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중놀이를 볼 수 있는 거창아시아1인극제!

 

제26회 <거창아시아1인극제> 참관기

 

15.08.11 15:19  최종 업데이트 15.08.11 15:19

 

 

 

 

 

▲ 거창아시아1인극제 필자가 '이효리'라고 부른 자원활동가가 동네 어르신에게 잔치국수를 직접 말아드리고 있다. '이효리' 를 비롯하여 총 6명의 대학생 활동가가 열심히 맡은바 소임을 다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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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일.

더웠다. 강렬한 햇살이 얼굴을 덮치듯 내리쬐었다.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땀이 안경에 튀어 시야가 흐려졌다. 가뜩이나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는데, 그래서 발걸음이 꼬이는데 앞까지 잘 안보이니...

"작년엔 비가 와서 공연 준비가 어려웠고, 올해는 폭염이 스태프들을 잡는구나!"

 

 

 

 

거창귀농학교에서 펼쳐지는 '거창아시아1인극제'

 


필자가 스태프로 참여한 행사는 올해로 26회째를 맞는 '거창아시아1인극제'다.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비슷한 시기에 개최되는 '거창국제연극제'와 구별되는 행사로 백두대간 삼봉산이 올려다 보이는 거창귀농학교에서 행해진다.

거창귀농학교는 삼봉산문화예술학교라고도 불리는데 폐교를 리모델링한 곳으로 거창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20km 정도 떨어진 고제면에 위치해 있다. '거창국제연극제'가 수승대라는 명승지에서 개최되는 큰 규모의 연극제라면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거창 읍내에서도 20km 정도 떨어진, 궁벽진 곳에서 행해지는 행사라는 뜻이다.

공연장의 규모뿐만 아니라 행사비용도 비교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거창아시아1인극제'에 참여한 참가자들은 '거마금' 정도만 받고 공연을 진행했다.

 


 

 

 


 
▲ 만석중 만석중 인형. 목각인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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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작은 산골짜기 연극제로 '쪼그라'들었지만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국내 유일의 모노드라마(monodrama) 축제다. 현재의 '거창아시아1인극제의 기원은 1988년, 서울 바탕골 소극장에서 펼쳐진 '아시아1인극제'에서 찾을 수 있다. 1회 대회를 치른 이후 '아시아1인극제'는 아시아 각국을 돌며 매해 개최되었다. 이후 1996년부터는 충남 공주에 있는 공주민속박물관이 주관이 되어 공연을 하게 된다. 이에 명칭도 '공주아시아1인극제'로 바뀌게 된다.

'아시아1인극제'가 현재의 체제로 자리를 잡은 건 2007년 이후부터였다. 거창의 진산인 삼봉산의 아래에 위치한 거창귀농학교에서 모노드라마 축제가 열리게 되니 이에 명칭도 '거창아시아1인극제'로 변하게 된 것이다.

 

 

 

 

 


 
▲ 만석중놀이 운심게작법을 추고 있는 연극인 한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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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볼 수 없는 만석중놀이

 


지난 3월 5일. 리퍼트 주한미국 대사가 김기종 '우리마당' 대표의 피습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주한 미국 대사의 피습이란 미증유의 사건이 발생해서인지 당시 언론들은 김기종과 관련된 이력들을 앞 다투어 보도했다. 그런 보도들은 거의가 김기종의 기이한 행적들에 대해서 초점이 맞추어졌다. 문제는 그런 보도들로 인해 애꿎은 우리전통놀이까지 도매금으로 격하됐다는 점이다. 김기종은 '우리마당'이외에도 '만석중놀이보존회'의 대표직을 겸하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만석중놀이까지 싸잡아 질타를 당했던 것이다.  

만석중놀이는 고려시대 때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나라의 전통 무언극이다. 개성 일대에서는 초파일을 전후하여 사찰 부근에서 그림자놀이가 펼쳐졌는데 이 놀이가 바로 만석중놀이다. 어두운 밤, 사찰 인근에 큰 광목천을 걸어 놓고 횃불을 피워 용, 잉어, 사슴 같은 종이 인형의 그림자가 비추게 하여 놀이를 진행했던 것이다.  알록달록한 색깔이 입혀진 인형들, 즉 십장생들이 그려진 인형들이 광목천에서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면서 이야기가 흘러간다.

만석중놀이의 주인공은 만석중이라는 나무 인형이다. 십장생 인형들이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만석중 인형은 '탕'하고 소리를 낸다. 이 소리는 만석중을 조종할 때 나는 소리로 만석중 인형의 조종은 다른 인형들과 마찬가지로 광대가 한다. 만석중 인형이 내는 '탕'하는 소리는 목탁 소리 같기도 하고, 죽비소리 같기도 하다. 어리석은 무지몽매함에서 벗어나 세상을 직시하라는 경고처럼 들리기도 한다.

 

 

 

 


 
▲ 만석중놀이 인형을 조종하고 있는 광대들. 인형의 색깔이 참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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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중놀이의 대미는 운심게작법이라는 승무다. 용과 잉어가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클라이맥스 단계에서 운심게작법이 펼쳐진다. 운심게작법을 끝으로 40여 분에 걸쳐 올려진 만석중놀이는 끝이 난다.

만석중놀이는 쉽게 볼 수 없는 공연이다. 무대 세팅의 번거로움은 둘째 치고, 이 놀이를 행할 광대들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돈을 들고 대학로를 가 봐도, 국립극장을 가 봐도 '티켓'을 구할 수가 없다. 만석중놀이를 재연할 수 있는 광대들은 우리나라에서도 극히 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운이 좋았는지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만석중놀이를 감상할 수 있었다. 올해는 아예 무대 뒤편에 시선을 두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십장생 인형들이 어떻게 조정되는지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실내 공연이었다면 어림없는 이야기겠지만 실외공연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스태프 아닌가? '거창아시아1인극제'의 스태프로 참여한 '특권'을 톡톡히 누렸던 셈이다.

 

 

 


 
▲ 황해도 작두굿 마고당 서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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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두 좀 타 봤수? 황해도 작두굿!

역시 사람의 취향은 제각각이었다. 필자는 만석중놀이에 방점을 찍어 시선을 고정시켰다면 대다수의 관객분들은 황해도 작두굿에 열광을 하는 분위기였다.

마고당 서문정이 행한 황해도 작두굿은 남한에서는 보기 드문 황해도 지역의 굿판이라고 한다. 요즘에는 작두를 타는 모습이 흔하게 보이지만 예전에는 꼭 그렇지 않았다. 통상 북쪽 지방인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작두굿이 많이 벌어졌고, 남쪽으로 갈수록 작두를 타는 무속인들이 적었다고 한다. 무당이라고 모두 작두를 타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황해도 작두굿은 고정형 작두만 이용하지 않고 이동식 작두도 사용했다. 그러니 다양한 변형방식도 등장했다. 서문정은 발뿐만 아니라 손목과 배, 심지어 목에까지 작두를 들이댔다. 작두 위에 목을 올려놓으니 마치 '기요틴(단두대)'에 머리가 오른 듯했다. 한 여름 밤에 호러쇼(?)가 펼쳐졌다고나 할까? 이렇게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내던졌으니 황해도 작두굿의 인기는 상당했다.

독자들 중에는 작두가 가짜가 아니냐고 의구심을 품으실 분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필자도 그런 의구심을 품었다. 그래서 눈을 크게 뜨고 작두의 상태를 관찰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가짜 작두가 아니었다. 나중에 뒤풀이에서 마고당 서문정 선생의 상처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온 몸이 상처 투성이었다. 발에도, 팔에도, 심지어 배와 목까지... 역시 세상에 그냥 되는 일은 없는 듯싶었다.

No pain, No gain!

 
▲ 전통공연예술단 난타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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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에는 문화버스를 타고, 거창으로?

