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흥사: 비가 그친 후. 산 안개가 설악산 봉우리를 두르고 있다.

 

 

 

 

 

 

 

2021년 6월 30일 수요일

 

누구나 다 자신만의 계곡이 하나씩 있을 것이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기암괴석이 그려낸 갖가지 기이한 형상을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곳! 그곳에 들어서면 어느 순간 신선이 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비경을 간직한 곳! 필자에게는 설악산 천불동계곡이 바로 그런 곳이다. 무척 매력적인 다른 계곡들도 많이 다녀봤지만 그래도 역시 최고는 천불동계곡이었다.

 

그 천불동계곡 초입에 있는 신흥사(新興寺)에 대한 이야기다. 이 포스팅은 천불동계곡이 아닌 신흥사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천불동계곡 이야기하다 갑자기 신흥사로 바꾸다니... 이거 글쓰기가 왜이래!ㅋ

 

신흥사는 2번에 걸쳐 자리 이동을 했고, 역시 2번에 걸쳐 이름을 바꿨다. 그 첫번째 이름은 향성사였다. 향성사는 652년(진덕여왕6)에 자장율사가 개창을 했는데 중향성불국토(衆香城佛國土)라는 뜻을 따서 지은 것이다. '불국토'는 알겠는데 '중향성'이라는 말은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중국집 이름인가?ㅋ

 

중향성은 법기(法起)보살이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법기보살은 산스크리트어로 다르모가타(Dharmogata)로 불리우는데 한자에서도 보이듯 '불법을 세우는 보살'을 말한다. 불법, 합법할 때 그게 아니라 불도를 세운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요한 일을 하는 보살이 바로 법기보살이고, 그가 거처하는 곳이 중향성이라는 곳이다. 짜장면집이 아니고. 이렇듯 향성사는 법기보살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중향성은 금강산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 불교에서는 법기보살이 금강산에 거주한다고 말한다.

 

 

 

 

 

 

 

* 신흥사: 안개가 낀 설악산

 

 

 

 

 

 

 

향성사는 원래 지금의 켄싱턴스타호텔 앞에 위치해있었다. 현재의 신흥사에서 동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위치다. 그곳에는 지금도 향성사지 삼층석탑이 자리를 잡고 있다. 버스정류장 앞에 석탑이 있는데 집중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향성사지 삼층석탑 정류장은 버스종점 한 정거장 전이라 신흥사 매표소까지 그리 멀지 않다. 그래서 설악산신흥사 역사트레킹은 향성사지 삼층석탑에서 시작된다.

 

삼층석탑은 2층 기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높이가 약 4.3미터에 달한다. 상륜부가 훼손된 터라 온전히 보존이 됐다면 4.3미터 이상이 됐을 것이다. 9세기경에 제작된 삼층석탑은 후기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계승했다. 그래서 국보 443호로 지정되었다. 9세기경에 만들어졌으니 자장율사 시대에 만들어진게 아니다. 이 시기에는 향성사가 선정사로 불릴 때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신흥사는 두 번이나 이름이 바뀌었다. 향성사가 첫번째 이름이었고, 두번째가 선정사였다. 그렇게 이름이 바뀌게 된 건 향성사에 화재가 발생해 폐허가 됐기 때문이다. 개창한 지 40년이 지난 후였는데 이후 의상대사가 지금의 내원암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재건을 한다. 이때가 701년이었는데 재건을 하면서 사찰 이름을 선정사로 바꾼 것이다. 선정사는 이후 천년동안 번창하게 된다. 그러다 조일전쟁(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1642년(인조20)에는 또 화재가 발생해 경내 전체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 향성사지 삼층석탑

 

 

 

 

 

 

 

 

내원암은 현재의 신흥사에서 울산바위 방면으로 올라가는 길에 위치해 있다. 약 2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나저나 향성사지 삼층석탑은 자신의 이름이 맞는지 좀 의아스럽다. 의문점들을 적어본다.

 

1. 690년경에 향성사가 폐허가 됐다. 이후 향성사지에서 북쪽으로 3km 이상 떨어진 곳에 의상대사가 사찰을 재건함. 이때가 701년이었는데 이름을 선정사로 바꾸었음.

 

2. 9세기경에 삼층석탑을 만들었음. 그럼 선정사 삼층석탑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그것보다 더 의아한 것은 왜 이미 폐허가 된 곳에 석탑을 세웠을까? 가보시면 알겠지만 삼층석탑이 있는 곳과 신흥사는 같은 경내로 묶기에는 꽤 거리가 있다. 더군다나 당시는 더 먼 내원암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3. 그럼 향성사가 불에 타기 이전에 삼층석탑이 만들어진 것인가? 그럼 9세기에 만들어졌다는 건 잘못된 이야기인가? 그것도 아니면 다른 곳에 있다가 지금의 자리로 이건을 한 것인가?

 

4. 향성사 시절에 9층 석탑으로 만들어졌는데 지금처럼 3층만 남게됐다는 주장을 하는 자료도 있다. 그런데 기단이나 상승률을 고려해 볼 때 9층 석탑의 규모가 나올 수 없는 구조다. 목탑도 아닌 석탑으로 9층을 쌓는다? 석탑 한 두 번 보나!

 

아이고 머리가 아프다. 가뜩이나 머리도 안 좋은데...ㅋ 이렇게 석탑 하나로 다양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 우리 문화재는 스토리텔링의 보고 같은 곳이다.

 

향성사지 삼층석탑은 신라계 석탑중에서 가장 최북단에 위치한다는 지리적인 특색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버스에서 꼭 한 정거장 먼저 내려서 향성사지 삼층석탑을 보고 가자.

 

 

 

 

 

 

 

* 신흥사: 극락보전

 

 

 

 

 

 

 

* 신흥사: 통일대불

 

 

 

 

 

 

 

이제 신흥사를 향해 본격적으로 이동하자. 설악소공원과 설악케이블카를 지나가다보면 푸른색의 거대한 부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바로 신흥사 통일대불이다. 통일대불은 좌대 4.3미터, 좌대둘레 13미터 위에 만들어져 있다. 앉아있는 좌상이지만 그 높이가 14.6미터에 달한다. 여기에 머리 뒤에 장식된 두광까지 포함시키면 높이가 무려 17.5미터가 된다. 통일대불은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청동이 약 108톤 정도가 사용됐다고 한다.

 

거대한 불상이니 제작하는데도 오래 걸렸다. 1987년 8월부터 만들기 시작해 10년이 지난 1997년 10월 25일에 점안식(點眼式)을 거행한 것이다. 개안식(開眼式)으로도 불리우는 점안식은 불상에 눈을 그려넣는 것을 말한다. 눈을 그려넣음으로써 신앙의 대상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용의 눈을 그려넣는 화룡정점을 연상해보자. 그러고보면 점안식은 거칠게 말해 불교식 준공식인 셈이다.

 

통일대불 앞에서 경건하게 삼배를 한 후 신흥사 중심공간으로 향했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보제루가 나온다.

보통 큰 사찰에는 절의 중심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거대한 누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누각은 통상 1층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2층은 법회 장소로 쓰인다. 이런 누각을 보통 보제루라고 부른다. 하지만 꼭 그 이름으로만 불리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유명한 부석사 무량수전 앞의 누각은 안양루다. 서울의 명찰 진관사에서는 홍제루라고 부른다.

 

정면7칸 측면2칸으로 만들어진 신흥사(神興寺) 보제루도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신흥사 보제루는 1644년(인조22)에 만들어졌는데 이 해에 드디어 신흥사라는 이름이 자리잡게 된다. 천년동안 번성하던 선정사가 1642년에 불 탄 후, 2년 뒤인 164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재건을 했고 드디어 신흥사라는 이름표가 생긴 것이다.

 

향성사 -> 선정사 -> 신흥사

 

무슨 사찰이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았는지... 신흥사 보제루는 강원도 시도문화재유형문화재 제 10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동네 팔각정처럼 사방이 다 오픈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971년에 분합문을 달아서 현재와 같은 구조로 변했다.

 

보제루에는 향성사 시절에 만든 범종이 있다. 무려 1400년 전에 만들어진 이 범종은 무게가 약 600kg 정도 된다. 1748년, 1758년, 1788년 세 번에 걸쳐 개주를 하기도 했다. '개주'는 활자나 주물, 즉 금속물을 다시 제작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화포는 대다수 청동으로 만들어졌는데 화포를 다시 만드는 것도 개주라 하였다. 활발하게 북방 개척에 나섰던 세종대왕 시기에 화포를 개주했다는 내용이 실록에 기재되기도 했다.

 

보제루 이야기하다 개주이야기까지. 얼핏 들으면 곗돈 모으는 계주 같다.ㅋ

 

 

 

 

 

 

 

 

* 신흥사: 보제루

 

 

 

 

 

 

 

* 신흥사: 극락보전. 왼쪽에 명부전이 보인다.

 

 

 

 

 

 

 

 

보제루를 지나 본전인 극락보전으로 가보자. 독특한 계단돌과 형형색색의 창살이 인상적인 극락보전이 탐방객들을 반길 것이다. 정면3칸, 측면3칸으로 이루어진 극락보전은 1648년(인조 25)에 만들어졌다. 이후 여러번 보수를 했지만 그래도 그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2018년 6월 4일에 보물 제1981호로 승격된다. 그 이전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14호였다. 검색을 해보니 아직까지도 몇몇 백과사전은 보물이 아닌 유형문화재로 표기하고 있었다. 문화재 데이터베이스는 좀 늦나?ㅋ

 

신흥사는 효종이 향로를 순종이 청동시루를 하사하는 등 조선왕실과 연계가 깊은 사찰이었다. 가신이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었다. 그래서 일반사찰과는 다른 모습의 형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극락보전 돌계단 옆을 보시라. 일반 태극이 아닌 삼태극이 있다. 삼태극은 조선왕릉의 정자각 돌계단에서 볼 수 있는 모양이다. 일반 사찰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모양이다.

 

삼태극 옆에 치우천왕처럼 생긴 귀면이나 아랫쪽에 조각된 용머리도 무척 인상적이다. 이렇게 장식된 부분을 계단의 소맷돌이라고 부른다. 신흥사 극락보전의 계단 소맷돌은 정말 멋지다! 이외에도 극락보전의 창살도 참 독특하다. 창살에 꽃 장식을 했는데 이걸 솟을빗꽃살이라고 부른다. 이름은 어렵지만 어쨌든 참 아름답다.

 

극락보전의 외관이 이렇게 아름다운만큼 실내에도 귀중한 보물이 모셔져 있다. 바로 신흥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다. 1651년에 제작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각승 무염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안정된 비례미와 세련된 기교미가 조화된 여래좌상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9월 5일에 보물 제 1721호로 지정된다.

 

이승을 떠난 이들의 명복을 비는 곳, 명부전을 둘러볼 차례다. 1737년(영조 13) 지어진 신흥사 명부전은 목조지장보살삼존상이 모셔져 있다. 1651년에 제작된 신흥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도 무염이 제작하였다. 기법이 뛰어나고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밝혀진 작품이기에 2012년 2월 22일에 보물 제1749호로 지정되었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나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둘 다 조각승 무염이 1651년에 제작했고, 1년의 간격을 두고 모두 보물로 승격됐다. 그만큼 조각승 무염의 예술미가 뛰어났다는 뜻일 거다.

 

 

 

 

 

 

 

* 신흥사: 명부전

 

 

 

 

 

 

 

 

신흥사 명부전도 외관이 독특한 면이 있다. 조선 후기인 1737년(영조 13)에 지어졌다고 전해지는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외형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보면 중앙의 문은 건물 높이에 맞게 큼직한데 좌우칸에 달린 문은 크기가 작다. 좌우칸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는 머리를 쿵하고 부딪히기 쉽상이다. 일부러 그랬을까? 일부러 그랬다. 안내문을 보니 아래를 둘러보자는 '하심(下心)'을 생각하며 명부전에 출입하라는 뜻이다. 하심은 자기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한다.

