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선정 절벽소나무

 

 

 

 

 

 

* 요선암 돌개구멍

 

 

 

 

 

 

강원도 영월군 탐방은 계속이어졌다. 영월군 주천면의 허름한 모텔에서 1박을 한 후 다시 무릉도원면으로 이동했다. 주천면은 서부 영월의 중심지로 충북 제천시까지 들어가는 시내버스도 있다.

 

이번 탐방은 무릉도원면에 있는 요선정, 무릉리마애여래좌상, 돌개구멍계곡 일대에서 이루어졌다. 요선정이 자리잡고 있는 주천강 일대는 명소들이 많은 곳이다. 유명한 한반도지형과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가 바로 그것이다. 주천강은 평창강 혹은 서강이라고도 불리는데 영월읍에서 동강과 합수되어 남한강으로 흐른다. 강원도 남쪽 골짜기 곳곳에서 흘러내린 물줄기들이 동강과 서강으로 모여들었고, 이후 영월읍에서 동강과 서강이 합수되어 남한강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동강은 래프팅으로 유명한 그 동강을 말한다.

 

그렇게 주천강이 유유히 흐르는 곳에 요선정(邀仙亭)이 있으니 그뜻 그대로 신선이 노닐던 정자라고 할만하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1호로 지정되어 있는 요선정은 요선암이라고도 불린다. 요선정에 올라서면 절벽 위에 반쯤 누워있는 소나무를 볼 수 있다. 그 절벽 소나무 뒤로 펼쳐진 주천강의 모습은 절경중에 절경이라고 할만 하다. 아찔한 절벽 위에 걸쳐있는 소나무, 그리고 큰 계곡같은 강이 어우러지니 감탄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감탄사를 내뱉은 이 중에 양사언이라는 조선 중기 시대를 살아간 이도 있었다. 문인이자 서예가인 양사언은 조선 전기 4대 명필에 속할 정도로 글씨를 잘 썼다. 특히 초서를 잘 썼다고 한다. 그런 양사언이 평창군수 시절 이곳을 방문하여 요선암(邀僊岩)이라는 글씨를 요선정 아래 바위에 썼다. 그 글씨가 요선정의 유래가 된 것이다.

 

 

 

 

 

 

* 요선정과 석탑

 

 

 

 

 

 

 

양사언은 관직생활을 약 40년 정도 했는데 특이하게도 외관직, 즉 지방관을 주로 맡은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평창군수, 철원군수,함흥부윤 등등... 일설에 의하면 풍류를 좋아하여 일부러 외관직을 자처했다고 한다. 그런 풍류객의 면모는 금강산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됐다. 회양군수 시절에 금강산을 자주 방문했던 양사언은 만폭동에 봉래풍악원화동천(逢萊楓岳元化洞天)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그 여덟글자는 지금도 남아있다.

 

참고로 조선 전기 4대 명필은 안평대군, 김구, 한호, 양사언이다. 한호는 그 유명한 한석봉이다. 양사언 선생이 어떤 위치에 있는 분인지 가늠이 되실 것이다. 그나저나 양사언 선생 글씨보러 금강산에 가고 싶다...ㅋ

 

요선정은 1913년에 건립됐으니 수백년의 세월을 버틴 정자는 아니다. 하지만 숙종, 영조, 정조 세 분의 각기 다른 임금께서 쓴 어제어필시문(御製御筆詩文)이 있는 뜻깊은 곳이다. 숙종은 유배지인 영월에서 죽음을 맞이한 단종을 복위시켰다. 이후 단종의 유배지에서의 행적을 살펴보다 시 하나를 지어 강원 감사에게 보냈는데 이 시가 주천현의 누각인 청허루에 현판으로 걸리게 된다.

 

안타깝게도 청허루는 불타게 된다. 이후 영조가 숙종의 어제시를 다시 쓰고, 거기에 더해 자신도 시를 써서 복원된 청허루에 걸게 했다. 또 이후 정조께서 두 선대왕의 어제시를 잘 간직하고자 하는 의미로 시를 써서 내려보내니 주천현 청허루에는 무려 세 분 임금의 어제시가 걸려있게 된 것이다.

 

그럼 왜 청허루에 있어야 할 어제시 세 편이 요선정에 있을까? 시간이 흘러 누각은 무너져 내렸고 어제시 세 편을 담아낼 새로운 둥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13년, 현 위치에 요선정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 무릉리마애여래좌상

 

 

 

 

 

 

 

* 무릉리마애여래좌상

 

 

 

 

 

사실 요선정 일대는 작은 암자가 있던 곳이다. 인근 무릉도원면 사자산에는 적멸보궁인 법흥사가 있다. 법흥사는 후기 신라시대에 선종 9산 선문 중에 하나인 사자산문의 근본도량이다. 사자산문을 열고 계승한 이는 철감국사 도윤과 징효대사 절중인데 그들이 요선정 일대를 자주 방문을 했다는 것이다. 법흥사의 부속 암자가 지금의 요선정 자리에 있었다는 뜻이다.

 

마애불 앞에 놓인 허름한 삼층석탑이 이곳에 암자가 있었다는 흔적을 대변해주고 있는 듯하다. 이제 시선을 돌려 무릉리마애여래좌상을 살펴보자. 사실 이 곳에는 요선정, 삼층석탑, 마애불이 오밀조밀하게 자리잡고 있다. 한 눈에 그 3개의 문화재가 다 들어올 정도로 촘촘히 들어서있다.

 

강원도에는 큰 사찰은 많지만 마애불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철원군 동송읍 금학산에 위치한 마애불과 무릉리마애불(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4호)이 문화재로 등록됐을 뿐이다. 그런 의미로 무릉리마애불은 사료적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는 얼핏보면 오리배처럼 보인다. 그런 바위 한쪽면에 약 3.5미터 크기로 석각을 해놓았다. 사람을 처음 볼 때 얼굴을 보듯 마애불도 얼굴을 비롯한 상체부터 보기 마련이다. 그런면에서 탐방객들은 시원시원한 마애불의 용안을 보게 된다. 무릉리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고부조高浮彫)로 조각되어 있는데 특히 얼굴 부분이 아주 도톰하게 묘사되어 있다. 눈,코,입이 아주 큼직큼직하다. 달덩이처럼 둥글게 표현된 얼굴 모습이 참으로 복스럽다.

 

하지만 무릉리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비례감이 떨어진다. 하체는 결가부좌를 했는데 상체보다 더 크게 묘사되어 있다. 바위 크기에 맞춰 석각을 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원래 하체를 크게 묘사하려는 의도로 그랬던 것인가? 어쨌든 복스럽게 그려진 얼굴을 보다 오버하듯 새겨진 하체를 보면 피식 웃음이 나오기까지 했다.

손은 아담하게 잘 묘사됐지만 발바닥은 곰발바닥처럼 아주 커다랗게 조각을 해놓은 것이다.

 

무릉리마애여래좌상은 독립된 통바위에 그려져 있어 그 전체적인 형상이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강한 인상까지 풍긴다. 하지만 전체적인 비례미를 고려하지 않아 균형감이 떨어진다. 그래서 개성미를 강조했던 고려 전기시대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 돌개구멍: 앗 사람이 빠져있나? 자연이 만들어놓은 신비한 형상이다.

 

 

 

 

 

 

요선정과 마애불 탐방을 마쳤으니 이제 돌개구멍을 보러 가자. 강가로 내려가면 되니 엎어지면 코닿을 곳이다. 돌개구멍이 있는 바위들을 보면 그 형태 하나하나가 다 특이하게 보인다. 큰 강이나 계곡에 있는 보통의 너럭바위들하고는 큰 차이가 난다. 너럭바위가 잔잔한 물길처럼 평평하게 다듬어졌다면 돌개구멍을 품은 바위들은 각양각색의 모습이다. 마치 전위 예술을 하고 있는 거 같다.

 

바위가 예술은 한다고?ㅋ

 

천연기념물 제543호로 지정되어 있는 요선암 돌개구멍은 포트홀(pot hole) 혹은 구혈(甌穴)이라고도 불린다. 그럼 왜 이런 형태가 도출됐을까? 하천에 있는 큰 바위에 작은 구멍이 생긴다. 그 구멍으로 작은 자갈이 담기는데 그 자갈이 깎기 역할을 한다. 자갈이 뱅글뱅글 돌면서 작은 구멍을 계속해서 깎아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깎인 돌은 평평한 작은 항아리 모양을 띄고 있다. 그래서 커피포트처럼 생겼다고 포트홀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런 돌개구멍은 쥐라기 시대에 생성된 지각작용 때문이라고 한다. 그 옛날 공룡이 뛰어놀고 다녔던 시기의 지각 작용이 지금까지 이어져 현대인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어디 찾아보면 공룡 발자국이 있을지 모른다. ㅋ

 

답사를 다닐 때 항상 다른 관광객들의 말에 목소리를 귀기울이는 편이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말이다.

 

"거대하지는 않은데... 우리나라는 참 아기자기해요."

"그게 바로 우리나라의 멋이잖아요."

 

필자의 생각하고 너무 똑같아서 이렇게 소리를 지를뻔 했다.

 

"맞아요. 제 생각이랑 똑같아요!"

 

 

 

 

 

* 돌개구멍

 

 

 

 

 

* 2021년 8월 11일에 탐방했음.

 

 

 

 

 

 

 

 

* 법흥사: 소나무숲

 

 

 

 

 

* 적멸보궁: 부도탑과 자장굴

 

 

 

 

 

 

2021년 8월 10일

 

충북 제천시 장락사지를 둘러본 후 강원도 영월군으로 넘어왔다. 영월은 예전에 참 많이 탐방을 했던 곳이다. 트레킹 코스를 기획한다고 여기저기 발길을 참 많이도 내디뎠었다. 2013년도에 행한 중부내륙 자전거여행 때는 아예 영월의 주요 포인트를 가로질러 갔었다. 당시 온라인 신문에 자전거여행기를 기고를 했는데 영월편의 제목이 이랬다.

 

- 트레킹으로 왔던 곳, 자전거로 다시왔네!

 

그동안 바빴었나? 약 7년 만에 다시왔다. 무엇하느라 그리 바빴는지... 탐방지는 무릉도원면 사자산에 있는 적멸보궁 법흥사(法興寺)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말한다.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는 당나라에서 귀국하면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가지고 들어왔는데 이때가 선덕여왕 12년(643)이었다. 자장율사는 진신사리를 평창 오대산 상원사, 정선 태백산 정암사, 양산 영축산 통도사, 인제 설악산 봉정암, 영월 사자산 법흥사에 봉안한다. 이를 두고 5대 적멸보궁이라고 부른다.

 

유명해서 그런가? 사람들은 적멸보궁하면 5대 적멸보궁부터 떠올린다. 하지만 이외에도 적멸보궁은 더 있다. 대표적인 곳이 김제에 있는 금산사다. 자장율사 이후로도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계속 국내로 유입됐다는 말이다. 근래에도 유입되고 있다. 사찰들이 너도나도 적멸보궁을 내세우다보니, 도대체 석가모니의 사리는 얼마나되냐는 의문섞인 물음들도 함께 따라온다.

 

어쨌든 자장율사가 세운 5대 적멸보궁은 우리 불교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귀한 곳들이다. 한편 자장율사는 경주 황룡사9층목탑 건립을 주도하는 등 신라 불교 진흥에 큰 공헌을 하기도 했다.

