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석중놀이는 영화의 기원이 될 수 있다!

 

 전통그림자극 '만석중놀이'까지 폄훼... 일제의 탄압으로 명맥 끊겨

 

15.03.13 10:22    
최종 업데이트 15.03.13 10:22

 

 

 

 

  

피습을 당했음에도 끝까지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마크 리퍼트 대사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리퍼트 대사 피습 사건에서 보인 미국 정부와 미국언론의 태도도 차분해 보였다. 굳이 '테러'라는 어휘를 선택하지 않고, '공격'이라는 말로 사태를 설명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피습을 가한 김기종의 행위는 그게 테러든 공격이든 비판받아 마땅하다. 오랜 시간 사회와 격리가 불가피할 정도로 그의 행위는 우리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김기종씨가 '우리마당'과 '만석중놀이보존회'의 대표를 맡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 두 단체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지금의 영화가 개성의 인형극에서 비롯됐다는 황당한 주장이 펼쳐졌지만, 자금 지원은 끊기지 않았습니다." (중략) "개성에서 유래한 무언 인형극인 '만석중놀이'가 일제 때문에 왜곡됐다며 희한한 논리를 댑니다."
- [단독] '김기종 주도 행사' 영진위서 두 차례 지원, <채널 A> 2015년 3월 6일자

 


이 보도를 보지 않았다면 필자는 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김기종이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지원금을 받았다는 점, 그런데 그 지원이 적절치 않다는 점이 이 보도의 큰 골자였다. 한마디로 왜 김기종에게 정부가 돈을 지급했느냐는 물음이었다. 여타 다른 매체들도 이런 비슷한 내용의 뉴스를 생산해냈다.

필자가 우려를 표시한 부분은 김기종을 비판하기 위해 그가 발을 담그고 있었던 만석중놀이까지 끌어와 희화화시켰다는 점이다.

실제로 만석중놀이는 일제의 탄압으로 1920년대 그 명맥이 끊겼다. 그러다 문화운동판 관계자들의 혼신의 노력으로 인해 1983년 다시 빛을 보게 된 전통 그림자 인형극이다. 어렵게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민속극이 한 사람의 그릇된 행동으로 인해 그 파편을 뒤집어썼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 만석중놀이 운심게작법이란 승무를 추고 있는 연극인 한대수 선생. 운심게작법은 만석중놀이의 절정 부분에서 올려진다. 2014년 8월 <거창아시아1인극제>에서 공연된 만석중놀이를 촬영한 사진이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전통 그림자 인형극 만석중놀이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 만석중놀이에 대해서 설명해 보겠다. 만석중놀이의 기원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의 도읍지였던 개성 일대에서는 초파일을 전후해 민중 포교와 교화를 목적으로 그림자놀이가 행해졌다. 그림자놀이를 한다는 건 어두운 밤중에 놀이가 진행된다는 뜻이다.

넓게 펼쳐 놓은 광목천 뒤로 횃불을 피우고 그 사이로 용, 잉어, 사슴 같은 인형들을 조종하여 그림자가 광목천에 투영되게 하는 방식으로 놀이가 진행된다. 만석중놀이에 등장하는 인형들은 색이 입혀졌는데 그 때문에 빛에 투영된 그림자들에도 색감이 묻어난다.

만석중놀이의 주인공은 단연 만석중이라는 큰 나무 인형이다. 만석중은 십장생들이 등장할 때마다 가슴과 머리를 탕탕 쳐, 큰 소리를 낸다. 이 소리는 둔탁하지만 그 여운은 귓전을 맴돈다. 죽비소리처럼 무지몽매한 어리석음에서 깨어나라는 따끔한 질책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여의주를 두고 천년 묵은 용과 잉어가 다투는 절정 부분에서는 그림자가 아닌 승려가 막 앞에 나와 승무를 춘다. 이 춤은 운심게작법이라는 의식무다. 이처럼 만석중놀이는 대사 한마디 없는 무언극이지만 '버라이어티'하다. 요즘으로 치면 '블록버스터'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이 있어 밤에도 심심할 틈이 없지만, 호롱불을 켜고 지냈던 그 옛날에 마땅한 오락거리가 있었겠는가? 그런 면에서 색깔을 띤 그림자가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 만석중놀이는 많은 이들을 불러 모으기에 손색이 없는 무대였다.

한편 남사당패의 꼭두각시놀음(중요무형문화재 3호), 유랑광대들의 발탈(중요무형문화재 79호)같은 인형극들이 대낮에 장터에서 이루어진 것에 비해 만석중놀이는 사찰에서, 그것도 한밤중에 공연이 이루어졌으니 공연장의 '공기'부터가 달랐을 것이다.

 


 
▲ 만석중놀이 인형들에 색깔을 입혀서 그런지 투영된 그림자에도 색감이 살아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만석중놀이는 영화의 기원이 될 수 있다


일제는 만석중놀이에 대해 탄압을 가하였다. 놀이를 통해 조선인들이 단결을 도모하고, 선전수단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는 의심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석중놀이는 1920년대 그 명맥이 끊기게 된다.

유럽에서 영화가 태동을 할 때, 당시의 관계자들은 동아시아에서 발달한 그림자극에서 중요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이 이론에 입각하자면 만석중놀이도 영화의 기원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민속극의 대가인 심우성 선생은 만석중놀이를 우리 영화의 원형이라고 평가를 할 정도였다. 심우성 선생은 1983년, 각고의 노력 끝에 만석중놀이를 다시 재연한 원로 민속연극인이다.

이런 내용들을 놓고 보면 앞서 언급한 <채널 A>의 보도는 김기종을 깎아내리기 위해 만석중놀이까지 도매금으로 떠넘긴 보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만석중놀이가 김기종의 전유물도 아닐뿐더러 영화의 기원이라는 부분은 연구가 더 필요한 부분이지 '황당하다'는 평가로 폄하할 부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일제에 의해 만석중놀이의 명맥이 끊긴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에도 보도에서는 그 본질보다는 김기종의 발언 방식에 초점을 맞춰 '희한하다'는 식으로 희화화 시켰다.

필자는 그 보도를 보면서 <채널A> 기자가 만석중놀이의 '만'자나 알고 취재를 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일제의 탄압에 의해 수십 년 동안 그 명맥이 사라졌다 이제서야 겨우 자리를 잡고 있는 우리 전통 민속극을 김기종을 비판하기 위해 싸잡아 끌어내는 모습에 참담함이 느껴졌다.

 



 
▲ 만석중놀이 사진 오른쪽에 서 있는 것이 만석중인형이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김기종은 당연히 욕을 먹어야 한다. 그는 용서 받을 수 없는 중죄를 지었다. 하지만 김기종을 비판하기 위해 만석중놀이까지 같이 끌어내리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행위다. 마치 리퍼트 대사를 위문하기 위해 동원된 부채춤과 석고대죄가 적절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외교관 피습이라는 전대미문의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더불어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어렵게 재조명된 우리 전통문화가 싸잡혀서 폄하되지도 말아야 한다.

 


덧붙이는 글 |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

 

 

 

 


 

'3.1절은 아이구아이구?'...

이런 달달달 암기 방식은 아니다

 

 

[주장] 기계적인 '암기식 역사' 학습에서 벗어나야

 

15.03.05 11:51   최종 업데이트 15.03.05 11:51
'이 여론조사만 놓고 보면, 우리는 역사를 잊은 민족이니 미래가 사라질 수도 있겠군!'

3·1운동 관련 뉴스를 하나 읽다가 저런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게 됐다. 그 뉴스는 우리나라 성인 남성 중 절반 이상이 3·1절의 정확한 연도를 모른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성인 1005명을 대상으로 한일관계를 조사한 한국갤럽의 여론조사를 담은 기사였는데, 응답자 중 32%만이 3·1운동이 1919년에 일어났다고 정확히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강제병탄이 있었던 1910년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19%인 반면,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은 23%로 더 많았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었다.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P)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격언을 그 기사에 빗대보면 필자의 독백이 전혀 틀린 말이 되지 않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미래가 없는 민족이 되는 것일까? 미래의 어느 한 시점에 우리 민족은 그대로 사라지고 말 것인가?

 

 


 
▲ 태극기 서대문 형무소에 걸려있는 태극기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역사 퀴즈식의 여론조사

 


삼일절이나 광복절, 혹은 한국전이 발발된 6월 말 경이 되면 저런 역사 퀴즈(?)식의 여론조사 결과가 어김없이 언론에 공표된다. 그런 기사들은 질책을 담은 자극적인 제목으로 생산되기 일쑤인데 이런 방식이다.

