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샛강생태공원: 여의도의 숨어 있는 진주 샛강생태공원.

 

 

 

 

 

 

 

 

* 코스명: 여의도샛강길

 

 

* 이동경로: 당산역 ▶ 선유도 ▶ 샛강(여의도) ▶ 한강대교 ▶ 한강텃밭

 

* 역사유적: 선유도, 절두산 성지, 한강대교, 한강철교, 양화대교

1. 선유도(선유봉): 근대화 이전 시기의 한강 하구에 대한 설명. 선유도의 불운의 역사 설명.

2. 절두산(잠두봉): 선유봉과 잠두봉을 엮어서 설명. 절두산 성지에 대한 이야기 설명.

3. 한강대교, 한강철교, 양화대교: 각 다리에 얽혀 있는 이야기 설명.

4. 그 외: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한강 텃밭

 

 

* 이동거리: 약 8.5km

 

 

* 예상 소요시간: 약 3시간(쉬는 시간 포함 등)

 

 

* 난이도: 하 ---> 초보자 가능

 

 

* 방향찾기: 표지판 있음. 한강, 여의도에 위치한 길이라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음.

 

 

* 이용불가 계절: 없음. 4계절 이용 가능함.

 

 

* 특이사항: 당산역에서 샛강생태공원으로 이동할 때 자전거를 조심해야 함.

 

 

* 교통편: 서울 지하철 2호선 당산역을 이용. 트레킹을 마친후에는 한강대교 근처에 있는

        지하철 9호선 노들역을 이용할 수 있음.

 

 

 

 

 

 

 

 

 

 

* 여의도 샛강길: 여의도 샛강 트레킹 코스 지도.

 

 

 

 

 

 

 

 

* 절두산 성지: 절두산은 직접 가지 않고, 양화대교에서 구두로 설명한다.

 

 

 

 

 

 

 

* 양화대교: 선유도에서 바라본 양화대교

 

 

 

 

 

 

 

 

* 샛강생태공원: 생태공원에는 저렇게 흙길이 있다.

 

 

 

 

 

 

여의도샛강 역사트레킹 후기 보러 가기

 

---> 클릭

 

 

 

 

 

 

 

* 백련사: 백련사에서 바라본 강진만

 

 

 

 

 

 

* 천일각: 다산초당에서 백련사 가는 길, 위쪽에 있다. 다산 선생 유배시절에는 없었던 것인데 선생의 뜻을 기려 후대에 세운 것이다.

 

 

 

 

 

* 다산초당 가는 길: 다산유물전시관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 숲길. 길 자체가 매력적이다.

 

 

 

 

*백운동: 백운동 정원은 담양 소쇄원, 보길도 부용정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정원으로 불린다. 다산 선생은 월출산을 탐방하면서 백운동에서 며칠을 머무셨다. 한마디로 백운동을 베이스캠프 삼으셨던 것이다. 백운동의 숲에 감탄하셨던 다산 선생은 13편의 시를 지었고, 제자였던 초의선사에게 백운동 일대를 그림으로 그리게 하셨다. 그렇게 작성된 화첩이 지난 2001년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백운첩이라는 이름으로. 초가집 위로 단풍이 곱게 든 모습이 인상적이다.  

 

 

 

 

 

 

* 강진다원: 월출산과 어우러진 녹차밭.

 

 

 

 

 

*월남사지 석탑: 강진다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월남사지 터가 있다. 그 곳에 서 있는 월남사지 석탑. 백제계 양식의 석탑이다.

 

 

 

 

 

 

 

* 이진항: 이진항은 작고 아담한 포구다. 앞에 보이는 섬은 완도군의 달도다.

 

 

 

 

 

* 이진항: 이진성터 위쪽 언덕배기에서 찍은 사진이다.

 

 

 

 

 

* 공룡능선: 이진항에서 바라본 해남의 공룡능선

 

 

 

 

 

 

 

 

 

 

 

 

 

 

---> 1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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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도 속초해수욕장에서 바라본 조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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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초해수욕장과 조도

아바이마을을 빠져나오는 곳에서부터 본격적인 해변 트레킹이 시작된다. 거기서부터가 속초 제일의 명소라고 불리는 속초해수욕장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속초 해수욕장은 황토빛 모래사장이 인상적인 곳이다. 약 1km 정도에, 질 좋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새들의 낙원이라고 불리는 조도(鳥島)가 두둥실 푸른 동해바다에 떠있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한다. 더구나 바다 반대편에는 우뚝 솟은 설악산이 내려다보고 있어 여느 바닷가 해우욕장과는 다른 운치를 자아낸다.

사실 속초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은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니다. 느릿느릿 걸어도 30~40분 정도면 끝부분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해운대나 경포대 같은 '광대역' 백사장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성이 안 찰 수도 있다. 하지만 광대역보다는 아기자기함을, 더불어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속초해수욕장에 더 높은 점수를 줄지도 모른다.