박일화 선생의 창작 춤 공연, 전통공연예술단의 타혼 공연 등이 이어졌고, 그렇게 26회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잘 마무리됐다. 달빛이 아름답게 쏟아지는 거창의 한 시골마을에서 행해진 모노드라마 축제는 내년을 기약하며 막을 내렸다.

"그래도 작년보다 관객이 더 많이 들었어요."

이 말이 참 고마웠다. 낮에 흘린 땀방울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니까. 내년 27회 '거창아시아1인극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와서 즐기는 축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문화버스'가 와도 좋을 것 같다. 1박 2일로 연극제를 즐길 수 있는 문화버스 말이다. '문화버스'를 타고 와서 공연도 공짜로 보고, 공짜로 밥도 얻어  먹을 수 있다면 그거 훌륭한 여름휴가 아닌가?

 

 

 


 
▲ 창작무 박일화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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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가정법이 없다고? 그럼 역사에서 교훈을 찾자!

 

[리뷰] 영화 <암살>을 보고

 

15.07.28 14:10   최종 업데이트 15.07.28 14:11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줄거리가 담겨 있습니다.

 

한이 서려 있을수록 역사의 가정법은 더 왕성해진다


우리는 흔히들 말한다. 역사에서 가정법은 없다고. '한니발이 로마에 패배하지 않았다면', '광해군이 인조반정에 의해 축출되지 않았다면'... 아무리 간절하게 이런 가정들을 한다 해도 해당 사건들을 다른 식으로 돌이킬 수는 없다.

역사에서 가정법을 적용하려는 사람들은 해당 역사를 쟁취하지 못한 이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도 그럴 것이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을 격퇴한 로마군이 뭐가 아쉬워서 역사의 가정법을 사용하겠는가? 능양군(인조) 세력들도 무엇하러 광해군 걱정을 하겠는가?

이렇듯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역사의 가정법은 해당 역사에서 소외된 이들, 혹은 그들에게 공감하는 후세의 몫으로 남게 된다. 역사의 가정법은 정통 역사서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소설이나 영화 같은 예술 분야에서 생명력을 얻게 된다. 해당 역사가 한이 서려 있으면 있을수록 가정법은 더욱더 왕성한 생명력을 얻게 된다.

영화 <암살>도 역사의 가정법을 스크린으로 옮겨 놓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에 대한 가정법? 친일매국노 척결에 대한 가정이다. 실제로 <암살>이 그려낸 장면들은 사실이 아니다. 영화에서처럼 1933년에 친일매국노 강인국(이경영 분)과 조선 주둔군 사령관 가와구치가 저격을 당하지 않는다. 사실 강인국과 가와구치라는 인물조차도 가공의 인물이다.

 

 


 
▲ 포스터 영화 암살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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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자가 더 무서운 법이다


필자는 스크린에서 보이는 내용이 명백히 허구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2시간 동안 팝콘도 먹지 않으며 열심히 집중할 수 있었다. 필자도 최동훈 감독이 제시하는 역사적 가정법에 크게 공감했다는 뜻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해 서슴없이 민족까지 팔아먹는 강인국은 탐욕적인 친일매국노의 캐릭터를 대변했다. 소설 <꺼삐딴 리>의 이인국 박사의 이름을 옮겨온 듯한 강인국은 자신의 이익과 배치된다면 서슴없이 가족들에게도 총질을 해대는 인물이었다.

이와 달리 염석진(이정재 분)은 김구 선생의 표현처럼 '어떨 때는 선비 같고, 어떨 때는 깡패 같은' 다층적인 면을 보인다. 극 중에서 염석진은 김구의 총애를 받으며 임시정부 경무국 대장 직위를 맡고 있지만 실제로는 일제의 밀정이었다.

거칠게 이야기하면 강인국은 처음부터 매국노였고, 염석진은 독립운동을 하다 밀정이 된 변절 매국노라고 할 수 있겠다. 원래 변절자가 더 무서운 법이다. 자신의 변절 행위를 지우기 위해 더 '임팩트' 있는 모습을 보이려고 하기 때문이다.

염석진은 암살 임무를 띠고 경성으로 떠난 안옥윤(전지현 분)과 속사포, 최덕삼 등을 제거하기 위해 하와이 피스톨(하정우 분)을 고용한다. 안옥윤 팀은 염석진이 직접 소환했다. 염석진은 자신이 직접 '소환'한 암살팀을 죽이기 위해 킬러들까지도 몰래 '픽업'한 것이다.

 

 



 
▲ 백범 김구 남산에 있는 김구 선생 동상. 청소를 안 했는지 곳곳에 푸른색 곰팡이가 끼어 있었다. 지난 7월 19일에 촬영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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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가정법이 없다면, 역사에서 교훈을 찾자


<암살>은 '민족주의적' 시각을 털어낸 후 본다고 해도 수작이 될 만했다. 이정재와 하정우의 불꽃 튀기는 연기 대결만으로도 영화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을 테니까. 더군다나 영감(오달수 분), 속사포(조진웅 분), 황덕삼(최덕문 분) 등의 감초 연기는 관객들을 쉴 새 없이 웃게 하였다.

광복을 맞이하는 순간, 김구 선생과 김원봉(조승우 분) 선생이 서로 술잔을 기울이는 장면이 나온다. 약산 김원봉은 잔에 술을 채우며 이런 말을 남겼다.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

이 부분에서 필자는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 김구와 김원봉, 두 거물에다 단재 신채호 선생까지 술자리에다 합석시키는 것이다. 물론 단재 선생은 1936년에 돌아가셨으니 그 세 분이 1945년도에 자리를 같이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억지로 단재 선생까지 소환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반민특위에 불려 나온 염석진은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며 오히려 역정을 낸다. 거기에 더해 안옥윤이 "왜 배신을 했느냐"고 묻자 이렇게까지 답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일본이 빨리 망할 줄은 몰랐으니까!"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닌가? 그렇다. 소설가 이광수, 시인 서정주가 광복 이후에 실제로 내뱉은 궤변이다. 이렇게 궤변을 내뱉었어도 그들은 잘살았다. 그와 달리 독립운동가들은 찬밥 신세에다 모욕감까지 느껴야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김원봉이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 노덕술에게 고문을 당했다고 생각해 보시라. 실제로 김원봉은 그렇게 당했다. 독립군을 고문했던 악질 노덕술에게 해방 후 조국에서 수모를 겪었다.

글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역사서에는 가정법이 들어설 수 없다. 하지만 역사의 가정법은 예술의 영역에서 계속 생명력을 이어 나갈 것이다. 한편 그런 방식은 한풀이식의 자기 위안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에서 가정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서 교훈을 찾으면 된다. 자리에 동석하신 신채호 선생의 명언에서 역사적인 교훈을 얻는 것이다. 그래야 친일매국노들이 염석진처럼 적반하장을 하지 않을 테니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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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해지고 치밀해진 ‘몰카’의 계절

 

프로필이미지  곽동운

 Date 2015.06.18 11:39

 

 

 

 

본문내용

신도림역 경찰센터

 

 

 

여름! 뜨거운 계절이 돌아왔다. 과감한 노출을 감행하며 한껏 자신을 뽐내는 여성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계절이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여성들의 노출이 과감해질수록 그것을 노리는 몰카범들의 시선은 은밀해지고 치밀해진다.

 

몰카 범죄는 주로 지하철과 같은 다중이용시설에서 벌어지는데 그 증가세가 매년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이에 따라 ‘서울지방경찰청 지하철 경찰대’에서는 4월 1일부터 7월 31일까지를 지하철 성범죄 집중 단속기간으로 정해놓고 중점단속에 나서고 있다.

