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장소에 울려퍼진 친일파 옹호론

 

 

높아진 목소리... 온라인 논쟁을 오프라인으로 옮겨온 듯

 

15.08.14 16:58   최종 업데이트 15.08.14 16:58

 

 

 

 

 

 

 
▲ 서대문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 걸린 대형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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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이 친일을 하고 싶어서 한 거겠어. 상황이 그래서 그런 거지."
"그건 아니죠. 시대상황으로 돌리기에는 친일파들이 나쁜 짓을 많이 했잖아요."
"상황을 이해해야지! 만약에 ○○씨가 일제시대에 살고 있어, 먹고 살아야 하잖아. 그럼 어떻게 하겠어? 일본놈들이랑 등 돌리고 살겠어? 그때 살았으면 그럴 수밖에 없는 거야. "
"선배님 말씀은 그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거의 다 친일파가 되야 한다는 말씀이잖아요. 그런데 그때 독립군은 뭐지요? 항일운동한 사람은 뭐가 되는 거죠?"

 


제가 집필실(?)로 이용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한 대학교의 휴게실이 바로 그곳입니다. 글 쓸 공간이 없어 도서관으로, 카페로 옮겨 다녀야 하는 글쟁이들보다는 제 처지가 훨씬 나을 겁니다. 와이파이도 빵빵 터지고, 에어컨도 시원한 공간에서 물건들을 '쫘악' 펼쳐놓고 글을 쓰니까요.  

하지만 휴게실은 휴게실입니다. 통닭 시켜 먹는 이들,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는 이들... 식사 시간이 되면 휴게실은 맛있는 음식 냄새로 채워집니다. 그러면 글이 잘 안 써집니다. 저도 배가 고프니까요. 그래도 후각을 혼란시키는 음식 냄새는 그나마 낫습니다. 문제는 역시 청각을 혼동시키는 것입니다.

 

 

 

나의 '집필실'인, 어느 대학의 휴게실에서

 

 

이 대학은 오픈 대학교입니다. 그래서 학우들의 연령대가 아주 다양합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20살부터 백발이 성성한 분들까지... 주축은 50~60대 학우들이 이루더군요. 그래서 대화의 내용도 일반 대학생들이 하는 말들과는 많이 차이가 납니다. 일반 대학생들이 스펙과 취업 걱정으로 대화 내용을 채운다면, 이곳의 학우들은 자신의 아파트 값이 어떤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어떤지에 대한 문제들을 입에 올립니다.

부동산이나 건강 문제들은 거의 비슷한 결론으로 달려가는 가더군요. 딱히 첨예하게 부딪힐 부분도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하나라도 더 정보공유를 하려고 '코드'를 맞추더군요. 하지만 정치 문제가 나오면 양상은 달라집니다. 서로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서로 갈등을 빚고 얼굴을 붉히기까지 합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서 그런지 요즘에는 광복, 일제청산, 이승만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들리더군요. 하여간 그렇게 첨예한 이야기들이 대화 테이블에 오르면 저도 본의 아니게 그 대화에 '참여'하게 됩니다. 휴게실이 지하에 위치해 있어 조금만 목소리를 높여도 그 소리가 다 제 귀에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 때부터는 제 몸은 노트북 앞에 있지만 마음은 그 대화 테이블에 앉게(?) 됩니다. '동석'하기 싫은데 '동석'하게 되는 겁니다. 한마디로 글쓰기 작업은 잠시 중단을 하게 되는 것이죠.

"요즘 사람들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뭐라뭐라 안 좋게 이야기를 하지만, 난 이승만에 대해서 달리 봐야 한다고 봐. 그때 정부를 안 세웠으면 어떻게 되겠어. 한반도가 적화가 되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지."
"그럼 이승만 세력이 친일파 중용한 거랑 반민특위 해산한 거랑은 어떻게 보십니까?"

 

 

 

 

 

 


온라인 논쟁을 옮겨 놓은 것 같은 휴게실 논쟁

 
▲ 소녀상 위안부소녀상. 일본대사관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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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서두에 언급한 대화는 그렇게 계속 이어졌습니다. 총 네 분이서 이런 대화를 나누셨는데 나이가 많으신 분은 이승만과 친일파에 대해서 옹호를 하는 입장이었고, 상대적으로 젊은 분은 그에 대해서 반박을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때는 나라가 새로 세워졌어. 당연히 인재가 필요하잖아. 그럼 누가 그 일을 하겠어? 일제시대에 일 좀 했다고 그 사람들을 안 쓸 수 있겠어."
"그게 바로 친일파들이 주로 주장하는 내용 아닙니까..."
"위쪽으로는 공산당이 꽈리를 틀고 있었고, 그래서 실제로 전쟁도 났잖아. 그런데 인재는 필요했고.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니깐!"
"그게 바로 전형적인 그들의 주장이라니까요!"

 


이미 서로의 목소리는 높아졌고, 주장은 계속해서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 대화에 깊숙이 '참여'를 하게 됐습니다. 당장이라도 몸을 이끌고 그 테이블에 가서 식민지근대화론과 같은 친일 옹호론을 격파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친일 문제를 반박하는 분에게는 좀 더 내공을 쌓아 친일 옹호론을 꼼짝 못하게 하라고 조언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마음만으로 그렇게 한 것이지요.

이 분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일제 잔재청산과 관련하여 온라인에서 '피터지게' 싸우는 댓글들이 생각났습니다. 어쩌면 휴게실에서의 대화들은 온라인에서 오가는 논쟁들을 오프라인으로 옮겨놓은 거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실제로 나이가 많았던 분의 논리는 인터넷에서 친일을 옹호하는 댓글의 내용과 거의 일치했으니까요. 대신 잘 아는 동아리 멤버들이었기에 서로 예의는 지키는 모습이었습니다. 나중에는 2학기 수강신청에 대해서 서로 '코드'를 맞추더군요.

 

 


원죄론과 친일론

전 그 대화를 보면서, 친일을 옹호하는 측이 '우리안의 친일', 즉 '친일의 범위 확장'에 전력을 기울인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생계형 친일과 악질 친일을 하나로 묶어버려,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에서 생계를 꾸리던 모든 이들에게 '원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일제 잔재는 전부 아니면 전무 형식으로 프레임이 형성되겠지요. 당연한 일이겠지만 신생 독립국에서 전무가 가능하겠습니까?

이렇듯 '친일 범위의 확장'은 악질 매국노들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것이죠. 윤동주도 창씨개명을 했고, 북한도 정권 수립 초기에 친일파가 몇몇 요직에 기용됐다, 그러니  일왕에게 혈서를 쓰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 되겠냐?, 하는 식이 되어 버립니다.

휴게실에서 어깨너머로 들은 이야기를 가지고 제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신다고 질책하실 분들이 있을 겁니다. 나이 드신 분이 큰 의중 없이 흘린 말에 과도한 해석을 한다고 타박하실 분들도 있을 겁니다.

저는 이런 것들을 보고자 합니다. 친일매국노들의 뿌리가 깊은 만큼 자신들을 지키는 논리도 상당하다는 것을요. 그 논리가 타당한지 개연성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파급력이 중요한 것이겠죠. 그 파워가 중요한 것이겠죠. 대학교 휴게실이라는 공공장소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친일매국행위를 옹호하는 논리들이 입에 오르고 있다면 그 파워는 상당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추신) 지난 12일,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서대문 형무소를 찾아서 무릎을 꿇고 사죄를 했습니다. 전직 총리라는 한계가 있지만 분명 의미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비해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인 박근령씨는 일본 우익들이 좋아할 말들을 일본에서 쏟아내고 왔습니다.

 

두 사람의 행위를 보면 참 많은 것을 떠오르게 합니다. 광복절을 앞두고 동생이 망동된 행동을 했는데도 사과 한 마디 없는 대통령을 보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사태의 경중을 인지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요?
어쨌든 15일은 광복절입니다. 이날만큼은 태극기를 가슴에 새겨보고, 경건하게 보내야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만석중놀이를 볼 수 있는 거창아시아1인극제!

