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티에 세워진 동학 장승들

- 우금티 장승제이야기

 

14.02.19 14:09l   최종 업데이트 14.02.19 14:09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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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장승제 금강 풍물패가 사물놀이를 하고 있다. 한편 왼쪽 장승은 웨이브가 져서 무척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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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실제로 동학군들이 살육을 당한 곳은 우금티 고개 아래쪽이다. 사진에서 버스와 트럭이 다니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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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으로 불리는 장승은 마을 입구와 같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에 세워졌다. 역병 같은 액운을 막고, 마을의 무사태평을 기원하기 위해 세웠던 것이다. 즉 장승은 마을의 수호신이자 지킴이였던 것이다. 

하지만 공주 우금티 고개에 세워지는 장승들은 그런 교과서적인 의미의 장승들과는 '임무'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왜? 우금티는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동학군들이 결사항전을 벌인 역사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동학군들의 한, 민초들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기에 그곳에 세워지는 장승들도 남다른 '스토리'를 갖게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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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장승작업은 나무 껍질을 벗기는 것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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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김작업 장승의 얼굴과 복부 부분의 틀을 잡기 위해 전기톱으로 깎고 있다. 장승은 남녀 쌍으로 제작하기에 사진에서처럼 동시 작업을 할 수 있다. 사진 오른편에서 나무 껍질을 벗기고 있는 사람들은 공주대학교 학생들이다. 공주대 이명희 교수는 교학사 역사교과서 집필에 참여해 식민지 근대화를 역설했지만 정작 나이 어린 공주대 학생들은 우금티에서 동학 정신을 기리는 장승을 깎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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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6일, 충남 공주시 우금티 고개에서는 우금티 장승제가 거행됐다. 우금티 장승제는 공주민주단체협의회와 우금티 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행사로 매년 정월대보름 주간에 열렸다. 벌써 20년이 넘는 유서 깊은 제례라고 한다.

장승제라고 해서 매년마다 장승을 세우지는 않았다. 그렇게 장승을 깎지 않았던 해는 제례만 드렸다고 한다. 제례를 통해 공주 지역의 무사태평과 함께 동학 정신을 기렸던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시간상의 한계 때문에 미리 제작된 거대한 장승이 세워지는 것으로 장승제가 진행된다. 하지만 우금티 장승제에서는 현장에서 장승이 직접 제작되어 참관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또한 참관객들이 장승 제작에 직접 손발을 보태기도 했다. 필자도 힘을 보탰다. 땔감을 날랐고, 다듬기 작업도 했다. 하지만 크게 일한 티가 나지 않았다. 역시 내가 잘하는 걸 해야지!

'그래서 내가 지금 이 기사를 쓰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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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역시 공주대학교 학생이 글씨가 새겨지는 부분을 다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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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윤여관 우금티기념사업회 집행위원장께서 끌과 망치로 장승의 얼굴 부분을 정교하게 입체화 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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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 제작의 첫 단추는 나무껍질 벗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장승에 쓰이는 나무는 밤나무와 같은 목질이 단단한 것들이 선호되지만 일반적으로는 야산에서 구하기 쉬운 소나무가 주로 쓰인다. 껍질이 제거되면 나무는 '알몸'을 드러낸다. 이제 본격적인 장승 제작이 시작되는 것이다.

몸통이 매끈하게 드러난 목재에 전기톱을 이용하여 기본스케치를 하는 것이 두 번째 작업이다. 얼굴 부분과 글씨가 새겨질 복부 부분에 기본스케치를 하게 된다. 이후 얼굴 부분과 몸통부분은 좀 다르게 작업된다.   

얼굴 부분은 끌과 망치로 깎아내는 작업을 하게 된다. 마치 조각가가 조각을 하듯이 정교화 작업을 하는 것이다. 복부 부분은 낫으로 다듬기 작업을 한다. 글씨가 새겨질 곳이기 때문에 평탄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세 번째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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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장승의 밑둥을 불로 그슬리고 있다. 밑둥은 흙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쉽게 부식될 수 있다. 그래서 목질의 내구성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밑둥 부분을 불로 그슬린다. 사진 중앙에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이 한준혜 공주민주단체협의회 집행위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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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장승의 복부에 글을 적는다. 보통의 장승들에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이란 글씨들이 새겨지지만 우금티 장승들은 좀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문구들이 쓰여진다. 그래서인지 음각을 하지 않고 즉석에서 먹으로 글씨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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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는 나무 밑동을 불로 그슬리는 것이다. 밑동 부분은 땅 속에 묻히기 때문에 쉽게 부식될 수 있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불로 그슬리는 것이다. 그렇게 불로 그슬리면 목질이 단단해지고, 벌레들이 덜 침투하게 된다. 

이제 글씨를 새기는 작업이다. 칼로 음각을 새기고 그 위에다 먹칠을 하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우금티 장승들은 음각을 하지 않고 그냥 먹으로 글씨를 적었다. 왜? 우금티 장승들은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같은 통상적인 문구를 가진 장승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 작업은 장승 세우기였다. 미리 준비한 솟대와 함께 장승을 세우는 것으로 장승 작업은 종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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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세우기 예전에는 직접 삽으로 땅을 파서 장승을 세웠지만 요즘은 포클레인으로 땅을 파고 장승을 세운다. 이렇게 하여 장승제작과 장승세우기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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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제 장승세우기가 끝나고 이제 제례가 시작됐다. 우금티기념사업회 이원하 사무국장이 제례의 사회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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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보듯 장승 세우기는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마을 공동체가 움직여야 가능한 작업이다. 그렇게 마을 주민들의 공동의 염원과 기원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장승들이 떡~하고 마을 앞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해보시라. 얼마나 든든하겠는가? '세콤'이 달린 것보다도 훨씬 더 든든할 것이다.

우금티 장승들에는 '시민교통노조화합'과 '살림·나눔·모심' 같은 문구들이 새겨졌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과 같은 일반적인 문구들이 아니라 지역 단체들의 염원과 기원이 새겨졌던 것이다. 현안에 맞춰 더 디테일한 문구들이 장승에 새겨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우금티에는 한 쌍의 장승들이 더 자리 잡게 되었다. 120년 전, 못다핀 동학군들의 열망이 서려있는 우금티에 농민군들의 뜻을 이어받은 장승들이 더 세워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동학군들의 장승들이 더해지니 우금티가 든든해 보였다.  

장승제가 무사히 끝난 후, 필자도 나름대로 장승에 새겨질 문구를 떠올려보았다. 만약 필자에게 먹과 붓이 주워졌다면 이런 문구를 새겨 넣었을 것이다.

'친일매국노 교과서 축귀'
'국정원 댓글 조작 축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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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한쪽편만 있던 장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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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승 왼쪽에 새로운 장승이 세워졌다. 우금티 고개가 더 든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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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변에 우뚝 솟아 있는 선돌

다음 목적지는 선돌이었다. 선돌은 서강 강변에 우뚝 솟은 기암괴석이다. 선돌은 그 자태가 오묘하여 예로부터 '신선암'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그런 기묘한 모습 때문에 선돌은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예전에는 전망대에 올라 선돌에서 서강을 내려다 봤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래쪽에서 선돌을 올려다 볼 생각으로 수풀을 헤집고 나갔다. 선돌 옆으로는 서강이 동강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지, 인적이 거의 없었다. 사람이 없으면 길도 사라지는 걸까? 선돌로 가는 길은 만만치가 않았다. 잡초가 무성하여 길을 잡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도착한 보람이 있었다.

