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 시장 옛날엔 수산시장이었다?

 

[서울 탐방] 칠패 시장과 남대문 시장

 

오마이뉴스 | 곽동운 

 

 입력 2015.08.01 15:20 | 수정 2015.08.01 15:24

 

 

 

 

▲ 남대문 숭례문
ⓒ 곽동운

 

 

 

"예? 남대문시장이 예전에는 수산물 시장이었다고요?"

"콕 집어서 수산물만 판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수산물이 에이스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요? 그거 메르스만큼 쇼킹한 말이네요!"

 

메르스가 한참 맹위를 떨치던 지난 6월경,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 일대를 탐방하며 지인들과 나눈 대화 중 일부다. 당시 남대문시장 일대는 썰물 빠지듯 사람들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느낀 점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이 우리나라 재래시장에 대한 역사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재래시장 탐방을 좋아하는 이들을 만나 봐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이런 말을 했던 분들도 있었다.

 

"대형마트 이전에 있던 게 재래시장 아니에요?"

 

 

 

▲ 남대문시장 남대문시장 로고
ⓒ 곽동운

 

 

 

 

호남지역에서 최초로 나타난 장시

 

이 땅에 장시(場市)라 불리는 시장이 출현하기 시작한 건 14세기 말 무렵이었다. 처음 시장이 개설된 지역은 전라도 나주 일대였다. 나주는 영산강을 끼고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농업생산물이 풍부했다.

 

영산강을 거슬러 온 것들도 있었다. 바로 인근 바다에서 잡힌 수산물들이었다. 곡식과 수산물이 집산되고, 거기에 지리산 부근에서 채집된 임산물까지 더해지니 영산강 일대는 장시 출현의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서해바다에서 잡힌 물고기들은 나주의 영산포까지 실려 왔고, 그 생선들은 나주평야에서 생산된 곡식들로 교환됐다.

 

영산포까지 실려온 물고기들 중에는 홍어도 있었다. 흑산도 부근에서 잡힌 홍어가 내륙 안쪽에 있는 영산포까지 오려면 시일이 필요했고, 그러다 보니 삭힌 홍어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삭힌 홍어 요리는 나주 영산포의 명물이 됐다.

 

 

 

 

▲ 남대문시장 남대문시장
ⓒ 곽동운

 

 

 

 

백성들의 숨통을 트이게 해주었던 장시

 

16세기가 되면 장시는 5일장, 혹은 10일장 형태를 띠며 전국적으로 뻗어나갔다. 장시의 출현과 확장은 농업생산성의 발달과 관계가 깊다. 농업기술의 발달로 생산물이 풍부해지자 잉여 산물이 생기게 됐고, 그 잉여 산물을 농민들끼리 교역하는 방식으로 장시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대형마트 이전에 재래시장'이 있던 게 아니라 사회적인 분위기가 무르익게 되자 하나 둘씩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물산이 모이다 보니 '떡고물'이라도 떨어졌던 것일까? 장시는 흉년이 들었을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시가 농민들의 호구책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장시에 들러 붙어 있으면 국밥 건더기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다. 한편 가렴주구(苛斂誅求)를 피해 도망쳐 온 농민들에게도 장시는 귀중한 '쉼터'역할을 해주었다.

 

그래서 조선 왕조는 장시를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 그치지 않고 금지령도 수시로 발령했다. 하지만 대세를 누가 꺾을 수 있겠는가? 막는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었다. 장시의 성립과 발전은 순조류를 타고 역사적 흐름의 하나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 남산공원 서울성곽 남산 구간. 남대문시장과 남산공원을 묶어서 탐방을 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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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큰 시장이었던 곳, 칠패 시장

 

조선시대 한양에서 가장 큰 시장 세 곳을 꼽으라고 하면 칠패, 배오개, 종로가 꼽혔다. 이 중 육의전을 중심으로 한 종로를 제외하면 칠패와 배오개는 아직까지도 그 명맥이 굳건히 이어지고 있다. 칠패는 남대문 시장으로, 배오개는 동대문 시장으로 연결됐다.

 

칠패 시장은 원래 소의문이라고 불렸던, 서소문 밖에 펼쳐진 시장이었다. 서소문은 서대문(돈의문)과 함께 일제 강점기 때 철거가 된 상태라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그 터에서 조금만 더 가면 서소문 공원이 있는데 그 일대가 칠패 시장이었다. 서소문공원과 남대문은 도보로 10분 남짓 걸린다. 한마디로 예전 칠패 시장은 남대문 쪽으로 옮겨와 계승됐다고 보면 된다.

 

그 옛날 칠패 시장은 다양한 물산을 자랑했다. 소금, 새우젓, 채소, 죽세공품 등등... 하지만 칠패 시장의 에이스 중에 에이스는 단연 물고기였다. 1844년에 한산거사라는 사람이 <한양가(漢陽歌)>라는 풍물가사를 썼는데 그곳에 칠패 시장에 대해 이렇게 묘사를 했다.  

 

 

우리나라 소산(所産)들도 부끄럽지 않건마는
타국 물자 교합하니 백각전(百各廛) 장할시고.
칠패의 생선전에 각색 생선 다 있구나.
민어 석어 석수어며 도미 준치 고등어며
낙지 소라 오적이며 조개 새우 전어로다.

 

 

<한양가>에서 언급됐듯이 당시 칠패 시장에서는 마포나루에서 올라온 각종 해산물들이 파닥거리고 있었다. 근원을 따지면 칠패 시장의 어물전들은 노량진수산시장보다 훨씬 더 오래된 연혁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메르스 사태가 일정 정도 가라앉은 7월경에 다시 남대문시장을 찾았다. 시장은 다시 활기를 띠고 있었다. 양 손 가득 물건을 들고 있는 외국인들의 모습도 많이 보였다. 결국 남대문시장이 메르스를 이긴 것이다!

