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백두대간 종단이었으나 끝은 대폭 수정

[중부내륙자전거 여행 2편] 실패(?)한 여행의 기록들___ 2부 

 

 

 

 

 

 

 

 

 

나는 춘천 도심지를 떠나 홍천으로 길을 잡았다. 역시 첫 날이라 그런지 몸이 풀리지 않은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춘천에서 홍천가는 길에는 왜그리 오르막이 많던지! 당시 여행일지를 찾아보니 오후 8시에 원창고개 도착, 오후 9시 40분 모래재 도착이라고 적혀 있었다. 모래재에 도착했을 때, 이미 주위는 암흑으로 변한 뒤였다. 달빛도 없어 한 치 앞도 분간이 어려울 정도였다. 

'갓길도 없는 춘천-홍천간 국도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달빛도 없어 적막한데...'

콘플레이크를 두유에 말아 저녁식사를 했다. 서울에서부터 품고 왔던 그 우쭐함과 시건방은 이미 어둠속으로 사그러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근사한 야영지에서 멋진 '파티'를 벌이겠다는 계획도 이미 암흑 속으로 자취를 감춘 뒤였다.

자칫하면 캠핑은커녕 야산에서 노숙을 해야 할 판이었다. 장거리 여행 경력이 풍부한 나에게 노숙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모기였다. 모기와 정면 승부를 벌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새벽에 강원도 모기와 맞대결을 한다고 생각해보시라! 웬만한 공포영화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소름이 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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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부내륙자전거여행 시작은 우쭐했으나 끝은 쪼글아 들었다. 백두대간-남해바다횡단이 중부내륙자전거여행으로 축소 변경되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경북 문경에서 경남 거창까지는 시외버스를 타고 '점핑'을 했다. 라이더로서 반칙을 한 셈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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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많이 잘못됐어. 첫날부터 꼬여버렸어. 완전 꼬여버렸어!'

그랬다. 첫 단추가 잘못 끼어지니 마지막까지 엉켰던 것이다. 여정도 대폭 축소가 되었고, 몸도 종합병원으로 변하고 말았다. 실제로 여행 중에 나는 허리가 아파서 드러누웠고, 위장병 때문에 밤잠을 설쳤으며, 이빨에 이상이 생겨 얼굴이 퉁퉁 부은 상태로 이동을 해야 했다. 한마디로 여행 내내 약봉지를 달고 살았던 셈이다.

하지만 가장 안타까웠던 건 여정이 대폭 축소되었다는 점이다. 여행 경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중간에 경남 거창에서 사과작업을 했는데 그 시간이 예정보다 길어졌던 것이다. 사과작업을 하느라 에너지도 많이 허비됐고, 추석은 코 앞으로 다가왔고... 그렇게 되다보니 중간 기착지가 종착지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결국 여행 명칭도 '백두-남해 자전거여행'에서 '중부내륙자전거여행'으로 바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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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영월 영월의 서강이다. 영월 지역은 자전거여행이 아닌 도보여행으로 많이 방문을 한 지역이었다. 트레킹 여행을 했던 곳을 자전거여행으로 다시 왔으니 그 감회가 새로웠다. 이 서강은 그 유명한 동강과 합수되어 남한강을 이룬다. 남한강은 단양을 거쳐 경기도 양평의 두물머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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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지고 있는 퍼즐 조각

그러고보면 여행도 우리들의 인생살이처럼 딱, 딱 안 떨어진다. 그런면에서 우리들의 손에 들린 건 네모가 반듯한 벽돌이 아니라 모양도 제각각인 퍼즐이 아닌가 싶다. 차곡차곡 반듯하고 미끈하게 나의 성을 쌓고 싶지만 현실에서는 외형이 울퉁불퉁한 퍼즐 조각들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을 뿐이다.

그 퍼즐 조각을 긁어모아다 하나하나 끼워 넣기도 힘든 일이다. 하지만 더 두려운 것은 그렇게 고생해서 맞춘 퍼즐의 최종 결과물이 어떤 것인지 우리가 잘 모른다는 것이다. 대박이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끼워 맞췄는데 쪽박을 찰 수도 있고, 쪽박만 면했으면 하는 심정으로 끼웠는데 예상치 못한 대박으로 '해피엔딩'을 맞을 수도 있는게 우리들의 인생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이번 여름 정기 투어는 쪽박이었다. 엉뚱한 퍼즐 조각들을 긁어모아 가지고 와서 대박이 나올 것처럼 우쭐해 있었던 것이다. 쪽박을 찼다고 그냥 주저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열심히 여행기를 작성해서 문제점을 찾아야지! 그래야 다음에는 대박을 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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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조라떼 녹조가 일어났다는 것은 수질이 개선됐다는 것'이라는 MB 말씀에 그저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그 말대로 녹조가 수질 개선의 징표라면 깊은 산 속 청정계곡에도 녹조가 발생하길 간절히 기원해야 할 판이다. 8월 하순경, 충북 단양군 고수교 부근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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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강 남한강 단양군의 고수교. 필자는 강원도 영월을 거쳐 단양으로 입성했다. 한편 바로 위에 사진처럼 녹조가 낀 남한강은 흉물스럽다. 같은 강인데 왜 4대강 사업이 진행된 남한강은 '녹조라떼'가 되고, 4대강 사업에서 제외된 영월 서강은 푸른 물결을 드러내고 있을까? 둘 중에 어느 강이 더 수질이 좋은가?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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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임: 사실 이 여행기는 이미 한 달 전 쯤에 작성된 것이다. 처음 기사를 작성했을 때는 바로 송고를 할 셈이었는데 중간에 계속 일이 생겨 송고시기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인생사 타이밍'이라고 기사 작성도 타이밍이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필자는 허송세월을 보내다 그 시기를 놓쳐 버린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본 기사와 이후에 나올 후속 여행기들을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굳이 좋은 이야기 거리를 사장시킬 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됐다. 시기를 놓쳤든 아니든 기록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결과물에 대한 판단은 독자가 하겠지만...        

 

 

 

 

 

 

 

 

시작은 백두대간 종단이었으나 끝은 대폭 수정

[중부내륙자전거 여행 1] 실패(?)한 여행의 기록들

13.10.31 17:23l최종 업데이트 13.11.03 08:34l
곽동운(artpunk)             

 

 

 

여행은 8월 15일부터 시작하여 9월 15일에 다녀왔습니다. 이동 경로는 강원도 춘천 -> 홍천 -> 횡성 -> 영월 -> 충북 단양 -> 제천 -> 경북 문경 -> 경남 거창을 자전거로 다녀왔습니다. 여행수첩과 사진기록을 토대 삼아 약 5편에 걸쳐 여행기를 작성할 예정입니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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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영월군의 한반도 지형 한반도 지형 옆으로 관광용 뗏목선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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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15일 오후 4시.

나는 우쭐해 있었다. 왜? 여름 정기 투어에 나서려고 용산역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몰골은 '우쭐'하지 못했다. '삐거덕' 소리가 나는 중고자전거에 짐을 잔뜩 실었는데 그나마 패킹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그것들이 한쪽으로 쏠렸다. 뒤에서 보면 자전거의 뒤태가 완전히 껑뚱했던 것이다.