속초해수욕장의 끝자락에는 외옹치라는 작은 언덕이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속초해수욕장 일대와 속초 중심부를 조망해 볼 수 있다. 푸른 동해바다의 물결과 황토빛 모래사장이 서로 서로의 배경색이 된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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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옹치 외옹치는 해안가로 툭 튀어나온 형상을 하고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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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옹치와 마도로스 리

속초해수욕장에서 외옹치를 바라다보면 마치 어떤 산 하나가 바닷가를 향해 뛰어들려는 형상이다. 평평한 해안가가 계속 이어지다 외옹치 부근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 나온 모습이라는 것이다. 외옹치(外瓮峙)라는 명칭도 바깥(外)으로 튀어 나온 항아리(瓮) 같은 언덕(峙)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외옹치에는 짧기는 했지만 숲길도 있었다. 속초시 지형도를 보면, 설악산 대청봉에서 동쪽 방면으로 내려온 줄기는 주봉산을 타고 내려오다 바다를 앞에 두고 외옹치가 된다. 즉 외옹치에서는 동해바다와 설악산이 서로 만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지형적인 특색 때문인지 외옹치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된 것이다. 사실 외옹치 해변은 2005년 전까지만 해도 군사용 철책이 들어서서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다. 한편 같은 해에 동쪽에 주둔하고 있었던 군부대도 철수하게 되어 지금의 외옹치의 모습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외옹치 일대에는 해안 방어를 위해 군 초소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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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옹치 외옹치를 배경으로 촬영을 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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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군사시설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외옹치의 안쪽은 덕산이라고 불렸는데 그 곳에 봉수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덕산 봉수대는 북쪽으로는 간성 남쪽으로는 지금의 양양으로 봉화를 연결해주는 곳이었다. 그렇게 오솔길을 타고 가다보면 '마도로스 리' 선생이 살고 있는 집이 나온다. 그 마도로스 선생 뒤편으로는 외옹치항이 있다.

마도로스 선생은 홍게잡이 어선을 타는 분인데 한 번 출항할 때마다 일 주일 정도는 해상에서 보낸다고 한다. 홍게는 심해 1000미터 부근에서 서식하는 터라 어획하기가 무척 까다롭다. 또 한 번 조업에 나서면 하루 20시간 이상 작업을 해야 할 정도로 노동 강도가 무척 세다. 오죽하면 홍게 잡이가 극한직업으로까지 분류될 정도일까! 실제로 '마도로스 리' 선생은 극한 직업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에 여러번 출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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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도로스 LEE 외옹치와 대포항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다. 그 힘들다는 홍게 잡이 배를 탄다고 한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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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고 아담한 외옹치항

외옹치에서 오랫동안 거주했다는 마도로스 선생은 사람이 좋아서 그런지 자신의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따뜻한 차 대접을 아끼지 않는 분이다. 외옹치 숲길에서 빠져나오는 길에 집이 있는데 외옹치항으로 길을 잡으려면 반드시 마도로스 선생의 집을 지나쳐야 한다. 그렇게 필자도 차를 대접받았는데 그 분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외옹치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현재 외옹치 마을은 바닷가 쪽이 아닌 도로와 인접한 곳에 밀집되어 있었다. 어촌 마을이라면 조금이라도 바닷가와 가까운 곳에 집을 지어야 이치에 맞을 텐데 그렇지가 않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1984년에 있었던 수해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1984년에 있은 수해로 인해 산사태가 나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그 이후 마을은 보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을 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당시 수해는 외옹치 마을의 어로 활동에도 큰 변화를 주었다. 1984년 이전에는 '뗀마'라고 불리던 무동력선을 타고 문어를 잡는 재래식 어로 작업을 많이 했다. 하지만 수해복구와 함께 항구도 현대식으로 탈바꿈했고, 무동력선도 동력선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재래식 어로 활동도 자취를 감추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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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옹치항의 야경 철책선 위로 불빛이 비취고 그 반대편에는 보름달이 떠올랐다. 동해바다와 어루어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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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외옹치항에는 어선들이 입출입을 하지 않는다. 외옹치항을 입출입하는 어선들은 항구 앞에 꾸려진 난전 식당들에 싱싱한 수산물을 공급했는데 그만 그 식당들이 올 겨울에 화재로 다 소실됐기 때문이다. 약 10채에 달하던 외옹치 난전들이 싹 다 소실될 정도로 큰 화재였다고 한다. 수산물의 판로가 없으니 항구에 배들은 인근 지역으로 옮겨 갔다고 한다.

1984년에 있은 큰 수해를 극복했던 외옹치이기에 이번에도 그런 곤경을 잘 극복할 것이다. 실제로 화마의 상처가 깊던 식당가는 올 겨울 재개장을 앞두고 한창 공사중에 있었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고깃배가 직접 잡아온 싱싱한 수산물을 바로 맛볼 수 있는 외옹치 난전이 다시 개장할 것이다. 그러면 작고 아담한 외옹치 항구는 예전처럼 다시 활기를 찾을 것이다.

# 유명한 대포항 수산시장

외옹치에서 유명한 대포항까지는 약 1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실제로 행정구역 상 외옹치는 대포동에 속한다. 대포항은 어시장이 잘 발달되어 속초 최고의 항구로 손꼽힌다. 최근에 현대화 공사가 끝나 대포항은 항구와 어시장이 확 바뀌었다. 싱싱한 횟감이 즐비한 어시장과 말끔하게 정비된 접안 시설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구경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해안트레킹에서 어시장탐방 트레킹으로 변형이 되는 것이다.

대포항 일대를 다 걸어보려면 1시간 이상이 소요될 정도로 항구와 어시장은 큰 규모를 자랑한다. 깔끔하게 단장된 식당들에는 싱싱한 수산물들을 맛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북적인다. 이렇듯 작고 아담한 외옹치 항구와 큰 규모의 대포항이 공존하는 곳이 바로 속초해변트레킹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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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포항 오토바이 오징어. 오토바이에 걸려 있는 오징어의 모습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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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항과 어시장 탐방을 마치면 약 8km에 달하는 속초해변트레킹이 종료가 된다. 사실 8km는 트레킹을 하기에는 짧은 거리이다. 2시간 정도면 완료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시간 만에 속초해변트레킹을 마무리 짓기는 힘들 것이다. 멋진 풍광과 함께 힘차게 들려오는 파도소리에 취하다보면 자꾸 발걸음이 멈춰지기 때문이다.

