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쌍폭포

 

 

 

 

 

 

 

2021년 5월 24일 월요일

 

전날 강릉에서 동해로 이동하여 숙박을 했다. 이날은 동해시의 자랑인 두타산 무릉계곡을 탐방하는 날이다.

도대체 얼마나 멋들어졌으면 무릉계곡(武陵溪谷)이라고 불렸을까! 명칭만으로도 풍유객들의 발걸음을 확 이끈다. 탐방 순서는 이렇다.

 

무릉반석(금란정) -> 삼화사 -> 학소대 -> 관음폭포 -> 쌍폭포 -> 용추폭포

 

무릉계곡은 두타산(1,352m)과 청옥산(1,403m)이 빚어놓은 천혜의 절경이다. 둘 다 해발고도가 천 미터가 넘는 험준한 산이라 자칫 무릉계곡도 난이도가 높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무릉계곡은 느긋하게 계곡 트레킹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풍경 하나하나가 다 아름답고 귀해서 일부러라도 발걸음 하나하나도 천천히 두고 싶은 곳이다. 그런 곳이기에 1977년 3월 17일에 국민관광지1호로 지정되었고, 이후 2008년 2월 5일에는 명승 제 37호로 지정되었다.

 

동해시내에서 무릉계곡으로 향하는 시내버스는 상당히 많다. 대신 시내권에서 약 15km 정도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이동시간은 30분 이상이 소요됐다. 잘 확인을 하고 이동을 하시기 바란다.

 

매표를 한 후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금란정과 무릉반석이라고 불리는 너럭바위다. 금란정은 금란계(金蘭契) 회원들이 세운 정자인데 좀 사연이 있는 건축물이다.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으로 이 지역의 향교가 폐쇄가 됐다. 이에 울분에 찬 유림들이 금란계를 조직한 후 모임 장소로 쓰일 수 있는 건물을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일제의 방해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해방 이후에야 금란정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금란정은 북평에 있었다. 혹시 들어보셨을지도 모른다. 북평 5일장. 바로 그 북평에 금란정에 서 있었는데 1956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건을 했다. 북평은 동해항과 가까운데 직선거리로 약 2km도 되지 않는다.

예전 2012년도에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 강릉을 거쳐 동해로 이동을 했는데 북평에서 1박을 했었다. 숙소에서 잔 게 아니라 후미진 곳에서 텐트치고 잤었다. 그곳이 바로 북평 성당이었다. 성당 내에 공터같은 곳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것이다. 관계자분에게 사정 말씀을 드렸을 때 필자를 좀 기특하게 보셨던 걸로 기억을 한다. 별로 안 기특한데...ㅋ

 

금란정을 지나 무릉반석을 보러갔다. 계곡의 너럭바위가 이렇게도 평평하고 크다니! 자연이 빚은 천연의 대운동장 같다. 한 천 명 정도가 동시에 앉아도 끄떡없을 거 같다. 높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주위를 감싸고 유유히 계곡물이 흐르고 있으니 누구나 다 풍유객이 될 수밖에... 그래서인지 무릉반석 곳곳에는 글씨가 새겨져있다. 풍유객들이 이런 평평한 바위를 그냥 지나쳤겠는가! 그렇게 흔적을 남긴 이 중에는 매월당 김시습 선생도 있었다. 또한 조선시대 명필 중에 한 명이었던 양봉래의 글씨도 있다. 양봉래는 '무릉선경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境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는 풍경과 지명에 딱 걸맞은 글씨를 남겼다.

 

 

 

 

 

 

 

* 삼화사: 철조노사나좌불

 

 

 

 

 

 

 

* 삼화사3층석탑

 

 

 

 

 

 

 

이제 삼화사(三和寺)를 보러가자. 신라 자장율사에 의해 건립된 삼화사는 그 창건 시기가 642년(선덕여왕 11)에 이른다. 삼화사는 흑연대(黑連臺) 혹은 삼공사(三公寺)으로도 불렸는데 이와 관련하여 각기 다른 창건설화가 있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율사가 동해안 일대를 두루 다니다 두타산에 이르러 절을 지으니 그것이 바로 흑연대라는 것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사찰이라하면 '~사', '~암', '~정사'로 끝나야 하는데 '~대'로 끝나니까. 이에 약사불삼형제의 이야기가 있다. 병을 치유해주는 약사부처님이 삼형제로 오셨다는 이야기인데 SF 어드벤처같은 스토리지만 잠깐 언급해본다.

 

약사삼불인 백(伯)·중(仲)·계(季) 삼형제가 멀리 이국에서 무릉계곡으로 들어온다. 삼형제는 각기 색깔이 다른 연꽃을 들고 왔는데 첫째는 흑련(黑蓮), 둘째는 청련(靑蓮), 셋째는 금련(金蓮)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후 삼형제가 머무른 곳은 각각 흑련대, 청련대, 금련대가 됐다. 자장율사가 흑련대를 창건했다는 이야기는 약사불 삼형제 중 첫째의 스토리와 서로 맞물린다.

 

두번째는 삼공사와 관련된 이야기다. 불교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은 신라 말기에 유행했던 구산선문에 대해서 한번쯤 들어보셨을 것이다. 구산선문은 경전 위주의 교종과는 달리 수행에 중심을 둔 선종의 9개 선문을 말한다. 한마디로 신라 말기에 9개의 선종 문파가 산을 중심으로 세워졌다는 것이다. 수행하기에는 산이 딱이지 않은가.

 

구산선문 중 사굴산파를 연 범일국사라는 분이 계시다. 범일국사가 개창한 굴산사는 강릉에 위치해있는데 도보여행길인 강릉바우길 6구간을 걷다보면 닿을 수 있다. 강릉바우길 6구간의 다른 명칭은 '굴산사지가는길'인데 네이밍에서도 보이듯 현재 굴산사는 폐사가되었다. 그래도 그곳에 가보면 굴산사지 당간지주가 우뚝하게 서서 도보여행자들을 반겨준다.

 

범일국사가 무릉계곡에 사찰을 창건하니 그곳이 바로 삼공사였다. 고려 건국 이후 삼공사는 드디어 삼화사(三和寺)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름을 바꾼 이는 왕건이었다. 왕건이 삼공사에서 후삼국의 통일을 기원하였고 이후 '세 나라를 하나로 화합시킨 영험한 절'이라는 뜻의 삼화사로 개칭을 한 것이다.

 

그렇게 좋은 뜻을 가진 삼화사지만 아픔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계곡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서 그런지 홍수 피해를 입기도 했고, 화재를 당해 다시 고쳐짓기도 했다. 1907년도에는 방화에 의한 피해를 입기도 했다. 사찰이야 목조건물이 대대수라 화재에 항상 취약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하지만 방화라니! 누가 감히 천년고찰에 불을 질렀단 말인가!

 

일제가 불을 질렀다. 1907년이었다. 동해안 지역에서 활동했던 의병들이 삼화사에서 도움을 받게된다. 이에 일본군은 삼화사를 불태워버린 것이다. 이런 만행을 저지르다니! 부처님이 노할 일이다. 산길로 한 시간 정도 올라가면 두타산성이 있는데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이 지역 의병들의 거점이라고 하니 삼화사 일대는 일본과 연관이 많이 곳이라고 할 수 있다.

 

 

 

 

 

* 두타산 무릉계곡 숲길

 

 

 

 

 

 

 

* 학소대

 

 

 

 

 

 

 

삼화사의 시련은 여기가 끝이아니다. 사실 삼화사는 1977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을 했다. 원래 자리는 동쪽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곳인데 이곳에 시멘트 공장이 들어서게 되어 옮기게 된 것이다. 수많은 시련을 견뎌냈던 천년고찰이 시멘트 공장에 밀려나다니... 안타까울 뿐이다.

 

사천왕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가면 본전인 적광전이 있고 그 앞에 3층 석탑이 보인다. 보물 제1277호로 지정되어 있는 삼화사 3층석탑인데 이 탑도 사연이 많다. 1977년 시멘트 공장을 피해 삼화사가 이전을 했을 때 함께 이동을 한다. 하지만 터를 잘못 잡았는지 그 뒤 20년 후인 1997년에 현재의 자리로 다시 이건을 한다.

