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농월정에 다녀왔습니다. 농월정이 어디냐고요? 농월정은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 있답니다. 안의면에는 화림동이라고 유명한 계곡이 있는데 그 계곡 하류쪽에 농월정이 자리잡고 있지요.

달빛 아래에서 노닌다는 농월정. 비록 낮에 가서 달을 희롱하며 노닐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눈은 시원했습니다. 계곡에 유량이 풍부했기 때문입니다.

여름이 가까워질수록 화림동 계곡은 더욱더 시원해지겠지요. 그렇게 시원하게 굽이치는 물에다 근심걱정을 다 실어보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럼 몸과 마음이 다 상쾌해지겠네요!
















* 트레킹팀.









관악산은 내 베이스캠프

 

둘레길 따라가는 관악산 역사트레킹

 



 

당신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입니까?

 

산악인인 엄홍길 대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키운 건 도봉산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히말라야, 킬리만자로 같은 으리으리한 산들이 아니라 동네 뒷산인 도봉산이 현재의 자신을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대목을 읽었을 때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혹시 엄홍길 대장의 베이스캠프는 도봉산?’

 

자신만의 베이스캠프가 있으신가요? 트레킹이나 등산을 즐겨하시는 분들은 각자 자신만의 베이스캠프가 하나씩 있을 겁니다. 물론 여기서의 베이스캠프는 사전적인 의미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자신의 다리 근육을 키운 곳을 말하는 겁니다. 통을 키우고, 잔뼈를 궂게 해 준 그런 곳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아웃도어 지수를 높여준 곳을 뜻하는 것이죠.


그럼 저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일까요? 바로 관악산입니다. 동네 뒷산은 아니지만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던 관악산이 베이스캠프 역할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곳을 걸어 다니며 다리근육을 키웠고, 아웃도어 지수를 높였던 것입니다.

 





* 관악산 장승


 



 

남부 서울의 진산관악산

 

서울에는 한강을 기준으로 남쪽에는 관악산, 북쪽으로는 북한산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그렇게 두 산은 서울의 남북을 든든히 받쳐주고 있지만 역시 사람들은 북한산을 서울의 최고 산으로 인정하고 있지요. 그래서 관악산은 항상 넘버 2’의 지위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하지만 한강 이남으로 국한을 시키면 관악산이 당당히 진산의 지위를 누릴 것입니다. 서울 남부권에 관악산만한 산이 없거든요.


이미 삼국시대부터 관악산의 중요성은 부각되었습니다. 삼국은 한강 하류지역을 얻기 위해 이 일대에서 치열한 격전을 벌였습니다. 고려시대에는 남경(서울)의 남쪽 방어를 위한 산으로 삼았습니다. 그렇듯 관악산은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수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의 배경이 되어주었던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이런 역사성 때문인지 관악산은 흥미로운 스토리텔링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광화문에 해태상이 조각된 이유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한 방편이라는 이야기, 조선 태종이 셋째 세종에게 양위를 할 것을 눈치 챈 첫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이 도성을 빠져나와 왕좌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기 위해 수도를 했다던 연주대이야기.


하지만 연주대(戀主臺)는 그 한자 이름에도 나타났듯이 왕좌에 대한 그리움이 넘쳐났던 공간이라는 이야기 등등...


그럼 관악산을 누비며 역사의 시간 속으로 걸어가 볼까요? 어렵지 않습니다. 힘들게 등산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관악산 둘레길을 따라 걸으면 수월하게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강감찬 장군 기마상: 말은 역동적으로 잘 조각됐다. 하지만 장군의 다리를 보라. 너무 짧지 않은가? 기왕하는 거 잘 만들지. 장군을 숏다리(?)로 만들어 버렸다.


 




 

노익장을 발휘한 문신 출신, 강감찬 장군

 

트레킹팀도 떠났습니다. 일명 관악산 역사트레킹을 하기 위해서!


트레킹팀이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낙성대였습니다. 수많은 관악산 스토리텔링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는 것은 고려시대 명장 강감찬 장군과 그의 생가인 낙성대(落星垈)일 것입니다. 낙성대라는 의미에서도 보듯, 강감찬 장군이 태어날 때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굳이 신화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역사적인 인물을 과도하게 칭송했다고 거부감을 드러내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한편 군사정권 시절, 성역화 작업의 한 대상자였던 강감찬에 대해 외면하고 싶은 시각도 존재할 것입니다. 현재의 낙성대는 1974, 유신헌법이 한참 맹위를 떨칠 때 건립된 것입니다.

 

그거 아세요. 강감찬 장군이 사실은 문신 출신이라는 거요.”


정말요?”


더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장군께서 나이 70에 최전방 사령관으로 직접 전투를 지휘했다는 겁니다. 그러다 귀주대첩에서 큰 승리를 거둬서 거란 세력을 물리쳤고요.”


, 그래요!”

 

제 설명에 참가자들이 좀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하긴 그럴 만도 했습니다. <삼국지>의 황충 장군도 아니고, 고희의 나이에 최전방에서 을 휘둘렀다는 점이 놀라웠을 것입니다. 사실 저도 놀랐습니다.





* 안국사: 강감찬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 낙성대 공원 안에 있다.





더구나 상대편은 당시 동북아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거란족들이 아니었습니까? 이야기를 조금 더 확장해보죠.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두고 금수지국(禽獸之國)이라고 칭하며 건국 초기부터 강경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래서 거란이 선물로 준 낙타를 굶겨 죽인, 일명 만부교 사건도 발생하게 됐답니다.