그런 아름다운 광경 앞에서 도보 여행객의 상처와 시름은 어느 순간 동해바다에 실려 멀리멀리 사라졌을지 모른다. 물론 도시로 돌아와 일상에 찌들면 그 상처와 시름들이 다시 몰려올 수도 있겠지. 그럼 그때마다 쉽게 변하지 않는 것들을 되새겨 보는 것이다. 설악산의 상록수, 외옹치를 감싸는 푸른 동해바다...

아직 후배는 속초행 고속버스에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은근히 필자와 함께 가길 원하는 것 같다. 기회가 닿는다면 함께 가도 좋을 것이다. 그럼 속초해변 역사트레킹이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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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초해변트레킹 코스 빨간색으로 그려진 부분으로 이동한다. 이동거리는 약 8km 정도다.


● 도움말
1. 서울 동서울터미널 기준으로 속초 시외버스터미널까지 약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속초에는 고속버스터미널도 있는데 그 곳은 속초해수욕장 입구 부근에 있다.

2. 대포항에서 트레킹을 마친 후에는 7번 국도쪽 나와서 시내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돌아올 수 있다. 버스 노선이 많기 때문에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3. 춘천에서 속초까지는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춘천 같은 강원도 서부 내륙지역도 속초까지 가는 것이 부담스럽지가 않다.

 

 

 

 

 

 

 

 

 

 

 

 

 

 

추울수록 동해바다로 1편

동해바다와 함께 하는 속초해변 트레킹

13.11.29 11:32l최종 업데이트 13.11.29 11:32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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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초해수욕장 황토빛 모래사장과 푸른 동해바다가 서로의 배경색이 되어 주는 모습이 장관이다. 외옹치에서 바라본 속초해수욕장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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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추운 날에 웬 동해 바다?"

"겨울 바다가 운치도 있잖아요. 좀 답답한 것도 있고 해서..."
"난 바다보다는 트레킹 쪽인데..."
"알아요. 그러니까 파도 소리 들으면서 트레킹도 하는 곳, 그런 곳 좀 알려주세요."

이 친구 많이 답답하기는 했나 보다. 이 엄동설한 같은 추위에 겨울바다를 보고 싶다니! 더군다나 파도소리를 들으며 트레킹을 2시간 정도 하고 싶다고 하는데... 그러다 감기 걸리기 딱 십상이지. 하지만 요즘 같은 때 이른 겨울 추위도 이 친구의 동해 바다행을 막을 수는 없어 보였다. 이제 곧 연말이 다가오는데 이루어 놓은 것이 없이 또 한 해를 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그를 동해바다로 도망(?)치게 한 듯싶었다.

 

 

 

 



# 동해바다가 보이는 속초로 가자!

며칠 전 오랜만에 만난 후배와의 대화 내용이다. 후배도 필자도 삶의 무게 앞에 속절없이 늙어 갔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명제를 거역할 수 없다는 걸, 뼈 속 깊숙이 깨달았을 때였을 것이다. 그 때부터 쉽게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동경이 생겨났다. 산, 바다, 강, 상록수 등등... 너무나 쉽게 변해버리는 것들로 인해 받은 상처를 그런 자연물들로 닦아냈던 것 같다. 한마디로 치유를 했던 것이다.

겨울바다가 보고 싶다는 후배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알고 있는 최적의 해안가 트레킹 코스를 알려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알려준 곳이 바로 강원도 속초시의 속초해변트레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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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옹치 외옹치에는 약간의 경작지가 존재한다. 두 노부부가 경작하는 이 고구마밭은 가을걷이가 끝났다. 고구마밭을 넘어 펼쳐진 속초해수욕장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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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춘천간 고속도로의 개통, 미시령터널의 개통 등으로 이제 속초는 서울에서 2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해안 도시가 되었다. 속초시 관광안내 책자에는 '1시간 40분'이라고 적혀 있다. 그만큼 강원도 해안 도시로의 접근은 용이해졌다. 너무 서울 중심적인 발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속초나 강릉 같은 도시들은 서울의 근교 바닷가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도보여행을 할 수 있는 속초해변트레킹의 시작은 시외버스터미널에서부터 시작된다.

시외버스터미널→ 속초관광수산시장(입구)→ 아바이마을→ 속초해수욕장→ 외옹치→ 대포항

속초해변트레킹은 이런 곳들을 통과하는데 거리는 약 8km 정도 되며, 휴식 시간을 포함하여 약 3시간 정도면 충분히 이동할 수 있다. 시외버스터미널이 있는 시내를 중심으로 속초는 남쪽과 북쪽으로 나눌 수 있는데 속초해변트레킹은 속초시 남쪽에서 이루어진다.

 

 

 

 


# 아바이마을과 갯배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유명한 속초관광수산시장으로 방향을 잡고 가면 아바이 마을이 있는 청호동이 나온다. 아바이 마을은 1·4 후퇴 때 남하했다가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피난민들이 정착한 곳이다. 정착 초기에 함경도 사람들, 특히 노년층이 많았는데 함경도 방언으로 '아바이'가 할아버지란 뜻이기에 아바이 마을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게 됐다고 한다.

