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독자사연공모전 당선작

 

여러분의 2012년은 어떻게 저물어가고 있습니까? 형편없는 성적표나 불합격 통지서, 애인의 이별통보와 갑자기 엄습해온 병 등 많은 것들이 우리를 지치게 했고 울게 만들었습니다. 많은 독자분들이 esc와 함께 그 흑역사를 털어버리고자 공모전에 동참해왔습니다. 아깝게 탈락한 독자 여러분께도 큰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당선자 7명에게 롯데월드 자유이용권 4매씩 드립니다.

 

 

 

 

호환마마보다 두려운 카드명세서

 

 

내게는 사자나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있다. 귀신도 두려워하지 않는 나지만 그 녀석 앞에만 서면 내 심장은 ‘쫄깃쫄깃’해진다. 그 녀석은 한달에 한번씩 꼭 찾아와서는 나를 뒤죽박죽 만들어 놓고 떠나가 버린다. ‘대금 결제가 정상적으로 이뤄졌습니다’라는 문자메시지를 남기고. 그렇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건 바로 카드 값이다.

 

 

그간 카드 좀 긁었다. 벌이가 변변치 않아, 일단 카드로 결제하고 다음달에 메우는 식으로 살아왔던 것이다. 현금서비스도 많이 받았다. 그러다 보니 결제일이 다가올수록 살얼음판을 걸어야 했다. 혹자는 내게 ‘화끈하게 놀았구먼!’ 하고 질책할 것이다. ‘얼마나 절제하지 못하고 긁었으면….’ 하지만 난 화끈하게 놀지 않았다. 이상한 곳에서 긁지도 않았다. 가난하게 살다 보니 카드 의존도가 높았을 뿐이다. 누군들 한달에 한번씩 꼭 ‘멘붕’을 맞고 싶겠는가!

 

 

2013년 새해부터는 카드 값의 공포에서부터 벗어나고 싶다. 새해부터는 재무설계를 똑 부러지게 할 생각이다. 더 졸라맬 허리띠도 없지만 그래도 개미허리가 되겠다는 각오로 열심히 살아볼 생각이다. 체크카드도 이용할 생각이다. 통장의 잔고 범위에서 지출하는 체크카드를 쓴다면 계획성 있게 돈을 쓸 것 같다. 재무설계를 똑 부러지게 하고 체크카드도 쓴다면, 2013년은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카드 값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원년이 될 것이다.

 

 

  

곽동운/

 

 

*** 한겨레 주말판(ESC)에 독자공모를 한다고 해서 글을 올렸습니다. 카드값과 관련된 이야기를요. 맨 위에 걸린 일레스트레이션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카드값 귀신이 자고 있는 사람을 놀래킵니다. 앗! 혹시 저 그림에서 놀란 곽작가, 나인가???ㅋ

아래글은 다른분들의  공모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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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가야 좀만 참아줘~

 

7시50분, 내가 직장에 출근을 해야 하는 시간이다. 집에서 직장까지는 차로 6~7분 거리, 밀릴 염려도 없는 주택가 도로임을 고려한다면 나의 출근길은 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시 정도에 밥을 먹고 준비해서 7시40분께 집에서 출발하면 느긋한 맘으로 갈 수 있는 거리다. 그런데 느긋한 나의 이 출근길을 가로막는 방해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일명 ×이라 불리는 대변이다.

 

 

지금껏 내 인생에서 아침에 대변을 보지 않은 적은 손에 꼽을 정도다. 일어나면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배설기관을 작동시키는 것. 실패한 적이 거의 없는지라 항상 가뿐하게 아침을 시작하는데, 문제는 희한하게도 아침을 먹고 나서 7시40분만 되면 후속타가 생긴다는 것이다. “나 다녀올게” 하고 인사까지 다 마치고 현관문을 열려고 하면, 그때서야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이 신호가 오는데, 그 신호를 무시하고 그냥 가기에는 너무 부담스럽고 꺼림칙하다. 옷이며 가방이며 다 준비된 것들을 다시 내려놓고 화장실로 가야 하는 참담함, 그리고 오늘도 늦을 수밖에 없구나 하는 암담함. 그래도 어쨌거나 가뿐한 몸으로 출근을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이 뒤늦은 쾌감.

 

 

아침잠이 없어 새벽에 항상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인 나는, 이 말 못할 배설작용으로 올 한해 게으름뱅이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이것이 하늘의 뜻이 아니라면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13년 새해를 시작하기에 앞서, 당당하게 외친다. “×아, 이제 나를 놓아다오~”

 

 

임주성/대전시 유성구 노은동

 

 


 

 

 

양다리의 길은 멀고도 험난해

 

 

스물다섯이 되도록 애인 없이 모태솔로로 지내던 나에게 소개팅은 거의 일상이었다. 끝나가는 스물다섯을 한탄하며 ‘이번에는 꼭!’이라는 각오로 소개팅을 하게 됐다. 다행히 괜찮은 상대를 만나게 되었다. ‘드디어 남자친구가 생기는구나’ 하는 기대까지 하게 됐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상대는 만날수록 물음표를 던지게 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중 다른 지인에게서 새로운 소개팅 제안을 받았고 약속 날까지 잡았다.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바람 아닌 바람을 피우는 기분이랄까. 아직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뭐! 하고 생각하며 남자1호와의 만남을 이어갔다.

 

 

문제의 발단은 남자2호를 만나기 전에 1호의 고백을 받게 된 거였다. 나의 예상 시나리오는 두 사람을 만나보고 더 나은 상대를 택하는 것이었는데! 팔자에도 없는 저울질을 하려다 보니 일이 꼬인 것인지, 남자1호에게 나는 시간을 달라는 애매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이야기 들은 사람이라면 예상했을 것이다.

 

 

‘두 마리 토끼 잡으려다 놓쳤구나?’ 이 정도였다면 그렇게 지우고 싶은 기억도 아니었을 것이다. 남자1호는 자꾸만 대답을 듣고 싶어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기다려달라’는 말만 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만났을까. 정말, 거짓말처럼 남자2호와의 약속이 잡힌 바로 전날 인내심이 바닥난 남자1호가 이별 선언(?)을 해온 것이다. 떠나겠다는 사람 잡을 이유는 없었기에 쿨하게 안녕 하고 다음날 소개팅에 나갔지만, 더는 쿨할 수가 없었다.

 

 

남자2호가 영 아니었던 것이다. 그 뒤로 자꾸만 남자1호가 생각나고 마음에 걸렸다. 가슴앓이를 하는 나를 주선자는 신기해했다. 지금껏 내가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나는 해서는 안 되는 연락을 하고야 말았다. 무려 세번이나! 주선자를 통해서도 해보고 내가 시도도 해보고. 결국 세번 다 까였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결론이다. 떠나는 2012년과 함께 정말 잊고 싶은 기억이 돼버렸다.