"이야 정말 멋지군! 위에서 볼 때랑은 또 완전 다르네. 봐봐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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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돌 여름날의 선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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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돌 여름날의 선돌. 화면 중앙에 있는 것이 선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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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돌 선돌의 겨울. 서강이 꽁꽁 얼어 있다. 오른쪽에 있는 것이 선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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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선돌을 내려 볼 때하고는 또다른 맛이었다. 큰 기암괴석이 눈 앞에 떡 하고 서 있으니, 그  모습에 압도되는 느낌이었다. 한편 전에는 서강이 꽁꽁 언 겨울 풍경을 내려다 봤는데 이제는 푸른 강물과 조화를 이룬 선돌을 보게 됐다. 그것도 역시 색다른 맛이었다.  

청령포 터널이 숨어(?)있는 방절산 탐방으로 영월에서의 일정은 마무리가 됐다. 방절산은 청령포 선착장 뒤편에 있는 작은 야산인데 이곳에 올라서면 청령포 일대는 물론 영월읍내도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또한 멀리 동강과 서강이 합수되어 남한강을 이루는 곳도 보인다. 이 곳 역시 계절마다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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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령포 기차터널 청령포 기차터널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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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령포 기차터널 청령포 기차터널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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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방절산 탐방까지 마치니 3일이라는 시간이 소요됐다. 며칠 더 영월에 머물고 싶었지만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베이스캠프를 해체해야 했다. 갈 길이 구만리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예상했던 이동거리는 진작 파기했다. 일정 정도 감안을 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속도가 너무 안 나왔다. 장거리 자전거여행만 5년째인데 매년 같은 일이 반복됐던 것이다.

하지만 너무 조급해 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속도가 안 나오는 만큼, 또 나름대로의 재미도 있지 않던가? 그러고 보면 여행이나 인생살이나 비슷한 거 같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지만 예상외의 것에서 재미와 위안을 삼을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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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절산 방절산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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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절산 방절산의 겨울. 영월읍내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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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내륙자전거여행 5편: 강원도 영월의 여름과 겨울

 

 

14.01.07 14:06  최종 업데이트 14.01.09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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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지형 영월군 서면 선암마을 부근의 한반도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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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천강 기암괴석들이 열을 지어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얼핏보면 물 속에 괴물이나 악어떼가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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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6일째: 2013년 8월 20일


겨울 다르고, 여름 다른 우리나라! 기후 온난화로 뚜렷한 4계절이라는 말이 퇴색되긴 했지만 그래도 봄·여름·가을·겨울이 각각의 특색을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우리나라! 그래서 누구는 이런 말을 한다. 방문한 여행지를 제대로 알려면 4계절을 다 맛(?) 보아야 한다고...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일상에 쫓기는 생활인들이라면, 제대로 마음 놓고 여행하기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당지역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곳이 계절마다 '패션너블'한 옷을 갈아입는 곳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철마다 달라진 옷 색깔을 보기 위해 여행자들은 분주히 발걸음을 옮길 것이다. 그런 '패션쇼'를 경탄의 눈으로 감상하며 여행자들은 이런 말을 내뱉을 지도 모른다.

"계절 바뀌고 나서 또 와야지."

 

 


# 철이 바뀔 때마다 오고 싶은 영월

강원도 영월은 필자에게 그런 곳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찾고 싶은 곳이 바로 영월인 것이다. 봄에는 꽃들이 만발해서 좋고, 여름에는 녹음이 짙어서 좋고, 가을에는 단풍여행 해서 좋고, 겨울에는 얼음놀이 해서 좋은 곳이다.

이전까지 영월에서는 주로 트레킹을 했었다. 영월은 유명한 동강 뿐아니라 서강과 주천강 등도 흐르고 있는데 이런 강들은 하나 같이 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필자는 이런 곳에서 강변트레킹을 했었다. 꾸불꾸불한 강변길을 걷다보면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리고는 꼭 '철 바뀔 때마다' 다시 올 것을 다짐했었다. 그래서 중부내륙 자전거여행에서도 일부러 영월을 코스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트레킹을 했던 곳을 자전거여행으로 다시 찾았을 때의 그 느낌이란 참으로 묘했다.  감정이 오묘해서 그랬는지 몰라도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터져 나왔다.

"다시 왔군. 다시 왔어. 이번에는 혼자 오지 않고 자전거랑 같이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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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천강 강물에 누군가가 돌로 금을 그은 것 같다. 멀리서보면 괴물의 등지느러미나 악어떼처럼 보이는데 자세히보니 차별침식을 받은 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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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천강이 흐르는 주천면에서 1박을 한 후, 물길을 따라 한반도 지형이 있는 선암마을 부근에 도착했다. 주천강은 태기산에서 발원한 하천으로 한반도면에서 평창강과 합수되어 서강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다시 서강은 영월읍내에서 동강과 합수되어 남한강을 이루어 충북 단양으로 물길을 잡는다.

한편 주천강은 기이한 풍광을 품고 있었다. 물 속에 잠겨 있는 암석들이 일렬로 늘어진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다. 등지느러미 같이 생긴 것들이 물 위로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강물 속에 엄청난 괴물(?)들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네스호에 괴수가 살 듯... 혹시 주천강에도?

 

 



# 단종의 유배지, 청령포

어느덧 필자는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에 도달하게 됐다. 청령포 선착장 인근에다 베이스캠프를 꾸렸다. 24시간 개방되는 화장실도 있고 텐트를 칠 공간도 넉넉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청령포 베이스캠프에서 삼 일을 머물면서 본격적인 영월 탐방에 나섰다.

청령포는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배후면에는 가파른 산이 놓여 있어 육지 속의 섬으로 불린다. 그래서 청령포는 지금도 배가 없으면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다. 
1457년 6월 초순, 단종을 복위시키겠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단종도 그 사건에 연류된다. 불똥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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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령포 청령포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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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령포 청령포의 겨울. 이렇게 강물이 꽁꽁 얼 때는 배가 운항하지 않는다. 그래서 얼음 위를 걸어서 청령포에 간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곳이 바로 청령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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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왕에서 졸지에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은 청령포로 유배를 오게 된다. 하지만 단종은 청령포에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그해 여름 홍수를 피해 영월 읍내에 있는 관풍헌으로 옮겨 갔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해 10월 하순에 관풍헌에서 숙부인 세조에 의해 사사됐다. 그때는 그나마 있던 '노산군'이라는 지위도 박탈되고 서인 신분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넉 달 정도 밖에 안 되는 단종의 유배생활. 그의 짧은 생애만큼 유배생활도 아주 짧았던 셈이다.


단종의 탄식과 절규가 곳곳에 베어 있는 청령포지만 그 모습은 절경중의 절경이다.
깎아질 듯 급경사를 이룬 육륙봉과 청정한 서강의 모습이 어우러진 청령포의 모습은 누가 봐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곳이다. 350도로 청령포를 휘돌아 나가는 서강의 물줄기 또한 힘이 넘친다. 이런 모습들이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다고 생각해 보시라! 그 모습은 분명 아름다움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광경일 것이다.

