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과 서소문공원, 광희문과 신당동

 

시체가 나간 두 개의 문, 서소문과 광희문

 

15.04.14 13:52   최종 업데이트 15.04.14 16:20

 

 

 

 

 

 

 

 

 
▲ 서소문 공원 서소문 공원에 있는 순교자현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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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양에는 두 개의 문이 있었다. 무슨 문? 시체가 나가는 두 개의 문이 있었다.

하나는 소의문이라고 불렸던 서소문이고, 다른 하나는 남소문 역할을 했던 광희문이다. 조선시대 한성부에서는 도성 안과 도성 인근 십리 안에는 묘를 쓰는 것을 금지했다. 도성 인근 십리 부근을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했는데, 도성과 성저십리는 한성부의 관할이었다. 만약 도성 안에도 묘를 썼다면, 아마도 남산 같은 경우는 공동묘지가 됐을지 모른다. 그럼 '남산골 샌님'이 아닌 '남산골 처녀귀신'이 같은 괴담이 퍼져 나갔을까?

 

 

 

* 소덕문 터: 지금의 중앙일보 주차장 입구.

 

 

 

 



처형장으로 쓰인, 서소문

서울 시청역에서 <중앙일보> 사옥 방면으로 가다보면 철도건널목이 보인다. 그 건널목을 건너면 공원이 나오는데 그곳이 바로 서소문 공원이다. 서소문 공원은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근린공원 규모의 작은 공원이지만 그 역사성만큼은 대단한 곳이다.

서소문은 소덕문(昭德門) 혹은 소의문(昭義門)으로 불린 사소문 중 하나다. 1396년 태조 3년, 이 문이 지어졌을 때는 소덕문이라 불렸다가 1744년(영조 20)에 문루를 세우면서 소의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자리에서 좀 벗어난 곳에 서소문 공원이 위치해 있는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서소문은 광희문과 함께 시체가 나가는 문 중 하나였다. 하지만 광희문과는 다른 것이 있었다. 처형장으로 쓰였다는 점이다. 서소문, 정확히는 서소문 밖이 처형장으로 쓰였는데 이는 유교 오경 중 <예기>에 언급된 가르침을 적용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예기>에는 '형장은 사직단의 우측이어야 한다'고 적어 놓았는데 서소문 밖이 그 말에 일치되어 조선의 공식 처형장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 서소문 공원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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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유교 경전식 해석 말고 다른 해석도 있다. 서소문에서 의금부나 전옥서(죄수를 관장하는 관서) 등이 가까운 터라 서소문이 처형장으로 쓰였다는 것이다. 지도상에서 보면 사직단이나 서소문이나 둘 다 거의 동일선상에 있는 터라 후자의 의견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렇게 서소문 밖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을 당했다. 신유박해(1801년) 때는 정약용의 셋째 형인 정약종이 이승훈, 최창현 등과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때 정약종의 첫째 아들 정철상도 함께 목숨을 잃게 된다.

기해박해(1839년) 때도 많은 천주교인들이 서소문에서 처형을 당하게 됐다. 정약종의 둘째 아들이었던 정하상과 딸인 정정혜가 이때 참수를 당했다. 처형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정약종의 아내이자 하상, 정혜의 어머니인 유소사도 기해박해 때 목숨을 잃게 됐다.

서소문에서는 신유박해 때부터 병인박해까지 100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처형을 당한다. 그래서 서소문은 천주교 최고의 성지 중에 한 곳이다. 그래서 현재 서소문 공원에는 순교자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2014년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도 서소문 공원을 방문했다. 

 

 

 



 
▲ 서소문 공원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을 기념하여 동판을 새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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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을 둘러싼 갈등들

현재 서소문 공원 일대는 '역사공원' 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지하에 성당을 만들고, 천주교 순교 성인을 위한 기념전시관을 만드는 데 약 500억 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하지만 이 '천주교 성역화' 사업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다. <서소문공원 바로 세우기 범국민대책위원회(아래 범대위)>가 바로 그들이다. 범대위는 서소문에서 생을 마감한 이들이 천주교인들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동학농민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김개남,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 홍경래 난에 연루된 관련자들, 사육신인 성삼문, <홍길동전>의 허균 등이 모두 서소문에서 이승과 작별을 했다고 강조한다. 즉, 서소문 공원이 천주교만의 성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범대위 측과 천주교 측의 입장이 절충될 수는 없을까? 서소문 공원에 천주교 성지 건물과 동학(천도교)을 비롯한 민족 종교의 건물이 동시에 등장할 수는 없을까? 이런 식으로 말이다. A구역은 천주교, B구역은 동학, C구역은 인물 역사관 등등...

자, 이제까지 필자는 서소문 공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서소문 자체보다는 서소문 공원에 대해서 훨씬 더 길게 설명했다. 왜? 서소문은 현재 없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철거됐다. 그래서 현재의 서소문 공원이 옛 서소문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셈이다.

 


 


 
▲ 복원된 성벽 한양 도성의 성곽 중 평지 부분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거의 다 훼손되고 만다. 평지에 있던 서소문도 철거가 되고 만다. 사진에 복원된 성벽은 중앙일보 뒤편에 있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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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소문역사공원범국민대책위원회: 현수막

 

 

 

 

 

우사단 길도 공동묘지?

도성 안에 매장을 하지 말라는 원칙은 잘 지켜진 반면, '성저십리' 원칙은 서서히 무너져 갔다. 그래서 시체가 나가던 서소문과 광희문(光熙門) 인근에는 공동묘지들이 하나 둘씩 들어서게 됐다. 서소문으로 나갔던 시체들은 지금의 아현동 부근에 묻히게 됐다. 광희문에서 나가는 시체들은 신당동이나 왕십리, 이태원 쪽으로 매장됐다. 그러고 보니 언급된 동네들은 야트막한 언덕배기로 되어 있어 공동묘지가 되기에 안성맞춤(?)인 곳들이다. 그래서 이런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지금 한창 핫플레이스로 뜨고 있는 이태원 우사단길도 예전에는 공동묘지가 아니었는지?"

신당동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있다. 지금이야 신당동하면 떡볶이로 유명하지만 예전에는 무당들이 모여 산 곳으로 유명했다. 광희문 밖으로 나온 망자들을 위해, 유족들은 무당들을 불러 굿을 하며 넋을 달랬다고 한다. 광희문 밖은 자연스럽게 하나둘씩 신당이 늘어나게 됐고, 이후 신당이 많다 하여 신당동(神堂洞)으로 불렸다. 이후 갑오개혁 때부터는 한자어가 신당동(新堂洞)으로 바뀌어 이제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편 광희문도 서소문처럼 천주교의 성지다. 옥사를 한 천주교인들의 시신이 광희문 밖에 버려졌고 그 곳이 성지화된 것이다.

이제까지 시신들이 나갔던 두 개의 문에 대해서 알아봤다. 죽은 자들은 그 문을 통해 다시는 도성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죽은 자들은 도성에서 '거주'할 자격이 없었던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서소문은 언제 복원이 될까? 앞서도 언급했듯이 서소문 공원에 500억이 투입된다는데 서소문 복원이 우선이 아닐까?

 
▲ 광희문 평지에 있던 광희문도 훼손됐다, 지난 1975년에 다시 복원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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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희문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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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유도가 원래 섬이 아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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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작가

 

 

 

 

 

 

본문내용

양화대교

 

한강은 서울 한복판을 유유히 흘러가며 사람들에게 많은 것들을 나누어 주었다. 지금이야 모습이 많이 바뀌었지만 여름에는 강수욕장으로 변해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고, 겨울에는 얼음을 채취할 수 있는 일등 장소로 이용됐다. 그렇듯 한강은 예로부터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정선(1676~1759)도 한강을 무척이나 사랑한 인물이었다. 진경산수화란 우리 산천을 우리의 필치로 담아낸 것을 말한다. 진경산수화 이전에는 중국 남방 화풍으로 우리 산천을 담아냈었다.

