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산티아고에 한국인이 많냐고? 스트레스 사회라서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⑤] 산티아고를 걷는 한국인들

 

15.01.06 13:18 최종 업데이트 15.01.06 13:18

 

 

 

 

 

 

 

 

 

 
▲ 멜리다 중심부에 위치한 성당 멜리다는 내륙에 위치했지만 문어 요리로 유명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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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7일, 여행 5일째다.


"저 고백할 게 있습니다."

필자의 뜬금없는 말에 순례팀 시선이 일제히 집중됐다.

"저, 사실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가 스페인어였습니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따가운 시선과 함께 핀잔 섞인 말들이 쏟아졌다.

"그런데 그렇게 스페인어를 몰라!"

 

 



 
▲ 개 신기한 듯 필자를 쳐다보고 있는 개. 그러고보니 '아니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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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말(animal)'들은 일단 맞고 시작했다


그 말이 맞다. 필자가 아는 스페인어라고는 CASA(집)와 ANIMAL(동물) 같은 간단한 단어들뿐이다. 아예 회화는 불가능하고 저런 간단한 단어들 정도만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시절에 제대로 스페인어를 공부한 기억이 거의 없다. 대신 몽둥이찜질을 당한 장면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스페인어 선생님은 단어 암기를 무척이나 강조하셨다. 그래서 매일같이 단어 쪽지 시험을 봤다. 스페인어는 발음 기호가 없어 로마자를 그대로 발음한다. 예를 들면, bar를 '바르'로 animal을 '아니말'로 읽는다.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며 줄을 세우셨다.

"공부 안 하는 사람들은 아니말입니다. 아니말들은 일단 맞고 시작합시다."

필자는 스페인어 시간마다 '아니말'이 되어 두들겨 맞는 줄에 세워졌다. 그외에 스페인어 학습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저 '동물적 감각'으로 그 시간을 회피하고 싶었다는 것과 볼기짝의 아픈 트라우마가 있을 뿐.

저토록 형편없는 스페인어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산티아고 순례길 트레킹을 하는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물론 스페인어 뿐 아니라 영어까지 능통하면 여행이 더 윤택해질 수 있고, 세계 각국의 순례자들과 함께 어울릴 수도 있다. 그렇다고 스페인어나 영어가 완숙되기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그만큼 산티아고 순례길은 외국어가 짧은 사람도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도보여행자들이 순례를 떠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 개와 순례자 개 한 마리가 순례팀 막내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막내는 너무 발에 꽉 끼는 트레킹화를 신어 고생을 많이 했다. 결국에는 트레킹화를 벗고 슬리퍼를 신고 걸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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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 물집을 터뜨리며 '아니말'이 되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낭만이 아닌 현실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의 현실이란 바로 육체적인 괴로움을 말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깨와 무릎 통증, 더불어 물집이다. 그런데 어깨와 무릎 통증은 각 개인별로 상이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물집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그래서인지 순례자의 숙소인 알베르게에서는 밤마다 물집을 터트리는 순례자들의 신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필자도 그런 신음 소리 대열에 참가했다. 잘잘한 건 그래도 터트리는 맛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대왕 물집을 터트릴 때는 인간이 아닌 '아니말'이 되어 비명을 내질렀다.

"아, 읔"

 

 

 



 
▲ 신라며 컵라면 순례길을 걷는 한국인들이 많아서 그런지 저런 광고문구를 내건 기념품 가게도 있었다. 그나저나 저 광고문구를 보니 입 안 가득 군침이 돌았다. 계란 탁, 파 송송 썰어 김치 한조각 올려 후르륵~ 필자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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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자 서구권 순례자들은 우리에게 물었다. "왜이리 한국인들이 많이 오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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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스트레스가 많아서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다보면 많은 한국인들을 만날 수 있다. 아마도 비유럽권 순례자들 중에서는 한국인들이 단연 압도적일 것이다. 그래서 스페인 현지인들과 서구에서 온 순례자들은 이렇게 많이 물어왔다.

"왜 이렇게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나요?"

그들이 보기에 한국은 불교나 유교 국가일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라는 가톨릭 성인을 기리는 순례길 곳곳에서 많은 한국인들을 만난다는 건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그렇게 서구인들이 물어왔을 때마다 필자는 못하는 영어로 떠듬떠듬 설명을 했다.

한국에 산티아고 순례길이 무척 많이 알려졌고, 이 길을 걷고 싶어 자신의 버킷리스트에 넣은 사람들이 많다고. 필자의 영어가 짧아서 그런지 흔쾌히 납득했던 표정을 지은 사람들은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미국 알래스카에서 온 노부부와 함께 잠깐 휴식을 취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미국에서 왔어요. 이제 곧 목표한 지점에 도달합니다."
"대단하세요. 그런데 힘들지 않으세요?"
"아니요. 우리는 쌩쌩해요. 그런데 왜 이렇게 한국 사람들이 많은 거죠?"


필자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한국이 스트레스가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노부부는 수긍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는 '스트레스'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보온병을 꺼내서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밀었다. 스트레스 받지 말고 씩씩하게 걸어가라고 주는 차 한 잔이었다.

 

 

 


 
▲ 멜리데 저 다리를 넘으면 멜리데 시내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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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요리로 유명한 내륙도시 멜리데


순례팀의 목적지는 아르주아(Arzúa)였는데 그곳을 가기 위해서는 멜리데(Melide)라는 도시를 지나야했다. 멜리데는 바닷가와 많이 떨어진 곳임에도 문어(pulpo)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이 도시에 들러 꼭 문어 요리를 맛 본다고 한다.

그날은 트레킹을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트레킹이든 자전거여행이든 3일째가 제일 힘겨운 법이다. 그 순간을 넘기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완주를 할 수 있다. 그만큼 고비라는 뜻이다. 여행 수첩에도 그날 무척 힘들어다는 기록이 구구절절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필자는 사진을 찍는다는 핑계로 후미에 섰는데 말이 사진사 역할이었지 다리가 후들거려서 자연스럽게 뒤로 처졌던 것이다.

그렇게 육체적으로 힘겨운 날에 멜리데 인근에서 철웅이를 만났다. 대학생이었던 철웅이는 다국적 팀과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영어를 잘해서 그런지 일행들과 능숙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말 그대로 다국적으로 '놀고' 있었다. 얼마나 부럽던지!

거의 한 시간 이상 철웅이와 이야기를 하며 걸은 것 같다. 홀로 걸었으면 그냥 주저앉았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격려를 하며 걸어가니 훨씬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런 격언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빨리 가려면 혼자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그렇게 동행이 되어준 철웅이에게 무언가 보답을 해주고 싶었다. 그런데 딱히 해줄 건 없고 해서, 내륙에 위치한 멜리데가 왜 수산물(문어)의 산지인지를 알려주었다.

"혹시 충남 논산에 강경이라는 곳 알아요? 거기도 내륙 안쪽에 있는 곳인데 젓갈 산지로 유명해요. 예전에는 쌀과 수산물 집산지로도 유명했고요. 그게 다 금강 때문에 가능한 거에요. 강을 따라 배들이 올라왔던 겁니다. 이 곳도 마찬가지에요. 대서양에서 잡은 문어를 옛날에는 내륙수운을 통해서 여기까지 가지고 온 거죠."

실제로 멜리데 주위로 카타솔 강(rio catasol)과 프레로스 강(rio furelos)이 흐르는데 이 두 강은 합수되어 울라 강(rio ulla)이 된다. 이 울라 강은 대서양으로 유유히 흘러간다. 강경도 이와 비슷하다. 금강은 옥녀봉 인근에서 논산천을 합수하여 더 큰 강폭을 자랑한다. 그리고는 유유히 서해바다로 빠져나간다.

 

 


 
▲ 철웅이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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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어려워도 아니말이 되지 말자!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아직 철웅이처럼 대학생 신분이거나 과감히 사직서를 쓰고 온 20대 청년들이 많았다. 그들은 아직 스트레스 사회의 중심에 섰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차라리 본격적인 스트레스 사회 진입을 위해 준비중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들이 직면해야 하는 현실은 녹록치 않을 것이다. 갑보다는 을일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일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렇게 스트레스 사회의 중심에 놓이게 되면 대왕 물집을 터트리며 걷는 순례길의 현실을 무척이나 그리워 할지 모른다. 그런 척박한 현실이 싫다고 도망갈 수 없다. 그러면 정말 '아니말'이 되는 것이다. '아니말'이 되지 않기 위해 파이팅 한 번 해보자. 좀 늦었지만 2015년 새해 각오도 다지면서...

"힘들고 외로워도 파이팅입니다! 가야할 길이면 가야 하는 게 운명이잖아요. 여행이든 현실이든..."

 

 



 
▲ 메모 한국인 순례자가 적어 놓은 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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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장거리 도보여행을 할 때에는 일반 운동화보다는 트레킹화를 착용하는 것이 좋다. 예행연습을 하며 미리 국내에서 길을 들여야 한다.

 


2. 트레킹화는 자신의 발보다 5㎜ 정도 큰 것을 장만하는 게 좋다. 그 여유 부분은 양말이나 끈 조임으로 조절할 수 있다. 한편 개인적인 건강에 따라 발이 부을 수도 있기 때문에 트레킹화는 꽉 끼지 않는 것이 좋다.

 


3. 우리팀의 막내는 너무 꽉 끼는 트레킹화를 가지고 왔는데 현지에서 신어보고야 그걸 알았다고 한다. 국내에서 예행연습을 하지 않아 이후 큰 고생을 하게 됐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영화 <호빗>을 통해 톨킨이 말 하려고 했던 것!

 

판타지를 통해 본 인간 근원의 문제

 

15.01.03 15:07 최종 업데이트 15.01.03 15:07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줄거리나 주요 장면이 포함돼 있습니다.

 

 



 
▲ 호빗 영화 <호빗> 포스터
ⓒ 호빗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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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네요. 다른 건 모르겠는데 그 영화는 좀... 그거 판타지 영화 아니에요. 애들 보는 거요?"


<JSA 공동경비구역>, <박하사탕>, <7월 4일생> 등등 필자가 그런 영화들을 감명 깊게 봤다고 하면 상대방도 흔쾌히 수긍한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에 이르면 꼭 부연 설명이 필요했다.

