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을 갔을 때였다. 사리아(sarria)라는 도시에서 순례길을 중단했는데 사리아는 순례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동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당시 필자의 왼쪽 다리 상태는 썩 좋지가 않았다. 햄스트링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트레킹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 다리에 이상이 있다니! 그래서 고민 끝에 사리아에서 기차를 타고 산티아고콤포스텔라로 넘어가기로 했다. 이미 그전에 순례길 800km를 완주한 적이 있었기에 과감히 결단을 내린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도보여행가인데 기차 ‘점핑’이라니. 갈등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거기서 더 무리를 했으면 내 왼쪽 다리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을 지도 모른다. 이미 그때도 파스로 범벅을 하고 있었으니까. 돌아가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하루 이틀하고 트레킹을 그만 둘 것도 아니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길게 보고 돌아가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돌아가는 길이라고 다 순탄할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적어도 필자의 경험은 그랬다. 기차를 잘못 탔는지 엉뚱한 곳에 도착을 했다. 오우렌세(ourense)라는 도시였다. 이곳은 산티아고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남동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순례길에서 이미 체력을 많이 소진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기차를 잘못 탔고 뜻하지 않은 곳에 발걸음을 하게 된 것이다. 다음 기차까지 배차 시간도 꽤 길어서 역 밖으로 나와야했다.      


‘왜 이렇게 돌아가는 길이 어려운가. 왜 내 여행은 항상 이런 식일까?’     






* 남산성곽길: 단풍이 잘 물든 가을날에 촬영했다.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서 성곽이 잘 보이지 않는다. 대신 뒤에 북한산은 시원스럽게 보인다. 






● 트레킹 코스도 이름을 잘 지어야한다     


이제까지 인왕산, 낙산, 백사실계곡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았다. 백사실계곡이 백악산(북악산)에 있으니 내사산 중 남산만 제외하고 다 언급한 것이다. 그럼 4편은 남산 역사트레킹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다. 제목처럼 돌아간다. 대신 많이는 안 돌아간다. 이번편은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이다.       


“원래 이 코스의 이름이 <서울 내부트레킹>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으로 강제 개명을 시켰어요.”

“왜요?”

“이름이 서울내부트레킹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감을 못 잡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감을 잡나요?”

“그건 모르겠는데 최소한 예전보다 장사는 좀 되네요. 사람들이 조금 더 많이 와요.”     


트레킹 코스도 이름을 잘 지어야한다. 해당 명칭에서 사람들의 발걸음을 확 이끌 수 있는 무언가를 전달해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은 예전 명칭인 <서울 내부트레킹>보다는 훨씬 더 낫다. 적어도 사람들의 발걸음을 확 이끌었으니까.  


그렇다고 서울 내부트레킹이라는 이름이 아예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본 코스는 ‘서울숲 - 남산’을 연결하여 걷기 때문이다. 서울의 내부를 가로질러 가기 때문에 예전에 저런 네이밍을 했던 것이다. 한편 종료지점이 남산의 끄트머리인 장충단공원이라서 돌아간다고 표현한 것이다. 남산을 가기는 하지만 살짝 찍으니까.     




● 매 사냥터였다는 매봉산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의 시작점은 지하철 5,6호선 청구역이다. 청구역에서 첫걸음을 뗀 후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금호산이라고도 불리는 매봉산이다. 조선시대 왕들이 매를 풀어 사냥을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매봉산은 응봉근린공원의 한 축으로 속해 있다. 그 응봉근린공원은 남산과 서울숲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이야 도심지의 확장으로 중간 중간 녹지축이 잘려 나갔지만 예전에는 남산에서부터 응봉산까지 하나의 능선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응봉산은 조선 초기 동빙고(東氷庫)가 있던 산으로 지금은 개나리 축제로 유명한 작은 산이다. 사냥감을 노리는 ‘매’서운 눈빛이 사라진 매봉산이지만 그곳에 올라서면 눈이 크게 떠지게 된다. 시원스럽게 한강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강을 가깝게 전망할 수 있는 곳은 매봉산 팔각정이다. 이 곳에 올라서면 서울을 흐르고 있는 한강의 동쪽편을 관찰할 수 있다. 


여기서 잠깐 한강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한강은 예전부터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광개토대왕비문에는 '아리수'라고 기재되어 있고, 고려시대에는 '열수'라고 불리기도 했다. 지역적으로 다른 이름을 가지기도 했는데 경기도 여주 지역은 '여강'이라고 불렸고, 임진강과 합수되는 한강 하류 일대는 조강이라고 불렸다.


매봉산 팔각정 앞에 있는 동호대교는 '동호'라는 옛날 그 지역의 명칭을 따서 지었다. 동호는 서울의 동쪽 지역 한강을 일컫는 말이다. 한강이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게 보인다고 하여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팔각정에 올라서면 강남 방면으로 꺾여 나가는 한강의 역동적인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인근에 있는 아차산은 물론 멀리 팔당대교 부근까지 조망할 수도 있다. 


연이어 놓여 있는 한강다리들의 이름을 맞춰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동행한 사람들과 한강다리 맞추기 놀이를 해볼 수도 있다. 필자도 동행한 트레킹팀과 함께 한강다리 맞추기 놀이를 했다. 결과는? 비밀!     





* 한강: 매봉산 팔각정에서 서울의 동쪽 지역을 바라본 모습.






● 버티고개에 앉아 있는 놈이 되지 말자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다.”   

  

이런 속담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 저 속담은 사람들한테 사기나 치고, 민폐나 끼치는 못된 놈들을 욕할 때 쓰는 말이다. 버티고개는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버터고개, 번터고개라고도 불린 이 고개는 길이 좁은데다 도둑들까지 들끓는 터에 악명이 높았다. 그 도둑들을 옛날 순라꾼들이 ‘번도’라고 외치며 추격을 했는데, 그 말이 변하여 ‘번티’라 불렸다가 다시 ‘버티’로 바뀌었다고 한다. 


예전 한 밤 중에 버티고개에 앉아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아마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남들에게 민폐나 끼쳐서 ‘밤중에 버티고개에 앉을 놈’과 같은 욕을 먹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의 버티고개는 걷기에 좋은 길이 됐다. 안전한 생태다리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남산의 동쪽 방면을 보며 걸을 수 있다. 그렇게 버티고개를 넘으면 동남쪽 서울성곽길과 만나게 된다. 이 구간의 성곽길은 신라호텔 후면을 돌아간다. 이 구간은 신라호텔의 사유지였던 곳이 개방된 터라 비교적 성곽의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 매봉산 팔각정






●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장충단 공원     


가수 배호의 노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으로 유명한 장충단(奬忠壇)은 원래 제례를 드리는 공간이었다. 이곳은 어영청의 분소인 남소영(南小營)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남소영은 도성의 남부지역을 방비하는 군영이었다. 


이 자리에 장충단이 들어서게 된 건 1900년 9월경이었다. 고종은 을미사변(1895년)으로 살해된 명성왕후와 신하들의 넋을 추모하고자 장충단을 세웠다. 처음에는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장병들만 제사를 지냈으나 이후에는 이경직 같은 궁내부 대신들도 배향되었다. 더불어 임오군란, 갑신정변 당시에 순직한 문신들도 배향되면서 많은 문무관들이 장충단제향신위(奬忠壇祭享神位)에 봉안됐다.  


공원 중심부에 서 있는 장충단(奬忠壇) 비석의 앞면은 순종이 직접 쓴 글씨를 세긴 것이다. 순종은 명성왕후의 둘째 아들이었으니 글자를 써내려가면서 울분을 토했을 것이다. 


장충단은 1910년, 일제에 의해 폐사된다. 1920년대 일제는 장충단을 공원화하면서 그곳의 정신을 앗아가게 된다. 마치 ‘종묘사직’ 할 때의 ‘사직단’이, 1922년 사직단 공원이 된 것과 같이 격하된 것이다. 


을미사변 희생자들의 넋들이 빠져(?)나간 장충단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추모시설들이 그 자리를 채워나갔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을 당해 죽었을 때인 1909년에 일본은 장충단에서 추도대회를 열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도하기 위해 박문사(博文寺)가 세워졌고, 상해사변(1932년) 때 폭탄을 안고 적진(?)을 향해 갔던 육탄삼용사를 기리는 동상도 세워졌다. 


육탄삼용사는 가미카제의 원형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중국군의 철조망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은 폭탄에 불을 댕겼는데 생각한 것보다 심지가 빨리 탔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됐을까? 그냥 폭사했다. 그런 3인을 위해 일제는 동상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 일제가 만든 시설들은 광복 후에 다 철거가 됐다.      





* 수표교





● 정치집회 장소로 쓰였던 장충단공원     


광복 이후 장충단 공원은 정치집회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수많은 정치집회 연설 중 두드러진 연설이 하나 있었다. 1971년 4월 18일,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의 선거 유세가 바로 그것이다. 그해 4월 27일에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선거 와중에 행해진 김대중의 연설은 무척 파격적이었다.   

   

“이번에 우리가 집권하지 못하면 박정희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온다”     


그의 연설처럼 1972년에 유신헌법이 제정됐고,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꿈꾸게 된다. 1979년 10월 26일에 한 발의 ‘총탄’이 있기 전까지 박정희는 실질적으로 총통이었다. 3권 분립은 그저 교과서에서만 존재했다. 


이외에도 김대중은 향토예비군 폐지, 남북간 비정치적 영역 교류 실시, 지방자치제 도입 등을 언급했다. 지금이야 새로울 것이 없지만 당시의 시각으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들이었다. 장충단 공원에 모인 100만 가까운 인파들 앞에서 저런 ‘센세이셔널’한 내용들이 확성기를 타고 퍼져나갔으니 당시 집권세력은 얼마나 긴장을 했겠는가?      



● 청계천 복원의 핵심수표교 


장충단공원에는 수표교(水標橋)도 있다. 청계천에 세워져 있던 수표교는 1958년, 청계천이 복개가 될 때 철거되어 홍제동으로 이전했다가 1965년부터 장충단공원 입구에 자리 잡게 됐다. 수표교는 세종 2년(1420)에 처음 세워졌는데 그때 이름은 마전교(馬廛橋)였다. 마전교가 수표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변경되게 된 건 세종 23년(1441)의 일이다. 그해 강수량을 측정하기 위해 다리 아래에 양수표(量水標) 세우게 됐는데 그것을 계기로 수표교(水標橋)로 개칭이 된 것이다.  


수표교의 매력은 다리 난간에 있다. 난간이 있는 다리는 궁궐에서나 쓰였다. 조선시대 민간의 다리는 징검다리나 섶다리 수준이었다. 그래서 수해가 나면 다리가 흔적조차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수표교는 튼튼한 돌다리인데다 고급스러운 난간까지 더해졌다. 백성들이 이용하는 다리들 중에 수표교처럼 궁궐의 양식으로 격조 높게 축조된 다리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편 수표교의 돌기둥에는 경진지평(庚辰地坪)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영조 36년(1760), 그해에 있은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 과정에서 새겨진 것이다. 이렇듯 수표교는 역사적으로 건축학적으로 무척 중요한 다리다. 하지만 청계천 복원이 된 지금도 원래 위치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청계천 자리에는 ‘짝퉁 수표교’가 세워져 있다. 


한강도 보고, 버티고개도 넘고, 장충단도 탐방하는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 그렇게 서울 내부를 가로질러 가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들을 탐방하게 된다. 생각지도 못한 울창한 숲길에 매료되게 된다. 



* 한강정망대 역사트레킹: 한양도성 남산구간






● 가야할 길이라면 우리는 가야한다     


서두에 언급한 오우렌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보자. 돌아가는 길이 순탄하지 않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길을 헤매는 것도 여행의 일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도 여행의 일부니까. 