 

겸재는 65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양천 현감으로 봉직된다. 현감 시절 겸재는 ‘선유봉’, ‘양화환도’ 같은 진경산수화를 그렸는데 그 배경이 됐던 장소가 지금의 선유도와 절두산 일대이다.

 

 

 

 

신선이 노닐던 봉우리, 선유봉

 

선유도-양화대교: 뒤로 당산철교와 여의도가 보임.

 

 

 

 

선유도는 원래 섬이 아니었다. 선유봉(仙遊峰)이라고 불린 해발 40m 정도의 봉우리였다. ‘신선들이 노니는 곳’이라고 불릴 정도로 선유봉은 그 형상이 오묘하였다고 한다. 지대가 얕은 강변 부근에 소나무가 군집해 있는 기암괴석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으니, 예로부터 이곳은 많은 이들이 즐겨 찾은 명승지였다. 그렇게 선유봉을 찾아 ‘신선놀음’을 했던 이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중국의 사신들도 이곳을 찾아 조선의 풍광에 감탄을 했다고 한다.

 

 

 

 

당산철교 아래 초미니섬

 

 

 

그렇다면 ‘신선들의 봉우리’였던 선유봉은 왜 지금처럼 섬이 되었을까? 선유봉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자신을 깎아내렸다. 그렇게 깎인 돌은 일제 강점기에는 여의도 비행장의 활주로와 제방을 쌓는데 사용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강변북로 공사에 이용되었다. 그렇게 깎이고 깎이다가 원형을 잃게 되었고, 이후 한강의 강폭이 넓어졌을 때는 주변으로 강물이 채워져 섬으로 고립되게 된다.

 

선유도의 변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78년에 서울 서남부권의 식수를 공급하는 정수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선유도 정수장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서남부권의 주민들에게 식수를 공급했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 서울 서남부권에 거주했던 필자도 선유도 정수장에서 공급된 물을 마시고 자랐던 셈이다. 선유도 정수장은 2000년도 까지 운영됐고, 그 이후에는 공원으로 꾸며졌다.

 

 

 

 

* 척화비: 절두산 성지

 

 

 

 

 

지금은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개명한 잠두봉

 

선유도의 반대편에는 절두산이 있다. 이 절두산(切頭山)도 사연이 많은 산이다. 절두산의 원래 명칭은 잠두봉이었다. 뽕나무가 많이 자란다고 하여 잠두봉(蠶頭峰)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그런데 1866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대거 붙잡혀 와 머리가 잘리는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 무려 8천 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를 당했는데 그 이후로 이 곳은 ‘절두산’으로 불리게 됐다. 흥선대원군은 이곳에 척화비를 세워 쇄국정책의 고삐를 죄게 된다.

 

 

 

 

 

절두산 성지

 

 

 

 

한강을 사이에 두고 한 곳은 깎이고 깎여 섬이 되었고, 또 한 곳은 ‘머리가 잘린다는’ 무시무시한 이름으로 개명을 하게 됐다. 두 봉우리가 동시에 비운을 겪게 된 셈이다.

 

300여 년 전 겸재 정선이 양화진 일대를 그린 ‘양화환도’에는 선유봉과 잠두봉이 풍치있게 그려져 있다. 두 봉우리 사이로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그 위를 나룻배가 느긋하게 물길을 가르고 있다. 유심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화폭에 들어가 겸재 선생과 함께 뱃놀이를 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지금은 겸재 선생도, 나룻배도 없다. 또한 선유봉은 원형을 잃었다. 하지만 너무 슬퍼하지 말자. 양화대교가 있으니까. 절두산 성지를 탐방한 후 양화대교를 건너 선유도에 갈 수 있다. 양화대교와 선유도는 연결되어 있다.

 

양화대교에는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한강을 조망할 수 있는 커피전문점도 있다. 양화대교 양 옆에 있는 절두산 성지와 선유도를 탐방한 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것도 운치가 있을 것이다. 아, 그렇다면 한강 근현대사 탐방 후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이 되는 건가?

 

 

 

* 선유도 공원: 옛 정수장 시설물을 전시하고 있다.

 

 

 

 

 

 

 

■ 도움말
1. 코스: 합정역 ▶ 절두산성지 ▶ 양화대교 ▶ 선유도 ▶ 당산역
 * 코스 종료 후 여의도에 위치한 샛강생태공원까지 탐방하는 것도 추천함.
2. 교통편: 시작 – 합정역(2,6호선) 7번 출구 / 종료 – 당산역(2,9호선)

 

 

 

 

중동발 훈풍, 한반도에도 불 수 있을까?

 

[주장] 오바마의 광폭 행보와 북한 핵협상

 

15.04.07 11:40  최종 업데이트 15.04.07 11:40

 

 

 

 

 

 

 

악의축과 불량국가

 

'악의 축'도 '불량국가'도 이제 하나만 남았다. 그렇게 무대에 단독으로 서 있는 '주인공'은 바로 북한이다. 지난 2일 이란 핵협상의 타결로, 이제 무대는 북한의 독차지(?)가 된 것이다. 이란의 퇴장으로 인해 소련 붕괴와 911테러 이후로 만들어진 악의 축과 불량국가들은 미국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사실상 그 목표(소멸)에 도달하게 된 셈이다. 

일단 용어를 정리해보자. 불량국가(rogue state)는 소련의 붕괴 이후로 만들어진 것으로 냉전 이후 새롭게 등장했다기보다 기존에 '눈엣가시'같던 국가들을 묶어, 소련이 행했던 역할로 자리매김했다. 그 역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적'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세계평화에 역행하고, 테러를 자행하거나 방조하는 국가들이 그 리스트에 올려졌다. 북한, 쿠바, 이란, 이라크, 리비아, 수단, 시리아 등이 올랐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을 탄압하는 이스라엘이나, 쿠르드족을 탄압한 터키가 빠져 있는 등, 불량국가 리스트는 온전히 미국의 국익적 관점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악의 축(axis of evil)은 2002년 1월 29일,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연두교서 문서에서 언급한 것으로 이란, 이라크, 북한이 그 대상이었다. 불량국가 중에서도 국제사회에 중대한 위협을 주는 몇 나라를 추려낸 것이다. 911테러가 있은 지 채 몇 달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한창인 시점에 발표된 것이라 그 파장은 상당했다. 정권 교체에 군사행동까지 포괄적으로 포함된다는 것으로 알려지자 해당 국가들은 크게 반발했었다.

악의 축 지정과 관련하여 북한은 무척 억울했을 것이다. 북한은 911테러가 있은 후, 테러에 대해 반대한다고 성명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또한 중동지역에 쏠린 것을 중화시키기 위해 북한이 구색 갖추기 용으로 포함됐다는 후문이 있었다. 실제로 초안에는 북한이 빠져있었다.

조지 W. 부시 정권 시절에 창안되고, 혹은 공고화된 악의 축과 불량국가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흘러간 유행가처럼 빛이 바랬다. 가다피 정권 시절에 이미 미국과 화해의 손을 잡은 리비아는 재스민 혁명의 여파로 내전 중에 있다. IS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시리아도 내전 중에 있다. 수단은 2011년 수단과 남수단으로 분리됐다. 쿠바는 작년 12월에 53년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미국과 관계 개선에 나섰다. 이라크는 굳이  언급을 안 해도 사정을 잘 아실 것이다.