"원작이 워낙 탄탄해요. J.J. 톨킨 박사가 원작자인데 이 사람이 북유럽 신화에 아주 능통하거든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영화 자체가 하나의 잘 짜인 신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신화라는 텍스트에 인간의 욕망을 담아냈으니 하나의 대서사시가 되는 것이죠. 앞으로 이렇게 기승전결이 잘 떨어지는 판타지영화는 나오기 힘들 겁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부연 설명을 했다는 건, 필자와 상대방의 시각이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판타지 영화에 대해서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애들이 보는 영화라 취급하며 낮잡아 보기까지 한다. 리얼리티가 강조될수록 후한 별점을 주는 풍토에서 요정이 활을 쏘고 용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판타지물은 그저 아이들의 영역으로만 자리매김 될 뿐이다.

 

 

 

 
▲ 호빗 엘프족 여전사 타우리엘
ⓒ 호빗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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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통해 인간의 근원을 들쳐보다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백색의 마법사 간달프의 주술은 로또 1등만큼이나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또한 중간계를 짓누르는 악의 화신 사우론의 눈빛보다 옆에 있는 김 팀장의 시선이 더 싸늘해 보인다. 그래서 판타지 영화에서는 <레미제라블>과 같은 카타르시스를 아예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판타지를, '눈 뜨고 코 베어 가는' 냉혹한 현실을 빗대어보는 하나의 원초적 도구로 바라본다. 철천지원수인 엘프족의 레골라스와 난쟁이족의 김리가 당면한 목적을 위해 오월동주(吳越同舟)가 되는 모습, 더 큰 욕심 때문에 난쟁이 왕 소린이 생사고락을 함께한 부하들을 의심하는 모습 등을 보고 있자면,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을 들쳐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요정족, 난쟁이족 같은 비현실적인 종족들이 오히려 인간의 근원적인 심성을 더 명징하게 표출했다고 판단한다.

SF영화와 달리 판타지영화는 물리적으로 현실화 될 수 없는 것들을 담아 놓았다. 기술이 발전하면 <스타워즈>에 등장했던 광선검 같은 무기들도 '실전배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에 등장한 엘프족이나 호빗들은 스크린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대신 그들은 탐욕과 무소유, 신뢰와 배신, 전쟁과 평화 같은 우리 현실세계에서 빈번하게 회자되는 개념들을 스크린에 뿌려 놓는다.

 

 

 

 

 

 

 

 

 

 

 

▲ 제복을 입은 톨킨 1차대전에 참전했던 톨킨.

풀네임은 John Ronald Reuel Tolkien 이다.  

위키피다 출전. 

 

 

 

 

 

 

 

물질문명을 지독하게 혐오했던 톨킨


원작자 톨킨은 1차대전 중 가장 치열한 전투 중에 하나였던 솜 강 전투에 초급 장교로 참전했다. 그 전투에서 친구를 잃은 톨킨은 전쟁, 더 나아가 세계대전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현대문명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후 현대문명과 과학기술에서 멀찌감치 자신을 떼어 놓았다.

문헌학자였던 톨킨은 각 나라들의 언어 변천과정을 연구했는데 각 언어들에 내포되어 있는 신화적인 요소들에 매료됐다. 기계문명의 빈자리를 고대의 신화가 채웠던 셈이다.

그렇게 신화적인 상상력으로 풀어낸 <호빗>을 톨킨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태어난 지 3년 만에 아버지를 여윈 톨킨은, 그 자신이 평생 가질 수 없었던 부성애를 자식들의 침대 곁에서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다. 그런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잠이 들었던 아이들은 꿈에서 엘프 혹은 용을 만났을지 모른다. 

 

 

 

 


<호빗 3: 다섯 군대의 전투>

2014년 12월에 개봉된 <호빗 3: 다섯 군대의 전투>는 호빗 시리즈의 최종판이다. 자신들의 왕국이었던 에르보르를 탈환하기 위해 난쟁이의 왕 소린은 원정대를 꾸린다.

원정대에는 호빗 종족의 빌보 배긴스도 포함되는데 빌보의 역할은 스마우그라는 용에게서 난쟁이들의 최고의 보물인 '아르겐스톤'을 훔쳐 오는 것이었다. 험준한 산 아래에 자리 잡은 에르보르는 원래 난쟁이들이 만든 요새였지만, 사악한 스마우그라는 용이 그곳을 파괴하고 수많은 금은보화 속에서 '꽈리'를 틀게 된다.  

결국 스마우그는 죽고, 난쟁이들은 꿈에도 그리던 잃어버린 땅을 되찾게 됐다. 소린이 자신의 왕국을 되찾은 것이다. 하지만 용이 죽었다고 끝이 아니었다. 악에 의해 이루어진 균형이, 그 악이 제거됐다고 바로 선의 의한 균형으로 넘어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후세인이 제거되자 정파주의에 의해 이리저리 찢기고, 결국에는 IS(이슬람국가)가 꽈리를 튼 이라크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에르보르의 전략적 가치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황금을 차지하기 위해 사방에서 군대들이 진격해 오기 시작했다. 그 군대들은 오크족이나 괴수족 같은 어둠의 세력뿐만이 아니었다. 엘프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 호빗 영화 <호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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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지만, 난쟁이 왕 소린은 전투준비에 박차를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릇된 행동을 하게 된다. 최고의 보물이라는 아르켄스톤을 부하 중에 한 명이 미리 빼돌렸다고 의심을 했던 것이다. '황금의 저주'로 인해 눈이 멀게 된 것이다. 탐욕 때문에 생사고락을 함께 한 부하들을 다 도둑놈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반지의 제왕 3>편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다. 반지를 파괴하는 임무를 지닌 프로도가 절대반지의 힘에 눈이 멀어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고 스스로 반지의 주인으로 선언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임무 수행을 위해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겼던 프로도였지만 정작 마지막 순간에는 반지를 용암에 던지지 못하고 주인 행세를 하려 든 것이다.

이 부분에서 원작자인 톨킨 박사는 탐욕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유도했는지 모른다. 채워지지 않는 무한한 욕구로 인해 인간이 궁극적으로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지를 일깨워주었다고나 할까? 난쟁이였던 소린은 피붙이와 같은 자신의 부하와 친구들에게 불신을 얻게 됐고, 호빗인 프로도는 절대반지를 끼었던 검지손가락 한마디를 잃게 됐다. 그것이 바로 현대 물질문명을 혐오했던 톨킨이 판타지를 통해 우리 인간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대망의 2015년이 시작됐다. 유난히 사건과 사고가 많았던 지난 2014년과 달리 올해는 좀 더 달라질 수 있을까? 좀 더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인간들이 탐욕에 눈이 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질에서 좀 더 자유로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이런 언급은 '판타지'적이라고 욕을 먹을지 모른다.

"장그래로 대변되는 비정규직들이 넘쳐나고, 최저 시급의 굴레에 사로잡힌 알바생들 좀 봐! 탐욕에서 자유로워지라니, 탐욕을 부릴게 있어야 탐욕을 부리지!"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안전한 겨울 눈꽃 트레킹을 위하여!

 

눈길에서 '방탄조끼' 기능 톡톡히 해... 기능성 내의로 체온 조절 신경써야

 

14.12.31 14:51l최종 업데이트 14.12.31 14:51

 

곽동운(artpunk)

 

 

 

 

 

 

 

 

 
▲ 눈꽃트레킹 겨울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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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온이 뚝뚝 떨어질수록 야외 활동도 위축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는 시기에는 '집 나가면 고생'이란 말을 절감하게 된다. 그렇다. 겨울철에는 아웃도어 활동도 비수기에 접어든다.

 

 



겨울에만 즐길 수 있는 눈꽃 트레킹

 



하지만 아무리 눈발이 날리고 북풍이 불어도 배낭을 짊어지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혹시 그들에게 으뜸으로 꼽는 트레킹이나 산행을 물어보면 이렇게 답할지 모른다.

"눈꽃 트레킹, 눈꽃 산행!"

봄꽃 산행, 가을철의 단풍 산행도 좋지만 산악인들이 으뜸으로 꼽는 산행은 바로 겨울철 눈꽃 산행이다. 도보여행도 마찬가지다. 눈꽃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겨울철을 손꼽아 기다렸다는 도보여행가들이 상당히 많다.

그렇다면 겨울 트레킹의 특징은 무엇일까? 동상에 걸릴 수도 있는 등 위험천만한 상황들이 발생할 수 있는데도 무엇이 신발끈을 조여 매게 만드는 걸까? 온 천지가 흰 눈으로 덮인 산길을 걸을 때의 느낌은 겨울철 이외에는 맛볼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

가을철 단풍 트레킹이 알록달록한 비주얼을 감상하는 것이 재미라면, 눈꽃 트레킹은 흰 색으로 통일된 세상을 걷는 오묘한 맛이 있다. 그렇게 흰색으로 단일화된 세상을 말없이 걷다보면 도보여행자 자신의 내면도 하얗게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겨울철 트레킹만큼 위험한 트레킹도 따로 없다. 예기치 못한 폭설을 만난다면 조난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저체온증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래서 겨울트레킹을 하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 상고대 눈꽃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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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고, 벗기를 잘 하자!

 


두 말 하면 잔소리겠지만 겨울에는 든든하게 입어야 한다. 보온에 충실해야 한다. 그렇다고 옷을 마구 껴입어서는 안 된다. 입기와 벗기를 적절히 해야 한다. 트레킹을 할 때에는 몸을 움직이므로 신체에서 열이 난다.

이때는 옷을 벗어 몸에서 과도하게 땀이 분출되지 않게 해야 한다. 반대로 휴식 중에는 옷을 꺼내 입어 보온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어떻게 '열 관리'를 했느냐에 따라 겨울트레킹의 성패가 갈린다고 할 수 있다.

내의를 입을 때도 고려점이 있다. 면 소재 제품은 가급적 피해야 한다. 면 소재 내의들은 땀을 흡수만 했지 방출을 하지 못한다. 그럼 땀으로 범벅이 된 찝찝한 면 수건을 몸에 두르고 트레킹을 하는 셈이 된다.