나의 신발도 문제였다. 어차피 장거리 여행을 끝내고 나면 새로 산 신발도 망가지게 되어 있다. 더군다나 나는 자전거만 타는 게 아니라 중간중간에 트레킹과 등산을 병행한다. 그래서 2012년에 행한 '백두대간 자전거여행'때에도 신고 갔던 트레킹화는 서울로 복귀하자마 쓰레기통에 던져졌다. 그런 점을 잘 알기에 나는 아예 '빵구' 난 트레킹화를 신고 갔던 것이다. 자전거 뒤태는 껑뚱하지, 신발은 옆면이 터져 양말이 보이지... 뒤쪽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관련기사:
흥미진진했던 56일, 나는 '백두대간'을 달렸다)

"자전거... 노숙자...?
"정말...?"

 


광복절을 맞아 시작한 자전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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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태가 구린 여행자전거 내 여행자전거의 이름은 블루야크. 모 아웃도어 회사의 이름을 빗대서 네이밍을 해 본 것이다. 그나저나 무슨 여행 자전거가 저렇게 뒤태가 안 이쁜가? 패킹을 잘못해서 그런지 짐이 한쪽 편으로 쏠려 있다. 사고 나기 딱 좋은 모습이다. 그런데 신기하게 사고가 안 났다. 필자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다. 강원도 춘천시에서 홍천군 방면으로 길을 잡을 때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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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는 그런 괄시를 쿨하게 받아넘겼다.

'난 지금 백두대간을 종단하고 거기다 남해를 횡단할 거다. 푸하핫! 이거 아무나 못하지.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쉽게 못 덤빌걸. 억만장자 워런 버핏도 쉽게는 못 덤빌 거야!'

워런 버핏도 못할 일을 시작한다고 그렇게 한참 우쭐해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여행의 시작일이 또 8·15 광복절이 아닌가? 광복절 맞이 국토대행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더 어깨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백두대간을 횡단하고 남해바다를 횡단할 테니 이름을 '백두-남해 자전거여행'이라고 붙이면 되겠군! 푸하핫!'

백두대간 종단과 남해바다 횡단? 호기는 좋았으나 내 앞에 놓인 상황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이동거리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백두대간 횡단에 1200Km 이상, 남해바다 횡단에 흑산도까지 입도하려면 600Km 이상이 걸리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약 1800km 정도 되는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고난의 행군'이 떡하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짐이 주렁주렁 매달린 자전거를 다 떨어진 트레킹화로 페달을 굴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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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깨비도로 갑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지고 난 뒤의 도깨비 도로. 이 도로는 하도 경사가 가팔라서 그런지 왕래하는 차들이 뜸했다. 그래서 '신기하고 재밌기'보다는 그냥 무척 힘든 도로로 기억된다. 도깨비도로는 강원도 횡성군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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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가 넘는 장거리 여행을 앞두고도 내가 느긋할 수 있었던 건 다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이 첫 장거리 여행이 아니었기에 그런 여유를 부렸던 것이다.

'지리산에서 태풍도 맞아봤고, 공동묘지에서도 홀로 밤을 지새웠는데 겁날 게 뭐있겠어. 한두 번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말야!'

이런 시건방은 아웃도어 여행에서는 독이다. 철저한 준비와 다부진 마음가짐을 갖고 떠나도 될까 말까인데, 시건방부터 떤다면 여행의 성공 여부를 떠나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산악사고도 보면 초심자들보다는 '산 좀 탔다'는 사람들이 더 많이 당한다. 네팔도 다녀오고 했는데 해발고도가 낮은 우리나라 산 쯤이야, 하다가 큰 낭패를 당하고 마는 것이다.

하여간 나의 시건방은 열차 출발 시각에서도 표출됐다. 여행의 시작점을 춘천으로 잡기 위해 용산역에서 ITX를 탔는데 그 시간이 오후 4시였던 것이다. 남춘천역까지는 1시간 정도 소요되니 첫 페달을 굴린 시각이 오후 6시 경이 되고 말았다. 여름에는 해가 길다고 하지만 그래도 오후 6시가 가까이 된 시각에 여행을 시작하면 그거 문제 있는 거 아닌가?

 

 


시건방은 장거리여행의 독(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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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널 자전거여행 중에 가장 난감할 때는 터널을 통과할 때다. 강렬한 굉음이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려 퍼질때의 그 느낌이란! 강원도 횡성에서 영월로 넘어갈 때 찍은 사진이다. 이 터널은 극히 교통량이 적었기에 이와 같은 사진 촬영이 가능했음을 밝혀 둔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터널 중간에 정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위험한 짓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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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 작은 외계인?: 이것은 넋전이다. 넋전은 죽은이의 넋을 담은 종이 인형을 말한다.

이 넋전에는 우금티 전투에서 비통하게 눈을 감은 동학농민군들의 혼이 담겨져 있다.

 

 

 

* 병뚜껑으로 만든 우리나라: 우리나라 외교에서 쟁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병뚜껑에 기재하여 제작한 병뚜껑 한반도. 충남 예산 여고 학생들이 급우들과 함께 만든 작품이다. 독도나 위안부를 적은 병뚜껑이 많이 눈에 띄었다.   

 

 

 

 

 

* 학생 작품: 겉면에는 주제가 나가고, 날개를 들어 안쪽을 보면 그 주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기재된 작품. 충남 천안여고 역사동아리 학생들이 제작한 것이다. 역시 여고생들이 제작해서 그런지 꼼꼼함이 돋보였다. 설명 부분에 기재된 내용도 상당히 심도가 있었다. 왠만한 성인들도 잘 모를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충실히 잘 기재하였다. 우리 청소년들이 역사를 잘 모른다고 걱정들을 하시는데 이런 작품들을 보면 오히려 자신을 책망할지 모른다. '읔, 고딩들보다 내가 더 모르네...' 하면서!   

 

 

 

 

 

 

 

* 국립 공주대: 교학사 역사교과서 파동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는 공주대가 아닐까? 저자 중에 한 사람인 이명희 교수가 공주대 역사교육과에 재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 교수는 총대를 매듯 이번 사태에서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 비판의 화살이 이 교수를 넘어 공주대 전역으로까지 퍼져나가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공주대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은 무척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자기와는 관계 없는 인물 때문에 괜히 자신들까지 도매금으로 팔려나갔으니까. 하지만 걱정마시라! 필자가 만나본 공주대 역사교육과 재학생들은 패기가 넘쳤고, 무척 똘똘했다. 도매금으로 팔려나갈 인물들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학생들이 교수보다 더 낫더라!

 

 

 

* 우금티 캐릭터: 이제 동학농민전쟁 기념식도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젊은층의 참여를 이끌 수 있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런 캐릭터 이벤트는 청년층에 대한 참여와 관심을 이끌 수 있다. 한편 위의 캐릭터에 새겨진 초코릿 복근이 무척 인상적이다.  

 

 

 

 

 

* 넋전: 넋전을 직접 땅에 꽂고 있는 청소년들.

 

 

 

 

 

* 지수걸 교수: 지수걸 교수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학과장이자 이번 <우금티 추모제례 및 역사축제>의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얼마전 같은 학과에 있는 이명희 교수의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대한 비판을 꼼꼼하게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었다.

 

 

 

 

 

* 우금티 추모제례: 119년 전 우금티 고개에서 유명을 달리한 동학농민군들의 넋을 달래는 추모제례

 

 

 

 

 

 

뒤태가 구린 여행자전거: 내 여행자전거인 블루야크다. 모 아웃도어 회사의 이름을 빗대서 네이밍을 한 것이다.

그나저나 무슨 여행 자전거가 저렇게 뒤태가 안 이쁜가?