 

 

적과도 악수를 하겠다


 
▲ 오바마 대통령 이란 핵협상과 관련된 문서를 열람하고 있는 오바마. 옆에 있는 사람은 벤 로즈, 국가안전보장회의 부보좌관. 백악관 홈페이지 자료사진 캡처.
ⓒ 백악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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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전에 '적과도 악수를 하겠다'라는 큰 포부를 밝혔다. 이번 이란 핵협상 타결과 지난 쿠바와의 관계 개선은 그 포부가 결과물로 도출된 것이다. 2012년, 오랫동안 관계가 단절되었던 버마를 전격적으로 방문한 것도 결은 다르지만 그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오바마의 광폭 행보는 이란이 마지막 종착지가 아닐 수도 있다. 중동발 훈풍이 한반도에도 전해지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이런 국내외 예측에 대해서 미 국무부는 이란과 북한의 경우는 사안이 다르다고 차이를 강조했다. 이란과 북한의 핵무기 고도화 수준이 엄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이번 협의에서 이란은 원심분리기를 1만 9000개에서 6104개로 줄이고, 저농축 우라늄 비축 분을 1만kg에서 300kg으로 줄이는데 합의했다.

내용에서도 보이듯 시험기기나 실험실 차원의 핵물질이 이번 합의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이미 3번에 걸쳐 핵실험을 했다. 이란과 달리 상당 수준의 핵무기 제조에 접근해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하여 벤 로즈(Ben Rhodes) 미 국가안전보장회의 부보좌관은 2013년 9월 23일에 이런 발언을 했다.

"실제로는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 북한은 핵무기를 획득했고 2006년 초 시험도 했다. 그러나 이란은 핵무기를 아직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벤 로즈의 발언에 입각하자면 미국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셈이다. 벤 로즈가 오바마의 '남자'로 불릴 정도로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만큼 당시 그의 발언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의 벤 로즈의 발언은 현재 미 국무부가 이란과 북한은 다르다고 언급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셈이다.

비핵화 단계냐, 아니면 비핵화 단계를 넘어섰느냐는 큰 차이를 나타낸다. 지불해야 하는 비용적인 면에서 그 '액수'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핵화 단계인 이란은 실험실을 '문 닫으면' 되지만 비핵화 단계를 넘어선 북한은 '더 큰' 것을 넘겨주어야 한다. 북한측에서도 '초대장'을 받았다고 순순히 그 '초대'에 응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이런 난제들 때문에 전문가들은 이란과 달리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물음표를 제기하는 것이다.

 

 

한반도발 훈풍을 기대하며


그렇다면 한반도발 봄바람은 아예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사실 이란 핵협상도 이스라엘의 강한 반대를 극복해야 했다. 이스라엘 총리인 베나민 네타냐후는 오바마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 하원에서 이란 핵협상을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시아파 이란의 부상을 꺼리는 나라 중에 하나가 수니파의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였던 것이다.

이렇듯 이란 핵협상 이면에는 주변국들의 복잡한 역학관계가 얽히고설켜 있었다. 북한 핵과 관련된 난제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들이었다. 다음 대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오바마이기에 마지막 악수를 북한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편 오바마는 할아버지의 나라였던 케냐도 방문할 예정이다. 그간 오바마는 케냐 출신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왔다. 그래서 이제껏 자신의 뿌리였던 케냐를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눈초리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외교행보에 박차를 가하려고 한다.

협상이라는 건 난제가 있기 때문에 꾸려지는 것이다. 고스톱이나 치려고 협상테이블에 앉는 게 아니다. 북한은 오바마를 잘 이용(?)해야 할 것이다. 임기 종료가 가까울수록 자신의 외교적 업적에 큰 방점을 찍으려고 하는 오바마는 협상 파트너로서 제격일지 모른다.

오바마가 물러나면 또 이상한 사람이 그 테이블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2000년 615공동성명,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과 조명록 차수의 워싱턴 방문, 북미공동코뮤니케 등등... 2000년 하반기에 일어난 한반도발 훈풍이 조지 W. 부시의 등장으로 일순간에 삭풍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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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가족'의 역습

 

개들은 사람처럼 '가족'을 버리지 않습니다!

 

15.04.05 16:11    최종 업데이트 15.04.05 16:11

 

곽동운(artpunk)

 

 

 

 

 

 

산티아고 순례길의 들개들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동네 개. 들개가 아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게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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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정말 소름 끼쳤어요. 여기까지 와서 개떼한테 습격을 당할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작년 11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한 젊은 여성인 K씨, 그녀는 필자에게 이렇게 하소연을 하였다. 단독으로 산티아고 길을 걷고 있었던 K씨는 인적이 뜸한 숲길에서 들개들의 습격을 받았다.

"처음에는 개들이 저를 그냥 경계를 하는 것 같던데... 그런데 제가 개를 좀 무서워하거든요. 그래서 지팡이로 몇 번 휘저으니까 개들이 공격을 하더라고요."

천만 다행으로 뒤쪽에서 순례자들 여럿이 달려와 개들을 쫓아냈다며, 그녀는 바지를 걷어 개한테 물린 부위를 확인시켜주기까지 했다.

"스페인 땅까지 와서 병원에 갈 줄은 정말 몰랐어요. 의사 선생님이 치료를 잘 해주셔서 그나마 다행이었죠."

산티아고 순례길은 편의성이 높은 도보여행길이다. 안내표지와 숙소 등의 제반시설들이 잘 갖추어져 있어 단독으로 길을 걷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순례길은 인적이 뜸한 구간이 많아 홀로 걷는 것보다는 그룹으로 움직이는 것이 좋다. 그러나 K씨는 그날 단독으로 일정을 소화하다 그만 들개들의 습격을 받았던 것이다.

K씨를 공격한 개들은 버려진 개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순수한 의미의 들개는 아니었다. 어떤 개는 목줄도 있었고, 또 어떤 개는 크기가 고양이만한 애완견 정도였다고 했다. 추측을 해보건대 그 개들은 순례길 인근 농가에서 흘러들어 와, 그 후 들개화 된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의 농촌도 고령 인구가 많다. 주인이 사망을 하면 개들은 떠돌이가 되고, 그런 개들이 모여 들개가 된 것이라 여겨진다.

 

 

 


북한산의 들개들

 
▲ 백구 북한산 인근에서 만난 백구. 역시 주인이 있는 동네 개다. 들개가 아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게재한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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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K씨에게 말했다.


"우리나라에도 들개가 있어요. 북한산 들개들이죠. 정확히는 버려진 유기견들이지만..."

그렇다. 북한산에도 들개가 있다. 실제로 북한산 국립공원 측은 60여 마리의 들개가 북한산에 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북한산뿐 아니라 서울 근교 산에도 들개들이 있다. 실제로 필자는 관악산에서 진돗개로 보이는 들개와 마주친 적이 있다. 심지어 도심지와 아주 가까운 인왕산 부근에서도 직접 목격을 했었다. 이렇듯 들개 문제는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겪을 수 있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그 현실을 구체적으로 좀 더 살펴보자. 얼마전 아웃도어 모임에서 만난 A씨는 둘레길을 걷다 위험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고 했다. 젊은 여성인 A씨는 트레킹 마니아인데 주말에는 시간을 낼 수 없어 주중에 주로 둘레길을 걷는다고 했다. 그날도 단독으로 둘레길을 걷고 있는데 유기견으로 보이는 들개들과 마주쳤다는 것이다. 유기견들은 위협했고, A씨는 그 길로 도망을 쳤다고 했다.

한참을 내달려 다른 등산객들을 만난 이후에야 들개들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필자는 개들이 몇 마리였는지, 견종은 무엇이었는지를 물어봤지만 A씨는 경황이 없어 알 수 없었다고 답했다. 대신 이런 말을 남겼다.

"분명 한 두 마리는 아니었어요."

다른 사례도 짚어보자. 필자가 '수학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선배가 있는데 이 분은 자전거 마니아다. 근무지 문제로 경남 양산에 약 1년 간 머무르던 선배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전거 라이딩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한적한 임도길 오르막에서 유기견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 송아지만한 개 있잖아. 시베리아 허스키인가 하는... 나랑 같이 눈이 마주쳤는데 오싹하더라고. 만약 내가 중간에 내렸으면 공격을 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냥 계속 페달을 밟았어. 그 지역 사람들이 그러는데 그 일대에 버려진 개들이 좀 있다고 하되."