이런 상황을 맞지 않으려면 건조성이 뛰어난 기능성 내의를 입는 게 상책이다. 한편 봄이나 가을에도 기능성 내의를 입고 트레킹에 나서는 게 좋다. 일교차가 큰 계절인 만큼 대비를 해야 한다.  

 

 

 



배낭이 방탄조끼?

 


이런 말이 있다.

'겨울 아웃도어 활동은 장비가 반이다'

그런 장비들 중에는 배낭도 포함된다. 독자들 중에는 트레킹을 하면 당연히 배낭을 메는데 무엇 때문에 배낭을 목록에 올려놓았는지 의아해 하실 분들도 있을 것이다. 요즘은 산악회처럼 관광버스를 이용하여 트레킹을 하는 도보여행 카페가 많다.

관광버스를 이용한 트레킹은 장비를 차내에 놓고 갈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배낭도 없이 그저 맨 몸으로 도보여행에 나서기도 한다.

겨울철에 배낭은 단순 짐 가방으로 쓰이지 않는다. 방탄조끼처럼 자신을 보호해주는 장비로 쓰인다. 빙판길에 미끄러져 몸이 뒤로 넘어질 때 배낭은 쿠션 작용을 해준다.

잘못 넘어져 뒷머리가 곧장 땅바닥에 부딪치는 불상사를 막아줄 수 있다는 것이다. 배낭을 메고 넘어졌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확실히 느낄 것이다.

이 때 배낭 속에는 여분의 옷(재킷)이나 무릎 담요, 여분의 양말 같은 것들로 채운다. 무릎담요는 식사 시간에 사용하자. 양말이 젖으면 동상에 걸릴 염려도 있으니 여분의 양말도 꼭 챙기자. 이렇게 방어용 배낭은 뾰족한 것이 아닌 푹신한 것들로 채워야 한다. 

 

 



 


 
▲ 겨울트레킹 겨울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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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트레킹의 필수 장비들


겨울 트레킹에 아이젠이 필수이듯이 '스패츠'도 필수로 착용해야 한다. 스패츠(spats)는 눈이나 비, 흙 등이 들어가지 않게 발목에 차는 각반을 말한다. 무릎 아래까지 오는 긴 스패츠는 따로 게이터(gaiter)라고 부르기도 한다.

장시간 눈길을 걷다보면 신발의 끈 부분과 발목 상단 부분으로 눈이 스며든다. 그렇게 신발 안쪽으로 들어온 눈은 양말을 젖게 하여 동상을 유발시킬 수 있다. 하지만 스패츠를 착용하면 조금이라도 눈이 덜 스며들게 할 수 있다. 스패츠를 착용했다고 안심할 수 없으니 앞서 언급했듯이 꼭 여분의 양말을 챙기자.

평소 스틱을 사용하지 않는 분들도 겨울에는 스틱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 물웅덩이가 진 곳이나 살얼음이 진 곳을 스틱으로 먼저 체크한 후에 이동을 하면 보다 더 안전하게 트레킹을 할 수 있다.

한편 장비를 제대로 갖추었다면 아이스 트레킹에 도전해 볼 수도 있다. 아이스 트레킹은 꽁꽁 언 강물 위에서 트레킹을 하는 것을 말한다. 빙하 트레킹은 아이슬란드 같은 극지방에서만 할 수 있기에 제약이 많이 따르지만 아이스 트레킹은 강원도에서도 할 수 있다.

평소에는 강물 때문에 갈 수 없었던 부근을 얼음을 지치며 나가는 것이 아이스 트레킹의 매력이다. 빙하 트레킹을 못하는 아쉬움을 아이스 트레킹이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 있을 것이다.

 

 


 

 

▲ 영월: 한 겨울 강원도에서 아이스 트레킹을 할 수도 있다.

 

 

 




팩으로 따뜻한 음식 준비하기

 


겨울에는 행동식 준비도 제약을 받는다. 김밥이나 떡 같은 대표적인 행동식은 강추위에 꽁꽁 얼기 일쑤다. 이렇게 언 음식물을 먹다 보면 체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보온밥통과 보온병을 이용해서 따뜻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조금 번거롭지만 이런 방법을 써보자. 수건에 음식물과 함께 핫팩을 돌돌 말아 여분의 옷가지 깊숙한 곳에 보관하는 것이다. 이때 음식물은 핫팩과 함께 묶여도 좋은 것들이어야 한다.

한편 요즘은 전투식량을 민간용으로 만들어 시중에서 판매한다. 그 중에는 발열 기능이 있는 것들도 있다. 발열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 게 문제지만 그래도 엄동설한에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게 발열 전투식량의 장점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찬찬히 다시 읽어보니, '조심해라', '하지 마라'라는 식의 경고형 문구들이 눈에 많이 띈다. 여행면에 쓰는 글이라면 좀 더 진취적이고 밝은 내용을 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경고형 문구가 반복됐다는 건 그만큼 겨울트레킹이나 겨울산행이 무척 위험하다는 반증이다.

유비무환이라고 철저히 준비를 하는 사람은 설국에서 겨울을 만끽할 수 있다. 그렇게 새하얀 세상을 사뿐히 걷다보면 어느 순간 자신 속에 있는 검은 때가 씻겨 내려갈지 모른다. 하얀 세상이 공짜로 자신을 정화시켜주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독재자 프랑코가 우리에게 유신을 알려줬다고?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4편] 산티아고를 걷는 유럽인들

 

14.12.27 15:51l최종 업데이트 14.12.27 15:51

 

 

 

 

 

 

 
▲ 순례자 산티아고 대성당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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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들의 동료의식

산티아고 순례길에서의 또다른 볼거리는 바로 '사람'이다. 길을 걷다보면 전 세계에서 온 순례자들과 만나고 헤어지고를 수없이 반복한다. 순례자들의 일일 이동거리가 뻔하기 때문에 계속 동선이 겹쳐지고, 그러다보니 보는 얼굴이 계속 보이게 된다. 아침에 같은 알베르게(albergue: 순례자 전용 숙소)에서 출발한 사람과 점심 때 같은 바르(bar)에서 만나고, 그러다 저녁에 또 같은 알베르게에서 1박을 하고.

그래서인지 순례자들끼리는 자연스럽게 동료의식이 생긴다. 아예 팀처럼 움직이는 무리들도 있었다. 그들은 같은 알베르게에 묵으며 일정 자체를 공유했다. 심지어 그들은 빨래도 같이 했다. 알베르게에 있는 세탁기와 건조기의 요금은 보통 3유로 정도인데 개별적으로 하는 것보다 모아서하면 훨씬 저렴하기에 그들은 세탁물을 한 통에 넣어 세탁을 했다.

순례길을 걷기 전까지는 전혀 인연이 없던, 순례길을 통해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옷들이 한 통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남자 속옷, 여자 속옷 가릴 것 없이 세탁기에서 원심 운동을 하고 있었다.

 

 

 

 



 
▲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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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은 피레네에서 끝났다!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다국적이었지만 역시 자국민인 스페인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스페인을 제외하고는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비유럽권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은 듯했다.

유럽권 순례자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특히 히피처럼 보이는 순례자들을 보니 그 의문이 더욱 짙어졌다.

'중세는 그렇다 치고, 현대에 와서는 언제부터 유럽 사람들이 이렇게 산티아고 순례길로 몰려들었지? 프랑코 독재에 진절머리 쳤던 유럽 사람들인데 말야. 아직까지 스페인에 프랑코의 어두운 그림자가 남아 있다면 그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었을까?'

<1984> <동물농장> <카탈로니아 찬가>로 유명한 소설가 조지 오웰은 스페인의 역사를 두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스페인의 역사는 1936년에 멈추고 말았다."

조지 오웰은 1950년, 46세의 나이로 요절을 했고 그때까지도 스페인은 프랑코가 통치를 했다. 국제여단의 일원으로 스페인내전(1936~1939)에 참여해 목에 관통상을 당하는 등 엄청난 고생을 했던 조지 오웰이었기에 절대로 프랑코를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저런 말들을 쏟아냈을 것이다.

조지 오웰처럼 서구 사람들은 스페인에 대해서 고운 시선을 보낼 수가 없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를 끌어들여 선거로 들어선 인민전선 정부를 전복시켰던, 파시스트 프랑코 정권이 계속 존속했던 한 서구인들에게 스페인은 논외의 국가였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런 말도 있었다.

"유럽은 피레네(산맥)에서 끝났다."

이렇듯 피레네 산맥은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에게 가상 경계선으로 인식됐다. 뻔히 피레네 산맥 아래에 스페인이 존재함에도 그들은 애써 이베리아반도를 유럽 대륙에서 떼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피레네를 들었다 놨다 했던 프랑코

그렇게 가상의 경계선이었던 피레네 산맥은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의 시작점이 돼 전세계 순례자들이 모이는 집합소 역할을 해주고 있다. 그러고 보면 피레네는 20세기 들어 유럽과 스페인을 이어주는 가교가 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큰 장벽처럼 경계선이 되기도 하는 등 그 역할이 빈번했다.

그렇듯 피레네가 가교가 되던 장벽이 되던 그 중심에는 항상 프란시스 프랑코가 있었다. 프랑코의 파시즘을 막기 위해 유럽인들은 피레네를 넘었고, 프랑코가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하게 되니 피레네를 경계선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하자 피레네를 통해 이베리아반도를 방문했다.

 

 



 
▲ 프란시스 프랑코 프란시스 프랑코
ⓒ 위키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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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코가 사망을 했다고 군부중심의 독재체제가 일거에 해소되지는 않았다. 당연한 이야기다. 프랑코 체제가 하루아침에 민주체제로 변환된다고 생각하는 건 그저 판타지적인 상상일 뿐이다. 그래서 서구 국가들은 스페인의 민주주의 이행 과정을 근심어린 시각으로 바라봤다.


살얼음판 같았지만 '스페인의 봄'은 민주주의 체제로 착실히 이행되어 갔다. 정치개혁법 제정,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의 합법화, 신헌법 제정 등, 39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프랑코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법안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어디나 구체제를 신봉하는 수구세력들이 있는 법! 역사의 수레바퀴가 언제나 순탄하게 돌아가지는 않는 법이다. 1981년 2월 23일, 민주화 이행에 불만을 가진 군부세력들이 국회의사당에 진입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프랑코 사후에 진행된 민주주의 개혁 덕택에 희미해졌던 피레네의 경계가 다시 'DMZ'처럼 선명하게 되돌려 질 판이었다.