 

자장율사가 처음 창건했을 때의 이름은 흥녕사였다. 이후 징효대사 절중이 이곳을 9산 선문 중에 하나인 사자산문의 근본도량으로 삼게 된다. 불교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신라 말기에 유행했던 구산선문에 대해서 한번쯤 들어보셨을 것이다. 구산선문은 경전 위주의 교종과는 달리 수행에 중심을 둔 선종의 9개 선문을 말한다. 한마디로 신라 말기에 9개의 선종 문파가 산을 중심으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사자산문은 사자산에 있다하여 그렇게 불린 것이다.

 

이후 흥녕사는 큰 화재를 당해 약 천 년동안 명백만 이어져왔다. 그러다 1902년에 비구니인 대원각 스님이 중건을 했고 이때 사찰 이름을 법흥사로 개칭하기에 이른다. 그러고보면 법흥사로 불린 기간은 100년 정도인 셈이다.

 

일주문을 지나 주차장에 들어서면 2층 누각으로 된 종루가 보인다. 그 옆쪽으로 안내문을 따라가면 적멸보궁이다. 키가 큰 전나무가 양 옆으로 펼쳐진 전나무 숲길을 따라가서 그런지 기분이 상쾌하다. 그렇게 전나무숲길을 따라 약 500미터 정도 오르면 적멸보궁에 도착한다.

 

법흥사 적멸보궁의 첫 인상은 소박함이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인 적멸보궁은 분명 화려한 건물은 아니었다. 큰 사찰의 전각들보다도 더 아담한 사이즈였다. 하지만 주위의 풍광과 어루러져서 그런지 허전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적멸보궁이 가지지 못한 화려함을 주위의 산 속 풍광이 채워주고 있다고나 할까?

 

 

 

 

 

* 법흥사

 

 

 

 

 

 

* 적멸보궁

 

 

 

 

 

 

 

적멸보궁 실내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는다. 대신 창문을 만들어 건물 뒤편 언덕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었다. 그 언덕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부도탑이 있기에 불상을 봉안하지 않는 것이다. 그 부도탑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3호인 영월 법흥사 부도이다. 이외에도 언덕에는 토굴도 있다. 자장율사가 수도를 했다고 전해지는 토굴이라 자장굴이라는 명칭도 있다. 지금은 앞쪽에 석축을 올려 사실상 입구가 막혔지만 그 안쪽은 성인 한 명이 가부좌를 틀고 수도하기에 넉넉한 공간이라고 한다.

 

적멸보궁 탐방을 마치고 다시 숲길을 내려가다 이런 생각이들었다.

 

'부처님 사리가 든 탑이면 국보가 되야 하지 않나? 적어도 보물이라도 되야 하잖아? 그런데 도지정 문화재라니... 무언가 좀 안 맞네...'

 

사실 그 부도탑은 어떤 스님의 사리탑이라고 한다. 어느 이름모를 스님의 부도탑이 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부도탑으로 알려졌는지 그 시기와 이유는 알려져있지 않다. 사람들은 속은 건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는 관련이 없는 부도탑을 바라보면서 괜히 합장을 하는 것인가?

 

이와 관련해서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영원토록 보전하기 위해 사자산 어딘가에 숨겨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말에 의거하면 사자산은 산 자체가 커다란 부도탑이 되는 것이다.

 

숲길을 내려와서 법흥사의 중심영역을 둘러봤다. 적멸보궁처럼 법흥사 경내도 크지 않다. 하지만 주위 산이 잘 감싼 모습을 하고 있어 보기가 좋았다. 그런데 경내 곳곳이 공사중이라 좀 어수선하기도 했다. 포크레인을 피해서 사진을 찍으려고 꽤나 애를 먹었다.

 

징효대사 절중의 탑비와 부도비까지 둘러본 후 건너편 소나무숲에 가서 법흥사를 전체적으로 다시 둘러봤다. 그렇게 사자산과 사찰 일대를 바라보니, 자장율사가 왜 이곳에 진신사리를 숨겨놓았는지 알 수 있을 거 같다. 그렇게 법흥사는 밀림의 왕으로 불리는 사자처럼 듬직한 사자산이 품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참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찾으러 다시 사자산에 가볼까?^^

 

글을 마치기 전에 법흥사가 있는 무릉도원면에 대해서 잠깐 언급해본다. 무릉도원면의 원래 명칭은 수주면이었다. 주민투표에 의해 2016년 11월 15일부터 무릉도원면으로 개칭을 했다. 2009년 영월군에 있는 서면이 한반도면으로 이름을 바꾼 후 관광객이 늘어난 전례를 따른 듯싶다. 비교적 근래에 변경되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를 비롯한 몇몇 자료들은 '수주면'으로 기재를 하고 있다.

 

 

 

 

 

 

* 부도탑

 

 

 

 

* 징효대사탑비: 보물 제612호

 

 

 

 

 

 

* 법흥사

 

 

 

 

 

 

 

 

 

*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2021년 8월 10일.

 

충북 제천시에 있는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을 탐방했다. 보물 제459호로 지정되어 있는 장락동 모전석탑은 그 높이가 무려 9.1미터에 달한다. 석탑이 서 있는 곳은 과거 창락사라는 사찰이 있었는데 지금은 논밭으로 변했다. 탑 인근에서는 발굴작업을 행한 흔적을 보존하고 있었다. 주위가 평평하다보니 키가 큰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은 멀리서도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그 석탑처럼 내 키고 컸으면...ㅋ

 

보물 제459호로 지정되어 있는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은 점판암(粘板岩)을 다듬어 벽돌처럼 쌓아올렸다. 모전석탑(模塼石塔)이란 전탑을 모방해서 만든 탑을 뜻이다. 전탑은 벽돌을 구워만든 탑이다. 즉 자연석을 써서 만들었지만 벽돌탑 모양 비스무리하게 외형을 뽑은 탑을 말하는 것이다. 이 모전석탑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이한 탑 양식으로 후기 신라시대부터 고려 전기까지 만들어졌다.

 

 

 

 

 

*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벽돌모양을 흉내낸다고 했지만 아무 돌이나 가져다 쓸 수는 없었다. 높이 쌓아올릴 수 있는 평평한 형태의 암석이 필요했다. 그래서 점판암이 쓰인 것이다. 점판암은 넙쩍하게 쪼개지는 성질이 있는데 영어로는 slate라고 불린다. 평평하게 쪼개지니 기와처럼 지붕에 올리기도 했다. 평평하니 고기를 굽기에도 제격이었다...ㅋ

점판암으로 만든 문화재를 가까이서 보고 싶으면 김제 금산사에서 육각다층석탑을 친견하시라! 육각다층석탑은 보물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은 1층에 점판암이 아닌 화강암으로 4개의 기둥을 세웠다. 그중 남쪽과 북쪽에 돌문을 달아서 감실을 만들었다. 무거운 돌문을 열고 들어가면 성스러운 공간이 나올 것이다. 현재 남쪽문은 사라지고 북쪽문만 남아있다.

 

탑 주변에서는 발굴작업을 하고 난 후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이 주변의 평평한 논밭 일대가 다 예전 창락사의 경내라고 한다. 사찰이 꽤 컸을 거 같다.

 

탑 너머로 키 큰 아파트들이 들어선다. 이미 입주를 마친 아파트도 있고, 한참 건설중인 아파트도 있다.

예전같았으면 9미터짜리 칠층모전석탑이 이 동네에서 단연 1등이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석탑을 보며 방향을 잡았다면 이제는 아파트를 보며 길을 잡을까?

 

강원도 영월군 법흥사로 길을 잡았다. 카카오 지도를 보며 길을 잡았다...ㅋ

 

 

 

 

 

 

*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 장락동 칠층모전석탑

 

 

 

 

 

 
 

 

 

 

 

 

 

 

* 수승대

 

 

 

 

 

우두산 y자형 출렁다리, 창포원 등등... 근래에 들어 경남 거창에는 주목받는 관광자원들이 많이 생겼다. 하지만 역시 거창하면 수승대다. 계곡을 따라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고 거대한 거북바위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곳이 바로 수승대다. 워낙 빼어난 풍광을 자랑해서 그런지 수승대에서는 여름에 국제연극제까지 펼쳐진다. 시원한 계곡이 흐르는 그곳, 명승 제53호로 지정되어 있는 거창 수승대 일대를 탐방해보자.

 

 

● 안의삼동이라고 불렸던 수승대 계곡

 

수승대는 널찍한 바위와 그 옆을 흐르는 맑은 물, 푸른 숲이 어우러져 일품 풍광을 자랑한다. 그 물의 발원지는 덕유산이다. 원학동(猿鶴洞)계곡이라고도 불리는 수승대는 거창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한 곳이다. 거창을 방문하는 이들이라면 한 번쯤은 꼭 들러야 하는 곳이 바로 수승대라는 것이다.

 

원학동 계곡은 함양의 화림동(花林洞) 계곡, 용추계곡이라는 명칭으로 더 유명한 심진동(尋眞洞) 계곡과 더불어 안의삼동(安義三洞)이라고 불렸다. 원학동, 화림동, 심진동이 안의 지방의 3대 계곡이라는 뜻이다. 안의는 현재 행정구역상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으로, 면 단위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안의현이라 불리며 함양, 거창과 함께 그 어깨를 나란히 했다다. 이후 행정구역이 개편됐고, 그래서 현재 수승대는 거창군 소속이 됐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류를 논할 때, 흔히 '좌 안동, 우 함양'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여기서 '우 함양'을 '우 안의'로 바꿔도 될 만큼 안의 지역은 풍부한 선비문화를 창달했던 곳이다. 수승대가 안의삼동이었던 만큼 수승대도 선비 문화와 궤를 같이 했다는 건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인지 그 명칭을 둘러싼 이야기부터 아주 선비적이었다.

 

 

 

 

 

* 관수루: 구연서원의 정문

 

 

 

 

 

 

 

 

● 수승대의 옛 이름 '수송대'

 

수승대의 옛날 명칭은 수송대(愁送臺)였다. 한자를 풀어보면 근심 수(愁), 보낼 송(送), 돈대 대(臺)다. 한자에서도 보이듯 수송대라는 명칭은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다. 보낼 송(送)자에서 보듯 '근심을 떨쳐낸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원학동 계곡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였다. 백제는 나날이 쇠락해졌고, 반대로 신라는 점점 더 강성해질 무렵이었다. 백제 사신들은 신라 조정에 가서 수모를 당했다. 심지어는 목숨을 잃고 영영 본국으로 돌아오지 못하

기도 했다.

 

이렇듯 먼 길을 떠나는 이들에게 술 한 잔 건네며 위로를 해 주었던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마침 국경과 가까운 곳에 풍광이 수려한 곳이 있으니, 그 곳에서 위로주를 건냈을 것이다. 그곳이 바로 거북바위로 유명한 수송대라는 거다.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하지만 확실한 건, 이 일대에서 백제와 신라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오갔다는 사실이다. 원학동에서 동쪽으로 약 8㎞ 떨어진 곳에 거열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 산 정상부근에는 거열성이라는 산성이 있다. 삼국시대 말기, 거열성은 신라군에 의해 함락되기도 했고, 이후에는 백제 부흥 운동이 3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던 곳이기도 했다. 그만큼 이 일대는 백제와 신라의 격전장이었다. 그렇게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하지만 거북바위는 그 이후로도 약 천 년 동안 수송대라고 불리게 됐다.

 

 

 

 

 

 

* 요수정: 거북바위 건너편에 있다.

 

 

 

 

 

 

 

● 풍류객(?) 이황이 지어준 '수승대'라는 이름

 

거북바위가 수승대(搜勝臺)라는 현재의 명칭을 얻게 된 건 퇴계 이황이 지은 시 한 수 때문이었다. 그 시를 수취한 이는 요수(樂水) 신권(愼權)이라는 분이었다. 신권 선생은 일찍부터 벼슬길을 마다하고 원학동 일대에서 후학들을 양성했다. 거북바위 옆쪽에 구연재(龜淵齋)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는데 이를 두고 구연서당이라고 불렀다.