 

 

문송이/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

 


 

호환마마보다 두려운 카드명세서

 

 

 

 

 

 

2012 view블로거대상 엠블럼

 

 

 

 

 

 

 

 

 

 

 

 

 

 

 

 

 

 

 

 

 

 

 

 

 

 

 

 

 

 

 

 

 

 

 

 

 

 

 

 

 

 

미디어가 파묻은 진실 발로 뛰며 파헤쳐
[한겨레 2006-08-25 14:54]    

 

 

[한겨레] 나는 이렇게 읽었다/<전선기자 정문태 16년간의 전쟁기록>

 

 

 

 

이 책에서 독자들의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 건 ‘전선기자’라는 말일 것이다. 지난 16년간 전쟁터를 누빈 정문태는 종군기자라는 통상적인 호칭을 과감히 거부하고 자신을 전선기자라고 소개한다.

 

  

하지만 필자의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은 부분은 미군의 민간인학살에 대한 기록이었다. 2005년 11월, 미 해병대에 의해 발생한 이라크 하디타 학살이나 최근 공개된 1950년 당시 미국 대사였던 무초의 편지글은 정문태가 기록한 민간인학살과 그 궤를 같이 한다. 미군의 전쟁범죄는 1950년대나 지금이나 작동방식이 같다는 말이다. 즉 무차별적인 학살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실상을 잘 모른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가 대표적이다. 폴포트의 크메르루즈 집권시 200만명이 죽었다는 얘기는 잘 알려져 있다. 1984년에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킬링필드>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영화 <킬링필드>는 75~79년까지 집권세력인 크메르루주가 동족 200만명을 학살했다는 걸 토대로 삼았다. 그러나 정문태는 킬링필드가 69년부터 시작됐다고 말한다.

   

 

베트남과 국경이 맞닿은 캄보디아는 당시 중립을 선언했음에도 미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무려 60만명 이상이 죽었다. 미군은 네이팜탄 등과 같은 제네바 협정에 위배되는 폭탄으로 캄보디아를 지옥으로 만들었다. “폭격 임무를 안고 날아갔으나 어디에도 군사 목표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인 결혼식장을 공격 목표물로 삼았다.” 당시 폭격임무를 수행한 B-52폭격기의 파일럿이 오죽했으면 이런 증언을 했겠는가.

  

 

놀랍지 않은가? 우리 일반사람들 인식 속에 69~75년 기간의 1차 킬링필드는 인지조차 안 되고, 오직 2차 킬링필드에만 초점이 맞춰진 터라 미군의 전쟁범죄는 ‘내 머릿속 지우개’가 돼 버린다. 현재도 국내 언론들의 킬링필드에 대한 보도 관행은 영화 <킬링필드> 수준이다. 크메르루즈의 학살 책임을 묻는 만큼 미군의 학살책임도 짚고 넘어가야 옳은 일이 아닐까?

   

 

미군에 의한 학살은 이렇듯 무차별적이었고 미디어는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쟁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면 목표물이 적대행위 대상자든 민간인이든 그건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냥 방아쇠를 당겼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당시의 상황은 어땠을까? 노근리는 단면에 불과하다. 무차별 폭격과 사격이 특정지역에서만 발생했겠는가? B-29로 융단폭격을 가한 익산역 폭격, F-86으로 공격한 단양 곡계굴 폭격, F-80으로 기총사격한 사천 조장리 난민캠프 학살…. 이 외에도 수많은 곳에서 미군학살이 발생했다. 이라크, 캄보디아, 베트남에 비해 더하면 더했다.

 

 

한국전 당시 이렇게 많은 학살이 있었음에도 우리가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 미디어 ‘덕택’이다. 그런 면에서 “심지어 자신을 전장으로 보낸 언론사도 배신하고 시민 편에 서야 된다”는 말까지 하는 정문태 기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오연호 기자가 90년대 내내 노근리에 대해서 알리고 또 알렸지만 눈길 한 번 안 주다가 AP 통신에 의해 노근리가 밝혀지니 그때서야 열심히 취재경쟁에 나섰던 국내 언론사들의 한심한 작태를 상기하면서 <전선기자 정문태 16년간의 전쟁기록>을 읽는다면 더욱더 감칠 맛나게 책장을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곽동운/자유기고가 << 온라인미디어의 새로운 시작. 인터넷한겨레가 바꿔갑니다. >>

 

 

 

*** 앗! 2006년 8월에 기고한 글이네요. 곽작가, 제 사진이 저렇게 걸려 있네요. ~ㅋ

 

 

 

 

 

 

 

 

 

 

 

 

 

 

 

 

 

 

 

 

 

 

 

 

 

 

 

뱃길아, 북적북적해져라

 

[한겨레] 강화도 외포리에서 출발한 ‘2005 한강하구 평화의 배 띄우기’

전쟁으로 갈라진 강화지역-황해도 생활권의 적막이 구슬프다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글 곽동운 10기 독자편집위원

 

 

 


7월27일 오전 9시, 강화 외포리 항구에서 뱃고동이 힘차게 울렸다. 그동안 통행할 수 없었던 한강 하구를 향해 평화의 배는 씩씩하게 물살을 헤치고 나아갔다. 얼마 만인가. 52년 동안 갈 수 없었던 한강 하구. 더 정확히는 한강과 임진강의 하구. 남북 분단으로 반세기가 넘는 동안 가로막혔던 물길을 평화의 배는 갈매기를 벗 삼아 유유히 흘러갔다.

지금은 석모도행 전용 항구가 됐지만, 옛날 외포리에서는 서울 마포나루로 떠나는 배들도 있었다. 수산물과 각종 특산물을 가득 싣고 한강 하구를 거슬러 올라갔던 것이다. 인근 교동도에서는 북한 지역인 황해도 연백으로 장을 보러 다니곤 했다. 생활권으로 묶일 만큼 강화 일대와 황해도는 가까웠다.

 

 

 

 


전쟁은 물길까지 갈라놓았다. 52년 전 조인된 정전협정에서는 민간 선박의 규제가 없었음에도 북방한계선(NLL)과 어로 한계선이 ‘관습헌법’처럼 작동해 이 지역은 고깃배 한척 없는 적막한 곳이 되었다. 돈이 있어도 그곳은 못 갔다. 배가 있어도 그곳은 갈 수 없었다. 러시아도 가고, 달나라도 가는데.

평화의 배 출항지가 외포리항이어서 더욱 뜻깊었다.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로 인해 강화 지역에서만 1천명 정도가 사망했다. 외포리도 학살지 중 하나였다. 비무장 민간인들이 전쟁의 제물이 되어 총과 칼을 맞아야 했던 잔혹한 역사를 지닌 곳이다. 진혼무의 가락이 더욱더 구슬프게 느껴졌다.

예정했던 항로가 단축되어 어로한계선 800m 북상을 끝으로 뱃머리를 돌려야 했던 평화의 배에서는 각종 문화공연과 리영희 교수, 도법 스님, 김낙중 선생의 강연이 이어졌다. 예정 항로를 다 채우지 못해 무척 아쉬웠지만 평화의 배 띄우기는 출항만으로도 충분한 의의가 있었다. 꽃게철만 되면 남북 경비정의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던 이곳에 새로운 물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이 평화의 기운이 서해 건너 중국 베이징까지 전달되면 얼마나 좋을까. 52주년을 맞은 7·27 휴전 협정일을 떠올리며 4차 6자회담이 잘되길 기원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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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제가 한겨레21 독자편집위원을 했을 때, 작성한 기사였습니다. 한겨레21 독자편집위원을 하면, 아주 간간이 한겨레 측에서 원고 청탁을 하더군요. 물론 원고료가 서운했죠...-_- ㅋ 그러고보니 이 행사를 했던 때가 벌써 7년 전입니다. 시간이 참 빠르네요~!