 

 

 

쿠데타에 단호히 반대한 후안 카를로스 국왕


프랑코 체제에 향수를 갖고 있던 일부 군부 세력들은 공산당 합법화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부터 40년간 반공을 국시로 삼고 스스로의 정당성을 부여했던 군부였다. 그래서 공산당까지 합법의 테두리로 끌어들이는 정당 개혁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행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렇게 '스페인의 봄'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놓이게 됐다. 또다시 프랑코 시대와 같은 독재시대로 돌아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의 민주화는 그렇게 쉽게 꺾이지 않았다. 아니다. 오히려 좀 싱거웠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왜? 6시간 만에 쿠데타 상황이 '종결'됐기 때문이다.

"조국의 단합과 영원함의 상징인 왕실은... 민주적인 정치 과정을 무력에 의해 파괴하려고 하는 어떠한 행동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 후안 카를로스 후안 카를로스
ⓒ 위키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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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이자 군 최고사령관인 후안 카를로스는 단호하게 쿠데타를 반대했고, 그들 세력의 그릇된 야망을 좌절시켰다.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됐지만 아돌포 수아레스를 총리로 내세워 개혁을 이끌게 했고, 쿠데타라는 긴박한 상황에서 결단력을 발휘하여 스페인이 구체체로 복귀하는 것을 막아냈다.


한편 후안 카를로스는 우리하고도 인연이 있다. 왕세자시절 한국인 사범으로부터 태권도를 배웠기 때문이다. 

 

 

 

<게르니카>와 산티아고 순례길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중에 공화정부의 요청으로 그려진 작품이다. 피카소는 프랑코가 집권하는 한 조국으로 <게르니카>를 보낼 수 없다며, 미국에 그것을 맡겼다. 자유의 상징인 <게르니카>를 파시스트 독재자 손에 건넬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조국 스페인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돌려보낸다는 조건이었다.

40년 넘게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타향살이'를 했던 <게르니카>는 드디어 1982년,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림의 반환에 스페인 국민들은 크게 환호했다. 전세계 사람들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스페인이 오랜 독재체제에서 벗어나 민주주의 사회로 거듭났음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만약 1981년 2월에 있은 군부 쿠데타가 성공을 했다면 <게르니카>가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산티아고 순례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스페인이 프랑코 체제를 극복하지 못했다면 순례길도 북적거리지 못했을 것이다. 

<게르니카>가 환대를 받으며 귀향했듯, 산티아고 순례길에도 봄바람이 불어왔다. 1982년 교황 바오르 2세의 방문, 1987년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 출간,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등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은 더욱더 북적북적 해진 것이다. 또다른 중흥기를 맞이한 것이다.

 

 

* 게르니카

 

 

 

 


대원군, 십상시, 문고리... 사극 찍어도 되겠네!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태권도로 우리와 인연이 있듯 프란시스 프랑코도 우리와 관련이 있다. 유신 헌법이 바로 그 '인연의 끈'이다. 1972년 박정희가 유신헌법을 제정하며 영구집권을 획책했을 때, 관련 학자들을 스페인과 대만으로 파견했다고 한다. 당시 두 나라는 총통이 최고 권력기관으로 군림했었고, 유신헌법은 총통제를 목표로 했기에 '적절한' 파견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알다가도 모르는 게 세상일인 것 같다. 약 40여년 전, 총통제를 가르쳐줬던 스페인은 입헌군주국으로서 착실히 민주주의를 실천해 갔고,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의 기소에 앞장을 서기도 했다. 하지만 총통제를 배워갔던 우리나라는 그 유신헌법을 기초한 사람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자리에 임하고 있다. '기춘대원군'이라는 매우 봉건 왕조적인 별명을 가지고 말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십상시'와 '문고리 3인방'도 있다. 대원군, 십상시, 문고리... 이 정도 캐릭터면 사극 영화 하나 찍어도 될 듯하다. 누가 아는가? <광해>나 <왕의 남자> 빰칠 정도의 흥행몰이를 할지!

 


 
▲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필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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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산티아고 순례길, 밥도둑들에게 도시락을 빼앗기다!

 

[22일간의 스페인 여행 ③] 버렸더니 채워졌다

 

14.12.22 10:14 최종 업데이트 14.12.22 10:14

 

 

 

 

 

 

 

 
▲ 포르토마린(Portomarin) 포르토마린을 흐르고 있는 미뉴(Minho)강. 강 한가운데 로마시대에 지어진 다리의 잔해가 있다. 서기 2세기에 지어진 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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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5일, 여행 3일째


순례팀은 전날 기차를 타고 갈리시아 지방에 있는 사리아(Sarria)에 도착했다. 사리아는 순례길의 종료점인 산티아고 시에서 동쪽으로 약 1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굳이 사리아에서 순례여행을 시작한 이유는 '완주증' 때문이었다. 100km만 걸어도 정식으로 발급되는 완주증을 받을 수 있다.

원칙적으로 하면 순례길의 메인이라고 불리는 프랑스길(Camino Francés)의 전 구간, 즉 800km를 다 걸은 이에게만 완주증이 발급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100km 이상 걸은 이에게도 발급한다는 건 그만큼 더 순례길을 대중화시키겠다는 이야기다. 여건상 전 구간을 종주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일정 부분에 도달하면 '완주'를 인정해주겠다는 뜻이다.

 

 



 
▲ 사리아 사리아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동쪽으로 약 110km 정도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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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짐은 고행의 지름길


아침부터 계속 비가 오락가락했다. 우비를 부실한 걸 챙겨와서 그런지 입어도 변변찮았다. 트레킹 첫날 오전부터 '삐끄덕'거리는 느낌이다. 비도 그랬지만 가장 문제였던 건 짐이었다. 줄인다고 줄였는데도 배낭에 한 가득이었다. 배낭을 제대로 못 닫을 정도로 짐이 넘쳤다. 인천공항 수하물 코너에서 무게를 체크 할 때는 12㎏이었다. 그때는 그럭저럭 버틸 만 했는데 오전에 배낭을 매어보니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전날 마트에서 과소비(?)를 해서 그랬던 것이다.

스페인의 물가는 다른 유럽국들보다 더 저렴했다. 그래서 손에 잡히는 대로 식료품을 구매한 것이다. 우유, 치즈, 버터, 요거트, 빵 등은 한국보다 더 저렴해서 그런지, 한가득 집었는데도 8유로(1유로: 약 1400원)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필자는 자칭 빵돌이, 치즈돌이인 터라 매우 흐뭇하게 마트에서 나올 수 있었다.

숙소에 돌아와 콧노래를 부르며 그것들로 저녁을 먹었고, 다음 날 점심에 먹을 도시락도 준비했다. 버터를 바르고 치즈도 넣고, 딸기잼으로 마무리 한 특선 도시락을 넉넉히 준비하였다. 또 남는 건 하나도 남기지 않고 배낭 속에 넣었다.

'무겁더라도 다 가져가야지. 어떻게 먹을 것을 버리고 가나!'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카미노를 걷고 있는 순례팀.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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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배낭이 무겁지! 배낭 무게는 자신의 몸무게의 10%를 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배낭이 30리터든 60리터든 빈 공간을 다 채우려고 드는 것이 장거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심리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것저것 다 챙겨 넣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필자는 원래 짐에다 부식까지 잔뜩 더 짊어졌기에 어깨를 늘어뜨리며 걸어야 했다.


과도한 짐들은 어깨를 내리 누르고, 허리와 무릎에 부담을 가중시킨다. 즐거워야 할 도보여행길은 고행길로 바뀌게 된다. 물론 순례자라면 일정 정도 고행을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과도한 고행은 도보여행 자체를 망칠 수도 있다. 경건한 마음으로 순례길을 여행하려고 스페인에 왔지, 골병들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니까. 

 

 

 



어깨는 짓눌리고, 뱃속은 부글부글...

어쨌든 필자는 첫날, 고행과 더불어 고역을 겪어야 했다. 과도한 짐무게로 어깨는 내려앉을 것 같은 데다 설상가상으로 배까지 아파왔기 때문이다. 유제품이 저렴하다는 이유로 엄청 배불리 먹었다가 탈이 난 듯싶었다. 과유불급이라고 적당히 사고, 적당히 먹었어야 했는데...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뱃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배낭은 어깨를 짓누르고... 그러다보니 주위 풍광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무척 아름다운 풍광이 연이어 이어졌지만 필자의 눈은 그저 화장실을 찾는 데 혈안이 됐을 뿐이다. 오죽했으면 노상방변(?)까지 심각하게 고려를 했을까.

 

 



 
▲ 바르(bar) 사장 바르(bar) 사장과 '밥도둑'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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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료점까지 100km가 남았다는 표지석을 뒤로 하고 바르로 내달렸다. 'bar'를 영어로는 '바'라고 하지만, 스페인어는 발음 기호가 없이 로마자 그대로 읽어 '바르'라고 한다. 스페인도 다른 유럽국가들처럼 공공화장실 개념이 희박하다. 마드리드 지하철역에도 화장실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여행 중에 화장실을 이용하려면 바르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아주 시원하게 일을 처리했다. 10년 묵은 체증이 밀려나가듯 무척 후련했다. 박재동 화백이 저술한 <박재동의 실크로드 스케치 기행>에서는 아침 인사말이 '화장실을 잘 갔냐?'였다. 해외여행을 하면 긴장감 때문에 일을 시원하게 못 보기에 그런 인사말이 오갔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순례길을 걷는 첫날부터 아주 유쾌하게 처리했다. 역시 도보여행은 화장실 '도우미'다.

 

 



'밥도둑'들에게 도시락을 빼앗겼다

비웠으니 다시 속을 채울 때였다. 전날 준비했던 특선 도시락이 빛을 발했다. 1유로 짜리 커피 한 잔과 함께 도시락을 펼쳐놓았다. 이제 맛있게 점심을 즐길 시간이었다. 그런데 도시락 뚜껑을 열자마자 '밥도둑'들이 몰려들었다. 그 녀석들은 순식간에 주위를 감쌌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당혹스러웠다.

