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1일 화요일.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지난 8주간 진행되었던 성북50플러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의 마지막 강의(8강)가 실시된 날이었다. 마지막 강의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이다.

 

성북50플러스에서 진행했던 이번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은 좀 어렵게 잡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아시다시피 코로나의 여파로 오프라인 강의가 직접적인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기회였기에 좀 더 잘 하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발동이 안 걸렸다고나 할까?

 

강의 평가는 잘 나왔지만 스스로에게는 불만이었다. 내 자신에게 학점을 매기자면... B학점 정도 될까?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의 이동 노선은 이렇다.

 

홍제천 -> 세검정 -> 백사실계곡 -> 별서터 -> 능금마을 -> 북악스카이웨이 -> 북악팔각정 -> 성북동

 

백사실계곡은 가을이 가장 예쁘다. 하지만 여름날의 백사실계곡도 충분히 매력적인 곳이다. 전날 비가 와서 그런지 졸졸졸 계곡물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울창한 숲터널에서 피톤치드를 팍팍 맡다보니 몸이 확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사실 이 날은 좀 더웠다. 거의 30도에 육박할 정도로 직사광선이 내려쬐고 있었다. 하지만 전날 비가 내리고 해서 대기는 무척 맑았다. 가시거리가 좋아서 사진 찍기에도 딱이었다. 북악팔각정에서 북한산 일대의 사진을 찍으니 바로 일품 풍경 사진이 되더라.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은 무사히 종료가 됐다. 더불어 성북50플러스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도 종강이 됐다. 사고없이 무사히 잘 완료가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종강은 했지만 우리들의 발걸음은 계속된다. 우리들은 앞으로도 계속 길을 걸을 것이다! 아주 힘차게!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3편>

 

 

역사트레킹을 행하다보면 필연이든 우연이든 역사적 라이벌과 관련된 테마를 언급하게 된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에서 다룬 무학대사와 정도전, 즉 불교세력 VS 유교세력 간의 라이벌 대결이 좋은 예이다. 인물이 아닌 자연지형물 간의 대결도 있다. <낙산 역사트레킹>에서 서울의 좌청룡(낙산)과 우백호(인왕산) 간의 대결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정릉 역사트레킹도 라이벌과 관련이 있다. 누구와 누구 간의 라이벌일까?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 씨의 무덤이다. 일단 한 명은 나왔다. 그럼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 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정릉: 필자가 탐방했을 때는 비가 많이 온 다음이어서 그랬는지 봉분에 방수포를 덮었었다. 보시다시피 정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무척 단출하다. 뺄셈을 당한 것이다.

 

 

 

 

 

 

● 이성계의 총애를 받은 신덕왕후

 

트레킹 팀이 첫 번째로 탐방한 곳은 정릉(貞陵)이었다. 정릉은 신덕왕후 강 씨의 무덤이다. 황해도 곡산 출신인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이성계의 총애를 받게 된다. 1392년, 조선이 개국했을 때 태조의 옆에 서 있던 사람도 신덕왕후였다.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 씨가 그 전 해에, 조선의 개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결국 강 씨는 현비로 봉해져 조선의 첫 번째 왕비에 오르게 된다.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세자 책봉에 나서야했다. 현비였던 신덕왕후로서는 자신이 생산한 왕자를 세자의 자리에 앉히고 싶어 했다. 이성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그녀였기에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했으리라. 하지만 쟁쟁하게 버티고 있던 신의왕후 한 씨의 소생들이 문제였다. 방과(정종), 방원(태종) 등등... 신의왕후의 소생들은 조선 창업에 큰 공을 세운 이들이었다.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신덕왕후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정도전과 손을 잡게 된다. 정도전 입장에서도 이미 다 장성한데다 자기 주관이 뚜렷한 신의왕후 자제들보다는 아직 나이가 어린 강 씨의 소생이 세자가 되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재상중심의 왕도정치를 주창한 정도전이었으니까.

 

결국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었던 방석(의안대군)이 1392년 8월 20일에 세자로 책봉된다. 그해 7월 17일에 조선이 개국했으니 약 한 달 만에 세자가 책봉이 된 것이다. 이에 이방원(정안대군)은 격분한다.

