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총선을 8일 앞 둔 어제(4월 5일).


경남 거창에서 함양 안의면까지 갈 일이 있었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다 거창지역에 출마한 총선 후보자들의 걸개그림이 있어 찍어봤습니다. 더민주당 권문상과 새누리당 강석진, 유력주자 두 명의 사진만 찍었습니다. 버스정류장에 저 두 사람의 걸개그림이 유독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버스를 타고 함양군 안의면 화림동 계곡에 도착했습니다. 군 경계지역을 넘은 셈이죠. 세 번째 사진은 안의면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후보자를 담은 선거 벽보지요.

어! 그런데 여기도 아까 봤던 후보자들이 보이네요. 그렇습니다. 이 곳은 경남 거창 함양 합천 산청이 하나로 묶였답니다. 그래서 합천에 가도 산청에 가도 동일한 선거 벽보를 볼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곳도 요즘 한창 바쁘답니다. 비료주고 풀매고... 농번기라 손이 많이 필요하죠. 실제로 선거운동원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하네요.

그래서 어떤 분들은 농사 짓기도 바쁜데 무슨 선거냐!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농번기니까 많이 바쁘죠. 그래도 할 건 해야겠죠.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 아닙니까? 아무리 바쁘더라도 꽃을 피울 건 피워야겠죠.

마지막 사진은 화림동 계곡에 있는 농월정이라는 정자입니다. 멋진계곡을 품고 있는 정자 옆에 예쁜 벚꽃이 피어있네요.









* 절두산: 당산역에서 바라 본 절두산. 뒤에 보이는 산은 북한산이다.









이승만이 한강 다리를 끊었다고요?

 

- 한강 따라가는 한강역사트레킹

    

 


그게 정말이에요? 저 한강대교가 폭파됐었다고요? 그게 언젠데요?”

 

어느 가을날, 한강 역사트레킹을 행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참가자 중 한 분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저런 질문을 던지더군요. 다른 분들의 표정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강대교와 한강철교가 폭발해서 폭삭 주저앉았다는 제 설명에 대한 반응들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KTX 한 대가 미끄러지듯 한강철교 위로 속도를 내고 지나가고 있더군요. 강제적(?)으로 묶인 침묵의 시간이 흘렀고, 저는 입을 뗐습니다.

 

한국전쟁 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폭발시킨 주체가 인민군이 아닌 우리 국군이었다는 점입니다. 인민군의 남하를 막겠다고 다리를 폭파시킨 거죠. 전쟁 때는 일부러 시설물을 파괴해서 적군의 행군 속도를 늦추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강대교 폭파는 문제가 아주 많았어요. 다리 폭파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거든요.”

 

무슨 피해가 있었는데요?”

 

사전 예고 없이 폭파가 실시돼서 당시 다리를 건너던 피난민들이 많이 죽었어요. 수 백명의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더 황당한 일은 다리가 끊기기 몇 시간 전까지,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힘찬 목소리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는 겁니다.”

 




* 노들텃밭: 노들섬, 노들텃밭에서 바라 본 한강대교 아치형 교각.






그럼 대통령이 서울에 남아 있었는데 다리를 끊었다는 건가요?”


아닙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에 없었어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수뇌부들은 멀리 대전까지 피난을 간 상태였습니다. 미리 녹음했던 음성으로 계속 돌려 됐던 거죠. 그래서 실제로 그 방송 내용을 믿고 피난을 안 간 사람도 있었다고 하네요. 웃기는 거죠. 자신들만 살겠다고 도망을 간 건 그렇다 쳐도 왜 거짓말을 합니까? 서울에 있지도 않으면서 서울에 있다고 구라쳐서 국민들을 바보로 만들고...”

 

마지막 설명을 할 때는 저도 비속어를 써가며 좀 흥분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침도 튀기면서... 마지막 설명이 끝나자 분위기가 좀 가라앉는 듯 보이더군요. 그래서 영화이야기로 방향을 좀 틀어봤습니다.

 

“<웰컴투 동막골>이라는 영화 기억나시죠? 그 영화에서 신하균이 육군 소위로 나오잖아요. 영화에서 신하균은 탈영을 하고 자살까지 시도를 했는데 그게 다 죄책감 때문에 그랬더라고요. 피란민들이 몰려든 다리를 폭파시켰는데 담당자가 신하균이었던 거죠. 그래서 신하균은 죄책감에 시달렸던 거고요. 그 부분은 한강대교 폭파에서 모티브를 따온 게 아닌가 하네요.”

 

그때 다시 한강철교 위로 무궁화호가 한 대 지나가더군요. 무궁화호가 느린 걸음을 하는 동안 트레킹 팀은 또 한 번 침묵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소풍 같은 역사트레킹이라는 리딩 원칙이 어긋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순간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이렇게 이야기 하더군요.

 

아픈 우리 현대사네요.”

 









 * 샛강생태공원: 여의도에 숨어 있는 보물인 샛강생태공원.

 







 

# 선유도가 되어버린 선유봉?

 

한강. 매일 보는 한강인데. 매일 같이 출근하러 다리를 넘고, 퇴근하면 복실이랑 같이 산책하는 그런 곳인데. 그런 한강에도 역사트레킹을 할 곳이 있는 걸까요? , 그렇습니다. 있습니다.


한강역사트레킹의 첫 번째 도착지는 절두산 성지지만 그 반대편에 있는 선유도부터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사실 선유도와 절두산은 하나의 권역으로 묶일 수 있기에 선유도부터 이야기하는 전개 방식이 틀린 것만은 아니죠.


원래 선유도는 섬이 아니었습니다. 선유봉(仙遊峰)이라고 불렸던 봉우리였습니다. 높이는 해발 40미터 정도였습니다. 해발 40미터면 썩 높은 편은 아니지요. 하지만 푸른 나무들을 품고 있는 봉우리가 강가 가까운 쪽에 우뚝 서 있었으니,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것이죠. 그래서일까요? 중국 사신들도 조선에 오면 꼭 선유봉이 있는 양화 일대를 유람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겸재 정선도 선유봉을 사랑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진경산수화로 유명한 겸재 선생도 한 풍류하시지 않습니까? 그런 겸재 선생이 선유봉이 자리잡고 있는 양천현의 현령으로 부임을 하게 됩니다. 그때가 1740, 조선 영조 때였죠

 

겸재 선생은 1741년에 <양화환도>, <금성평사>, <소악후월>3편의 진경산수화를 화폭에 담았답니다. 지금의 선유도 일대의 한강 유역을 사실감 넘치는 필치로 담아낸 것이죠. 특히 <양화환도>에서는 선유봉과 함께 잠두봉이라고 불렸던 지금의 절두산이 등장합니다. 또한 그 잠두봉 아래에는 양화진(지금의 합정동)의 모습도 그려져 있습니다.


선유봉과 잠두봉 사이의 물길을 느긋하게 노를 저으며 건너가는 뱃사공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양화환도>를 보고 있노라면, 그림 속에 뛰어들어 신선놀음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선유봉(仙遊峰)은 한자 풀이대로 신선이 노닌다는 봉우리입니다. 만약 진짜 그림 속으로 뛰어들 수 있다면 선유봉 꼭대기에 서 있는 노송 아래에서 차를 한 잔 마시고 싶네요. 막걸리 말고.


그렇다면 왜 선유봉은 졸지에 선유도로 내려앉았을까요? 누가 파먹었나요?

일제에 의해 여의도에 비행장이 들어설 무렵이었습니다. 일제는 활주로를 닦고 제방을 쌓는다며 명목으로 선유봉을 깎아냈습니다. 채석을 한 것이죠. 그렇게 선유봉은 채석장이 되어버렸고 봉우리는 점점 더 깎여나갔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선유봉은 계속해서 채석장으로 이용되었는데 선유봉에서 캔 돌들은 지금의 강변북로 공사 등에 이용됐다고 합니다. 그렇게 깎이다보니 선유봉은 납작하게 되어버렸고, 이후 한강이 개발되어 강폭이 넓어졌을 때 영등포쪽과 분리되어 결국 섬이 되고 맙니다.


그러고보면 선유도는 참 사연이 많은 섬이네요. 깎이고, 부서지고, 졸지에 섬이 되고... 그렇게 섬이 된 선유도는 지금 서울 시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휴식처 중에 한 곳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와서 신선놀음을 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척화비: 절두산 성지에 있다.