 

제26회 <거창아시아1인극제> 참관기

 

15.08.11 15:19  최종 업데이트 15.08.11 15:19

 

 

 

 

 

▲ 거창아시아1인극제 필자가 '이효리'라고 부른 자원활동가가 동네 어르신에게 잔치국수를 직접 말아드리고 있다. '이효리' 를 비롯하여 총 6명의 대학생 활동가가 열심히 맡은바 소임을 다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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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더웠다. 강렬한 햇살이 얼굴을 덮치듯 내리쬐었다.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땀이 안경에 튀어 시야가 흐려졌다. 가뜩이나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는데, 그래서 발걸음이 꼬이는데 앞까지 잘 안보이니...

"작년엔 비가 와서 공연 준비가 어려웠고, 올해는 폭염이 스태프들을 잡는구나!"

 

 

 

 

거창귀농학교에서 펼쳐지는 '거창아시아1인극제'

 


필자가 스태프로 참여한 행사는 올해로 26회째를 맞는 '거창아시아1인극제'다.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비슷한 시기에 개최되는 '거창국제연극제'와 구별되는 행사로 백두대간 삼봉산이 올려다 보이는 거창귀농학교에서 행해진다.

거창귀농학교는 삼봉산문화예술학교라고도 불리는데 폐교를 리모델링한 곳으로 거창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고제면에 위치해 있다. '거창국제연극제'가 수승대라는 명승지에서 개최되는 큰 규모의 연극제라면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거창 읍내에서도 20km 정도 떨어진, 궁벽진 곳에서 행해지는 행사라는 뜻이다.

공연장의 규모뿐만 아니라 행사비용도 비교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거창아시아1인극제'에 참여한 참가자들은 '거마금' 정도만 받고 공연을 진행했다.

 


 

 

 


 
▲ 만석중 만석중 인형. 목각인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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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작은 산골짜기 연극제로 '쪼그라'들었지만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국내 유일의 모노드라마(monodrama) 축제다. 현재의 '거창아시아1인극제의 기원은 1988년, 서울 바탕골 소극장에서 펼쳐진 '아시아1인극제'에서 찾을 수 있다. 1회 대회를 치른 이후 '아시아1인극제'는 아시아 각국을 돌며 매해 개최되었다. 이후 1996년부터는 충남 공주에 있는 공주민속박물관이 주관이 되어 공연을 하게 된다. 이에 명칭도 '공주아시아1인극제'로 바뀌게 된다.

'아시아1인극제'가 현재의 체제로 자리를 잡은 건 2007년 이후부터였다. 거창의 진산인 삼봉산의 아래에 위치한 거창귀농학교에서 모노드라마 축제가 열리게 되니 이에 명칭도 '거창아시아1인극제'로 변하게 된 것이다.

 

 

 

 

 


 
▲ 만석중놀이 운심게작법을 추고 있는 연극인 한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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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볼 수 없는 만석중놀이

 


지난 3월 5일. 리퍼트 주한미국 대사가 김기종 '우리마당' 대표의 피습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주한 미국 대사의 피습이란 미증유의 사건이 발생해서인지 당시 언론들은 김기종과 관련된 이력들을 앞 다투어 보도했다. 그런 보도들은 거의가 김기종의 기이한 행적들에 대해서 초점이 맞추어졌다. 문제는 그런 보도들로 인해 애꿎은 우리전통놀이까지 도매금으로 격하됐다는 점이다. 김기종은 '우리마당'이외에도 '만석중놀이보존회'의 대표직을 겸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만석중놀이까지 싸잡아 질타를 당했던 것이다.  

만석중놀이는 고려시대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나라의 전통 무언극이다. 개성 일대에서는 초파일을 전후하여 사찰 부근에서 그림자놀이가 펼쳐졌는데 이 놀이가 바로 만석중놀이다. 어두운 밤, 사찰 인근에 큰 광목천을 걸어 놓고 횃불을 피워 용, 잉어, 사슴 같은 종이 인형의 그림자가 비추게 하여 놀이를 진행했던 것이다.  알록달록한 색깔이 입혀진 인형들, 즉 십장생들이 그려진 인형들이 광목천에서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면서 이야기가 흘러간다.

만석중놀이의 주인공은 만석중이라는 나무 인형이다. 십장생 인형들이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만석중 인형은 '탕'하고 소리를 낸다. 이 소리는 만석중을 조종할 때 나는 소리로 만석중 인형의 조종은 다른 인형들과 마찬가지로 광대가 한다. 만석중 인형이 내는 '탕'하는 소리는 목탁 소리 같기도 하고, 죽비소리 같기도 하다. 어리석은 무지몽매함에서 벗어나 세상을 직시하라는 경고처럼 들리기도 한다.

 

 

 

 


 
▲ 만석중놀이 인형을 조종하고 있는 광대들. 인형의 색깔이 참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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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중놀이의 대미는 운심게작법이라는 승무다. 용과 잉어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클라이맥스 단계에서 운심게작법이 펼쳐진다. 운심게작법을 끝으로 40여 분에 걸쳐 올려진 만석중놀이는 끝이 난다.

만석중놀이는 쉽게 볼 수 없는 공연이다. 무대 세팅의 번거로움은 둘째 치고, 이 놀이를 행할 광대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돈을 들고 대학로를 가 봐도, 국립극장을 가 봐도 '티켓'을 구할 수가 없다. 만석중놀이를 재연할 수 있는 광대들은 우리나라에서도 극히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운이 좋았는지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만석중놀이를 감상할 수 있었다. 올해는 아예 무대 뒤편에 시선을 두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십장생 인형들이 어떻게 조정되는지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실내 공연이었다면 어림없는 이야기겠지만 실외공연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스태프 아닌가? '거창아시아1인극제'의 스태프로 참여한 '특권'을 톡톡히 누렸던 셈이다.

 

 

 


 
▲ 황해도 작두굿 마고당 서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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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두 좀 타 봤수? 황해도 작두굿!

역시 사람의 취향은 제각각이었다. 필자는 만석중놀이에 방점을 찍어 시선을 고정시켰다면 대다수의 관객분들은 황해도 작두굿에 열광을 하는 분위기였다.

마고당 서문정이 행한 황해도 작두굿은 남한에서는 보기 드문 황해도 지역의 굿판이라고 한다. 요즘에는 작두를 타는 모습이 흔하게 보이지만 예전에는 꼭 그렇지 않았다. 통상 북쪽 지방인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작두굿이 많이 벌어졌고, 남쪽으로 갈수록 작두를 타는 무속인들이 적었다고 한다. 무당이라고 모두 작두를 타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황해도 작두굿은 고정형 작두만 이용하지 않고 이동식 작두도 사용했다. 그러니 다양한 변형방식도 등장했다. 서문정은 발뿐만 아니라 손목과 배, 심지어 목에까지 작두를 들이댔다. 작두 위에 목을 올려놓으니 마치 '기요틴(단두대)'에 머리가 오른 듯했다. 한 여름 밤에 호러쇼(?)가 펼쳐졌다고나 할까? 이렇게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내던졌으니 황해도 작두굿의 인기는 상당했다.

독자들 중에는 작두가 가짜가 아니냐고 의구심을 품으실 분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필자도 그런 의구심을 품었다. 그래서 눈을 크게 뜨고 작두의 상태를 관찰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가짜 작두가 아니었다. 나중에 뒤풀이에서 마고당 서문정 선생의 상처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온 몸이 상처 투성이었다. 발에도, 팔에도, 심지어 배와 목까지... 역시 세상에 그냥 되는 일은 없는 듯싶었다.

No pain, No gain!

 
▲ 전통공연예술단 난타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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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는 문화버스를 타고, 거창으로?

박일화 선생의 창작 춤 공연, 전통공연예술단의 타혼 공연 등이 이어졌고, 그렇게 26회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잘 마무리됐다. 달빛이 아름답게 쏟아지는 거창의 한 시골마을에서 행해진 모노드라마 축제는 내년을 기약하며 막을 내렸다.