 

 

몰래카메라 촬영 주의 지역 안내

 

 

몰카 범죄가 늘어나게 된 원인 중에 하나는 스마트폰 카메라 기술의 발달과 관계가 있다. 디지털카메라를 능가할 정도로 고화질을 자랑하는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몰카 범죄에 이용되기까지 이른 것이다. 범죄로의 악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스마트폰은 출시될 때 카메라 셔터음이 울리도록 설계되어 있다. 하지만 카메라 ‘무음’ 앱을 내려 받으면 셔터 음이 제거된 상태로 촬영이 가능하기에 성범죄의 도구로 악용되는 것이다.

 

스마트폰 이외에도 다양한 카메라가 몰카에 이용된다. USB형, 만년필형, 신발형 등 첩보영화에서나 등장하는 초소형카메라들이 여성의 치마 속을 노리고 있다. 이렇게 기기들이 소형화, 은밀화 되니 적발하기도 어려워진다.

 

 

몰카 범죄가 일어나기 쉬운 에스컬레이터

 

 

문제는 이런 몰카 범죄를 일으키는 가해자들이 자신의 행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몰카 범죄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적용되어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 벌금형 이상을 선고 받으면 신상공개까지 되는 등 처벌이 엄격하다.

 

몰카 범죄가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만큼 피해자가 인지하기도 쉽지 않다.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예방에 있다. 예를 들어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는 몸을 엇각(45도)으로 틀어 후방을 주시하면서 이동을 하는 것이다.

 

만약 자신이 몰카 범죄에 노출이 됐다 싶으면 지체 없이 112나 1366(여성긴급전화)에 신고를 한다. 몰카 특성상 촬영자가 해당 파일을 삭제하면 범죄 사실을 적발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 포스터: 지하철 성범죄 집중단속

 

 

 

윤동주 시인이 '친일매국노'냐고요?

 

청년들의 역사 인식 수준 안타까워

 

15.06.16 11:23   최종 업데이트 15.06.16 17:22

 

곽동운(artpunk)

 

 

 

 

 

 

 

 

 
▲ 서시 윤동주 문학관 뒤편, 시인의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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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이야 모두 다 아실 테죠. 유명한 서시도 잘 아실 거고요."


자하문이라고도 불리는 창의문 인근에는 윤동주 문학관이 있고, 그 뒤편으로는 시인의 언덕이 조성되어 있다. 지난 5월말 필자는 그 언덕에서 역사트레킹 참가자들에게 윤동주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윤동주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보다는 국문학에 가깝기에 짧게 설명을 한 후 다음 코스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괜히 서시를 통째로 외워보라고 짓궂게 구는 참가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빨리 이동하는 게 상책이었다.

"서시만큼 유명한 참회록도 아시죠? 참회록은 윤동주가 창씨개명을 한 후 스스로에게 느낀 자괴감을 시어로 풀어낸 것이라 합니다."

이 정도로 설명을 마친 후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설명을 듣던 참가자 한 분이 불현 듯 이런 말을 건넸다.

"창씨개명을 했다면 친일파가 아닌가요?"

 

 

 

시인 윤동주가 친일매국노?


잠깐 발걸음이 꼬였다. 윤동주 시인이 친일파라는 소리를 듣다니! 하늘에 있을 시인은 무척 억울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비교적 젊은 사람들, 또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의 역사 지식수준이 '꽝'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필자는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있다. 그간 역사트레킹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고, 많은 유적지들을 탐방했다. 역사트레킹이 제주 올레를 정점으로 한 걷기열풍의 부산물, 혹은 편승물이라는 조롱과 질책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름대로 그 안에서 보람도 찾았고, 재미도 느꼈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처음부터 트레킹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중간에 코스를 잊어버려 참가자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고, 저질(?) 체력인 참가자들의 보폭을 고려하다 시간이 너무 많이 지체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해당 유적에 대한 설명이었다. 즉 필자의 역사 실력이었다. 트레킹의 참가자들이 주로 젊은층들이라 그들의 날카로운 질문 공세가 예상됐었다. 그래서 이런 걱정까지 하게 됐다.

"이거 내 역사 실력이 확 드러나는 거 아니야? 학교 다녔을 때도 역사 점수 안 나왔었는데..."

저런 자조의 말이 괜히 나왔던 게 아니었다. 실제로 필자는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그래서 학술서적보다는 대중서적을 읽으며 역사에 대해서 지식을 쌓았다. 그렇다고 학벌이 좋냐?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장점으로 내세울 수 있는 건 20년 가까이 종이신문을 꾸준히 읽은 것과 국제정치에 관심이 많다는 점이었다. 그런 장점들까지 끌어들이고서야 겨우 참가자들 앞에 설 수 있었다. 한국사에서 바닥을 치면, 세계사로 넘어가고, 그것도 역부족이다 싶으면 국제정치로 도망치자(?)는 게 전략이었다. 어쨌든 초창기에는 실력이 '뽀록'날까봐 무척 조심스럽게 행동을 했었다. 

하지만 두어 번 역사트레킹을 진행하다 보니 역사 실력에 대한 고민은 싹 사라지게 됐다. 오히려 너무 느긋했다. 나중에는 말장난까지 하면서 참가자들을 농락(?)할 정도였다. 이런 극적인 변화는 왜 일어난 것일까? 밑천이 드러날 걸 초조해하던 마스터가 참가자들을 농락하기까지 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런 극적인 변화는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사람들의 역사 지식이 '꽝'인 것에 토대를 두고 있다. 참가자들이 역사 지식에 무지하다면 그만큼 필자의 '구라'가 통할 여지가 크다는 뜻이 된다. 

- 조선총독부가 무엇을 하는 곳이고,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 모른다.
- 서대문형무소가 어떤 곳인지 잘 모른다.
- 동학군을 이끌던 전봉준 부대가 어디서 패배를 했는지 어디를 가고자 했는지 모른다.

필자를 당혹스럽게 했던 참가자들의 발언들을 모아봤다. '이 정도면 당연히 알겠지' 하는 필자 나름대로 그어놓은 상식선은 저런 발언들로 인해 여실히 깨지게 됐다. 상황이 이러하니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거 사기 쳐도 되겠는데... 그래서 그런가. 권력자들은 똑똑하지 않은 국민들을 선호하는 건가?'

 

 

 


윤동주를 괴롭게 했던 창씨개명, 그리고 참회록

 
▲ 시인의 언덕 윤동주 문학관 뒤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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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윤동주 시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1941년 겨울, 윤동주는 '히라누마 도슈'라는 창씨명을 얻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윤동주 개인의 의사가 아닌 창씨개명이었다는 점이다. 집안 자체에서 행해진 것이지 윤동주가 직접 행정기관에 찾아가 창씨개명 서류에 도장을 찍은 게 아니었다는 뜻이다. 의도하지 않은 자신의 창씨개명에 대해서 윤동주는 '참회록'에서 자괴감을 드러내게 된다.


한편 당시는 중일전쟁이 이미 발발한 상태였고, 태평양전쟁까지 일어났다. 일제의 침략 야욕이 극에 달할 때였다. 식민지 조선에도 총동원령이 내려져 식량이 배급되기에 이르게 된다. 이때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서는 창씨개명이 필수였다고 한다. 그런 생존과 직결된 문제와 연결되어 있기에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을 모두 '친일 매국노'로 분류한다는 건 적절하지 않은 일이다. 실제로 반민특위에서도 창씨개명 자체를 친일행위로 보지 않았다.

윤동주 시인은 일본 황군을 화끈하게 격려하고 '일본이 이렇게 빨리 망할 줄은 몰랐다'고 궤변을 늘어놓은 시인 서정주나 소설가 이광수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를 했기 때문이다. 윤동주가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죽음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청년층의 역사 인식 미비도 큰 문제


함께 장시간을 걸으며 동고동락한 참가자들을 폄하하는 내용을 작성하는 터라 필자의 마음은 편하지가 않다. 하지만 젊은층의 역사 인식이 생각보다 미비하다는 점을 꼭 알리고 싶었다. 청소년층의 역사 인식이 심각하다, 그래서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지만 20~30대 청년층의 역사 인식도 만만치 않게 수준이 낮다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 부족한 역사인식을 무엇으로 채워줘야 할까? 역사, 교양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해줘야 할 것이다. 역사교양 강의의 확대, 역사체험 학습의 다변화 등등... 적어 놓고 보니 뻔한 대답이다.