그런데 뜻밖의 장면을 목격하게 됐다. 로마시대에 건설된 다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ponte roman de ourense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 로마시대의 다리인데 현재도 현역으로 쓰이고 있다. 또 한 가지가 있다. 도시자체가 무척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 로마다리 밑으로는 미뉴강이라는 강이 흐르고 있는데 수변과 어우러진 도심지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직진을 하든 돌아서 가든 가야할 길이라면 우리는 가야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숙명이다. 그렇게 묵묵히 걷다보면 위와 같은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에피소드를 이렇게 부른다.     


- 전화위복     





■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     


1. 코스: 금호산 ▶ 매봉산팔각정 ▶ 버티고개 ▶ 한양도성  ▶ 장충단공원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하

5. In: 지하철5,6호선 청구역 / Out: 장충단공원(지하철3호선 동대역)    





*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역사트레킹


 

박수를 받든 안 받든 그냥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무대에 서 있을 때만큼은 정말 행복합니다.”

 

예전에 우연히 만난 연극인이 이런 말을 했었다. 연극인이 겪어야 하는 생활고, 캐스팅에 대한 불안감...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고단한 연극판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는 해맑은 미소로 저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대행복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는 더 힘줘서 이야기를 했었다.


방송에서 인기가 떨어진 가수나 배우들이 무대가 너무 그립다는 말들을 할 때는 마음에 와 닿지 않았었다. 그냥 한물간 연예인들의 인기회복용 멘트라고 생각했다. 시청자들의 감수성을 건드리려는 작업용 멘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연극인과의 대화 이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가식적인 방송용 멘트가 아니라 진짜 무대에 대한 간절한 갈증을 마이크에 대고 표출한 것이라고.


무대라고 하니까 가수나 배우들에게만 초점이 맞춰지는데, 무대를 그라운드로 바꿀 수도 있다. 시즌 중에 부상을 당한 한 여자배구 선수가 있었다. 재활 과정 중에 인터뷰를 했었는데 코트가 그립다며 눈물까지 보이더라. 배구가 너무 하고 싶었다는 이야기다. 그녀에게 배구는 존재 이유였던 것이다.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은 야구선수 이종범도 인터뷰에서 비슷한 말을 했었다. 부상 이후에 찾아온 슬럼프 때문에 너무 괴로웠고, 다시 그라운드에 서기 위해 더 열심히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루키시절보다 더 열심히 타격과 수비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곳이 바로 그라운드였으니까


결국 그는 다시 그라운드에 섰고, 2009년 소속팀인 기아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를 우승할 때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 당시 이종범의 나이는 40살이었다. 이미 은퇴를 해야 할 나이였지만 그는 그라운드 위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실히 입증했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무대가 있을 것이다. 자신만의 그라운드가 있을 것이다. 그곳에 올라서면 자신도 모르게 화색이 돌고 말에 힘이 넘치게 된다.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는 힘에 부쳐하다가도 그곳에 올라서면 얼굴색이 달라진다. 마치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렇다면 필자의 무대는 어디일까? 그렇게 화색이 돌고, 말에 힘이 넘치는 무아지경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 어디일까? 길이다. 더 정확히는 숲길.

 



* 북악팔각정: 북악팔각정에서 바라본 북한산. 






세검정(洗劍亭)보다 고향집 팔각정이 더 낫다?

 

3편에서는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서울의 숨어 있는 비경이라고도 불리는 백사실계곡은 북악산에 자리 잡고 있다. 백악산이라고도 불리는 북악산은 서울의 내사산(內四山) 중 가장 키가 큰 산이다. 그 높이가 340m이다. 전편에서도 계속 언급했듯이 한양도성은 내사산을 연결하여 만들어졌다. 북악산-인왕산(338m)-남산(270m)-낙산(125m)을 연결하여 18.6km의 성곽을 쌓았다.


법궁이었던 경복궁이 그 아래에 자리 잡고 있듯, 북악산은 궁궐의 주산으로서 조선시대 내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군주제에서 공화정으로 바뀐 지금도 그 역할은 계속되고 있다. ? 청와대가 있으니까.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은 상명대입구에 있는 홍제천에서부터 시작한다. 3호선 경복궁역에서 상명대행 시내버스를 타고 약 15분 정도 이동하면 시작점에 도달한다.


홍제천은 모래가 많아 사천(沙川)이라고도 불렸다. 그 홍제천을 따라 백사실계곡으로 방향을 잡고 가면 세검정을 만날 수 있다. 세검정은 칼을 씻었다(洗劍)’는 의미인데 광해군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자,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칼을 갈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라고 명명됐기 때문이다. 정자정()에서도 보듯 세검정은 계곡 옆에 지어진 정자다.


세검정 일대(종로구 부암동)는 예부터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였다.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이 주위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홍제천이 너럭바위 위를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데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다산 정약용과 겸재 정선도 그렇게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린 이들이었다. 다산 선생은 <유세검정(遊洗劍亭)>이란 시를 지었고, 겸재 선생은 <세검정도>라는 부채 그림을 그려 세검정을 칭송했다.


현재의 세검정은 1977년에 지어졌다. 1941년에 인근에 있던 종이공장에서 화재가 났는데 불이 옮겨 붙어 주춧돌만 남기고 완전히 소실됐다가 이후 36년 만에 복원된 것이다. 겸재 선생의 부채 그림을 많이 참조하여 복원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크다고 한다


필자가 봐도 복원된 세검정과 겸재 선생의 그림 속의 세검정은 닮아 있지 않았다. 현재의 세검정은,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동네 정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트레킹팀의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 고향 마을회관에 있는 팔각정이 더 좋아 보이는데요...”


부채에 그려진 수려한 주위풍광은 되돌릴 수 없겠지만 문화재 복원만큼은 보다 더 정교하게 이루어졌으면 한다.

 




* 세검정





비밀의 화원 같은 백사실계곡

 

북악산은 많은 부분이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그래서인지 1급수에서만 산다는 도롱뇽이 살고 있단다. 그곳이 정확히 어디냐? 바로 백사실계곡이다. 북악산의 북사면에 위치한 백사실계곡은 비밀의 화원같다고 표현할 수 있다.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중심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그렇게 한적한 장소가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사실 백사실 계곡은 말이 계곡이지 거의 건천에 가깝다.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을 때를 거의 본적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백사실 계곡은 계곡 자체보다는 숲길이 더 각광을 받는 곳이다. 울창한 숲이 터널처럼 산책로를 감싸고 있어 삼림욕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저 한들한들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랄까.


산책로를 따라 백사실계곡 위쪽으로 올라가면 큰 연못 자리와 함께 별서터가 나온다. 주춧돌만이 남아 있는 그곳은 오성대감 이항복 선생의 별서터였다고 전해졌다. 그래서 필자는 예전에 이런 식으로 해설을 했었다.

 

예전에 이곳은 백사 이항복 선생의 별장터였어요. 이항복 선생은 오성과 한음 할 때, 그 오성이었죠.”

 

하지만 몇 해 전에 추사 김정희 선생이 그곳의 주인이었다는 고문서가 발견됐고, 백사실계곡의 별서는 추사 선생의 소유라는 게 정설이 되었다. 하지만 그 곳이 이항복 선생 소유든 김정희 선생 소유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오히려 오성대감과 추사 선생이 함께 묶여 있으니 더 풍부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식으로 해설을 한다.

 

예전에는 이곳이 오성대감 별장터라고 말했는데요. 이제 추사 선생의 문서가 발견됐으니 저는 이렇게 가정해봅니다. 이곳이 오성대감 소유였다가 나중에 추사 선생이 매입했다, 이런 식으로요. 오성대감은 조선 중기 때 인물이고, 추사선생은 후기 때 인물이니까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과거의 행한 해설 오류를 만회하려고 나름대로 꼼수(?)를 써본 것이다.

백사실계곡 일대는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동천은 풍광이 수려한 곳을 지칭하는데 어떤 풍류객이 白石洞天네 글자를 보기 좋게 각자를 해두었다. 그 백석동천 바위는 탐방객들의 포토존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누구나 그 곳을 탐방하면 그 바위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카메라를 꺼내고 멋진 포즈를 취하게 될 것이다. 찰칵!

 




* 백사실계곡: 계곡 초입에 있는 현통사






서울 한복판에 능금마을이?

 

백석동천을 탐방하다 보면 능금마을이라는 곳을 만나게 된다. 능금마을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그런지 전원적인 모습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서울 도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비료포대가 쌓여진 농촌 마을을 보고 있자니 생경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왜 능금마을이 북악산 서북쪽 부암동 부근에 있는 것일까? 아시다시피 능금이면 우리나라의 고유 사과종을 말하는데 능금으로 유명한 지역은 대구·경북 쪽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드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예전에 트레킹에 참가한 사람들도 그렇게 묻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왜 사과마을이 있는 거에요?”

 

현재 창의문 밖, 부암동 일대는 능금마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과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능금마을이라는 마을 명칭만이 옛 흔적(?)을 확인해 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40여 년까지만 해도 창의문 밖 능금은 경림금(京林檎)이라 하여 서울의 유명한 특산물이었다. 능금이 출하되는 가을 때쯤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창의문 인근이 들썩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창의문 밖에 능금나무가 많이 심어졌을까? 먼저 산지 형태를 띠는 부암동 일대의 토양이 척박하여 논농사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로 들어질 수 있겠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는 창의문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 두 번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창의문의 역사를 더듬어 가야 한다.

 




* 백석동천: 각자바위






인조반정과 능금마을

 

1623313.

창의문 밖 홍제원(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에 집결한 의군(義軍)’들은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진격한다.


반정군의 원두표가 도끼로 문을 부셨다. 당시 창의문은 문루가 없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기 때문이다. 높은 위치에서 활도 쏘고 해야 하는데 문루가 없으니 효과적인 방어가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반정군은 창덕궁을 점령했고, 광해군은 폐위된다.


능금마을 이야기를 하다 뚱딴지 같이 왜 인조반정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일까? 그렇다. 창의문 밖 능금마을은 인조반정과 무척 관련이 깊다. 인조는 반정에 협조했다 하여 창의문 밖 백성들에게 능금나무와 자두나무를 나눠주었다. 그게 부암동 능금마을의 시초가 된 것이다.


숙종 때에는 정책적으로 묘목을 더 많이 심어 부암동 일대에 무려 20만 그루의 능금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빨갛게 달아오른 사과들이 푸른 잎들 사이에서 대롱대롱 거렸을 것이다. 아주 멋진 장관이 펼쳐졌을 것 같다. 거기에 인왕산 서편으로 석양이 지는 모습까지 어우러지면!


창의문 밖 능금, 경림금은 그렇게 서울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되었다. 추석 차례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제례물품이 되었던 것이다.

 




* 수각터: 수각터에서 바라본 별서터. 물에 세운 정자를 수각이라고 한다. 백사실계곡 별서터 옆에는 수각이 세워졌던 기단들이 이렇게 남아 있다. 현재 수각은 사라졌고, 연못은 매말랐다.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 다음날에는 저 연못이 물이 차기도 한다. 





북악스카이웨이와 북악산 산책로

 

능금마을을 돌아가면 약수터가 나온다. 산길도 계곡 이어진다. 백사실계곡 숲길보다는 덜하지만 이 산길도 정말 걷기에 좋은 길이다. 걷다보면 어깨춤을 추거나 콧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필자는 둘 다 했다. 어깨춤을 추며 콧노래를 불렀다.


이제 북악스카이웨이를 따라간다. 북악팔각정을 향해가는 것이다. 일명 북악스카이웨이로 불리는 북악로는 19689월에 완공됐다. 이 도로는 그해 121일에 있었던 청와대습격사건(일명 김신조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다. 서울방어목적으로 개통됐던 것이다.


무장공비에 의한 청와대습격이라는 엄청난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지만 이 도로는 관광용으로 더 많이 애용됐다. 도로 정상부에 북악산 팔각정이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을 한 눈에 다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사산은 물론 멀리 관악산과 아차산 등 외사산까지도 다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북악산 팔각정이다.


