 

 

 

 

 

 

 

 

 

 

 

 

 

 

 

 

 

* 마임: 조명과 함께 모닥불이 소품으로 쓰였다. 마임의 소품으로 모닥불이 이용되는 건 처음 보았다.

그만큼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품격 높은 공연을 많이 선보인다.

 

 

 

 

 

 

# '다시 서야 할 아시아1인극제'

그렇다. 돈이 문제였다. 오죽했으면 여름에 수박을 쪼개먹던 큰 평상 4개를 붙여서 무대를 만들 정도였을까. 또한 손·발이 턱없이 부족하여 필자와 같은 고급인력(?)이 화장실 청소를 하며 자원활동을 해야 했다. 필자는 계획했던 '여름 정기투어'를 잠시 접어두기까지 했다. 그러다 뒷마무리까지 마친 후, 8월 6일에서야 서울로 귀가할 수 있었다.

사실 2013년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칫 했으면 아시아1인극제의 명맥이 끊길 뻔했다. 그런 상황을 반영하듯 이번 대회의 부제는 '다시 서야할 아시아1인극제'였다. 그렇지만 십시일반이라고 공연자들이 무료공연을 펼치고, 뜻있는 분들이 격려금을 전달해 주셔서 어려운 상황에서나마 대회를 잘 마칠 수가 있었다.

지역의 문화행사가 돈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면 큰 문제일 것이다. 지원금의 유·무에 의해서 대회 개최의 유·무가 결정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지역문화 행사에 대한 안정적인 지원과 관심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된다.

 

 

 

 

 

 

* 무대: 돈이 없어서 큰 평상 4개를 붙여서 무대를 만들었다. 큰 느티나무가 뒷배경으로 쓰인터라 환상적인 모습이 연출됐다. 야간 조명이 무대 뒤 나무들을 비추었을 때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전화위복이라고 환상적인 무대 덕택인지 모르겠지만 올해<거창아시아1인극제>는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그런 의미에서, 입장료는커녕 오히려 동네 분들에게 돼지고기와 막걸리를 대접하는 <거창아시아1인극제>에 대한 안정적인 예산 집행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면소재지에 짜장면집 하나 없는 '깡촌'에서 마을 주민들이 언제 그런 수준 높은 문화예술 활동을 접할 수 있겠는가! 소외지역 문화행사 지원 차원에서라도 적절한 지원금은 반드시 집행되어야 할 것이다.

기왕 돈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가지 더 언급하고 가겠다.
2012년 <거창아시아1인극제>에서는 부대행사로 거창·함양지역의 다문화 가정들의 1박 2일 캠프가 개최됐었다. 참가자들은 국적도 다양하고, 피부색도 조금 다르긴 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 중요한가! 그저 축제를 재밌게 즐기면 그만 아니던가! 그래서 그런지 꼬맹이들의 장난 때문에 거창귀농학교의 운동장은 떠들썩했다. 그들의 엄마인 이주여성들도 조금은 느긋한 모습이었다. 공연을 즐기며 하룻밤 야영을 할 수 있다는 게 좋았던지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 거창아시아1인극제

 

 

 

 

당시에는 아시아 각국에서 온 공연자들이 자국의 전통무를 공연했었다. 필리핀에서 온 공연자들이 필리핀 이주 여성들 앞에서 공연을 펼쳤고, 인도네시아 온 공연자들이 인도네시아 이주 여성들 앞에서 춤사위를 펼쳤다. 이주 여성들의 표정은 무척 진지했다. 낯선 곳에서 자국의 전통무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큰 감흥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공연중에 눈물을 훔치던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 돈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괜히 쓸데없는 토목 공사 하느라 세금 낭비하지 말고 이런 문화축제에 쓰면 얼마나 좋겠는가!

 

 

 

 

 

 

 

*거창귀농학교

 

 

 

 

 

 

 

 

# <고제 사과길>

앞서도 언급했듯이 거창군 고제면은 홍로 사과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8월 말 경에 가보면 '새빨간' 사과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멀리서보면 마치 녹색의 그라운드에 빨간색 점들이 뿌려진 것처럼 보인다. 녹색과 빨간색이 서로의 배경색이 되어 시각적으로 장관을 이루는 것이다.

필자가 누군가? 역사트레킹 마스터 아닌가! 자원활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트레킹 코스를 하나 개척해보았다. 약 6km 정도 되는 짧은 코스인데 사과와 관련된 도보여행길이다. 이름하여 <고제 사과길>이다. 이 길을 걸으면 탐스러운 사과와 함께 백두대간 삼봉산의 아름다운 풍광도 감상할 수 있다.

이제 추석이 한 달 남짓 남았다. 그럼 사과 수확 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음에 사과 작업하러 거창귀농학교에 갈 때는 '뺑끼'를 쓰지 않고 일을 좀 열심히 할 생각이다. 특히 화장실 청소에 역점을 둘 것이다. 그럼 이모님에게 이런 소리를 듣지 않을까?

'곽 작가. 조단조단 일 잘 하네. 이 막걸리 한 잔 묵고 하그래!'

 

 

 

 

 

 

 

 

* 거창군 고제면: 고제면은 전형적인 산촌 마을의 모습을 보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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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제 사과길>: 거창아시아1인극제 자원활동을 마친 후, 돌아오는 길에 <고제 사과길>이라는 트레킹 코스를 하나 개척해 보았다.

 

 

 

 

 

* 홍로: 거창군 고제면은 홍로하는 사과 품종으로 유명한 곳이다. 지금은 사과들이 푸른 빛을 띠지만 8월 말 정도 되면 아주 '새빨간' 사과가 된다.

뒤쪽에 보이는 산은 삼봉산이다.  

 

 

 

 

 

 

 

"곽 작가, 그딴 식으로 할라믄 다시는 여그 오지마라. 그라케 일하믄 여러사람 욕본데이..."

날카로운 이모님의 음성이 내 머릿속을 한바퀴 휘돌아 나갔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거지?

'아, 맞다. 1층 화장실 청소 때문에 그러시는구나!'

솔로 변기를 구석구석 세척해야 했지만 필자는 귀찮다는 이유로 물만 들입다 뿌려댔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화장실 청소가 말끔히 되지 않았고, 그 일이 이모님의 심기를 건드렸던 모양이다. '뺑끼' 좀 썼다가 제대로 혼쭐이 났던 셈이다.

 

 

 

 

 

 

 

 

 

* 사과: 8월 말이 되면 이렇게 사과는 새빨갛게 된다. 이 사진은 작년 9월 달에 촬영했다.

 

 

 

 

 

 

# 거창귀농학교

필자가 혼쭐이 났던 곳은 거창귀농학교였다. 거창귀농학교는 경남 거창군 고제면에 있는 곳인데 폐교를 리모델링하여 설립되었다. 고제면은 거창 읍내에서 북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져있는데 백두대간인 삼봉산과 덕유산이 자리잡고 있어 말그대로 '깡촌'인 곳이다. 이곳의 농업형태도 논농사보다는 고랭지 작물 위주로 경작된다.

특히 이곳은 홍로라고 불리는 사과 산지로 유명한데 이 홍로라는 품종은 잘 영글면 <백설공주>에 나오는 그 '새빨간' 사과처럼 아주 먹음직스럽고, 빛깔도 무척 고운 품종이다. 이런 환경적 특성 때문에 거창귀농학교는 사과나 오미자 같은 특산 작물에 대한 현장실습 교육을 많이 실시한다고 한다.

