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7일에 행한 진관사 역사트레킹에서...

6호선 독바위역에서 내려 북한산 둘레길 서편을 쭈욱~
따라 걷는길. 이곳은 내시와 상궁들의 묘역이 많다.
그래서인지 버려진 석물들도 많다. 

쌍으로 서 있어야 할 문인석이지만... 저 문인석은 홀로
외롭게 서 있었다. 대신 내가 저 옆에 서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했다. 

그 순간을 수강생분이 찍어주셨다. 
너무 잘 찍어주셔서 올해의 포토인감?ㅋ













2019년 11월 14일 목요일.
영등포50플러스 역사트레킹 커뮤니티와 함께...


누가 수능일 아니랄까봐... 왜이리 쌀쌀한 것이냐!
아무리 추워봐라, 동장군이 미리 엄습했다고 해도 다산 정약용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을 막을 수 있겠는가!
발바닥은 시려도 남양주 마재로 향하는 길은 발걸음은 가벼웠다. 
이렇게 호기롭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날 춥기는 추웠다^^!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도 여러가지 여건상 1년에 딱 한 번 정도 할 수
있는 트레킹이다. 비교적 서울에서 멀기도 하고, 코스도 좀 길다. 다른 코스들이
대략 7~8km 정도면,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은 약 10~11km 정도 된다. 
또 그늘이 없는 구간이 많아서 햇살이 강한 시기에는 걷는데 무척 애를 먹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을 행하고 나면... 내가 뻗어버린다는
것이다. 꽤 긴 코스를 이동하다보니 체력소모가 무척 커서 그런 거 같다. 이번에도
뻗어버렸다^^

하지만 어려운만큼 값진 법이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대기는 어느 때보다 더 깨끗했다. 
또한 파란 하늘과 강과 산이 어우러진 남양주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들이 트레킹팀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진 출사 여행이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남양주 트레킹은 그렇게 행할 때마다 재미났다. 그래서 필자는 이런 멘트도 날렸다. 

"제가 생각해도 남양주는 올 때마다 재미났어요. 재미난 수학여행 같다고 해야 하나요. 
하여간 그렇게 재미났어요!"

다산 선생의 생가인 여유당은 시골 외갓집 같고, 선생의 고향인 마재 일대는 외국의
어느 풍광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무엇이 더 필요할까?
트레킹팀은 아주 신나고 재미나게 걸었다. 이맛에 트레킹 하는 것이 아닌가!



















예전부터도 그랬지만 요즘 들어 더 강렬하게 느껴지는 생각!

그림을 정말 잘 그리고 싶다!

그래서인지 그림이나 디자인 잘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부럽다. 
예전에 박재동 화백님이 내 캐리커처를 그려준 일이 있었다. 

박 화백님은 터치 몇 번으로 캐리커처를 완성하시더라~ 
난 수 백 번 그렸다 지웠다... 지우개를 몇 개 날려 먹은 후에야 겨우 얼굴 모양이 나오던데...ㅋ

인왕산 역사트레킹 지도를 그려봤다. 연필로 그리고 색칠하고, 거기에 컴퓨터 작업까지 하다보니
한 3일은 걸린 거 같다. 차라리 3일 동안 글을 썼으면 수 십 페이지를 작성했을텐데. ^^

3일 동안 투자를 했는데 어째 초딩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내 드로잉 레벨은 딱
초딩 수준인 거 같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계속 그릴 수밖에. 
저 지도를 누가 그려주지도 않고, 그려준다고 해도 돈이 무지 많이 들거다. 

트레킹 관련 글에 지도가 빠지면 얼마나 휑하던가! 그런 휑한 글을 지도가 일정 부분 채워줄 수 있다. 
물론 내가 그린 지도는 초딩 레벨이라 많이는 못 채워줄 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하게 기원이 행해지는 곳이 어딜까? 정답은 서울이다. 사람들이 많이 사니까.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누구나 다 기원을 한다. 건강, 학업, 승진, 시험... 누구는 로또.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원을 올린다. 성당이나 교회에서는 기도를 드리겠지만 단어가 달라진다고 내용까지 달라지지는 않는다. 성경책 위에 가지런히 모은 두 손과 불경 위에 올려진 합장한 손은 종교적인 구분만 있을 뿐 그 속에 담은 마음만은 동일하다.


무속신앙도 마찬가지다. 정화수를 떠놓고 바퀴 굴리듯 손을 비벼대며 올리는 기원도 외형만 다를 뿐이다. 잘 되라고, 건강하라고, 사랑하라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정성인 것이다.

오늘 탐방할 곳은 서울의 우백호 인왕산이다. 이곳 인왕산에는 한국에서 가장 기도빨이 잘 받는 기도터가 있다.

