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들: 북한산성 12성문 종주기념으로 한 컷

 

 

 

 

 

 

* 마스터클래스 11차 회원들: 마스터클래스 11차 회원분들은 사진 찍는 걸 좋아하십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금요일 밤만 되면 잠이 잘 오지 않더군요.

계속 뒤척이다 늦게서야 잠이 들고... 부담감 때문이었을까요?

북한산성 12성문 산행까지, 제가 참석한 산행이 총 4번인데 4시간 이상

수면을 취하고 간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이 정도의 수면 부족은 큰 문제는 아니죠. 아웃도어를 하다 별의별 일도 많이

당했으니... 홀로 산 꼭대기에서 태풍을 맞은 적도 있었고,

홀로 공동묘지에서 단잠을 잔 적도 있었으니까요.

 

무엇이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되더군요. 무엇때문에 금요일 밤마다

잠을 뒤척였을까요?

 

숙제였던 것 같습니다. 마스터클래스 11은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숙제였던 것이죠.

기왕하는 숙제 잘해야 하잖아요. 숙제를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부담감으로 작용했던 것 같습니다.

또 이렇게 후기를 작성해야 하는 나머지 공부도 있고~ㅋㅋㅋ

 

 

 

 

 

 

 

 

 

 

* 나무들: 본격적인 산행을 앞두고 무척 긴장해 있는 모습!

 

 

 

 

 

 

 

* 도깨비님: 저렇게 미션수행을 했답니다. 별님이 그려진 숫자판을 들고요~ 뒤에 성문에는 경천님이 계시군요!

 

 

 

 

 

이번 북한산성 12성문 산행은 확실히 달랐습니다. 산행의 길이면이나 산행 시간, 난이도 등등...

제가 최근에 행했던 산행 중에서 가장 험난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선봉대와 후발대가 서로 끊어진 경우가 두 번이나 있었지 뭡니까! 저도 중간에 혼자 외떨어져서 '차라리 하산을 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말이야 선봉과 후미를 연결하는 중간역할이라고 했지. 혼자 외떨어지니 이거 정말 쓸쓸하더군요.

 

마스터클래스까지 와서 단독산행이야!!! ㅋ

 

산행 시작전에 많은 분들이 조금은 긴장된 모습을 보이시는 듯했습니다. 워낙 12성문에 대한 엄포가 강했고, 11시간이라는 물리적 거리가 사람들을 위축들게 했으니까요.

 

하지만 마스터클래스 11 분들이 누구입니까? 숙제를 제대로 해내는 분들이 아닙니까?

무사히 산행을 다 마쳤고, 미션도 다 수행을 하신 대단한 분들이죠!

 

물론 11성문으로 마무리 하신 분들도 계시지만 모두다 자신의 피지컬을 고려한 결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렇죠. 하루이틀 아웃도어 하고 쫑낼 거 아니니까, 자신의 피지컬은 항상 염두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서도 언급됐듯이 저도 중간에 외떨어져서 그냥 혼자 하산할까, 생각했었답니다. ㅋㅋㅋ

하지만 원효봉의 수려한 풍광은 함께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죠. 정말 혼자 보기 아까운 풍광이었습니다. 남도에 있는 산자락 풍광들과 비교를 해도 손색이 없었을 정도였으니까요!

 

 

힘들게 산행했고, 같이 장시간을 이동하다보니 확실히 다른 분들하고 친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또한 다른분들을 존경하는 마음도 불같이 피어오르더군요! 이것이 바로 11시간의 고된 산생이 가져다 준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ps. 이 포스팅은 고어코리아에서 주최한 마스터클래스 11차, <어게인 서울 7대 명산> 오르기 행사를 체험하고 난 후에

작성됐답니다.  이번 포스팅은 북한산 등반입니다.

 

 

 

  

 

  

*선우아빠님: 힘들게 의상봉을 오르고 계시군요. 사진이 참 멋있었는데...

그런데 왼쪽 상단에 날라가는 녀석은 까마귀??? 우리 그냥 독수리라고 생각하죠! 북한산 독수리~ㅋ

 

 

 

 

 

*쥔장님: 매번 사진을 찍어주셔서 이번에는 제가 한 번 카메라에 담아 보았습니다. 배경 좋고, 인물 좋고!

 

 

 

 

 

* 북한산성: 산성의 특성상 주위에 있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축성을 한답니다. 그래서 시골의 돌담처럼 질서정연하게 축성되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됩니다.

요거는 폐허가 된 성곽 일부에 사람들이 기원석을 올려 놓은 것 같네요. 성곽이 성황당이 된 것이 아닌가요?ㅋ

 

 

 

 

 

 

* 복원된 성곽: 아무리 봐도 올바른 방식으로 복원된 모습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위에 올린 돌은 북한산에 있는

돌이 아닌 다른 곳에서 가져온 것처럼 보이네요. 사진 아래쪽에 있는 괸돌들이 원래 성곽을 이루었던 것 같습니다.

 

 

 

 

 

 

 

*북한산성: 북한산의 경사도를 이용한 천혜의 요새라고 생각되는군요.

 

 

 

 

 

 

 

 

 

* 다솜님: 힘든 산행 와중에도 카메라를 들이대면 바로 포즈가~ㅋ 나이미스님과 자유의지님도 보이네요!

 

 

 

 

 

* 길바닥코딩님: 멋진 바위와 함께 한 컷~

 

 

 

 

 

 

* 경천님: 멋진 배경을 뒤로 하고 한 컷. 사진만 보면, 경천님이 산악사진 전문가처럼 보이는군요!

 

 

 

 

 

 

 

* 경희님: 경희님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한 컷! 그나저나 저 바위는 참 많이 등장합니다.

 

 

 

 

 

 

 

* 별님: 별님이 별을 들으셨군요. 점프를 하시려는지 자세를 응크리셨군요! 왼쪽으로는 믹님이 보이는군요~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 수진님: 빠질 수 없지 수진양! 그런데 얼굴은 안 보이는군요. 대신 이런 사진이 역동적으로 보여서 더 좋을지 모르지 음...

뒤로는 코딩님, 멋진여행가님이 보이는군요. 코딩님과 여행가님 중간에는 사페티이거님이 있답니다.

 

 

 

 

 

 

 

 

 

* 선우아빠님: 원효봉에서 바라본 풍광입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무척 시원한 조망입니다.

 

 

 

 

 

 

 

* 나무들: 우뚝 솟은 봉우리들을 뒤로 하고. 인증샷 한 컷!

 

 

 

 

 

* 파워블로킹님: 이번에도 제 후기의 대미는 파워블로킹님이 장식해주셨습니다. 아쉽게도 파워블로킹님은 원효봉에 못 오르셨답니다.

함께 했으면 더 좋았을텐데요. 이 사진은 의상봉에서 찍은 사진인데 그래도 이 사진의 배경도 무척 좋네요! 

 파워블로킹을 비롯한 마클 11분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심야 지리산 자전거 질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56일간의 백두대간자전거여행-마지막] 민족의 영산 지리산

13.03.21 18:21l최종 업데이트 13.03.21 18:21l

 

 

 

▲ 성삼재 성삼재에서 바라본 전남 구례. 앞에 보이는 도로가 지리산 관통도로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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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는 타이밍이다. 여행기의 작성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은 콘텐츠가 있다고 하더라도 발표 시기를 놓친다면 그 의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여행기는 묵혀 놓으면 놓을수록 가치가 상승하는 골동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행 기사는 시급을 다퉈 발표하는 성격의 뉴스가 아니다. 사진도 잘 선별해야 하고, 이동 중에 기록한 메모들도 잘 정리해야 한다. 그렇기에 기사를 송고할 때까지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장거리 여행에 대한 여행기이면 더더욱 그렇다.