 

하심과 유사한 말로 조고각하(照顧脚下)도 많이 쓰인다. 자신의 발밑을 잘 보라는 뜻으로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기자신부터 돌아봐야 한다는 말이다. 하심이든 조고각하든 불가에서는 겸손과 겸양을 중시한다. 신흥사 명부전에서는 알아서 하심이 발휘될 거다. 그렇지 않으면 헤딩을 하는 것이고. 문 하나를 드나들면서도 삶의 지혜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빗줄기가 내리는 날에 신흥사를 탐방했다. 덕분에 산 안개를 걸친 설악산의 봉우리들을 볼 수 있었다. 신흥사의 한옥 지붕들과 엮어서 사진을 찍으니 한 편의 예술이 탄생하는 느낌이었다. 기암괴석과 그것을 두르고 있는 안개, 그것을 배경으로 해서 찍은 한옥들... 혹시 저기에 신선이 있는 거 아니야? 내가 사진찍고 내가 감탄하고!ㅋ

 

이제 신흥사를 벗어나 숲길로 들어선다. 오른쪽에 있는 울산바위가 자꾸 손짓을 하지만 천불동계곡으로 방향을 잡고 간다. 일단 신흥사 옆 숲길에 발을 디디면 천불동계곡 입구에 들어선 것이다.

 

글이 넘치니 천불동계곡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으로...

 

 

 

 

 

 

* 신흥사: 극락보전의 계단 소맷돌. 용머리가 인상적이다.

 

 

 

 

 

 

* 신흥사: 명부전. 중앙칸의 문보다 좌우측의 문이 높이가 낮다. 중앙은 부처님이나 스님이 출입하는 문이고, 좌우측 문은 일반 신도들이 드나드는 문이다. 하심을 생각하지 않고 들어가다가는 쿵하고 헤딩할지 모른다.

 

 

 

 

 

 

 

 

 

 

 

* 약사암: 본전인 대웅전과 삼층석탑

 

 

 

 

 

 

 

2021년 6월 13일 일요일

 

이날은 광주광역시에 있는 무등산 일대를 탐방했다. 정확히는 광주 동구에 있는 증심사와 약사암을 방문했다. 뭐 정상까지 가고 싶었지만 워낙 공사가 다망하다보니...^^ 그래도 천 년 고찰을 동시에 두 개나 방문을 했다. 무등산에 온 보람이 있었다.

 

광주는 여러번 방문했었다. 배낭여행 뿐아니라 예전 자전거여행을 행했을 때도 여러번 방문했었다. 광주 시내로 들어갔다가 길을 헤매인 것이 기억난다. 원래 자전거여행이나 장거리도보여행을 할 때는 대도시의 중심지는 피해야 한다. 길을 헤매일 수도 있고, 자동차들로 인해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도시는 경유지 개념으로 방문해서 그랬는지 그곳에 자리잡은 산들도 그렇게 눈길을 주지 않았었다. 광주의 무등산, 대구의 팔공산, 부산의 금정산 등등... 하지만 이제는 대도시의 큰 산들도 좀 다녀볼 생각이다. 지역의 산들이 주는 매력이 있듯이 도시의 산들이 주는 매력도 있기 때문이다.

 

서론이 길어졌다. 광주 지하철을 타고 학동증심사역에서 하차를 했다. 증심사까지 시내버스를 탈까 하다 그냥 하천변을 걷기로 했다. 증심사천. 3km정도였는데 무등산을 바라보면서 걸으니 걸을만 했다.

 

해발 1,187미터인 무등산(無等山)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산 혹은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라는 뜻이다. 1972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2013년에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 그런 무등산에 천년고찰인 증심사(證心寺)가 자리잡고 있다.

 

증심사는 후기 신라시대인 860년(헌안왕4)에 철감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후 여러번의 중창이 있었다. 한국전쟁 때 큰 피해를 입어 대다수의 전각들이 불탔다. 지금의 건물들은 1971년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다.

산 중에 있는 사찰이라 그런지 산지가람형을 띄고 있었다. 일주문부터 아주 가파르게 올라갔다. 그렇게 산을 깎아 단을 쌓고 건물을 올려야 했으니 사찰 경내가 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무등산을 대표하는 사찰이라는데 그 명성에 비해서는 좀 아담할 정도였다.

 

 

 

 

 

 

 

 

 

 

* 증심사 오백전: 오백전과 삼층석탑. 오백전은 조선시대 만들어졌고, 석탑은 후기 신라시대에 제작됐다.

 

 

 

 

 

 

 

 

 

*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

 

 

 

 

 

 

 

증심사에서 눈여겨 볼 문화재들은 대웅전 뒤편에 몰려있다. 먼저 1609년(광해군2)에 지어진 오백전을 살펴보자. 정면 3칸 측면 3칸인 이 오백전은 오백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세종 시기였던 1443년,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김방은 자신의 사제를 털어 증심사를 중창한다. 이때 오백나한상을 봉안하게 된다. 막돌허튼층 쌓기로 높은 단을 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올려 오백전을 지었다.

 

무슨 말인가? 막돌허튼층 쌓기는 무엇이고? 두리기둥은 또 무엇인가? 외계어인가?ㅋ 막돌허튼층 쌓기는 다듬지 않은 막돌을 층층이 쌓았다는 것이다. 막돌로 쌓아 올리니 층계가 확 드러나지 않고 불규칙하게 쌓이게 된다. 막돌허튼층 쌓기라고 막돌로만 쌓지는 않는다. 막돌과 막돌 사이에 찐득찐득한 진흙을 채워넣기도 한다. 호박돌로 쌓아 올린 돌담을 생각해보시라. 본드보다 더 강력한 진흙으로 돌과 돌을 붙여놓았다.

 

그럼 두리기둥은 무엇인까? 배흘림기둥은 들어봤는데 두리기둥은? 두리기둥은 원형, 즉 둥근기둥을 말한다. 배흘림기둥이 같은 원형기둥이면서 중간 부분이 똥배처럼 불쑥나왔다면 두리기둥은 똥배없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동일하게 통원형 스타일을 유지한다.

 

막돌허튼층 쌓기, 두리기둥... 평소에 거의 쓰지 않는 말들을 사용하다보니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이렇게 또 알아가는 재미도 있지 않은가!^^

 

다시 오백전 이야기. 오백전에 봉안된 오백나한상들은 제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다른 점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것이다. 그럼 시간이 너무 오래걸리나?

 

오백전 앞에는 후기 신라시대에 세워진 증심사 삼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2단 기단으로 이루어진 삼층석탑은 높이가 3.2미터로 좀 아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증심사 삼층석탑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보물이 아닌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백전도 조선 후기 한옥 양식을 지녔음에도 보물이 아닌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13호 지정되어 있다.

 

이외에도 오백전 옆에는 고려시대에 만든 오층석탑과 조선시대 만든 칠층석탑이 있다. 그러고보니 증심사에는 신라, 고려, 조선 등 각기 다른 시대의 탑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자 이제 오백전 옆에 있는 비로전으로 눈을 돌려보자. 이곳에 또 귀한 문화재가 있다.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철조비로자나불이 바로 그것이다. 철조비로자나불은 원래 옛 전남도청 자리에 있던 대황사에 있었다가 1934년에 지금의 증심사로 옮겨졌다. 이때 조선시대에 만든 칠층석탑도 함께 옮겨왔다. 대황사는 조선 말기에 폐사가 됐다고 한다.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은 전체적으로 늘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얼굴도 작게 표현되어 있다. 워낙 우리나라 불상, 보살상들이 후덕한 모습을 많이 하고 있는터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의 모습이 좀 낯설 수도 있을 것이다.

 

높이 90cm의 이 불상은 재료의 성분이 거침없이 드러난 것처럼 전체가 초코렛빛깔을 띄고 있다. 그 검은 빛깔 마디마디에 새겨진 선과 선이 정교함으로 가득차 있다.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은 철로 튼튼하게 만들어서 그런지 천 년의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보존 상태가 상당히 좋다. 그래서 보물 제 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증심사 탐방은 참 유익했다. 메인 등산로 곁에 있는 사찰인데도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아 호젓한 사찰 탐방을 할 수 있었다. 이제 무등산 중턱부에 있는 약사암을 향해 간다.

 

증심사 일대는 예로부터 차밭이 유명했다. 증심사에서 차 공양을 위해 재배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경영을 하다 광복 후에 허백련이라는 분이 인수하였는데 그는 고유의 차를 재배하는 등 차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등산로에 차 향이 풍기는 것도 같고...^^

 

 

 

 

 

 

 

* 증심사 대웅전

 

 

 

 

 

 

 

* 증심사 오층석탑과 칠층석탑

 

 

 

 

 

 

 

 

무등산 약사암은 증심사에서 약 1km 정도 올라가면 닿을 수 있다. 약사암도 증심사를 세운 철감선사 도윤이 개창한 사찰인데 처음에는 인왕사라고 불렀다. 이후 고려 예종 때 혜조국사 담진이 중창을 하면서 약사암으로 이름을 고쳤다.

 

약사암에서 가장 주목해서 볼 문화재는 보물 제600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조여래좌상이다. 약사암 석조여래좌상은 9세기인 후기 신라시대에 제작되었다. 석불 양식은 석굴암 석불에서 정점을 찍게 된다. 이후에는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개성이 살아있는 형식으로 변모해 간다. 아무래도 신라후기에서 고려 초기에는 지방호족 세력들이 강성해지는데 그런 사회상이 반영된 것일테지. 약사암 석조여래좌상도 그런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목재 건물에 돌로 만든 석불이 주존불로 모셔져 있어 좀 독특해보였다. 돌로 만든 대좌도 있고 해서 석조여래좌상은 수미단에 올려져 있지 않았다. 중간에 단을 싹뚝 잘라서 홈을 만들고 그 안에 석조여래좌상을 모셨다. 그것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하긴 그 무거운 석불을 나무로 만든 수미단에 올려놓는다고 생각해보라. 올려놓는 순간 우루르 무너질 것이다. 앞서 언급한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도 그렇고 약사암 석조여래좌상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불상이 아니어서 더 눈길이 간다. 이 귀중한 문화재들을 볼 수 있으니 필자는 행운아인가?^^;

 

본전 건물을 나오니 무등산 새인봉이 한 눈에 들어왔다. 새인봉은 봉우리가 옥새처럼 생겼다하여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본전 앞에는 약사암 삼층석탑이 사찰의 중심을 잡고 있다. 후기 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아직 문화재지정이 안 됐다. 문화재지정이 안 됐다고 하더라도 삼층석탑은 그 존재만으로도 소중하다. 천 년의 세월을 약사암과 함께 했으니까.

 

새인봉과 어우러진 약사암의 모습이 참으로 정겹다. 대도시에 있는 사찰이 이렇게나 호젓할 수 있다니!

다음에 무등산을 가면 증심사와 약사암을 또 방문할 생각이다. 그때는 정상도 한 번 찍고 오는거야?ㅋ

 

 

 

 

 

 

 

 

*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수미단에 홈을 내서 봉안했다.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 미륵전: 왼쪽으로는 금산사 오층석탑이 보인다. 오층석탑 옆에는 부처님의 사리탑이 있다.

 

 

 

 

 

 

 

* 금산사 당간지주: 보물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2021년 6월 12일 토요일.

 

전북 김제에 있는 금산사를 탐방하는 날이다. 전날 전주터미널 인근에서 1박을 했었는데 터미널 바로 앞에 금산사로 향하는 시내버스가 있었다. 전주가 익숙한 분들이면 전주터미널에서 금산사로 향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직선거리로 따지면 전주나 김제나 금산사까지 거기서 거기다.