 

 


 

 

 

 

 

 

 

속이 쓰려도 여행은 계속된다!___ 2부

 

[중부내륙자전거여행 4] 종북 딱지 붙이기 놀이 그리고 말로만 '안보'

 

 

 

 

종북 딱지 붙이기 놀이, 그리고 말로만 '안보'

이런 진지한(?)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맨 마지막 문제 같은 경우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다. 현재 새누리당 상임고문으로 있는 김용갑이라는 분이 있다. 이 분에게는 '안보의 첨병'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그만큼 강경파였다는 것이다. 안기부 출신이었던 김용갑 전 의원은 1989년 정계에 출사표를 내던지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한국의 보수들은 다 죽었는가?'

당시 국회는 여소야대를 이루었고 그것에 대한 반발격으로 이런 말을 했다고 추측된다. 국회입성 이후 김용갑 의원은 줄기차게 햇볕정책을 비롯한 남북화해 정책에  반대를 표명해왔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안보의 첨병 슬하에 있는 3명의 아들은 다 현역 군복무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명은 아예 면제고, 그나마 한 명은 공익근무를 했다. 뚱딴지같지 않은가? 진정한 안보의 첨병이라면 자신의 핏줄부터 현역복무에 적극적으로 임하도록 해야 하지 않은가? 국방과 안보는 말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자신의 혈육은 국방의 최일선에서 쏙 빼놓고, 다른이들에게 목청 높여 안보를 외친다면 설득력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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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깨비도로 갑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지고 난 뒤의 도깨비 도로. 이 도로는 하도 경사가 가팔라서 그런지 왕래하는 차들이 뜸했다. 그래서 '신기하고 재밌기'보다는 그냥 무척 힘든 도로로 기억된다. 도깨비도로는 강원도 횡성군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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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래터 강원도 횡성군에서 영월군으로 넘어갈 때 넘는 곳이 바로 도깨비도로다. 그 도깨비 도로 옆을 가고 있는데 어느 할머니께서 저렇게 빨래를 하시고 계셨다. 요즘은 보기 힘든 장면이라 한 컷 찍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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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현 의원도 마찬가지다. 현재 새누리당 원내부대표를 맡고 있는 윤상현의 병역 이행 유무를 살펴본 필자는 경악했다. 1988년 5월 14일에 입대해서 당일날에 전역을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계 군복무 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경이적인 기록이다. 징병제를 도입한 근대 국민국가 중에, 입영대상자가 단 하루만의 복무로 전역을 했던 일례가 있었던가? 필자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아예 화끈하게 면제를 받던가. 그러면서 이런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윤 의원은 군번이 있으신가?'
'총기 및 총번을 부여받으셨나?'
'사격과 수류탄 투척 등 기초 군사훈련을 받으셨는가?'
'하루만 군복무를 했다면, 스스로 창피해서라도 안보를 목청껏 높이기 어렵지 않은가?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선거로 일어선 자, 선거로 망하나?

최첨단 IT시대에도 아직까지 3대 세습을 통한 철권통치를 하고 있는 북한을 보면 짜증이 확 난다. 필자는 일본의 아베 총리를 싫어하는데 북한의 김정은 제1비서도 싫어한다. 아베는 군국주의 부활을 꿈꿔서 싫다. 김정은은 그냥 싫다. 뭐 준 거 없이 싫다. 좋아할 이유도 없으니까.

어쨌든 그런 북한정권에 맞서 안보의 기치를 높이 세우려면 스스로가 당당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반대편만 보면 다 김정은이라고 생각되는지 다짜고짜  '종북 딱지붙이기 놀이'부터 하는데, 혹시 자신이 당당하지 못하기에 그렇게 앙칼진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그런 분들은 쓸데없는 딱지붙이기 놀이로 사람들을 몰아세우지 말고 자신이 과연 안보나 국방에 대해서 당당하게 발원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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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흥면 안흥찐빵 안흥찐빵은 횡성군 안흥면의 명물이다. 사진에 등장한 곳은 면사무소 앞에 있는 빵집이다. 외벽에 그려진 빵집 아줌마의 모습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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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이야기가 나왔으니 좀 더 해보자. 얼마전에 군 사이버사령부 선거 개입에 대한 중간발표가 있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발표 내용은 이랬다고 한다.

"군의 정치적 중립의무를 위반한 행위는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지만 대선에 개입한 것은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과연 그런가? 노골적인 여당 후보 편들기와 야당후보 흠짓 내기를 한 댓글이 증거 자료로 나왔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중립의무를 위반했는데 대선 개입은 아니라는 발언은 '밥은 먹었으나 식사는 하지 않았다'와 같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그런 말장난을 아웃도어식으로 바꿔서 해보면 이렇게 된다.

'텐트를 쳤으나 캠핑은 하지 않았다!'

국정원이나 군 사이버사령부 선거 개입을 주변 강대국들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들은 콧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국내외 정보수집을 맡고 있는 고급엘리트들이 댓글이나 달고 있고, 국방의 의무를 맡고 있는 군인들이 선거 개입 SNS나 작성하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얼마나 대한민국을 업신여겼겠는가!

이 사태에 책임은 분명 박근혜 대통령에게 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도 박근혜 대통령이다. 하지만 그게 쉽게 해결될 거 같지 않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서는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의 댓글로 도움을 받았다는 걸 인정하기 싫을 것이다. 선거의 여왕이 겨우 댓글 따위에 의탁했다니!

그냥 모른척 하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는 '자랑스런 불통'이라고 위안을 삼고 싶겠지. 그러나 그것이 바로 자신을 망치는 지름길인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어리석은 짓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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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박 강원도 횡성군과 영월군 접경지대에 있는 한 공사장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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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이 쓰려도 여행은 계속된다!

여행 4일째: 8월 18일

이런 웃지못할 촌극들 때문에 필자의 속은 계속 쓰릴 것 같다. 여행할 때나 이 여행기를 쓰고 있는 지금이나... 하지만 여행은 계속됐다. 할 건 해야지.

안흥찐빵으로 유명한 횡성군 안흥면에 도착한 필자는 안흥찐빵으로 배를 채우고 강원도 영월군을 향해 힘차게 나아갔다. 횡성에서 영월로 넘어가려면 도깨비 도로라는 곳을 넘어야 했다. 그곳의 입간판에는 '신기하고 재미난 도깨비 도로'라고 적혀있었지만 필자에게는 그저 힘들고 어려운 도로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도깨비 도로에서 지체를 하다보니 이미 세상은 어두워졌다.

또 텐트를 칠 시간을 놓쳐 버린 것이다. 여행을 시작한 지 3일째인데 3일 내내 텐트를 제때 쳐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마나 달빛이 밝아 운치는 있었다. 그 달빛을 벗삼아 나름대로 시를 읊어봤다.

달에 있는 옥토끼 잡아다
이 수풀들 찧게 해야지
평평하게 다져지면 그곳에다
침낭깔아 대자로 누우리라!