거창귀농학교? 귀농학교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욕을 먹었다? 그렇다면 필자에게 귀농을 준비하냐고 물으실 분들도 있을 것이다. 느긋하게 사과 농사나 지으면서 말이다... 아니다. 필자는 귀농할 의사가 없다. 나이가 들면 백두대간 아래에 터를 잡고 누렁이들을 기르며 살고 싶기는 하지만 농사를 지을 생각은 없다. 그리고 농사는 아무나 짓나? 필자처럼 게으른 사람은 남의 집 소작도 못 부칠지 모른다.

 

 

 

 

 

 

 

* 죽방울놀이: 우리놀이문화연구회 이원하 소장이 아이들 앞에서 죽방울놀이 시범을 보이고 있다.   

 

 

 

 

 

# 자전거여행하다 자원 활동했다!

필자는 2012년 여름에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행했다. 강원도를 거쳐 경상북도를 종단한 후 경남 거창에 진입했는데 문득 한대수 선생이 떠올랐다. '물 좀 주소'를 부른 가수 한대수 말고 거창 민예총을 이끈 연극인 한대수 선생이 떠올랐던 것이다. 거창 한대수 선생은 민속무(民俗舞)로 유명한 분인데 그중에서도 살풀이와 관련된 춤사위가 일품인 연극인이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7년 만에 다시 뵈었는데 한대수 선생은 변한게 거의 없으셨다. 오히려 7년 전보다 훨씬 더 건강해보이셨다.

"백두대간 여행한다고? 그라지말고 아시아1인극제나 와서 도와라."

그렇게 하여 필자는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잠시 멈추고 <거창아시아1인극제>와 인연을 맺게 됐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식으로 자전거여행을 하다가 연극제 자원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 삼봉산이면 백두대간인데 그곳에서 숨 좀 돌려보지 뭐!'

 

 

 

* 죽방울놀이

 

 

 

 


# <거창아시아1인극제>

거창아시아1인극제? 혹시 수승대라는 명승지에서 개최되는 <거창국제연극제>의 다른 이름인가? 아니다.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거창국제연극제>와 별개의 행사다. 둘은 단지 '거창'이라는 공통점 외에는 합치되는 면이 없다. 더구나 수승대는 위천면에 소재해 있고, 아시아1인극제가 열렸던 거창귀농학교는 고제면에 소재해 있다. 서로 지역적으로도 거리가 있는 셈이다.

<아시아1인극제>는 민속극의 대가인 심우성 선생의 주관으로 1988년 서울에서 1회 대회가 개최됐다. 1회 대회 이후부터는 아시아 각국을 돌며 공연이 계속되었다. 남사당패처럼 유랑을 하며 공연을 했던 것이다. 그러다 1996년, 충남 공주에 안착하게 된다. 공주민속박물관이 들어섰는데 거기에 둥지를 튼 것이다. 그래서 명칭에 '공주'가 들어가 <공주아시아1인극제>가 된다. 하지만 아시아1인극제의 '유랑'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7년에 거창으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거창귀농학교의 다른 이름은 삼봉산문화예술학교인데 그 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아시아1인극제는 거창에서 개최됐다. 그래서 명칭도 <거창아시아1인극제>로 변경되었다.

 

 

 

 

 

 

 

* 2013년 <거창아시아1인극제>: 한 여름밤, 야외무대에서 펼쳐진 공연은 신명이 넘쳤다.

 

 

 

 

 

1인극의 영어 명칭은 monodrama다. 즉, 무대에 오른 한 명의 배우가 무대 밖의 객관적 실체들을 내적 자아에 투영시켜 각양각색의 극중 인물상들을 풀어내듯 연기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배우 1인이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다는 말인데 연극 <버지니아모놀로그>가 좋은 예이다.

하지만 아시아1인극제에서는 서구 연극계의 'monodrama'의 정의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 왔다. 유언극과 함께 무언극도 공연됐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모노드라마가 공연되는가 하면, 민간신앙에서나 볼 수 있는 무속무도 무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판소리의 거장 박동진 명창의 <진국명산>이 울려 퍼졌고, 공옥진 여사의 <심청전>이 무대에서 조용히 날갯짓을 펼쳤었다. 그 외에도 내로라하는 아시아 각국의 수많은 공연자들이 아시아1인극제의 무대를 수놓았다.

하지만 그건 옛날 말이 되어버렸다. 올해 8월 2일부터 3일까지 진행된 2013년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아시아'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국내파'들로만 꾸려졌다. 더욱이 초청된 국내파들은 공연료도 받지 않고 재능기부를 해주었다.

 

 

 

 

 

 

 

 

 

 

 

 

 탱크킬러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미공군의 A-10 공격기. 2009년 서울에어쇼에서 촬영.

 

 

 

 

작년 가을. 필자는 강월도 영월의 동강을 거닐고 있었다. 동강 최고의 비경이라는 어라연을 탐방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느긋해하고 있었다. 단풍철도 지난 시기라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유유히 흐르는 동강만이 필자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푸아항~! 그런 호젓한 정적을 깨는 강력한 엔진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비행기 한 대가 동강의 골짜기 사이를 유유히 스쳐지나갔다. 탱크킬러라고 불리는 A-10 공격기였다. 미 공군 마크가 선명했다. 필자는 좀 어리둥절했다. 왜 이 아름다운 곳에 저 공격기가 비행을 하고 있을까? 난 순간 반사적으로 사진기를 잡았지만 이미 엔진소리는 저 골짜기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아참 이 근처에 공군 사격장 있지. 그런데 거기 백두대간 허리축이라던데….'

한때 필자의 마음 속에는 비행기가 있었다. 푸른 창공을 가르며 나는 비행기들이 좋았고, 그 비행기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함을 느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하늘을 날아보겠다고 보자기를 둘러쓰고 옥상에서 뛰어내리기도 했었다. 그러다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필자가 본격적으로 비행기에 대해 '구애 작전'을 벌였던 때는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하나둘씩 비행기 사진을 모으다가 나중에는 항공잡지 세계에 뛰어들었다. 항공잡지를 모으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항상 문제는 돈이었다. 돈이 없으니 잡지를 구입하는 데도 제약이 많았다. 하긴 당시 고등학생이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용돈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필자는 헌책방 투어에 나섰다. 어차피 속보성을 획득하려고 항공잡지를 구매했던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1990년대 초반의 헌책방에서 항공잡지를 찾아보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와 같은 일이었다. 그만큼 항공잡지가 귀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구한 잡지들도 부실한 경우가 많았다. 곰팡이가 피고, 냄새나고.

 

 

 

 

▲ 동강 어라연 동강 최고의 풍광이라고 불리는 어라연이다.

 

 

 



'어린왕자' 꿈꾸던 그 시절... 지금도 그립다

그렇게 부실한 잡지들은 한 번씩, 꼭 손을 거쳐야 했다. 햇볕에 내다말려야 했던 것이다. 한번은 옥상에서 잡지들을 펼쳐놓고 잠시 일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햇볕이 쨍쨍하기에 느긋하게 길을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 와중에 엄청난 소나기가 내렸다. 허겁지겁 다시 돌아왔더니 옥상에 있던 항공잡지들은 이미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빗방울이 컸고, 강수량도 많았던 터라 내 잡지들은 소나기의 맹공을 견뎌내지 못했던 것이다. 난 멍하게 잡지 파편들을 보고 있었다. 그 잡지들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뛰어다니고 움직였던가! 동쪽 하늘에 예쁘게 드리워졌던 무지개가 얄미웠다.

