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과 '비낭만'이 교차하는 서울성곽길

 

[서촌의 뒷산, 인왕산역사트레킹①]

 

15.06.09 16:33  최종 업데이트 15.06.09 16:33

 

 

 

 

 

 

 

 

 

▲ 낭만적인 서울성곽의 모습 활처럼 휜, C자형 구간. 뒤로 남산타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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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仁王山)은 보면 볼수록 위엄이 느껴지는 산이다. 가파른 바위가 드러낸 바위색과 그 바위 사이로 가지를 뻗은 수풀들의 푸른색이 서로의 배경색이 되어주니, 그 운치에 감탄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그런 인왕산을 겸재 정선은 <인왕제색도>, 강희언은 <인왕산도>를 붓끝으로 담아 표현하였다.   


호랑이가 살고 있어 무서운 곳이긴 했지만 인왕산은 예부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광화문, 경복궁 너머로 보이는 인왕산의 풍광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혼자만 좋아한 게 아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함께 트레킹을 할 정도로 좋아한다. 일명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리딩하며, 사람들에게 인왕산의 매력을 알려줄 정도다. 인왕산역사트레킹 코스는 다음과 같다.

 


광화문 → 사직단 → 단군성전 → 수성동계곡 → 윤동주문학관 → 창의문

 


▲ 서울성곽 서울성곽 인왕산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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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은 '종묘사직'할 때, 그 '사직'이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사직단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신(社神)과 오곡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제례를 올리는 곳이다.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 바로 사직단인 것이다. 농경을 중시했던 조선왕조였기에 사직단의 의미는 종묘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들이 닥쳤을 때 사직단에 직접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보통 '사직'은 궁을 중심으로 서쪽, '종묘'는 동쪽에 들어선다. 실제로 사직단은 경복궁의 서편인 서촌에 위치에 있고, 종묘는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사직단은 동쪽에 사신을 모시는 사단, 서쪽에는 직신을 모시는 직단이 있다. 큰 담 안에 작은 담이 둘러져 있는데, 그 작은 담은 '율'이라고 불린다. 그 율 안에 사단과 직단이 있는 것이다.

조선의 근간 중 하나였던 사직단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치게 된다. 1911년에 사직단이 폐사됐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1922년에는 원래 부지에다 인근의 땅들을 합쳐서 공원을 만든다. 사직단을 공원화 하여 격하시켰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사직단은 아픔을 겪었다. 도시계획에 따라 신문(神門)이라고 불린 정문이 원 위치보다 14미터 뒤로 후퇴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부지 안에 차례로 도서관, 학교, 어린이 놀이공간 등이 세워지게 된다.

 


▲ 사직제례 사직제례를 준비하는 모습. 2014년에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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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이 떠난(?) 예전 사직공원은 몸살을 앓았다. 취객들이 술김에 울타리를 넘어 가기도 하고, 아이들은 제단에서 씨름을 하기도 했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는 '부비부비'를 즐긴 남녀들도 넘쳐났다고 한다. 필자는 사직단 뒤편 신사임당, 이율곡 동상 근처에 있는 족구장과 배드민턴장을 보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종묘에서 족구나 배드민턴을 칠 수 없잖아요. 그런데 사직단에서는 지금 하고 있거든요. 현재 사직단은 복원화 사업을 하고 있는데 원안대로 한다면 저기 도서관이랑 어린이 시설을 철거해야 한답니다. 사직단을 종묘처럼 성역화한다면 이곳에서 족구는 못하겠죠. 그건 그렇다 쳐도 도서관이랑 어린이시설까지 철거한다면 너무 일이 커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설명을 얼버무리는 건 복원사업에 대한 스스로의 입장 정리가 되지 않은 탓이다. 대신 확실한 건 하나 있다.

"성역화를 하더라도 입장료는 받지 마세요! 지갑이 얇아서요..."

 


▲ 단군성전 사직공원 한쪽편에 있는 단군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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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처럼 휘어나가는 서울성곽의 곡선미


트레킹팀은 단군성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직공원 위쪽에 자리 잡은 단군성전은 규모가 크지 않다.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사실 단군성전은 전국에 산재해 있다. 규모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다.

성전이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크기가 중요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직동의 단군성전은 우리동네 교회보다도 더 작다. 아무리 그래도 서울에 있는 단군성전이라면 일정 정도 규모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단군성전을 탐방할 때마다 느끼는 아쉬움이다.

그런 아쉬움을 뒤로 하고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섰다. 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다 보면 활처럼 곡선으로 휜 성곽이 펼쳐진다. 뒤쪽으로 남산을 두고 'C자'형으로 크게 휘어나가는 서울성곽은 트레킹팀의 시선을 독차지했다. 이를 두고 필자는 이렇게 말을 했다.

"여기가 서울성곽 중 가장 곡선미가 뛰어난 구간인 듯싶습니다. 뒤쪽에 남산도 있어서 배경도 살아 있어요. 그러니 열심히 사진을 찍어주세요!"

 


 

▲ 서울성곽 성곽길을 걷고 있는 트레킹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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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이지 않은 서울성곽길


서울성곽길 역사트레킹을 리딩하면서 하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성곽길을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점이다. 등산에 준하는 복장을 갖추라고 미리 공지를 했음에도 트레킹 당일날 보면, 필자를 당혹스럽게 하는 참가자들이 꼭 있었다.

배낭이 없으면 백팩이라도 메고 오라고 당부했지만 옆으로 메는 가방을 들고 오는 참가자. 가급적 트레킹화를 신고 오라고 말을 해도 운동화는커녕 하이힐을 신고 오는 참가자. 그런 사람들을 보면 필자는 이런 말을 건넨다.

"서울성곽 길은 낭만과 비낭만이 교차하는 곳입니다. 성곽자체는 낭만적으로 보일 겁니다. 하지만 한양도성은 말 그대로 방어시설이었어요. 비탈의 경사가 급격할수록 방어력도 높아지잖아요. 그런 상식에 기초해서 성곽이 만들어졌으니 성곽길이 험할 수밖에 없답니다. 그런 곳은 비낭만적이죠."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성곽길을 낭만적인 길로 인지하고 있을까? 미디어에서 접한 모습들이 낭만적으로 묘사돼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기자들이 험한 구간은 직접 취재하거나 체험하지 않고, 그저 '그림'이 잘 나오는 부분을 부각시키는 기사를 남발했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필자도 자유롭지 않다. 곡선미가 사는 C자형 성곽구간을 메인 사진으로 올려 사람들의 참가를 유도했으니까. 어렵고 난이도 있는 구간은 쏙 빼놓았으니까. 낭만과 비낭만이 교차하는 성곽길을 뒤로하고 트레킹팀은 수성동 계곡으로 향했다.  

 

 


▲ 서울성곽 사진에도 보이듯 성곽길은 경사도가 꽤 된다. 계단을 계속 타고 올라가는게 무척 비낭만적이지만 성벽 넘어로 보이는 풍광들은 무척 낭만적이다. 비낭만이 있어야지 낭만이 더 돋보이는 법이다. 뒤로 보이는 산은 북한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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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아기자기한 재미, 서울내부트레킹!

 

한강, 서울성곽, 수표교까지... 아기자기한 도보여행

 

15.06.03 14:14   최종 업데이트 15.06.03 14:15

 

 

 

 

 

 

 
▲ 수표교 장충단공원 입구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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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날 행하는 아웃도어 활동이라면 적어도 북한산 정도는 올라가야 폼이 좀 날지 모른다. 그 귀중한 시간에 동네 뒷산에나 오른다면 휴일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동네 뒷산도 훌륭한 트레킹 코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동네 뒷산의 쓰임새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역사트레킹 코스는 금호산이라는 전형적인 동네 뒷산을 시작점으로 삼고 있다.

이곳은 북한산에 비하면 작은 동네 산일 뿐이다. 하지만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한강을 조망할 수도 있고, 서울성곽길을 만날 수도 있다. 거기에 걸음을 더하면 수표교와 광희문, 그리고 동대문으로 익숙한 흥인지문도 탐방할 수 있다.