 

 

 

 

 

 

 

 

 

 

 

 

 

 

 

 

 

 

 

 

 

공선옥, <사는게 거짓말 같을 때>의 표지

 

 

 

 

 

*** 예전에 기고했던 기사를 여기다 올려봅니다. 날짜를 보니 벌써 7년 전이군요!

에궁~ 이제 한 달 후면, 2013년인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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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

 

 
[오마이뉴스 곽동운 기자]안녕하세요? 공선옥 작가님!

 

녹음이 짙어지는 이 아름다운 계절에 평안하신지요? 지금 춘천은 참 아름답겠네요. 아아! 곧 전주로 이사를 간다고 하셨지요. 전주도 참 멋들어진 곳이지요. 비빔밥도 맛있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기 전에 형식에 대해 한마디 합니다. 서평을 이렇게 편지글 형식으로 작성해 보는 게 처음입니다. 서평을 편지 형식으로 쓴다고 해서 누가 뭐랄 사람은 없겠죠? 객관성을 중시하며 각종 자료들이 동원되는 서평 글은 서평자의 감정이 쉽게 드러나지 않아 균형감이 쉽게 흐트러지지 않는 장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 딱딱한 문체가 별로죠. 서평을 꼭 논문 쓰는 것처럼 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 공선옥 산문집 <사는게 거짓말 같을 때> 표지
ⓒ2005 당대
<사는 게 거짓말 같을 때> 전편에 흘러넘치는 소외된 이웃에 대한 작가님의 시선은 너무나 따사로웠습니다. 그 품에 안기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카드 빚에 내몰리고, 재개발에 내몰리고, 가정 파탄으로 내몰리고… 우리네 고단한 서민들의 아픔을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당신의 착한 마음을 보았습니다.

 

 

작가님은 '아름다운 노래 따위 나는 부를 수 없다'고까지 하셨지요. 작가님은 "나도 정말 이 세상에 태어나 예술 한번 하고 싶었다. 예술. 그러나 나는 그렇게도 소원이던 예술을 이제와 포기하여 한다"며 괴로워하셨지요. 또, "사는 것이 사는 것인 사람들아, 백죄 그러지 말아라. 사는 것이 사는 것인 사람들아, 입 좀 닥쳐라"라고 엄포를 놓으셨습니다. 그건 소외받은 이웃을 향해 따뜻한 시선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절대 외칠 수 없는 절규입니다.

 

 

<사는 게...> 중에서 제가 가장 숨죽이며 읽었던 부분은 "사랑은 가고 '러브'만 남은 이 휘황한 밤에"였습니다. 가난한 열여덟 살 청년이 택시기사의 사납금 10만원을 뺏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에서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더군요. 또 이혼한 장애 여성이 단지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랑하는 아이의 양육권을 포기하는 부분에서는 제 입술을 깨물어야 했습니다.

 

 

 

 

이 책 전반에 흐르는 키워드는 빈곤과 소외, 그에 따른 고단한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들 이외에 사람들은 이 책에 등장하지 않더군요. 뭐 작가님 자신과 시민사회에서 활동하는 몇몇 분이 계시긴 하지만. 그래서인지 <사는 게...>는 신문의 사회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사는 것이 사는 것인 사람들' 속에서도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은 인생'들도 꿈틀거린다고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서평이라고 할 수 없겠죠. 책에 대한 냉엄한 평가는 오간데 없고, 칭찬 일색이니. 일반독자에 의한 주례사 비평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다음 부분부터는 작가님을 위한 제 나름대로의 쓴소리를 적어보았습니다. 작가님과 제가 사회를 보는 방식의 차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저는 이 책을 신문의 사회면을 보는 듯했습니다. 더 정확히는 신문 사회면 중에서 '경악스러울'만한 팩트를 추리고 거기에 '좋은 생각'을 접목해 놓은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가슴을 쓸어내리는 구구절절한 사연과 함께 고통스런 환경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대미를 장식하는 식이지요.

 

 

여기에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런 고단한 이웃들의 삶 자체가 사색의 대상이 되는 만큼 그에 따른 합당한 대안 제시도 필요합니다. '그게 지식인의 책무'라는 말은 너무 흔하죠?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억울할지도 모르겠지만, 혹자는 작가님에게 빈곤을 이용해먹는다고 비난할지도 모릅니다.

 

 

전 작가님이 그 비난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빈곤의 늪에서 허덕이는 그들에게 따뜻한 시선 못지않게 그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끈을 던져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가님의 생생한 현장 기록들을 폄하하는 게 아닙니다. 또 전 결코 대안 지상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작가님에게 합당한 대안 제시를 요구하는 건, 대안이 빠진 <사는 게...>의 내용은 자칫 신문 사회면의 동어반복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그 나름대로의 생명력이 충만함에도 작가님의 기록들과 사색이 2% 부족 할 수밖에 없는 건 바로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그런 모습은 빈곤에 대한 지식인의 알량한 연민으로 내비칠 수 있습니다. 작가님이 그렇게 꺼리는 '예술'을 하고 있다고 오해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짧게 한 이야기만 더 할게요. 작가님은 어려웠지만, 그래도 인정미가 넘치는 당신의 어린 시절을 무척이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계시더군요. 그 시절은 항상 아름답게 떠올리셨어요. 그러나 그런 유년시절의 시골풍경들이 2005년에 휘돌고 있는 수많은 복잡한 일들의 안식처가 될 수 없습니다. 복잡하고 골머리 썩이는 현실이 싫다고 목가적이고 전원적인 시선들로 독자들의 시야를 돌려서는 안 됩니다.

 

 

제가 한 비판들이 작가님에게는 섭섭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서운해 하지 마셨으면 합니다. 그저 한 독자의 애정 어린 비판으로 받아주셨으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소외되고, 외로운 이웃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셨으면 합니다. 건강조심하시고요.

 

 

건필 하십시오!

/곽동운 기자

 


덧붙이는 글
서평전문 사이트 리더스 가이드에도 올립니다(www.readersguid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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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 투구바위

 

 

*** 언론 기고문이라는 폴더를 하나 만들었습니다. 여기에는 제가 언론에 기고한 콘텐츠를 게시할 예정입니다. 저는 언론사에 기고를 할 때 블로그에다 원문글을 작성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일단 개인 블로그에서 작성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편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현재 자전거여행기를 기고하고 있는 오마이뉴스도 기사작성 하는 것이 편리하지가 않습니다. 오마이뉴스가 인터넷 신문인데도 기사 작성하는데 순탄치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제 개인블로그에다 초고를 작성합니다. 그런 후에 완성본을 오마이뉴스에 송고하는 식입니다.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면 다음 블로그의 웹기반 성에 대한 찬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실지 모를 일입니다. 맞습니다. 저는 다음블로그의 웹기반에 대한 평가를 긍정적으로 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블로거들에 대한 대접은 다음이 네이버에 비해 한참 못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있는 현실이겠죠.