속초는 38선 이북에 있던 지역으로 한국전쟁 이전에는 북한 쪽에 속해 있었다. 휴전이 됐을 때, '동쪽의 38선'은 북상했다. 그러나 '서쪽의 38선'은 하강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38선 이북이었던 속초는 현재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2시간이지만, 38선 이남이었던 개성은 아무나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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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로 설악대교 밑으로 새롭게 난 수로. 예전에는 이 곳이 바게트 빵처럼 길게 늘어진 육지였다. 하지만 그 곳에다 새롭게 수로를 냈다. 그래서 이 수로가 개통되기 전에 사진과 현재의 모습과는 차이가 난다. 설악대교 넘어로 보이는 산은 설악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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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대교 수로가 생기기 전에 모습이다. 가운데 있는 다리가 설악대교이고 다리 위, 아래로 있는 동네가 아바이마을이 있는 청호동이다. 수로가 생기기 전에는 사진에서처럼 아바이마을에도 모래사장이 있었다. 수로가 생긴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포털에 있는 위성 사진은 옛날 모습을 담고 있다. 빨리 업데이트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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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실향민들은 조금이라도 고향에 가까운 곳에다 삶의 터전을 잡았던 것이다. 함경도 도민들이 집단으로 생활을 하다 보니 그곳에는 전통적인 속초지역의 문화와는 다른 음식문화와 언어문화가 자리잡게 됐다. 그런 음식문화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바이순대와 오징어순대다.

동네 떡볶이집에서 파는 일반적인 순대는 돼지 창자 속에 당면을 넣지만 아바이순대는 찹쌀과 선지 등을 넣어 독특한 맛을 낸다. 오징어순대도 마찬가지다. 옛날부터 강원도를 비롯한 동해안 지역에서는 돼지가 귀해 오징어를 이용하여 순대를 만들어왔다. 그런 방식의 오징어순대가 아바이마을에서는 함경도식으로 변형이 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입가에는 군침이 흐르고 있다. 아바이마을에서 맛 본 오징어순대가 입가에 맴돌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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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갯배 배 삯이 200원인 갯배. 시내 중심부와 아바이 마을을 연결해주던 갯배는 이제 속초의 또다른 명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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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이마을이 있는 청호동은 트레킹을 하기에 적합한 곳은 아니다. 그냥 동네 주택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초에 가면 한 번쯤은 꼭 가볼 곳인데다 청호동과 중앙동을 이어주는 설악대교에서 바라보는 속초 시내의 모습이 장관이기에 속초해변트레킹 코스에 포함시켰다.

한편 아바이마을에는 '갯배'라는 또 하나의 명물이 있다. 갯배는 중앙동과 아바이 마을이 있는 청호동을 이어주는 무동력 선을 말한다. 양쪽 선착장에 걸려 있는 밧줄을 끌어 당겨 그 힘으로 이동을 하는 것이다.

아바이마을은 육지 속의 섬과 같은 형상이다. 그래서 이 갯배가 없었다면 5분 정도 걸릴 거리를 30분 정도 돌아가야 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설악대교(2003년 개통)와 금강대교(2013년 7월 임시개통)가 건설되어 이 갯배가 없어도 시내로 들어갈 수 있지만 그 전에는 이 갯배가 아바이마을 사람들의 다리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한편 이 갯배의 배 삯은 200원이라 부담이 없어 좋다.

 

 

 


 

* 마도로스 LEE: 외옹치와 대포항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다. 그 힘들다는 홍게 잡이 배를 탄다고 한다.

 

 

 

 

 

* 속초해변트레킹 코스: 빨간색으로 그려진 부분으로 이동한다.

 

 

 

 

*갯배: 배 삯이 200원인 갯배. 시내 중심부와 아바이 마을을 연결해주던 갯배는 이제 속초의 또다른 명물이 되었다.

 

 

 

 

 

* 조도: 속초해수욕장에서 바라본 조도.

 

 

 

* 외옹치항의 야경: 철책선 위로 불빛이 비취고 그 반대편에는 보름달이 떠올랐다. 동해바다와 어루어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 수로: 설악대교 밑으로 새롭게 난 수로. 예전에는 이 곳이 바게트 빵처럼 길게 늘어진 육지였으나 작년에 새롭게 수로를 개통했다. 그래서 이 수로가 개통되기 전에 사진과 현재의 모습을 보면 차이가 있다. 설악대교 양편으로는 유명한 아바이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설악대교 넘어로 보이는 산은 설악산이다.

 

 

 

* 외옹치: 외옹치는 해안가로 툭 튀어나온 형상을 하고 있다.

 

 

 

*속초해수욕장: 외옹치에서 바라본 속초해수욕장. 황토빛 모래사장과 푸른 동해바다가 서로의 배경색이 되어 주어 더 아름다워 보인다.

 

 

 

* 속초해수욕장

 

 

 

*대포항: 오토바이 오징어. 오토바이에 걸려 있는 오징어의 모습이 흥미롭다.

 

 

 

* 외옹치: 외옹치를 배경으로 촬영을 하는 모습.

 

 

 

* 설악대교: 수로가 생기기 전에 모습이다. 가운데 있는 다리가 설악대교이고 다리 위, 아래로 있는 동네가 아바이마을이 있는 청호동이다.  수로가 생기기 전에는 사진에서처럼 아바이마을에도 모래사장이 있었다. 수로가 생긴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포털에 있는 위성 사진은 옛날 모습을 담고 있다. 빨리 업데이트가 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전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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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목사님 필자 같은 가난한 여행객에게 따뜻함을 선사해 주신 분이다. 사진에 나온 녀석들은 전 목사님을 큰 아버지라고 부른다. 보라색 옷을 입은 꼬마 숙녀는 내게 '모르는 아저씨한테 함부러 이름 알려주는 거 아니에요'라며 도도함을 드러냈었다. 하지만 사진을 찍자고 하니 저렇게 활달한 포즈를 취해주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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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님은 센스쟁이

여러번 공을 치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은 춘천시 동산면 조양리라는 곳이었다. 이곳 마을회관 앞쪽에 공간이 있어 그곳에다 텐트를 치려는데 걸림돌이 하나 있었다. 그 공간 바로 앞이 이면 도로였던 것이다. 텐트가 도로 바로 옆에 설치되는 형상이었다. 그런 난감한 상황이 전 목사님의 배려로 한 방에 해결됐다. 목사님은 센스쟁이!