앞서 K씨가 스페인에서 당한 경우와 우리나라의 상황을 기계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팩트가 있다. 우리나라의 들개는 주인들에게 버려진 유기견이라는 것이다. 버려진 개들이 들개가 되고, 그 들개들이 사람들을 위협하기에 이른 것이다.

지난 1월 16일자, <EBS> '하나뿐인 지구, 북한산 들개'편을 보면, 최근 5년 사이에 북한산 일대에서 포획된 들개들 중 320마리가 안락사를 당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 개들은 분명 누군가에게 '소중한 가족'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개들은 버려졌고, 들개가 되어 사람들을 위협하는 존재가 됐다.
 
필자는 아웃도어를 즐겨하는 입장이라 북한산에 자주 간다. 그때마다 종종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었을, 하지만 지금은 '안락사' 대상인 존재들을 마주쳤고, 마주칠 것이다. 개 좀 버리지 말자. 좋다고 기를 때는 언제고, 나이 들고 병들었다고, 또한 아파트로 이사 간다고 그렇게 함부로 버리는가! 그렇게 '소중한 가족'을 버리는 사람들에게 필자는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인간보다 못한 개들이지만, 개들은 일부 사람들처럼 '소중한 가족'을 버리지 않습니다."

 

 

덧붙임: 들개를 만났을 때 대처법


들개를 만났을 때는 침착하게 대응해야 한다. 소리를 지르거나 지팡이를 휘두르면 개들은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한다고 여기고 공격성을 드러낸다. 가급적 정숙함을 유지하며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좋다. 에어파스를 뿌리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에어파스를 휴대해야 하는 불편도 있고, 파스를 맞은 견공은 큰 해를 당할 수 있으니 이 방법은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자.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끊어진 곳에서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다!

 

홍지문, 동십자각, 광희문... 이 건축물들은 왜 끊어졌을까

 

 

15.04.03 11:15  최종 업데이트 15.04.03 14:58

 

 

 

 

 

 

 
▲ 홍지문 끊겨진 성벽 위로 도로가 닦였고, 그 위로 자동차들이 쌩쌩 달린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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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언가를 항상 연결하고 이으려고 한다. 이쪽과 저쪽을 연결하려고 길을 닦는다.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이 뜸했던 지인들과의 인맥을 다시 잇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연결과 이음은 인간의 본성 중에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와 달리 끊김은 회피하려고 한다.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 한강 다리가 끊겨 수많은 피난민이 수장되었다. 상호 간에 왕래가 끊겼다는 것은 서로 소원해 졌다는 뜻이다.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건축물이 끊겼다는 건 좋은 뜻이 아니다. 그 정체성이 훼손되어 원래의 의미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런 '끊어진 건축물'들을 소개해보고자 이 글을 작성하였다.

 

 



 
▲ 동십자각 도로 위에 섬처럼 떠있는 동십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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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처럼 떠 있는 동십자각


광화문에서 동쪽, 삼청동 방면으로 가다보면 누각 하나가 '껑뚱'하게 떨어져 나와 있는 것이 보인다. 광화문 인근이라서 그런지 자동차들이 쉴 새 없이 그 앞을 지난다. 외국인 관광객들을 태운 대형 버스들도 많이 지나간다. 도로 한복판에 툭 튀어 나온 누각을 보고 있다 보면 마치 도로 위에 섬이 떠 있는 느낌이 들 정도다.

도로 한복판에 외떨어져 나온 누각은 동십자각이다. 동십자각은 경복궁의 동쪽의 방위 초소 역할을 했던 곳이다. 보통 궁궐은 '궁'과 '궐'이 합쳐진 것을 지칭한다. '궁'은 말 그대로 궁이다. '궐'은 높은 석대 위에 누각을 올려놓은 것을 말한다. 이 둘을 합쳐 '궁궐'이라고 했던 것이다. 만약 '궐'이 없다면 궁궐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궁이라고 했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동십자각, 서쪽으로는 서십자각이 배치되었는데 이는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갖춘 것이었다. 즉 조선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의 위상을 궐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현재 동십자각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동십자각은 경복궁의 담벼락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럼 왜 지금처럼 끊겨 있는 걸까? 일제에 의해 끊기게 됐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남쪽 담벼락을 다 헐어버렸다. 그리고 광화문도 원래 위치에서 멀리 떨어진 동북쪽으로 옮겨버렸다. 지금의 민속박물관 부근이다. 돌담들이 서 있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게 철책선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구한말에 촬영한 사진을 보면 동십자각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 계단을 타고 지상으로 오르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계단을 확인할 길이 없다. 한편 동십자각은 감시초소였던 만큼 그 역할은 무척 중요했다.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일본인 자객들도 동십자각을 점령한 후 경복궁 내부로 진입했다.

그래도 동십자각은 서십자각보다는 상황이 더 낫다. 서십자각은 아예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일제는 광화문에서 영추문 사이에 전차노선을 개설했는데 그때 서십자각을 철거했던 것이다. 멀쩡한 광화문을 옮겨버리고, 담장을 헐고, 누각도 철거시키고... 그러고 보면 일제도 반달리즘을 저지른 셈이다. 반달리즘은 로마의 유적들을 파괴했던 반달족들의 반문명적인 행위를 빗댄 명칭이다.

 

 

 


홍지문을 보며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다

 


조선시대의 도성 방어는 이중 방어 형식을 띠었다. 1차 방어라인은 내사산(북악산-낙산-목멱산-인왕산)이었고, 2차 방어라인은 외사산(북한산-아차산-관악산-덕양산)이었다. 조선 초기, 내사산에는 한양도성이 축조되어 그 방어력을 더 배가시켰다.

이후 숙종 시기에 북한산성의 축조로, 한성 북쪽 지역은 이중방어 체제가 더 공고해졌다. 여기에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길이 4km의 성이 만들어졌으니, 이 성을 두고 탕춘대성(湯春大城)이라고 불렀다. 탕춘대성은 성곽이 자리 잡은 곳 인근에 탕춘대라는 돈대가 있어 탕춘대라고 명명됐다고 한다. 탕춘대는 지금의 세검정 초등학교 인근에 위치해 있다.

 

 



 
▲ 홍지문 홍지문과 오간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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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들어섰으니 성문도 있어야 했다. 그래서 생긴 것이 홍지문이다. 인왕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탕춘대성의 성벽은 홍제천에서 홍지문과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으로 그 형태를 달리한다. 홍제천을 건넌(?) 이후에는 가파른 비탈을 타고 북한산 방면으로 향한다.


앞서 탕춘대는 돈대라고 언급했다. 돈대는 경사면을 자르거나, 혹은 채워서 평평하게 만든 것을 말한다.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돈대는 주위를 관망하기에 좋다. 그래서 주로 군사시설에 쓰였다. 하지만 탕춘대는 유희 공간으로 쓰였다. 연산군이 세웠던 탕춘대는 앞으로 홍제천이 흐르고, 그 건너편에는 북악산이 위치해 있으니 놀기(?)에 적당한 곳이었을지 모른다.    

홍지문은 동십자각과는 달리 자연재해를 입어 '끊기게' 됐다. 풍유를 즐기게 해주었던 홍제천이 범람하여 홍지문을 비롯한 오간대수문을 싹 다 쓸어버린 것이다. 그때가 1921년이었다. 홍지문과 오간대수문이 다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된 건 1977년이었다. 56년 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다시 그 자리를 찾은 것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50년이면 세상이 5번이나 바뀔 기간이었다. 그 기간 동안 홍지문은 복원이 됐지만 인왕산 쪽의 성벽은 단절되었다. 그 위로 도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오늘도 홍지문 옆으로 자동차들이 '쌩쌩' 달린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머릿속으로나마 옛 모습을 복원해본다. 그 자동차들을 제거하고, 아스팔트도 들어내 본다. 그리고는 그 위로 성벽을 연결하여 끊어진 구간을 연결시켜 본다.