'길 닦아놓으니 뭐가 먼저 지나간다고, 도시락 뚜껑을 여니까 누렁이랑 야옹이가 먼저 달려드네!'

 

 


 
▲ 밥도둑 누렁이 표정이 참 거시기해서 빵조각을 안 줄래야 안 줄 수가 없었다. 앉은 자세도 참 거시기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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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터, 치즈, 잼을 골고루 넣은 빵맛이 좋았나 보다. 한두 점 떼어주면 그것만 먹고 돌아설 줄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었다. '밥도둑'들은 오히려 더 열성적으로 도시락 통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녀석들 빵맛을 아는구먼!'

그런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안양 삼막사에 있는 토종개 삼총사가 생각났다. 밥 때에 맞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공양간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그 토종개들...

그렇게 버릴 건 버리고, 채울 건 채웠더니 그제야 주위 풍광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됐다. 순례팀이 도보여행을 시작했던 사리아와 대성당이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모두 갈리시아(Galicia) 지방에 속해 있다. 갈리시아는 이베리아반도 북서쪽에 위치해 있는데 왼쪽 면에는 대서양과 맞닿아 있고, 기후는 다른 스페인 지역과 달리 대체로 습하다. 또한 비도 많이 내리는 지역이다.

 

 



 
▲ 소몰이 한 지역 주민이 소떼를 몰고 있다. 소들도 이런 산책(?)이 익숙한 듯 나름대로 진영을 갖춰 이동을 하고 있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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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제주 올레길을 떠올리다


필자도 나름대로 도보여행가라 이 곳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봤다. 갈리시아 지역은 대체적으로 산악지형이었다. 여행기 2편에서 이슬람 무어인들에 의해 서고트 왕국이 멸망당했고, 옛 귀족들이 규합하여 반도 북부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설립했다고 언급했다(관련 기사 :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자료를 찾아보니 당시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산악지형을 이용하여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가까스로 막아냈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이 곳의 지형은 경사도가 가파르지 않고 무척 순했기 때문이다. 산악지형이긴 했지만 산들은 완만한 언덕배기 형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급격한 경사도를 나타내는 지형은 거의 없어 보였다. 방어력을 높여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천혜의 요새를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험준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당시 코르도바 왕국은 반도 북부지역을 점령할 의지가 없었다고 기술한 역사책도 있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이 지형을 방패삼아 방어를 잘 한 것이 아니라 애초 이슬람인들에게 북부지역은 관심권 밖이었다는 이야기다.

 

 


 
▲ 돌담 너머 보이는 목초지 넓은 평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소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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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완만한 지형과 풍부한 강수량 때문인지 갈리시아 지역은 오래전부터 목축업이 잘 발달되었다. 드넓게 펼쳐진 목초지에서 소와 말들이 느긋하게 풀을 뜯고 있는 풍광은 갈리시아 지역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그런 모습들은 그저 보고만 있어도 아름답고, 시원스러웠다.


순례팀은 약 25km를 걸어 포르토마린(Portomarin)에 도착했다. 미뉴(minho river)강을 넘어 다다른 포르토마린은 그 자체로 절경이었다. 미뉴강의 흐름으로 생성된 완만한 협곡 지형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고 있었다.

지금이야 현대식 교량으로 미뉴강을 넘지만 중세시대의 순례자들은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교량을 넘어 도시로 진입했다. 그 교량은 서기 2세기 경에 만들어졌는데 아직도 강 한복판에는 그 흔적들이 남아 있다.

정겨움이 가득한 돌담들 너머 소와 말들이 한가롭게 초원을 누비는 모습, 미뉴강이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고 있는 포르토마린까지 보고 있자니 제주도가 생각났다. 또한 자연스럽게 올레길도 연상됐다. 필자가 산티아고에서 제주 올레를 떠올리듯, 유럽 출신 순례자들이 제주 올레를 걷는다면 산티아고 카미노를 떠올릴지 모른다. 필자는 평소에 지론이 하나 있다.

'아무리 지역이 다르더라도 아름다움은 서로서로 통하는 무언가가 있다!'

 

 

 

 



 
▲ 포르토마린 포르토마린에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다리가 있었다. 중세시대 순례자들은 그 다리를 넘어 산티아고 대성당으로 향했다. 사진에서 보는 잔해물들이 그 다리의 일부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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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필자는 짐을 꾸릴 때 3-3-3 원칙을 썼다. 속옷 3, 양말 3, 상의 3. 이런 식으로 짐을 꾸렸다. 순례자들의 숙소인 알베르게에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어서 그런지 일부 순례자들 중에는 '단벌신사'들도 있었다. 하여간 세탁기를 사용할 수 있으니 옷을 너무 많이 휴대하지는 말자. 가벼운 짐은 순례여행을 더 알차게 만들 것이다.

2. 배낭이 커지면 꾸역꾸역 채워 넣으려고 하는 게 사람의 심리다. 그러니 배낭은 40리터가 넘지 않는 것을 구매하는 게 좋다. 여성순례자들이라면 30리터짜리 배낭을 메는 것도 좋을 듯싶다. 

3. 스페인의 11~12월은 우기라고 한다. 하루에도 비가 계속 오락가락한다. 그러니 꼭 우비를 준비해야 한다. 또한 침낭도 필수다. 침구류가 없는 알베르게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4. 도시락용 플라스틱 용기를 준비하자. 의외로 많은 순례자들이 자신이 만든 도시락으로 점심 식사를 대신했다. 바르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과 함께 먹는 도시락도 그럭저럭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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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22일간의 스페인 여행기 ②] 산티아고 순례길과 성인 야고보 2부

 

 

 

 

 

 

---> 전편에 이어서

 

 

 

 

 

 

 

 

 

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

 

 
▲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이 스페인 가족은 포르투갈과 인접한 지역인 비고(Vigo)에서 왔는데 순례길을 걷는 내내 자주 마주치게 됐다. 동선을 함께한 것이다. 야고보 성인을 캐릭터화한 음수대에서 물을 마시고 있을 때 촬영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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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물음대로라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그 수많은 순례자들은 '사기'를 당한 셈이 된다. 있지도 않은 야고보 무덤을 보기 위해 무려 800km에 달하는 길을 걷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자신의 버킷리스트로 넣는 사람들은 어떤가? 미래에 행할 '바보들의 행진'을 준비하기 위해, 현재의 소중한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는 멍청이들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필자의 의문은 더욱 짙어졌다. 그러다 책 <새 유럽의 역사>159쪽에 기술된 부분을 읽게 됐다.



사도 성 요한의 형제이자 에스파냐의 수호 성인인 야곱(기자 주. 야고보)이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 프레데리크 들루슈 편, 윤승준 역, <새 유럽의 역사>(까치)


이 서술에 의하면 산티아고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없을 확률이 농후해진다. 이외에도 서양의 중세사를 다룬 유명한 저서, <서양중세사>에도 야고보와 스페인에 대한 관계를 그저 '전설' 수준으로 서술했다.

애초 야고보가 에스파냐에 복음을 전달했을 가능성이 없었다면, 그의 유언도 성립될 수 없다. 가보지도 않은 땅에 자신의 주검을 묻어달라고 간청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사기를 당한 것일까? 존재하지도 않은 야고보의 행적을 좇아,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인가?

 

 

 

 


국토 회복 운동에 구심점이 되어 준 야고보

 

 
▲ 무어인을 무찌르는 야고보 17세기 작품이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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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됐다는 9세기 초, 당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고 있었다. 611년, 무함마드가 이슬람교를 창시한 이래, 무슬림들은 포교를 위한 전쟁을 수행해나갔다. 북아프리카 일대를 점령한 그들은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까지 물밀 듯 쳐들어갔다.

당시 이베리아반도에 있던 서고트 왕국은 이들의 침략을 막지 못하고 713년에 멸망한다. 이후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 산악 지대로 도주했다가, 718년에 아스투리아스(Asturias) 왕국을 창건하게 된다.

스페인은 유럽 주요국 중 유일하게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나라였다. 그도 그럴 것이 1차 십자군 전쟁(1096년 발발)이 일어났을 때도 국토의 절반 이상이 이슬람 세력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자국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던 것이다.

 

 

 

 

* 12세기 경의 스페인: 북부 지방을 제외하면, 이베리아반도 전체가

코르도바 왕국의 영역이다. 코르도바 왕국은 이슬람 무어인들이 세운 나라다.

 

 

 

 

 


이런 국토 회복 운동을 레콘키스타(reconquista)라고 부른다. 국토 회복 운동은 이슬람 세력이 침공했던 711년부터 1492년까지, 무려 800년이나 지속됐는데 그런 국토 회복 운동의 중심에 야고보가 서게 된다. 국토 회복이라는 엄청난 과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큰 구심점이 필요했는데 스페인 사람들은 그 역할을 야고보에게 맡긴 것이다. 열두 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했던 야고보였기에 그런 큰 역할을 부여했을 것이다.

그와 관련해 전설이 하나있다. 844년의 클라비호 전투에서 백마를 탄 야고보가 나타나 이슬람 무어인들을 무찔렀다는 것이다. 이후 야고보는 '무어인을 죽이는 산티아고(Santiago Matamoros)'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야고보는 스페인 사람들을 정신적, 종교적으로 하나로 묶어 이슬람 세력에 대한 항전 의지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했다.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야고보는 큰 구심점이 돼주었던 것이다.

 

 

 

 

의심도 순례자들의 덕목일지 모른다

 

 
▲ 산티아고 대성당 산티아고 대성당에 선 필자. 대성당은 당시 공사중이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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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대성당에 산티아고(야고보)가 있냐, 없냐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답을 명확하게 내려줄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한편 고생 고생하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도 필자와 같은 의문을 한 번쯤 다 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우리 순례길 팀에도 '어떻게 그 당시 항해 기술로 예루살렘 땅에서 스페인까지 원거리 항해가 가능하겠냐'고 말씀한 분도 계셨다.

필자는 그런 의심(?)들도 순례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중 하나로 판단했다. 덮어놓고 무조건 '믿어라, 믿어라'하면 맹목적인 신앙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짜 순례자들이라면 몸은 고달프더라도 정신적으로는 '예수천국 불신지옥' 같은 그릇된 배타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이 돼야 할 것이다.