거란은 요나라를 세우고 동북아에서 위세를 떨쳤습니다. 당시 요나라는 만리장성 부근에서 송나라와 대치를 하게 됐는데 한반도에 있는 고려에 대해 늘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고려가 송나라와 손을 잡고 자신들을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3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공하였던 것입니다. 강감찬 장군은 3차 침공 때 상원수가 되어 10만 거란군을 격퇴시켰고, 그로 인해 고려는 전란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 낙성대 3층 석탑 좀 보세요.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인데요. 12세기 경에 건립됐으니 천 년의 세월을 버틴 탑이라네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탑이라는 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담아 놓는 조형물이잖아요. 그런데 강감찬 장군은 부처님도 아니고 유명한 고승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 곳에 탑이 세워졌습니다. 아무래도 강감찬 장군의 위엄이 생각 이상으로 엄청났던 것 같아요.”

 

 




* 낙성대 3층 석탑





 

삼성산 성지

 

낙성대를 뒤로 하고 본격적인 관악산 역사트레킹이 시작됐습니다. 트레킹 팀은 서울대 입구를 지나 삼성산 성지로 향했습니다.


삼성산은 관악산의 지산으로 원효, 의상, 윤필 세 분의 성인이 움막을 짓고 수도에 정진했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삼성산에 있는 천년고찰 삼막사(三幕寺)의 유래도 거기에서 나왔습니다. 

 

그런 삼성산에 성지가 있는데 불교 성지가 아니라 천주교 성지입니다. 삼성산 성지는 기해박해(1839) 때 효수를 당한 세 명의 프랑스 신부들의 무덤이 있던 자리를 성역화 시킨 것입니다.


세도 가문이었지만 안동 김씨는 천주교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폈습니다. 하지만 뒤이어 집권한 풍양 조씨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에 앞장섰습니다. 그렇게 하여 발발한 것이 헌종 5년에 있었던 기해박해였습니다.


이로 인해 권력의 중심은 풍양 조씨 세력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런면에서 기해박해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간의 권력투쟁의 부산물로 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 삼성산 성지





기해박해로 인해 앵베르도 주교(한국명: 범세형)와 모방, 샤스탕 신부 등이 새남터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들의 주검은 노고산(마포구 노고산동)을 거쳐 삼성산에 묻히게 된 것입니다. 이후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역화 하였고 지금의 삼성산 성지가 되었습니다.


삼성산 성지는 조용히 사색하기 좋은 곳입니다. 성지라서 그런지 다른 탐방객들도 목소리를 낮추고 주위를 경건하게 둘러보고 있었습니다. 트레킹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떤 천주교 신자께서는 잠깐 동안 기도를 올리더군요.


삼성산 성지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삼성산 숲이라는 소나무 군락지도 있는데 이곳도 사색하거나 시집을 꺼내 읽기 좋은 곳입니다. 트레킹팀도 삼성산 숲에서 신선한 피톤치드를 온 몸으로 맞으며 기분 좋게 삼림욕을 했답니다

 

관악산의 또다른 자랑인 메타세쿼이어 숲 탐방을 끝으로 관악산 역사트레킹도 무사히 끝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껏 수도 없이 관악산을 올랐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오를 생각입니다. 지겨울 만도 한데 이상하게 관악산에 발을 디디면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지금도 다음에 행할 관악산 역사트레킹을 떠올렸는데 벌써부터 흥분이 되네요. 역시 자신의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은 항상 즐거운 일인 듯싶습니다.

 

 



* 삼성산 성지: 한 중년 남성께서 조용히 기도를 올리고 있다.





 

관악산역사트레킹

 

1. 코스: 낙성대역 낙성대 서울대입구 헬기장 삼성산 성지 삼성산 성당

2. 이동거리: 8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 선돌: 전망대에서 바라 본 선돌. 뒤로 보이는 강이 바로 서강이다. 영월강변둘레길은 서강을 따라 걷는다.








영월, 그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다!


서강길 따라 걷는 영월강변둘레길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앞에 보이는 게 선돌이고, 그 뒤로는 서강이 흐르고 있어요.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우리는 저 서강길을 따라 트레킹을 하게 됩니다. 일명 영월강변둘레길 역사트레킹을 하게 되는 거죠. 저 아름다운 길에 흠뻑 빠져볼까요?”

 

당시 저와 트레킹팀은 선돌이란 큰 바위 앞에 서 있었습니다. 선돌은 강원도 영월군에 위치해 있는데 그 뒤로는 서강이라는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선돌의 기묘한 자태가 푸른 강물과 어우러지니 그 멋이 한층 더 격조 있어 보이더군요.


영월에는 유명한 동강 말고, 서강도 있습니다. 워낙 동강의 유명세가 강해 서강이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서강도 무척 아름다운 절경들을 여럿 품고 있습니다. 유명한 한반도지형도 서강이 품고 있지요.


그렇습니다. 이번에 떠날 곳은 영월입니다. 영월 중에서도 서강길을 따라 갑니다. 영월강변둘레길을 걷는 것이죠.

 






* 선돌: 아래쪽 서강에서 바라 본 선돌. 다른 바위에 가려서 갈라진 부분이 작게 보인다.





