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닭장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새끼 고양이의 밥을 병아리들이 달려와서 뺏어(?) 먹네요.


배가 부른지 이런 밥도둑놈들(?)을 고양이는 본체만체하고 있고요. 병아리들이 고양이 밥 맛을 알았나 봅니다. 맛집 탐방하듯 때가 되면 먹이통에 부리를 들이대니 말이죠. 맛있는 건 알아가지고... ㅋㅋ


아참 저 고양이는 닭장을 지키는 파수꾼입니다. 닭장은 쥐들의 습격에 무척 취약하거든요.

그래서 관리를 안 해주면 닭장이 아니라 '쥐장'이 되어버리죠. '쥐장'이 되지 않기 위해서 투입된 녀석이 바로 저 고양이랍니다.


고양이를 어려서부터 닭들과 함께 키우면 닭들을 해칠 염려가 없다고 하더군요. 고양이도 병아리도 서로서로 익숙해진 것이죠. 그런데 저 녀석은 너무 익숙한 나머지 자신의 밥그릇도 넘겨주어 버렸네요! ㅋㅋㅋ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토박이와 함께 한 공주역사트레킹

 

 

이번 트레킹 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다고, 이거 괜히 공주토박이 앞에서 망신당하는 거 아니야?’

 

역사트레킹을 진행하다보면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톡톡 튀어나옵니다. 제 리딩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중간에 집에 가버리는 분. 그것도 아무런 말씀도 없이... 험한 서울 성곽길을 걷는데 하이힐을 신고 오신 분. 트레킹에는 관심이 없고 이성의 연락처를 얻는 데만 혈안이 되신 분 등등...


몇 해 전, 가을경에 행했던 공주역사트레킹에서도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바로 공주 토박이 분이 참가를 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공주 시청에서 근무하는 분이 참가를 한 것입니다. 좀 긴장이 되더군요. 괜히 밑천이 드러날까 조마조마하기까지 했습니다.

 





* 우금티. 우금티에 쓰러져 있는 조형물. 원래는 서 있었는데 지금은 쓰러져 있다. 120여 년 전, 우금티에서 쓰러져 갔을 농민군들의 모습이 겹쳐져서 그런지,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애잔해진다.






 

토박이에게 선수를 빼앗기다!

 

공주역사트레킹의 시작점은 공산성입니다. 동학농민전쟁 당시 전봉준 부대가 가고자 했던 성이 바로 공산성입니다. 공주성이 공산성이라는 것이죠.


현재의 공산성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475년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현 공주)으로 천도했을 때 이곳은 왕성이었고, 536년 사비(현 부여)로 천도했을 때는 북방성으로 불리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당나라 소정방에 의해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백제가 역사속으로 사라졌을 때, 의자왕이 있던 곳도 사비성이 아닌 바로 이곳 공산성이었습니다.


공산성의 현재 모습은 조선 후기 시대에 그 틀이 잡혔습니다.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인해, 1602년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했고, 그에 따라 공산성도 개·보수가 이루어졌습니다.





* 진남루: 공산성 진남루. 남쪽에 위치해 있다.





매표소가 있는 금서루 부근에서 이런 기본적인 설명을 하며 서쪽 성곽을 둘러갔습니다. 서쪽 성곽에서는 멀리 황새울이라는 천주교 성지가 보이는데 그 지점에 다다랐을 때 공주토박이 참가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기 건너편 십자가 표시 보이시죠? 저기가 황새울이라는 곳인데요. 저기서 천주교 신자가 많이 죽었어요. 그래서 황새울 성지로 불러요.”


! 그건 제가 설명하려고 했는데...”

 

선수를 빼앗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시선을 되찾아오기 위해 서둘러 첨언을 했습니다.

 

저 건너편에 공주 감영이 있어서 그랬어요. 사실 천주교 신자가 가장 많이 희생된 곳은 여기 공주라고 하더군요. 감영이 있어 충청지역의 천주교도들이 여기로 다 붙잡혀 온 거에요. 그래서 희생이 컸던 거고요.”

 

염려했던 일이 발생했지만 그럭저럭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식은땀 한 방울을 흘리며 서둘러 쌍수정(雙樹亭)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 산책로: 공산성 산책로.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 참 힘드네!

 

1624년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으로 파천(播遷: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난을 하는 일)했습니다. 인조는 성 안에 있는 나무 두 그루 아래에서 반란이 진압되길 간절히 기원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이괄이 부하의 배신으로 참수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 나무 두 그루(쌍수)에 정삼품의 작위(통훈대부)를 내립니다.


이후 영조 11, 그 자리에 정자가 세워졌으니 이것이 바로 쌍수정입니다. 처음에는 삼가정이라고 불렸으나 이후 쌍수정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고 있지요. 한편 이런 스토리텔링 때문인지 공산성은 조선시대 쌍수산성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쌍수정에 대한 대략적인 이야기를 하고 금강이 보이는 성의 북면으로 이동을 하려고 할 때였습니다. 인조와 관련된 설명을 하나 더 준비를 했는데 기억이 안 났습니다. 무슨 떡 이름이었는데 기억이 안 나서 그냥 북면 쪽으로 이동을 하려 했습니다. 찜찜한 마음을 뒤로 하고 선두로 나서는데 뒤쪽에서 그 떡 이름과 그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더군요.

 

인조가 이곳에 와서 6일 동안 머물렀는데 인근에 사는 임씨 집안사람이 떡을 받쳤데요. 인조는 그걸 맛있게 먹었고요. 당연히 그 떡 이름을 물어봤겠죠. 그런데 이름이 없던 거에요. 그래서 이후에 임씨 집안에서 만든 맛있는 떡이라고 해서 인절미가 된 거라고 하더군요.”

 

또 그 토박이 분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못한 설명을 그 분이 직접 대신해주었습니다. 저는 멋쩍은 나머지 서둘러 입을 열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역사트레킹 마스터 아닙니까!

 

“‘변화돼서 결국 인절미가 된 거에요. 그나저나 갑자기 인절미가 땡기네...”

 

괜히 애꿎은 인절미 타령을 하며 그 순간을 벗어났습니다. 역시 토박이 앞에서 해당 지역을 설명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번데기 앞에서는 주름을 잡는 게 그렇게나 힘들 줄이야!

 

 





* 임류각: 공산성 임류각. 백제 동명왕 시대 건축물이다. 1980년대 복원한 것이다.






 

공산성을 떠나 우금티로 향하는 길

 

공산성 탐방을 마친 트레킹 팀은 중동성당을 지나 본격적인 도보여행에 나섰습니다. 옛 공주 읍내는 분지형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가지를 두고 둥글게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입니다. 공주 분들은 이를 두고 공주대간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렇게 공주대간을 타고 가는 중간에 우금티와 관련된 설명들을 간략하게 했습니다. 1894년 갑오년에 있었던 국내정세, 청나라의 파병을 빌미로 국내로 출병한 일본군, 청나라와의 전쟁 중이라 후방지역의 준동을 심각하게 판단했던 당시 일본 정부, 일본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청나라 폐잔병들 일부가 동학농민군에 합류했다는 사실 등등...


우금티로 향해가는 의미를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참가자들 중에는 이미 동학농민전쟁과 우금티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분들도 있었고, 처음 듣는 듯 생소한 눈빛을 보내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 금학생태공원. 금학생태공원을 걷고 있는 트레킹팀.






이미 그 관련 내용을 알고 있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공산성을 출발하여 우금티로 가는 것이었고, 그곳에서 120년 전의 사건을 떠올려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의미심장한 다짐을 하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을 만났습니다. 복병은 바로 밤송이들이었습니다. 공주역사트레킹을 행했을 때가 가을경이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밤 막걸리에서 보듯, 공주는 밤의 고장 아닙니까? 우금티 부근도 밤나무가 지천으로 깔려 있어서 그런지, 가는 곳마다 밤송이들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밤송이가 너무 많아 이동이 쉽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얼마나 독한지(?) 신발 사이로 가시가 쑥쑥 들어올 정도였지요. 선두에 선 저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조심하세요. 지뢰밭이에요. 밤송이 지뢰밭!”

 

밤송이 지뢰밭을 지나 우여곡절 끝에 트레킹 팀은 우금티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 우금티터널: 우금티 아래를 지나고 있는 우금티 터널.





 

우금티에서 갑오년, 그날을 떠올리다!

 

우금티에 도착해서는 주위 지형을 가리키며 설명을 했습니다. 일본군의 기관총이 어디에 배치됐는지 또한 농민군들이 어느 방면에서 올라왔는지, 하는 것들을 알려주었습니다. 농민군들은 실제로 정상부가 아닌 고개 아래에서 희생을 많이 당했는데 높은 지대를 선점하고 있던 연합부대가 기관총과 화포를 난사해서 그렇게 됐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현장성을 살려 책에서는 풀어낼 수 없는 것들을 설명하려고 나름대로 애썼지요. 물론 그런 설명들이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었습니다. 당시 참가자들이 트레킹을 단순히 소비(?) 하지 않고 그 이상의 대화를 나누었다는 점입니다. 우금티 고개에 있는 조형물들, 처음에는 곧추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쓰러져 있는 조형물들이 동학농민군처럼 느껴져 마음이 애잔하다고, 표현한 참가자가 있었습니다. 또한 이런 식으로 대화가 확장되기도 했습니다.

 

요즘 세대들은 우리 역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안 하는 것 같아요.”

이런 아픔의 역사들을 많이 알아야 하는데... 아는 사람만 아는 것 같고요.”

정치도 그래요. 젊은 사람들이 좀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할 텐데요. 투표날에 놀러가지 말고요.”

 

우금티에서 이런 대화들이 오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뿌듯할 따름이었지요. 리딩자로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맛에 역사트레킹을 하는 것이겠죠.

그렇게 하여 공주역사트레킹은 잘 종료가 됐습니다. 트레킹을 마친 후 그 토박이 분이 제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공주 사람도 잘 몰랐던 길을 안내해 주셔서 감사해요. 오랜만에 엄청 걸었네요. 힘들어도 재밌었어요.”