 

현재 남대문시장에는 칠패 시장의 비릿한 생선 냄새가 진동하지 않는다. 대신 '남대문시장에는 핵무기와 탱크 빼고 다 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없는 게 없는 곳이 됐다. 시간이 흘러 위치도 약간 달라지고, 취급하는 물품도 달라졌지만 그 명성은 계속 이어져 왔던 것이다. 또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 여행 길잡이: 남대문시장과 남산공원을 묶어서 도보 탐방해보자. 시작점은 시청역이고 종료점은 장충단 공원이다. 약 2시간 30분 정도 소요 예상.

 

시청역 ▶ 숭례문 ▶ 남대문시장 ▶ 남산공원 ▶ 장충단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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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가정법이 없다고? 그럼 역사에서 교훈을 찾자!

 

[리뷰] 영화 <암살>을 보고

 

15.07.28 14:10   최종 업데이트 15.07.28 14:11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줄거리가 담겨 있습니다.

 

한이 서려 있을수록 역사의 가정법은 더 왕성해진다


우리는 흔히들 말한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없다고. '한니발이 로마에 패배하지 않았다면', '광해군이 인조반정에 의해 축출되지 않았다면'... 아무리 간절하게 이런 가정들을 한다 해도 해당 사건들을 다른 식으로 돌이킬 수는 없다.

역사에서 가정법을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해당 역사를 쟁취하지 못한 이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도 그럴 것이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을 격퇴한 로마군이 뭐가 아쉬워서 역사의 가정법을 사용하겠는가? 능양군(인조) 세력들도 무엇하러 광해군 걱정을 하겠는가?

이렇듯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역사의 가정법은 해당 역사에서 소외된 이들, 혹은 그들에게 공감하는 후세의 몫으로 남게 된다. 역사의 가정법은 정통 역사서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소설이나 영화 같은 예술 분야에서 생명력을 얻게 된다. 해당 역사가 한이 서려 있으면 있을수록 가정법은 더욱더 왕성한 생명력을 얻게 된다.

영화 <암살>도 역사의 가정법을 스크린으로 옮겨 놓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에 대한 가정법? 친일매국노 척결에 대한 가정이다. 실제로 <암살>이 그려낸 장면들은 사실이 아니다. 영화에서처럼 1933년에 친일매국노 강인국(이경영 분)과 조선 주둔군 사령관 가와구치가 저격을 당하지 않는다. 사실 강인국과 가와구치라는 인물조차도 가공의 인물이다.

 

 


 
▲ 포스터 영화 암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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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자가 더 무서운 법이다


필자는 스크린에서 보이는 내용이 명백히 허구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2시간 동안 팝콘도 먹지 않으며 열심히 집중할 수 있었다. 필자도 최동훈 감독이 제시하는 역사적 가정법에 크게 공감했다는 뜻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서슴없이 민족까지 팔아먹는 강인국은 탐욕적인 친일매국노의 캐릭터를 대변했다. 소설 <꺼삐딴 리>의 이인국 박사의 이름을 옮겨온 듯한 강인국은 자신의 이익과 배치된다면 서슴없이 가족들에게도 총질을 해대는 인물이었다.

이와 달리 염석진(이정재 분)은 김구 선생의 표현처럼 '어떨 때는 선비 같고, 어떨 때는 깡패 같은' 다층적인 면을 보인다. 극 중에서 염석진은 김구의 총애를 받으며 임시정부 경무국 대장 직위를 맡고 있지만 실제로는 일제의 밀정이었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강인국은 처음부터 매국노였고, 염석진은 독립운동을 하다 밀정이 된 변절 매국노라고 할 수 있겠다. 원래 변절자가 더 무서운 법이다. 자신의 변절 행위를 지우기 위해 더 '임팩트' 있는 모습을 보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염석진은 암살 임무를 띠고 경성으로 떠난 안옥윤(전지현 분)과 속사포, 최덕삼 등을 제거하기 위해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을 고용한다. 안옥윤 팀은 염석진이 직접 소환했다. 염석진은 자신이 직접 '소환'한 암살팀을 죽이기 위해 킬러들까지도 몰래 '픽업'한 것이다.

 

 



 
▲ 백범 김구 남산에 있는 김구 선생 동상. 청소를 안 했는지 곳곳에 푸른색 곰팡이가 끼어 있었다. 지난 7월 19일에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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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가정법이 없다면, 역사에서 교훈을 찾자


<암살>은 '민족주의적' 시각을 털어낸 후 본다고 해도 수작이 될 만했다. 이정재와 하정우의 불꽃 튀기는 연기 대결만으로도 영화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을 테니까. 더군다나 영감(오달수 분), 속사포(조진웅 분), 황덕삼(최덕문 분) 등의 감초 연기는 관객들을 쉴 새 없이 웃게 하였다.

광복을 맞이하는 순간, 김구 선생과 김원봉(조승우 분) 선생이 서로 술잔을 기울이는 장면이 나온다. 약산 김원봉은 잔에 술을 채우며 이런 말을 남겼다.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필자는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 김구와 김원봉, 두 거물에다 단재 신채호 선생까지 술자리에다 합석시키는 것이다. 물론 단재 선생은 1936년에 돌아가셨으니 그 세 분이 1945년도에 자리를 같이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억지로 단재 선생까지 소환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반민특위에 불려 나온 염석진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오히려 역정을 낸다. 거기에 더해 안옥윤이 "왜 배신을 했느냐"고 묻자 이렇게까지 답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일본이 빨리 망할 줄은 몰랐으니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닌가? 그렇다. 소설가 이광수, 시인 서정주가 광복 이후에 실제로 내뱉은 궤변이다. 이렇게 궤변을 내뱉었어도 그들은 잘살았다. 그와 달리 독립운동가들은 찬밥 신세에다 모욕감까지 느껴야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김원봉이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시라. 실제로 김원봉은 그렇게 당했다. 독립군을 고문했던 악질 노덕술에게 해방 후 조국에서 수모를 겪었다.