패킹을 잘못해서 그런지 짐이 한쪽 편으로 쏠려 있다. 사고 나기 딱 좋은 모습이다. 그런데 신기하게 사고가 안 났다.

필자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다. 강원도 춘천시에서 홍천군 방면으로 길을 잡을 때 찍은 사진.

 

 

 

 

* 도깨비도로: 갑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지고 난 뒤의 도깨비 도로. 이 도로는 하도 경사가 가팔라서 그런지 왕래하는 차들도 뜸했다.

그래서 '신기하고 재밌기'보다는 그냥 무척 힘든 도로로 기억된다.  도깨비도로는 강원도 횡성군에 위치해 있다.   

 

 

 

 

 

* 중부내륙자전거여행: 시작은 우쭐했으나 끝은 쪼글아 들었다. 백두대간-남해바다횡단이 중부내륙자전거여행으로

축소 변경되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경북 문경에서 경남 거창까지는 시외버스를 타고 '점핑'을 했다. 라이더로서 반칙을 한 셈이다.

 

 

 

 

 

*강원도 영월군의 한반도 지형: 한반도 지형 옆으로 관광용 뗏목선이 지나가고 있다.  

 

 

 

 

* 터널: 자전거여행 중에 가장 난감할 때는 터널을 통과할 때다. 강렬한 굉음이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려 퍼질때의 그 느낌이란!

강원도 횡성에서 영월로 넘어갈 때 찍은 사진이다. 이 터널은 극히 교통량이 적었기에 이와 같은 사진 촬영이 가능했음을 밝혀 둔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터널 중간에 정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위험한 짓이기 때문이다.  

 

 

 

 

 

 

 

* 강원도 영월: 영월의 서강이다. 영월 지역은 자전거여행이 아닌 도보여행으로 많이 방문을 한 지역이었다. 트레킹 여행을 했던 곳을 자전거여행으로 다시 왔으니 그 감회가 새로웠다. 이 서강은 그 유명한 동강과 합수되어 남한강을 이룬다. 남한강은 단양을 거쳐 경기도 양평의 두물머리로 향한다.  

 

 

 

* 녹조라떼: '녹조가 일어났다는 것은 수질이 개선됐다는 것'이라고 MB 말씀에 그저 헛웃음이 나올 뿐이다.

그 말대로 녹조가 수질 개선의 징표라면 깊은 산 속 청정계곡에도 녹조가 발생하길 간절히 기원해야 할 판이다.  

8월 하순경, 충북 단양군 고수교 부근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 남한강: 단양군의 고수교. 필자는 강원도 영월을 거쳐 단양으로 입성했다.  

 

 

 

덧붙임: 이 사진들은 지난 8월 15일부터 9월 15일까지 행한 중부내륙권 여행에 때 찍은 사진들입니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차후에 여행기 형식으로 작성할 예정입니다.

 

 

 

 

 

 

* 마임: 조명과 함께 모닥불이 소품으로 쓰였다. 마임의 소품으로 모닥불이 이용되는 건 처음 보았다.

그만큼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품격 높은 공연을 많이 선보인다.

 

 

 

 

 

 

# '다시 서야 할 아시아1인극제'

그렇다. 돈이 문제였다. 오죽했으면 여름에 수박을 쪼개먹던 큰 평상 4개를 붙여서 무대를 만들 정도였을까. 또한 손·발이 턱없이 부족하여 필자와 같은 고급인력(?)이 화장실 청소를 하며 자원활동을 해야 했다. 필자는 계획했던 '여름 정기투어'를 잠시 접어두기까지 했다. 그러다 뒷마무리까지 마친 후, 8월 6일에서야 서울로 귀가할 수 있었다.

사실 2013년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칫 했으면 아시아1인극제의 명맥이 끊길 뻔했다. 그런 상황을 반영하듯 이번 대회의 부제는 '다시 서야할 아시아1인극제'였다. 그렇지만 십시일반이라고 공연자들이 무료공연을 펼치고, 뜻있는 분들이 격려금을 전달해 주셔서 어려운 상황에서나마 대회를 잘 마칠 수가 있었다.

지역의 문화행사가 돈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면 큰 문제일 것이다. 지원금의 유·무에 의해서 대회 개최의 유·무가 결정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지역문화 행사에 대한 안정적인 지원과 관심은 꼭 필요한 일이라고 판단된다.

 

 

 

 

 

 

* 무대: 돈이 없어서 큰 평상 4개를 붙여서 무대를 만들었다. 큰 느티나무가 뒷배경으로 쓰인터라 환상적인 모습이 연출됐다. 야간 조명이 무대 뒤 나무들을 비추었을 때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전화위복이라고 환상적인 무대 덕택인지 모르겠지만 올해<거창아시아1인극제>는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그런 의미에서, 입장료는커녕 오히려 동네 분들에게 돼지고기와 막걸리를 대접하는 <거창아시아1인극제>에 대한 안정적인 예산 집행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면소재지에 짜장면집 하나 없는 '깡촌'에서 마을 주민들이 언제 그런 수준 높은 문화예술 활동을 접할 수 있겠는가! 소외지역 문화행사 지원 차원에서라도 적절한 지원금은 반드시 집행되어야 할 것이다.

기왕 돈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가지 더 언급하고 가겠다.
2012년 <거창아시아1인극제>에서는 부대행사로 거창·함양지역의 다문화 가정들의 1박 2일 캠프가 개최됐었다. 참가자들은 국적도 다양하고, 피부색도 조금 다르긴 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이 중요한가! 그저 축제를 재밌게 즐기면 그만 아니던가! 그래서 그런지 꼬맹이들의 장난 때문에 거창귀농학교의 운동장은 떠들썩했다. 그들의 엄마인 이주여성들도 조금은 느긋한 모습이었다. 공연을 즐기며 하룻밤 야영을 할 수 있다는 게 좋았던지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 거창아시아1인극제

 

 

 

 

당시에는 아시아 각국에서 온 공연자들이 자국의 전통무를 공연했었다. 필리핀에서 온 공연자들이 필리핀 이주 여성들 앞에서 공연을 펼쳤고, 인도네시아 온 공연자들이 인도네시아 이주 여성들 앞에서 춤사위를 펼쳤다. 이주 여성들의 표정은 무척 진지했다. 낯선 곳에서 자국의 전통무를 감상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큰 감흥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공연중에 눈물을 훔치던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 돈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괜히 쓸데없는 토목 공사 하느라 세금 낭비하지 말고 이런 문화축제에 쓰면 얼마나 좋겠는가!

 

 

 

 

 

 

 

*거창귀농학교

 

 

 

 

 

 

 

 

# <고제 사과길>

앞서도 언급했듯이 거창군 고제면은 홍로 사과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8월 말 경에 가보면 '새빨간' 사과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멀리서보면 마치 녹색의 그라운드에 빨간색 점들이 뿌려진 것처럼 보인다. 녹색과 빨간색이 서로의 배경색이 되어 시각적으로 장관을 이루는 것이다.

필자가 누군가? 역사트레킹 마스터 아닌가! 자원활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트레킹 코스를 하나 개척해보았다. 약 6km 정도 되는 짧은 코스인데 사과와 관련된 도보여행길이다. 이름하여 <고제 사과길>이다. 이 길을 걸으면 탐스러운 사과와 함께 백두대간 삼봉산의 아름다운 풍광도 감상할 수 있다.

이제 추석이 한 달 남짓 남았다. 그럼 사과 수확 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음에 사과 작업하러 거창귀농학교에 갈 때는 '뺑끼'를 쓰지 않고 일을 좀 열심히 할 생각이다. 특히 화장실 청소에 역점을 둘 것이다. 그럼 이모님에게 이런 소리를 듣지 않을까?