성경에는 '의심하지 말라'라고 적혀 있지만, 그 의심이 합리적이라면 계속해서 되새겨야 할 것이다. '왜'라는 물음 없이 교조적으로 종교를 받아들인다면 그건 종교가 아니라 세뇌일 뿐이다. 그 세뇌가 통한다면 그로 인해, 누군가가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기사를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산티아고에 야고보가 묻힌 것이 맞냐'라는 필자의 의구심은 해소가 됐는가? 그걸 궁금하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필자의 결론은 이렇다.

 

 



물음표는 그저 물음표로 남겨 두겠습니다. 어쩌면 느낌표가 대신 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관촉사 은진미륵에서 선한 감흥을 받았을 때도, 56억 7천만 년 후에 부처님이 도래한다는 미륵불 신앙을 기계적으로 믿어서 얻은 불심이 아니었거든요. 산티아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에 야고보가 묻혀 있든 아니든 저는 대성당에서 성소를 체험했기에 그 감흥을 느낌표로 간직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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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 '산티아고'가 없다고? 

 

[22일간의 스페인 여행기 ②] 산티아고 순례길과 성인 야고보 1부

 

14.12.19 10:47 최종 업데이트 14.12.19 14:03
 


 

 

 


 
▲ 산티아고 카미노 순례자 스페인어로 산티아고는 야고보를, 카미노는 길을 뜻한다. 즉, 산티아고 카미노는 '야고보 길'이라는 뜻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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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Santiago)는 스페인어로 야고보를 뜻한다. 야고보는 사도 요한의 형으로, 야고보와 요한은 둘 다 예수의 열두 제자였다. 야고보는 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야고보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돌아왔다. 고된 사역 길 이후 다시 돌아온 고향이었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금의환향'이 아닌 죽음의 그림자였다.

유대왕인 헤롯 아그리파 1세의 무시무시한 칼날이 그의 목을 내리쳤기 때문이다. 아그리파는 예수가 태어날 때, 베들레헴의 신생 아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했던 그 헤롯왕의 손자였다. 대대로 헤롯왕가들은 유대 땅에 그리스도교가 기반을 잡는 것을 싫어했던 모양이다. 결국 야고보는 기원후 44년 7월 25일에 참수를 당하고 만다. 열두 제자 중 처음으로 순교자가 된 것이다.

 

 



민중 속에서 '부활'한 야고보

 

 
▲ 성인 야고보 산티아고 대성당 벽면에 새겨진 야고보상.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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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야고보의 시신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배에 실려 에스파냐 북서부 지역으로 이동하게 됐다고 한다. 에스파냐에서 복음을 전한 만큼 그곳에 뼈를 묻겠다는 유언이 있었고, 제자들이 이를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 그 먼, 당시는 로마 지배하에 있던 이베리아 반도까지 장거리 항해를 마다하지 않고 제자들은 돛을 올렸을 것이다.

당시 로마는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지 않았다. 공인은커녕 탄압에 앞장섰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야고보와 관련된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잊혀 갔다. 이후 야고보의 존재가 민중 속에서 '부활'한 것은 8세기경이었다. '별들의 들판'이라고 불리는 캄푸스 스텔라(Campus Stellae)에 있는 무덤 중 하나가 별의 계시를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들이 민중 속에서 널리 퍼져 나갔던 것이다.

그 계시가 실현이 된 것인지, 서기 813년경 성인 야고보의 무덤이 발견됐다고 한다. 이 소식을 접한 당시 스페인 북서부를 지배하고 있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알폰소 2세는 그 무덤이 발견된 곳에 성당을 짓게 한다. 그렇게 해서 건립된 것이 산티아고 대성당이다. 이후 대성당이 있는 곳에 도시가 들어서니, 그곳이 바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다.

여기까지가 산티아고 카미노(camino : 스페인어로 '길')에 녹아 있는 역사적 스토리텔링이다. 이 내용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언론들뿐 아니라 스페인 관광청의 소개 책자에도 기술돼 있다.

 

 

 

 

 



정말 산티아고 대성당에 성인 야고보가 잠들어 있을까? 

 

 
▲ 산티아고 순례길 지도상에 표기된 길은 순례길의 메인이라고 불리는 프랑스길이다. 프랑스 길 이외에도 북부길, 포르투갈길 등 다양한 지선들이 있다. 산티아고 정보를 담은 현지 홈페이지 자료이다.
ⓒ 산티아고홈페이지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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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카미노를 걷는 사람들은 필그림(Pilgrim)이라고 불린다. 말 그대로 순례자라는 뜻이다. 종교다원론자(?)인 필자도 200km 남짓 되는 순례길을 걸으며 짧게나마 필그림이 됐다.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야고보 성인을 기리며 미사에도 참석했다. 대성당에서 드린 미사는 필자에게 무언가 모를 강한 영감을 심어주었다. 그 영감은 예전에 논산 관촉사에서 은진미륵을 처음 봤던 때의 감흥과 비슷했다. 그러한 '신성한 느낌'에 이끌려서 그랬는지, 필자는 이후 계속된 스페인 여행에서 일부러 각 지역에 있는 성당들을 골라 탐방하기도 했다. 

순례자의 마음으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고 또한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선한 감흥을 얻었지만, 여행을 하기 전부터 품었던 근본적인 물음은 계속 풀리지 않았다. 그림자처럼 그 물음은 계속 필자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진짜 산티아고 대성당에 사도 야고보가 묻혀 있는 게 맞는 거야? 야고보의 제자들은 스페인 땅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을 텐데 어떻게 거기까지 간 거지. 내비게이션이라도 있었던 건가?'

 

 

 

 

 

노숙하고 경찰서 가고... 그렇게 스페인에 왔다

 

[22일간의 스페인 여행기①] 산티아고 순례길, 확 질러버렸다

 

14.12.13 20:46  
최종 업데이트 14.12.13 20:46
곽동운(artpunk)

 

 

 

 

 

 

 

 

지난 11월 3일~25일까지, 22일 동안 스페인과 핀란드를 여행했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수도 마드리드와 그 인근에 있는 도시들을 방문했습니다. 스톱오버로 방문한 핀란드에서는 헬싱키를 탐방했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약 10회에 걸쳐 담아보려고 합니다.... 기자말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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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서 그 곳을... 그 돈이면 국내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는 돈인데...'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 도보여행을 제안 받았을 때 필자는 좀 멈칫했다. 도보여행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고 싶어 하는 곳을 제안 받았는데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트레킹 '바닥'에서 먹고 살려면 분명히 한 번 이상은 가야 할 곳이고, 버킷리스트에도 상위에 링크돼 있는 그 산티아고 순례길 트레킹을 확 낚아채지 못했던 것이다.

 

 

인생사 타이밍, 갈 수 있을 때 가자!


왜? 일단 돈이 없어서 그랬다. 달마다 꼬박꼬박 찾아오는 '카드 귀신'을 물리치기도 역부족인데 해외여행이라니! 또한 아직 국내도 가본 곳보다 가보지 못한 곳이 더 많은 터라, 국내에서 내공을 많이 쌓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국내와 서로 비교대조를 하면서 길을 걸어야 할 테니 더 많은 내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갈 수 있을 때 가! 나중에는 여건이 돼도 못 갈 수도 있어!"   

주저하는 필자에게 여행 제안을 했던, 아름다운 도보여행의 손성일 대장이 일침을 가했다.

그 말이 맞다. '인생사 타이밍'이라고, 이거다 싶으면 확 낚아채야 한다. 질질 끌다가는 손에 남는 건 그저 허송세월뿐이다. '카드 귀신'이야 허리띠 졸라매면서 틀어막으면 되는 것이고, 국내와의 비교대조는 그간 역사트레킹 리딩을 하며 익힌 지식을 써먹으면 될 테니까!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에 선 필자.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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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3일.


필자는 스페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핀란드 헬싱키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는 여정이라 비행기에서만 약 15시간 정도 머물러야 했다. 좀이 쑤시고, 발이 저려오는 것을 참으며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했다. 수하물을 찾고, 화장실을 가고 했더니 시계는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스페인이 남부유럽이라고 하지만, 11월 마드리드의 밤공기는 무척 차가웠다. 필자의 마음속에도 찬바람이 쌩쌩 불어왔다. 공항에서 노숙을 해야 될 판이었기 때문이다. 손성일 대장을 위시한 본진들은 그 다음날 오전 비행기로 도착할 예정이었고, 필자는 머나먼 이역만리에서 홀로 선발대(?)가 되어 공항 벤치에 자리를 깔아야 했다. 픽업을 해주는 한인민박집에서 1박을 하면 만사 '오케이'가 되겠지만 첫날부터 과소비(?)를 할 수는 없었다. 

 

 

 

세계적인 건축가가 설계한 마드리드 공항에서 노숙을


공항보안 요원들이 필자의 앞을 지나다니며 '쑥떡쿵' 거리기는 했지만 못 본 척하고 그냥 자리를 깔았다. 공항 내부는 춥지가 않아 그럭저럭 버틸 만했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벤치에 있는 손잡이가 바로 그것이었다. 벤치를 침대처럼 쓸 생각이었는데 칸칸이 있는 손잡이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몸을 옆쪽으로 꾸부정하게 만들어 배낭을 앉고 잠을 청했다. 

11월 4일.

필자는 터미널 4(T4)에서 노숙을 했는데, 이 T4는 건축가인 리처드 로저스(Richard George Rogers)의 작품이다. 리처드 로저스는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1977), 영국 그리니치 밀레니엄 돔(1999)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들을 많이 설계했다.

 

 


 
▲ 마드리드 공항 마드리드 공항에서 자리를 깔고 노숙을 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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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완공된 T4는 매우 독특한 형상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건물 전체를 '통유리'로 감싼 듯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자연광을 듬뿍 받을 수 있을 뿐더러 유리 너머로 이착륙하는 항공기들도 감상할 수 있게 설계됐다. 로저스의 건축 철학은 '첫째도 사람, 둘째도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런 생각들이 반영되어 T4는 시야가 확 트인 공항청사로 태어난 것이다. 