글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역사서에는 가정법이 들어설 수 없다. 하지만 역사의 가정법은 예술의 영역에서 계속 생명력을 이어 나갈 것이다. 한편 그런 방식은 한풀이식의 자기 위안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에서 가정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서 교훈을 찾으면 된다. 자리에 동석하신 신채호 선생의 명언에서 역사적인 교훈을 얻는 것이다. 그래야 친일매국노들이 염석진처럼 적반하장을 하지 않을 테니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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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보면 꼭 막힐 때가 있잖아요. 장문의 글은 당연하고, 하물며 트위터나 페이스북 글도 막힐 때가 있더군요. 저만 그런가요? ^^; 저는 그런 걸 글장벽이라고 부른답니다.

 

그렇게 글이 막히면 저는 무언가가 턱 막히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 답답함은 이상 행동으로 이어지지요. 머리를 쥐어 뜯던지, 허벅지를 꽉 꼬집던지, 연필을 콧구멍 속에 집어 넣던지... 어떨 때는 소리를 꽥 지르고 싶을 때도 있더군요. 하여간 그런 장면들을 보면 저한테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할지 모릅니다.

 

다른 브런치 작가분들은 그런 글쓰기의 장벽을 만났을 때 어떤 식으로 해소를 하시나요? 어디 인터넷 카페에서 본 적이 있는데 글장벽을 만났을 때의 해소법도 각양각색이더군요. 어떤 분들은 커피를 한 잔 마신다고 하고, 또 어떤 분들은 스트레칭을 하신다는 하더군요. 심지어 빨래나 청소를 하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으신다는 분들도 있었답니다.

 

빨래는 모르겠는데 저도 그렇게 언급된 해소법들을 다 해 봤답니다. 커피도 마셔보고, 스트레칭도 해보고...

어쨌든 글장벽을 얼마나 슬기롭게, 또 얼마나 빨리 넘느냐에 따라 프로냐, 아니냐로 갈라지는 것 같더군요. 그런 글장벽을 지혜롭게 극복한다면 폴더함이 깨끗할 겁니다. 미완성 상태로 쳐박힌 글들이 없다는 뜻이겠죠.

 

글장벽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극복법이 있어야 할 겁니다. 저한테도 극복법이 하나 있어요. 예전에 다녀온 여행지를 떠올려 보는 것이죠. 단순히 여행지 자체를 뭉뚱그려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장소를 캡처하듯이 끌어오는 것입니다.

 

- 제주도 서귀포의 천지연 폭포 앞에서 들었던 폭포 소리

- 스페인 세고비아에서 세고비아 성당을 향해 갈 때 걸었던 골목길

- 부암동 백사실 계곡에 있던 목책 가드레일

 

 

 

 

 

 

 

 

그런 순간들을 떠올려 보면, 몸은 비록 조그마한 노트북 앞에 있지만 잠시나마 숨을 고를 수 있더군요. 그러면 글도 매끄럽게 이어지고요. 대신 억지로 여행지를 떠올리면 별로 더군요. 억지로 생각하면 글장벽이 해소되지도 않고 더 꼬이는 느낌도 받았으니까요.

 

계속 여행을 다녀야 글장벽을 해소할 수 있는 재료들이 더 많아지겠지만 현실에서는 그게 쉽지 않잖아요. 그럴 때 필요한 게 여행 사진들입니다. 예전에 찍어 두었던 여행 사진들이 조금이나마 그 역할을 대신해준답니다.

제 기억을 활성화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죠. 제가 글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게 윤활유 역할을 해주는 셈이죠.

 

여러분들은 글장벽이 가로 막을 때 어떻게 극복 하시나요?

 

 

 

 

 

 

 

 

 

 

 

 

 

 

 

 

 

 

 

 

남산 타워 아래쪽에 있는 비밀의 숲길 같은 서울성곽길.

이 구간에서는 숙종 시대에 쌓여진 성벽을 볼 수 있답니다.

 

이곳에 발을 내디디는 순간 저는 여러가지 단어들이

떠올랐답니다.

 

한적함, 휴식, 느림 등등...

 

남산타워의 바글바글함에 정신이 없었는데 불과 몇 백 미터의

사이를 두고 이렇게 느긋하게 숲길을 걸을 수 있다니!

더군다나 서울성곽을 바로 옆에다 두고 걸을 수 있다니!

 

성벽을 호위하듯 서 있는 소나무 숲. 그 숲 사이로 난 산책로를

걷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드네요.

 

"서울에도 이런 보석 같은 곳이 있어!"

 

 

 

 

 

 

 

 

서울 한복판에 왜 사과마을이 있는 거에요?

 

 

창의문과 능금마을

 

 

15.07.12 15:45    최종 업데이트 15.07.12 15:45

 

 

 

 

 

 

 

 

 

 

 
▲ 사과 능금은 아니다. 홍로라는 종이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게재했다. 2012년 경남 거창에서 촬형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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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 밖인 백사실 계곡을 탐방하다 보면 능금마을이라는 곳을 만나게 된다. 능금마을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그런지 전원적인 모습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서울 도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비료포대가 쌓여진 농촌 마을을 보고 있자니 생경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왜 능금마을이 북악산 뒤편 부암동 부근에 있는 것일까? 아시다시피 능금이면 우리나라의 고유 사과종을 말하는데 능금으로 유명한 지역은 대구·경북 쪽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드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필자와 함께 북악산 역사트레킹을 행한 참가자들도 그렇게 묻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왜 사과마을이 있는 거에요?"

 

 


가을만 되면 경림금 때문에 창의문이 들썩들썩!