문제는 그 지점에 있다. 시간의 소요가 느긋함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느긋함을 부리다가 기사 작성이 계속 뒤로 미뤄지고, 그러다 아예 전체 기사분에서 누락되는 원고가 생기게 된다. 내가 연재 아닌 연재를 하고 있는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 여행기에도 그렇게 누락분이 발생했다. 삼척·동해·예천·거창·김천 등등 시간에 쫓기다 보니 좀 더 오래 머물고, 좀 더 많은 에피소드를 경험한 지역을 취사선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뜀뛰기를 하듯 여행기를 작성했지만 한 번 꼬인 '스텝'은 잘 풀리지 않았다. 한여름에 다녀왔던 이야기가 엄동설한에 발표됐던 것이다. 계절감이 전혀 맞지 않게 된 것이다.


 


▲ 도계삼거리 달궁삼거리를 도계삼거리라고도 부른다. 저 표지판처럼 그 곳은 분명 아름다운 곳이지만... 필자에게는 너무나 험난한 곳이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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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파주의보에 보는 반소매 사진

 

 

특정 주제를 놓고 공모를 하는 여행기 공모전이나 옛 추억을 회고하는 방식의 포토에세이라면 시간의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처럼 특정 시기에 행하고 동선이 명확한 여행기는 계절감이라는 족쇄에 묶일 수밖에 없다. 2012년 12월 31일에 발행된 <태백산 주목, 혹시 당신이 산신령?>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 여행기를 본 지인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글도 사진도 꽤 쓸 만한데, 반소매 입은 사진은 좀 추워 보인다. 지금 한파주의보라는데…."

아무리 좋은 글을 쓰고, 아무리 멋진 사진을 게재하더라도 한파주의보를 체감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반소매 사진은 '아니올시다'를 유발시킬 것이다. 하지만 이제 필자도 이런 변명 아닌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이제 뜀뛰기를 하듯 여행지를 취사선택을 할 필요도 없게 됐다. 이번 편이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 마지막 편이기 때문이다.

 

 



# 2011년 여름에 만난 태풍의 기억

여행 43일 차 2012년 7월 26일

나는 경남 함양군을 출발했다. 이제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리산!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민족의 영산. 나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의 마지막 관문인 지리산. 그렇게 필자는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마무리 짓기 위해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나는 이미 2011년에 관통도로를 통해 지리산을 넘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는 국토종단 자전거여행 중이었는데 성삼재에서 태풍을 만났다. '죽음의 도로'라고 불리는 지리산 관통도로를 힘들게 올라갔는데 나를 반긴 것은 '덴무'라는 태풍이었다.

무척 억울했다. 여러 번에 걸친 위기를 넘기고 성삼재에 도착했더니, 태풍이 필자를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구절양장 같은 꾸불꾸불한 지리산 관통도로를 40시간에 걸쳐 이동을 했는데 말이다.

겨우 태풍이나 만나려고 그 고생을 하며 성삼재에 올랐던 것인가. 힘 좋은 4륜 구동 자동차로도 오르기 힘들다는 지리산 관통도로를 자전거로, 그것도 40kg나 되는 짐을 싣고 올라섰건만. 이름도 이상한 태풍이나 만났으니! 더군다나 당시 내 자전거의 브레이크는 둘 다 작동 불능 상태였다. 지리산 성삼재에서 태풍을 만났지, 자전거 브레이크는 망가졌지, 체력은 다 빠졌지.

 

 

 


 
▲ 지리산 관통도로 꼬불꼬불 구절양장 같은 지리산 관통도로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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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의 종결점을 다시 지리산 성삼재로 잡은 것은 2011년의 '리벤지 매치'의 성격이 강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성삼재에 올라서 등산객들에게 제대로 환대와 격려도 좀 받고, 노고단에도 오를 생각이었다. 지리산 관통도로에서 블루야크(내 자전거의 애칭)를 끌고 가는 내내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푸하핫, 태풍도 안 오고 날씨 참 좋네. 이번에는 성삼재에 올라가서 목에 힘 좀 주고 다녀도 되겠군. 백두대간자전거 여행의 마지막이 지리산이라고 등산객들한테 자랑하고 다녀야지!'

나는 시간 계산을 잘못해, 야간주행을 하는 위험천만한 짓을 했지만 당시 마음은 뭔지 모를 뿌듯함이 넘쳤다. 불빛 하나 없는 산 한복판에서 오직 달빛에 의존해 주행하는 것도 '판타스틱'했고, 그런 '판타스틱'한 일이 벌어지는 곳이 지리산이라는 점도 내 마음을 기쁘게 했다. 당시 여행일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여행을 해서 그런지 몸이 무척이나 피곤하다. 그냥 눈이 감길 정도다. 하지만 기분은 좋다. 몸은 피곤해도 기분은 상쾌하다. 왜? 이곳은 지리산이니까! 민족의 영산 지리산이니까!"(7월 26일 오후 11시 뱀사골 야영장에서)

 

 

 

 


# 땀 뻘뻘 흘리며 페달 밟는데, 옆에서는 맥주가...

다음날. 지리산 산신령께서 단잠을 내려 주셔서 그랬는지, 나는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까지 잠이 들었다. 여행 막바지라고 여유를 좀 부렸던 것이다. 어차피 내가 그곳 지리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시간당 이동 거리도 가늠할 수 있었기에 그런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그 전년도의 경험도 한몫했다.

한여름의 지리산은 생기가 흘러넘쳤다. 덩달아 탐방객들이나 캠핑족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흘러넘쳤다. 달궁 캠핑장을 지날 때였다. 한무리의 가족들이 둘러앉아 수박을 쪼개 먹고 있었다. 시원한 맥주도 한 잔 걸치면서... 불타오르는 아스팔트의 열기를 온몸으로 느꼈던 나로서는 그런 광경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천하절경 속에서 음식과 술잔이 도니 이곳이 무릉도원이 아닌가? 하지만 술 한 잔 받아먹지 못하는 내 처지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렇게 느긋한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서편으로 해가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리산 지리를 안다고 하지만, 야간에 지리산 관통도로를 이동하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성삼재에 오르는 것이 급선무였다.


 


▲ 노고단에서의 아침 첩첩 산 중을 배경으로 한 컷! 일출 즈음이라 그런지 사진이 잘 안 찍혔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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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재에서의 결심 '자랑 좀 해야겠다'

 

 

7월 27일 오후 7시


드디어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에 진입했다. 유명한 달궁 삼거리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 관통도로의 경사도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가팔라졌다.

보통 산행을 할 때 자신의 에너지 중 30%는 비축해놔야 한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아무리 비상시라도 체력이 남아 있다면 훨씬 더 생존 확률이 높아진다. 보다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산행 가이드'는 내게 적용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젖 먹던 힘까지 내뿜어야 할 시기였던 것이다.

그냥 등산 배낭을 메고 그 도로를 타고 오르는 것도 힘든데 40kg 정도 되는 짐을 실은 자전거를 끌고 그곳을 올라가야 하다니…. 어느 구간은 너무 경사도가 심해서 자전거가 뒤로 밀리기까지 했다. 닳고 닳은 신발을 신고 자전거를 밀어 올리는 순간에 내 에너지는 0%에 가까웠을 것이다. 에너지 30% 비축론은 지리산 관통도로에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는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법칙이다.

그렇게 나는 온몸으로 성삼재로 향했고, 지리산은 어둠으로 덮였다. 이제 슬슬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의 마지막도 보이기 시작했다.

'푸하핫, 드디어 내 여행도 끝이 보이는구나. 성삼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분에게 인사하고 여행 자랑 좀 해야지!'

내 발걸음과 블루야크의 바퀴질도 더 분주해졌다. 빨리 가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다. 몸은 힘들었으나 노고단이 눈앞에 있으니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 성삼재 드디어 성삼재에 도달했다. 어두운 시각에 도착했던 터라 사진도 잘 안 찍혔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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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7일 오후 8시


성삼재에 도착했다. 드디어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의 종착지에 도달한 것이다. 난 해냈다. 결국 여행의 끝을 본 것이다. 어둠 속 성삼재는 고요했다. 밤이라 그런지 오가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필자는 성삼재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려고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성삼재 이곳에서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마쳤습니다. 여행을 마치자마자 처음으로 뵙는 분이 선생님이십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으로 보이는 분이 주차관리소에서 급히 나오셨다. 난 먼저 인사를 건넸다.