그런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던져주던 나의 비행기 사랑은 이제 많이 무뎌진 게 사실이다. 시간 앞에 장사 없다고 세월이 흘러가면 첫사랑의 짜릿함도 사그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심경의 변화가 꼭 시간의 흐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몇 년 전, 필자가 그토록 좋아하던 비행기들이 민간인 학살에 동원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파시스트 세력들의 맹렬한 공세를 막아내던 용맹스럽고 멋진 비행기들이 우리 땅에서 민간인 학살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런 사실들은 내게 큰 혼란을 주었다. 전쟁통에 무장한 세력끼리 적대행위를 하는 건 별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비무장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사격을 가했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동강 산소길 영월 동강의 산소길. 비행기가 떠난 자리에 아웃도어가 들어왔다.

 

 


무언가가 있던 자리에는 또 무언가로 채워지는 게 순리인 걸까? '비행기'가 떠난 자리에 '아웃도어 여행'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 번, 두 번 떠난 여행이 쌓이고 쌓여 내 인생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더 솔직히 이야기를 하자면 아웃도어 여행으로 인해 인생의 지향점까지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동강 어라연에서의 일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비행기가 지나간 자리에 백두대간 걱정부터 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은 돌고 도는 법이다. 이러다가 아웃도어에 대한 애정도 '있다 없어'질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무엇이든 그것이 있었던 시간이 무척 소중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있었기에 그 빈자리가 느껴지는 것이고, 또 옛 기억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필자는 가끔 그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비행사 생텍쥐페리와 함께 '어린왕자'를 만나러 가던 그 시절, 그 동경의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 천지연 폭포: 비가 온 뒤라 유량이 아주 풍부했다. 낙수 소리가 우레와 같이 쩌렁쩌렁하게 들렸다. 뒤쪽으로는 멀리 한라산이 보인다.

 

 

 

 

 

[제주도] 빗물로 지은 밥

한편 제주도에서는 추자도 때와는 다른 경험을 했다. 제주도에서는 입도하는 첫 날부터 비를 맞기 시작했다. 워낙 비가 많이 내려 주행을 포기한 날도 생길 정도였다.

천지연 폭포가 내려다보이는 서귀포시 외곽의 한 공원. 유량이 풍부해져서 그랬는지 천지연 폭포는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폭포는 꽤 먼 곳에 있었지만 그 낙수 소리는 세상을 울리는 듯, 쩌렁쩌렁했다. 엄청난 유량을 자랑하는 천지연 폭포를 감상하는 것은 좋았지만 난 비가 싫었다. 정말 싫었다. 제주도에서 비를 하도 많이 맞아서 이제 비라면 신물이 날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텐트를 간이 팔각정 밑에 칠 수 있다는 것.

시간이 지나도 빗줄기는 잦아들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거세졌다. 라디오에서도 서귀포지역 일대에 호우주의보가 발령됐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꼼짝없이 팔각정에 갇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빗줄기가 멈추길 기원하면서 점심을 지어먹으려 식수를 찾았다.

 

 

 

 

 

* 꽃이 핀 야영지: 사진에서처럼 지붕이 달리고, 바닥에 데크가 깔린 나무 정자가 가장 이상적이다.

강한 폭우도 막아주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도 막아주니 가난뱅이 여행객들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곳이 바로 저런 곳이다.

2011년,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찍은 사진이다.  

 

 

 

 

 

'아뿔싸! 이걸 어째!'

아침에 식사 준비를 하면서 식수를 다 써버린 것이다. 누가 점심 때까지 팔각정에 갇혀 있을 줄 알았나! 생수 한 통을 사오는 것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장대비를 뚫고 마트까지 갔다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당시 필자는 장대비를 맞을 몸 상태가 아니었다. 장기간의 여행으로 인해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던 우비도 구멍이 뻥뻥 난 상태라 입으나마나였다. 우산은 아예 없었다.

하늘이 뚫린 듯, 빗방울이 거세게 내렸지만 정작 내게는 밥 해 먹을 식수가 한 방울도 없는 상황이었다. 추자도에서는 바닷물을 앞에 두고 씻을 물이 없어 안타까워했는데 제주도에서는 장대비를 바라보면서 밥 해 먹을 물을 갈구하다니! 세상을 집어 삼킬 듯 천지연 폭포에서는 폭포수가 떨어지는데 정작 난 밥 해먹을 물이 없어 발을 동동 굴리고 있다니! 그러고보면 그 상황은 정말 아이러니했다. 하지만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언가 방도가 필요했다. 무슨 수가 없을까?

 

 

 

 

 

 

 

 

* 한계령 창고에 친 텐트: 아무리 여름이라고 하지만 한계령은 한계령이었다. 원통리에서 출발했을 때가 낮 12시였는데 한계령에 도착했더니 밤 10시였다.

안개가 가득찬 한계령에서는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밤안개처럼 당시 내 처지는 우울했다. 설악산에서 노숙할 판이었으니까. 그러다 저 창고를 발견했는데,

 한 겨울 제설장비 차량 차고로 쓰이는 곳이었다. 덕분에 하룻밤 잘 지냈다. 2012년 백두대간자전거여행 당시의 사진이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군! 푸하핫!'

얼마 후 묘안이 떠올랐다. 생각을 달리하니 금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랬다. 그 빗물을 받아서 밥을 짓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팔각정 처마 밑에다 코펠을 펼쳐 놓았다. 어차피 며칠간 계속된 비로 대기는 아주 깨끗한 상태였다. 그건 팔각정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그곳은 청정지역 제주도 서귀포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런가, 빗물로 지은 밥은 정말 맛있었다. 꿀맛이었다. 서귀포의 청정한 빗물로 밥을 지어 먹었으니 꿀맛일 수밖에!

사실 필자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무리 필자가 아웃도어 여행을 많이 했어도 빗물로 밥을 지어 먹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여행이 아니겠는가. 언제 어떤 돌발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게 여행이라는 말이다. 더군다나 필자는 돈이 없는 관계로 가난뱅이 여행을 해야 하니 더욱더 그럴 수밖에!

몇 시간 후 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개미새끼 한 마리 안 보이던 공원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우산을 받쳐 들고 나오고 있었다. 필자는 저 멀리에 있는 한라산을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구름으로 휘감긴 한라산은 무언가 모를 영험함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그런 고즈넉한 분위기는 깨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저기 봐. 서귀포에서도 노숙자가 있나 봐요."
"그러게요. 근데 요즘 노숙자는 텐트도 치고 자나 봐요. 밥도 해먹고. 그나마 서울보다는 낫네."

올레길을 걷는 올레꾼들이었다. 필자를 노숙자로 본 것이다. 하긴 당시 나는 노숙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필자는 그런 말들을 그냥 웃어 넘겼다. 왜? 청정수 빗물로 밥을 해 먹었으니까! 이런 경험은 아무나 못하는 거니까!

 

 

* 대통령의 자전거와 내 자전거: 고 노무현 대통령이 타고 다녔던 자전거다. 필자의 자전거만큼이나 싸구려 철TB였다.

대신 내 자전거는 짐이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대통령의 자전거는 아주 단출하다. 그 분이 생전에 계셨다면 필자에게 쌀을 주었을 지도 모른다. 불쌍하다고.

 생각해보니 당시 봉화 마을에서 통김치를 얻었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한동안 김치 걱정은 안했다. 2010년 여름에 찍은 사진이다.  

 

 

 

* 수해복구: 텐트가 망가져 임시방편으로 저렇게 모기장 텐트를 쳤다. 하지만 모기장 텐트 쳤다 폭우를 만났다.