 




* 인왕산역사트레킹





서울의 우백호 인왕산

 

당연한 이야기지만 서울에도 좌청룡·우백호가 있다.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이 풍수지리에 의거해 기획된 도시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좌청룡·우백호가 있고,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가 자리 잡고 있다. 인왕산이 우백호라면 좌청룡은 어디일까? 낙산이다. 혜화동 뒤편에 나지막하게 서 있는 낙산이 바로 서울의 좌청룡인 것이다.


인왕산과 낙산, 거기에 남산과 북악산을 더해 내사산(內四山)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안쪽의 4개의 산이라는 뜻이다. 이 내사산을 기반으로 18.6km의 성벽을 쌓았으니 그것이 바로 한양도성이다.


외사산(外四山)도 있다. 남쪽에서 주작 역할을 하는 관악산, 북쪽에서 현무 역할을 하고 있는 북한산, 여기에 동쪽의 아차산과 서쪽의 덕양산(행주산성) 4개의 산을 일컬어 외사산이라고 칭한다. 이를 두고 필자는 트레킹팀에게 이렇게 설명을 하곤 했다.

 

내사산이니 외사산이니 하는 말들이 감이 잘 안 오시죠. 이렇게 생각하세요. 내사산은 작은 서울, 외사산은 큰 서울. 지도 놓고 보시면 더 감이 잘 올 거예요.”

 





* 내사산 외사산







사직단은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사직단에서부터 시작된다. 우리 선조들은 삼국시대부터 사직단을 세워 기원을 올렸다. 그것도 한 곳에만 세우지 않고 여러 곳에 세웠다. 우편번호를 검색해보면 사직동이라는 지명이 꽤 여러 곳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장 부산에 사직야구장이 있지 않던가.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신(社神)과 오곡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제례를 올리는 곳이다.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 바로 사직단인 것이다. 농경을 중시했던 조선왕조였기에 사직단의 의미는 종묘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들이 닥쳤을 때 사직단에 직접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 지역에 있는 사직단에는 해당지역 수령이 왕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렸다.


보통 '사직'은 궁을 중심으로 서쪽, '종묘'는 동쪽에 들어선다. 실제로 사직단은 경복궁의 서편인 서촌에 위치에 있고, 종묘는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사직단은 동쪽에 사신을 모시는 사단, 서쪽에는 직신을 모시는 직단이 있다. 큰 담 안에 작은 담이 둘러져 있는데, 그 작은 담은 ''라고 불린다. 그 유 안에 사단과 직단이 있는 것이다.

이번편의 주제는 기원이다. 사직단은 국가적인 기원, 즉 풍작을 기원하는 곳이니 주제 적합도가 딱 맞아 떨어진다.

 




* 사직단





그래도 국가적인 기원은 계속될 것이다

 

조선이 망국의 길로 들어서자 사직단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치게 된다. 1911년에 사직단이 폐사됐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1922년에는 원래 부지에다 인근의 땅들을 합쳐서 공원을 만든다. 사직단을 공원화하여 격하시켰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사직단은 아픔을 겪었다. 도시계획에 따라 신문(神門)이라고 불린 정문이 원 위치보다 14미터 뒤로 후퇴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영역 안에 차례로 도서관, 어린이 놀이공간, 단군성전 등이 세워지게 된다. 심지어 수영장도 들어섰다. 애초 사직단의 근본 취지와 동떨어진 건물들이 자리를 잡게 됐다.


그렇게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이 떠난(?) 예전 사직공원은 몸살을 앓았다. 취객들이 술김에 울타리를 넘어 가기도 하고, 아이들은 제단에서 씨름을 하기도 했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는 '부비부비'를 즐긴 남녀들도 넘쳐났다고 한다. 국가적으로 기원을 드렸던 곳인데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현재 사직단은 복원정비사업 중이다. 2015년에 시작한 복원 사업은 2027년에 완료될 예정이다. 무려 12년 동안 진행된다. 상처가 깊었던 만큼 복원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는 셈이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현대에는 왕도 없고, 국가적으로 제례를 드리지도 않는다. 농업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더 이상 사신과 직신은 한물간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가적인 기원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소녀상을 두고 일본의 진심어린 사과를 바라는 것과 세월호를 두고 진실규명을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 선바위






승복을 입은 선바위?

 

국가적인 기원을 올렸던 사직단을 탐방했으니 이제 개인적인 기원을 드리는 곳으로 가보자. 그곳이 어디인가? 바로 선바위다.


인왕산 서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선바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기도빨이 잘 받는 곳 중에 하나다. 특히 아이를 잘 잉태해준다고 한다. 그래서 트레킹팀에게 이런 말을 간간이 건넸다.

 

늦둥이를 낳고 싶으신 분들은 시주 한 번 하시고 간절히 기원하세요!”

 

어떤 대답이 돌아왔을까?

 

지금 있는 것들도 징글징글한데 무슨 놈의 늦둥이야!”

 

본전도 못 찾고 핀잔만 잔뜩 들었다.