 

 

매 사냥터였다는 매봉산

이렇게 아기자기한 길에 이름이 없다면 섭섭할지 모른다. 그래서 필자는 이름을 지어보았다. 서울 내부트레킹! 남산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을 탐방한다는 의미로 지어본 이름이다.

서울 내부트레킹의 시작점은 지하철 5호선 청구역이다. 청구역에서 첫걸음을 뗀 후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금호산이라고도 불리는 매봉산이다. 조선시대 왕들이 매를 풀어 사냥을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매봉산은 응봉근린공원의 한 축으로 속해 있다. 그 응봉근린공원은 남산과 서울숲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이야 도심지의 확장으로 중간중간 녹지축이 잘려 나갔지만 예전에는 남산에서부터 응봉산까지 하나의 능선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응봉산은 조선 초기 동빙고(東氷庫)가 있던 산으로 지금은 개나리 축제로 유명한 작은 산이다. 사냥감을 노리는 '매'서운 눈빛이 사라진 매봉산이지만 그곳에 올라서면 눈이 크게 떠지게 된다. 시원스럽게 한강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호대교 아래로 압구정동 방면으로 꺾여 나가는 한강의 모습이 역동적으로 보인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인근에 있는 아차산은 물론 멀리 팔당대교 부근까지 조망할 수 있다.

연이어 놓여 있는 한강다리들의 이름을 맞혀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필자도 동행한 트레킹팀과 함께 한강다리 이름 맞히기 놀이를 했다. 결과는? 당연히 필자가 1등을 했다. 참가자들 중에 지방출신이 많았기 때문이다.

 

 

 


 
▲ 버티고개 버티고개를 걷고 있는 트레킹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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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고개에 앉아 있는 놈'이 되지 말자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다."

이런 속담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 저 속담은 사람들한테 사기나 치고, 민폐나 끼치는 못된 놈들을 욕할 때 쓰는 말이다. 버티고개는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버터고개, 번터고개라고도 불린 이 고개는 길이 좁은 데다 도둑들까지 들끓는 터에 악명이 높았다. 그 도둑들을 옛날 순라꾼들이 '번도'라고 외치며 추격을 했는데, 그 말이 변하여 '번티'라 불렸다가 다시 '버티'로 바뀌었다고 한다.

예전 한밤중에 버티고개에 앉아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아마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남들에게 민폐나 끼쳐서 '밤중에 버티고개에 앉을 놈'과 같은 욕을 먹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의 버티고개는 걷기에 좋은 길이 됐다. 안전한 보행교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남산의 동쪽 방면을 보며 걸을 수 있다. 그렇게 버티고개를 넘으면 동남쪽 서울성곽길과 만나게 된다. 이 구간의 성곽길은 신라호텔 후면을 돌아간다. 이 구간은 신라호텔의 사유지였던 곳이 개방된 터라 비교적 성곽의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 서울성곽길 서울성곽길. 이 길을 따라가면 신라호텔과 장충단공원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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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장충단 공원

 


가수 배호의 노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으로 유명한 장충단(奬忠壇)은 원래 제례를 드리는 공간이었다. 이곳은 어영청의 분소인 남소영(南小營)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남소영은 도성의 남부지역을 방비하는 군영이었다.

이 자리에 장충단이 들어서게 된 건 1900년 9월경이었다. 고종은 을미사변(1895년)으로 살해된 명성왕후와 신하들의 넋을 추모하고자 장충단을 세웠다. 처음에는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장병들만 제사를 지냈으나 이후에는 이경직 같은 궁내부 대신들도 배향되었다. 더불어 임오군란, 갑신정변 당시에 순직한 문신들도 배향되면서 많은 문무관들이 장충단제향신위(奬忠壇祭享神位)에 봉안됐다. 

공원 중심부에 서 있는 장충단(奬忠壇) 비석의 앞면은 순종이 직접 쓴 글씨를 새긴 것이다. 순종은 명성왕후의 둘째 아들이었으니 글자를 써내려가면서 울분을 토했을 것이다.

장충단은 1910년, 일제에 의해 폐사된다. 1920년대 일제는 장충단을 공원화하면서 그곳의 정신을 앗아가게 된다. 마치 '종묘사직' 할 때의 '사직단'이, 1922년 사직단 공원이 된 것과 같이 격하된 것이다.

 

 



 
▲ 장충단 비석 앞면은 순종, 뒷면은 민영환의 글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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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희생자들의 넋들이 빠져(?)나간 장충단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추모시설들이 그 자리를 채워나갔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을 당해 죽었을 때인 1909년에 일본은 장충단에서 추도대회를 열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도하기 위해 박문사(博文寺)가 세워졌고, 상해사변(1932년) 때 폭탄을 안고 적진(?)을 향해 갔던 육탄삼용사를 기리는 동상도 세워졌다.


육탄삼용사는 가미카제의 원형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중국군의 철조망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은 폭탄에 불을 댕겼는데 생각한 것보다 심지가 빨리 탔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됐을까? 그냥 폭사했다. 그런 3인을 위해 일제는 동상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 일제가 만든 시설들은 광복 후에 다 철거가 됐다.

광복 이후 장충단 공원은 정치집회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수많은 정치집회 연설 중 두드러진 연설이 하나 있었다. 1971년 4월 18일,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의 선거 유세가 바로 그것이다. 그해 4월 27일에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선거 와중에 행해진 김대중의 연설은 무척 파격적이었다.

"이번에 우리가 집권하지 못하면 박정희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온다"

그의 연설처럼 1972년에 유신헌법이 제정됐고,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꿈꾸게 된다. 1979년 10월 26일에 있은 '시크릿 파티'에서 한 잔의 술에 섞인 한 발의 '총탄'이 있기 전까지 박정희는 실질적으로 총통이었다. 3권 분립은 그저 교과서에서만 존재했다.

이외에도 김대중은 향토예비군 폐지, 남북간 비정치적 영역 교류 실시, 지방자치제 도입 등을 언급했다. 지금이야 새로울 것이 없지만 당시의 시각으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들이었다. 장충단 공원에 모인 100만 가까운 인파들 앞에서 저런 '센세이셔널'한 내용들이 확성기를 타고 퍼져나갔으니 당시 집권세력은 얼마나 긴장을 했겠는가?

 


 
▲ 수표교 장충단공원에 있는 수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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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복원의 핵심, 수표교 

    
장충단공원에는 수표교(水標橋)도 있다. 청계천에 세워져 있던 수표교는 1958년, 청계천이 복개가 될 때 철거되어 홍제동으로 이전했다가 1965년부터 장충단공원 입구에 자리 잡게 됐다.

수표교는 세종 2년(1420)에 처음 세워졌는데 그때 이름은 마전교(馬廛橋)였다. 마전교가 수표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변경되게 된 건 세종 23년(1441)의 일이다. 그해 강수량을 측정하기 위해 다리 아래에 양수표(量水標) 세우게 됐는데 그것을 계기로 수표교(水標橋)로 개칭이 된 것이다. 

수표교의 매력은 다리 난간에 있다. 난간이 있는 다리는 궁궐에서나 쓰였다. 조선시대 민간의 다리는 징검다리나 섶다리 수준이었다. 그래서 수해가 나면 다리가 흔적조차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수표교는 튼튼한 돌다리인 데다 고급스러운 난간까지 더해졌다. 백성들이 이용하는 다리들 중에 수표교처럼 궁궐의 양식으로 격조 높게 축조된 다리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편 수표교의 돌기둥에는 경진지평(庚辰地坪)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영조 36년(1760), 그해에 있은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 과정에서 새겨진 것이다. 

이렇듯 수표교는 역사적으로 건축학적으로 무척 중요한 다리다. 하지만 청계천 복원이 된 지금도 원래 위치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청계천 자리에는 '짝퉁 수표교'가 세워져 있다.

 

 

 

아기자기한 역사트레킹 코스


광희문과 흥인지문(동대문) 탐방을 끝으로 서울 내부트레킹은 종료가 된다. 광희문은 4소문 중에 하나고, 흥인지문은 4대문의 하나다.