 

# 절두산으로 개명한 잠두봉

 

이제 절두산 이야기를 해보죠. 앞서 언급한 <양화환도>에서 절두산, 즉 잠두봉은 선유봉과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뽕나무가 많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잠두봉은 그 머리가 불쑥 튀어나왔다고 하여 용두봉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중국 사신들이 조선에 왔을 때 꼭 들렀다는 잠두봉이, 겸제 정선이 화폭으로 담아낼 정도로 비경을 자랑하던 잠두봉이 왜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었을까요? 그것도 머리가 잘린다는 의미의 절두산(切頭山)이라는 살벌한 이름으로

   

1866.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이루어진 병인박해 때문에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죽음을 당합니다. 이때 주교인 베르뇌를 포함한 9명의 프랑스인들이 처형을 당했는데 그들은 절두산이 아닌 새남터(현재의 용산구 이촌동)와 충남 보령 갈매못 등지에서 죽었습니다.


이 병인박해가 원인이 되어 병인양요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자국의 선교사가 처형됐다는 소식에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의 로즈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프랑스 함대는 본격적인 공세에 앞서 정찰선을 파견하는데 그 정찰선이 한강 깊숙이까지 올라온 것이죠. 양화진을 넘어 서강까지 침범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대원군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대원군은 아주 격분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악한 서양 세력의 흔적들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씻어내겠다며 잠두봉에 새로운 처형지를 만든 것입니다. 잠두봉이 양화진이나 서강과 가깝다는 이유로 그렇게 된 것이죠. 그렇게 하여 뽕나무들이 우거졌던 잠두봉은 머리가 떨어져 나간다는 뜻의 절두산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150년 전, 그렇게 절두산은 수 천 명의 천주교인들의 목이 잘려나간 비극의 땅이었습니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가 감시견처럼 서 있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끊임없이 흘러갔습니다. 그런 흐름은 흥선대원군도 막을 수는 없었겠지요.


현재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는 절두산 한쪽에 꿔다둔 보릿자루 마냥 껑뚱하게 서있지만 절두산은 그 자체가 우리 천주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성지 중에 성지가 됐습니다. 절두산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 쯤은 가볼만한 곳입니다. ‘피의 역사가 서린 근현대사의 중요한 장소인 만큼 직접 탐방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척화비를 직접 확인해 보는 것도 좋고요

 

그러고 보면 절두산이나 선유도나 공통점이 많네요. 예전에 사랑을 많이 받은 것도 똑같고, 본의 아니게 이름이 바뀐 것도 똑같고.

 






* 한강철교: 63빌딩 쪽에서 바라본 한강철교. KTX가 지나고 있다.







 

 

# 이승만이 끊은 한강대교

 

다시 한강대교 이야기.

한강대교 폭파로 인해 군사적인 피해도 엄청났습니다. 한강 북부에 남아 있던 국군의 퇴각로가 봉쇄됐기 때문입니다. 만약 순차적인 퇴각이 이루어졌다면 국군은 한강 이남에서 전열을 정비하여 인민군의 남하를 저지할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1950714일에 전격적으로 이양된 전시작전통제권도 그렇게 쉽게 이양되지 않았을 겁니다. 아직까지도 우리에게는 전시작전권이 없습니다.


분명 한강대교 폭파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사실들을 모르고 있더군요. 대다수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리가 끊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절단한 주체를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미군의 공중폭격으로 교량이 폭파되지 않았냐고 물었던 참가자도 있었으니까요.


좋은 역사든 아픈 역사든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름이 바뀌었으면 왜 바뀌었는지, 다리가 끊어졌다면 왜 끊어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반면교사를 삼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야지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막을 수 있겠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한강역사트레킹을 마칠 때 항상 이런 말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인민군의 남침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한강대교 폭파에 대한 면죄부가 부여될 수 없지요. 자기는 안전하게 대전에 내려가 있으면서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거짓말이나 해대고... 그게 바로 이승만입니다.”

 





 

한강역사트레킹

 

1. 코스: 절두산성지 양화대교 선유도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63빌딩 한강철교 노들텃밭(한강대교)


2. 이동거리: 10km


3. 예상시간: 4시간 정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5. 교통편: IN - 지하철 2호선 합정역 / OUT - 노들텃밭 노들텃밭에서 노량진역으로 가는 버스를 탑승할 수 있음.

 

 

 

 

 





* 인왕산 서울성곽에서 본 남산




돈 안 되는 거 뭐하러 하세요?


길 위의 인문학_ 인왕산 역사트레킹

 


 

윤동주 시인이야 굳이 제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겠죠. 유명한 서시도 잘 아실 거고요. 국어 시간에 배웠잖아요...”

 

햇살이 따사했던 어느 봄날. 당시 저는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리딩하고 있었습니다. 역사트레킹 팀은 수성동 계곡을 지나 창의문 인근에 있는 시인의 언덕에서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시인의 언덕은 윤동주 문학관 뒤편에 있는데 그 곳에 올라서면 서촌과 광화문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그만큼 전망이 좋은 곳이죠.


영화 <동주>에서도 보듯, 윤동주 시인은 너무나 유명한 국민시인입니다. 굳이 입 아프게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저도 그냥 저 수준으로 설명을 했습니다. 그래도 <참회록>까지는 설명을 해야 할 거 같아서 첨언을 했습니다.

 

참회록도 아시죠? 그것도 배웠잖아요. 그래도 모르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니까... 참회록은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한 후 스스로에게 느낀 자괴감을 시어로 풀어낸 것이죠.”

 

됐다 싶어서, 저는 창의문으로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런데 설명을 듣던 참가자 한 분이 제게 불쑥 이런 말을 던지는 겁니다

 

창씨개명을 했으면 친일파가 아닌가요?”

 

잠시 저는 숨이 하고 막혔습니다. 발걸음도 잠깐 꼬였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친일파소리를 듣다니!


하지만 이내 숨을 가다듬은 후에 그 참가자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진짜 궁금하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일부러 윤동주 시인을 깎아내리려고 그런 말을 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 인왕산역사트레킹: 인왕산 성곽구간을 걷고 있는 참가자들.



 




돈 안 되는 역사트레킹

 

저는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트레킹은 말 그대로 도보여행을 통해 유적지를 탐방하는 것입니다. 마스터는 필드에서는 대장 역할을 하고, 역사유적 앞에서는 문화해설사로 변신을 해야 합니다.


참가자들의 장비를 점검(?)하고, 화장실이나 주차시설을 찍어주는 것도 마스터의 책무이지요. 부상 방지를 위하여 스트레칭을 행하는 것도 꼭 챙겨야 할 임무중에 하나입니다.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답사지를 소개하는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그간 역사트레킹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고, 그들과 함께 많은 유적지들을 탐방해왔습니다. 그렇게 만난 이들은 대체로 찬사와 격려를 보내줬습니다. 하지만 날카로운 지적도 꽤있었습니다. 역사트레킹이 걷기열풍에 편승한 단순한 파생물이라는 이야기가 대표적이었습니다.


또한 이미 많은 이들이 답사여행을 즐기고 있는데 굳이 역사트레킹이라는 명칭을 써가며 차별화 하는 것이 좀 억지 같다는 이야기도 간간이 들리더군요. 그런 쓴소리들은 그냥 그렇게 흘려 넘겼습니다. 이미 예상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애정 어린 쓴소리는 항상 저를 머뭇거리게 했습니다.

 

돈도 안 되는 거 뭐하러 하세요? 참가한 저희야 좋지만...”

 

그렇습니다. 역사트레킹은 돈이 안 됩니다.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아닙니다. 실제로 저는 역사트레킹을 하면서 돈을 벌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제 사비를 턴 적도 꽤 있었죠. 그럼 저는 왜 돈도 안 되는 역사트레킹을 해왔을까요? 재밌으니까요! 역사 공부도 하고 트레킹도 하면 몸도 머리도 상쾌해지니까요!

 






* 윤동주 문학관: 시인의 언덕





 


 

마스터는 멍석을 깔아주는 사람

 

참가자들과 함께 호흡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참가자들의 지적 호기심을 유도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멍석을 깔아준다는 표현을 합니다. 저 혼자 마이크를 잡고 떠드는 것이 아니라 참가자 각 개인이 스스로 보고 느끼게 멍석을 깔아주는 것이죠.


멍석이 잘 깔리면 참가자들은 스스로 그 멍석 위로 올라오더군요. 그러다보면 얼음처럼 굳어 있던 참가자들의 입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합니다. 한들거리는 봄꽃을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짓기도 하고, 맛집이야기로 군침을 흘리기도 하더군요. 그렇게 즉흥적인 반응들이 이어지다 어느 순간부터는 고품격(?)의 이야기들이 흘러나옵니다.


정약용 트레킹에서는 다산 선생의 실학 정신과 조선 후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공주 우금티 트레킹에서는 우금티 전투와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제가 굳이 아이스브레이킹을 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어색함을 깨버리고, 나중에는 해당 주제에 맞혀 토론까지 즐기더군요.