 

선바위는 높이 7미터, 가로 10미터 정도가 되는 바위로 산 중턱에 불쑥 솟아 있다. 그렇게 바위의 규모가 크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 존재를 알아볼 수 있다. 선바위를 한자로 쓰면 '선암(禪岩)'으로 '스님바위'라는 뜻이 된다. 승복을 입은 선승이 참선을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선바위를 자세히 보면 단일 암석이 아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붙어 있는데 이것을 두고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영혼이 나란히 깃들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렇게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 보니 선바위는 예로부터 아이를 갖기 원하는 이들의 좋은 기도처였다고 한다. 쌍둥이 바위는 다산을 뜻하니까. 요즘같이 저출산 시대에는 애국자 바위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거대한 암석에서 치성을 드리는 것을 두고 거석숭배문화라고 한다. 이 거석숭배문화는 우리 민간신앙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선바위는 이런 거석숭배문화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된다. 바로 산악신앙이다.


우리 옛 선인들은 산을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였다. 물이 샘솟고, 과실과 약초들이 산재해 있으며, 연료인 나무들을 채취할 수 있으니 산은 인간에게 생명의 원천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산을 마냥 좋은 것만 주는 존재로 인식하지는 않았다. 사나운 맹수들이나 험준한 지형이 항상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 국사당






국사당과 산악신앙

 

그래서 그들은 경이로운 존재이자 두려운 존재인 산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드렸다. 산에 사는 신령, 즉 산신령에게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산악신앙이라고 부른다. 그런 산악신앙은 우리 무속신앙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바위 아래에는 국사당(國師堂)이라는 신당이 있다. 이 국사당은 원래 남산에 있던 신당이었다.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1395(태조4), 이성계는 목멱산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았다. 그때 제사를 드리기 위해 사당이 세워졌는데 이것을 국사당, 또는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 불렀다.


이 목멱신사에서는 봄과 가을에 국가의 공식행사로 제례를 올렸다. 유교중심주의를 표방하며 건국된 조선에서조차도 산신령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제사를 드렸던 것이다.


그렇게 목멱대왕을 모셨던 국사당은 1925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다. 일제가 남산 중턱에 조선신궁을 세웠는데 자기들의 신궁 위에 국사당이 있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것이다. 국사당이 선바위 부근으로 옮겨오게 된 건, 인왕산이 무학대사의 기도처였기 때문이었다. 국사당(國師堂)에서 '국사(國師)'는 무학대사를 뜻한다.


그렇게 아래쪽에 국사당이 자리 잡게 되니 선바위는 거석숭배문화에다 산악신앙까지 더해지게 된다. 선바위에서 기원을 드리는 사람들이 국사당 앞에서도 두 손을 모으게 됐다는 것이다.

사직단에서 선바위, 그리고 국사당까지. 인왕산 남쪽은 굵직굵직한 기원 장소가 즐비하다.

 

 

무학대사와 정도전, 그리고 선바위

 

선바위는 한양도성에서 직선거리로 3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두냐 마냐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 간에 격론이 오갔다. 불교세력을 대변했던 무학대사는 당연히 선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유교세력을 대변했던 정도전은 이 스님바위가 도성 안에 들어오는 것을 크게 반대했다. 선바위가 들어오면 도성 안에 불교가 융성해질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첨예하게 오갔던 격론은 이성계에 의해 결론이 났다. 선바위가 도성 밖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불심이 깊은 이성계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유학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200년 안에 큰 전란이 있을 것이고, 국운이 기울 것이라는 큰 저주(?)를 내뱉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이 선바위를 두고 오갔다던 무학대사 VS 정도전간의 갈등은 정사가 아닌 야사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선바위를 두고 오갔던 두 사람의 갈등은 <조선왕조실록> 같은 공식적인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왜 이런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일까? 선바위 논쟁이 입에서 입으로 흘러나왔던 건, 실제로 조선이 건국한 후 약 200년 뒤에 일어난 조일전쟁(임진왜란) 때문이었다


당시의 민중들이 어떤 식으로든 전란에 대한 유학자들의 책임을 묻기 위해 선바위와 무학대사를 무대로 등판시켰다는 것이다. 도성을 버리고 떠난 왕과 사대부들에 대한 원망을 선바위와 무학대사에 기대어 풀고자 했던 것이다.


선바위를 빠져나오면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을 걸을 수 있다. 최근 성곽 밖의 순성로도 잘 정비되어 성곽트레킹을 하기에 제격이다. 인왕산 성곽도 좌청룡인 낙산 성곽길처럼 성돌의 변천사를 관찰할 수 있는 좋은 장소이다. 더군다나 이 성곽길의 반대편은 자락길로 유명한 서대문 안산이기에 양 옆의 시선이 다 즐거운 곳이다.