두 번이나 자리를 옮겨서 그런가? 현재의 자리가 제자리인 거 같다. 높이 4.8미터짜리 3층석탑이 본당 앞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다보니 중심이 꽉 잡힌 느낌이다.

 

후기 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니 3층석탑도 천 년의 시간을 버틴 셈이다. 삼화사 석탑은 좀 특이한 점이 있다. 석재가 석회암이다. 우리나라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화강암이 아닌 석회암으로 석탑을 쌓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1977년도 삼화사가 이전을 했던 일을 생각해보시라. 시멘트 생산한다고 천년고찰을 이전을 시키지 않았던가. 시멘트의 원료가 바로 석회암이다.

 

석재의 특성상 화강암보다 석회암이 더 풍화에 취약하다. 삼화사 3층석탑도 마찬가지다. 군데군데 훼손이 됐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태는 큰 훼손없이 잘 드러나있다. 상륜부인 찰주 부분이 두드러져 보이는데 꺾인 찰주에 걸린 보주 하나가 인상적이다. 찰주는 탑의 상륜부에 장식물들을 꽂기 위해 세운 쇠로 만든 기둥이다. 마치 피뢰침처럼 생겼다. 보주는 상륜부를 구성하는 장식물로 찰주에 쏙 끼어넣는다. 잘 연상이 안되면 여의주를 생각하시면 된다. 삼화사 3층석탑의 찰주에는 보주 하나가 달랑 하나 걸려있다. 얼핏보면 까치밥처럼 보인다.

 

이제 본당인 적광전에 가보자. 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곳이다. 꼭 대웅전이 사찰의 본당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극락전이 본당이 될 수도 있고, 약사전이 본전이 될 수도 있다. 부처님은 한 분만 계시는게 아니니까. 불교는 유일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지 않은가.

 

삼화사 적광전에는 보물 제1292호로 지정된 철조노사나좌불이 있다. 은은한 미소를 짓는 부처님을 잘 표현됐다. 어떤 솜씨좋은 이가 만들었을까. 구부리기도 쉽지 않은 거친 질감의 철로 저렇게 멋진 작품을 만들 수 있다니. 그저 감탄사가 나올 뿐이다. 한편 노사나불은 비로자나불의 다른 이름이다.

 

삼화사를 나오면 본격적으로 무릉계곡을 걷게 된다. 두타산과 청옥산이 품고 있는 곳이라 그런지 무릉계곡 일대에는 폭포가 많다. 관음폭포, 쌍폭포, 용추폭포 등등... 기암괴석들도 만날 수 있다. 학소대, 병풍바위, 만물상 등등... 울창한 계곡숲길을 따라가면서 만나는 폭포는 탐방객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 기암괴석들은 눈을 즐겁게 한다.

 

무릉계곡 탐방은 쌍폭포와 용추폭포에서 절정에 이른다. 부드럽게 완경사로 이어진 탐방로를 따라가다 쌍폭포를 만나고, 이후 용추폭포에 다다른다. 힘차게 쏟아지는 폭포수 소리를 눈을 감고 들어본다. 귓전을 때리는 폭포 소리에 속이 다 시원해진다. 유량이 많으면 더 경쾌한 소리를 감상할 수 있으니 비가 온 뒤에 무릉계곡을 탐방하면 더 다이나믹할 거 같다.

 

이렇게하여 신선놀음같던 두타산 무릉계곡 트레킹이 끝이났다. 원점회귀형 코스라 왔던 길을 다시 돌아와야 하지만 그것조차도 좋다. 워낙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라 올라가는 길도 내려가는 길도 모두 다 즐겁기 때문이다. 그냥 가기가 아쉬울 정도다. 이참에 그냥 무릉도원에서 자리깔고 신선이나 되볼까?ㅋ

 

 

 

 

 

 

* 용추폭포

 

 

 

 

 

 

* 쌍폭포: 쌍폭포중 계단식으로 낙수되는 폭포.

 

 

 

 

 

 

*관음폭포

 

 

 

 

 

 

* 무릉반석

 

 

 

 

 

 

*** 두타산 무릉계곡 가는법

1. 동해시내나 동해역 인근 버스정류장에서 무릉계곡행 시내버스탑승

2. 동해역 기준으로 이동시간은 약 20~30분 정도 소요됨. 배차간격은 약 30분 정도임.

 

 

 

 

 

 

 

 

 

* 정동심곡바다부채길

 

 

 

 

 

 

 

2021년 5월 23일 일요일 / 여행 5일차

 

이전 포스팅에서 언급한 것처럼 전날 관음리5층석탑 탐방을 너무 늦은 시각에 했다. 그러다보니 숙소에 거의 밤 12시경에 들어갔다. 이러니까 여행이 노동이 되버리는거지... 이것도 팔자인가?ㅋ

 

이날은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을 탐방하러 갔다. 바다부채길은 강릉시 강동면에 위치해있는데 정동진과 심곡항 사이에 있다하여 정동심곡 바다부채길로 불린다. 2017년 6월에 개통된 바다부채길은 아름다운 해상 비경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곳이다.

 

강릉시내에서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을 가려면 강릉역에서 정동진역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게 좋다. 하지만 기차가 많이 있지 않다. 차선책으로 남대천강릉교 정류장에서 정동진역행 버스를 타보자. 배차간격이 약 40분 정도라 시간을 잘 맞춰어야 한다. 만약 시간이 좀 엇나가면 인근에 있는 월하거리에 가서 주점부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하긴 배차간격 40분이면 양호한 거지. 하루에 버스가 4번 들어가는 곳을 탐방했을 때를 생각해봐!ㅋ 이 버스는 마을112번인데 강릉역에서도 탈 수 있다.

 

 

 

 

 

* 부채바위

 

 

 

 

 

정동진역으로 유명한 정동진은 해안단구로도 유명하다. 정동진의 해안단구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천연기념물 437호(2004년 4월 9일)로 지정되었다. 정동진 해안단구는 면적이 넓고, 보존상태가 좋아 천연기념물이 된 것이다.

 

해안단구(海岸段丘)에 대해서 조금만 더 알아보자. 해안단구는 파식, 즉 파도에 의해서 침식이 된 평평한 지형을 말한다. 한자 구(丘)는 '언덕구'다. 이런 평평한 부분이 해수면 아래에 있다 지각작용으로 인해 지금처럼 수면 위로 올라와 해안단구가 된 것이다. 지각이 올라오는 건 '융기'라고 말한다. 올라오는 것과 달리 물이 빠져서 해안단구가 형성되기도 한다. 바닷물이 빠졌다는 것이다. 하여간 지구는 살아있다. 올라오거나 내려오거나 하니...ㅋ

 

넓은 지형이 드러나서 그런지 정동진 해안단구에는 대형 크루즈선도 올려져있다. 여객선의 외형으로 만들어진 썬크루즈리조트를 말하는 것이다. 급경사였다면 이런 형식의 리조트를 건설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릉을 갈 때마다 항상 그 리조트에서 숙박을 하고 싶었는데... 현실은? 항상 싸구려 여관이었지...ㅋ

 

본격적으로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을 가보자. 바다부채길은 파도가 치는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는 것이 매력이다. 파도가 세게치면 옷에 짠물이 튀기기도 할 정도다. 그런만큼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파도가 거세게 치는 날에는 입장이 불가능하다. 또한 2020년 태풍으로 망실된 심곡 부근 탐방로가 복구가 되지 않아 부채바위까지만 개방이됐다. 2021년 5월 현재의 이야기다. 조속히 복구가 되어 전 구간 탐방이 됐으면 좋겠다.

 

철썩철썩 파도가 치는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다.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은 파도를 좋아하는 사람이 걸으면 좋을 거 같다. 전 구간이 평탄하고, 데크로 만들어져 있어 걷는데 무리가 없다. 하지만 정동매표소 입구 구간의 계단은 '헉' 소리가 난다. 다리에 근육 좀 생길거다...ㅋ

 

ps. 정동심곡 바다부채길이 좋기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속초 외옹치 바다향기로를 더 선호한다. 왜? 외옹치 바다향기로는 공짜니까.

