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렌즈세상

[렌즈세상] 죽방울놀이

등록 : 2013.08.26 18:12수정 : 2013.08.26 18:12

 

 

 

 

 

 

 

 

 

 

 

 

 

 

 

 

 

 

 

 

 

 

 

 

 

 

 

우리문화연구소 이원하 소장이 아이들 앞에서 죽방울놀이 시범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소장은 충남 공주에서

 

우리의 전통 놀이문화에 대한 연구와 보존에 힘쓰고 있는데요. 죽방울놀이는 보부상단의 볼거리 문화에서

 

전해 내려왔다고 합니다.

 

8월2일 ‘거창아시아1인극제’에서 찍었습니다.

 

곽동운/ 여행프리랜서 

 


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한겨레 구독하기

 

===========================================================================================================================

 

2013년 8월 27일자 <한겨레신문> 오피니언란에 필자가 찍은 사진이 게재됐다. 죽방울놀이라고,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놀이에 대한 사진이 게재된 것이다. 이 사진에 등장한 이원하 소장은 우리나라 전통 민속놀이에 대한 애정이 강한 분이다. 이 소장과 잠깐 인터뷰를 했을때 필자는 그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었다.

 

"우리나라 전통놀이 문화를 통해 제 삶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사실 제 얼굴이 많이 험상 궂잖아요. 그런데 우리 놀이문화를 알고, 접하고, 연구하다보니 어느새 제 얼굴이 부드러워졌다고 하더군요~"

 

이 소장의 얼굴에서 부드러움이 묻어 나오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전통놀이 문화에 대한 이 소장의 신념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제가 충남 공주의 한 아파트에서 사는데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도 흙이 없어요. 아이들이 다친다고 놀이터에 우레탄을 깔아 놓은 겁니다. 공주시에 사는 아이들이 이 정도인데 다른 대도시의 아이들은 어떻겠습니까? 도대체 유년기에 흙이나 땅을 만지고 놀 기회가 없는 거에요. 아이들이 흙장난을 하면서 얻는 정서적인 느낌들이 애초부터 박탈 당하는 것이죠.'

 

그렇다. 이 소장의 말처럼 흙 장난을 하면서 얻는 정서적인 감흥이 얼마나 소중한가? 그 유년시절의 경험과 느낌들은 소리소문 없이 우리의 유전자 속에 크게 각인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경험과 느낌들은 하나하나가 다 소중한 것들이다. 황혼에 잠긴 어르신들이 50~60년도 더 지난 자신의 유년기 시절을 미소를 띄우며, 바로 엊그제 이야기처럼 떠올리는 것을 보면 그 유년시절의 기억들은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하고 귀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학원에 쫓겨, 스마트폰에 쫓겨 어른들보다 더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에게 흙을 되돌려주자. 흙에서 놀다 무릎팍이 좀 까진다고 너무 속상해 하지 말고... 상처나면 소독연고 좀 발라주면 되지 뭐. 자신의 아이가 어떠한 상처도 받지 않고 자라기를 원하시나? 왠만한 부모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실 것이다. 그럼 아이들에게 숨 쉴 공간을, 또한 정서의 공간을 내주시라. 그냥 흙에서 재밌게 놀 수 있게 짬을 주시라~!    

 

 

 

 

 

 

 

 

 

*** 벌써 2년 전의 일이다. 당시 필자는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주최하는 <신문논술대회>에 참여를 했었다. 예전부터 언론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어쩌면 당연한 참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상금에도 눈독을 들이고...ㅋ

 

그런데 문제는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신문논술대회는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공모전 중에 하나다. 그래서 지원자들도 많고 경쟁율도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특히 언론사 입사를 준비하는 취업준비생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공모전이 바로 신문논술대회라고 한다. 하긴 이런 공모전에서 수상을 한다면 입사 원서 쓸 때 상당히 유리할 수 있지~

 

그나저나 필자는 당시 은상을 수상했었다. 대상 - 금상 -은상 순이기에, 필자는 3등을 했다. 응모할 때 필자는 내심 대상을 생각했었다. 다른이들이 쓰지 않는 외신에 대한 이야기를 썼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상작들을 살펴보니 외신에 대한 이야기는 필자이외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3등상. 은상이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상에 대한 미련은 남는법! 그래서 다음에 기회가 닿는다면 꼭 다시 참여를 할 생각이다. 대상 한 번 먹어봐야지! 그래서 상금 받아서 소고기 한 번 구워 묵어야지~ㅋㅋㅋ 

 

 

 

 

 

 

 탱크킬러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미공군의 A-10 공격기. 2009년 서울에어쇼에서 촬영.