한강 보고, 서울성곽길 걷고, 장충단도 탐방하고, 대문과 소문을 관찰할 수 있는 서울 내부트레킹! 동네 뒷산에서 시작되지만 이 정도면 아기자기한 역사트레킹 코스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 광희문 광희문을 탐방중인 트레킹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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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헬도림'에 작은 숨통이 트이게 됐다!

 

신도림역 선상 역사 개통을 바라보며

 

15.05.30 15:34   최종 업데이트 15.05.30 15:34

 

곽동운(artpunk)

 

 

 

 

 

 

 
▲ 신도림역 선상역사 테크노마트 방면에서 바라본 신도림역 지상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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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찍으세요? 사무실에 허가는 맡으셨나요?"

"예... 역내 공간을 촬영하는데 허가까지 맡아야 하나요?"
"일단 역무실에 가서 말씀 한방만 해 주시면 되는데..."
"납득이 좀 안 되네요. 폐쇄된 곳을 찍는 것도 아니고 오픈된 역사 안을 촬영하는데요. 시청역이나 서울역에서 촬영을 할 때도 허락받으라는 소리는 없잖아요. 더군다나 저는 여기 홍보해주려고 왔는데..."
"말씀 잘 알겠는데... 그래도 역무실에 가서 말씀 한방만..."

 


지난 5월 24일, 선상역사(철로 위에 건설된 역사)가 개통된 신도림역에서 필자는 어떤 역무원과 작은 언쟁(?)을 벌였다. 개통 당일 날인 23일에는 같은 이유 때문에 사회복무요원과 작은 실랑이를 벌이기 했다. 연이틀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사진 촬영이 원활하게 되지 않자 좀 언짢은 마음이 들었다.

"무장한 보완요원이 활보하는 인천공항에서도 마음껏 사진촬영을 하는데... 전철역에서 사진을 허락을 맞고 찍어야 된다고? 더군다나 역사가 새로 개통됐다고 홍보할 목적으로 찍은 건데..."

그렇게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국철 1호선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그러다 번뜩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신도림역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스트레스 많이 받나 보네. 지상역사를 만드는데 450억이나 들였다고 욕 먹고, 한편으로는 혼잡도를 줄이지 못했다고 욕 먹고 있으니 말이야. 그러니 저렇게 민감하지!'

 
▲ 신도림역 6번 출구 선상역사 개통으로 이제 신도림역은 총 6개의 출구를 갖게 됐다. 예전에는 3개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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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이용객 50만 명 중 국철 승객은 '겨우 5만'


그렇게 연유를 따지다보니 꼬인 실타래가 좀 풀리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신도림 선상역사와 관련된 뉴스들은 부정적인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신도림역의 근본적인 문제는 환승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선상역사가 들어서는 게 그 치유책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가장 많았다.

하루 이용객 50만 명 중 국철 승객은 불과 5만 명 남짓이기에, 선상 역사 개통이 혼잡도 개선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JTBC는 23일 방송에서 기존 지하 역사를 이용했을 때보다 선상역사로 직접 이동할 때가 오히려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된다는 것을 리포터가 직접 보여주기까지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역무원들이 '카메라'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신도림역 4번 출구 신도림역 4번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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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도림'에 자신의 발걸음을 보탠 국철 승객들

      
지난 30년 동안 신도림역은 지상으로 직접 연결되는 길이 없었다. 국철 플랫폼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하를 거쳐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야 했다. 국철 승객들은 물밀 듯 몰려오는 환승객들의 틈에 끼어, 떠밀리듯 발걸음을 내디디며 해당 플랫폼으로 이동을 해야 했다. 탁한 지하 공기를 들이쉬며 지하까지 내려가 '헬도림(신도림역을 지옥으로 빗댄 명칭)'에 자신의 발걸음을 보태야 했던 것이다.

국철 승객들이 '헬도림'에 일조를 하게 된 이유는 그동안 선상 역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1984년 4월 22일에 개통된 신도림역은 애초 탄생할 때부터 지하역사만 있었다. 지상 역사가 존재한다면 국철 승객들은 탁한 지하 공기를 마셔가며 '헬도림'에 일조를 할 필요가 없다. 국철과 지하철 7호선이 교차되는 상봉역처럼, 곧장 출구 밖으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 신도림역 디큐브시티 쪽에서 바라본 신도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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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역사 개통은 이 지역 주민들의 숙원 사업


이렇듯 선상 역사의 개통은 국철 이용객들의 편의를 향상시킬뿐더러 지하 환승공간의 혼잡도도 낮출 수 있다. 실제로 근래에 들어 신도림역 일대는 상전벽해를 이룰 정도로 많이 변했다. 연탄공장, 철근공장 등이 있었던 공장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 자리에는 고층 아파트들과 대규모 상업시설들이 채워졌다. 신도림역과 직접 연결되는 테크노마트와 디큐브시티 같은 상업시설들로 출퇴근하는 인구도 많이 생겼다. 그에 따라 국철 이용객들의 수도 많이 늘어났다는 뜻이다.

필자는 지난 23일에 개통된 신도림 선상 역사의 개통을 누구보다도 더 환영했다. 선상 역사 개통은 우리 지역의 숙원 사업이기도 했다. 지난 30년간 선거철만 되면 여야를 막론하고 약방의 감초처럼 '신도림역 선상역사' 건설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하루 5만 명의 이용객이 있는 시설이 지금에서야 개통됐다면 오히려 너무 늦은 것이다.

공사에 투입된 450억 원이라는 예산이 커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 예산은 그런 일을 하라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의 편익이 결과물로 도출되는 사회 인프라는 어떤 식으로든 건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4대강 사업같이 불이익이 도출되는 사업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2조 원이라는 엄청난 예산이 투입됐지만 '녹조라떼'라는 기이한 결과물이 쥐어진다면 그거 문제 있는 거 아닌가? 

 

 



 
▲ 신도림역 신도림역 지상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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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내 손 안에 서울>에 기고한 글을 대폭, 수정 재작성하여 송고한 기사입니다.


 

 

 

 

 

이제 ‘헬도림역’이라고 놀리지 말아요~

 

 

신도림역, 선상 역사 개통으로 변화를 꾀하다! | 곽동운 시민기자

 

 

지난 30년 동안 그 곳에는 지상으로 직접 연결되는 길이 없었다. 목적지인 플랫폼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하를 거쳐야 했다. 물밀 듯 몰려오는 환승객들의 원치 않는 환대(?)를 받으며, 그들의 보폭에 자신의 걸음을 맞춰야만 해당 플랫폼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30년 동안 국철 1호선 승객들은 환승객들과 원치 않는 조우를 해야 했다.

 

 

지난 23일 경부선 신도림 선상 역사가 개통했다

 

 

지난 5월 23일에 ‘선상 역사(철로 위에 건설된 역사)’가 개통된 신도림역에 대한 이야기다. 그동안 신도림역은 엄청난 혼잡으로 인해 ‘헬도림(신도림역을 지옥으로 빗댄 명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써야 했다. 국철 승객들과 지하철 2호선의 승객들이 서로 환승을 하기 위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탓에 그런 오명이 붙여진 것이다. 실제로 출퇴근 시간의 신도림역은 사람에 떠밀려 이동할 정도로 혼잡함이 극심하다.

 

그런 혼란을 가중시켰던 원인 중에 하나로 선상 역사의 부재가 꼽혔다. 1984년 4월 22일에 개통된 신도림역은 태생적으로 구조적인 한계가 있었다. 지상 역사가 없었기에 국철 1호선을 이용하는 승객들은 반드시 지하를 거쳐 다시 지상 플랫폼으로 올라와야 했다. 예를 들어 국철을 통해 용산역으로 간다면 이런 식의 동선이 그려진다.