이런 모습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전 흐뭇했습니다. 요즘같이 파편화된 사회에서 역사에 대한 지식을 나누며, 함께 도보여행을 즐긴다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 아닙니까? 헬조선이니, N포세대니... 하는 말들이 난무하는 요즘인데.

 

 

 




* 윤동주문학관: 서시





 


윤동주가 친일매국노?

 

다시 윤동주 이야기로 돌아와서.

1941년 겨울, 윤동주는 히라누마 도슈라는 창씨명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윤동주 개인의 의사가 아닌 창씨개명이었다는 점이죠. 집안 전체에서 행해진 것이지 윤동주가 직접 행정기관에 찾아가 창씨개명 서류에 도장을 찍은 게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의도하지 않은 자신의 창씨개명에 대해서까지도 참회를 했던, ‘참회록을 썼던 윤동주였습니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고뇌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한편 당시는 중일전쟁이 이미 발발했고, 태평양전쟁까지 일어난 상태였습니다. 일제의 침략 야욕이 극에 달할 때였습니다. 식민지 조선에도 총동원령이 내려져 식량이 배급되기에 이릅니다. 이때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서는 창씨개명이 필수였다고 합니다. 그런 생존과 직결된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에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을 모두 친일 매국노로 분류한다는 건 적절하지 않은 일입니다. 실제로 반민특위에서도 창씨개명 자체를 친일행위로 보지 않았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일본 황군을 화끈하게 격려하고 찬양한 시인 서정주나 일본이 이렇게 빨리 망할 줄은 몰랐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소설가 이광수하고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윤동주가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그가 진짜 친일매국노였다면 교도소에서 옥사했겠습니까? 윤동주도 나름대로 지식인 아니었습니까? 그가 진짜 친일매국노였다면 그의 재능을 팔아 일제와 잘 붙어먹었겠지요. 그래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그는 서정주나 이광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반대편에 섰고, 결국에는 타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겁니다

 

이런 윤동주와 관련된 이야기를 그 참가자에게 해주었습니다. 버벅대면서 이야기를 했는데도 내용은 전달됐는지 그 분은 고개를 끄덕거리더군요. 어쨌든 그 분이나 저나 함께 호흡을 맞춘 것입니다.

 






 * 성곽에 핀 풀과 꽃: 인왕산 성곽 구간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요즘도 인문학은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꺾일 만도 한데 그 위력은 계속 되더군요. ‘먹방처럼요. 아무리 사회가 각박하다고 해도 인간의 근원적인 부분을 건드려주는 분야는 계속 건재하나 봅니다. 근원적인 지적 욕구! 근원적인 식욕

 

역사트레킹의 부제는 길 위의 인문학입니다. 트레킹을 하면서, 인문학을 느껴보자는 뜻입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역사가 균형추를 잡고 있습니다. 그 균형추 옆에 다른 영역도 배치를 해두었죠. 세계사, 신화, 종교, 국제정치, 육식 문제까지... 역사만 하면 재미없으니까요. 그런 이야기들... 트레킹을 하면서 참가자들과 함께 그런 다양한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스토리펀딩에서도 길 위의 인문학이라는 취지에 맞춰 다양한 이야기를 전개할 생각입니다. 그래야 재밌죠!

 

 


 

인왕산 역사트레킹

 

1. 코스: 사직단 인왕산 입구 수성동계곡 인왕산(서울성곽) 윤동주 기념공원창의문

2. 이동거리: 6km

3. 예상시간: 3시간 정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5. 교통편: IN -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 OUT - 부암동 부암동(윤동주 기념공원 옆 정류장)에서 버스에 탑승한 후 다시 경복궁역으로 돌아올 수 있음.

 

 

 

 

 




'풍류객' 퇴계 이황 선생이 이름 붙여준, 수승대


경남 거창 '수송대'를 '수승대'로 바꾼 퇴계 이황


16.03.21 15:50  최종 업데이트 16.03.21 15:50
    
곽동운(artpunk)            


    




이런저런 이유로 속세의 근심이 밀려올 때, 우리는 도피처를 찾아갑니다. 수려한 자연 속에 자신을 맡기며 잠시나마 세상 시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신선들이 산다는 무릉도원에서 시름을 달래면 좋겠지만 현실세계에서는 그 곳을 갈 수 없으니 '대타'를 찾아야겠지요. 여기 무릉도원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세상 시름을 달래며 풍류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가 어디냐?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에 위치한 '수승대(搜勝臺)'라는 곳입니다.





 
▲ 수승대 수승대 거북바위. 여름 사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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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의삼동이라고 불렸던 수승대 계곡

수승대는 널찍한 바위와 그 옆을 흐르는 맑은 물, 푸른 숲이 어우러져 일품 풍광을 자랑합니다. 그 물의 발원지는 덕유산이랍니다. 물과 바위와 숲이라... 그렇습니다. 수승대는 계곡 한복판에 있습니다. 정확히는 거북바위를 말합니다.


원학동(猿鶴洞)계곡이라고도 불리는 수승대는 거창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한 곳입니다. 거창을 방문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꼭 들러야 하는 곳이 바로 수승대라는 뜻이죠. 원학동 계곡은 함양의 화림동(花林洞) 계곡, 용추계곡이라는 명칭으로 더 유명한 심진동(尋眞洞) 계곡과 더불어 안의삼동(安義三洞)이라고 불렸습니다. 원학동, 화림동, 심진동이 안의 지방의 3대 계곡이라는 뜻입니다.


안의는 현재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으로, 면 단위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안의현이라 불리며 함양, 거창과 함께 그 어깨를 나란히 했다고 합니다. 이후 행정구역이 개편됐고, 그래서 현재 수승대는 거창군 소속이 된 것입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류를 논할 때, 흔히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여기서 '우 함양'을 '우 안의'로 바꿔도 될 만큼 안의 지역은 풍부한 선비문화를 창달했던 곳입니다. 수승대가 안의삼동이었던 만큼 수승대도 선비 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라는 건 자명한 일입니다. 그 명칭을 둘러싼 이야기부터 아주 선비적(?)이었답니다.






 
▲ 수승대 구연교. 이 다리를 이용하여 계곡 반대편, 요수정으로 넘어갈 수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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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승대의 옛 이름 '수송대'

수승대의 옛날 명칭은 수송대(愁送臺)였습니다. 한자를 풀어보면 근심 수(愁), 보낼 송(送), 돈대 대(臺)입니다. 한자에서도 보이듯 수송대라는 명칭은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습니다. 보낼 송(送)자에서 보듯 '근심을 떨쳐낸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죠.


근심을 잊으려면 잊을 망(忘)를 썼겠지요. 풍류를 즐기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이는 이 아름다운 장소에, 왜 '근심'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명칭에 드리워져 있었을까요? 무슨 이유로?


원학동 계곡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였습니다. 백제는 나날이 쇠락해졌고, 반대로 신라는 점점 더 강성해질 무렵이었습니다. 백제 사신들은 신라 조정에 가서 수모를 당합니다. 심지어는 목숨을 잃고 영영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먼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술 한 잔 건네며 위로해 주었던 곳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국경과 가까운 곳에 풍광이 수려한 곳이 있으니, 그 곳에서 마지막(?)을 잘 챙겨 보내주었다는 것이죠. 그곳이 바로 수송대라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일대에서 백제와 신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갔다는 사실입니다. 원학동에서 동쪽으로 약 8㎞ 떨어진 곳에 거열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 산 정상부근에는 거열성이라는 산성이 있습니다.


삼국시대 말기, 거열성은 신라군에 의해 함락되기도 했고, 이후에는 백제 부흥 운동이 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이 일대는 백제와 신라의 격전장이었습니다.


그렇게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습니다. 하지만 거북바위는 그 이후로도 약 천 년 동안 수송대라고 불리게 됩니다.





 
▲ 구연서원 거북바위 옆쪽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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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류객(?) 이황이 지어준 '수승대'라는 이름


거북바위가 수승대(搜勝臺)라는 현재의 명칭을 얻게 된 건 퇴계 이황이 지은 시 한 수 때문이었습니다. 그 시를 수취한 이는 요수(樂水) 신권(愼權)이라는 분이었습니다. 신권 선생은 일찍부터 벼슬길을 마다하고 원학동 일대에서 후학들을 양성했습니다. 거북바위 옆쪽에 구연재(龜淵齋)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이를 두고 구연서당이라고 불렀습니다.