 

각설하고.

 

이 코너에 게재되는 기사들은 이미 제 블로그에 올라온 것들입니다. 블로그의 포스팅과 차이는 있습니다. 블로그 글보다 신문기사 글이 훨씬 더 깁니다. 기사글이 한 편이면 블로그 글은 3편으로 쪼개 놓았습니다. 길다고 좋은 게 아니니까요. 우리는 스코롤의 압박을 싫어하잖아요!

 

저는 블로그 글과 기고문을 좀 다르게 작성해 왔습니다. 아무리 인터넷 신문이라지만, 제 기명으로 발행되는 것이기에 나름대로 게이트키핑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최대한 블로그 원문글과 신문기사글을 일치시키려고 노력을 했었지요.

 

블로그에는 쪼개서 작성하였지만 기사에는 한 편으로 올라갔다, 이것이 가장 핵심일 것 같습니다.

 

 

 

 

 

 

 

 

▲ 울릉도 울릉도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곳곳이 절경이라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그곳이 최고의 출사지가 되는 곳이다. 사진 왼쪽 하단에 있는 흰색 구조물은 작은 터널이다. 자연과 인공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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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와 자전거 일명 '철TB'라 불리는 '막강한 자전거'를 끌고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다녔다. 한편 울릉도는 자전거를 타기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해안도로가 놓여 있기는 했지만 가파르게 형성된 구간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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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부터 거창하다. 그냥 자전거여행이면 자전거여행이지, 뭐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이라고? 요즘은 백두대간이라는 명칭이 맥주 광고에도 차용될 정도로 대중화 됐다지만 자전거를 타고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거나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지 못했다면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이라는 명칭은 한마디로 '낚시용' 제목이 아닌가.

그렇다.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은 앞뒤가 안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난 이번 여행을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이라고 이름지었고, 다른 분들에게도 그렇게 설명했다. 실제로 난 백두대간을 너댓번 정도 오르락내리락했다.

한계령을 넘어 울릉도에 입도했고, 태백산 야영장에 자전거를 주차(?)시켜 놓고 천제단까지 등산을 했다. 남덕유산 아래에 있는 육십령 고개를 통해 전라북도 장수에서 경상남도 거창으로 이동을 했다. 또한 각종 장비로 중무장한 철TB를 끌고 지리산 성삼재와 노고단까지 다녀왔다. 이 정도면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질책을 그나마 덜 당하지 않을까.

 

 


▲ 청량산에 위치한 청량사 청량사는 정말 시원한 배경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저기에 계신 부처님은 참 행복한 부처님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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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필자가 여행한 코스와 산악인들이 언급하는 백두대간의 코스는 다르다. 앞서도 말했듯이 자전거를 끌고 대청봉에 오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경북 지역에서 봉화와 안동지역을 여행했는데 이곳은 차라리 낙동정맥과 더 가까웠다.

어쨌든 나는 자전거를 타고 백두대간과 가장 근접한 지역을 여행을 했고, 지금은 무사히 서울로 돌아와 이렇게 여행 기사를 작성하고 있다. 산악지역을 다니느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여행 일수가 소요됐고, 체력적인 부담도 무척이나 컸다. 더군다나 올 여름은 무더위가 맹위를 떨치지 않았던가.

지난 56일간의 여행에서 나는 많은 것을 얻었고, 느꼈다. 더불어 아쉬움도 스쳐갔다. 이번 여행이 국내에서 행하는 장거리 자전거여행의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만 거의 1200km 정도를 주행했는데 지난 5년간 누적된 거리만 따지고 보면 한 5400km 정도가 된다. 그렇다. 필자는 자동차나 기차처럼 동력을 이용하지 않고, 무동력(No-motor)으로 5000km 이상을 여행했다. 국내에서 축적한 5000km 이상의 자전거여행 경력을 이제는 해외로 발산할 순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여행기는 제대로 잘 기록해 둘 셈이다. 구슬도 잘 꿰어야 보배라고 하지 않던가. 장거리 여행을 한 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획득한 엄청난 스펙을 스스로 차버리는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필자도 그런 우를 범하지 않게 지난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 생각이다. 여행 내내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있었고, 살벌한 이야기도 있었다. 또 폭염에 지쳐 황천길로 갈뻔한 이야기도 있었으니 통상적인 여행기보다는 좀더 '서프라이즈'한 스토리를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 강원도 화천의 평화의 댐과 평화의 종 평화의 댐 부근은 DMZ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인지 역설적이게도 천혜의 자연 경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왼쪽에 보이는 타원형에 평화의 종이 걸려있다. 평화의 종은 탄피를 녹여 만들었다고 한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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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노고단 부근 힘든 여정이 있었기에 지리산에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영광을 얻은 것일까? 동이 트고 있을 때라 좀 어둡기는 하지만 지리산의 영험함이 느껴지는 사진이다!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을 수 있어서 무척 행복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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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1. 여행기간: 2012년 6월 14일~ 8월 8일

2. 주행거리: 약 1200km

3. 이동경로: 서울 -> 강원도 춘천 -> 화천 -> 양구 -> 인제 -> 설악산(한계령) -> 양양 -> 강릉 -> 경상북도 울릉군 -> 강릉 -> 동해 -> 삼척 -> 태백 -> 경상북도 봉화 -> 안동 -> 예천 -> 구미 -> 김천 -> 경상남도 거창 -> 함양 -> 지리산(성삼재, 노고단) ->전라남도 구례 -> 전라북도 남원 -> 장수 -> 거창

* 원래는 지리산에서 여행을 종료할 예정이었으나, 경남 거창에 볼 일이 생겨 다시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음. 거창에서는 고속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서울로 복귀함.


이기사는 제 블로그(http://blog.daum.net/artpunk)에도 실렸습니다.

 

 

 

내수전: 울릉읍에 있는 내수전. 울릉도에 가면 꼭 둘러봐야 할 곳 중에 하나다.  구름 사이로 펼쳐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 거북바위: 울릉도 서면에 위치한 거북바위. 생김새 자체가 워낙 독특하여 사진작가들에게 인기가 좋은 바위다. 바위 바로 옆에서 파도가 치는 것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가 있다. 배수구인지 시멘트 블럭 사이로 구멍이 몇 개 난 곳이 있었는데, 파도가 치면 그 구멍에서 분수가 뿜어지듯 물줄기가 차올랐다.

 

 

 

 

 

----> 전편에 이어

 

 

“배 타시려고요?”

“지금 출발하는 배가 있어요?”

“네. 편도 4만 9천원이에요.”

 

 

 

대합실로 자전거를 끌고 들어온 내 모습이 이상했는지 매표소 아줌마가 퉁명스럽게 말을 건냈다.