그런 뻔한 것들이 쌓이다보면 내공이 된다. 그 내공은 역사 인식이 빈약한 정치인들을 솎아낼 수 있는 거름체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놈이 그놈이다.'

이렇게 싸잡아 묶어버리는 언어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놈' 중에서도 덜 나쁘고, 덜 때가 묻은 사람들을 솎아낼 수 있는 내공이 생긴다는 뜻이다. 그럼 역사를 현실에서 써먹게 되는 셈이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헬도림'에 작은 숨통이 트이게 됐다!

 

신도림역 선상 역사 개통을 바라보며

 

15.05.30 15:34   최종 업데이트 15.05.30 15:34

 

곽동운(artpunk)

 

 

 

 

 

 

 
▲ 신도림역 선상역사 테크노마트 방면에서 바라본 신도림역 지상역사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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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찍으세요? 사무실에 허가는 맡으셨나요?"

"예... 역내 공간을 촬영하는데 허가까지 맡아야 하나요?"
"일단 역무실에 가서 말씀 한방만 해 주시면 되는데..."
"납득이 좀 안 되네요. 폐쇄된 곳을 찍는 것도 아니고 오픈된 역사 안을 촬영하는데요. 시청역이나 서울역에서 촬영을 할 때도 허락받으라는 소리는 없잖아요. 더군다나 저는 여기 홍보해주려고 왔는데..."
"말씀 잘 알겠는데... 그래도 역무실에 가서 말씀 한방만..."

 


지난 5월 24일, 선상역사(철로 위에 건설된 역사)가 개통된 신도림역에서 필자는 어떤 역무원과 작은 언쟁(?)을 벌였다. 개통 당일 날인 23일에는 같은 이유 때문에 사회복무요원과 작은 실랑이를 벌이기 했다. 연이틀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사진 촬영이 원활하게 되지 않자 좀 언짢은 마음이 들었다.

"무장한 보완요원이 활보하는 인천공항에서도 마음껏 사진촬영을 하는데... 전철역에서 사진을 허락을 맞고 찍어야 된다고? 더군다나 역사가 새로 개통됐다고 홍보할 목적으로 찍은 건데..."

그렇게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국철 1호선 플랫폼으로 내려갔다. 그러다 번뜩 이런 생각이 스쳐갔다.

'신도림역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스트레스 많이 받나 보네. 지상역사를 만드는데 450억이나 들였다고 욕 먹고, 한편으로는 혼잡도를 줄이지 못했다고 욕 먹고 있으니 말이야. 그러니 저렇게 민감하지!'

 
▲ 신도림역 6번 출구 선상역사 개통으로 이제 신도림역은 총 6개의 출구를 갖게 됐다. 예전에는 3개 뿐이었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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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이용객 50만 명 중 국철 승객은 '겨우 5만'


그렇게 연유를 따지다보니 꼬인 실타래가 좀 풀리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신도림 선상역사와 관련된 뉴스들은 부정적인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신도림역의 근본적인 문제는 환승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선상역사가 들어서는 게 그 치유책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 가장 많았다.

하루 이용객 50만 명 중 국철 승객은 불과 5만 명 남짓이기에, 선상 역사 개통이 혼잡도 개선에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JTBC는 23일 방송에서 기존 지하 역사를 이용했을 때보다 선상역사로 직접 이동할 때가 오히려 시간이 더 많이 소요된다는 것을 리포터가 직접 보여주기까지 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역무원들이 '카메라'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신도림역 4번 출구 신도림역 4번 출구.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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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도림'에 자신의 발걸음을 보탠 국철 승객들

      
지난 30년 동안 신도림역은 지상으로 직접 연결되는 길이 없었다. 국철 플랫폼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하를 거쳐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야 했다. 국철 승객들은 물밀 듯 몰려오는 환승객들의 틈에 끼어, 떠밀리듯 발걸음을 내디디며 해당 플랫폼으로 이동을 해야 했다. 탁한 지하 공기를 들이쉬며 지하까지 내려가 '헬도림(신도림역을 지옥으로 빗댄 명칭)'에 자신의 발걸음을 보태야 했던 것이다.

국철 승객들이 '헬도림'에 일조를 하게 된 이유는 그동안 선상 역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1984년 4월 22일에 개통된 신도림역은 애초 탄생할 때부터 지하역사만 있었다. 지상 역사가 존재한다면 국철 승객들은 탁한 지하 공기를 마셔가며 '헬도림'에 일조를 할 필요가 없다. 국철과 지하철 7호선이 교차되는 상봉역처럼, 곧장 출구 밖으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 신도림역 디큐브시티 쪽에서 바라본 신도림역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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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 역사 개통은 이 지역 주민들의 숙원 사업


이렇듯 선상 역사의 개통은 국철 이용객들의 편의를 향상시킬뿐더러 지하 환승공간의 혼잡도도 낮출 수 있다. 실제로 근래에 들어 신도림역 일대는 상전벽해를 이룰 정도로 많이 변했다. 연탄공장, 철근공장 등이 있었던 공장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 자리에는 고층 아파트들과 대규모 상업시설들이 채워졌다. 신도림역과 직접 연결되는 테크노마트와 디큐브시티 같은 상업시설들로 출퇴근하는 인구도 많이 생겼다. 그에 따라 국철 이용객들의 수도 많이 늘어났다는 뜻이다.

필자는 지난 23일에 개통된 신도림 선상 역사의 개통을 누구보다도 더 환영했다. 선상 역사 개통은 우리 지역의 숙원 사업이기도 했다. 지난 30년간 선거철만 되면 여야를 막론하고 약방의 감초처럼 '신도림역 선상역사' 건설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하루 5만 명의 이용객이 있는 시설이 지금에서야 개통됐다면 오히려 너무 늦은 것이다.

공사에 투입된 450억 원이라는 예산이 커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 예산은 그런 일을 하라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의 편익이 결과물로 도출되는 사회 인프라는 어떤 식으로든 건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4대강 사업같이 불이익이 도출되는 사업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2조 원이라는 엄청난 예산이 투입됐지만 '녹조라떼'라는 기이한 결과물이 쥐어진다면 그거 문제 있는 거 아닌가? 

 

 



 
▲ 신도림역 신도림역 지상역사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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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내 손 안에 서울>에 기고한 글을 대폭, 수정 재작성하여 송고한 기사입니다.


 

 

 

 

 

이제 ‘헬도림역’이라고 놀리지 말아요~

 

 

신도림역, 선상 역사 개통으로 변화를 꾀하다! | 곽동운 시민기자

 

 

지난 30년 동안 그 곳에는 지상으로 직접 연결되는 길이 없었다. 목적지인 플랫폼으로 가려면 반드시 지하를 거쳐야 했다. 물밀 듯 몰려오는 환승객들의 원치 않는 환대(?)를 받으며, 그들의 보폭에 자신의 걸음을 맞춰야만 해당 플랫폼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30년 동안 국철 1호선 승객들은 환승객들과 원치 않는 조우를 해야 했다.

 

 

지난 23일 경부선 신도림 선상 역사가 개통했다

 

 

지난 5월 23일에 ‘선상 역사(철로 위에 건설된 역사)’가 개통된 신도림역에 대한 이야기다. 그동안 신도림역은 엄청난 혼잡으로 인해 ‘헬도림(신도림역을 지옥으로 빗댄 명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써야 했다. 국철 승객들과 지하철 2호선의 승객들이 서로 환승을 하기 위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탓에 그런 오명이 붙여진 것이다. 실제로 출퇴근 시간의 신도림역은 사람에 떠밀려 이동할 정도로 혼잡함이 극심하다.