 

“정릉은 조선왕조가 개국한 후 처음으로 능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왕릉들에 비해서는 좀 허술해 보이지 않나요? 봉분을 둘러싼 봉분석(병풍석)도 없고요.”

 

그 말대로 정릉은 능의 격식에 맞지 않게 무언가가 빠져있다. 여백의 미학이 아닌 인위적으로 뺄셈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뺄셈을 한 사람은 바로 태종 이방원이었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소생이 왕위에 등극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396년(태조5)에 눈을 감고 만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신덕왕후가 죽자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 현재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을 조성했다. 또한 흥천사라는 사찰을 지어 그녀의 명목을 빌었다. 이 흥천사를 두고 원찰(願刹)이라고 부르는데, 원찰은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진 사찰을 뜻한다. 정조대왕과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융건릉 인근에 있는 용주사도 원찰이다.

 

 

 

 

 

 

 

* 정릉: 봉분에서 정자각 및 부속건물들을 내려본 모습.

 

 

 

 

 

 

 

● 뺄셈을 당한 정릉

 

1398년 8월, 이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무인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불리는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정도전은 목숨을 잃게 된다. 세자였던 이방석도 목숨을 잃게 된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도성 안에 무덤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1409년(태종9)에 정릉을 지금의 위치인 성북동으로 이전시킨다. 본격적인 뺄셈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다음해에는 정릉의 봉분을 두르고 있던 석각신장 같은 석물들을 광통교 건설에 쓰게 했다. 광통교는 청계천에 있는 다리다.

 

능에서 가져온 귀한 석재들로 돌다리를 만드는 만큼 그것들을 제대로 이용했으면 좋았으련만 이방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부러 신장석을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광통교 하단을 보면 몇몇 신장석들은 머리가 바닥을 향해 있다. 이방원은 철저하게 신덕왕후를 짓밟았던 것이다.

 

“여기 이거 물구나무 선 거 같지 않나요?”

“진짜 그러네요.”

“청계천 복원할 때 뒤집어서 복원한 게 아니고, 광통교가 처음으로 만들어졌을 때부터 이렇게 물구나무를 세웠습니다. 광통교는 1410년, 태종 때 만들어졌지요. 이렇게 거꾸로 놓이게 된 건 제작자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됐다는 뜻이겠죠.”

“굳이 이렇게까지...”

“그나저나 이것들은 거의 600년 이상을 이렇게 거꾸로 세상을 보고 있었겠네요.”

 

이 대화들은 청계천 광통교를 탐방했을 때 이루어졌다. 이런 스토리텔링이 있기 때문에 정릉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광통교도 함께 탐방할 것을 추천한다.

 

신덕왕후의 능을 탐방한 후에는 정릉 숲길을 따라 걷는다. 정릉 자체보다 정릉 숲길이 더 좋다고 할 정도로 숲길이 참 빼어나다. 30분 정도 걸리는 코스가 있고 1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가 있는데 둘 다 좋다. 트레킹팀은 일부러 긴 코스를 걸었다.

 

이제 트레킹팀은 흥천사(興天寺)로 향한다. 정릉에서 나와 위쪽 주택가로 길을 잡으면 흥천사 표지판이 나온다. 왕릉의 정문을 통해 나오니 바로 주택가가 나오는 것도 정릉의 특징이다. 큰 주차장이 자리를 잡고 있는 동구릉이나 서오릉 같은 곳과는 차이가 확연하다. 숲길을 좋아하는 주민들은 아예 정릉 숲길에서 산책을 할 정도다. 정릉이 속해있는 성북구 주민들에게는 50% 할인이 적용된다. 성인 입장료가 1천 원이니 할인을 받으면, 500원으로 매일같이 정릉 숲길을 걷는 것이다. 무척 부럽더라.

 

 

 

 

 

 

 

* 석각신장: 청계천 광통교 교각 부분에 있는 석각신장. 머리 부분이 아래를 향하고 있다. 정릉의 봉분을 두루고 있던 병풍석이었는데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이상한 자세로 세워져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정릉의 봉분이 단출할 수밖에...