 





* 수성동계곡






인왕산의 숨어 있는 보석, 수성동 계곡

 

다음 탐방지는 수성동 계곡이다.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의 숨겨진 보물 같은 곳이다. 아랫동네 서촌의 번잡함은 싹 사라지고, 계곡이 주는 청량감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곳이 바로 수성동 계곡인 것이다.


수성동(水聲洞)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한경지략>에는 수성동을 명승지로 소개하고 있고, 겸재 정선은 <수성동>을 그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수묵으로 옮겨놓았다. 또한 이곳은 중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닐던 곳이다. 조선후기 중인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그러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무척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수성동 계곡은 20127월에 복원한 것인데 복원 전에는 1971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후 안전문제로 아파트는 철거가 됐고, 그 위치를 옛 모습으로 돌려놨던 것이다.


복원 과정에서 겸재 정선의 <수성동>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수성동>에 나오는 것처럼 기린교라는 통돌다리도 그대로 복원이 됐다. 어쩌면 겸재의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수성동 계곡은 평범한 도시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재개발로 사라졌던지.

 





* 창의문







창의문 밖에는 고소한 냄새가 풍긴다!

 

인왕산에도 자락길이 있다. 걷기에 부담이 없는 길이다. 마천루가 즐비한 도심지와 가까운 곳에 이렇게 부드러운(?) 길이 있다는 게 참 좋다. 그렇게 부드럽게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인왕산 역사트레킹의 마지막 구간인 창의문을 만나게 된다.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문이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북문(北門) 역할을 했던 건 바로 창의문이었다. 북악산의 험한 지형 위에 세워진 숙정문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 뿐더러 1413년부터는 그마저도 폐쇄를 시켰기 때문이다. 숙정문이 오른팔이 되어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학적인 의미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때 창의문도 폐쇄가 되는데 왼팔의 역할을 하여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죄명때문이었다. 하지만 숙정문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 위에 놓여 있던 창의문은 1506(중종 1)에 다시 통행이 재개된다. 그래서 소문(小門), 창의문이 북문 역할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다는 것은 그 문 아래로 수많은 역사적 발걸음이 오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로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옹립하던 세력들은 이 문을 통해 도성을 점령했고, 광해군을 쫓아낸 후 권력을 잡게 된다. 현재의 문루는 조일전쟁 때 불 타 사라진 것을 영조 때(1740) 건립한 것이다.


창의문의 천장에는 큰 새가 그려져 있다. 필자는 창의문을 지날 때마다 트레킹팀에게 묻는다.

 

저기 위에 그려진 새가 뭐로 보이세요?”

봉황 아니에요?”

주작이요. 주작!”

 

봉황에 주작까지 나왔다. 하지만 꽝! 정답은 닭이다. 이 일대가 풍수적으로 지네의 기운을 가졌다하여 천적인 닭을 창의문에 그려 넣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창의문 밖인 부암동 일대가 치킨으로 유명한 것이다. 창의문 밖을 나서면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 냄새를 맡은 도보여행자들은 더 이상 길을 나설 수 없게 된다. 자연스럽게 트레킹도 종료되게 된다. 대신 입이 즐거워진다.


사직단, 선바위, 국사당, 성곽길, 수성동계곡, 창의문까지... 거기에 이번 글에 언급하지 않은 윤동주문학관(시인의 언덕)과 이빨바위, 출렁다리까지... 이처럼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인왕산을 소개할 수 있어서 필자도 참 기쁘게 생각한다.

 




* 인왕산 성곽길





난 타인의 기원을 실현시켜주는 사람

 

트레킹팀과 함께 열심히 걷다보니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다. 내가 타인의 기원을 실현시켜주는 기특한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트레킹에 오신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건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다. 육체건강이든 정신건강이든 건강에 대한 간절함이 강렬하셨다. 꾸준한 운동이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역사트레킹이 거기에 이라는 것이다.


숲길도 걷고, 답사도 하고, 만 보 이상 걸으니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튼튼해졌다고 필자에게 신앙고백을 하셨던 분들도 계셨다. 그런 말씀들을 하실 때마다 참 고마웠다. 어쨌든 필자가 건강에 대한 기원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탰으니까. 좀 우쭐하기도 했다. 복 받을 일을 했으니 이 정도 우쭐함은 괜찮지 않나.

 






 

인왕산 역사트레킹

 

1. 코스: 사직단 선바위(국사당) 성곽길 수성동계곡 출렁다리 윤동주문학관 창의문

2. 이동거리: 7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5. In: 지하철3호선 경복궁역 / Out: 창의문(부암동)





* 인왕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10월 25일 금요일

장장 6시간 동안 트레킹을 리딩하게 됐다. 4시간만 리딩해도 체력이 고갈되는데 무려 6시간이라니!
그래도 의뢰인이 원한다면야 까짓거 ~ 뭐!^^ 

가톨릭 성모병원에서 직무교육 차원에서 내게 트레킹 강의를 의뢰했다. 올 봄에 의뢰를 했는데
10월 말에 실시하게 됐다. 좀 오래기다리긴했다. 
수강생들이 병원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이어서 그랬는지 난 슬쩍 이런 농담을 던졌다. 