'곽 작가. 조단조단 일 잘 하네. 이 막걸리 한 잔 묵고 하그래!'

 

 

 

 

 

 

 

 

* 거창군 고제면: 고제면은 전형적인 산촌 마을의 모습을 보이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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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제 사과길>: 거창아시아1인극제 자원활동을 마친 후, 돌아오는 길에 <고제 사과길>이라는 트레킹 코스를 하나 개척해 보았다.

 

 

 

 

 

* 홍로: 거창군 고제면은 홍로하는 사과 품종으로 유명한 곳이다. 지금은 사과들이 푸른 빛을 띠지만 8월 말 정도 되면 아주 '새빨간' 사과가 된다.

뒤쪽에 보이는 산은 삼봉산이다.  

 

 

 

 

 

 

 

"곽 작가, 그딴 식으로 할라믄 다시는 여그 오지마라. 그라케 일하믄 여러사람 욕본데이..."

날카로운 이모님의 음성이 내 머릿속을 한바퀴 휘돌아 나갔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거지?

'아, 맞다. 1층 화장실 청소 때문에 그러시는구나!'

솔로 변기를 구석구석 세척해야 했지만 필자는 귀찮다는 이유로 물만 들입다 뿌려댔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화장실 청소가 말끔히 되지 않았고, 그 일이 이모님의 심기를 건드렸던 모양이다. '뺑끼' 좀 썼다가 제대로 혼쭐이 났던 셈이다.

 

 

 

 

 

 

 

 

 

* 사과: 8월 말이 되면 이렇게 사과는 새빨갛게 된다. 이 사진은 작년 9월 달에 촬영했다.

 

 

 

 

 

 

# 거창귀농학교

필자가 혼쭐이 났던 곳은 거창귀농학교였다. 거창귀농학교는 경남 거창군 고제면에 있는 곳인데 폐교를 리모델링하여 설립되었다. 고제면은 거창 읍내에서 북쪽으로 약 20Km 정도 떨어져있는데 백두대간인 삼봉산과 덕유산이 자리잡고 있어 말그대로 '깡촌'인 곳이다. 이곳의 농업형태도 논농사보다는 고랭지 작물 위주로 경작된다.

특히 이곳은 홍로라고 불리는 사과 산지로 유명한데 이 홍로라는 품종은 잘 영글면 <백설공주>에 나오는 그 '새빨간' 사과처럼 아주 먹음직스럽고, 빛깔도 무척 고운 품종이다. 이런 환경적 특성 때문에 거창귀농학교는 사과나 오미자 같은 특산 작물에 대한 현장실습 교육을 많이 실시한다고 한다.

거창귀농학교? 귀농학교에서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욕을 먹었다? 그렇다면 필자에게 귀농을 준비하냐고 물으실 분들도 있을 것이다. 느긋하게 사과 농사나 지으면서 말이다... 아니다. 필자는 귀농할 의사가 없다. 나이가 들면 백두대간 아래에 터를 잡고 누렁이들을 기르며 살고 싶기는 하지만 농사를 지을 생각은 없다. 그리고 농사는 아무나 짓나? 필자처럼 게으른 사람은 남의 집 소작도 못 부칠지 모른다.

 

 

 

 

 

 

 

* 죽방울놀이: 우리놀이문화연구회 이원하 소장이 아이들 앞에서 죽방울놀이 시범을 보이고 있다.   

 

 

 

 

 

# 자전거여행하다 자원 활동했다!

필자는 2012년 여름에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행했다. 강원도를 거쳐 경상북도를 종단한 후 경남 거창에 진입했는데 문득 한대수 선생이 떠올랐다. '물 좀 주소'를 부른 가수 한대수 말고 거창 민예총을 이끈 연극인 한대수 선생이 떠올랐던 것이다. 거창 한대수 선생은 민속무(民俗舞)로 유명한 분인데 그중에서도 살풀이와 관련된 춤사위가 일품인 연극인이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7년 만에 다시 뵈었는데 한대수 선생은 변한게 거의 없으셨다. 오히려 7년 전보다 훨씬 더 건강해보이셨다.

"백두대간 여행한다고? 그라지말고 아시아1인극제나 와서 도와라."

그렇게 하여 필자는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잠시 멈추고 <거창아시아1인극제>와 인연을 맺게 됐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식으로 자전거여행을 하다가 연극제 자원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 삼봉산이면 백두대간인데 그곳에서 숨 좀 돌려보지 뭐!'

 

 

 

* 죽방울놀이

 

 

 

 


# <거창아시아1인극제>

거창아시아1인극제? 혹시 수승대라는 명승지에서 개최되는 <거창국제연극제>의 다른 이름인가? 아니다.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거창국제연극제>와 별개의 행사다. 둘은 단지 '거창'이라는 공통점 외에는 합치되는 면이 없다. 더구나 수승대는 위천면에 소재해 있고, 아시아1인극제가 열렸던 거창귀농학교는 고제면에 소재해 있다. 서로 지역적으로도 거리가 있는 셈이다.

<아시아1인극제>는 민속극의 대가인 심우성 선생의 주관으로 1988년 서울에서 1회 대회가 개최됐다. 1회 대회 이후부터는 아시아 각국을 돌며 공연이 계속되었다. 남사당패처럼 유랑을 하며 공연을 했던 것이다. 그러다 1996년, 충남 공주에 안착하게 된다. 공주민속박물관이 들어섰는데 거기에 둥지를 튼 것이다. 그래서 명칭에 '공주'가 들어가 <공주아시아1인극제>가 된다. 하지만 아시아1인극제의 '유랑'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7년에 거창으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거창귀농학교의 다른 이름은 삼봉산문화예술학교인데 그 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아시아1인극제는 거창에서 개최됐다. 그래서 명칭도 <거창아시아1인극제>로 변경되었다.

 

 

 

 

 

 

 

* 2013년 <거창아시아1인극제>: 한 여름밤, 야외무대에서 펼쳐진 공연은 신명이 넘쳤다.

 

 

 

 

 

1인극의 영어 명칭은 monodrama다. 즉, 무대에 오른 한 명의 배우가 무대 밖의 객관적 실체들을 내적 자아에 투영시켜 각양각색의 극중 인물상들을 풀어내듯 연기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배우 1인이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한다는 말인데 연극 <버지니아모놀로그>가 좋은 예이다.

하지만 아시아1인극제에서는 서구 연극계의 'monodrama'의 정의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 왔다. 유언극과 함께 무언극도 공연됐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모노드라마가 공연되는가 하면, 민간신앙에서나 볼 수 있는 무속무도 무대에 올랐기 때문이다. 판소리의 거장 박동진 명창의 <진국명산>이 울려 퍼졌고, 공옥진 여사의 <심청전>이 무대에서 조용히 날갯짓을 펼쳤었다. 그 외에도 내로라하는 아시아 각국의 수많은 공연자들이 아시아1인극제의 무대를 수놓았다.

하지만 그건 옛날 말이 되어버렸다. 올해 8월 2일부터 3일까지 진행된 2013년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아시아'라는 명칭이 무색하게 '국내파'들로만 꾸려졌다. 더욱이 초청된 국내파들은 공연료도 받지 않고 재능기부를 해주었다.