<역사의식 실종? 국민 절반이 3·1절이 언제 일어났는지 몰라...>
<충격적인 청소년들의 안보 불감증! 6·25전쟁이 북침이라고?>

여론조사는 칼럼이나 사설로 재생산되는데 질책의 강도를 더 높인 상태로 기사화 된다. 그런 칼럼이나 사설은 작성자의 성향에 따라 온도차가 있기는 하지만 역사교육 강화라는 결론으로 도달한다.

그런 결론이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교육 강화라는 명제는 큰 범죄만 일어나면 제시되는 '인성교육 강화'와 닮은꼴을 한다. 교육 강화를 외칠 때는 큰 보폭으로 움직이는 듯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점으로 회귀해 있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강화만하면 무엇 하는가 내용이 달라져야지!

 

 

 



# '3·1절은 아이구아이구'로 외웠다!

 


학창시절에 필자는 역사를 좋아했지만 국사 시간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연표를 '달달달' 외우고, 인물을 암기하는 방식의 수업 시간이 지루했기 때문이다. 다른 과목들과 마찬가지로 국사도 그저 시험용 학습을 했을 뿐이다.

'3·1절은 아이구아이구(1919년)다'는 식의 암기 방식으로 삼일절 페이지에 '별표'를 했던 것이다. 1918년 11월 1차 세계대전이 종전이 됐고, 그에 따라 1919년 1월에 파리강화 회의가 개최됐는데 거기서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다는 부분에도 '밑줄 쫙'을 했다.

'별표'를 치고 '밑줄 쫙'을 하는 단편적인 암기는 시험 문제를 풀 때는 유용했었다. 하지만 그런 기계적인 암기는 필자의 머릿속도 기계적으로 만들었다. 인과관계가 명확한 각 사건들이 파편화되어 단절된 지식으로 머릿속에 저장됐기 때문이다. 분명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우리민족을 위한 정책이 아니었다. 여기서의 '민족자결'은 패전국 식민지에 속해 있던 민족들의 자결을 뜻하는 것으로 당시 일본은 승전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혜를 입지도 않은 민족자결주의를 두고 3·1운동의 중요한 원인으로 별표를 했던 것이다. 3.1운동과 민족자결주의 사이에 인과관계를 찾을 생각은 못하고 그저 기계적인 암기에만 열중했던 것이다. 

필자의 학습은 거기까지였다. 시험범위가 거기까지였고 필자가 배운 교과서에도 그 이상의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3·1운동과 민족자결주의와의 간극을 그대로 남겨둔 채 교과서를 덮고 말았다. 하지만 당시에도 무언가 찜찜했는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3·1운동을 준비했던 사람들은 파리강화회의가 강대국들의 놀이터라는 것을 몰랐나? 너무 순진했던 거 아니야?'

 

 
▲ 소녀상 일본 대사관 앞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파편적 지식 극복하기  

파편적 지식으로 필자의 머릿속에서 따로 놀고(?) 있었던 민족자결주의와 3·1운동의 간극이 명쾌하게 극복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교복을 벗고, 또한 군복(?)까지 벗고 나서야 그 연결고리를 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 속의 역사읽기>라는 딱딱한 서술 방식이 아닌, 스토리텔링식으로 기술된 역사책을 읽다가 그 연결고리를 알아냈던 것이다. 만약 스토리텔링식의 역사책을 읽지 못했다면 아직까지도 그 둘은 서로 따로 놀고 있을지도 모른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은 독일의 조차지였던, 청도(靑島) 맥주로 유명한 중국의 산동반도와 중부태평양의 남양군도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요구한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남아있는 패전국 독일의 식민지에 대한 침탈 야욕을 보인 것이다. 한마디로 민족자결주의와 어긋난 행위를 했던 것이다. 이런 일본의 행태는 중국과 태평양 지역에 관심을 보이던 미국의 이익과 정면으로 배치됐다.

3.1운동을 준비했던 지도자들은 이런 일본의 야욕과 미국의 이익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충돌할 것이라고 예견했던 것이다. 비록 같은 제국주의 국가였다 할지라도 미국의 팽창은 우리에게 이익을 전해줄 것이라고 판단했던 셈이다. 하지만 그런 판단은 일제 치하에 있던 우리의 운명을 미국이라는 또 다른 외세의 힘을 빌어 극복한다는 점에서 분명 한계가 명확했다. 어쨌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독립운동 진영에 큰 파동을 전해주었다.

 



 
▲ 단재 신채호
ⓒ 위키피디아

관련사진보기


 

 

 

 

# 역사에서 교훈을 얻으려면... '기계적 지식' 극복해야

2017년부터 국사가 수능 필수 과목으로 지정됐고, 또한 이제부터는 초등학생들도 정식과목으로 배우게 됐다. 이런 것만 놓고 보면 우리는 분명 역사교육를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초중고생들은 필자가 국사책에 별표를 하며 기계적으로 암기를 했던 방식에서 탈피하여 능동적이고 종합적으로 한국사를 배우고 있을까?

수험 대비용으로 '달달달' 외운 파편적인 지식은 오히려 한국사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기계적인 암기는 시험의 공포가 사라지는 순간부터 급격히 뇌리에서 지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계적인 암기로 국사를 배웠던 사람들은 서두에 언급한 역사 퀴즈 여론조사에 걸려들어(?) 질책을 들을 가능성이 높다.  

신채호 선생이 강조한 역사 기억하기는 '3·1절은 아이구아이구(1919년)다'라는 식이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를 종합적 다각적으로 바라보고 거기서 교훈을 얻자는 게 단재 선생의 의도였을 것이다. 기계적인 암기로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을사조약'과 '을사늑약'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직시하지 못할 테니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길 위의 인문학 역사트레킹 http://blog.daum.net/artpunk'에도 실립니다.

 

 

 

 

 

 

 

영화 <언브로큰>과 광복 70주년

 

15.01.16 18:46   최종 업데이트 15.01.16 18:46

 

 

 

 



"견딜 수 있으면, 해낼 수 있다."

일본군과의 치열한 전투, 태평양에서의 47일간의 조난, 그 조난 생활보다 더 혹독했던 포로수용소 생활 등등... 영화 <언브로큰(unbroken)>의 실제 인물인 루이 잠페리니가 겪은 고난들은 저 격언으로 버티기에는 너무 강도가 심한 것들이었다.

그런 고난들은 끊임없이 저승사자처럼 앞에 나타나 주인공 뒤편에 죽음의 그림자를 길게 늘여 놓았다. 전투 중에는 일본의 제로센 전투기가 저승사자였고, 태평양의 망망대해에서는 상어떼들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그런 저승사자 중에서 가장 악랄했던 건, 일명 '새'라고 불렸던 포로수용소장 와타나베였다. 저승사자들은 주인공의 명줄을 조여 왔다. 그런 생지옥과 같은 상황이 계속 펼쳐지니, 필자의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어떤 수녀님 한 분이 연신 이런 말을 내뱉었다.

"세상에... 세상에..."

필자는 침묵을 지켰지만, 마음 만은 똑같았다. 신에 가호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주인공에게 크게 감정이입이 됐던 것이다. 


 
▲ 언브르큰 포스터
ⓒ 언브로큰 홈페이지

관련사진보기


 

 

 

생지옥을 견딜 수 있게 해 준 격언

"견딜 수 있으면, 해낼 수 있다"는 청년 멘토 프로그램에 잘 어울릴 것 같은 좀 '말랑말랑'한 격언이다. 하지만 그 격언은 주인공 루이 잠페리니에게 숨을 불어넣어줬고, 그가 역경을 극복할 수 있게 큰 버팀목이 되었다. 작은 말 한 마디가 생지옥을 벗어나게 하고, 저승사자들을 따돌리게 만든 원동력이 됐던 것이다. 

사실 저 격언은 요한계시록에 있는 문장인데, 루이에게 그의 형이 말한 것이다. 루이는 우유통에다 술을 숨겨 먹을 정도로 삐딱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러던 중 루이의 형은 동생에게 달리기에 대한 재능을 발견하고 그에게 육상을 권하게 된다. 하지만 반항아인 그가 순순히 달리기에 맛을 들였겠는가? 형은 투정을 부리던 루이에게 일침을 가하며 저 격언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그 격언을 밑거름 삼아 루이는 열심히 달렸고, 결국 미국 육상 대표로까지 선발된다. 맛보기(?)로 참가한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큰 두각을 나타냈던 루이는 다음 올림픽을 기약한다. 다음 올림픽은 1940년 도쿄 올림픽이었다. 물론 도쿄 올림픽은 2차 대전으로 인해 개최되지 못했다.