그렇게 하여 여행 첫째 날은 무사히 넘길 수가 있었다. 야음을 틈타(?) 전 목사님의 교회 앞마당에서 시원하게 샤워를 했다. 대충 콘플레이크로 저녁을 떼운 후, 시계를 보니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그곳에서 이장님 같은 목사님을 뵙지 못했다면 영락없이 날 밤을 지새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음날.

전 목사님이 티타임이나 갖자며 교회로 초대를 해주셨다. 전날 들이닥쳤던 도보 순례단은 이미 떠나고 없던 터였다.

"작년 겨울인가, 그때도 학생들이 우리 교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간 적이 있어요."
"그때도 도보여행자들이었어요?"
"그랬어요. 대학생 두 명이서 도보 여행을 하는데 우리 교회로 왔더라고요. 겨울이라 해는 빨리 졌고, 갈 곳은 없고 했는데 마침 교회가 있어서 그냥 무작정 들어왔대요."
"그 친구들도 무척 준비가 안 된 상태였나 보네요."
"그랬던 것 같아요."
"아무리 그래도 아무나 막 다 받아주실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어쩌겠어요. 날씨는 춥고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또 1층은 공간이 넓어서 여러 명이 와도 다 잘 수 있어요."

아침에 기상해서 주위를 살펴봤는데 그곳 근처는 논과 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지도를 보니 동산면은 춘천시에 속했지만 지리적으로는 홍천군에 더 가까웠다. '되도록이면 춘천 도심지에서 멀리 벗어나보자'라는 첫날 계획이 맞아 떨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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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통 춘천시도 시가지만 벗어나면 전원의 풍경이 펼쳐진다. 홍천군과의 경계 지역에서 찍은 벌통들이다. 원거리에서 찍어 화질이 선명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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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이 '전두환 코드'

"목사님. 그런데 걸려 있는 사진들을 보니까 젊은 시절에 유학을 다녀오셨나 봐요."
"맞아요. 젊었을 때 독일에 좀 있었어요."

1980년대 목사님 내외분은 슈투트가르트에서 오랫동안 유학을 하셨다. 목사님은 신학, 부인은 성악을 공부하셨다고 한다.

"그때는 참 답답하고 징글징글 했지."
"뭐가요?"

그때 사모님께서 필자에게 빵을 건네주시며 말씀하셨다.

"전두환 때요. 요즘 젊은이들은 그걸 아나 모르겠네."
"이분은 알 거 같은데. 87년에 선거가 그렇게 끝나고 나니까 독일 친구들도 이상하게 이야기를 했었지."
"하여간 그 꼴 보기 싫어서... 아니 내가 손님 앞에 두고 쓸데없는 말을 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
"사모님 괜찮습니다. 저는 여행중에 만난 분들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걸 좋아해요. 또 그런 걸 여행기로 쓰기도 하고요."

젊은 시절 '외국물'을 드셔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목사님 내외분은 환갑 언저리에 연배가 놓여있었음에도 필자에게 고리타분한 '설교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런 편안한 분위기가 좋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커피가 맛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연거푸 커피 리필을 요청했다. 주는 거 없이 받기만 하는 게 '거시기'해서 필자는 썰렁한 농담을 하나 띄었다.

"이 빵이랑 커피 그 분한테 갖다 줄까 봐요. 29만 원 밖에 없다니까 얼마나 배고프겠어요."

필자는 전 목사께서 어떤 방식으로 교회 사역을 하는지 잘 모르고 묻지도 않았다. 더불어 그 분의 정치적, 사회적 견해가 어느쪽에 맞춰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 역시 알 필요가 없는 사안이다. 하지만 목사님 내외분과 나는 전두환에 대한 '코드'가 정확히 일치하였기에 서로 느긋하게 환담을 나눌 수 있었다. 당시 뉴스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 비자금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이런 맛에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판 모르는 분들과 차를 마시며, 또는 술잔을 기울이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다는 것. 그게 여행의 또다른 매력이 아니겠는가.

 

 

 

 

 

 

 

 

 

자전거 여행서 만난 목사님, '전두환 코드'로 통했네

[중부내륙자전거여행②] 춘천에서 만난 센스쟁이 목사님

13.11.25 10:17l최종 업데이트 13.11.25 10:57l
         
여행은 8월 15일부터 시작하여 9월 15일에 다녀왔습니다. 이동 경로는 강원도 춘천→홍천→횡성→영월→충북 단양→제천→경북 문경→경남 거창으로, 자전거를 이용해 다녀왔습니다. 여행수첩과 사진기록을 토대 삼아 약 5편에 걸쳐 여행기를 작성할 예정입니다. - 기자 말

여행 1일째 : 2013년 8월 15일

용산역에서 ITX 열차를 탄 후, 한 1시간 가량을 달려 남춘천역에서 하차했다. 북한강 자전거 도로를 따라 춘천까지 올 수도 있었지만 그냥 편하게 ITX로 이동을 했다. 일명 '청춘열차'라고도 불리는 ITX는 영업 속도가 시속 180km에 이른다. KTX 다음으로 쾌속 질주를 한다.