 

공주 토박이 분에게 그런 칭찬의 말을 들으니 정말 기분이 좋더군요. 코스를 잡기 위해서 100km 이상을 탐방을 했었는데 그게 물거품이 되지 않았으니까요. 중간에 뱀들과 사투(?)를 벌이며 탐방했던 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초반에는 좀 스텝이 꼬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번데기 앞에서 제대로 주름을 잡아본 하루였습니다.

 

 



* 우금티: 우금티 조형물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트레킹팀.




 

공주 역사트레킹

 

1. 코스: 공산성 중동성당 금학생태공원 우금티

 

2. 이동거리: 11km

 

3. 소요시간: 4시간 30분 정도(휴식시간 포함)

 

4. 난이도:















문경새재에서 온 몸으로 설명하다!

- 문경새재 역사트레킹


"아까 전에 말씀 드렸죠. 펠리페 2세 시기에 스페인은 무적함대를 가지고 있었다고요. 그 스페인 무적함대가 임진왜란이 있기 4년 전인, 1588년에 영국의 드레이크 함대에 의해 칼레에서 대파를 당합니다. 칼레는 도버해협 중에서 도버 반대편에 있던 프랑스 땅이랍니다."

 

저는 이렇게 설명을 한 후 잠시 숨을 골랐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입을 뗐습니다.

 

 





* 주흘관: 제1관문 주흘관. 뒤쪽에서 바라본 모습.





 

온 몸으로 설명하기

 

"임진왜란 때, 일본군 수군이랑 당시 무적함대랑은 비슷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닮은 점은 둘 다 수군이면서, 한편으로는 강력한 지상군이었다는 점입니다. 둘 다 래밍(ramming, 상대방 배에 부딪히기)과 보딩(boarding, 상대방 배에 올라타기) 전법을 썼는데 그렇게 했다가 둘 다 크게 패했다는 점도 마찬가지고요."

 

이 말을 끝낸 후 저는 몸을 틀어서 참가자들이 제 옆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른팔로 대포를 쏘는 시늉을 했습니다.

 

'빵빵빵'

 

"당시 판옥선은 제자리 선회가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우현에서 대포를 쏜 다음에 바로 뱃머리를 돌려서 좌현에 있는 대포가 불을 뿜었습니다."

 

'빵빵빵'

 

그 말대로 저는 제자리에서 몸을 돌렸고, 이번에는 왼쪽팔로 대포를 쏘는 시늉을 했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 수군의 주력함인 세키부네는 속도가 빨랐을지 몰라도 선회 능력이 상당히 떨어졌습니다."

 

이 설명을 할 때는 판옥선 때와는 달리 작은 원을 그리며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조일전쟁 당시 판옥선의 특성을 일본군의 주력 함정과 비교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제 몸을 설명 도구로 썼던 셈이지요. 이때 참가자 중에 한 분이 '~'라는 외침을 내뱉더군요.


어떤 참가자는 고개를 끄떡이며 응답 해주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온몸으로 표현해서 그랬던가요? 제 설명이 영 ''은 아니었나 봅니다.


위 설명은 제가 문경새재에서 행한 것입니다. 2관문인, 조곡관을 바라보면서 설명을 했었답니다. 조곡관은 비밀의 정원 같은 아름다운 곳이죠. 그렇습니다. 이번화는 문경새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문경새재 역사트레킹을 하는 것이죠.

 






* 백두대간 조령






 

 

우리나라 고개는 스토리텔링의 보고

 

성씨가 다른 세 명의 장군이 지켰다는 성삼(性三), ‘경사가 가팔라서 오르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미시령(彌時嶺), ‘남쪽에 높은 고개라는 남태령(南泰嶺), ‘밤에는 소들을 끌고 넘을 수 없다는 우금(牛禁)티 등등...


우리땅은 산이 많은 만큼 그 산을 넘을 수 있게 해주는 고개도 많습니다. 그것을 부르는 이름도 다양했습니다. ‘’, ‘’, ‘()’등으로 불리기도 했고, ‘여우고개처럼 그냥 고개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고개를 넘는 이들의 사연도 제각각이었습니다. 선비들은 청운의 꿈을 안고 고개를 넘었고, 보부상들은 장시를 찾아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종교인들은 포교를 위해 넘었겠지요. 이렇듯 고개는 많은 이들의 발자국을 담아낸 공간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풍부한 스토리텔링이 흘러나오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룻밤의 사랑 이야기부터 귀신에 홀린 이야기까지...


그렇게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었던 고개는 스토리텔링의 보고였습니다. 그런 고개들 중에서도 문경새재의 스토리텔링은 더욱더 두드러졌습니다.

 

 




* 문경새재 과거길: 3관문, 조령관 앞쪽에 세워져 있다.






 

청운의 꿈을 안고 문경새재를 넘었던 선비들

 

새재는 새들도 넘기 힘들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한자로 풀면 조령(鳥嶺)이 됩니다. 3관문, 즉 조령관이 위치한 곳의 해발 고도가 642m인 만큼 그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닌 듯싶습니다. 서울남부를 지키고 서 있는 관악산의 정상고도가 629m이니, 조령의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겠지요. 물론 해발 1,102m인 성삼재나 826m인 미시령 앞에서 높이를 말한다면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겠지만...


문경새재는 영남대로(嶺南大路) 상에 놓여 있습니다. 조선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며, 전국을 ‘X'자 형태로 연결하는 도로망을 구축합니다. 그렇게 하여 6개의 대로(大路)가 탄생하게 되는데 영남대로도 그 중 하나입니다. 수많은 고갯길을 제쳐두고 문경새재가 우리나라의 으뜸 고갯길로 꼽히는 이유도 문경새재가 영남대로 상에서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문경(聞慶)이라는 지명 이름도 문경새재의 격을 높여주는데 큰 일조를 했습니다. 과거를 보러 나서는 경북 영주나 강원도 삼척의 선비들은 가까운 죽령을 넘지 않았습니다. 경북 김천이나 성주 등지의 선비들도 추풍령을 넘지 않았습니다. 죽령은 주욱 미끄러진다라고 해서,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해서 기피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대신 경사스런 소리를 듣는다라는 뜻을 가진 문경이기에 과거길에 나서는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필수코스처럼 밟고 지나갔습니다. 심지어 전라도 지역의 선비들까지 문경새재를 넘으며 합격을 기원했다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예나 지금이나 큰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의 마음은 비슷한 거 같습니다. 조그만 징크스도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이렇듯 문경새재는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불러 모았고, 그로 인해 조선의 으뜸 고갯길로 자리매김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그 길에 선 발자국들이 모두 다 좋은 걸음이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 조령관: 3관문인 조령관을 지나고 있는 참가자들.







 

조령과 조일전쟁(임진왜란)

 

1592414.


부산포에 왜군들이 상륙합니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입니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 20만 명은 파죽지세로 북상합니다. 그러다 조령을 앞에 두고 잠시 숨고르기를 합니다.


당시 조령 앞에서 주춤했던 일본군은 고니시유키나와가 지휘하는 제1부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부대였습니다. 이들이 숨 고르기를 한 건 조령의 지세가 험준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당시 일본군들의 전투력이 뛰어났다고 하지만 낯선 곳에서 험한 지형지물을 만나면 위축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고니시유키나와는 수차례에 걸쳐 조령을 정찰했다고 합니다. 자칫하다가는 자신의 부대가 큰 타격을 입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쾌재를 부릅니다. 그 험한 조령을 지키는 조선군 부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선군을 이끌었던 장수는 신립이었는데 그는 조령이 아닌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조령이 험준한 골짜기라면 탄금대는 기병전이 가능했던 개활지입니다.


이후의 이야기들은 잘 아실 겁니다.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은 크게 패배하고 맙니다. 조총으로 무장한데다 백병전까지 능한 일본군을 상대로 개활지에서 싸운다는 건 승산이 없는 게임임에 분명합니다. 그럼 왜 신립 장군은 조령이 아닌 탄금대를 선택했을까요? 신립하면 당대 최고의 무장이었는데...


첫 번째 이유는 기병술을 전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본군들이 보병 위주였기에 기병의 말발굽으로 찍어 누를 생각이었습니다. 보병은 기병의 공격에 취약한데다 신립 자신이 기병술에 능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탈영병 문제와 연락체계 문제 였습니다. 산 중에서 진을 치다보면 시야가 가려질 테고, 그 틈을 타 병사들이 탈영을 할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훈련이 제대로 안 된, 오합지졸인 당시의 조선군이기에 산악보다는 개활지에서 진을 쳐야 그나마 연락체계가 제대로 작동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조곡관: 제2관문 조곡관. 사진 중앙 상단부에 살짝 고개를 내민 봉우리는 부봉이다. 겨울철 눈이 많이 온 후 조곡관을 방문하면 색다른 장면을 볼 수 있다. 조곡관 넘어 부봉에 눈이 덮여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모습 참 장관이다.




426, 고니시유키나와는 별다른 저항 없이 조령을 넘었고, 탄금대에서 조선 육군을 격파합니다. 탄금대 패배 소식을 전해들은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도망을 갔고, 52일 일본군은 한양을 점령합니다.


만약 신립이 탄금대가 아닌 조령에서 일본군들의 북상을 막았다면 어땠을까요? 험준한 산악지형을 방패삼아 게릴라 전술을 취했다면 어떤 결과가 도출됐을까요? 한편 다음과 같은 시각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당시 동원된 병사들이 오합지졸인 농민군이라는데 의병에 참여한 이들도 제대로 훈련이 안 된 농민들이 주축이었습니다.


같은 오합지졸인데도 후자쪽은 승전보를 울렸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오합지졸을 승리의 용사로 만드는 것도 장수의 책무라는 겁니다.


역사에 가정법이 없다지만 문경새재 트레킹을 하다보면 그런 가정들이 끊임없이 떠오르더군요. 이 고지에 궁수들을 배치하고, 저쪽에서는 매복을 하고... 자신 스스로가 조령 방어 사령관이라고 생각하고, 가상으로 병력을 배치해보는 것도 문경새재 트레킹의 또다른 매력이 아닐까 합니다.