 

 

기묘한 자태의 선돌

 

영월강변둘레길은 선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진에서처럼 선돌은 서강 강변에 우뚝 솟아 있는 기암괴석입니다. 선돌은 그 높이가 70m에 달하는데 그 자태가 오묘하여 예로부터 신선암으로 불리기도 했답니다. 푸른 서강을 배경삼아 기묘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는 선돌은 그 자체만으로도 명물 중에 명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기묘한 모습 때문에 선돌은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단종 임금도 그들 중에 한 명이었지요. 단종 임금의 유배지는 영월의 청령포였는데 그 곳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돌을 지나쳐야 했습니다. 단종도 기묘한 형상의 선돌을 볼 때만큼은 고된 귀양길에서 오는 피곤함을 잠시 내려놓았다고 합니다.


트레킹 팀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습니다. 선돌과 서강의 모습에 반한 듯, 한 컷이라도 더 좋은 장면을 찍기 위해 카메라 각도를 조절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번 방문했던 선돌이었지만 올 때마다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지요

 




* 서강






즐거웠던 순간도 잠시! 이제 난이도 상()에 해당되는 구간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습니다. 선돌에서부터 서강의 뚝방길로 내려가는 길이었는데 그 구간은 등산로가 무척 험했습니다. 경사가 상당히 심했습니다. 심지어 낭떠러지를 스쳐지나가야 하는 구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리딩자였던 저는 무척 고민을 많이 했었지요.

 

제발 무사히! 아무도 다치지 말고 제발 무사히!’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참가자분들의 트레킹 실력이 출중해서 그랬는지 모두 다 그 위험구간을 무사히 통과했답니다. 리딩자로서 그런 모습이 참 고맙더군요. 그래서 저는 참가자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로 했습니다. 저만 알고 있던 비밀화원같은, 환상의 뷰 포인트(view-point)로 안내했던 것입니다.


그 곳에 올라선 참가자들은 더 열심히 사진을 찍더군요. 독사진을 찍고, 짝을 지어서 찍고... 저에게 이런 말들을 건네면서요.

 

이런 멋진 곳에서 사진 찍게 해줘서 고마워요!”

 

 




* 환상의 뷰 포인트: 실제로 가보면 사진보다 훨씬 더 멋진 곳이다.





 

단종의 한이 서린 청령포

 

서강 뚝방길은 5km 정도에 달합니다. 옆으로 서강이 흐르고 있고, 간간이 기차도 지나고 하니 볼거리가 꽤 됩니다. 하지만 5km에 달하는 평지를 쉬는 시간 포함하여 1시간 반 이상을 걷고 있자니, 살짝 지루한 감이 밀려오더군요.


그렇게 살짝 지루한 감이 밀려올 때쯤, 트레킹팀은 단종의 유배지였던 청령포에 도착했습니다. 다행이었습니다. 트레킹팀은 청령포를 보자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습니다.


청령포는 3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배후면에는 가파른 육륙봉이 놓여 있어 육지 속의 섬으로 불립니다. 그래서 청령포는 지금도 배가 없으면 도달할 수 없는 곳입니다. 

 

단종은 청령포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못했습니다. 계유정난 발생 3년 후인 14566, 단종 복위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고, 주도자들이었던 사육신은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청령포: 청령포의 여름.



어두운 그림자는 단종에게도 드리워지게 되지요. 한명회, 권람 같은 일파들이 단종을 가만히 두었겠습니까? 엄청나게 단종을 몰아붙였고, 결국에는 노산군으로 강봉시켜 영월 땅으로 유배를 보냈던 것입니다. 그때가 14576월이었습니다.


졸지에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은 청령포에 왔다 그해 여름 홍수를 피해 영월 읍내에 있는 관풍헌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러다 그해 10월 하순에 관풍헌에서 숙부인 세조에 의해 사사됐지요. 단종의 짧았던 생애와 4개월 남짓한 영월 유배기간을 되새기며 저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한명회가 없었다면 수양대군이 정권을 틀어잡은 계유정난도 없었을 것입니다. 어찌됐든 수양대군은 정권을 잡았고, 한명회도 부귀영화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우리는 단종 대왕의 뜻을 기리는 곳에 왔습니다. 한명회가 아닌...”

 

계유정난 당시는 한명회가 승리자였습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단종의 자취를 따라갑니다. 한명회를 따라가지는 않지요. 김구 선생의 자취를 따라가는 공주 마곡사 트레킹도 같은 이치입니다. 해방공간에서는 이승만이 승리자였습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김구 선생의 뜻을 기리며 마곡사 트레킹에 나섭니다. 이승만의 자취를 따라 걷지 않는다는 뜻이죠.

 

 



* 청령포: 청령포의 겨울





 

청령포와 관련하여 한 가지 더!

 

기회가 되시면 겨울에 청령포를 방문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보통 청령포는 그 맞은편에서 배를 타고 갑니다. 하지만 겨울에는 그 앞을 흐르는 서강이 꽁꽁 얼게 되지요. 그래서 배를 타고 들어갔던 청령포를 겨울에는 얼음 위를 걸어 입장하게 됩니다.


살살살,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떼며 강을 넘어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입니다. 그렇게 꽁꽁 언 강을 넘다보면 미끄러지듯 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갈지 모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가더군요.

 

단종 임금이 겨울에 유배를 왔으면 저 얼음을 넘어서 다시 한양 땅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명도 짧고, 유배도 짧았던 우리의 슬픈 임금...’

 






* 참가자: 청령포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역사트레킹 참가자.




 

 

방절리에 있는 방절산

 

트레킹 팀은 청령포를 지나 방절산으로 향했습니다. 방절산은 강 건너 청령포 앞쪽에 있는 야트막한 산인데 제가 임의적으로 네이밍을 한 것입니다. 제가 영월에 사는 것도 아닌데, 감히(?) 그렇게 산 이름을 지은 것이죠.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동네 분들을 붙잡고 계속 그 산 이름을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건 이런 대답뿐이었습니다.