 

 

 

 

 

 

● 정릉의 원찰 흥천사

 

흥천사는 정릉의 원찰이다. 신덕왕후에 대한 그리움이 지극했던 태조 이성계였기에 원찰을 크게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흥천사는 1397년에 170여 칸의 대가람으로 탄생했고, 창건과 동시에 조계종의 본산이 된다. 1년 후에는 부처님 사리를 모신 사리각(舍利閣)도 만들어진다.

 

하지만 흥천사도 정릉처럼 우여곡절이 많았다. 흥천사는 정릉처럼 중구 정동에 세워졌다. 정릉이 현재의 자리인, 성북구로 옮겨진 후로도 계속 그 자리를 지키게 된다. 이때에는 원찰이 아닌 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는 왕실 사찰이 된다. 하지만 성종 이후에는 쇠락해졌고 1504년(연산군10)에는 큰 화재가 나서 사리각을 제외한 건물 전체가 불에 타는 아픔을 겪는다.

 

그러다 1510년(중종5)에는 남아있던 사리각까지 불타 없어진다. 이렇게 사찰이 쇠락하니 그 안에 있던 기물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중 대표적인 게 보물 1460호로 지정된 흥천사 동종이다. 이 동종은 현재 덕수궁에 전시되어 있다. 범종이 사찰이 아닌 궁궐에 있는 것이다.

 

흥천사는 1569년(선조2)에는 왕명에 의해 정동 생활을 마감하고 ‘함취정’이라는 정자터에 다시 세워진다. 이때는 이름을 바꿔 신흥사(新興寺)로 불렸다. 그러다 1669년(현종10)에 신덕왕후가 복권됐고, 1794년(정조18)에 지금의 자리인 성북구 돈암동으로 이전하여 중창된다.

 

신흥사에서 흥천사로 제 이름을 다시 찾게 된 건 1865년(고종2) 때였다. 흥선대원군은 대방을 짓고, 그 대방의 현판을 쓰는 등 흥천사의 중창에 큰 역할을 한다.

 

어렵지 않은가? 연도도 많이 나오고,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솔직히 정릉골 역사트레킹을 하면서 참 많이 애를 먹었다. 위에 저 내용을 트레킹팀 앞에서 해설을 했다고 생각해보시라! 가뜩이나 머리도 안 좋은데... 그래서 정리를 해본다.

 

1. 1397년 정릉과 흥천사 만들어짐

2. 1409년 정릉, 성북동으로 천장됨

3. 1569년 흥천사가 신흥사로 이름을 바꿔 옛 함취정 자리에 들어섬

4. 1669년 신덕왕후 복권됨

5. 1794년 신흥사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 중창됨

6. 1865년 흥선대원군이 중창을 하고, 흥천사로 이름을 다시 고침

 

흥천사는 사찰 탐방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한 번 방문해 볼만한 곳이다. 본당인 극락전을 비롯해 대방, 명부전 등의 가람들이 조선 후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흥천사 대방의 겨울

 

 

 

 

 

 

 

● 이름값 하는 산사 가는 길

 

이제 트레킹팀은 북악스카이웨이의 동쪽편을 따라 걷는다. 차로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북악하늘길을 걷는 것이다. 계속 북악하늘길을 따라 걷다 북악골프연습장이 나오면 숲길로 들어선다. 이 숲길은 ‘산사 가는 길’이라는 도보여행길이다. 북악산 북쪽편에는 작은 사찰들이 많은데 그 사찰들을 연결한 길이다. 북악하늘길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차가 다니는 길이라 산사 가는 길보다 못하다. 산사 가는 길은 진짜 이름값을 한다. 직접 걸어보시길 권한다.

 

역사의 라이벌은 참 많이도 있었다. 싸움 구경이 재미나듯이, 역사가들에 의해 싸움 붙여진 라이벌들도 많을 것이다. 라이벌은 선의의 경쟁관계로 있어야 서로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상대방을 찍어 누르려는 라이벌은 비극만을 초래할 뿐이다. 특히 권력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는 더 그렇다. 도대체 권력이 무엇이기에!

 

 

 

 

 

 

 

* 흥천사의 본당 극락전

 

 

 

 

 

 

 

 

* 정릉 숲길

 

 

 

 

 

 


 

 

 

 

■ 정릉골 역사트레킹

 

1. 코스: 정릉 ▶ 흥천사 ▶ 북악하늘길 ▶ 산사가는길 ▶ 전망대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휴식시간 포함)

4. IN: 경전철 우이신설선 정릉역 2번 출구 / OUT: 국민대 ☞ 국민대에서 버스편을 이용하여 다시 정릉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 태릉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박수를 받든 안 받든 그냥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무대에 서 있을 때만큼은 정말 행복합니다.”