 

관수루라는 멋진 문루를 두고 있는 구연서원은 이후 구연서당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계곡의 반대편에는 요수정이라는 정자도 지었는데 요수정에 오르면 거북바위의 또다른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그렇게 자연과 학문을 벗 삼고 있던 신권 선생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다. 안의지역을 유람하던 퇴계 이황 선생이 원학동을 방문하겠다는 전갈이 당도한 것이다. 신권 선생은 요수정에서 한 상 차려 놓고 반가운 이의 발걸음을 기다렸다고 한다.

 

하지만 오라는 퇴계 선생은 오지 않고, 편지 한 통이 전해지게 된다. 왕의 부름 때문에 급하게 한양으로 떠나야 했던 퇴계 선생이 보낸 서찰이었다. 그 서찰에는 원학동을 방문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담은 시 한 수가 적혀 있었다.

 

그 시에서 퇴계 선생은 어감이 좋지 않은 '수송대'를 '수승대(搜勝臺)'로 고치라고 권유한다. 한자를 거칠게 풀어보면, '찾아다녔던 뛰어난 곳' 정도로 쓰일 수 있겠네요. 발음도 비슷하니 못 바꿀 이유도 없었겠지요. 그렇게 하여 거북바위는 퇴계 선생 덕분에 천 년 동안 간직해오던 부정적인 이름을 떨쳐낼 수 있었던 것이다. 풍류를 즐기기에 딱 좋은 장소에 어울리는 '풍류 스토리텔링'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이야기를 입증이라도 하듯 거북바위에는 퇴계 선생의 시문이 새겨져 있다. 이외에도 거북바위에는 수많은 풍류객들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갔다. 그런 글씨들이 멋있어보여서 그랬는지 필자도 한 번 붓을 놀리고 싶었다. 하지만 문화재를 훼손하면 감방에 갈 수도 있다.

 

 

 

 

 

* 용암정: 숲길을 따라 수승대에서 약 1km 정도 이동을 하면 만날 수 있다.

 

 

 

 

 

 

근래에 들어 수승대의 명칭 변경 논란이 있었다. 2019년에 서울 성북동에 있는 성락원(명승 제35호)이 역사성 논란에 휩싸였는데 엉뚱하게 그 불똥이 수승대로 튄 것이다. 성락원 논란으로 인해 전국의 명승과 별서정원의 역사성을 전수조사를 했다고 한다. 그와 관련하여 관계자들이 삼국시대의 명칭인 수송대로 바꾸자는 의견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승대는 수승대였다. 굳이 수송대라는 옛 이름으로 돌릴 이유가 없었다. 거창 군민들은 반발을 했고 적극적으로 의견 제시를 했다고 한다. 결국 2021년 11월 10일, 문화재청은 현재의 수승대 명칭을 유지한다고 밝혔다.

 

수승대 일대는 보물로 지정된 농산리석조여래입상, 용암정, 모산재 등등... 다양한 문화재들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수승대를 감싸고 있는 성령산은 소나무숲길이 인상적인 곳이다. 계곡도 좋고, 문화재도 만날 수 있고, 숲길도 좋은 곳... 당장 가보자!

 

 

ps. 본 포스팅은 경상남도에서 주관하는 거창한달살기 프로그램을 행한 결과물입니다.

 

 

 

 

 

* 농산리석조여래입상: 보물 1436호로 지정되어 있는 농산리석불. 수승대에서 약 2km 정도 떨어져있다.

 

 

 

  

* 소나무숲길: 계곡을 끼고 걷는 길이다. 숲길이 짧다는게 단점이었다.

 

 

 

 

 

* 수승대

 

 

 

 

 

 

* 참고

 

1. 서울에서 거창까지는 고속버스로 약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됨. 남부터미널이나 동서울터미널에서 거창행 버스를 탈 수 있음.

2. 거창읍내에서 수승대가 있는 위천면까지 군내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음.

3. 거창읍내-위천면 시골버스 이동시간은 약 15분 정도임. 배차간격은 약 30분 정도임.

 

 

 

 

 

 

 

 

 
 

 

 

 

 

 

 

 

* 수타사 대적광전

 

 

 

 

 

2021년 7월 3일 토요일

 

설악산을 떠나 홍천에 도착했다. 같은 강원도라도 설악산, 태백산이 있는 영동지방과 경기도와 가까운 영서지방과는 확실히 차이가 난다. 영동지방이 우뚝 솟아있는 산봉우리 이미지라면 영서지방은 그보다는 부드러운 강물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아무래도 영서지방을 적시고 있는 북한강과 남한강 때문에 그런 이미지가 연상될터!

 

이날은 홍천의 명산인 공작산을 탐방했다. 정상을 간 것은 아니고... 그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수타사를 탐방한 것이다. 그리고 수타사 옆쪽에 조성되어 있는 공작산 산소길을 걸었다. 필자도 나이가 점점 먹어가니 산 정상을 가는 것보다 그 아래에서 노니는 것이 더 좋아진다. 그렇게 노닐다 사찰을 탐방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수타사! 이름부터 군침이 돌지 않는가? 가뜩이나 필자는 짜장면을 좋아하는데... 특히 간짜장!

 

수타사(壽陀寺)는 목숨수(壽), 비탈질타(陀)에서 보듯 면발이 예술인 수타짜장하고는 관계가 없는 곳이다. 수타사(壽陀寺)는 셀 수 없는 정토세계의 무한한 수명을 뜻한다. 그런데 해당 명칭을 얻게 된 건 1811년(순조 11) 때이다. 홍천 공작산 수타사라하면 알 사람은 아는 유명한 사찰인데 그에 비해 명칭은 너무 늦게 자리잡은 것이다.

 

수타사는 공작산(887.4m)에 있다. 공작산! 이름부터 무언가 있어보이지 않는가? 공작산 일대는 공작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일명 공작포란형 지형이다. 화려하고 큰 날개를 가진 공작이 알을 품고 있다니! 명당이 따로 없구나! 더군다나 그 사이로 비경을 품고 있는 수타계곡이 흐르고 있으니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천하 제일의 명당이라고 할 만 하다.

 

공작포란형 지형에서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동작동 국립묘지다. 서울 서달산 아래에 자리잡은 국립묘지는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북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 아시겠지만 집을 짓는 양택이든 묘지를 쓰는 음택이든 남향을 선호하지 북향을 따르지는 않는다. 그럼 흉지에 국립묘지를 썼다는 것인가? 아니다. 아무리 북향이라도 서달산이 가지고 있는 공작포란형 지형 때문에 국립묘지는 명당이 된 것이다. 지형 자체가 가진 기운이 북향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다.

 

공작새의 화려한 날개짓처럼 웅장함을 드러내는 공작산은 영서지방의 명산으로 불린다. 그런 명산에 천년고찰인 수타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 일월사지 삼층석탑

 

 

 

 

 

 

* 흥회루

 

 

 

 

 

 

 

수타사는 후기 신라시대인 708년(성덕왕7)에 창건됐다. 원효대사가 창건주라고 전해지지만 원효께서는 이미 686년에 열반에 드셨으니 창건과 관련된 정황들은 좀 더 면밀하게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처음에는 일월사(日月寺)였다. 또한 위치도 현재보다 좀 더 위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사실 공작산도 처음에는 우적산이라고 불렸다. 그러다 조선 중기인 1568년(선조2)에 현 위치로 이건을 하게 된다. 이때 일월사에서 수타사(水墮寺)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우적산도 이름이 바뀌어 공작산이 된다. 지금은 옛 일월사 터에는 삼층석탑만이 그 공간을 지키고 있다. 삼층석탑은 현재 2층과 3층 탑신부가 없는 상태다. 꼭대기 부분인 상륜부도 없다. 훼손이 많이 됐는데 온전한 형태였으면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 거 같다.

 

수타사 일대에 흐르고 있는 덕지천을 건너 사천왕문을 향한다. 그전에 앞쪽에 펼쳐진 연꽃밭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수타사 산소길로 이어지는 길인데 자꾸 몸이 그리고 향한다. 길이 얼마나 예뻤으면! 빨리 수타사 탐방하고 산소길을 걸어야겠다.

 

수타사의 사천왕문은 봉황문이라고 불린다. 그 봉황문을 지나면 흥회루가 나온다. 사찰의 중심 영역으로 들어갈 때는 2층으로 된 누각 아래로 난 문을 통해 입장한다. 그런 누각을 통상 보제루라고 하는데 수타사에서는 흥회루(興懷樓)라고 부른다. 봉황문도 그렇고, 흥회루도 그렇고... 수타사는 독특한 면이 있다.

 

흥회루를 자세히 살펴보면 더 독특하다. 통상적으로 보제루는 2층으로 되어있는데 흥회루는 단층이다. 그래서 아래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누각을 옆으로 둘러가야 한다. 이것도 좀 독특한 방식이다. 정5칸 측3칸으로 이루어진 흥회루는 조선 후기인 1658년(효종9)에 지어졌다. 이후 변형이 있었지만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2015년 8월 7일에 강원도유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되었다.

 

이제 흥회루를 지나 본전인 대적광전으로 가보자. 수타사는 본전이 대적광전인데 이곳에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있다. 정3칸 측3칸으로 지어진 대적광전은 1636년(인조14)에 공잠대사에 의해서 중창됐다. 조일전쟁으로 폐허가 된 수타사를 다시 일으켜세운 이가 바로 공잠대사인 것이다.

 

대적광전 앞에는 길쭉한, 빼빼로같은 석물이 하나 있다. 본전 건물 앞에는 석탑이 있거나 석등이 있기 마련인데 이렇게 빼빼로처럼 생긴 석물은 거의 보지 못하셨을 것이다. 이것은 물을 공양하기 위해 만든 석물이다. 맨 위를 둥글게 큰 그릇처럼 만들었는데 그곳에다 맑은 물을 올렸다는 것이다.

 

대적광전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기품이 있는 형상이다. 주위의 산세와도 서로 어우러진 모습이 눈길을 끈다. 이런 이유로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는 만큼 보물로의 격상도 고려해봐야 하지 않을까?

 

수타사를 나서기 전에 꼭 봐야할 문화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수타사 동종이다. 이 종은 조선 후기에 활약하신 사인 스님이 제작한 것으로 빼어난 조형미를 자랑한다. 사인 스님은 종을 만드는 주종장이었는데 주로 경기, 강원, 경상지역에서 종을 제작하셨다. 워낙 제작 기술이 뛰어나서 그런지 사인스님이 만든 종은 무려 8개가 보물 제11호로 지정되어 있다. '11-x호'와 같이 지정번호를 받았는데 수타사 동종은 11-3호이다.

 

서울 북한산 화계사에도 사인스님의 동종이 있다. 그 종은 보물 제11-5호다. 화계사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 동종을 보면서 이러쿵저러쿵 설명을 했었는데 수타사에서 또다른 사인스님 동종을 친견하게 되서 무척 반가웠다. 하지만 보호각 안에 있어서 시원하게 보지는 못했다. 그에 비해 화계사 동종은 종루에 걸려있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런 점에서는 화계사 동종이 실물을 친견하기에 낫다.

 

이렇게하여 공작산 수타사 탐방은 종료가 됐다. 경내가 크지는 않지만 참 아기자기한 사찰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사찰이 더 좋다.

 

이제는 산소길을 걸을 차례다. 왜 산소길이라는 명칭이 붙었는지 걸어보면 아실 것이다. 걷다보면 맑은 공기로 전해지는 청량감이 온 몸을 감싸앉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산소길을 걷는 이유다.