 

그 산 이름 없어요. 저쪽 산도 이름 없는데...”

 

그래서 방절산이라고 지었습니다. 그 동네가 방절리였기 때문입니다. 방절(芳節)리의 뜻을 거칠게 풀어보면 꽃다운 나이에 꺾이다라는 정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역시 동네 지명도 단종 임금과 떼려야 뗄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트레킹 코스를 명확히 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네이밍을 한 만큼 누군가 좋은 이름을 제시한다면 방절산은 곧 다른 이름으로 바뀌게 될 겁니다

 




* 방절산: 사진 오른쪽, 아파트 뒤편이 동강과 서강이 합수되는 지점이다.





이름이야 어찌됐든 방절산은 충분히 올라갈 가치가 있는 산입니다. ? 동강과 서강이 합수되어 남한강을 이루는 곳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곳에 올라서면 영월 읍내가 한 눈에 다 들어온답니다. 그러니 충분히 올라갈 만 하지요.


지금은 무인역사가 된 청령포역 탐방을 끝으로 영월강변둘레길 트레킹은 종료가 됐습니다.

지금까지 영월강변둘레길을 걸어보았습니다. 어떠신가요? 당장 배낭을 꾸려 떠나고 싶지 않으신가요? 굳이 영월이 아니어도 괜찮겠지요. 어디든 좋습니다. 봄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면... 우리나라도 갈 곳이 많으니까요.

 


 



* 서강 뚝방길: 뚝방길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역사트레킹 참가자들.





 

영월강변둘레길

 

1. 코스: 선돌 서강 뚝방길 청령포 방절산(가칭) 청령포역(폐역사) 세경대학교

 

2. 이동거리: 10km

 

3. 소요시간: 4시간 30

 

4. 이용불가 계절: 겨울철과 여름철. 겨울에는 눈 때문에 이용불가. 여름에는 수풀이 우거져 등산로가 사라짐. 또한 서강의 범람이 우려됨.

 

 

 

 

 

 

 

 

 

 

    





























외롭게 서 있던 석탑에 부처님이 임하셨네!



이제 곧 석가탄신일입니다. 오랜만에 거창 읍내에 나왔더니 군청 앞 공원과 로터리가 연등으로 장식됐네요.

거창군청 로터리 중앙에는 아림사지5층석탑이 서 있습니다 . 차들이 쉴세없이 뱅글거리며 도는 로터리에 귀중한 문화재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석탑을 볼 때마다 마음이 좀 무거웠습니다.

고찰이었던 아림사는 몽고와 왜구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졌고, 5층석탑 마져 뱅글거리는 자동차들에 의해 찬밥처럼 섞여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짠할 수밖에요.

그래도 석탄일은 석탄일입니다. 외롭게 서 있는 석탑에 조형물이나마 석가모니께서 함께 해주시니 고마운 일이죠. 코끼리도 있어서 더 다채로워 보이기도 하네요. 한지로 만든 조형물들이었지만 그래도 석탄일을 나타내주는데 부족함이 없어보입니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거창의 옛 명칭은 아림이었습니다. 아림사의 명칭도 그것에 연유한 것이죠.


















* 조도: 속초해수욕장에서 바라 본 조도.







파도를 따라 걷는 속초 해변트레킹

지루할 틈이 없는 속초 해변트레킹

  

    

 

동해바다가 보이는 속초로 가자!

 

이번 화는 서울을 떠나서 동해바다 쪽으로 방향을 잡아봤습니다. 목적지는 강원도 속초입니다. 서울-춘천 고속도로의 개통, 미시령터널의 개통 등으로 이제 속초는 서울에서 2시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해안 도시가 되었습니다. 속초시 관광안내 책자에는 ‘1시간 40이라고 적혀 있더군요.


그만큼 강원도 해안 도시로의 접근이 용이해졌다는 뜻이겠지요. 너무 서울 중심적인 발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속초나 강릉 같은 지역들은 서울의 근교 바닷가지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번 트레킹의 특징은 파도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속초의 해변길을 걷기 때문에 속초해변트레킹이라는 이름도 붙여봤습니다. 속초해변트레킹은 해안가를 걷지만 꼭 바다 풍광만 바라보는 트레킹 코스는 아닙니다. 일단 코스 반대편에 우뚝 솟아 있는 설악산의 장엄함을 관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외옹치라는 작은 언덕에도 오릅니다. 갯배도 타고요.

    

 

    


* 고깃배




 

아바이마을과 갯배

 

속초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바닷가 쪽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동명항이 나옵니다. 이 곳에 속초등대전망대가 있는데, 그곳에서부터 트레킹은 시작됩니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속초 시가지와 동해바다가 시원하게 눈에 들어옵니다. 또한 속초해변트레킹 코스를 눈으로 먼저 걸어볼 수도 있습니다.


동명항 탐방을 마친 후에는 아바이 마을이 있는 청호동을 향해갑니다. 아바이 마을은 1.4후퇴 때 남하했다가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피난민들이 정착한 곳입니다. 정착 초기에 함경도 사람들, 특히 노년층이 많았는데 함경도 방언으로 '아바이'가 할아버지란 뜻이기에 아바이 마을이라는 명칭이 널리 쓰이게 됐습니다.


속초는 38선 이북에 있던 지역으로 한국전쟁 이전에는 북한쪽에 속해 있었습니다. 휴전이 됐을 때, ‘동쪽의 38은 북상했습니다. 그러나 서쪽의 38은 하강을 하고 말았지요.