 

 



 
▲ 광희문 도심의 확장으로 인해 '끊겨진' 광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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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확장으로 '끊긴' 광희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위치해 있는 곳에서 신당동쪽으로 살짝 코너를 돌면 광희문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람들 중에는 간간이 광희문(光熙門)과 광화문(光化門)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광희문'과 '광화문'의 한글 명칭에도 차이가 있듯, 이 두 문은 전혀 다른 개념의 문이다. 광화문은 동십자각 부분에서도 언급했듯이 경복궁의 정문이다. 궁궐의 대문(大門)이라는 말이다. 이에 비해 광희문은 소문(小門)이다.

도성에는 사대문 이외에도 작은 문 4개를 만들었는데 이를 사소문이라고 하였다. 광희문은 숭례문(남대문)과 흥인지문(동대문) 사이에 있다하여 남소문이라 불리기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흥인지문 쪽에 훨씬 더 가깝게 위치해 있다. 그래서 광희문에서 10분 정도 걸어가면 동대문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다.

'빛나는 빛의 문'이라는 명칭과는 달리 광희문은 시체가 나가는 문이었다. 그래서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불렸다. 광희문을 나선 장례 행렬은 지금의 신당동과 왕십리로 이어졌는데, 그곳에 공동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 광희문 2014년 2월, 39년 만에 광희문이 개방됐다. 그 전에는 낮은 철책이 쳐져서 문 안으로 출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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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크게 훼손됐다. 현재의 광희문은 1975년에 복원된 것인데 원래 위치보다 남쪽으로 15미터 가량 떨어져 세워졌다. 도로 확장 때문에 제자리에서 벗어나 복원된 것이다.


이와 같이 광희문의 '끊김'은 서울의 확장과 연관이 있다. 도심지가 확장될수록 성벽이 잘려나갔기 때문이다. 잘려나간 성벽 위로는 도로가 닦였다. 집이 지어지기도 했다. 심지어 운동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제까지 '끊어진' 것들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끊어진' 것들을 알아봤으니 이제는 연결을 해보자. 무엇으로? 역사적 상상력을 이용해서. 눈을 감고 머릿속에서 3D를 그려내어 이곳과 저곳을 연결해보는 것이다.

 


"머리가 돌처럼 굳어 상상력이 떨어졌다고요? 그럼 현장에 가보세요. 유적 앞에서면 없던 상상력도 자연스럽게 떠오를 겁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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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스는 피해야 하고, 사드는 알아야 한다!

[주장] 사드를 둘러싼 한-미-중과의 관계

 

15.03.31 14:02 최종 업데이트 15.03.31 14:02
곽동운

 

 

 

 

"사드? 사드가 뭐야. 사스 아니야? 그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이라는……."

농담 같지만 실제로 이런 말들이 오간다. '사드'와 '사스'는 어감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스는 자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많이들 인지하고, 또한 대비책도 강구할 것이다. 하지만 사드(THAAD: 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는 명칭에도 보이듯 일반사람들이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운 개념이다. '종말단계 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라는 한글명칭으로 바꿔도 그 뜻이 단번에 납득되지 않는다.


MD체계에서는 하늘을 3등분... 마지막단계가 종말단계

사드는 미사일방어체계(MD)의 핵심이라 불린다. MD 시스템에서는 상대국의 탄도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해 하늘을 3등분 한다. 이륙(Boost) - 중간궤도(midcourse) - 종말(terminal)로 구분 짓는데 실제로 탄도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는 구간은 중간궤도 이후 단계부터다.

이론상으로는 이륙단계부터 요격할 수 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측이 친절하게(?) 발사 시각을 알려주겠는가? 탄도미사일 공격이 '전광석화'처럼 진행되기에 요격을 할 수 있는 실제적인 시각은 중간궤도 이후부터가 되는 것이다.   

탄도미사일은 곡선을 그리며 비행하기에 가장 고도가 높은 지점은 중간궤도 부분에 위치해 있다. 이런 개념을 일반 사람들이 들으면 혼란스러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다.

"사드가 고고도라며? 그럼 최고점도 종말 단계에 있어야 하지 않아? 고고도, 종말 서로 어울리네..."

MD체계의 마지막 구간인 종말단계는 말 그대로 탄도미사일을 방어할 수 있는 마지막 영역이다. 그래서 미국은 종말단계를 고(高)고도와 중(中)고도로 세분화하였다.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만큼 중간궤도보다는 더 촘촘히 빗장을 걸어둔 것이다.

 

 
▲ 미사일방어체계 MD체계 개념도
ⓒ 위키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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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로 총알을 잡는다?

중고도를 담당하는 패트리어트 미사일과 마찬가지로 사드 미사일도 역시 명중률이 문제다.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미사일방어시스템을 구비했는데 명중률이 낮다면 그거 곤란한 일이 아닌가?

제조사인 록히드마틴사는 사드의 명중률을 80% 발표했다. 상당히 높은 수치다. 하지만 이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힘들어 보인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탄도미사일 발사는 발사 당사자가 친절하게 사전 고지를 하지 않는다. 차량에 실린 이동발사대는 계속 움직일 것이다. 만약 발사 모체가 잠수함이면 사전 탐지가 더욱더 어려울 수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명중실험도 기습적인 상황 하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수송기인 C-17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타깃으로 사용되는 등 실전과는 다른 명중 실험이었다. 탄도미사일은 대기권 밖에까지 치솟아 올랐다, 정점을 찍고 다시 지구 궤도로 급강하한다. 그럼 물리시간에 배웠던 것처럼 미사일은 중력가속도가 붙어 엄청난 속도로 지구표면에 낙하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수송기에서 발사된 미사일에 그런 중력가속도를 기대할 수 있을까? 한편 그런 엄청난 낙하속도 때문에 '총알로 총알을 잡을 수 있나?'라는 말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더미(dummy) 탄두 문제도 있다.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로켓에 인공위성을 하나만 싣지는 않는다. 각국에서 실려 온 각양각색의 인공위성들이 하나의 로켓에 실려 우주로 쏟아 올려 진다. 하나라도 더 실으면 발사국은 금전적으로 더 이득을 볼 것이다.

인공위성 발사 로켓과 동일한 하드웨어를 가진 대륙간 탄도미사일도 탄두를 하나만 장착하지 않고 여러 개를 동시에 탑재한다. 일정 지점에서 탄두가 여러 개로 쪼개지면 공격은 더 극대화되는 반면 방어는 더욱더 어려워진다는 건 자명한 일이다. 더미 탄두는 이때 이용된다. 기만책으로 '거짓' 탄두를 탑재시켜 진짜 탄두를 찾아내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사드 미사일은 더미탄두 문제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사스는 피해야 하고, 사드는 알아야 한다!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처럼 사드는 북한 견제용이라기보다는 대 중국 견제용이다. 일본이 북한을 '지렛대' 삼아 자위대의 확장을 꾸준히 이룩한 것처럼, 사드 문제도 미국이 북한을 '지렛대' 삼아 동북아지역에서 MD 체계를 확장시키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중국은 그토록 사드를 포함한 MD 문제에 민감할까? 중국 측도 사드미사일이 요격율이 낮다는 걸 잘 알 듯한데... 필자가 보기에는 미국과의 정보 비대칭을 우려하는 것 같다. 사드에 핵심 장비 중에 하나인 X-밴드 레이더가 남한에 설치된다면 중국의 동부 해안지역은 실시간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국은 어디에 레이더를 설치하여 정보를 얻을 것인가? 캐나다 혹은 쿠바? 꿈같은 소리다. 중국은 우리 해군의 초계기인 PC-3의 서해 상공 초계 비행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 정도로 동부 해안지역은 중국이 빗장을 꽁꽁 걸어두고 싶은 핵심적인 지역인 것이다.   