 

 

 

 

 

 

*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삼불이 아닌 단불로 모셔져있다.

 

 

 

 

 

 

 

 

* 대적광전: 물을 공양하기 위해 만든 석물

 

 

 

 

 

 

* 수타사 사인비구 동종

 

 

 

 

 

 

* 산소길

 

 

 

 

 

 

 

 

 

 

* 신흥사: 비가 그친 후. 산 안개가 설악산 봉우리를 두르고 있다.

 

 

 

 

 

 

 

2021년 6월 30일 수요일

 

누구나 다 자신만의 계곡이 하나씩 있을 것이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며 기암괴석이 그려낸 갖가지 기이한 형상을 느긋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곳! 그곳에 들어서면 어느 순간 신선이 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비경을 간직한 곳! 필자에게는 설악산 천불동계곡이 바로 그런 곳이다. 무척 매력적인 다른 계곡들도 많이 다녀봤지만 그래도 역시 최고는 천불동계곡이었다.

 

그 천불동계곡 초입에 있는 신흥사(新興寺)에 대한 이야기다. 이 포스팅은 천불동계곡이 아닌 신흥사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천불동계곡 이야기하다 갑자기 신흥사로 바꾸다니... 이거 글쓰기가 왜이래!ㅋ

 

신흥사는 2번에 걸쳐 자리 이동을 했고, 역시 2번에 걸쳐 이름을 바꿨다. 그 첫번째 이름은 향성사였다. 향성사는 652년(진덕여왕6)에 자장율사가 개창을 했는데 중향성불국토(衆香城佛國土)라는 뜻을 따서 지은 것이다. '불국토'는 알겠는데 '중향성'이라는 말은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중국집 이름인가?ㅋ

 

중향성은 법기(法起)보살이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법기보살은 산스크리트어로 다르모가타(Dharmogata)로 불리우는데 한자에서도 보이듯 '불법을 세우는 보살'을 말한다. 불법, 합법할 때 그게 아니라 불도를 세운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요한 일을 하는 보살이 바로 법기보살이고, 그가 거처하는 곳이 중향성이라는 곳이다. 짜장면집이 아니고. 이렇듯 향성사는 법기보살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중향성은 금강산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 불교에서는 법기보살이 금강산에 거주한다고 말한다.

 

 

 

 

 

 

 

* 신흥사: 안개가 낀 설악산

 

 

 

 

 

 

 

향성사는 원래 지금의 켄싱턴스타호텔 앞에 위치해있었다. 현재의 신흥사에서 동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위치다. 그곳에는 지금도 향성사지 삼층석탑이 자리를 잡고 있다. 버스정류장 앞에 석탑이 있는데 집중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향성사지 삼층석탑 정류장은 버스종점 한 정거장 전이라 신흥사 매표소까지 그리 멀지 않다. 그래서 설악산신흥사 역사트레킹은 향성사지 삼층석탑에서 시작된다.

 

삼층석탑은 2층 기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높이가 약 4.3미터에 달한다. 상륜부가 훼손된 터라 온전히 보존이 됐다면 4.3미터 이상이 됐을 것이다. 9세기경에 제작된 삼층석탑은 후기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계승했다. 그래서 국보 443호로 지정되었다. 9세기경에 만들어졌으니 자장율사 시대에 만들어진게 아니다. 이 시기에는 향성사가 선정사로 불릴 때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신흥사는 두 번이나 이름이 바뀌었다. 향성사가 첫번째 이름이었고, 두번째가 선정사였다. 그렇게 이름이 바뀌게 된 건 향성사에 화재가 발생해 폐허가 됐기 때문이다. 개창한 지 40년이 지난 후였는데 이후 의상대사가 지금의 내원암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겨 재건을 한다. 이때가 701년이었는데 재건을 하면서 사찰 이름을 선정사로 바꾼 것이다. 선정사는 이후 천년동안 번창하게 된다. 그러다 조일전쟁(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1642년(인조20)에는 또 화재가 발생해 경내 전체가 큰 피해를 입게 된다.

 

 

 

 

 

 

* 향성사지 삼층석탑

 

 

 

 

 

 

 

 

내원암은 현재의 신흥사에서 울산바위 방면으로 올라가는 길에 위치해 있다. 약 2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나저나 향성사지 삼층석탑은 자신의 이름이 맞는지 좀 의아스럽다. 의문점들을 적어본다.

 

1. 690년경에 향성사가 폐허가 됐다. 이후 향성사지에서 북쪽으로 3km 이상 떨어진 곳에 의상대사가 사찰을 재건함. 이때가 701년이었는데 이름을 선정사로 바꾸었음.

 

2. 9세기경에 삼층석탑을 만들었음. 그럼 선정사 삼층석탑이라고 해야 하지 않나? 그것보다 더 의아한 것은 왜 이미 폐허가 된 곳에 석탑을 세웠을까? 가보시면 알겠지만 삼층석탑이 있는 곳과 신흥사는 같은 경내로 묶기에는 꽤 거리가 있다. 더군다나 당시는 더 먼 내원암에 자리잡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3. 그럼 향성사가 불에 타기 이전에 삼층석탑이 만들어진 것인가? 그럼 9세기에 만들어졌다는 건 잘못된 이야기인가? 그것도 아니면 다른 곳에 있다가 지금의 자리로 이건을 한 것인가?

 

4. 향성사 시절에 9층 석탑으로 만들어졌는데 지금처럼 3층만 남게됐다는 주장을 하는 자료도 있다. 그런데 기단이나 상승률을 고려해 볼 때 9층 석탑의 규모가 나올 수 없는 구조다. 목탑도 아닌 석탑으로 9층을 쌓는다? 석탑 한 두 번 보나!

 

아이고 머리가 아프다. 가뜩이나 머리도 안 좋은데...ㅋ 이렇게 석탑 하나로 다양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 우리 문화재는 스토리텔링의 보고 같은 곳이다.

 

향성사지 삼층석탑은 신라계 석탑중에서 가장 최북단에 위치한다는 지리적인 특색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 버스에서 꼭 한 정거장 먼저 내려서 향성사지 삼층석탑을 보고 가자.

 

 

 

 

 

 

 

* 신흥사: 극락보전

 

 

 

 

 

 

 

* 신흥사: 통일대불

 

 

 

 

 

 

 

이제 신흥사를 향해 본격적으로 이동하자. 설악소공원과 설악케이블카를 지나가다보면 푸른색의 거대한 부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바로 신흥사 통일대불이다. 통일대불은 좌대 4.3미터, 좌대둘레 13미터 위에 만들어져 있다. 앉아있는 좌상이지만 그 높이가 14.6미터에 달한다. 여기에 머리 뒤에 장식된 두광까지 포함시키면 높이가 무려 17.5미터가 된다. 통일대불은 청동으로 만들었는데 청동이 약 108톤 정도가 사용됐다고 한다.

 

거대한 불상이니 제작하는데도 오래 걸렸다. 1987년 8월부터 만들기 시작해 10년이 지난 1997년 10월 25일에 점안식(點眼式)을 거행한 것이다. 개안식(開眼式)으로도 불리우는 점안식은 불상에 눈을 그려넣는 것을 말한다. 눈을 그려넣음으로써 신앙의 대상에게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이다. 용의 눈을 그려넣는 화룡정점을 연상해보자. 그러고보면 점안식은 거칠게 말해 불교식 준공식인 셈이다.

 

통일대불 앞에서 경건하게 삼배를 한 후 신흥사 중심공간으로 향했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보제루가 나온다.

보통 큰 사찰에는 절의 중심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거대한 누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런 누각은 통상 1층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2층은 법회 장소로 쓰인다. 이런 누각을 보통 보제루라고 부른다. 하지만 꼭 그 이름으로만 불리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유명한 부석사 무량수전 앞의 누각은 안양루다. 서울의 명찰 진관사에서는 홍제루라고 부른다.

 

정면7칸 측면2칸으로 만들어진 신흥사(神興寺) 보제루도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신흥사 보제루는 1644년(인조22)에 만들어졌는데 이 해에 드디어 신흥사라는 이름이 자리잡게 된다. 천년동안 번성하던 선정사가 1642년에 불 탄 후, 2년 뒤인 1644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재건을 했고 드디어 신흥사라는 이름표가 생긴 것이다.

 

향성사 -> 선정사 -> 신흥사

 

무슨 사찰이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았는지... 신흥사 보제루는 강원도 시도문화재유형문화재 제 104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동네 팔각정처럼 사방이 다 오픈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971년에 분합문을 달아서 현재와 같은 구조로 변했다.

 

보제루에는 향성사 시절에 만든 범종이 있다. 무려 1400년 전에 만들어진 이 범종은 무게가 약 600kg 정도 된다. 1748년, 1758년, 1788년 세 번에 걸쳐 개주를 하기도 했다. '개주'는 활자나 주물, 즉 금속물을 다시 제작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 화포는 대다수 청동으로 만들어졌는데 화포를 다시 만드는 것도 개주라 하였다. 활발하게 북방 개척에 나섰던 세종대왕 시기에 화포를 개주했다는 내용이 실록에 기재되기도 했다.

 

보제루 이야기하다 개주이야기까지. 얼핏 들으면 곗돈 모으는 계주 같다.ㅋ

 

 

 

 

 

 

 

 

* 신흥사: 보제루

 

 

 

 

 

 

 

* 신흥사: 극락보전. 왼쪽에 명부전이 보인다.

 

 

 

 

 

 

 

 

보제루를 지나 본전인 극락보전으로 가보자. 독특한 계단돌과 형형색색의 창살이 인상적인 극락보전이 탐방객들을 반길 것이다. 정면3칸, 측면3칸으로 이루어진 극락보전은 1648년(인조 25)에 만들어졌다. 이후 여러번 보수를 했지만 그래도 그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2018년 6월 4일에 보물 제1981호로 승격된다. 그 이전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14호였다. 검색을 해보니 아직까지도 몇몇 백과사전은 보물이 아닌 유형문화재로 표기하고 있었다. 문화재 데이터베이스는 좀 늦나?ㅋ

 

신흥사는 효종이 향로를 순종이 청동시루를 하사하는 등 조선왕실과 연계가 깊은 사찰이었다. 가신이의 명복을 비는 원찰이었다. 그래서 일반사찰과는 다른 모습의 형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극락보전 돌계단 옆을 보시라. 일반 태극이 아닌 삼태극이 있다. 삼태극은 조선왕릉의 정자각 돌계단에서 볼 수 있는 모양이다. 일반 사찰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모양이다.

 

삼태극 옆에 치우천왕처럼 생긴 귀면이나 아랫쪽에 조각된 용머리도 무척 인상적이다. 이렇게 장식된 부분을 계단의 소맷돌이라고 부른다. 신흥사 극락보전의 계단 소맷돌은 정말 멋지다! 이외에도 극락보전의 창살도 참 독특하다. 창살에 꽃 장식을 했는데 이걸 솟을빗꽃살이라고 부른다. 이름은 어렵지만 어쨌든 참 아름답다.

 

극락보전의 외관이 이렇게 아름다운만큼 실내에도 귀중한 보물이 모셔져 있다. 바로 신흥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이다. 1651년에 제작된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각승 무염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안정된 비례미와 세련된 기교미가 조화된 여래좌상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1년 9월 5일에 보물 제 1721호로 지정된다.

 

이승을 떠난 이들의 명복을 비는 곳, 명부전을 둘러볼 차례다. 1737년(영조 13) 지어진 신흥사 명부전은 목조지장보살삼존상이 모셔져 있다. 1651년에 제작된 신흥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도 무염이 제작하였다. 기법이 뛰어나고 제작시기와 제작자가 밝혀진 작품이기에 2012년 2월 22일에 보물 제1749호로 지정되었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나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둘 다 조각승 무염이 1651년에 제작했고, 1년의 간격을 두고 모두 보물로 승격됐다. 그만큼 조각승 무염의 예술미가 뛰어났다는 뜻일 거다.