그래서 38선 이북이었던 속초는 현재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2시간이지만, 38선 이남이었던 개성은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개성공단이 폐쇄되었으니 더더욱 그렇게 된 것이지요.






* 갯배





그렇게 실향민들은 조금이라도 고향에 가까운 곳에다 삶의 터전을 잡았던 것입니다. 함경도 도민들이 집단으로 생활을 하다 보니 그곳에는 전통적인 속초지역의 문화와는 다른 음식문화와 언어문화가 자리 잡게 됐습니다.


그런 음식문화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바이순대와 오징어순대입니다. 동네 떡볶이 집에서 파는 일반적인 순대는 돼지 창자 속에 당면을 넣지만 아바이순대는 찹쌀과 선지 등을 넣어 독특한 맛을 연출합니다. 오징어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부터 강원도를 비롯한 동해안 지역에서는 돼지가 귀해 오징어를 이용하여 순대를 만들어왔습니다. 그런 방식의 오징어순대가 아바이마을에서는 함경도식으로 변형이 됐습니다.


한편 아바이마을에는 갯배라는 명물이 하나 있습니다. 갯배는 중앙동과 아바이 마을이 있는 청호동을 이어주는 무동력 선을 말합니다. 양쪽 선착장에 걸려 있는 밧줄을 끌어 당겨 그 힘으로 이동을 하는 것이죠.


아바이마을은 육지속의 섬과 같은 형상입니다. 그래서 이 갯배가 없었다면 5분 정도 걸릴 거리를 30분 정도 돌아가야 했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설악대교와 금강대교가 건설되어 이 갯배가 없어도 시내로 들어갈 수 있지만 그 전에는 이 갯배가 아바이마을 사람들의 다리 역할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 속초해수욕장: 뒤로는 외옹치가 보인다.




 

 

속초해수욕장과 조도

 

아바이마을을 빠져나오는 곳에서부터 본격적인 해변 트레킹이 시작됩니다. 거기서부터가 속초 제일의 명소라고 불리는 속초해수욕장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속초 해수욕장은 황토빛 모래사장이 인상적인 곳입니다.


1km 정도에 걸쳐 질 좋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고, 새들의 낙원이라고 불리는 조도(鳥島)가 눈앞에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습니다. 더구나 바다 반대편에는 우뚝 솟은 설악산이 내려다보고 있어 여느 바닷가 해수욕장과는 다른 운치를 자아냅니다.


사실 속초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은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닙니다. 느릿느릿 걸어도 20~30분 정도면 끝부분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해운대나 경포대 같은 큰 백사장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성이 안 찰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큰 것보다는 아기자기함을, 더불어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속초해수욕장에 더 높은 점수를 줄지도 모릅니다.


속초해수욕장의 끝자락에는 외옹치라는 작은 언덕이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속초해수욕장 일대와 속초 중심부를 조망해 볼 수 있습니다. 푸른 동해바다의 물결과 황토빛 모래사장이 서로 서로의 배경색이 된 모습은 그야 말로 장관을 연출합니다

 





* 외옹치에서 바라 본 속초해수욕장: 현재 외옹치에는 대규모 리조트시설이 들어 서고 있다. 외옹치에는 고구마밭이 많았었는데 이제 그 밭들은 찾아 볼 수 없을 것 같다.





속초해수욕장에서 외옹치를 바라다보면 마치 어떤 산 하나가 바닷가를 향해 뛰어들려는 형상입니다. 평평한 해안가가 계속 이어지다 외옹치 부근에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 나온 모습이라는 뜻이죠. 외옹치(外瓮峙)라는 명칭도 바깥()으로 튀어 나온 항아리() 같은 언덕() 정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속초시 지형도를 보면, 설악산 대청봉에서 동쪽 방면으로 내려온 줄기는 주봉산을 타고 내려오다 바다를 앞에 두고 외옹치가 됩니다. 즉 외옹치에서는 동해바다와 설악산이 서로 만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지형적인 특색 때문인지 외옹치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됩니다. 사실 외옹치 해변은 2005년 전까지만 해도 군사용 철책이 들어서서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습니다.


그런 군사시설은 조선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외옹치의 안쪽은 덕산이라고 불렸는데 그 곳에 봉수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덕산 봉수대는 북쪽으로는 간성 남쪽으로는 지금의 양양으로 봉화를 연결해주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외옹치에 지금은 대규모 리조트 시설이 들어서고 있습니다. 리조트가 건설되면 속초경제가 활성화되겠지요. 또한 일자리 창출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겁니다. 하지만 이제 외옹치에서 밭을 경작하는 모습은 그저 옛 사진으로만 남아 있을 겁니다. 외옹치의 옛 모습은 그저 우리의 기억 속으로만 남아 있게 될 겁니다.