북악산 팔각정은 석양이 질 무렵이 가장 낭만적이다. 뒤쪽 북한산 서편으로 펼쳐진 붉은 노을을 감상한 후에 앞쪽으로 이동을 하여 서울의 야경을 보는 것이다. 노을도 감상하고, 뒤이어 야경도 감상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연과 도시의 낭만을 동시에 품고 있는 북악스카이웨이는 60~70년대 신혼여행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당시에는 택시를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나 남산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신혼여행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해외여행이 흔한 일상이 된 요즘과 비교해보면 정말 격세지감이다.


한편 북악산 산책로는 한양도성 북악산 구간과는 다르다. 성곽 구간을 포함하여 북악산 일대는 안보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됐다 2006년 이후 일반인들에게 개방됐다.

팔각정에서 성북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군인들의 보초로이다. 그 길을 걷다보면 지금 자신이 서울 중심부에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게 될지 모른다. 그만큼 그 길 주변은 때 묻지 않은 자연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 백사실계곡: 울창한 여름숲도 좋고, 이렇게 단풍이 지는 가을도 좋다. 이렇게 좋은 길을 걸으니 어깨춤이 들썩이고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거겠지!





숲길에 서면 무아지경에 빠진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필자의 무대는 길이다. 길 위에 서서 트레킹을 행하다보면 모든 근심걱정에서 벗어난다. 평소에 거울을 보면 항상 해있는데 숲길에서 트레킹을 할 때는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렇게 해맑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다


좋은 기가 발산 되서 그런지 숲길에서는 해설도 잘 된다. 마이크를 잡고 이러쿵저러쿵 두서없이 이야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박수로 갈무리된다그렇게 숲길은 필자의 존재가치를 확실히 입증해주는 무대다. 가끔 그 위에 올라서면 어느덧 무아지경에 빠지기도 한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무대가 있을 것이다. 그 무대가 누구에게는 실험실일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그라운드일수도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주방일수도 있다. 누구의 무대가 더 좋고 나쁜지는 굳이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다. 그저 묵묵히 무대에 올라 자신만의 에너지를 발산하면 되는 것이다.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지만 숫자는 한 번 따져보고 싶다. 숫자는 확실히 필자의 무대가 압도적이다. ? 전국방방곡곡에 있는 숲길이 다 필자의 무대니까.

 

 



* 백사실계곡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

 

1. IN: 부암동

2. OUT: 성북동

3. 세부코스: 세검정 백사실계곡 능금마을 북악산팔각정 성북동

4. 이동거리: 7km

5. 예상시간: 3시간 30

 

 


*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예전에 작성했던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원고를 재작성 하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다짐한 것 중에 하나가 원고 재작성 및 마무리였었다. 책 출판은 둘째치고... 원고가 미완성으로 있다보니 뒤가 계속 캥기는 것이다.

기존에는 총 16편을 작성했다. 16편이면 적은 편수는 아니지만 좀 두서가 없다고 해야 하나? 잡다한 게 섞여서 순도가 좀 낮은 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트레킹이라는 주제에 더 집중하자고 각오를 다졌다.

그런 각오를 다지며 2월 11일 국내에 복귀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신종코로나 바이러스가 더욱더 창궐을 했다. 덕분에 원고를 쓸 시간은 아주 많아졌다. 정확히는 재작성인데 이것도 만만치가 않은 작업이다.

이전과는 달리 원고에 참고용 지도를 그려넣고 있다. 트레킹 글을 작성하는데 지도를 안 넣으니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진 느낌이들어서였다. 마치 온라인 여행기사에 관련 사진이 하나도 없는 그런 느낌?ㅋ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보시다시피 지도를 수작업으로 생산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원고 작성하는 시간보다 지도 그리는 시간이 훨씬 더 많이 소요된다는 것이다. 지도 작성 공정은 이렇다.

1. 연필로 초안 잡기

2. 스캔

3. 스캔본에 채색하기 -> 다이소에서 구매한 3천원 짜리 색연필로 채색!ㅋ

4. 스캔

5. 이름붙이기 -> 그림 도구 상자를 이용

이러다보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클 정도로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지도를 그리면서도 속으로 궁시렁궁시렁 거렸다.

- 그림도 못 그리면서 왜 이런 짓을 하는거야.

- 누가 저 지도를 보고 그대로 따라가겠냐.

- 디자이너한테 외주를 주는게 훨씬 더 낫지 않어.

- 이지드로잉 같은 그림그리기 타블릿을 구매하는 건 어때?

궁시렁궁시렁 거리면서도 연필로 그리고, 채색을 하고 그랬다. 원고 작성하는데 1시간이 소요된다면 지도 그리는데는 5시간이 걸렸다. 미련해도 이렇게 미련할수가!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리다보니 재밌는거다. 초딩들이 그린 것처럼 결과물의 퀄리티가 높지는 않지만

이거 그리다보니 은근히 재밌는거다. 중독성이 있단 말야. 나중에 내가 그린 지도들이 디자이너들의 작업물로 대체될 수도 있지만... 지금은 내가 그린 지도가 내 원고에 찰떡궁합인 것이다. ^^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참 독특한 중독에 빠지는 요즘이다. ^^;










이름을 떨치고 싶었다. 말이 좋아 역사트레킹 마스터지 필자의 삶은 백수의 고급버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프리랜서, 그것이 딱 필자의 자화상이었다. 그렇게 이도저도 아닌 삶을 살고 있다 보니 엉뚱하게도 이름 떨치기에 대한 욕구가 커져갔다.


변변치 않은 벌이와는 별개로 트레킹 바닥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시즌과 비시즌이 확 갈린다는 것이다. 봄과 가을에는 신발밑창이 닳도록 열심히 움직이지만 여름과 겨울에는 멍하니 하늘을 보는 시간이 많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노을트레킹을 겨울에는 눈꽃트레킹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도 딱 거기까지다. 더군다나 필자가 추구하는 트레킹은 대중트레킹이다. 어두운 밤에 멧돼지를 만나거나 동장군에 맞서면서까지 트레킹을 하기가 쉽지 않다. 수강생들도 안 온다.


만약 필자의 이름값이 꽤 나간다면 비시즌에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지는 않을 것이다. 열심히 원고 작성을 하거나 마이크를 잡고 실내 강의를 하고 있겠지. 하지만 현실은 동장군이 얼어 죽을 정도로 냉혹하다. 필자의 통장은 비시즌이 되면 싸늘함 그 자체가 된다.


불혹이 넘은 나이에도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다 보니 이름에 대한 집착을 갖게 된 거 같다. 네임밸류가 있었으면 적어도 현재와 같은 불안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텐데. 호랑이가 가죽을 남기듯 내 이름 석 자를 남길 수 있을까?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아무 의미 없이 그냥 살다가 가는 건가?


허명(虛名)이라도 갖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답답한 현실에 대한 유일한 탈출구이자 판타지였다






* 인왕산: 서울의 우백호 인왕산. 낙산공원에서 촬영했다. 





낙산은 서울의 좌청룡

 

1편 인왕산 역사트레킹에서 언급했던 내용을 다시 복기해본다. 좌청룡·우백호에 대한 이야기이다.


서울에도 좌청룡과 우백호가 있다. 조선의 도읍지였던 한양이 풍수지리에 의거해 기획된 도시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동쪽-청룡’, ‘서쪽-백호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남쪽-주작’, ‘북쪽-현무도 빼놓을 수 없다.


일단 우백호는 어디일까? 인왕산이다. 경복궁 옆쪽에 우뚝 서 있는 인왕산이 서울의 우백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 좌청룡은 어디일까? 낙산이다. 혜화동 뒤편에 나지막하게 서 있는 낙산이 바로 서울의 좌청룡인 것이다. 이화동 벽화마을, 낙산공원을 품고 있는 산이 바로 그 낙산이다.


낙산(駱駝)은 높이가 약 125미터로 키가 작은데 산의 형세가 낙타 등처럼 보인다하여 낙산 또는 낙타산이라고 불린다. 낙산은 인왕산과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낙산은 좌청룡이기에 우백호인 인왕산과는 필연적으로 용호상박을 해야 하는 팔자다. 청룡과 백호의 피할 수 없는 한 판 승부! 당신은 어디에다 베팅을 할 것인가?

 

- 세상을 뒤흔들 세기의 맞대결! 메가톤급 강펀치가 천지를 진동한다. 세상의 모든 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청룡과 백호의 물러설 수 없는 한 판! 그 세기의 대결에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절대 놓치지 마십시오. 마감 임박~!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는 법이다. 저렇게 프로모션을 띄운다고 해도 결과

는 뻔하다. 세기의 대결치고 진짜 세기의 대결이 펼쳐진 거 본 적 있는가?  






* 낙산성곽길





우백호의 위세에 눌린 좌청룡

 

결론적으로 말해 서울의 청룡은 백호에게 게임이 안 된다. 체급부터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낙산은 해발고도가 125미터로 338미터인 인왕산에 비해 키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낙산(), 인왕산(), 남산(), 북악산()을 묶어 내사산으로 칭하는데 그 내사산 중에서 낙산이 가장 작다. 참고로 북악산은 342미터이고, 남산은 270미터이다.


해발고도가 낮으니 낙산은 산세도 그리 웅장하지 못하다. 이에 비해 인왕산은 민낯을 드러낸 것처럼 돌출된 암반면이 소나무들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300미터급 산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풍광을 뽐내고 있다.


그렇게 우백호보다 기량이 딸리는 좌청룡이었기에 그것을 보완해야 했다. 동쪽에 있는 좌청룡은 남자, 장자를 뜻했다. 이에 비해 서쪽에 있는 우백호는 여자, 차자 등을 뜻했다. 적장자 중심의 왕위계승을 중시했던 조선이었기에 좌청룡에 대한 보완은 분명히 필요했던 것이다


이에 무학대사는 인왕산 아래에 궁궐을 짓자고 역설한다. 그리고는 궁궐의 방향을 동쪽인 낙산으로 향하게 하자는 주장을 펼친다. 이것이 인왕산 주산론이다. 하지만 당시의 실권자였던 정도전 세력들은 인왕산 주산론을 반대한다


궁궐의 방향을 서쪽으로 둘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정도전을 위시한 유교세력들의 주장이 힘을 얻었고 법궁이었던 경복궁이 북악산 아래에 들어서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북악산 주산론이다






* 성북동: 성북동 성곽길은 낙산이 아닌 백악산(북악산)에 속한다. 낙산 역사트레킹

은 낙산을 다 걸은 후 성북동에서 종료한다. 



   


200년 후를 내다본 무학대사?

 

이렇게 자신의 주장이 꺾인 무학대사는 이런 말을 남기며 탄식했다고 한다.

 

“200년 뒤 경복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너희들이 알겠느냐!”

 

여기서 다시 한 번 1, 인왕산 역사트레킹에서 언급한 내용을 재론해보겠다. 1

에서는 기도빨이 잘 받는 인왕산 선바위가 정도전을 위시한 유교 세력에 의해 

도성 밖으로 밀려났다는 것을 기술했었다. 그리고 이번 편에서는 인왕산 주산론

이 탈락되고, 북악산 주산론이 채택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듯 무학대사를 

위시한 불교세력들은 유교세력들에 의해 번번이 자신의 의사가 꺾이고 만다. 불교

세력들은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 무학대사가 200년 후를 내다보며 저런 이야기를 했을까? 무학대사가 

노스트라다무스도 아닌데... 불교세력이 밀려난 후, 200년 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천도를 했을 때가 1394년이었으니, 200년 후는 

1590년대였다. 그 즈음에 누구나 다 아는 전쟁이 일어났다. 그렇다. 임진왜란이라 

불리는 조일전쟁이 1592년에 벌어진 것이다.