관수루라는 멋진 문루를 두고 있는 구연서원은 이후 구연서당 자리에 들어선 것입니다. 계곡의 반대편에는 요수정이라는 정자도 지었는데 요수정에 오르면 거북바위를 정면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연과 학문을 벗 삼고 있던 신권 선생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안의지역을 유람하던 퇴계 이황 선생이 원학동을 방문하겠다는 전갈이 당도한 것입니다. 신권 선생은 요수정에서 한 상 차려 놓고 반가운 이의 발걸음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라는 퇴계 선생은 오지 않고, 편지 한 통이 전해지게 됩니다. 왕의 부름 때문에 급하게 한양으로 떠나야 했던 퇴계 선생이 보낸 서찰이었습니다. 그 서찰에는 원학동을 방문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은 시 한 수가 적혀 있었습니다.





 
▲ 수승대 사진 오른편에 요수정이 있다. 소나무에 가려서 잘 보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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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에서 퇴계 선생은 어감이 좋지 않은 '수송대'를 '수승대(搜勝臺)'로 고치라고 권유합니다. 한자를 거칠게 풀어보면, '찾아다녔던 뛰어난 곳' 정도로 쓰일 수 있겠네요. 발음도 비슷하니 못 바꿀 이유도 없었겠지요. 그렇게 하여 거북바위는 퇴계 선생 덕분에 천 년 동안 간직해오던 부정적인 이름을 떨쳐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풍류를 즐기기에 딱 좋은 장소에 어울리는 '풍류 스토리텔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이야기를 입증이라도 하듯 거북바위에는 퇴계 선생의 시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외에도 거북바위에는 수많은 풍류객들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갔습니다.


이제 완연한 봄입니다. 소풍 가기 딱 좋은 계절이 다가온 거죠. 우리도 옛날 선비들처럼 산천이 수려한 곳에서 풍류를 즐겨볼까요? 근심을 떨쳐 보낼 수 있고, 찾아다녔던 멋진 곳인, 수승대에서 말이죠.





* 거북바위







■ 도움말

1. 서울에서 거창까지는 고속버스로 약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됨. 남부터미널이나 동서울터미널에서 거창행 버스를 탈 수 있음.


2. 거창읍내에서 수승대가 있는 위천면 면소재지까지는 시골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음. 면소재지에서 수승대까지는 걸어서 약 10분 정도 소요됨.


3. 거창읍내-위천면 시골버스 이동시간은 약 15분 정도임. 배차간격은 약 30분 정도임.


덧붙이는 글 | http://blog.daum.net/artpunk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이 문경새재 고집한 이유


문경새재 역사트레킹... 전라도 지역 선비들도 넘으며 합격 기원



16.02.29 11:36 최종 업데이트 16.02.29 11:40


 











 
▲ 주흘관 문경새재 제1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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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씨가 다른 세 명의 장군이 지켰다'는 성삼(性三)재, '경사가 가팔라서 오르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미시령(彌時嶺), '남쪽에 높은 고개'라는 남태령(南泰嶺), '밤에는 소들을 끌고 넘을 수 없다'는 우금(牛禁)티 등등... 우리땅은 산이 많은 만큼 그 산을 넘을 수 있게 해주는 고개도 많습니다. 그것을 부르는 이름도 다양했습니다. '재', '령', '치(티)'등으로 불리기도 했고, '여우고개'처럼 그냥 '고개'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고개를 넘는 이들의 사연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선비들은 청운의 꿈을 안고 고개를 넘었고, 보부상들은 장시를 찾아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종교인들은 포교를 위해 넘었겠지요. 이렇듯 고개는 많은 이들의 발자국을 담아낸 공간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풍부한 스토리텔링이 흘러나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룻밤의 사랑 이야기부터 귀신에 홀린 이야기까지... 여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고개를 하나 소개합니다. 그곳이 어디냐? 바로 문경새재입니다.
 



 
▲ 기도굴 초기 천주교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이 좁은 바위굴에서 미사를 드렸다. 탐방로에서 좀 떨어진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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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운의 꿈을 안고 문경새재를 넘었던 선비들


새재는 '새들도 넘기 힘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한자로 풀면 조령(鳥嶺)이 됩니다. 제3관문, 즉 조령관이 위치한 곳의 해발 고도가 642m인 만큼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듯싶습니다. 서울남부를 지키고 서 있는 관악산의 정상고도가 629m이니, 조령의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물론 해발 1102m인 성삼재나 826m인 미시령 앞에서 높이를 말한다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겠지만...

문경새재는 영남대로(嶺南大路) 상에 놓여 있습니다. 조선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며, 전국을 'X'자 형태로 연결하는 도로망을 구축합니다. 그렇게 하여 6개의 대로(大路)가 탄생하게 되는데 영남대로도 그중 하나입니다. 수많은 고갯길을 제쳐두고 문경새재가 우리나라의 으뜸 고갯길로 꼽히는 이유도 문경새재가 영남대로 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문경(聞慶)이라는 지명 이름도 문경새재의 격을 높여주는 데 큰 일조를 했습니다. 과거를 보러 나서는 경북 영주나 강원도 삼척의 선비들은 가까운 죽령을 넘지 않았습니다. 경북 김천이나 성주 등지의 선비들도 추풍령을 넘지 않았습니다. 죽령은 '주욱 미끄러진다'라고 해서,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해서 기피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대신 '경사스런 소리를 듣는다'라는 뜻을 가진 '문경'이기에 과거길에 나서는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필수코스처럼 밟고 지나갔습니다. 심지어 전라도 지역의 선비들까지 문경새재를 넘으며 합격을 기원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큰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의 마음은 비슷한 거 같습니다. 조그만 징크스도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이렇듯 문경새재는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불러 모았고, 그로 인해 조선의 으뜸 고갯길로 자리매김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 길에 선 발자국들이 모두 다 좋은 걸음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 지름틀바우 기름을 짜는 도구인 '지름틀'과 유사하게 생겼다하여 '지름틀바우'라는 이름이 붙여진 바위. '지름틀'은 경상도 사투리다. 그런데 필자는 저 바위를 악어바위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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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과 조일전쟁(임진왜란)

1592년 4월 14일. 부산포에 왜군들이 상륙합니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입니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20만 명은 파죽지세로 북상합니다. 그러다 조령을 앞에 두고 잠시 숨고르기를 합니다. 당시 조령 앞에서 주춤했던 일본군은 고니시유키나와가 지휘하는 제1부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부대였습니다. 이들이 숨 고르기를 한 건 조령의 지세가 험준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당시 일본군들의 전투력이 뛰어났다고 하지만 낯선 곳에서 험한 지형지물을 만나면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고니시유키나와는 수차례에 걸쳐 조령을 정찰했다고 합니다. 자칫하다가는 자신의 부대가 큰 타격을 입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쾌재를 부릅니다. 그 험한 조령을 지키는 조선군 부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선군을 이끌었던 장수는 신립이었는데 그는 조령이 아닌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조령이 험준한 골짜기라면 탄금대는 기병전이 가능했던 개활지입니다.

이후의 이야기들은 잘 아실 겁니다.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크게 패배하고 맙니다. 조총으로 무장한데다 백병전까지 능한 일본군을 상대로 개활지에서 싸운다는 건 승산이 없는 게임임에 분명합니다. 그럼 왜 신립 장군은 조령이 아닌 탄금대를 선택했을까요? 신립하면 당대 최고의 무장이었는데...








 
▲ 조곡관 제2관문 조곡관. 임란이 발발한 지 2년 후인, 1594년에 만들어졌다. 앞에 보이는 다리는 조곡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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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이유는 기병술을 전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본군들이 보병 위주였기에 기병의 말발굽으로 찍어 누를 생각이었습니다. 보병은 기병의 공격에 취약한데다 신립 자신이 기병술에 능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탈영병 문제와 연락체계 문제였습니다. 산 중에서 진을 치다보면 시야가 가려질 테고, 그 틈을 타 병사들이 탈영을 할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훈련이 제대로 안 된, 오합지졸인 당시의 조선군이기에 산악보다는 개활지에서 진을 쳐야 그나마 연락체계가 제대로 작동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4월 26일, 고니시유키나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조령을 넘었고, 탄금대에서 조선 육군을 격파합니다. 탄금대 패배 소식을 전해들은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갔고, 5월 2일 일본군은 한양을 점령합니다.

만약 신립이 탄금대가 아닌 조령에서 일본군들의 북상을 막았다면 어땠을까요? 험준한 산악지형을 방패삼아 게릴라 전술을 취했다면 어떤 결과가 도출됐을까요? 한편 다음과 같은 시각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당시 동원된 병사들이 오합지졸인 농민군이라는데 의병에 참여한 이들도 제대로 훈련이 안 된 농민들이 주축이었습니다. 같은 오합지졸인데도 후자쪽은 승전보를 울렸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오합지졸을 '승리의 용사'로 만드는 것도 장수의 책무라는 겁니다.