 

    


* 외옹치항의 낮



 

 

작고 아담한 외옹치항

 

외옹치에는 마을도 있습니다. 그런데 현재 외옹치 마을은 바닷가 쪽이 아닌 도로와 인접한 곳에 밀집되어 있습니다. 어촌 마을이라면 조금이라도 바닷가와 가까운 곳에 집을 지어야 이치에 맞을 텐데 그렇지가 않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1984년에 있었던 수해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1984년에 있은 수해로 인해 산사태가 나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습니다. 그 이후 마을은 보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을 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당시 수해는 외옹치 마을의 어로 활동에도 큰 변화를 주었습니다. 1984년 이전에는 '뗀마'라고 불리던 무동력선을 타고 문어를 잡는 재래식 어로 작업을 많이 했답니다. 하지만 수해복구와 함께 항구도 현대식으로 탈바꿈 했고, 무동력선도 동력선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재래식 어로 활동도 자취를 감추었고요

 

외옹치 마을에서 조금만 이동하면 외옹치항이 내려다보입니다. 외옹치항은 작고 아담한 항구입니다. 외옹치항은 외옹치가 숨겨놓은 보물(?)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 보물이 가장 빛날 때는 달빛을 받을 때입니다. 동해바다에 떠 있는 달빛이 은은하게 항구를 감쌀 때, 외옹치항은 그 고운 자태를 드러냅니다.

 

    




* 외옹치항의 밤





 

유명한 대포항 수산시장

 

외옹치에서 유명한 대포항까지는 약 1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행정구역상 외옹치는 대포동에 속합니다.


대포항은 어시장이 잘 발달되어 속초 최고의 항구로 손꼽힙니다. 몇 해 전 현대화 공사가 끝나 대포항은 항구와 어시장이 확 바뀌었습니다. 싱싱한 횟감이 즐비한 어시장과 말끔하게 정비된 접안 시설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구경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해안트레킹에서 어시장탐방으로 변형이 된다고 할 수 있겠네요. 대포항 일대를 다 걸어보려면 1시간 이상이 소요될 정도로 항구와 어시장은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대포항과 어시장 탐방을 마치면 약 8km에 달하는 속초해변트레킹이 종료가 됩니다.


속초해변트레킹의 특징은 바다만 따라가는 코스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바다를 끼고 걷는 길은 처음에는 드넓은 바다를 볼 수 있어 시원한 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다는 2차원 적입니다. 아기자기한 멋이 없다는 뜻이죠.


그래서 바닷가를 끼고 걷다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지루한 감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속초해변트레킹은 갯배도 타고, 외옹치도 오르고, 설악산도 관망할 수 있습니다. 물론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해변도 걷고요. 한마디로 지루할 틈이 없다는 뜻이죠!

    

 

    


 

속초해변트레킹

 

1. 코스: 시외버스터미널 동명항(속초등대전망대) 아바이마을(갯배) 속초해수욕장 외옹치 대포항


2. 이동거리: 8km


3. 예상시간: 3시간 30(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이곳은 백두대간 삼봉산이 내려다보이는 경남 거창군 고제면입니다. 덕유산이 가까운 경남 서부권이죠.

이곳도 어제 강한 바람에 의해 피해를 입었습니다. 시설물이 내려 앉고 유실수가 꺾이고... 제가 있는 거창귀농학교도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고추 농사를 지으려고 만들어 놓은 비닐하우스가 무너져 내린 것이죠.

얼마나 바람이 세게 불었는지 하우스 뼈대가 꺾이기까지 했네요.

어제 바람은 태풍이 아니었지만 태풍만큼 큰 피해를 농가들에게 안겨 준 것 같습니다. 농업 경쟁력 저하 등으로 인해 가뜩이나 주름살이 깊은 농촌인데... 이번 같은 강풍 피해는 구제를 받을 수 없을까요? 참 답답합니다.







































뱀과 벌 피하기!


안전한 아웃도어 활동을 위하여




계절의 여왕인 5월. 야회활동하기 좋은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맛나는 도시락을 싸서 떠나는 봄소풍! 생각만해도 기분이 설렙니다.
풀밭에 앉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맛있게 얍얍...!

그렇게 즐거운 야외활동을 위해서는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자외선 차단, 여분의 옷가지 준비 등등... 준비할 것도 많고, 염두해야 할 것도 많습니다.

야생동물들도 주의해야 합니다. 현수막의 내용처럼 뱀을 발견했을 때는 당황하지 말고
그 자리를 신속히 벗어나는 게 상책입니다. '캬악'하고 소리를 지르거나 돌을 던져
뱀의 '성질'을 건드는 건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뱀은 생각보다 공격성이 강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먼저 위협당하지 않으면 선제 공격을 하지 않더군요. 저 꽃뱀 사진은 전남 장성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제가 바로 옆에서 사진을 찍었는데도 느긋하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더군요. 물론 저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촬영을 했었지요.

뱀보다는 벌이 더 공격성이 강합니다. 괜히 위협하지도 않았는데 벌침을 놓고 가는게
그 녀석들입니다. 선제공격을 한다는 뜻이죠. 더군다나 벌들은 떼로 달려드니 그 위험성이 더 증가될 수 있죠.

벌들의 공격에서 벗어나려면 야외활동을 시, 짙은 향수를 뿌리지 마세요. 향기가 나는 음료수도 가급적 휴대하지 마세요. 만약 향기나는 음료수를 드셨다면 벌들에게 노출되지 않게 마개를 꼭 닫거나 비닐봉지로 밀폐를 시키세요.

뱀이든 벌이든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조심하다보면 즐겁고 쾌적한 야외활동을 즐길
수 있을 겁니다. 기왕하는 아웃도어 활동 안전하게 하면 좋잖아요!











산책하다 만난 19금?





















앗! 느긋하게 산책을 하려고 숲길에 들어섰더니... 생각지도 못한 19금(?) 광경을 목도하게 됐답니다! 숲 속에서 만난 나체 요정들인가요? 시원시원한 신체미를 자랑하고 있네요.

탄탄한 복근을 자랑하고 있는 저 조형물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불쑥 튀어나온 제 똥배가 부끄럽기까지 하더군요. 그래서 지지부진하게 질질 끌어오던 똥배 줄이기 프로젝트를 다시 풀가동 하기로 결심했답니다.