현재 창의문 밖, 부암동 일대는 '능금마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과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능금마을'이라는 마을 명칭만이 옛 흔적(?)을 확인해 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40여 년까지만 해도 창의문 밖 능금은 경림금(京林檎)이라 하여 서울의 유명한 특산물이었다. 능금이 출하되는 가을 때쯤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창의문 인근이 들썩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창의문 밖에 능금나무가 많이 심어졌을까? 먼저 산지 형태를 띠는 부암동 일대의 토양이 척박하여 논농사가 적합하지 않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는 창의문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 두 번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창의문의 역사를 더듬어 가야 한다.

 

 


 
▲ 능금마을 백사실 계곡 입구에서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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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문으로 더 많이 알려진 창의문


1396년(태조5)에 세워진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 중의 하나로 경복궁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창의문은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자하문 고개에 서 있다. 서울 성곽길을 걷다보면 두 산을 거느리고 있는 창의문의 지형적 존재감을 더 명확하게 감상(?)할 수 있는데 인왕산을 타고 내려온 서울성곽이 북악산으로 넘어가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곳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북대문(北大門)이었던 숙정문이 근방에 있었음에도 소문(小門)이었던 창의문이 북문의 역할을 해야 했다. 숙정문을 이용하려면 북악산의 급격한 경사를 타고 가야 했기에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1413년(태종14)에 풍수가 최양선의 건의로 문이 닫히게 됐는데 숙정문이 오른쪽 어깨의 형상을 하고 있고, 그 어깨로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능금마을 서울 종로구 부암동 부근에 위치해 있다. 북악산 뒤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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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과 인조반정


오른쪽 어깨가 있으면 왼쪽 어깨도 있을 것이다. 그 왼쪽 어깨 역할을 창의문이 했다하여 1413년에 창의문도 함께 폐쇄가 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그렇게 하여 도성에서 북쪽 지역인 개성이나 양주로 가는 길이 오랫동안 불편을 겪게 된다. 창의문은 폐쇄된 지 거의 100년이 흐른 후인 1506(중종1년)에 와서야 다시 열린다.

문이 열리니 길도 열리게 됐고, 그로 인해 역사적인 발자국도 하나씩 하나씩 생기게 됐다. 인조반정도 그런 역사적인 발걸음 중에 하나다. 1623년 3월 13일, 창의문 밖 홍제원(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에 집결한 '의군(義軍)'들은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진격한다.

반정군의 원두표가 도끼로 문을 부셨다. 당시 창의문은 문루가 없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기 때문이다. 높은 위치에서 활도 쏘고 해야 하는데 문루가 없으니 효과적인 방어가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반정군은 창덕궁을 점령했고, 광해군은 퇴위된다.

 

 

인조반정과 능금마을


능금마을 이야기를 하다 뚱딴지 같이 왜 인조반정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일까? 그렇다. 창의문 밖 능금마을은 인조반정과 무척 관련이 깊다. 인조는 반정에 협조했다 하여 창의문 밖 백성들에게 능금나무와 자두나무를 나눠주었다. 그게 부암동 능금마을의 시초가 된 것이다.

숙종 때에는 정책적으로 묘목을 더 많이 심어 부암동 일대에 무려 20만 그루의 능금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매운 음식을 먹은 듯, 빨갛게 달아오른 사과알들이 푸른 잎들 사이에서 대롱대롱 거렸을 것이다. 아주 멋진 장관이 펼쳐졌을 것 같다. 거기에 인왕산 서편으로 석양이 지는 모습까지 어우러지면...!

창의문 밖 능금, 경림금은 그렇게 서울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되었다. 추석 차례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제례물품이 되었던 것이다.

 

 



 
▲ 창의문 사소문 중에 하나인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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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창의문 능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


2008년 숭례문 화재 이후, 창의문은 사대사소(四大四小)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연혁을 가진 문으로 등극(?)하게 된다. 지금의 문루는 영조 17년에(1740) 세워졌지만 1396년에 세워진 '동기동창'인 나머지 사대사소문들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철거되거나 그 원형이 훼손됐기에 창의문이 '최고참'이 되어 버린 것이다. 화재 전까지 숭례문이 그 '최고참' 자리에 있었다.

그 많던 부암동 일대의 사과나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가을이면 경림금을 사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온 그 많던 상인들은 또 어디로 갔단 말인가? 능금나무가 심어져 있던 부암동에는 카페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고, 상인들을 대신해서는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있다. 이렇듯 세상은 변하고, 또 변한다. 역사적인 해석도 변한다. 인조반정에 참여한 반정군이 '의군'인지 아닌지, 광해군이 폭군인지 아닌지... 그런 역사적인 해석이 변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변하지 말고 계속 그대로 존속해 주었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문화재들이다. 문화재들이 있어야 역사탐방을 하든 역사트레킹을 하든 할 테니까. 어찌됐든 우리 문화재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47년 만에 창의문 옛길이 복원된다는 소식이 정말 반갑다. 180미터 복원이라 좀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옛 원형을 찾아가는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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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사진을 찍다보면 단선보다는 곡선을 더 선호하게 됩니다. 그냥 단선은 밋밋할

 

뿐이라 별 감흥이 없잖아요. 같은 다리라고 해도 아치가 있는 한강대교가 그냥 밋밋한

 

원효대교보다는 그림이 더 잘 나올 겁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비슷해서 그런지 여행 사진 공모전에 입상한 작품들을 보아도 곡선미가

 

살아 있는 사진들이 후한 점수를 받더군요. 'S라인 순천만', '반원을 그린 공룡해안'...

 

 

 

 

 

그렇게 둥글게 휘돌아 나가는 모습에 눈길이 가니 자연경관 뿐아니라 인공구조물도

 

곡선미를 중심에 두고 사진을 찍는 버릇이 생기더군요. 여행을 하고, 사진을 찍다보니...

 

나름대로의 미적 감각이 생겼나 봅니다.

 

 

 

 

 

게재된 사진은 둘 다 서울 성곽을 담은 사진입니다. 메인은 남산 구간에서 찍었고,

 

아래 사진은 인왕산 코스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성곽이 휘돌아 나가는 모습이 저에게는

 

하나의 '리듬'처럼 들리네요. 그럼 미감에 음감까지 얻게 된 것인가요?