그렇게 실없는 자작시를 낭송하고 있었는데 야영지가 눈에 확 들어왔다. 널찍한 곳에 땅이 평평하게 잘 다져진 곳이었다. 이게 웬 횡재냐! 자세히보니 그 곳은 바로 공사가 중단된 공사장이었다. 다짜고짜 들어갔다. 공사가 중단됐으니 하룻밤 신세를 진다고 달라질 것은 없을 테지! 필자는 그 곳에서 상당히 낭만적인 하룻밤을 보낼 수가 있었다! 텐트를 치지 않는 방식, 즉 비박으로 낭만적인 밤을 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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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사장에서의 비박 비박이란 야외에서 텐트를 치지 않고 취침을 하는 것을 말한다. 텐트를 설치하면 캠핑이 되는 것이고, 사진에서처럼 그냥 침낭만 깔고 자면 비박이 되는 것이다. 처음 달빛에 봤을 때는 팬션이나 마을회관을 짓는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개인 집이었다. 어쨌든 남의 집 공사장에서 비박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신 잠은 무척 맛있게 잘 잤다. 모기가 걱정이었는데 모기도 안 물리고 개운하게 아침을 맞았다.
ⓒ 곽동운

 

 

 

 

 

 

 

 

 

 

 

속이 쓰려도 여행은 계속된다!___ 1부

 

[중부내륙자전거여행 4] 종북 딱지 붙이기 놀이 그리고 말로만 '안보'

13.12.24 17:42  최종 업데이트 13.12.24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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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우와 자전거 횡성 읍내에서 찍은 사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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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3일째: 8월 17일


전날 119의 도움으로 횡성군 공근면 금계천 일대에서 무사히 캠핑을 할 수 있었다. 그럭저럭 밤을 지새울 수는 있었지만 아침에 일어나니 뱃속에서 신호가 왔다. 그건 아주 쓰라린 신호였다.

"우읍~~~ 꺼억"

 


쓰린 속을 붙잡고 여행을 이어갔다!

뱃속을 부여잡고 텐트에서 한 바퀴 굴렀다. 쓰린 속을 두 손으로 문질러댔다. 위산과다였다. 목구멍에 무언가 턱하니 하고 걸린 느낌 때문에 새벽에 몇 번이나 잠을 야 했다. 서울에서부터 기미가 보이더니만 결국은 수면 위로 올라와 '나이트메어'가 됐던 것이다.

화장실에서는 넉넉히 일을 잘 봤기 때문에 별 일 아니라고 여겼고, 그래서 위장병을 치유하지 않고 그냥 출발을 강행했었다. 하지만 그게 화근이었다. 그저 열심히 페달을 밟으면 장운동이 잘되어 위장도 튼튼해질 줄 알았다. 자전거여행으로 몸을 '치유'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어리석은 짓! 어쭙잖은 자가 진단으로 몸을 막 굴려댔던 것이다. 다리에 무리가 많이 갈 거 같아 그에 맞는 비상약은 준비했지만 위장약은 없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여행이고 뭐가 다 귀찮아졌다.

'이 쓰린 속을 붙잡고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냥 여기까지만 갔다 남은 구간은 나중에 도보여행으로 채울까?'

이러저런 생각으로 머리는 복잡해졌고 몸은 축 늘어졌다. 한참을 그냥 텐트 속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쫑 낼 수는 없잖아. 그래 일단 읍내에 가서 약국을 찾아보자. 해볼 건 다 해보고 포기하자고!'

여기서 여행팁이 하나 생긴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장거리 여행을 떠날 때에는 필요한 구급약을 챙겨가야 한다. 진통제, 반창고, 소화제는 필수품목이다. 또 에어파스도 꼭 챙겨야한다. 이 에어파스는 유사시에 호신용 무기로도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들개들이 공격할 때 안면부에 분사를 하면 위험한 순간을 모면할 수 있다. 후각이 예민한 야생동물을 잠시나마 교란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한 여름이었지만 필자는 핫팩도 하나 가져갔다. 갑자기 산 중에서 폭우를 만나면 체온이 급격히 떨어질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하지만 속쓰림을 다스리는 위장약은 챙기질 못했다. 다른 건 다 있었는데 딱 그것만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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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성 성당 횡성성당은 1950년대 지어진 성당이다. 현재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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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맛있는 라면, 피자, 통닭, 삼겹살을 포기하라고요?


"라면, 피자, 통닭, 삼겹살... 등등...  뭐 이렇게 기름진 건 드시지 마시고, 식사는 정기적으로 하세요. 소식으로요."
"라면, 피자, 통닭, 삼겹살... 그거 다 제가 좋아하는 건데요. 그리고 저는 아웃도어 하는 사람이라 밥을 많이 먹어야 되는데..."
"병은 고치셔야죠. 안 그러면 그게 위궤양이 되고, 그러다 위암이 되는 거에요."
"예? 위암이요?"

횡성군 읍내에 있는 약국에서 오간 대화다. 약사님은 음식물 조절을 강조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상황은 더 악화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약사님이 미웠다. 그 맛있는 것들을 내게서 떼어 내려고 하다니!

"약사님. 혹시 자전거나 트레킹을 열심히 해서 장운동이 활성화 되면, 위액 분비가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나요?"
"장이 활성화되면 좋기는 하지만 위하고 장은 투약되는 약이 달라요. 둘이 붙어 있지만 다른 거죠."

필자의 자가진단은 보기 좋게 뭉개지고 말았다. 하긴 위하고 장하고 한 몸도 아니지 않은가? 장이 좋다고 위궤양에 걸리지 말라는 법은 없는 법이니까.

아무리 하찮더라도 병을 달고 가는 여행길은 유쾌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허리도 반응을 하는지 찌릿찌릿 거렸다. 이빨도 문제였다. 돈이 없어 치과에 가지 않았던 게 치통으로 되돌아 왔던 것이다. 위장병, 허리통증, 치통까지... 이렇게까지 삼중고(?)에 시달릴 정도면 여행을 포기하고 서울로 돌아가는게 순리일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계속 페달을 굴렸다.

일단 장거리 여행이 한 두 번이 아니었고, 그 삼중고가 상당히 어중간했다는 것이다. 아예 팍 아파버리면 '옳거니' 하고 그냥 집으로 되돌아갔을 테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단 약발로 버텨보기로 했다.

'약발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고고씽이다~!' 

1950년대에 세워진 횡성성당 답사 등, 잠시나마 횡성군 읍내 일대를 돌아본 후 남행을 계속했다. 한우 식당들이 밀집해 있는 우천면에 도착한 후 네덜란드 참전기념공원에서 1박을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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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 참전 기념탑 횡성군 우천면 우항리에 기념탑이 있다. 날씨가 흐려서 그랬는지 좀 어둡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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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전투와 네덜란드 참전 기념공원


횡성군 우천면에 있는 네덜란드 참전 기념공원은 횡성전투에 참가해서 전공을 세운 네덜란드 군인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곳이다. 1951년 2월 경에 있은 횡성 전투에서 국군 8사단은 중공군의 맹공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됐다. 당시 8사단은 구축된 방어선보다 돌출된 부분에 자리를 잡고 있어 적의 기습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물밀 듯이 밀려 내려오는 중공군의 공세에 8사단은 큰 타격을 입게 됐고 부대는 퇴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퇴각이라도 순조로웠으면 불행 중 다행이겠지만 그렇지도 못했다. 부대간 연락 체계의 붕괴, 후방지원의 미비 등으로 상황은 더욱더 악화됐던 것이다. 더구나 8사단을 지원하기 달려온 미군과 국군도 중공군의 포위망에 걸려 큰 희생을 치루게 됐다. 당시 미8군 사령관이었던 리지웨이 장군은 전황을 보고받고 크게 격노를 했다고 한다.