 

 

 

 

 

 

* 정동진 해안단구: 지형이 평평하여 그 위에 썬크루즈리조트가 만들어져있다.

 

 

 

 

 

 

* 정동진역

 

 

 

 

 

 

 

*정동심곡바다부채길: 투구바위. 사진 상단 왼쪽에 있는 바위가 투구바위다.

 

 

 

 

 

 

 

* 정동심곡바다부채길

 

 

 

 

 

 

 

* 정동심곡바다부채길

 

 

 

 

 

 

 

* 정동심곡바다부채길: 정동진 해안단구. 평평한 지형이 드러나보인다.

 

 

 

 

 

 

 

*** 정동심곡 바다부채길 가는법

 

1. 기차: 강릉역에서 정동진역행 기차를 이용. 약 15분 정도 소요됨.

2. 시내버스: 마을112번 탑승(남대천강릉교 정류장 혹은 강릉역정류장)

3. 정동진역에서 썬크루즈리조트 방면으로 걸어감. 약 30~40분 정도 소요됨.

 

 

 

 

 

 

 

 

 

 

* 강릉관음리5층석탑: 심령사진이 아님.

 

 

 

 

 

 

 

2021년 5월 22일 토요일 / 여행 4일차

 

전날 양양에서 강릉으로 이동을 했다. 느그적거렸더니 벌써 오후가 되어버렸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강도가 낮은(?) 과업을 수행하기로 했다. 강릉 시내권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성산면 관음리5층석탑을 탐방하러 가기로 했다. 지도 검색을 해보니 강릉버스터미널에서 약 5km 정도 떨어져있었다. 5킬로면 쉬엄쉬엄 가더라도 2시간 정도 아닌가! 그래 오늘은 좀 놀면서 탐방하자.

 

관음리5층석탑에 대해서 검색을 하다가 이곳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는 블로그 글을 읽었다. 강릉에 거주하시는 어떤 시민기자가 작성한 기사였는데 그런 글을 쓰셔서 좀 의아했었다.

 

'시내권에서 직선거리로 5킬로 밖에 안 되는 곳이 접근이 어렵다고?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 말이 맞았다. 관음리5층석탑을 찾는데 엄청 고생을 했다. 길을 헤매서 약15km 정도를 걸었던 거 같다. 마지막에는 철조망도 넘어야했다. 10kg가 넘는 배낭을 메고 짧은 다리로 철조망을 넘으려니...ㅋ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했냐? 일단 현지 시민들이 관음리5층석탑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 오히려 필자한테 그런곳이 있냐고 되묻더라. 그리고 관음리 일대가 상당히 외졌다. 시내권과 가까울 뿐이지 민가도 띄엄띄 엄 있었고 버스편도 몇 편 없었다.

 

강릉남대천에 진입해서 뚝방을 걸었다. 좀 돌아가더라도 뚝방길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이날따라 갑자기 폭염이 몰려왔는지 엄청나게 덥더라. 5월 1일에 설악산 일대에 폭설이 내렸었는데 언제 그랬냐는듯이 20일 만에 초여름 날씨로 변하다니! 이것도 기후변화 때문에 그런 것인가?

 

그렇게 걷다보니 더위를 먹었나? 관음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온 것이다.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이때부터 머리가 찡해지기 시작했다. 대신 다리는 아주 빨라졌다. 지도를 계속 체크를 하는데 계속 뱅뱅거리며 같은 지점을 도는 느낌이 들었다. 막판에는 현지분이 알려주신 철조망을 넘기까지했다. 그렇게 그렇게 관음리5층석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주 늦은 시각에...!

 

관음리5층석탑이 서 있는 자리는 안국사지라고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에는 석탑말고도 돌로 만든 대좌가 있다. 이 대좌에는 예전에 석불이 올려져 있었을 것이다.

 

관음리5층석탑은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 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높이가 3.3미터인데 5층 석탑치고는 크기가 작은 편이다. 안타깝게도 5층 탑신 부분이 결실되어 있다. 그래서 크기가 작은 것인지도 모른다.

 

너무 늦은 시각에 도착해서 그랬는지 사진들이 무슨 심령사진같다. 심야괴담회용 사진인가? 주위에는 불빛 하나 없더라. 대신 산짐승들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계속 들리고... 뭐 이렇게 늦은 시각에 답사를 할 수도 있는 거지. 하지만 늦게 가면 좋은 사진을 찍기는 어렵지. 카메라가 별로 안 좋으니까.

 

그래도 막판에는 운이 좀 뜨였다. 근처에 사시는 분이 트럭으로 터미널까지 픽업을 해주셨다. 얼마나 고맙던지! 만약 그렇게 안 됐다면 새벽까지 걸어갔을지도 몰라. 택시비 때문에...ㅋ

 

 

 

 

 

 

* 강릉관음리5층석탑

 

 

 

 

 

 

 

* 석불대좌

 

 

 

 

 

 

 

 

 

 

* 소금산 출렁다리

 

 

 

 

 

 

 

2021년 4월 2일 금요일.

 

이전 흥법사지 탐방에 이어서... 흥법사지에서 소금산 출렁다리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4km 정도에 달한다. 하지만 중간에 간현관광지를 만나는터라 실제 체감되는 거리는 그만큼 길지는 않다. 간현관광지에서 화장실도 가고, 식사도 하고...

 

흥법사지에서 간현관광지까지는 농로길을 따라가거나 섬강 수변로를 따라 이동할 수 있다. 산길도 이용할 수 있는데 좀 길이 정비되지도 않았고, 표지판도 없어서 자세한 내용은 소개하지 못한다. 사실 필자는 산길을 따라갔는데 중간에 가시덤불에 찔리고, 사나운 개에 쫓기는 등 아주 쇼를 했다. ㅋ

 

그래도 나중에 트레킹팀과 함께 갈 때는 산길로 이동을 해야쥐! 뭐 약간 모험도 하고 그러는 거잖아~ㅋ

 

2018년 1월 11일에 개통된 소금산 출렁다리는 원주의 대표적인 관광 명물이 됐다. 원래 소금산은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했었다. 이미 소금산 아래에 간현관광지가 조성되어 있을만큼 원주의 명물중에 한 곳이었다. 그러다 출렁다리가 개통되고 나니 관광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빼어난 자연경관에 스릴을 즐길 수 있는 인공시설물이 등장하니 서로 상승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지상 100미터 높이에 길이 200미터로 만들어진 소금산 출렁다리에 서면 주위 일대가 시원스럽게 조망된다. 누구는 출렁다리가 무섭다고 하는데 필자는 느긋하게 통과했다. 좀 바람이 세게 불고 해야 무서우려나...^^

 

입장료 3천원 값을 탈탈 뽑으려고 사진을 아주 많이 찍었다. 소금산과 간현산이 협곡을 이루고 그 아래를 유유히 흐르는 섬강이 흐르고 있으니 찍는데마다 명품 사진이었다.

 

매표소에서 출렁다리까지는 약 500여개에 달하는 계단을 올라야 한다. 다리운동 좀 제대로 하실 것이다.

500계단을 올라야 할 정도로 출렁다리는 그 값어치가 있는 곳이다. 하지만 생각해 볼거리도 있다. 자연에 어디까지 인공시설물을 받아들일 것인가? 돈이 된다고 무턱대고 인공 시설물들을 만들 것인가?

 

자연미로 승부가 가능한 곳이면 자연미로 승부를 했으면 좋겠다. 인공미는 최대한 줄이는게 맞다.

 

 

 

 

 

 

 

 

 

* 간현관광지

 

 

 

 

 

 

* 여행정보

1. 소금산 출렁다리 입장료: 3천원 -> 이중 2천원은 원주상품권으로 돌려받는다.

2. 간현관광지에서 서원주역으로 이동하여 기차를 탈 수 있음. 시내버스로 약 10분 정도 소요.

서원주역은 2021년 1월 5일에 상업운영을 시작했음.

3. 간현관광지에서 서원주역까지 걸어서 이동할 수 있음. 두 곳은 약 3km 정도 떨어져있음.