 

 



# 자랑은 고사하고 꾸지람부터 듣다니

"안녕하세요."
"아니 이 밤에 여기는 뭐하러 올라와?"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을 뱉고는, 서둘러 쇠사슬로 자동차 진입로를 걸어 잠그는 것이었다.

"뭐해요. 당장 가요."
"……."

역시 또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난 당혹스러웠다. 힘든 여행을 종결짓자마자 가장 먼저 접한 소리가 퉁명스러운 꾸짖음이라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겨우 이런 괄시나 당하려고 그 고생을 하면서 지리산에 왔단 말인가? 내 여행이 이렇게 멸시를 당할 정도로 하찮았단 말인가?'

2011년에 태풍을 맞았던 것보다 훨씬 더 억울했다. 그나마 태풍을 맞았을 때는 관리소 직원이 직접 커피를 타주며 필자의 '무사귀환'을 염려해줬다. 그런 고마운 기억이 있었기에 일부러 국립공원 직원분을 찾아 먼저 인사를 드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 작은 소망은 퉁명스러운 꾸짖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버렸다.

'그래 무슨 대단한 자랑거리라고 그렇게 혼자 오버 하냐. 뭐 대단한 여행이라고…. 대충 정리하고 빨리 서울 갈 생각이나 해야겠다.'

심신이 다 지쳤다. 그냥 빨리 복귀하고 싶었다. 심야고속버스라도 있으면 잡아타고 곧장 서울로 출발하고 싶었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지리산 관통도로를 타고 내려간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제동이 좋은 자동차도 골짜기로 굴러떨어진다는 '죽음의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야간에 그곳을 내려간다면?

나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가야 했다. 그 직원이 퇴거 요구를 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렇게 멸시를 당했더니 그 자리에 계속 머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걸 어쩌지? 가긴 가야 하는데, 내려갔다가는 바로 골로 갈 텐데….'



▲ 노고단 탐방소 노고단 탐방소에 갔더니, 저렇게 노고 할매가 반겨주었다. 사진에서 보여지듯 내 자전거는 해발 1,380m까지 올라갔다. 짐을 주렁주렁 매달고 참 멀리도 간 셈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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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다가 딱지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내려갈 수 없으면 올라가면 되지 않던가? 그냥 노고단으로 가면 되지 않던가?


현재 노고단-성삼재 구간은 임도로 돼 있다. 그래서 1톤 트럭도 통행이 가능하다. 하지만 자전거는 통행할 수 없다. 게다가 일몰 후 야간에는 산행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두 개의 규칙을 어기고 노고단으로 향했다.

한밤중 지리산은 고요했다. 적막감이 들 정도였다. 나는 랜턴을 끄고 달빛에 의존해 노고단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지난 시간을 회고해봤다. 한밤중 지리산에서 여행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그렇게 두 시간 동안 자전거를 끌고 가니 노고단에서 빛나는 불빛을 만날 수 있었다. 노고단 탐방소에 갔더니 어떤 젊은 국립공원 직원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야간 산행에, 자전거까지…. 이러시면 안 돼죠. 과태료 딱지를 맞으실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말에 수긍했다. 그 직원이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다음부터는 규칙을 꼭 지켜주십시오. 어쨌든 여행이 완료된 건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해 나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은 무사히 종료됐다. 성삼재에서 빰 맞고 노고단에서 화풀이 한 경우이지만, 어쨌든 지리산에서 무사히 여행을 종료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 육십령 지리산과 남덕유산 사이에 있는 육십령 고개. 육십령도 백두대간에 자리잡은 고개이다. 지리산까지의 여행 일정을 마치고 지선 개념으로 육십령을 거쳐 남덕유산까지 달려보았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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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그동안 재미는 없고, 분량만 긴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전하고 싶다.

덧글. 내 자전거 블루야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고지대인 노고단 탐방소(1380m)에 오른 여행 자전거로 기록될 것이다. 만약 그 주차관리소 직원 아저씨가 아니었으면 블루야크의 고지대 기록은 성삼재(1090m)에서 멈췄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를 가지고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곳은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만항재(1330m)다. 한마디로 자전거도 만항재까지밖에 못 올라간다.

 

 

 


 

 

 

 

 

 

 

 

 

 

 

 

 

 

 

 

 

 

 

 

 

 

 

 

 

 

 

 

 

 

 

석불 앞에 서니 웃음이 절로 나오네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 12] 안동 이천동 석불 앞에서 '깔깔'거리며 웃다

 

 

13.02.21 13:43l최종 업데이트 13.02.21 18:20l
▲ 국제탈춤공연장 안동 시내에 국제탈춤공연장이 있다. 그 입구에 하회탈 석상이 방문객들을 환영해 주고 있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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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14일: 여행 31일차


# 안동 이천동 석불 앞에서 크게 웃어댔다!

누구는 여행을 직접 할 때보다 여행 계획을 꾸릴 때가 더 흥분된다고 한다. 지도를 보며 동선을 그리고 검색을 통해 탐방지에 대한 사전 정보를 습득하는 행위 자체가 즐겁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행 계획을 꾸리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한정된 시간과 뻔한 예산을 가진 가난뱅이 여행자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다녀보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느껴보고 싶으나 시간과 경비 제약 때문에 가보고 싶은 탐방지를 뺄 수밖에 없었던 아픔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가난뱅이 여행자들이라면 더 많은 뺄셈을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여행자들이 그렇듯, 필자도 절경과 유적지를 양대 축으로 삼아 여행 계획을 수립한다. 한편에서는 아름다운 풍광에 매혹되고, 또 한편에서는 찬란한 우리 문화유산에 감탄사를 내뱉는다는 말이다. 양대 축을 동시에 누리면 금상첨화겠지만 따로 따로 체험한다고 해도 큰 불만은 없다. 이번 여행기에 소개할 안동 이천동 석불은 후자 쪽에 속할 것이다. 이천동 석불은 감탄사를 유발시키는 훌륭한 우리의 문화유산이었던 것이다.

 

 

 

▲ 안동 이천동 석불 멀리서 보면 이천동 석불은 망토를 두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천동 석불은 몸통에 따로 제작한 머리를 올린 형상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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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필자는 이천동 석불 앞에서 '깔깔깔'하고 연신 웃음보를 터뜨렸다. 석불 앞에서 경망스럽게 웃었더니,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필자를 보고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다. 그럼 필자는 왜 그렇게 부처님 앞에서 망동된 행동을 했던 것일까? 혹시 필자는 불교에 대한 존중심이 없던 것이 아닐까?

 


# 거인 같은 고려 전기시대 석불들

전편인 경북 봉화 여행기에서 필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처님을 만나 뵙고 왔다고 했다. 청량산에 있는 청량사에서 세상을 시원스럽게 굽어보시는 석불 좌상을 두고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 말에 빗대보자면 안동 이천동 석불은 세상을 즐겁게 해주시는 부처님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멀리서 보았을 때 이천동 석불은 망토를 두른 모습이었다. 큰 망토를 두르고 얼굴을 불쑥 내민 형상이었다. 그런 독특한 형상의 석불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런 엉뚱한 생각이 스쳐지나 갔다.

'부처님이 누더기 같은 도포를 두르고 불쌍한 중생들을 위해 고행의 길을 가시다 안동 이천동에서 석상이 되신 것이 아닐까?'

 

▲ 안동 이천동 석불 망토를 두르고 수풀 속에서 그 앞을 지나는 중생들을 굽어 보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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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이천동 석불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든 석불이다. 몸통 부분과 머리 부분이 별개의 암석으로 제작된 독특한 형상을 갖고 있는 것이 이 석불의 특징이다. 몸통 부분, 즉 필자가 망토를 둘렀다고 지칭한 큰 바위 상단 중앙에 머리 부분을 조각한 별개의 돌을 얹었다는 것이다. 단지 머리 부분만 조각하여 올렸을 뿐인데도 자연석인 몸통 부분이 서로 어우러져 일체형의 거대한 석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석불 제작자의 지혜와 구성 감각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대목이다.