그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때 네덜란드군은 퇴각로를 방어하여 국군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희생도 컸다. 대대장이 사망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이다.  
아군과 적군을 합쳐 1만 5천명이 넘는 인원이 희생된 횡성전투를 두고 미군측에서는 '학살의 계곡'이라고 칭했다. 그런 명칭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횡성 지역에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유해들이 많다고 한다. 그런 쓰디쓴 아픔의 자리에 네덜란드 참전 기념관이 들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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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전기념탑 6.25참전기념탑과 베트남참전기념탑. 네덜란드 참전기념탑 옆 쪽에 건립되어 있다. 이 사진 역시 좀 어둡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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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차 모양을 한 네덜란드 군인상이 보이는 곳에 텐트를 치고 늦은 저녁을 지어 먹었다. 전날 먹지 못한 특식으로 3분 요리 카레를 해서 먹었다. 차를 한 잔 마신 후 어두워진 공원 일대를 할 일 없이 누볐다. 공원에는 네덜란드 참전비 외에도 6.25참전 기념탑과 베트남참전 기념탑이 나란히 서있었다. 장거리여행을 하다보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전쟁기념탑들! 거기에 적혀 있는 서릿발 같은 반공문구들! 그런 전쟁 조형물들을 바라보면서 자연스럽게 국가와 민족에 대한 물음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다.


'왜 아직도 우리는 분단되어 있는가?'
'휴전체제에서 평화체제로 나아갈 수는 없는가? 왜 60년이 넘게 평화협정을 맺지 못하고 있는가?'
'분단의 고착화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종북, 종북거리는데... 종북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은 진짜 반공을 하고 있는 것일까?'

 

 

* 안흥면 안흥찐빵: 안흥찐빵은 횡성군 안흥면의 명물이다. 사진에 등장한 곳은 면사무소 앞에 있는 빵집이다.

외벽에 그려진 빵집 아줌마의 모습이 이채롭다.  

 

 

 

* 빨래터: 강원도 횡성군에서 영월군으로 넘어갈 때 넘는 곳이 바로 도깨비도로다.

그 도깨비 도로 옆을 가고 있는데 어느 할머니께서 저렇게 빨래를 하시고 계셨다. 요즘은 보기 힘든 장면이라 한 컷 찍어봤다.

 

 

 

 

* 비박: 비박이란 야외에서 텐트를 치지 않고 취침을 하는 것을 말한다. 텐트를 설치하면 캠핑이 되는 것이고,

사진에서처럼 그냥 침낭만 깔고 자면 비박이 되는 것이다. 처음 달빛에 봤을 때는 팬션이나 마을회관을 짓는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개인 집을 짓고 있었다. 어쨌든 남의 집 공사장에서 비박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신 잠은 무척 맛있게 잘 잤다. 모기가 걱정이었는데 모기도 안 물리고 개운하게 아침을 맞았다.    

 

 

 * 비박

 

 

 * 네덜란드 참전 기념탑: 횡성군 우천면 우항리에 기념탑이 있다.

 

 

 

* 참전기념탑: 6.25참전기념탑과 베트남참전기념탑. 네덜란드 참전기념탑 옆 쪽에 건립되어 있다.  

 

 

 

 

 

 

▲ 도깨비도로: 갑작스러운 폭우가 쏟아지고 난 뒤의 도깨비 도로. 이 도로는 하도 경사가 가팔라서 그런지 왕래하는 차들이 뜸했다.

그래서 '신기하고 재밌기'보다는 그냥 무척 힘든 도로로 기억된다. 도깨비도로는 강원도 횡성군에 위치해 있다.

 

 

 

 

 

 

 * 횡성 성당: 1950년대 지어진 성당이다.

 

 

 

 

 * 횡성 성당: 횡성 성당은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횡성 한우: 한우와 자전거. 횡성 읍내에서 찍은 사진임.

 

 

 

 

 

 

 

 

 

 

 

 

 

 

 

*횡성군 섬강: 섬강에서 느긋하게 피서를 즐기고 있는 횡성 군민들

 

 

 

 

 

 

 

 

[중부내륙자전거여행 3편] 아웃도어 스펙 조작하기__2부

여행 후기, 걸러서 보세요

 

 

 

 

---> 전편에 이어서

 

 

 

 

# '날벼락 치는데 이 와중에 잠 자는 사람이...'  

오후 4시경. 엄청난 소나기가 쏟아졌다. 맞으면 쓰라린 굵은 빗줄기가 천둥, 번개와 함께 쏟아지고 있었다. 다행히 필자는 게릴라성 집중호우를 예감했다. 그래서 홍천군청 앞에 있는 팔각정에 몸을 숨겼다. 바람에 휘날리는 빗줄기가 얼굴을 세게 때려댔지만  그 와중에도 필자는 큰 대(大)자로 뻗어서 잤다. 팔각정에는 급작스럽게 내린 폭우를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개의치 않고 그냥 잤다. 왜? 피곤하니까!

"날벼락 치는데, 이 와중에도 잠을 자는 사람이 있네."
"그러게요. 대자로 뻗었네요. 낮술 먹었나?"

잠결에 들리는 소리였다. 이런 비판에 반론(?)을 하고 싶었으나 필자가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팔각정은 텅 비어 있었다.

'낮술은커녕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 먹었다!'

우리나라 여름 날씨는 변덕이 심하다. 언제 어디서 게릴라성 집중 호우와 마주칠지 모른다. 그렇게 집중호우를 국도 주행 중에 만난다면? 아주 큰 낭패다. 몸을 숨길 수 없는 곳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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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군 군청 홍천 군청에 있는 팔각정에서 소나기를 피한 후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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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충남 홍성을 여행하고 있었을 때다. 김좌진 장군 기념관 부근에서 큰 소나기를 만났다. 당시 기념관 앞에서는 부스를 차려놓고 무슨 기념행사 같은 것을 하고 있었는데, 필자는 잠시 몸을 피할 생각으로 부스 안으로 쏙 들어가 있었다. 갑작스런 폭우로 행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진행요원도 아니면서 자리를 잡고 있기에 '거시기'했지만 관계자들은 별 신경을 쓰지도 않는 듯 싶었다.

오히려 한 자리라도 채워준  모습이 기특했는지 잔치국수와 떡을 건네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국수와 떡을 먹었다. 또 거기서도 한숨을 잤다. 피곤했으니까. 하지만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김좌진 장군 기념관 앞에서 두어 시간을 대기해야만 했다.

이렇듯 여름 여행은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양이 적은 비는 그냥 그렇게 맞을 수도 있지만 온 몸이 싹 다 젖는 폭우는 맞아서는 안 된다. 비를 맞고 주행을 하면 에너지 소모가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 119에 SOS를 요청하다!

주위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하지만 난 야영지를 찾지 못했고 계속 페달을 밟아야 했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이미 오후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오늘은 기필코 해 떨어지기 전에 텐트 치고 자겠다고? 캠핑 특별식으로 김치찌개를 해 먹겠다고? 이래가지고?'

아침에 한 다짐들은 이미 물 건너 간 상태였다. 소나기 때문에 시간을 너무 지체한 탓에 또 일정이 어그러진 것이다. 한우로 유명한 횡성에 왔으니, 고기로 배를 채울 수 있다는 생각에 콧노래를 불렀건만! 그저 탄식만 뿜어져 나올 뿐이었다.

"죄송하지만 근처에 텐트 칠 만한 곳이 있을까요?"