정말 무학대사는 200년 후를 내다보며 저런 예언을 했던 것일까? 1편에서도 언급했

듯이 불교 VS 유교간의 갈등은 공식적인 사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무학대

사의 예언은 개국 초기가 아닌 조일전쟁 이후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당시의

민초들은 지배층이었던 사대부들에게 전란의 책임을 묻고 있었던 것이다


도성을 버리고, 백성도 버린 지배층에 대해서 힐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책임을 묻는 자리에 무학대사를 등판시킨 것이다. 자신들의 울분과 설움을 무학대사

에게 투영하여 당시 지배층인 사대부들을 꾸짖고 있었던 것이다





* 이화동 벽화마을






동인의 핵심 김효원이 살았던 낙산

 

낙산은 야트막한 산세 때문에 산책로로 많이 이용되었다. 또한 숲길이 우거져 있어 낙산 인근에는 별장들이 많았다. 인조의 셋째 아들이었던 인평대군이 지은 석양루(夕陽樓)를 비롯하여 18세기에 활약했던 문인 이심원이 지은 일옹정(一翁亭) 등 많은 별채들이 있었다.


명사들도 많이 살았다. 태종의 외손이었던 남이 장군, 우암 송시열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동서분당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던 김효원도 낙산 기슭에서 살았다. 김효원의 집이 동쪽에 위치한다 하여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동인이라고 불렀다. 이에 비해 서인의 거두 심의겸의 집은 지금의 덕수궁 근처라 한양의 서쪽에 있었다. 그래서 심의겸을 따르는 이들을 서인이라고 불렀다.


일설에 의하면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도 낙산에 은거해 살았다고 한다. 단종이 강원도 영월 땅으로 유배를 떠나고 난 후, 폐서인이 된 정순왕후는 이 산 아래에 있는 청룡사의 승려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임을 떠나보냈던 정순왕후는 이 산 동쪽에 있는 동망봉에 올라 매일같이 치성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낙산은 누군가에게는 한이 서린 기원의 장소이기도 했다






* 혜화문: 원래는 사진 아래에 있는 도로에 위치해 있었다. 1928년 도로 확장에 

따라 문이 헐리게 됐다. 이후 1994년에 현재의 위치로 복원된다.  







낙산 성곽길에서 성돌 모양 맞추기

 

이렇게 낙산에 대한 연혁들을 나열해봤다. 하지만 낙산 역사트레킹의 백미는 역시 성곽길을 걷는 것이다. 낙산 성곽길에서는 축성 시기에 따른 다양한 성돌 모양을 직접 관찰할 수가 있다. 한양도성은 축성 시기에 따라 크게 4시기로 나눌 수가 있다.

 

1. 태조시기. 이때는 토성(土城)과 석성(石城)이 혼합된 형태로 축성됐음.

2. 세종시기. 토성을 석성으로 개축함.

3. 숙종시기. 종전보다 더 큰 성돌로 축성함.

4. 순조이후시기. 더 큰 성돌로 축성함.

 

낙산 성곽길에서는 세종시기부터 순조 이후까지, 즉 조선 전기부터 후기까지 성돌의 변천사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성돌의 변화상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런데 처음 봐서는 잘 구분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도 그랬다. 주변머리가 없어서 그랬는지 성돌 구분이 처음부터 확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는 나름대로의 구별법을 써봤다.

 

1. 세종시기 -> 옥수수돌

2. 숙종시기 -> 두붓돌

3. 순조이후시기 -> 주사위돌

 

*정리: 시간이 흐를수록 성돌은 점점 더 커져갔고, 규격화됐다. 후기로 갈수록 치석(治石)의 강도가 세지고, 돌의 크기도 더 커지는데 순조 시기에는 큰 주사위돌 같은 형태가 나타난다. 여기서의 치석은 치과에서 말하는 치석이 아니라 돌을 다듬는 것을 말한다. 태조 시기의 돌들은 자연석을 옮겨놓는 수준이라 표면이 매우 거칠었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치석이 강화되니 표면이 매끈한 성돌이 성체에 자리 잡게 된 것이다.  

   



* 성돌의 시기별 모양





낙산 정상에 올라서면 속이 다 시원해진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낙산은 서울의 안쪽을 감싸고 있는 내사산 중에 가장 키가 작다. 그래서인지 한양도성 낙산 구간은 인왕산이나 북악산 구간보다 훨씬 더 걷기 편하다. 인왕산이나 북악산 구간에는 급경사 구간이 있지만 이에 비해 낙산 구간은 시종일관 완만한 경사를 유지하고 있다. 선조들에게는 왜소한 좌청룡이라고 놀림을 받았지만 역설적으로 성곽길을 탐방하는 여행객들에게는 찬사를 받는 것이다.


또한 접근성도 상당히 좋다. 전철역에서 바로 성곽길 트레킹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에서 하차한 후 흥인지문(동대문)을 둘러본 후 성곽길을 따라 트레킹을 할 수 있는 것이 낙산트레킹의 큰 장점 중에 하나다.


그렇게 성곽길을 타고 올라가다보면 이화동 벽화마을도 만날 수 있다. 벽화마을을 탐방한 후 언덕길을 올라가면 낙산 정상부인 낙산공원에 다다르게 된다. 이 곳에 올라서면 속이 다 시원해질 정도로 멋진 풍광을 만날 수 있다


눈앞에 북한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 때문이다. 백운대·인수봉·만경대 등의 동북쪽 봉우리들뿐만 아니라 보현봉이나 형제봉 같은 남쪽의 봉우리들까지도 한 눈에 다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필자는 항상 이런 멘트를 했었다.

 

저 북한산 좀 보세요. 위쪽으로는 살짝 도봉산까지 보이죠? 북한산을 한 눈에 다,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바라보려면 이 낙산만큼 좋은 곳도 없습니다. 낙산이 키가 작아도 이렇게 참 실하지 않습니까?”

 

성곽길 낙산 구간이 끝날 무렵에는 동소문이라고 불리는 혜화문을 만나게 된다. 혜화문은 일제에 의해 철거됐다, 199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복원됐다. 낙산 역사트레킹은 북악산 성곽길도 걷는다. 그렇게 성북동 인근 북악산 구간을 걷다 와룡공원을 지나게 된다. 이후 트레킹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인 심우장에서 종료하게 된다






* 북한산: 낙산공원에서 바라본 북한산.




 작자미상

 

서울은 인구 천 만 명이 사는 메트로폴리탄이다. 그런 거대 도시에 축조된 지 600년도 더 넘는 거대한 성곽이 잘 버티고 서 있다는 게 참 대견스럽다. 서울의 내사산을 따라서 만들어진 한양도성. 마치 순리를 따르듯 자연지형에 녹아든 한양도성의 모습이 서울 메트로폴리탄을 더 돋보이게 한다.


그런 한양도성을 보면서 꼭 잊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있다. 무엇을? 이름 모를 백성들의 피와 땀이다. 역군으로 징발된 그들에게 성곽축조는 중노동 중에 상중노동이었다. 그 추운 계절에 동원된 그들에게 나라에서는 아무런 반대급부도 지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먹을 식량까지 각자 알아서 준비해야 했다. 농한기라도 힘없는 백성들은 느긋하게 쉴 수가 없었다.


죽기는 또 얼마나 많이 죽었겠는가. 그렇게 이름 모를 민초들이 피와 눈물을 흘려가며 한땀한땀 성돌을 올린 것이 지금의 한양도성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 석 자는 어디에도 기재되지 않았다. 공사를 지휘하던 관리들은 그나마 각자성석에 자신의 흔적을 남겼지만 민초들의 이름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팔이 빠져라 성돌을 나르고 쌓았던 수많은 김개똥, 최돌쇠 등등... 부르튼 그들의 손을 누가 제대로 기억이라도 해줬을까?

 

이렇게 좀 씁쓸한 생각이 이어졌다. 결말을 지어야하는데 좀 우울한 면을 너무 부각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아무래도 결말은 해피엔딩으로 하는게 낫지 않나.


이름 모를 민초들은 성곽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성곽이 지금까지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연과 어우러진 한양도성이라는 예술작품을 그들이 공동으로 제작한 것이다. 김개똥도 최돌쇠도 공동으로 제작한 것이다. 대신 문서상으로는 그들의 이름이 기재되지 않았다. 작자미상이다. 물론 발주처는 명확하다. 조선 조정.


글을 마무리하려고 할 때 이런 생각이 밀려왔다.

 

굳이 이름을 남겨야 돼?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작자미상이 있는데... 그냥 

민폐 안 끼치고 좋아하는 역사트레킹하면서 사는 것도 복 받은 일이잖아!’   







* 이름남기기: 순종 이후 시기에 쌓여진 성돌에 필자의 방식대로 민초들의 이름을 

남겨보았다. 하는 김에 필자도 이름도 슬쩍 끼어넣었다. 얄밉게 숟가락을 올리는 형식

이라 뒤가 캥기지만... 이런 식으로 필자의 이름을 남겨본다. 혼자 북치고 장구친다고

욕을 먹더라도 상관없다. 소원성취를 한 것이다. 이름을 남겼으니까...








 낙산 역사트레킹  

   

1. 코스: 흥인지문 ▶ 이화동벽화마을 ▶ 낙산공원 ▶ 혜화문 ▶ 와룡공원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하

5. In: 지하철1,4호선 동대문역 / Out: 와룡공원(성북동)






* 낙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 콜로세움

☞ 지난 2019년 12월 17일부터 2020년 2월 11일까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및 유럽 여행을 행하고 왔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 전년도에도 다녀왔으니 2년 연속 탐방을 한 셈입니다. 순례길 탐방이 종료된 이후에는 20대에 못해봤던 배낭여행을 행했답니다.

독일 - 오스트리아 -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 스위스 - 이탈리아

알프스 산맥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 위주로 여행을 다녔습니다. 알프스 산맥에는 못 갔지만 먼 발치에서나마 알프스 일대를 둘러보았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열심히 여행일지를 작성했습니다. 여행일지는 수첩(기자수첩 사이즈)에 작성했는데 그 내용들을 포스팅할 생각입니다. 여행일지를 온라인으로 옮겨 놓는거라 재밌는 포스팅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또한 디테일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한 개인의 여행기가 이 공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작은 기록이 올라가지만 그것 자체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한 개인의 역사로 이어질테니까요!

* 2020년 2월 6일 목요일: 52일차 / 맑음

1. new hostel florence에서 오전 9시경 체크아웃함. 인근 bar에서 아침식사를 했는데 11유로가 나왔다. 어제 피렌체 대성당 근처 식당에서도 별로 먹은 것도 없는데 20유로가 나오고... 그저그런 아침식사였는데 11유로가 나오니 바가지 쓴 거 같은 생각까지 들었음. 스페인에서는 기껏해야 5~6유로 정도였을텐데... 이탈리아가 스페인보다는 물가가 좀 더 비싼 거 같음.

2. 오늘은 마지막 여행지인 로마로 이동하는 날임. 피렌체 중앙역에서 로마 테르미니(roma termini)역까지 이동함. 오전 11시 10분경 열차 탑승. 오후 3시경 테르미니역 도착함.

3. the rome hello hostel에 오후 4시경 체크인을 했음. 이후 유명한 스페인광장과 트레비(trevi) 분수를 탐방함. 트레비 분수를 봤을 때는 이미 해가 져서 야경 트레비 분수를 봤음.

4. 오랜만에 빨래를 했음. 속이 다 시원했다!

* 2020년 2월 7일 금요일: 53일차 / 맑음

1. the rome hello hostel에서 체크아웃함. 오전 10시경. 더 있고 싶었지만 베드가 없단다. 얼마나 인기가 좋으면... 하긴 좋을만 했다. 그 가격에 그 시설이면. 13유로.

2. 테르미니(termini)역 근처에 있는 two ducks hostel에 이른 체크인을 했다. 12시경. 11유로였는데 딱 11유로짜리였다.