루이에게 도쿄 올림픽은 꿈의 무대였다. 하지만 그 꿈은 아주 비극적으로 현실화가 된다. 국가대표로 올림픽 주경기장에 선 것이 아니라 도쿄 외곽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끌려왔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루이는 무려 850일 동안 총 3번의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된다. 콰절런 섬(먀샬제도 인근)의 야전수용소에서 시작한 생활은 오모리(도쿄 인근)를 거쳐 역사상 최악이라는 나오에츠 수용소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나오에츠는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수용소였는데 이곳에서 포로들은 석탄 운반 노역에 처하게 된다. 작업을 하다 목숨을 잃을 정도로 포로들은 엄청나게 혹사를 당한다. 한마디로 그곳은 죽음의 수용소였던 것이다.  

 

 
▲ 와타나베 와타나베 역할을 한 배우는 록밴드 출신인 미야비이다. <언브로큰>에 대해 심기가 불편했던 일본 우익들은 미야비에게도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그가 재일동포 3세라는 것을 트집잡았던 것이다.
ⓒ 언브로큰 홈페이지

관련사진보기


 

 

 

일본 우익들을 불편하게 한 포로수용소 장면

주인공이 석탄 노역에 시달린 북방의 수용소 장면을 바라보고 있자니, 1944년에 사할린으로 징용된 필자의 외할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강제로 사할린 탄광으로 끌려간 외조부께서는 하루 12시간 이상의 중노동에 시달리셨다고 한다. 죽도록 고생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 상황을 돌이키시는 것이 괴로우셨는지, 외조부께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말씀을 아꼈다.

외조부께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말을 아끼셨지만 <언브로큰>에서는 순화시켜서 이야기를 전개시켰다. 원작에서는 포로들이 생체실험에 동원되기도 했고, 심지어 인육까지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감독인 안젤리나 졸리는 그런 부분을 전혀 담아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순화된 내용조차도 일본 우익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언브로큰>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회자되는 부분은 이 포로수용소 장면이다. 이미 많은 내외신 언론보도에도 언급됐듯이 일본 우익들은 이 포로수용소 장면을 무척 불편해 한다. 포로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강제노역 부분을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도쿄수용소부터 저승사자처럼 굴었던 와타나베의 악독함을 완전 부정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뿐이겠는가? 사실 그들이 부정하는 것들이 어디 한 두 가지인가? 2014년 9월에 있은 고노 담화 흔들기에는 아베 신조 총리가 직접 나서기까지 했다. 만주에서 생체실험을 벌였던 731부대는 아예 존재자체도 부정하고 있다. 외조부가 당한 강제 징용이나 근로정신대에 대해서도 한일청구권 소멸을 들어 그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 안젤리나 졸리 <언브로큰>의 감독.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견딜 수 있으면, 해낼 수 있다!

주인공 루이 잠페리니가 더욱더 칭송받을 수 있는 건 그가 조국을 배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라디오 방송에 나가 써준 대로 읽기만 하면, 안락한 삶을 제공한다는 유혹을 뿌리치고 다시 혹독한 포로수용소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렇게 루이는 저승사자들의 위협과 안락한 삶의 유혹을 참아냈고 끝까지 견뎌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게 된다. 비록 도쿄가 아닌 나가노 동계올림픽이었지만 그는 성화 봉송주자로 나서는 영광을 누린 것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필자는 "견딜 수 있으면, 해낼 수 있다"는 격언을 입에서 중얼거렸다. 영화관 밖에 나와서는 새삼스럽게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소중히 여겼고, 또한 한 끼 식사도 감사히 먹었다. 물론 그런 작은 것들에 대한 감사를 언제까지 이어갈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저 격언이 벌써부터 필자의 입에 감긴다는 것이다. 덕분에 좋은 격언을 입버릇으로 삼게 됐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게 있다. 올해는 2차 대전 종전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더불어 광복 7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그런데 세월만 흘렀지 일본 우익들의 사고는 아직도 욱일승천기가 펄럭이는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그래서 한일관계도 아직 그 자리를 계속 맴도는 것 같다. 일본의 과거사 부정이 계속된다면 70주년이 되든, 100주년이 나아지는 건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한편 일본에게 비판의 화살을 날리듯 우리 자신에게도 그 화살을 날려야 할 것이다. 왜? 광복된 지 70년이 넘도록 아직 친일매국노 청산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학사 역사교과서 파동과 같은 일도 못 처리하면서 일본에 과거사 청산을 요구하는 이중적인 행보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일본 출신 '와타나베'에 대한 청산을 요구하려면 우리 안에 있는 조선 출신 '와타나베'에 대한 청산이 우선이다. 제대로 청산해야 일본 우익들에게 목소리를 높일 수 있지 않겠나.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영화 <호빗>을 통해 톨킨이 말 하려고 했던 것!

 

판타지를 통해 본 인간 근원의 문제

 

15.01.03 15:07 최종 업데이트 15.01.03 15:07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줄거리나 주요 장면이 포함돼 있습니다.

 

 



 
▲ 호빗 영화 <호빗> 포스터
ⓒ 호빗홈페이지

관련사진보기


 

 

 

"의외네요. 다른 건 모르겠는데 그 영화는 좀... 그거 판타지 영화 아니에요. 애들 보는 거요?"


<JSA 공동경비구역>, <박하사탕>, <7월 4일생> 등등 필자가 그런 영화들을 감명 깊게 봤다고 하면 상대방도 흔쾌히 수긍한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에 이르면 꼭 부연 설명이 필요했다.

"원작이 워낙 탄탄해요. J.J. 톨킨 박사가 원작자인데 이 사람이 북유럽 신화에 아주 능통하거든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영화 자체가 하나의 잘 짜인 신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신화라는 텍스트에 인간의 욕망을 담아냈으니 하나의 대서사시가 되는 것이죠. 앞으로 이렇게 기승전결이 잘 떨어지는 판타지영화는 나오기 힘들 겁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부연 설명을 했다는 건, 필자와 상대방의 시각이 큰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판타지 영화에 대해서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애들이 보는 영화라 취급하며 낮잡아 보기까지 한다. 리얼리티가 강조될수록 후한 별점을 주는 풍토에서 요정이 활을 쏘고 용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판타지물은 그저 아이들의 영역으로만 자리매김 될 뿐이다.

 

 

 

 
▲ 호빗 엘프족 여전사 타우리엘
ⓒ 호빗홈페이지

관련사진보기

 

판타지 통해 인간의 근원을 들쳐보다


팍팍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백색의 마법사 간달프의 주술은 로또 1등만큼이나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또한 중간계를 짓누르는 악의 화신 사우론의 눈빛보다 옆에 있는 김 팀장의 시선이 더 싸늘해 보인다. 그래서 판타지 영화에서는 <레미제라블>과 같은 카타르시스를 아예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판타지를, '눈 뜨고 코 베어 가는' 냉혹한 현실을 빗대어보는 하나의 원초적 도구로 바라본다. 철천지원수인 엘프족의 레골라스와 난쟁이족의 김리가 당면한 목적을 위해 오월동주(吳越同舟)가 되는 모습, 더 큰 욕심 때문에 난쟁이 왕 소린이 생사고락을 함께한 부하들을 의심하는 모습 등을 보고 있자면, 인간 내면의 깊숙한 곳을 들쳐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요정족, 난쟁이족 같은 비현실적인 종족들이 오히려 인간의 근원적인 심성을 더 명징하게 표출했다고 판단한다.

SF영화와 달리 판타지영화는 물리적으로 현실화 될 수 없는 것들을 담아 놓았다. 기술이 발전하면 <스타워즈>에 등장했던 광선검 같은 무기들도 '실전배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에 등장한 엘프족이나 호빗들은 스크린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대신 그들은 탐욕과 무소유, 신뢰와 배신, 전쟁과 평화 같은 우리 현실세계에서 빈번하게 회자되는 개념들을 스크린에 뿌려 놓는다.

 

 

 

 

 

 

 

 

 

 

 

▲ 제복을 입은 톨킨 1차대전에 참전했던 톨킨.

풀네임은 John Ronald Reuel Tolkien 이다.  

위키피다 출전. 

 

 

 

 

 

 

 

물질문명을 지독하게 혐오했던 톨킨


원작자 톨킨은 1차대전 중 가장 치열한 전투 중에 하나였던 솜 강 전투에 초급 장교로 참전했다. 그 전투에서 친구를 잃은 톨킨은 전쟁, 더 나아가 세계대전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던 현대문명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감을 갖게 된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후 현대문명과 과학기술에서 멀찌감치 자신을 떼어 놓았다.

문헌학자였던 톨킨은 각 나라들의 언어 변천과정을 연구했는데 각 언어들에 내포되어 있는 신화적인 요소들에 매료됐다. 기계문명의 빈자리를 고대의 신화가 채웠던 셈이다.