 

예술가 다 됐네! ^^;

 

 

 

 

 

 

 

 

 

 


 

'짝퉁' 수표교, 사라지면 좋겠다

 

 

진짜 수표교와 가짜 수표교

 

15.06.28 14:32   최종 업데이트 15.06.28 14:32

 

 

 

 

 

 

 

 

 
▲ 수표교 장충단공원에 있는 수표교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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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것은 가짜다'


고전 연구자로 유명한 한양대 정민 교수의 책 제목이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2000)는 연암 박지원의 실학사상과 산문을 소개하고, 풀어쓴 책이다.

서평을 쓰자고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수표교(水標橋)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럼 왜 여행기사의 첫 문장에 책 제목을 끌어다 쓴 것인가? 수표교에 비슷하게 생긴 '가짜'가 있는가?

 

 


조선 개국과 함께 정비된 청계천

지금은 장충단 공원 한 쪽에 위치해 있지만 수표교는 원래 청계천에 있던 다리였다. 청계천이 복개가 된 후 홍제동에 머물렀다 1965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50년 동안 현재의 자리에 터를 잡은 것이다.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천도를 했을 때, 조정에서는 매년마다 반복되는 물난리로 골머리를 앓게 된다. 당시 한양의 하수시설이 빈약했기 때문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백악산(북악산), 인왕산, 남산 등등... 도성을 감싸고 있는 내사산의 물길을 한 곳으로 모아 흐르게 하기로 했다. 그 사업이 바로 개천(開川) 개설 사업이었다. 개천은 청계천의 옛 이름이다.

태종 11년(1411)부터 세종 16년(1434)까지 대대적으로 벌어진 치수 사업으로 인해 청계천은 흔하디흔한 자연형 하천에서 명실 공히 도성의 으뜸하천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때 물길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게 됐는데 한양이 서고동저형 지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수표교 봄 꽃이 화사하게 핀 수표교.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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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역사의 산증인 수표교

하천이 개설됐으니 다리들도 세워졌다. 청계천에는 24개의 다리가 들어섰는데 수표교도 그 중 하나였다. 수표교는 세종 2년(1420)에 세워졌는데 처음 이름은 마전교(馬廛橋)였다. 다리 인근에 소와 말을 매매하던 시전이 있었다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던 것이다. 그러다 20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수표교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1441년, 강수량 측정을 할 수 있는 수표(水標)를 마전교 서쪽에 세우게 됐는데 그 이후부터는 다리 이름도 수표교로 불리게 된 것이다. 

처음 물길이 잡히고, 300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청계천은 다시 바닥이 높아지게 된다. 상류에서 쏟아져 나온 토사가 계속 쌓이다보니 하천의 바닥과 둑의 높이가 비슷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영조 36(1760)년, 청계천은 다시 대대적인 준설이 이루어진다. 수표교 부근에 준천사(濬川司)라는 기관을 세우고 작업을 실시하게 되는데 57일 동안 무려 20만 명의 인원이 동원된 대대적인 준설을 하게 된다. 이때 수표교의 교각에는 경신지평(庚辰地坪)이라는 각자가 새겨졌다.

 


 

 
▲ 경신지평 조선 영조 때 새겨진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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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으로 돌아가지 못한 수표교 

시전 상인들이 건너고, 소와 말들도 건넜을 수표교에는 왕실 양식이 적용되어 있다. 다리 양 옆에 난간이 설치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일반 백성들의 발걸음이 대다수였을 청계천의 다리에 왕실에서 쓰는 기법이었던 난간을 설치한 경우는 무척 이례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민간에서는 징검다리나 외나무다리 같이 격식은커녕 안정성도 담보되지 않은 다리들을 주로 이용했었다.

수표교는 튼튼한 돌다리에다 양 옆으로는 고급스러운 난간까지 설치되어 있다. 수량을 측정하기 위해 수표까지 세워졌다. 또한 청계천 준설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렇듯 수표교는 청계천 다리 중 가장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청계천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수표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청계천이 아닌 장충단공원에 자리 잡고 있다. 청계천 복원공사가 종료(2005년)된 지 한참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물을 흘려보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원래 수표교 자리에는 무엇이 들어섰는가? '짝퉁'이 들어서 있다. 품격 있는 '오리지널' 수표교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갈색페인트로 덧칠된 격 떨어지는 '짝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리지널'의 고급스러운 석재 난간은 나무로 대체되었는데 얼핏 보면 등산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데크처럼 보인다. 진짜 수표교를 보다가 가짜 수표교를 보면 탄식의 한숨이 터져 나올 것이다.

 


 

 
▲ 난간 진짜 수표교의 난간. 왕실에서 쓰이는 난간 양식이 민간 다리에 적용됐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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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간 가짜 수표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난간을 나무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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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은 수표교 복원 사업

어떤 역사학자는 청계천 복원의 정점은 수표교를 원래 위치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빗대보면 아직 청계천의 복원은 끝나지 않은 셈이다. 필자도 그 말에 일정부분 동의한다. 수표교가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곳은 장충단공원이 아닌 바로 청계천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는 청계천시민위원회를 꾸려 수표교 복원과 관련된 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2020년까지 수표교는 원래 자리인 청계2가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이전 비용이 무려 800억에 달하기 때문이다. 또한 노후화가 심해서 자칫하면 훼손된 상태로 복원이 될 수도 있다는 어려움도 안고 있다. 한편 원위치인 청계2가로 옮긴다고 해도 그 주변의 경관들이 '오리지널' 수표교의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맹점도 도사리고 있다. 실제로 청계2가 주변은 상가들이 정돈되지 않은 모습으로 영업을 하고 있다.

이런 문제점들 때문에 '오리지널'에 준하는 복제교를 세우자는 의견도 있다. 진짜 수표교는 그대로 장충단공원에 놔두고, 정교하게 복제된 다리를 만들어 청계2가에 세우자는 의견이다.