3. 오늘은 콜로세움을 보러 가는 날. 콜로세움 지역은 정말 볼거리가 풍성한 곳이다. 콜로세움 - 콘스탄틴누스 개선문 - 비너스와 로마신전 - 팔라티노언덕 - 포로로마노 - 조국의 제단 등등... 너무 많아서 다 열거하기도 어렵다. 오죽했으면 투어 티켓의 유효 시간이 24시간도 아닌 48시간일까.

4. 콜로세움에 들어가보고 싶었는데 시간도 애매하고 콜로세움만 들어가는 표가 아닌 통합권이라 구매를 하지 않았다. 진짜 로마 여행은 2~3일 가지고는 어림도 없을 거 같다. 적어도 5일 이상 잡고 꼼꼼히 챙겨본다고 해도 다 못 둘러볼 거 같다.

5. 어쨌든 다시 로마에 올 핑계가 생겼다. 그때는 일주일 정도 시간을 갖고 제대로 둘러봐야겠다. 사진기도 제대로 된 것을 갖고 와서 사진도 제대로 찍고 말야.




* 스페인광장: 스페인 광장 앞에 스페인 계단. 스페인 대사관이 있다하여 스페인 광장이라고 불림.




* 트래비분수: 야간 조명이 잘 되어 있어서 그런지 야간에도 사람들이 아주 많~다!





* 2020년 2월 8일 토요일: 54일차 / 맑음

1. two ducks hostel에서 오전 9시 30분경 체크아웃함. 이 호스텔은 딱 11유로 수준이다. 그래서 1박만 했음.

2. 오늘은 바티칸(vatican city)에 다녀왔다. 첫날 묵었던 the rome hello hostel에 이른 체크인을 한 후 도보로 바티칸 시티에 다녀왔음.

3. 호스텔에서 바티칸 시티까지는 약 4km 정도 거리다. 느릿느릿 한 시간 정도 걸었다. 바티칸 시티 성베드로 광장에서 성베드로 대성전을 바라보았다. 정말 굉장하고, 웅장했다.

4.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산티아고콤포스텔라 대성당을 보고, 이탈리아 로마여행에서 바티칸 성베드로 대성전을 봤으니 가톨릭에서 말하는 3대 성지 중 2대 성지를 이번 여행에서 탐방하게 된 것이다. 나머지 한 곳은 이스라엘 예루살렘.

5. 로마 여행은 좋기는한데 계속 도심지만 탐방하다보니 좀 헤매는 느낌이었다. 인파에 밀려 좀 정신이 없었다. 역시 난 시티투어보다는 아웃도어 트레킹이 더 좋다!

6. 어차피 이번 여행도 이제 거의 끝났다. 여행 마무리 잘 하자! 아자아자!

* 2020년 2월 9일 일요일: 55일차 / 맑음

1. 숙소를 hostel gabriel로 옮겼음. 이번 여행의 마지막 밤을 보내야하니 홀로 느긋하게 있고 싶었음. 동네는 지저분했지만 30유로에 더블룸을 얻었으니 그럭저럭...

2. 오늘은 일정없이 그냥 있었음. 아니다 로마 데카트론에 가서 배낭과 트레킹화 등을 구매했다. 내가 간 데카트론은 상품이 많이 없었다. 내가 간 곳 말고도 다른 곳도 있던데 거기는 좀 많으려나? 데카트론은 프랑스에서 시작된 스포츠 매장으로 스포츠, 아웃도어계의 이케아라고 보면 된다. 우리나라에도 인천 송도에 데카트론 매장이 있다.




* 판테온신전: 기원후 120년 경.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때 지어진 신전. 모든 신들에 바쳐진 신전이라는 뜻을 가진 곳임. 로마 시대 유물이 완벽하게 보존된 형태임. 신전 안에 들어가면 중앙에 돔이 있는데 그 돔의 맨 윗부분을 뚫어놓았다. 이걸 커다란 눈(오쿨루스)이라고 한다. 그 커다란 눈 덕분에 자연 채광이 된다. 물론 비가 오면 그 커다란 눈으로 빗물이 다 들어오기도 한다. ㅋ





* 진실의 입: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온 진실의 입.


* 2020년 2월 10일 월요일: 56일차 / 맑음

1. 오전 11시 30분에 로마국제공항에서 핀에어 항공을 타고 핀란드 헬싱키 도착함. 이후 인천행 비행기로 환승하여 다음날(11일) 오전 9시경에 인천국제공항 1청사에 도착함.

2. 57일간의 산티아고 순례길과 유럽배낭여행 종료. 이번 여행이 끝난다. 하지만 국내에 돌아가면 다시 시작이다. 끝났다고 끝난게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것이지!

3. 비용: 2,616유로(항공료 제외, 쇼핑포함) + 52프랑(스위스) + 1,127쿠나(크로아티아)




* 바티칸 시티: 성베드로 성당





* 콜로세움: 인증샷 한 컷





* maty amaya nomad: 로마 콜로세움 앞에서 만난 아르헨티나 출신 자전거 여행가 maty. 자전거로 중남미를 다 돌고 유럽으로 넘어왔단다. 남부유럽을 돈 후 중동 두바이로 간다고 했다. 정말 대단한 친구다. 자전거가 무슨 장갑차 같았다. 무게만도 거의 130kg 정도 된다고 했다. 피켓에 써 있는건 풀어보면... 5년 동안 9만 1천 km를 여행했다고 한다. 정말 대단해!












* 피렌체: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만난 이탈리아 모델. 여신 같다. ^^



☞ 지난 2019년 12월 17일부터 2020년 2월 11일까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및 유럽 여행을 행하고 왔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 전년도에도 다녀왔으니 2년 연속 탐방을 한 셈입니다. 순례길 탐방이 종료된 이후에는 20대에 못해봤던 배낭여행을 행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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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 산맥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 위주로 여행을 다녔습니다. 알프스 산맥에는 못 갔지만 먼 발치에서나마 알프스 일대를 둘러보았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열심히 여행일지를 작성했습니다. 여행일지는 수첩(기자수첩 사이즈)에 작성했는데 그 내용들을 포스팅할 생각입니다. 여행일지를 온라인으로 옮겨 놓는거라 재밌는 포스팅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또한 디테일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한 개인의 여행기가 이 공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작은 기록이 올라가지만 그것 자체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한 개인의 역사로 이어질테니까요!

* 2020년 2월 3일 월요일: 49일차 / 맑음

1. hostal siena에서 오전 9시 30분경에 체크아웃함. 오랜만에 중간에 깨지 않고 푹잤음. 일어나보니 오전 8시 30분이었음. 역시 숙소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느꼈음. 공용화장실을 쓰는 숙소라 살짝 비싼감은 있었지만... 그래도 하룻밤 잘 지냈으니 그걸로 족함. 싱글룸, 33유로(도시세 포함).

2. 오늘은 이동일임. 피렌체(florence)까지 이동할 예정임. 밀라노에서 피렌체까지는 약 300km 이상이 걸림. 오늘은 오랜만에 다시 flix 버스를 타기로 했음. 생각해보니 이탈리아에서는 도시간 이동을 기차로만 했음.

3. 대도시라 그런지 밀라노의 플릭스 버스 출발지는 여러 곳이었다. 그중 대표적인 lampugnano bus station으로 이동했다. 지하철로 이동했는데 90분짜리 싱글 티켓을 구매했다. 이 티켓은 90분 이내에서 자유롭게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다. 지하철, 트램, 버스 등. 트램을 타고 싶었지만 시간관계상 타지 못했다. 다음에 밀라노에 왔을 때 트램, 그중에서도 클래식 트램을 꼭 타보리라! lampugnano bus station은 역 바로 앞에 있었다.

4. 오후 12시 5분발 버스에 탑승. 피렌체에 오후 4시 45분 도착예정. 하지만 거의 오후 5시 도착했음.

5. 피렌체에 있는 plus flonece 호스텔에 체크인했음. 이곳은 독일에서 묵었던 유스호스텔 같은 분위기가 났음.

* 2020년 2월 4일 화요일: 50일차 / 맑음

1. 무엇을 하던지 사람이 중요하다. 호스텔도 마찬가지다. 어떤 룸에이트를 만나느냐에 따라 숙박의 질이 달라진다. 오늘의 룸메이트는 정말 매너가 없었음. 인도와 뉴질랜드의 젊은 여성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떠들고, 전화하고... 또 왜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불러들이는지. 싫은 내색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더라. 주절이주절이 그 내용을 쓰면 끝도 없을 거 같다. 한마디로 꽝인 여자들이었다.

2. 피렌체역에서 기웃거리다 현지 경찰한테 검문을 당했다. 내가 얼마나 구리구리하게 생겼으면...ㅋ 그래도 나혼자 검문을 당하지는 않았다. 나 말고도 구리구리한 인간들이 또 있더군...ㅋ

3. 피사(pisa)역으로 향하는 기차를 탔다. 피사의 사탑을 보려고 피사에 가는 것이다. 오전 11시에 기차를 탔는데 50분 정도 만에 피사에 도착했다. 피사는 피렌체에서 서쪽으로 약 50km 정도 떨어져 있다.

4. holiday pisa gare pisa 호스텔에 이른 체크인을 하고 피사의 탑을 보러갔다. 사진으로만 보다가 실물을 보니 정말 신기하더라. 그렇게 독특하니까 많은 이들이 찾아와서 좋아들 하지!

5. 오늘은 새벽에 있은 일로 해서 일정을 빨리 종료했다.






* 피사의 사탑: 많은 이들이 다양한 포즈로 사진을 찍고 있다.





* 피사의 사탑: 옆에 있는 건물은 피사 대성당임.





* 피사의 사탑: 산 조반니 세례당에서 바라본 사탑. 세례당 - 대성당 -사탑 순으로 보인다.





* 2020년 2월 5일 수요일: 51일차 / 맑음, 피렌체는 바람이 많이 불었음.

1. holiday pisa gare pisa 호스텔에서 오전 9시 30분경 체크 아웃함.

2. 피사역에서 오전 11시경 기차를 타고 12시경에 다시 피렌체역으로 왔음. 이틀전 호스텔에서 겪은 불편함 때문에 새로운 호스텔에 이른 체크인을 함. new hostel florence.

3. 피렌체대성당 - 베키오궁전 - 베키오다리 - 미켈로젤로광장 순으로 탐방함. 르네상스를 꽃피운 피렌체답게 볼거리가 정말 많은 곳이었음. 특히 피렌체 대성당은 정말 독특했음. 붉은색과 녹색 대리석을 사용해서 그런지 다른 대성당들과 달리 알록달록한 색감이 있었음. 대리석은 주요 자재로 썼다는게 신기했음. 다른 성당들은 주로 튼튼한 화강암을 많이 쓰지 않던가!

4. 미켈란젤로 광장, 정확히는 미켈란젤로 언덕 위에 올라서니 피렌체 시내가 한 눈에 다 들어왔음. 마치 중세시대를 보는 것처럼 피렌체는 곳곳에 옛 건축물들이 즐비했음.

5. 피렌체가 가죽으로 유명한 도시인만큼 가죽 지갑을 하나 구매함. 지금 내 지갑은 상태가 아주 꽝이었으니... 생각보다 좀 저렴하게 구입했다. 30유로.





* 피렌체: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본 피렌체 올드 타운






* 베키오궁: 피렌체의 유력 가문이었던 메디치 가문(공작)의 궁으로 쓰였던 곳.






* 피렌체대성당











* 베로나: 피에트라 다리


☞ 지난 2019년 12월 17일부터 2020년 2월 11일까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및 유럽 여행을 행하고 왔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 전년도에도 다녀왔으니 2년 연속 탐방을 한 셈입니다. 순례길 탐방이 종료된 이후에는 20대에 못해봤던 배낭여행을 행했답니다.