 

금산사는 도립공원인 모악산에 위치해있는데 이 산은 전주, 완주 그리고 김제에 걸쳐있다. 지평선 축제가 있을 정도로 김제는 평야지대로 유명한 지역이다. 또한 전주와 완주도 평탄한 지형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해발 795미터인 모악산은 평지에 우뚝 솟아 있는 형상이다. 전남 영암에 가보면 국립공원인 월출산(810미터)이 있는데 이 월출산도 평지에 우뚝 솟아있다.

 

넓은 평야지대에 큰 산이 서있는 형상이라 그런지 모악산은 예로부터 이 지역 사람들에게 경외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랬다. 산이 내뿜는 강한 기운 때문인지 모악산은 계룡산과 함께 대표적인 민중신앙의 발생지로 꼽힌다. 실제로 1970년대까지 신흥종교 집단거주지가 있었을 정도로 이곳은 민속신앙의 집산지 역할을 했었다. 물론 지금은 많이 정비된 상태다.

 

그런 모악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어서일까?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성지같은 곳이다. 금산사는 백제 법왕 때인 599년에 창건됐는데 그때는 작은 사찰에 불과했다. 그러다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율사에 의해 크게 중창되면서 이 지역의 중심 사찰로 자리잡게 된다. 이때 진표율사는 미륵장육상을 미륵전에 모셨는데 이는 법상종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다. 법상종은 교종계열로 미륵신앙을 중심에 둔 종파로 진표율사 그 자신이 개산조다.

 

머리가 아프다. 일상생활에서는 잘 언급되지 않는 말들이 연이어 나오니 머리가 지끈거릴 수밖에... 또 미륵장육상은 무엇인가? 육개장 같은건가?ㅋ 거칠게 이야기하면 약 4.8미터짜리 미륵부처님 불상을 말하는 것이다. 장육상(丈六像)의 뜻을 더 알아보자. 통상적으로 불상을 만들 때 사람 키의 두 배인 16척으로 제작한다. 여기서 1척은 약 30cm이다. 그래서 '삼척동자도 다 안다'라고 했을 때는 강원도 삼척에 사는 꼬맹이가 아니라는 거다. 키가 90cm 정도 되는 꼬맹이도 다 아는데, 너만 모르냐 할 때 쓰는 말이다. 정리를 해보자.

 

1척= 30cm

1장= 10척

16척= 1장 6척

 

장육상은 이런 계산법에서 나온 것인데 신라의 세 가지 보물로까지 불렸던 경주 황룡사의 장육존상이 유명하다. 하지만 황룡사도 폐사되고 장육존상도 자취를 감추었다. 진표율사가 세운 미륵장육상도 마찬가지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 미륵전

 

 

 

 

 

 

금산사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과 깊은 관련이 있는 곳이다. 미륵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궁예다. 하지만 견훤도 자신을 미륵이라고 칭하며 미륵신앙을 정치에 이용했다. 900년 견훤은 완산주로 도읍을 정했는데 완산주가 바로 전주와 완주 일대다. 미륵신앙의 성지인 금산사가 아주 가까운 곳에 후백제의 도읍지가 들어선 것이다.

 

하지만 권력은 참으로 비정한 법! 미륵신앙을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데 사용했던 견훤은 금산사에 감금되고 만다. 아들인 신검, 양검, 용검에 의해서. 스스로를 미륵이라고 칭한자가 미륵신앙의 본거지에 감금되고 만것이다.

 

이때가 후백제가 한참 고려와 항쟁을 벌이던 935년 3월이었다. 견훤은 아들이 10명이나 있었는데 그중 넷째 아들인 금강을 특별히 좋아했다. 그래서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하지만 첫번째 부인의 소생인 신검, 양검, 용검이 이를 알고 금강을 죽이고 만다. 또한 견훤을 금산사의 본전인 미륵전에 유폐시킨다. 이후 견훤은 고려로 도망치고 자신이 세운 후백제가 멸명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이 얼마나 황망한 일인가! 자신이 세운 나라가 망하는 광경을 직접 지켜보다니... 그런 충격 때문인지 후삼국이 통일된 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에 견훤은 충남 논산에 있는 한 절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이때가 936년이었다.

 

 

 

 

 

 

* 대적광전: 오른쪽에 오층석탑이 보인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이든다. 궁예와 견훤은 미륵신앙을 전면에 앞세우며 도탄에 빠져있는 백성들의 환심을 샀다. 그럼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어떤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나? 바로 도참사상이다. 미래의 길흉에 대한 예언을 믿는 사상이 바로 도참사상이다. 서구식으로 하면 노스트라다무스다.

 

금산사 중심영역에 들어서면 넓은 마당이 나온다. 중앙에 대적광전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미륵전이 우람하게 서 있다. 이 미륵전이 금산사의 본전이면서 견훤이 감금된 장소다. 외관이 3층으로 이루어진 미륵전은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3층 법당이다. 그래서 국보 제62호로 지정되었다.

 

미륵전은 외관이 3층 형식으로 되어있지만 실내는 통층으로 되어 있다. 천장이 높다보니 이곳에는 큰 미륵불이 세워져 있는데 그 높이가 무려 11미터가 넘는다. 또한 좌우에 세워진 보살상도 8미터가 넘는다. 직접 실내에 들어가 불상을 보면 경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필자도 합장을 하고 공손하게 기원을 드렸다.

 

이렇듯 금산사는 미륵불을 모신 미륵전이 본전, 즉 메인 법당이기에 따로 대웅전은 없다. 대신 석가모니불은 미륵전의 반대편에 있는 대장전에 모셔져 있다.

 

 

 

 

 

 

 

* 대장전: 석가모니불이 모셔진 대장전. 그 앞에 석등이 서있다. 석등은 보물 제 828호로 지정되어 있다.

 

 

 

 

 

 

 

* 금강계단: 왼쪽에 석종형 사리탑이 보인다. 오른쪽에 오층석탑이 우뚝 서있다.

 

 

 

 

 

 

1500년 전에 창건된 금산사에는 수많은 문화재들이 있다. 일일이 다 설명할 수 없으니 사진으로 대신하겠다. 그래도 몇가지 문화재들은 잠깐 언급하겠다.

 

먼저 방등계단이라고도 불리는 금강계단이다. 보물 제26호로 지정된 금산사 금강계단은 부처님의 사리탑이 있는 곳이다. 그렇다. 금산사도 유명한 양산 통도사처럼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진 적멸보궁이다. 2층 계단으로 이루어진 금산사 금강계단은 진표율사가 처음 만들었고, 이후 여러번 다시 세웠다고 한다. 1층이 약 12미터이고, 2층은 약 8미터 정도다. 2층 한가운데 석종형의 사리탑이 모셔져 있다. 석종형이라하면 돌을 범종 형태로 깎은 것을 말한다.

 

금강계단 옆에는 보물 제25호인 금산사 오층석탑이 우뚝 서 있다. 통상적으로는 금강계단 앞에는 석등이 서 있다. 통도사 금강계단에도 석등이 서있다. 하지만 금산사 금강계단에는 고려시대에 만든 오층석탑이 우뚝하게 서있다. 그래서인지 부처님의 사리가 있는 석종형 사리탑보다 우뚝선 오층석탑에 먼저 눈길이 간다. 사리탑은 낮게 깔려있어 한 눈에 안 들어오고 높게 서 있는 오층석탑은 한 눈에 들어오니 그럴 수밖에... 두드러진 것만 보려하는 한낱 시력 안 좋은 어리석은 중생이여! 그 불쌍한 중생이 바로 접니다. 제가 시력이 안 좋아서리...ㅋ

 

금강계단과 오층석탑은 미륵전과 대적광전 사이에 있다. 송대라고 불리는 이 작은 언덕에 올라서면 금산사의 중심영역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둘러보고 있는데 저 아래 희안하게 생긴 석탑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금산사 육각다층석탑이다. 보물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는 육각다층석탑은 특이하게도 점판암으로 만들어져있다. 점판암은 넙쩍하게 쪼개지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슬레이트라고도 불리며 기와로 쓰이기도 한다.

 

통상적으로 우리나라 석탑들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사각형으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육각다층석탑은 그 법칙에서 벗어났다. 얼핏보면 맛나는 초코케이크를 층층이 쌓은 것처럼 보인다. 좀 앙증맞아 보일 정도다. 그도 그럴 것이 높이도 2.18미터로 그리 높지가 않다. 갑자기 달달한 게 땡기네...ㅋ

 

이제까지 모악산에 있는 금산사를 탐방해 보았다. 사찰 하나에 이렇게 많은 문화재와 이야기가 숨쉬고 있다니! 그런 문화재와 이야기를 따라 오늘도 길을 나서는 거야! 아자아자~

 

 

 

 

 

 

 

* 금산사 육각다층석탑

 

 

 

 

 

 

* 금산사: 금강계단 쪽에서 내려본 모습. 육각다층석탑과 석련대가 보인다. 석련대는 보물 제 23호로 지정되어 있다.

 

 

 

 

 

 

*노주석: 대적광전과 대장전 사이에 위치해 있다. 아마도 석등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그냥 노주석으로 불린다.

 

 

 

 

 

ps. 앞으로도 미륵불을 칭하는 자는 많이 나올 거 같다. 미래불인 미륵불은 현세에 아직 출현하지 않으셨으니까. 세상이 혼탁할수록 자신을 '살아있는 미륵'이라고 칭하는 이들은 계속 등장할 수밖에 없다. 혼란한 세상에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니까. 그 심리를 귀신같이 이용해먹는 인간들도 분명 있으니까. 그런 사기꾼의 속셈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한다. 아래의 꽁트처럼 말이다.

 

"내가 살아있는 미륵이다!"

"됐다. 공양간에 밥이나 묵으러 가자!"

"내가 살아있는 미륵이래도! 내 관심법으로...!"

"배고파 죽겠다니까... 지가 미륵이면 사람들 밥부터 챙겨줘야지! 나 간다."

"..."

 

 

 

 

 

 

 

 

* 성주사지 : 본당터를 중심으로 4개의 탑이 보인다.

 

 

 

 

 

 

 

2021년 6월 11일 금요일.

 

이날은 충남 보령시에 있는 성주사지를 탐방한 날이다. 탐방한 지 두 달이나 지나서 후기를 작성하다니...ㅋ

 

성주사! 후기 신라시대 대표적인 선종 사찰로 불렸던 곳. 하지만 지금은 폐사지가 되어 허허로움이 갈대처럼 나붓기는 곳. 한편 경북 성주군과 이름이 비슷하기에 성주사도 그곳에 있지 않나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곳. 사실 필자가 그랬다. 성주사지라고 하니 경북 성주군부터 생각한 것이다. 맛있는 성주 참외를 떠올리면서...^^

 

답사를 한 날은 무척 무더웠다. 그런 날은 인근에 있는 대천 해수욕장에서 머드팩을 하는게 훨씬 남는 장사일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무거운 배낭을 메고 성주사지가 있는 성주면으로 향했다. 보령 시내에서 성주면사무소 입구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약 15분 정도 소요됐다. 면사무소 입구에서 성주사지까지는 약 1km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어렵지 않게 걸어갈 수 있다. 성주사지 바로 앞까지 가는 버스 노선도 있지만 자주있지 않다.

 

성주천을 따라 이동을 하다보면 넓게 펼쳐져있는 성주사지가 나타난다. 성주산과 만수산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데 그 품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서해안에 있는 산들이 그렇듯 해발고도가 높지 않은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이 옛 절터의 뒷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성주사의 원래 이름은 오합사였다. 백제 법왕이 왕자 시절인 599년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때는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원찰로 오합사가 창건된 것이다. 한편 백제 법왕은 같은 해인 599년에 제29대 왕으로 등극한다. 그리고는 그 다음해인 600년에 승하하고 만다. 직전 28대 혜왕도 재위 기간이 딱 1년이었다. 598년에서 599년.