침낭 양 옆으로 물고가 생겼을 정도로 엄청난 폭우를 만났었다. 2011년 전북 완주에서 찍은 사진이다.

 

 

 ▲ 청량산 베이스캠프: 낙동강가에 세운 청량산 베이스캠프. 청량산을 병풍 삼고, 낙동강 끌어 안을 수 있었던 최고의 캠핑지였다!

한편 저렇게 정자 아래에 텐트를 치니 밤새 비가 내려도 물난리를 겪을 일이 없었다. 이 사진은 2012년에 행한 백두대간자전거여행 때 찍은 사진이다.

 

 

 

 

* 충남 천안: 2009년, 천안에 있는 풍세천이란 곳에서 캠핑을 했을 때의 모습이다.

장거리 여행이 익숙지가 않아서 그랬는지 모든 것이 어설펐을 때다.

위험천만하게 하천변에 텐트를 쳤을 정도로 어설펐다. 이 풍세천을 따라가면 호두나무 산지로 유명한 광덕산이 나온다.

광덕산 입구에는 천년고찰인 광덕사가 있다.

 

 

 

 

2010년 여름. 필자는 단독으로 L자형 자전거여행을 행하고 있었다. 이동한 지역을 선으로 이어보면 알파벳 L자와 비슷한 형상이 나와서 L자형 여행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짐을 앞·뒤로 주렁주렁 매달고, 한 여름 뙤약볕 속에서 질주를 한다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다. 땀은 비 오듯 쏟아졌고, 옷은 싹 다 젖었다. 티셔츠는 등짝에 척 붙었고, 팬티까지 흥건했다.
다음은 필자가 추자도와 제주도에서 겪은 이야기들이다. 둘 다 물과 관계된 에피소드들이다.

필자는 서쪽 하늘에 노을이 지기 시작했을 때가 제일 싫었다. 매일같이 야영지를 확보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서 캠핑장은 갈 수가 없었다. 물론 이동 경로에 캠핑장이 없기도 했다.

야영지 확보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었다. 바로 밥 지을 물과 씻을 물을 확보 하는 것이었다. 하루종일 자전거를 타다보면 온 몸은 땀으로 범벅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씻을 물을 확보하는 것은 먹는 물을 확보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전라남도와 제주도 사이에 있는 추자도에 갔을 때의 일이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서해안 노선을 타고 가느라 바다는 언뜻언뜻 바라보았다. 그런데 추자도에 도착할 당시까지 바다에 발 한 번 담그질 못했다. 그게 좀 억울했다. 여름여행이라 수영복도 준비를 해갔는데….

 

 

 

 

* 추자도: L자형 여행 당시 방문했던 추자도. 추자도는 제주 본섬이나 전남지역과는 다른 멋이 있었다. 한편 이곳은 상추자도 지역의 고개마루였는데

어떤 주민 한 분이 아침에 쓰윽 오시더니, 우려섞인 눈빛으로 '전날 잠을 잘 잤냐'고 물으셨다. 귀신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오싹한 말을 하면서...  

 

 

 

 

 

 

[추자도] 몸을 벅벅 긁으면서 잔 이유

여객선에서 내려 자전거로 추자도 일대를 내달렸다. 추자도에 입도하는 날 안개가 짙게 끼어 좀 불안했지만 주행을 하는 데는 그리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추자도의 바닷물은 육지 해수욕장에서 보던 바닷물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정말 깨끗했다. 

넋을 잃고 섬 구경을 했다. 그러다 서쪽 하늘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렇게 추자도 구경 삼매경에 빠지다가 야영지를 잡을 시간을 놓친 것이다. 조바심이 났다. 추자도 바닷바람이 장난이 아니라는데… 해풍을 맞으며 노숙할 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어느 해수욕장 근처에 텐트를 칠 수 있었다. 하지만 씻을 물이 없었다.

수도시설이 있을 줄 알고 일부러 야영지를 해수욕장으로 정했는데… 요즘은 웬만한 해수욕장은 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갖춰져 있다. 하지만 추자도의 해수욕장은 화장실은커녕 수돗가도 없었다. 왜냐? 추자도는 아직도 제한급수를 할 만큼 급수시설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하도 물 부족에 시달리니 몇 해 전에 빗물을 보관하는 저장시설을 완공했다 한다.

어쩌겠는가? 씻을 물이 없는데. 땀에 찌든 몸으로 그냥 잘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눈앞에는 시원한 바닷물이 출렁거리는데 내 한 몸 씻을 물이 없어, 필자는 그냥 바닷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냥 바닷물에 빠져보자. 페트병에 물이 좀 남아 있으니까 그걸로 몸 좀 닦아내고.'

그래서 그냥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하지 않나? 땀으로 범벅 된 몸보다는 바닷물로 범벅된 몸이 낫다는 생각에 그냥 뛰어들었다. 그날 밤 필자는 자다가 벅벅 긁었다. 염분을 제대로 제거하지 않고 잤더니 자는 내내 너무 가려웠던 것이다. 정말 샤워물이 간절한 밤이었다.

 

 

 

 

* 한옥집과 텐트: 요즘은 한옥 펜션이 많다고 하는데... 저런 펜션에서 하룻밤 휴식을 취하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전남 순천에서 2011년에 찍은 사진이다.

 

 

 

 

 

 

 

 

* 수해복구: 싸구려 텐트를 치고 다녔던 터라 비가 오면 항상 물날리를 겪었었다. 그래서 비온 뒤에는 항상 저렇게 수해복구를 해야했다.

2011년에 충남 서산에서 찍은 사진이다.

 

 

 

 

 

 

 

 

 

 

 

 

 

* 강진의 다산 선생 상: 남양주의 다산 선생이 의관을 갖추고 계셨다면 강진에 있는 다산 선생은 서민적인 풍모를 보이고 있다.

 

 

 

 

 

 

껑뚱한 나, 다산 선생의 제자가 되다___2편

다산 정약용 테마여행 이야기

 

 

 

 

 

 

 

 

강진의 다산유물전시관

필자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다산유물전시관이었다. 강진군 도암면에 위치한 다산유물전시관은 만덕산 아래에 있었다. 다산초당은 다산유물전시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산길을 따라 20분 정도 올라가면 다산초당에 닿을 수 있다.

다산유물기념관은 다산과 관련된 유물과 서적들이 전시돼 있었다. 다산이 500권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기록한 만큼 기념관은 다산 선생이 기술한 책들로 가득했다. 다산이 직접 기록한 책이 아닌 필사본이라 아쉽기는 했지만 옛 고서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 거중기: 다산문화의 거리에 있다. 강진 다산유물전시관에도 실내에 거중기 모형이 있지만 남양주에 있는 거중기가 좀 더 나아 보인다.

 

 

 

 

 

 

 

 

특히 내 눈을 사로잡은 서책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기중가도설>이었다. <기중가도설>은 중국의 <기기도설>을 토대로 다산 선생이 저술한 것인데 한마디로 기중기설계도였다. 수원 화성 축조 시, 다산이 기중기를 제작해 큰 성과를 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기중가도설>에는 그런 기중기의 도면이 직접 그려져 있었다. 꼼꼼하게 그려진 설계도를 보니 감탄사가 연신 터져 나왔다. 그 밖에도 다산유물기념관에는 볼거리가 풍부했다. 공짜로 입장해 본다는 게 미안할 정도로 기억에 남는 전시물들이 꽤 많았다.