배가 있단다. 그런데 배에서 먹을 간식거리 같은 필요 물품들을 구매하지 않았는데. 강릉항 근처에서 1박을 하면서 그때 마트에 가서 물품들을 준비할 생각이었는데. 터미널 구조나 알아보려고 들어왔는데 바로 배가 있다니. 어차피 물품이야 울등도에 가서 구매를 하면 되지 않은가? 물론 울릉도 물가가 비싸다고는 하지만 말야. 인생사 타이밍아닌가! 지금 안 잡으면 또 언제 타이밍을 잡을 것인가.

 

나는 그 즉시 배에 올랐다. 알고 보니 그 배는 부정기편이었는데 그래서 승선 인원도 적었다. 나를 포함해서 40명도 안 되는 인원이 탑승을 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자전거를 적재할 수 있는 공간도 여유가 있었다. 강릉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은 차량 탑승이 안 되는 밀폐형 배다. 일명 박스(box)배로 불리는 쾌속정으로 선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시속 50Km 이상의 속도로 해상을 질주를 하는 터라 승객 안전을 위해 그런 구조로 배를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속도가 빠른 만큼 파도의 영향을 많이 받아 울렁증이 심하게 생길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출항 직전에 승무원들이 승객들에게 구토용 검은 비닐봉지를 하나씩 나눠줄 정도였다.

 

까짓것 무슨 배멀미인가! 내가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배를 타봤는데. 그동안 섬여행을 얼마나 많이 다녔는데. 난 받아든 비닐봉지를 하찮게 여기며 그냥 쓰레기 비닐봉지로 사용을 할 생각을 했었다.

 

 

 

* 시스타(sea star)호 객실: 울릉도와 강릉항(구 안목항) 구간을 운항하는 쾌속정이다. 배수량 590톤에 433명을 태우고 3시간 정도로 강릉-울릉

구간을 주파한다.  한편 밀폐형 배라서 그런지 배멀미가 심하다. 사전에 배멀리 약을 준비하는 게 좋겠다.

 

 

 

 

 *  북면 석포동: 울릉도 북면에 가면 석포동이 있는 그 곳에 석포전망대가 있다. 석포전망대까지 오르는 길이 험난 했는데, 그때 찍은 사진이다.

울릉도의 산길은 경사도가 급했다.

 

 

 

 

#울릉도여행의 팁: 멀리약을 챙기자!

 

깜빡 잠이 들었다 깼다. 무언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왜이리 속이 울렁거리지? 울릉도에 간다고 이렇게 울렁거리나. 역시 울릉도는 내게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속에서 무언가가 뿜어져 나올 기세였다. 난 당장 화장실로 달려갔다. 우윀. 해상 날씨가 안 좋았던지 배가 요동을 쳤다. 다시 우윀. 난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아까 주문진에서 먹은 오징어가 꿈틀대며 내 몸에서 빠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또다시 우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승선 인원이 별로 없어 화장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도 구토를 심하게 하다 보니, 난 오기가 생겼다. 그래 몇 번까지 하냐, 한 번 카운팅을 해보자. 또 우윀. 총 여섯 번이었다. 총 여섯 번에 걸쳐 구토를 했다. 나중에는 개어낼 것이 없어서 그냥 위액이 쏟아졌다. 아까운 내 주문진 오징어들이 변기통으로 싹 다 쓸려 내려간 것이다.

 

필자도 느껴진다. 내게 가해지는 따가운 시선들. 좋은 것도 아닌데 왜 굳이 이렇게 세밀하게 ‘우윀’ 장면을 묘사 하냐고 항의를 하실 분들이 많을 것 같다. 만약 이 기사를 식사 시간 전후로 읽으신 분들은 필자에게 엄청난 저주를 퍼부으실 것이다.

 

하지만 오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한다. 필자는 몇 가지 당부를 하려고 이 부분을 세밀하게 그린 것이다. 그렇다. 배멀미를 주의하라는 것이다. 꼭 배멀미 약을 준비하신 후에 승선을 하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자신이 배멀미에 강하다고 과신하지 마시고 미리 약을 준비하라고 꼭 말씀드리고 싶다. 배멀미를 앓으면 그만큼 자신도 괴롭고 향후 여행 일정에도 막대한 차질이 생기게 된다. 필자처럼 56일 동안 여행을 하실 시간적 여유가 없으신 분들은 돈 2~3천원 들여서 멀미약을 복용하신 후에 승선을 하시면, 더 기분 좋게 울릉도 여행을 하실 수 있을 것이다. 이게 필자가 독자들에게 드리는 첫 번째 울릉도 여행 팁이다.

 

여기서 잠깐! 당시 필자는 울릉도에 입도를 할 때까지 여행 경비로 110,000원을 지출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그때가 여행 10일차였었다. 하루에 만 원 정도 썼는데, 7일을 머물렀던 울릉도에서는 얼마를 지출했을까? 항간에는 울릉도 여행이 제주도여행보다 비용이 더 많이 든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다. 그만큼 울릉도의 물가가 비싸다는 것이다. 그럼 주머니가 가벼운 필자가 7일 동안 울릉도 곳곳을 다니면서 쓴 돈이 얼마일까? 필자는 놀 거 다 놀고, 볼 거 다 보면서 울릉도의 곳곳을 둘러보았다. 그럼 비용이 상당히 많이 들었을 텐데, 이거 경비 부족으로 울릉도가 자전거여행의 마지막이 되는 건가?

 

다음편을 기대해주시라. 울릉도에서 쓴 경비내역들을 올릴 생각이다. 가난뱅이 여행가가 고물가 지역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보여드릴 생각이다. 아웃도어여행 앞에 모든이들이 공평하다는 게 내 여행 철학인만큼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도 울릉도 여행을 재밌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릴 생각이다.

 

 

 

 

 

 

* 울릉도의 해양경찰차: 울릉도의 지형이 워낙 험난한 터라 경찰차도 힘이 좋은 4륜 구동을 이용한다.

 

 

 

 

 

 

*울릉도 저동항: 배에서 구토를 여섯 번이나 해서 그런지 넋이 빠진 모습에서 인증샷을 찍었다. 저동항에서 정신 좀 차리고 하다보니 이미 주위는 어두워져 있었다.

 

 

 

 

 

* 울릉도 서면: 서면의 딴바위 부근에서 한 컷. 울릉도는 그 자체가 출사지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사진을 찍었다.

차를 타고 지나갔으면 제대로 사진을 못 찍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 울릉도: 울릉도의 지형 저렇게 급경사지가 많다. 그래서 사진에서처럼 해안도로 주변에도 터널들이 많았다. 재미있는 것은 저 터널들이 단방향이라는 것이다.

신호에 따라 한 편에 있던 차들이 쫘악 지나간 후에야 반대편 차량들이 움직일 수 있었다.

 

 

 

 

*울릉도 터널: 터널이 단일 차선이다. 그래서 신호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 울릉도의 도동: 도동은 울릉도의 중심지이다. 도동에는 군청과 읍사무소, 군의회 등등의 행정기관과 각종 편의시설들이 몰려 있다.

 하지만 도로사정은 매우 열악했다. 사진처럼 콘크리트가 떨어져 나간 도로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었다.  