하여간 산책하러 숲길에 들어섰다 19금 조각상을 만나고, 거기에 더해 똥배 줄이기 결심까지!  역시 숲은 우리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곳인 듯합니다.

아참 이 곳이 어디냐고요? 이 곳은 그 유명한 충주의 탄금대입니다.















* 피스테라 가는 길. 대서양에 접한 스페인의 한 어촌 마을. cee라는 곳이다.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가는 길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 두 번째 이야기

 

 

 

이번 화는 전편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이란 제목에서처럼, 저는 통상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는 상당히 도발적인 내용을 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산티아고지우개로 지워버린 셈이 됐으니까요.


제가 그런 이야기를 작성한 건 산티아고 순례길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조만간 다시 산티아고 순례길을 탐방할 예정입니다. 다른 순례자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그 길을 걸으며 많은 감흥을 얻었고, 큰 마음의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만큼 저도 산티아고 앓이를 했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이란 도발적인 글을 썼을까요? 간단합니다. 제대로 알고 가자는 의미에서 글을 썼습니다. 기왕 돈 들여, 시간 들여가는 길이라면 제대로 알고 가야하는 게 아닐까요? 그래야 더 알찬 트레킹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 피스테라 가는 길. 조가비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징물이다.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피스테라(Fisterra)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서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스페인의 땅끝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의 시신은 나룻배에 실려 에스파냐 땅에 닿게 됐는데 그 첫 번째 장소가 바로 피스테라였다고 합니다. 많은 여행책자들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지요.


어쨌든 그런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에다 땅끝이라는 지정학적인 의미가 더해진 곳이기에 피스테라는 순례여행이 아니더라도 꼭 한 번 방문해 볼 가치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도 그렇게 피스테라를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피스테라로 가는 시작점은 산티아고 대성당입니다. 대성당은 순례길의 종료점이기도 했지만 땅끝으로 가는 시작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곳을 보고 있자니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이 실감나더군요. 새삼스레 인생은 끝없는 여정이라는 말도 떠올랐습니다.

 

시작 할 때는 이게 언제 끝나나, 하고 막막해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마침표를 찍게 되고, 그러다 또 다른 시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예전 국내여행을 할 때도 그랬습니다. 시작할 때는 막막했지만 여행이 종료가 될 때는 성취감을 느끼는 동시에 이미 다음 여행의 경로를 머릿속으로 그리곤 했었지요.

    






* 산티아고 순례길.







 

해양과 산맥이 공존하는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

 

피스테라로 가는 길은 인적도 드물었지만 마을 자체도 듬성듬성 있었습니다. 조금은 척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개발이 덜 된 곳도 있었습니다.


피스테라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속한 갈리시아 지방은 스페인의 북서부에 위치해 있는데 서쪽으로는 대서양, 위쪽으로는 비스케이만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지형은 산지 형태를 띠고 있는데 험준한 산악지형이라기보다는 구릉형 산지가 층층이 쌓아 올려진 형태였습니다

 

전편에도 언급했듯이 이 지역은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을 때도 그 침략의 사슬에서 벗어나 있던 곳입니다.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온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은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고, 이에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반도의 서북부에서 아스투리아스(Asturias)를 건립하여 가톨릭 왕국의 재건에 나서게 됩니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서북부 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들어서게 됩니다. 이곳은 첩첩산중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산악지형을 띠고 있기에 효과적인 방어가 가능했습니다

 

대서양에 가까워지는 만큼 기후변화가 더 심해졌습니다. 비가 더 심하게 오락가락했습니다. 우리나라 여름철 날씨도 변덕스럽지만 여기에 오면 명함도 못 내밀 것 같더군요. 하루에도 몇 번이나 호랑이가 장가를 갈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인지 무지개도 무척이나 많이 봤답니다. 평생 본 무지개보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본 무지개가 훨씬 더 많았을 정도였습니다.

 

    






* 피스테라. 큰 네모는 산티아고 콤포스텔라를, 작은 네모는 피스테라를 표시한다. 구글지도 변형.





 



피스테라와 야고보

 

앞서 언급한 것처럼 피스테라는 스페인의 땅끝입니다.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대개 그곳을 유럽대륙의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피스테라를 소개하는 일부 책자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피스테라는 제가 반복해서 기술한대로 스페인의 땅끝이지 유럽 대륙의 땅끝은 아닙니다.


정확히 유럽 대륙의 땅끝은 호카 곶(Cabo de Roca)입니다. 호카 곶은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서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깎아질 듯 서 있는 해안절벽이 일품인 곳이지요.


육지에서 바다쪽으로 툭 튀어나온 지형을 말할 때 두 가지로 분류를 해서 말합니다. 튀어나온 규모가 크면 반도가 되고, 작으면 이 됩니다. 유명한 포항의 호미곶을 연상하시면 될 것 같네요. 북한 쪽에서는 장산곶이 유명하지요.







* 피스테라. 광활한 대서양이 펼쳐지는 곳. 가슴이 확 트이는 곳이다.