 






* 지름틀 바우: 기름을 짜는 '지름틀'과 유사하다 하여 '지름틀 바우'라고 이름 붙여진 바위. 지름틀은 경상도 방언이다. 하지만 필자는 저 바위를 '악어 바위'라고 불렀다. 제1관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주흘관, 조곡관, 조령관

 

그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문경새재에 방어시설이 들어 선 건 1594년의 일입니다. 충주 사람인 신충원의 건의로 지금의 제2관문인, 조곡관(鳥谷關)이 들어선 것입니다. 그 이후 숙종대에 제3관문인 조령관(鳥嶺關), 1관문인 주흘관(主屹關)이 들어서게 됩니다.


그 세 개의 관문은 제각기 다른 멋이 있습니다. 1관문인 주흘관은 넓고 평평한 터에 세워져 있어 성곽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3개의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한 성문이라고 합니다.


산 중 깊은 곳에 위치한 제2관문인 조곡관은 조곡교라는 다리를 건너야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 앞으로 계곡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죠. 조곡관의 계곡물은 적군의 침입을 방해하는 역할도 하지만 관광객들의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역할도 합니다. 그만큼 조곡관은 비밀의 정원처럼 아름다운 관문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제3관문인 조령관은 조령 정상에 우뚝 솟아 있습니다. 조령관은 오랑캐를 막기 위해 세워져서 그런지 주흘관과 달리 북쪽을 향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렇게 외적 방비를 위해서 세워진 관문들이지만 딱히 그 기능대로 쓰인 적은 없었습니다. 대신 그 관문들 덕택에 다른 고개들보다 문경새재는 더 안전해졌지요. 시험 징크스 때문에 고집한 것도 있지만 다른 고개들보다 새재가 더 안전했기에 선비들의 발걸음이 문경으로 향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 주흘관: 제1관문 주흘관.






 

경사스러운 소식을 많이 듣고 싶습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너무나 안 좋은 소식들만 들려옵니다. 귀를 막고 싶어지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귀를 막는다고 막아지겠습니까?


기왕 들을 소식이라면 경사스러운 소식을 많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문경(聞慶)이라는 말처럼, ‘경사스러운 소식이 많이 들려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좋은 소식을 기대하며, 문경새재를 한들한들 거닐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문경새재는 초보자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을 수 정도로 탐방로가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한들한들거리며 거닐어 볼 수 있을 겁니다. 마치 바람을 타고 나는 나비처럼요.

 

 




* 옛길 박물관: 문경새재 입구쪽에 있다.






문경새재 역사트레킹

 

1. 코스: 수옥정관광단지(괴산) 3관문 2관문 1관문 옛길박물관(문경)

 

2. 이동거리: 9km

 

3. 소요시간: 3시간 30분 정도(휴식시간 포함)

 

4. 난이도:

 

 

 

 

 

 

     * 연풍새재: 충북쪽 새재를 연풍새재라고 칭한다. 문경쪽 반대편은 충북 괴산군 연풍면이다.

 

 





 






역사도시 톨레도의 골목길에서 서성이다!

스페인 톨레도 역사트레킹

 

 

이번에는 해외로 눈을 돌려보겠습니다. 해외 역사트레킹을 한 번 해보는 것이죠. 역사트레킹을 굳이 국내에서만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제가 소개할 곳은 톨레도(Toledo)라는 곳입니다. 톨레도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고도(古都)입니다. 로마시대에는 자치 도시가 있었고, 서고트 왕국 시절에는 도읍지가 있던 곳이 바로 톨레도입니다. 8세기경 이베리아 반도를 침공한 이슬람 무어인들도 톨레도를 전략적 거점으로 이용했습니다. 그들은 이 도시를 요새화시켰습니다.


이렇듯 2천년도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톨레도이기에 역사트레킹을 하기에도 제격인 것이죠. 우리나라의 경주나 공주, 혹은 전주를 탐방한다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쉽게 될 겁니다.

 

 




* 톨레도 위치






 

마드리드에서 고속버스타고 톨레도로!

 

저는 이 톨레도를 2년 전 쯤에 방문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4편에 언급함)을 탐방한 후 마드리드 근교 여행을 행했을 때, 그때 방문한 것입니다.


톨레도는 마드리드에서 남쪽으로 7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논스톱 버스로 5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고 왕복(round trip) 버스비도 약 10유로 정도로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은 스페인에 오면 꼭 한 번은 들러야 할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페인 중부지역의 드넓은 평원이 차창 밖으로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광경들을 바라보다 잠깐 잠이 들었었는데 벌써 종착지였습니다. 역시 톨레도는 생각보다 가까웠습니다. 터미널에서 내려 구도심 쪽을 바라보는데 예사롭지 않은 풍광이 펼쳐지더군요. 옛 건축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는데 마치 중세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톨레도 여행은 언덕길을 올라가 비사그라 문을 통해 톨레도 구 시가지에 진입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 비사그라 문은 카를로스 1세가 1550년에 축조한 문으로 일명 성스러운 문이라고도 불립니다. 합스부르크가 출신인 카를로스 1세는 이 문의 정면에다 자신의 가문의 문장을 새겨놓았습니다.

 





* 세르반테스 상: 톨레도에 있는 세르반테스 상.




 

 

독일 출신 스페인 왕, 카를로스 1

 

합스부르크가 문장에도 보듯 카를로스 1세는 당시 스페인 국왕이기도 했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기도 했습니다. 독일 지방을 통치하는 황제가 스페인 국왕을 겸임할 수 있었던 건 결혼을 통해 왕실끼리 연결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간 결이 다른 이야기인데 정복왕윌리엄 1(1028~1087) 같은 경우도 프랑스 노르망디 공이면서 영국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왕이면서도 주로 프랑스 지역에 거주했지요. 영어도 못했다고 합니다.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카를로스 5세로 불렸습니다. 그는 합스부르크 출신답게(?) 스페인보다는 독일 지역을 우선시 했는데 그로 인해 스페인 국내인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의 집권 초기에 발발한 코무네로스(Comuneros) 반란의 원인 중에는 외국 출신 왕에 대한 반감도 한 몫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집권 40년 동안 스페인에 있었던 시기가 고작 16년 밖에 되지 않았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였지만 그는 스페인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을 아들로 두었습니다. 그가 바로 스페인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펠리페 2세였습니다.

 

 




* 톨레도 성.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간직한 곳, 톨레도 성

 

비사그라 문을 지나 톨레도 성(Alcázar of Toledo)으로 향했습니다. 톨레도가 역사적인 장소라는 것은, 달리 말하면 이곳에서 수많은 분쟁이 일어났다는 뜻일 겁니다. 그런 분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 바로 톨레도 성이었습니다.


톨레도 성은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데 멀리서보면 빈틈이 없는 단단한 하나의 성채처럼 보입니다. 로마시대부터 궁성이 있었던 이곳은 수많은 세월을 거치는 동안 계속해서 증개축이 이루어졌습니다.


현재의 톨레도 성은 카를로스 1세와 펠리페 2세 때 밑그림이 그려진 것입니다. 정확히 말해 지금의 톨레도 성은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완전히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멀리서 본 성의 형상은 고풍스러웠지만 실제 외관의 벽돌 하나하나는 비교적 때가 덜 묻어 있었습니다

 

이렇듯 톨레도 성은 스페인 내전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그와 관련된 유명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소개를 해보겠습니다.


1936727. 당시 톨레도 성은 프랑코 휘하의 호세 모스카르도(José Moscardó) 대령이 사관생도들과 함께 방어를 하고 있었고 외곽에서는 인민전선이 진을 치고 성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인민전선은 모스카르도 대령의 16세 아들을 인질로 잡고 있었는데 톨레도 성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들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와 관련된 전화 통화 내용입니다.

 

나는 인민전선군 대장 바르델로 소령이오. 항복하지 않으면 당신 아들을 죽일 것이오.”

항복은 없소.”

최후통첩이란 말이오.”

중략...

아버지. 저 루이스에요.”

아들아, 스페인 국민으로, 기독교인으로 만세 두 번을 외쳐라. 한 번은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한 번은 스페인을 위해...”

, 아버지. 신이여 만세! 스페인 만세!”

탕탕

 

어린 소년의 죽음 때문인지 성 안에 있던 프랑코 군은 70일간 지속됐던 인민전선의 포위를 이겨냈습니다. 이런 일화 때문인지 톨레도 성은 복원과 함께 성역화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70일간 계속된 인민전선의 혹독한 포위를 견뎌내고, 성을 지키는 최고 사령관의 어린 아들의 장렬한 죽음까지... 이 곳은 이후 스페인 내셔널리즘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 되어버립니다. 독재자 프랑코는 이를 놓치지 않고 톨레도 성을 선전장으로 활용했던 것이죠

 




* 톨레도 골목길: 톨레도의 거리는 저렇게 좁은 골목길 투성이었다. 그래도 자동차들은 쌩쌩 잘 달린다.





저는 이 일화를 들었을 때 좀 의아했습니다. 물음표부터 떠오르더군요. 그 엄혹한 순간에 만세를 외치라고 한 모스카르도 대령이나 그 말에 따라서 만세를 외친 아들 루이스나... 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인민전선 측의 대응도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인질로 잡혀 있는 최고 사령관의 아들을 그대로 총살했다는 건 자신이 쥐고 있는 최고의 꽃놀이패를 스스로 버려버렸다는 뜻이니까요. 아무리 당시 인민전선 측이 노련하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히든카드를 버릴 정도로 멍청했을까요

 

그래서인지 그 에피소드와 관련하여 몇 가지 다른 이야기들이 존재합니다. 먼저 대령의 아들이 전화 통화 중에 죽지 않고 한 달 후에 벌어진 인민전선에 대한 보복공습 때 총격을 당해 사망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는 어린 아들의 죽음을 통해 인민전선의 잔악성을 고발함으로써 프랑코 측의 만행을 덮어버렸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옵니다. 당시 ‘Guardia Civil’이란 공안조직이 다수의 인민전선 측 남성 인질들을 죽였는데 그 만행을 덮기 위해 어린 아들의 죽음을 더 부각시켰다는 것입니다.


루이스의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스페인 내전을 기억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을 과거의 일로 돌리지 않고, 또한 서양 사람들의 일로 치부하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 톨레도 성을 방문하는 우리들의 책무일 겁니다.

 


 


* 톨레도 성당.