 



# ITX와 동서고속철도

경춘선의 복선화와 그에 따른 전철화로 '춘천 가는 기차'식의 낭만이 많이 사그라진 게 사실이다. 복선화 이후 터널이 많아져 창문 밖 경치 구경도 '끊김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복선화가 경춘선의 신비감을 떨어뜨렸다고 푸념을 늘어놓기도 한다. 나도 일정 정도 그 푸념에 동의를 한다. 분명 단선일 때, 경춘선은 터널도 적었고, 역사(驛舍)도 아담했다. 옛 김유정역 같은 경우는 아담하다 못해 앙증맞을 정도였다.  

그런 시각을 불편해 하는 사람도 있다. 낭만을 따지기에는 강원도 지역의 SOC(사회간접자본) 시설이 너무 열악하다는 것이다. 단선철도 시절, 서울 청량리역에서 무궁화호를 타면 거리가 80km 정도인 춘천까지 약 2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서울에서 천안까지 거리가 약 90km 정도이고 무궁화호로 약 1시간 정도 소요되니 춘천까지 얼마나 거북이 걸음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강원도 도청 소재지인 춘천이 이런 상황인데 다른 곳은 어땠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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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X ITX에는 자전거 거치대가 있는 칸이 있다. 그나저나 왼쪽에 있는 자전거와 필자의 자전거가 너무 비교된다. 필자의 자전거는 뒤태가 너무 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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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역사에 들어선 장애인, 노약자 편의 시설들은 기존의 옛 역사들이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다. 지금도 철도 건널목을 건너듯 맞은편 플랫폼으로 이동을 해야 기차를 탈 수 있는 역이 있다. 신체가 건강한 사람이야 철로를 건너 맞은편으로 느긋하게 이동할 수 있지만 휠체어나 유모차를 끌고 횡단한다고 생각해보라.

이런 맥락에서 나는 춘천에서 속초까지 이어지는 동서고속철도를 찬성한다. 동서고속철도는 강원도민들의 오랜 숙원 사업으로, 선거철만 되면 단골메뉴로 등장했다. 거의 30년 동안이나. 이렇게 오랫동안 동서고속철도가 활로를 찾지 못했던 건, 이 사업이 경제 타당성이 낮다고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악산이 수도권의 '외곽산'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원도 지역은 정서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수도권과의 거리가 많이 좁혀진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간의 동서고속화철도에 대한 박한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낡은 경제 방식이지만,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현상을 경춘선 복선화와 중앙선(용산-용문) 전철화로 확인을 이미 한 바 있다.

북한-중국-러시아를 잇는 환동해권 물류 '파이프라인'으로도 동서고속화철도가 이용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중국이나 러시아에서 선적된 물류들이 속초항을 거쳐 수도권으로 직접 올 수 있게 될 것이다. 남북 교류뿐 아니라 극동아시아 물류 운송 등에서도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카드'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나는 동서고속화철도를 찬성하지만 그건 조건부다. 백두대간에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그런 조건 말이다. 허울뿐이지만 그래도 필자가 명색이 역사트레킹 마스터인데 백두대간이 다치는 것은 눈뜨고 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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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랭이논 다랭이논은 경작지가 협소한 산촌이나 섬지역에서 많이 나타난다. 그래서 남해군, 청산도, 지리산에 있는 다랭이논들은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다. 이 다랭이 논은 좀 규모가 작지만 경작구간과 비경작구간이 확연히 구분되어 있어 필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춘천에서 홍천으로 넘어갈 때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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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장님 같은 목사님


남춘천역에 하차했을 때가 오후 6시께였으니 많이 달려봐야 2시간 정도를 주행할 수 있을 터. 애초 첫날 계획은 춘천 시내에서 되도록이면 멀리 벗어나 홍천 부근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춘천의 도심부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그래도 시보다는 군이나 읍 단위가 야영하기에 더 느긋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내 자전거가 '거북이'였다는 것이다. 180km가 아니라 그저 시속 18km 정도만 됐어도 좋았을 텐데... 현실은 8km였다. 그나마도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보다 끌고 가는게 더 많았다. 그리고 춘천-홍천 간에는 왜 그리 고개들이 많던지!

결국 야간주행을 하게 됐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하려고 보니 고심이 앞섰다. 통상 3일 정도는 페달을 굴려줘야 다리가 풀리는데 아직 다리가 덜 풀린 상태에서 행하는 야간주행이었기 때문이다. 갓길이 거의 없는 도로 사정도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공친 거 같다. 빨리 마을회관 같은데 가서 텐트나 쳐야겠어!'

당시 나는 제대로 공을 쳤다. 농로길로 들어섰다 공동묘지로 빠져나왔고 논두렁에 자전거가 엎어지기도 했다. 오랜만에 하는 야간주행이라 적응이 안됐던 것이다. 누군가의 손길이 그리웠다. 그저 하룻밤 캠핑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적시해 줄 그런 고마운 손길.

"실례하지만 이 동네 이장님이세요?"
"아니에요. 저는 저쪽에 있는 교회 목사예요."
"예... 아... 그러세요."

영락없는 동네 이장님 같은 분이셨는데 교회 목사님이란다.

"오늘은 손님들이 많네."
"손님이요?"
"좀 전에도 대안학교 학생들이 도보 순례를 한다고 왔어요. 숙소가 없다고 해서 우리교회 1층에 자리를 마련해 줬어요."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주신 분은 춘천시 동산면에서 교회 사역을 담당하고 계신, 전 목사님이셨다.