"제가 쓰러지면 응급처지 해주실 분들이 아주 많으시네요. 마음놓고 쓰러져도 되나요?"

여성 수강생들이 많다는 점, 난이도를 '하'로 맞춰야 한다는 점, 40여 명 가까이 움직인다는 점 등등... 
여러 사항들을 고려하여 서대문 안산과 인왕산을 연결하여 걷기로 했다. 특히 6시간 동안 이동하려면 
코스가 길어질 수밖에 없기에 안산과 인왕산을 동시에 걷기로 한 것이다. 

4시간 수업만 하다가 갑자기 6시간 수업을 하려고 하니 여러가지 면에서 적응이 안됐다. 
특히나 6시간 동안 계속 떠들다보니 목이 아프더라. 뭐 다리가 아픈 건 당연한 거고.

이날 날씨도 참 좋고, 숲길도 좋아서 수강생 분들이 만족하시는 눈치였다. 어떤 분들은 개인적으로 다시
오고 싶다고 내게 오는 방법을 묻기도 했다.

많은 인원을 통솔하며 6시간 동안 마이크를 잡고 해설을 하다보니 나중에는 혀가 꼬이더라. 정말 강행군이었다. 그래도 무척 재미났다. 매번 4시간, 20명을 기준으로 트레킹을 했었는데... 그 틀에서 벗어났으니까.

간간이 틀을 깨는 것도 재미난다.











트레킹은 생각창고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까?



● 서울은 어떤 도시일까?


서울은 어떤 도시일까내가 살고 있는 이 서울에 대해서 난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필자가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을 시작했을 때 품었던 근원적인 물음이었다. ‘서울천도 600’, ‘한성백제 2000’ 등과 같은 역사교과서적인 수식어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삶의 공간으로서의 서울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물론 필자는 지금도 서울공화국’, ‘수도권과밀화’ 같은 서울에 붙여진 비판적인 꼬리표에 좋아요’ 버튼을 누르고 있다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다 빨아드리고 있는 이 블랙홀 도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거둘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비판적인 시각과 근원적인 물음이 꼭 상충되는 것만은 아니었다예를 들어 서울이 블랙홀이 되기까지의 과정들에 대한 탐구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서울의 확대발전에 대한 개념을 짚고 넘어가게 된다한편 서울이 최상위 포식자가 되어 모든 것을 다 집어삼키기 시작한 것은 불과 한 두 세기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공룡 도시 서울에 대한 냉정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 맞는 만큼 역사 도시 서울을 탐구하는 진지한 자세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곳은 우리가 발을 딛고 구체적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공간이니까자신이 속해 있는 이 도시가 잘 났는지 혹은 못 났는지 그것을 알아보자는 것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의 취지인 것이다.


● 토박이를 이길 수 있는 여행작가는 없다


각 개인이 살아가면서 층층이 쌓아올린 생각들도 지역적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산들로 둘러싸인 지역에서는 갯가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반대로 바닷가 지역에서는 산신령을 모시는 신당을 찾아보기가 어렵다자신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관념들은 결국 지역적인 틀 속에서 생성된 상호작용의 결과물인 것이다.


필자가 낙산의 성곽길을 미디어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접했다면 어땠을까그저 벽화마을에서 사진을 찍고 성곽길을 잠깐 탐방한 후 이렇게 이야기했을지 모른다.


별 거 없네맛집이나 찾아서 가자고.”


외국인 관광객들이 들고 다니는 가이드북 정도의 인식 수준으로 낙산과 성곽길을 바라봤을 것이다.


아무리 머리가 비상한 여행작가라고 하더라도 해당 지역의 토박이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학창시절에 그렇게 공부를 못했던 필자가 그나마 서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던 건 45년 동안 서울에서 계속 살아왔기 때문이다서울에 있는 산들이 좋아 많이 돌아다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물론 군대생활 2년은 빼고.


필자는 이 책에서 역사적인 지식만 나열하지는 않을 것이다필자의 삶의 공간인이곳 서울에서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자유롭게 풀어나갈 생각이다서울 촌놈인 필자가 트레킹을 통해 서울 곳곳을 탐방하고그곳에서 주어올린 생각들을 나름대로의 필체로 풀어낼 생각이다.

밥값을 하듯이 책값을 하고 싶다나름대로 열심히 쓸 생각이다기대하셔도 좋을 것이다







* 필자: 해설을 하고 있는 필자의 모습

















지난 9월 26일 목요일. 
영등포50 커뮤니티 목요반.

올 봄, 화사했던 개나리들의 물결로 찬사를 받았던 그 인왕산성곽길 역사트레킹!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이날 다시 탐방했다. 