피스테라에 대한 환상(?)을 한 가지 더 깨볼까요. 저는 전편에 야고보 성인은 이베리아반도에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서술했습니다. 그 서술을 따라가 보면, 야고보의 시신이 담긴 배가 예루살렘에서 피스테라까지 옮겨왔다는 이야기도 허구일 가능성이 큽니다. 뻔한 당시의 항해 기술은 둘째 치고, 사역을 하지도 않은 곳에다 자신의 시신을 묻어 달라는 전도자는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피스테라가 왜 야고보와 연결이 됐을까요? 아무래도 야고보의 존재를 더욱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피스테라가 동원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로마인들은 피스테라를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끝에서 야고보 성인의 시신이 도착하여 별들의 들판이라는 산티아고 콤프스텔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는 식으로 스토리텔링이 정리될 수 있겠지요. 이런 전개 과정 자체가 여행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만약 로마인들이 세상의 끝을 호카 곶으로 판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럼 호카 곶과 야고보가 연결이 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루하루 잘 사는 것이 진정한 챔피언!

 

환상이 다 깨졌다고 해도 피스테라는 그 자체로 무척 매력적인 곳입니다. 넘실대는 파도와 해안절벽들을 따라 가다보면 땅끝 등대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대서양의 모습은 일품 중에 일품입니다. 특히 이곳의 노을은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피스테라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자신의 신발이나 옷가지를 태워 대서양에 띄우는 의식을 행합니다. 더 이상 갈 수 없으니 자신의 것들을 불태우는 것이죠. 실제로 등대 근처 곳곳에는 순례자들이 태운 신발과 옷가지의 흔적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피스테라는 그런 장소였습니다. 무언가 의식을 행하거나 다짐을 하게 만드는 장소였다는 것이죠. 마치 해남 땅 끝에 가면 무언가 마음을 다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요. 저도 대서양 바다를 보면서 한 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하루하루 잘 사는 것이 진정한 챔피언!’

 

난생 처음 보는 대서양 앞에서 다짐을 한 말치고는 무척 소박한가요?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작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큰일도 못한다고 하잖아요. 허상과도 같은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바로 앞에 있는 일들을 척척해내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라는 것이죠. 지나간 과거를 괴롭게 되새기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억지로 끌어와서 현재를 낭비하지 말자는 뜻이기도 합니다.

    




* 피스테라 표지판


 




 

남북한 순례자들이 함께 산티아고 길을 걷는다면?

 

순례길은 화합의 길이었습니다. 지역감정으로 유명한 마드리드, 카탈로니아, 바스크 사람들이 서로 정답게 트레킹을 하는 곳이 순례길이었습니다.


스페인 내국인들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앙숙이었던 아일랜드와 영국, 그리고 러시아와 에스토니아(발트3) 청년들이 서로 의지를 하며 걷는 곳이 바로 순례길이었습니다. 도보여행을 하는데 국적이니 지역이니 하는 것들은 다 소용이 없을 테지요.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 그게 바로 순례길에 녹아 있는 정신일 겁니다. 그런 정신들이 길 위에 뿌려지고, 뿌려지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사랑하는 것이겠지요.


저도 짧게나마 일본인 친구들과 즐겁게 순례길을 걸었답니다. 니가타 출신이라는 처자는 저에게 한국말로 오빠라고 칭해주더군요.

 

나 아저씨인데...’

 

이 말을 표현할 방법은 없고, 기분은 좋고 하니, 저는 그들에게 강남스타일의 말춤을 춰줬습니다. 그들도 따라 추더군요. 아주 즐겁게!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북한 순례자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된다면 무척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남한과 북한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순례길을 걷는다면 그것 자체로 좋은 일일 것이겠지요. 함께 격려하고, 도우며 길벗을 하고... 힘들 때는 함께 아리랑도 부르고!

 

 



* 진정한 챔피언. 이 친구의 왼쪽 다리를 보라! 의족이다. 하지만 사진에도 나와 있듯이 그의 표정은 아주 밝다. 자신을 북부 빌바오 출신이라고 말한 이 친구는 자전거로 이베리아 반도를 투어하고 있다고 했다. 저런 청년들이 있기에 순례길이 아름다운 것이다. 순례길 곳곳에 뿌려진 선한 마음과 인간애가 산티아고 순례길로 더 많은 이들을 불러모으고 있는 것이다.


















                                          차령 옛길을 가다!



차령 옛길을 다녀왔습니다. 쌍령 옛길도 다녀왔습니다. 차령은 천안시 광덕면과 공주시 정안면을 연결하는 고개입니다. 고려 왕건이 언급한 훈요 10조에 등장하는 그 차령입니다. 쌍령은 차령 바로 옆에 있는 고개입니다.

차령은 약 190미터 정도로 해발은 그리 높지 않지요. 하지만 호남대로 상에 있는 고개 중에서 가장 험한 곳 중에 하나입니다. 실제로 차령 옛길은 등산을 방불케 할 정도로 가파른 구간이 아직까지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가파른 구간이기에 있기에 역설적으로 옛길이 잘 보존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옛길 걷기가 유행이지요. 그런데 가끔 그 옆에 난 임도길을 옛길과 혼동하시는 분들이 있더군요. 임도길도 도로라 산을 깎고 만들 수밖에 없지요. 또한 차량의 등판력을 고려해 길의 경사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간간이 도보여행자의 시야각에서 벗어날 정도로 구불구불하게 되는 것이죠. 횡각이 크니 코너를 돌아야 다음 구간이 보이는 것이죠.

하지만 옛길은 그런 고려를 할 필요가 없으니 구불구불함이 덜 한 것이죠. 실제로 옛길의 횡폭은 크지가 않습니다. 그 범위가 한 눈에 다 들어올 정도로 뻔하다는 것이죠. 임도길의 횡폭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답니다.

옛길이든 임도길이든 우리 같은 도보여행자들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존재들입니다. 왜? 걷기 좋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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