그렇게 신화적인 상상력으로 풀어낸 <호빗>을 톨킨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다.  태어난 지 3년 만에 아버지를 여윈 톨킨은, 그 자신이 평생 가질 수 없었던 부성애를 자식들의 침대 곁에서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다. 그런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잠이 들었던 아이들은 꿈에서 엘프 혹은 용을 만났을지 모른다. 

 

 

 

 


<호빗 3: 다섯 군대의 전투>

2014년 12월에 개봉된 <호빗 3: 다섯 군대의 전투>는 호빗 시리즈의 최종판이다. 자신들의 왕국이었던 에르보르를 탈환하기 위해 난쟁이의 왕 소린은 원정대를 꾸린다.

원정대에는 호빗 종족의 빌보 배긴스도 포함되는데 빌보의 역할은 스마우그라는 용에게서 난쟁이들의 최고의 보물인 '아르겐스톤'을 훔쳐 오는 것이었다. 험준한 산 아래에 자리 잡은 에르보르는 원래 난쟁이들이 만든 요새였지만, 사악한 스마우그라는 용이 그곳을 파괴하고 수많은 금은보화 속에서 '꽈리'를 틀게 된다.  

결국 스마우그는 죽고, 난쟁이들은 꿈에도 그리던 잃어버린 땅을 되찾게 됐다. 소린이 자신의 왕국을 되찾은 것이다. 하지만 용이 죽었다고 끝이 아니었다. 악에 의해 이루어진 균형이, 그 악이 제거됐다고 바로 선의 의한 균형으로 넘어가지는 않았던 것이다. 후세인이 제거되자 정파주의에 의해 이리저리 찢기고, 결국에는 IS(이슬람국가)가 꽈리를 튼 이라크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에르보르의 전략적 가치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황금을 차지하기 위해 사방에서 군대들이 진격해 오기 시작했다. 그 군대들은 오크족이나 괴수족 같은 어둠의 세력뿐만이 아니었다. 엘프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 호빗 영화 <호빗>
ⓒ 호빗홈페이지

관련사진보기

 


 

 

 

탐욕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쳐오고 있었지만, 난쟁이 왕 소린은 전투준비에 박차를 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릇된 행동을 하게 된다. 최고의 보물이라는 아르켄스톤을 부하 중에 한 명이 미리 빼돌렸다고 의심을 했던 것이다. '황금의 저주'로 인해 눈이 멀게 된 것이다. 탐욕 때문에 생사고락을 함께 한 부하들을 다 도둑놈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반지의 제왕 3>편에서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다. 반지를 파괴하는 임무를 지닌 프로도가 절대반지의 힘에 눈이 멀어 자신의 임무를 망각하고 스스로 반지의 주인으로 선언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임무 수행을 위해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겼던 프로도였지만 정작 마지막 순간에는 반지를 용암에 던지지 못하고 주인 행세를 하려 든 것이다.

이 부분에서 원작자인 톨킨 박사는 탐욕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을 유도했는지 모른다. 채워지지 않는 무한한 욕구로 인해 인간이 궁극적으로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지를 일깨워주었다고나 할까? 난쟁이였던 소린은 피붙이와 같은 자신의 부하와 친구들에게 불신을 얻게 됐고, 호빗인 프로도는 절대반지를 끼었던 검지손가락 한마디를 잃게 됐다. 그것이 바로 현대 물질문명을 혐오했던 톨킨이 판타지를 통해 우리 인간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대망의 2015년이 시작됐다. 유난히 사건과 사고가 많았던 지난 2014년과 달리 올해는 좀 더 달라질 수 있을까? 좀 더 행복할 수 있을까? 그러려면 인간들이 탐욕에 눈이 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질에서 좀 더 자유로워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이런 언급은 '판타지'적이라고 욕을 먹을지 모른다.

"장그래로 대변되는 비정규직들이 넘쳐나고, 최저 시급의 굴레에 사로잡힌 알바생들 좀 봐! 탐욕에서 자유로워지라니, 탐욕을 부릴게 있어야 탐욕을 부리지!"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핼러윈의 기원은 알고 핼러윈 데이를 보내시나?

 

켈트 신화 속 나무 숭배... 산신령 섬기는 문화와 닮았다

 

14.11.03 11:53  최종 업데이트 14.11.03 13:52

 

 

 

 

 

 

 
핼러윈 데이 촛불. 호박을 파서 만든 잭-오-랜턴이 눈에 띈다.
ⓒ 픽사베이

관련사진보기


 

 

 

 

 

"핼러윈의 유래는 알고 있냐? 그런 복장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냐?"


필자도 처음에는 손가락질을 했다. 우리 명절도 아닌 핼러윈(할로윈의 표준어 규정)을 챙기려는 일부 사람들의 모습에 냉소를 보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까지 '핼러윈 특수'에 노출되어 있는 모습에 혀를 차며 질타했다. 그러면서 이런 말도 잊지 않았다.

"핼러윈 챙길 정신으로 우리 풍습이나 알고 챙겨라!"

이런 반응은 포털에 걸린 핼러윈 관련 기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반응이었다. 대다수의 누리꾼들은 국적 불명의 서구 풍습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반론도 있다. 국제화 시대에 맞춰 "하루 정도는 괴기스런 복장도 해보고 재미삼아 놀 수도 있지 않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반론에 "우리 풍습이나 알고 챙겨라"라는 재반박이 이어졌다.

 

 

 

켈트 신화와 드루이드교의 관계


핼러윈은 켈트족의 명절인 삼하인(Samhain) 축제에서 유래됐다. 켈트족은 앵글로족과 색슨족에 의해 브리튼 섬의 노른자에서 쫓겨나 궁벽한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 터를 잡았다. 켈트족은 앵글로-색슨족에 의해 브리튼의 핵심 지역에서 쫓겨난 것에 대한 원망과 서러움을 갖고 있다. 부결됐기는 하나, 지난 9월 18일에 있었던 스코틀랜드의 분리 독립 선거에서 보이듯 이들의 잉글랜드에 대한 악감정은 여전히 뿌리가 깊다.

하지만 켈트족이 맹주 노릇을 하기 전에도 브리튼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넘어온 사람들로 추정된다. 즉, 브리튼 섬의 원주민은 켈트족이 아니었다. 사실 켈트족은 갈리아 지방(지금의 벨기에 및 프랑스 일대)에서 도버 해협을 거쳐 브리튼에 도착했다. 따지고 보면 이들도 이주민이었다.

켈트족은 드루이드교라는 고유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다신을 섬기는 드루이드교는 애니미즘 요소가 강했는데 특히 숲이나 나무와 관련된 여러 징표들에서 신화적 상상력으로 표출됐다. 오랫동안 숲에서 사냥을 하며 연명했던 켈트족이었기에 숲과 나무는 삶의 터전이자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정령'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와 같은 켈트족의 신화는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으로 <반지의 제왕>, <호빗>의 작가로 유명한 J. R. R. 톨킨 박사가 있다. <반지의 제왕>과 <호빗>도 켈트 신화가 밑바탕이 된 작품이다. 죽은 자는 물론 요정이 나오고, 떡갈나무의 정령이 페이지 곳곳을 장식한다.

 

 

 

 


 
▲ 계룡산 산신제 계룡산 산신제의 모습, 켈트족도 이전에는 숲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기 때문에 숲과 나무에 정령이 있다고 믿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공동체의 결속력을 높인 핼러윈

 


핼러윈은 이처럼 풍부한 애니미즘 요소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켈트족의 새해 첫날은 11월 1일이었다. 켈트족은 겨울이 시작되는 11월을 새해의 시작으로 본 것이다. 우리나라의 음력이 그레고리력(양력)과 같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켈트족은 사람이 죽어도 그 영혼은 1년 동안 다른 사람의 몸속에 접신해 있다 저승으로 간다고 믿었다. 특히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0월 31일을 접신할 수 있는 절호의 적기로 봤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날만큼은 온갖 괴기스러운 분장을 했다. 영혼들이 그런 분장 때문에 접신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켈트족은 로마에 의해 복속됐다. 이후 교황 보니파체 4세는 11월 1일을 '모든 성인의 날(All Hallow Day)로 선포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성인(Hallow)의 전야(Eve)로 자리매김되었고, 이후 핼러윈(Halloween)으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르게 됐다.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왜 켈트족의 영혼들은 10월 31일에 일제히 접신 대상자를 찾아 나설까. 왜 미리미리 찾아 나서지 않았나. 그렇다. 핼러윈도 인간이 만든 풍습이다. 애니미즘적 상상력이 풍부한 켈트족이 만든 하나의 명절이었다. 묵은해를 털어버리고 활기차게 새해를 맞이하자는 의미에서 만든 풍습이다.