안동 이천동 석불은 고려 전기 작품이다. 파주 용미리마애이불입상(일명 파주 쌍미륵 석불)이나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등이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석상들이다. 이 시기에 세워진 석불들은 하나 같이 다 엄청난 크기들을 자랑하고 있다. 신체비례에 맞춰 정교함을 구현하는 방식이 아닌, 선이 굵은 방식으로 '키다리 아저씨' 같은 큰 석불을 조각했던 것이다. 일례로 대조사 석불은 인체비례로 따지면 4등신에 가깝고, 얼굴은 '얼큰이'다. 정교성보다는 투박함이, 조화미보다는 개성이 넘치는 석불들이 탄생했던 시기가 바로 고려 전기였던 것이다.

그럼 왜 고려 사람들은 선이 굵으면서 개성이 넘치는 큰 석불들을 제작했을까?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사람들보다 세공기술이 덜 해서 그런 식으로 석불을 제작했단 말인가? 고려 전기 시대에는 마을의 안녕에서부터 개인적 기복까지 다 받아주는 수호신과 같은 '키다리 아저씨'가 대표적인 석불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런 대형 석불들은 해당 지역의 민간 신앙이 접목된 형태라고 한다. 마치 큰 장승을 세운 것처럼 거인 같은 수호신이 마을 입구나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으니 해당 지역 사람들은 얼마나 든든했겠는가?

 

▲ 안동 이천동 석불 안동 이천동 석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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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주 쌍미륵과 안동 이천동 석불


더불어 파주 쌍미륵은 잉태까지 '책임'져 준다고 하지 않던가? 파주 쌍미륵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남녀 쌍미륵 형상이라 잉태와 관련된 기도들이 많이 올려진다는 것이다. 즉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부부들이 많이 와서 기원을 드리고 간다고 한다. 실제로 이 쌍미륵과 관련된 설화도 잉태와 관련이 있었다.

파주 쌍미륵도 안동 이천동 석불처럼 자연석을 몸통으로 이용하였고, 얼굴 부위도 따로 제작하여 올렸다고 한다. 쌍미륵이 있는 용미사를 방문했을 때, 필자는 쌍미륵을 보면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경내에서 그것도 석불 앞에서 큰 소리를 내며 웃는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짓이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스님이었다. 누가 뒤에 있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웃었던 것이다.

"쌍석불을 보니까 좋네요. 그냥 보기만 해도 복이 오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 파주 용미리마애이불입상 일명 파주용미리석불입상 또는 쌍미륵석불이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쌍둥 석불 형식을 띄고 있다. 왼쪽에 원립불을 쓰고 있는 상은 손에 연꽃을 들었는데 남성을 뜻한다고 한다. 오른쪽 방립불을 쓰고, 손을 합장한 상은 여성을 뜻한다고 한다. 원립불은 말그대로 둥근 모자 형태이고, 방립모는 그에 비해 각이 진 모자 형태라고 한다. 용미리마애이불입상은 보물 93호로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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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 이천동 석불 이천동 석불이 있는 곳은 제비원이라는 하여, 조선시대 국영여관이 있었던 곳이다. 즉 석불이 세워진 제비원 일대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교통의 요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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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한 짓을 했지만 웃음소리가 나쁘지 않게 들렸는지, 스님은 필자를 꾸짖지 않고 그냥 거처로 돌아가셨다. 필자는 그런 큰 웃음을 안동 이천동 석불 앞에서도 터뜨리고 만 것이다. 망토를 두른 듯한 모습이 재밌었고, 수풀 사이로 몸을 쑤욱 내민 듯한 모습도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하느라 심신이 다 지쳐있었지만 석불을 보고 있을 때만큼은 근심 걱정을 다 내려놓고 크게 웃었다.

그런 '불경'한 모습을 보고 어떤 불심이 깊은 분이 손가락질을 해댔지만 필자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마을의 수호신에게 안녕을 기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석불 앞에서 경망스럽게 '깔깔'거리며 웃었던 것은 예의에 어긋난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런 안동 이천동 석불이 준 큰 기쁨 덕택에 나는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계속 해서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천동 석불을 보기 위해 거의 20Km 이상을 돌아갔지만 200Km 이상을 갈 수 있는 에너지를 자연스럽게 충전시킨 느낌이었다.

글을 마치기 전에 4대강과 관련된 이야기를 잠깐 언급해 보겠다. 이미 실패한 정책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4대강에 대해서, 필자까지 나서서 왈가불가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필자가 스스로 느낀 감상 정도만 언급해 보겠다.

필자는 경북 안동에서부터 구미까지 낙동강 자전거도로를 타고 이동을 했다. 필자는 예전부터 국토를 종단하는 자전거 도로가 하나 개설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자전거도로든 도보여행길이든 무동력 여행을 하는 여행자들이 안전하게 이동을 할 수 있는 길이 개설됐으면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4대강의 부속시설로 만들어진 현재의 4대강 자전거도로 방식은 반대한다. 필자가 직접 주행을 한 결과 4대강 자전거도로는 안전성이 결여된 구간이 상당히 많았다. 4대강을 중심축에 두고 억지로 설계를 해서 그랬는지 급경사가 다반사였다. 기존의 산길과 농로길을 끌어 와서 4대강 자전거도로 탈바꿈을 시키느라 그런 무리수가 나왔던 것으로 판단된다. 급경사가 진 농로길은 굴곡이 심한 일반국도 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도로폭이 좁을뿐더러 안전시설물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를 가장 당혹시켰던 것은 강 중간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보였다. 그런 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아름다운 이곳에 이런 시설물이 있어야 하지? 굳이 이런 시설물이 여기 있을 필요가 있을까?'

자연석을 이용하여 석불을 제작함으로써 주위사물들과 혼연일체가 된 안동 이천동 석불을 보다 '쌩뚱맞게' 낙동강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입맛이 무척 씁쓸했다.

 
▲ 낙단보 경북 군위군에 위치한 낙단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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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 낙동강 상류의 사진이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두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보를 쌓고, 콘크리트를 바르면서 4대강이 친환경적이라고 하면 그걸 누가 믿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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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풍광만 보고, 걷기만 하는 트레킹에서 벗어나고 싶으신가요?

 

* 정상만 찍고 하산을 하는 등산여행이 지겨우신가요?

 

* 답사도 속도전을 하는 것인지, 스케줄에 쫓겨 '버스 뺑뺑이'를 하는 답사여행이 싫으신가요?

 

* 아웃도어를 통한 육체적인 활동은 좋은데 지적인 활동까지 병행하고 싶으세요?

 

 

누구나 한 번쯤 아웃도어를 하시다 이런 물음들을 곱씹어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사실 위에 물음들도 제가 여행을 하다 만난 분들의 의견을 토대로 작성한 것입니다.

이런 물음들을 종합해보자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기왕하는 아웃도어, 좀 더 배우고. 채우자!'

 

역사트레킹은 이런 고민들 속에서 창안됐습니다. 육체적인 활동을 넘어서서 지,덕,체가

혼연일체되는 아웃도어를 해보자는 것이 바로 역사트레킹의 목표입니다.

 

 이런 역사트레킹의 바탕에는 우리의 5천년 문화전통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지붕 없는 박물관'이란 말이 있듯이 우리나라는 전국에 문화재들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 유서 깊은 문화유산을 탐방하고, 이어서 풍광 좋은 길을 트레킹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지,덕,체가 배양되는 것입니다.

 

역사트레킹은 마스터에 의해서 주관됩니다. 마스터는 문화유산 앞에서는 문화해설사가

되고, 도보코스에서는 대장 역할을 합니다. 길을 걷는 중간중간에는 지리학자가 되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마스터의 역할이 무척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화해설도 해야하고, 10km 정도의 트레킹 리딩도 해야 하니까요.

그러고보니 마스터는 지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강해야 되겠군요!

 

10km 정도의 도보가 있듯이, 역사트레킹은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일반적인 답사여행과는 구별됩니다.