 

 

 

 

 

* 시스타호: 저렇게 시스타호 후미 부근에 자전거를 적재했다. 원칙적으로는 자전거 탑승이 안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출항 당시 워낙 사람들이 적게 승선해서 그냥 승무원들이 탑승을 시켜줬다. 본 사진은 창문 넘어로 찍었다. 운항중에는 승무원 이외에는 원칙적으로 선실밖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 태하 황토굴: 서면 태하리의 황토굴. 사진 오른쪽에 나오는 것처럼 이 동굴은 황토굴이다. 울릉도는 이렇듯 신비로운 지형들을 품고 있다.

조선시대에 파견관리들은 울릉도 순찰의 증거로 향나무와 태하황토를 제출해야 했다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농땡이 치는 넘들이 있고, 한편으로는 그 농땡이를 막으려는 장치가 있는 것이겠지!ㅋ

 

 

 

 

 

 

 

 

 

 

* 설악산: 산봉우리의 걸린 흰구름을 보니 아이스크림 생각이 간절해지더라! 쪽쪽 빨아먹을 수 있는 배 맛 탱크보이가 그리웠었다.

 

 

 

* 장수대: 한국전쟁 당시 국군의 설악전투의 전승을 기념하고, 설악산을 찾은 탐방객들이 쉬어갈 수 있도록 지은 'ㄱ' 형태의 한옥집.

 

 

 

 

---> 전편에 이어서

 

 

 

#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어찌하리요!

 

인제군 원통리의 지형은 생각보다 험하지 않다. 북쪽으로는 명당산(764m)이 있긴 하지만 동쪽으로는 소양강을 향해 가는 북천이 흐르고 있어 비교적 완만한 지형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원통리에는 원통체육공원도 자리 잡고 있다. 차라리 한계령을 품고 있는 한계리의 지형이 험하면 더 험한 듯싶었다.

 

원통(元通)은 원래 원산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설악산과 금강산을 넘으면 바로 원산이니 그런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지리적인 의미의 명칭은 한국전쟁과 분단, 그리고 군사도시로 변모한 인제군의 모습 속에서 그 의미가 확연히 달라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마음속에 ‘슬픈 아리랑’ 한 곡조씩을 품고 사는 강원도 군번들에게 ‘인제’와 ‘원통’이란 명칭은 심심풀이 땅콩 같은 푸념거리의 소스로 제격이었던 것이다.

 

원통에 대해서 왜그리 장황하게 이야기를 했냐고 필자에게 질책을 가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다. 자전거여행을 하는 것인지 ‘명칭 따라 삼천리’를 하는 것인지 혼동스럽다고 비판의 화살을 내게 발사하는 분들도 계실 것 같다.

 

필자는 원통을 보면서 한국전쟁과 뒤이은 분단으로 인해 해당 지역 명칭이 일반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각인되는지에 대해서 주목을 해본 것이다. 예를 들어 지리산 피아골 같은 경우도 원래는 곡식인 피가 많이 재배된 지역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리산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골짜기가 피로 넘쳐 났다는 변형된 의미가 일반 사람들에게는 '상식'으로 통하게 됐다는 것이다. 

 

 

 

 

* 설악산: 구름 덮인 산봉우리의 모습이 장관이었다.

 

 

 

* 설악산

 

 

 

 

# 달려라 블루야크

 

한계령의 초입에 해당되는 한계교차로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12시 경이었다. 40Kg 달하는 자전거를 끌고 한계령을 넘기 위해서는 꼼꼼한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행동식은 준비가 됐는가? 식수는 몇 통을 챙겼는가? 만약 밤샘 이동을 한다면 체력적으로 버틸 수 있겠는가? 등등의 물음들에 대한 답을 충족시키려면 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계령이 어떤 곳인가? 설악산을 가로질러 동해바다로 나아갈 수 있는 높디높은 고개가 아니던가!

 

한계교차로에서 46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가면 미시령 고개를 넘을 수 있고, 44번 국도를 타면 한계령에 다다를 수 있다. 인제군에서 만난 사람들은 인접 도시인 속초로 갈 때 주로 미시령 도로를 이용한다고 했다. 미시령은 터널로 연결됐기 때문에 보다 더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꼬불꼬불한 한계령을 이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도 서울에서 속초로 차를 타고 이동할 때는 주로 미시령을 이용했다.

 

뜨거운 여름 햇살을 받으며 나아갔지만, 설악산의 속살을 다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난 콧노래를 부르며 나아갔다. 더군다나 차가운 개천이라는 뜻의 한계(寒溪)로 들어가는데 그 정도의 노고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나. 확실히 자동차 여행과 자전거여행은 차이가 난다. 아무리 한계령이 험하다고 하지만 자동차로 1시간 정도면 반대편 양양군에 입성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빠른 속도로 달리다보면 놓치는 것들이 많아진다. 공간을 빨리 이동할수록 인간의 두뇌가 ‘패스’시키는 지리적 장면들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하긴 운전에 집중을 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그 수많은 자연풍광들을 어떻게 일일이 다 지켜보겠는가.

 

비록 중고자전거지만 엄연히 내 자전거도 이름을 가지고 있다. 블루야크. 내 자전거가 푸른색이라 국내 모 아웃도어 브랜드 명칭을 빗대서 그렇게 지어본 것이다. 내 자전거가 무적 철TB라 히말라야 야크들처럼 튼튼하다는 의미에서 그런 네이밍을 붙여본 것이다. 다른 사람이 시비를 거는 것도 아니니까.

 

산중에서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어차피 야간 이동을 각오했지만 밤이 되니 덜컥 무서운 것이었다. 남는 건 사진이라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사진을 찍었던 터라 시간이 더 지체됐던 것이다. 나도 블루야크도 지쳐갔다. 이전의 여행들을 통해 많은 경험이 쌓였지만, 한밤중 산중에서의 이동은 역시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 장수대

 

 

 

* 설악산

 

 

 

 

* 설악산: 한계령을 지나 양양 오색약수 방면으로 향하는 길

 

 

 

 

 

 

 

 

 

 

 

 

 

 

 

 

 

 

 

 

 

 

 

 

 

 

 

 

 

 

 

 

 

 

 

 

 

 

 

 

 

 

 

 

* 울릉도: 울릉도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곳곳이 절경이라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그곳이 최고의 출사지가 되는 곳이다. 사진 왼쪽 하단에 있는 흰색 구조물은 작은 터널이다. 자연과 인공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다.

 




 

* 강원도 화천의 평화의 댐과 평화의 종: 평화의 댐 부근은 DMZ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인지 역설적이게도 천혜의 자연 경관을 유지하고 있었다.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

 

1. 여행기간: 2012년 6월 14일~ 8월 8일

 

2. 주행거리: 약 1200km

 

3. 이동경로:  서울 -> 강원도 춘천 -> 화천 -> 양구 -> 인제 -> 설악산(한계령) -> 양양 -> 강릉 -> 경상북도 울릉군 -> 강릉 -> 동해 -> 삼척 -> 태백 -> 경상북도 봉화 -> 안동 -> 예천 -> 구미 -> 김천 -> 경상남도 거창 -> 함양 -> 지리산(성삼재, 노고단) ->전라남도 구례 -> 전라북도 남원 -> 장수 -> 거창

* 원래는 지리산에서 여행을 종료할 예정이었으나 거창에서 지인분이 축제를 도와달라는 말씀에 다시 거창으로 발길을 돌렸음. 거창에서 고속버스에 자전거를 싣고 서울로 복귀함.