 

그런 혼란을 가중시켰던 원인 중에 하나로 선상 역사의 부재가 꼽혔다. 1984년 4월 22일에 개통된 신도림역은 태생적으로 구조적인 한계가 있었다. 지상 역사가 없었기에 국철 1호선을 이용하는 승객들은 반드시 지하를 거쳐 다시 지상 플랫폼으로 올라와야 했다. 예를 들어 국철을 통해 용산역으로 간다면 이런 식의 동선이 그려진다.

 

 

지상▶ 지하이동(환승객들과 함께 이동)▶ 지상플랫폼(1호선)

 

 

하지만 지상 역사가 존재한다면 지하를 통해 환승객들과 혼잡함을 공유(?)할 필요가 없어진다. 국철과 지하철 7호선이 교차되는 상봉역처럼, 곧장 출구 밖으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선상 역사의 개통은 국철 이용객들의 편의를 향상시킬뿐더러 지하 환승공간의 혼잡도도 낮출 수 있다. 실제로 근래에 들어 신도림역 일대는 많은 주거시설들이 들어섰고, 테크노마트와 디큐브시티 같은 상업시설들로 출퇴근하는 인구도 많이 생겼다. 그에 따라 국철 이용객들의 수도 늘어났다. 일각에서 제기하는 선상 역사에 대한 평가절하가 적절하지 않다는 뜻이다.

 

 

 

신도림역 6번 출구 앞(좌), 신도림역 테크노마트 방면(우)

 

 

필자는 지난 23일에 개통된 신도림 선상 역사의 개통을 누구보다도 더 환영했다. 실제로 개통되기 전부터 선상 역사 일대를 돌며 취재용 사진을 찍었고, 개통되자마자 이용해보기도 했다. 이용한 날이 석가탄신일 연휴여서 그랬는지 아직 선상 역사를 이용하는 승객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주위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신도림역에 선상 역사가 들어선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직 홍보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은 듯싶다.

 

‘헬도림’이 ‘천국도림’으로 쉽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신도림역은 계속 변화를 하고 있다. 그 변화의 계단들이 꾸준히 놓이다보면 언젠가는 신도림역도 ‘헬도림’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

 

 

 

 

지옥의 신도림역, 1호선 지상역사로 피해가자 | 김건탁 시민기자

 

지하철 1호선과 2호선이 만나는 신도림역. 경기 남부 수도권 지역에서 올라오는 수많은 환승객들만 하루 35만 명이고, 신도림역 자체 이용인원도 13만 명이나 되어 하루 이용인원만 약 50만 명에 달하는 역이다. 이로 인해 신도림역은 출퇴근 시간에 예로부터 높은 혼잡도로 악명 높았던 지하철 역 중 하나다. 덕분에 환승하기가 너무나도 힘들어 ‘헬도림’ 이라는 별명도 생겼을 정도.

 

지금까지는 1호선만을 이용하고자 하는 승객들도 1호선에 별도의 역사가 없어, 어쩔 수 없이 2호선 대합실을 경유해서 1호선을 탑승해야만 하는 약간 불편한 구조였다. 이는 1호선에서 2호선으로 환승하는 승객들의 동선과 자연스레 만날 수밖에 없어, 신도림역의 혼잡도를 더욱 가중시키고 있었다.

 

 

지난 23일 새롭게 개통된 1호선 지상역사

지난 23일 새롭게 개통된 1호선 지상역사

 

 

이로 인해 코레일은 신도림역의 혼잡도를 조금이나마 감소시키고자 지난 2011년, 1호선 지상역사를 착공하였다. 따라서 신도림역에서 처음으로 1호선을 이용하는 승객들은 2호선 역사를 거치지 않고 1호선 열차를 바로 탈 수 있게 되었다.

1호선만을 이용하는 승객과 2호선만을 이용하는 승객 및 1-2호선 간 환승객을 분리시키는 것이 가능해져 혼잡도를 감소시키는 효과가 생긴다는 것이다.

 

 

4~6번 출구가 새로 생겨났다

4~6번 출구가 새로 생겨났다

 

 

 

새롭게 지어진 1호선 지상역사는 3개의 출구가 있어, 신도림역에는 4번부터 6번 출구가 새로 생겼다. 허나 약 450억을 투입하여 지어진 새 역사는 출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다. 바로 새로 생긴 4번과 5번 출구가 기존의 2호선 1번 출구와 방향이 완벽하게 똑같을 뿐더러, 1호선만을 이용하는 승객도 기존의 2호선 대합실을 이용할 때가 1호선 지상역사를 이용할 때 보다 2분정도 시간이 더 걸리기 때문이다.

 

 

4~6번 출구가 새로 생겨났다

4~6번 출구가 새로 생겨났다

 

 

 

그럼에도 분명한 장점은 있다. 새로 지어졌다 보니 기존의 역사에 비해 훨씬 깨끗하고, 이용하는 사람도 많지 않아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노약자, 장애인들을 위하여 11대의 에스컬레이터와 5대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더불어서 경부선 철도로 인해 남북으로 단절된 구로 지역을 연결하는 효과도 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아직까지 여러 보완점이 필요한 신도림역 지상역사. 하지만 출근 시간에 조금이라도 쾌적하게 출근하고 싶은 시민들에게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야사가 빠진 곳에 또아리를 튼 '임나일본부'설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해보기

 

15.04.23 11:39   최종 업데이트 15.04.23 11:39

 

 

 

 

 

 

 

그 이야기가 다시 돌아왔다. 아베 정권의 우경화를 타고 당당히 다시 역사교과서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그것이 무엇이냐? 임나일본부설이다.

철지난 유행가 같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설이 다시 현안으로 떠오른 건, 4월 6일 일본 문부과학성의 교과서 검정 결과 발표 때문이었다. 검정을 통과한 역사교과서 8종 중 4종에서 임나일본부에 대해서 기술됐고, 이에 우리 정부는 총리까지 나서 해당 교과서의 주장을 반박하기에 이르렀다.

독도나 위안부, 혹은 난징대학살 같은 문제를 자의적으로 해석한 일본 교과서들이 검정을 통과하고, 이에 한국이나 주변국들이 반발하는 모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임나일본부 문제는 우리의 고대사를 왜곡할 뿐더러, 일본제국주의의 한반도 '진출'의 역사적 근거로 악용될 수 있는 심각한 사안이다. 경각심을 갖고 주시를 해야 한다.  

 

 



남선경영론이라고 불린 임나일본부설

그럼 일단 임나일본부설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남선경영론(南鮮經營說)이라고도 불리는 임나일본부설은 고대시기인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일본이 한반도 남부에 통치기관을 두고 직접 지배를 했다는 설이다.

그 설의 중추적인 근거로 제시되는 <일본서기>에 의하면, 신공왕후가 몸소 군대를 이끌고 삼한지역을 정벌했는데 그 원년이 369년이라고 한다. 정벌이 끝난 후에는 임나 지역에 일본부를 설치하니 그것이 바로 '임나일본부'가 됐고, 562년 신라에 의해 망할 때까지 200년간 존속되었다는 것이다.

임나일본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도 이론적 근거로 끌어 쓴다. 이런 내용들을 일본 우익들이 주장했고, 이번 역사교과서에 실리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임나'는 가야지역을 말하는데 우리도 임나라는 지역명칭을 사용했다. 일본만 독점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의 영역은 가야지역의 세력권을 넘어 전라도 남부지역과 경상도 서부권까지 포괄한다. 사실상 한반도 남부에서 삼국과 동일한 지위를 누리며, 삼국과 경쟁체제에 있었다는 것이다.