역사에 가정법이 없다지만 문경새재 트레킹을 하다보면 그런 가정들이 끊임없이 떠오르더군요. 이 고지에 궁수들을 배치하고, 저쪽에서는 매복을 하고... 자신 스스로가 조령 방어 사령관이라고 생각하고, 가상으로 병력을 배치해보는 것도 문경새재 트레킹의 또다른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 조령원 새재에는 관리들의 숙박시설인 원이 세 곳이나 있었다. 동화원, 신혜원, 조령원이 바로 그곳이다. 이 조령원 터는 1970년대에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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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그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문경새재에 방어시설이 들어선 건 1594년의 일입니다. 충주 사람 신충원의 건의로 지금의 제2관문인, 조곡관(鳥嶺關)이 들어선 것입니다.  그 이후 숙종대에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 제1관문인 주흘관(主屹關)이 들어서게 됩니다.

그 세 개의 관문은 각기 다른 멋이 있습니다. 제1관문인 주흘관은 넓고 평평한 터에 세워져 있어 성곽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한 성문이라고 합니다.

산 중 깊은 곳에 위치한 제2관문인 조곡관은 조곡교라는 다리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앞으로 계곡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죠. 조곡관의 계곡물은 적군의 침입을 방해하는 역할도 하지만 관광객들의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역할도 합니다. 그만큼 조곡관은 '비밀의 정원'인 것처럼 아름다운 관문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제3관문인 조령관은 조령 정상에 우뚝 솟아 있습니다. 조령관은 오랑캐를 막기 위해 세워져서 그런지 주흘관과 달리 북쪽을 향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렇게 외적 방비를 위해서 세워진 관문들이지만 딱히 그 기능대로 쓰인 적은 없었습니다. 대신 그 관문들 덕택에 다른 고개들보다 문경새재는 더 안전해졌지요. 시험 징크스 때문에 고집한 것도 있지만 다른 고개들보다 새재가 더 안전했기에 선비들의 발걸음이 문경으로 향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 조령관 제3관문인 조령관.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쪽을 향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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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봄에는 경사스러운 소식이 많기를!


북한의 핵실험과 로켓 발사, 개성공단 폐쇄, 테러방지법에 대한 논란 등등... 요즘 뉴스를 보면 너무나 안 좋은 소식들만 들려옵니다. 올 봄에는 문경(聞慶)이라는 말처럼, '경사스러운 소식'이 많이 들려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따뜻한 봄날에 좋은 소식을 기대하며, 문경새재를 한들한들 거닐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문경새재는 초보자들도 부담없이 즐길 수 있을 수 정도로 탐방로가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한들한들거리며 거닐어 볼 수 있을 겁니다. 마치 봄바람을 타고 나는 나비처럼요.







 
▲ 주흘관 제1관문 주흘관. 사진 오른쪽 중간 부분에 수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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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길박물관










● 트레킹 정보

1. 코스: 수옥정관광단지(괴산군) ▶ 제3관문 ▶ 제2관문 ▶ 제1관문 ▶ 옛길박물관 ▶ 문경새재 관리사무소

2. 이동거리: 약 9km

3. 소요시간: 3시간 30분 정도(휴식시간 포함)

4. 교통편: 수옥정관광단지는 수안보(충주)에서 접근하는 것이 편하다. 동서울터미널에서 수안보 시외버스정류장까지 가는 시외버스가 있다. 수안보에서 수옥정관광단지까지는 7km 정도다. 버스가 다니긴 하지만 하루에 4편 밖에 없다. 택시를 타면 1만 원 정도가 든다.

5. TIP: 트레킹 종료점을 문경방면으로 한 것은 편의성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수옥정에서 수안보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 4편뿐이다. 이에 비해 문경새재 입구에서 문경읍까지 가는 버스는 20분마다 있다. 또한 수안보는 터미널이 독립된 건물로 존재하지 않는다. 노상 정류장으로 되어 있다. 이에 비해 문경터미널은 아담한 독립 건물로 존재한다.


















갓 내림굿 받은 무당에게 덕담을 들었어요


입춘에 내림굿 받은 박영숙씨 이야기





16.02.23 15:05 최종 업데이트 16.02.23 15:05


  

           


주위에 아는 용한(?) 점쟁이가 있으십니까? 저는 이번 입춘에 한 명 생겼답니다. 제가 '박 보살'이라고 부르는, 일본에서 온 박영숙씨가 바로 그분입니다.

영숙씨는 일본에서 '돈 꽤나' 만진 분입니다. 어려서부터 어려운 형편에 놓였던 그녀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습니다. '고진감래'라고, 그렇게 어려운 시기를 넘기니 물질적인 풍요가 따라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쿄에서 큰 식당을 운영하기도 했고, 나중에는 임대업에 뛰어들었다고 하네요. 요즘 아무리 엔화 가치가 떨어졌다고 하지만 도쿄에서 임대업을 할 정도면 '돈 좀 굴렸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랬던 영숙씨는 지난 입춘(立春)에 신을 받았습니다. 내림굿을 한 것이지요. 여기서 한 가지! 과거에 '돈 좀 만진' 박 보살은 뭐가 아쉬워서 무당이 되기로 한 걸까요?

"17살께부터 신기(神氣)가 있었어요. 외할머니가 무속인이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그때는 잘 몰랐어요. 제가 무당이 된다는 걸 어디 상상이나 했겠어요?"

하지만 자신이 거부한다고 신기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걸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생채기가 날 뿐이죠. 그렇습니다. 신병(神病)에 시달리게 됩니다. 영숙씨도 원인을 알 수 없는 병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응급실에 실려 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 내림굿 박영숙 내림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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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길도 혼자, 신의 길도 혼자

그래도 거기까지는 감수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운명의 잔'을 계속 거부하니, 그 잔이 결국 자기 자식에게로 향하게 됐다고 합니다. 자신이 거부하니 하나 있는 아들에게로 그 운명이 넘어갔다는 것이죠. 그 운명이라는 건, 좋은 뜻이 아니겠죠. 아들의 교통사고…. 이후 박 보살은 '운명의 잔'을 집어들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저는 인간의 길을 갈 때도 혼자였고, 신의 길을 갈 때도 혼자 갑니다!"


영숙씨가 이런 말을 한 건, 그녀가 고아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젖먹이였을 때부터 부모의 품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고아원에서 자랐고, 이름도 고아원에서 지어줬다고 합니다. 일본은 20년 전께 갔다고 하더군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이름조차도 고아원에서 지어줬다면, 부모에 대한 정보는 아예 없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외할머니가 무속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걸까요? 그건 그녀의 몸에 조상신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외할머니의 영혼이 박 보살의 몸에 들어온 것입니다. 인간의 길에서는 만날 수 없었던 두 사람이 신의 길에서 서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인생 스토리를, 더군다나 '신의 길을 갈 때도 혼자 간다'는 영숙씨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무언가 짠한 기분이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저도 동영상 담당 스태프로 참여하게 됐고, 현장 기록을 토대로 이렇게 기사까지 작성하게 됐습니다.





 
▲ 내림굿 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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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포먼스가 강한 황해도 작두굿

박영숙씨의 내림굿은 2월 4일부터 5일까지, 이틀에 걸쳐 경남 거창군 고제면에 위치한 '아시아1인극협회 한국본부'에서 행해졌습니다. 연극제가 열렸던 소극장에 제단이 차려지고 굿이 거행된 것입니다. 악사가 동원되기는 하지만 굿도 1인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1인극제가 개최된 장소에서 굿이 거행되는 것이 어색해보이지 않습니다.

신굿, 신명굿, 강신제 등으로도 불리는 내림굿은 신령의 부름에 답하는 절차입니다. 더불어 신령을 정식으로 받아들여 '몸주'로 삼는 절차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매우 중요한 절차이기에 내림굿을 이끌어 줄 선배 무당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어머니' '신아버지'로 불리는 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영숙씨는 마고당이라 불리는 서문정을 신어미니로 모시게 됩니다. 마고당은 작두굿으로 유명한 무속인인데, 황해도 작두굿 계보를 잇고 있는 분이죠. 지금 황해도 땅이 휴전선 이북에 있는 만큼, 마고당의 위치는 매우 독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 보살이 마고당의 '신딸'이 된 만큼 이제 그녀도 황해도 작두굿 '줄'을 잡게 된 것입니다.