 

 

 

 

 

 

 

 

 

 

 

 

 

 

 

 

* 천지연 폭포: 비가 온 뒤라 유량이 아주 풍부했다. 낙수 소리가 우레와 같이 쩌렁쩌렁하게 들렸다. 뒤쪽으로는 멀리 한라산이 보인다.

 

 

 

 

 

[제주도] 빗물로 지은 밥

한편 제주도에서는 추자도 때와는 다른 경험을 했다. 제주도에서는 입도하는 첫 날부터 비를 맞기 시작했다. 워낙 비가 많이 내려 주행을 포기한 날도 생길 정도였다.

천지연 폭포가 내려다보이는 서귀포시 외곽의 한 공원. 유량이 풍부해져서 그랬는지 천지연 폭포는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폭포는 꽤 먼 곳에 있었지만 그 낙수 소리는 세상을 울리는 듯, 쩌렁쩌렁했다. 엄청난 유량을 자랑하는 천지연 폭포를 감상하는 것은 좋았지만 난 비가 싫었다. 정말 싫었다. 제주도에서 비를 하도 많이 맞아서 이제 비라면 신물이 날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텐트를 간이 팔각정 밑에 칠 수 있다는 것.

시간이 지나도 빗줄기는 잦아들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거세졌다. 라디오에서도 서귀포지역 일대에 호우주의보가 발령됐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꼼짝없이 팔각정에 갇히는 신세가 된 것이다. 빗줄기가 멈추길 기원하면서 점심을 지어먹으려 식수를 찾았다.

 

 

 

 

 

* 꽃이 핀 야영지: 사진에서처럼 지붕이 달리고, 바닥에 데크가 깔린 나무 정자가 가장 이상적이다.

강한 폭우도 막아주고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도 막아주니 가난뱅이 여행객들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곳이 바로 저런 곳이다.

2011년,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찍은 사진이다.  

 

 

 

 

 

'아뿔싸! 이걸 어째!'

아침에 식사 준비를 하면서 식수를 다 써버린 것이다. 누가 점심 때까지 팔각정에 갇혀 있을 줄 알았나! 생수 한 통을 사오는 것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장대비를 뚫고 마트까지 갔다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당시 필자는 장대비를 맞을 몸 상태가 아니었다. 장기간의 여행으로 인해 피로가 누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가지고 있던 우비도 구멍이 뻥뻥 난 상태라 입으나마나였다. 우산은 아예 없었다.

하늘이 뚫린 듯, 빗방울이 거세게 내렸지만 정작 내게는 밥 해 먹을 식수가 한 방울도 없는 상황이었다. 추자도에서는 바닷물을 앞에 두고 씻을 물이 없어 안타까워했는데 제주도에서는 장대비를 바라보면서 밥 해 먹을 물을 갈구하다니! 세상을 집어 삼킬 듯 천지연 폭포에서는 폭포수가 떨어지는데 정작 난 밥 해먹을 물이 없어 발을 동동 굴리고 있다니! 그러고보면 그 상황은 정말 아이러니했다. 하지만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언가 방도가 필요했다. 무슨 수가 없을까?

 

 

 

 

 

 

 

 

* 한계령 창고에 친 텐트: 아무리 여름이라고 하지만 한계령은 한계령이었다. 원통리에서 출발했을 때가 낮 12시였는데 한계령에 도착했더니 밤 10시였다.

안개가 가득찬 한계령에서는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밤안개처럼 당시 내 처지는 우울했다. 설악산에서 노숙할 판이었으니까. 그러다 저 창고를 발견했는데,

 한 겨울 제설장비 차량 차고로 쓰이는 곳이었다. 덕분에 하룻밤 잘 지냈다. 2012년 백두대간자전거여행 당시의 사진이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군! 푸하핫!'

얼마 후 묘안이 떠올랐다. 생각을 달리하니 금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랬다. 그 빗물을 받아서 밥을 짓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팔각정 처마 밑에다 코펠을 펼쳐 놓았다. 어차피 며칠간 계속된 비로 대기는 아주 깨끗한 상태였다. 그건 팔각정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그곳은 청정지역 제주도 서귀포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런가, 빗물로 지은 밥은 정말 맛있었다. 꿀맛이었다. 서귀포의 청정한 빗물로 밥을 지어 먹었으니 꿀맛일 수밖에!

사실 필자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아무리 필자가 아웃도어 여행을 많이 했어도 빗물로 밥을 지어 먹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여행이 아니겠는가. 언제 어떤 돌발변수가 생길지 모르는 게 여행이라는 말이다. 더군다나 필자는 돈이 없는 관계로 가난뱅이 여행을 해야 하니 더욱더 그럴 수밖에!

몇 시간 후 비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개미새끼 한 마리 안 보이던 공원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씩 우산을 받쳐 들고 나오고 있었다. 필자는 저 멀리에 있는 한라산을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구름으로 휘감긴 한라산은 무언가 모를 영험함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항상 그런 고즈넉한 분위기는 깨는 사람들이 있지 않나.

"저기 봐. 서귀포에서도 노숙자가 있나 봐요."
"그러게요. 근데 요즘 노숙자는 텐트도 치고 자나 봐요. 밥도 해먹고. 그나마 서울보다는 낫네."

올레길을 걷는 올레꾼들이었다. 필자를 노숙자로 본 것이다. 하긴 당시 나는 노숙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필자는 그런 말들을 그냥 웃어 넘겼다. 왜? 청정수 빗물로 밥을 해 먹었으니까! 이런 경험은 아무나 못하는 거니까!

 

 

* 대통령의 자전거와 내 자전거: 고 노무현 대통령이 타고 다녔던 자전거다. 필자의 자전거만큼이나 싸구려 철TB였다.

대신 내 자전거는 짐이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대통령의 자전거는 아주 단출하다. 그 분이 생전에 계셨다면 필자에게 쌀을 주었을 지도 모른다. 불쌍하다고.

 생각해보니 당시 봉화 마을에서 통김치를 얻었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한동안 김치 걱정은 안했다. 2010년 여름에 찍은 사진이다.  

 

 

 

* 수해복구: 텐트가 망가져 임시방편으로 저렇게 모기장 텐트를 쳤다. 하지만 모기장 텐트 쳤다 폭우를 만났다.

침낭 양 옆으로 물고가 생겼을 정도로 엄청난 폭우를 만났었다. 2011년 전북 완주에서 찍은 사진이다.

 

 

 ▲ 청량산 베이스캠프: 낙동강가에 세운 청량산 베이스캠프. 청량산을 병풍 삼고, 낙동강 끌어 안을 수 있었던 최고의 캠핑지였다!

한편 저렇게 정자 아래에 텐트를 치니 밤새 비가 내려도 물난리를 겪을 일이 없었다. 이 사진은 2012년에 행한 백두대간자전거여행 때 찍은 사진이다.

 

 

 

 

* 충남 천안: 2009년, 천안에 있는 풍세천이란 곳에서 캠핑을 했을 때의 모습이다.

장거리 여행이 익숙지가 않아서 그랬는지 모든 것이 어설펐을 때다.

위험천만하게 하천변에 텐트를 쳤을 정도로 어설펐다. 이 풍세천을 따라가면 호두나무 산지로 유명한 광덕산이 나온다.

광덕산 입구에는 천년고찰인 광덕사가 있다.