다산유물기념관 위쪽으로는 '다산 정약용 말씀의 숲'이 있었다. '다산 정약용 말씀의 숲'은 큰 석상에다 다산의 어록을 옮겨 놓은 것이다. 난 그 어록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하나하나가 다 울림이 큰 말씀들이었다. 마치 세상의 지혜들을 다 압축시켜 놓은 듯했다. 다르게 보면 따분한 '도덕선생님' 같은 글귀들에 하품을 내뿜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그 어록들은 내게 죽비소리처럼 큰 깨우침을 줬다.

 

 

 

 

* 동암에서 저술중인 다산: 강진 다산유물전시관 한쪽에는 다산초당의 모습을 재현한 공간이 있었다. 다산초당은 크게 동암과 서암으로 나뉘었다.

동암은 다산 선생이 기거하는 처소였고, 서암은 후학들을 가르치는 강학장소였다.

 

 

 

 

 

다산초당

다산초당은 만덕산 중턱 부근에 위치에 있었다. 필자가 방문하기 전날 남부 지방 일원에 비가 내려서인지 다산 초당이 있는 만덕산의 숲은 싱그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정약용이 강진읍내에 갈 때 건넜다는 시냇물도 유량이 풍부했다.

다산초당은 생각보다 비좁았다. 그리고 무척 소박했다. 하긴 다산초당은 정약용의 유배지였지 여름 별장이 아니지 않은가? 유배지가 '대궐' 같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일 것이다. 초당에서 만덕산 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다 보면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나온다. 천일각에 올라서니 아름다운 강진만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사실 천일각은 정약용의 유배시절에는 없던 정자였지만 차후에 다산 선생의 뜻을 받들어 건립했다고 한다.

드넓게 펼쳐진 강진만을 바라보면서 다산은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강진만 상공을 유유히 날아오르는 백로들을 바라보면서 고향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나긴 유배생활을 한탄하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시울을 붉혔을지도 모른다. 강진보다도 더 먼, 흑산도 땅에 유배됐다 그 곳에서 임종을 맞이한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며 비탄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 경기 남양주의 천일각: 본래 천일각은 전남 강진 다산초당 부근에 있었다.

하지만 다산의 멋을 살리자는 의미로 다산문화의 거리에 천일각을 재현해 놓았다고 한다.

 

 

 

 

다산 선생과 차를 마시다

다음 날이었다. 아침부터 계속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전날 지붕 달린 오두막에다 텐트를 쳤기에 폭우가 쏟아져도 큰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친 김에 다산기념관 공원에서 하루를 더 묵기로 결정했다.

점심께에는 비가 소강상태에 이르렀지만 오후가 되니 다시 빗줄기가 거세졌다. 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밥을 지어 먹었다. 그러다 식곤증 때문인지 아니면 거듭된 여행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슬며시 눈이 감겼다. 잠결에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빗소리인가?

"누구요? 어느 문중의 과객인지 모르겠으나 일어나 보구려."

누구지? 이 거센 빗줄기 속에서.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뉘신데, 어떻게 여기 만덕산까지 찾아 오셨소?"
"누구세요? 관리인이세요?"
"난 다산이라 하오. 지금은 이 곳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중이오."
"예, 정말 다산 선생님이세요? 정말 그 정약용 선생님이 맞으세요?"
"그렇소. 내가 다산이오. 자자, 우리 이럴게 아니라 차를 한 잔 듭시다. 이 고장에서 나는 차는 향기가 은은하기로 유명하지."

그러면서 다산 선생은 향긋한 냄새를 풍기를 차를 한 잔 건네주셨다. 그리고는 내게 그 먼 천리길을 어떻게 해서 왔는지 물어보셨다. 나는 자전거를 가리키며 저것을 타고 왔다고 했고, 수원을 거쳐서 왔다고 대답했다. 역시 과학에도 조예가 깊으셔서 그랬는지, 다산 선생은 내 철TB를 유심히 살펴보셨다.

"화성을 거쳐 오셨다고? 그럼 성곽은 어떻소. 온전히 잘 있는 거요?"

 

 

 

 

* 수원 화성: 필자가 꿈 속에서 이 사진을 보여드리자 다산 선생은 무척 흡족한 미소를 띄우셨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판단은 독자의 몫!

 

 

 

 

 

나는 디지털카메라에 담아놓은 수원성 관련 사진들을 다산 선생께 보여드렸다. 수원의 도시화로 성곽 일부가 잘려나간 것에 대해 무척 아쉬워하셨지만, 그래도 수원성의 굳건한 모습을 바라보시며 흡족한 미소를 띠셨다.

"다산 선생님. 그 길고긴 유배 생활을 어떻게 이겨내셨습니까? 귀양 보낸 사람들이 밉지 않으세요?"

다산 선생은 쓴 웃음을 지으며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런 소리는 이제 다 부질없는 소리. 난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오."
"그래도 18년이란 세월이 얼마나 힘이 드셨습니까?"
"그건 그렇지. 고독했지. 외로웠지. 하지만 이렇게 아주 먼 곳에서 찾아온 방랑객과 차를 함께 마시고 있지 않은가. 그걸로 족한 거지."
"선생님도 무척 외로우셨군요."
"그랬지. 하지만 고독감이 밀려올 때마다 난 저 멀리 바다를 보면서 외로움을 실어 보냈다오. 그리고 시를 짓고 문장을 썼다오. 유배기간이 괴로운 시간인 것은 맞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살찌우는 좋은 시간이었소.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하지 않소. 또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는 말도 있고. 내가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했다면 그 수많은 경집과 문집들을 어떻게 저술했겠소. 여기가 내 유배지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내 도서관이 아니겠소? 그렇게 내가 서책을 썼으니 후세 사람도 나를 알아보는 것이겠고. 그대도 나를 알아주어서 발길을 이 곳으로 돌리지 않았나?"
"그건 그렇죠."

선생께서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자 이제 나는 처소로 돌아가 봐야겠소. 이제는 헤어질 시간인 듯싶네. 아참, 혹시 자네 경기도 마현이라는 곳을 아나? 내가 그곳에 여유당이라는 집을 짓고 말년을 보낸 곳인데."
"아, 양수리 근처요. 알지요. 거기에 선생님의 이름을 딴 트레킹 코스도 있어요. 뒤쪽에 있는 운길산도 풍경이 수려한 곳이고요."
"잘 알고 있구먼. 그럼 그 곳에도 한 번 와주시게. 거기서도 한 번 보고 싶네."
"예?"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번쩍하고 번개가 내리쳤다. 그 소리에 눈이 떠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좀 전까지 내 앞에 계셨던 다산 선생도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꿈을 꾼 것이다. 아주 생생한 꿈이었다. 시공간을 넘어, 마치 다산 선생과 직접 다과를 했던 것처럼 아주 생생했다. 마치 입속에서는 은은한 차향이 맴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 연꽃공원: 최근에 다산문화의 거리 앞쪽에 대규모의 연꽃 공원이 들어섰다. 화사한 연꽃들이 피어 있어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연꽃밭 앞쪽으로는 한강이 펼쳐져 있는데 그곳에는 야영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껑뚱한 나, 다산 선생의 제자가 되다!



2013년 6월 30일, 필자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다산문화의 거리를 방문했다. 3년 전 꿈 속에서 만난 다산 선생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였다.

너무 늦은 방문이었다. 3년 전의 일은 둘째치고서라도 다산 생가 방문은 미리미리 했어야 하지 않나? 명색이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면서! 중앙선의 복선화로 접근성도 많이 좋아지지 않았던가. 물론 변명거리가 있긴 있다. 다산 생가를 방문하려고 할 때마다 꼭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 먼 남도 땅에서는 쉽게 만나주시더니만 정작 수도권에서는 그림자도 안 보여주실라나?'