 

 

 

 

 

 

 

 

* 의민공사우: 하늘이 예뻐서 한 컷

 

 

 

 

 

 

 

 

 

* 소금산 출렁다리

 

 

 

 

 

 

 

* 출렁다리에서 본 모습

 

 

 

 

 

 

 

* 출렁다리에서 본 모습

 

 

 

 

 

 

 

 

* 배낭: 본인대신 배낭이 인증샷을 해줌.

 

 

 

 

 

 

 

 

 

 

 

* 흥법사지 3층석탑

 

 

 

 

 

 

 

 

2021년 4월 2일 금요일.

이날은 원주에 있는 흥법사지를 탐방했다. 이전 포스팅에도 언급했듯이 강원도 원주 일대에는 큰 폐사지들이 여러개가 있다. 원주시 부론면에 자리잡고 있는 거돈사지와 법천사지에 이어 흥법사지에 대한 포스팅을 해본다.

 

여기서 잠깐 의문이든다. 왜 강원도 원주와 경기도 여주에 큰 폐사지가 많은지에 대해서... 이곳은 남한강이 흐르고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뿐만아니라 고려시대에도 남한강 수계는 무척이나 중요한 교통로였다. 고려는 이곳에 흥원창이라는 조창을 설치하여 세곡을 거두어들였다. 이곳은 현재 원주시 부론면에 위치해있다.

 

다시 흥법사지 이야기로. 흥법사지는 원주시 지정면에 자리잡고 있는데 뒤쪽으로는 영봉산이라는 야트막한 산이 둘러싸고 있다. 영봉산은 소금산과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데 소금산에는 유명한 출렁다리가 놓여 있다. 워낙 유명해서 그런지 소금산 출렁다리는 주중에도 사람들이 티케팅을 하더라.

 

신라 말에 창건된 흥법사는 고려 개국시기에 크게 중창된다. 흥법사에 주석한 진공대사 충담이 태조 왕건의 왕사였기 때문이다. 신라의 귀족 출신인 충담은 당나라에 유학가서 불법을 연구하는데 충담이 귀국하자 왕건은 그를 극진히 대접하며 왕사로 임명했던 것이다. 왕건이 그를 얼마나 극진히 대접했냐면, 진공대사가 열반에 이르자 탑비에 들어가는 비문을 왕건 자신이 직접 지었다는 것이다. 탑비의 비문은 고위 학자들이 짓는게 일반적인데... 왕이 직접 짓다니!

 

흥법사지도 여느 폐사지처럼 주변에 논과 밭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우뚝 서 있어야 할 당간지주가 없기에 그 역할을 삼층석탑이 대신해주고 있다. 흥법사지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고려시대 3층석탑인데 1층 탑신부에 문고리를 조각해 부처님의 사리가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사진에도 보이듯 흥법사지 3층석탑은 여러부분의 석재들이 파손됐다. 옥개석은 끝단이 잘려나갔고, 하부 기단도 금이 갔다. 탑신 전체도 약간 기울어진 모습이다. 나중에 해체복원도 필요해보인다. 이렇게 훼손된 민낯을 드러낸 흥법사지 3층석탑이지만 그래도 당당히 보물 464호로 지정되어 있다. 약 3.7미터 달하는 3층 석탑이 없었다면 흥법사지의 모습은 무척 쓸쓸했을지 모른다.

 

 

 

 

 

 

 

 

* 진공대사탑비: 중간에 비가 없고, 받침돌인 귀부와 머릿돌인 이수만 있다.

 

 

 

 

 

 

 

 

 

* 진공대사탑비: 머리 부분에 네모난 홈이 있다. 무언가 별도의 장식이 있었을 것이다.

 

 

 

 

 

 

 

 

 

눈길을 돌려 드디어 진공대사탑비를 바라보았다. 3층 석탑과 아주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 구조를 보니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석탑은 사찰 가람의 중심이잖아. 통상적으로 무슨무슨 대사 탑비나 부도는 사찰 외곽에 조성하지않나?'

 

그만큼 진공대사의 위상을 보여주는 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진공대사가 열반에 든 건 940년이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것이 936년이었으니 한참 고려의 국운이 뻗어나갈 때 진공대사탑비가 만들어지고 흥법사가 크게 중창된 것이다.

 

사찰의 중심부에, 그것도 태조 왕건이 비문을 작성했으니 흥법사를 방문한 사람들은 당연히 진공대사탑비를 보려고 했을 것이다. 필자도 그랬다. 한자 실력이 낮지만 그래도 봐야쥐~

 

이게 뭐야! 비좌 역할을 하는 귀부와 머리장식인 이수만 있는 것이다. 왕건이 작성한 비문을 보고 싶단 말야! 내 한자 실력을 만방에 알리고 싶단 말야!^^

 

귀부와 이수 사이에 긴 막대처럼 있어야 할 비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 반출됐다 다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세파에 시달렸는지 비는 4조각으로 짤려나갔다고 한다. 무슨 조각피자도 아니고 말야.

 

중간에 있어야 할 비가 타향에 있지만 귀부와 이수만 있는 현재의 모습도 그 자체로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부터 현재의 모습이 완성품이었나 할 정도로 귀부와 이수가 서로 딱 맞아떨어져 보인다. 그래서 보물 463호로 지정되어 있다. 얼핏봤을 때 작은 장갑차처럼 보였는데 그걸 타면 수륙양용으로 달릴 수 있으려나?

 

보시다시피 용인지 거북이인지 정말 정교하게 잘 조각을 해놨다. 발톱과 갑옷도 보시라. 하나하나 부족한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화려한 장식을 한 머릿돌인 이수도 보시라. 용이 날아갈 거 같지 않은가?

 

이렇게 귀중한 문화재가 있지만 흥법사지는 방치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위가 논밭이라 그런지 인근에는 농업 쓰레기들이 많이 보였다. 탑비 옆에는 담배꽁초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흥법사지가 유명하지 않아서인지 마땅히 주차할 곳도 없어보였다.

 

흥법사지를 사적지로 지정하자는 한 시민단체의 현수막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직선거리로 20km도 안 떨어져 있는 원주시 부론면의 법천사지와 거돈사지는 사적지로 지정되어 잘 보호를 받고 있다. 하지만 흥법사지는 일부러 찾지 않는 이상은 발길이 쉽게 가지 않을 정도로 방치되어 있다. 보물 2점이 있고, 인근에 소금산과 연동하면 많은 이들이 탐방할 수 있는 소중한 문화 유산인데 말야.

 

예산 쏟아부어서 이상한 조형물 만드는 것보다 있는 문화재 잘 활용하면 그것 자체가 문화재 힐링 여행이 되는 것이다.

 

 

 

 

 

 

 

 

* 흥법사지 3층석탑

 

 

 

 

 

 

 

 

* 흥법사지: 주위는 논밭으로 변했다.

 

 

 

 

 

 

 

 

 

 

* 흥법사지: 방치된 석물들. 왼쪽 연꽃 받침돌은 석등의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 흥법사지: 국가사적 지정 청원 현수막

 

 

 

 

 

 

 

 

 

 

 

 

 

 

 

 

 

4월 1일 목요일.

 

백패킹의 성지라고 불리는 여주 강천섬 일대를 탐방했다. 이전 포스팅에서 세종대왕릉과 신륵사를 기록했으니 경기도 여주만 이 근래에 세번째다. 그만큼 남한강을 품고 있는 여주가 아름답다는 뜻이고, 가볼 곳도 많다는 이야기이다.

 

강천섬이 우리들에게 다가온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4대강 사업이 있기 전까지 강천섬은 물이 불어나면 자취를 감췄다가 물이 빠지면 그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사실 지금도 한강 수계에 홍수가 발생하면 강천섬은 물 속에 잠길 수도 있다. 그래서 화장실 같은 시설도 침수가 예상될 시에는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이동식이다. 강천섬은 축구장 80개 정도의 넓이인데 화장살이 달랑 하나다. 그만큼 침수까지 고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뭐니뭐니해도 강천섬의 큰 매력은 수변을 보면서 한가롭게 트레킹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수변트레킹의 진수라고나 할까나... 잘 정비된 산책로, 잘 가꾸어진 나무들. 하지만 역시 아쉬운 달랑 하나 화장실...ㅋ

 

백패커들의 성지답게 평일인데도 많은 텐트들을 보았다. 필자는 유유히 그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이날 날씨가 정말 맑았는데 마치 가을하늘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진도 아주 예쁘게 잘 나왔다. 마치 사진을 득템한 느낌이었다.