 

 

 

 

2010년 여름. 필자는 단독으로 L자형 자전거여행을 행하고 있었다. 이동한 지역을 선으로 이어보면 알파벳 L자와 비슷한 형상이 나와서 L자형 여행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짐을 앞·뒤로 주렁주렁 매달고, 한 여름 뙤약볕 속에서 질주를 한다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다. 땀은 비 오듯 쏟아졌고, 옷은 싹 다 젖었다. 티셔츠는 등짝에 척 붙었고, 팬티까지 흥건했다.
다음은 필자가 추자도와 제주도에서 겪은 이야기들이다. 둘 다 물과 관계된 에피소드들이다.

필자는 서쪽 하늘에 노을이 지기 시작했을 때가 제일 싫었다. 매일같이 야영지를 확보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돈이 없어서 캠핑장은 갈 수가 없었다. 물론 이동 경로에 캠핑장이 없기도 했다.

야영지 확보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었다. 바로 밥 지을 물과 씻을 물을 확보 하는 것이었다. 하루종일 자전거를 타다보면 온 몸은 땀으로 범벅되기 일쑤였다. 그래서 씻을 물을 확보하는 것은 먹는 물을 확보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전라남도와 제주도 사이에 있는 추자도에 갔을 때의 일이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서해안 노선을 타고 가느라 바다는 언뜻언뜻 바라보았다. 그런데 추자도에 도착할 당시까지 바다에 발 한 번 담그질 못했다. 그게 좀 억울했다. 여름여행이라 수영복도 준비를 해갔는데….

 

 

 

 

* 추자도: L자형 여행 당시 방문했던 추자도. 추자도는 제주 본섬이나 전남지역과는 다른 멋이 있었다. 한편 이곳은 상추자도 지역의 고개마루였는데

어떤 주민 한 분이 아침에 쓰윽 오시더니, 우려섞인 눈빛으로 '전날 잠을 잘 잤냐'고 물으셨다. 귀신들이 자주 출몰한다는 오싹한 말을 하면서...  

 

 

 

 

 

 

[추자도] 몸을 벅벅 긁으면서 잔 이유

여객선에서 내려 자전거로 추자도 일대를 내달렸다. 추자도에 입도하는 날 안개가 짙게 끼어 좀 불안했지만 주행을 하는 데는 그리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추자도의 바닷물은 육지 해수욕장에서 보던 바닷물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정말 깨끗했다. 

넋을 잃고 섬 구경을 했다. 그러다 서쪽 하늘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렇게 추자도 구경 삼매경에 빠지다가 야영지를 잡을 시간을 놓친 것이다. 조바심이 났다. 추자도 바닷바람이 장난이 아니라는데… 해풍을 맞으며 노숙할 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어느 해수욕장 근처에 텐트를 칠 수 있었다. 하지만 씻을 물이 없었다.

수도시설이 있을 줄 알고 일부러 야영지를 해수욕장으로 정했는데… 요즘은 웬만한 해수욕장은 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갖춰져 있다. 하지만 추자도의 해수욕장은 화장실은커녕 수돗가도 없었다. 왜냐? 추자도는 아직도 제한급수를 할 만큼 급수시설이 열악하기 때문이다. 하도 물 부족에 시달리니 몇 해 전에 빗물을 보관하는 저장시설을 완공했다 한다.

어쩌겠는가? 씻을 물이 없는데. 땀에 찌든 몸으로 그냥 잘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눈앞에는 시원한 바닷물이 출렁거리는데 내 한 몸 씻을 물이 없어, 필자는 그냥 바닷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냥 바닷물에 빠져보자. 페트병에 물이 좀 남아 있으니까 그걸로 몸 좀 닦아내고.'

그래서 그냥 바닷물로 뛰어들었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하지 않나? 땀으로 범벅 된 몸보다는 바닷물로 범벅된 몸이 낫다는 생각에 그냥 뛰어들었다. 그날 밤 필자는 자다가 벅벅 긁었다. 염분을 제대로 제거하지 않고 잤더니 자는 내내 너무 가려웠던 것이다. 정말 샤워물이 간절한 밤이었다.

 

 

 

 

* 한옥집과 텐트: 요즘은 한옥 펜션이 많다고 하는데... 저런 펜션에서 하룻밤 휴식을 취하면 정말 좋을 것 같다. 전남 순천에서 2011년에 찍은 사진이다.

 

 

 

 

 

 

 

 

* 수해복구: 싸구려 텐트를 치고 다녔던 터라 비가 오면 항상 물날리를 겪었었다. 그래서 비온 뒤에는 항상 저렇게 수해복구를 해야했다.

2011년에 충남 서산에서 찍은 사진이다.

 

 

 

 

 

 

 

 

 

 

 

 

 

* 강진의 다산 선생 상: 남양주의 다산 선생이 의관을 갖추고 계셨다면 강진에 있는 다산 선생은 서민적인 풍모를 보이고 있다.

 

 

 

 

 

 

껑뚱한 나, 다산 선생의 제자가 되다___2편

다산 정약용 테마여행 이야기

 

 

 

 

 

 

 

 

강진의 다산유물전시관

필자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다산유물전시관이었다. 강진군 도암면에 위치한 다산유물전시관은 만덕산 아래에 있었다. 다산초당은 다산유물전시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산길을 따라 20분 정도 올라가면 다산초당에 닿을 수 있다.

다산유물기념관은 다산과 관련된 유물과 서적들이 전시돼 있었다. 다산이 500권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기록한 만큼 기념관은 다산 선생이 기술한 책들로 가득했다. 다산이 직접 기록한 책이 아닌 필사본이라 아쉽기는 했지만 옛 고서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 거중기: 다산문화의 거리에 있다. 강진 다산유물전시관에도 실내에 거중기 모형이 있지만 남양주에 있는 거중기가 좀 더 나아 보인다.

 

 

 

 

 

 

 

 

특히 내 눈을 사로잡은 서책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기중가도설>이었다. <기중가도설>은 중국의 <기기도설>을 토대로 다산 선생이 저술한 것인데 한마디로 기중기설계도였다. 수원 화성 축조 시, 다산이 기중기를 제작해 큰 성과를 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기중가도설>에는 그런 기중기의 도면이 직접 그려져 있었다. 꼼꼼하게 그려진 설계도를 보니 감탄사가 연신 터져 나왔다. 그 밖에도 다산유물기념관에는 볼거리가 풍부했다. 공짜로 입장해 본다는 게 미안할 정도로 기억에 남는 전시물들이 꽤 많았다.

다산유물기념관 위쪽으로는 '다산 정약용 말씀의 숲'이 있었다. '다산 정약용 말씀의 숲'은 큰 석상에다 다산의 어록을 옮겨 놓은 것이다. 난 그 어록들을 찬찬히 살펴봤다. 하나하나가 다 울림이 큰 말씀들이었다. 마치 세상의 지혜들을 다 압축시켜 놓은 듯했다. 다르게 보면 따분한 '도덕선생님' 같은 글귀들에 하품을 내뿜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그 어록들은 내게 죽비소리처럼 큰 깨우침을 줬다.

 

 

 

 

* 동암에서 저술중인 다산: 강진 다산유물전시관 한쪽에는 다산초당의 모습을 재현한 공간이 있었다. 다산초당은 크게 동암과 서암으로 나뉘었다.

동암은 다산 선생이 기거하는 처소였고, 서암은 후학들을 가르치는 강학장소였다.

 

 

 

 

 

다산초당

다산초당은 만덕산 중턱 부근에 위치에 있었다. 필자가 방문하기 전날 남부 지방 일원에 비가 내려서인지 다산 초당이 있는 만덕산의 숲은 싱그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정약용이 강진읍내에 갈 때 건넜다는 시냇물도 유량이 풍부했다.