다산 생가를 방문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중앙선 팔당역까지 전철을 타고 간 후 능내리행 버스로 갈아타는 것이다. 그러다 능내역에서 하차한 후 도보로 이동한다. 버스를 타고 보는 팔당댐 일대의 경치가 일품이다. 능내역은 중앙선 복선화로 현재 폐역이 됐다.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은 다산문화의 거리에 있었다. 문화의 거리는 강진에 있는 유물전시관보다 좀 더 세련된 느낌이었다. 더 규모도 있었다. 2009년에 실학박물관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거칠게 이야기해서 강진의 다산 유적은 남도의 멋이 녹아든 것처럼 고즈넉했고, 남양주의 다산 유적은 좀 더 정돈된 모습이었다. 물론 이런 비교는 전적으로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이다.

 

 

 

* 다산 정약용의 묘: 다산 선생의 묘. 생가인 여유당 위쪽에 선생은 고이 잠드셨다. 필자가 참배를 했을 때는 한 여름이어서 그런지 나무들이 무성했다.

 하지만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에 가면 시원스럽게 양수리 유역이 조망된다. 마치 다산초당에서 아름다운 강진만을 시원스럽게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처럼.

 

 

 

 

 

강진이나 남양주나 풍광만큼은 '용호상박'을 이룬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다산초당 위쪽 천일각에 올라서면 강진만이 한 눈에 들어온다. 또 그 뒤쪽으로는 천관산이 둘러져 있다. 그 만큼 수려한 풍광을 자랑한다. 남양주도 마찬가지다. 다산 선생이 자주 올랐다는 운길산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수도권 최고의 경치를 자랑한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서로 만나, 큰 물길을 이룬 양수리가 눈 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다산 선생은 강진에 있을 때는 마현(다산 생가가 있는 곳의 옛 지명)을 그리워했고, 여유당에 있을 때는 다산초당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다산선생의 묘는 여유당 위쪽에 있었다. 소나무들이 늘어선 모습이 마치 제자들이 늘어 서서 선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처럼 보였다. 필자도 저 소나무들처럼 다산 선생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 혹시 너무 '껑뚱'하다고, 꾸짖지나 않으실까? 하지만 필자는  이미 제자일지 모른다. 그동안 다산 선생의 저서를 읽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읽을 생각이니까.

다산 선생의 제자가 된 것을 기념하여 묘소와 여유당 일대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줍고 왔다. 그렇게 해 '나의 정약용 테마 탐방'은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 홍이포: 실학박물관 앞쪽에 전시되어 있다. 이 홍이포는 명나라 시대 포르투갈에서 수입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연안 방어용으로 장착됐다고 한다.

홍이포는 우리나라와도 연관이 있었다. 병자호란 때 후금이 이 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 전투에서도 쓰였다고 한다.

 

 

 

 

 

 

 

 

 

 

 

 

 

 

 

 

 

 

 

 

 

 

 

 

 

 

 

 

 

 

 

 

 

 

 

 

 

 

 

 

 

 

 

 

 

 

 

 

* 운길산: 다산 선생께서 자주 발걸음을 하셨다는 운길산에서 양수리 방면을 찍은 사진이다.

 운좋게도 날씨가 정말 좋아서 사진이 잘 나왔다. 하늘에 구름이 참 멋지다!

 

 

 

 

 

 

 

껑뚱한 나, 다산 선생의 제자가 되다

다산 정약용 테마여행 이야기

 

 

 

 

 

 

 

따로 또 같이, 테마여행



우리는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필자의 이런 질문에 당황하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뚱딴지 같은 질문을 필자 스스로에게 해봤다. 나는 다산 선생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나? 다산 선생의 저작은 많이 읽어보았는가?

필자는 역사트레킹 인터넷 카페의 주인장이다. 우리 카페는 역사유물 탐방과 트레킹이 결합된 고품격(?)의 도보여행 카페다. 그래서 가입할 때,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인물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흥미로웠던 것은 다른 역사인물보다 압도적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1위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쟁쟁한 역사인물들을 물리치고, 다산 선생이 우리카페 회원들이 제일 존경하는 역사인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퀴즈의 결과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우리 카페의 회원수는 겨우 8명에 불과하니까.

기사 앞 부분부터 싱거운 소리를 한다고 질책을 가하실 독자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필자는 이런 소리를 하려고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다.

 

 

 

 

 

* 다산 정약용 선생상: 생가인 여유당에서는 저렇게 선비적인 풍모로 여생을 보내셨을 것 같다. 뒤쪽의 나무가 선생의 상과 잘 어울린다.

 

 

 

우리나라에 박경리 선생과 관련된 문학관은 세 개에 이른다. 강원도 원주, 경남 하동과 통영이 바로 그곳이다. 동학혁명기념관도 마찬가지다. 전북 정읍과 전주에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또한 장내리 집회가 열렸던 충북 보은에도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이 들어서 있다.

이렇듯 동일한 테마를 가졌지만 각 지역별로 나눠져 있는 기념관 혹은 기념공원을 하나의 주제로 묶어 탐방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이번에는 원주 토지 문학관에 갔다면, 다음에는 통영 박경리 기념관을 방문하는 식이다.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박경리'라는 하나의 테마를 가진 곳이라, 두 곳의 일대일 비교도 가능할지 모른다. 자동차 있으면서 질질 끄는 거 싫어하는 분이라면 당일치기로 테마여행을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런 식의 테마 탐방은 무척 흥그런 테마 탐방은 무척 흥미로운 여행일 수 있다.

필자의 테마 탐방은 다산 정약용 선생 유적지다. 다산 선생의 유적지는 크게 두 개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그가 오랫동안 유배돼 있던 전남 강진이고, 또 하나는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다산 생가다. 하나를 더 하자면 수원 화성도 다산 테마 탐방에 포함된다.

 

 

 

 

 

* 다산길: 다산길은 남양주시에서 개설한 도보여행길이다. 아마 이 길을 다산선생도 걸으시지 않으셨을까?

 

 

 

L자형 여행

2010년 여름 당시 필자는 L자형 자전거여행을 행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시작한 여행은 제주도를 거쳐 고흥 나로호 우주센터에서 종료됐다. 이동한 지역을 선으로 이어보면 알파벳 L자와 비슷한 형상이 나와서 L자형 여행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L자형 여행 당시 필자는 제주도→완도→해남→강진 순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도자기로 유명했던 도요새의 고장 강진. 하지만 강진은 내게 '다산 정약용'의 고장으로 더 많이 기억됐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다산은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는데 그곳에서 수백 권의 책을 저술했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1801년에 있는 신유박해로 인해 억울하게 유배길에 올라야 했지만 다산은 그 황량한 유배지를 하나의 작은 '규장각'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이런 이유 때문에 일부러 강진의 다산 초당을 자전거 여행코스로 잡았던 것이다.

 

 

 

 

* 경세유표

 

 

 

 

*목민심서

 

 

 

 

1800년, 당시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전 유럽에 걸쳐 프랑스 혁명을 전파했던 1799년. 당시 조선의 조정은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했기 때문이다.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다.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 당연히 정약용이었다. 정약용이 1순위였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된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했으면 '승복'해야 할 텐데 벽파는 그렇지 못했다. 꼼수를 썼던 것이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형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낙향하게 된다. 그렇게 정약용이 한양을 등지고 낙향한 후 두 달도 안 돼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승하하게 된다. 그때가 1800년 6월이었다.