 

 

 

 

 

 

 

* 신흥사: 명부전

 

 

 

 

 

 

 

 

신흥사 명부전도 외관이 독특한 면이 있다. 조선 후기인 1737년(영조 13)에 지어졌다고 전해지는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외형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보면 중앙의 문은 건물 높이에 맞게 큼직한데 좌우칸에 달린 문은 크기가 작다. 좌우칸으로 들어가려고 하다가는 머리를 쿵하고 부딪히기 쉽상이다. 일부러 그랬을까? 일부러 그랬다. 안내문을 보니 아래를 둘러보자는 '하심(下心)'을 생각하며 명부전에 출입하라는 뜻이다. 하심은 자기자신을 낮추는 것을 말한다.

 

하심과 유사한 말로 조고각하(照顧脚下)도 많이 쓰인다. 자신의 발밑을 잘 보라는 뜻으로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기자신부터 돌아봐야 한다는 말이다. 하심이든 조고각하든 불가에서는 겸손과 겸양을 중시한다. 신흥사 명부전에서는 알아서 하심이 발휘될 거다. 그렇지 않으면 헤딩을 하는 것이고. 문 하나를 드나들면서도 삶의 지혜를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빗줄기가 내리는 날에 신흥사를 탐방했다. 덕분에 산 안개를 걸친 설악산의 봉우리들을 볼 수 있었다. 신흥사의 한옥 지붕들과 엮어서 사진을 찍으니 한 편의 예술이 탄생하는 느낌이었다. 기암괴석과 그것을 두르고 있는 안개, 그것을 배경으로 해서 찍은 한옥들... 혹시 저기에 신선이 있는 거 아니야? 내가 사진찍고 내가 감탄하고!ㅋ

 

이제 신흥사를 벗어나 숲길로 들어선다. 오른쪽에 있는 울산바위가 자꾸 손짓을 하지만 천불동계곡으로 방향을 잡고 간다. 일단 신흥사 옆 숲길에 발을 디디면 천불동계곡 입구에 들어선 것이다.

 

글이 넘치니 천불동계곡 이야기는 다음 포스팅으로...

 

 

 

 

 

 

* 신흥사: 극락보전의 계단 소맷돌. 용머리가 인상적이다.

 

 

 

 

 

 

* 신흥사: 명부전. 중앙칸의 문보다 좌우측의 문이 높이가 낮다. 중앙은 부처님이나 스님이 출입하는 문이고, 좌우측 문은 일반 신도들이 드나드는 문이다. 하심을 생각하지 않고 들어가다가는 쿵하고 헤딩할지 모른다.

 

 

 

 

 

 

 

 

 

 

 

* 약사암: 본전인 대웅전과 삼층석탑

 

 

 

 

 

 

 

2021년 6월 13일 일요일

 

이날은 광주광역시에 있는 무등산 일대를 탐방했다. 정확히는 광주 동구에 있는 증심사와 약사암을 방문했다. 뭐 정상까지 가고 싶었지만 워낙 공사가 다망하다보니...^^ 그래도 천 년 고찰을 동시에 두 개나 방문을 했다. 무등산에 온 보람이 있었다.

 

광주는 여러번 방문했었다. 배낭여행 뿐아니라 예전 자전거여행을 행했을 때도 여러번 방문했었다. 광주 시내로 들어갔다가 길을 헤매인 것이 기억난다. 원래 자전거여행이나 장거리도보여행을 할 때는 대도시의 중심지는 피해야 한다. 길을 헤매일 수도 있고, 자동차들로 인해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도시는 경유지 개념으로 방문해서 그랬는지 그곳에 자리잡은 산들도 그렇게 눈길을 주지 않았었다. 광주의 무등산, 대구의 팔공산, 부산의 금정산 등등... 하지만 이제는 대도시의 큰 산들도 좀 다녀볼 생각이다. 지역의 산들이 주는 매력이 있듯이 도시의 산들이 주는 매력도 있기 때문이다.

 

서론이 길어졌다. 광주 지하철을 타고 학동증심사역에서 하차를 했다. 증심사까지 시내버스를 탈까 하다 그냥 하천변을 걷기로 했다. 증심사천. 3km정도였는데 무등산을 바라보면서 걸으니 걸을만 했다.

 

해발 1,187미터인 무등산(無等山)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산 혹은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라는 뜻이다. 1972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2013년에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 그런 무등산에 천년고찰인 증심사(證心寺)가 자리잡고 있다.

 

증심사는 후기 신라시대인 860년(헌안왕4)에 철감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후 여러번의 중창이 있었다. 한국전쟁 때 큰 피해를 입어 대다수의 전각들이 불탔다. 지금의 건물들은 1971년 이후에 지어진 것들이다.

산 중에 있는 사찰이라 그런지 산지가람형을 띄고 있었다. 일주문부터 아주 가파르게 올라갔다. 그렇게 산을 깎아 단을 쌓고 건물을 올려야 했으니 사찰 경내가 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무등산을 대표하는 사찰이라는데 그 명성에 비해서는 좀 아담할 정도였다.

 

 

 

 

 

 

 

 

 

 

* 증심사 오백전: 오백전과 삼층석탑. 오백전은 조선시대 만들어졌고, 석탑은 후기 신라시대에 제작됐다.

 

 

 

 

 

 

 

 

 

*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

 

 

 

 

 

 

 

증심사에서 눈여겨 볼 문화재들은 대웅전 뒤편에 몰려있다. 먼저 1609년(광해군2)에 지어진 오백전을 살펴보자. 정면 3칸 측면 3칸인 이 오백전은 오백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세종 시기였던 1443년,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김방은 자신의 사제를 털어 증심사를 중창한다. 이때 오백나한상을 봉안하게 된다. 막돌허튼층 쌓기로 높은 단을 쌓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올려 오백전을 지었다.

 

무슨 말인가? 막돌허튼층 쌓기는 무엇이고? 두리기둥은 또 무엇인가? 외계어인가?ㅋ 막돌허튼층 쌓기는 다듬지 않은 막돌을 층층이 쌓았다는 것이다. 막돌로 쌓아 올리니 층계가 확 드러나지 않고 불규칙하게 쌓이게 된다. 막돌허튼층 쌓기라고 막돌로만 쌓지는 않는다. 막돌과 막돌 사이에 찐득찐득한 진흙을 채워넣기도 한다. 호박돌로 쌓아 올린 돌담을 생각해보시라. 본드보다 더 강력한 진흙으로 돌과 돌을 붙여놓았다.

 

그럼 두리기둥은 무엇인까? 배흘림기둥은 들어봤는데 두리기둥은? 두리기둥은 원형, 즉 둥근기둥을 말한다. 배흘림기둥이 같은 원형기둥이면서 중간 부분이 똥배처럼 불쑥나왔다면 두리기둥은 똥배없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동일하게 통원형 스타일을 유지한다.

 

막돌허튼층 쌓기, 두리기둥... 평소에 거의 쓰지 않는 말들을 사용하다보니 머리가 아프다. 하지만 이렇게 또 알아가는 재미도 있지 않은가!^^

 

다시 오백전 이야기. 오백전에 봉안된 오백나한상들은 제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다른 점을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것이다. 그럼 시간이 너무 오래걸리나?

 

오백전 앞에는 후기 신라시대에 세워진 증심사 삼층석탑이 자리잡고 있다. 2단 기단으로 이루어진 삼층석탑은 높이가 3.2미터로 좀 아담한 모습을 하고 있다. 증심사 삼층석탑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보물이 아닌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백전도 조선 후기 한옥 양식을 지녔음에도 보물이 아닌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13호 지정되어 있다.

 

이외에도 오백전 옆에는 고려시대에 만든 오층석탑과 조선시대 만든 칠층석탑이 있다. 그러고보니 증심사에는 신라, 고려, 조선 등 각기 다른 시대의 탑들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자 이제 오백전 옆에 있는 비로전으로 눈을 돌려보자. 이곳에 또 귀한 문화재가 있다.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철조비로자나불이 바로 그것이다. 철조비로자나불은 원래 옛 전남도청 자리에 있던 대황사에 있었다가 1934년에 지금의 증심사로 옮겨졌다. 이때 조선시대에 만든 칠층석탑도 함께 옮겨왔다. 대황사는 조선 말기에 폐사가 됐다고 한다.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은 전체적으로 늘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얼굴도 작게 표현되어 있다. 워낙 우리나라 불상, 보살상들이 후덕한 모습을 많이 하고 있는터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의 모습이 좀 낯설 수도 있을 것이다.

 

높이 90cm의 이 불상은 재료의 성분이 거침없이 드러난 것처럼 전체가 초코렛빛깔을 띄고 있다. 그 검은 빛깔 마디마디에 새겨진 선과 선이 정교함으로 가득차 있다.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은 철로 튼튼하게 만들어서 그런지 천 년의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보존 상태가 상당히 좋다. 그래서 보물 제 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증심사 탐방은 참 유익했다. 메인 등산로 곁에 있는 사찰인데도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아 호젓한 사찰 탐방을 할 수 있었다. 이제 무등산 중턱부에 있는 약사암을 향해 간다.

 

증심사 일대는 예로부터 차밭이 유명했다. 증심사에서 차 공양을 위해 재배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이 경영을 하다 광복 후에 허백련이라는 분이 인수하였는데 그는 고유의 차를 재배하는 등 차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등산로에 차 향이 풍기는 것도 같고...^^

 

 

 

 

 

 

 

* 증심사 대웅전

 

 

 

 

 

 

 

* 증심사 오층석탑과 칠층석탑

 

 

 

 

 

 

 

 

무등산 약사암은 증심사에서 약 1km 정도 올라가면 닿을 수 있다. 약사암도 증심사를 세운 철감선사 도윤이 개창한 사찰인데 처음에는 인왕사라고 불렀다. 이후 고려 예종 때 혜조국사 담진이 중창을 하면서 약사암으로 이름을 고쳤다.

 

약사암에서 가장 주목해서 볼 문화재는 보물 제600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조여래좌상이다. 약사암 석조여래좌상은 9세기인 후기 신라시대에 제작되었다. 석불 양식은 석굴암 석불에서 정점을 찍게 된다. 이후에는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 개성이 살아있는 형식으로 변모해 간다. 아무래도 신라후기에서 고려 초기에는 지방호족 세력들이 강성해지는데 그런 사회상이 반영된 것일테지. 약사암 석조여래좌상도 그런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목재 건물에 돌로 만든 석불이 주존불로 모셔져 있어 좀 독특해보였다. 돌로 만든 대좌도 있고 해서 석조여래좌상은 수미단에 올려져 있지 않았다. 중간에 단을 싹뚝 잘라서 홈을 만들고 그 안에 석조여래좌상을 모셨다. 그것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하긴 그 무거운 석불을 나무로 만든 수미단에 올려놓는다고 생각해보라. 올려놓는 순간 우루르 무너질 것이다. 앞서 언급한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도 그렇고 약사암 석조여래좌상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불상이 아니어서 더 눈길이 간다. 이 귀중한 문화재들을 볼 수 있으니 필자는 행운아인가?^^;

 

본전 건물을 나오니 무등산 새인봉이 한 눈에 들어왔다. 새인봉은 봉우리가 옥새처럼 생겼다하여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본전 앞에는 약사암 삼층석탑이 사찰의 중심을 잡고 있다. 후기 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아직 문화재지정이 안 됐다. 문화재지정이 안 됐다고 하더라도 삼층석탑은 그 존재만으로도 소중하다. 천 년의 세월을 약사암과 함께 했으니까.