 

예전에 우연히 만난 연극인이 이런 말을 했었다. 연극인이 겪어야 하는 생활고, 캐스팅에 대한 불안감...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고단한 연극판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는 해맑은 미소로 저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대행복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는 더 힘줘서 이야기를 했었다.


방송에서 인기가 떨어진 가수나 배우들이 무대가 너무 그립다는 말들을 할 때는 마음에 와 닿지 않았었다. 그냥 한물간 연예인들의 인기회복용 멘트라고 생각했다. 시청자들의 감수성을 건드리려는 작업용 멘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연극인과의 대화 이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가식적인 방송용 멘트가 아니라 진짜 무대에 대한 간절한 갈증을 마이크에 대고 표출한 것이라고.


무대라고 하니까 가수나 배우들에게만 초점이 맞춰지는데, 무대를 그라운드로 바꿀 수도 있다. 시즌 중에 부상을 당한 한 여자배구 선수가 있었다. 재활 과정 중에 인터뷰를 했었는데 코트가 그립다며 눈물까지 보이더라. 배구가 너무 하고 싶었다는 이야기다. 그녀에게 배구는 존재 이유였던 것이다.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은 야구선수 이종범도 인터뷰에서 비슷한 말을 했었다. 부상 이후에 찾아온 슬럼프 때문에 너무 괴로웠고, 다시 그라운드에 서기 위해 더 열심히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루키시절보다 더 열심히 타격과 수비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곳이 바로 그라운드였으니까


결국 그는 다시 그라운드에 섰고, 2009년 소속팀인 기아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를 우승할 때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 당시 이종범의 나이는 40살이었다. 이미 은퇴를 해야 할 나이였지만 그는 그라운드 위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실히 입증했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무대가 있을 것이다. 자신만의 그라운드가 있을 것이다. 그곳에 올라서면 자신도 모르게 화색이 돌고 말에 힘이 넘치게 된다.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는 힘에 부쳐하다가도 그곳에 올라서면 얼굴색이 달라진다. 마치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렇다면 필자의 무대는 어디일까? 그렇게 화색이 돌고, 말에 힘이 넘치는 무아지경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 어디일까? 길이다. 더 정확히는 숲길.

 



* 북악팔각정: 북악팔각정에서 바라본 북한산. 






세검정(洗劍亭)보다 고향집 팔각정이 더 낫다?

 

3편에서는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서울의 숨어 있는 비경이라고도 불리는 백사실계곡은 북악산에 자리 잡고 있다. 백악산이라고도 불리는 북악산은 서울의 내사산(內四山) 중 가장 키가 큰 산이다. 그 높이가 340m이다. 전편에서도 계속 언급했듯이 한양도성은 내사산을 연결하여 만들어졌다. 북악산-인왕산(338m)-남산(270m)-낙산(125m)을 연결하여 18.6km의 성곽을 쌓았다.


법궁이었던 경복궁이 그 아래에 자리 잡고 있듯, 북악산은 궁궐의 주산으로서 조선시대 내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군주제에서 공화정으로 바뀐 지금도 그 역할은 계속되고 있다. ? 청와대가 있으니까.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은 상명대입구에 있는 홍제천에서부터 시작한다. 3호선 경복궁역에서 상명대행 시내버스를 타고 약 15분 정도 이동하면 시작점에 도달한다.


홍제천은 모래가 많아 사천(沙川)이라고도 불렸다. 그 홍제천을 따라 백사실계곡으로 방향을 잡고 가면 세검정을 만날 수 있다. 세검정은 칼을 씻었다(洗劍)’는 의미인데 광해군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자,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칼을 갈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라고 명명됐기 때문이다. 정자정()에서도 보듯 세검정은 계곡 옆에 지어진 정자다.


세검정 일대(종로구 부암동)는 예부터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였다.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이 주위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홍제천이 너럭바위 위를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데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다산 정약용과 겸재 정선도 그렇게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린 이들이었다. 다산 선생은 <유세검정(遊洗劍亭)>이란 시를 지었고, 겸재 선생은 <세검정도>라는 부채 그림을 그려 세검정을 칭송했다.