한편 핼러윈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은 "Trick or Treat(과자 안주면 장난칠 거야)"이다. 큰 호박을 파서 만든 잭-오-랜턴(Jack-O'-Lantern)을 쓴 아이들이 남의 집 문을 두들기며 이런 말을 한다. 중세시대에는 다가오는 겨울을 맞아 서로 먹을 것을 나누며 공동체적 결속을 다져보자는 의미로 저 말을 했다고 한다. 실제로 핼러윈은 중세시대 공동체의 구휼 장치로서 작동했다. 

 

 

 

 

 

 

계룡산 산신령과 켈트 신화의 유사성


 
▲ 계룡산 중악단 계룡산 중악단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신원사 계룡산 신원사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앞서 필자는 이렇게 언급했다.


"핼러윈 챙길 정신으로 우리 풍습이나 알고 챙겨라!"

그럼 그 말대로 우리의 풍습에 대해서 알아봐야 할 것이다. 단오나 정월대보름처럼 그 의미가 다소 희미해진 명절을 소개하는 것도 좋겠지만, 개인적으로 계룡산 산신제를 소개하고 싶다.

켈트족의 드루이드교가 삶의 터전을 제공했던 숲을 신봉했듯이 우리 선인들은 태초부터 산을 영험하게 여겼다. 산은 생명의 근원인 물을 흘려보냈고, 각종 과실과 약초가 자라나는 보고였다. 또한 산짐승들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양공급원이 됐다. 이렇듯 산은 많은 것을 품고, 많은 것을 사람들에게 내주었다. 그랬기에 우리 선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산을 신성시했고, 산의 주인인 산신령에게 제례를 올렸다.

유교를 앞세웠던 조선시대에도 산신제의 위엄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화됐다. 묘향산, 계룡산, 지리산에 각각 상악단, 중악단, 남악단을 세워 산신제를 올렸다. 현재는 상악단과 남악단은 사라지고, 중악단만 남아 있다. 계룡산 신원사에 위치한 중악단은 조정의 명에 의해서 지어진 건물이라서 그런지 여타 다른 사원과는 달리 궁궐 양식이 적용됐다. 매년 4월에는 이 중악단을 비롯한 계룡산 일대에서 산신제가 봉행되어 산악신앙의 뜻을 기리고 있다.

 

 



 

 

 
▲ 신원사 중악단 삼존불이 놓일 자리에 산신령이 모셔진 신원사 중악단.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우리문화에 대해 제대로 눈길을 준 적이 있었는가?


앞으로 핼러윈 축제의 '시장'은 더욱더 커질 듯싶다. 외국 유학을 경험한 사람뿐만 아니라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도 늘었다. 영어 유치원이 확장되고 있고, 인기 연예인의 분장도 지속된다. 당분간 핼러윈의 열기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핼러윈 특수를 노리는 자본도 더욱더 팽창할 것이다. 마치 '밸런타인 데이'처럼, 이제 핼러윈도 10월의 마지막 밤을 점점 더 많이 채워나갈지 모른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무분별하게 서구문화를 직수입한다고 손가락질할 것인가. 질책을 한다고 그들이 꿈쩍이나 하겠나. 무엇보다 그들을 질타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문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핼러윈을 떠나서 우리는 우리 풍습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가? 그들을 욕하기 전에 우리 고유의 문화에 대해 제대로 눈길을 준 적이 있었나? 주지 못했다면 이제라도 눈길을 주자. 우리문화 중에도 켈트 신화 뺨칠 정도로 멋지고 재미난 것들이 많으니까!"

 



 

 

 
▲ 동자승 인형 마치 숲 속에서 불경을 보는 듯한 모습이다. 신원사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허벅지를 더듬는 '손길'.. 친구를 의심하다

오마이뉴스 2014.09.15 11:45

 

 

 

 

 
▲ 부동산 광고 전월세 광고
ⓒ 곽동운

 

 

 

 

공주 → 제주 → 공주 → 거창 → 남도 일대 → 거창


지난 여름, 필자의 이동 궤적이다. 무슨 팔자(?)가 붙었는지 유랑단처럼 계속 이동을 하고 살았다. 그러다보니 잠자리도 계속 바뀌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실내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던 점이다. 매일 밤 폭우를 걱정하며 텐트 생활을 했던 장거리 여행 때보다는 그나마 장족의 발전을 한 셈이다.

그렇게 방랑 생활을 하다보니 한 가지 '잠자리의 철학'이 생겼다.

"7성급 호텔이든 공동묘지 옆에 친 텐트든 내가 두 다리 뻗고 누운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하자. 어차피 잠만 잘 자면 되잖아!"

실제로 이런 원칙을 세우고 장거리 여행을 다녔더니, 잠자리가 바뀌어서 겪는 불면증 따위는 겪지 않게 됐다. 하지만 이 같은 나의 '잠자리 철학'은 역설적으로 안정된 거주지에 대한 열망을 드러낸다.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한 곳에 정착하고 싶은 그런 열망.

 

 

 


 
▲ 물폭탄 맞은 텐트 돈이 없어 모기장 텐트를 쳐가며 여행을 했을 때 사진. 전날에 내린 게릴라성 집중호우로 물난리를 겪은 모습을 담았다. 2011년 여름, 전북 완주 부근에서 촬영했다.
ⓒ 곽동운

 

 

 

창고가 된 내 방


대학 시절이었다. IMF 이후였다. 자영업을 하시던 삼촌이 일이 잘못되어 사업을 정리해야 했고, 사시던 집까지 잘못되어 가족들을 이끌고 우리집으로 들어오셨다. 가뜩이나 좁은 집에 삼촌 식구 4명이 들어오니 집안은 정신이 없었다. 삼촌네 살림살이들도 전부 다 이사 왔기 때문이다. 집 안에서 이동할 때도 짐들을 피해 쏙쏙 옮겨 다녀야 했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내 방도 짐이 쌓여 창고(?)처럼 보였다. 간신히 몸을 누일 정도만 됐던 것이다.
당연히 내 생활은 사라졌다. 창고 같은 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심 끝에 학교 근처에다 방을 구하기로 했다.

'룸메이트는 없고 방에서 술은 안 마시겠다'

이런 식의 나름대로의 독립생활 수칙도 정했다. 내 방이 주당들의 아지트화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친구와 시작한 자취생활


우여곡절 끝에 나의 '자취 일기'는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나름대로 생활을 잘했다. 삼시 세끼 다 챙겨먹었고, 방 청소도 주기적으로 했다. 거의 다 학교 사람이긴 했지만 이웃들과도 친하게 지냈다. 빨래, 설거지, 청소, 음식 장만 등등... 살림에 필요한 것들을 척척 해내니 스스로가 대견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이런 생각까지 들었다.

'이제 같이 살 여자 친구만 있으면 되겠네!'

그 기원이 통했는지 정말 친구와 함께 살게 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친구는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여자 친구가 있으면 같이 살고 싶다는 소박한 기원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친구 녀석인 성훈이와 동거를 하게 됐던 것이다. 룸메이트를 두지 않겠다는 수칙을 깨지게 만든 이 녀석의 사연도 기구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이 전부 뿔뿔이 해체됐기 때문이다.

스스로 정한 수칙 때문에 친구의 어려운 사정을 제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친구를 위해 방 한편을 내주기로 결정했다. 다행인 건 성훈이가 생활 매너가 좋았다는 점이다.

성훈이도 방을 아지트화 하지 않겠다는 약속도 했다. 서로서로 바빠서 그랬는지 방을 아지트화 하지 않겠다는 것은 그런대로 잘 지켜졌다. 또한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그런지 서로간의 생활 트러블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성훈이가 등장한 이후로 이상한 일이 생겼다. 무언가 전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이 분명히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바퀴벌레!

전에는 한두 마리씩 보이던 바퀴벌레가 어느 순간부터는 하루가 멀다 하고 보이는 거였다. 소풍(?)을 가는지 어른 바퀴 뒤로 줄줄이 새끼바퀴들이 따라다니는 장면도 목격됐을 정도다. 전에는 분명 이렇게 자주 출몰하지 않았었는데...

바퀴벌레는 정말 별로다. 차라리 뱀이나 두꺼비가 낫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바퀴벌레 덕택에 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어두운 밤에 집에 불을 켰을 때 처음 눈에 띄는 게 바퀴벌레라면... 그것 참 거시기 했다.

 

 

 

 

 
▲ 부동산 어플리케이션 음식배달 어플이 있듯이, 이제는 부동산 어플도 등장했다.
ⓒ 곽동운

 

 

 

 

바퀴벌레 때문에 친구를 의심하게 되다


바퀴벌레들 때문에 성훈이를 오해한 적도 있었다. 어느 더운 여름날이었다. 전날 알바 때문에 난 몸이 녹초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쉽게 잠은 오지 않았다. 성훈이도 알바를 하고 왔는지 골아 떨어져 있었다. 뒤척거리다가 선잠에 들었다. 몽롱한 기운이었지만 의식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자꾸 내 허벅지를 뭐가 건드는 게 아닌가. 한쪽도 아니고 양쪽을 동시에 다 건드리고 있었다.