 

스페인 내전과 마드리드 시민들

 

스페인 내전과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우리는 스페인 내전과 관련하여 바르셀로나를 위시한 까탈루니아, 빌바오를 위시한 바스크 지방이 프랑코 측에 의해 혹독하게 탄압받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마드리드 지역은 프랑코 측에 우호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지가 않습니다. 실제로 스페인 내전 당시 많은 수의 마드리드 시민들이 프랑코에 맞서다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또한 1970년대 중반, 프랑코 사망에 의한 혼란기 때 많은 마드리드 시민들이 앞장서서 민주화를 외쳤습니다.


스페인 내전을 마드리드 VS 바르셀로나프레임으로만 바라본다면, 프랑코 독재에 맞섰던 수많은 마드리드 시민들의 희생은 말 그대로 헛된 희생이 될 것입니다.

 






* 톨레도 성당.





 

 

정신없었던 톨레도 성당

 

다음 탐방지는 톨레도 성당입니다. 톨레도 성당으로 가는 길은 좁았습니다. 아주 좁은 골목길이었습니다.

 

? 8유로요?”

 

멈칫했습니다. 무슨 성당 입장료가 그렇게 비싸단 말입니까? 8유로면 우리나라 돈으로 만 원이 넘는 돈이었습니다. 그래도 발걸음을 돌릴 수 없어 표를 끊었습니다. 속으로 궁시렁궁시렁거리며...


톨레도 대성당은 페르난도 3세 재위시절인 1226년부터 짓기 시작했습니다. 후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이 성당은 완공 때까지 무려 187년이나 소요됐습니다. 오랜 연륜을 가지고 있고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인 만큼 이 성당은 톨레도 여행의 필수코스로 자리매김 하고 있습니다.


핵심 코스라서 그런지 성당 안에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관광객들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8유로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톨레도 대성당은 훌륭했지만 인파에 떠밀리는 것이 싫어서 서둘러 다음 탐방지로 향했습니다.

 

 



* 알칸타라.





 

천혜의 요새 톨레도

 

마지막 탐방지는 톨레도 구시가지를 감싸고 있는 타호강과 알칸타라(Alcantara) 다리였습니다. 톨레도가 오래전부터 전략적 요충지가 된 건 타호강 때문이었습니다. 톨레도의 구도심은 말발굽처럼 생겼는데 그 주위 3면을 타호강이 휘돌아 나갑니다. 3면은 협곡 형태를 띠고 있는 터라 톨레도는 천혜의 방어요충지가 되는 셈입니다.


그런 타호강에 로마시대에 축조된 다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알칸타라 다리입니다. ‘알칸타라는 아랍어로 다리라는 뜻이죠. 알칸타라는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만큼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입니다.


톨레도가 수많은 분쟁을 겪은 도시인만큼 알칸타라도 부침이 많았습니다. 또한 협곡에 위치해 있는 터라 홍수가 나서 교각이 떠내려가기도 했습니다. 톨레도만큼이나 알칸타라의 역사도 파란만장했던 셈입니다.


톨레도를 탐방을 하니 중세시대로 되돌아 간 느낌이었습니다. 물론 스페인 내전 같은 현대사도 떠올리기도 했지요. 덕분에 유익한 해외 역사트레킹을 행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톨레도에서 지인들과 함께 역사트레킹을 해보고 싶네요. 대신 그때는 인원파악을 하느라 애를 좀 먹을 것 같습니다. 작은 골목길을 헤집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까요.

 

 

 


* 산 마르틴 다리: 이 다리는 알칸타라가 아니다. 산 마르틴(San Martin) 다리다. 이 다리는 14세기 경에 만들어졌는데 이 곳에서 바라보는 석양이 일품이라고 한다. 산 마르틴에서 알칸타라까지는 약 3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샌책로로 연결되어 있다.









  







인기짱이었던, 북악산 역사트레킹!

호감도 높았던 북악산 역사트레킹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라는 속담처럼, 제게 역사트레킹 코스 하나하나는 모두 다 보배 같은 존재입니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달랐습니다. 유난스럽게 참가자들이 환영하는 코스가 몇몇 있었습니다. 그런 코스들은 아름다운 풍광과 풍부한 역사적 스토리텔링을 공통점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화에 소개할 북악산 역사트레킹도 참가자들이 크게 선호했던 코스 중에 하나입니다. 모객을 하기가 무섭게 매번 조기마감이 됐으니까요. , 그럼 북악산 역사트레킹을 하러 떠나볼까요? 진짜 인기 있는 코스가 맞는지 확인해 볼까요?

 


 



* 탕춘대성 성벽.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그리고 탕춘대성

 

북악산 역사트레킹은 상명대 옆쪽에 자리잡은 홍지문(弘智門)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서울에는 큰 성곽이 두 개가 있습니다. 일명 서울성곽이라고 불리는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이 바로 그것이지요. 서울성곽은 북악산을 기점으로 동쪽의 낙산, 서쪽 인왕산, 남쪽 남산을 둘러쌓아 축조한 것입니다. 이 네 개의 산은 내사산이라고 불립니다. 안쪽에 있는 네 개의 산이란 뜻이죠.


서울성곽이 도읍 방어의 최후의 보루였다면, 북한산성은 도성 방어의 전초기지라고 불릴 수 있습니다. 북한산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손꼽히는 요충지였습니다. 이 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삼국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지요. 고려시대에도 여러 차례 북한산에 있는 산성을 수리·축조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북한산 일대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방어 거점이었던 것입니다.


현재의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시기에 축조된 것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혹독하게 치룬 조선은 국방력 강화와 도성 방어에 전력을 기울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1704(숙종 30)부터 1710년까지 도성 성곽을 재정비했습니다.





* 홍지문





또한 다음해인 1711년에는 북한산성을 축조하기에 이릅니다. 8km 달하는 북한산성은 기공에서 완공까지 6개월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 규모에 비해 무척 빨리 축조된 것인데 청나라가 간섭할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공사를 서둘렀던 것입니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의해 성의 축조와 수축에 큰 제약을 받고 있었습니다.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서울성곽은 내사산을 둘러 만든 성입니다. 북한산성은 북한산에 있는 성이고요. 그래서 두 성곽 사이에는 간극이 생길 수밖에 없었죠. 두 성곽 사이가 좀 붕 떠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간극을 메울 필요가 있었죠. 그래서 축조된 것이 바로 바로 탕춘대성(湯春臺城)입니다. 성이 세워진 세검정 부근에 탕춘대(湯春臺)가 있어서 그렇게 명명된 것입니다. 도성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성이라고도 불렸습니다.


도성과 북한산성을 약 5km에 걸쳐 연결한 탕춘대성도 1719, 조선 숙종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인왕산에서 가파르게 내려온 성벽은 홍제천(사천)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 다시 북한산 쪽으로 숨 가쁘게 비탈을 타고 올라갑니다. 그러다 북한산 서남쪽 비봉 인근에서 북한산성과 합류합니다. 북한산 비봉은 유명한 진흥왕 순수비(555년 건립)가 있던 곳입니다.

 

 





* 홍지문. 성벽이 잘려나간 홍지문.






 

상처(?)가 많은 홍지문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입니다. 성벽이 숨을 골랐던 자리에 홍지문이 들어선 것입니다. 그래서 홍지문 옆에는 홍제천이 흐를 수 있도록 수문 5개가 함께 세워져 있습니다.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이라고 불리는 이 수문은 홍예형(무지개)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홍지문(弘智門)은 상처(?)가 많은 문입니다. 사람들이 자꾸 4대문 중 북쪽에 있는 문으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트레킹 참가자들 중에도 그렇게 오해를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근처에 북대문이 있다고 하던데... 이게 그 북대문이에요? ”

 

아닙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입니다. ‘북대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북쪽의 대문은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에 있는 숙정문(肅靖門)입니다. 4대문에 붙여진 인의예지(仁義禮智) 중 북쪽에 해당되는 가 홍지문(弘智門)에 붙여져 그런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홍지문은 그런 명칭의 혼용 같은 내적상처 뿐 아니라 외적상처도 가지고 있습니다. 성곽 일부가 잘려나간 것입니다. 홍지문 바로 옆으로 세검정로가 놓여 있는데 성곽 일부를 잘라서 도로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홍지문은 자동차들의 매연과 소음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곳입니다. 문화재가 자동차들에 의해 압도당하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그보다 더 큰 상처도 있었습니다. 1921년에 있은 대홍수로 아주 싹 쓸려 내려갔던 것입니다. 옆에 있는 오간대수문도 그때 싹 쓸려 내려갔습니다. 지금의 홍지문은 1977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대홍수 이후 방치되어오다 약 반세기만에 복원을 한 것이지요.


이렇게 상처 많은 홍지문이지만 그 곳 일대를 탐방하다보면 서울성곽과 북한산성이 어떻게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지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가파른 경사에 축조된 성곽이 어떻게 방어기지 역할을 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평소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가을이 되면 성벽과 오색단풍이 어우러져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것입니다.

 




* 세검정. 옆으로 사천이 흐르고 있다.






 

이항복 별서터가 있는 백사실 계곡

 

다음 탐방지는 백사실 계곡입니다. 백사실 계곡에 들어서면 이전까지 들리는 소음은 사라지고 울창한 숲길이 탐방객들을 반겨줍니다. 백사실 계곡은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도롱뇽 서식지가 있는 곳입니다. 그만큼 수질이 맑다는 뜻이겠죠. 그렇게 청정함을 자랑(?)해서 그런지 멧돼지도 가끔 출몰하는 것 같습니다. 멧돼지를 조심하라는 현수막이 인상적이더군요.