현재의 세검정은 1977년에 지어졌다. 1941년에 인근에 있던 종이공장에서 화재가 났는데 불이 옮겨 붙어 주춧돌만 남기고 완전히 소실됐다가 이후 36년 만에 복원된 것이다. 겸재 선생의 부채 그림을 많이 참조하여 복원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크다고 한다


필자가 봐도 복원된 세검정과 겸재 선생의 그림 속의 세검정은 닮아 있지 않았다. 현재의 세검정은,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동네 정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트레킹팀의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 고향 마을회관에 있는 팔각정이 더 좋아 보이는데요...”


부채에 그려진 수려한 주위풍광은 되돌릴 수 없겠지만 문화재 복원만큼은 보다 더 정교하게 이루어졌으면 한다.

 




* 세검정





비밀의 화원 같은 백사실계곡

 

북악산은 많은 부분이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그래서인지 1급수에서만 산다는 도롱뇽이 살고 있단다. 그곳이 정확히 어디냐? 바로 백사실계곡이다. 북악산의 북사면에 위치한 백사실계곡은 비밀의 화원같다고 표현할 수 있다.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중심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그렇게 한적한 장소가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사실 백사실 계곡은 말이 계곡이지 거의 건천에 가깝다.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을 때를 거의 본적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백사실 계곡은 계곡 자체보다는 숲길이 더 각광을 받는 곳이다. 울창한 숲이 터널처럼 산책로를 감싸고 있어 삼림욕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저 한들한들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랄까.


산책로를 따라 백사실계곡 위쪽으로 올라가면 큰 연못 자리와 함께 별서터가 나온다. 주춧돌만이 남아 있는 그곳은 오성대감 이항복 선생의 별서터였다고 전해졌다. 그래서 필자는 예전에 이런 식으로 해설을 했었다.

 

예전에 이곳은 백사 이항복 선생의 별장터였어요. 이항복 선생은 오성과 한음 할 때, 그 오성이었죠.”

 

하지만 몇 해 전에 추사 김정희 선생이 그곳의 주인이었다는 고문서가 발견됐고, 백사실계곡의 별서는 추사 선생의 소유라는 게 정설이 되었다. 하지만 그 곳이 이항복 선생 소유든 김정희 선생 소유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오히려 오성대감과 추사 선생이 함께 묶여 있으니 더 풍부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식으로 해설을 한다.

 

예전에는 이곳이 오성대감 별장터라고 말했는데요. 이제 추사 선생의 문서가 발견됐으니 저는 이렇게 가정해봅니다. 이곳이 오성대감 소유였다가 나중에 추사 선생이 매입했다, 이런 식으로요. 오성대감은 조선 중기 때 인물이고, 추사선생은 후기 때 인물이니까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과거의 행한 해설 오류를 만회하려고 나름대로 꼼수(?)를 써본 것이다.

백사실계곡 일대는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동천은 풍광이 수려한 곳을 지칭하는데 어떤 풍류객이 白石洞天네 글자를 보기 좋게 각자를 해두었다. 그 백석동천 바위는 탐방객들의 포토존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누구나 그 곳을 탐방하면 그 바위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카메라를 꺼내고 멋진 포즈를 취하게 될 것이다. 찰칵!

 




* 백사실계곡: 계곡 초입에 있는 현통사






서울 한복판에 능금마을이?

 

백석동천을 탐방하다 보면 능금마을이라는 곳을 만나게 된다. 능금마을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그런지 전원적인 모습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서울 도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비료포대가 쌓여진 농촌 마을을 보고 있자니 생경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왜 능금마을이 북악산 서북쪽 부암동 부근에 있는 것일까? 아시다시피 능금이면 우리나라의 고유 사과종을 말하는데 능금으로 유명한 지역은 대구·경북 쪽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드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예전에 트레킹에 참가한 사람들도 그렇게 묻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왜 사과마을이 있는 거에요?”