'오리지널'이 복원되든 복제본이 세워지든 갈색으로 덧칠된 현재의 '짝퉁' 수표교는 좀 사라졌으면 좋겠다. 진짜를 보다가 격 떨어지는 가짜를 보면 다리에 힘이 풀린다. 비슷하지도 않은 가짜를 보니 그저 답답함이 밀려올 뿐이다. 비슷하지도 않은 짝퉁을 좀... 어떻게 좀... 해주셨으면 좋겠다.  

 

 

 
▲ 가짜 수표교 청계 2가에 위치해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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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수표교와 가짜 수표교를 비교해 보고자 하면:

장충단공원(3호선 동대입구역) ▶ 동대문(오간수교) ▶ 청계천 ▶ 청계2가


- 이동거리: 약 3.5km / 이동시간: 약 50분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은밀해지고 치밀해진 ‘몰카’의 계절

 

프로필이미지  곽동운

 Date 2015.06.18 11:39

 

 

 

 

본문내용

신도림역 경찰센터

 

 

 

여름! 뜨거운 계절이 돌아왔다. 과감한 노출을 감행하며 한껏 자신을 뽐내는 여성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계절이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의 노출이 과감해질수록 그것을 노리는 몰카범들의 시선은 은밀해지고 치밀해진다.

 

몰카 범죄는 주로 지하철과 같은 다중이용시설에서 벌어지는데 그 증가세가 매년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이에 따라 ‘서울지방경찰청 지하철 경찰대’에서는 4월 1일부터 7월 31일까지를 지하철 성범죄 집중 단속기간으로 정해놓고 중점단속에 나서고 있다.

 

 

몰래카메라 촬영 주의 지역 안내

 

 

몰카 범죄가 늘어나게 된 원인 중에 하나는 스마트폰 카메라 기술의 발달과 관계가 있다. 디지털카메라를 능가할 정도로 고화질을 자랑하는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몰카 범죄에 이용되기까지 이른 것이다. 범죄로의 악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스마트폰은 출시될 때 카메라 셔터음이 울리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카메라 ‘무음’ 앱을 내려 받으면 셔터 음이 제거된 상태로 촬영이 가능하기에 성범죄의 도구로 악용되는 것이다.

 

스마트폰 이외에도 다양한 카메라가 몰카에 이용된다. USB형, 만년필형, 신발형 등 첩보영화에서나 등장하는 초소형카메라들이 여성의 치마 속을 노리고 있다. 이렇게 기기들이 소형화, 은밀화 되니 적발하기도 어려워진다.

 

 

몰카 범죄가 일어나기 쉬운 에스컬레이터

 

 

문제는 이런 몰카 범죄를 일으키는 가해자들이 자신의 행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몰카 범죄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적용되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벌금형 이상을 선고 받으면 신상공개까지 되는 등 처벌이 엄격하다.

 

몰카 범죄가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만큼 피해자가 인지하기도 쉽지 않다.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예방에 있다. 예를 들어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는 몸을 엇각(45도)으로 틀어 후방을 주시하면서 이동을 하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몰카 범죄에 노출이 됐다 싶으면 지체 없이 112나 1366(여성긴급전화)에 신고를 한다. 몰카 특성상 촬영자가 해당 파일을 삭제하면 범죄 사실을 적발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 포스터: 지하철 성범죄 집중단속

 

 

 

윤동주 시인이 '친일매국노'냐고요?

 

청년들의 역사 인식 수준 안타까워

 

15.06.16 11:23   최종 업데이트 15.06.16 17:22

 

곽동운(artpunk)

 

 

 

 

 

 

 

 

 
▲ 서시 윤동주 문학관 뒤편, 시인의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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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이야 모두 다 아실 테죠. 유명한 서시도 잘 아실 거고요."


자하문이라고도 불리는 창의문 인근에는 윤동주 문학관이 있고, 그 뒤편으로는 시인의 언덕이 조성되어 있다. 지난 5월말 필자는 그 언덕에서 역사트레킹 참가자들에게 윤동주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윤동주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보다는 국문학에 가깝기에 짧게 설명을 한 후 다음 코스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괜히 서시를 통째로 외워보라고 짓궂게 구는 참가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빨리 이동하는 게 상책이었다.

"서시만큼 유명한 참회록도 아시죠? 참회록은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한 후 스스로에게 느낀 자괴감을 시어로 풀어낸 것이라 합니다."

이 정도로 설명을 마친 후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설명을 듣던 참가자 한 분이 불현 듯 이런 말을 건넸다.

"창씨개명을 했다면 친일파가 아닌가요?"

 

 

 

시인 윤동주가 친일매국노?


잠깐 발걸음이 꼬였다. 윤동주 시인이 친일파라는 소리를 듣다니! 하늘에 있을 시인은 무척 억울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비교적 젊은 사람들, 또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의 역사 지식수준이 '꽝'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필자는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있다. 그간 역사트레킹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고, 많은 유적지들을 탐방했다. 역사트레킹이 제주 올레를 정점으로 한 걷기열풍의 부산물, 혹은 편승물이라는 조롱과 질책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름대로 그 안에서 보람도 찾았고, 재미도 느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처음부터 트레킹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중간에 코스를 잊어버려 참가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고, 저질(?) 체력인 참가자들의 보폭을 고려하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해당 유적에 대한 설명이었다. 즉 필자의 역사 실력이었다. 트레킹의 참가자들이 주로 젊은층들이라 그들의 날카로운 질문 공세가 예상됐었다. 그래서 이런 걱정까지 하게 됐다.

"이거 내 역사 실력이 확 드러나는 거 아니야? 학교 다녔을 때도 역사 점수 안 나왔었는데..."