 



 
▲ 일본 역사교과서 임나일본부를 표시한 일본의 역사교과서. 가야국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 일본역사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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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나일본부는 무역대표부?


욱하지 않는가? 하지만 감정보다는 논리와 객관성을 앞세우자. 일본 우익들의 역사왜곡을 합리적인 시각으로 격파해보자. 그들의 말대로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가 한반도 남부의 통치기관이었다면 조세징수, 군사징발, 노역동원, 구휼활동 같은 기록이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내용은 전혀 없다.

<일본서기>에는 임나일본부의 외교적 활동만 언급이 되어 있을 뿐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혼신을 기울일 때, 임나일본부는 군사도 징발하지 않고, 조세징수도 하지 않는 등 느긋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독자들 중에는 의문점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 굳이 가야지역일까'라는 의문이다. 차라리 전라도와 충청도의 곡창지대에다 설치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덧붙여질 수도 있다. 당시 왜(倭)는 철 생산지인 가야지역과의 통상에 큰 주안점을 두었다. 철의 매입과 수입에 사활을 걸었던 것이다. 변변한 제철 기술이 없었던 왜국이 철기무기 획득을 위해 가야국과 외교·통상을 중시했다는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럼 이렇게 정리가 될 수 있다.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위해 제철 무기의 획득을 국정 목표로 삼았던 당시의 왜는 가야지역에 사신들을 파견, 주재시킨다. 그런 사신들의 수도 늘어나고 주재하는 기간도 늘어나니, 그들만의 자치규약이 필요했고 나름대로 교통정리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자리 잡은 것이 임나일본부가 된 것이다. 즉 임나일본부는 가야 지역 백성들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권력기관이 아닌 그저 무역대표부였을 뿐이다. 무역대표부 혹은 외교공관이 들어섰다고 그 곳을 지배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게 따지면 미국 워싱턴에 주미대사관이 있는데 우리가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거야? 정말 그런 거야?"

 


 
▲ 역사저널 그날 KBS의 <역사저널 그날>에서 방송한 '일본,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임나일본부'편. 가야사 전공자인 인제대학교 이영식 교수가 패널로 나와 임나일본부의 허구성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했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시청을 하시는 것도 좋을 듯싶다. 2015년 4월 19일 방송분임.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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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가 빠진 자리를 치고 들어온 임나일본부설


4세기에 쓰인 일본부(日本府)라는 명칭도 역사적인 객관성이 떨어지는 대목이다. 일본(日本)이라는 국호가 7세기 이후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객관성 이야기가 나왔으니 한 가지 더 첨언해본다. 앞서 신공왕후가 몸소 선봉장이 되어 한반도를 침공했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그때 신공왕후는 만삭의 몸이었다. 뱃멀미는 그렇다 치고 말을 타기도 어려웠을 텐데... 혹시 신공왕후는 슈퍼우먼이 아니었을까?

가야사가 빠진 삼국사는 임나일본부설이 똬리를 틀기에 좋은 토양을 제공한다. 실제로 가야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이 됐다면 지금과 같은 논란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로 현재의 임나일본부설 논란은 역설적으로 우리의 반성을 촉구하기도 한다. 활발한 연구로 가야사에 '빗장'을 걸어 두었다면 일본의 역사가들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하나의 '설'이 외교적 현안으로까지 부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필자는 임나일본부설은 과거의 문제가 아닌 현재적인 문제라고 판단한다. 일제의 조선 침략을 정당화시키는 데 동원된 임나일본부설이 이제는 집단자위권 문제에 동원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집단자위권을 행사할 때 그 대상영역이 어디가 될 것 같은가? 한반도다.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필자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일본의 우익화를 염려한다면 뜨거운 가슴과 함께 차가운 머리도 필요하다. 차근차근 반박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글을 마치며 하는데 뒤가 자꾸 켕긴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대해서 뭐라고 그럴 수 있겠어? 친일매국을 한 사람을 이달의 스승으로 지정하고 아이들에게 널리 알린 게 누군데!'

 

 

* 역사저널 그날: 소품으로 광개토대왕릉비 탁본이 등장했다. 이 탁본은 실물을 1/2 크기로 줄였다고 한다. 이걸 감안하더라도 광개토대왕릉비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중동발 훈풍, 한반도에도 불 수 있을까?

 

[주장] 오바마의 광폭 행보와 북한 핵협상

 

15.04.07 11:40  최종 업데이트 15.04.07 11:40

 

 

 

 

 

 

 

악의축과 불량국가

 

'악의 축'도 '불량국가'도 이제 하나만 남았다. 그렇게 무대에 단독으로 서 있는 '주인공'은 바로 북한이다. 지난 2일 이란 핵협상의 타결로, 이제 무대는 북한의 독차지(?)가 된 것이다. 이란의 퇴장으로 인해 소련 붕괴와 911테러 이후로 만들어진 악의 축과 불량국가들은 미국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사실상 그 목표(소멸)에 도달하게 된 셈이다. 

일단 용어를 정리해보자. 불량국가(rogue state)는 소련의 붕괴 이후로 만들어진 것으로 냉전 이후 새롭게 등장했다기보다 기존에 '눈엣가시'같던 국가들을 묶어, 소련이 행했던 역할로 자리매김했다. 그 역할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적'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세계평화에 역행하고, 테러를 자행하거나 방조하는 국가들이 그 리스트에 올려졌다. 북한, 쿠바, 이란, 이라크, 리비아, 수단, 시리아 등이 올랐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을 탄압하는 이스라엘이나, 쿠르드족을 탄압한 터키가 빠져 있는 등, 불량국가 리스트는 온전히 미국의 국익적 관점에 의해 작성된 것이다.

악의 축(axis of evil)은 2002년 1월 29일, 당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연두교서 문서에서 언급한 것으로 이란, 이라크, 북한이 그 대상이었다. 불량국가 중에서도 국제사회에 중대한 위협을 주는 몇 나라를 추려낸 것이다. 911테러가 있은 지 채 몇 달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한창인 시점에 발표된 것이라 그 파장은 상당했다. 정권 교체에 군사행동까지 포괄적으로 포함된다는 것으로 알려지자 해당 국가들은 크게 반발했었다.

악의 축 지정과 관련하여 북한은 무척 억울했을 것이다. 북한은 911테러가 있은 후, 테러에 대해 반대한다고 성명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또한 중동지역에 쏠린 것을 중화시키기 위해 북한이 구색 갖추기 용으로 포함됐다는 후문이 있었다. 실제로 초안에는 북한이 빠져있었다.

조지 W. 부시 정권 시절에 창안되고, 혹은 공고화된 악의 축과 불량국가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흘러간 유행가처럼 빛이 바랬다. 가다피 정권 시절에 이미 미국과 화해의 손을 잡은 리비아는 재스민 혁명의 여파로 내전 중에 있다. IS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시리아도 내전 중에 있다. 수단은 2011년 수단과 남수단으로 분리됐다. 쿠바는 작년 12월에 53년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미국과 관계 개선에 나섰다. 이라크는 굳이  언급을 안 해도 사정을 잘 아실 것이다.

 

 

적과도 악수를 하겠다


 
▲ 오바마 대통령 이란 핵협상과 관련된 문서를 열람하고 있는 오바마. 옆에 있는 사람은 벤 로즈, 국가안전보장회의 부보좌관. 백악관 홈페이지 자료사진 캡처.
ⓒ 백악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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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 대통령은 취임 전에 '적과도 악수를 하겠다'라는 큰 포부를 밝혔다. 이번 이란 핵협상 타결과 지난 쿠바와의 관계 개선은 그 포부가 결과물로 도출된 것이다. 2012년, 오랫동안 관계가 단절되었던 버마를 전격적으로 방문한 것도 결은 다르지만 그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오바마의 광폭 행보는 이란이 마지막 종착지가 아닐 수도 있다. 중동발 훈풍이 한반도에도 전해지지 말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이런 국내외 예측에 대해서 미 국무부는 이란과 북한의 경우는 사안이 다르다고 차이를 강조했다. 이란과 북한의 핵무기 고도화 수준이 엄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이번 협의에서 이란은 원심분리기를 1만 9000개에서 6104개로 줄이고, 저농축 우라늄 비축 분을 1만kg에서 300kg으로 줄이는데 합의했다.