"그래도 작년보다 관객이 더 많이 들었어요."

이 말이 참 고마웠다. 낮에 흘린 땀방울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니까. 내년 27회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즐기는 축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문화버스'가 와도 좋을 것 같다. 1박 2일로 연극제를 즐길 수 있는 문화버스 말이다. '문화버스'를 타고 와서 공연도 공짜로 보고, 공짜로 밥도 얻어  먹을 수 있다면 그거 훌륭한 여름휴가 아닌가?

 

 

 


 
▲ 창작무 박일화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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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시장 옛날엔 수산시장이었다?

 

[서울 탐방] 칠패 시장과 남대문 시장

 

오마이뉴스 | 곽동운 

 

 입력 2015.08.01 15:20 | 수정 2015.08.01 15:24

 

 

 

 

▲ 남대문 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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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남대문시장이 예전에는 수산물 시장이었다고요?"

"콕 집어서 수산물만 판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수산물이 에이스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요? 그거 메르스만큼 쇼킹한 말이네요!"

 

메르스가 한참 맹위를 떨치던 지난 6월경, 서울 중구 남대문시장 일대를 탐방하며 지인들과 나눈 대화 중 일부다. 당시 남대문시장 일대는 썰물 빠지듯 사람들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느낀 점이 하나 있었다. 사람들이 우리나라 재래시장에 대한 역사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재래시장 탐방을 좋아하는 이들을 만나 봐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이런 말을 했던 분들도 있었다.

 

"대형마트 이전에 있던 게 재래시장 아니에요?"

 

 

 

▲ 남대문시장 남대문시장 로고
ⓒ 곽동운

 

 

 

 

호남지역에서 최초로 나타난 장시

 

이 땅에 장시(場市)라 불리는 시장이 출현하기 시작한 건 14세기 말 무렵이었다. 처음 시장이 개설된 지역은 전라도 나주 일대였다. 나주는 영산강을 끼고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그래서 예로부터 농업생산물이 풍부했다.

 

영산강을 거슬러 온 것들도 있었다. 바로 인근 바다에서 잡힌 수산물들이었다. 곡식과 수산물이 집산되고, 거기에 지리산 부근에서 채집된 임산물까지 더해지니 영산강 일대는 장시 출현의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서해바다에서 잡힌 물고기들은 나주의 영산포까지 실려 왔고, 그 생선들은 나주평야에서 생산된 곡식들로 교환됐다.

 

영산포까지 실려온 물고기들 중에는 홍어도 있었다. 흑산도 부근에서 잡힌 홍어가 내륙 안쪽에 있는 영산포까지 오려면 시일이 필요했고, 그러다 보니 삭힌 홍어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삭힌 홍어 요리는 나주 영산포의 명물이 됐다.

 

 

 

 

▲ 남대문시장 남대문시장
ⓒ 곽동운

 

 

 

 

백성들의 숨통을 트이게 해주었던 장시

 

16세기가 되면 장시는 5일장, 혹은 10일장 형태를 띠며 전국적으로 뻗어나갔다. 장시의 출현과 확장은 농업생산성의 발달과 관계가 깊다. 농업기술의 발달로 생산물이 풍부해지자 잉여 산물이 생기게 됐고, 그 잉여 산물을 농민들끼리 교역하는 방식으로 장시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대형마트 이전에 재래시장'이 있던 게 아니라 사회적인 분위기가 무르익게 되자 하나 둘씩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물산이 모이다 보니 '떡고물'이라도 떨어졌던 것일까? 장시는 흉년이 들었을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시가 농민들의 호구책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장시에 들러 붙어 있으면 국밥 건더기라도 얻어먹을 수 있었다. 한편 가렴주구(苛斂誅求)를 피해 도망쳐 온 농민들에게도 장시는 귀중한 '쉼터'역할을 해주었다.

 

그래서 조선 왕조는 장시를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 그치지 않고 금지령도 수시로 발령했다. 하지만 대세를 누가 꺾을 수 있겠는가? 막는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었다. 장시의 성립과 발전은 순조류를 타고 역사적 흐름의 하나로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 남산공원 서울성곽 남산 구간. 남대문시장과 남산공원을 묶어서 탐방을 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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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의 큰 시장이었던 곳, 칠패 시장

 

조선시대 한양에서 가장 큰 시장 세 곳을 꼽으라고 하면 칠패, 배오개, 종로가 꼽혔다. 이 중 육의전을 중심으로 한 종로를 제외하면 칠패와 배오개는 아직까지도 그 명맥이 굳건히 이어지고 있다. 칠패는 남대문 시장으로, 배오개는 동대문 시장으로 연결됐다.

 

칠패 시장은 원래 소의문이라고 불렸던, 서소문 밖에 펼쳐진 시장이었다. 서소문은 서대문(돈의문)과 함께 일제 강점기 때 철거가 된 상태라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 그 터에서 조금만 더 가면 서소문 공원이 있는데 그 일대가 칠패 시장이었다. 서소문공원과 남대문은 도보로 10분 남짓 걸린다. 한마디로 예전 칠패 시장은 남대문 쪽으로 옮겨와 계승됐다고 보면 된다.

 

그 옛날 칠패 시장은 다양한 물산을 자랑했다. 소금, 새우젓, 채소, 죽세공품 등등... 하지만 칠패 시장의 에이스 중에 에이스는 단연 물고기였다. 1844년에 한산거사라는 사람이 <한양가(漢陽歌)>라는 풍물가사를 썼는데 그곳에 칠패 시장에 대해 이렇게 묘사를 했다.  

 

 

우리나라 소산(所産)들도 부끄럽지 않건마는
타국 물자 교합하니 백각전(百各廛) 장할시고.
칠패의 생선전에 각색 생선 다 있구나.
민어 석어 석수어며 도미 준치 고등어며
낙지 소라 오적이며 조개 새우 전어로다.

 

 

<한양가>에서 언급됐듯이 당시 칠패 시장에서는 마포나루에서 올라온 각종 해산물들이 파닥거리고 있었다. 근원을 따지면 칠패 시장의 어물전들은 노량진수산시장보다 훨씬 더 오래된 연혁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메르스 사태가 일정 정도 가라앉은 7월경에 다시 남대문시장을 찾았다. 시장은 다시 활기를 띠고 있었다. 양 손 가득 물건을 들고 있는 외국인들의 모습도 많이 보였다. 결국 남대문시장이 메르스를 이긴 것이다!

 

현재 남대문시장에는 칠패 시장의 비릿한 생선 냄새가 진동하지 않는다. 대신 '남대문시장에는 핵무기와 탱크 빼고 다 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없는 게 없는 곳이 됐다. 시간이 흘러 위치도 약간 달라지고, 취급하는 물품도 달라졌지만 그 명성은 계속 이어져 왔던 것이다. 또한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 여행 길잡이: 남대문시장과 남산공원을 묶어서 도보 탐방해보자. 시작점은 시청역이고 종료점은 장충단 공원이다. 약 2시간 30분 정도 소요 예상.

 

시청역 ▶ 숭례문 ▶ 남대문시장 ▶ 남산공원 ▶ 장충단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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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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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보면 꼭 막힐 때가 있잖아요. 장문의 글은 당연하고, 하물며 트위터나 페이스북 글도 막힐 때가 있더군요. 저만 그런가요? ^^; 저는 그런 걸 글장벽이라고 부른답니다.

 

그렇게 글이 막히면 저는 무언가가 턱 막히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 답답함은 이상 행동으로 이어지지요. 머리를 쥐어 뜯던지, 허벅지를 꽉 꼬집던지, 연필을 콧구멍 속에 집어 넣던지... 어떨 때는 소리를 꽥 지르고 싶을 때도 있더군요. 하여간 그런 장면들을 보면 저한테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할지 모릅니다.