횡성군 공근면에 도착한 후 이리저리 헤매다 소방서를 찾아들어간 것이다. 소방서에는 야간근무를 하시는 분들이 계셨다. 그 분들은 필자를 보고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필자를 불청객으로 봤던 거 같다. 하지만 119는 119였다.  

"음… 아, 맞다. 거기 가시면 되겠네요. 여기서 한 3km 정도 위쪽으로 올라가면 캠핑할 때가 있을 거예요."
"사람이 많은 곳인가요?"
"아니요. 너무 사람이 안 와서 탈이죠. 가면 깜깜해서 무서울지도 모르는데…."
"괜찮습니다. 저는 차라리 한적한 곳이 좋더라고요."
"근데 문제가 있어요. 거기 가려면 좀 헤매실 수 있을 텐데요…."

문제가 있긴 있었다. 그곳은 동네 주민 분들만 아는 곳이었다. 그래서 길 찾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더군다나 불빛 하나 없는 곳이라 방향잡기가 난감했다.

"이거 보면서 하면 되겠네. 와보세요. 여기 모니터 좀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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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계천 119분들 덕택에 하룻밤 느긋하게 야영을 할 수 있었다. 사진은 횡성군 공근면을 흐르는 금계천이다. 금계천은 대관대천과 합수되어 섬강을 이룬다. 섬강은 원주를 휘돌아 나가다 경기도 여주에서 남한강에 합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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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119는 119였다. 고맙게도 지도 보기를 통해 필자가 가야하는 곳을 일일이 찍어주었던 것이다.

"여기 보세요.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마을이 나오는데, 그 마을은 그냥 지나치시고 앞으로 쭈욱~ 직진하시다보면 그곳이 나올 겁니다."

그냥 말만 들었으면 한참을 헤맸을지 모르지만 위성지도를 보면서 설명을 들으니 훨씬 이해가 빨랐다. 119가 응급환자만 이송하는 것이 아니었다. 필자 같은 난관에 봉착한 여행자도 '응급구조'를 한 것이다. 정말 감사했다.

염치불구하고 커피까지 한 잔 마신 후에 소방서에서 빠져 나와 목적지로 향했다. 지도를 숙지해서 그랬는지 어렵지 않게 그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위는 불빛 하나 없는 그런 곳이었다. 은밀함을 즐기는 연인들이 이용하기 딱 좋은 장소였던 것이다. 앞에는 강물이 흐르고 주위는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어쨌든 그렇게 여행의 이틀째가 마무리됐다. 텐트를 치고 김치찌개를 떠올리며 콘플레이크로 늦은 저녁을 때웠다. 내리 4끼를 행동식으로 해결한 것이다. 그러다 병나지! 한 두 끼도 아니고. 그러다 진짜 병이 났다.

병이 난 이야기는 다음편에….

 

 

 

 

 

 

 

 

 

 

 

[중부내륙자전거여행 3편] 아웃도어 스펙 조작하기

여행 후기, 걸러서 보세요

13.12.16 15:40   최종 업데이트 13.12.16 15:40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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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계천 강원도 횡성군 공근면 금계천에서 캠핑을 했을 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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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2일째 : 2013년 8월 16일


강원도 춘천시 동산면을 출발한 필자는 홍천을 거쳐 횡성군으로 방향을 잡았다. 당시 여행일지를 찾아보니 낮 12시에 출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전날 야간주행의 여파로 너무 밤늦게 잠이 든 게 원인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아직 몸상태가 장거리 자전거 여행에 적합할 정도로 달아오른(?) 것도 아니었으니 삭신이 다 쑤실 정도였다. 그래서 필자는 묘한 신음 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아~ 정말 적응 안 되네. 몇 년을 달렸어도 여행 첫날이랑 그 다음날은 죽음이란 말이야! 오늘은 기필코 해 떨어지기 전에 텐트 치고 자야지. 오늘 저녁은 두부 송송 썰어서 김치찌개 해먹어야겠다. 푸하핫! 오늘은 캠핑 특별식이다!'

 

 

# '사흘 갈 길 하루에 갔다, 열흘 앓아눕는다'


'사흘 갈 길 하루에 갔다, 열흘 앓아눕는다'라는 속담이 있다. 한마디로 과유불급이라는 소리다. 그렇다. 이 속담은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여행자들이 깊게 새겨 들여야 하는 격언일 것이다. 그건 자전거 여행이든 도보 여행이든 마찬가지다. 자신의 체력, 장비의 한계 등을 고려하지 않고 "진격! 진격"만 외치다가는 큰 코 다치게 된다. 여행을 통해 하나라도 배워가야지 여행이 '중노동'으로 변질된다면 곤란해진다.

스스로에게 적합한 일일 적정 주행거리를 설정하고 그것에 맞춰 이동을 한다면 보다 더 즐겁고 재밌는 여행이 될 것이다. 필자가 생각하는 일일 적정 이동거리는 자전거 여행일 때는 50~60km, 도보 여행일 때는 20~25km이다. 둘 다 취사와 캠핑장비로 완전무장한 상태를 가정한 것이다.

자전거 여행일 때는 자전거에 주렁주렁 매달 수 있어서 상황이 좀 낫다. 하지만 도보 여행일 때는 거의 20kg에 육박하는 무거운 배낭을 온전히 자신의 신체만으로 버텨야 한다. 그래서 장거리 도보 여행을 떠날 때는 5~6일을 이동했으면 하루 정도는 휴식을 취하는 식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좀 더 여유롭게 여행을 진행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위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은 객관성보다는 주관성에 기울어져 있다. 필자의 경험과 아웃도어 선배들의 의견들을 한 데 모아서 정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자신의 체력이 좋으면 하루에 100km 이상을 주행할 수도 있고, '천리행군' 빰칠 정도로 수십 킬로를 이동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행이라는 고유의 특색이 중노동으로 변질되지 않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이동을 할 수 있는 타협책이 바로 일일 적정 이동거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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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잿골터널 홍천군 북방면에서 홍천 읍내를 향해 갈 때 이용했던 잿골터널. 보행자의 편의를 위해 한쪽에 보행자 통행로가 있다. 방음벽까지 갖춘 보행자 통로가 인상적이어서 한 컷 찍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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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리어 '뻥튀기'의 유혹


전에 어떤 유명 여행 블로그를 눈팅하면서 혀를 찬 적이 있었다. 4개월 동안 무려 1800km의 거리를 도보로 이동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한 여름인 6월에서 9월 사이에 그랬다는 것이다. 억지로 하면 할 수도 있을 듯싶지만 그래도 필자의 머릿속에서는 물음표가 떠나지 않았다.

'이 분은 장맛비가 오고 태풍이 불어도 트레킹을 하셨나? 한 여름에는 제대로 아웃도어를 할 수 있는 날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이 신규 진입을 하는 여행판. 더 정확히는 여행작가판에서 치열한 경쟁은 불가피한 면이 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자신의 스펙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하려고 무진 애를 쓸 수밖에 없다. 그건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도 마찬가지다. 한 곳이라도 여행지를 더 다니려고 발품을 팔고, 글감을 뽑아내려고 에피소드 찾는 데 혈안이 된다.