"텐트 칠 자리가 필요하다고요? 우리 교회에 앞마당이 있는데..."
"그건 제가 좀 불편하고요. 저기 마을회관 앞에다 텐트를 좀 칠게요."
"여기는 바로 앞에 차들이 다녀서 좀 정신없을 텐데요."
"그게 좀 걸리긴 하네요."
"그럼 제가 차를 앞쪽에다 댈게요. 그럼 차가 방패막이 역할을 할테니까."
"그럼 저야 감사하죠. 앞이 뻥 뚫린 것보다 훨씬 낫죠."

 

 

 

 

 

 

 

 

이런 동학군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나라와 일본은 기어코 조선땅에 군대를 파병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대로 청나라는 조선 정부의 파병 요청을 받고 진압군을 보냈다. 이에 일본도 텐진 조약을 빌미 삼아 조선땅에 군대를 급파하게 된다. 청나라야 요청을 받았다지만 일본군의 파병은 뚱딴지같은 처사였다. 조선 정부의 공식 파병 요청도 없었을 뿐더러 전주화약 이후에 조선 땅에 들어 왔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남부지방이 아닌 한성으로 진격을 했다. 동학도들이 한성에다 집강소를 차린 것도 아닌데.

그랬다. 일본군들은 이미 그릇된 야욕을 품고 조선땅을 침략했던 것이다. 그래서 1894년 6월 하순에 경복궁을 공격했고, 곧이어 청나라와 청·일 전쟁을 벌이게 된다. 이런 거듭된 일본의 침략 야욕에 동학군들은 크게 반발하며 본격적인 항일 투쟁에 나서게 된다. 그들은 전열을 가다듬고 충청도 공주로 진격을 하게 된다. 당시 공주는 충청 감영이 있던 곳으로 호서 지방의 중심지였다. 공주성을 함락시킨다면 호서 지방도 동학군들의 세력 범위 안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주성으로 나아가려는 동학군과 이를 진압하려는 관군, 일본군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우금티 전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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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농민운동 겉면에는 주제가 나가고, 날개를 들어 안쪽을 보면 그 주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기재된 작품. 충남 천안여고 역사동아리 학생들이 제작한 것이다. 역시 여고생들이 제작해서 그런지 꼼꼼함이 돋보였다. 설명 부분에 기재된 내용도 상당히 심도가 있었다. 웬만한 성인들도 잘 모를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충실히 잘 기재하였다. 우리 청소년들이 역사를 잘 모른다고 걱정들을 하시는데 이런 작품들을 보면 오히려 자기 자신을 책망할지 모른다. '읔, 고딩들보다 내가 더 모르네...'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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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죽창으로 무장했던 동학군들에게 개틀링 기관총과 야포를 난사했다. 일본군과 관군의 우수한 화력 앞에 동학군은 속수무책 당하고 말았다. 약 1만 5000명 정도 되는 동학농민군들이 우금티에서 비통한 최후를 맞았고 동학군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한 타격을 입게 됐다.

당시 일본은 동학군의 진압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금티 전투가 일어날 무렵, 일본군은 청·일 전쟁 중이었는데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와 요동반도를 공략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학군의 봉기를 후방을 교란하는 심각한 사태로 판단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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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 공주대 교학사 역사교과서 파동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는 공주대가 아닐까? 저자 중에 한 사람인 이명희 교수가 공주대 역사교육과에 재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군다나 이 교수는 총대를 매듯 이번 사태에서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으니, 그 비판의 화살이 이 교수를 넘어 공주대 전역으로까지 퍼져나가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을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공주대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은 무척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자기와는 관계 없는 인물 때문에 괜히 자신들까지 도매급으로 팔려나갔으니까. 하지만 걱정마시라! 필자가 만나본 공주대 역사교육과 재학생들은 패기가 넘쳤고, 무척 똘똘했다. 도매금으로 팔려나갈 인물들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학생들이 교수보다 더 낫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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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보다 학생들이 더 낫네

본격적인 우금티 추모제에 앞서 사전 행사인 역사 축제가 공주대학교 산학협력관에서 개최됐다. 공주대학교? 혹시 교학사 역사교과서의 주요 필진 중의 한 명인 이명희 교수가 재직하고 있다는 그곳?

그렇다. 교학사 교과서 문제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이명희 교수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에 재직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번 역사 축제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재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프로그램을 총괄하고 있었다. 단순히 장소 제공을 넘어 전체 진행을 주도적으로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금티 역사축제는 충남 관내에 있는 고등학생들이 직접 제작한 작품 전시와 소극장에서 펼쳐지는 발표회, 두 축으로 이루어졌다. 꼼꼼한 손길로 제작된 전시물들에는 동학뿐만 아니라 독도, 위안부 강제 동원 같은 다양한 문제들이 담겨져 있었다. 작품 의도가 무엇이냐는 필자의 물음에 학생들은 똑 부러지는 설명도 잊지 않았다. 해당 내용을 제대로 숙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당찬 모습에 '요즘 애들은 역사를 너무 모른다'고 몰아세우는 편에 섰던 한 사람으로서 좀 부끄럽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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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넋전 넋전을 직접 땅에 꽂고 있는 청소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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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교학사 역사교과서 파동으로 인해 공주대학교는 본의 아니게 큰 불똥을 맞게 됐다. 선봉장(?) 역할을 맡고 있는 이명희 교수가 목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애꿎은 공주대학교의 재학생·졸업생·교수들까지 도매금으로 묶여 질책을 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가 만나본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학생들은 무척 합리적이었고 쾌활한 젊은이들이였다. 해당 학과의 교수 한 명 때문에 다수의 청춘들이 싸잡혀서 욕을 먹는다? 이거 정말 불합리하지 않은가?