 

오합사가 성주사로 이름이 바뀌게 된 건 신라 후기였다. 성주사(聖住寺)의 의미를 풀어보면 '성인이 거주하는 절'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성인은 무염국사를 지칭한다. 태종 무열왕의 8대손인 무염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드러냈다. 아홉살 때에는 해동신동으로 불렸을 정도다. 무염은 22살 때인 821년(헌강왕13)에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 이후 무려 20년 동안이나 중국 일대를 다니며 자비를 실천했는데 이를 두고 '동방의 대보살'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다.

 

무염이 유학을 했을 당시 중국에는 경전을 중심으로 한 교종에서 벗어나 수행을 강조하는 선종이 유행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무염도 현실의 상황에서 벗어난, 중앙 귀족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던 교종을 비판했다.

 

 

 

 

 

*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그가 중국에서 귀국했을 때 보령 지역의 호족인 김양에 의해 오합사의 주지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때 신라에서는 구산선문이 크게 번성하게 된다. 구산선문은 경전 위주의 교종과는 달리 수행에 중심을 둔 선종의 9개 선문을 말한다. 한마디로 신라 말기에 9개의 선종 문파가 산을 중심으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그중 무염은 선승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더불어 그가 주지로 주석하는 성주사도 구산선문의 대표적인 사찰로 주목받게 된다.

 

그런 무염의 업적을 기리고자 성주사터 한편에는 큰 비석이 세워져있다. 비각으로 보호되고 있는 이 비석은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이다. 대낭혜는 무염의 시호이고, 백월보광은 탑호이다. 줄여서 낭혜화상탑비라고도 불린다. 국보 제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후기 신라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높이가 무려 4.55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한 비석에는 무염과 관련된 5천여 자의 글자가 새겨져있다.

 

한편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하나다. 사산비명은 최치원이 지은 비석문 가운데 사료적 가치가 높은 4개를 묶어서 만든 책이다. 그럼 그 대상인 4개는 무엇인가? 아참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가 그중 하나라고 했지.

 

1. 진감선사대공령탑비(국보 제47호): 지리산 쌍계사

​2. 지증대사적조탑비(국보 제 315호): 경북 문경 봉암사

3. 대숭복사비: 경주 대숭복사터

4.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

 

대숭복사비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3개의 비문이 다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데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니 사산비명을 주제삼아 탐방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신라 말기 비운의 천재였던 최치원의 자취를 따라서... 성주사터에 왔으니 벌써 한 곳은 다녀온 셈이다.

 

이제 절의 중심부였던 곳으로 향해가보자. 총 4개의 탑이 눈길을 확 사로잡을 것이다. 하나는 오층석탑이고, 나머지 3개는 삼층석탑이다. 삼층석탑은 열을 지어 서 있고, 오층석탑은 그것들과는 외떨어져 있다. 오층석탑과 삼층석탑 사이에는 본당 건물터가 있다.

 

하나도 아닌 4개의 탑이 한 곳에 집중적으로 서 있다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건물 하나에 탑 하나를 두고, 사찰의 가람배치에서 1당 1탑이라고 한다. 탑이 두 개면 1당 2탑이라고 한다. 1당 3탑까지는 들어봤는데 1당 4탑은...? 하여간 우뚝 서 있는 4개의 탑이 있어 그런지 성주사지는 그 어떤 폐사지보다 덜 쓸쓸해보인다.

 

탑들을 둘러보기 전에 본당터부터 살펴보자. 이 본당터 가운데에는 연꽃무늬로 새겨진 석조대좌가 있는데 오랜 시간이 흘러서인지 사각형의 석조대좌는 군데군데가 훼손되었다. 외형이 훼손되었지만 그래도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보았다. 아니 건축학적 상상력인가? 이 석조대좌에는 큰 불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 불상은 석불이 아닌 철불이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들고 나갔다는 것이다. 이런 괴씸한!

 

 

 

 

 

* 성주사지 오층석탑

 

 

 

 

 

 

 

오층석탑은 6.6미터로 성주사지에 남은 문화재들중에서 가장 높다. 오층석탑은 성주사지의 기준점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처럼 본당터 앞에 우뚝 서 있다. 2중 기단 위에 5개의 탑신이 올려져있는데 1층 탑신이 두드러지게 길쭉하지만 탑 전체가 늘씬한 상승감을 자랑하며 균형있게 층층을 이루고 있다. 안타깝게도 꼭대기 부분인 상륜부는 훼손이 됐다.

 

성주사지 오층석탑은 신라 후기에 제작되었는데 2층 기단과 1층 탑신 사이에 괴임돌이 받혀졌다. 이렇게 괴임돌이 받혀지는 형식은 신라시대 석탑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형태다. 아무래도 오층석탑을 만든 석공은 시대를 앞서간 아티스트가 아니었을까... 성주사지 오층석탑은 보물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제 열을 지어 서 있는 세 개의 탑을 살펴보자. 얼핏보면 세 쌍둥이 탑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보면 각 탑의 높이가 제각각이다. 서탑은 4미터, 중간탑은 3.7미터, 동탑은 4.6미터이다. 이 세 탑은 건너편 오층석탑처럼 2층 기단과 1층 탑신 사이에 괴임돌이 따로 받혀진 형태다. 그런데 이 세 개의 탑의 1층 탑신에는 무언가가 조각되어 있다. 문틀모양과 문고리 장식을 새겨넣은 것이다. 탑에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독특함 때문인지 세 개의 탑은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서탑은 제47호, 중간탑은 제20호, 동탑은 제2021호이다. 동탑은 2019년도에 승격됐는데 이전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였다.

 

한편에 서 있는 석불입상도 친견했다. 훼손이 심해 시멘트로 보수되어 있는 석불은 좀 어눌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좀 더 친근한 모습이었다. 마을에서는 미륵불로 불린다고 한다. 오랜동안 이곳에 서 있으면서 성주사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석불일텐데... 그렇게 묵묵하게 이 터를 지켜준 석불 앞에서 크게 몸을 숙여 합장을 하였다.

 

성주사지도 폐사지이기에 허허로움이 탐방 내내 느껴졌지만 그래도 석불도 있고, 석탑도 4개나 있어서 그나마 덜 외로운 느낌이었다. 뒤쪽에 둘러져 있는 성주산도 압도하는게 아니라 아늑해 보이고... 그렇게 성주사지 탐방이 종료가 됐다.

 

 

 

 

 

* 세 개의 탑

 

 

 

 

 

 

 

* 성주사지 석불입상

 

 

 

 

 

 

 

 

* 세 개의 석탑: 사진 가운데 하단부에 석불입상이 보인다.

 

 

 

 

 

 

 

* 본당터 석조계단: 오리지널 석조 계단을 1986년에 누가 들고 갔다고 한다. 그 무거운 걸 가져가다니! 이 문화재 도둑놈아! 현재 계단은 옛 사진을 근거로 복원한 것이다.

 

 

 

 

 

 

 

 

 

 

 

 

 

 

 

* 두 기의 보물탑: 왼쪽편이 하리 3층석탑. 오른쪽편이 창리 3층석탑.

 

 

 

 

 

 

 

 

2021년 5월 28일 금요일

 

이날은 경기도 여주 영월루 일대를 탐방했다. 여주는 남한강이 유유히 중심부를 흐르고 있다. 그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세종대왕이 잠들어계신 영릉과 신륵사가 자리잡고 있다. 그 두 곳은 약 6km 정도 떨어져있는데 여주시에서 조성한 도보여행길인 여강길을 따라 이동할 수 있다.

 

강변을 따라 걷는 길은 시야는 트여서 좋은데 좀 밋밋한 감이 있다. 서울에서 한강을 걸어보시라. 시간이 흐를수록 좀 따분해질 것이다. 6km면 짧은 거리가 아니다. 그래서 중간에 좀 시야 전환을 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해보인다.

 

그런 역할을 영월루와 영월공원이 해준다. 영월공원은 여주대교 옆 언덕배기에 조성을 했는데 그 정상부에 영월루가 자리잡고 있다. 멀리서보면 언덕배기에 누각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다. 그렇다. 영월루 위에 올라서면 높은 위치에서 남한강 일대를 조망할 수 있게된다. 강 건너편에 있는 신륵사 관광지 일대도 한 눈에 들어온다. 강변길에서 보는 풍광과는 또다른 이미지가 펼쳐지는 것이다.

 

영월공원에 들어서면 세종대왕의 업적을 기린 벽화가 눈길을 끈다. 그런데 이 벽화는 도자기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세계도자기엑스포2001>을 맞이하여 세종대왕의 업적을 도자기 벽화로 그려낸 것이다. 상당히 이색적인 설치물이었다. 참고로 <세계도자기엑스포2001>은 2001년도에 경기도 여주, 이천, 광주에서 개최되었다. 3곳 다 도자기와 관련이 많은 도시들이다.

 

세종대왕의 일대기를 둘러본 후 영월루에 올라섰다. 원래 영월루는 여주군청의 정문이었다. 1925년에 군청 건물을 새로지을 때 당시 군수였던 신현태가 현재의 자리로 이건을 했다. 이건이라고는 하지만 새로 지을 정도로 손을 많이봤다고 한다. 현재는 경기도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어떻게 누각이 군청의 정문이 될 수 있을까, 하고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나만 궁금하나...ㅋ

 

 

 

 

 

 

 

 

* 영월루

 

 

 

 

 

 

 

 

 

 

 

 

* 남한강: 마암 일대에서 바라본 모습. 강 건너편이 신륵사 관광지구다.

 

 

 

 

 

 

 

격이 높은 사찰같은 곳을 생각해보자. 본당이 있는 중심지 앞에 누각이 있을 것이다. 이런 누각은 통상 1층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2층은 법회 장소로 쓰인다. 이런 본당앞 누각을 보통 보제루라고 부른다. 하지만 꼭 그 이름으로만 쓰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유명한 부석사 무량수전 앞의 누각은 안양루다. 서울의 명찰 진관사에서는 홍제루라고 부른다.

 

이렇게 누각 형식으로 문을 낸 것을 두고 누문이라고 칭한다. 같은 누문이지만 사찰과 관청은 좀 달랐다. 관청은 문짝이 달려있어 시간이 되면 문을 닫았고, 그 앞에 횃불을 밝히고 포졸들이 서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하지만 사찰은 부처님의 가피가 만방에 펼쳐지듯이 문짝이 달리지 않고 항상 오픈되어 있다.

 

영월루가 자리잡고 있는 언덕배기 아래에는 '마암'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 마암의 진면목을 관찰하려면 강 건너편이나 여주대교 중간쯤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잔잔한 강물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마암은 풍류객들의 발걸음을 모으기에 충분할 정도로 매력적인 모습이다.

 

영월루를 내려 오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기의 탑을 볼 수 있다. 두 기가 나란히 있어 얼핏보면 쌍둥이탑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보면 서로 다른 외형을 가진 탑임을 알 수 있다. 뭐 눈썰미가 없는 분이면 좀 시간이 걸리려나...ㅋ

 

먼저 하리 삼층석탑을 살펴보자. 하리 삼층석탑은 보물 제92호로 지정됐는데 1958년 11월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높이가 3.7미터에 달하는 하리 삼층석탑은 신라시대 석탑 양식을 계승한 탑으로 고려 후기에 만들어졌다. 1층 탑신부가 날씬하고 길죽한 것이 특징인데 아쉽게도 상륜부는 완전히 멸실된 상태다.