 

현재 창의문 밖, 부암동 일대는 능금마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과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능금마을이라는 마을 명칭만이 옛 흔적(?)을 확인해 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40여 년까지만 해도 창의문 밖 능금은 경림금(京林檎)이라 하여 서울의 유명한 특산물이었다. 능금이 출하되는 가을 때쯤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창의문 인근이 들썩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창의문 밖에 능금나무가 많이 심어졌을까? 먼저 산지 형태를 띠는 부암동 일대의 토양이 척박하여 논농사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로 들어질 수 있겠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는 창의문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 두 번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창의문의 역사를 더듬어 가야 한다.

 




* 백석동천: 각자바위






인조반정과 능금마을

 

1623313.

창의문 밖 홍제원(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에 집결한 의군(義軍)’들은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진격한다.


반정군의 원두표가 도끼로 문을 부셨다. 당시 창의문은 문루가 없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기 때문이다. 높은 위치에서 활도 쏘고 해야 하는데 문루가 없으니 효과적인 방어가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반정군은 창덕궁을 점령했고, 광해군은 폐위된다.


능금마을 이야기를 하다 뚱딴지 같이 왜 인조반정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일까? 그렇다. 창의문 밖 능금마을은 인조반정과 무척 관련이 깊다. 인조는 반정에 협조했다 하여 창의문 밖 백성들에게 능금나무와 자두나무를 나눠주었다. 그게 부암동 능금마을의 시초가 된 것이다.


숙종 때에는 정책적으로 묘목을 더 많이 심어 부암동 일대에 무려 20만 그루의 능금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빨갛게 달아오른 사과들이 푸른 잎들 사이에서 대롱대롱 거렸을 것이다. 아주 멋진 장관이 펼쳐졌을 것 같다. 거기에 인왕산 서편으로 석양이 지는 모습까지 어우러지면!


창의문 밖 능금, 경림금은 그렇게 서울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되었다. 추석 차례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제례물품이 되었던 것이다.

 




* 수각터: 수각터에서 바라본 별서터. 물에 세운 정자를 수각이라고 한다. 백사실계곡 별서터 옆에는 수각이 세워졌던 기단들이 이렇게 남아 있다. 현재 수각은 사라졌고, 연못은 매말랐다.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 다음날에는 저 연못이 물이 차기도 한다. 





북악스카이웨이와 북악산 산책로

 

능금마을을 돌아가면 약수터가 나온다. 산길도 계곡 이어진다. 백사실계곡 숲길보다는 덜하지만 이 산길도 정말 걷기에 좋은 길이다. 걷다보면 어깨춤을 추거나 콧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필자는 둘 다 했다. 어깨춤을 추며 콧노래를 불렀다.


이제 북악스카이웨이를 따라간다. 북악팔각정을 향해가는 것이다. 일명 북악스카이웨이로 불리는 북악로는 19689월에 완공됐다. 이 도로는 그해 121일에 있었던 청와대습격사건(일명 김신조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다. 서울방어목적으로 개통됐던 것이다.


무장공비에 의한 청와대습격이라는 엄청난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지만 이 도로는 관광용으로 더 많이 애용됐다. 도로 정상부에 북악산 팔각정이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을 한 눈에 다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사산은 물론 멀리 관악산과 아차산 등 외사산까지도 다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북악산 팔각정이다.


북악산 팔각정은 석양이 질 무렵이 가장 낭만적이다. 뒤쪽 북한산 서편으로 펼쳐진 붉은 노을을 감상한 후에 앞쪽으로 이동을 하여 서울의 야경을 보는 것이다. 노을도 감상하고, 뒤이어 야경도 감상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연과 도시의 낭만을 동시에 품고 있는 북악스카이웨이는 60~70년대 신혼여행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당시에는 택시를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나 남산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신혼여행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해외여행이 흔한 일상이 된 요즘과 비교해보면 정말 격세지감이다.


한편 북악산 산책로는 한양도성 북악산 구간과는 다르다. 성곽 구간을 포함하여 북악산 일대는 안보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됐다 2006년 이후 일반인들에게 개방됐다.

팔각정에서 성북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군인들의 보초로이다. 그 길을 걷다보면 지금 자신이 서울 중심부에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게 될지 모른다. 그만큼 그 길 주변은 때 묻지 않은 자연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 백사실계곡: 울창한 여름숲도 좋고, 이렇게 단풍이 지는 가을도 좋다. 이렇게 좋은 길을 걸으니 어깨춤이 들썩이고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거겠지!