"너, 뭐야!"

소리를 냅다 지르고 일어나 불을 켰다. 그런데 성훈이는 방 한편에서 곤히 잘 자고 있었다. 정신없는 내 눈에는 범인으로 보이는 어른 바퀴벌레 두 마리가 도망가는 게 보였다. 그 중 한 마리는 성훈이 얼굴을 타고 도망을 갔는데, 그 기척에 놀라 성훈이도 일어났다.

"뭐야... 도둑 들었어?"
"어.... 아니..."
"그럼 꿈꿨냐? 빨리 자라. 나 내일 일찍 나가야 돼."
"......"

당시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성훈이가 내 방으로 이사 왔을 때 살림살이도 좀 가지고 왔다. 그래서 그 이사 와중에 바퀴벌레들도 같이 이사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성훈이의 짐들을 방 한편에 쌓아두었으니 바퀴벌레 녀석들의 아지트도 넓어진 셈이다.

물론 이런 결론은 내 스스로 한 것이고, 성훈이한테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훈이도 눈치가 있었는지 바퀴약 사는데 '거금'을 내놓았다. 또한 집 청소와 이불 말리기에 손수 앞장섰다.

우리들의 일제소탕 작전으로 그 녀석들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일단 집안 청소에 신경을 쓰니 자연스레 그 녀석들의 개체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우리집 본가에서도 바퀴벌레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삼촌댁 이삿짐과 함께 그 녀석들이 옮겨왔던 것이다.

그 바퀴벌레 에피소드가 일어난 몇 달 후 나는 다시 본가로 복귀를 했다. 삼촌이 집을 구해 나가셨고 내 방도 창고 신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두 다리 뻗고 누운 곳이 바로 천국


글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필자에게는 돌아다니는 팔자가 붙은 거 같다. 역마살이 붙은 것 같다. 역사트레킹이니 도보여행이니 하는 역마살 팔자가 붙다보니 역설적으로 안정된 거주지에 대한 갈증이 항상 존재한다.

하지만 그 갈증은 평생 해소되지 않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잠자리가 바뀔 때마다 '내가 누운 곳이 천국'이라는 다짐을 하며 유유자적하게 받아 넘겨야 할 것 같다. 그 곳이 7성급 호텔이든 허름한 오두막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정말 내가 두 다리를 뻗고 있는 곳이 천국인가? 진짜 그럴지도 모르지! 대신 바퀴벌레가 있으면 지옥일지도 몰라. 뱀은 자세히 보면 귀엽기라도 한데... 바퀴벌레는 진짜 별로야...'

 

 

덧붙이는 글 |
'나는 세입자'다 응모글입니다.

 

 

 

 



 

 

 

 

 

 

한겨레21


 

한겨레 이종근 기자

 

 


 

 

[한겨레21]
[레디 액션!]

뭐 서평을 쓰자고? 세상살이에 바빠 책 한 권 읽기도 힘든 마당에 책에 대한 평가를 해보자고? 이거 너무 무리한 ‘레디 액션’이 아닌가. 맞는 말이다. 독서다운 독서를 하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책읽기를 넘어 서평을 써보자는 건 너무 무리한 요구일 수도 있다.

온라인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책은 부차적인 정보취득원일지 모른다. 간단한 키워드 검색만으로도 평생 섭렵할 수 없는 자료가 쏟아져나오는데 해당 정보를 찾으려 굳이 책장부터 뒤적일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손에 ‘수갑’처럼 콱 쥔 스마트폰은 또 어떤가?

하지만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 어지러운 온라인 지식을 걸러내고, 심도 있는 정보를 구체화하는 데 아직 책보다 더 뛰어난 지식의 도구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읽는 것이 좋을까? 앞서도 언급했듯이 서평을 쓰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서평을 쓰면 적극적으로 책읽기를 하게 된다. 서평을 쓰기 위해서라도 밑줄을 긋거나 메모하는 경우가 늘어난다는 것이다. 능동적인 독서 행위를 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능동적으로 독서에 임하다보면 책에 더 집중할뿐더러 지은이가 말하는 바를 잘 깨닫게 된다.

 

 

 

 

 

 

 


 

독자가 천재가 아닌 이상, 아무리 재밌게 읽은 책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머릿속에서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책장을 덮을 때부터 한줄 한줄 사라지다 나중에는 자신이 그 책을 읽었는지 모를 정도로 가물가물해진다. 하지만 서평을 쓰다보면 구체적인 문장은 사라질지언정 저자가 말하는 큰 틀은 머릿속에 남아 있게 된다. 그러고 보면 서평쓰기는 바다에 던지는 그물과도 같다. 작은 물고기는 놓치더라도 큰 녀석만큼은 잡아둘 수 있기 때문이다.


서평쓰기에는 특별한 격식이 필요 없다. 전문적인 평론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손이 가는 대로 작성하면 된다. 예를 들어 책 내용 중에 중점적으로 드러내고 싶은 부분을 기술하고, 왜 그 부분을 부각시켰는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면 된다.

잘 작성된 서평을 자신의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게재해보자. 그러면 지식나눔이 되는 것이다. 그 서평을 통해 네티즌과 알차게 소통할 수도 있다. 누가 아는가? 서평을 열심히 쓰다보면 인터넷 서평꾼 ‘로쟈’처럼 되어 이름을 날릴 수도 있을지. 물론 그렇게 되려면 엄청난 내공이 필요하지만 말이야.

 

곽동운 독자


*‘레디 액션!’은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소소한 제안을 하는 코너입니다. 독자 여러분에게도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제안하고 싶은 ‘액션’을 원고지 6~7장 분량으로 써서 han21@hani.co.kr로 보내주세요. 채택되신 분께는 소정의 원고료를 드립니다. 레디 액션!

 


Copyrights ⓒ 한겨레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창극은 조선총독부 총리로 지명됐는가?

 

 

'야동 학대?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야한 동영상들이 탄압을 받는다는 거야?'

아니었다. '아동학대'를 '야동학대'로 잘못 본 것이다. 요즘 들어 난독증 때문에 뒷골을 몇 번 잡은 적이 있다. 아직까지는 팔팔한 청춘이라고 자부하고 있지만 필자도 점점 주름살이 짙어지는 나이 대에 진입한 것이다.
한편 언론인 문창극 씨가 총리로 지명된, 당일 날에는 이런 일까지 겪었다.

'총리 후보자? 일본의 아베 총리가 권좌에서 물러났나? 얼마전에 북한과 스톡홀롬에서 납치피해자에 대한 당국간 회담을 했잖아. 또 요즘은 집단자위권 문제 때문에 발바닥에 불나고 있을 텐데...'

 


기사 관련 사진

 


 

# 문창극 총리 지명자에 대한 착시현상


착시현상이었다. 인터넷 창을 여러 개 띄어놓고 국내정치와 국제정치면 뉴스를 번갈아 가면서 봤더니 그런 착시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피식 웃음이 나왔고, 문창극 지명자에 대해서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아무리 그가 나와 반대편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억지로 아베 신조와 엮어, 그를 비난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억지로 엮는다면 필자는 '적폐'로 낙인찍힐 것이다. 말 그대로 '개조'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필자는 문 후보자에게 미안한 감정을 덜어내고 가뿐한 마음으로 이 기사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아시다시피 문 후보자가 온누리교회 강연에서 '일본지배와 남북분단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분명히 언급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문 후보자는 이를 특종보도한 KBS를 향해 고소를 준비한다고 했다.
이렇게 문 후보자가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이니 필자가 착시현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브레이크 없이 우경화로 치닫고 있는 아베 신조 정권, 그 정권에서 잊혀질 만 하면 쏟아져 나오는 망언들과 동영상에서 드러난 문창극 후보자의 발언이 대동소이했기 때문이다.

'게으르고 자립심 부족한 우리 민족 DNA'
'일본지배, 남북분단은 하나님의 뜻'
'일본이 이웃인 건 지정학적인 축복'
'제주 4․3은 폭동'

 

 

 


# 비겁하게 윤치호 뒤에 숨지 마시라!

제주 발언을 제외하고는 군국주의 부활을 꿈꾸는 일본 우익세력들의 주장과 거의 일치하지 않은가? 조선은 고대 국가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스스로 문명개화를 할 수 없으니 일본인들이 '시혜'를 베풀어 문명국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는, 100년 전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일본 식민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나?