'사람'을 우선시한 로저스의 건축 철학 때문인지 단잠을 잘 수 있었다. 너무 맛있게 잠을 자서 예정시간보다도 더 늦게 일어날 정도였다. 그래서 서둘러 본진이 도착하는 터미널 2(T2)로 이동해야 했다.

EU 지역은 하나의 존(zone)으로 묶여, 나라가 다르더라도 국내선 개념으로 비행기를 이용할 수 있다. T4는 국내선 청사로 분류되었는데 그래서 필자는 별다른 절차 없이 공항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보안검색대를 거치지 않고 너무 쉽게 게이트를 빠져나와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핀란드 헬싱키에서 스페인 입국심사를 받았던 것이다. 핀란드 출입국 직원이 차가운 음성으로 '왜 스페인과 핀란드를 방문하냐'는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핀란드는 그렇다 쳐도 스페인은 지가 무슨 상관이야? 지가 핀란드 사람이지, 스페인 사람이야?"

그때는 이렇게 투덜댔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진이 도착할 T2는 비유럽권에서 출발하는 비행기가 도착하는 터라 따로 입국수속을 밟아야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의 인천공항은 단일청사라 항공편에 따라 터미널을 이동하는 불편이 없어서 좋다. 공항 벤치에 개별손잡이가 없어 노숙하기도 편하고.

 

 


 
▲ 마드리드 지하철 전동차 내에 광고가 거의 없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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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의 미가 있는 마드리드 지하철

 


늦잠을 자서 그랬는지 본진과 합류하여 지하철을 탔을 때는 한창 출퇴근 시간에 걸리고 말았다. 우리 일행이 가야 할 곳은 마드리드 북쪽에 위치해 있는 차마르틴(Chamartin)이었다. 그곳에는 차마르틴 역이 있는데 거기서 기차를 타고 사리아(Sarria)로 가야했다.

우리나라 지하철과 달리 마드리드 지하철은 광고를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덕지덕지 붙어 있는 성형광고들로 점령(?)된 우리나라 전동차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짭짤한 광고 수익을 낼 수 있는 공간을 그냥 여백으로 남겨 놓은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매일같이 출퇴근을 하며 성형수술을 '권장'받는 한국인의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혼자 속삭였다.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지... 외모가 전부냐!'

드디어 차마르틴 역에 도착했다. 마드리드에서 우리의 서울역에 해당되는 곳은 중앙역이라 불리는 아토차(Atocha)역이고, 차마르틴 역은 청량리역 정도에 해당되는 곳이다. 이 역은 주로 스페인의 북부지역과 연결된다.

 

 


 
▲ 스페인 경찰서 스페인에서는 경찰을 폴리시아(policia)로 부른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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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작부터 스토리를 만들었다!


"어, 내 스마트폰?"

시차적응이 안 된 건지, 아니면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생각을 너무 깊게 한 것인지...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분실했다. 배낭까지 다 들어내서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없었다. 스스로를 자책했다. 이 곳이 좀 도둑이 들 끊는 마드리드라는 사실을, 더군다나 혼잡한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을 탔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허둥지둥 대는 필자에게 손성일 대장이 이런 말을 했다.

"첫날부터 스토리 만들려고 그러는 거야? 빨리 잘 찾아봐!"

그 말대로 스토리를 만들고 말았다. 그냥 소매치기들한테 스마트폰을 헌납할 수가 없어 경찰서를 찾아갔다. 스페인어도 못하면서 그냥 찾아갔다. 그냥 분실신고서 하나 작성하고 나오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찾아들어간 것이다.

사무실에 있던 현지 경찰관은 자신은 영어를 못한다면서 어디론가 전화를 돌려, 필자에게 건네주었다. 순간 긴장했다.

'나도 영어 못하는데!'

전화를 받는 내내 식은땀이 흘렀다.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느낌이었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어 전화상으로 심문을 받는 듯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스페인 경찰의 한숨 소리가 이렇게 들리는 듯했다.

'어이 동양친구, 왜 이리 영어를 못 해. 너 영어실력 다 바닥났어!'

결국 스마트폰은 찾지 못했다. 그래서 여행 내내 필자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척 어색하고 답답했지만 나중에는 그것조차도 적응이 되었다. 그냥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만큼은 문명의 이기에서 벗어나보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첫날부터 스토리가 작성됐다. 하지만 그건 서막에 불과했다. 이후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필자 앞에 펼쳐졌으니까.

 

 


 
▲ 스페인의 땅끝 스페인의 대서양쪽 땅끝이라 불리는 피스테라(Fisterra).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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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교 로마시대에 건립된 수도교. 마드리드 인근인, 세고비아에 위치해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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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러윈의 기원은 알고 핼러윈 데이를 보내시나?

 

켈트 신화 속 나무 숭배... 산신령 섬기는 문화와 닮았다

 

14.11.03 11:53  최종 업데이트 14.11.03 13:52

 

 

 

 

 

 

 
핼러윈 데이 촛불. 호박을 파서 만든 잭-오-랜턴이 눈에 띈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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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핼러윈의 유래는 알고 있냐? 그런 복장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필자도 처음에는 손가락질을 했다. 우리 명절도 아닌 핼러윈(할로윈의 표준어 규정)을 챙기려는 일부 사람들의 모습에 냉소를 보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까지 '핼러윈 특수'에 노출되어 있는 모습에 혀를 차며 질타했다. 그러면서 이런 말도 잊지 않았다.

"핼러윈 챙길 정신으로 우리 풍습이나 알고 챙겨라!"

이런 반응은 포털에 걸린 핼러윈 관련 기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반응이었다. 대다수의 누리꾼들은 국적 불명의 서구 풍습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반론도 있다. 국제화 시대에 맞춰 "하루 정도는 괴기스런 복장도 해보고 재미삼아 놀 수도 있지 않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반론에 "우리 풍습이나 알고 챙겨라"라는 재반박이 이어졌다.

 

 

 

켈트 신화와 드루이드교의 관계


핼러윈은 켈트족의 명절인 삼하인(Samhain) 축제에서 유래됐다. 켈트족은 앵글로족과 색슨족에 의해 브리튼 섬의 노른자에서 쫓겨나 궁벽한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 터를 잡았다. 켈트족은 앵글로-색슨족에 의해 브리튼의 핵심 지역에서 쫓겨난 것에 대한 원망과 서러움을 갖고 있다. 부결됐기는 하나, 지난 9월 18일에 있었던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 선거에서 보이듯 이들의 잉글랜드에 대한 악감정은 여전히 뿌리가 깊다.

하지만 켈트족이 맹주 노릇을 하기 전에도 브리튼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넘어온 사람들로 추정된다. 즉, 브리튼 섬의 원주민은 켈트족이 아니었다. 사실 켈트족은 갈리아 지방(지금의 벨기에 및 프랑스 일대)에서 도버 해협을 거쳐 브리튼에 도착했다. 따지고 보면 이들도 이주민이었다.

켈트족은 드루이드교라는 고유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다신을 섬기는 드루이드교는 애니미즘 요소가 강했는데 특히 숲이나 나무와 관련된 여러 징표들에서 신화적 상상력으로 표출됐다. 오랫동안 숲에서 사냥을 하며 연명했던 켈트족이었기에 숲과 나무는 삶의 터전이자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정령'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와 같은 켈트족의 신화는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으로 <반지의 제왕>, <호빗>의 작가로 유명한 J. R. R. 톨킨 박사가 있다. <반지의 제왕>과 <호빗>도 켈트 신화가 밑바탕이 된 작품이다. 죽은 자는 물론 요정이 나오고, 떡갈나무의 정령이 페이지 곳곳을 장식한다.

 

 

 

 


 
▲ 계룡산 산신제 계룡산 산신제의 모습, 켈트족도 이전에는 숲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기 때문에 숲과 나무에 정령이 있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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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의 결속력을 높인 핼러윈

 


핼러윈은 이처럼 풍부한 애니미즘 요소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켈트족의 새해 첫날은 11월 1일이었다. 켈트족은 겨울이 시작되는 11월을 새해의 시작으로 본 것이다. 우리나라의 음력이 그레고리력(양력)과 같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켈트족은 사람이 죽어도 그 영혼은 1년 동안 다른 사람의 몸속에 접신해 있다 저승으로 간다고 믿었다. 특히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0월 31일을 접신할 수 있는 절호의 적기로 봤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날만큼은 온갖 괴기스러운 분장을 했다. 영혼들이 그런 분장 때문에 접신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켈트족은 로마에 의해 복속됐다. 이후 교황 보니파체 4세는 11월 1일을 '모든 성인의 날(All Hallow Day)로 선포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성인(Hallow)의 전야(Eve)로 자리매김되었고, 이후 핼러윈(Halloween)으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됐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왜 켈트족의 영혼들은 10월 31일에 일제히 접신 대상자를 찾아 나설까. 왜 미리미리 찾아 나서지 않았나. 그렇다. 핼러윈도 인간이 만든 풍습이다. 애니미즘적 상상력이 풍부한 켈트족이 만든 하나의 명절이었다. 묵은해를 털어버리고 활기차게 새해를 맞이하자는 의미에서 만든 풍습이다.

한편 핼러윈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은 "Trick or Treat(과자 안주면 장난칠 거야)"이다. 큰 호박을 파서 만든 잭-오-랜턴(Jack-O'-Lantern)을 쓴 아이들이 남의 집 문을 두들기며 이런 말을 한다. 중세시대에는 다가오는 겨울을 맞아 서로 먹을 것을 나누며 공동체적 결속을 다져보자는 의미로 저 말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핼러윈은 중세시대 공동체의 구휼 장치로서 작동했다. 

 

 

 

 

 

 

계룡산 산신령과 켈트 신화의 유사성


 
▲ 계룡산 중악단 계룡산 중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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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원사 계룡산 신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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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필자는 이렇게 언급했다.


"핼러윈 챙길 정신으로 우리 풍습이나 알고 챙겨라!"

그럼 그 말대로 우리의 풍습에 대해서 알아봐야 할 것이다. 단오나 정월대보름처럼 그 의미가 다소 희미해진 명절을 소개하는 것도 좋겠지만, 개인적으로 계룡산 산신제를 소개하고 싶다.