 

새인봉과 어우러진 약사암의 모습이 참으로 정겹다. 대도시에 있는 사찰이 이렇게나 호젓할 수 있다니!

다음에 무등산을 가면 증심사와 약사암을 또 방문할 생각이다. 그때는 정상도 한 번 찍고 오는거야?ㅋ

 

 

 

 

 

 

 

 

*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 약사암 석조여래좌상: 수미단에 홈을 내서 봉안했다.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다.

 

 

 

 

 

 

 

 

 

 

* 성주사지 : 본당터를 중심으로 4개의 탑이 보인다.

 

 

 

 

 

 

 

2021년 6월 11일 금요일.

 

이날은 충남 보령시에 있는 성주사지를 탐방한 날이다. 탐방한 지 두 달이나 지나서 후기를 작성하다니...ㅋ

 

성주사! 후기 신라시대 대표적인 선종 사찰로 불렸던 곳. 하지만 지금은 폐사지가 되어 허허로움이 갈대처럼 나붓기는 곳. 한편 경북 성주군과 이름이 비슷하기에 성주사도 그곳에 있지 않나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곳. 사실 필자가 그랬다. 성주사지라고 하니 경북 성주군부터 생각한 것이다. 맛있는 성주 참외를 떠올리면서...^^

 

답사를 한 날은 무척 무더웠다. 그런 날은 인근에 있는 대천 해수욕장에서 머드팩을 하는게 훨씬 남는 장사일지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무거운 배낭을 메고 성주사지가 있는 성주면으로 향했다. 보령 시내에서 성주면사무소 입구까지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했는데 약 15분 정도 소요됐다. 면사무소 입구에서 성주사지까지는 약 1km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어렵지 않게 걸어갈 수 있다. 성주사지 바로 앞까지 가는 버스 노선도 있지만 자주있지 않다.

 

성주천을 따라 이동을 하다보면 넓게 펼쳐져있는 성주사지가 나타난다. 성주산과 만수산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데 그 품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서해안에 있는 산들이 그렇듯 해발고도가 높지 않은 올망졸망한 봉우리들이 옛 절터의 뒷배경이 되어주고 있다.

 

성주사의 원래 이름은 오합사였다. 백제 법왕이 왕자 시절인 599년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때는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원찰로 오합사가 창건된 것이다. 한편 백제 법왕은 같은 해인 599년에 제29대 왕으로 등극한다. 그리고는 그 다음해인 600년에 승하하고 만다. 직전 28대 혜왕도 재위 기간이 딱 1년이었다. 598년에서 599년.

 

오합사가 성주사로 이름이 바뀌게 된 건 신라 후기였다. 성주사(聖住寺)의 의미를 풀어보면 '성인이 거주하는 절'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성인은 무염국사를 지칭한다. 태종 무열왕의 8대손인 무염은 어려서부터 총명함을 드러냈다. 아홉살 때에는 해동신동으로 불렸을 정도다. 무염은 22살 때인 821년(헌강왕13)에 당나라에 유학을 갔다. 이후 무려 20년 동안이나 중국 일대를 다니며 자비를 실천했는데 이를 두고 '동방의 대보살'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다.

 

무염이 유학을 했을 당시 중국에는 경전을 중심으로 한 교종에서 벗어나 수행을 강조하는 선종이 유행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무염도 현실의 상황에서 벗어난, 중앙 귀족의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던 교종을 비판했다.

 

 

 

 

 

*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

 

 

 

 

 

그가 중국에서 귀국했을 때 보령 지역의 호족인 김양에 의해 오합사의 주지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때 신라에서는 구산선문이 크게 번성하게 된다. 구산선문은 경전 위주의 교종과는 달리 수행에 중심을 둔 선종의 9개 선문을 말한다. 한마디로 신라 말기에 9개의 선종 문파가 산을 중심으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그중 무염은 선승의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더불어 그가 주지로 주석하는 성주사도 구산선문의 대표적인 사찰로 주목받게 된다.

 

그런 무염의 업적을 기리고자 성주사터 한편에는 큰 비석이 세워져있다. 비각으로 보호되고 있는 이 비석은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이다. 대낭혜는 무염의 시호이고, 백월보광은 탑호이다. 줄여서 낭혜화상탑비라고도 불린다. 국보 제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후기 신라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높이가 무려 4.55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한 비석에는 무염과 관련된 5천여 자의 글자가 새겨져있다.

 

한편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하나다. 사산비명은 최치원이 지은 비석문 가운데 사료적 가치가 높은 4개를 묶어서 만든 책이다. 그럼 그 대상인 4개는 무엇인가? 아참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가 그중 하나라고 했지.

 

1. 진감선사대공령탑비(국보 제47호): 지리산 쌍계사

​2. 지증대사적조탑비(국보 제 315호): 경북 문경 봉암사

3. 대숭복사비: 경주 대숭복사터

4.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

 

대숭복사비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3개의 비문이 다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데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니 사산비명을 주제삼아 탐방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신라 말기 비운의 천재였던 최치원의 자취를 따라서... 성주사터에 왔으니 벌써 한 곳은 다녀온 셈이다.

 

이제 절의 중심부였던 곳으로 향해가보자. 총 4개의 탑이 눈길을 확 사로잡을 것이다. 하나는 오층석탑이고, 나머지 3개는 삼층석탑이다. 삼층석탑은 열을 지어 서 있고, 오층석탑은 그것들과는 외떨어져 있다. 오층석탑과 삼층석탑 사이에는 본당 건물터가 있다.

 

하나도 아닌 4개의 탑이 한 곳에 집중적으로 서 있다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건물 하나에 탑 하나를 두고, 사찰의 가람배치에서 1당 1탑이라고 한다. 탑이 두 개면 1당 2탑이라고 한다. 1당 3탑까지는 들어봤는데 1당 4탑은...? 하여간 우뚝 서 있는 4개의 탑이 있어 그런지 성주사지는 그 어떤 폐사지보다 덜 쓸쓸해보인다.

 

탑들을 둘러보기 전에 본당터부터 살펴보자. 이 본당터 가운데에는 연꽃무늬로 새겨진 석조대좌가 있는데 오랜 시간이 흘러서인지 사각형의 석조대좌는 군데군데가 훼손되었다. 외형이 훼손되었지만 그래도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보았다. 아니 건축학적 상상력인가? 이 석조대좌에는 큰 불상이 있었다고 전한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 불상은 석불이 아닌 철불이었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들고 나갔다는 것이다. 이런 괴씸한!

 

 

 

 

 

* 성주사지 오층석탑

 

 

 

 

 

 

 

오층석탑은 6.6미터로 성주사지에 남은 문화재들중에서 가장 높다. 오층석탑은 성주사지의 기준점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처럼 본당터 앞에 우뚝 서 있다. 2중 기단 위에 5개의 탑신이 올려져있는데 1층 탑신이 두드러지게 길쭉하지만 탑 전체가 늘씬한 상승감을 자랑하며 균형있게 층층을 이루고 있다. 안타깝게도 꼭대기 부분인 상륜부는 훼손이 됐다.

 

성주사지 오층석탑은 신라 후기에 제작되었는데 2층 기단과 1층 탑신 사이에 괴임돌이 받혀졌다. 이렇게 괴임돌이 받혀지는 형식은 신라시대 석탑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 형태다. 아무래도 오층석탑을 만든 석공은 시대를 앞서간 아티스트가 아니었을까... 성주사지 오층석탑은 보물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제 열을 지어 서 있는 세 개의 탑을 살펴보자. 얼핏보면 세 쌍둥이 탑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보면 각 탑의 높이가 제각각이다. 서탑은 4미터, 중간탑은 3.7미터, 동탑은 4.6미터이다. 이 세 탑은 건너편 오층석탑처럼 2층 기단과 1층 탑신 사이에 괴임돌이 따로 받혀진 형태다. 그런데 이 세 개의 탑의 1층 탑신에는 무언가가 조각되어 있다. 문틀모양과 문고리 장식을 새겨넣은 것이다. 탑에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독특함 때문인지 세 개의 탑은 모두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서탑은 제47호, 중간탑은 제20호, 동탑은 제2021호이다. 동탑은 2019년도에 승격됐는데 이전에는 충청남도 유형문화재였다.

 

한편에 서 있는 석불입상도 친견했다. 훼손이 심해 시멘트로 보수되어 있는 석불은 좀 어눌해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좀 더 친근한 모습이었다. 마을에서는 미륵불로 불린다고 한다. 오랜동안 이곳에 서 있으면서 성주사의 흥망성쇠를 함께한 석불일텐데... 그렇게 묵묵하게 이 터를 지켜준 석불 앞에서 크게 몸을 숙여 합장을 하였다.

 

성주사지도 폐사지이기에 허허로움이 탐방 내내 느껴졌지만 그래도 석불도 있고, 석탑도 4개나 있어서 그나마 덜 외로운 느낌이었다. 뒤쪽에 둘러져 있는 성주산도 압도하는게 아니라 아늑해 보이고... 그렇게 성주사지 탐방이 종료가 됐다.

 

 

 

 

 

* 세 개의 탑

 

 

 

 

 

 

 

* 성주사지 석불입상

 

 

 

 

 

 

 

 

* 세 개의 석탑: 사진 가운데 하단부에 석불입상이 보인다.

 

 

 

 

 

 

 

* 본당터 석조계단: 오리지널 석조 계단을 1986년에 누가 들고 갔다고 한다. 그 무거운 걸 가져가다니! 이 문화재 도둑놈아! 현재 계단은 옛 사진을 근거로 복원한 것이다.

 

 

 

 

 

 

 

 

 

 

 

 

 

 

 

* 고달사지 석불대좌

 

 

 

 

 

 

 

 

2021년 5월 27일 목요일

 

3일간의 강원도 평창 오대산 일대 탐방을 마친후 경기도 여주로 향했다. 벼르고 있던 여주 고달사지를 찾아가려고 한 것이다. 아시분들은 아시겠지만 뚜벅이들에게 답사여행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해당 문화재가 읍내 근처에 있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니까. 하루에 서너편밖에 없는 시골버스를 놓쳤다가는... 택시를 타라고? 돈이 어딨어!

 

지도를 검색해보니 그나마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양동역에서 고달사지로 가는 버스편을 타는게 제일 나은 듯싶었다. 하지만 필자의 뜻대로 됐겠는가? 뭐 워낙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난터라 새삼스럽지도 않다. 결론적으로 말해 버스를 잘못타고 해서 2시간 이상을 걸었고, 고달사지에는 해가 진 이후에 도착했다. 그래서 사진들이 다 어둡게 나왔다. 이렇게 뚜벅이들은 문화재 답사하기가 어렵다.

 

내리는 곳을 지나쳐서 급하게 버스에 내렸다. 그런데 알고보니 필자가 탔던 버스는 원래부터 고달사지까지 가지 않는 버스였다. 가는 방향만 비슷할 뿐 하차해서 약 4km 이상을 걸어가야 했다. 혼자 궁시렁거리면서 방향을 다시잡고 이동을 했는데 옆쪽으로 무언가 보이는 것이다.

 

"앗! 버스를 잘 못 탄 이유가 있구만. 저걸 보려고 여기에 내리게 된 거였어!"