 

하리 삼층석탑을 조사하다가 흥미로운 점을 하나 발견했다. 기단부를 두고 책마다 다른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와 <두산백과>는 기단을 2층 기단으로 설명하고 있고, <답사여행의 길잡이>라는 책에서는 1층 기단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하리 삼층석탑은 2층기단이 될 수 없어보인다. 단층 기단의 석탑인 것이다. 석탑 앞에 설치된 설명문에도 1층 기단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그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이 잘못 기술된 것인가? 뭐 그럴 수도 있겠지. 하여간 역사트레킹을 하다보면 이렇게 어긋난 것을 찾아보는 재미도 생긴다.

 

바로 옆에 있는 창리 삼층석탑을 살펴보자. 창리 삼층석탑도 하리 삼층석탑과 함께 1958년 11월에 이곳으로 이전된다. 보물 제91호로 지정되어 있는 창리 삼층석탑이야말로 기단부가 2층으로 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제작된 이 탑은 신라 석탑 양식에서 벗어나 좀 더 독특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1층 기단을 굄돌이 받치고 있는데 이 굄돌들은 단일 석재가 아니라 여러개의 돌로 이루어져있다. 그래서 얼핏보면 그 부분이 금이 간 것처럼 보인다. 하리 삼층석탑처럼 창리 삼층석탑도 상륜부가 다 멸실됐다. 아쉽다.

 

두 개의 탑까지 봤으면 영월공원 탐방이 종료된다. 영월루에서 시원한 남한강변도 보고, 보물로 지정된 두 개의 탑도 볼 수 있는 영월공원... 여주를 방문하실 기회가 있으시면 꼭 한 번 가보셨으면 좋겠다. 후회하지 않으실 것이다. 입장료도 없다...ㅋ

 

 

 

 

 

 

* 두 개의 탑

 

 

 

 

 

 

 

* 남한강

 

 

 

 

 

 

 

 

 

 

 

 

 

* 고달사지 석불대좌

 

 

 

 

 

 

 

 

2021년 5월 27일 목요일

 

3일간의 강원도 평창 오대산 일대 탐방을 마친후 경기도 여주로 향했다. 벼르고 있던 여주 고달사지를 찾아가려고 한 것이다. 아시분들은 아시겠지만 뚜벅이들에게 답사여행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해당 문화재가 읍내 근처에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니까. 하루에 서너편밖에 없는 시골버스를 놓쳤다가는... 택시를 타라고? 돈이 어딨어!

 

지도를 검색해보니 그나마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양동역에서 고달사지로 가는 버스편을 타는게 제일 나은 듯싶었다. 하지만 필자의 뜻대로 됐겠는가? 뭐 워낙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난터라 새삼스럽지도 않다. 결론적으로 말해 버스를 잘못타고 해서 2시간 이상을 걸었고, 고달사지에는 해가 진 이후에 도착했다. 그래서 사진들이 다 어둡게 나왔다. 이렇게 뚜벅이들은 문화재 답사하기가 어렵다.

 

내리는 곳을 지나쳐서 급하게 버스에 내렸다. 그런데 알고보니 필자가 탔던 버스는 원래부터 고달사지까지 가지 않는 버스였다. 가는 방향만 비슷할 뿐 하차해서 약 4km 이상을 걸어가야 했다. 혼자 궁시렁거리면서 방향을 다시잡고 이동을 했는데 옆쪽으로 무언가 보이는 것이다.

 

"앗! 버스를 잘 못 탄 이유가 있구만. 저걸 보려고 여기에 내리게 된 거였어!"

 

선돌이었다. 여주 석우리 선돌. 경기도 기념물 제132호로 지정된 석우리 선돌은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 알려졌다. 입석이라고 불리는 선돌은 옛 선인들의 신앙의 대상이었다. 이를 두고 거석숭배문화라고 부른다. 석우리 선돌이 자리잡고 있는 곳은 주위 산들이 완만하게 둘러져있고, 앞으로는 금당천이 흐르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예전부터 마을이 형성됐고, 그 주민들이 선돌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선돌 인근에는 마고 할멈이 물레질을 했다는 넓은 돌이 있는데 이 대석은 제단으로 쓰였을 거라고 추측된다.

 

석우리 선돌은 높이가 2.45미터라 그렇게 크지는 않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옛 선인들의 신앙의 대상을 만날 수 있어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선돌이 필자를 불렀나, 아니면 필자가 선돌을 불렀나... 한편 옛날 표지판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표지판에는 '여주군석우리선돌'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됐을 때가 1992년이었으니 '여주시'가 아니라 '여주군'으로 표기된 것이다. 여주군이 여주시로 승격된 시기는 2013년 6월이었다.

 

 

 

 

 

 

 

* 석우리 선돌

 

 

 

 

 

 

 

 

우여곡절 끝에 고달사지에 도착했다. 이미 해가 거의 진 상태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잘못하면 또 심령사진처럼 이상한 사진만 찍게될 거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고 산세도 가늠해보고... 이런 것도 없이 그냥 빠르게 셔터를 눌렀다. 큰 폐사지를 빠르게 움직이며 사진을 찍어댔다.

 

혜목산 아래 넓직하게 자리잡고 있던 고달사는 764년, 신라 경덕왕 23년에 창건됐다고 전해진다. 고달사는 남한강 물길과 가까이에 있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이곳의 관리를 위해 사찰의 건립을 하였는데 유명한 신륵사도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신륵사, 고달사, 법천사, 흥법사, 거돈사 등등... 남한강 수계에는 큰 사찰들이 들어섰고 고려시대에는 더 크게 번성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갔고 사찰들도 쇠락하기 시작했다. 현재 신륵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폐사되었다. 그래서 남한강 수계를 따라가면 폐사지들을 여럿 만날 수 있다. 폐사지 답사는 역사의 시간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여행이다. 하지만 폐사지라서 그런지 좀 쓸쓸하다. 가을 낙엽이 날릴때 행하면 아주 더 쓸쓸할 거다. ㅋ

 

고달사(高達寺)는 '도의 경지를 통한다'라는 뜻을 가졌다. 고달사에는 석조물들이 많았는데 모든 석물들은 석공 '고달'이 다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석공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죽는 줄도 모르고 석물 만들기에 매달렸다. 이윽고 석조물들은 다 완성됐고 고달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다. 이후 그는 도에 통달했으니, 이에 고달사가 됐다는 전설따라 삼천리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달사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석불대좌이다. 보물 제8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지 석불대좌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좌이다. 높이가 1.57미터인 고달사지 대좌는 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다른 석조대좌들이 원형이나 팔각형으로 되어 있는 것과 다른 면모다. 비교적 원형이 잘 갖추어져 있고 그 모양새가 세련돼 고달사지에서 가장 눈에 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보니 사각형 석불대좌는 강릉에 있는 안국사지에서도 보았다. 안국사지는 관음리 5층석탑이 있는 곳인데 이 폐사지에도 사각형 석불대좌가 있는 것이다. 안국사지의 석불대좌는 고달사지 대좌보다 규모는 작았고 세련미도 좀 떨어지긴 했다. 그래서인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데도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안국사지를 방문했을 때도 어두운 밤이었고, 고달사지를 방문했을 때도 해가 떨어진 뒤였고... 그래서 사진이 다 심령사진처럼 찍혔고...ㅋ

 

 

 

 

 

 

 

* 원종국사혜진탑비

 

 

 

 

 

 

 

정말 사진들이 엉망이라 사진을 내거는 게 좀 민망할 정도다. 그래도 보물 제6호로 지정된 원종국사혜진탑비는 좀 언급해야겠다. 옛날 고달사지 사진을 보면 원종국사혜진탑비는 현재의 모습처럼 생기지 않았다. 몸체라 불릴수 있는 비신 부분이 없었다. 그래서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 있었다. 몸체가 없었지만 워낙

귀부와 이수가 커서 그랬는지 마치 거북이 장갑차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2014년에 비신이 복제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사실 비신은 1915년에 넘어져 8조각으로 깨졌다고 한다. 무슨 조각 피자도 아닌데 8조각이나... 그렇게 훼손된 오리지널 비신은 이후 정비가 됐고, 경복궁을 거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종대사 찬유는 신라말에 태어나 고려 광종 때 입적을 하셨는데 그때 나이가 90세라고 한다. 광종은 그를 왕사라 삼았고, 그가 열반에 이르자 원종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달사는 원종대사 때 크게 중창이 됐던 것이다.

 

옛날 자료에는 고달사지 일대가 전부 논과 밭으로 나온다. 하긴 폐사지는 평평하니 곡식을 기르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고달사지 일대가 대대적으로 발굴되고, 답사지로 각광을 받게된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어떤 남자가 차에서 내려 말을 건냈다.

 

"별보러 오셨어요?"

"예, 별이요?"

"천문동호인 아니세요?"

"아닌데요. 저는 문화재 보러 왔는데요."

 

알고보니 고달사지 주차장이 별을 보는데 딱 좋은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날씨가 좋은 날에 천문동호인들이 간간이 와서 별을 본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고달사지는 아주 컴컴했다. 그 흔한 가로등 시설도 없었다. 그러니 별 보러오지.

 

"여기서 고달사지라고 폐사지의 메카같은 곳이에요. 그래서 저는 문화재 탐방하러 온 거죠."

"그렇군요. 저는 별 보는 거 좋아해서 가끔 이곳에 왔어요. 주차장도 넓어가지고 장비 세팅하기도 좋고 하니까요."

 

한 장소를 두고 서로가 다르게 이용을 했다. 그래도 폐사지에 왔으니 별보는 것보다는 문화재를 보는게 제격이 아니겠나!

 

후일담) 버스가 끊긴지 오래고 해서 신륵사 관광지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그곳에 가면 숙소가 있을 거 같아서. 약 10km 정도가 떨어져 있었는데 열심히 걸어갔다. 다행히 하천 뚝방길이 잘 되어 있어서 안전하게 갈 수 있었다.

 

알고보니 석우리 선돌 앞에 흐르고 있던 금당천을 따라 걷고 있었다. 석우리는 상류였고 신륵사 방향은 하류쪽이었다. 이 일대도 고달사지처럼 아주 컴컴했다. 하긴 인적도 드문 곳에 무슨 가로등이 있었겠는가! 그래서 금당천이 무척 고마웠다. 안전하게 갈 수 있게 뚝방길이 되어 있으니. 이름도 얼마나 이쁜가, 금당천!

 

그렇게 어두컴컴한 금당천을 따라 걷는데... 보름달이 너무 예쁜 것이다. 이날 보름달은 '슈퍼블러드문'이라고 대보름달이었다고 한다. 주위가 어두우니 보름달이 더 명징하게 보였던 것이다. 별 대신 달을 본 것이다.

그날 뚝방길 걷기가 재밌었나보다. 아직까지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우연하게 인조반정과 관련이 있는 원두표의 묘도 확인해두었다. 원두표는 창의문을 도끼로 부수고 도성으로 처음 입성한 무장이었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 창의문 앞에서 항상 원두표이야기를 했었는데 그의 묘가 경기도 여주에 있는지는 처음 알았던 것이다.

 

나중에 기회가되면 금당천을 한 번 더 걸어보고 싶다. 야간에, 그것도 대보름달이 뜰 때 말이다. 요즘은 야간트레킹을 자제하려고 하는데 그래도 금당천은 야간에 걸어야 더 재밌게 걸을 수 있을 거 같다.

 

 

 

 

 

 

* 고달사지 석조

 

 

 

 

 

 

 

* 고달사지 승탑

 

 

 

 

 

 

 

 

* 원두표 묘지: 사진 오른쪽 상단에 달이 보인다. 사진으로 찍으니 작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말 큰 보름달이었다.