 

 

 

*다산초당: 강진의 다산초당. 이 현판을 추사 김정희가 썼다고 한다. 추사는 다산을 정신적인 스승으로 흠모했다고 한다.

 

 

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된다. 1801년 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것이다.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사사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에 나서게 된다.  이때 정약용도 유배길에 나서게 됐는데 처음 다산의 유배지는 경상도 포항 부근이었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백사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약용은 포항보다 더 궁벽한 강진 땅으로 이배되기에 이른다.

강진에서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는 고정되지 않았다. 읍내에 있는 주막거리에 거처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다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다산초당이었던 것이다. 다산초당은 정약용이 1808년에서부터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 이제서야 문화관광부에서 도보여행길에 대한 본격적인 정비에 나서나 봅니다. 하지만 너무 뒤늦은 감이 있습니다. 지금의 도보여행길의 중복투자 및 혼선은 일찌감치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중앙정부가 중심이 되어 콘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했는데 오히려 그릇된 경쟁에 불을 지폈으니까요!

 

그나저나 이렇게 정리되는 기조 때문에 건실한 도보여행길조차 도매금으로 넘겨지는 건 아닌지 모를 일입니다. 유행을 타듯, 행정력이 도보여행길 개설에 몰려다녔던 모습은 정말 촌극 중에 촌극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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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하나에 이름 두개'..전국 도보여행길 중복 명칭 '수두룩'(종합)

 

최종수정 2013.07.11 06:50기사입력 2013.07.10 10:58

 

 

 

 

 

사회문화부이규성

 

 

 

 

[아시아경제 이규성 기자]걷기 열풍에 편승, 정부 부처 및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경쟁적으로 도보여행길(일명 '올레길') 조성에 나서 예산 중복 및 이용자 혼란, 정보 미흡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심지어는 같은 길을 두고 조성 주체에 따라 다른 이름을 쓰는가 하면 기본적인 여행 정보마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곳이 수두룩한 상태다.

이에 정부도 도보여행길 신규 지정 중단 등 관련 정책 공유 및 협업 등을 위한 중앙부처 협의회 개최 및 현장점검을 실시하기로 하는 등 개선, 보완을 서두르고 있지만 '사후 약방문'이라는 지적을 면키 어렵게 됐다.

10일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에 따르면 전국 도보여행길(조성중인 사업 포함)은 총 595개, 단위 코스 1689개, 총 길이 1만767km에 달한다. 이 중 조성 주체별로 ▲ 중앙부처 390개, 1만246km ▲ 지자체 196개, 6559km ▲ 민간 및 기타 9개, 866km이다.

현재 도보여행길 조성사업에 ▲ 국토교통부(52개) '녹색경관길' ▲ 안전행정부(125개) '우리마을 녹색길' ▲ 문체부(48개) '문화생태탐방로' ▲ 환경부(55개) '국가생태탐방로' ▲ 산림청(58) '산림문화체험길' ▲ 해양수산부(52개) '해안누리길' 등 6개 부처가 참여하고 있다.

이처럼 중앙부처가 경쟁적으로 도보여행길을 조성함에 따라 예산 중복, 관리 주체 혼선, 사후 운영 미흡 등의 문제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도보여행길 일부 구간의 경우 조성 주체의 따라 같은 노선에 명칭이 중복 사용되는 사례도 허다하다. 같은 구간 내에서 명칭 중복 사용된 구간으로 ▲ 부산 도보여행길의 경우 해파랑길과 갈맷길이 사용중인 것을 비롯, ▲ 울산-해파랑길, 솔마루길 ▲ 강원 고성- 해파랑길, 산소길 ▲ 충남 부여 -사비길, 백마강길 ▲ 전북 군산- 구불길, 생태문화탐방로 등이 대표적이다. 심지어는 같은 길을 두고, 사업 주체별로 세개의 명칭을 쓰는 곳도 있다. 경기 양평 '두물머리길'은 물소리길, 물레길 등으로 문체부, 국토부, 지자체가 각기 다른 이름을 쓰고 있다.

중복 구간은 전체 구간 중 500km 정도로 도보여행길의 3%에 이른다. 그 중에서 동해안 도보여행길인 해파랑길은 부산지역에서 해파랑길과 갈맷길로 중복되기도 하고 강릉 일부 구간에서는 '해파랑길', 관동팔경 녹색관광길, 강릉바우길' 등으로 명칭이 붙어 있다. 이런 구간들은 관리 주체마저 불명확해 조속한 정리가 요구되는 구간들이다.

이같은 문제는 전국여행길 조성사업 초기부터 예정됐다는 지적이다. 실례로 강원 고성에서 부산에 이르는 동해안 도보여행길은 안행부 예산 1200억원을 포함, 5개 부처가 2500억원 이상 투입하기도 했다.

반대로 지방자치단체가 조성한 길 중에는 다른 노선에 해파랑길, 산소길, 삼남길, 갈맷길 등 같은 이름이 중복 사용돼 이용자의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일부 지자체는 내부 부서간 소통 부재로 관할 지역 내 도보여행길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가 이뤄지지 않아 이용자의 안전마저 위협하고 있다. 도보여행자 살인사건으로 사회문제가 됐던 제주 올레길의 경우 여행자가 요청할 경우 경찰서에서 GPS가 정착된 위험 송신기를 제공하고, SOS 기능을 탑재한 두발로 앱이 운영중이나 기타 여행길에는 안전관리시스템이 전무한 상태다. 따라서 치안 및 안전대책도 절실한 형편이다. 이 외에도 안내 표지판 부족, 표기 오류 등 사후 관리 부실도 곳곳에 노출된 상태다.

현재 도보여행길 정보망이 갖춰져 있는 것은 150여 개에 불과하다. 안행부가 조성한 일부 도보여행길은 부처 홈페이지에서도 기본 정보를 파악할 수 없는 지경이다. 그나마 지자체 사이트에 정보가 있기는 하나 이용이 불편하다는 하소연이 넘친다.

각종 관리 문제가 노출된 것과 관련, 사후 예산 중복 투입 및 안전체계 수립 등을 총괄 관리할 컨트롤 타워 부재에서 비롯됐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이에 도보여행 전문가들은 "도보여행길 운영 및 관리 효율화를 위해 지역 주민 등 민간의 참여를 확대해야 한다"며 "정보망 구축, 관리 주체 재정비 등 보완작업이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또한 "도보여행길 조성 단계부터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 여행길 기본 계획 및 시행계획 수립, 실태조사, 관리대상 지정 절차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한편 문체부는 오는 9월까지 '전국도보여행길' 종합정보망을 구축하고 모바일 앱 서비스 '두발로 3.0' 보완하기로 했다. 또한 중복 구간 안내체계 및 안전·편의시설을 재정할 예정이다. 또한 국회에 계류중인 '걷는 길 조성 관리 및 이용 촉진에 관한 법률' 입법화도 적극 지원할 방침이다.

이규성 기자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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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도보여행길 1만7671㎞...정부, 체계적 관리

9월까지 전국 종합안내망 구축-이정표 등 안내체계 보완

 

기사입력 [2013-07-10 15:45] , 기사수정 [2013-07-10 15:45]

양승진 기자 기사더보기

 

 

정부가 전국의 1만7671km에 달하는 도보 여행길을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사진은 영주 00길.