본 인왕산성곽길 역사트레킹은 인왕산을 탐방하지만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코스로 가지 않는다. 
통상적으로 인왕산은 서촌, 즉 효자동 청운동 방면이 익숙하다. 실제로 인왕산하면 서촌 위에 수성동계곡에서 많은 이들이 인증샷을 찍는다. 

하지만 트레킹팀은 홍제동 방면 탐방로로 향했다. 홍제동쪽 탐방로는 좀 거친 면이 있고, 좀 덜 다듬어져 있다. 그래서인지 많은 이들이 찾지를 않지만 난 홍제동 방면으로 인왕산을 오르는 코스가 참 좋다. 
인왕산의 숨겨진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서 그런 것이다. 

독특한 형식의 마애불이 있는 환희사를 탐방한 후 트레킹팀은 인왕산의 기차바위를 향해 치고 올라갔다. 백련봉이라고 불리지만 역시 기차바위는 기차바위라고 불러야 제 맛인듯~











거기에 올라선 트레킹팀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서울 최고의 풍광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서울에도 이름난 전망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기차바위가 가장 최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그건 바로 북한산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 내놓아도 남부럽지 않은 북한산이 떡하니 배경이 되어주니 바로 서울 최고의 풍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서울둘레길 아차산 코스의 풍광과 경합을 버린다고 할 수도 있다. 

참가자 분 중에 사진을 잘 찍는 분이 계셨다. 나도 사진을 찍어줬는데... 날씨까지 받혀줘서 그런지 인생샷을 찍었다. 정말 귀한 사진을 공짜로 얻은 셈이다. 정말 감사했다. 

인왕산성곽길 역사트레킹은 올 때마다 좋은 감흥을 받았다. 올 때마다 즐거웠고, 올 때마다 행복했다. 
이런 인생샷을 서울에서도 찍을 수 있다는게 정말 즐겁고, 행복한 일이아니겠는가! ^^;























트레킹은 생각창고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들어가면서


사실 본 원고는 몇 해 전에 출간 제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몇 권의 베스트셀러를 출간한 중견출판사에서 필자의 원고를 눈여겨봤다고 메일로 연락이 왔던 것이다정형화된 형식에서 벗어난 역사서를 만들고 싶다는 내용이었다본 원고의 네이밍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니 그들이 찾는 원고로 이었을 것이다트레킹과 역사가 서로 합쳐진데다 서울학개론이라는 독특한 명칭까지 더해지니 편집자의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겼을 것이다.


● 김칫국을 제대로 마셨다


정말 기뻤다내 원고의 가치를 알아봐주었던 것도 기뻤고내 이름으로 된 책을 낼 수 있다는 것도 기뻤다더군다나 찾기도 어려웠을 내 이메일 주소를 알아내서 연락을 줬으니 출간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게 아닌가!

두근두근 설렜지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답장을 보냈다.


출간 제의를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그런데 글에도 언급되었듯이 제가 역사 전공이 아닌데 괜찮을까요전공자가 아닌데 괜히 역사서 썼다가 씹히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또 저는 본격적인 역사서보다는 역사트레킹아웃도어 이런 것들을 다 다루고 싶은데요제가 트레킹 강사니까요.”


이렇게 점잔을 뺐다그냥 좋다고 덥석 물면 괜히 없어 보일 거 같아서물론 당시 내 머릿속은 인세부터 계산하고 있었다또 저자 사인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연구중이었다그렇게 난 김칫국을 제대로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곽 작가님의 의견 잘 봤습니다전공비전공 부분은 저희도 감안을 했던 부분입니다그런데 우리는 역사에 방점을 찍고역사서를 출간할 생각이거든요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난다지만 핵심은 역사거든요트레킹이나 아웃도어는 그저 부수적인 영역이고요트레킹을 무시할 수 없으시다면 우리가 애초 기획한 포지셔닝과 어긋나네요책 분류 자체도 달라져서 무척 애매해질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결론은 내 원고로 책을 출간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내가 너무 겸손을 떨었던 것일까그냥 덥석 잡았을 걸치고 나갈 때는 확 치고 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인데 난 겸손을 떨다가 김칫국만 제대로 들이켰던 것이다.









● 내 원고의 포지션은 반반 치킨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그렇다고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았다그동안 더 많은 자료를 검토했고더 많은 코스를 탐방했다좋은 역사 해설을 위해서 책을 열심히 읽었고더 순조로운 트레킹을 위해 열심히 코스 답사를 다녔다김칫국을 들이켰을 때나 지금이나 내 포지셔닝은 반반치킨이다역사 반트레킹 반출간 제의를 했던 그 편집자 입장에서는 내 원고는 아직도 포지셔닝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것으로 보일 것이다.


어쩌면 그때 책을 출간하지 않았던 것이 더 나았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내 원고는 부족해 보인다비역사 전공자의 한계가 고스란히 눈에 밟힌다.