독일 - 오스트리아 -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 스위스 - 이탈리아

알프스 산맥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 위주로 여행을 다녔습니다. 알프스 산맥에는 못 갔지만 먼 발치에서나마 알프스 일대를 둘러보았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열심히 여행일지를 작성했습니다. 여행일지는 수첩(기자수첩 사이즈)에 작성했는데 그 내용들을 포스팅할 생각입니다. 여행일지를 온라인으로 옮겨 놓는거라 재밌는 포스팅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또한 디테일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한 개인의 여행기가 이 공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작은 기록이 올라가지만 그것 자체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한 개인의 역사로 이어질테니까요!

* 2020년 1월 31일 금요일: 46일차 / 맑음

1. 조식을 먹고 오전 10시 넘어 호스텔에서 나왔다. 베로나는 생각보다 볼거리가 많은 도시였다. 콜로세움, 원형극장, 피에트라 다리 등등...

2. 일단 피에트라 다리로 향했다.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피에트라 다리는 다섯개의 아치로 이루어져있다. 피에트라 다리 아래로는 아디제강(adige)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그 아디제강과 피에트라 다리를 중심으로 많은 역사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로마원형극장, 산 피에트라성(castle san pietro), 베로나성당(verona cathedral) 등등... 워낙 많아서 더는 잘 모르겠다.

3.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베로나. 그래서인지 주변 지역으로부터 많은 침략을 당했다. 뭐 이탈리아 땅 전체가 그랬기도 했지만. 그래서 로마시대 유적만 있는게 아니었다. 중세, 르네상스 등등... 그러고보면 베로나는 도시 전체가 역사유적지였다. 그래서 이 도시 자체가 2000년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4. 피에트라성 말고도 베로나에는 city wall이 있었다. 관리가 안됐는지 많이 훼손됐더라. 하여간 이런 역사유적들을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바라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베로나 정말 멋지다!

5. 야경으로 먼저 만난 베로나 콜로세움을 탐방했다. 이후 점심 식사를 하러갔다. 이탈리아에 왔으니 스파게티를 맛봐야지. 그래서 콜로세움 앞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좀 비싸보였는데... 그래도 주문해서 맛있게 먹었다. 뭐 잘 먹었다. 그런데 고급 식당이라 그런지 그 스파케티 쪼가리가 약 19유로였다. 물론 콜라에 커피까지 마셔서 그런 가격이 나왔겠지만... 하여간 이탈리아에 왔으니 기분 좀 내봤다.

6. 베로나 중앙역에서 밀라노 첸트랄레(milano centrale)역으로 가는 오후 3시 45분 기차를 탔다. 역시 제일 저렴한 열차를 탔다. 우리나라 무궁화호보다 시설이 더 떨어지는 기차...ㅋ 오후 6시 40분경 밀라노 첸트랄레역 도착.

7. 오후 7시 30분경. hostel old milano house 체크인함.






* 피에트라성: 피에트라성과 로마원형극장. 피에트라 다리에서 찍은 사진임. 중앙 상단부 성체 일부가 보임. 가운데 보이는 회색빛 건물은 수도원이다. 그 아래쪽에 위치한 로마원형 극장은 가려져 잘 안 보임.






* 콜로세움: 베로나 콜로세움

* 2020년 2월 1일 토요일: 47일차 / 밀라노 - 약한 비, 루가노 - 갬

1. hostel old milano house는 장기투숙객들이 많았다. 이곳은 달방처럼 이용하는 사람도 있었다. 낮에 자고 밤에 출근하는 사람도 있더라. 그런데 이 인간들이 잘 안 씻는건지 냄새가 엄청났다. 냄새와의 전쟁이라고 불릴 수도 있을 듯~ㅋ

2. 밀라노는 관광지라기보다는 상업도시였다. 그래서 호스텔을 달방처럼 이용하는 사람이 있는 거겠지.

3. 드디어 고대하던 밀라노 대성당을 보러갔다. 밀라노 대성당은 정말 의리의리했다. 사람도 엄청났다. 무슨 돗떼기 시장같았다.

4.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가. 대성당 내부는 들어가지 않고 외관만 보고 왔다. 그 많은 사람과 함께 성당 내부를 관람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무거운 배낭을 메고 내부를 관람하다가 힘을 다 뺄지도 모르지. 성당 외부만 관람해도 좋았다. 의리의리했으니까!

5. 스위스 북부에 잠깐 다녀오기로 했다. 스위스 루가노라고 밀라노에서 북쪽으로 약 80km 정도 떨어진 곳을 가기로 했다. 밀라노 중앙역에서 오후 3시 10분 기차를 타고 루가노(lugano)를 향했다. 오후 4시 30분경 도착. 중간에 치아소(chiasso)라는 마을에서 입국심사를 받았다. 객차 내로 스위스 경찰이 올라와서 몇 가지를 물었다. 당시 한국에서 발병한 신종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전혀 묻지 않았다.

6. 한국에서는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난리라는데 이쪽은 별 관심이 없어보였다. 참고로 치아소는 스위스 최남단의 국경도시다.

7. 드디어 도착한 스위스 루가노! 역시 스위는 멋지군! 시원하게 펼쳐진 호수, 그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우뚝 솟은 산들, 그리고 그 위에 지어진 멋진 건축물들. 물가가 비싼거 빼고는 스위는 참 매력적인 곳이란 말야.

8. 100프랑을 인출했다. 1프랑= 1,232원. 호스텔 albergo montarina에 체크인 했다. 오후 6시경.

주의) 본 스위스 여행이 이루어진 시점은 2020년 2월 1일임. 당시 한국은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발병 환자가 많지 않았음. 그래서 스위스나 이탈리아 여행을 하는데 무리가 없었음. 발병자가 확 늘어난 2020년 3월 7일(현재)하고는 완전 다른 상황이었음. 이점 오해없기 바랍니다.






* 밀라노 대성당

* 2020년 2월 2일 일요일: 48일차 / 맑음

1. 새벽에 탱크 두 대가 지나갔음. 옆족에 있던 남자 둘이 얼마나 코를 골던지. 새벽에 잠이 깼는데 다시 잠들지 못했음. 그들은 아침까지 단잠을 자는게 아닌가! 얼마나 얄밉던지...ㅋ

2. 스위스의 물가를 조식에서 실감함. 호스텔에서 받은 조식비용, 정확히는 조식 추가비용이 15프랑이었음. 유로로 치면 약 14유로 정도임. 다른나라 호스텔에서는 기껏해야 5~6유로 정도인데 말야. 하지만 그 값을 하긴했음. 조식은 호스텔이 아닌 그 옆에 있는 호텔에서 먹었는데 다양한 먹거리가 준비되어 있었음. 하지만 아침을 거하게 먹지 않는 스타일이라 내게는 5~6유로 짜리 조식이 적당하다고 생각됨.

3. 호스텔을 결제할 때 무슨 교통쿠폰을 주었는데 그거에 대해 다시 물어봤음. 알고보니 1일 무료교통권과 같은 쿠폰이었음. 기차와 버스가 모두 무료였음. 그래서 교통권으로 루가노 호수까지 내려가는 트램을 탔음. 정확히는 쿠니풀라 같은 케이블카였음.

4. 루가노 호수는 정말 시원했음. 드넓게 펼쳐진 호수와 그 뒤에 우뚝 솟은 산들. 블레드 호수와는 사뭇 다른 맛이 있었음. 루가노 호수는 워낙 방대해서 그런지 얼핏보면 바다같기도 했음. 우뚝 솟은 산들과 그 사이에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있는 집들. 그저 호수만 있었으면 좀 밋밋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서로 어우러져 있다보니 더 아름답게 보였다. 그걸 조화라고 해야 하나?

5. 슬로베니아 블레드 호수도 그렇고, 이 루가노 호수도 그렇고. 귀국하면 강 혹은 호수와 연동된 트레킹 코스를 2~3개 정도 더 기획해봐야겠다. 강과 산, 그리고 건축물까지 서로 어우러진 3박자가 서로 맞아 떨어지는 코스를 기획하고 싶음. 강만 쭈욱 걷는 길은 재미가 없으니까.

6. 새벽에 탱크 두 대 때문에 잠을 설친 것도 있고 해서 좀 일찍 밀라노로 왔음. 무료 교통권으로 스위스의 국경 도시인 치아소까지 공짜로 올 수 있었음. 그 다음 도시인 이탈리아 코모(como)까지 걸어가 볼까하다가 그냥 다시 기차표를 끊었음.

7. 치아소역에서 이탈리아 쪽으로 넘어갈 때 입국 심사를 받지 않았음.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무실에 사람이 없었음. 대신 노랑 기계에다 펀칭만 하고 그냥 기차에 탔음. 아무 문제없었음. 루가노 - 치아소 약 20분 소요 / 치아소 - 밀라노 약 50분 소요.

8. 오후 5시경 밀라노에 있는 호텔 시에나(hotel siena)에 체크인 함.






* 루가노 호수




* 루가노 호수





* 루가노 호수 : 인증샷 한 컷









* 리예카: 크로아티아 리예카



☞ 지난 2019년 12월 17일부터 2020년 2월 11일까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및 유럽 여행을 행하고 왔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 전년도에도 다녀왔으니 2년 연속 탐방을 한 셈입니다. 순례길 탐방이 종료된 이후에는 20대에 못해봤던 배낭여행을 행했답니다.

독일 - 오스트리아 -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 스위스 - 이탈리아

알프스 산맥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 위주로 여행을 다녔습니다. 알프스 산맥에는 못 갔지만 먼 발치에서나마 알프스 일대를 둘러보았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열심히 여행일지를 작성했습니다. 여행일지는 수첩(기자수첩 사이즈)에 작성했는데 그 내용들을 포스팅할 생각입니다. 여행일지를 온라인으로 옮겨 놓는거라 재밌는 포스팅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또한 디테일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한 개인의 여행기가 이 공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작은 기록이 올라가지만 그것 자체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한 개인의 역사로 이어질테니까요!

* 2020년 1월 28일 화요일: 43일차 / 자그레브 - 맑음, 리예카 - 비

1. 아침부터 쌩쇼를 했다. 오전 11시 30분 크로아티아 리예카로 떠나는 플릭스 버스를 타려고 hostel bureau에서 체크 아웃했다. 조식도 잘 먹고 체크 아웃도 잘했다.

2. 자그레브 버스터미널에 도착. 좀 넉넉하게 도착했다. 그런데 무언가 허전한 것이다. 카메라가 안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터미널 한구석에서 배낭을 전부 다 깠다. 역시 카메라가 없었다. 버스 출발 10분 전. 다시 찬찬히 배낭을 살폈다. 역시 없음.

3.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는 카메라 충전기를 잃어버리더니 이제는 카메라 본체를 잃어버린 것인가. 도대체 락커 안에다 잘 둔 카메라가 왜 없어진 것인가? 락커 안에다 배낭을 통째로 넣어두었다가 아침에 잘 꺼내지 않았던가...

4. 예매한 버스는 포기하고 호스텔로 돌아갔다. 그 시간동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심지어 깨끗이 잊어버리고 그냥 바로 이탈리아로 넘어갈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5. 사실 다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호스텔로 잡은게 아니었다. 다음 버스 시간이 꽤 길게 남았고, 호스텔측에 분실 사건을 알려주려고 갔던 것이다. 어쨌든 확인은 해야 하지 않나!

6. 리셉션 직원이 놀란 표정으로 룸키를 건네줬다. 그냥 확인 차원으로 올라갔다. '그게 남아있겠냐' 하는 생각으로... 하지만 그게 남아있었다. 내가 쓰던 락커에 카메라가 잘 모셔져있던 것이다. 락커를 건성으로 확인하고 체크아웃을 한 것이다. 큰 배낭이 들어갈 정도로 락커가 컸었기에 샅샅이 살폈어야 했는데... 크기가 큰 락커라 검은색 물건을 맨 뒤쪽에 두면 잘 안 보였던 것이다. 내가 오전에 확인을 했을 때는 조명도 어두웠던 터라 더욱더 안 보였던 것이다. 뭐 변명이지만..ㅋ

7. 하여간 시건방 떨지말고 제대로 했어야했다. 놓친 버스값 9유로는 스스로한테 부과한 벌금으로 생각하자. 다음부터 심도가 있는, 큰 락커는 랜턴을 비쳐서 일일이 확인을 해야겠다. 어쨌든 카메라를 찾았다! 다행이야!