 

봄날에 가을하늘을 만난 느낌이라고 할까? 언제 이런 멋진 강천섬 사진을 또 찍을 수 있겠어!

 

강천섬을 뒤로 하고 남한강을 따라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으로 향했다. 여주에서 만든 도보여행길인 여강길을 따라가면 원주시 부론면에 닿을 수 있기에 그렇게 갔는데... 간만에 야간 트레킹 좀 했다. 헤드랜턴도 안 가져갔는데 말야. 도 경계지역이라 그런가, 아주 깜깜했다. 가로등 하나가 아쉽더라.

 

뭐 별 수 있는가 트레킹하다보면 별의별 일이 다 있으니까! 그런 가변성이 트레킹의 매력 아니겠어~^^

 

 

 

ps. 강천섬은 2021년 6월부터 캠핑이 금지된다. 일부 그릇된 캠퍼들 때문에 캠핑의 성지가 날라가게 된 것이다.

 

 

 

 

 

 

 

 

 

 

 

 

 

 

 

 

 

 

 

 

 

 

 

 

* 문인석

 

 

 

 

역사트레킹을 행하다보면 무덤도 많이 탐방한다. 왕이 모셔진 왕릉, 세자 혹은 세자빈이 잠들어 있는 원, 사적으로 지정된 사대부들의 묘.

 

그런 무덤들은 후손들이 부지런해서인지 아니면 사료적 가치가 뛰어나서인지 아무튼 잘 관리되어 있다. 왕릉의 숲길은 어떤가? 왕릉이 아니라 숲길을 걸으려고 일부러 티켓팅을 할 정도다.

 

4월 19일 월요일. 내시묘역이라 불리는 초안산을 탐방했다. 서대문 안산 말고 강북에 있는 초안산. 이곳은 궁인들과 상민들의 묘가 무려 천 여기에 달했다. 지형이 야트막하고 도성에서 가깝기에 그랬던 것이다. 초안산의 묘들은 서남쪽 방면으로 향한 것들이 많은데 아무래도 그 방향에 궁궐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런 듯하다.

궁인들은 죽어서도 궁궐을 향해 마음을 두고 있나보다.

 

후손이 없는 주인을 잃은 묘라서 그런가? 초안산의 분묘들은 훼손되고 방치됐다. 이런 모습들은 또다른 내시묘역이라고도 불리는 이말산 일대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이말산은 북한산 서쪽편의 작은산으로 무덤을 쓰기에 적당한 곳이다.

 

초안산 곳곳에 파손된 석물들이 방치되어 있다. 특히 목이 잘린 문인상을 여럿 목격했다. 어떤 것은 무언가로 내리친 것처럼 절단면이 비교적 예리하게 잘려있었다. 진짜 누군가 일부러 손상을 시켰다면 그건 명백한 범죄 행위다. 현행법으로 문화관리법 위반이다. 저승법으로는 천벌을 받을지 모른다.

 

차라리 집에 가져가지 왜 자르나!

 

앞서 언급한 이말산에도 버려지고 훼손된 석물들이 아주 많다. 그곳에도 예리하게 절단된 석물들이 꽤 많이 목격된다. 특히 문인석과 동자석의 훼손이 심했다. 도대체 목을 왜 자르나? 그것을 보니 갑자기 목잘린 단군상이 생각나더라.

 

 

 

 

 

 

* 석물: 상석, 비좌, 문인석. 얼핏봐도 오른쪽 문인석의 목 부분이 이상해보인다.

 

 

 

 

 

 

* 문인석: 왼쪽 문인석인데 어깨 부분이 실리콘으로 발라졌다. 실리콘을 바른 위쪽으로 잘려 나간 파편들이 보인다.

 

 

 

 

 

 

필자가 오버하며 생각한다고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떤 무덤가를 가보니 명확해졌다. 그 무덤에는 상석, 비석, 문인석 한쌍이 있었다. 문인석 한 쌍은 둘 다 머리가 잘렸는데 나중에 실리콘으로 발랐는지 목 부분이 지저분하게 접착되어 있었다.

 

그래서 상석과 비석 부분을 살펴보았다. 문인석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상석과 비석은 방치된 거 말고는 딱히 눈에 띄는 훼손은 없었다. 정확히는 비석은 비좌, 즉 받침대만 있었다. 하지만 그 비좌는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참고로 상석은 상돌이라고도 불리는데 네모나게 생긴 상이다. 돌로 만든 제사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문인석의 목 뒷부분을 살펴봤는데 무엇에 찢겨 나간 듯 큰 파편 조각이 잘려나갔다. 약하다는 석회암도 그렇게는 안 잘려나가겠다. 화강암으로 만든 동자석이 그렇게 약하다고 할 수 있나. 타인 무덤의 석물을 함부러 건들이지 마라. 그 석물들은 망자에게 속한 것들이니까...

 

버려진 무덤가를 탐방하다 보면 죽음에 대해서 곱씹어 보게 된다. 왕릉처럼 잘 관리되어 후세에게도 자주 회자되는 무덤들이 있는가 하면 죽어서까지도 버려지고 잊혀진 묘들도 있다.

 

평소 문인석을 듬직해 해서 그런가 목 잘린 문인석을 바라보고 있으니 정말 씁쓸하다. 하지만 어떤 문인석은 봉분이 다 사라져 자신의 임무도 끝났지만 아직까지도 꿋꿋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새로운 임무까지 부여받은 듯싶었다. 누군가가 복을 빌며 복 쌀알을 올려놨으니까. 그 문인석 얼굴을 보니 아주 해맑은게 복스러운 얼굴이었다. 누구라도 그 앞에서 서면 미소를 지을 것이다. 그 문인석의 새로운 임무처럼 세상의 복밭에 결실이 많이많이 맺었으면 좋겠다.

 

 

 

 

 

 

 

 

* 초안산 숲길

 

 

 

 

 

 

 

 

* 문인석: 목이 잘렸다. 내 무덤의 문인석도 아닌데... 마음이 아프다.

 

 

 

 

 

 

 

 

 

 

 

* 문인석: 후더분한 표정이 마음에 드는 문인석.

 

 

 

 

 

 

 

 

 

* 문인석: 복 쌀알이 올려져 있다. 세상의 복밭에 좋은 결실이 많이 맺어졌으면...

 

 

 

 

 

 

 

 

 

 

 

* 문인석: 이스턴섬의 모아이 석상 부럽지 않은 문인석들. 초안산 비석골 근린공원에 전시되어 있다.

 

 

 

 

 

 

 

 

 

 

 

 

 

 

* 세종대왕릉

 

 

 

 

 

 

 

2021년 3월 9일 화요일.

 

이날은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과 신륵사를 탐방했다. 한 달도 더 넘은 여행기를 이제서야 작성한다. 너무 게을렀어...ㅋ

 

여주는 세종대왕께서 먹여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곳곳에 세종대왕의 이름을 끌어와 네이밍을 했더라. 세종여주병원, 세종도서관... 하물며 훈민정음 한글교회라는 곳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피식하며 생각이 들더라.

 

"이 도시는 아직도 세종대왕께서 통치하고 있는 게 아닐까?"

 

세종대왕께서 잠들어 계시는 영릉(英陵)은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1446년 세종의 부인이었던 소헌왕후가 숨을 거두자 헌릉 서쪽편에 능을 마련한다. 헌릉은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이 묻힌 곳인데 강남구와 서초구에 걸쳐 있는 대모산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효자였던 세종은 아버지와 가까운 곳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래서 소헌왕후의 능에 자신의 수릉(壽陵)을 마련한다. 수릉은 살아있을 때 미리 봐두는 임금의 무덤을 말한다.