사실 백사실 계곡은 실개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만큼 유량이 적다는 겁니다. 저는 이곳을 여러 번 방문했지만 계곡다운 면모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점 때문에 백사실 계곡을 방문하고 실망한 분들도 많다고 합니다. 대성동이나 천불동 계곡까지는 아니더라도, 물줄기가 시원하게 흘러나가는 모습을 기대하고 오신 분들에게는 분명 아쉬운 대목이겠지요





* 북악산 역사트레킹 참가자들. 백사실계곡 숲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백사실 계곡은 숨은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울창한 숲길이 바로 그것입니다. 서울 종로에 이렇게 걷기 편한 숲길이 있다는 게 놀랍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산책로도 잘 정비되어 있고, 벤치도 여러 개 갖춰져 있어 데이트 코스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숲길 안쪽으로 걷다보면 백사 이항복의 별서터가 보입니다. 숲길 한편에 자리잡은 별서터는 현재 기단석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 기단석과 바로 옆쪽에 있는 연못자리로 그 옛날 별장의 풍채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별서터에서 조금만 걷다보면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고 새겨진 바위를 볼 수 있습니다. ‘백석백악을 뜻합니다. 북악산을 예전에는 백악산이라고 불렀습니다. ‘동천은 산천으로 둘러싸인, 풍광이 수려한 곳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백석동천은 북악산에 있는 풍광이 수려한 골짜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한편 백사실 계곡의 백사는 이항복의 호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 백석동천: 별서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백석동천이라는 글씨가 각자되어 있다.


 



북악스카이웨이와 북악산 산책로

 

일명 북악스카이웨이로 불리는 북악로는 19689월에 완공됐습니다. 이 도로는 그해 121일에 있었던 청와대습격사건(일명 김신조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습니다. 서울방어목적으로 개통됐던 것입니다.


무장공비에 의한 청와대습격이라는 엄청난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지만 이 도로는 관광용으로 더 많이 애용됐습니다. 도로 정상부에 북악산 팔각정이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을 한 눈에 다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사산은 물론 멀리 관악산과 아차산 등 외사산까지도 다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북악산 팔각정입니다.


북악산 팔각정은 석양이 질 무렵이 가장 낭만적입니다. 뒤쪽 북한산 서편으로 펼쳐진 붉은 노을을 감상한 후에 앞쪽으로 위치를 이동을 하여 서울의 야경을 보는 겁니다. 노을도 감상하고, 뒤이어 야경도 감상하는 것이죠.


이렇듯 자연과 도시의 낭만을 동시에 품고 있는 북악스카이웨이는 60~70년대 신혼여행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택시를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나 남산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신혼여행의 전부였던 시절이었습니다. 해외여행이 흔한 일상이 된 요즘과 비교해보면 정말 격세지감입니다.


한편 북악산 산책로는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과는 좀 다릅니다.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이 동서로 이어졌다면 산책로는 남북으로 연결됩니다. 성곽 구간을 포함하여 북악산 일대는 안보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됐다 2006년 이후 일반인들에게 개방됐습니다.

 


 



* 북악산 역사트레킹팀. 북악산 팔각정에서 북한산을 바라보고 있는 트레킹팀. 백사실 사진에 등장한 팀과는 다른 사람들이다.





 

만해 한용훈이 싫어한 돌집은 사라졌지만...

 

마지막 탐방지는 성북동입니다. 성북동에 있는 심우장이 트레킹의 종료점입니다.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입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심우장은 남향으로 집을 짓지 않았습니다. 남향으로 하면 돌집을 봐야하기에 일부러 북향으로 집을 지었던 것입니다. 돌집은 조선총독부였습니다. 조선총독부가 얼마나 보기 싫었으면, 집짓기의 기본까지 어겨가며 그렇게 하셨을까요?


만해선생이 그렇게 보기 싫어했던 돌집’, 그 조선총독부는 이 땅에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 뿌려놓았던 식민 잔재들까지 이 땅에서 사라졌을까요? 식민지근대화론 같은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을, 만해 선생께서는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요?

 

심우장 탐방을 끝으로 북악산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됩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보셨습니까? 매번 조기마감이 된 이유가 이해가 되셨는지요? 이해가 안 되셨다면 이번 주말에 당장 배낭을 꾸려서 떠나보세요. 직접 걸으면서 판단해주시길!

 




 

* 뮤지컬 심우. 심우장에서 뮤지컬 심우를 야외극 형식으로 공연하고 있었다. 2014년 가을경에 촬영한 사진임.






 

북악산 역사트레킹

 

1. 코스: 홍지문 세검정 백사실계곡 북악산팔각정 북악산산책로 심우장

 

2. 이동거리: 7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펀딩비 미리 당겨썼습니다!

- 청소년들과 함께한 인왕산역사트레킹

 

 

제게 메일 한 통이 왔습니다. 홍은동 공부방이라는 곳의 프로그램 담당 선생님이 보낸 메일이었습니다. 담당 선생님은 검색을 통해 우연히 역사트레킹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아이들이 인왕산 역사트레킹에 참여를 할 수 있는지 문의를 했습니다. 한마디로 역사트레킹을 통해 지역체험활동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인왕산이 홍은동의 동네 뒷산이라서 그랬던 것이죠.

 

 



 

청소년들과 함께한 역사트레킹

 

사실 역사트레킹은 성인 대상 프로그램입니다.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껏 계속 성인들만 참가신청을 해왔기에 그렇게 굳어져버린 것이죠. 그러다보니 저도 성인들 기준으로 코스를 짜게 됐습니다. 또한 성인들의 입맛(?)에 맞는 해설을 준비해 왔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 성인들 대상으로만 프로그램을 진행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역사트레킹을 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아니, 오히려 청소년들이 더 많이 역사트레킹에 참여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무거운 책가방만큼이나 학습에 짓눌린 그들이기에... 그렇게 해서 지난 528, 청소년들과 함께 인왕산 역사트레킹에 나서게 됐습니다.


한편, 인왕산역사트레킹은 지난 1화에 언급이 됐습니다. 그럼 이번화는 재탕이 되는 건가요? 아닙니다. 그때는 윤동주 시인과 관련된 에피소드 위주로 내용을 서술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이번화에서는 코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습니다. 또한 코스의 시작점도 변경됐습니다. 예전에는 광화문에서부터 시작을 했지만 변경된 코스에서는 청계천에 있는 광통교에서부터 출발을 하게 됩니다.


이번화가 재탕인지 아닌지 끝까지 읽어 봐주세요. 더군다나 펀딩비를 미리 땡겨쓴만큼 후원자분들은 냉철한 시선으로 이번화를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 광통교





 

 

광통교(廣通橋)


트레킹 팀이 첫 번째로 탐방한 곳은 청계천에 있는 광통교입니다. 대광통교, 광충교, 광교라고도 불리는 광통교는 원래 태조 때 흙으로 만들어진 토교(土橋)였습니다. 그러다 태종10(1410), 홍수로 인해 다리가 떠내려 가 다시 돌다리(石橋)로 만들게 됩니다. 이때 다리에 쓰였던 석재들은 정릉(貞陵)에 있던 석물들이었습니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의 무덤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어떻게 왕후의 무덤에 있던 돌들이 다리의 재료로 쓰일 수 있냐는 의문 말입니다.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습니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세자 책봉에 나서야했습니다. 그래서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었던 방석이 1392820일에 세자로 책봉됩니다. 그해 717일에 조선이 개국했으니 약 한 달 만에 세자가 책봉이 된 것이지요.


쟁쟁한 형들을 물리치고 이방석이 세자가 될 수 있었던 건, 신덕왕후가 개국 후 첫 번째 왕후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원래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은 신의왕후 한 씨였습니다. 한 씨는 이성계가 즉위하기 1년 전에 세상을 떠났기에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게 됩니다. 신의왕후는 방과(정종), 방원(태종), 방간(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킴) 6명의 남자 형제들을 낳았습니다

   



* 광통교. 거꾸로 세워진 신장석.




 

신덕왕후는 자신의 소생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396(태조5)에 세상을 뜨고 맙니다. 강 씨를 무척 아꼈던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 정동에 묘소를 만드니, 그것이 바로 정릉이었습니다. 이후 13988, 이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이때 세자였던 방석이 죽고 맙니다. 이를 무인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부릅니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1409(태종9), 도성 안에 무덤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정릉을 현 위치인 성북동으로 옮기게 합니다. 그 다음해에는 정릉의 봉분을 두르고 있던 석각신장(石刻神將) 등을 광통교 건설에 이용하게 합니다

 

신덕왕후에 대한 이방원의 '뒤끝'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기왕 능에서 가져온 귀한 석재들인 만큼 그걸 제대로 쌓았으면 좋았으련만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신장석들을 뒤집어 놓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장석은 머리가 바닥을 향해 있습니다. 신덕왕후를 철저히 조롱한 것이죠.


이 광통교는 길이(12미터)보다 폭(14미터)이 더 넓습니다. 그래서 광통교라고 부르나 봐요. 그렇게 넓은 다리인 만큼 거기에 담긴 스토리텔링도 풍부하네요.”

 

트레킹 팀은 풍부한 역사를 담고 있는 광통교를 직접 건넜습니다. 다리에 담긴 많은 이야기들을 곱씹어 보면서.

 

 




* 서울성곽: 서울성곽 인왕산 구간.







 

사직단은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다.

 

트레킹 팀은 광화문을 지나 사직단으로 향했습니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신(社神)과 오곡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제례를 올리는 곳입니다.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 바로 사직단인 것입니다. 농경을 중시했던 조선왕조였기에 사직단의 의미는 종묘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들이 닥쳤을 때 사직단에 직접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고 합니다.


보통 사직은 궁을 중심으로 서쪽, ‘종묘는 동쪽에 들어섭니다. 실제로 사직단은 경복궁의 서편인 서촌에 위치에 있고, 종묘는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사직단은 동쪽에 사신을 모시는 사단, 서쪽에는 직신을 모시는 직단이 있습니다. 큰 담 안에 작은 담이 둘러져 있는데, 그 작은 담은 이라고 부릅니다. 그 율 안에 사단과 직단이 있는 것이죠.


조선의 근간 중에 하나였던 사직단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쳤습니다. 1911년에 사직단이 폐사됐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해 1922년에는 원래 부지에다 인근의 땅들을 합쳐서 공원을 만들기까지 합니다. 사직단을 공원화하여 격하시켰던 것입니다.






* 사직단: 사직단 제단 바로 옆에서 사진촬영을 하는 청소년 트레킹 팀.