그렇다고 눈 비비며 작성했던 내 노력의 결정체가 다시 또 거절당하는 아픔을 겪고 싶지는 않았다그래서 원고를 변경하기로 했다.  그럼 역사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는 것인가아니다오히려 역사의 비중은 그대로 두거나 줄이고 에세이적인 면을 더 보강하려고 한다


트레킹을 하면서 들었던 생각들을 해당 탐방지의 역사적인 면과 결합시켜 글로 풀어낼 생각이다반반치킨에 에세이라는 양념소스를 제대로 버무리려한다그래서 제목도 <트레킹은 생각창고>아니던가!


비전공자의 역사다루기라는 ‘잘 안 받아주는’ 포지션보다 역사적인 길을 걷다 느낀 단상들을 에세이로 풀어내는 게 더 그나마 ‘잘 받아' 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편집자도 비전공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피상적인 역사 원고를 ‘오케이’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에세이라는 거대한 장르라면 비전공자도 그 속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역사 글빨’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 앉아서 하는 트레킹?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은 트레킹을 통해 자신의 두 발로 서울의 명소들을 탐방하는 아웃도어 프로그램이다이 책은 그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의 기록들과 함께 필자가 트레킹을 행하며 느꼈던 생각들을 정리하였다그래서 역사아웃도어에세이가 결합된 짬뽕된 포지셔닝을 갖고 있다


누구는 이런 결과물에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정체성이 없다고근본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하지만 요즘같이 최첨단 초결합시대에 도서항목 분류표에 따라 기계적으로 원고를 맞출 필요는 없을 것이다시대가 변했다독자도 변했고.


독자여러분들은 필자와 함께 서울구경을 하실 것이다간간이 경기도구경도 하신다이제 필자와 함께 앉아서 하는 트레킹을 행하실 것이다.


자 함께 같이 떠나볼까요신발 끈 단단히 묶으셨나요그럼 출발!















* 덕암사: 덕암사에서 바라본 의상봉





2019년 9월 19일 목요일.

추석 명절이 지나서일까? 하늘은 정말 청명하고 맑았다. 연휴 즈음에 있었던 비구름들이 언제 그랬냐는듯 물러가고 하늘에는 하얀 뭉개구름이 피어올랐다. 

걷기에 딱 좋은 날! 

그래서 트레킹팀은 북한산으로 향했다. 북한산성 역사트레킹을 행하러 발걸음을 옮긴 것이다. 영등포50 커뮤니티 목요반으로 꾸려진 이날의 참가자들은 서로간의 안부를 물으며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내가 그런 화기애애함에 찬물을 끼얹졌다. 3호선 지축역에서 만나 북한산성 입구로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했는데 버스시간을 착각한 것이다. 시간을 벌기 위해 별로 마음에 없는 말들을 지어내야했다.

"이제 가을인데요, 올 가을 계획 같은 것은 세우셨나요? 저는 얼굴살이 쪄서 다이어트 하려고요!"

다이어트는 개뿔! 야식이나 먹지 마라. 너무나 뻔한 소리를 이러쿵저러쿵 내뱉으며 시간을 끌었지만 왜그리 버스는 안 오는지...ㅋ

북한산성 역사트레킹은 몇 개의 탐방포인트를 가지고 있다. 

1. 중성문
2. 북한산성계곡
3. 산영루
4. 덕암사에서 바라본 의상봉  

북한산성은 성벽의 길이가 12.7km로 북한산의 주요 봉우리를 연결해서 축성됐다. 유명한 백운대 같은 경우도 북한산성의 일부다. 그런데 백운대에는 성벽이 없지 않은가? 성벽이 없는게 당연한게 그 험한 백운대를 어떤 멍청한 군대가 기어올라 오겠나. 

백운대 자체가 워낙 험하니 인공적인 성벽이 없어도 된다는 것이다. 자연물 자체가 성벽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곳은 백운대 말고도 의상봉과 용암봉이 있다. 

반대의 경우도 있지 않은가? 지형이 너무 평탄하여 적들의 공격으로 취약한 곳도 있을 것이다. 그곳이 바로 북한산성의 서쪽 구간이다. 그래서 이곳은 중성문을 쌓아 이중 방어 구조를 만들었다. 





*대서문: 공사중인 대서문



*중성문: 겨울 답사 때 찍은 사진




즉, 대서문 -> 중성문 식이 된다. 중성문 밖은 외성, 중성문 안쪽은 내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중성문 길을 따라 쭈~욱 올라가면 예전에 북한산성 행궁터가 있다. 행궁은 지금은 복원중이다. 

올 봄 답사때와는 달리 중성문은 지금은 보수중이었다. 대서문도 마찬가지였다. 중성문에 가면 총맞은 성돌의 모습을 보며 트레킹팀과 서로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정확히는 육축 부분에 총탄 자국이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 때 피탄된 것으로 보인다. 