저런 자조의 말이 괜히 나왔던 게 아니었다. 실제로 필자는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그래서 학술서적보다는 대중서적을 읽으며 역사에 대해서 지식을 쌓았다. 그렇다고 학벌이 좋냐?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장점으로 내세울 수 있는 건 20년 가까이 종이신문을 꾸준히 읽은 것과 국제정치에 관심이 많다는 점이었다. 그런 장점들까지 끌어들이고서야 겨우 참가자들 앞에 설 수 있었다. 한국사에서 바닥을 치면, 세계사로 넘어가고, 그것도 역부족이다 싶으면 국제정치로 도망치자(?)는 게 전략이었다. 어쨌든 초창기에는 실력이 '뽀록'날까봐 무척 조심스럽게 행동을 했었다. 

하지만 두어 번 역사트레킹을 진행하다 보니 역사 실력에 대한 고민은 싹 사라지게 됐다. 오히려 너무 느긋했다. 나중에는 말장난까지 하면서 참가자들을 농락(?)할 정도였다. 이런 극적인 변화는 왜 일어난 것일까? 밑천이 드러날 걸 초조해하던 마스터가 참가자들을 농락하기까지 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런 극적인 변화는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사람들의 역사 지식이 '꽝'인 것에 토대를 두고 있다. 참가자들이 역사 지식에 무지하다면 그만큼 필자의 '구라'가 통할 여지가 크다는 뜻이 된다. 

- 조선총독부가 무엇을 하는 곳이고,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 모른다.
- 서대문형무소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른다.
- 동학군을 이끌던 전봉준 부대가 어디서 패배를 했는지 어디를 가고자 했는지 모른다.

필자를 당혹스럽게 했던 참가자들의 발언들을 모아봤다. '이 정도면 당연히 알겠지' 하는 필자 나름대로 그어놓은 상식선은 저런 발언들로 인해 여실히 깨지게 됐다. 상황이 이러하니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거 사기 쳐도 되겠는데... 그래서 그런가. 권력자들은 똑똑하지 않은 국민들을 선호하는 건가?'

 

 

 


윤동주를 괴롭게 했던 창씨개명, 그리고 참회록

 
▲ 시인의 언덕 윤동주 문학관 뒤편에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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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윤동주 시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1941년 겨울, 윤동주는 '히라누마 도슈'라는 창씨명을 얻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윤동주 개인의 의사가 아닌 창씨개명이었다는 점이다. 집안 자체에서 행해진 것이지 윤동주가 직접 행정기관에 찾아가 창씨개명 서류에 도장을 찍은 게 아니었다는 뜻이다. 의도하지 않은 자신의 창씨개명에 대해서 윤동주는 '참회록'에서 자괴감을 드러내게 된다.


한편 당시는 중일전쟁이 이미 발발한 상태였고, 태평양전쟁까지 일어났다. 일제의 침략 야욕이 극에 달할 때였다. 식민지 조선에도 총동원령이 내려져 식량이 배급되기에 이르게 된다. 이때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서는 창씨개명이 필수였다고 한다. 그런 생존과 직결된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에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을 모두 '친일 매국노'로 분류한다는 건 적절하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반민특위에서도 창씨개명 자체를 친일행위로 보지 않았다.

윤동주 시인은 일본 황군을 화끈하게 격려하고 '일본이 이렇게 빨리 망할 줄은 몰랐다'고 궤변을 늘어놓은 시인 서정주나 소설가 이광수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를 했기 때문이다. 윤동주가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청년층의 역사 인식 미비도 큰 문제


함께 장시간을 걸으며 동고동락한 참가자들을 폄하하는 내용을 작성하는 터라 필자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다. 하지만 젊은층의 역사 인식이 생각보다 미비하다는 점을 꼭 알리고 싶었다. 청소년층의 역사 인식이 심각하다, 그래서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지만 20~30대 청년층의 역사 인식도 만만치 않게 수준이 낮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 부족한 역사인식을 무엇으로 채워줘야 할까? 역사, 교양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해줘야 할 것이다. 역사교양 강의의 확대, 역사체험 학습의 다변화 등등... 적어 놓고 보니 뻔한 대답이다.

그런 뻔한 것들이 쌓이다보면 내공이 된다. 그 내공은 역사 인식이 빈약한 정치인들을 솎아낼 수 있는 거름체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놈이 그놈이다.'

이렇게 싸잡아 묶어버리는 언어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놈' 중에서도 덜 나쁘고, 덜 때가 묻은 사람들을 솎아낼 수 있는 내공이 생긴다는 뜻이다. 그럼 역사를 현실에서 써먹게 되는 셈이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창의문 천장에 '닭' 그려넣은 이유, 오호라

 

[서촌의 뒷산, 인왕산역사트레킹 ②]

 

15.06.09 20:06    최종 업데이트 15.06.09 20:06

 

 

 

 

 

 

 

 

 

▲ 수성동계곡 사진 왼쪽 부분에 돌다리가 보인다. 기린교다. 뒤에 보이는 산은 인왕산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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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 [서촌의 뒷산, 인왕산역사트레킹 ①] '낭만'과 '비낭만'이 교차하는 서울성곽길

 

인왕산의 숨겨진 보물, 수성동계곡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의 또 다른 볼거리다. 열을 갖춰 늘어서 있는 소나무들 사이로 암반이 드러난 인왕산을 바라보다보면 여기가 서울이 맞나 싶을 정도다. 아랫동네 서촌의 번잡함은 싹 사라지고, 계곡이 주는 청량감이 주위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계곡치고는 유량이 거의 없어서 안타깝기는 하지만. 