그런 와중에 유혹도 생긴다. 커리어를 '뻥튀기'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아웃도어 스펙을 조작하는 것이다. 500km짜리 도보여행을 했는데 거기에 한 300km를 더 붙여서 800km 정도로 늘려 잡는 것이다. 딱히 검증할 수단이 없기 때문에 500이 고무줄처럼 800으로 늘어난다고 해도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500보다는 800이, 5000보다는 8000이 더 장사가 잘 되는 법이다. 5000을 뛴 것보다는 8000을 뛰었다고 하면 방송이나 언론에서 더 주목을 받지 않겠는가? 카메라는 조금이라도 더 드라마틱한 그림을 요구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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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천강 강원도 홍천군을 흐르고 있는 홍천강. 이 강은 북한강의 지류이다. 앞쪽에는 강이 흐르고 뒤로는 산이 있는 곳에 들어선 아파트가 눈에 띄어서 한 번 찍어보았다. 그러고보면 이곳도 강변아파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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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맥락으로 원웨이(편도) 티켓만으로 세상을 누볐다는 이야기도 필자는 물음표를 붙인다. 이런 식으로.


'여비나 생활비는 그렇다 쳐도, 비자 받을 때도 공짜로 받을 수 있나?'

누군가는 필자에게 이렇게 질책을 하실 수도 있겠다.

"너는 그렇게 잘났냐? 넌 네가 주장하는 커리어가 딱 일치하냐? GPS로 다 찍어봤어?"

솔직히 할 말이 없다. GPS로 다 찍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필자의 GPS는 싸구려라서 그런지 기록이 고무줄로 나온다. 간간이 종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아웃도어 여행을 하는 필자가 왜 이런 제살 깎아먹기(?) 식의 발언을 하고 있는가. 커리어 '뻥튀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필자가 왜 이런 동업자 정신에 반하는 짓을 하고 있는가. 이런 주문을 드리고 싶어서다.

'걸러서 보세요. 너무 액면 그대로 믿지 마시고! 아웃도어도 따라쟁이 식으로 하지 마시고 주체적으로 하자고요!'

 

 

 

 

 

 

 

 

 

남도답사 1번지, '강진군' 사용법을 소개합니다___2편

 

 

---> 전편에 이어서

 

 

 

# 월출산과 강진 녹차밭

전남 영암과 강진 사이에 걸쳐 있는 월출산(月出山, 809m)은 예로부터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산이다. 남도의 평야지대에 불쑥 솟아 있는 이 돌 산은 그 모습이 기이하게 생겼다.

예전 자전거여행을 할 때 영암의 외곽 지역을 주행한 적이 있었다. 길을 잘못 들어 자동차 전용도로를 타고 이동을 했을 때다. 한적해서 그랬는지 차들은 그곳을 '아우토반'처럼 질주했다. 필자도 이에 질세라 열심히 페달을 굴렸다. 내리막길이라 속도가 상당했는데 그 옆으로 월출산이 병풍처럼 서 있던 모습이 아직까지도 눈에 선하다.

산 주변의 해발고도가 낮았던 터라 월출산의 모습은 더더욱 두드러졌던 것이다. 땅에서 불쑥 튀어 나온 듯한 돌산을 옆으로 끼고 빠른 속도로 주행할 때의 그 쾌감이란! 하지만 그런 쾌감도 적당히 즐겨야 한다.

"허어, 이러시다 큰 사고 납니다. 여기 자동차 전용이에요. 그러다 딱지 뗄 수도 있어요."

경찰 아저씨한테 이런 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니까. 다행히 그때 필자는 딱지를 안 뗐다.

그처럼 기이한 형상을 한 월출산은 많은 문인들의 음유의 대상이었다. 월출산을 노래한 이중에는 매월당 김시습도 포함되어 있다.

'남쪽 고을의 한 그림 가운데 산이 있으니, 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이 산간에 오르더라.'

천재 시인답게 월출산의 모습을 제대로 간파하는 시문을 남겼던 것이다. 매월당의 시처럼 월출산은 달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산이다. 다산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유배시절 다산 선생은 월출산 옥판봉 일대를 오르셨는데 그 풍광에 크게 심취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제자로 하여금 옥판봉 일대의 모습을 화첩으로 그리게 하셨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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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다원 월출산과 어우러진 녹차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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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남사지 석탑 강진다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월남사지 터가 있다. 그 곳에 서 있는 월남사지 석탑. 백제계 양식의 석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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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판봉이 보이는 곳에는 강진 다원이라는 큰 녹차밭이 있다. 옥판봉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드넓게 펼쳐진 강진 다원은 보성 녹차밭과는 또 다른 멋이 있다. 녹색의 녹차밭과 돌산인 월출산의 모습이 서로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월출산 일대는 예로부터 차 재배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일조량, 일교차 등이 차를 재배하기에 최적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다산 선생은 월출산에서 나온 차 맛이 으뜸이라고 평가 했을 정도로 이곳에서 자란 차를 좋아하셨다고 한다.

강진 다원 양 옆으로 자리 잡은 백운동과 그 숲길, 월남사지터에 있는 월남사 3층 석탑도 빼놓을 수 없는 탐방 명소이다. 이런 명소들은 삼남길 8코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 다산초당

강진과 관련된 여행기에 다산초당이 빠지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다산초당과 관련된 기사는 많이 게재가 됐기에 여기서는 간략하게 소개한다.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 중턱에 자리 잡은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였다. 다산 선생은 무려 18년 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하셨는데 그중 후반부 10년 정도를 다산초당에서 기거하시며 집필과 후학양성에 매진하셨다.

현재의 다산초당은 한옥이다. 초당이라 하면 초가집이어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은 것이다. 아무래도 현재의 다산초당을 복원하면서, 보다 위엄을 살리기 위해 초가가 아닌 한옥집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다산초당은 만덕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기에 주변이 다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 숲길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다. 초당 위쪽인 만덕산 중턱 부근에는 천년고찰인 백련사가 자리 잡고 있는데 다산 선생께서는 백련사 스님들과도 활발하게 교유하셨기에 그 길을 자주 걸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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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련사 백련사에서 바라본 강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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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면 다산 선생은 차를 즐기셨고, 월출산도 탐방하시고, 백련사의 승려들과도 교유하셨던 풍유객이었던 것 같다. 자료를 찾아보니 다산 선생은 유배시절을 수도승처럼 보내시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산초당 시절에는 살림을 도맡아 했던 과수댁을 들였고, 그 과수댁과의 사이에 딸도 하나 있었다고 한다.

어찌보면 다산 선생은 험난한 유배시절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잘 극복했던 것이 아닐까? 유배지를 창살 없는 감옥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거대한 도서관으로 만들고, 그 일대를 큰 정원처럼 산책을 하셨던 것이 아닐까?

남도답사 1번지 강진군 사용기는 여기까지다. 사실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곳들을 여러번 탐방했었다. 자전거여행 중에 들르기도 했었고, 삼남길 개척 작업을 할 때도 방문했었다. 또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여행기로 작성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이 여행기는 예전 남도이야기의'재탕'인 셈이다.