 

 

지상▶ 지하이동(환승객들과 함께 이동)▶ 지상플랫폼(1호선)

 

 

하지만 지상 역사가 존재한다면 지하를 통해 환승객들과 혼잡함을 공유(?)할 필요가 없어진다. 국철과 지하철 7호선이 교차되는 상봉역처럼, 곧장 출구 밖으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선상 역사의 개통은 국철 이용객들의 편의를 향상시킬뿐더러 지하 환승공간의 혼잡도도 낮출 수 있다. 실제로 근래에 들어 신도림역 일대는 많은 주거시설들이 들어섰고, 테크노마트와 디큐브시티 같은 상업시설들로 출퇴근하는 인구도 많이 생겼다. 그에 따라 국철 이용객들의 수도 늘어났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선상 역사에 대한 평가절하가 적절하지 않다는 뜻이다.

 

 

 

신도림역 6번 출구 앞(좌), 신도림역 테크노마트 방면(우)

 

 

필자는 지난 23일에 개통된 신도림 선상 역사의 개통을 누구보다도 더 환영했다. 실제로 개통되기 전부터 선상 역사 일대를 돌며 취재용 사진을 찍었고, 개통되자마자 이용해보기도 했다. 이용한 날이 석가탄신일 연휴여서 그랬는지 아직 선상 역사를 이용하는 승객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주위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신도림역에 선상 역사가 들어선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직 홍보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은 듯싶다.

 

‘헬도림’이 ‘천국도림’으로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도림역은 계속 변화를 하고 있다. 그 변화의 계단들이 꾸준히 놓이다보면 언젠가는 신도림역도 ‘헬도림’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

 

 

 

 

지옥의 신도림역, 1호선 지상역사로 피해가자 | 김건탁 시민기자

 

지하철 1호선과 2호선이 만나는 신도림역. 경기 남부 수도권 지역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환승객들만 하루 35만 명이고, 신도림역 자체 이용인원도 13만 명이나 되어 하루 이용인원만 약 50만 명에 달하는 역이다. 이로 인해 신도림역은 출퇴근 시간에 예로부터 높은 혼잡도로 악명 높았던 지하철 역 중 하나다. 덕분에 환승하기가 너무나도 힘들어 ‘헬도림’ 이라는 별명도 생겼을 정도.

 

지금까지는 1호선만을 이용하고자 하는 승객들도 1호선에 별도의 역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2호선 대합실을 경유해서 1호선을 탑승해야만 하는 약간 불편한 구조였다. 이는 1호선에서 2호선으로 환승하는 승객들의 동선과 자연스레 만날 수밖에 없어, 신도림역의 혼잡도를 더욱 가중시키고 있었다.

 

 

지난 23일 새롭게 개통된 1호선 지상역사

지난 23일 새롭게 개통된 1호선 지상역사

 

 

이로 인해 코레일은 신도림역의 혼잡도를 조금이나마 감소시키고자 지난 2011년, 1호선 지상역사를 착공하였다. 따라서 신도림역에서 처음으로 1호선을 이용하는 승객들은 2호선 역사를 거치지 않고 1호선 열차를 바로 탈 수 있게 되었다.

1호선만을 이용하는 승객과 2호선만을 이용하는 승객 및 1-2호선 간 환승객을 분리시키는 것이 가능해져 혼잡도를 감소시키는 효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4~6번 출구가 새로 생겨났다

4~6번 출구가 새로 생겨났다

 

 

 

새롭게 지어진 1호선 지상역사는 3개의 출구가 있어, 신도림역에는 4번부터 6번 출구가 새로 생겼다. 허나 약 450억을 투입하여 지어진 새 역사는 출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다. 바로 새로 생긴 4번과 5번 출구가 기존의 2호선 1번 출구와 방향이 완벽하게 똑같을 뿐더러, 1호선만을 이용하는 승객도 기존의 2호선 대합실을 이용할 때가 1호선 지상역사를 이용할 때 보다 2분정도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이다.

 

 

4~6번 출구가 새로 생겨났다

4~6번 출구가 새로 생겨났다

 

 

 

그럼에도 분명한 장점은 있다. 새로 지어졌다 보니 기존의 역사에 비해 훨씬 깨끗하고, 이용하는 사람도 많지 않아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노약자, 장애인들을 위하여 11대의 에스컬레이터와 5대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더불어서 경부선 철도로 인해 남북으로 단절된 구로 지역을 연결하는 효과도 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아직까지 여러 보완점이 필요한 신도림역 지상역사. 하지만 출근 시간에 조금이라도 쾌적하게 출근하고 싶은 시민들에게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철썩철썩... 파도를 따라 걷는 속초해변트레킹

 

속초해변길 역사트레킹

 

 

 

 
▲ 속초해수욕장 황토빛 모래사장과 푸른 동해바다가 서로의 배경색이 되어 주는 모습이 장관이다. 외옹치에서 바라본 속초해수욕장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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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옹치 외옹치에는 약간의 경작지가 존재한다. 두 노부부가 경작하는 이 고구마밭은 가을걷이가 끝났다. 고구마밭을 넘어 펼쳐진 속초해수욕장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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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바다가 보이는 속초로 가자!

 

서울 - 춘천간 고속도로의 개통, 미시령터널의 개통 등으로 이제 속초는 서울에서 2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해안 도시가 되었다. 속초시 관광안내 책자에는 '1시간 40분'이라고 적혀 있다. 그만큼 강원도 해안 도시로의 접근은 용이해졌다. 너무 서울 중심적인 발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속초나 강릉 같은 도시들은 서울의 근교 바닷가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 속초에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도보여행길이 있다. 일명 속초해변길!

속초해변트레킹의 시작은 시외버스터미널에서부터 시작된다.

시외버스터미널→ 속초관광수산시장(입구)→ 아바이마을→ 속초해수욕장→ 외옹치→ 대포항

속초해변트레킹은 이런 곳들을 통과하는데 거리는 약 8km 정도 되며, 휴식 시간을 포함하여 약 3시간 정도면 충분히 이동할 수 있다. 시외버스터미널이 있는 시내를 중심으로 속초는 남쪽과 북쪽으로 나눌 수 있는데 속초해변트레킹은 속초시 남쪽에서 이루어진다.

 

 



아바이마을과 갯배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유명한 속초관광수산시장으로 방향을 잡고 가면 아바이 마을 있는 청호동이 나온다. 아바이 마을은 1·4 후퇴 때 남하했다가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피난민들이 정착한 곳이다. 정착 초기에 함경도 사람들, 특히 노년층이 많았는데 함경도 방언으로 '아바이'가 할아버지란 뜻이기에 아바이 마을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게 됐다고 한다.

속초는 38선 이북에 있던 지역으로 한국전쟁 이전에는 북한 쪽에 속해 있었다. 휴전이 됐을 때, '동쪽의 38선'은 북상했다. 그러나 '서쪽의 38선'은 하강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38선 이북이었던 속초는 현재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2시간이지만, 38선 이남이었던 개성은 아무나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그렇게 실향민들은 조금이라도 고향에 가까운 곳에다 삶의 터전을 잡았던 것이다. 함경도 도민들이 집단으로 생활을 하다 보니 그곳에는 전통적인 속초지역의 문화와는 다른 음식문화와 언어문화가 자리잡게 됐다. 그런 음식문화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바이순대와 오징어순대다.

동네 떡볶이집에서 파는 일반적인 순대는 돼지 창자 속에 당면을 넣지만 아바이순대는 찹쌀과 선지 등을 넣어 독특한 맛을 낸다. 오징어순대도 마찬가지다. 옛날부터 강원도를 비롯한 동해안 지역에서는 돼지가 귀해 오징어를 이용하여 순대를 만들어왔다. 그런 방식의 오징어순대가 아바이마을에서는 함경도식으로 변형이 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의 입가에는 군침이 흐르고 있다. 아바이마을에서 맛 본 오징어순대가 입가에 맴돌아서...