내용에서도 보이듯 시험기기나 실험실 차원의 핵물질이 이번 합의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이미 3번에 걸쳐 핵실험을 했다. 이란과 달리 상당 수준의 핵무기 제조에 접근해 있는 걸로 알려져 있다. 이와 관련하여 벤 로즈(Ben Rhodes) 미 국가안전보장회의 부보좌관은 2013년 9월 23일에 이런 발언을 했다.

"실제로는 북한은 이미 핵무기를 가지고 있다. 북한은 핵무기를 획득했고 2006년 초 시험도 했다. 그러나 이란은 핵무기를 아직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벤 로즈의 발언에 입각하자면 미국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셈이다. 벤 로즈가 오바마의 '남자'로 불릴 정도로 오바마 행정부의 외교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만큼 당시 그의 발언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의 벤 로즈의 발언은 현재 미 국무부가 이란과 북한은 다르다고 언급한 것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셈이다.

비핵화 단계냐, 아니면 비핵화 단계를 넘어섰느냐는 큰 차이를 나타낸다. 지불해야 하는 비용적인 면에서 그 '액수'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비핵화 단계인 이란은 실험실을 '문 닫으면' 되지만 비핵화 단계를 넘어선 북한은 '더 큰' 것을 넘겨주어야 한다. 북한측에서도 '초대장'을 받았다고 순순히 그 '초대'에 응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이런 난제들 때문에 전문가들은 이란과 달리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물음표를 제기하는 것이다.

 

 

한반도발 훈풍을 기대하며


그렇다면 한반도발 봄바람은 아예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사실 이란 핵협상도 이스라엘의 강한 반대를 극복해야 했다. 이스라엘 총리인 베나민 네타냐후는 오바마 대통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국 하원에서 이란 핵협상을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시아파 이란의 부상을 꺼리는 나라 중에 하나가 수니파의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였던 것이다.

이렇듯 이란 핵협상 이면에는 주변국들의 복잡한 역학관계가 얽히고설켜 있었다. 북한 핵과 관련된 난제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것들이었다. 다음 대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오바마이기에 마지막 악수를 북한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한편 오바마는 할아버지의 나라였던 케냐도 방문할 예정이다. 그간 오바마는 케냐 출신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왔다. 그래서 이제껏 자신의 뿌리였던 케냐를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눈초리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외교행보에 박차를 가하려고 한다.

협상이라는 건 난제가 있기 때문에 꾸려지는 것이다. 고스톱이나 치려고 협상테이블에 앉는 게 아니다. 북한은 오바마를 잘 이용(?)해야 할 것이다. 임기 종료가 가까울수록 자신의 외교적 업적에 큰 방점을 찍으려고 하는 오바마는 협상 파트너로서 제격일지 모른다.

오바마가 물러나면 또 이상한 사람이 그 테이블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2000년 615공동성명,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과 조명록 차수의 워싱턴 방문, 북미공동코뮤니케 등등... 2000년 하반기에 일어난 한반도발 훈풍이 조지 W. 부시의 등장으로 일순간에 삭풍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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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가족'의 역습

 

개들은 사람처럼 '가족'을 버리지 않습니다!

 

15.04.05 16:11    최종 업데이트 15.04.05 16:11

 

곽동운(artpunk)

 

 

 

 

 

 

산티아고 순례길의 들개들

 
▲ 산티아고 순례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동네 개. 들개가 아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게재한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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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정말 소름 끼쳤어요. 여기까지 와서 개떼한테 습격을 당할 줄은 정말 몰랐거든요."


작년 11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한 젊은 여성인 K씨, 그녀는 필자에게 이렇게 하소연을 하였다. 단독으로 산티아고 길을 걷고 있었던 K씨는 인적이 뜸한 숲길에서 들개들의 습격을 받았다.

"처음에는 개들이 저를 그냥 경계를 하는 것 같던데... 그런데 제가 개를 좀 무서워하거든요. 그래서 지팡이로 몇 번 휘저으니까 개들이 공격을 하더라고요."

천만 다행으로 뒤쪽에서 순례자들 여럿이 달려와 개들을 쫓아냈다며, 그녀는 바지를 걷어 개한테 물린 부위를 확인시켜주기까지 했다.

"스페인 땅까지 와서 병원에 갈 줄은 정말 몰랐어요. 의사 선생님이 치료를 잘 해주셔서 그나마 다행이었죠."

산티아고 순례길은 편의성이 높은 도보여행길이다. 안내표지와 숙소 등의 제반시설들이 잘 갖추어져 있어 단독으로 길을 걷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순례길은 인적이 뜸한 구간이 많아 홀로 걷는 것보다는 그룹으로 움직이는 것이 좋다. 그러나 K씨는 그날 단독으로 일정을 소화하다 그만 들개들의 습격을 받았던 것이다.

K씨를 공격한 개들은 버려진 개들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순수한 의미의 들개는 아니었다. 어떤 개는 목줄도 있었고, 또 어떤 개는 크기가 고양이만한 애완견 정도였다고 했다. 추측을 해보건대 그 개들은 순례길 인근 농가에서 흘러들어 와, 그 후 들개화 된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의 농촌도 고령 인구가 많다. 주인이 사망을 하면 개들은 떠돌이가 되고, 그런 개들이 모여 들개가 된 것이라 여겨진다.

 

 

 


북한산의 들개들

 
▲ 백구 북한산 인근에서 만난 백구. 역시 주인이 있는 동네 개다. 들개가 아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게재한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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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K씨에게 말했다.


"우리나라에도 들개가 있어요. 북한산 들개들이죠. 정확히는 버려진 유기견들이지만..."

그렇다. 북한산에도 들개가 있다. 실제로 북한산 국립공원 측은 60여 마리의 들개가 북한산에 있을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북한산뿐 아니라 서울 근교 산에도 들개들이 있다. 실제로 필자는 관악산에서 진돗개로 보이는 들개와 마주친 적이 있다. 심지어 도심지와 아주 가까운 인왕산 부근에서도 직접 목격을 했었다. 이렇듯 들개 문제는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겪을 수 있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그 현실을 구체적으로 좀 더 살펴보자. 얼마전 아웃도어 모임에서 만난 A씨는 둘레길을 걷다 위험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고 했다. 젊은 여성인 A씨는 트레킹 마니아인데 주말에는 시간을 낼 수 없어 주중에 주로 둘레길을 걷는다고 했다. 그날도 단독으로 둘레길을 걷고 있는데 유기견으로 보이는 들개들과 마주쳤다는 것이다. 유기견들은 위협했고, A씨는 그 길로 도망을 쳤다고 했다.

한참을 내달려 다른 등산객들을 만난 이후에야 들개들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필자는 개들이 몇 마리였는지, 견종은 무엇이었는지를 물어봤지만 A씨는 경황이 없어 알 수 없었다고 답했다. 대신 이런 말을 남겼다.

"분명 한 두 마리는 아니었어요."

다른 사례도 짚어보자. 필자가 '수학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선배가 있는데 이 분은 자전거 마니아다. 근무지 문제로 경남 양산에 약 1년 간 머무르던 선배는 시간이 날 때마다 자전거 라이딩을 즐겼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한적한 임도길 오르막에서 유기견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 송아지만한 개 있잖아. 시베리아 허스키인가 하는... 나랑 같이 눈이 마주쳤는데 오싹하더라고. 만약 내가 중간에 내렸으면 공격을 했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그냥 계속 페달을 밟았어. 그 지역 사람들이 그러는데 그 일대에 버려진 개들이 좀 있다고 하되."