해방 이후에도 사직단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도시계획에 따라 신문(神門)이라고 불린 정문이 원 위치보다 14미터 뒤로 후퇴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지 안에 차례로 도서관, 학교, 어린이 놀이공간 등이 세워지게 됩니다.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이 떠난(?) 예전 사직공원은 몸살을 앓았습니다. 취객들이 술김에 울타리를 넘어 가기도 하고, 아이들은 제단에서 씨름을 하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는 부비부비를 즐긴 남녀들도 넘쳐났다고 합니다



트레킹 팀은 율을 넘어 사직단을 지근거리에서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내친김에 기념촬영도 했습니다. 물론 허락을 받고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죠. 소중한 문화유산을 앞에 두고 기념촬영을 할 수 있어서 은근히 기분이 좋더군요. 학생들의 표정도 밝아보였습니다. 이런 맛에 역사트레킹 하는 거겠죠!

 






* 사직단






 

인왕산의 숨겨진 보물, 수성동계곡

 

트레킹 팀은 수성동 계곡을 향해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의 또 다른 볼거리입니다. 아랫동네 서촌의 번잡함은 싹 사라지고, 계곡이 주는 청량감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곳이 바로 수성동입니다. 물론 계곡치고는 유량이 거의 없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더군요.


수성동(水聲洞)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한경지략>에는 수성동을 명승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겸재 정선은 <수성동>을 그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수묵으로 옮겨놓았습니다.


또한 이곳은 중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닐던 곳입니다. 조선후기 중인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본거지였던 셈이죠. 그러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무척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수성동 계곡은 20127월에 복원한 것입니다. 복원 전에는 1971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후 안전문제로 아파트는 철거가 됐고, 그 위치를 옛 모습으로 돌려놨던 것입니다.


복원 과정에서 겸재 정선의 <수성동>이 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수성동>에 나오는 것처럼 기린교라는 통돌다리도 그대로 복원이 됐습니다. 어쩌면 겸재의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수성동 계곡은 평범한 도시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 수성동 계곡







 

북문의 역할을 했던 창의문

 

윤동주 문학관을 넘어 마지막 목적지인 창의문으로 향했습니다.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문입니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북문(北門) 역할을 했던 건 바로 창의문이었습니다.


북악산의 험한 지형 위에 세워진 숙정문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 뿐더러 1413년부터는 그마저도 폐쇄를 시켰기 때문입니다. 숙정문이 오른팔이 되어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학적인 의미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입니다.


그때 창의문도 폐쇄가 되는데 왼팔의 역할을 하여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죄명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숙정문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 위에 놓여 있던 창의문은 1506(중종 1)에 다시 통행이 재개됩니다. 그래서 소문(小門), 창의문이 북문 역할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다는 것은 그 문 아래로 수많은 역사적 발걸음이 오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옹립하던 세력들은 이 문을 통해 도성을 점령했고, 광해군을 쫓아낸 후 권력을 잡게 됩니다.


현재의 문루는 조일전쟁(임진왜란)때 불 타 사라진 것을 영조 때(1740) 건립한 것입니다. 현재 창의문은 일반인에게 개방이 되어 있어 문루까지 직접 올라갈 수 있습니다. 내부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인사들의 이름을 적은 나무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 판은 문루를 세울 때 같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 창의문: 창의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청소년 트레킹 팀.





 

 

펀딩비를 미리 당겨쓰다!

 

트레킹 팀은 창의문을 통과할 때 천장화를 바라보면서 이동했습니다.

 

저 그림이 뭘로 보이세요?”

봉황 아니에요?”

주작이요. 주작.”

 

! 봉황에 주작까지 나왔습니다만 정답이 아니었습니다. 정답은 닭이었습니다. 이 일대가 풍수적으로 지네의 기운을 가졌다하여 천적인 닭을 창의문에 그려 넣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의문 밖인 부암동 일대가 치킨으로 유명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청소년들과 함께 한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무사히 종료가 되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넘었더군요. 그냥 그렇게 헤어지기는 아쉬웠습니다. 배도 고프고.


그래서 제가 점심을 쏘기로 했습니다. 제 사비를 쓸까 하다가 스토리펀딩비를 당겨 쓰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유익하게 역사트레킹을 하려고 펀딩을 받고 있는 거잖아요. 그 목적에 맞게 지출이 됐다면 후원금을 미리 당겨쓴다고 해도 후원자분들이 너그러이 이해해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

 

 

 

인왕산 역사트레킹

 

1. 코스: 광통교 사직단 단군성전 수성동계곡 윤동주문학관 창의문

 

2. 이동거리: 7km

 

3. 예상시간: 3시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정조대왕이 만든 돌다리를 건너며

 

삼성산 역사트레킹

 

 

흥미로운 질문 두 가지를 던져볼게요. 서울 인근에 경주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연혁을 가진 사찰이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또 그 사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정조대왕 시대에 축조한 돌다리가 있다면요?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은 분명 이런 물음에 흥미를 느끼실 것입니다.


불국사보다 더 오래됐다는 사찰은 삼성산에 있는 삼막사라는 사찰이고, 정조대왕 시대에 축조된 다리는 만안교라는 석교(石橋)입니다. 이 두 문화재는 하나의 선으로 연결하여 이동할 수 있습니다. 또한 편리하게 수도권 전철을 타고 탐방을 할 수 있답니다. 이를 두고 저는 일명 삼성산 역사트레킹이라고 이름을 붙였답니다.

 





 

* 만안교.







 

화산 능행차와 만안교(萬安橋)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경기도 안양시에 있는 관악역 1번 출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1번 출구에서 나와 안양역 방면으로 약 500미터 정도를 걸어가면 만안교를 만날 수 있답니다.


1795(정조19)에 축조된 만안교는 정조대왕의 화산 능행차를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효심이 깊었던 정조는 1789년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 영우원에서 수원 화산의 현륭원으로 이장을 합니다. 그리고는 자주 참배에 나섰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화산 능행차가 된 것입니다.


처음 능행차는 도성에서 동작나루를 거쳐 남태령을 넘는 길이었지만 이후 시흥과 안양을 거치는 길로 변경됩니다. 남태령 길이 협소하다는 지형적인 한계가 가장 큰 이유였지만 다른 사정도 있었습니다. 과천 행차로에는 김상로와 그의 형 김약로의 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의 명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것도 뒤주에 갇혀 죽게 되지요. 이것을 두고 임오화변(1762, 영조 38)이라고 부릅니다.


임오화변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상로는 사도세자 처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습니다.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해원하기 위해 떠나는 능행차 길에 사도세자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김상로 형제의 묘소를 지나는 것이, 정조 입장에서는 당연히 유쾌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1794년 이후부터는 능행차 노선이 시흥과 안양 방면으로 변경된 것입니다.


당시 왕의 행차 길에는 임시로 나무다리 등을 가설한 후, 행차가 끝난 뒤에는 철거 하는 방식이 반복됐습니다. 이에 정조는 그런 번거로움을 피하고, 인근 주민들이 평상시에도 안전하고 편리하게 하천을 넘을 수 있게 튼튼한 돌다리(石橋)를 건설하라고 왕명을 내립니다.


석교의 축조에는 경기관찰사, 병마수군절도사, 수원개성강화 유수까지 동원됐습니다. 큰 공사였지요. 하지만 건설 기간은 3개월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왕명으로 지어진 돌다리는 길이가 31.2m, 넓이가 8m에 달하는 큰 규모를 자랑하게 됩니다.


왕의 뜻대로 인근 백성들도 안심하고 하천을 건널 수 있는 튼튼한 돌다리가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 다리를 두고 정조대왕은 만년동안 사람들이 편안하게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한다는 의미로 만안교(萬安橋)라는 이름을 직접 작명하였습니다.

 

 





* 만안교. 만안교를 건너는 트레킹 팀.








 

백성들을 위해 튼튼한 돌다리를 축조한 정조대왕

 

 

한편 원래 만안교는 지금의 자리보다 남쪽으로 200m 지점인 삼성천 위에 축조됐습니다. 그러다 1980년 국도 확장 공사 시에 지금의 삼막천 위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 다리가 놓여 있는 안양시 만안구의 명칭은 만안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만안교는 무지개교라 불리는 홍예교입니다. 조선 후기에 축조된 홍예교 중에서 가장 큰 다리로 모두 7개의 아치가 놓여 있습니다. 판석과 장대석을 서로 맞물려 축조했는데 그 기법이 매우 정교하여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불린답니다.


저는 처음 만안교를 탐방했을 때 좀 색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4대문 밖, 그것도 한강 이남에 이렇게 정교하고 거대한 아치형 석교를 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이 돌다리는 박물관에 갇혀 있는 죽은(?) 다리가 아니라 지금도 인근 주민들이 건너다니는 살아있는 생활다리였다는 점입니다.


이제는 다산 정약용 선생이 진두지휘하는 화산 능행차를 볼 수 없고, 다리 주위로는 고층 아파트들이 들어섰지만 정조대왕의 바람은 계속 이어지는 듯싶습니다. 인근 백성들이 만년동안 편안하게다리를 건널 수 있게 하는, 그런 애민 정신 말입니다.

예전 삼성산 역사트레킹을 했을 때 저는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조대왕 시대에 만들어진 역사적인 다리를 걷고 있습니다. 200년이란 시간이 흘렀어도 아직까지 튼튼한 돌다리를 넘고 있는 거죠. 그 이름대로 만년동안 계속 잘 넘어 다녔으면 좋겠네요.”

 

 





* 남근석. 삼막사 칠성각 부근에 위치해 있다. 은근히 인기가 좋다.







 

울창한 숲길, 삼막계곡

 

 

다음 코스는 삼막천을 따라 이동을 합니다. 삼막천은 삼성산에서 발원된 작은 하천으로 그 상류 위쪽에는 삼막사가 터를 잡고 있고, 그 하류에는 현재 만안교가 놓여 있습니다. 만안교를 지난 삼막천은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 안양천과 합수됩니다.


예전, 삼성산 역사트레킹을 행했을 때는 5월 달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여름과 같이 더운 날씨였지요. 땀방울이 눈앞을 가릴 정도였습니다. 봄소풍 같은 역사트레킹을 기대했지만 때 이른 더위로 자꾸 나무그늘만 찾게 됐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도 지쳐갔고, 참가자들도 지쳐갔습니다.