 

우리 옛 풍습에는 윤달에 수릉을 미리 봐두거나 수의(壽衣)를 만들면 장수한다는 속설이 있다. 미리 무덤가를 마련하고, 죽을 때 입을 옷을 만들어놓으면 오래산다니... 윤달이 가져다주는 독특함이라고 해야 하나?ㅋ

 

세종대왕은 실제로 대모산, 즉 헌릉 서쪽편에 묻히게 된다. 최근에 크게 언론에 오르내린 서초구 내곡동이 바로 그곳이다. 소헌왕후와 합장을 했는데 조선 왕릉 중에서는 최초의 합장릉이었다. 영릉은 1450년에 들어선다. 지금은 그곳에 국가기관이 들어서 있어서 일반인들은 접근을 할 수가 없다.

 

세종대왕은 그렇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잠들어 있는 헌릉 옆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평안함은 19년 후인 1469년(예종 1년) 깨어지고 만다. 세종이 승하하고 난 후 연이어 안 좋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문종이 재위 2년 4개월 만에 숨을 거두고, 뒤를 이은 단종도 세조에 의해 사약을 받게 된다.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도 불행을 피하지는 못했다. 장남이었던 의경세자가 20살의 나이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도 잦은 병치레를 겪어야 했다. 계유정난을 일으키고 기세등등하게 왕좌에 오른 세조였지만 재위 기간은 13년에 불과했다.

 

그렇게 흉사가 거듭되자 영릉은 예종 원년에 멀리 여주땅으로 천릉(遷陵)을 하게 된 것이다. ‘옮길천(遷)’자에서도 보듯 천릉은 이장(移葬)을 뜻한다. 천장(遷葬)이라고도 부른다. 세종대왕의 능을 옮겼지만 흉사는 멈추지를 않았다. 예종이 재위 13개월 만에 숨을 거두웠기 때문이다. 예종은 세조의 장남이었던 의경세자의 아들이었다.

 

능을 옮긴다고 불길한 일들이 없어지겠는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결국 사람의 문제다. 아무리 천하제일 명당에다 이장을 하고, 용한 무당에게 굿을 시키더라도 사람이 못 됐으면 흉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나쁜놈이 나쁘게 되는게 세상 이치 아닌가! 인생사 자업자득, 인과응보!

 

 

 

 

 

 

 

* 세종대왕상

 

 

 

 

 

 

 

여기서 다른 왕릉들의 위치를 살펴보자. 거의 수도권을 벗어나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단종이 묻힌 강원도 영월에 있는 장릉은 예외다. 경종이 묻혀 있는 의릉 같은 경우에는 성북구에 자리잡고 있는데 한양도성에서 직선거리로 4km도 되지 않는다.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신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정릉은 그보다도 더하다. 3km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울을 중심으로 왕릉이 자리잡고 있는 이유는 왕들의 능행차 때문이었다. 능행차는 하룻길이 원칙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도세자를 만나러 갔던 정조대왕의 화산 능행차가 1박 2일이었듯, 꼭 원칙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지금은 경강선으로 편하게 전철을 타고 갈 수 있다해도 여주는 멀긴 멀다. 걸어서 하루에 다녀올 수 없는 길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었다. 뱃길이 있지 않은가! 여주에는 남한강이 흐르고 그 물결을 타고 가면 하루 안에 한양에 닿을 수 있다. 육로든 수로든 하루거리면 되지 않은가. 어쨌든 뱃길로 하루거리라 왕릉을 쓰기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이거 꼼수 아닌가? 어째 구렁이가 스리슬쩍 담 넘어 가는 거 같다.^^

 

세종대왕의 능답게 영릉(英陵)은 다른 왕릉들보다 더 큰 규모를 자랑한다. 500미터 동쪽에 자리잡고 있는 또다른 영릉(寧陵)과 비교를 해보면 바로 알게 된다. 영릉(寧陵)은 제17대왕 효종과 부인 인선왕후의 능이다. 이 영릉도 천릉을 했는데 원래는 구리시 동구릉에 있었다. 세종대왕릉이나 효종의 능이나 둘 다 자리 이동을 한 셈이다.

 

영릉(寧陵)은 봉분이 두 개인 쌍릉 형식인데 좌우가 아닌 위아래로 봉분이 늘어서 있다. 무척 독특한 형식인데 경종의 능인 희릉도 위아래식으로 되어 있다. 이와 달리 세종대왕의 영릉(英陵)은 합장릉이다. 그래서 외형적으로는 단릉과 유사하다.

 

세종대왕릉은 규모가 크기에 시간을 두고 천천히 둘러보는 것이 좋다. 능 입구에는 세종대왕 시기에 발명된 각종 발명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니 그것들을 관찰해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 또 효종의 능까지 숲길로 연결되어 있으니 꼭 같이 탐방해보자. 왕릉의 숲길을 한들한들 걸어보는 것이다.

 

세종대왕도 만나고, 왕릉 숲길도 걷고...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 세종대왕릉: 능 바로 옆까지 올라갈 수 있어 석물들을 관찰하기에 좋다.

 

 

 

 

 

 

* 세종대왕릉

 

 

 

 

 

 

 

 

 

 

* 효종릉: 사람들이 많이 찾는 세종대왕릉에 비해 한적하다.

 

 

 

 

 

 

 

 

* 재실: 영릉(효종의 능)에 있는 재실이다. 영릉 재실은 비교적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 지난 2007년에 보물 1532호로 지정되었다.

 

 

 

 

 

 

* 영릉(寧陵): 효종의 능인 영릉은 좌우가 아닌 상하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사진 왼쪽의 봉분이 효종의 능이고, 오른쪽이 왕비인 인선왕후의 능이다.

 

 

 

 

 

 

 

 

 

 

 

 

 

* 미륵리5층석탑

 

 

 

 

 

 

 

2021년 3월 8일 월요일.

 

이날은 충청북도 충주에 있는 미륵대원지와 계립령을 탐방하러 갔다. 이 답사기는 3월 31일에 작성하고 있으니 거의 20일 만에 정리하고 있는 셈이다. 필자가 게으른 것도 있지만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다. ^^

 

미륵대원지는 온천으로 유명한 수안보에 자리잡고 있다. 정확히는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이다. 서울에서 수안보까지 다이렉트로 도착하는 시외버스를 타면 가장 좋다. 하지만 그 버스편이 많지가 않다. 수안보의 명성이 예전만 못한 것이다. 차선책이 있다. 동서울이나 강남터미널에서 충주터미널까지 가는 시외버스를 타는 것이다. 생각보다 버스편이 꽤 많아서 좋다. 이후 충주터미널에서 수안보행 시내버스를 탄다. 수안보행 시내버스도 적은편이 아니다. 어쨌든 수안보는 미륵대원지를 가기 위한 전진 기지가 되는 셈이다.

 

2016년이었다. 당시 필자는 <한국보건복지인력개발원>이라는 곳에서 시행하는 프로그램에 강사로 참여를 하고 있었다. 보건, 위생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트레킹을 리딩하는 것이었다. 문경새재 트레킹을 리딩하는 것이었는데 다른 교육 프로그램보다 필자의 트레킹 강의가 훨씬 더 인기가 많았다. 수강생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우천시에도 우비를 뒤집어 쓰고 문경새재를 누볐던 것이 기억이 난다. 당시 강사료도 짭짭했는디...ㅋ

 

갑자기 이렇게 문경새재에 대해서 언급하는 건 이유가 있다. 문경새재의 전진 기지도 수안보이기 때문이다. 수안보에서 미륵리 방면으로 가면 미륵대원지가 나오고, 괴산군 연풍면 연풍리 방면으로 가면 문경새재가 나온다. 문경새재를 두고 충북 괴산군 쪽에서는 연풍새재라고 부른다.

 

미륵대원지든 문경새재든 둘 다 아름다운 곳이다. 국내여행을 좋아하시고 트레킹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두 곳 모두 방문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륵대원지는 하늘재라고도 불리는 계립령이 있어 이 둘을 묶어 트레킹을 할 수 있다.

 

수안보에서 미륵대원지까지는 약 10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주머니가 가벼운 뚜벅이가 택시를 타다니! 그래도 시간 관계상 어쩔 수 없었다. 중간에 월악산 국립공원을 지나가는데 눈이 호강할 정도로 아름다운 숲길이 펼쳐져 있었다. 그 울창한 숲길에는 인적도 없고 차편도 드문드문이라 참 묘한 느낌이 들더라.