 
▲ 갯배 배 삯이 200원인 갯배. 시내 중심부와 아바이 마을을 연결해주던 갯배는 이제 속초의 또다른 명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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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이마을이 있는 청호동은 트레킹을 하기에 적합한 곳은 아니다. 그냥 동네 주택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초에 가면 한 번쯤은 꼭 가볼 곳인데다 청호동과 중앙동을 이어주는 설악대교에서 바라보는 속초 시내의 모습이 장관이기에 속초해변트레킹 코스에 포함시켰다.

한편 아바이마을에는 '갯배'라는 또 하나의 명물이 있다. 갯배는 중앙동과 아바이 마을이 있는 청호동을 이어주는 무동력 선을 말한다. 양쪽 선착장에 걸려 있는 밧줄을 끌어 당겨 그 힘으로 이동을 하는 것이다.

아바이마을은 육지 속의 섬과 같은 형상이다. 그래서 이 갯배가 없었다면 5분 정도 걸릴 거리를 30분 정도 돌아가야 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설악대교(2003년 개통)와 금강대교(2013년 7월 임시개통)가 건설되어 이 갯배가 없어도 시내로 들어갈 수 있지만 그 전에는 이 갯배가 아바이마을 사람들의 다리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한편 이 갯배의 배 삯은 200원이라 부담이 없어 좋다.

 

 
▲ 조도 속초해수욕장에서 바라본 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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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해수욕장과 조도

 


아바이마을을 빠져나오는 곳에서부터 본격적인 해변 트레킹이 시작된다. 거기서부터가 속초 제일의 명소라고 불리는 속초해수욕장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속초 해수욕장은 황토빛 모래사장이 인상적인 곳이다. 약 1km 정도에, 질 좋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새들의 낙원이라고 불리는 조도(鳥島)가 두둥실 푸른 동해바다에 떠있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한다. 더구나 바다 반대편에는 우뚝 솟은 설악산이 내려다보고 있어 여느 바닷가 해우욕장과는 다른 운치를 자아낸다.

사실 속초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은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니다. 느릿느릿 걸어도 30~40분 정도면 끝부분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래서 해운대나 경포대 같은 '광대역' 백사장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성이 안 찰 수도 있다. 하지만 광대역보다는 아기자기함을, 더불어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속초해수욕장에 더 높은 점수를 줄지도 모른다.

속초해수욕장의 끝자락에는 외옹치라는 작은 언덕이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속초해수욕장 일대와 속초 중심부를 조망해 볼 수 있다. 푸른 동해바다의 물결과 황토빛 모래사장이 서로 서로의 배경색이 된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 외옹치 외옹치는 해안가로 툭 튀어나온 형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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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옹치와 외옹치항

속초해수욕장에서 외옹치를 바라다보면 마치 어떤 산 하나가 바닷가를 향해 뛰어들려는 형상이다. 평평한 해안가가 계속 이어지다 외옹치 부근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 나온 모습이라는 것이다. 외옹치(外瓮峙)라는 명칭도 바깥(外)으로 튀어 나온 항아리(瓮) 같은 언덕(峙) 정도로 해석될 수 있다.

외옹치에는 짧기는 했지만 숲길도 있었다. 속초시 지형도를 보면, 설악산 대청봉에서 동쪽 방면으로 내려온 줄기는 주봉산을 타고 내려오다 바다를 앞에 두고 외옹치가 된다. 즉 외옹치에서는 동해바다와 설악산이 서로 만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지형적인 특색 때문인지 외옹치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된 것이다. 사실 외옹치 해변은 2005년 전까지만 해도 군사용 철책이 들어서서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다. 한편 같은 해에 동쪽에 주둔하고 있었던 군부대도 철수하게 되어 지금의 외옹치의 모습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외옹치 일대에는 해안 방어를 위해 군 초소가 남아있다.

 

 

 

 

 

 

 

 
▲ 외옹치항의 야경 철책선 위로 불빛이 비취고 그 반대편에는 보름달이 떠올랐다. 동해바다와 어루어진 모습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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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초해변트레킹 코스 빨간색으로 그려진 부분으로 이동한다. 이동거리는 약 8km 정도다.

 


● 도움말
1. 서울 동서울터미널 기준으로 속초 시외버스터미널까지 약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속초에는 고속버스터미널도 있는데 그 곳은 속초해수욕장 입구 부근에 있다.

2. 대포항에서 트레킹을 마친 후에는 7번 국도쪽 나와서 시내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돌아올 수 있다. 버스 노선이 많기 때문에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3. 춘천에서 속초까지는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춘천 같은 강원도 서부 내륙지역도 속초까지 가는 것이 부담스럽지가 않다.

 

 

 

 

홍지문과 역사적 상상력

 

 

 

 

 

 

 

홍지문 현판

 

 

자하문이라고도 불리는 창의문 근방에는 역사적인 명소가 많다. 유명한 백사실 계곡에는 오성 이항복 대감의 별서 터가 있고, 너럭바위가 펼쳐진 세검정은 광해군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꿈틀대고 있다. 또, 흥선대원군의 별서 터도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창의문 밖에는 홍지문도 있다.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인데 역사적인 상상력을 발휘하기에 이만한 곳도 없다. 일단 홍지문과 탕춘대성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자. 탕춘대성을 새로 나온 ‘중국 음식’으로 오해할 수도 있으니.

 

 

 

홍지문과 오간수문

 

 

 

 

탕춘대성과 홍지문

 

탕춘대성은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해주는 보조 성으로 지어졌다. 한양도성은 조선 초기시대에 축조된 것에 비해 북한산성은 후기인 숙종 때 만들어졌다. 임진왜란과 병자·정묘호란을 통해 처참한 피해를 입었던 조선은 한성 방어를 위해 성곽들을 정비하게 됐고, 그렇게 하여 북한산성이 완공되기에 이른다.

 

이후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길이 4km의 성이 만들어졌으니, 이 성을 두고 탕춘대성(湯春大城)이라고 불렀다. 탕춘대성의 이름은 성곽이 자리 잡은 곳 인근에 탕춘대라는 돈대를 따라 지었다고 한다. 축조 된 순서를 정리해보면 ‘한양도성(조선 초기) ▶ 북한산성(조선 후기) ▶ 탕춘대성(조선 후기)’ 순이다.

 

홍지문은 그런 탕춘대성의 성문이었다. 비록 4km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성이었지만 탕춘대성도 있을 건 다 있는 성채였다. 홍지문 옆으로는 홍제천이 흐르기에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도 만들어졌다.

 

 

 

홍지문과 북한산 방면의 성벽. 수풀이 무성하지 않은 계절에 가야 성벽을 관찰할 수 있음.

 

 

 

 

상상력으로 홍지문 성벽을 ‘복원’ 해보자!

 

 

지금의 홍지문은 다시 만들어진 것이다. 1921년 홍제천이 범람하여 홍지문을 비롯한 오간대수문을 싹 다 쓸어버리고 간 걸, 1977년에 복원했다. 하지만 복원은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왕산 방면의 성벽이 훼손이 됐고, 그 위로는 도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지문의 한쪽은 단절되어 있고, 그 옆으로는 지금도 자동차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가고 있다.

 

 

 

경사가 급격한 인왕산 성벽

 

 

 

역사책으로 해보는 상상력은 텍스트의 한계를 넘어서기가 어렵다. 그래서 역사적 상상력은 현장에 있을 때 가장 선명하게 그려질 수 있다. 그런 역사적 상상력을 홍지문 앞에서 발휘해보자. 자동차들을 지워버리고, 도로도 걷어내보자. 그런 후에는 끊어진 성벽을 이어보자. 인왕산에서 급하게 내려온 성벽이 북한산 방면으로 또 급격하게 오를 수 있게 홍지문의 끊어진 성벽을 역사적 상상력으로 ‘복원’해 보자.