본격적인 내림굿 이전에 일반 재수굿 열두거리가 거행됩니다. 거기에 '허주굿'이라 불리는 잡귀를 씻어내는 굿까지 진행돼야 정식으로 내림굿이 거행됩니다. 이렇게 사전에 많은 굿들이 거행되니 1박 2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황해도 굿은 의복을 여러 번 갈아입고 칼춤을 추는 등, 화려함이 두드러집니다. 이에 대해 아시아1인극제 한국본부장인 한대수 선생은 황해도 굿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다른 지역에 비해 황해도나 경기 이북 지역의 굿은 화려함, 즉 퍼포먼스적인 요소가 강조됩니다. 그래서 볼거리가 풍부한 면이 있습니다."

아무리 강신(降神)이 됐다지만 작두를 탄다는 건 두려운 일일 겁니다. 그건 영숙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심 작두가 무섭다며 말끝을 흐리더군요. 그렇다고 안 탈 수가 있을까요? 신을 받고 싶어서 받고, 안 받고 싶어서 안 받을 수가 없듯이, 작두도 타기 싫다고 안 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운명은 운명인 거죠!

"아, 좋다! 오늘처럼 기분 좋은 날은 처음이구나! 이 제자 그동안 길을 몰라 헤매였지만…. 오늘에서야 이 길을 가니, 기분이 정말 좋구나!"

천하대장군의 공수(무당에 신이 내려 신의 소리를 내는 일)가 영숙씨의 입을 타고 우렁차게 울려 퍼졌습니다. 영숙씨의 두 발은 날카로운 작둣날 위에 오른 상태였습니다. 신이 잘 강림했다는 뜻입니다. 내림굿이 성공했다는 뜻입니다.





 
▲ 내림굿 내림굿에 임하는 박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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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에 들은 덕담

갓 내림굿을 받은 무당의 신기가 가장 좋다는 건 다들 아실 겁니다. 그래서 강신자(降神者)에게 공수를 받기 위해 사람들은 줄을 섭니다. 저도 줄을 섰습니다.

"2년 내에 좋은 일이 있을 거야. 그때까지만 참어!"

박 보살은 제게 그런 공수를 줬습니다. 얼핏 보면 2년만 지나면 성공한다는 뜻이니 좋은 거지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반론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제까지도 계속 참았는데, 또 2년을 참으라고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나 봅니다. 그 공수를 액면 그대로 풀면, 2년 안에 '고진감래'가 된다는 뜻이 아닙니까? 요즘 같이 '헬조선'이라는 말이 남발되는 세상에 2년 만 고생하면 된다는 말은 무척 희망적이지 않습니까? 2년 만 지나면 '파라다이스'를 만날 수도 있으니….

저는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천주교 성지 탐방을 할 것이고, 사찰 순례를 행할 것입니다. 또한 계속해서 우리나라의 무속신앙에 대해서도 공부할 것입니다. 왜? 저는 종교 다원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2년 만 고생하라'는 공수는 입춘에 들은 덕담 정도로 넘길 생각입니다. 맹신은 금물입니다. 공수만 믿고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는 있던 복도 달아날 테니까요. 그러고 보면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하루하루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공수도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자체가 복(福)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 아래사진은  박보살이 찍은 사진입니다. 박보살은 일월성신을 찍은 사진이라고 했고, 저는 UFO라고 했던 사진입니다. 일월성신이든 UFO든... 신기한 사진임에는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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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금티 고개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현장] '2015 우금티 예술제', 통한의 고개에서 본 '희망의 씨앗'

 

15.11.14 15:54   최종 업데이트 15.11.14 15:56

 

 

 

 

 

 

 
▲ 우금티 예술제 지게 상여가 나가고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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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오후 2시. 전국에 촉촉한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극심한 가을 가뭄을 꺾어줄 단비였지요. 저는 그날 우산을 받쳐 들고 충남 공주시 우금티 고개에 서있었습니다. '2015 우금티 예술제'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금티 전투. 벌써 12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60갑자로 치면, 두 갑자에다 또 한 해가 더해진 것입니다. 121년 전 그날, 그곳 우금티 고개에서는 통한의 피눈물들이 뿌려졌습니다. 빗발치는 일본군과 관군의 공세에 막혀 우금티를 넘지 못하고, 그곳에서 눈을 감아야 했던 2만여 명의 농민군들의 피눈물이 바로 그것입니다.  농민군들이 내세웠던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도 그 피눈물을 따라 흩뿌려지게 됩니다.

'2015 우금티 예술제'는 사단법인 '동학농민전쟁 우금티기념사업회'가 주관이 되어 진행됐습니다. 우금티를 넘지 못했던, 인내천 사상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했던 수많은 농민군들의 통한을 달래주기 위해서 행해졌습니다.

 

 


 
▲ 지게상여 우금티예술제에 등장한 지게상여.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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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제는 추모제례와 역사축제로 나눌 수 있었습니다. 추모제례는 농민군들의 한을 달래기 위한 의식이 진행됐는데 특이하게도 지게상여가 등장했더군요. 지게 두 개를 이어붙인 지게상여는 상여를 살 수 없었던 망자를 운구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그 옛날, 가난 때문에 상여조차 구할 수 없었던 이들이 이승과 하직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타고 갔던 것이 지게상여였습니다. 평생 동안 등짝에 걸쳐 메고 곡식과 땔감을 날랐던 그 지게에 자신을 실어 보냈던 것입니다. 


121년 전, 우금티에서 전사한 동학농민군들은 그런 초라한 지게 상여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시신은 버려졌고 내팽개쳐졌습니다. 살아난 자들에게는 '반역도'라는 낙인이 찍혀졌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장례는 꿈도 못 꾸었던 것입니다.

 

 



21세기 우금티 고개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 설문조사판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설문조사판이 설치되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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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제례가 영령들의 한을 달래주는 자리였다면, 역사축제는 미래 세대들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예술제에 모인 중·고등학생들은 농민군들의 뜻을 기억하면서도 '놀 건' 놀았습니다. 짚으로 만든 달걀꾸러미 체험, 벼훑이를 이용한 탈곡체험 등등...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자신의 소원을 적은 만장과 사발통문이었습니다.


'좋은 대학 가게해주세요!'
'이번에는 오빠들 콘서트 꼭 가고 말테야!'


위처럼 또래끼리 통용되는 생각들이 많이 적혀있더군요. 하지만 뜨거운 이슈를 담은 것들도 있었습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한국사 국정교과서 OUT'


'헬조선'이라는 우울한 말이 그들의 입에서 오르내리고, 극우 성향의 커뮤니티 일베 같은 사이트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그들이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의 희망의 씨앗도 그들 아닙니까?

121년 전, 갑오년의 우금티가 통한의 피눈물이 터져 나온 곳이라면 현재의 우금티는 새로운 희망이 싹 터 오르는 옥토와 같은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인내천을 꿈꾸던 농민군들의 희생이 헛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겠죠. 그런 의미로 우리 아이들이 우금티에서 많은 역사체험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우금티 우금티에 세워진 조형물이 쓰러져 있다. 우금티에서 쓰러져 갔을 농민군들의 모습이 겹쳐져서 마음이 애잔해진다. 봄의 새싹처럼 힘껏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으면 좋겠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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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저는 2년 전에도 우금티 추모제례에 대해서 기사를 작성했습니다. 그때 기사를 다시 살펴보니, 당시는 교학사 역사교과서에 대해서 언급을 했더군요. 당시 교학사 역사교과서가 얼마나 뜨거운 이슈였습니까? 식민지근대화론에 대해서 긍정적인 시각을 드러낸 교학사 교과서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반대를 했었죠.


2년이 지난 현재. 이제 교학사 교과서를 넘어 한국사가 국정 교과서가 되려고 합니다. 역사가 퇴보한다는 걸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내년 우금티 예술제 기사에서는 이런 안타까운 심정을 기사 말미에 적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의 씨앗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 우금티: 동학농민전쟁 시기 공주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해서 설명한 설명판.

 

 

 

 

* 우금티: 설명판을 보고 있는 학생. 

 

 

 


덧붙이는 글 | 우금티 예술제에서 자원봉사를 한 후, 그것에 대한 소감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사과가 익고 있는 마을. 이 사과는 홍로라고 불리는 새빨간 사과입니다. 추석 제사상에 오르는 그 사과지요. 홍동백서 할 때 홍을 담당하는 녀석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지금도 색깔이 붉게 잘 물들었지만 이제 가을햇살을 받으면 더욱더 붉은 빛을 머금을 것입니다. 그때 쯤이면 우리들의 발걸음은 추석을 보내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겠지요.

 

이 사과를 생산하기 위해 수많은 농꾼들이 땀을 쏟아낸답니다. 잎을 솎아내고 거름을 주고 가지를 치고... 하지만 도시인들이 만나는 사과는 마트에 잘 진열된 상품들이지요. 아주 정갈하게 잘 진열된...