하지만 삼막계곡에 들어서니 언제 그랬냐는 듯 기운이 솟구쳤습니다. 계곡을 끼고 있는 숲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직사광선이 내려찐다고 해도 숲속에 있으면 탈진할 일이 없습니다. 숲속이 강력한 썬크림역할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시원한 나무그늘에 있으면 원기가 회복됩니다. 이런 숲길을 걷는다면 한 여름 때양볕 아래에서도 트레킹을 마음껏 할 수 있을 듯싶었습니다.


1시간 정도 계곡 숲길을 따라 올라가니 드디어 삼막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 삼막사.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삼막사


  

삼막사는 677,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입니다. 원효, 의상, 윤필 3대사가 막()을 치고 수행을 하다가 그 후에 절을 지으니, 그 절이 삼막사가 된 것입니다. 삼성산의 명칭 유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원효, 의상, 윤필의 성인이 수도를 한 곳이라 하여 삼성산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앞선 8화에서도 언급을 했었습니다. 참고로 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입니다.


서두에서 저는 삼막사가 불국사보다 더 오래된 연혁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했습니다. 개창 시기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통상적으로 불국사의 창건은 751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삼막사가 불국사보다 무려 70년 정도 앞선 연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서가 깊어서인지 삼막사에는 수많은 선승들이 다녀갔습니다. 신라 말에 도선국사, 고려시대에는 나옹선사,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와 사명대사, 서산대사가 이곳에서 수도를 했습니다. 특히 조선왕조 개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무학대사는 삼막사에서 새로운 왕조에 대한 융성을 기원했다고 합니다.





* 삼막사.





유명한 선승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는 건, 달리 말하면 삼막사가 좋은 기운을 품고 있다는 뜻일 테지요. 제가 처음 삼막사를 탐방했을 때였습니다. 기운이 사방으로 트였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삼막사는 정상부 능선 부근에 자리 잡고 있어, 그 곳에 올라서면 멀리 서해바다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데 그런 입지적 조건이 삼막사의 기운을 하게 생성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좋은 기운 때문인지 삼막사는 조선시대부터 남왈삼막(南曰三幕)으로 지칭됐습니다. 또한 진관사 등과 함께 서울 인근의 4대 명찰로 불리게 됐답니다

 

삼막사에는 무학대사가 중수한 대웅전을 비롯하여 1880(고종 17)에 지어진 명부전과 그 다음해 지어진 칠성각 등의 당우(堂宇)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또 고려중기 시대에 건립된 3층 석탑과 조선 후기시대에 제작된 아미타삼존불 등 다양한 문화재가 있습니다.


삼막사에서 바라보는 낙조도 일품입니다. 서해바다로 넘어가는 해가 세상을 붉게 만든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시조 한 수를 읊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삼막사 아래에 있는 염불암 탐방을 끝으로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됩니다. 삼성산 역사트레킹은 8화에서 소개했던 관악산 역사트레킹과 함께 묶어서 해보시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서울 남부지역에 대한 이해도도 더 높아질 것입니다.

 


 



* 삼막사.






 

삼성산 역사트레킹

 

1. 코스: 만안교 경인교대 정문 삼막계곡 삼막사 염불암 안양예술공원

 

2. 이동거리: 8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포함)

 

4. 난이도:

 

 

 


 

 

 






























여기는 지리산 삼신봉입니다. 삼신봉은 유명한 청학동과 가깝습니다. 청학동에서 약 3km 정도 이동을 하면 오를 수 있답니다.

삼신봉은 지리산 주능선 중간부분에 위치하고 있지요. 그래서 삼신봉에 오르면 노고단에서부터 천왕봉까지 한 눈에 다 조망할 수 있답니다.

그런 곳이라 그런지 이 삼신봉은 예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곳입니다. 공간도 협소하고 어설프지만 그 삼신봉 제단에서 제를 올리면 영험한 기운이 퍼져간다고 하네요.

그런 삼신봉 제례가 있어 저도 참여해 봤습니다. 영험한 기운이 제게 스며들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천왕봉에서부터 노고단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지리산 주능선을 볼 수 있어서 눈이 다 시원하더군요.












* 다산 정약용: 다산 유물전시관에 서 있는 다산 선생 동상.







정약용 선생 만나러 갑시다_2편


강진 정약용 역사트레킹

    


 

남도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 , 바다가 서로 어우러진 풍광들은 여행자들의 마음까지 시원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런 넉넉한 남도의 풍광들을 벗 삼아 길을 걷다보면 발걸음도 가벼워질 겁니다. 그렇게 걷다가 꼬르륵소리가 나면 푸짐한 남도 음식으로 배를 채울 수도 있겠지요. 상다리가 부러질 듯이, 한 상 가득 채워진 음식들을 먹다보면 콧노래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환호성을 터뜨리면서요.

 

~ 풍광 좋고, 음식 좋고...! 이 맛에 남도 트레킹한다!”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남도로 떠납니다. , 그럼 아기자기한 풍광과 맛깔 나는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남도로 우리 함께 길을 나서보죠!


제가 찾은 곳은 전남 강진군입니다. ‘남도 답사 1번지라고 불리는 강진군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다산 선생은 만덕산 기슭에다 다산초당을 짓고 그곳에서 집필 활동과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강진에서 무려 18년 동안이나 생활 하셨던 만큼 강진 곳곳에는 다산 선생의 자취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답니다. 그런 자취를 따라서 강진을 찾는 이들이 많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산 선생의 자취를 따라서 도보여행을 했습니다. 일명 강진 정약용역사트레킹을 행했답니다. 이번화는 그 강진 정약용트레킹을 담았습니다. 이전 9화가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이었으니, 이번 10화는 9화의 후속편이 되는 셈입니다.

    



* 다산 정약용: 안경을 쓰신 모습이 인상적이다. 다산유물전시관.


 


 

정약용과 강진

 

영월군은 단종이 먹여 살리고 있어요!”

 

제가 영월강변둘레길을 리딩 했을 때였습니다.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를 앞에 두고 참석자들에게 저 말을 했답니다. 좀 과장된 면이 있긴 했지만 제가 했던 말이 영 틀린 표현은 아니었던 것 같았습니다. 참가자들이 거의 다 고개를 끄떡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저는 한 마디를 더 보탰습니다

 

강진도 그래요. 전남 강진도 정약용 선생이 먹여 살리고 있어요!”

 

이 말에는 참가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수준을 넘어, 이구동성으로 맞장구를 쳐주더군요. 그래서 저는 첨언을 했습니다.

 

단종이 영월에 유배를 가지 않았다면, 청령포가 지금처럼 많은 이들의 발걸음으로 채워지지 않았을 겁니다. 강진도 마찬가지죠. 다산 선생이 강진으로 유배를 오지 않으셨다면, 강진이 지금처럼 남도답사 1번지라는 수식어를 부여받지 못했을 겁니다.”

 

여행지로서의 강진은 무척 매력적입니다. 고려청자의 고장이자, 도요새의 고장인 전남 강진! 그런 지역적 명물들이 강진을 빛나게 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진을 강진답게 해주는 건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입니다. 정약용 선생이 없는 강진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해보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산 선생의 생가가 경기도 남양주라는 것을 잘 모르고 있더군요. 하지만 다산 선생의 유배지가 강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드물었습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다산 선생과 강진을 한 묶음으로 묶어서 생각하고 있더군요. 한마디로 다산 선생과 강진은 떼래야 뗄 수 없는 존재라는 겁니다.

    




* 수원 화성 축조: 기중기를 이용하여 성을 쌓고 있는 모습을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산유물전시관.




 

 

다산유물전시관

 

강진 정약용 역사트레킹은 다산유물전시관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강진군 도암면에 위치한 다산유물전시관은 만덕산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답니다. 유명한 다산초당은 다산유물전시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산길을 따라 20분 정도 올라가면 다산초당에 닿을 수 있지요.


다산유물기념관은 다산 선생과 관련된 유물과 서적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다산 선생이 500여권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기록한 만큼 기념관은 다산 선생이 기술한 책들로 가득했습니다. 다산 선생이 직접 기록한 책이 아닌 필사본이라 아쉽기는 했지만 옛 고서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제 눈을 사로잡은 서책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기중가도설>이었습니다. <기중가도설>은 중국의<기기도설>을 토대로 다산 선생이 저술한 것인데 한마디로 기중기설계도였습니다. 수원 화성 축조 시, 다산 선생이 기중기를 제작하여 큰 성과를 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요.


<기중가도설>에는 그런 기중기의 도면이 직접 그려져 있었습니다. 꼼꼼하게 그려진 설계도를 보니 감탄사가 연신 터져 나오더군요. 그 밖에도 다산유물기념관에는 볼거리가 풍부했습니다. 공짜로 본다는 게 미안할 정도로 기억에 남는 전시물들이 꽤 많았답니다.


다산유물기념관 위쪽으로는 다산 정약용 말씀의 숲이 있었습니다. ‘다산 정약용 말씀의 숲은 큰 석상에다 선생의 어록을 옮겨 놓은 것입니다. 전 그 어록들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하나하나가 다 울림이 큰 말씀들이더군요. 세상의 지혜들을 모두 다 옮겨 놓은 것처럼 보였답니다.


어쩌면 따분한 도덕선생님같은 글귀들에 하품부터 내뿜는 분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제게는 그 말씀들이 죽비소리처럼 들렸답니다. 아주 큰 울림을 내는 그런 죽비소리.

    

 

    


* 다산 정약용 말씀의 숲.





 

다산초당

 

다음 탐방지는 다산초당(茶山草堂)입니다.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 중턱에 자리 잡은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배지였습니다. 다산 선생은 무려 18년 동안이나 유배생활을 하셨는데 그중 후반부 10년 정도를 다산초당에서 기거하시며 집필과 후학양성에 매진하셨습니다. 유배에서 풀리는 것을 해배(解配)라고 하는데, 그 초당에서 다산선생은 해배를 맞이하게 됩니다.


아무리 초당이 유배지였다지만 10년 동안 그곳에 기거하시다보니 정이 많이 드셨나 봅니다. 선생께서 고향땅으로 돌아가신 후에도 강진에 있는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초당의 안부를 물으시곤 했으니까요.