켈트족의 드루이드교가 삶의 터전을 제공했던 숲을 신봉했듯이 우리 선인들은 태초부터 산을 영험하게 여겼다. 산은 생명의 근원인 물을 흘려보냈고, 각종 과실과 약초가 자라나는 보고였다. 또한 산짐승들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양공급원이 됐다. 이렇듯 산은 많은 것을 품고, 많은 것을 사람들에게 내주었다. 그랬기에 우리 선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산을 신성시했고, 산의 주인인 산신령에게 제례를 올렸다.

유교를 앞세웠던 조선시대에도 산신제의 위엄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화됐다. 묘향산, 계룡산, 지리산에 각각 상악단, 중악단, 남악단을 세워 산신제를 올렸다. 현재는 상악단과 남악단은 사라지고, 중악단만 남아 있다. 계룡산 신원사에 위치한 중악단은 조정의 명에 의해서 지어진 건물이라서 그런지 여타 다른 사원과는 달리 궁궐 양식이 적용됐다. 매년 4월에는 이 중악단을 비롯한 계룡산 일대에서 산신제가 봉행되어 산악신앙의 뜻을 기리고 있다.

 

 



 

 

 
▲ 신원사 중악단 삼존불이 놓일 자리에 산신령이 모셔진 신원사 중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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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에 대해 제대로 눈길을 준 적이 있었는가?


앞으로 핼러윈 축제의 '시장'은 더욱더 커질 듯싶다. 외국 유학을 경험한 사람뿐만 아니라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도 늘었다. 영어 유치원이 확장되고 있고, 인기 연예인의 분장도 지속된다. 당분간 핼러윈의 열기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핼러윈 특수를 노리는 자본도 더욱더 팽창할 것이다. 마치 '밸런타인 데이'처럼, 이제 핼러윈도 10월의 마지막 밤을 점점 더 많이 채워나갈지 모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무분별하게 서구문화를 직수입한다고 손가락질할 것인가. 질책을 한다고 그들이 꿈쩍이나 하겠나. 무엇보다 그들을 질타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문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핼러윈을 떠나서 우리는 우리 풍습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가? 그들을 욕하기 전에 우리 고유의 문화에 대해 제대로 눈길을 준 적이 있었나? 주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눈길을 주자. 우리문화 중에도 켈트 신화 뺨칠 정도로 멋지고 재미난 것들이 많으니까!"

 



 

 

 
▲ 동자승 인형 마치 숲 속에서 불경을 보는 듯한 모습이다. 신원사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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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우금티에서 갑오년, 그날을 떠올리다!

 

공주역사트레킹 2편

 

14.10.31 09:39  최종 업데이트 14.10.31 09:39

 

 

 

 

 

 

 

 

 
▲ 우금티 우금티에 쓰러져 있는 조형물들.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간 동학농민군들의 모습과 겹쳐져, 좀 서글퍼 보인다. 올해 여름에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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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이든 수평이든, 장염 걸린 사람에게는 힘들다

 


공산성 탐방을 마친 트레킹 팀은 중동성당을 지나 본격적인 도보여행에 나섰다. 옛 공주 읍내는 분지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시가지를 두고 둥글게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그런 지형을 기반으로 도보 여행길을 개척했기에 해변가나 강변을 걷는 길보다는 좀 험하다. 본격적인 등산보다는 덜해도 급경사가 있는 구간이 몇몇 있다는 것이다.

등산이 수직적인 개념이라면, 트레킹은 수평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트레킹도 지형을 타고 가야하기에 일정 부분에서는 수직적으로 올라가야 할 때가 있다. 반대로 등산도 봄소풍 가듯 평평한 길을 걸을 때도 많다.

개념 정의에서는 수직과 수평으로 나누어지지만 지형이라는 구체적인 물리적 공간에서는 중첩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베이스 캠프로 삼고 있는 관악산 둘레길의 경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등산로였다. 그런데 걷기 열풍을 타고 '둘레길'로 변신을 하게 됐다.

하지만 이런 지형적, 개념적 정의들도 컨디션이 좋을 때나 귀에 들어올 것이다. 장염 때문에 배앓이를 하는 사람에게 수직이든 수평이든 힘든 것은 매한가지 일 테니까. 그랬다.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서게 되니 공주토박이 분보다는 장염에 걸린 분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장염 특성상 아무것도 먹을 수 없지 않은가? 공복인 상태로 장시간 걸으면 자칫 탈진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분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자신은 완주를 할 수 있다고 강하게 의사표시를 했기 때문이다. 또 나름대로 아웃도어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고 해서 그분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 금학생태공원 금학생태공원에서 우금티로 향해가는 역사트레킹 팀. 가는 도중에 밤송이 '지뢰밭'을 지나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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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송이 '지뢰밭'을 지나 우금티로...

 


가는 중간 중간에 우금티와 관련된 설명을 했다. 1894년 갑오년에 있었던 국내 정세, 청나라의 파병을 빌미로 국내로 출병한 일본군, 청나라와의 전쟁 중이라 후방지역의 '준동'을 심각하게 판단했던 당시 일본 정부, 일본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청나라 폐잔병들 일부가 동학농민군에 합류했다는 사실 등등...

우금티로 향해가는 의미를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다. 참가자들 중에는 이미 동학농민전쟁과 우금티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분들도 있었고, 처음 듣는 듯 생소한 눈빛을 보내는 분들도 있었다.

이미 그 관련 내용을 알고 있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우리가 공산성을 출발하여 우금티로 가는 것이었고, 그곳에서 120년 전의 사건을 떠올려 보는 것이었다. 이렇게 의미심장한 다짐을 하고 나섰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을 만났다. 밤송이가 바로 그것이다. 우금티 부근도 밤나무가 지천으로 깔려 있어 그런지 가는 곳마다 밤송이들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밤송이가 너무 많아 이동이 쉽지 않을 정도였다. 얼마나 독한지(?) 신발 사이로 가시가 쑥쑥 들어올 정도였다. 선두에 선 필자는 이렇게 외쳤다.

"조심하세요. 지뢰밭이에요. 밤송이 지뢰밭!"

유독 장염에 걸린 참가자 분이 가장 많이 밤송이에 찔렸다. 트레킹화가 아닌 가벼운 신발을 신고 와서 그랬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했던 건, 밤송이 지뢰밭 통과 이후부터 그 분이 복통을 호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발에 가시가 찔리면서 복통이 완화된 것인가?

이런 우여곡절 끝에 역사트레킹 팀은 우금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염으로 고생한 분도 무사히 완주를 해주셨다. 공주토박이 분은 '공주 사람도 모르는 길을 개척하고 안내해 주셔서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모두 다 완주를 해주고, 저런 칭찬을 들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 우금티 우금티. 올해 여름에 촬영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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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티에서 갑오년, 그날을 떠올리다!

 


우금티에 도착해서는 주위 지형을 가리키며 설명을 했다. 일본군의 기관총이 어디에 배치됐는지 또한 농민군들이 어느 방면에서 올라왔는지, 하는 것들을 알려주었다. 농민군들은 실제로 정상부가 아닌 고개 아래에서 희생을 많이 당했는데 높은 지대를 선점하고 있던 연합부대가 기관총과 화포를 난사해서 그렇게 됐다고 말해주었다. 현장성을 살려 책에서는 풀어낼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려고 나름대로 애썼다. 물론 그런 설명들이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잘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다. 참가자들이 이번 트레킹을 단순히 소비(?) 하지 않고 그 이상의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이다. 우금티 고개에 있는 조형물들, 처음에는 곧추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쓰러져 있는 조형물들이 동학농민군처럼 느껴져 마음이 애잔하다고, 표현한 참가자가 있었다. 또한 이런 식으로 대화가 확장되기도 했다.

"요즘 세대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이런 아픔의 역사들을 많이 알아야 하는데... 아는 사람만 아는 것 같고요."
"정치도 그래요. 젊은 사람들이 좀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요."


우금티에서 이런 대화들이 오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뿌듯할 따름이다. 리딩자로서 보람을 느꼈다. 앞서 언급했듯이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한 지 120주년이 되는 해이다. 60년이 한 갑자이니 120년이면 두 갑자가 되는 것이다.

 

 



 

 
▲ 우금티 우금티에 선 역사트레킹 팀. 그곳에서 갑오년을 떠올렸다. 단순히 트레킹을 소비(?)했던 것이 아니라 발전적이고 확장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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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오는 11월 초에는 우금티 추모제가 개최된다. 프랑스 대혁명에 비견되는 동학농민혁명의 의미를 고찰해 볼 수 있는 좋은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내외적으로 진지한 숙고의 시간을 방해하는 사건과 발언들이 넘쳐난다. 그 중에서 요즘 가장 '인상적인 발언'은 이인호 KBS 이사장이 해주었다.

"김구는 대한민국 건국 공로자가 아니다.(10월 22일, 한국방송 국정감사)"
"(조부는) 유학의 세를 늘려가기 위해 타협하면서 사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친일을 단죄하면 일제시대 중산층은 다 친일파다.(9월 9일,<한겨레신문>과의 전화통화)"


자신의 조부를 구명하고자 김구 선생까지 매도하는 사람이 KBS 이사장 자리에 앉아 있다. 이렇듯 '친일매국'의 후손들은 요직에 앉아 느긋하게 부모세대들의 친일에 대해 항변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 무슨 일본의 군국주의 침탈에 대해 왈가불가 하는가? 일본 아베 정권의 과거사 부정과 친일파 후손들의 항변이 서로 맥락이 다른 것인가? 이인호 같은 사람이 KBS 이사장 자리를 꿰차고 있는 한,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정부비판은 그저 쇼에 불과할 뿐이다. 그저 보여주기 위한 쇼!

우금티에서 돌아가신 영령들은 그런 쇼를 보고 어떤 생각을 가지실까? 혹시 이런 말씀들을 하지 않을까?

"아이고~ 재미없다!"

 

 

 



덧붙임
<공주역사둘레길>은 아직 정식으로 개통되지 않은 길입니다. 내년 봄을 목표로 표식 작업을 완성한 후 개통할 예정입니다. 제 사비를 털어서 표식 작업을 해볼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더 많은 이들과 함께 하기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자금을 마련할 생각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애정 부탁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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