하지만 필자는 계속 '재탕'을 할지 모른다. 앞으로도 계속 남도로 트레킹을 떠날 예정이기 때문이다. 무궁무진한 이야기 창고와도 같은 남도! 그런 남도에서는 뿌리는 같지만 다른 꽃을 피우는 이야기들이 만발한다. 이렇게 스토리텔링이 넘쳐나는 남도는 필자에게 소중한 이야기 창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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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초당 가는 길 다산유물전시관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숲길. 길 자체가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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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이진성터
1. 이진성터는 삼남길 3코스에 있음.
2. 삼남길 3코스: 약 10km【서홍마을 → 이진성터(이진우물) → 남창리숲길 → 차경마을】
3. 강진시외버스터미널에서 차경마을까지 가는 버스를 이용함. 차경마을에서 역순으로 이동하는 방식도 좋음. 차경마을은 해남군 북평면 면사무소와 인접해 있음.

* 강진 다원
1. 강진다원은 삼남길 8코스에 있음.
2. 삼남길 8코스: 약 14km【달마지마을 → 월하마을회관 → 강진 다원(백운동) → 월남사지3층탑 → 누릿재 → 천황사입구(전남 영암군)】
3. 강진시외버스터미널에서 월남사지행 버스를 이용함. 하루 6편 운행.

* 다산초당
1. 다산초당은 삼남길 6코스에 있음.
2. 삼남길 6코스: 약 12km【다산수련원 → 다산초당 → 백련사 → 춘곡마을 → 기룡마을앞 도로 → 초동마을회관 → 영랑생가】
3. 강진시외버스터미널 다산초당행 버스를 이용함. 하루 6편 운행.

 

 

 

 

 

 

 

 

 

 

남도답사 1번지, '강진군' 사용법을 소개합니다___1편

빼어난 갈대밭 코스, 빠질 수 없는 다산초당 등...남도의 매력

13.12.06 14:16l최종 업데이트 13.12.06 17:52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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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항 이진성터 위쪽 언덕배기에서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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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즐겁다. 산, 들, 바다가 서로 어우러진, 그런 아기자기한 남도의 풍광들을 벗 삼아 길을 걷다보면 발걸음도 가벼워진다. 그렇게 걷다가 허기가 지면 푸짐한 남도 음식으로 배를 채울 수도 있다. 자, 그럼 아기자기한 풍광 속에서 즐겁게 트레킹을 할 수 있는 남도로 떠나보자!

필자가 찾은 곳은 전남 강진군이다. '남도 답사 1번지'라고 불리는 강진군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다산 선생은 만덕산 기슭에다 다산초당을 짓고 그곳에서 집필 활동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강진에서 무려 20년 가까이나 생활 하셨던 만큼 강진 곳곳에는 다산 선생의 자취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런 자취를 따라서 강진을 찾는 이들도 많다. 그런 모습을 보면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다.

'정약용 선생이 강진을 먹여 살리고 있다!'

 



# 정약용과 강진

물론 비약이 심한 말이다. 그래서 필자에게 손가락질을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산 선생이 강진에 유배를 오지 않았다면, 강진이 '남도답사 1번지'라는 수식어를 부여받을 수 있었을까? 만약 다산의 자취가 없었다면, 굳이 강진으로 답사 여행을 떠날 필요가 있을까? 한편 다산 선생의 생가가 경기도 남양주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은 반면, 그의 유배지가 강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드물다는 것도 필자의 주장에 힘(?)이 실릴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여행기의 거점은 강진군 버스터미널이다. 강진군은 해남, 장흥, 영암과 인접해 있어 남도여행에 중심축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래서 강진터미널에서는 인근지역으로 연결되는 시골버스들이 꽤 많은 편에 속한다. 위에서 언급한 주변지역 뿐 아니라 완도군에 있는 약산면(조약도) 당목항까지도 연결된다. 당목항까지 가는 버스는 남도 섬 여행 버스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그만큼 아름다운 다도해 해상을 시원하게 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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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진항 이진항은 작고 아담한 포구다. 앞에 보이는 섬은 완도군의 달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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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군 북평면에 있는 이진성터도 강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여 도착했다. 북평면은 완도대교가 있기 때문에 완도로 진입하려면 반드시 이곳을 거쳐야 한다. 북평면 면사무소가 있는 곳에서 이진성터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현재 이진성터는 삼남길 전남구간 3코스(해들길)에 놓여 있다.

 


# 삼남대로의 내륙 종착점, 해남 이진성

여기서 잠깐 삼남길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해보겠다. 삼남길은 옛 삼남대로를 계승한 길로 도보여행을 하기에 적합한 트레일(trail: 오솔길, 소로길)이다. 특히 전남구간(14개 코스, 228km)은 남도를 종단하기에 코스 하나하나가 다 명품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옛 삼남대로는 한양 숭례문에서 시작하여 제주도까지 연결되었던 길이다. 그 길을 따라 관헌들은 부임지로 말을 몰았고, 보부상들은 장마당으로 발걸음을 분주히 옮겼다. 정약용·정약전 형제가 눈물을 흘리며 유배지로 향했던 길도 바로 옛 삼남대로였고, 권좌에서 쫓겨난 광해군이 제주도로 유배를 갈 때 걸었던 길도 삼남대로였다. 그렇듯 삼남대로는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삼남대로는 그 자체가 역사의 현장이었던 셈이다.

이진성은 옛 삼남대로의 내륙 종착지였다. 이진성은 삼포왜란과 임진왜란 이후 그 전략적 가치가 높아져 숙종 임금 시기에 수군만호부가 개설된 곳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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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룡능선 이진항에서 바라본 해남의 공룡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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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성은 종점이자 시작점이기도 했다. 해남에서 제주도로 가는 관선의 출항지가 이곳 이진항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이곳에는 작은 포구가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이 항구에서 제주도로 향하는 배가 입·출항을 했다.

그래서 아직도 이 항구 곳곳에는 제주도에서 실어온 돌(현무암)들이 널려있다. 이 현무암들은 제주도에서 군마를 실어올 때 균형축 역할을 했던 돌들이다. 항해에 익숙지 않은 말들이 선내에서 요동을 치면 자칫 배가 전복될 수 있기에 일부러 돌을 실어 배의 총중량을 늘렸던 셈이다. 역할을 다한 돌들은 이진항에 버려졌고 그 자리에는 남도의 곡식들이 선적됐다.

앞서 언급한 북평면 면사무소 일대는 조선시대 남창이라는 창고가 있던 자리다. 남창은 제주도에서 수취한 공물들을 모아두었던 곳인데 이진성과는 불과 1km 남짓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한마디로 이진성과 남창은 한 테두리로 묶일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인 의미 외에도 이곳은 빼어난 갈대밭 트레킹 코스를 자랑한다. 가을 억새밭 산행과는 다른 느낌의 갯벌 갈대밭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갈대밭을 따라 걷다보면, 오른쪽으로는 바다 너머 완도 본섬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유명한 해남의 공룡능선을 보며 느긋하게 트레킹을 할 수 있다. 바다, 산, 섬 그리고 갈대가 어우러진 풍광은 도보여행자들의 마음속을 시원하게 적셔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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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운동 백운동 정원은 담양 소쇄원, 보길도 부용정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정원으로 불린다. 다산 선생은 월출산을 탐방하면서 백운동에서 며칠을 머무셨다. 한마디로 백운동을 베이스캠프 삼으셨던 것이다. 백운동의 숲에 감탄하셨던 다산 선생은 13편의 시를 지었고, 제자였던 초의선사에게 백운동 일대를 그림으로 그리게 하셨다. 그렇게 작성된 화첩이 지난 2001년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백운첩이라는 이름으로. 초가집 위로 단풍이 곱게 든 모습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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