 

 

 

 

 

 

 

 

 

 

 

 

* 월정사 8각9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

 

 

 

 

 

 

 

 

* 전나무숲

 

 

 

 

 

 

 

2021년 5월 25일 화요일

 

전날 동해 두타산 무릉계곡 탐방을 한 후 오대산이 있는 평창으로 이동했다. 오대산이 있는 평창군 진부면으로 향했는데 오랜만에 KTX를 탔다. 동해역 -> 진부역까지 탑승했는데 생각보다는 요금이 비싸지 않았다. 저렴하게 KTX를 타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이다. 고속열차가 왜이리 느리지? 무궁화호랑 별 차이가 없네.

 

요금이 저렴한 이유가 있었다. 동해 -> 강릉 구간은 단선 철도다. 양방향 선로가 아니라 앞에서 기차가 오면 비켜줘야 하는 하나짜리 선로라는 것이다. 그러니 KTX가 느릿하게 운행됐던 것이다. 물론 강릉 이후 구간부터는 복선이라 KTX다운 속도로 내달렸다.

 

진부역에 내리니 밤 10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왜 평창군 진부면에 왔는가? 오대산에 가려고 왔다. 오대산이 가까워서 그런지 진부역의 다른 명칭은 오대산역이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오대산을 방문했다. 2014년 가을경에 방문하고 다시 왔으니 7년 만이다. 물론 2014년 이전에도 오대산을 방문했었는데 그때는 비로봉(1,565m)을 오르려고 왔었다. 이와 달리 2014년에는 선재길을 걸으려고 방문했다. 오대산 선재길이 2013년 10월경에 개통을 했는데 개설 1년만에 단풍의 명소로 입소문을 엄청 탄 것이다. 이에 필자도 단풍 구경을 갔던 것이다.

 

예전부터 오대산은 단풍의 명소로 손꼽이는 곳이었다. 그런 오대산에 계곡길을 따라 도보여행길인 선재길이 개설이되니 도보여행자들은 신이 날 수밖에! 가을이 깊어갈수록 선재길의 단풍도 더 깊은 빛깔을 내고 있었다. 맑은 계곡물과 어우러진 오색빛깔 단풍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 아름다워 눈물이 날 정도였다. 길을 걷고 있으니 근심걱정이 계곡물 위로 떠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이 얼마나 좋은가!

 

가을이 좋으면 다른 계절도 다 좋다. 봄여름가을겨울이 다 자신의 색깔을 가지고 스스로를 뽐내는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5월말에 왔으니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그래서 초록의 싱그러움을 한껏 기대하고 왔다. 과연 그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유유히 흐르는 오대천 계곡물, 그 사이로 퍼지는 싱그러운 피톤치드의 향...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1975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오대산은 다섯개의 대(臺)가 모여있는 곳이다. 중심인 중대(中臺)를 동대, 서대,남대,북대가 둥글게 두르고 있는 형상이다. 그래서 오대산(五臺山)이라 불린다. 중대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 연꽃잎이 감싸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하여 오대산은 천하 명당이라고 불린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 실록을 보관하던 오대산 사고도 있었다.

 

이렇게 오대산이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게 된 건 자장율사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장율사는 643년(선덕여왕12)에 당나라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가지고 귀국한 후 오대산에 진신사리를 모시는 절을 짓는다. 그곳이 바로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이다. 상원사 적멸보궁이라고 더 많이 알려진 곳이다. 한편 자장율사는 경주 황룡사9층목탑 건립을 주도하는 등 신라 불교 진흥에 큰 공헌을 했다.

 

오대산은 문수보살 신앙의 중심지로 불리고 있다.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에서 수도를 했고 그 자리에 월정사가 창건된 것이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화신으로 코끼리를 타고 다니시는 분인데 동자의 모습으로 현세계에 나타나신다고 한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조는 만났다고 한다. 등까지 밀어줬다고 한다. 오대산 선재길을 찬찬히 걸어가면서 관련된 이야기를 알아보자.

 

 

 

 

 

 

* 선재길

 

 

 

 

 

 

 

* 선재길

 

 

 

 

 

 

 

선재길은 2013년 가을에 개통된 도보여행길로 월정사와 상원사를 연결하는 트레일(오솔길)이다. 선재길은 스님들이 월정사와 상원사를 오갈 때 다니던 옛길이었다. 월정사가 643년, 상원사가 724년에 창건됐으니 길 자체가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길인 셈이다. 오대산은 산세가 그리 험하지 않다. 부드러운 흙산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선재길도 부드럽게 걸어갈 수 있다.

 

'선재'라는 말도 불교용어다. 동자인 선재는 지혜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표상으로 <화엄경>의 중심인물이다. 월정사를 창건한 자장율사는 선재동자의 구도행각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뒤뜰에 53그루의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53은 선재동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만난 선지자의 숫자였다. 정리를 해보면, 옛 스님들이 오가던 선재길을 걸으며 '나를 찾아보는' 깨달음의 시간을 가져보자는 것이다. 안내문에도 선재길을 걸으며 선재동자처럼 깨달음을 얻어 보라고 적혀 있었다.

 

그 깨달음을 찾아 본격적으로 선재길을 걸어보자. 첫번째 탐방지는 전나무숲으로 유명한 월정사다. 일주문을 지나면 월정사 전나무숲이 시작되는데 시내버스는 일주문을 지나친다. 그래서 월정사 정류장에서 내려 일주문 방향으로 역순으로 이동했다. 주차장에서 다리를 건너기 전에 주차장 방면 전나무 숲길로 접어들 수 있다. 이 숲길은 메인이 아니다. 메인 숲길은 하천 반대편에 있다. 한마디로 오대천을 사이에 두고 메인과 사이드 전나무숲이 있는 것이다.

 

일주문을 통과하니 더 울창한 전나무숲이 등장했다.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서 있는 전나무들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 전나무숲은 '천년의 숲'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약 1,700여 그루의 전나무에서 발산되는 알싸한 나무향이 탐방객의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준다. 전나무는 상록수라 사계절 내내 녹음을 유지하지 않던가. 꼿꼿함 속에 피어나는 푸르름을 사시사철 만끽할 수 있다니! 전나무숲이 주는 감동만으로도 월정사는 방문할 가치가 있는 곳이다.

 

전나무숲은 약 1km 정도에 달했다. 이후 사천왕문을 지나 월정사 중심영역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어째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보이지 않는다. 본전인 적광전도 연륜이 느껴지지 않았다. 월정사가 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아니었던가?

 

그렇다. 월정사의 전각들은 한국전쟁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수많은 전란으로 소실과 중건을 반복했던 월정사였다. 그러다 한국전쟁, 그 중에서도 1.4후퇴 당시 작전상의 이유로 국군이 월정사의 전각들을 불태웠다. 이렇게 전쟁이 무서운 것이다. 전쟁때문에 너무나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니까.

 

유명한 탄허 스님이 1964년에 본당인 적광전을 다시 짓는 것을 시작으로 월정사의 중건이 시작되었다. 오대산과 인연이 많으셨던 탄허 스님은 1983년. 세속 나이로 71세에 월정사 방산굴에서 속세과의 인연을 마감하셨다.

 

월정사 적광전은 좀 독특하다. 통상적으로 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이 본존불로 모셔지는데 월정사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찰에 가면 대웅전은 꼭 가본다. 그 대웅전에 모셔진 분이 석가모니불이다. 이 부분이 쉽게 다가오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사찰에는 무조건 대웅전이 있어야 하고 그곳에 모셔진 분이 최고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다. 이 부분은 나중에 한 번 쫘~악 한 번 설명해보겠다.

 

건물에서 느껴졌던 헛헛한 느낌은 월정사 팔각구층(8각9층)석탑과 보살상 앞에 가면 싹다 사라질거다. 높이 15.2미터의 이 거대한 석탑은 주위의 전각들을 호령하듯 절 마당 중심에 우뚝하게 솟아있다. 그 앞으로는 석조보살좌상이 인자한 미소를 품고 그윽하게 9층석탑을 바라보고 있다.

 

 

 

 

 

 

 

* 월정사 8각9층석탑

 

 

 

 

 

 

 

 

* 월정사 전나무숲: 전나무숲과 성황당

 

 

 

 

 

 

 

8각9층석탑은 말그대로 탑신이 8각형으로 되어 있다. 신라시대 대표적인 석탑인 석가탑을 생각해보자. 생일케이크 상자처럼 탑신이 네모꼴이다. 하지만 월정사 9층석탑은 표준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다각형으로 탑신부를 조각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제작된 석탑은 경천사지10층석탑과 원각사지10층석탑 등이 있다. 교과서에서 한 번 쯤 다보셨을 것이다. 혹시 보시면서 이런 생각들을 하셨을지 모른다.

 

'이 탑들 정말 큰데! 커서 사진에 다 안 나와!'

 

기회가 되시면 탑돌이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 천천히 돌면서 9층석탑을 관찰하는 것이다. 석조보살의 은은한 미소와 아름다운 뒤태를 살펴보는 것도 잊지 말자. 또 석조보살-9층석탑-적광전이 일직선상으로 늘어서 있는 부분도 놓치지 말고 꼭 눈여겨 보자. 주위 산세와 어우러진 석탑과 보살상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보인다. 그렇게 고운 자태를 선사하는 8각9층석탑은 국보 제48호로 석조보살좌상은 보물 제1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제 본격적인 선재길 탐방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오대산은 단풍의 명소다. 그래서 선재길도 가을에 오면 제일 좋다. 선재길을 걸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걷다보면 오색찬란한 단풍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단풍을 바라보며 집착과 번뇌를 잊어버리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섶다리, 징검다리 같은 정겨움을 더하는 구조물들이 있었지만 선재길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계곡이다. 시원스레 물줄기를 뿜는 계곡길 주위로 울긋불긋하게 펼쳐진 단풍나무 숲을 지날 때의 매력이란! 그 매력에 빠지며 걷다보면 무아지경에 이를지 모른다. 맑은 계곡물 위로 붉은빛을 머금은 단풍잎 하나가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곳이 무릉도원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니까.

 

오대산 선재길은 약 9km 정도에 달하는데, 계곡을 끼고 있는 길치고는 경사도가 상당히 완만하다. 그래서 휴식시간을 갖는다고 해도 3시간 30분이면 완주가 가능하다. 필자는 넉넉히 아예 4시간을 잡고 이동했다. 계곡길이란 한계 때문에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에는 통행에 제한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지난 수해때 망실된 것으로 보이는 몇몇 시설물들은 아직까지 복구가 되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여름에 계곡을 끼고 걷는 길은 조심해야한다.

 

그렇게 선재길이 끝나는 지점에 상원사가 자리잡고 있다. 전통찻집 옆에 관대걸이 혹은 갓걸이라고 불리는 비석이있는데 이는 상원사 계곡에서 목욕을 했던 세조가 의관을 걸어두웠던 비석이라고 한다.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이후 피부병에 걸리고만다. 이에 오대산 상원사 계곡에 와서 목욕을 하게된다. 이때

숲에 있던 동자승을 불러 자신의 등을 밀게한다.

 

"어디 가서 임금의 몸을 씻겨주었다고 말하지 말거라."

"임금께서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직접 보았다고 말하지 마세요."

 

오대산이 문수보살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설화라고 할 수 있다. 그나저나 세조는 꽤나 호사를 누린 셈이다. 문수보살은 깨달음의 지혜를 품고 있는 분인데 그분한테 등을 밀게 했다니... 뜻하지 않게 VIP 서비스를 받은 것인가? 정작 문수보살을 그토록 친견하고했던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 상원사

 

 

 

 

 

 

상원사는 월정사와는 또다른 멋이 있다. 산 봉우리가 부드럽게 감싸고 있어 경내 안으로 들어가면 포근한 느낌이든다. 상원사 경내로 들어섰으면 상원사 동종부터 찾아보자. 725년에 만들어진 상원사 동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으로 국보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이 종은 안동에 있었는데 1469년(예종1)에 상원사로 옮겨왔다.