그 즈음에 비가 좀 내려서 그랬는지 북한산성 계곡은 풍부한 유량을 자랑하고 있었다. 지리산이나 설악산에 있는 계곡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북한산성 계곡은 나름 호평을 받는 계곡이다. 공룡알 같은 큰 바위도 많고, 선녀탕 같은 여울도 꽤 있다. 서울에서 이렇게 시원한 계곡을 만날 수 있다는게 정말 감사할 일이지!

물도 맑고, 날씨도 좋고 해서 계곡으로 자꾸 뛰어드시려고 하는 분들이 있어서... 참 곤란했었다. ^^;

드디어 반환점인 산영루에 도착했다. 산영루 앞에 있는 비석군에도 피탄을 당한 비석들이 있어 그런 내용을 전달한 후 산영루가 보이는 너럭바위에 앉아 다들 도시락을 꺼냈다. 

"이 산영루는 북한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로 손꼽힙니다. 그래서인지 내노라하는 풍류객들이 이곳에서 노닐다 가셨죠. 다산 정약용 선생, 추사 김정희 선생 등등..."  

식후경이라고 여기서 더 이야기하면 돌 맞을 거 같아서 배낭을 정리하고 돌아서는데... 회원 한 분이 너럭바위에 큰 대자로 뻗어있는게 아닌가. 리딩자로서 빨리 도와야겠다는 생각에 냅다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 짧은 순간에 내가 허공으로 붕~ 떠서 떨어지는게 아닌가! 하늘을 보면서 떨어졌는데 그 순간이 꽤 길게 느껴졌었다. 도대체 뭐야! 물기를 머금어서 엄청 미끄러웠던 바위를 생각없이 내딛어서 그런 사고를 당한 것이다. 

어쨌든 회원 분은 크게 다치지 않으셨다. 단순 타박상 정도라고 하신다. 그런데 내가 문제였다. 얼마나 챙피하던지. 우리 트레킹팀이 열 분 정도요. 그 주위에도 여러명의 산행객들이 있었다. 허공을 날았던 모습을 그 눈들이 목격했다는 거 아닌가! 리딩자로서 너무 쪽팔렸다!^^

의상봉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덕암사까지 탐방한 후 북한산성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됐다. 참고로 덕암사의 대웅전은 자연 석굴에다 법당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덕암사 대웅전의 실내 천장은 돌로 되어 있다. 

덕암사는 메인 탐방로에서 벗어나서 그런지 찾는 이들이 많지 않은데 북한산 마니아라면 한 번쯤은 방문해 볼만한 곳이다. 특히 덕암사에서 바라보는 의상봉의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다. 

이렇게하여 북한산성 역사트레킹은 잘(?) 종료가됐다. 다음 트레킹에서는 무슨 해프닝이 발생할 것인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다시 허공을 나는 건 아니겠지...ㅋ
 



* 트레킹팀: 덕암사에서 한 컷. 사진 왼쪽으로 덕암사의 대웅전이 보인다. 






* 산영루: 겨울 답사 때 찍은 사진.






* 북한산성계곡














* 금오도 비렁길







* 8월 25일 일요일 7일째 맑음

1. 통영 -> 진주 -> 순천 -> 여수 이동함. 이날은 순수하게 이동일이었음. 
2. 여수여객선터미널 인근에서 숙박함.




* 8월 26일 월요일 8일째 맑음

1. 여수 금오도 비렁길 트레킹을 행함. 금오도는 울릉도가 연상되는 곳이었음. '비렁'이라는 말은 이곳 사투리로 '벼랑'이라고 함. 벼랑길을 걷는 맛이 참으로 좋은 곳이었음. 섬트레킹으로는 제격인 곳!

2. 비렁길 1코스는 함구미항에서부터 시작됨. 함구미항과 여수여객터미널을 잇는 배편은 하루에 세 편 밖에 없지만 비렁길을 걷기 위해서는 '여수여객터미널-함구미행' 배편을 타는게 훨씬 나음. 함구미항 반대편인 여천항에서 돌산도로 들어가는 배편은 많이 있음. 그러나 비렁길 1코스 초입으로 이동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기에 함구미행 배편을 타는게 좋음.

3. 여수 -> 광주 -> 전주 이동함.

 




* 비렁길






* 여수







* 8월 27일 화요일 9일째 / 비 온 후 갬

1. 전주시외버스터미널 인근에 있는 콩나물국밥집에서 식사를 했음. 콩나물국밥이 참 맛있었다.
2. 전주한옥마을 인근에 있는 경기전, 전동성당, 풍남문 탐방. 평일이고 간간이 비가 내렸지만 전주한옥마을은 많은 이들이 오가고 있었다.
한옥마을이 전주를 먹여살리고 있남? ^^
3. 9일간의 남도여행 종료. 서울로 상경함.








* 전주 전동성당






* 경기전






* 경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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