수성동(水聲洞)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수성동을 두고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와 <한경지략>에는 명승지로 소개하고 있다. 겸재 정선은 <수성동>을 그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수묵으로 옮겨놓았다. 또한 이곳은 중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닐던 곳이다. 조선후기 중인들의 중심으로 발달된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그러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무척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수성동 계곡은 2012년 7월에 복원한 것이다. 복원 전에는 1971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후 안전문제로 아파트는 철거가 됐고, 그 위치를 옛 모습으로 돌려놨던 것이다. 복원 과정에 겸재 정선의 <수성동>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수성동>에 나오는 것처럼 '기린교'라는 통돌다리도 그대로 복원이 됐다. 어쩌면 겸재의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수성동 계곡은 평범한 도시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수성동에 '동(洞)'자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행정구역명을 뜻하는 게 아니다. 골짜기를 뜻한다. 백사실계곡으로 유명한 백석동천(白石洞天)도 같은 한자어를 쓰고 있다. 수성동계곡이든 백사실계곡이든 참으로 소중한 존재다. 시내중심가와 멀지 않은 곳에 그렇게 청량감을 주는 계곡이 있다는 게 그저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 수성동계곡 인왕산 수성동계곡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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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성동계곡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


수성동계곡을 벗어난 트레킹팀은 윤동주 문학관을 향해 갔다. 2012년 7월에 개관한  문학관은 윤동주 시인의 친필 원고와 시집 등이 전시되어 있다. 흥미롭게도 문학관은 수도가압장과 물탱크 시설을 개조하여 만든 전시관이다. 그런 탓인지 전시관에는 옛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위쪽으로는 시인의 언덕이라는 작은 공원도 마련되어 있다. 시인의 언덕에서 바라보는 주변 풍광이 상당히 낭만적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문학관에 가기 전에 누상동에 있는 윤동주의 하숙방을 먼저 탐방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누상동 하숙방은 수성동계곡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 시인의 언덕 윤동주 시인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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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의 역할을 했던 창의문


윤동주 문학관을 넘어 마지막 목적지인 창의문으로 향했다.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 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문이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북문(北門) 역할을 했던 건 바로 창의문이었다. 북악산의 험한 지형 위에 세워진 숙정문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뿐더러 1413년부터는 그마저도 폐쇄를 시켰다. 숙정문이 오른팔이 되어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학적인 의미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때 창의문도 폐쇄가 되는데 왼팔의 역할을 하여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죄명' 때문이었다. 하지만 숙정문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 위에 놓여 있던 창의문은 1506년(중종 1년)에 다시 통행이 재개된다. 그래서 소문(小門)인, 창의문이 '북문 역할'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다는 것은 그 문 아래로 수많은 역사적 발걸음이 오갔다는 뜻도 된다. 실제로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옹립하던 세력들은 이 문을 통해 도성을 점령했고, 광해군을 쫓아낸 후 권력을 잡게 된다. 현재의 문루는 조일전쟁(임진왜란)때 불 타 사라진 것을 영조 때(1740) 건립한 것이다. 현재 창의문은 일반인에게 개방이 되어 있어 문루까지 직접 올라갈 수 있다. 내부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인사들의 이름을 적은 나무판이 걸려 있다. 이 판은 문루를 세울 때 같이 만들어진 것이다.

 



 
▲ 창의문 북문의 역할을 했던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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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의 천장벽화는 닭


트레킹팀은 창의문을 통과할 때 천장화를 바라보면서 이동했다. 광화문이든 창의문이든 문을 통과할 때 천장화를 보면서 관찰해보자. 각 문마다 그려진 수호동물이 다르다. 막간을 이용한 퀴즈시간.

"저 그림이 뭘로 보이세요? 딱 봐도 용은 아니고."
"봉황 아니에요? 좀 모습이 우습긴 한데..."
"맞아요. 봉황 같은데요."


거의 다 '봉황'으로 답으로 말했다. 하지만 틀린 답이다. '닭'이다. 특이하게도 창의문의 천장화에는 닭이 그려져 있다. 이 일대가 풍수적으로 지네의 기운을 가졌다하여 천적인 닭을 창의문에 그려 넣었던 것이다. 관악산의 화기를 누른다고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만든 것과 같은 이치다.

"설명을 들으니까 치킨이 생각나요. 저기가 부암동 아닌가요? 저쪽에 유명한 통닭집이 있다고 하던데요."

부암동을 잘 아는 참가자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선가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몰려왔다. 통닭 냄새였다. 마늘통닭인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어쨌든 창의문 밖 치킨집에서 풍겨오는 치킨 냄새에 트레킹팀은 모두 한마음이 되었다. 모두 다 군침을 흘렸다.

 
▲ 창의문 천장화. 닭이 그려져 있다. 봉황이 아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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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유익하고, 또한 맛집 탐방도 할 수 있는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됐다. 글을 마치기 전에 1편에 언급된 사직단으로 돌아가 보자.


국가의 대소사가 있을 때 조선의 왕들은 직접 제단에 나가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자신의 부덕함을 하늘에 고하면서 제를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메르스 사태라는 중차대한 일을 직면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은 어떤가? 사태가 일어난 지 12일이 지난 후에야 '초기 대응이 잘못됐다'고 짧은 멘트를 남겼을 뿐이다. 이후 발표에서는 발병 환자의 수도 틀리게 언급을 했다. 또한 주말(6월 6~7일)에는 특별한 외부활동 없이 조용히 보내셨다고 한다.

지금이 그렇게 한가할 때인가? 시급을 다투며 행정력을 총결집해도 모자를 판에 그렇게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맞는 일인가? 차라리 화끈하게 사직단에서 제사라도 올려주셨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의 안녕을 위해서. 너무 답답해서 하는 말이니 오해는 없으셨으면 한다. 오죽 답답하면 여행기사를 이런 식으로 끝을 맺겠는가!   

 
▲ 창의문 창의문 문루는 개방되어 있다. 문루를 탐방중인 트레킹팀.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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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인왕산역사트레킹 코스: 광화문→사직단→단군성전→수성동계곡→윤동주문학관→창의문
2. 약 5km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탐방할 것들이 많아 3시간 이상 소요될 것으로 보임.
3. 시작점: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하차. / 종료점: 종로구 부암동. 경복궁역행 버스 탑승 가능함.
4. 5월 25일에 트레킹을 행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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