현재의 다산초당은 기와집입니다. 초당(草堂)이라 하면 초가집이어야 할 텐데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아무래도 현재의 다산초당을 복원하면서, 보다 위엄을 살리기 위해 초가가 아닌 기와집으로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 다산초당: 현판에 걸린 글씨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다산초당은 만덕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기에 주변이 다 숲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숲길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입니다. 초당 위쪽인 만덕산 중턱 부근에는 천년고찰인 백련사가 자리 잡고 있는데 다산 선생께서는 백련사 스님들과도 활발하게 교유하셨기에 그 길을 자주 걸으셨답니다.


유학자였지만 다산 선생께서는 서학(천주교)에도 일가견이 있으셨습니다. 도교에도 문외한이 아니셨죠. 또한 스님들과도 활발하게 교류를 하셨습니다. 그럼 이렇게 정리가 될 수 있을까요?

 

다산 선생은 유···서를 두루 섭력하신 학자였다

 

다산(茶山) 선생은 자신의 호처럼 차를 즐기셨습니다. 또 백련사 승려들과 활발하게 불교에 대해서 토론을 하셨습니다. 간간이 강진 읍내도 다녀가셨고, 인근 영암에 있는 월출산에도 오르셨습니다. 그러고 보면 다산 선생도 한 풍류하셨던 분이었습니다.


어쩌면 다산 선생의 일생 자체가 바람과 같은 삶이었을지 모릅니다. 계속되는 반대파들의 견제와 탄압, 그리고 억울한 귀향살이. 무려 18년이나 계속된 귀향살이. 하지만 그런 운명에 굴하지 않고 유배지를 도서관으로 만든 그 꿋꿋함.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못 다한 일을 잘 마무리하기까지.

 

드라마틱한 다산 선생의 일생을 들여다 볼 때마다 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매일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사는 제 자신이니까요. 얼마전에도 예정된 트레킹이 펑크가 났다고 며칠간 궁시렁거렸답니다. 조금만 궁시렁거려도 될 걸...


하지만 다산 선생을 생각하며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은 정말 기쁘고 행복하네요. 딱 꼬집어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를 하나 배워가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제 발걸음이 계속해서 다산 선생에게로 가는 것이겠죠. 강진이든 남양주든, 혹은 수원이든. 그 곳이 어디든지 상관없습니다. 다산 선생의 뜻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제 발걸음도 함께 것이니까요.






* 다산초당 가는 길: 저렇게 한적한 숲길을 지나면 다산초당에 닿을 수 있다. 한편 왼쪽에 삼남길이라는 표식이 보인다. 삼남길은 서울에서부터 해남까지 걸을 수 있게 만든 도보여행길인데 그 길이가 무려 600km에 달한다.






강진 정약용역사트레킹

 

1. 코스: 다산수련원 다산초당 백련사 뚝방길 강진읍내

 

2. 이동거리: 11km

 

3. 예상시간: 4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 백련사: 천년고찰 백련사.



 






















* 능내역. 작은 간이역의 정취가 살아 있다.









정약용 선생 만나러 갑시다_ 1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


 

서울내부트레킹, 속초해변트레킹. 솔직히 그런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데 누가 그런 명칭을 지었습니까?”

 

트레킹 참여자들 중에는 간간이 이렇게 문의를 해 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제가 직접 지었습니다. 코스에 담긴 내용성을 전달하려고 그런 이름을 지었어요.”

 

제 대답을 듣고 물음표를 거두는 분들이 대다수였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물음표를 몇 개 더 가져다 붙인 표정을 지으시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그런가하면 이렇게 더 묻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럼 귀에 확 꽂히는 명칭 같은 건 없나요?”

 

당시 저는 잠시 망설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답을 했지요.

 

! 이건 어떻습니까? 정약용역사트레킹이요. 정확히는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이요.”


, 그래요? 귀에 확 꽂히네요. 다산 선생은 저도 좋아하는데... 그 명칭 잊어버리지 않겠는데요.”

 








* 능내역.





 

 


 

간이역의 정취가 살아있는 능내역

 

이번에는 경기도 남양주로 가보겠습니다. 귀에 확 꽂히는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을 소개하겠습니다.


정약용 역사트레킹은 능내역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능내역은 중앙선에 있던 간이역이었습니다. 중앙선은 2008년에 복선화가 됐고, 능내역은 더 이상 열차가 서지 않게 됩니다. 폐역이 된 것이죠. 하지만 능내역은 휴식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간이역의 색깔을 그대로 남겨두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공간으로 변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정취를 쫓아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능내역으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단선철도 시절, 옛 중앙선의 일일 수송량보다 더 많은 인파가 주말이면 능내역 인근으로 몰려와 트레킹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입니다. 

 

그런 북적북적한 능내역을 뒤로 하고 트레킹팀은 천주교 성지인 마재성지로 향했습니다. 마재성지는 능내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지만 그 주변 분위기는 능내역과는 완전 달랐습니다. 무척 차분했습니다. 성지는 성지였던 것입니다.

 

 






* 마재성지. 한옥성당이다.






 

정약종의 생가,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선생의 셋째형인 정약종의 생가입니다.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 일반적인 천주교 성지는 거의가 순교, 즉 신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 대대수지만 마재성지는 한 집안의 살림집이 성지가 된 독특한 사례입니다.


그럼 정약종은 누구인가요?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용의 둘째형인 정약전은 잘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정약종이란 이름 석 자는 처음 들어보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형이었습니다. 바로 위형이었습니다. 도교에 심취해있던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에 입문하게 됩니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 진산사건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천주교를 멀리할 때도 그는 강건하게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1791(신해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사람이 제례를 거부하고 위폐를 불사른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의 파장으로 다산 선생도 벽파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됩니다. 신유박해(1801) 이후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황사영의 백서(帛書)에도 신해년 박해 이후에 형제나 친구들로서 여전히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정약종만 홀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 마재성지.





그렇듯 정약종의 신앙은 강건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정약종의 강건한 신앙을 그의 형제들은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포교된 것이 아니라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 서학을 토대로 자생적으로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혁명적 도구로 천주신앙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상의 위폐를 불태운 진산 사건에 반발해 천주교를 떠난 이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배교를 한 이들은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천주 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약종이 계속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면 지킬수록 집안 형제들과의 사이는 멀어져갔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약종만 홀로 강 건너 분원리(현 광주시 남종면)에 살게 될 정도였습니다.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정약종은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를 하게 됩니다.

 






* 다산생가 가는 길.



 



 

정조대왕과 정약용

 

트레킹팀은 다산 정약용 생가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마재성지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떠났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뭐 다들 아시겠지만... 1799, 당시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를 했습니다. 반대파였던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지요.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요? 정약용이 1순위였습니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 다산선생 묘.





벽파는 꼼수를 썼습니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입니다.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둘째형인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습니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고향인 마현(현 능내리)으로 낙향하게 됩니다.


체제공과 정약용이란 원투펀치가 조정을 떠난 두 달 후,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정조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임금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크게 스스로를 책망했다고 합니다. 그때가 18006월이었습니다.


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습니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됩니다. 1801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런 빌미로 이용되었죠.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사사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에 나서게 됩니다.

 

 





* 거중기






 

신유박해로 유배길에 올라야했던 정약용

 

이때 셋째 정약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길에 나서게 됩니다. 처음 다산의 유배지는 경상도 포항 부근 장기였고, 정약전의 유배지는 전라도 완도 본섬 옆에 있는 신지도였습니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백사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약용은 포항보다 더 궁벽한 강진 땅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배되기에 이릅니다.


한편 강진에서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는 고정되지 않았습니다. 읍내에 있는 주막거리에 거처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다산초당이었던 것입니다. 다산초당은 다산 선생이 1808년에서부터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간 머물렀던 곳입니다.


그렇게 해배된 이후 다산 선생은 고향인 이 곳 마현으로 다시 오게 됐고,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에서 강진 시절에 마치지 못한 저술 작업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 다산 선생 동상.





 

산 선생은 무려 500여 권의 서책을 저술한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강진에서의 18년 동안, 또 여유당에서의 18년 동안 다산 선생은 묵묵히 저술과 학술작업에 매진하셨습니다. 그런 다산 선생의 뜻을 배우고자 우리는 여기에 온 것입니다.”

 

나름대로 설명을 잘했는지 제 말에 환호를 하는 참가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친김에 몇마디 더 설명을 보탰습니다.

 

아참 다산 선생은 40세에 유배됐다가 58세에 여유당으로 오시게 됩니다. 그러다 76세에 돌아가십니다. 그때 기준으로는 무척 장수를 하신 셈이죠.”

 

다산생가를 떠나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 이후에도 저는 참가자들과 함께 다산 선생과 정조대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습니다. 파란만장한 다산 선생과 그의 형제들의 삶, 참된 목민관이었던 다산 선생의 애민 정신,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의 일대기 등등... 트레킹의 명칭이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이었던 만큼 다산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에 한 분은 집에 가서 다산 선생과 관련된 공부를 해야겠다고 저에게 슬며시 말을 건냈답니다. 그러고보면 저 같은 사람은 두꺼운 역사책의 머리말을 읽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드네요. 비록 도서관이 아닌 아웃도어이지만, 필드에서 트레킹을 하며 사람들을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리딩하기 때문이겠죠.


임진왜란 당시 변응성 장군이 지켰다는 마진산성 탐방을 끝으로 정약용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됩니다. 마진산성은 야트막한 산인데 그곳에 올라서면 양수대교를 비롯한 양수리 일대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답니다.


정약용역사트레킹은 그 명칭이 귀에 확 꽂힙니다. 또한 눈도 확 뜨이게 하지요. 양수리일대가 수도권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에 한 곳이니까요. 그 아름다운 양수리 일대를 다산 선생을 생각하며 걸을 수 있기에 정약용역사트레킹은 더욱더 재밌는 것이겠지요.

 

 



* 마진산성. 마진산성에서 바라 본 양수리. 앞에 보이는 다리는 신 양수대교이다.





 

남양주 정약용역사트레킹

 

1. 코스: 능내역(폐역)마재성지 다산 생가(여유당) 연꽃 공원 다산 삼거리 조안면사무소 진둥산 솔개고개 마진산성

 

2. 이동거리: 10km

 

3. 예상시간: 4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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