 

 

상품의 비주얼이 제품 선택의 우선 순위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마케팅이 힘을 쓰는 공간에서는 농꾼들의 땀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한낱 수분과 같은 그저그런 존재로 밖에 취급받을지 모릅니다.

 

 

이제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기운이 감도는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그러고보니 이제 20여일이 지나면 추석입니다. 시간 참 빠르지 않습니까?

 

올 추석에는 곡식이 영글 듯, 모든이들이 풍요로운 한가위를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그 농작물들을 서로 나누며 농꾼들의 땀과 노력에 대해서도 한 번 쯤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백설공주 사과처럼 새빨간 사과가 익고 있는 이 곳이 어디냐고요? 이 곳은 경남 거창군 고제면입니다. 백두대간 삼봉산이 내려다보이는 사과 마을입니다.

 

 

 

 

 

 

 

 

 

 

 

 

 

 

 

 

 

 

 

 

 

 

 

 

 

 

 

                      

 

 

 

 

 

 

 

 

 

공공장소에 울려퍼진 친일파 옹호론

 

 

높아진 목소리... 온라인 논쟁을 오프라인으로 옮겨온 듯

 

15.08.14 16:58   최종 업데이트 15.08.14 16:58

 

 

 

 

 

 

 
▲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걸린 대형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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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이 친일을 하고 싶어서 한 거겠어. 상황이 그래서 그런 거지."
"그건 아니죠. 시대상황으로 돌리기에는 친일파들이 나쁜 짓을 많이 했잖아요."
"상황을 이해해야지! 만약에 ○○씨가 일제시대에 살고 있어, 먹고 살아야 하잖아. 그럼 어떻게 하겠어? 일본놈들이랑 등 돌리고 살겠어? 그때 살았으면 그럴 수밖에 없는 거야. "
"선배님 말씀은 그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거의 다 친일파가 되야 한다는 말씀이잖아요. 그런데 그때 독립군은 뭐지요? 항일운동한 사람은 뭐가 되는 거죠?"

 


제가 집필실(?)로 이용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한 대학교의 휴게실이 바로 그곳입니다. 글 쓸 공간이 없어 도서관으로, 카페로 옮겨 다녀야 하는 글쟁이들보다는 제 처지가 훨씬 나을 겁니다. 와이파이도 빵빵 터지고, 에어컨도 시원한 공간에서 물건들을 '쫘악' 펼쳐놓고 글을 쓰니까요.  

하지만 휴게실은 휴게실입니다. 통닭 시켜 먹는 이들,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이들... 식사 시간이 되면 휴게실은 맛있는 음식 냄새로 채워집니다. 그러면 글이 잘 안 써집니다. 저도 배가 고프니까요. 그래도 후각을 혼란시키는 음식 냄새는 그나마 낫습니다. 문제는 역시 청각을 혼동시키는 것입니다.

 

 

 

나의 '집필실'인, 어느 대학의 휴게실에서

 

 

이 대학은 오픈 대학교입니다. 그래서 학우들의 연령대가 아주 다양합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20살부터 백발이 성성한 분들까지... 주축은 50~60대 학우들이 이루더군요. 그래서 대화의 내용도 일반 대학생들이 하는 말들과는 많이 차이가 납니다. 일반 대학생들이 스펙과 취업 걱정으로 대화 내용을 채운다면, 이곳의 학우들은 자신의 아파트 값이 어떤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에 대한 문제들을 입에 올립니다.

부동산이나 건강 문제들은 거의 비슷한 결론으로 달려가는 가더군요. 딱히 첨예하게 부딪힐 부분도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하나라도 더 정보공유를 하려고 '코드'를 맞추더군요. 하지만 정치 문제가 나오면 양상은 달라집니다. 서로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서로 갈등을 빚고 얼굴을 붉히기까지 합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서 그런지 요즘에는 광복, 일제청산, 이승만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들리더군요. 하여간 그렇게 첨예한 이야기들이 대화 테이블에 오르면 저도 본의 아니게 그 대화에 '참여'하게 됩니다. 휴게실이 지하에 위치해 있어 조금만 목소리를 높여도 그 소리가 다 제 귀에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는 제 몸은 노트북 앞에 있지만 마음은 그 대화 테이블에 앉게(?) 됩니다. '동석'하기 싫은데 '동석'하게 되는 겁니다. 한마디로 글쓰기 작업은 잠시 중단을 하게 되는 것이죠.

"요즘 사람들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뭐라뭐라 안 좋게 이야기를 하지만, 난 이승만에 대해서 달리 봐야 한다고 봐. 그때 정부를 안 세웠으면 어떻게 되겠어. 한반도가 적화가 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지."
"그럼 이승만 세력이 친일파 중용한 거랑 반민특위 해산한 거랑은 어떻게 보십니까?"

 

 

 

 

 

 


온라인 논쟁을 옮겨 놓은 것 같은 휴게실 논쟁

 
▲ 소녀상 위안부소녀상. 일본대사관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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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서두에 언급한 대화는 그렇게 계속 이어졌습니다. 총 네 분이서 이런 대화를 나누셨는데 나이가 많으신 분은 이승만과 친일파에 대해서 옹호를 하는 입장이었고, 상대적으로 젊은 분은 그에 대해서 반박을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때는 나라가 새로 세워졌어. 당연히 인재가 필요하잖아. 그럼 누가 그 일을 하겠어? 일제시대에 일 좀 했다고 그 사람들을 안 쓸 수 있겠어."
"그게 바로 친일파들이 주로 주장하는 내용 아닙니까..."
"위쪽으로는 공산당이 꽈리를 틀고 있었고, 그래서 실제로 전쟁도 났잖아. 그런데 인재는 필요했고.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니깐!"
"그게 바로 전형적인 그들의 주장이라니까요!"

 


이미 서로의 목소리는 높아졌고, 주장은 계속해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 대화에 깊숙이 '참여'를 하게 됐습니다. 당장이라도 몸을 이끌고 그 테이블에 가서 식민지근대화론과 같은 친일 옹호론을 격파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친일 문제를 반박하는 분에게는 좀 더 내공을 쌓아 친일 옹호론을 꼼짝 못하게 하라고 조언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마음만으로 그렇게 한 것이지요.

이 분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일제 잔재청산과 관련하여 온라인에서 '피터지게' 싸우는 댓글들이 생각났습니다. 어쩌면 휴게실에서의 대화들은 온라인에서 오가는 논쟁들을 오프라인으로 옮겨놓은 거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실제로 나이가 많았던 분의 논리는 인터넷에서 친일을 옹호하는 댓글의 내용과 거의 일치했으니까요. 대신 잘 아는 동아리 멤버들이었기에 서로 예의는 지키는 모습이었습니다. 나중에는 2학기 수강신청에 대해서 서로 '코드'를 맞추더군요.

 

 


원죄론과 친일론

전 그 대화를 보면서, 친일을 옹호하는 측이 '우리안의 친일', 즉 '친일의 범위 확장'에 전력을 기울인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생계형 친일과 악질 친일을 하나로 묶어버려,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서 생계를 꾸리던 모든 이들에게 '원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일제 잔재는 전부 아니면 전무 형식으로 프레임이 형성되겠지요. 당연한 일이겠지만 신생 독립국에서 전무가 가능하겠습니까?

이렇듯 '친일 범위의 확장'은 악질 매국노들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것이죠. 윤동주도 창씨개명을 했고, 북한도 정권 수립 초기에 친일파가 몇몇 요직에 기용됐다, 그러니  일왕에게 혈서를 쓰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 되겠냐?, 하는 식이 되어 버립니다.

휴게실에서 어깨너머로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신다고 질책하실 분들이 있을 겁니다. 나이 드신 분이 큰 의중 없이 흘린 말에 과도한 해석을 한다고 타박하실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보고자 합니다. 친일매국노들의 뿌리가 깊은 만큼 자신들을 지키는 논리도 상당하다는 것을요. 그 논리가 타당한지 개연성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파급력이 중요한 것이겠죠. 그 파워가 중요한 것이겠죠. 대학교 휴게실이라는 공공장소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친일매국행위를 옹호하는 논리들이 입에 오르고 있다면 그 파워는 상당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추신) 지난 12일,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서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습니다. 전직 총리라는 한계가 있지만 분명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비해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인 박근령씨는 일본 우익들이 좋아할 말들을 일본에서 쏟아내고 왔습니다.

 

두 사람의 행위를 보면 참 많은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광복절을 앞두고 동생이 망동된 행동을 했는데도 사과 한 마디 없는 대통령을 보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사태의 경중을 인지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어쨌든 15일은 광복절입니다. 이날만큼은 태극기를 가슴에 새겨보고, 경건하게 보내야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만석중놀이를 볼 수 있는 거창아시아1인극제!