8. 부끄러움을 뒤로 하고 오후 1시 30분에 크로아티아 리예카로 떠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번에는 플릭스(flix) 버스가 아니라 arrive라는 버스를 이용했는데 버스 요금도 비싸고 수화물 비용도 따로 받았다. 10kn. 다양하게 벌어먹는군...ㅋ

9. 오후 4시를 넘은 시각에 리예카(rijeka)에 도착함. 이곳은 아드리아해에 면한 크로아티아 최대의 무역항이라고 함. 도착하니 비가 좀 세게 내렸다. 바람도 거셌고.

10. 오후 5시경 hostel rijeka에 체크인함.





* 트램: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를 누비는 트램. 제작한지 꽤 오래된 트램 같다. 구 유고연방 시절에 제작된 트램이 아닐까 한다. 올드스타일이라 한 컷.





* 리예카: 사진 중앙 상단에 트르사트성(trsat fortress)이 보인다. 저 성에 올라가면 리예카 시내와 아드리아해가 보인다.

* 2020년 1월 29일 수요일: 44일차 / 맑음

1. hostel rijeka에 하루 더 묵기로 했다. 아드리아해를 보려고 rijeka에 왔으니 아드리아해를 봐야지.

2. 리예카 시내를 바라보려고 트르사트성(trsat fortress)에 올랐다. 그런데 안개가 끼어서 그런지 바다가 잘 안보이는 거다. 안타깝더라.

3. 트로사트성은 고지에 있어서 그런지 리예카 시내를 조망하기에는 딱이었다. 해안가 도시의 면모를 잘 관찰할 수 있었다.

4. 내일이면 드디어 이탈리아로 들어간다. 이제 슬슬 이 여행의 끝자락이 보이고 있다. 끝까지 건강하게 여행 잘 하자!

5. 은행 atm기에서 400kn 인출함.

* 2020년 1월 30일 목요일: 45일차 / 맑음

1. 오전 9시 30분경 hostel rijeka에서 체크아웃했다. 4일간의 크로아티아 여행을 뒤로 하고 이제 마지막 여행지인 이탈리아로 향한다. 2일간의 슬로베니아, 4일간의 크로아티아 여행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6일간의 동유럽 일정이 자칫 루즈해질 수 있는 여행에 활기를 불어넣어 준 것이다. 동유럽은 다음에 또 와야지! 예쁜 동유럽 처자들 보러...ㅋ

2. 버스를 타고 일단 이탈리아의 최동쪽 항구 도시인 트리에스테(trieste)로 갔다. 가는 도중에 차창 밖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아드리아해를 봤다. 결국 아드리아해를 버스타면서 보게 됐다.

3. 트리에스테(trieste)로 가기 전에 슬로베니아 국경을 넘었는데 이때 또 여권 검사를 했다. 슬로베니아에서 크로아티아로 넘어올 때처럼 말이다. 비 셍겐국가(schengen) 크로아티아에서 셍겐국가인 슬로베니아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4. 트리에스테에서 1박을 할까했는데 좀 애매한게 있어 바로 베로나(velona)로 향했다. 중간에 베니스 mestre역에서 베로나행 열차로 갈아탔다. 베니스에는 santa lucia역도 있는데 잘못하면 santa lucia역으로 갈뻔했다.

5. trenitalia라고 이탈리아 철도공사의 열차를 타게 됐다. 우리나라로 치면 무궁화급의 열차를 탔는데 좌석번호가 없는 것이다. 그냥 자리나면 아무데나 앉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데나 앉았다. ^^ 참고로 이탈리아에는 민영철도인 italo도 있다.

6. 오후 7시경 베로나 도착. 늘상하던대로 부킹닷컴에서 가장 저렴한 호스텔을 찾았다. 그런데 두 곳이나 퇴짜를 맞았다. 처음 간 곳은 오늘 문을 닫았다고 하고, 두번째는 호스텔이 다 찼다는 것이다. 결국 세번째로 향한 호스텔에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7. 그래도 그렇게 호스텔 찾아 삼만리했더니 베로나의 야경을 잠깐이나마 감상할 수 있었다. 야경으로 본 베로나의 콜로세움! 인생사 세옹지마, 여행은 더욱더 세옹지마!

8. the hostello 호스텔에 체크인 함. 오후 8시경.






* 리예카항: 사진에 보이는 배는 호스텔로 이용되고 있다. 여객선을 개조하여 호스텔로 쓰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기회되면 저 곳에 숙박해 볼 셈이다. 그날이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른다...ㅋ






* 콜로세움: 이탈리아 베로나에 있는 콜로세움. 숙소 찾아 삼만리를 하다 콜로세움 야경을 발견했다. 숙소 찾아 삼만리를 하지 않았다면 이런 멋진 장면을 볼 수 있었을까? 인생사 세옹지마이듯 여행도 세옹지마?^^











​* 블레드 호수


☞ 지난 2019년 12월 17일부터 2020년 2월 11일까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및 유럽 여행을 행하고 왔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 전년도에도 다녀왔으니 2년 연속 탐방을 한 셈입니다. 순례길 탐방이 종료된 이후에는 20대에 못해봤던 배낭여행을 행했답니다.

독일 - 오스트리아 -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 스위스 - 이탈리아

알프스 산맥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 위주로 여행을 다녔습니다. 알프스 산맥에는 못 갔지만 먼 발치에서나마 알프스 일대를 둘러보았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열심히 여행일지를 작성했습니다. 여행일지는 수첩(기자수첩 사이즈)에 작성했는데 그 내용들을 포스팅할 생각입니다. 여행일지를 온라인으로 옮겨 놓는거라 재밌는 포스팅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또한 디테일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한 개인의 여행기가 이 공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작은 기록이 올라가지만 그것 자체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한 개인의 역사로 이어질테니까요!

* 2020년 1월 25일 토요일: 40일차 / 맑음, 오전에는 약한 비

1. 슬로베니아(slovenia)는 그냥 스쳐가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발걸음은 해야 하지 않나. 그래서 turn hostel에 하루 더 묵기로 했다. turn hostel의 시설도 괜찮으니 하루 더 묵기로 한 것이다.

2. 호스텔에 붙어 있는 england pub에서 조식을 먹었다. 진짜 빵쪼가리 하나와 커피를 먹었는데 3.4유로가 나왔다. 동유럽에 속하는 슬로베니아지만 유로화를 써서 그런지 물가가 좀 세 보이더라. 물론 스페인보다는 좀 약했다.

3.오늘은 bled라는 곳을 간다. 블레드(bled)호수가 있고, 유명한 블레드 성(bled castle)이 있는 곳인데 류블라냐에서는 북쪽으로 약 60km 정도 떨어져 있다.

4. 오전 11시 버스를 탔다. 블레드행 버스는 시외버스 개념이었는데 블레드까지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됐다. 버스타는 곳은 류블라냐 중앙역 앞에 있는 터미널이다. 플릭스 버스를 타고 내리는 곳과 동일하다.

5. 블레드는 참 멋진 곳이었다. 만약 이 곳을 오지 않았으면 무척 후회했을 것이다. 편도 6.30유로로 눈이 호강했다.. 뭐 왕복 버스비로 치면 12.60지만...ㅋ 참고로 블레드행 버스, 또한 블레드에서 류블라냐로 돌아오는 버스도 기사에게 직접 차표를 살 수 있다.

6. 블레드 호스가 없었다면 블레드의 존재 가치가 확 떨어졌을지 모른다. 블레드 성이라는 오래된 성이 있지만 호수가 받혀주지 않았으면 블레드 성은 그저 그런 성일 뿐이다.

7. 호수 앞에 병풍처럼 둘러 서 있는 알프스 산맥의 봉우리들! 그 위에 덮힌 눈들. 설봉(snow peak)과 호수가 어우러진 그 모습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8. 솔직히 여행이 길어지니 거기가 거기 같고, 그 장면이 그 장면 같았다. 이걸 여행 권태기라고 부르더군. 하지만 블레드 호수에서 바라본 멋진 풍광들은 그런 권태기를 확 날려주었다. 풍광들이 판타스틱했으니까.

9. 블레드 호수 뒤편에 있는 산의 이름이 veliki stol이라고 한다. 그 veliki stol을 위시한 연이은 고봉들에서 흘러내린 물들이 블레드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10. 그런데 이쪽의 지질 형태가 석회질 성분이 많은 걸까? 호수의 색깔이 자줏빛이었다. 아니면 누가 호수에 레드 와인을 뿌려댔나?ㅋ 참고로 veliki stol의 북쪽은 오스트리아 땅이다. 블레드 자체가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있다.

11. 약 3시간 정도 블레드 호수 강변 트레킹을 즐기고, 오후 3시 30분 버스를 타고 오후 5시를 넘은 시각에 류블라냐에 도착함. 전날 해프닝을 벌인 케밥집에 가서 식사를 함. 아무 생각없이 주문했는데 볶음밥 비스무리한 게 나옴. 맛나게 먹었음.






* 블레드 호수: 초췌한 모습을 최대한으로 감추려고 노력한 모습이다^^ 배경이 멋있어서 다 멋있어 보인다.^^






* 류블랴나: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 올드타운.






* 2020년 1월 26일 일요일: 41일차 / 오전 약한 비(류블라냐) - 오후 갬(자그레브)

1. turn hostel에서 오전 9시 30분경 체크아웃했음. 오후 1시 30분경에 크로아티아로 향하는 플릭스 버스를 타야 했음. 시간이 좀 남아서 ljubljanica 강 일대를 탐방했다. ljubljanica라는 이름에도 나와 있듯이 류블라냐(ljubljana)는 이 강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2. 류블라냐의 올드 시티 구역은 그리 크지 않아 도보로도 다 둘러볼 수 있다. 특히 강변을 따라 주욱 늘어선 카페와 상점들을 둘러보는 것도 재미난다. 당연히 유명하다는 드래곤 다리와 삼중교도 등도 직접 건너봤다. 대신 류블라냐 성은 가지 않았다.

3. 아침에 간간이 비가 내리더니 버스 탈 때쯤이 되니 빗줄기가 좀 세졌다. 하지만 안전하게 버스 탑승.

4. 슬로베니아 류블라냐에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까지는 150km도 안 떨어져있다. 고속도로를 타고 가니 2시간도 안 걸렸다.

5. 국경 근처에서 버스에서 내렸다. 크로아티아는 쉥겐조약에 가입되지 않아 따로 입국심사를 받아야 했다. 뭐 여권에 도장 찍는 식이라 아주 잠깐이었는데... 이전에는 그런 스템프 찍는 것도 하지 않았기에 좀 낯설었다.

6. 오후 3시 40분경. 도착 예상 시간인 오후 4시경보다 일찍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터미널에 도착했다. 크로아티아는 비유로화 국가이기에 자국 통화인 쿠나(kn)를 사용한다. 그래서 1,000쿠나를 atm기에서 인출했다. 1쿠나 = 173원, 1,000쿠나 = 약 17만원 정도.

7. 낯선 곳에서 낯선 돈을 만지니... 내 이방인 같은 삶이 새삼스럽게 떠올려졌다. 고독한 떠돌이의 삶.

8. 고독한 떠돌이일수록 배가 더 고픈 법이다. 그래서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대성당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아주 맛있게.

10. 오후 5시경 자그레브 대성당 인근 hostel bureau에 체크인 함.