다산초당은 생각보다 비좁았다. 그리고 무척 소박했다. 하긴 다산초당은 정약용의 유배지였지 여름 별장이 아니지 않은가? 유배지가 '대궐' 같았다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일 것이다. 초당에서 만덕산 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다 보면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나온다. 천일각에 올라서니 아름다운 강진만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사실 천일각은 정약용의 유배시절에는 없던 정자였지만 차후에 다산 선생의 뜻을 받들어 건립했다고 한다.

드넓게 펼쳐진 강진만을 바라보면서 다산은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강진만 상공을 유유히 날아오르는 백로들을 바라보면서 고향 생각을 했을 것 같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나긴 유배생활을 한탄하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시울을 붉혔을지도 모른다. 강진보다도 더 먼, 흑산도 땅에 유배됐다 그 곳에서 임종을 맞이한 형 정약전을 그리워하며 비탄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 경기 남양주의 천일각: 본래 천일각은 전남 강진 다산초당 부근에 있었다.

하지만 다산의 멋을 살리자는 의미로 다산문화의 거리에 천일각을 재현해 놓았다고 한다.

 

 

 

 

다산 선생과 차를 마시다

다음 날이었다. 아침부터 계속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전날 지붕 달린 오두막에다 텐트를 쳤기에 폭우가 쏟아져도 큰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친 김에 다산기념관 공원에서 하루를 더 묵기로 결정했다.

점심께에는 비가 소강상태에 이르렀지만 오후가 되니 다시 빗줄기가 거세졌다. 난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며 밥을 지어 먹었다. 그러다 식곤증 때문인지 아니면 거듭된 여행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슬며시 눈이 감겼다. 잠결에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빗소리인가?

"누구요? 어느 문중의 과객인지 모르겠으나 일어나 보구려."

누구지? 이 거센 빗줄기 속에서.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뉘신데, 어떻게 여기 만덕산까지 찾아 오셨소?"
"누구세요? 관리인이세요?"
"난 다산이라 하오. 지금은 이 곳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중이오."
"예, 정말 다산 선생님이세요? 정말 그 정약용 선생님이 맞으세요?"
"그렇소. 내가 다산이오. 자자, 우리 이럴게 아니라 차를 한 잔 듭시다. 이 고장에서 나는 차는 향기가 은은하기로 유명하지."

그러면서 다산 선생은 향긋한 냄새를 풍기를 차를 한 잔 건네주셨다. 그리고는 내게 그 먼 천리길을 어떻게 해서 왔는지 물어보셨다. 나는 자전거를 가리키며 저것을 타고 왔다고 했고, 수원을 거쳐서 왔다고 대답했다. 역시 과학에도 조예가 깊으셔서 그랬는지, 다산 선생은 내 철TB를 유심히 살펴보셨다.

"화성을 거쳐 오셨다고? 그럼 성곽은 어떻소. 온전히 잘 있는 거요?"

 

 

 

 

* 수원 화성: 필자가 꿈 속에서 이 사진을 보여드리자 다산 선생은 무척 흡족한 미소를 띄우셨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 판단은 독자의 몫!

 

 

 

 

 

나는 디지털카메라에 담아놓은 수원성 관련 사진들을 다산 선생께 보여드렸다. 수원의 도시화로 성곽 일부가 잘려나간 것에 대해 무척 아쉬워하셨지만, 그래도 수원성의 굳건한 모습을 바라보시며 흡족한 미소를 띠셨다.

"다산 선생님. 그 길고긴 유배 생활을 어떻게 이겨내셨습니까? 귀양 보낸 사람들이 밉지 않으세요?"

다산 선생은 쓴 웃음을 지으며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런 소리는 이제 다 부질없는 소리. 난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다오."
"그래도 18년이란 세월이 얼마나 힘이 드셨습니까?"
"그건 그렇지. 고독했지. 외로웠지. 하지만 이렇게 아주 먼 곳에서 찾아온 방랑객과 차를 함께 마시고 있지 않은가. 그걸로 족한 거지."
"선생님도 무척 외로우셨군요."
"그랬지. 하지만 고독감이 밀려올 때마다 난 저 멀리 바다를 보면서 외로움을 실어 보냈다오. 그리고 시를 짓고 문장을 썼다오. 유배기간이 괴로운 시간인 것은 맞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살찌우는 좋은 시간이었소.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하지 않소. 또 위기 속에 기회가 있다는 말도 있고. 내가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했다면 그 수많은 경집과 문집들을 어떻게 저술했겠소. 여기가 내 유배지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내 도서관이 아니겠소? 그렇게 내가 서책을 썼으니 후세 사람도 나를 알아보는 것이겠고. 그대도 나를 알아주어서 발길을 이 곳으로 돌리지 않았나?"
"그건 그렇죠."

선생께서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자 이제 나는 처소로 돌아가 봐야겠소. 이제는 헤어질 시간인 듯싶네. 아참, 혹시 자네 경기도 마현이라는 곳을 아나? 내가 그곳에 여유당이라는 집을 짓고 말년을 보낸 곳인데."
"아, 양수리 근처요. 알지요. 거기에 선생님의 이름을 딴 트레킹 코스도 있어요. 뒤쪽에 있는 운길산도 풍경이 수려한 곳이고요."
"잘 알고 있구먼. 그럼 그 곳에도 한 번 와주시게. 거기서도 한 번 보고 싶네."
"예?" 

요란한 천둥소리와 함께 번쩍하고 번개가 내리쳤다. 그 소리에 눈이 떠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좀 전까지 내 앞에 계셨던 다산 선생도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꿈을 꾼 것이다. 아주 생생한 꿈이었다. 시공간을 넘어, 마치 다산 선생과 직접 다과를 했던 것처럼 아주 생생했다. 마치 입속에서는 은은한 차향이 맴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 연꽃공원: 최근에 다산문화의 거리 앞쪽에 대규모의 연꽃 공원이 들어섰다. 화사한 연꽃들이 피어 있어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 연꽃밭 앞쪽으로는 한강이 펼쳐져 있는데 그곳에는 야영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껑뚱한 나, 다산 선생의 제자가 되다!



2013년 6월 30일, 필자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다산문화의 거리를 방문했다. 3년 전 꿈 속에서 만난 다산 선생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였다.

너무 늦은 방문이었다. 3년 전의 일은 둘째치고서라도 다산 생가 방문은 미리미리 했어야 하지 않나? 명색이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면서! 중앙선의 복선화로 접근성도 많이 좋아지지 않았던가. 물론 변명거리가 있긴 있다. 다산 생가를 방문하려고 할 때마다 꼭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 먼 남도 땅에서는 쉽게 만나주시더니만 정작 수도권에서는 그림자도 안 보여주실라나?'

다산 생가를 방문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중앙선 팔당역까지 전철을 타고 간 후 능내리행 버스로 갈아타는 것이다. 그러다 능내역에서 하차한 후 도보로 이동한다. 버스를 타고 보는 팔당댐 일대의 경치가 일품이다. 능내역은 중앙선 복선화로 현재 폐역이 됐다.

다산의 생가인 여유당은 다산문화의 거리에 있었다. 문화의 거리는 강진에 있는 유물전시관보다 좀 더 세련된 느낌이었다. 더 규모도 있었다. 2009년에 실학박물관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거칠게 이야기해서 강진의 다산 유적은 남도의 멋이 녹아든 것처럼 고즈넉했고, 남양주의 다산 유적은 좀 더 정돈된 모습이었다. 물론 이런 비교는 전적으로 필자의 주관적인 판단이다.