사드가 북한 방어용이든 중국 방어용이든, 그것이 실전에 사용되는 순간 남북한은 모두 석기시대로 돌아갈 것이다. 어찌 보면 참 중요한 일이 한-미-중 간에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우리는 너무 그런 문제에 둔감해 있는 듯싶다. 사스는 피해야 하지만 사드는 낱낱이 따져봐야 하는 한다. 그것이 필자 이 글을 쓴 이유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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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소리 들으러 갔는데 '뽕짝'... 이건 아니잖아요

 

[주장] 행복한 봄 등산을 위한 실천 제안 4가지

 

곽동운(artpunk)

 

 

 

 

 

 

 
▲ 봄꽃 산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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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업계에서 일하는 최아무개씨는 시간이 날 때마다 등산과 트레킹을 즐기는 아웃도어 마니아다. 얼마 전 서울 근교로 등산을 떠난 그는, 산책로를 걷다 불쾌한 경험을 했다. 앞장선 중년 남성이 카세트의 볼륨을 너무 크게 틀었기 때문이다.


"저는 산에서 새소리를 듣는 걸 정말 좋아하거든요. 바람 소리도 좋잖아요. 그런데 그 분 때문에 뽕짝만 계속 들었어요. 새타령도 뽕짝으로 들었어요."

등산로가 한 방향 길이라 계속 동선이 겹쳤고, 그 덕택(?)에 그는 예정에도 없던 뽕짝을 '감상'해야 했다고 푸념했다.

"산에서는 음악 소리를 좀 줄여줬으면 좋겠어요. 주말에 산에 오르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닌데 자기 좋다고 볼륨을 키우면 안 되잖아요."

최근 몇 년 사이, 아웃도어 인구의 급격한 팽창으로 주말이면 서울 근교산들은 등산객들로 북적인다. 특히 요즘 같은 봄꽃 산행철은 성수기라 그 혼잡의 강도가 더 심해진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산을 찾다 보니, 위의 경우처럼 종종 볼썽사나운 일도 겪게 된다. 몇몇 불청객으로 유쾌해야 할 산행에서 불쾌감만 얻고 오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봄엔 산을 찾는 사람이 많은 만큼 산행 예절도 필요하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서로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즐겁게 산행할 수 있다. 등산객 모두 즐거운 산행을 하기 위한 몇 실천 제안을 아래 덧붙인다.

 

 

 



[실천 1] 술 좀 그만 드세요

산허리 부근에 가면, 여럿이 모여 술판을 벌이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산의 '정상'은 그곳이 된다. 돗자리를 넓게 펴고 막걸리와 소주를 연신 들이키는 모습은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아니다. 말 그대로 '거한' 술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술잔이 더해질수록 술 냄새는 심해지고, 취기가 오른 이들의 목소리는 더 커지게 된다. 그렇게 술판이 벌어지다 보면 아무리 뒷정리를 잘 한다고 하더라도 쓰레기가 남기 마련이다. 등산로 한편에 막걸리와 소주병이 뒹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한편 산중에서의 과도한 음주는 하산 시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산행 중 사고의 70%가 하산 시 발생한다. 그러니 산에서는 금주를 해야 한다. 만약 음복을 한다 하더라도 정상에서 딱 한 잔만 하자. '정상주' 딱 한 잔만 하시고, 하산한 후 마음껏 음주가무를 즐기시라.   

 

 



[실천 2] 꽃 좀 꺾지 맙시다

야생화가 아름다운 건 그 주위 배경이 그 아름다움을 더 돋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꽃집에서 파는 잘 관리된 꽃들보다 흩뿌려지듯 무질서하게 나열된 야생화가 오히려 더 시각적인 미를 돋운다. 기암괴석과 소나무, 계곡물과 산새 소리들이 어우러진 곳에 꽃이 피어있다면 공감각적인 효과는 더욱 극대화될 것이다.

하지만 일부 등산객은 그런 아름다움을 훼손한다. 주인이 없다는 생각에 마구잡이로 꽃을 꺾는 것이다. 그런 탓인지 등산로와 인접한 곳에 핀 꽃들은 주말이면 몸살을 겪는다. 식물 채집도 마찬가지다. 봄나물이 입맛을 돋운다고 마구잡이로 캐는 등산객도 있다. 아예 등산할 때 호미나 야삽을 지참하고 오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마구잡이 식물 채집은 생태계의 교란을 일으킬 수 있다. 종 다양성의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봄나물을 채집해 실제 식용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지 궁금하다. 필자는 등산로 초입에 버려진 채집 식물들을 많이 보아왔다. 지하철 플랫폼 쓰레기통에 버려진 채집 식물도 목격했을 정도였다.

 

 

 


[실천 3] 바위는 낙서판이 아닙니다

 
▲ 낙서 누군가 바위에 낙서를 했다. 몰상식한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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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서 지우기 바위에 적힌 글씨를 지우고 있다. 누군가의 몰상식한 행위 때문에 시민들의 귀중한 세금이 낭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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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가 많은 산에서는 바위가 몸살을 앓는 경우가 있다. 바로 암석에 쓰인 낙서 때문이다. 아무리 그 곳에 적힌 내용이 주옥같은 명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낙서에 불과할 뿐이다. 산악회의 완등 기념 새김 글자도 마찬가지다.


스프레이로 쓰인 것, 페인트로 칠해진 것, 음각으로 새긴 것 등등... 낙서의 방법도 여러 가지다. 이런 낙서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인부들이 동원되고, 행정력이 동원된다. 귀중한 시민의 세금이 투입되는 것이다. 낙서는 연습장에다 쓰는 게 제격이다. 바위에 새겨서는 안 된다.  

 

 

 

 


[실천 4] 문화재를 아껴주세요

 
▲ 서울 성곽 탐방객들이 성벽에 올라가 있다. 성벽이 훼손될 수도 있고, 자칫하면 추락할 수도 있으니 성벽에 올라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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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곽길은 서울을 대표하는 도보 여행 코스다. 성곽길을 따라 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역사적 명소들을 탐방하게 된다. 걷는 것 자체가 훌륭한 역사 공부가 되는 셈이다.

하지만 아쉬운 점도 많다. 성벽을 자세히 보면 군데군데 시멘트로 덧댄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벽 곳곳에 누더기처럼 시멘트가 발라져 있으니 탐방자들의 눈에는 성곽의 문화재적 가치가 현저히 떨어져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성곽에 버젓이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도 있다.

 
▲ 서울 성곽 복원이 부족하다해도 우리 문화재다. 사진처럼 쓰레기를 성벽에 올려놓아서는 안 된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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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예 성벽 위로 올라가 사진 촬영을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복원이 미흡하다고 해도 문화재는 문화재다. 성벽 위로 올라가서는 안 된다. 성벽이 훼손될 수도 있고, 아래로 추락할 수도 있다. 쓰레기를 성벽 위에 투기하지도 말자. 넉넉하든, 부족하든 문화재는 문화재다.


위에 언급된 내용들은 어렵지 않게 실천이 가능한 것들이다. 누구나 다 어렵지 않게 행할 수 있는 아웃도어 활동의 매너들이다. 한 발짝씩만 양보를 하면 모두가 다 즐겁게 아웃도어를 즐길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관악산 둘레길 따라 가는 ‘역사탐방’

 

 

 

프로필이미지 곽동운

 

 

서울에는 한강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관악산, 북쪽으로는 북한산이 우뚝 솟아 있다. 그렇게 두 산은 서울의 남북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지만 역시 사람들은 북한산을 서울의 최고 산으로 치고 있다. 그래서 관악산은 항상 ‘넘버 2′의 지위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한강 이남으로 국한을 시키면 관악산이 당당히 ‘진산’의 지위를 누릴 것이다.