수학여행식의 '버스 뺑뺑이'를 하지 말자는게 역사트레킹의 큰 취지입니다.

 

역사트레킹은 걸음마 단계입니다. 아니 아직 시작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걸음걸이를 뛸 것입니다. 느릿느릿 걸어도 황소걸음이란 말이 있잖아요!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 사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불인 관촉사 은진미륵입니다!

 

 

 

 

 

 

 

 

 

 

 

 

 

 

 

 

 

 

 

 

 

 

 

 

 

 

 

 

안녕하세요?

 

드디어 역사트레킹 카페가 탄생했습니다.

역사유적 답사와 트레킹이 결합된 역사트레킹은 신개념의 아웃도어 활동입니다.

 

수학여행 같은 속도전 식의 '버스뺑뺑이'와 그저 육체적 활동으로만 국한된  

기존의 트레킹을 지양하고, 역사탐방과 트레킹을 동시에 진행하여

·덕·체를 골고루 배양하고자 하는 것이 역사트레킹의 목표입니다!

 

역사트레킹의 리더는 마스터라고 불릴 예정입니다. 마스터는 유물 앞에서는 문화해설사가 되고,

트레킹에서는 리더가 됩니다. 어떨 때는 역사가, 어떨 때는 지리학자, 또 한편으로는

대장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 만큼 마스터의 어깨가 무거울 겁니다. 제 어깨도 무겁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 역사와 아웃도어의 만남! 아웃도어 활동을 하면서 지식도 쌓고,

육체 활동도 하고. 이것만큼 좋은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충남 서산 아라메길에 있는 서산삼존마애불입니다. 저 부처님의 후덕한 미소처럼

역사트레킹 카페가 크게 번창하길 기원해 봅니다~!

 

 

 

 

 

 

 

 

클릭---> 역사트레킹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처님을 만나다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11] 경북 봉화 여행기②

13.02.02 09:56l최종 업데이트 13.02.02 09:56l
▲ 청량사 청량산 중턱에 있는 청량사. 사찰 한 가운데에는 석탑과 함께 부처님이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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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량사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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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 하늘다리에서 스릴을 즐기다!

 

다음날.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정신없이 잠에 빠져 있었는지 늦잠을 잔 것이다. 세면을 하고 난 후에 어제 내가 '물아일체'를 했던 곳을 찾아보았다. 기억을 더듬어 그 곳을 찾았는데, 자세히 보니 거기는 좀 움푹 파인 곳처럼 보였다. 선녀탕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충의 틀은 나왔다. 그래서 난 내식대로 이름을 지어보았다. 신선탕으로.

그런데 신선탕 주변에 쓰레기가 눈에 띄는 게 아닌가! 누군가가 먹다 남은 술병과 안주거리들을 그대로 놓고 간 것이다. 어제밤에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난 좀 짜증이 났다. 자연은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와서 '유명관광지 티'를 내고 갔기 때문이었다. 어떤이들이 '유명관광지 티'를 내던 곳에서 난 좋다고 물아일체를 했던 것이다.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 청량사 산들이 병풍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있지만 부처님이 계신 곳은 주위가 확 트여 있어, 풍광이 시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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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까지 와서 등산을 하지 않고 그냥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전거와 텐트를 잘 놓아두고 등산 버전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등산을 하기 전에 신선탕 근처에 있는 쓰레기들을 수거하고 갔다. 내가 전날 물아일체를 했지만, 한편으로는 풍기문란도 했기에 그 벌로 환경미화를 자청했던 것이다. 내가 재미있게 즐겼던 만큼 남들도 재밌게 놀 수 있게 뒷정리를 깨끗이 하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청량산도 국립공원 클럽의 물망에 오를 정도로 절경을 뽐내는 산이다. 낙동강 상류와 어우러진 청량산의 모습은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또한 산 중턱에 있는 청량사에 가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처님도 만나 뵐 수 있다.

한편 청량산에는 하늘다리가 있다. 그 곳에 서면 자신의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산바람이 세게 분다. 스릴을 느끼고 싶지만 번지점프를 할 용기가 나지 않는 분들은 청량산 하늘다리를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필자가 구름다리를 통과할 때, 갑작스럽게 돌풍이 불었는데 '삐그덕' 소리를 내면서 다리가 요동을 쳤다. 스릴 만점이었다.

 

 

▲ 청량산 하늘다리 저 하늘다리를 건너는 것만으로도 스릴이 넘친다. 다리를 건널때 강력한 횡풍이 불면 그 스릴감은 공포감으로 바뀔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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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량산 하늘다리 선학봉과 자란봉을 연결하는 청량산 하늘다리는 해발 800m 고도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바람이 세차게 분다. '바람의 계곡'에 하늘다리를 걸어놓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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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는 물귀신, 오늘은 고기귀신의 유혹에 넘어가다!


즐겁게 청량산 산행을 마치고 난 후, 필자가 다시 베이스캠프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 경이었다. 그런데 내 베이스캠프 옆쪽에 승용차와 함께 작은 텐트가 하나 쳐져 있었고, 수염을 기른 어떤 아저씨가 분주하게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삼겹살을 굽는지 고소한 냄새가 솔솔 내 코를 자극시켰다. 어제는 물귀신이 나를 유혹하더니만 오늘은 고기귀신이 나를 유혹하나?

"자전거여행 다니시나 봐요? 여기 와서 같이 식사 하시겠어요?"

서울에서 봉화군으로 귀농을 하셨다는 분이셨다. 자신도 젊었을 때 자전거여행을 많이 다녔던 터라 자전거 여행족들의 마음을 잘 안다고 했다.

"아참, 아까 저 아래에서 쓰레기를 줍던데..."
"그거요. 제가 먹은 건 아니고요. 그냥 보기 흉해서 제가 환경미화 좀 했죠."
"아, 역시 그랬구나! 진짜 자전거여행 하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단 말야."

별 뜻 없이 쓰레기를 주었을 뿐인데, 그 덕에 난 푸짐하게 삼겹살과 술을 얻어 마실 수 있었다. 착한 일을 해서 내가 상을 받았던 것일까? 그 귀농아저씨도 그날 같이 캠핑을 했다. 젊은 시절 캠핑을 자주했던 분이라 귀농 이후에도 종종 캠핑을 해오셨다고 한다.

"그 팔각정 명당자리에요. 그 자리 내가 좋아하는 자리인데..."

알고 보니 내가 아저씨의 명당자리를 '선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량산 등반에서 오는 피로감에다 푸짐한 저녁 식사까지 대접받았더니 노곤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날은 자리에 눕자마자 그냥 눈이 감겼던 것 같다.

다음날.

 


그토록 예쁘게 안개가 낀 산을, 난 난생처음 보았다. 낙동강에서 피어오르는 안개가 청량산 봉우리들을 휘감고 있는 모습은 장관중의 장관이었다. 마치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맛에 강변 캠핑을 하는 거구나!

그렇게 진기하고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뒤로 하고 나는 계속 자전거여행을 이어갔다. 외롭고 힘든 길이었지만 아름다운 우리나라를 마음껏 느낄 수 있었으니, 난 행운아였던 셈이다.

 

▲ 차 한 잔 청량사 같은 고즈넉한 사찰에서 느긋하게 차를 한 잔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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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량사 청량사 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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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해가 졌네"... 이럴 때 최고의 야영지는?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10] 경북 봉화 여행기①

 

13.02.01 11:01l최종 업데이트 13.02.01 13:24l

 

 

 

 

 

 

 

▲ 낙동강과 청량산 필자가 봉화를 방문했을 때는 장마철이라 그랬는지 무척 유량이 풍부했다. 물소리가 아주 거세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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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동강 낙동강은 청량산을 굽이쳐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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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을 바라보면서 잠이 드는 것처럼 로맨틱한 '굿나잇'이 또 있을까? 나는 바다도 좋아하지만 강변에서의 하룻밤을 더 선호한다. 그 이유는 강변이 갖고 있는 아기자기함 때문이다. 난 광활한 망망대해를 인간의 한계를 일깨워 주는 각성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다독여 주는 입체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강물을 끌어와 농사를 짓고, 강촌으로 친구들과 즐겁게 모꼬지를 가고, 캔 맥주 하나 들고 홀로 한강에 나가 실연의 아픔을 강물에 실어 보내고...