 

 

 

* 다산 정약용의 묘: 다산 선생의 묘. 생가인 여유당 위쪽에 선생은 고이 잠드셨다. 필자가 참배를 했을 때는 한 여름이어서 그런지 나무들이 무성했다.

 하지만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에 가면 시원스럽게 양수리 유역이 조망된다. 마치 다산초당에서 아름다운 강진만을 시원스럽게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처럼.

 

 

 

 

 

강진이나 남양주나 풍광만큼은 '용호상박'을 이룬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다산초당 위쪽 천일각에 올라서면 강진만이 한 눈에 들어온다. 또 그 뒤쪽으로는 천관산이 둘러져 있다. 그 만큼 수려한 풍광을 자랑한다. 남양주도 마찬가지다. 다산 선생이 자주 올랐다는 운길산에서 바라보는 풍광은 수도권 최고의 경치를 자랑한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서로 만나, 큰 물길을 이룬 양수리가 눈 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다산 선생은 강진에 있을 때는 마현(다산 생가가 있는 곳의 옛 지명)을 그리워했고, 여유당에 있을 때는 다산초당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다산선생의 묘는 여유당 위쪽에 있었다. 소나무들이 늘어선 모습이 마치 제자들이 늘어 서서 선생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처럼 보였다. 필자도 저 소나무들처럼 다산 선생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 혹시 너무 '껑뚱'하다고, 꾸짖지나 않으실까? 하지만 필자는  이미 제자일지 모른다. 그동안 다산 선생의 저서를 읽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읽을 생각이니까.

다산 선생의 제자가 된 것을 기념하여 묘소와 여유당 일대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줍고 왔다. 그렇게 해 '나의 정약용 테마 탐방'은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 홍이포: 실학박물관 앞쪽에 전시되어 있다. 이 홍이포는 명나라 시대 포르투갈에서 수입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연안 방어용으로 장착됐다고 한다.

홍이포는 우리나라와도 연관이 있었다. 병자호란 때 후금이 이 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 전투에서도 쓰였다고 한다.

 

 

 

 

 

 

 

 

 

 

 

 

 

 

 

 

 

 

 

 

 

 

 

 

 

 

 

 

 

 

 

 

 

 

 

 

 

 

 

 

 

 

 

 

 

 

 

 

* 운길산: 다산 선생께서 자주 발걸음을 하셨다는 운길산에서 양수리 방면을 찍은 사진이다.

 운좋게도 날씨가 정말 좋아서 사진이 잘 나왔다. 하늘에 구름이 참 멋지다!

 

 

 

 

 

 

 

껑뚱한 나, 다산 선생의 제자가 되다

다산 정약용 테마여행 이야기

 

 

 

 

 

 

 

따로 또 같이, 테마여행



우리는 다산 정약용 선생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필자의 이런 질문에 당황하신 분들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뚱딴지 같은 질문을 필자 스스로에게 해봤다. 나는 다산 선생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나? 다산 선생의 저작은 많이 읽어보았는가?

필자는 역사트레킹 인터넷 카페의 주인장이다. 우리 카페는 역사유물 탐방과 트레킹이 결합된 고품격(?)의 도보여행 카페다. 그래서 가입할 때,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인물이 누구인지를 묻는다. 흥미로웠던 것은 다른 역사인물보다 압도적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1위를 차지했다는 점이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같은 쟁쟁한 역사인물들을 물리치고, 다산 선생이 우리카페 회원들이 제일 존경하는 역사인물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런 퀴즈의 결과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우리 카페의 회원수는 겨우 8명에 불과하니까.

기사 앞 부분부터 싱거운 소리를 한다고 질책을 가하실 독자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필자는 이런 소리를 하려고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니다.

 

 

 

 

 

* 다산 정약용 선생상: 생가인 여유당에서는 저렇게 선비적인 풍모로 여생을 보내셨을 것 같다. 뒤쪽의 나무가 선생의 상과 잘 어울린다.

 

 

 

우리나라에 박경리 선생과 관련된 문학관은 세 개에 이른다. 강원도 원주, 경남 하동과 통영이 바로 그곳이다. 동학혁명기념관도 마찬가지다. 전북 정읍과 전주에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또한 장내리 집회가 열렸던 충북 보은에도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이 들어서 있다.

이렇듯 동일한 테마를 가졌지만 각 지역별로 나눠져 있는 기념관 혹은 기념공원을 하나의 주제로 묶어 탐방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이번에는 원주 토지 문학관에 갔다면, 다음에는 통영 박경리 기념관을 방문하는 식이다.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박경리'라는 하나의 테마를 가진 곳이라, 두 곳의 일대일 비교도 가능할지 모른다. 자동차 있으면서 질질 끄는 거 싫어하는 분이라면 당일치기로 테마여행을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런 식의 테마 탐방은 무척 흥그런 테마 탐방은 무척 흥미로운 여행일 수 있다.

필자의 테마 탐방은 다산 정약용 선생 유적지다. 다산 선생의 유적지는 크게 두 개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그가 오랫동안 유배돼 있던 전남 강진이고, 또 하나는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다산 생가다. 하나를 더 하자면 수원 화성도 다산 테마 탐방에 포함된다.

 

 

 

 

 

* 다산길: 다산길은 남양주시에서 개설한 도보여행길이다. 아마 이 길을 다산선생도 걸으시지 않으셨을까?

 

 

 

L자형 여행

2010년 여름 당시 필자는 L자형 자전거여행을 행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시작한 여행은 제주도를 거쳐 고흥 나로호 우주센터에서 종료됐다. 이동한 지역을 선으로 이어보면 알파벳 L자와 비슷한 형상이 나와서 L자형 여행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L자형 여행 당시 필자는 제주도→완도→해남→강진 순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고려시대부터 도자기로 유명했던 도요새의 고장 강진. 하지만 강진은 내게 '다산 정약용'의 고장으로 더 많이 기억됐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다산은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는데 그곳에서 수백 권의 책을 저술했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1801년에 있는 신유박해로 인해 억울하게 유배길에 올라야 했지만 다산은 그 황량한 유배지를 하나의 작은 '규장각'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이런 이유 때문에 일부러 강진의 다산 초당을 자전거 여행코스로 잡았던 것이다.

 

 

 

 

* 경세유표

 

 

 

 

*목민심서

 

 

 

 

1800년, 당시 조선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전 유럽에 걸쳐 프랑스 혁명을 전파했던 1799년. 당시 조선의 조정은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했기 때문이다.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다.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 당연히 정약용이었다. 정약용이 1순위였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된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했으면 '승복'해야 할 텐데 벽파는 그렇지 못했다. 꼼수를 썼던 것이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형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낙향하게 된다. 그렇게 정약용이 한양을 등지고 낙향한 후 두 달도 안 돼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승하하게 된다. 그때가 1800년 6월이었다.

 

 

 

*다산초당: 강진의 다산초당. 이 현판을 추사 김정희가 썼다고 한다. 추사는 다산을 정신적인 스승으로 흠모했다고 한다.

 

 

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된다. 1801년 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것이다.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사사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에 나서게 된다.  이때 정약용도 유배길에 나서게 됐는데 처음 다산의 유배지는 경상도 포항 부근이었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백사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약용은 포항보다 더 궁벽한 강진 땅으로 이배되기에 이른다.

강진에서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는 고정되지 않았다. 읍내에 있는 주막거리에 거처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다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다산초당이었던 것이다. 다산초당은 정약용이 1808년에서부터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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