우금티 추모제는 오후 3시 우금티 고개에서 행해졌다. 참가자들이 죽은이의 넋이 담겨져 있는 넋전이라는 종이 인형을 제단 앞쪽에 꽂으면서 추모제는 시작됐다. 추모제는 해원무 공연, 사물 놀이 공연 등으로 이어졌는데 전체적으로 규모가 작게, 조촐하게 치러졌다. 공동집행위원장인 지수걸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는 이런 인사말을 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3km 정도만 올라가면 금강이 나옵니다. 만약 동학군들이 우금티를 넘고, 금강을 건넜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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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추모제례 119년 전 우금티 고개에서 유명을 달리한 동학농민군들의 넋을 달래는 추모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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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변했을 것 같다. 적어도 일제강점이라는 치욕적인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러면 분단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그저 허무한 일이라지만 그래도 이런 유쾌한 상상력은 삶에 활력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교학사' 이명희 교수, 공주대 제자들에게 배우시길

공주에서 '우금티 전투' 추모제례·역사축제 열려

13.11.06 13:47l최종 업데이트 13.11.06 15:42
곽동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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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 작은 외계인? 이것은 넋전이다. 넋전은 죽은이의 넋을 담은 종이 인형을 말한다. 이 넋전에는 우금티 전투에서 비통하게 눈을 감은 동학농민군들의 혼이 담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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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 캐릭터 이제 동학농민전쟁 기념식도 정형적인 틀에서 벗어나 젊은층의 참여를 이끌 수 있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런 캐릭터 이벤트는 청년층에 대한 참여와 관심을 이끌 수 있다. 한편 위의 캐릭터에 새겨진 초코릿 복근이 무척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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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금티냐, 우금치냐

지난 10월 27일. 옛 백제의 도읍이었던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행사가 하나 개최됐다. 119년 전 공주 우금티에서 비통한 최후를 맞은 동학 농민군들에 대한 추모 제례와 역사 축제가 행해진 것이다.

일단 용어 정리가 필요하겠다. '우금치'는 알겠는데 '우금티'는 무엇이냐고 반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또 '치'나 '티'나 비스무리한데 굳이 왜 우금티를 내세우냐고 물으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고개를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은 '티'나 '재'였다. 칡이 많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충북 충주의 '갈티고개', 노루들이 출몰한다는 경북 봉화의 '노루재'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고개를 뜻하는 우리말에도 왜곡의 씨앗을 뿌려 놓았다. 일제는 지도를 제작하면서 고개마다 이름을 붙였는데 고개를 뜻하는 한자 '티'자가 없었기에 손쉬운 대로 '언덕 치(峙)'자를 가져다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우금티'가 '우금치'로 개명된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인지 공주 지역에서는 우금치가 아닌 우금티로 더 많이 불리고 있었다.

옛 고지도를 살펴보면 '언덕 치(峙)'를 쓴 지명들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곰치재'나 '웅치' 같은 곳들이 그런 곳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굳이 우금티라는 명칭을 소리 높여 부른다고 오히려 질책을 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금티가 어떤 곳인가?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동학농민군들이 학살에 가까운 몰살을 당한 곳이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결합되었기에 '우금치'가 아닌 '우금티'로의 제 이름 찾기는 분명 의미가 있는 발걸음으로 평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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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수걸 교수 지수걸 교수는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학과장이자 이번 <우금티 추모제례 및 역사축제>의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얼마전 같은 학과에 있는 이명희 교수의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대한 비판을 꼼꼼하게 담은 성명서를 발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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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년 11월, 공주 우금티 고개


그럼 119년 전인 1894년에 도대체 우금티에서는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모르시는 독자들을 위해 부연 설명을 해보겠다. 황토현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군은 그 기세를 몰아 정읍을 점령하고 전주로의 진격을 결행한다.

전주가 어떤 곳인가? 당시 전주는 전라도의 핵심 지역으로 관찰사의 소재지였다. 한마디로 전라도의 심장부가 동학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것이다. 이에 당황한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구원 요청을 한다. 이에 외국 군대의 국내 입성에 대한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들이 모아져 동학군과 정부 사이에 전주화약(6월 11일)이 맺어졌다.     

전주화약 이후 동학군의 세력 범위에 있던 지역은 점차 안정화를 찾아갔는데 그 중심에서는 집강소 제도가 있었다. 동학농민군이 휩쓸고 간 지역은 치안과 행정이 마비됐는데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동학군의 대척점에 서 있던 사람들이 누구였는가, '가렴주구'를 행한 장본인들이 누구였는가를 생각해보면 쉽게 유추가 될 것이다. 동학군에 의해 탐관오리들이 처형됐으니 해당 고을의 치안과 행정은 마비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에 전봉준과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은 전라도 지역의 안정화를 도모하고자 민간자치 기구를 설치하기로 합의한다. 그렇게 하여 탄생된 것이 바로 집강소였다. 집강소는 자치 기구였으나 사실상 지방행정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실질적인 지역 통치기구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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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뚜껑으로 만든 우리나라 우리나라 외교에서 쟁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병뚜껑에 기재하여 제작한 병뚜껑 한반도. 충남 예산 여고 학생들이 급우들과 함께 만든 작품이다. 독도나 위안부를 적은 병뚜껑이 많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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