 

미륵대원지에 들어섰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북향을 향하고 있다는 미륵리 석조여래입상을 친견할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드디어 이곳에 왔구나!

 

'에이~ 이게 뭐야!'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공사중이었다. 공사장 가림막 넘어 곁눈질로 친견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 유일의 북향 석불을 보러왔더니만 곁눈질이라니!

 

 

 

 

 

 

 

*미륵대원지: 미륵대원지에 있는 대표적인 석물들을 한 컷에 담아보았다. 미륵리5층석탑, 미륵리석등,미륵리사각석등.

 

 

 

 

 

 

 

미륵대원지(彌勒大院址)는 충북과 경북을 잇는 하늘재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로 원(院)을 겸하고 있는 특별한 형태의 절이었다. 원은 공적인 임무를 띈 관리나 상인들에게 숙식과 편의를 제공하는 공공 숙소를 말한다. 원은 대개 말을 다루는 역(驛) 인근에 설치하였다. 이를 두고 역원(驛院)제도라고 불렀다. 역원은 30리마다 세워졌는데 중앙의 행정력을 지방까지 빠르게 전달하는 첨병 역할을 했다. 조치원, 퇴계원이 바로 그 역원이었다. 그래도 가장 유명한 지명은 어디? 이태원이다. 우리가 아는 그 이태원! 이태원이 원래 클럽이 즐비한 곳이 아니었다니깐~!^^

 

보물 제96호인 충주미륵리석조여래입상은 미륵대원의 본존불이었다. 미륵리석불도 고려 초기에 만들어져서 그런가? 키가 엄청 크시다. 무려 10.6미터에 달하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불인 관촉사 은진 미륵이 약 18미터에 달하는 거에 비하면 작은 수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10미터가 넘는 큰 석불이 산 중에 있다는게 신기할 정도다. 실제로 석불 뒤편에 올라서면 가까이로는 북바위산 일대가, 멀리는 월악산의 영봉 일대가 보인다. 그 광경을 보면 석불이 북향을 향하는게 아니라 주위 산들을 굽어보시는 거 같더라.

 

물론 이런 장면은 사진 속에서 봤다. 지금은 공사중이니까...

 

미륵대원은 석굴사원이다. 거대한 암석을 쪼개서 굴 형식으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석굴 사원이다.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서 감실을 만들고 그 가운데에 거대한 충주미륵리석조여래입상을 모신 것이다. 처음에는 지붕 역할을 하는 목조 건축물이 있었을 거라고 추측되는데 지금은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돌들이 석불에 둘러져 있으니 석굴사원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더불어 공사 이전에는 뒤편까지 올라갈 수 있어 석불이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맞출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시선에는 월악산 영봉 일대가 보이는 것이고.

 

하지만 지금은 공사중이라 석불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미륵리 석불의 강한 기운을 느끼고파 한걸음에 달려왔는데... 그런 아쉬움은 충주 미륵리 오층석탑에 투영할 수밖에 없었다. 꿩대신 닭이라고 해야 하나?

 

보물 제95호인 미륵리 오층석탑은 높이가 6미터에 달한다. 바로 뒤에 있는 석불도 크고 석탑도 크다. 얼핏보면 6층 석탑같은 이 석탑의 기단은 자연석에 가까워보인다. 앞쪽에 있는 돌거북처럼 그 자리에 있던 자연석을 다듬어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탑신과 옥개석을 올려 지금의 석탑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다.

 

1층 탑신은 기단처럼 아주 거대하지만 2층 탑신은 확 줄어든 모습이 정교성을 떨어뜨린다.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뒤에 있는 석불도 디테일은 떨어지니까. 필자는 그런 덜 정교하고 더 순박한 불교 미술도 좋아한다. 정교한 것은 정교한대로 투박한 것은 투박한대로 눈길이 가는게 우리들의 시선이 아니겠는가.

 

 

 

 

 

 

* 미륵리석조여래입상: 옛날 사진을 필자의 카메라로 찍었음.

 

 

 

 

 

 

 

미륵리사각석등, 미륵리석등, 거북바위, 온달장군 공기돌 등등... 미륵대원지는 협소한 공간에 문화재들이 오밀조밀하게 뭉쳐있고, 옆쪽으로는 새로 지은 절이 있어서 그런지 다른 폐사지와는 달리 분주함이 느껴졌다. 다른 페사지에서 느꼈던 허허로움은 전혀 감지되지 않았다. 띄엄띄엄이지만 계속해서 탐방객들이나 기도객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그곳에 문화해설사가 배치되었을까!

 

다른 페사지에도 보물이나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있다. 국보급 문화재를 품고 있는 페사지도 있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도 어김없이 허허로움이 강하게 밀려든다. 넓디넓은 공간에 덩그러이 남아 있는 석조물들이 세상사의 흥망성쇠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 같아서다.

 

하지만 미륵대원지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으니 폐사지의 느낌이 덜하다는 것이다. 역시 사람이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폐사가 된 것도 사람 때문이겠지만 그 곳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도 사람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끈 것은 누가뭐래도 미륵리 석불이다. 다른 폐사지에는 석불이 없으니 덜 할 수밖에 없지만 미륵대원지에는 석불이 있으니 발걸음이 분주할 수밖에... 그렇게 필자의 발걸음을 이끈 것도 미륵리 석불 때문이었지.

 

미륵대원지 옆쪽으로는 넓은 마방터와 3층 석탑, 또 불두(부처님 머리)가 있다. 그 옆쪽으로는 하늘재 입구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 거북바위: 미륵대원지의 마스코트 같은 거북바위. 형태를 봐서는 당연히 등에 비석을 올려놓았을 거 같은데 인근에서 비석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 이 형태가 최종결과물인 셈이라 더 독특하다고 할 수 있다.

 

 

 

 

 

 

 

 

* 미륵리석조여래입상과 5층석탑: 빨리 공사가 끝나길 기원해본다.

 

 

 

 

 

 

* 미륵리석등

 

 

 

 

 

 

 

 

* 미륵리사각석등

 

 

 

 

 

 

 

 

* 공기돌: 온달장군이 가지고 놀았다는 공기돌. 그럼 온달장군은 헤라클라스인가? 충북 일대에는 온달장군과 관련된 설화가 아주 많이 있다.

 

 

 

 

 

 

 

* 미륵대원지 가는법

 

1. 동서울터미널에서 수안보행 시외버스 탑승. 편수가 많지 않음. 약 2시간 40분 소요. 이후 미륵대원지행 시내버스 탑승. 거리는 약 11km임.

 

2. 서울강남터미널이나 동서울터미널에서 충주터미널행 고속버스(시외버스) 탑승. 이후 미륵대원지행 시내버스 탑승. 미륵대원지행 시내버스는 충주시내에서 출발하고 수안보를 경유함. 충주버스터미널에서 미륵대원지까지는 약 33km임.

 

 

 

 

 

 

 

 

 

* 법천사지에서 거돈사지 가는 길

 

 

 

 

 

 

*** 지난 1월 31일부터 2월 5일까지, 6일간 강원도 일대를 탐방했다. 잘 간직하기 위해 기록한다. 디테일한 것보다는 스케치 정도 수준이다. 탐방 순서는 이렇다.

 

인제 ☞ 속초 ☞ 양양 ☞ 강릉 ☞ 평창 ☞ 원주

 

 

 

 

 

 

 

 

* 법천사지 당간지주

 

 

 

 

 

 

 

 

2021년 2월 5일 금요일.

 

강원도 동계여행의 마지막 날. 이날은 원주에 있는 폐사지 여행으로 테마를 잡았다. 남한강변을 끼고 있는 원주 일대에는 예전에 큰 사찰들이 번창을 했었다. 하지만 이후 억불정책, 전란 등으로 인해 사찰들은 폐사가 된다. 이날은 그렇게 폐사가 된 법천사지와 거돈사지를 찾아나섰다. 이 두 곳은 모두 원주시 서쪽에 위치한 부론면에 자리잡고 있다.