 

 

 

 

 

 

 


이름부터 거창하다.

그냥 자전거여행이면 자전거여행이지, 뭐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이라고?

 


요즘은 백두대간이라는 명칭이 맥주 광고에도 차용될 정도로 대중화 됐다지만 자전거를 타고

설악산 대청봉을 오르거나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지 못했다면,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이라는

명칭은 한마디로 '낚시용' 제목이 아닌가? ㅋㅋㅋ

 


그렇다.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은 좀 어패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난 이번 여행을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이라고 네이밍을 했고, 다른분들에게도 그렇게 설명을 했다. 실제로 난 백두대간을 너댓번 정도 오르락 내리락했었다.


한계령을 넘어 울릉도에 입도를 했고, 태백산 야영장에 자전거를 박아 놓고 천제단까지 등산을 했다. 남덕유산 아래에 위치한 육십령 고개를 통해 전라북도 장수에서 경상남도 거창으로 이동을 했다.

 


또한 각종 장비로 중무장한 철TB를 끌고 지리산 성삼재와 노고단까지 다녀왔다.

이 정도면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이라고 네이밍을 붙인다고 해도 욕은 덜 먹지 않을까?

 

 

 

 

* 울릉도: 일명 '철TB'라 불리는 '막강한 자전거'를 끌고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다녔다.

한편 울릉도는 자전거를 타기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해안도로가 놓여 있기는 했지만 가파르게 형성된 구간이 상당히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본인이 여행한 코스와 산악인들이 언급하는 백두대간의 코스는 다르다. 앞서도 말했듯이 자전거를 끌고 대청봉에 오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경북 지역에서 봉화와 안동지역을 여행했는데 이곳은 차라리 낙동정맥과 더 가까웠다.


어쨌든 나는 자전거를 타고 백두대간과 가장 근접한 지역을 여행을 했고, 지금은 무사히 서울로 돌아와 이렇게 후기를 작성하고 있다. 산악지역을 다니느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여행 일수가 소요됐고, 체력적인 부담도 무척이나 컸었다. 더군다나 올 여름은 무더위가 맹위를 떨치지 않았던가!

 

 

 

* 경북 봉화의 청량산: 청량산의 하늘다리다. 역시 산 정상부에는 바람이 많이 불더라. 청량산의 초입에서는 바람 한 점 없었는데, 왜 하늘다리에서는 그리도 강풍이 불어대던지! 바람에 의해 미묘하게 흔들리는 하늘다리를 걸어보는 것도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지난 56일간의 여행에서 나는 많은 것을 얻었고, 느꼈다. 더불어 아쉬움도 스쳐갔다. 이번 여행이 국내에서 행하는 장거리 자전거여행의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만 거의 1200km 정도를 주행했는데 지난 5년간 누적된 거리만 따지고 보면 한 5400km 정도가 된다. 국내에서 5000km 이상 뛰었으면 많이 뛴 것 아닌가?

 


이제는 발길을 돌려 해외로 나가야 할 것 같다. 오늘부터 하나하나 지난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의 이야기 보따리를 꺼내들 생각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도 있었고, 살벌한 이야기도 있었다. 또 폭염에 지쳐 황천길로 갈뻔한 이야기도 있었으니 <나무들의 행복세상> 블로그를 방문해서, 주인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이번에는 동영상도 여러편 찍었는데 그것들을 잘 편집해서 공개할 계획도 있다. 물론 내가 아직 동영상 찰영은 미숙한 점이 있으니 사전에 양해를 구한다.

 

 

 

* 청량산에 위치한 청량사: 청량사는 내가 가본 사찰 중에 가장 시원한 배경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저기에 계신 부처님은 참 행복한 부처님이 아닐까 한다. 

 

 

 

 


아참! 작년에는 36일간 1300km를 주행했다고 하는데 왜 올해는 56일 동안 여행했으면서 겨우 1200km 밖에 이동하지 못했냐고 의문을 던지실 분이 있을 것 같다. 체력적인 한계 때문이 가장 큰 이유였다. 사실 너무 힘들었다.


자전거로 서해안을 타고 가는 것과 강원도 산악지형을 가는 것은 피지컬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난다. 또한 이번 여행부터는 체류형 여행으로 여행 형태를 바꾸었다. 따지고보니 강원도 화천에서 5일, 울릉도에서 7일, 강원도 태백에서 5일 등등... 지난 여행과는 달리 한 지역에서 며칠을 소요했던 것 같다.

 


사실 지금 국토종단자전거여행을 하라고 하면, 나의 철TB로도 한 4~5일이면 가능하다. 그런데 그게 무슨 재미인가? 그런 의문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기왕 시간내서 가는 여행이라면 주행도로에서 벗어나 인근의 명승지나 역사유적들도 둘러보고, 주위에 어르신들도 만나서 그 지역에서 일어나는 현안들도 들어본다면 더 알찬 여행이 되지 않겠나?


그렇게 하는 것이 여행의 퀄리티를 더 높일 수 있을거라는 생각에서, 나는 주행거리는 줄이고 체류 일수는 늘렸던 것이다.

 


앞으로 한편 한편 써내려갈 나무들의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기대하시라! 지갑이 가벼운 여행자들을 위해 내 나름대로의 TIP도 알려드릴테니 많이들 오셔서 클릭 좀 이빵이 해주시라! ㅋ

 

 

 

 

 

 

 

 

* 경북 김천: 경북 김천의 한 폐교를 개조한 문화공간에서 재밌는 사진을 찍어봤다. 저 인어공주(?)가 머리에 쓴 헬맷은 내 것이다.

 

 

 

 

 

* 지리산 성삼재: 저 무거운 자전거를 끌고 노고단의 관문인 성삼재에 다다랐다. 자전거 앞,뒤로 짐이 가득 실려 있던 터라 팔과 다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정말 너무 힘들었다. 정말 만만치가 않았다. 하지만 오르고 나니 지리산이 나를 반겨주었다.

 

 

 

 

 

* 지리산 노고단 부근: 그렇게 힘든 여정이 있었기에 지리산에 이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영광을 얻은 것이 아닐까? 동이 트고 있을 때라 좀 어둡기는 하지만 지리산의 영험함이 느껴지는 사진이다!

 

 

 

 

 

 

 

 

       * 2코스 숲 : 2코스가 끝날 무렵 저렇게 울창한 숲을 만날 수 있다.

나도 관악산을 많이 다녔는데 이런 나무 숲은 처음이었다.

 

 

 



 

* 손성일 대장님과 아도행 회원님: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아름다운 도보여행 회원분들과 함께한 관악산 둘레길 걷기>

 

 

 

일시: 2012년 5월 16일 수요일

장소: 관악산 둘레길 1~2코스

소요시간: 약 4시간 30분 정도( 식사시간, 휴식시간 포함)

인원: 손성일 대장님을 비롯한 아도행 회원님

기타: 날씨 맑음. 사진빨 잘 받는 날씨였음!