숲길에 서면 무아지경에 빠진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필자의 무대는 길이다. 길 위에 서서 트레킹을 행하다보면 모든 근심걱정에서 벗어난다. 평소에 거울을 보면 항상 해있는데 숲길에서 트레킹을 할 때는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렇게 해맑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다


좋은 기가 발산 되서 그런지 숲길에서는 해설도 잘 된다. 마이크를 잡고 이러쿵저러쿵 두서없이 이야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박수로 갈무리된다그렇게 숲길은 필자의 존재가치를 확실히 입증해주는 무대다. 가끔 그 위에 올라서면 어느덧 무아지경에 빠지기도 한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무대가 있을 것이다. 그 무대가 누구에게는 실험실일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그라운드일수도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주방일수도 있다. 누구의 무대가 더 좋고 나쁜지는 굳이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다. 그저 묵묵히 무대에 올라 자신만의 에너지를 발산하면 되는 것이다.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지만 숫자는 한 번 따져보고 싶다. 숫자는 확실히 필자의 무대가 압도적이다. ? 전국방방곡곡에 있는 숲길이 다 필자의 무대니까.

 

 



* 백사실계곡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

 

1. IN: 부암동

2. OUT: 성북동

3. 세부코스: 세검정 백사실계곡 능금마을 북악산팔각정 성북동

4. 이동거리: 7km

5. 예상시간: 3시간 30

 

 


*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북악산 역사트레킹 합니다! 함께 하고 싶은 분들 클릭클릭!!!^^;


북악산 역사트레킹은 비밀의 화원’ 같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항복의 별서터가 있었던 백석동천그 백석동천을 흐르고 있는 백사실 계곡또한 북악산의 수려한 산세 등등... 누군가 꼭꼭 숨겨 놓은 화원을 걷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북악산 팔각정에 서면 앞으로는 서울 시내가 뒤로는 북한산이 한 눈에 펼쳐집니다특히 북악산 팔각정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일품 중에 일품입니다북한산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한 번 그 풍광 앞에 서 보세요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팔각정에서 성북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군인들의 보초로입니다그 길을 걷다보면 지금 자신이 서울 중심부에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게 될지 모릅니다그만큼 그 길 주변은 때 묻지 않은 자연 경관을 유지하고 있답니다.









 * 백사실 계곡: 백사실 계곡에서 한 컷







2016년 11월 5일.


이날은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북악산 역사트레킹이 행해진 날입니다.


어제 제가 포스팅 두 개를 연달아 올렸는데 그 두 개는 스토리펀딩의 리워드 트레킹입니다. 오늘 올리는 포스팅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한겨레문화센터에서 행해진 트레킹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한겨레문화센터에서 트레킹 강의를 하고 있잖아요.


간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문화센터 트레킹 강의와 리워드 트레킹 강의가 다르나요?"


아닙니다. 둘 다 차이가 없습니다. 차이라면 코스별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좀 길게 가느냐 좀 짧게 가느냐, 그 차이입니다.


이 북악산 트레킹은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코스입니다. 예전 포스팅들에도 그런 내용들이 언급되어 있지요. 제 말을 못 믿으신다면 이렇게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백 번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한 번 와 보시라고! ^^;


인기가 많은 코스라 그런지 참가자들도 다른 트레킹보다 많았습니다. 그렇게 북적거리는 모습이 보기 좋더군요.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날 미세먼지 때문에 하늘이 뿌옇게 됐기 때문입니다. 시야가 너무 안 좋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북악산 팔각정에서 바라보는 화려한 풍광도 제대로 감상을 하지 못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악산 트레킹에 대한 만족도는 대체적으로 높았답니다. 북악산 자체가 볼거리가 많은 곳이라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 북악산 트레킹이 네 번째였고, 다섯번째 트레킹인 관악산 역사트레킹을 끝으로 2016년 한겨레문화센터 가을학기 트레킹이 종료가 됐답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다!"


이번 가을학기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말 그대로입니다. 상당히 정신없게 진행이 됐습니다. 그래서 아쉬운 점도 많았지요. 하지만 나름대로 찬사를 받으며 종료가 됐습니다. 그런 격려를 발판삼아 내년 봄학기에는 더욱더 알찬 트레킹 강의가 될 수 있게 노력을 해야겠네요.  