이런 강변에 산이 어우러지면 그 입체성은 더욱더 강조될 것이다. 경쾌하게 흐르는 강물 소리에 산 새 소리가 어우러지면, 최소한 사운드면에서는 이미 무릉도원에 도달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 이번 여행기는 강변 캠핑에 대한 이야기이다. 필자는 백두대간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매일같이 텐트를 쳤다. 한계령 도로 정상에서 텐트를 쳤고, 울릉도 북면 천부항에도 쳤다. 또 수많은 초등학교와 폐교, 개활지에도 쳤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최고의 캠핑지에 대한 순위가 매겨졌다. 그럼 최고의 캠핑지 1순위는 어디일까.

 

 





▲ 청량산 베이스캠프 낙동강가에 세운 청량산 베이스캠프. 청량산을 병풍 삼고, 낙동강 끌어 안을 수 있었던 최고의 캠핑지였다! 한편 저렇게 정자 아래에 텐트를 치니 밤새 비가 내려도 물난리를 겪을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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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산 베이스캠프

 

당시 나는 경북 봉화를 거쳐 안동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강원도 태백을 통해 봉화군으로 입성을 했는데, 내가 보기에 봉화는 행정상으로는 경상북도이지만 지형적으로는 강원도와 별반 다르지 않아보였다. 그렇게 험준한 지형을 가지고 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봉화지역은 '심산유곡'의 절경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명소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명호면에 있는 낙동강시발지공원에서부터 청량산 도립공원 입구까지의 길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병풍처럼 서 있는 청량산을 따라 낙동강이 시원하게 내달리는 모습은 장관 중에 장관이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 근처에 캠핑장이 있나요?"

나는 조금 다급한 목소리로 도립공원 관리사무소에 도움을 청했다. 낙동강과 청량산이 뽐내는 절경을 카메라로 담아내느라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몰랐고, 그러다 덜컥 일몰 시간을 맞았기 때문. 설상가상이라고 그때 빗줄기가 한 두 방울씩 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어, 여기는 근처에 캠핑장이 없는데... 여유가 있으면 민박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비수기라 민박 요금이 비싸지는 않을 텐데요."

자신도 아웃도어를 무척 좋아한다고 밝힌, 관리사무소의 한 젊은 직원은 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비수기에는 민박 요금이 비싸지 않다고 하지만, 내게는 비쌌다. 하루를 만 원으로 버텼던 내게 5만 원 짜리 펜션 숙박은 사치였기 때문이었다.

"아참, 이렇게 하면 되겠네요. 여기에서 쭈욱 가다보면 주차장이 나오는데 거기 보면 비를 막을 수 있는 오두막이 있거든요. 거기다가 텐트를 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장마철이라 사람도 거의 없으니까요."

 

 


 

▲ 청량산 도립공원 주자창 필자가 청량산을 방문했을 때는 장마철이라 그랬는지 주자창이 텅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최고의 캠핑을 즐길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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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시 아웃도어 하는 사람은 다르다!


그러면서 손수 커피 한 잔을 타서 내게 건네주었다. 역시 아웃도어를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다르긴 다른 듯싶었다.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자칫하면 숙소도 못 잡고 노숙을 할 판이었는데 말이다. 시골 인심에 아웃도어 인심까지 더해진 행운이었다.

가로등 불빛에 의존하여 그 직원이 알려준 곳을 찾아갔다. 그 곳은 팔각정 같은 곳으로 나무 의자와 테이블을 설치해두고 있었다. 좋은 풍광을 바라보면서 도시락을 먹으면 딱 좋을 것 같은 장소인 듯싶었지만 내 시야는 가로등 불빛 너머를 넘지 못했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 주위 풍광만 지레짐작 할 수밖에 없었다. 난 서둘러 의자와 테이블을 한 쪽으로 몰아 텐트 칠 공간을 마련했다. 그것들이 돌처럼 무거워서 힘을 좀 쓴 후에야 그럭저럭 비가 들치지 않을 정도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야 드디어 나의 '청량산 베이스캠프'가 완성될 수 있었다.

 

▲ 청량폭포 등산로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청량폭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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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래프팅 낙동강 상류는 물살이 급해 래프팅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실제로 청량산 도립공원 인근에는 래프팅 업체들이 산재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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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장에 템플스테이 발우 공양 문화를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⑨] 태백산 2편

13.01.02 08:35l최종 업데이트 13.01.02 08:35l

 

 

 

 

 

 

▲ 태백산캠핑장 일명 당골캠핑장이라고도 불린다. 아침에 눈을 뜬 후, 바라보는 태백산의 전경이 일품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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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태백산캠핑장에서 3일을 머물렀다. 이번편에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한 번 해보겠다.


# 물소리를 들으며 잘 수 있는 태백산 캠핑장

"야영비 받으러 왔습니다."

태백산 산신령님이 달콤한 잠을 내려 단잠에 빠져 있는데, 아침부터 누가 돈 타령을 하고 있는가? 난 퉁명스럽게 대답을 했다.

"내일 받으러 와요."
"..."

나는 당골매표소 아래쪽에 위치한 태백산캠핑장(일명 당골야영장)에다 베이스캠프를 꾸렸다. 당시가 장마철이라서 그랬는지 캠핑장에는 야영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몰래 화장실 문을 잠가 놓고 샤워를 했다. 원래는 캠핑장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는 것은 규칙 위반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놈의 돈이 원수지!

필자가 보기에 태백산 캠핑장은 상당히 좋은 곳이었다. 내부는 숲이 둘러싸고 있고, 외부는 산이 둘러싸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어, 말 그대로 숲 속에서 캠핑을 하는 식이었다. 또 캠핑장 옆으로 당골천이 흐르고 있어, 밤에 물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할 수가 있었다. 잠자리 변화에 민감한 사람들은 작은 소음에도 잠을 뒤척일 수 있지만 태백산 캠핑장은 당골천이 소음을 중화시키기에, 민감한 사람도 비교적 편하게 취침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밤에 산 새 소리와 함께 물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할 수 있는 캠핑장이라면, 정말 좋은 캠핑장이 아니겠는가? 물론 갈수기에는 물 흐르는 소리가 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 태백산 베이스캠프 저렇게 태백산캠핑장에서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참 단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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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형텐트 내 텐트와 비교하면 저 텐트는 궁궐 같다. 나중에 기회가 닿는다면 나도 저런 멋진 텐트에서 캠핑을 하고 싶다.

 

 

 

 

 


그렇게 좋은 태백산 캠핑장에서 필자는 3일을 머물렀다. 하지만 돈 한푼 안냈다. 처음 수금하러 온 이후에는 징수원들이 다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장실에서 규칙을 위반하고, 사용료도 지불하지 않는 등 민폐를 끼쳤다고 필자에게 손가락질을 하시는 분들도 있을 듯싶다. 하지만 필자는 민폐를 끼쳤으면 그만큼의 값을 한다. 화장실 청소를 깨끗이 했고, 캠핑장 식수대를 말끔히 치웠다.

어느 캠핑장을 가나 식수대는 먹다 남은 음식물 찌꺼기로 몸살을 앓는다. 그래서 퇴수가 잘 되지 않는다. 나는 그 찌꺼기들을 손으로 직접 다 끄집어내, 퇴수가 잘 되도록 하고 나왔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여행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골든보이 캠핑장에 가면 색다른 만남들이 기다리고 있다. '골든보이' 이 친구도 태백산캠핑장에서 만났다. 그는 3개월 동안 자전거를 타고 강원도 일대를 여행했다고 한다. 3개월 동안 강원도를 돌아다닌 터라 그의 허벅지는 튼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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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핑장에 템플스테이 식문화를 이식시키자


한편 그 음식물 찌꺼기는 필자가 버린 것이 아니었다. 음식물을 왜 남기는가? 넉넉히 먹고 즐기는 것도 좋다. 하지만 좀 너무하다 싶은 캠퍼들이 종종 눈에 보인다. 숨 가쁜 도시생활을 벗어나 대자연을 만끽하는 것은 정말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도시생활의 안락함을 캠핑에서까지 이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볼 때, 필자는 답답함부터 느낀다. 얼마 전 한 중앙일간지 주말 섹션에 겨울캠핑과 관련하여 전기장판에 관련된 이야기가 언급됐다. 필자는 그 기사를 보고 혀를 찼다.