 

다른 브런치 작가분들은 그런 글쓰기의 장벽을 만났을 때 어떤 식으로 해소를 하시나요? 어디 인터넷 카페에서 본 적이 있는데 글장벽을 만났을 때의 해소법도 각양각색이더군요. 어떤 분들은 커피를 한 잔 마신다고 하고, 또 어떤 분들은 스트레칭을 하신다는 하더군요. 심지어 빨래나 청소를 하고 다시 컴퓨터 앞에 앉으신다는 분들도 있었답니다.

 

빨래는 모르겠는데 저도 그렇게 언급된 해소법들을 다 해 봤답니다. 커피도 마셔보고, 스트레칭도 해보고...

어쨌든 글장벽을 얼마나 슬기롭게, 또 얼마나 빨리 넘느냐에 따라 프로냐, 아니냐로 갈라지는 것 같더군요. 그런 글장벽을 지혜롭게 극복한다면 폴더함이 깨끗할 겁니다. 미완성 상태로 쳐박힌 글들이 없다는 뜻이겠죠.

 

글장벽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극복법이 있어야 할 겁니다. 저한테도 극복법이 하나 있어요. 예전에 다녀온 여행지를 떠올려 보는 것이죠. 단순히 여행지 자체를 뭉뚱그려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장소를 캡처하듯이 끌어오는 것입니다.

 

- 제주도 서귀포의 천지연 폭포 앞에서 들었던 폭포 소리

- 스페인 세고비아에서 세고비아 성당을 향해 갈 때 걸었던 골목길

- 부암동 백사실 계곡에 있던 목책 가드레일

 

 

 

 

 

 

 

 

그런 순간들을 떠올려 보면, 몸은 비록 조그마한 노트북 앞에 있지만 잠시나마 숨을 고를 수 있더군요. 그러면 글도 매끄럽게 이어지고요. 대신 억지로 여행지를 떠올리면 별로 더군요. 억지로 생각하면 글장벽이 해소되지도 않고 더 꼬이는 느낌도 받았으니까요.

 

계속 여행을 다녀야 글장벽을 해소할 수 있는 재료들이 더 많아지겠지만 현실에서는 그게 쉽지 않잖아요. 그럴 때 필요한 게 여행 사진들입니다. 예전에 찍어 두었던 여행 사진들이 조금이나마 그 역할을 대신해준답니다.

제 기억을 활성화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죠. 제가 글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게 윤활유 역할을 해주는 셈이죠.

 

여러분들은 글장벽이 가로 막을 때 어떻게 극복 하시나요?

 

 

 

 

 

 

 

 

서울 한복판에 왜 사과마을이 있는 거에요?

 

 

창의문과 능금마을

 

 

15.07.12 15:45    최종 업데이트 15.07.12 15:45

 

 

 

 

 

 

 

 

 

 

 
▲ 사과 능금은 아니다. 홍로라는 종이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게재했다. 2012년 경남 거창에서 촬형한 사진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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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 밖인 백사실 계곡을 탐방하다 보면 능금마을이라는 곳을 만나게 된다. 능금마을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그런지 전원적인 모습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서울 도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비료포대가 쌓여진 농촌 마을을 보고 있자니 생경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왜 능금마을이 북악산 뒤편 부암동 부근에 있는 것일까? 아시다시피 능금이면 우리나라의 고유 사과종을 말하는데 능금으로 유명한 지역은 대구·경북 쪽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드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실제적으로 필자와 함께 북악산 역사트레킹을 행한 참가자들도 그렇게 묻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왜 사과마을이 있는 거에요?"

 

 


가을만 되면 경림금 때문에 창의문이 들썩들썩!

현재 창의문 밖, 부암동 일대는 '능금마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과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능금마을'이라는 마을 명칭만이 옛 흔적(?)을 확인해 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40여 년까지만 해도 창의문 밖 능금은 경림금(京林檎)이라 하여 서울의 유명한 특산물이었다. 능금이 출하되는 가을 때쯤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창의문 인근이 들썩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창의문 밖에 능금나무가 많이 심어졌을까? 먼저 산지 형태를 띠는 부암동 일대의 토양이 척박하여 논농사가 적합하지 않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는 창의문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 두 번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창의문의 역사를 더듬어 가야 한다.

 

 


 
▲ 능금마을 백사실 계곡 입구에서 촬영한 사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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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문으로 더 많이 알려진 창의문


1396년(태조5)에 세워진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 중의 하나로 경복궁 북서쪽에 위치해 있다.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창의문은 인왕산과 북악산이 만나는 자하문 고개에 서 있다. 서울 성곽길을 걷다보면 두 산을 거느리고 있는 창의문의 지형적 존재감을 더 명확하게 감상(?)할 수 있는데 인왕산을 타고 내려온 서울성곽이 북악산으로 넘어가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곳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북대문(北大門)이었던 숙정문이 근방에 있었음에도 소문(小門)이었던 창의문이 북문의 역할을 해야 했다. 숙정문을 이용하려면 북악산의 급격한 경사를 타고 가야 했기에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1413년(태종14)에 풍수가 최양선의 건의로 문이 닫히게 됐는데 숙정문이 오른쪽 어깨의 형상을 하고 있고, 그 어깨로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능금마을 서울 종로구 부암동 부근에 위치해 있다. 북악산 뒤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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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과 인조반정


오른쪽 어깨가 있으면 왼쪽 어깨도 있을 것이다. 그 왼쪽 어깨 역할을 창의문이 했다하여 1413년에 창의문도 함께 폐쇄가 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그렇게 하여 도성에서 북쪽 지역인 개성이나 양주로 가는 길이 오랫동안 불편을 겪게 된다. 창의문은 폐쇄된 지 거의 100년이 흐른 후인 1506(중종1년)에 와서야 다시 열린다.

문이 열리니 길도 열리게 됐고, 그로 인해 역사적인 발자국도 하나씩 하나씩 생기게 됐다. 인조반정도 그런 역사적인 발걸음 중에 하나다. 1623년 3월 13일, 창의문 밖 홍제원(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에 집결한 '의군(義軍)'들은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진격한다.

반정군의 원두표가 도끼로 문을 부셨다. 당시 창의문은 문루가 없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기 때문이다. 높은 위치에서 활도 쏘고 해야 하는데 문루가 없으니 효과적인 방어가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반정군은 창덕궁을 점령했고, 광해군은 퇴위된다.

 

 

인조반정과 능금마을


능금마을 이야기를 하다 뚱딴지 같이 왜 인조반정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일까? 그렇다. 창의문 밖 능금마을은 인조반정과 무척 관련이 깊다. 인조는 반정에 협조했다 하여 창의문 밖 백성들에게 능금나무와 자두나무를 나눠주었다. 그게 부암동 능금마을의 시초가 된 것이다.

숙종 때에는 정책적으로 묘목을 더 많이 심어 부암동 일대에 무려 20만 그루의 능금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매운 음식을 먹은 듯, 빨갛게 달아오른 사과알들이 푸른 잎들 사이에서 대롱대롱 거렸을 것이다. 아주 멋진 장관이 펼쳐졌을 것 같다. 거기에 인왕산 서편으로 석양이 지는 모습까지 어우러지면...!

창의문 밖 능금, 경림금은 그렇게 서울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되었다. 추석 차례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제례물품이 되었던 것이다.

 

 



 
▲ 창의문 사소문 중에 하나인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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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창의문 능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


2008년 숭례문 화재 이후, 창의문은 사대사소(四大四小)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연혁을 가진 문으로 등극(?)하게 된다. 지금의 문루는 영조 17년에(1740) 세워졌지만 1396년에 세워진 '동기동창'인 나머지 사대사소문들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철거되거나 그 원형이 훼손됐기에 창의문이 '최고참'이 되어 버린 것이다. 화재 전까지 숭례문이 그 '최고참' 자리에 있었다.