 

 

아시아투데이 양승진 기자 =
정부가 전국의 1만7671㎞에 달하는 도보여행길을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문화체육관광부(장관 유진룡)는 10일 도보여행이 단순한 열풍을 넘어 지속 가능한 관광 상품이 될 수 있도록 관계부처와 지방자치단체가 협조해 9월까지 전국 도보여행길 종합안내망(Korea trails)을 구축하고 이정표 등 안내체계를 보완하겠다고 밝혔다.

문화부는 또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걷는 길 조성 관리 및 이용 촉진에 관한 법률안’이 통과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이와 관련 문화부는 최근 관련 부처, 지자체와 함께 전국에 조성된 도보여행길 현황을 조사한 결과, 독립된 이름을 가진 길의 수가 595개에 달했고, 도보여행을 위한 단위코스는 1689개, 총 길이는 1만7671km로 나타났다.

 

 

 

 

◆전국 시도별 도보 여행길 현황(단위= 개소수, km)

 


문화부 관계자는 “길을 조성한 중앙부처의 사업명에 따라 동일 노선에 여러 개의 명칭이 사용되는가 하면, 지자체가 조성한 길 중에는 다른 노선에 같은 이름이 중복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어 이용자의 불편이 큰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또 관리 주체가 명확하지 않아 관리가 어렵다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관련 부처와 단체 간 소통을 확대하고 도보 여행길에 대한 사후 관리를 강화할 예정이다.

 

ysyang@asiatoday.co.kr


 

*아버지의 일기장

 

 

 

 

# 아내는 슈퍼우먼

이 책을 읽다보면 강한 부부애도 느껴진다. 부부의 인연이 이렇게도 강할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박일호와 신봉선은 찰떡궁합이었다. 이들에게는 연리지나 비익조 같은 수식을 붙여도 될 정도였다. 연리지는 한 나무의 가지와 다른 나무의 가지가 서로 붙어있다는 뜻이고, 비익조는 암컷과 수컷이 각각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라서 짝을 이루지 못하면 날 수 없다는 상상속의 새 이름이다. 연리지와 비익조는 둘 다 금실 좋은 부부를 지칭할 때 쓰이는 말들이다. 그런 찬사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부부는 서로에게 좋은 동반자였다.

병든 남편을 위해 신봉선은 매일 같이 보양식을 준비했고, 장사도 도맡아 했다. 신봉선은 '슈퍼우먼'이었는데 연탄배달, 빙수 만들기, 떡볶이 조리, 문구류 판매까지 못하는 일이 없었다. 거기다 남편을 대신해서 파출소까지 끌려가야 했다. 당시는 '불량식품' 근절이니 '유해만화 단속'이니 하는 강압적 단속이 철마다 시행됐는데 병든 남편을 대신하여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고달프고 힘겨운 생활이었지만 신봉선의 다짐은 '강철'과도 같았다. <아버지의 일기장>은 박일호의 일기 이외에 첨언 식으로 박재동과 신봉선의 기록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와 관련된 기록을 한 번살펴보자.

천한 장사한다고 사람까지 천하게 보는 일이 허다했다. 어떤 부모는 아이들이 만화책을 빌려왔다고 열 권이 넘는 책을 불태워버린다고 했다. 우리는 그 만화책이 살림 밑천인데 서슴없이 찢어서 불태워버린다고. 어떤 이는 우리집 양반이 옳은 소리를 하면 만화방 하는 주제에 하고 무시하고, 평생 만화방이나 해먹으라고 악담까지 한다. 내 자식만은 당신들 뒤지지 않게 훌륭하게 키우리라. 세상 사람들이 얕보고 무시할 때면 내 마음은 강철같이 다져진다. 우리의 희망은 오직 세 아이다. 76페이지.

 

 

 

 

* 박재동 화백: 독자들을 위해 캐리커처를 그려주고 있는 박재동 화백. 

직접 만나보면 실제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었다.

자세히 보면 '청년' 박재동이다.   

 

 

 

 


이렇게 가족을 위해 아내는 희생을 했고, 그런 아내를 박일호는 극진히 사랑하였다. 그런 부부애가 통했던 것일까? 발병 당시 얼마 못 산다는 의사의 진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박일호는 3남매를 다 시집·장가 보냈고, 손자·손녀까지 안아 봤다. 또한 아들 박재동의 손을 거쳐 자신이 18년간 써온 일기장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박재동은 '타임머신'을 타고 청년 박재동으로 돌아가 그 시절의 아버지와 대화하고 있다. 매일같이 글쓰기가 버겁다는 아버지의 일기에 아들은 힘들어도 꾸준히 써야한다고 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쓴 일기장을 통해 현재의 박재동은 '철없던' 청년기의 자신과 만나고, 그 '철없던 아들'을 묵묵히 바라보는 아버지를 만나고 있던 것이다.

 

 

 

 

 

 

* 캐리커처: 필자의 캐리커처를 그려준 박재동 화백에 대한 답례로 박재동 화백의 캐리커처를 그려보았다. 박 화백이 그려준 그림에 필자의

그림을 덧붙였으니, 박재동 화백과 곽작가의 공동작업이 되는건가?  박재동 화백을 그린 캐리커처는  <손바닥아트>에 나온 모습을 응용해서 그려보았다.

 저 그림 그리는데 1시간이나 걸렸다. 이 참에 그림 공부 좀 열심히 해서, 나중에 시화전을 열어보고 싶다. 시화전도 나의 꿈이다.      

 

 

 

 

 

 # 아버지의 꿈

아버지에게도 꿈이 있었다. 특용작물을 기르는 농장 경영이 바로 그것이었다. 박재동의 할아버지는 박일호에게 농사를 지으라고 지게를 만들어줬지만 박일호는 그 지게를 부숴버린다. 자신에게는 꿈이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공부를 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하지만 아버지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젊은 시절 들이닥친 병마 때문에 모든 것을 접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접어야 했던 아버지의 꿈은 고스란히 자식 세대로 넘어갔다. 부모세대의 꿈과 관련하여 박재동은 오마이뉴스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녀들의 꿈이 중요하듯 부모들의 꿈도 중요합니다. 자식들의 꿈을 위해 부모들이 자신의 꿈을 접는 일은 이제 없어야 할 것입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자식들을 위해 일방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아버지의 일기장>을 읽은 전후로 필자는 꿈이 하나 실현됐고, 새롭게 꿈이 하나  생겼다. 실현된 꿈은 평소에 존경했던 박재동 화백을 직접 만났고, 박 화백이 직접 필자의 캐리커처를 그려주었다는 것이다.

이번에 생긴 꿈은 결혼이다. 돈도 없고, 능력도 없어서 결혼 생각은 엄두도 안 났지만 이 책을 읽으니 당장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로생활도 좋다. 하지만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다보면 솔로 때와는 다른 희로애락이 생길 것이다. 그런 희로애락을 거치다보면 부모만이 깨달을 수 있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 캐리커처: 박재동 화백이 직접 그려 준 필자의 모습. 그런데 필자의 모습이 좀 껑뚱하게 나온 것 같다.

박 화백께서는 이 그림을 불과 30초 만에 완성하셨다. 놀라울 정도의 속작 능력이다.

 

 

 

 

 

 

 

#  <아버지의 일기장>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앞서도 언급했듯이, 필자는 <아버지의 일기장>을 읽는 내내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두 책의 공통점이 하나 더 있었다. 둘 다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까지 미소를 머금고 읽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일기장>은 30년 동안 병마에 시달린 사람의 기록이었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2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던 사람의 기록이었다. 병마와 감옥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기록했던 두 분께 박수를 보낸다. 또한 좋은 기록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해 준 박재동 화백에게도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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