'과연 이 엄동설한에 뭐 하러 전기장판까지 준비해서 캠핑에 나서는가? 전기 꼽을 곳은 있나? 그렇게 갖출 거 다 갖추고 싶으면, 동네 찜질방에서 몸을 지지는 게 최고일 텐데!'

최근 몇 년 사이에 우리나라의 캠핑시장은 엄청난 양적 성장을 이루었다. 하지만 질적으로도 그런가? 아직까지는 아닌 것 같다. 최첨단 장비로 '중무장'한 캠퍼들이 기본적인 캠핑 매너도 안 지키는 모습들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나같이 주머니가 가벼운 여행자들은 캠핑장을 애용해야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캠핑장 사용을 매우 꺼리는 경향이 있다. 다음 일정을 위해서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먹고, 마시자, 죽자'라는 캠퍼들의 소음에 새벽까지 잠을 설친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 태백산 캠핑장 필자가 손으로 음식물 찌꺼기를 끄집어 낸 식수대. 그 뒤로 필자가 몰래 샤워를 한 화장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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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우리도 최첨단 장비에 걸맞게 캠핑문화도 최첨단으로 향상 시킬 때가 됐다. 성숙한 캠핑문화에 한 발짝 더 다가서야 할 때가 됐다. 이제 캠핑장에서는 좀 덜 먹고, 덜 마시는 분위기가 퍼져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생각 같아서는 '템플스테이'와 같은 식문화와 정숙함이 전국 캠핑장에 만발했으면 좋겠다. 이건 너무 급진적인 생각인가?

마지막으로 당부할 말이 있다. 캠핑장에서 수금 징수원을 가장해서 사기 행각을 벌이는 사기꾼들이 있으니 주의를 요망한다. 대규모 캠핑장 같은 경우는 워낙 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하기에 사기꾼들의 좋은 활동처가 되곤 한다. 그들은 캠핑장 직원과 동일한 복장과 동일한 영수증 용지를 들고 다니며 캠퍼들을 현혹시킨다. 그런 사기에 넘어간 캠퍼들은 사기꾼과 정식 수금요원에게 두 번 요금을 납부해야 하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캠핑의 낭만은 사라지고 불쾌지수만 높아질 것이다.

 

 

 
▲ 백캠핑 대형오토 캠핑도 좋지만 요즘은 호젓하게 백캠핑을 하는 캠퍼들도 많이 늘어났다. 백캠핑은 배낭에다 캠핑장비를 짊어 지고 다니며, 캠핑을 하는 것을 말한다. 백캠핑의 관건은 짐의 경량화에 달려 있다. 필자가 행한 캠핑도 백캠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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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비를 받아서 얼마나 남겠냐고, 의문을 표시하실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형텐트의 경우는 통상 2만 원 정도의 요금을 지불한다. 그런 텐트가 10동 이상 있다고 생각해보시라. 한 시간도 안 되서 사기꾼들은 수십 만원을 챙길 수가 있는 셈이다. 그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캠퍼 자신이 조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몇 가지 팁을 제시해 본다.


1. 영수증을 꼭 확인한다.
2. 징수원의 직원증을 확인한다.
3. 쓰레기봉투를 요청한다.

2번 직원증 확인의 경우는 쉽지 않다. 수금요원이 직원증이 없는 단순 아르바이트생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면, 사전에 캠핑장 관리사무소의 전화번호를 메모해뒀다가 전화를 걸어 수금 요원의 신분을 직접 확인해 보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고 판단된다.

요즘은 웬만한 대형캠핑장은 사용료를 지불하면 해당 지자체에서 발행한 쓰레기봉투를 지급하니, 쓰레기봉투 지급여부도 잘 확인을 해보면 가짜 징수원들의 사기 행각의 덫에서 벗어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캠핑장 요금도 안 내고 도망간 주제에 말이 많다고, 아직도 필자를 질책할 분이 있을지 모른다. 여행이 다 그런 거지 뭐. 여행에 무슨 정답이 있겠는가! 그리고 캠핑장 팁도 알려드렸으니 너그러이 봐주셨으면 좋겠다! 물론 캠핑 적기에 맞춰 이런 팁을 알려드렸어야 하는데 엄동설한에 이런 글을 쓰니, 필자도 그게 참 아쉽다.

 

 

 

 

 

 

 

 

 

 

 

 

 

 

 

 

 

 

 

 

 

 

 

 

 

 

 

 

 

 

 

* 이 글은 고어코리아에서 행하는 마스터클래스 again 서울 7대명산 이벤트와 관련된 등산여행기입니다.

마스터클래스는 고어코리아에서 진행하는 품격있는 아웃도어 이벤트라고 합니다. 그런 품격 있는 곳에 제가

참여를 하게 된 셈인가요? 이번에 오르게 된 산은 관악산입니다.

 

 

 

 

 

 

 

 

* 마스터클래스 11차 회원들: 노란색 복장을 입고 오신 별님. 복장 때문인지 확실히 눈에 띄더군요.

뒤로는 다솜님과 라라님. 선우아빠님도 보입니다.


 

* 관악산과 가자쥔장님: 매일 사진을 찍어 주시느라 고생을 하셨는데 이번에는 주인공이 되셨네요!

 

 

 

 

이번 산행은 뜻깊은 산행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제 기존의 틀을 깨준 산행이었다고 할까요?

건방진 말일 줄 모르겠지만 전 서울 근교산을 오를 때는 거의 기록 카운팅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한강에서 자전거 라이딩을 하시는 분들이 기록을 체크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것이죠.

그만큼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지요. 오르면 오르는 거고 말면 마는 거지 뭐... 이런 식이었죠.

지리산 권역이나 강원도 권역에서 해야 등산다운 등산으로 취급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관악산 산행에서 그런 오만함이 확 깨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스터클래스 11차

서울근교 산행이 제게는 보약 같은 존재가 됐네요.

어차피 저도 아웃도어 쪽의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으려고 준비중이라 이번 마클 참여가

큰 자극제가 되어 준 셈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옛 격언들을 떠올려 봤습니다.

'산에서는 건방 떨지 마!'

 

 

 




* 에릭님: 아웃도어 경험도 풍부하시고 입담도 좋으신 에릭님.

 

* 멋진여행가님과 선우아빠님: 여행가님은 2주 만에 오셨다고 하네요. 뒤로는 나이스미님이 보입니다.

 

 

관악산은 제 서식처와 가까운 곳에 있기에 예전에도 자주 오르던 산이었습니다.

전 주로 신림동 방면으로 in을 한 후 안양방면으로 out을 했습니다.

과천 방면은 거의 가보질 않았습니다. 그러니 관악산의 배후면이 암벽 투성인 걸

그날에서야 알았네요. 사실 관악산 정상도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 전에는 관악산의 줄기인 서쪽 줄기인 삼성산 방면으로 내려왔으니까요.

역시 '악'자 들어가는 산은 오를 때 '악' 소리가 나더군요.

그 이전까지 얼마나 관악산을 몰랐던지... 전면과 후면이 판이하게 다른 관악산!

앞과 뒤가 다른 산인가요?ㅋ

 

 

 


* 관악산 암벽: 로프를 타고 암벽을 잡고. 그러다보니 손에 상처가 생기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 관악산: 조선시대 수묵화가 떠오르는 풍광입니다.

 

 

 

암벽타고, 로프타고. 그러다보니 손에 상처도 나고. 그렇게 정상에 올라가니

횡풍이 불어 등산 하기 전부터 걸려 있던 감기는 종합감기로 발전하고!