그 많던 부암동 일대의 사과나무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가을이면 경림금을 사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온 그 많던 상인들은 또 어디로 갔단 말인가? 능금나무가 심어져 있던 부암동에는 카페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고, 상인들을 대신해서는 관광객들이 몰려오고 있다. 이렇듯 세상은 변하고, 또 변한다. 역사적인 해석도 변한다. 인조반정에 참여한 반정군이 '의군'인지 아닌지, 광해군이 폭군인지 아닌지... 그런 역사적인 해석이 변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변하지 말고 계속 그대로 존속해 주었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문화재들이다. 문화재들이 있어야 역사탐방을 하든 역사트레킹을 하든 할 테니까. 어찌됐든 우리 문화재는 우리가 지켜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47년 만에 창의문 옛길이 복원된다는 소식이 정말 반갑다. 180미터 복원이라 좀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옛 원형을 찾아가는 시도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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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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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퉁' 수표교, 사라지면 좋겠다

 

 

진짜 수표교와 가짜 수표교

 

15.06.28 14:32   최종 업데이트 15.06.28 14:32

 

 

 

 

 

 

 

 

 
▲ 수표교 장충단공원에 있는 수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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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것은 가짜다'


고전 연구자로 유명한 한양대 정민 교수의 책 제목이다. <비슷한 것은 가짜다>(2000)는 연암 박지원의 실학사상과 산문을 소개하고, 풀어쓴 책이다.

서평을 쓰자고 이 글을 쓰는 건 아니다. 수표교(水標橋)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럼 왜 여행기사의 첫 문장에 책 제목을 끌어다 쓴 것인가? 수표교에 비슷하게 생긴 '가짜'가 있는가?

 

 


조선 개국과 함께 정비된 청계천

지금은 장충단 공원 한 쪽에 위치해 있지만 수표교는 원래 청계천에 있던 다리였다. 청계천이 복개가 된 후 홍제동에 머물렀다 1965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50년 동안 현재의 자리에 터를 잡은 것이다.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천도를 했을 때, 조정에서는 매년마다 반복되는 물난리로 골머리를 앓게 된다. 당시 한양의 하수시설이 빈약했기 때문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백악산(북악산), 인왕산, 남산 등등... 도성을 감싸고 있는 내사산의 물길을 한 곳으로 모아 흐르게 하기로 했다. 그 사업이 바로 개천(開川) 개설 사업이었다. 개천은 청계천의 옛 이름이다.

태종 11년(1411)부터 세종 16년(1434)까지 대대적으로 벌어진 치수 사업으로 인해 청계천은 흔하디흔한 자연형 하천에서 명실 공히 도성의 으뜸하천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때 물길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게 됐는데 한양이 서고동저형 지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수표교 봄 꽃이 화사하게 핀 수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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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역사의 산증인 수표교

하천이 개설됐으니 다리들도 세워졌다. 청계천에는 24개의 다리가 들어섰는데 수표교도 그 중 하나였다. 수표교는 세종 2년(1420)에 세워졌는데 처음 이름은 마전교(馬廛橋)였다. 다리 인근에 소와 말을 매매하던 시전이 있었다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졌던 것이다. 그러다 20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수표교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1441년, 강수량 측정을 할 수 있는 수표(水標)를 마전교 서쪽에 세우게 됐는데 그 이후부터는 다리 이름도 수표교로 불리게 된 것이다. 

처음 물길이 잡히고, 300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청계천은 다시 바닥이 높아지게 된다. 상류에서 쏟아져 나온 토사가 계속 쌓이다보니 하천의 바닥과 둑의 높이가 비슷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영조 36(1760)년, 청계천은 다시 대대적인 준설이 이루어진다. 수표교 부근에 준천사(濬川司)라는 기관을 세우고 작업을 실시하게 되는데 57일 동안 무려 20만 명의 인원이 동원된 대대적인 준설을 하게 된다. 이때 수표교의 교각에는 경신지평(庚辰地坪)이라는 각자가 새겨졌다.

 


 

 
▲ 경신지평 조선 영조 때 새겨진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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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으로 돌아가지 못한 수표교 

시전 상인들이 건너고, 소와 말들도 건넜을 수표교에는 왕실 양식이 적용되어 있다. 다리 양 옆에 난간이 설치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일반 백성들의 발걸음이 대다수였을 청계천의 다리에 왕실에서 쓰는 기법이었던 난간을 설치한 경우는 무척 이례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민간에서는 징검다리나 외나무다리 같이 격식은커녕 안정성도 담보되지 않은 다리들을 주로 이용했었다.

수표교는 튼튼한 돌다리에다 양 옆으로는 고급스러운 난간까지 설치되어 있다. 수량을 측정하기 위해 수표까지 세워졌다. 또한 청계천 준설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렇듯 수표교는 청계천 다리 중 가장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청계천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수표교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청계천이 아닌 장충단공원에 자리 잡고 있다. 청계천 복원공사가 종료(2005년)된 지 한참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물을 흘려보내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원래 수표교 자리에는 무엇이 들어섰는가? '짝퉁'이 들어서 있다. 품격 있는 '오리지널' 수표교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갈색페인트로 덧칠된 격 떨어지는 '짝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리지널'의 고급스러운 석재 난간은 나무로 대체되었는데 얼핏 보면 등산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데크처럼 보인다. 진짜 수표교를 보다가 가짜 수표교를 보면 탄식의 한숨이 터져 나올 것이다.

 


 

 
▲ 난간 진짜 수표교의 난간. 왕실에서 쓰이는 난간 양식이 민간 다리에 적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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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간 가짜 수표교에서 바라본 청계천. 난간을 나무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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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지 않은 수표교 복원 사업

어떤 역사학자는 청계천 복원의 정점은 수표교를 원래 위치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빗대보면 아직 청계천의 복원은 끝나지 않은 셈이다. 필자도 그 말에 일정부분 동의한다. 수표교가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곳은 장충단공원이 아닌 바로 청계천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는 청계천시민위원회를 꾸려 수표교 복원과 관련된 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2020년까지 수표교는 원래 자리인 청계2가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이전 비용이 무려 800억에 달하기 때문이다. 또한 노후화가 심해서 자칫하면 훼손된 상태로 복원이 될 수도 있다는 어려움도 안고 있다. 한편 원위치인 청계2가로 옮긴다고 해도 그 주변의 경관들이 '오리지널' 수표교의 모습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맹점도 도사리고 있다. 실제로 청계2가 주변은 상가들이 정돈되지 않은 모습으로 영업을 하고 있다.

이런 문제점들 때문에 '오리지널'에 준하는 복제교를 세우자는 의견도 있다. 진짜 수표교는 그대로 장충단공원에 놔두고, 정교하게 복제된 다리를 만들어 청계2가에 세우자는 의견이다.

'오리지널'이 복원되든 복제본이 세워지든 갈색으로 덧칠된 현재의 '짝퉁' 수표교는 좀 사라졌으면 좋겠다. 진짜를 보다가 격 떨어지는 가짜를 보면 다리에 힘이 풀린다. 비슷하지도 않은 가짜를 보니 그저 답답함이 밀려올 뿐이다. 비슷하지도 않은 짝퉁을 좀... 어떻게 좀... 해주셨으면 좋겠다.  

 

 

 
▲ 가짜 수표교 청계 2가에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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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수표교와 가짜 수표교를 비교해 보고자 하면:

장충단공원(3호선 동대입구역) ▶ 동대문(오간수교) ▶ 청계천 ▶ 청계2가


- 이동거리: 약 3.5km / 이동시간: 약 50분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은밀해지고 치밀해진 ‘몰카’의 계절

 

프로필이미지  곽동운

 Date 2015.06.18 11:39

 

 

 

 

본문내용

신도림역 경찰센터

 

 

 

여름! 뜨거운 계절이 돌아왔다. 과감한 노출을 감행하며 한껏 자신을 뽐내는 여성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계절이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의 노출이 과감해질수록 그것을 노리는 몰카범들의 시선은 은밀해지고 치밀해진다.

 

몰카 범죄는 주로 지하철과 같은 다중이용시설에서 벌어지는데 그 증가세가 매년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이에 따라 ‘서울지방경찰청 지하철 경찰대’에서는 4월 1일부터 7월 31일까지를 지하철 성범죄 집중 단속기간으로 정해놓고 중점단속에 나서고 있다.