 

선돌이었다. 여주 석우리 선돌. 경기도 기념물 제132호로 지정된 석우리 선돌은 청동기 시대의 유물로 알려졌다. 입석이라고 불리는 선돌은 옛 선인들의 신앙의 대상이었다. 이를 두고 거석숭배문화라고 부른다. 석우리 선돌이 자리잡고 있는 곳은 주위 산들이 완만하게 둘러져있고, 앞으로는 금당천이 흐르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예전부터 마을이 형성됐고, 그 주민들이 선돌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선돌 인근에는 마고 할멈이 물레질을 했다는 넓은 돌이 있는데 이 대석은 제단으로 쓰였을 거라고 추측된다.

 

석우리 선돌은 높이가 2.45미터라 그렇게 크지는 않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옛 선인들의 신앙의 대상을 만날 수 있어서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선돌이 필자를 불렀나, 아니면 필자가 선돌을 불렀나... 한편 옛날 표지판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표지판에는 '여주군석우리선돌'이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됐을 때가 1992년이었으니 '여주시'가 아니라 '여주군'으로 표기된 것이다. 여주군이 여주시로 승격된 시기는 2013년 6월이었다.

 

 

 

 

 

 

 

* 석우리 선돌

 

 

 

 

 

 

 

 

우여곡절 끝에 고달사지에 도착했다. 이미 해가 거의 진 상태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잘못하면 또 심령사진처럼 이상한 사진만 찍게될 거 같았다. 주위를 둘러보고 산세도 가늠해보고... 이런 것도 없이 그냥 빠르게 셔터를 눌렀다. 큰 폐사지를 빠르게 움직이며 사진을 찍어댔다.

 

혜목산 아래 넓직하게 자리잡고 있던 고달사는 764년, 신라 경덕왕 23년에 창건됐다고 전해진다. 고달사는 남한강 물길과 가까이에 있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 신라는 이곳의 관리를 위해 사찰의 건립을 하였는데 유명한 신륵사도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신륵사, 고달사, 법천사, 흥법사, 거돈사 등등... 남한강 수계에는 큰 사찰들이 들어섰고 고려시대에는 더 크게 번성하게 된다.

 

하지만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갔고 사찰들도 쇠락하기 시작했다. 현재 신륵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다 폐사되었다. 그래서 남한강 수계를 따라가면 폐사지들을 여럿 만날 수 있다. 폐사지 답사는 역사의 시간을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여행이다. 하지만 폐사지라서 그런지 좀 쓸쓸하다. 가을 낙엽이 날릴때 행하면 아주 더 쓸쓸할 거다. ㅋ

 

고달사(高達寺)는 '도의 경지를 통한다'라는 뜻을 가졌다. 고달사에는 석조물들이 많았는데 모든 석물들은 석공 '고달'이 다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석공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죽는 줄도 모르고 석물 만들기에 매달렸다. 이윽고 석조물들은 다 완성됐고 고달은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다. 이후 그는 도에 통달했으니, 이에 고달사가 됐다는 전설따라 삼천리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고달사지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석불대좌이다. 보물 제8호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지 석불대좌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대좌이다. 높이가 1.57미터인 고달사지 대좌는 사각형으로 되어 있다. 다른 석조대좌들이 원형이나 팔각형으로 되어 있는 것과 다른 면모다. 비교적 원형이 잘 갖추어져 있고 그 모양새가 세련돼 고달사지에서 가장 눈에 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고보니 사각형 석불대좌는 강릉에 있는 안국사지에서도 보았다. 안국사지는 관음리 5층석탑이 있는 곳인데 이 폐사지에도 사각형 석불대좌가 있는 것이다. 안국사지의 석불대좌는 고달사지 대좌보다 규모는 작았고 세련미도 좀 떨어지긴 했다. 그래서인지 고려시대 작품으로 추정되는데도 아직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 그나저나 안국사지를 방문했을 때도 어두운 밤이었고, 고달사지를 방문했을 때도 해가 떨어진 뒤였고... 그래서 사진이 다 심령사진처럼 찍혔고...ㅋ

 

 

 

 

 

 

 

* 원종국사혜진탑비

 

 

 

 

 

 

 

정말 사진들이 엉망이라 사진을 내거는 게 좀 민망할 정도다. 그래도 보물 제6호로 지정된 원종국사혜진탑비는 좀 언급해야겠다. 옛날 고달사지 사진을 보면 원종국사혜진탑비는 현재의 모습처럼 생기지 않았다. 몸체라 불릴수 있는 비신 부분이 없었다. 그래서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 있었다. 몸체가 없었지만 워낙

귀부와 이수가 커서 그랬는지 마치 거북이 장갑차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2014년에 비신이 복제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사실 비신은 1915년에 넘어져 8조각으로 깨졌다고 한다. 무슨 조각 피자도 아닌데 8조각이나... 그렇게 훼손된 오리지널 비신은 이후 정비가 됐고, 경복궁을 거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원종대사 찬유는 신라말에 태어나 고려 광종 때 입적을 하셨는데 그때 나이가 90세라고 한다. 광종은 그를 왕사라 삼았고, 그가 열반에 이르자 원종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달사는 원종대사 때 크게 중창이 됐던 것이다.

 

옛날 자료에는 고달사지 일대가 전부 논과 밭으로 나온다. 하긴 폐사지는 평평하니 곡식을 기르기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고달사지 일대가 대대적으로 발굴되고, 답사지로 각광을 받게된다. 답사를 마치고

돌아가려고 하는데 어떤 남자가 차에서 내려 말을 건냈다.

 

"별보러 오셨어요?"

"예, 별이요?"

"천문동호인 아니세요?"

"아닌데요. 저는 문화재 보러 왔는데요."

 

알고보니 고달사지 주차장이 별을 보는데 딱 좋은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날씨가 좋은 날에 천문동호인들이 간간이 와서 별을 본다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고달사지는 아주 컴컴했다. 그 흔한 가로등 시설도 없었다. 그러니 별 보러오지.

 

"여기서 고달사지라고 폐사지의 메카같은 곳이에요. 그래서 저는 문화재 탐방하러 온 거죠."

"그렇군요. 저는 별 보는 거 좋아해서 가끔 이곳에 왔어요. 주차장도 넓어가지고 장비 세팅하기도 좋고 하니까요."

 

한 장소를 두고 서로가 다르게 이용을 했다. 그래도 폐사지에 왔으니 별보는 것보다는 문화재를 보는게 제격이 아니겠나!

 

후일담) 버스가 끊긴지 오래고 해서 신륵사 관광지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그곳에 가면 숙소가 있을 거 같아서. 약 10km 정도가 떨어져 있었는데 열심히 걸어갔다. 다행히 하천 뚝방길이 잘 되어 있어서 안전하게 갈 수 있었다.

 

알고보니 석우리 선돌 앞에 흐르고 있던 금당천을 따라 걷고 있었다. 석우리는 상류였고 신륵사 방향은 하류쪽이었다. 이 일대도 고달사지처럼 아주 컴컴했다. 하긴 인적도 드문 곳에 무슨 가로등이 있었겠는가! 그래서 금당천이 무척 고마웠다. 안전하게 갈 수 있게 뚝방길이 되어 있으니. 이름도 얼마나 이쁜가, 금당천!

 

그렇게 어두컴컴한 금당천을 따라 걷는데... 보름달이 너무 예쁜 것이다. 이날 보름달은 '슈퍼블러드문'이라고 대보름달이었다고 한다. 주위가 어두우니 보름달이 더 명징하게 보였던 것이다. 별 대신 달을 본 것이다.

그날 뚝방길 걷기가 재밌었나보다. 아직까지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

 

우연하게 인조반정과 관련이 있는 원두표의 묘도 확인해두었다. 원두표는 창의문을 도끼로 부수고 도성으로 처음 입성한 무장이었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 창의문 앞에서 항상 원두표이야기를 했었는데 그의 묘가 경기도 여주에 있는지는 처음 알았던 것이다.

 

나중에 기회가되면 금당천을 한 번 더 걸어보고 싶다. 야간에, 그것도 대보름달이 뜰 때 말이다. 요즘은 야간트레킹을 자제하려고 하는데 그래도 금당천은 야간에 걸어야 더 재밌게 걸을 수 있을 거 같다.

 

 

 

 

 

 

* 고달사지 석조

 

 

 

 

 

 

 

* 고달사지 승탑

 

 

 

 

 

 

 

 

* 원두표 묘지: 사진 오른쪽 상단에 달이 보인다. 사진으로 찍으니 작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말 큰 보름달이었다.

 

 

 

 

 

 

 

 

 

 

 

 

* 월정사 8각9층석탑과 석조보살좌상

 

 

 

 

 

 

 

 

* 전나무숲

 

 

 

 

 

 

 

2021년 5월 25일 화요일

 

전날 동해 두타산 무릉계곡 탐방을 한 후 오대산이 있는 평창으로 이동했다. 오대산이 있는 평창군 진부면으로 향했는데 오랜만에 KTX를 탔다. 동해역 -> 진부역까지 탑승했는데 생각보다는 요금이 비싸지 않았다. 저렴하게 KTX를 타서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이다. 고속열차가 왜이리 느리지? 무궁화호랑 별 차이가 없네.

 

요금이 저렴한 이유가 있었다. 동해 -> 강릉 구간은 단선 철도다. 양방향 선로가 아니라 앞에서 기차가 오면 비켜줘야 하는 하나짜리 선로라는 것이다. 그러니 KTX가 느릿하게 운행됐던 것이다. 물론 강릉 이후 구간부터는 복선이라 KTX다운 속도로 내달렸다.

 

진부역에 내리니 밤 10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왜 평창군 진부면에 왔는가? 오대산에 가려고 왔다. 오대산이 가까워서 그런지 진부역의 다른 명칭은 오대산역이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오대산을 방문했다. 2014년 가을경에 방문하고 다시 왔으니 7년 만이다. 물론 2014년 이전에도 오대산을 방문했었는데 그때는 비로봉(1,565m)을 오르려고 왔었다. 이와 달리 2014년에는 선재길을 걸으려고 방문했다. 오대산 선재길이 2013년 10월경에 개통을 했는데 개설 1년만에 단풍의 명소로 입소문을 엄청 탄 것이다. 이에 필자도 단풍 구경을 갔던 것이다.

 

예전부터 오대산은 단풍의 명소로 손꼽이는 곳이었다. 그런 오대산에 계곡길을 따라 도보여행길인 선재길이 개설이되니 도보여행자들은 신이 날 수밖에! 가을이 깊어갈수록 선재길의 단풍도 더 깊은 빛깔을 내고 있었다. 맑은 계곡물과 어우러진 오색빛깔 단풍을 보고 있자니 너무나 아름다워 눈물이 날 정도였다. 길을 걷고 있으니 근심걱정이 계곡물 위로 떠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이 얼마나 좋은가!

 

가을이 좋으면 다른 계절도 다 좋다. 봄여름가을겨울이 다 자신의 색깔을 가지고 스스로를 뽐내는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5월말에 왔으니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다. 그래서 초록의 싱그러움을 한껏 기대하고 왔다. 과연 그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유유히 흐르는 오대천 계곡물, 그 사이로 퍼지는 싱그러운 피톤치드의 향...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1975년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오대산은 다섯개의 대(臺)가 모여있는 곳이다. 중심인 중대(中臺)를 동대, 서대,남대,북대가 둥글게 두르고 있는 형상이다. 그래서 오대산(五臺山)이라 불린다. 중대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 연꽃잎이 감싸고 있는 모습과 흡사하다하여 오대산은 천하 명당이라고 불린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 실록을 보관하던 오대산 사고도 있었다.

 

이렇게 오대산이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게 된 건 자장율사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자장율사는 643년(선덕여왕12)에 당나라에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가지고 귀국한 후 오대산에 진신사리를 모시는 절을 짓는다. 그곳이 바로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이다. 상원사 적멸보궁이라고 더 많이 알려진 곳이다. 한편 자장율사는 경주 황룡사9층목탑 건립을 주도하는 등 신라 불교 진흥에 큰 공헌을 했다.