 

보호각 안에 있어 유리너머로 보아야 하지만 아름다운 그 자태는 가둘 수가 없어보인다. 특히 중심부에 새겨진 비천상의 흥겨운 연주는 주파수만 잘 맞추면 당장이라도 들을 수가 있을 거 같다. 혹시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주파수 대역으로 연주를 하시나? 참고로 비천(飛天)은 한자에서도 보이듯 날아다니는 천상인을 말한다.

 

상원사 동종이 제작됐을 때는 신라 성덕왕 24년이었는데 성덕대왕 신종(국보제29호)보다 46년이나 앞선 것이다. 성덕왕이 성덕대왕인가? 그렇다. 그리고 성덕대왕 신종은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 아실 것이다. 에밀레종!

 

중심지답게 상원사에서는 문수보살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 된다. 그 중심에는 국보 제221호로 지정된 목조문수동자좌상이 있다. 세조가 목격했다는 동자의 모습을 나무로 조각을 했다고 하는데 둥근 꼭지 두 개를 딴 머리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앳띈 동자의 모습이 맞긴하지만 한편으로는 후덕한 보살님의 낯빛도 묻어나온다.

 

목조문수동자좌상은 1466년(세조12)에 의숙공주가 봉헌을 했다고 전해진다. 의숙공주는 세조의 둘째 딸이다. 이렇게 봉헌자와 봉헌시기가 구체적으로 알려질 수 있었던 건 동자상 안에서 유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조사를 하다 그 안에서 서책, 기원문, 저고리 등등의 복장 유물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 유물들은 일괄로 보물 제793호로 지정되었다. 관대걸이를 비롯하여 동종, 목조문수동자좌상까지 상원사는 세조와 관련된 유물들이 참 많은 곳이다.

 

상원사가 높은 고지대에 있어서 그런지 전망대에서 주위를 둘러보는 느낌이든다. 주위가 아늑하다. 좋은 기운을 받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곳이 문수 신앙의 요람이자 천하 명당으로 불리는 것인가? 이렇게 좋은 기운을 받으며 걸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오대산 선재길이다.

 

 

 

 

 

 

* 상원사 동종

 

 

 

 

 

 

*상원사

 

 

 

 

 

 

 

 

 

 

*** 도움말

 

1. 오대산 선재길: 약 9km / 예상이동시간 3시간 30분 정도.

2. 동서울터미널에서 평창군 진부면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음. 소요시간 2시간 30분.

3. 진부면 공용터미널에서 월정사 입구까지 시골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음. 소요시간 약 25분.

4. 필자는 월정사 -> 상원사 방향을 추천함. 상원사가 버스 종점이기 때문임.

 

 

 

 

 

 

 

 

 

 

* 쌍폭포

 

 

 

 

 

 

 

2021년 5월 24일 월요일

 

전날 강릉에서 동해로 이동하여 숙박을 했다. 이날은 동해시의 자랑인 두타산 무릉계곡을 탐방하는 날이다.

도대체 얼마나 멋들어졌으면 무릉계곡(武陵溪谷)이라고 불렸을까! 명칭만으로도 풍유객들의 발걸음을 확 이끈다. 탐방 순서는 이렇다.

 

무릉반석(금란정) -> 삼화사 -> 학소대 -> 관음폭포 -> 쌍폭포 -> 용추폭포

 

무릉계곡은 두타산(1,352m)과 청옥산(1,403m)이 빚어놓은 천혜의 절경이다. 둘 다 해발고도가 천 미터가 넘는 험준한 산이라 자칫 무릉계곡도 난이도가 높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무릉계곡은 느긋하게 계곡 트레킹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풍경 하나하나가 다 아름답고 귀해서 일부러라도 발걸음 하나하나도 천천히 두고 싶은 곳이다. 그런 곳이기에 1977년 3월 17일에 국민관광지1호로 지정되었고, 이후 2008년 2월 5일에는 명승 제 37호로 지정되었다.

 

동해시내에서 무릉계곡으로 향하는 시내버스는 상당히 많다. 대신 시내권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이동시간은 30분 이상이 소요됐다. 잘 확인을 하고 이동을 하시기 바란다.

 

매표를 한 후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금란정과 무릉반석이라고 불리는 너럭바위다. 금란정은 금란계(金蘭契) 회원들이 세운 정자인데 좀 사연이 있는 건축물이다.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으로 이 지역의 향교가 폐쇄가 됐다. 이에 울분에 찬 유림들이 금란계를 조직한 후 모임 장소로 쓰일 수 있는 건물을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해방 이후에야 금란정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금란정은 북평에 있었다. 혹시 들어보셨을지도 모른다. 북평 5일장. 바로 그 북평에 금란정에 서 있었는데 1956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건을 했다. 북평은 동해항과 가까운데 직선거리로 약 2km도 되지 않는다.

예전 2012년도에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 강릉을 거쳐 동해로 이동을 했는데 북평에서 1박을 했었다. 숙소에서 잔 게 아니라 후미진 곳에서 텐트치고 잤었다. 그곳이 바로 북평 성당이었다. 성당 내에 공터같은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것이다. 관계자분에게 사정 말씀을 드렸을 때 필자를 좀 기특하게 보셨던 걸로 기억을 한다. 별로 안 기특한데...ㅋ

 

금란정을 지나 무릉반석을 보러갔다. 계곡의 너럭바위가 이렇게도 평평하고 크다니! 자연이 빚은 천연의 대운동장 같다. 한 천 명 정도가 동시에 앉아도 끄떡없을 거 같다. 높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주위를 감싸고 유유히 계곡물이 흐르고 있으니 누구나 다 풍유객이 될 수밖에... 그래서인지 무릉반석 곳곳에는 글씨가 새겨져있다. 풍유객들이 이런 평평한 바위를 그냥 지나쳤겠는가! 그렇게 흔적을 남긴 이 중에는 매월당 김시습 선생도 있었다. 또한 조선시대 명필 중에 한 명이었던 양봉래의 글씨도 있다. 양봉래는 '무릉선경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境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는 풍경과 지명에 딱 걸맞은 글씨를 남겼다.

 

 

 

 

 

 

 

* 삼화사: 철조노사나좌불

 

 

 

 

 

 

 

* 삼화사3층석탑

 

 

 

 

 

 

 

이제 삼화사(三和寺)를 보러가자. 신라 자장율사에 의해 건립된 삼화사는 그 창건 시기가 642년(선덕여왕 11)에 이른다. 삼화사는 흑연대(黑連臺) 혹은 삼공사(三公寺)으로도 불렸는데 이와 관련하여 각기 다른 창건설화가 있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율사가 동해안 일대를 두루 다니다 두타산에 이르러 절을 지으니 그것이 바로 흑연대라는 것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사찰이라하면 '~사', '~암', '~정사'로 끝나야 하는데 '~대'로 끝나니까. 이에 약사불삼형제의 이야기가 있다. 병을 치유해주는 약사부처님이 삼형제로 오셨다는 이야기인데 SF 어드벤처같은 스토리지만 잠깐 언급해본다.

 

약사삼불인 백(伯)·중(仲)·계(季) 삼형제가 멀리 이국에서 무릉계곡으로 들어온다. 삼형제는 각기 색깔이 다른 연꽃을 들고 왔는데 첫째는 흑련(黑蓮), 둘째는 청련(靑蓮), 셋째는 금련(金蓮)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후 삼형제가 머무른 곳은 각각 흑련대, 청련대, 금련대가 됐다. 자장율사가 흑련대를 창건했다는 이야기는 약사불 삼형제 중 첫째의 스토리와 서로 맞물린다.

 

두번째는 삼공사와 관련된 이야기다. 불교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신라 말기에 유행했던 구산선문에 대해서 한번쯤 들어보셨을 것이다. 구산선문은 경전 위주의 교종과는 달리 수행에 중심을 둔 선종의 9개 선문을 말한다. 한마디로 신라 말기에 9개의 선종 문파가 산을 중심으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수행하기에는 산이 딱이지 않은가.

 

구산선문 중 사굴산파를 연 범일국사라는 분이 계시다. 범일국사가 개창한 굴산사는 강릉에 위치해있는데 도보여행길인 강릉바우길 6구간을 걷다보면 닿을 수 있다. 강릉바우길 6구간의 다른 명칭은 '굴산사지가는길'인데 네이밍에서도 보이듯 현재 굴산사는 폐사가되었다. 그래도 그곳에 가보면 굴산사지 당간지주가 우뚝하게 서서 도보여행자들을 반겨준다.

 

범일국사가 무릉계곡에 사찰을 창건하니 그곳이 바로 삼공사였다. 고려 건국 이후 삼공사는 드디어 삼화사(三和寺)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름을 바꾼 이는 왕건이었다. 왕건이 삼공사에서 후삼국의 통일을 기원하였고 이후 '세 나라를 하나로 화합시킨 영험한 절'이라는 뜻의 삼화사로 개칭을 한 것이다.

 

그렇게 좋은 뜻을 가진 삼화사지만 아픔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계곡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서 그런지 홍수 피해를 입기도 했고, 화재를 당해 다시 고쳐짓기도 했다. 1907년도에는 방화에 의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사찰이야 목조건물이 대대수라 화재에 항상 취약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하지만 방화라니! 누가 감히 천년고찰에 불을 질렀단 말인가!

 

일제가 불을 질렀다. 1907년이었다. 동해안 지역에서 활동했던 의병들이 삼화사에서 도움을 받게된다. 이에 일본군은 삼화사를 불태워버린 것이다. 이런 만행을 저지르다니! 부처님이 노할 일이다. 산길로 한 시간 정도 올라가면 두타산성이 있는데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이 지역 의병들의 거점이라고 하니 삼화사 일대는 일본과 연관이 많이 곳이라고 할 수 있다.

 

 

 

 

 

* 두타산 무릉계곡 숲길

 

 

 

 

 

 

 

* 학소대

 

 

 

 

 

 

 

삼화사의 시련은 여기가 끝이아니다. 사실 삼화사는 1977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을 했다. 원래 자리는 동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인데 이곳에 시멘트 공장이 들어서게 되어 옮기게 된 것이다. 수많은 시련을 견뎌냈던 천년고찰이 시멘트 공장에 밀려나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사천왕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가면 본전인 적광전이 있고 그 앞에 3층 석탑이 보인다. 보물 제1277호로 지정되어 있는 삼화사 3층석탑인데 이 탑도 사연이 많다. 1977년 시멘트 공장을 피해 삼화사가 이전을 했을 때 함께 이동을 한다. 하지만 터를 잘못 잡았는지 그 뒤 20년 후인 1997년에 현재의 자리로 다시 이건을 한다.

두 번이나 자리를 옮겨서 그런가? 현재의 자리가 제자리인 거 같다. 높이 4.8미터짜리 3층석탑이 본당 앞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보니 중심이 꽉 잡힌 느낌이다.

 

후기 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니 3층석탑도 천 년의 시간을 버틴 셈이다. 삼화사 석탑은 좀 특이한 점이 있다. 석재가 석회암이다. 우리나라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화강암이 아닌 석회암으로 석탑을 쌓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1977년도 삼화사가 이전을 했던 일을 생각해보시라. 시멘트 생산한다고 천년고찰을 이전을 시키지 않았던가. 시멘트의 원료가 바로 석회암이다.