문 후보자 측은 위에서 언급된 내용들이 윤치호가 말한 것이고 자신은 그것을 인용했을 뿐이라며, KBS에 대해 악의적인 편집을 했다면서 고소를 준비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한 가지 묻고 싶은게 있다.

"왜 하필 친일 매국노인 윤치호의 입에서 나온 말을 인용하셨는가? 왜 솔직하지 못하고 윤치호 뒤로 숨으시는가? 제주 4․3 폭동 발언도 윤치호가 했는가?"

 

 

 

 

기사 관련 사진

 


 

 

 

 

이와 관련하여 문 후보자는 '강연은 종교인으로서 교회 안에서 한 것이어서 일반인 정서와 다소 거리가 있다'고 반론을 한다. 필자는 이런 시각이 무척 우려스럽다. 문 후보자 말에 의하면 교회 정서와 일반인의 정서 사이에는 간극이 명확해진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이를 더욱 확장하면 교회는 친일 매국노들과 매카시즘의 '해방구'가 될 수도 있다는 해석을 얻게 된다. 왜? 교회 안과 일반인들의 정서가 다르니까. 무엇을 하더라도 교회가 방패막이가 된다는 뜻이 아닌가?

한편 필자는 그 강연을 들었던 온누리교회 신자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문창극이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쌍수 들고 환영할, 그런 강연을 할 때 여러분들은 뭐하셨습니까? 혹시 '아멘'하고 화답한 거 아닙니까?"

 

 


# 총독부 총독으로 지명 받으셨나?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 사과 받을 필요 없다'는 올해 4월, 문 후보자의 서울대 강연 내용을 12일 밤 인터넷 기사로 읽었다. 그 기사를 읽은 후, 필자는 착시현상의 부담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필자가 착시현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제대로 봤던 것이다.

아무리 주어가 빠졌다고 하더라도 광운대 강연 동영상으로 MB는 BBK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윤치호의 뒤에 숨는다고 하더라도 문창극의 발언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주장과 일맥상통 할 수밖에 없다.

올해는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지 120주년이 되는 해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인내천)'라는 구호를 외치며 일어선 동학군들이나 혹은 독립군들이 문창극의 발언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혹시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

"게으르고 자립심 부족한 우리 민족 DNA, 일본지배는 하나님의 뜻,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 사과 받을 필요가 없다!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지명 받었어? 총리가 아니라 총독으로 착시현상 겪고 있는 거 아니야?"    

 

 

 

 

 

 

 

 

 

*** 이 글은 지난 6월 4일 <오마이뉴스>에 게재된 '스스로를 폭로한 루소, 딸이 폭로한 고승덕'의 원문글입니다. 오마이뉴스 측은 제 원문을 많이 수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제목도 바뀌었고, 원고 분량도 많이 줄어 들었지요. 오마이뉴스나 저나 더 많은 클릭수가 유인되기를 원할 겁니다.  사실 저도 욕 먹어도 괜찮으니까, 제 글이 많이 클릭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 낚시성 기사에 대한 유혹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유혹에 쉽게 굴복하면 안되겠지요. 하지만 언제 그런 유혹들에 넘어갈지 모르죠~ㅋㅋㅋ

 

원문글이 많이 수정되고, 가위질 당하다보니 문맥이나 글의 흐름이 많이 어그러졌더군요. 저는 글을 작성할 때 흐름을 매우 중요시합니다. 어감 하나하나에도 무척 신경을 씁니다.  제가 독자의 입장에 섰을 때도 글의 흐름이 매끄러운 글들에 시선을 고정시킵니다.

오마이뉴스는 기사분량을 줄이려는 측면에만 맞춰서 편집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방점을 찍으며 강조하려던 부분도 들어내버렸더군요. 그렇게되니 제 글은 뜀뛰기가 되어버렸습니다. 애초 저는 탄탄한 다리를 놓을 생각을 갖고 글을 작성했는데 오마이에서 발행된 글을 보니 중간중간이 짤린 징검다리가 되어버렸더군요. 그나마 그 징검다리도 일정한 간극을 유지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예전부터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편집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항의도 해보고 했지요. 그런데 이제는 그러려니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게 무명 시민기자의 설움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유명인들의 칼럼이나 에세이도 윤문을 거쳐 편집됩니다. 하지만 무명작가들의 글처럼 확 짤리지는 않습니다.

뭐 그런 이유 때문에 그런가요?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이 확 다가오는 요즘입니다. ㅋ  

 

 

 

오마이뉴스에 개제된 기사보러가기 ---> 클릭

 

 

 

 

 

 

혁명적인 루소와 보수적인 고승덕의 공통점

 

필자는 장자크 루소가 떠올랐다. 자신의 친딸에게서 서울시 교육감 후보로 적합하지 않다고 거명된, 고승덕 서울시 교육감 후보를 보고 있자니 장자크 루소의 생애부터 떠올랐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 장자크 루소와 <에밀>

 

장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 <인간불평등의 기원> 같은 역작들을 출간하여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혁명적인 인물이 아닌가? 그에 비해 고승덕 교육감 후보는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까지 지냈고, 또한 BBK 사건에서 MB쪽 변호사로 일하기도 한 인물이다. 그렇다. 고 후보자는 말 그대로 보수적인 인물이다.

 

그럼 도대체 프랑스 대혁명에 큰 영감을 준 혁명적 사상가와 보수 교육감 후보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 완전 다른 스타일의 삶의 궤적을 가진 분들 같은데... 둘 다 교육과 관련된 업적을 쌓거나 쌓으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의 아이들은 돌보지 않았고, 그 이유 때문에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고 있다는 점이 그 둘의 공통점이다.

 

루소는 1762년에 <에밀>을 출간하게 된다. 소설 형식으로 쓰인 이 책은 근대교육학의 한 획을 그은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루소 시대의 아동들은 독립된 인격체로 대접받지 못했다. 부모의 소유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에 루소는 <에밀>에서 아동중심주의를 역설한다. ‘아동의 발견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에밀>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아동 교육 문화에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된다.

 

 

 

 

 

 

 

 

 

# 자신의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낸 아동중심 교육자

 

이토록 아동중심주의 교육방법을 역설했던 루소의 아이들은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루소에게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았을까? 놀랍게도 루소는 자신의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내고 말았다. 루소의 아이들은 그의 아버지가 역설한 아동중심주의 교육을 구경도 못해 봤던 것이다. 대단히 역설적이다. 아동중심주의 교육법을 강력히 주장했던 이가 정작 자신의 아이들은 돌보지 않았으니

 

태어나마자 어머니를 잃는 등, 루소가 아무리 불후하게 성장을 했고, 또한 그 이후의 삶도 팍팍했다고 하지만 다섯 아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보낸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관대하지 않았다. 더 많이 손가락질을 했다. ? 그가 <에밀>이라는 아동중심주의 서적을 저술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피붙이도 잘 양육하지 못한 인물이 교육에 대해서 운운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남에 애들 교육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개입하지 말고, 당신 애들이나 잘 챙겨!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이 누구를 가르치려고 그래...!”

 

이런 비판은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실제로 루소가 직면했던 비판의 화살들이다. 또한 지금까지도 그에게 붙여진 꼬리표다. 쉽게 떼어지지 않는 꼬리표.

 

그럼 저런 비판의 화살들이 고승덕 서울시 교육감 후보에게 조준된다면? 저런 비판들 앞에서 고승덕 후보가 느긋할 수 있을까? 물론 프랑스 부르봉 왕가 시절을 살았던 루소와 2014년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 도전장을 내민 고 후보의 처지를 일대일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 재벌가에서는 고시 3관왕도 그저 그런 스펙?

 

고승덕 후보의 경우는 루소의 경우와 달리 이혼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가족사의 아픔이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고 후보는 고시 3관왕이라는 전무후무한 스펙을 쌓았고, 이후 재벌가인 박태준의 사위가 됐다. 하지만 이후의 삶은 순탄치 않았나 보다. 고 후보자가 61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것처럼, 재벌가의 사위되기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시 3관왕도 재벌가 앞에서는 그저 그런 스펙이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고 후보자는 동정표를 얻었을지 모른다. 아이들을 미국 시민권자로 키우려고 했던 재벌가와 그것을 막으려고 했던 사위간의 다툼에서 처절하게 패배를 하여, 그로 인해 아이들을 빼앗겼다면 그것 자체가 동정 여론일 것이다.