* 자그레브 대성당

* 2020년 1월 27일 월요일: 42일차 / 안개 낌

1. hostel bureau에 하루 더 묵기로 했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zagreb)에서의 일정을 하루 더 늘렸다. 자그레브는 하루만 있기 아까운 동네니까.

2. 전날 야경을 봤던 자그레브 대성당을 비롯해 올드타운을 탐방했다. 밤에 보는 것과 낮에 보는 것은 분명히 다르더라. zagreb도 류블라냐처럼 올드 타운이 아름답더라.

3. 메인 광장에서는 무슨 축제를 했음. 며칠 전 크로아티아 핸드볼 국가대표가 국제대회에서 우승을 했는데 그걸 축하하는 자리인 듯싶었다. 많은 인파가 몰렸는데 크로아티아에서는 핸드볼이 상당히 인기가 많은 스포츠인듯함.

4. 언덕 위에 있는 성 마르크교회(st. mark's church)도 방문했다.

5. 도시 구석구석을 누비는 트램을 한 번 타고 싶었지만... 그냥 눈으로 보는 걸로 만족했다. 자그레브 트램 중에는 아주 오래된 것도 보였다. 옛 유고 연방시절에 제작된 것들도 있는 듯싶었다. 화랑대역 기차박물관에 전시된 체코산 트램과 동일하게 보이는 동체도 있었으니까.

6. 자그레브에 있는 한인마트에서 진라면과 볶음 김치를 샀다. 정말 뿌듯했다. 서유럽의 한인 마트는 중국사람이 '한인마트'라는 간판만 걸고 장사하는 곳이 많은데 이곳은 진짜 한국 사람이 사장님이더라. 그래서 새해 복많이 받으시라고, 덕담을 드렸다. 이때가 한국에서는 설 명절이었으니까.





* 블레드 호수






* 자그레브 메인광장









* 잘츠부르크


☞ 지난 2019년 12월 17일부터 2020년 2월 11일까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및 유럽 여행을 행하고 왔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그 전년도에도 다녀왔으니 2년 연속 탐방을 한 셈입니다. 순례길 탐방이 종료된 이후에는 20대에 못해봤던 배낭여행을 행했답니다.

독일 - 오스트리아 -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 스위스 - 이탈리아

알프스 산맥을 둘러싸고 있는 나라들 위주로 여행을 다녔습니다. 알프스 산맥에는 못 갔지만 먼 발치에서나마 알프스 일대를 둘러보았답니다.

여행을 하는 내내 열심히 여행일지를 작성했습니다. 여행일지는 수첩(기자수첩 사이즈)에 작성했는데 그 내용들을 포스팅할 생각입니다. 여행일지를 온라인으로 옮겨 놓는거라 재밌는 포스팅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또한 디테일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한 개인의 여행기가 이 공간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작은 기록이 올라가지만 그것 자체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한 개인의 역사로 이어질테니까요!

* 2020년 1월 22일 수요일: 37일차 / 맑음, 하지만 쌀쌀함.

1. a&o hostel munchen hackerbrucke는 최악의 호스텔로 기억될 거 같다. 호스텔의 시설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문제는 룸메이트들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확 풍기는 그 냄새! 나도 한 냄새하는데 그 냄새에는 도저히 당할 수가 없겠더라. 하지만 더 최악은 12시 넘어서까지 소음을 내는 인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동영상을 보며 깔깔거리지를 않나, 과자를 오독오독 씹지 않나... 돈없어서 싸구려 호스텔에 묵는 내가 나쁜 넘이다...ㅋ

2. 오전 9시경에 체크아웃을 하려고 나갔는데 로비에 경찰이 와 있었다. 곧이어 구급차도 오고. 로비에서 어떤 젊은 여자가 불안한 모습으로 경찰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또 도난 사건인가? 뮌헨도 역시 대도시라 도둑들이 많은 건가?

3. 그런데 카운터에 있는 직원이 오른쪽 팔목에 상처를 입은게 아닌가? 구급대원들은 그 직원에게 붕대를 감아주고.

4. 이후 경찰이 그 여자를 태우고 갔다. 단순 도난 사건인 줄 알았는데... 여자가 직원을 폭행(?)하고 경찰이 그 여자를 잡아갔다, 뭐 이렇게 추측해본다. 여자는 경찰이 데려갔고 카운터 직원은 숨을 고르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복으로 갈아입고서 말이다. 커피 한 잔 마시려고 로비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는데... 참 별 일이야!

5. 호스텔에서의 일로 좀 찜찜했지만... 체크인을 하고 뮌헨 올드 타운으로 향했다. 올드 타운은 꽤 볼거리가 많았다. 마리엔광장(marienplaza)을 중심으로 옛 건물들이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 특히 광장 앞에 멋들어지게 들어서 있는 rathaus-glock enspiel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6. 올드 타운의 옆을 흐르고 있는 이자르강을 끼고 열심히 걸었다. 이자르강은 안양천 수준의 강이었다. 한강에 비하면...ㅋ

7. 올드 타운도 좋았지만 영국가든(englischen garten)도 좋았다. 도심 한복판에 드넓은 공원이 펼쳐져 있어서 꽤나 인상적이었다. 시간이 된다면 영국 가든 일대를 전부 다 돌아보고 싶을 정도였다. 나중에 또 올까?

8. 오후 6시 뮌헨 중앙역 버스터미널에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salzburg)행 플릭스 버스를 탔음. 오후 8시경 잘츠부르크 남부에 도착함. 중심가까지는 약 7km. 2유로를 주고 표를 끊어 트램같은 버스를 타고 중심가까지 갔음. 플릭스 버스(뮌헨 - 잘츠부르크)가 4.99유로였는데 시내버스가 2유로였다. 플릭스 버스가 너무 저렴한 거지.

9. 오후 9시경 a&o salzburg hauptbahnhof 호스텔에 입실함.




* 뮌헨 올드타운





* 뮌헨 올드타운


* 2020년 1월 23일 목요일: 38일차 / 맑음, 그러나 춥다

1. 호스텔은 시설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룸메이트가 더 중요하다. 내가 8인 도미토리에 묵었는데 함께 투숙한 어떤 서양 아줌마가 이상한 말들을 해댔다. 나 말고 다른 한국인 투숙객이 둘 있었는데 그들이 오전 7시경에 체크아웃을 하려고 소음을 냈다. 그랬더니 그 아줌마가 '노스코리아가 어떻고, 사우스코리아가 어떻고' 하더라. 한국인 투숙객의 소음이 싫었던 거다.

2. 그런데 그 아줌마도 밤 12시에 들어와 소음을 냈었다. 소등을 하고 남들 다 자려고 하는데 소음을 냈으면서. 남탓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룸 안에 다른 사람들은 동요를 하지 않았는데 그 아줌마만 민감하게 군 것이다. 그렇게 소음에 민감하면 그냥 편하게 싱글룸 잡고 주무시라! 그리고 딱히 그 한국인들이 큰 소음을 내지도 않았다. 생활 소음 정도를 냈었다.

3. 기분도 꿀꿀하고 해서 잘츠부르크(salzburg)의 일정을 빨리 정리하고 슬로베니아로 넘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잘츠부르크의 명소들을 둘러보고 가야지!

4. 먼저 도착한 곳은 미라벨정원(mirabell garten)이었다. 이곳은 영화 사운드오브뮤직의 주요 배경이 됐던 곳이다. 사실 영화 사운드오브뮤직의 주요 배경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였다. 그래서인지 이 도시는 사운드오브뮤직을 전면에 부각시키고 있었다. 청산도가 영화 서편제를 팍팍 밀듯이...

5. 이후로는 잘츠부르크 시내를 유유히 흐르고 있는 잘차흐강(salzach)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이 잘차흐강 강변 투어만 해도 좋을 정도로 강변 주변의 모습은 정말 멋졌다.

6. 이후 레지던스 광장을 지나 잘츠부르크의 명물이라는 호엔 잘츠부르크성(festung hohensalzburg) 입구까지 갔다. 사실 푸니쿨라를 타려고 여기저기를 둘러봤는데 못 찾겠는거다. 페터수도원 묘원에까지 가봤지만 못 찾겠는거다. 그러다 어찌해서 성 입구 매표소 앞에 다다랗다.

7. 하지만 굳이 티켓을 사서 성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계속해서 재채기가 나왔다. 콜록콜록 기침도 하고. 몸이 으실으실한 것이다. 빨리 그냥 숙소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슬로베니아를 가는 다음날로 미루고 yoho 호스텔에 체크인을 했다.

8. 그런데 갑자기 멘붕이 왔다. 전자기기를 넣어둔 파우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분명히 아침에 잘 넣어두었는데... 내가 물건 관리는 잘하는 편이다. 그런데 핸드폰 충전기가 들어 있는 파우치를 잃어버렸다?

9.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날 움직였던 동선을 따라 역추척 해봤다. 하지만 없었다. 오늘 배낭 똑딱이가 두 번 정도 풀어졌는데 그때 떨어졌나? 그럼 소리가 들렸을텐데... 그게 아니면 점심 먹을 때 햄버거 집에서 누군가 내 배낭을 뒤졌던 것일까? 내가 화장실 간 사이에 내 배낭 똑딱이를 풀어 그 파우치만 가져간 것일까? 그럼 값 나가는 타블릿pc를 가져가는게 더 낫지 않나? 하여간 풀리지 않는 신비였다.

10. 값나가는 것들은 아니었지만 물건을 잃어버렸다는게 속상했다. 특히 카메라충전기는 정말 아까웠다. 그 충전기가 없으면 이제 카메라로 사진을 찍을 수 없게 된다.

11. 한국은 설 명절이라는데, 그래서 그런가? 새해에는 좋은 일이 많으려고 그러나? 하나 잃었으니 많은 걸 얻으려나... 하여간 문건 간수는 잘 합시다!





* 잘츠부르크: 미라벨 정원

* 2020년 1월 24일 금요일: 39일차 / 맑음

1. yoho 호스텔에서 오전 9시 30분경 조식을 먹고, 체크아웃함. 무료 조식 코너도 있었는데 따뜻한 커피가 간절해서 4유로를 주고 유로 조식을 사 먹었음. 그냥 무료 조식을 먹을 걸 그랬다. 커피가 다 식었다.

2. 체크아웃을 하는데 한국인 직원을 만날 수 있었다. 남자직원인 줄 알았는데 여자 직원이었다. 이름이 현옥이라는 분인데 단아한 외모에 뛰어난 외국어 실력을 갖춘 분이었다.

3. 현옥씨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행이야기부터 어제 잃어버린 전자기기 파우치까지... 그러고보면 호스텔 스태프는 일정 부분 바텐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여행자들의 이야기들을 들어줘야하니까. 물론 그것도 언어가 통해야 가능하지!

4. 오후 1시 10분경 슬로베니아 수도 류블랴나(ljubljana)로 가는 플릭스 버스에 탑승했다. 잘츠부르크에 올 때와 같은 salzburg south에서 출발을 했다.

5. 드디어 슬로베니아. 나의 첫 동유럽 여행지 슬로베니아. 오후 5시경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 도착했다. 여기도 오후 5시가 안 됐을 때부터 어둡기 시작했다. 왜이리 어두운 것이야!

6. 오후 6시경 turn hostel에 입실했음. 체크인은 바로 옆에 있는 england pub에서 했음. 주인장이 축구를 좋아하는 듯함.

7. 배가 고파서 케밥집을 들어감. 이번에는 케밥 말고 접시요리를 시켰음. 맛있게 먹고 나왔는데... 생각해보니 계산을 안 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문을 열고 냉큼 들어가 계산을 했음. 잘못했으면 무전취식을 할 뻔 했음. 쪽팔린 생각에 내일 다시오겠다고 말했음. 직원들이 좀 많이 웃더라...ㅋ





* 뮌헨: 영국 가든





* 잘츠부르크: 옛 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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