 

이런 것도 하나의 재미다. 이런 재미가 있기에 서울 역사탐방은 언제나 필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옛 선인의 길을 따라...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
   

 

 

 

 

 

 

 

 

 

 

 

 

 


 

 
▲ 능내역 2008년 복선화된 중앙선이 개통되면서 능내역은 폐역사가 됐다. 하지만 사진에서 보여지듯 능내역은 많은 나들이객들의 사랑을 받는 휴식공간으로 재탄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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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의 생가다. 대개 천주교 성지는 순교와 관련된 곳이 많다. 절두산, 새남터, 황새울 등등... 하지만 이 곳은 독특하게도 한 인물의 생가가 성역화 됐다. 그만큼 우리 천주교에서 정약종의 업적과 희생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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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선생의 손을 붙잡고 싶었다!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의 코스는 다음과 같다.

팔당역 ▲(시내버스 이동) ▲능내역(폐역) ▲마재성지 ▲다산 생가(여유당) ▲연꽃 공원 ▲다산 삼거리 ▲조안면사무소 ▲진둥산 ▲솔개고개 ▲운길산역

2008년 중앙선 복선화로 인하여 폐역이 된 능내역은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간이역의 색깔을 그대로 남겨두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공간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정취를 쫓아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능내역으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다. 단선철도 시절, 옛 중앙선의 일일 수송량보다 더 많은 인파가 주말이면 능내역 인근으로 몰려와 트레킹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그런 북적북적한 능내역을 뒤로 하고 우리는 천주교 성지인 마재성지로 향했다. 마재성지는 능내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지만 그 주변 분위기는 능내역과는 완전 달랐다. 무척 차분했다. 성지는 성지였던 것이다. 



정약종의 생가,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선생의 셋째형인 정약종의 생가다.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 일반적인 천주교 성지는 거의가 순교, 즉 신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 대대수지만 마재성지는 한 집안의 살림집이 성지가 된 독특한 사례다.

그럼 정약종은 누구인가?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용의 둘째형인 정약전은 잘 알고 있는데 정약종이란 이름 석 자는 처음 들어보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형이었다. 바로 윗형이었다. 도교에 심취해있던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에 입문하게 된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진산사건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천주교를 멀리할 때도 그는 강건하게 신앙을 지켜냈다.

1791년(신해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사람이 제례를 거부하고 위폐를 불사른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의 파장으로 다산 선생도 벽파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된다. 신유박해(1801년) 이후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황사영의 백서(帛書)에도 '신해년 박해 이후에 형제나 친구들로서 여전히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정약종만 홀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 다산 정약용 선생

 


 

 

 


 

안타깝게도 형제들조차도 정약종의 강건한 신앙을 환영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포교된 것이 아니라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 서학을 토대로 자생적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혁명적 도구로 천주신앙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상의 위폐를 불태운 진산 사건에 반발해 천주교를 떠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배교를 한 이들은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천주 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정약종이 계속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면 지킬수록 집안 형제들과의 사이는 멀어져갔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약종만 홀로 강 건너 분원리(현 광주시 남종면)에 살게 될 정도였다.

그런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뒤로 하고, 역사트레킹 팀은 마재성지에 있는 '한복 입은 예수상' 앞에서 세월호 참사에 대한 묵념을 올렸다. 참가자 중에는 다른 종교를 가진 분도 있었고, 무신론자도 있었지만 그 시간만큼은 종교를 뛰어 넘어 경건의 시간을 함께했다. 필자도 나지막이 묵념을 올렸다.

'희생자들 모두 좋은 곳으로 가시길, 그리고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말길. 나도 당할 수 있는 이런 참사가 다시는 이 땅에서 벌어지지 않기를...'

역사트레킹팀은 다산 정약용 생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마재성지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다. 능내역 ▶ 마재성지 ▶ 다산 생가(여유당)에 연꽃 공원까지, 이들 지역이 도보로 20분 이내의 거리에 묶여 있다. 이런 명소들이 집중적으로 밀집해 있으니, 앞서 언급한대로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이곳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를 찾는 것이다.


 

 

 
▲ 정약용 동상 정약용 선생 동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참가자들. 이날은 햇살이 강해서 그랬는지, 참가자들은 선글라스나 창모자 등으로 햇살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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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과 정약용

매번 와도 느낌이 좋은 곳. 돌아가는 발걸음이 아쉬운 곳. 다산 선생의 뜻을 되새기고 싶은 곳... 필자는 이곳에 올 때마다 항상 좋은 감흥을 받았고, 그런 감흥을 다른이들과 함께 공유하기를 원했다. 결국, 그 날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떠났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뭐 다들 아시겠지만... 1799년, 당시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를 했다. 반대파였던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다.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 정약용이 1순위였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된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이다.

벽파는 꼼수를 썼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이다.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둘째형인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고향인 마현(현 능내리)으로 낙향하게 된다.

체제공과 정약용이란 '원투펀치'가 조정을 떠난 두 달 후,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정조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임금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크게 스스로를 책망했다고 한다. 그때가 1800년 6월이었다.

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된다. 1801년 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것이다.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사사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에 나서게 된다.

 

 

 
▲ 연꽃 공원 팔당호를 배경으로 기념 촬영을 했다. 사진 뒤편으로 보이는 곳은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으로, 가족들과 사이가 멀어진 정약종 선생이 따로 떨어져 살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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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로 유배길에 올라야했던 정약용

이때 셋째 정약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길에 나서게 된다. 처음 다산의 유배지는 경상도 포항 부근 장기였고, 정약전의 유배지는 전라도 완도 본섬 옆에 있는 신지도였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백사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약용은 포항보다 더 궁벽한 강진 땅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배되기에 이른다.

한편 강진에서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는 고정되지 않았다. 읍내에 있는 주막거리에 거처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다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다산초당이었던 것이다. 다산초당은 다산 선생이 1808년에서부터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그렇게 해배된 이후 다산 선생은 고향인 이 곳 마현으로 다시 오게 됐고,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에서 강진 시절에 마치지 못한 저술 작업에 매진하게 된다.

"다산 선생은 무려 500여 권의 서책을 저술한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강진에서의 18년 동안, 또 여유당에서의 18년 동안 다산 선생은 묵묵히 저술과 학술작업에 매진하셨습니다. 그런 다산 선생의 뜻을 배우고자 우리는 여기에 온 것입니다."
 


 
▲ 진둥산 남한강 자전거 도로만 따라가면 재미가 없다. 잘 닦인 길을 걷는 것도 좋지만 이런 비포장 도로를 걸어야 진정한 트레킹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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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설명을 잘했는지 필자의 말에 환호를 하는 참가자도 있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몇마디 더 설명을 보탰다.

"아참 다산 선생은 40세에 유배됐다가 58세에 여유당으로 오시게 됩니다. 그러다 76세에 돌아가십니다. 그때 기준으로는 무척 장수를 하신 셈입니다."

다산생가를 떠나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 이후에도 필자는 참가자들과 함께 다산 선생과 정조대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파란만장한 다산 선생과 그의 형제들의 삶, 참된 목민관이었던 다산 선생의 애민 정신,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의 일대기 등등... 이번 트레킹의 명칭이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이었던 만큼 다산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에 한 분은 집에 가서 다산 선생과 관련된 공부를 해야겠다고 필자에게 슬며시 말을 건냈다. 그러고보면 필자 같은 사람은 두꺼운 역사책의 머릿말을 읽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비록 도서관이 아닌 아웃도어이지만, 필드에서 트레킹하며 사람들을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리딩'하기 때문이다.  


 


  


다시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로

힘들고 지칠 때마다 다산 선생을 뵈러갈 생각이다. 남양주든 강진이든 상관없다. 그냥 가서 위로를 받고 올 생각이다. 역시 다산 선생은 멘토 중에 멘토인 듯싶다. 난 힘들 때마다 항상, '다시 다산 정약용선생'에게로 갈 생각이다.    


 


 

 

 

 


 



● 도움말

1. <남양주 정약용> 역사트레킹 코스: 팔당역 ▶(시내버스 이동) ▶ 능내역(폐역)▶ 마재성지 ▶ 다산 생가(여유당) ▶ 연꽃 공원 ▶ 다산 삼거리 ▶ 조안면사무소 ▶ 진둥산 ▶ 솔개고개 ▶ 운길산역



2. 이동거리: 약 9.5km / 소요시간: 약 4시간 30분(쉬는 시간포함)



3. 교통편: 중앙선 팔당역에서 하차하여 능내1리행 버스에 탑승함. 능내역이 능내1리임. 버스로 약 10분 정도 이동함.