그 감기 아직도 안 떨어지고 있습니다. 요즘 감기 정말 지독하네요!

이제 도봉산 산행을 마치면 마클 산행도 2번 밖에 남지 않았네요.

처음에는 완주를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많았는데 이제 꼭 완주를 해서 배낭 하나 더

받아야겠다는 결심이 불끈 솟아 오릅니다.

토요일 산행 잘 하자구요! 그리고 종합감기에 걸리지 마시길!

건강이 최고입니다.


 

 



* 나무들: 저도 인증샷 한 컷 올립니다. 맨 왼쪽은 믹님. 중간분은 고개를 돌리셔서 모르겠네요.


 


 

* 관악산과 윌로우님: 열심히 로프를 붙잡고 오르시는 윌로우님

 

 


* 파워블로킹: 역시 이번에도 제 후기의 대미는 파워블로킹님이 장식해 주셨습니다.

옆쪽으로는 삐수님과 경천님이 함께 등장하셨네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사진 은근히 잘 나왔네요.

재밌기도 하고요. 주인공인 파워블로킹님이 다른 곳 보시느라 사진 전체가 무척 재밌게 됐습니다.

 

 

 

* 은진미륵: 은진미륵을 옆에서 본 모습이다. 뒤쪽으로 보이는 곳은 황산벌이다.

 

 

 

 

* 관촉사 5층 석탑: 관촉사 석등과 함께 은진미륵 앞에 병렬에 서 있다. 필자가 방문했을 당시는 그 앞으로 무언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무려 36년 동안 제작된 은진미륵

우리나라에서 최대이고 긴 세월 동안 제작된 터라, 관촉사 석불에는 흥미로운 설화가 스며있었다. 어느날 반야산에 큰 바위가 불쑥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에 고려 조정은 그 바위로 불상을 만들 것을 결정하고 당대 최고 고승이던 혜명 스님에게 그 일을 맡겼다. 고려 광종 19년(968)에 시작된 석불 건립은 목종 9년(1006)에 가서야 완성이 됐다. 석불 제작은 다리, 몸통, 머리 세 부분으로 나뉘어서 제작이 됐는데 각 부분이 다 완성된 후 큰 문제가 발생했다. 각 부분들이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터라 인력으로는 석불을 세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타워크레인이 있었겠는가?

혜명 스님의 고민은 깊어 갔다. 그러던 차에 스님은 아이들이 진흙 불상 놀이를 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거기서 힌트를 얻어 석불을 세웠다고 한다. 아이들도 다리, 몸통, 머리를 따로따로 제작하여 불상을 만들었는데 나중에 그것을 독특한 방법으로 합체를 했던 것이다. 먼저 다리를 세우고 그 주위를 모래로 채우고는 물을 뿌려 주위를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탈을 만들어 몸통을 굴려서 올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래비탈을 이용해서 진흙 석불을 3단 합체했다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혜명스님은 '옳거니'했고, 결국 18m가 넘는 엄청난 규모의 석불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렇듯 은진 미륵불은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명확한 석불이다.  

 

 

 

 

 

 

 

 

 

▲ 은진미륵 필자 대신 등장한 나의 배낭. 이제 저 배낭을 메고 계속 해서 '모험'을 떠날 생각이다. 은진미륵의 큰 손을 붙잡고 함께 모험을 떠나고 싶다!

 

 

 

 

 

▲ 은진미륵 은진미륵이 워낙 거대해서,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남성이 무척 작아보인다.

 

 

 

 

# 고려 전기시대에 제작된 대형석불들

한편, 은진 미륵불이 제작된 고려 전기시대는 거석 석불이 유행한 시기였다. 고려왕조 창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호족들의 독특한 지방문화가 불교문화제에 투영된 시기였던 것이다. 활기차고 강건한 지방문화가 석불 건립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거대한 돌미륵을 탄생시켰다.

고려 전기에 제작된 대형 석불들은 여러 개가 있다.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일명 파주 쌍미륵), 안동 이천동 석불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 시기에 세워진 석불들은 하나 같이 다 엄청난 크기들을 자랑하고 있다. 신체비례에 맞춰 정교함을 구현하는 방식이 아닌 특정 부위를 부각시킨 거대한 석불을 제작하였다. 그런 탓인지 관촉사 석불은 3등신에 가깝고, 얼굴은 '얼큰이'다. 또 손은 마치 야구글로브를 낀 것처럼 아주 크다.

은진미륵을 가까이에서 마주하니, 당장이라도 내게 그 큰 손을 내밀고 이렇게 말하는 듯싶었다.

'어이 곽 작가, 지금 당장 나랑 같이 모험을 떠나자고!'

그럼 왜 그 당시 사람들은 그렇게 큰 석불들을 제작했을까?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보다 세공기술이 덜해서 그랬던 것일까?

고려 전기 시대에는 고을의 평안에서부터 각 개인의 기복까지 다 받아주는 수호신 같은 거대한 석불이 제작되었다. 이런 대형 석불은 해당지역의 민간신앙까지 접목되어, 마치 돌로 큰 장승을 세운 것처럼 형상화됐다. 거인 같은 미륵불이 마을입구나 왕래가 잦은 곳에 떡하니 서 있으니 해당지역 사람들은 얼마나 든든했겠는가? 방범용 CCTV가 없었더라도 아주 든든했을 것 같다. 은진미륵이 서 있는 반야산도 황산벌이 보이는 곳으로 인편의 왕래가 잦은 곳이다.

 

 

 

 

▲ 대조사 석조관음보살입상 고려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생김새와 조각기법 등이 논산 관촉사 석조관음보살입상과 유사성을 띄고 있다.

대조사는 충남 부여에 있는 사찰이다. 부여의 옆동네가 논산으로 두 지역은 무척 가까이에 있다.

 

 

 

 

# 은진미륵의 디테일은 선이 굵은 디테일

한편 디테일(detail)적인 관점으로 은진미륵을 바라본다면 어떤 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충남 서산시 가야산 자락 절벽에는 6세기 말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산마애삼존불상이 새겨져 있다. '백제의 미소'라고 불리는 서산마애삼존불은 섬세한 백제 불교 미술의 정수라고 할 만하다. 마치 한 땀 한 땀 수를 놓은 듯이 바위에 새겨진 마애삼존불은 정교성을 강조한 '세밀한 디테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손도 크고, 얼굴도 큰 은진미륵은 '선이 굵은 디테일'로 불릴 수 있을 것 같다. 얼굴과 손을 강조했고, 더군다나 발가락까지 크게 부각시킨 은진미륵을 두고 기계적인 관점에서 디테일이 떨어진다고 하면 그거 정말 곤란한 일이다. 세밀한 디테일이 있는가 하면 선이 굵은 디테일도 있지 않겠는가?

 

 

 

▲ 서산삼존마애석불 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서산 삼존마애석불. 일명 백제의 미소로 불린다. 세밀한 디테일이 두드러진 정교한 석불이다.

 

 

 

 

 

 

은진미륵께 삼배를 올린 후, 필자는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자리를 계속 옮겨가며 열심히 사진을 찍다 카메라 LCD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게 되었다. 내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그것도 그냥 웃음이 아니라 함박웃음이었다. 그냥 은진미륵 앞에 서 있으니 좋았던 것이다. 필자는 그냥 복을 넝쿨째 받은 느낌이었다.

은진미륵께서 복을 내려주셨으니 필자의 새로운 비즈니스가 번창할 것 같다. 새로운 비즈니스? 필자는 현재 outdoor와 tour를 접목한 일명 '아웃투어'를 아이템 삼아 사업을 시작할 예정이다. 거창한 일은 아니고, 그저 예전부터 해왔던 여행을 나름대로 특화시켜볼 생각이다. 기회가 된다면 <오마이뉴스>에도 아웃투어와 관련된 기사를 송고할 생각이다.

논산 관촉사에 가서 은진미륵께서 주신 '기복'을 받아왔으니 앞으로는 좋은 일들만 가득할 것 같다. 독자여러분들도 좋은 일들이 가득하시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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