 

 

몰래카메라 촬영 주의 지역 안내

 

 

몰카 범죄가 늘어나게 된 원인 중에 하나는 스마트폰 카메라 기술의 발달과 관계가 있다. 디지털카메라를 능가할 정도로 고화질을 자랑하는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몰카 범죄에 이용되기까지 이른 것이다. 범죄로의 악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스마트폰은 출시될 때 카메라 셔터음이 울리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카메라 ‘무음’ 앱을 내려 받으면 셔터 음이 제거된 상태로 촬영이 가능하기에 성범죄의 도구로 악용되는 것이다.

 

스마트폰 이외에도 다양한 카메라가 몰카에 이용된다. USB형, 만년필형, 신발형 등 첩보영화에서나 등장하는 초소형카메라들이 여성의 치마 속을 노리고 있다. 이렇게 기기들이 소형화, 은밀화 되니 적발하기도 어려워진다.

 

 

몰카 범죄가 일어나기 쉬운 에스컬레이터

 

 

문제는 이런 몰카 범죄를 일으키는 가해자들이 자신의 행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몰카 범죄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적용되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벌금형 이상을 선고 받으면 신상공개까지 되는 등 처벌이 엄격하다.

 

몰카 범죄가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만큼 피해자가 인지하기도 쉽지 않다.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예방에 있다. 예를 들어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는 몸을 엇각(45도)으로 틀어 후방을 주시하면서 이동을 하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몰카 범죄에 노출이 됐다 싶으면 지체 없이 112나 1366(여성긴급전화)에 신고를 한다. 몰카 특성상 촬영자가 해당 파일을 삭제하면 범죄 사실을 적발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 포스터: 지하철 성범죄 집중단속

 

 

 

윤동주 시인이 '친일매국노'냐고요?

 

청년들의 역사 인식 수준 안타까워

 

15.06.16 11:23   최종 업데이트 15.06.16 17:22

 

곽동운(artpunk)

 

 

 

 

 

 

 

 

 
▲ 서시 윤동주 문학관 뒤편, 시인의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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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이야 모두 다 아실 테죠. 유명한 서시도 잘 아실 거고요."


자하문이라고도 불리는 창의문 인근에는 윤동주 문학관이 있고, 그 뒤편으로는 시인의 언덕이 조성되어 있다. 지난 5월말 필자는 그 언덕에서 역사트레킹 참가자들에게 윤동주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윤동주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보다는 국문학에 가깝기에 짧게 설명을 한 후 다음 코스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괜히 서시를 통째로 외워보라고 짓궂게 구는 참가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빨리 이동하는 게 상책이었다.

"서시만큼 유명한 참회록도 아시죠? 참회록은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한 후 스스로에게 느낀 자괴감을 시어로 풀어낸 것이라 합니다."

이 정도로 설명을 마친 후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설명을 듣던 참가자 한 분이 불현 듯 이런 말을 건넸다.

"창씨개명을 했다면 친일파가 아닌가요?"

 

 

 

시인 윤동주가 친일매국노?


잠깐 발걸음이 꼬였다. 윤동주 시인이 친일파라는 소리를 듣다니! 하늘에 있을 시인은 무척 억울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비교적 젊은 사람들, 또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의 역사 지식수준이 '꽝'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필자는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있다. 그간 역사트레킹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고, 많은 유적지들을 탐방했다. 역사트레킹이 제주 올레를 정점으로 한 걷기열풍의 부산물, 혹은 편승물이라는 조롱과 질책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름대로 그 안에서 보람도 찾았고, 재미도 느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처음부터 트레킹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중간에 코스를 잊어버려 참가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고, 저질(?) 체력인 참가자들의 보폭을 고려하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해당 유적에 대한 설명이었다. 즉 필자의 역사 실력이었다. 트레킹의 참가자들이 주로 젊은층들이라 그들의 날카로운 질문 공세가 예상됐었다. 그래서 이런 걱정까지 하게 됐다.

"이거 내 역사 실력이 확 드러나는 거 아니야? 학교 다녔을 때도 역사 점수 안 나왔었는데..."

저런 자조의 말이 괜히 나왔던 게 아니었다. 실제로 필자는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그래서 학술서적보다는 대중서적을 읽으며 역사에 대해서 지식을 쌓았다. 그렇다고 학벌이 좋냐?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장점으로 내세울 수 있는 건 20년 가까이 종이신문을 꾸준히 읽은 것과 국제정치에 관심이 많다는 점이었다. 그런 장점들까지 끌어들이고서야 겨우 참가자들 앞에 설 수 있었다. 한국사에서 바닥을 치면, 세계사로 넘어가고, 그것도 역부족이다 싶으면 국제정치로 도망치자(?)는 게 전략이었다. 어쨌든 초창기에는 실력이 '뽀록'날까봐 무척 조심스럽게 행동을 했었다. 

하지만 두어 번 역사트레킹을 진행하다 보니 역사 실력에 대한 고민은 싹 사라지게 됐다. 오히려 너무 느긋했다. 나중에는 말장난까지 하면서 참가자들을 농락(?)할 정도였다. 이런 극적인 변화는 왜 일어난 것일까? 밑천이 드러날 걸 초조해하던 마스터가 참가자들을 농락하기까지 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런 극적인 변화는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사람들의 역사 지식이 '꽝'인 것에 토대를 두고 있다. 참가자들이 역사 지식에 무지하다면 그만큼 필자의 '구라'가 통할 여지가 크다는 뜻이 된다. 

- 조선총독부가 무엇을 하는 곳이고,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 모른다.
- 서대문형무소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른다.
- 동학군을 이끌던 전봉준 부대가 어디서 패배를 했는지 어디를 가고자 했는지 모른다.

필자를 당혹스럽게 했던 참가자들의 발언들을 모아봤다. '이 정도면 당연히 알겠지' 하는 필자 나름대로 그어놓은 상식선은 저런 발언들로 인해 여실히 깨지게 됐다. 상황이 이러하니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거 사기 쳐도 되겠는데... 그래서 그런가. 권력자들은 똑똑하지 않은 국민들을 선호하는 건가?'

 

 

 


윤동주를 괴롭게 했던 창씨개명, 그리고 참회록

 
▲ 시인의 언덕 윤동주 문학관 뒤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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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윤동주 시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1941년 겨울, 윤동주는 '히라누마 도슈'라는 창씨명을 얻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윤동주 개인의 의사가 아닌 창씨개명이었다는 점이다. 집안 자체에서 행해진 것이지 윤동주가 직접 행정기관에 찾아가 창씨개명 서류에 도장을 찍은 게 아니었다는 뜻이다. 의도하지 않은 자신의 창씨개명에 대해서 윤동주는 '참회록'에서 자괴감을 드러내게 된다.


한편 당시는 중일전쟁이 이미 발발한 상태였고, 태평양전쟁까지 일어났다. 일제의 침략 야욕이 극에 달할 때였다. 식민지 조선에도 총동원령이 내려져 식량이 배급되기에 이르게 된다. 이때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서는 창씨개명이 필수였다고 한다. 그런 생존과 직결된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에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을 모두 '친일 매국노'로 분류한다는 건 적절하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반민특위에서도 창씨개명 자체를 친일행위로 보지 않았다.

윤동주 시인은 일본 황군을 화끈하게 격려하고 '일본이 이렇게 빨리 망할 줄은 몰랐다'고 궤변을 늘어놓은 시인 서정주나 소설가 이광수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를 했기 때문이다. 윤동주가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청년층의 역사 인식 미비도 큰 문제


함께 장시간을 걸으며 동고동락한 참가자들을 폄하하는 내용을 작성하는 터라 필자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다. 하지만 젊은층의 역사 인식이 생각보다 미비하다는 점을 꼭 알리고 싶었다. 청소년층의 역사 인식이 심각하다, 그래서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지만 20~30대 청년층의 역사 인식도 만만치 않게 수준이 낮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 부족한 역사인식을 무엇으로 채워줘야 할까? 역사, 교양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해줘야 할 것이다. 역사교양 강의의 확대, 역사체험 학습의 다변화 등등... 적어 놓고 보니 뻔한 대답이다.