 

석재의 특성상 화강암보다 석회암이 더 풍화에 취약하다. 삼화사 3층석탑도 마찬가지다. 군데군데 훼손이 됐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는 큰 훼손없이 잘 드러나있다. 상륜부인 찰주 부분이 두드러져 보이는데 꺾인 찰주에 걸린 보주 하나가 인상적이다. 찰주는 탑의 상륜부에 장식물들을 꽂기 위해 세운 쇠로 만든 기둥이다. 마치 피뢰침처럼 생겼다. 보주는 상륜부를 구성하는 장식물로 찰주에 쏙 끼어넣는다. 잘 연상이 안되면 여의주를 생각하시면 된다. 삼화사 3층석탑의 찰주에는 보주 하나가 달랑 하나 걸려있다. 얼핏보면 까치밥처럼 보인다.

 

이제 본당인 적광전에 가보자. 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곳이다. 꼭 대웅전이 사찰의 본당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극락전이 본당이 될 수도 있고, 약사전이 본전이 될 수도 있다. 부처님은 한 분만 계시는게 아니니까. 불교는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지 않은가.

 

삼화사 적광전에는 보물 제1292호로 지정된 철조노사나좌불이 있다. 은은한 미소를 짓는 부처님을 잘 표현됐다. 어떤 솜씨좋은 이가 만들었을까. 구부리기도 쉽지 않은 거친 질감의 철로 저렇게 멋진 작품을 만들 수 있다니. 그저 감탄사가 나올 뿐이다. 한편 노사나불은 비로자나불의 다른 이름이다.

 

삼화사를 나오면 본격적으로 무릉계곡을 걷게 된다. 두타산과 청옥산이 품고 있는 곳이라 그런지 무릉계곡 일대에는 폭포가 많다. 관음폭포, 쌍폭포, 용추폭포 등등... 기암괴석들도 만날 수 있다. 학소대, 병풍바위, 만물상 등등... 울창한 계곡숲길을 따라가면서 만나는 폭포는 탐방객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 기암괴석들은 눈을 즐겁게 한다.

 

무릉계곡 탐방은 쌍폭포와 용추폭포에서 절정에 이른다. 부드럽게 완경사로 이어진 탐방로를 따라가다 쌍폭포를 만나고, 이후 용추폭포에 다다른다. 힘차게 쏟아지는 폭포수 소리를 눈을 감고 들어본다. 귓전을 때리는 폭포 소리에 속이 다 시원해진다. 유량이 많으면 더 경쾌한 소리를 감상할 수 있으니 비가 온 뒤에 무릉계곡을 탐방하면 더 다이나믹할 거 같다.

 

이렇게하여 신선놀음같던 두타산 무릉계곡 트레킹이 끝이났다. 원점회귀형 코스라 왔던 길을 다시 돌아와야 하지만 그것조차도 좋다. 워낙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라 올라가는 길도 내려가는 길도 모두 다 즐겁기 때문이다. 그냥 가기가 아쉬울 정도다. 이참에 그냥 무릉도원에서 자리깔고 신선이나 되볼까?ㅋ

 

 

 

 

 

 

* 용추폭포

 

 

 

 

 

 

* 쌍폭포: 쌍폭포중 계단식으로 낙수되는 폭포.

 

 

 

 

 

 

*관음폭포

 

 

 

 

 

 

* 무릉반석

 

 

 

 

 

 

*** 두타산 무릉계곡 가는법

1. 동해시내나 동해역 인근 버스정류장에서 무릉계곡행 시내버스탑승

2. 동해역 기준으로 이동시간은 약 20~30분 정도 소요됨. 배차간격은 약 30분 정도임.

 

 

 

 

 

 

 

 

 

* 정동심곡바다부채길

 

 

 

 

 

 

 

2021년 5월 23일 일요일 / 여행 5일차

 

이전 포스팅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날 관음리5층석탑 탐방을 너무 늦은 시각에 했다. 그러다보니 숙소에 거의 밤 12시경에 들어갔다. 이러니까 여행이 노동이 되버리는거지... 이것도 팔자인가?ㅋ

 

이날은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을 탐방하러 갔다. 바다부채길은 강릉시 강동면에 위치해있는데 정동진과 심곡항 사이에 있다하여 정동심곡 바다부채길로 불린다. 2017년 6월에 개통된 바다부채길은 아름다운 해상 비경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곳이다.

 

강릉시내에서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을 가려면 강릉역에서 정동진역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게 좋다. 하지만 기차가 많이 있지 않다. 차선책으로 남대천강릉교 정류장에서 정동진역행 버스를 타보자. 배차간격이 약 40분 정도라 시간을 잘 맞춰어야 한다. 만약 시간이 좀 엇나가면 인근에 있는 월하거리에 가서 주점부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하긴 배차간격 40분이면 양호한 거지. 하루에 버스가 4번 들어가는 곳을 탐방했을 때를 생각해봐!ㅋ 이 버스는 마을112번인데 강릉역에서도 탈 수 있다.

 

 

 

 

 

* 부채바위

 

 

 

 

 

정동진역으로 유명한 정동진은 해안단구로도 유명하다. 정동진의 해안단구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 437호(2004년 4월 9일)로 지정되었다. 정동진 해안단구는 면적이 넓고, 보존상태가 좋아 천연기념물이 된 것이다.

 

해안단구(海岸段丘)에 대해서 조금만 더 알아보자. 해안단구는 파식, 즉 파도에 의해서 침식이 된 평평한 지형을 말한다. 한자 구(丘)는 '언덕구'다. 이런 평평한 부분이 해수면 아래에 있다 지각작용으로 인해 지금처럼 수면 위로 올라와 해안단구가 된 것이다. 지각이 올라오는 건 '융기'라고 말한다. 올라오는 것과 달리 물이 빠져서 해안단구가 형성되기도 한다. 바닷물이 빠졌다는 것이다. 하여간 지구는 살아있다. 올라오거나 내려오거나 하니...ㅋ

 

넓은 지형이 드러나서 그런지 정동진 해안단구에는 대형 크루즈선도 올려져있다. 여객선의 외형으로 만들어진 썬크루즈리조트를 말하는 것이다. 급경사였다면 이런 형식의 리조트를 건설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릉을 갈 때마다 항상 그 리조트에서 숙박을 하고 싶었는데... 현실은? 항상 싸구려 여관이었지...ㅋ

 

본격적으로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을 가보자. 바다부채길은 파도가 치는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이 매력이다. 파도가 세게치면 옷에 짠물이 튀기기도 할 정도다. 그런만큼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파도가 거세게 치는 날에는 입장이 불가능하다. 또한 2020년 태풍으로 망실된 심곡 부근 탐방로가 복구가 되지 않아 부채바위까지만 개방이됐다. 2021년 5월 현재의 이야기다. 조속히 복구가 되어 전 구간 탐방이 됐으면 좋겠다.

 

철썩철썩 파도가 치는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다.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은 파도를 좋아하는 사람이 걸으면 좋을 거 같다. 전 구간이 평탄하고, 데크로 만들어져 있어 걷는데 무리가 없다. 하지만 정동매표소 입구 구간의 계단은 '헉' 소리가 난다. 다리에 근육 좀 생길거다...ㅋ

 

ps.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이 좋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속초 외옹치 바다향기로를 더 선호한다. 왜? 외옹치 바다향기로는 공짜니까.

 

 

 

 

 

 

* 정동진 해안단구: 지형이 평평하여 그 위에 썬크루즈리조트가 만들어져있다.

 

 

 

 

 

 

* 정동진역

 

 

 

 

 

 

 

*정동심곡바다부채길: 투구바위. 사진 상단 왼쪽에 있는 바위가 투구바위다.

 

 

 

 

 

 

 

* 정동심곡바다부채길

 

 

 

 

 

 

 

* 정동심곡바다부채길

 

 

 

 

 

 

 

* 정동심곡바다부채길: 정동진 해안단구. 평평한 지형이 드러나보인다.

 

 

 

 

 

 

 

*** 정동심곡 바다부채길 가는법

 

1. 기차: 강릉역에서 정동진역행 기차를 이용. 약 15분 정도 소요됨.

2. 시내버스: 마을112번 탑승(남대천강릉교 정류장 혹은 강릉역정류장)

3. 정동진역에서 썬크루즈리조트 방면으로 걸어감. 약 30~40분 정도 소요됨.

 

 

 

 

 

 

 

 

 

 

* 강릉관음리5층석탑: 심령사진이 아님.

 

 

 

 

 

 

 

2021년 5월 22일 토요일 / 여행 4일차

 

전날 양양에서 강릉으로 이동을 했다. 느그적거렸더니 벌써 오후가 되어버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강도가 낮은(?) 과업을 수행하기로 했다. 강릉 시내권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성산면 관음리5층석탑을 탐방하러 가기로 했다. 지도 검색을 해보니 강릉버스터미널에서 약 5km 정도 떨어져있었다. 5킬로면 쉬엄쉬엄 가더라도 2시간 정도 아닌가! 그래 오늘은 좀 놀면서 탐방하자.

 

관음리5층석탑에 대해서 검색을 하다가 이곳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는 블로그 글을 읽었다. 강릉에 거주하시는 어떤 시민기자가 작성한 기사였는데 그런 글을 쓰셔서 좀 의아했었다.

 

'시내권에서 직선거리로 5킬로 밖에 안 되는 곳이 접근이 어렵다고?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 말이 맞았다. 관음리5층석탑을 찾는데 엄청 고생을 했다. 길을 헤매서 약15km 정도를 걸었던 거 같다. 마지막에는 철조망도 넘어야했다. 10kg가 넘는 배낭을 메고 짧은 다리로 철조망을 넘으려니...ㅋ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했냐? 일단 현지 시민들이 관음리5층석탑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필자한테 그런곳이 있냐고 되묻더라. 그리고 관음리 일대가 상당히 외졌다. 시내권과 가까울 뿐이지 민가도 띄엄띄 엄 있었고 버스편도 몇 편 없었다.

 

강릉남대천에 진입해서 뚝방을 걸었다. 좀 돌아가더라도 뚝방길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이날따라 갑자기 폭염이 몰려왔는지 엄청나게 덥더라. 5월 1일에 설악산 일대에 폭설이 내렸었는데 언제 그랬냐는듯이 20일 만에 초여름 날씨로 변하다니! 이것도 기후변화 때문에 그런 것인가?

 

그렇게 걷다보니 더위를 먹었나? 관음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온 것이다.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이때부터 머리가 찡해지기 시작했다. 대신 다리는 아주 빨라졌다. 지도를 계속 체크를 하는데 계속 뱅뱅거리며 같은 지점을 도는 느낌이 들었다. 막판에는 현지분이 알려주신 철조망을 넘기까지했다. 그렇게 그렇게 관음리5층석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주 늦은 시각에...!

 

관음리5층석탑이 서 있는 자리는 안국사지라고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에는 석탑말고도 돌로 만든 대좌가 있다. 이 대좌에는 예전에 석불이 올려져 있었을 것이다.

 

관음리5층석탑은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가 3.3미터인데 5층 석탑치고는 크기가 작은 편이다. 안타깝게도 5층 탑신 부분이 결실되어 있다. 그래서 크기가 작은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 늦은 시각에 도착해서 그랬는지 사진들이 무슨 심령사진같다. 심야괴담회용 사진인가? 주위에는 불빛 하나 없더라. 대신 산짐승들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계속 들리고... 뭐 이렇게 늦은 시각에 답사를 할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늦게 가면 좋은 사진을 찍기는 어렵지. 카메라가 별로 안 좋으니까.

 

그래도 막판에는 운이 좀 뜨였다. 근처에 사시는 분이 트럭으로 터미널까지 픽업을 해주셨다. 얼마나 고맙던지! 만약 그렇게 안 됐다면 새벽까지 걸어갔을지도 몰라. 택시비 때문에...ㅋ

 

 

 

 

 

 

* 강릉관음리5층석탑

 

 

 

 

 

 

 

* 석불대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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