 

 

 

일제 강점기, 광화문이 옮겨진 이유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쪽에서 촬영한 광화문

 

 

 

광화문은 이른바 뜨는 지역이라는 ‘핫플레이스’를 양쪽으로 거느리고 있다. 오른쪽으로는 북촌, 왼쪽으로는 서촌이 바로 그곳이다. 하지만 광화문은 그 자체로 관광 명소다. 서울을 찾는 관광객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 광화문 광장을 산책했을 것이다. 또한 누구나 한 번은 수문장 교대식을 바라보며 카메라 셔터를 눌렀을 것이다.

 

이렇듯 광화문 일대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 됐다. 하지만 예전 광화문은 경복궁의 정문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형편없는 대접을 받았다. 일제에 의해 훼손됐고, 거기에 더해 본 위치에서 벗어난 곳에 방치되기까지 했다.

 

 

 

‘궁’과 ‘궐’이 합쳐진 궁궐

 

조선시대 궁들 중에서 궁궐이라는 말에 딱 떨어지는 곳은 경복궁이 유일하다. 여기서 말하는 궁궐은 ‘궁’과 ‘궐’이 결합된 말이다. ‘궁’은 다 아실 테니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문제는 ‘궐’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 ‘궐’은 높은 석대 위에 있는 곳으로 감시초소 역할을 하는 곳을 말한다. 중앙에 있는 문을 중심으로 궁벽의 양 옆에 궐이 자리 잡는다. 이렇게 궐이 있어야 온전한 궁궐 칭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광화문을 정문으로 삼고 있는 경복궁이 유일하게 궁궐의 칭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은 광화문과 함께 궐인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이 배치됐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설명하면, 광화문을 중심으로 북촌으로 가는 동쪽에는 동십자각이 자리 잡고 있고, 서촌으로 가는 서쪽에는 서십자각이 위치해 있었다.

 

 

 

 

 

* 수문장교대식

 

 

 

 

 

* 동십자각

 

 

 

 

광화문과 동십자각

 

현재 동십자각은 도로 한 가운데에 ‘뚝’ 떨어져 나와 있다. 그 동십자각을 사이에 두고 쉴 세 없이 자동차들이 오가고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을 태운 버스들도 많이 오간다.

 

그렇다면 왜 동십자각은 지금처럼 도로 한 가운데 나와 있는 것일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예전에는 동십자각도 경복궁의 담벼락과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이렇게 담벼락과 떨어지게 됐다.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만든다는 목적으로 남쪽의 담벼락을 다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 광화문도 원래 위치에서 동북쪽, 지금의 민속박물관 부근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렇게 담벼락이 헐린 곳에는 철책선이 흉물스럽게 들어서게 된다. 이후 삼청동쪽으로 도로가 건설됐고 동십자각은 현재와 같이 도로 위의 섬처럼 ‘뚝’ 튀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래도 동십자각은 서십자각 보다는 상황이 더 낫다. 서십자각은 아예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일제는 광화문에서 영추문 사이에 전차노선을 개설했는데 그때 서십자각을 철거했던 것이다. 그나마 동십자각은 실물이 있어 사진이라도 찍을 수 있지만 서십자각은 그 터만 남아 있다.

 

 

 

핫플레이스를 연결하는 핫플레이스

 

수문장 교대식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광화문은 2010년 8월에 완공된 것이다. 1968년에 중수를 하게 되는데 그때는 제대로 복원을 하지 못했다. 당시 중앙청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 축에 맞춰 중수를 했는데 그 때문에 본래보다 3.5도 가량 틀어졌던 것이다. 그런 오류를 바로잡고 거듭난 광화문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공간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수문장 교대식 때문이다. 그 수문장 교대식을 보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환호와 박수를 보낸다.

 

개인적으로는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이 온전한 상태로 복원이 됐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그럼 경복궁과 광화문의 권위가 한층 더 살아나지 않았을까. 하지만 너무 안타까워하지 말자. 이 소중한 광화문을 중심으로 북촌도 가고, 서촌도 갈 수 있으니까. 핫플레이스를 연결해주는 핫플레이스인 광화문이 아직 우리 곁에 남아있으니까!

 

 

 

 

* 광화문 해태상

 

 

* 광화문 돌담

 

 

 

가야사가 빠진 곳에 또아리를 튼 '임나일본부'설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해보기

 

15.04.23 11:39   최종 업데이트 15.04.23 11:39

 

 

 

 

 

 

 

그 이야기가 다시 돌아왔다. 아베 정권의 우경화를 타고 당당히 다시 역사교과서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그것이 무엇이냐? 임나일본부설이다.

철지난 유행가 같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이 다시 현안으로 떠오른 건, 4월 6일 일본 문부과학성의 교과서 검정 결과 발표 때문이었다. 검정을 통과한 역사교과서 8종 중 4종에서 임나일본부에 대해서 기술됐고, 이에 우리 정부는 총리까지 나서 해당 교과서의 주장을 반박하기에 이르렀다.

독도나 위안부, 혹은 난징대학살 같은 문제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일본 교과서들이 검정을 통과하고, 이에 한국이나 주변국들이 반발하는 모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임나일본부 문제는 우리의 고대사를 왜곡할 뿐더러, 일본제국주의의 한반도 '진출'의 역사적 근거로 악용될 수 있는 심각한 사안이다. 경각심을 갖고 주시를 해야 한다.  

 

 



남선경영론이라고 불린 임나일본부설

그럼 일단 임나일본부설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남선경영론(南鮮經營說)이라고도 불리는 임나일본부설은 고대시기인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통치기관을 두고 직접 지배를 했다는 설이다.

그 설의 중추적인 근거로 제시되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왕후가 몸소 군대를 이끌고 삼한지역을 정벌했는데 그 원년이 369년이라고 한다. 정벌이 끝난 후에는 임나 지역에 일본부를 설치하니 그것이 바로 '임나일본부'가 됐고, 562년 신라에 의해 망할 때까지 200년간 존속되었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도 이론적 근거로 끌어 쓴다. 이런 내용들을 일본 우익들이 주장했고, 이번 역사교과서에 실리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임나'는 가야지역을 말하는데 우리도 임나라는 지역명칭을 사용했다. 일본만 독점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의 영역은 가야지역의 세력권을 넘어 전라도 남부지역과 경상도 서부권까지 포괄한다. 사실상 한반도 남부에서 삼국과 동일한 지위를 누리며, 삼국과 경쟁체제에 있었다는 것이다.

 



 
▲ 일본 역사교과서 임나일본부를 표시한 일본의 역사교과서. 가야국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 일본역사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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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는 무역대표부?


욱하지 않는가? 하지만 감정보다는 논리와 객관성을 앞세우자. 일본 우익들의 역사왜곡을 합리적인 시각으로 격파해보자. 그들의 말대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한반도 남부의 통치기관이었다면 조세징수, 군사징발, 노역동원, 구휼활동 같은 기록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내용은 전혀 없다.

<일본서기>에는 임나일본부의 외교적 활동만 언급이 되어 있을 뿐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혼신을 기울일 때, 임나일본부는 군사도 징발하지 않고, 조세징수도 하지 않는 등 느긋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독자들 중에는 의문점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 굳이 가야지역일까'라는 의문이다. 차라리 전라도와 충청도의 곡창지대에다 설치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덧붙여질 수도 있다. 당시 왜(倭)는 철 생산지인 가야지역과의 통상에 큰 주안점을 두었다. 철의 매입과 수입에 사활을 걸었던 것이다. 변변한 제철 기술이 없었던 왜국이 철기무기 획득을 위해 가야국과 외교·통상을 중시했다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럼 이렇게 정리가 될 수 있다.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위해 제철 무기의 획득을 국정 목표로 삼았던 당시의 왜는 가야지역에 사신들을 파견, 주재시킨다. 그런 사신들의 수도 늘어나고 주재하는 기간도 늘어나니, 그들만의 자치규약이 필요했고 나름대로 교통정리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자리 잡은 것이 임나일본부가 된 것이다. 즉 임나일본부는 가야 지역 백성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권력기관이 아닌 그저 무역대표부였을 뿐이다. 무역대표부 혹은 외교공관이 들어섰다고 그 곳을 지배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게 따지면 미국 워싱턴에 주미대사관이 있는데 우리가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거야? 정말 그런 거야?"