그런 뻔한 것들이 쌓이다보면 내공이 된다. 그 내공은 역사 인식이 빈약한 정치인들을 솎아낼 수 있는 거름체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놈이 그놈이다.'

이렇게 싸잡아 묶어버리는 언어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놈' 중에서도 덜 나쁘고, 덜 때가 묻은 사람들을 솎아낼 수 있는 내공이 생긴다는 뜻이다. 그럼 역사를 현실에서 써먹게 되는 셈이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창의문 천장에 '닭' 그려넣은 이유, 오호라

 

[서촌의 뒷산, 인왕산역사트레킹 ②]

 

15.06.09 20:06    최종 업데이트 15.06.09 20:06

 

 

 

 

 

 

 

 

 

▲ 수성동계곡 사진 왼쪽 부분에 돌다리가 보인다. 기린교다. 뒤에 보이는 산은 인왕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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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 [서촌의 뒷산, 인왕산역사트레킹 ①] '낭만'과 '비낭만'이 교차하는 서울성곽길

 

인왕산의 숨겨진 보물, 수성동계곡


수성동 계곡은 인왕산의 또 다른 볼거리다. 열을 갖춰 늘어서 있는 소나무들 사이로 암반이 드러난 인왕산을 바라보다보면 여기가 서울이 맞나 싶을 정도다. 아랫동네 서촌의 번잡함은 싹 사라지고, 계곡이 주는 청량감이 주위를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계곡치고는 유량이 거의 없어서 안타깝기는 하지만. 

수성동(水聲洞)의 명성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수성동을 두고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와 <한경지략>에는 명승지로 소개하고 있다. 겸재 정선은 <수성동>을 그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수묵으로 옮겨놓았다. 또한 이곳은 중인들이 모여 시를 짓고 노닐던 곳이다. 조선후기 중인들의 중심으로 발달된 위항문학(委巷文學)의 본거지였던 셈이다. 그러니 문학사적인 측면에서도 무척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수성동 계곡은 2012년 7월에 복원한 것이다. 복원 전에는 1971년에 지어진 시민아파트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후 안전문제로 아파트는 철거가 됐고, 그 위치를 옛 모습으로 돌려놨던 것이다. 복원 과정에 겸재 정선의 <수성동>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수성동>에 나오는 것처럼 '기린교'라는 통돌다리도 그대로 복원이 됐다. 어쩌면 겸재의 그림이 없었다면 지금의 수성동 계곡은 평범한 도시 공원의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수성동에 '동(洞)'자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행정구역명을 뜻하는 게 아니다. 골짜기를 뜻한다. 백사실계곡으로 유명한 백석동천(白石洞天)도 같은 한자어를 쓰고 있다. 수성동계곡이든 백사실계곡이든 참으로 소중한 존재다. 시내중심가와 멀지 않은 곳에 그렇게 청량감을 주는 계곡이 있다는 게 그저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 수성동계곡 인왕산 수성동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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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성동계곡

 

 

 

 

 

시인의 언덕과 윤동주문학관


수성동계곡을 벗어난 트레킹팀은 윤동주 문학관을 향해 갔다. 2012년 7월에 개관한  문학관은 윤동주 시인의 친필 원고와 시집 등이 전시되어 있다. 흥미롭게도 문학관은 수도가압장과 물탱크 시설을 개조하여 만든 전시관이다. 그런 탓인지 전시관에는 옛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위쪽으로는 시인의 언덕이라는 작은 공원도 마련되어 있다. 시인의 언덕에서 바라보는 주변 풍광이 상당히 낭만적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문학관에 가기 전에 누상동에 있는 윤동주의 하숙방을 먼저 탐방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누상동 하숙방은 수성동계곡 아래쪽에 위치해 있다. 

 


▲ 시인의 언덕 윤동주 시인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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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문의 역할을 했던 창의문


윤동주 문학관을 넘어 마지막 목적지인 창의문으로 향했다. 창의문(彰義門)은 사소문 중 하나로 자하문(紫霞門)으로 더 많이 알려진 문이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있었음에도 실질적으로 북문(北門) 역할을 했던 건 바로 창의문이었다. 북악산의 험한 지형 위에 세워진 숙정문은 사람의 발길이 뜸했을뿐더러 1413년부터는 그마저도 폐쇄를 시켰다. 숙정문이 오른팔이 되어 경복궁을 내리누른다는 풍수학적인 의미 때문에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그때 창의문도 폐쇄가 되는데 왼팔의 역할을 하여 경복궁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죄명' 때문이었다. 하지만 숙정문과 달리 교통의 요충지 위에 놓여 있던 창의문은 1506년(중종 1년)에 다시 통행이 재개된다. 그래서 소문(小門)인, 창의문이 '북문 역할'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통행이 빈번했다는 것은 그 문 아래로 수많은 역사적 발걸음이 오갔다는 뜻도 된다. 실제로 인조반정 때 능양군(인조)을 옹립하던 세력들은 이 문을 통해 도성을 점령했고, 광해군을 쫓아낸 후 권력을 잡게 된다. 현재의 문루는 조일전쟁(임진왜란)때 불 타 사라진 것을 영조 때(1740) 건립한 것이다. 현재 창의문은 일반인에게 개방이 되어 있어 문루까지 직접 올라갈 수 있다. 내부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인사들의 이름을 적은 나무판이 걸려 있다. 이 판은 문루를 세울 때 같이 만들어진 것이다.

 



 
▲ 창의문 북문의 역할을 했던 창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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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의 천장벽화는 닭


트레킹팀은 창의문을 통과할 때 천장화를 바라보면서 이동했다. 광화문이든 창의문이든 문을 통과할 때 천장화를 보면서 관찰해보자. 각 문마다 그려진 수호동물이 다르다. 막간을 이용한 퀴즈시간.

"저 그림이 뭘로 보이세요? 딱 봐도 용은 아니고."
"봉황 아니에요? 좀 모습이 우습긴 한데..."
"맞아요. 봉황 같은데요."


거의 다 '봉황'으로 답으로 말했다. 하지만 틀린 답이다. '닭'이다. 특이하게도 창의문의 천장화에는 닭이 그려져 있다. 이 일대가 풍수적으로 지네의 기운을 가졌다하여 천적인 닭을 창의문에 그려 넣었던 것이다. 관악산의 화기를 누른다고 광화문 앞에 해태상을 만든 것과 같은 이치다.

"설명을 들으니까 치킨이 생각나요. 저기가 부암동 아닌가요? 저쪽에 유명한 통닭집이 있다고 하던데요."

부암동을 잘 아는 참가자 한 분이 이런 말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선가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몰려왔다. 통닭 냄새였다. 마늘통닭인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어쨌든 창의문 밖 치킨집에서 풍겨오는 치킨 냄새에 트레킹팀은 모두 한마음이 되었다. 모두 다 군침을 흘렸다.

 
▲ 창의문 천장화. 닭이 그려져 있다. 봉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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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유익하고, 또한 맛집 탐방도 할 수 있는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됐다. 글을 마치기 전에 1편에 언급된 사직단으로 돌아가 보자.


국가의 대소사가 있을 때 조선의 왕들은 직접 제단에 나가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자신의 부덕함을 하늘에 고하면서 제를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메르스 사태라는 중차대한 일을 직면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은 어떤가? 사태가 일어난 지 12일이 지난 후에야 '초기 대응이 잘못됐다'고 짧은 멘트를 남겼을 뿐이다. 이후 발표에서는 발병 환자의 수도 틀리게 언급을 했다. 또한 주말(6월 6~7일)에는 특별한 외부활동 없이 조용히 보내셨다고 한다.

지금이 그렇게 한가할 때인가? 시급을 다투며 행정력을 총결집해도 모자를 판에 그렇게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게 맞는 일인가? 차라리 화끈하게 사직단에서 제사라도 올려주셨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의 안녕을 위해서. 너무 답답해서 하는 말이니 오해는 없으셨으면 한다. 오죽 답답하면 여행기사를 이런 식으로 끝을 맺겠는가!   