 

오대산은 문수보살 신앙의 중심지로 불리고 있다. 자장율사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오대산에서 수도를 했고 그 자리에 월정사가 창건된 것이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화신으로 코끼리를 타고 다니시는 분인데 동자의 모습으로 현세계에 나타나신다고 한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조는 만났다고 한다. 등까지 밀어줬다고 한다. 오대산 선재길을 찬찬히 걸어가면서 관련된 이야기를 알아보자.

 

 

 

 

 

 

* 선재길

 

 

 

 

 

 

 

* 선재길

 

 

 

 

 

 

 

선재길은 2013년 가을에 개통된 도보여행길로 월정사와 상원사를 연결하는 트레일(오솔길)이다. 선재길은 스님들이 월정사와 상원사를 오갈 때 다니던 옛길이었다. 월정사가 643년, 상원사가 724년에 창건됐으니 길 자체가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길인 셈이다. 오대산은 산세가 그리 험하지 않다. 부드러운 흙산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선재길도 부드럽게 걸어갈 수 있다.

 

'선재'라는 말도 불교용어다. 동자인 선재는 지혜와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표상으로 <화엄경>의 중심인물이다. 월정사를 창건한 자장율사는 선재동자의 구도행각을 따르기 위해 자신의 뒤뜰에 53그루의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53은 선재동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만난 선지자의 숫자였다. 정리를 해보면, 옛 스님들이 오가던 선재길을 걸으며 '나를 찾아보는' 깨달음의 시간을 가져보자는 것이다. 안내문에도 선재길을 걸으며 선재동자처럼 깨달음을 얻어 보라고 적혀 있었다.

 

그 깨달음을 찾아 본격적으로 선재길을 걸어보자. 첫번째 탐방지는 전나무숲으로 유명한 월정사다. 일주문을 지나면 월정사 전나무숲이 시작되는데 시내버스는 일주문을 지나친다. 그래서 월정사 정류장에서 내려 일주문 방향으로 역순으로 이동했다. 주차장에서 다리를 건너기 전에 주차장 방면 전나무 숲길로 접어들 수 있다. 이 숲길은 메인이 아니다. 메인 숲길은 하천 반대편에 있다. 한마디로 오대천을 사이에 두고 메인과 사이드 전나무숲이 있는 것이다.

 

일주문을 통과하니 더 울창한 전나무숲이 등장했다.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서 있는 전나무들이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이 전나무숲은 '천년의 숲'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약 1,700여 그루의 전나무에서 발산되는 알싸한 나무향이 탐방객의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준다. 전나무는 상록수라 사계절 내내 녹음을 유지하지 않던가. 꼿꼿함 속에 피어나는 푸르름을 사시사철 만끽할 수 있다니! 전나무숲이 주는 감동만으로도 월정사는 방문할 가치가 있는 곳이다.

 

전나무숲은 약 1km 정도에 달했다. 이후 사천왕문을 지나 월정사 중심영역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어째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보이지 않는다. 본전인 적광전도 연륜이 느껴지지 않았다. 월정사가 조계종 제4교구의 본사아니었던가?

 

그렇다. 월정사의 전각들은 한국전쟁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수많은 전란으로 소실과 중건을 반복했던 월정사였다. 그러다 한국전쟁, 그 중에서도 1.4후퇴 당시 작전상의 이유로 국군이 월정사의 전각들을 불태웠다. 이렇게 전쟁이 무서운 것이다. 전쟁때문에 너무나 소중한 것들이 사라지니까.

 

유명한 탄허 스님이 1964년에 본당인 적광전을 다시 짓는 것을 시작으로 월정사의 중건이 시작되었다. 오대산과 인연이 많으셨던 탄허 스님은 1983년. 세속 나이로 71세에 월정사 방산굴에서 속세과의 인연을 마감하셨다.

 

월정사 적광전은 좀 독특하다. 통상적으로 적광전에는 비로자나불이 본존불로 모셔지는데 월정사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찰에 가면 대웅전은 꼭 가본다. 그 대웅전에 모셔진 분이 석가모니불이다. 이 부분이 쉽게 다가오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사찰에는 무조건 대웅전이 있어야 하고 그곳에 모셔진 분이 최고다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 않다. 이 부분은 나중에 한 번 쫘~악 한 번 설명해보겠다.

 

건물에서 느껴졌던 헛헛한 느낌은 월정사 팔각구층(8각9층)석탑과 보살상 앞에 가면 싹다 사라질거다. 높이 15.2미터의 이 거대한 석탑은 주위의 전각들을 호령하듯 절 마당 중심에 우뚝하게 솟아있다. 그 앞으로는 석조보살좌상이 인자한 미소를 품고 그윽하게 9층석탑을 바라보고 있다.

 

 

 

 

 

 

 

* 월정사 8각9층석탑

 

 

 

 

 

 

 

 

* 월정사 전나무숲: 전나무숲과 성황당

 

 

 

 

 

 

 

8각9층석탑은 말그대로 탑신이 8각형으로 되어 있다. 신라시대 대표적인 석탑인 석가탑을 생각해보자. 생일케이크 상자처럼 탑신이 네모꼴이다. 하지만 월정사 9층석탑은 표준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다각형으로 탑신부를 조각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제작된 석탑은 경천사지10층석탑과 원각사지10층석탑 등이 있다. 교과서에서 한 번 쯤 다보셨을 것이다. 혹시 보시면서 이런 생각들을 하셨을지 모른다.

 

'이 탑들 정말 큰데! 커서 사진에 다 안 나와!'

 

기회가 되시면 탑돌이를 해보는 것도 좋겠다. 천천히 돌면서 9층석탑을 관찰하는 것이다. 석조보살의 은은한 미소와 아름다운 뒤태를 살펴보는 것도 잊지 말자. 또 석조보살-9층석탑-적광전이 일직선상으로 늘어서 있는 부분도 놓치지 말고 꼭 눈여겨 보자. 주위 산세와 어우러진 석탑과 보살상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보인다. 그렇게 고운 자태를 선사하는 8각9층석탑은 국보 제48호로 석조보살좌상은 보물 제1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제 본격적인 선재길 탐방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오대산은 단풍의 명소다. 그래서 선재길도 가을에 오면 제일 좋다. 선재길을 걸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걷다보면 오색찬란한 단풍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단풍을 바라보며 집착과 번뇌를 잊어버리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섶다리, 징검다리 같은 정겨움을 더하는 구조물들이 있었지만 선재길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계곡이다. 시원스레 물줄기를 뿜는 계곡길 주위로 울긋불긋하게 펼쳐진 단풍나무 숲을 지날 때의 매력이란! 그 매력에 빠지며 걷다보면 무아지경에 이를지 모른다. 맑은 계곡물 위로 붉은빛을 머금은 단풍잎 하나가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곳이 무릉도원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니까.

 

오대산 선재길은 약 9km 정도에 달하는데, 계곡을 끼고 있는 길치고는 경사도가 상당히 완만하다. 그래서 휴식시간을 갖는다고 해도 3시간 30분이면 완주가 가능하다. 필자는 넉넉히 아예 4시간을 잡고 이동했다. 계곡길이란 한계 때문에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에는 통행에 제한이 있을 수 있다. 실제로 지난 수해때 망실된 것으로 보이는 몇몇 시설물들은 아직까지 복구가 되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여름에 계곡을 끼고 걷는 길은 조심해야한다.

 

그렇게 선재길이 끝나는 지점에 상원사가 자리잡고 있다. 전통찻집 옆에 관대걸이 혹은 갓걸이라고 불리는 비석이있는데 이는 상원사 계곡에서 목욕을 했던 세조가 의관을 걸어두웠던 비석이라고 한다.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이후 피부병에 걸리고만다. 이에 오대산 상원사 계곡에 와서 목욕을 하게된다. 이때

숲에 있던 동자승을 불러 자신의 등을 밀게한다.

 

"어디 가서 임금의 몸을 씻겨주었다고 말하지 말거라."

"임금께서도 어디 가서 문수보살을 직접 보았다고 말하지 마세요."

 

오대산이 문수보살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설화라고 할 수 있다. 그나저나 세조는 꽤나 호사를 누린 셈이다. 문수보살은 깨달음의 지혜를 품고 있는 분인데 그분한테 등을 밀게 했다니... 뜻하지 않게 VIP 서비스를 받은 것인가? 정작 문수보살을 그토록 친견하고했던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는데...

 

 

 

 

 

 

* 상원사

 

 

 

 

 

 

상원사는 월정사와는 또다른 멋이 있다. 산 봉우리가 부드럽게 감싸고 있어 경내 안으로 들어가면 포근한 느낌이든다. 상원사 경내로 들어섰으면 상원사 동종부터 찾아보자. 725년에 만들어진 상원사 동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으로 국보 제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이 종은 안동에 있었는데 1469년(예종1)에 상원사로 옮겨왔다.

 

보호각 안에 있어 유리너머로 보아야 하지만 아름다운 그 자태는 가둘 수가 없어보인다. 특히 중심부에 새겨진 비천상의 흥겨운 연주는 주파수만 잘 맞추면 당장이라도 들을 수가 있을 거 같다. 혹시 사람이 들을 수 없는 주파수 대역으로 연주를 하시나? 참고로 비천(飛天)은 한자에서도 보이듯 날아다니는 천상인을 말한다.

 

상원사 동종이 제작됐을 때는 신라 성덕왕 24년이었는데 성덕대왕 신종(국보제29호)보다 46년이나 앞선 것이다. 성덕왕이 성덕대왕인가? 그렇다. 그리고 성덕대왕 신종은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 아실 것이다. 에밀레종!

 

중심지답게 상원사에서는 문수보살이 가장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 된다. 그 중심에는 국보 제221호로 지정된 목조문수동자좌상이 있다. 세조가 목격했다는 동자의 모습을 나무로 조각을 했다고 하는데 둥근 꼭지 두 개를 딴 머리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앳띈 동자의 모습이 맞긴하지만 한편으로는 후덕한 보살님의 낯빛도 묻어나온다.

 

목조문수동자좌상은 1466년(세조12)에 의숙공주가 봉헌을 했다고 전해진다. 의숙공주는 세조의 둘째 딸이다. 이렇게 봉헌자와 봉헌시기가 구체적으로 알려질 수 있었던 건 동자상 안에서 유물이 나왔기 때문이다.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해 조사를 하다 그 안에서 서책, 기원문, 저고리 등등의 복장 유물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 유물들은 일괄로 보물 제793호로 지정되었다. 관대걸이를 비롯하여 동종, 목조문수동자좌상까지 상원사는 세조와 관련된 유물들이 참 많은 곳이다.

 

상원사가 높은 고지대에 있어서 그런지 전망대에서 주위를 둘러보는 느낌이든다. 주위가 아늑하다. 좋은 기운을 받는 느낌이다. 그래서 이곳이 문수 신앙의 요람이자 천하 명당으로 불리는 것인가? 이렇게 좋은 기운을 받으며 걸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오대산 선재길이다.

 

 

 

 

 

 

* 상원사 동종

 

 

 

 

 

 

*상원사

 

 

 

 

 

 

 

 

 

 

*** 도움말

 

1. 오대산 선재길: 약 9km / 예상이동시간 3시간 30분 정도.

2. 동서울터미널에서 평창군 진부면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음. 소요시간 2시간 30분.

3. 진부면 공용터미널에서 월정사 입구까지 시골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음. 소요시간 약 25분.

4. 필자는 월정사 -> 상원사 방향을 추천함. 상원사가 버스 종점이기 때문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