 


 
▲ 역사저널 그날 KBS의 <역사저널 그날>에서 방송한 '일본,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임나일본부'편. 가야사 전공자인 인제대학교 이영식 교수가 패널로 나와 임나일본부의 허구성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시청을 하시는 것도 좋을 듯싶다. 2015년 4월 19일 방송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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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가 빠진 자리를 치고 들어온 임나일본부설


4세기에 쓰인 일본부(日本府)라는 명칭도 역사적인 객관성이 떨어지는 대목이다. 일본(日本)이라는 국호가 7세기 이후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객관성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가지 더 첨언해본다. 앞서 신공왕후가 몸소 선봉장이 되어 한반도를 침공했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그때 신공왕후는 만삭의 몸이었다. 뱃멀미는 그렇다 치고 말을 타기도 어려웠을 텐데... 혹시 신공왕후는 슈퍼우먼이 아니었을까?

가야사가 빠진 삼국사는 임나일본부설이 똬리를 틀기에 좋은 토양을 제공한다. 실제로 가야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이 됐다면 지금과 같은 논란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로 현재의 임나일본부설 논란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반성을 촉구하기도 한다. 활발한 연구로 가야사에 '빗장'을 걸어 두었다면 일본의 역사가들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하나의 '설'이 외교적 현안으로까지 부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임나일본부설은 과거의 문제가 아닌 현재적인 문제라고 판단한다. 일제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시키는 데 동원된 임나일본부설이 이제는 집단자위권 문제에 동원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행사할 때 그 대상영역이 어디가 될 것 같은가? 한반도다.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필자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일본의 우익화를 염려한다면 뜨거운 가슴과 함께 차가운 머리도 필요하다. 차근차근 반박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글을 마치며 하는데 뒤가 자꾸 켕긴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대해서 뭐라고 그럴 수 있겠어? 친일매국을 한 사람을 이달의 스승으로 지정하고 아이들에게 널리 알린 게 누군데!'

 

 

* 역사저널 그날: 소품으로 광개토대왕릉비 탁본이 등장했다. 이 탁본은 실물을 1/2 크기로 줄였다고 한다. 이걸 감안하더라도 광개토대왕릉비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동네 뒷산에서도 매너는 필요합니다

 

- 표식으로 보는 산책 매너

 

 

 

 

평소 동네 뒷산을 자주 산책하는 김인선(가명)씨는 최근 무척 불쾌한 경험을 했다. 지정된 산책로를 걷다 개의 배설물을 밟은 것이다. 당시 산책로에는 목줄이 풀려 있는 애완견 하나가 배회하고 있었고, 인선씨는 그 주인을 찾아 자신이 당한 상황을 설명했다고 한다. 하지만 개주인에게 오히려 핀잔을 들었다.

 

 

 

“살다보면 개똥을 밟을 수도 있죠. 제가 화가 나는 건 그 견주 분이 적반하장격으로 나왔다는 거예요. 왜 저한테 부주의했냐고 하더군요. 저한테 잘 좀 피해 다니라고 핀잔을 주면서요.”

 

‘동네 뒷산’이라고 불렸던 도시 근교산 들이 최근 산책로 정비, 안전시설 확충 등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인선씨처럼 산책을 즐기는 사람, 운동기구를 이용하여 몸매 관리에 나서는 사람 등 도시 근교 산들을 이용하는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이용하는 공간인 만큼 서로가 한 발짝씩 양보하는 미덕이 필요하다. 즉, 아웃도어 매너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안내판에 있는 표식과 현수막을 이용하여 기사를 작성해봤다.

 

 

 

 

꽃은 눈으로만 보세요!

 

 

식물 채집 금지 표식

 

 

 

야생화에는 꽃집에서 파는 꽃들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야생성’이 그 아름다움에 배어 있는 것이다. 한겨울 엄동설한을 견뎌냈다가 봄이 되면 노랗고, 붉은 ‘비주얼’을 선사하는 봄꽃들은 말 그대로 계절의 전령사 역할을 한다.

 

하지만 봄은 꽃들이 수난을 겪는 시기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꽃을 꺾어 그 ‘야생’적인 아름다움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꽃을 꺾어 머리에 꽂아 보기도 하고, 꽃반지를 만들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그런 장면들을 자신의 SNS에 올리기까지 한다.

 

그러지 말자. 야생화는 야생화다. 꽃은 꺾지 말고 눈으로만 보자. 한편 꽃은 나비와 벌의 도움으로 수분을 한다. 즉 꽃이 꺾이면 나비와 벌의 활동들도 위축받게 된다는 뜻이다.

 

 

 

음악은 이어폰으로 들으세요!

 

도시 근교 산들은 말 그대로 근교에 있다 보니, 중심부에 진입을 해도 도시에서 발생하는 소음들이 가깝게 들려온다. 자동차 소리, 오토바이 소리, 심지어 멀리 아파트 공사장의 기계음까지 들린다. 하지만 그런 소음들보다 때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가 더 듣기 싫다는 사람들도 많다.

 

 

 

음악 소음 줄이기

 

 

 

일부 사람들은 등산이 무료하다는 이유로 ‘뽕짝’을 크게 틀어 놓고 산책을 한다. 만약 이런 사람들과 동선이 겹치기라도 하면 장시간 동안 원치않는 ‘뽕짝’을 감상(?)하며 산을 걷게 될 수도 있다.

 

산에서는 자연의 소리에 집중하자. 그래도 음악을 듣고 싶다면 이어폰으로 듣거나 스피커 볼륨을 최대한 낮춰서 듣자.

 

 

 

 

애완동물의 배설물은 즉각 수거해야!

 

애완동물 배설물 처리 표식

 

 

도시공원에서 애완동물을 동반할 때는 반드시 목줄을 해야 한다. 더불어 배설물도 즉각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만약 처리하지 않으면 과태료가 부과될 수 있다. 대변의 경우는 7만원이고, 소변의 경우는 벤치 같은 곳의 경우엔 동일한 과태료도 부과될 수 있다. 해당 조례에 따른다면, 인선씨를 곤욕스럽게 했던 그 견주는 과태료 처분을 당할 수도 있었다는 뜻이 된다.

 

 

 

 

쓰레기 좀 버리지 맙시다!

 

쓰레기 무단 투기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유명 국립공원, 동네 뒷산의 구분도 없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쓰레기 때문에 산들이 늘 몸살이다. 일단 도시 공원에 입산을 할 때는 가져간 쓰레기는 본인이 되가져오는 게 기본이다. 산을 사랑하는 등산 전문가들은 입산할 때 아예 쓰레기 봉지를 두 개씩 지참한다고 한다. 하나는 자신의 것이고, 또 하나는 등산로 옆에 떨어져 있는 줍기 위해 가져가는 것이다.

 

산책로에 진입할 때, 쓰레기가 발생할 물건들을 아예 가지고 가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예를 들어 이중 포장으로 되어 있는 초코바 같은 경우, 외부 포장을 미리 제거한 후 입산을 하는 방식이다. 그럼 내부 포장만 남게 되니 처리하기에 용이하다.

 

 

 

그밖에, 자동차, 오토바이 입장 금지 표식

 

 

이제까지 안내판과 현수막을 이용하여 도시 근교 산에서 주의할 점들을 살펴봤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결코 어렵지 않은 행동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최소한의 매너만 지켜주면 누구나 다 즐겁게 근교 산을 산책할 수 있다는 뜻이다.

 

 

 

* 쓰레기 투기 금지 표식

 

 

* 음주, 고성방가 금지 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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