 
▲ 창의문 창의문 문루는 개방되어 있다. 문루를 탐방중인 트레킹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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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움말

1. 인왕산역사트레킹 코스: 광화문→사직단→단군성전→수성동계곡→윤동주문학관→창의문
2. 약 5km 정도 밖에 되지 않지만 탐방할 것들이 많아 3시간 이상 소요될 것으로 보임.
3. 시작점: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하차. / 종료점: 종로구 부암동. 경복궁역행 버스 탑승 가능함.
4. 5월 25일에 트레킹을 행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낭만'과 '비낭만'이 교차하는 서울성곽길

 

[서촌의 뒷산, 인왕산역사트레킹①]

 

15.06.09 16:33  최종 업데이트 15.06.09 16:33

 

 

 

 

 

 

 

 

 

▲ 낭만적인 서울성곽의 모습 활처럼 휜, C자형 구간. 뒤로 남산타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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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仁王山)은 보면 볼수록 위엄이 느껴지는 산이다. 가파른 바위가 드러낸 바위색과 그 바위 사이로 가지를 뻗은 수풀들의 푸른색이 서로의 배경색이 되어주니, 그 운치에 감탄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그런 인왕산을 겸재 정선은 <인왕제색도>, 강희언은 <인왕산도>를 붓끝으로 담아 표현하였다.   


호랑이가 살고 있어 무서운 곳이긴 했지만 인왕산은 예부터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광화문, 경복궁 너머로 보이는 인왕산의 풍광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혼자만 좋아한 게 아니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함께 트레킹을 할 정도로 좋아한다. 일명 인왕산 역사트레킹을 리딩하며, 사람들에게 인왕산의 매력을 알려줄 정도다. 인왕산역사트레킹 코스는 다음과 같다.

 


광화문 → 사직단 → 단군성전 → 수성동계곡 → 윤동주문학관 → 창의문

 


▲ 서울성곽 서울성곽 인왕산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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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단은 '종묘사직'할 때, 그 '사직'이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은 사직단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직단은 토지의 신인 사신(社神)과 오곡의 신인 직신(稷神)에게 제례를 올리는 곳이다. '종묘사직'할 때 '사직'이 바로 사직단인 것이다. 농경을 중시했던 조선왕조였기에 사직단의 의미는 종묘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의 왕들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일들이 닥쳤을 때 사직단에 직접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보통 '사직'은 궁을 중심으로 서쪽, '종묘'는 동쪽에 들어선다. 실제로 사직단은 경복궁의 서편인 서촌에 위치에 있고, 종묘는 경복궁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사직단은 동쪽에 사신을 모시는 사단, 서쪽에는 직신을 모시는 직단이 있다. 큰 담 안에 작은 담이 둘러져 있는데, 그 작은 담은 '율'이라고 불린다. 그 율 안에 사단과 직단이 있는 것이다.

조선의 근간 중 하나였던 사직단에도 일제의 마수가 뻗치게 된다. 1911년에 사직단이 폐사됐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1922년에는 원래 부지에다 인근의 땅들을 합쳐서 공원을 만든다. 사직단을 공원화 하여 격하시켰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사직단은 아픔을 겪었다. 도시계획에 따라 신문(神門)이라고 불린 정문이 원 위치보다 14미터 뒤로 후퇴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부지 안에 차례로 도서관, 학교, 어린이 놀이공간 등이 세워지게 된다.

 


▲ 사직제례 사직제례를 준비하는 모습. 2014년에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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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이 떠난(?) 예전 사직공원은 몸살을 앓았다. 취객들이 술김에 울타리를 넘어 가기도 하고, 아이들은 제단에서 씨름을 하기도 했다. 어두운 불빛 아래에서는 '부비부비'를 즐긴 남녀들도 넘쳐났다고 한다. 필자는 사직단 뒤편 신사임당, 이율곡 동상 근처에 있는 족구장과 배드민턴장을 보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종묘에서 족구나 배드민턴을 칠 수 없잖아요. 그런데 사직단에서는 지금 하고 있거든요. 현재 사직단은 복원화 사업을 하고 있는데 원안대로 한다면 저기 도서관이랑 어린이 시설을 철거해야 한답니다. 사직단을 종묘처럼 성역화한다면 이곳에서 족구는 못하겠죠. 그건 그렇다 쳐도 도서관이랑 어린이시설까지 철거한다면 너무 일이 커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설명을 얼버무리는 건 복원사업에 대한 스스로의 입장 정리가 되지 않은 탓이다. 대신 확실한 건 하나 있다.

"성역화를 하더라도 입장료는 받지 마세요! 지갑이 얇아서요..."

 


▲ 단군성전 사직공원 한쪽편에 있는 단군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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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처럼 휘어나가는 서울성곽의 곡선미


트레킹팀은 단군성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직공원 위쪽에 자리 잡은 단군성전은 규모가 크지 않다. 눈을 크게 뜨고 찾아보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사실 단군성전은 전국에 산재해 있다. 규모가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다.

성전이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크기가 중요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직동의 단군성전은 우리동네 교회보다도 더 작다. 아무리 그래도 서울에 있는 단군성전이라면 일정 정도 규모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단군성전을 탐방할 때마다 느끼는 아쉬움이다.

그런 아쉬움을 뒤로 하고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섰다. 산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다 보면 활처럼 곡선으로 휜 성곽이 펼쳐진다. 뒤쪽으로 남산을 두고 'C자'형으로 크게 휘어나가는 서울성곽은 트레킹팀의 시선을 독차지했다. 이를 두고 필자는 이렇게 말을 했다.

"여기가 서울성곽 중 가장 곡선미가 뛰어난 구간인 듯싶습니다. 뒤쪽에 남산도 있어서 배경도 살아 있어요. 그러니 열심히 사진을 찍어주세요!"

 


 

▲ 서울성곽 성곽길을 걷고 있는 트레킹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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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이지 않은 서울성곽길


서울성곽길 역사트레킹을 리딩하면서 하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성곽길을 만만하게 보고 있다는 점이다. 등산에 준하는 복장을 갖추라고 미리 공지를 했음에도 트레킹 당일날 보면, 필자를 당혹스럽게 하는 참가자들이 꼭 있었다.

배낭이 없으면 백팩이라도 메고 오라고 당부했지만 옆으로 메는 가방을 들고 오는 참가자. 가급적 트레킹화를 신고 오라고 말을 해도 운동화는커녕 하이힐을 신고 오는 참가자. 그런 사람들을 보면 필자는 이런 말을 건넨다.

"서울성곽 길은 낭만과 비낭만이 교차하는 곳입니다. 성곽자체는 낭만적으로 보일 겁니다. 하지만 한양도성은 말 그대로 방어시설이었어요. 비탈의 경사가 급격할수록 방어력도 높아지잖아요. 그런 상식에 기초해서 성곽이 만들어졌으니 성곽길이 험할 수밖에 없답니다. 그런 곳은 비낭만적이죠."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성곽길을 낭만적인 길로 인지하고 있을까? 미디어에서 접한 모습들이 낭만적으로 묘사돼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기자들이 험한 구간은 직접 취재하거나 체험하지 않고, 그저 '그림'이 잘 나오는 부분을 부각시키는 기사를 남발했다는 뜻이다. 그런 면에서 필자도 자유롭지 않다. 곡선미가 사는 C자형 성곽구간을 메인 사진으로 올려 사람들의 참가를 유도했으니까. 어렵고 난이도 있는 구간은 쏙 빼놓았으니까. 낭만과 비낭만이 교차하는 성곽길을 뒤로하고 트레킹팀은 수성동 계곡으로 향했다.  

 

 


▲ 서울성곽 사진에도 보이듯 성곽길은 경사도가 꽤 된다. 계단을 계속 타고 올라가는게 무척 비낭만적이지만 성벽 넘어로 보이는 풍광들은 무척 낭만적이다. 비낭만이 있어야지 낭만이 더 돋보이는 법이다. 뒤로 보이는 산은 북한산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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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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