 

제26회 <거창아시아1인극제> 참관기

 

15.08.11 15:19  최종 업데이트 15.08.11 15:19

 

 

 

 

 

▲ 거창아시아1인극제 필자가 '이효리'라고 부른 자원활동가가 동네 어르신에게 잔치국수를 직접 말아드리고 있다. '이효리' 를 비롯하여 총 6명의 대학생 활동가가 열심히 맡은바 소임을 다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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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더웠다. 강렬한 햇살이 얼굴을 덮치듯 내리쬐었다.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땀이 안경에 튀어 시야가 흐려졌다. 가뜩이나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는데, 그래서 발걸음이 꼬이는데 앞까지 잘 안보이니...

"작년엔 비가 와서 공연 준비가 어려웠고, 올해는 폭염이 스태프들을 잡는구나!"

 

 

 

 

거창귀농학교에서 펼쳐지는 '거창아시아1인극제'

 


필자가 스태프로 참여한 행사는 올해로 26회째를 맞는 '거창아시아1인극제'다.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비슷한 시기에 개최되는 '거창국제연극제'와 구별되는 행사로 백두대간 삼봉산이 올려다 보이는 거창귀농학교에서 행해진다.

거창귀농학교는 삼봉산문화예술학교라고도 불리는데 폐교를 리모델링한 곳으로 거창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고제면에 위치해 있다. '거창국제연극제'가 수승대라는 명승지에서 개최되는 큰 규모의 연극제라면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거창 읍내에서도 20km 정도 떨어진, 궁벽진 곳에서 행해지는 행사라는 뜻이다.

공연장의 규모뿐만 아니라 행사비용도 비교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거창아시아1인극제'에 참여한 참가자들은 '거마금' 정도만 받고 공연을 진행했다.

 


 

 

 


 
▲ 만석중 만석중 인형. 목각인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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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작은 산골짜기 연극제로 '쪼그라'들었지만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국내 유일의 모노드라마(monodrama) 축제다. 현재의 '거창아시아1인극제의 기원은 1988년, 서울 바탕골 소극장에서 펼쳐진 '아시아1인극제'에서 찾을 수 있다. 1회 대회를 치른 이후 '아시아1인극제'는 아시아 각국을 돌며 매해 개최되었다. 이후 1996년부터는 충남 공주에 있는 공주민속박물관이 주관이 되어 공연을 하게 된다. 이에 명칭도 '공주아시아1인극제'로 바뀌게 된다.

'아시아1인극제'가 현재의 체제로 자리를 잡은 건 2007년 이후부터였다. 거창의 진산인 삼봉산의 아래에 위치한 거창귀농학교에서 모노드라마 축제가 열리게 되니 이에 명칭도 '거창아시아1인극제'로 변하게 된 것이다.

 

 

 

 

 


 
▲ 만석중놀이 운심게작법을 추고 있는 연극인 한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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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볼 수 없는 만석중놀이

 


지난 3월 5일. 리퍼트 주한미국 대사가 김기종 '우리마당' 대표의 피습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주한 미국 대사의 피습이란 미증유의 사건이 발생해서인지 당시 언론들은 김기종과 관련된 이력들을 앞 다투어 보도했다. 그런 보도들은 거의가 김기종의 기이한 행적들에 대해서 초점이 맞추어졌다. 문제는 그런 보도들로 인해 애꿎은 우리전통놀이까지 도매금으로 격하됐다는 점이다. 김기종은 '우리마당'이외에도 '만석중놀이보존회'의 대표직을 겸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만석중놀이까지 싸잡아 질타를 당했던 것이다.  

만석중놀이는 고려시대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나라의 전통 무언극이다. 개성 일대에서는 초파일을 전후하여 사찰 부근에서 그림자놀이가 펼쳐졌는데 이 놀이가 바로 만석중놀이다. 어두운 밤, 사찰 인근에 큰 광목천을 걸어 놓고 횃불을 피워 용, 잉어, 사슴 같은 종이 인형의 그림자가 비추게 하여 놀이를 진행했던 것이다.  알록달록한 색깔이 입혀진 인형들, 즉 십장생들이 그려진 인형들이 광목천에서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면서 이야기가 흘러간다.

만석중놀이의 주인공은 만석중이라는 나무 인형이다. 십장생 인형들이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만석중 인형은 '탕'하고 소리를 낸다. 이 소리는 만석중을 조종할 때 나는 소리로 만석중 인형의 조종은 다른 인형들과 마찬가지로 광대가 한다. 만석중 인형이 내는 '탕'하는 소리는 목탁 소리 같기도 하고, 죽비소리 같기도 하다. 어리석은 무지몽매함에서 벗어나 세상을 직시하라는 경고처럼 들리기도 한다.

 

 

 

 


 
▲ 만석중놀이 인형을 조종하고 있는 광대들. 인형의 색깔이 참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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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중놀이의 대미는 운심게작법이라는 승무다. 용과 잉어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클라이맥스 단계에서 운심게작법이 펼쳐진다. 운심게작법을 끝으로 40여 분에 걸쳐 올려진 만석중놀이는 끝이 난다.

만석중놀이는 쉽게 볼 수 없는 공연이다. 무대 세팅의 번거로움은 둘째 치고, 이 놀이를 행할 광대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돈을 들고 대학로를 가 봐도, 국립극장을 가 봐도 '티켓'을 구할 수가 없다. 만석중놀이를 재연할 수 있는 광대들은 우리나라에서도 극히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운이 좋았는지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만석중놀이를 감상할 수 있었다. 올해는 아예 무대 뒤편에 시선을 두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십장생 인형들이 어떻게 조정되는지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실내 공연이었다면 어림없는 이야기겠지만 실외공연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스태프 아닌가? '거창아시아1인극제'의 스태프로 참여한 '특권'을 톡톡히 누렸던 셈이다.

 

 

 


 
▲ 황해도 작두굿 마고당 서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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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두 좀 타 봤수? 황해도 작두굿!

역시 사람의 취향은 제각각이었다. 필자는 만석중놀이에 방점을 찍어 시선을 고정시켰다면 대다수의 관객분들은 황해도 작두굿에 열광을 하는 분위기였다.

마고당 서문정이 행한 황해도 작두굿은 남한에서는 보기 드문 황해도 지역의 굿판이라고 한다. 요즘에는 작두를 타는 모습이 흔하게 보이지만 예전에는 꼭 그렇지 않았다. 통상 북쪽 지방인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작두굿이 많이 벌어졌고, 남쪽으로 갈수록 작두를 타는 무속인들이 적었다고 한다. 무당이라고 모두 작두를 타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황해도 작두굿은 고정형 작두만 이용하지 않고 이동식 작두도 사용했다. 그러니 다양한 변형방식도 등장했다. 서문정은 발뿐만 아니라 손목과 배, 심지어 목에까지 작두를 들이댔다. 작두 위에 목을 올려놓으니 마치 '기요틴(단두대)'에 머리가 오른 듯했다. 한 여름 밤에 호러쇼(?)가 펼쳐졌다고나 할까? 이렇게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내던졌으니 황해도 작두굿의 인기는 상당했다.

독자들 중에는 작두가 가짜가 아니냐고 의구심을 품으실 분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필자도 그런 의구심을 품었다. 그래서 눈을 크게 뜨고 작두의 상태를 관찰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가짜 작두가 아니었다. 나중에 뒤풀이에서 마고당 서문정 선생의 상처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온 몸이 상처 투성이었다. 발에도, 팔에도, 심지어 배와 목까지... 역시 세상에 그냥 되는 일은 없는 듯싶었다.

No pain, No gain!

 
▲ 전통공연예술단 난타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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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는 문화버스를 타고, 거창으로?

박일화 선생의 창작 춤 공연, 전통공연예술단의 타혼 공연 등이 이어졌고, 그렇게 26회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잘 마무리됐다. 달빛이 아름답게 쏟아지는 거창의 한 시골마을에서 행해진 모노드라마 축제는 내년을 기약하며 막을 내렸다.

"그래도 작년보다 관객이 더 많이 들었어요."

이 말이 참 고마웠다. 낮에 흘린 땀방울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니까. 내년 27회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즐기는 축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문화버스'가 와도 좋을 것 같다. 1박 2일로 연극제를 즐길 수 있는 문화버스 말이다. '문화버스'를 타고 와서 공연도 공짜로 보고, 공짜로 밥도 얻어  먹을 수 있다면 그거 훌륭한 여름휴가 아닌가?

 

 

 


 
▲ 창작무 박일화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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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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