 

 


 

 

* 1코스를 걷고 있는 아도행 회원들: 1코스를 지나면 낙성대가 나온다.

 

 

 

 


 

단독으로 지리산에 가고, 단독으로 자전거 전국여행을 다녀오고, 단독으로 트레킹을 하고...

그러고보면 난 계속 단독으로만 아웃도어를 즐긴 것 같다. 왜 단독으로만 아웃도어를 하고 다녔냐는 상대방의 물음에 항상 머뭇거렸었다. 특별히 모범 답안 같은 것도 없을 뿐더러, 괜히 '친구도 없는 왕따라서 혼자 다녀요!'라고 실토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ㅋ

 

내가 아도행을 알게되고 관심있게 지켜본 계기는 2010년도에 있었던 삼남길 개척단 때문이었다. 난 삼남길 개척단 1기였고 거기서 손성일 대장을 처음 만났는데 손대장님이 개척단들에게 아도행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나야 등산, 자전거, 트레킹을 골고루 하는 짬뽕 아웃도어 맨이지만 한편에서는 항상 이런 생각들이 맴돌았다.

 

'아웃도어의 종착점은 어딜까? 결국 그많은 아웃도어 마니아들은 다 어디로 회귀를 할까?'

 

 



 

 * 1코스: 1코스를 누비는 아도행 회원들 

 

 

 


 

내가 내린 답은 도보, 즉 걷기였다. 결국에는 도보로 돌아올 거라는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난 작년에 재밌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7월 경이었는데, 당시 난 제2차 자전거 국토종단 여행중이었다.


전북 진안을 지나고 있었는데 제주도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걷기 국토종단을 나선 어떤 분을 만난 것이다. 나처럼 단독여행자였는데 그 분은 나를 무자게 부러워하더라~ 20kg짜리 배낭을 메고 이동을 한 것 자체가 고역이라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내가 무척 부러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걸 어쩌나? 난 그 도보여행자 분이 정말 부러웠는데. 무동력(No-moter)여행 중에서 가장 최고봉은 아무래도 걷기가 아닐까 한다. 자전거여행도 만만치 않게 힘들긴 하지만 도보여행자 앞에서는 그저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잠깐! 그럼 당시, 나와 그 도보여행자는 서로서로를 부러워 한 셈인가? ㅋ

 

내 아웃도어는 차후에 도보여행으로 종결지어질 것 같다. 어차피 내가 그렇게 체력이 강한 편도 아니지 않은가. 분명 피지컬적인 면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신체가 허락하는 한, 난 계속해서 아웃도어를 즐기고 싶은 만큼 도보여행이 가장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든다.

 

 



 

* 낙성대: 관악산 둘레길 덕분에 낙성대도 오랜만에 가봤다!

 

 

 

* 강감찬 장군상: 강감찬 장군의 기상이 느껴지는 동상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번 아도행 회원분들과의 관악산 둘레길 걷기는 참 좋은 시간이었다. 나보다 훨씬 더 연배가 높으신 분들과 함께 걷기를 한 것도 참 오랜만에 일이었다. 역시 아름다운 길은 혼자 가는 것보다 여러명이서 함께 걷는 것이 더 좋다.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일행 모두가 동시에 감탄사를 외쳤을 때의 느낌이란!


축구에서 우리가 응원하는 팀이 골을 넣었을 때,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는 것과 대동소이하다고 할까나?




관악산은 서울 남부 지역의 대표적인 명산이지만 관악산에 둘레길이 개설됐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관악산 둘레길을 걷는 분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당시 우리가 이동했을 때가 주중이라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관악산 주 등산로를 이동하는 사람들과 비교를 해보면 확실히 적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홍보의 미흡함도 있겠고, 아직 전 구간이 다 개통되지 않은 점 등 미비점들이 있긴 하다.

 

 



 

* 2코스: 2코스 입구에는 장승들이 줄지어 서 있다. 2코스는 예전에는 무척 지저분했었다. 등산로도 정비가 안 됐고

쓰레기들도 많았는데...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저렇게 정비가 잘 된 길로 변했다.

 

 

 



 

또한 손 대장님이 지적을 한 것인데 둘레길이라고 하면, 높아봐야 5부 능선 사이에서 길이 개설되어야 하는데 애초에 관악산 둘레길은 7부 능선 이상으로 연결하는 것으로 구상됐다고 한다. 등산을 즐겨하는 사람들은 5부든 7부든 상관은 없겠지만 아웃도어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7부보다는 5부 이하에서 걷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래야 무릎과 허리에 무리가 덜하지.

 

토르님도 1코스 시작지점이 급경사가 아니냐는 의문을 던지셨다. 하긴 내가 봐도 1코스의 시작점은 좀 경사도가 높긴 했다. 또한 협소하기도 하다. 그래서 팀으로 이동하는 분들은 따로 준비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나오지 않을 것 같다. 어찌댔든 애초 기획안보다는 현재의 노선이 좀 더 걷기 편해졌다고 한다.

 

역시 관악산 둘레길도 등산하는 느낌을 준다. 단지 수직적인 개념이 아닌 수평적인 개념을 전해준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번 도보여행은 1~2코스만 행했지만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1~3코스까지 통으로 한 번 다 걸어보고 싶다. 아카시 꽃이 만발한 관악산이 집근처에 있어서 참 좋다. 조만간 또 한 번 가봐야겠다.

 

 



 

 

*2코스: 장승들 사이를 걷고 있는 손 대장님

  

 

 

 

 

* 관악산 둘레길 지도: 관악산 메인 등산로 하고는 많이 차이가 난다.

'A코스',  'B코스'라는 표시는 내가 임의 편집하여 만든 것이다.

 

 


 

 

 *** 4년 전에 쓴 글인데... 이번에 블로그 정리하면서 다시 재정열, 갈무리 해봅니다.

 

 

 

 

 

 

 

 

 

 

 

 

 

 

 

 

 

 

 

 

 

 

 

 

 

 

 

 

 

 

 

 

 

 

나같이 단독 여행가에게 사진은 나를 담아내는 하나의 도구일 수 있다. 

최소한 여행할 때는 나의 분신 역할을 해준다고 할 수 있다.

 혼자 떠난 여행이기에 나를 피사체 삼아 사진을 찍어주는 사람이 없기에...

 

그렇게 찍은 사진들을 모아보면 내가 평소에 마음을 두었던 이미지들이

도출되는 듯싶다.

이 사진은 충남 천안시 광덕면에 위치한 천년 고찰인 광덕사이다.

천안시 광덕면은 우리가 알고 있는 천안 삼거리, 그 교통의 요지인

천안이 아니었다. 높지 않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그런 아름다운 산촌이었다.

 

이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좀 마음이 경건해진다. 길이나 도로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그냥 드립다 달리고 싶은데... 이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당장 108배라도 올리고 싶다.

 

최소한 이 사진을 보고 있을 때 만큼은 나도 구도자가 되련다.

 

 

 

2009년 7월에 있은 자전거 국토종단여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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