앞서 K씨가 스페인에서 당한 경우와 우리나라의 상황을 기계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팩트가 있다. 우리나라의 들개는 주인들에게 버려진 유기견이라는 것이다. 버려진 개들이 들개가 되고, 그 들개들이 사람들을 위협하기에 이른 것이다.

지난 1월 16일자, <EBS> '하나뿐인 지구, 북한산 들개'편을 보면, 최근 5년 사이에 북한산 일대에서 포획된 들개들 중 320마리가 안락사를 당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 개들은 분명 누군가에게 '소중한 가족'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개들은 버려졌고, 들개가 되어 사람들을 위협하는 존재가 됐다.
 
필자는 아웃도어를 즐겨하는 입장이라 북한산에 자주 간다. 그때마다 종종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었을, 하지만 지금은 '안락사' 대상인 존재들을 마주쳤고, 마주칠 것이다. 개 좀 버리지 말자. 좋다고 기를 때는 언제고, 나이 들고 병들었다고, 또한 아파트로 이사 간다고 그렇게 함부로 버리는가! 그렇게 '소중한 가족'을 버리는 사람들에게 필자는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인간보다 못한 개들이지만, 개들은 일부 사람들처럼 '소중한 가족'을 버리지 않습니다."

 

 

덧붙임: 들개를 만났을 때 대처법


들개를 만났을 때는 침착하게 대응해야 한다. 소리를 지르거나 지팡이를 휘두르면 개들은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한다고 여기고 공격성을 드러낸다. 가급적 정숙함을 유지하며 그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좋다. 에어파스를 뿌리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에어파스를 휴대해야 하는 불편도 있고, 파스를 맞은 견공은 큰 해를 당할 수 있으니 이 방법은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하자.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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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스는 피해야 하고, 사드는 알아야 한다!

[주장] 사드를 둘러싼 한-미-중과의 관계

 

15.03.31 14:02 최종 업데이트 15.03.31 14:02
곽동운

 

 

 

 

"사드? 사드가 뭐야. 사스 아니야? 그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이라는……."

농담 같지만 실제로 이런 말들이 오간다. '사드'와 '사스'는 어감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사스는 자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많이들 인지하고, 또한 대비책도 강구할 것이다. 하지만 사드(THAAD: 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는 명칭에도 보이듯 일반사람들이 쉽게 알아차리기 어려운 개념이다. '종말단계 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라는 한글명칭으로 바꿔도 그 뜻이 단번에 납득되지 않는다.


MD체계에서는 하늘을 3등분... 마지막단계가 종말단계

사드는 미사일방어체계(MD)의 핵심이라 불린다. MD 시스템에서는 상대국의 탄도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해 하늘을 3등분 한다. 이륙(Boost) - 중간궤도(midcourse) - 종말(terminal)로 구분 짓는데 실제로 탄도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는 구간은 중간궤도 이후 단계부터다.

이론상으로는 이륙단계부터 요격할 수 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측이 친절하게(?) 발사 시각을 알려주겠는가? 탄도미사일 공격이 '전광석화'처럼 진행되기에 요격을 할 수 있는 실제적인 시각은 중간궤도 이후부터가 되는 것이다.   

탄도미사일은 곡선을 그리며 비행하기에 가장 고도가 높은 지점은 중간궤도 부분에 위치해 있다. 이런 개념을 일반 사람들이 들으면 혼란스러워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나올 수도 있다.

"사드가 고고도라며? 그럼 최고점도 종말 단계에 있어야 하지 않아? 고고도, 종말 서로 어울리네..."

MD체계의 마지막 구간인 종말단계는 말 그대로 탄도미사일을 방어할 수 있는 마지막 영역이다. 그래서 미국은 종말단계를 고(高)고도와 중(中)고도로 세분화하였다.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만큼 중간궤도보다는 더 촘촘히 빗장을 걸어둔 것이다.

 

 
▲ 미사일방어체계 MD체계 개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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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알로 총알을 잡는다?

중고도를 담당하는 패트리어트 미사일과 마찬가지로 사드 미사일도 역시 명중률이 문제다.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미사일방어시스템을 구비했는데 명중률이 낮다면 그거 곤란한 일이 아닌가?

제조사인 록히드마틴사는 사드의 명중률을 80% 발표했다. 상당히 높은 수치다. 하지만 이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힘들어 보인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탄도미사일 발사는 발사 당사자가 친절하게 사전 고지를 하지 않는다. 차량에 실린 이동발사대는 계속 움직일 것이다. 만약 발사 모체가 잠수함이면 사전 탐지가 더욱더 어려울 수도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명중실험도 기습적인 상황 하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수송기인 C-17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타깃으로 사용되는 등 실전과는 다른 명중 실험이었다. 탄도미사일은 대기권 밖에까지 치솟아 올랐다, 정점을 찍고 다시 지구 궤도로 급강하한다. 그럼 물리시간에 배웠던 것처럼 미사일은 중력가속도가 붙어 엄청난 속도로 지구표면에 낙하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수송기에서 발사된 미사일에 그런 중력가속도를 기대할 수 있을까? 한편 그런 엄청난 낙하속도 때문에 '총알로 총알을 잡을 수 있나?'라는 말까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더미(dummy) 탄두 문제도 있다.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로켓에 인공위성을 하나만 싣지는 않는다. 각국에서 실려 온 각양각색의 인공위성들이 하나의 로켓에 실려 우주로 쏟아 올려 진다. 하나라도 더 실으면 발사국은 금전적으로 더 이득을 볼 것이다.

인공위성 발사 로켓과 동일한 하드웨어를 가진 대륙간 탄도미사일도 탄두를 하나만 장착하지 않고 여러 개를 동시에 탑재한다. 일정 지점에서 탄두가 여러 개로 쪼개지면 공격은 더 극대화되는 반면 방어는 더욱더 어려워진다는 건 자명한 일이다. 더미 탄두는 이때 이용된다. 기만책으로 '거짓' 탄두를 탑재시켜 진짜 탄두를 찾아내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사드 미사일은 더미탄두 문제도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사스는 피해야 하고, 사드는 알아야 한다!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것처럼 사드는 북한 견제용이라기보다는 대 중국 견제용이다. 일본이 북한을 '지렛대' 삼아 자위대의 확장을 꾸준히 이룩한 것처럼, 사드 문제도 미국이 북한을 '지렛대' 삼아 동북아지역에서 MD 체계를 확장시키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중국은 그토록 사드를 포함한 MD 문제에 민감할까? 중국 측도 사드미사일이 요격율이 낮다는 걸 잘 알 듯한데... 필자가 보기에는 미국과의 정보 비대칭을 우려하는 것 같다. 사드에 핵심 장비 중에 하나인 X-밴드 레이더가 남한에 설치된다면 중국의 동부 해안지역은 실시간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국은 어디에 레이더를 설치하여 정보를 얻을 것인가? 캐나다 혹은 쿠바? 꿈같은 소리다. 중국은 우리 해군의 초계기인 PC-3의 서해 상공 초계 비행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 정도로 동부 해안지역은 중국이 빗장을 꽁꽁 걸어두고 싶은 핵심적인 지역인 것이다.   

사드가 북한 방어용이든 중국 방어용이든, 그것이 실전에 사용되는 순간 남북한은 모두 석기시대로 돌아갈 것이다. 어찌 보면 참 중요한 일이 한-미-중 간에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우리는 너무 그런 문제에 둔감해 있는 듯싶다. 사스는 피해야 하지만 사드는 낱낱이 따져봐야 하는 한다. 그것이 필자 이 글을 쓴 이유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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