관악산의 중요성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부각되었다. 삼국은 한강 하류지역을 얻기 위해 이 일대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고려시대에는 남경(서울)의 남쪽 방어를 위한 산으로 삼았다. 그렇듯 관악산은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의 배경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럼 관악산을 누비며 역사의 시간 속으로 걸어가 보자. 어렵지 않다. 힘들게 등산을 할 필요도 없다.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 걸으면 수월하게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낙성대와 강감찬 장군 이야기

 

앞서도 언급했듯이 관악산은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곳이다. 그런 스토리텔링 중 가장 두드러진 곳은 바로 낙성대(落星垈)다. 낙성대는 고려 초기의 명장인 강감찬 장군의 생가로 한자에서도 보듯, 강감찬 장군이 탄생했을 때 별이 떨어졌다고 한다.

 

 

강감찬 장군 기마상과 낙성대 3층석탑

 

 

 

10만 거란군을 맞아 귀주에서 큰 승리를 이끌었던 인헌공 강감찬(948~1031년)은 사실 문신 출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고려시대에는 광종(925~975년)시기부터 과거시험이 시작됐는데 당시 과거는 문신을 등용하는 창구였다. 무신을 뽑는 과거는 고려 후기에 가서야 정례화 됐다. 즉 강감찬 장군은 문신 출신이었지만 귀주대첩이라는 큰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었던 것이다.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귀주대첩을 지휘할 당시, 강감찬 장군의 나이는 무려 70세였다는 것이다. 칠순의 나이에 최전방 사령관인 상원수가 되어 거란의 침입을 막아냈던 것이다. 그렇듯 노익장을 발휘하며 문무에 능통했던 인헌공 강감찬은 천수를 누리다 84세에 영면하게 된다.

 

 

 

사색하기 좋은 삼성산 성지

 

 

삼성산 성지

 

 

 

 

관악산 둘레길 역사탐방은 서울대 정문을 지나 삼성산 성지로 길을 잡아 볼만하다. 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이다. 삼성산 성지는 기해박해(1839년) 때 효수를 당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를 성역화 시킨 것으로 천주교 성지이다. 헌종 5년에 발발한 기해박해로 인해 앵베르도 주교,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 등이 새남터에서 참수를 당하게 된다. 그들의 주검은 노고산을 거쳐 이곳 삼성산에 가매장 되는데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역화 하였다. 현재 그들의 주검은 명동 성당 지하에 안치되어 있다.

 

기해박해는 같은 세도 가문이었던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의 권력투쟁의 산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안동 김씨 집권기에는 천주교에 대해서 관대한 처분이 내려졌는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기해박해가 일어나게 됐고, 박해 이후로는 풍양 조씨 가문으로 권력의 추가 넘어가게 됐기 때문이다.

 

관악산 주 등산로와 달리 삼성산 성지 일대는 등산객들이 많이 찾지 않는 곳이다. 더군다나 성지 인근에는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심어진 ‘삼성산 숲’이 있고, 또 거기서 좀 더 나아가면 ‘메타세콰이어 숲’도 있다. 한적하게 숲길을 거닐며 사색하기 좋은 환경을 가졌다는 뜻이다.

 

 

 

둘레길 탐방로

 

 

 

역사를 따라 둘레길 탐방도 하고, 한들한들 봄바람을 느끼며 사색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관악산 둘레길이다. 주 등산로와는 달리 한적해서 더 좋은 곳이 바로 관악산 둘레길인 것이다.

 

 

■ 도움말
 1. 필자가 행한 관악산둘레길 역사탐방은 관악산둘레길 1, 2코스에서 이루어졌다.
 2. 코스: 낙성대역 ▶ 낙성대 ▶ 서울대입구 ▶헬기장 ▶ 삼성산 성지 ▶ 삼성산 성당
 3. 이동거리: 약 7km / 이동시간: 3시간 정도 예상(쉬는 시간 포함)
 4. 교통편: 출발-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 종료- 삼성당 성당 버스정류장에서 지하철 2호선 신림역행 버스 탑승. 약 10분 정도 소요됨.

 

 

 

 

 

 

 

전기장판 켜고 캠핑하면서 자연과 벗 삼았다고?

 

[주장] 시대가 변해도 캠핑의 기본에 충실하자

 

15.03.26 15:00    최종 업데이트 15.03.26 15:00

 

 

 

 

 

 

# 팔자에도 없던 욕을 먹었다

1년 전인 지난해 3월, 필자는 팔자에도 없던 욕(?)을 먹었다. 그 당시 우연히 EBS 환경 다큐멘터리 <당신의 캠핑은 몇 g입니까?>를 시청했고, 그 프로그램에 대한 리뷰를 작성하였는데 그 리뷰가 문제를 발생시켰던 것이다. <오마이뉴스>에 '전기장판, 영상기기, 탁자... 왜 캠핑하세요?'라는 기사로 발행된 리뷰는 제목에서도 보듯 캠핑문화에 대한 비판을 담은 기사였다. 욕은 주로 기사가 걸린 네이버에서 먹었다.

방송에 대한 평가를 전면에 내세운 기사였지만 그 이면에는 폭발적으로 늘어난 캠핑에 대한 명암을 필자의 시각으로 써내려갔다. 일단 캠퍼들의 과다 장비에 대해서 비판했다. 이삿짐처럼 엄청난 짐을 싸들고 다니는 캠퍼들의 과다 장비가 부적절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는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에 대해 비판했다. 단순히 음식물 쓰레기가 많이 발생한다는 문제가 아니라 먹고, 마시고, 소비하는 방식으로 큰 흐름이 잡혀가는 캠핑 문화가 안타까웠기 때문에 그렇게 작성한 것이다. 

 
▲ EBS 당신의 캠핑은 몇 g입니까?
ⓒ EBS 홈페이지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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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핑장에 왜 전기장판이?


<당신의 캠핑은 몇 g입니까?>에 대한 호불호가 갈렸듯 필자의 기사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렸다. 특히 장비 부분에서는 캠퍼들끼리 댓글로 치열한 공방을 벌이기까지 했다. 몇몇 댓글들에서는 노골적으로 필자의 시각을 비판하고 있었는데 그중 눈에 띄는 것들이 있었다.

'캠핑장에 전기장판이 왜 필요하냐'는 필자의 지적에 아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다며, 역공을 가하는 댓글이었다. 아이들이 캠핑 가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추운 날씨에도 야영장에 가야 했고, 그러려면 전기장판이나 난로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댓글이었다.

이외에도 필자에게 날카롭게 항변하는 의견들이 많았다. 시대가 변한만큼 캠핑도 변했고, 그 변화를 제대로 부흥하지 못하는 건 필자라면서 이런 댓글을 남기는 누리꾼도 있었다.

"당신이야 말로 당신의 캠핑은 안녕한지 물어보고 싶다..."

이런 비판적 댓글들을 모아서 정리하고, 그에 대한 반론을 담아 후속 기사를 작성해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아이들 핑계는 대지 말자. 전기장판, 난로, 선풍기, 냉장고까지 다 갖춰진 캠핑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캠핑이란 원래 그렇게 다 풀세트로 갖춰 놓고 하는 걸로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반론을 하려다가 괜히 감정싸움으로 번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접은 것이다. 또한 '어디까지가 시대변화에 따른 캠핑인가?'에 대한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주저한 측면도 있었다.