 

먼저 부론면 법천리에 있는 법천사지를 찾았다. 법천사(法泉寺)는 한자에도 보이듯 '진리가 샘물과 같이 솟는다'라는 뜻을 가졌다. 남한강을 따라 강원, 충청, 경기의 물산들이 이동을 했던 이 일대에는 흥원창이라는 큰 조창이 있었다. 고려시대 13개 조창 중에 하나로 설치된 흥원창은 조선시대에도 계속 그 기능이 이어져 마포 일대에 있던 경창까지 세곡과 공물들을 수송했다. 그런 남한강 수계를 이용한 조창과 그에 따른 물산의 집산은 이 일대에 큰 사찰들이 자리잡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물적 동력이었을 것이다.

 

먼저 당간지주를 찾아보았다. 법천사지도 다른 페사지들처럼 허허벌판에 있는터라 평지에 우뚝 서 있는 당간지주에 첫 시선을 모을 수밖에 없다. 사찰이 융성했을 때도 지금처럼 사찰이 망했어도 당간지주는 사람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해준다. 사실 당간지주가 없었다면 좀 헤맸을 것이다.

 

길이가 약 4미터 정도 되는 법천사지 당간지주는 후기 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별다른 장식없이 소박한 외형을 드러내고 있는 당간지주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20호이다. 좀 거시기하지 않은가? 천년의 세월을 넘긴 문화재가, 더군다나 비교적 외형이 잘 보전된 당간지주가 도지정 문화재라는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당연히 보물일 줄 알았는데 말야.

 

당간지주를 뒤로 하고 지광국사탑비를 보러 갔다. 원주 출신인 지광국사는 속명이 원해린이었다. 승통, 왕사, 국사 등의 큰 칭호들을 받은 지광국사는 당대 제일의 고승이었다. 1058년(문종12)에 국사에 오른 그는 1070년에 법천사에서 열반에 든다. 법천사는 지광국사가 출가를 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탑비가 이곳에 있는 것이다.

 

전체 높이가 4.5미터에 달하는 지광국사탑비는 정교한 조각 솜씨가 돋보이는 문화재다. 비신을 받히고 있는 용같은 거북이는 당장이라도 발걸음을 뗄 것처럼 힘에 넘친다. 하지만 그래봐야 거북이 걸음이지...ㅋ

 

맨 상단의 이수 부분은 또 어떤가. 탑의 상륜부처럼 보주를 장식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비신 옆쪽에 용을 새겨놓았다. 비신 옆쪽에 조각을 새겨놓는 비석은 그리 흔한게 아니다.

 

그 규모나 정교함 때문인지 지광국사탑비는 국보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탑비와 함께 지광국사탑(국보 101호)이 있었는데 지금은 부재중이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에 일본인이 가져갔다가 3년 후에 다시 돌려받아 경복궁 뜰에 전시하였다. 그러다 보존처리를 위해 대전시에 있는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이전됐다. 언론 보도를 보니 이제 곧 있으면 진짜 원래 제자리인 법천사지로 돌아올 예정이란다.

 

지광국사탑이 돌아온다면 다시 한 번 법천사지로 가야하나? 안 갈 수가 없잖아!^^

 

좀 높은 곳으로 올라가 법천사지 일대를 둘러보았다. 황량한 벌판 위에 전각터와 행랑터가 눈에 들어왔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건물을 지어볼까? 옛 법천사는 분명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옛 영광은 사라지고 이제 쓸쓸한 터만 남아 있다. 그 적막한 터 위로 겨울 바람이 슬쩍 지나간다. 다시 옷깃을 부여잡고 거돈사지로 이동을 한다.

 

 

 

 

 

 

* 지공국사현묘탑비

 

 

 

 

 

 

 

* 지공국사현묘탑비: 비신 옆면에 용이 새겨져 있다.

 

 

 

 

 

 

 

* 법천사지

 

 

 

 

 

 

 

거돈사지(居頓寺址)는 부론면 정산리에 있는데 법천사지와는 약 4km 정도 떨어져 있다. 두 곳은 원주역사문화길이라는 도보여행길로 연결되어 있어 트레킹 행할 수 있다. 포장된 농로길과 비포장길을 걷는 것이라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당간지주가 법천사지의 길잡이였다면 거돈사지에서는 삼층석탑(보물 제750호)이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높이 5.4미터에 달하는 거돈사지 삼층석탑은 안에 흙을 채운 토단 위에 세워져 그 높이가 더 두두러진다. 1층 비신은 길쭉한데 갑자기 2층부터는 확 줄어드는게 눈에 띈다. 또 탑 앞에 있는 배례석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탑 자체에는 딱히 화려한 장식이 없다. 대신 후기 신라시대 양식을 잘 계승한 탑이다.

 

3층 석탑 뒤로는 본당 건물터가 있는데 그 가운데에 큰 돌들이 쌓여진 것이 보인다. 이것은 돌로 만든 불대좌이다. 불대좌면 불상을 놓는 곳이 아닌가? 그런데 왜 건물 중간에 있었을까? 예전에는 본존불이 모셔진 본당 건물은 일반 신도에게 개방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본존불을 본당 중앙에 안치해도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 조선시기에는 본당도 일반 신도들이 와서 종교활동을 행하게 됐고 불대좌는 건물 후미로 자리를 잡게 된다. 공간 효율성면에서 당연한 위치변동이었다. 이후 불대좌는 수미단으로 바뀌게 된다.

 

건물 한 가운데 떡하니 있는 거대한 불대좌만 남아 있다는 건 누군가 그 위에 있는 불상을 가져갔다는 뜻인가? 원래 있어야 하는 것의 부재를 지켜봐야 하는 게 폐사지 여행의 본질이다. 그런 부재감을 계속 확인해서 그런가? 폐사지 여행은 항상 허전함이 그림자처럼 뒤따라 다닌다. 그런 허전함 허허로움도 여행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 거돈사지 3층석탑

 

 

 

 

 

 

 

 

* 불대좌

 

 

 

 

 

 

 

 

석축 위쪽에 있는 원공국사탑을 보러갔다. 원공국사는 법명이 지종이었는데 고려 광종 때 큰 활약을 했던 승려였다. 이후 1018년 현종 때 거돈사에서 입적을 했다. 그 원공국사를 기리는 탑이 세원진 것이다.

 

-찰칵찰칵

 

사진을 찍으며, 피식 웃었다. 사실 거돈사지에 있는 원공국사탑은 가짜다. 오리지널은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데 진짜 원공국사탑은 보물 제 190호로 지정되어 있다. 북한산 비봉에 있던 진흥왕 순수비 사례와 유사하다. 오리지널은 보존을 위해 박물관에 있고, 원래 그 자리에는 카피본을 세운 것이다.

어쨌든 카피본이지만... 원공국사승묘탑은 고려시대 대표적인 팔각 부도탑으로 그 외형이 참 멋스럽다.

 

마지막으로 원공국사탑비를 보았다. 보물 제78호인 원공국사탑비는 법천사지에 있는 지광국사탑비보다는 소박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비석을 받치고 있는 귀부, 즉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은 역시나 특이하게 생겼다. 거북이의 귀가 커다랗고 독특해서 얼핏보면 해마처럼 보인다. 또 얼굴은 어떤가. 손오공처럼 보인다. 언발란스한데 이상하게 합쳐놓으니 서로 잘 어울린다. 우리 선조들의 해학미가 잘 녹아있어서 그런 것일까?

 

이렇게하여 원주 부론면 법천사지, 거돈사지 탐방이 종료가 됐다. 아울러 강원도 동계여행도 무사히 종료가 됐다. 얼음트레킹(아침가리골)에서부터 바람트레킹(선자령), 폐사지 탐방까지... 여러모로 참으로 유익한 여행이었다. 하지만 여행 내내 동장군과 옥신각신 했다는...ㅋ

 

 

 

 

 

*원공국사승묘탑: 카피본

 

 

 

 

 

 

 

 

 

 

* 원공국사승묘탑비

 

 

 

 

 

 

 

* 거돈사지 3층석탑: 배낭이 대신 인증샷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