 

미국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길래 제 딸과 아들을 빼앗아갔나 하는 생각에 저는 미국 땅을 밟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인간 고승덕의 고뇌까지 읽혀질 정도였다. 박태준가()와의 갈등의 골이 그랜드캐넌보다 깊다는 느낌까지 받을 정도였다. 한편 그 대목만 얼핏 보면 반미를 부르짖는 종북좌파라고 색깔론 공격을 당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인간적인 고뇌의 대목을 읊조리며 고승덕 후보가 서울시 교육감 후보에서 사퇴를 했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진짜 동정여론을 얻었을지 모른다. 차기 광역단체 후보 등, 더 큰 정치적인 그림을 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조광작 목사가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어째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라며 망언을 했을 때, 그 자리에 고승덕 후보자가 있었는지 아닌지 하는 진실공방도 사퇴기자 회견과 함께 사라졌을 것이다. 또한 전교조만큼은 손을 보겠다라고 언급을 했느니, 안 했느니 하는 다툼도 저편으로 날라 갔을 것이다.

 

하지만 고승덕 후보는 문용린-박태준의 정치공작에 굴복하지 않겠다며 후보직 사퇴를 거부했다. 이로써 고승덕의 딸, 캔디 고는 문용린-박태준고승덕 낙선커넥션의 돌격대원이 되었다.

권력이 무섭기는 무섭다. 자신의 혈육도 반대편 후보의 정치공작원으로 돌려세울 만큼 권력은 무서운 것이다. 자신의 혈육과 대척점에 서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쟁취를 해야 하는 것이 권력에 내재된 습성일지도 모른다.

 

 

 

 

 

 

 

 

 

# 스스로를 폭로한 루소 VS 딸이 폭로한 고승덕

 

장자크 루소가 자신의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외부의 폭로 때문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폭로를 했던 것이다. 루소는 말년에 <고백록>,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등의 참회록들을 연이어 저술하는데 그런 서적들에서 자신의 치부와 모순을 스스로 드러냈던 것이다. 이런 자신의 모순에 대한 스스로의비판과 성찰은 오히려 루소의 사상과 작품을 더 빛나게 해주었다. 그런 참회를 통해 루소는 그저 그런입 진보들과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승덕의 경우는? 자신의 딸이 직접 페이스북에서 폭로를 했다. 고승덕의 모순을 자신의 혈육이 폭로한 것이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미우나 고우나 아버지인데, 그런 아버지가 서울시의 교육감이 된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 더군다나 미국에서 터를 잡은 캔디 고 입장에서는 보수 후보가 되던 진보 후보가 되던 무슨 상관이 있겠냐, 이 말이다.

 

 

 

 

 

 

만약 61일에 고승덕 후보자가 깨끗이 사퇴를 했으면 이 기사도 작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선거판에 나온 정치인이라지만 그들의 가족사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는 것이 무척 꺼림칙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필자는 유명한 정치 평론가도 아니고, 그저 역사트레킹을 행하는 여행작가일 뿐이다. 그러고 보니 여행작가가 너무 정치색이 강한 기사를 작성한 것 같다.

기왕 정치색이 강한 발언을 한 김에 하나 더 해보자. 필자는 고승덕 후보가 교육감으로 선출되는 것이 무척 우려스럽다. 재임기간 내내 이런 꼬리표가 따라 붙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남에 애들 교육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개입하지 말고, 당신 애들이나 잘 챙겼어야지!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누가 누구를 가르치려고 그래...!”

 

 

 

 

 

 

 

 

 

 

 

 

 

 

 

 

 

 

 

 

 

 

 

 

 

 

 

 

 

 

 

 

 

스스로를 폭로한 루소, 딸이 폭로한 고승덕

오마이뉴스|입력2014.06.03 22:59

 

 

 

[오마이뉴스 곽동운 기자]

자신의 친딸로부터 '서울시 교육감 후보로 적합하지 않다'고 비판 받은, 고승덕 서울시 교육감 후보를 보고 있자니 장 자크 루소의 생애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했다.

프랑스 대혁명에 큰 영감을 준 혁명적 사상가와 보수 교육감 후보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을까? 둘 다 교육과 관련된 업적을 쌓거나 쌓으려고 하지만 정작 자신의 아이들은 돌보지 않았고, 그 이유 때문에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루소는 1762년에 < 에밀 > 을 출간한다. 소설 형식으로 쓰인 이 책은 근대교육의 한 획을 그은 수작으로 평가 받는다. 루소 시대의 아동들은 독립된 인격체로 대접 받지 못했다. 부모의 소유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이에 루소는 < 에밀 > 에서 아동중심주의를 역설한다. '아동의 발견'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 에밀 > 은 당시 프랑스 사회의 아동 교육 문화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자신의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낸 '아동중심 교육자'



▲ 에밀루소는 < 에밀 > 에서 아동중심주의 교육을 역설한다.

ⓒ 미네르바

 


이토록 아동중심주의 교육방법을 역설했던 루소의 아이들은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루소에게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았을까?
놀랍게도 루소는 자신의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내고 말았다. 루소의 아이들은 그의 아버지가 역설한 '아동중심주의 교육'을 구경도 못해 봤던 것이다. 대단히 역설적이다. 아동중심주의 교육법을 강력히 주장했던 이가 정작 자신의 아이들은 돌보지 않았으니.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는 등 루소가 아무리 불후하게 성장을 했고, 또한 그 이후의 삶도 팍팍했다고 하지만 다섯 아이들을 모두 고아원에 보낸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관대하지 않았다. 손가락질을 했다.

왜? 그가 < 에밀 > 이라는 아동중심주의 서적을 저술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피붙이도 잘 양육하지 못한 인물이 교육에 대해서 운운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남의 애들 교육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개입하지 말고, 당신 애들이나 잘 챙겨!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이 누구를 가르치려고 그래!"

이런 비판은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 실제로 루소가 직면했던 비판의 화살들이다. 또한 지금까지도 그에게 붙여진 꼬리표다. 쉽게 떼어지지 않는 꼬리표.

그럼 이러한 비판의 화살들이 고승덕 서울시 교육감 후보에게 조준된다면? 고승덕 후보가 느긋할 수 있을까? 물론 프랑스 부르봉 왕가 시절을 살았던 루소와 2014년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 도전장을 내민 고 후보의 처지를 일대일로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딸의 폭로를 '정치공작'으로 만든 고승덕



고승덕 서울시 교육감 후보

ⓒ 고승덕 후보 홈페이지

 

고승덕 후보의 경우는 루소의 경우와 달리 이혼 과정에서 불거져 나온 가족사의 아픔이었다. 잘 알려졌다시피 고 후보는 '고시 3관왕'이라는 전무후무한 스펙을 쌓았고, 이후 재벌가인 포스코 박태준 회장의 사위가 됐다. 하지만 이후의 삶은 순탄치 않았나 보다.


고 후보가 지난 1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것처럼, 재벌가의 사위되기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고시 3관왕도 재벌가 앞에서는 그저 그런 '스펙'이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고 후보는 동정표를 얻었을지 모른다. 아이들을 미국 시민권자로 키우려고 했던 재벌가와 그것을 막으려고 했던 사위간의 다툼에서 처절하게 패배해, 그로 인해 아이들을 빼앗겼다면 그것 자체가 동정 여론일 것이다.

"미국이 얼마나 대단한 나라길래 제 딸과 아들을 빼앗아갔나 하는 생각에 저는 미국 땅을 밟지 않았습니다."

이 부분에서는 인간 고승덕의 고뇌까지 읽혀질 정도였다. 그런 인간적인 고뇌의 대목을 읊조리며 고승덕 후보가 서울시 교육감 후보에서 사퇴를 했으면 어땠을까? 그렇다면 진짜 동정여론을 얻었을지 모른다. 차기 광역단체 후보 등 더 큰 정치적인 그림을 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승덕 후보는 문용린-박태준가의 '정치공작'에 굴복하지 않겠다며 후보직 사퇴를 거부했다.

 

 

 



 

스스로를 폭로한 루소 vs. 딸이 폭로한 고승덕

 


장 자크 루소가 자신의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냈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외부의 폭로 때문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폭로를 했던 것이다. 루소는 말년에 < 고백록 > , <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 등의 참회록들을 연이어 저술하는데 그런 서적들에서 자신의 치부와 모순을 스스로 드러냈다. 이런 자신의 모순에 대한 스스로의 비판과 성찰은 오히려 루소의 사상과 작품을 더 빛나게 해주었다.

하지만 고승덕 후보의 경우는? 자신의 딸이 직접 페이스북에서 폭로를 했다.

필자는 고승덕 후보가 교육감으로 선출되는 것이 무척 우려스럽다. 재임기간 내내 이런 꼬리표가 따라 붙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남의 애들 교육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개입하지 말고, 당신 애들이나 잘 챙겨!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사람이 누구를 가르치려고 그래!"

덧붙이는 글 |

안녕하세요? 역사트레킹 마스터 곽작가입니다. http://blog.daum.net/artpunk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