 
▲ 네이버 ‘전기장판, 영상기기, 탁자... 왜 캠핑하세요?’ 기사에 달린 비판 댓글. 네이버 화면 캡처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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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텐트 방염처리가 능사가 아니다


필자가 이렇게 1년 만에 후속기사를 작성하는 이유는, 지난 22일에 발생한 강화도의 글램핑 캠핑장 화재 때문이다. 사상자가 무려 7명이나 발생한 이번 사건을 접하면서 필자는 경악했다.

이 사건은 장비나 시설 같은 외형적인 면은 최상급이지만 안전이나 매너 등과 같은 무형적인 면은 낙제점인, 우리 캠핑 문화를 직설적으로 보여준 인재였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일부 언론에서는 텐트의 방염처리 유무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런 접근은 문제의 본질을 해결하지 못한다고 여겨진다.

사건을 담은 CCTV 화면에서도 보듯 발화는 텐트 내부에서 발생했다. 내부에서 화재가 시작됐다면 텐트의 방염처리는 의미를 잃게 된다. 내부에 있었을 옷가지, 배낭, 전자제품, 놀이기구 등등... 모든 것들이 방염 처리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방염처리가 언제까지 제 기능을 하는지도 의문이 든다. 추위와 더위, 또한 강풍과 폭우에 계속 노출되다 보면 방염처리 기능이 제 구실을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짐을 줄이는 것이 가장 상책이라고 판단한다. 전자제품을 쓰지 않으면 합선의 염려를 덜 수 있다. 난로를 챙기지 않으면 화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 캠핑 오토캠핑장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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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가 변해도 캠핑의 기본정신은 변하지 않는다!


다른 사고도 짚어 보자. 2014년 2월에 텐트 안에서 난로를 켜고 자던 일가족이 질식하여 중태에 빠지기도 했다. 또 11월에는 역시 텐트 안에서 난로를 켜고 자던 부부가 질식사하기도 했다. 이렇듯 안타까운 사고가 이어지는 건 동계캠핑의 발달과 맞물려 있다. 사실 동계 기간에 캠핑은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난방기구의 발달이 동계캠핑의 대중화를 촉진시켰고 그에 따라 질식사고 같은 인명피해도 증가하게 됐다.

겨울에는 춥다고 전기장판 깔고 화목난로를 피우고, 여름에는 덥다고 선풍기 돌리고 냉장고 사용하고. 그러려면 차라리 펜션이나 민박집에서 느긋하게 일박을 하는 게 낫지 않나? 갖출 거 다 갖추어서 하는 캠핑은 그저 도시생활의 연장일 뿐이다. 시티 라이프의 안락함을 옮겨 오는 캠핑은 자연과 벗 삼는 게 아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하여 필자는 결론을 내렸다.

"과도한 장비가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캠핑을 즐겨라! "

시대 변화에 대해서도 정리가 됐다. 

"아무리 시대가 변화했다고 하더라도 캠핑의 기본은 바뀌지 말아야 한다. 시대가 변했다고 한옥 체험 하는데 더블 침대를 갖다 놓을 것인가?"

취침 전에 화재 염려가 있는지 텐트 주위를 살펴보자. 바비큐 통에는 불씨가 남아 있을지 모르니 물을 뿌리자. 캠핑장에서 불꽃놀이도 하지 말자. 소음이 발생할뿐더러 화재 염려도 있고, 자칫하면 타인의 텐트에 손상이 가해질 수도 있다. 난로는 아예 사용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너무 유난을 떤다고 하지 말자. 트레킹이든 캠핑이든 아웃도어 활동의 제일 덕목은 안전이기 때문이다. 힐링을 하기 위해 떠난 길에서 사고를 당한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이번에 참사를 당한 분들의 명복을 빌면서 글을 마친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차두리도 보고, 산책도 하고

 

한국 축구의 성지, 상암월드컵 경기장 한 바퀴

 

 

 

상암 월드컵 경기장

 

 

 

 

FC서울의 홈구장 상암 월드컵경기장

 

축구팬들이라면 유럽에서 전해오는 손흥민, 기성용 선수 등이 전해주는 골 소식에 밤잠을 설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위성중계를 통해서나마 아시안컵의 주역들이 그라운드를 누비는 모습을 보고 만족하기도 한다. 국가대표팀 감독인, 슈틸리케의 ‘아이들’이 우리의 푸른 잔디를 힘차게 누비는 모습을 그리면서…

 

 

 

* 상암월드컵 경기장: FC 서울

 

 

 

 

K리그 클래식이 다시 시작됐다!

 

그런 축구팬들의 갈증은 지난 3월 7일부터 좀 누그러졌을지 모른다. 바로 K리그 클래식이 개최됐기 때문이다. K리그 클래식에 속한 12팀은 11월 29일까지, 각 팀 당 38경기를 소화하게 된다. 그 중 5경기는 스플릿시스템에 의해 치러지는데, 스플릿시스템이란 전체 팀을 상ㆍ하위 팀으로 나누어 경기를 치른 후 우승팀과 강등팀을 결정하는 승강제를 일컫는 말이다.

 

즉 성적이 나쁜 팀은 2부 리그인 K리그 챌린지(challenge)로 떨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반면 성적이 좋은 2부 리그 팀은 1부 리그인 K리그 클래식(classic)으로 승격될 수도 있다. 올해는 대전시티즌과 광주FC가 승격이 됐는데 두 팀 다 모두 시민구단들이다.

 

잘 아시다시피 서울에도 축구팀인 FC서울이 있다. 차두리 선수가 소속된 FC서울의 홈구장은 한국 축구의 성지라고 불리는 상암 월드컵경기장이다. 3월 프로축구 개막을 맞아 아시안컵에서 맹렬한 드리블로 국민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었던 차두리 선수의 모습을 상암구장에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휴식 공간이 풍부한 상암 월드컵경기장

 

상암구장은 주변에 훌륭한 휴식 공간을 가지고 있다. 먼저 월드컵경기장을 찾는 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담소정이 있다. 담소정 앞쪽으로는 연못이 있는데 그 곳에는 잉어들이 유유히 유영을 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가 있다. 담소정 뒤로는 매봉산 산책 코스가 있다. 매봉산이 야트막한 높이이라서 매봉산 산책코스는 가볍게 걷기에 적당하다.

 

 

상암월드컵경기장 북측광장 근처에 위치한 `담소정`

 

 

 

 

 

산만 있는 게 아니다. 불광천도 있다. 불광천을 따라 개설된 자전거도로와 보행로는 인근 주민들의 ‘건강 지수’를 높이는데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이 불광천 코스는 비교적 물이 맑아 특히 여름에 인기가 많다고 한다.

 

 

 

상암월드컵경기장을 끼고 흐르는 불광천

 

 

상암구장은 하늘공원과도 가깝고, 서울둘레길도 그 옆으로 지나간다. 그러고보면 상암구장은 산책과 전망을 즐길 수 있는 곳들로 둘러싸여 있는 셈이다. 굳이 축구 관람을 하지 않더라도 경기장 주변을 느긋하게 탐방할 수 있다는 뜻이다.

 

 

 

레알 마드리드 홈구장보다 주변 경관이 더 좋은 상암구장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나 잉글랜드의 맨체스터 시티 같은 명문 구단의 홈구장은 상암 구장 같은 휴식 공간이 거의 없다. 경기장들이 시내 한복판에 있어서 그런 것이다. 우리나라가 스페인이나 잉글랜드보다는 피파랭킹이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상암월드컵 경기장은 그들 나라의 대표적인 축구팀의 홈구장보다 훨씬 더 주변 환경이 낫다고 할 수 있다.

 

3월 14일부터 작년 우승팀인 전북과의 경기를 필두로 FC서울의 홈경기가 시작됐다. 이제 봄을 맞아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으로 나들이를 떠나보는 건 어떨까? 폭발적인 차두리 선수의 드리블도 직접 관찰해보고 경기가 끝난 후에는 매봉산이나 불광천을 산책해 보는 것도 좋겠다.

 

 

 

* 매봉산 둘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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