 * 현통사: 백사실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현통사.  

 




 * 북악산 역사트레킹 





 

북향의 한용운 집... '돌집' 증오 때문이다 2부

[북악산 역사트레킹 2편] 역사 의미 생각하며 걷는 길

 

 

 

 

 

 

 

 

* 북한산: 북악산 팔각정에서 북한산 보현봉 쪽을 바라본 모습

 

 

 

 


일명 북악스카이웨이로 불리는 북악로는 1968년 9월에 완공됐다. 이 도로는 그해 1월 21일에 있었던 청와대 습격 사건(일명 김신조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다. 서울방어와 관광목적으로 개통된 것이다.

무장공비에 의한 청와대 습격이라는 엄청난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지만 이 도로는 관광용으로 더 많이 애용됐다. 도로 정상부에 북악산 팔각정이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을 한 눈에 다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사산(인왕, 낙산, 남산, 북악)은 물론 멀리 관악산과 아차산 등 외사산도 볼 수 있다.

 


북악산 팔각정은 석양이 질 무렵이 가장 낭만적이다. 뒤쪽 북한산 서편으로 펼쳐진 붉은 노을을 감상한 후에 앞쪽으로 이동해 서울의 야경을 보는 것이다. 노을도 감상하고, 뒤이어 야경도 감상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연과 도시의 낭만을 동시에 품고 있는 북악스카이웨이는 1960~1970년대 신혼여행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당시에는 택시를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나 남산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신혼여행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해외여행이 흔한 일상이 된 요즘과 비교해보면 정말 격세지감이다.

북악산 산책로는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과는 좀 다르다.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이 동서로 이어졌다면 산책로는 남북으로 연결된다. 성곽 구간을 포함하여 북악산 일대는 안보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된 뒤 2006년 이후 일반인들에게 개방됐다.

 

 

 

 


 

 
▲ 뮤지컬 심우 만해 한용운의 일대기를 다룬 뮤지컬 <심우>. 만해 선생이 지은 심우장에서 공연되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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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이 싫어한 '돌집'은 사라졌지만...


성북동으로 내려온 역사트레킹 팀은 마지막 탐방지인 심우장으로 향했다.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다. 그곳에 도착하니 마침 <심우>라는 야외뮤지컬이 공연되고 있었다. 조선 독립을 염원한 한용운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작품이었다. 담장 너머로 본 공연이었지만 나름대로 흥미로웠다. 야외에서 뮤지컬 보는 게 쉬운 게 아니니까.

잘 알려졌다시피 심우장은 남향으로 집을 짓지 않았다. 남향으로 하면 '돌집'을 봐야하기에 일부러 북향으로 집을 지었던 것이다. 그 '돌집'은 조선총독부다. 조선총독부가 얼마나 보기 싫었으면, 집짓기의 기본까지 어겨가며 그렇게 하셨을까?

만해선생이 그렇게 보기 싫어했던 '돌집', 그 조선총독부는 이 땅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그 곳에서 뿌려놓았던 식민 잔재들까지 이 땅에서 사라졌을까? 식민지근대화론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그 이론을 충실히 따르는 이들이 역사교과서를 집필하는 지금의 현실을, 만해 선생께서는 어떻게 바라보실까?  

 

 

* 도움말

1. 북악산 역사트레킹 코스: 홍지문 - 석파랑 - 세검정 - 백사실 계곡 - 이항복 별서터 - 능금마을 - 북악산팔각정(북악스카이웨이) - 북악산산책로 - 한용운 생가(심우장)

2. 약 6k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탐방할 것들이 많아 3시간 이상 소요될 것으로 보임.

3. 시작점: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옴. 버스정류장에서 세검정 방면 버스에 탑승한 후 상명대에서 하차. 버스 이동 시간 약 10분 내외.

4. 종료점: 심우장이 있는 성북동에서 종료한 후, 지하철 4호선 한성대역으로 이동. 버스 이동 시간 약 5분 내외.

5. 이 코스는 지도상으로만 존재한다. 따로 표식이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길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다면 지도검색으로 탐방지들을 찾아갈 수 있다.

 

 

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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