 

 

 

 

작년 가을. 필자는 강월도 영월의 동강을 거닐고 있었다. 동강 최고의 비경이라는 어라연을 탐방하고 콧노래를 부르며 느긋해하고 있었다. 단풍철도 지난 시기라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유유히 흐르는 동강만이 필자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푸아항~! 그런 호젓한 정적을 깨는 강력한 엔진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비행기 한 대가 동강의 골짜기 사이를 유유히 스쳐지나갔다. 탱크킬러라고 불리는 A-10 공격기였다. 미 공군 마크가 선명했다. 필자는 좀 어리둥절했다. 왜 이 아름다운 곳에 저 공격기가 비행을 하고 있을까? 난 순간 반사적으로 사진기를 잡았지만 이미 엔진소리는 저 골짜기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아참 이 근처에 공군 사격장 있지. 그런데 거기 백두대간 허리축이라던데….'

한때 필자의 마음 속에는 비행기가 있었다. 푸른 창공을 가르며 나는 비행기들이 좋았고, 그 비행기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함을 느꼈던 시절이 있었다. 그래서 하늘을 날아보겠다고 보자기를 둘러쓰고 옥상에서 뛰어내리기도 했었다. 그러다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필자가 본격적으로 비행기에 대해 '구애 작전'을 벌였던 때는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처음에는 하나둘씩 비행기 사진을 모으다가 나중에는 항공잡지 세계에 뛰어들었다. 항공잡지를 모으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항상 문제는 돈이었다. 돈이 없으니 잡지를 구입하는 데도 제약이 많았다. 하긴 당시 고등학생이 돈이 있으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용돈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필자는 헌책방 투어에 나섰다. 어차피 속보성을 획득하려고 항공잡지를 구매했던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1990년대 초반의 헌책방에서 항공잡지를 찾아보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와 같은 일이었다. 그만큼 항공잡지가 귀한 시절이었다. 그렇게 어렵게 구한 잡지들도 부실한 경우가 많았다. 곰팡이가 피고, 냄새나고.

 

 

 

 

▲ 동강 어라연 동강 최고의 풍광이라고 불리는 어라연이다.

 

 

 



'어린왕자' 꿈꾸던 그 시절... 지금도 그립다

그렇게 부실한 잡지들은 한 번씩, 꼭 손을 거쳐야 했다. 햇볕에 내다말려야 했던 것이다. 한번은 옥상에서 잡지들을 펼쳐놓고 잠시 일을 보러 간 적이 있었다. 햇볕이 쨍쨍하기에 느긋하게 길을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 와중에 엄청난 소나기가 내렸다. 허겁지겁 다시 돌아왔더니 옥상에 있던 항공잡지들은 이미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빗방울이 컸고, 강수량도 많았던 터라 내 잡지들은 소나기의 맹공을 견뎌내지 못했던 것이다. 난 멍하게 잡지 파편들을 보고 있었다. 그 잡지들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뛰어다니고 움직였던가! 동쪽 하늘에 예쁘게 드리워졌던 무지개가 얄미웠다.

그런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던져주던 나의 비행기 사랑은 이제 많이 무뎌진 게 사실이다. 시간 앞에 장사 없다고 세월이 흘러가면 첫사랑의 짜릿함도 사그라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심경의 변화가 꼭 시간의 흐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몇 년 전, 필자가 그토록 좋아하던 비행기들이 민간인 학살에 동원된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파시스트 세력들의 맹렬한 공세를 막아내던 용맹스럽고 멋진 비행기들이 우리 땅에서 민간인 학살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런 사실들은 내게 큰 혼란을 주었다. 전쟁통에 무장한 세력끼리 적대행위를 하는 건 별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비무장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폭탄을 투하하고 기총사격을 가했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동강 산소길 영월 동강의 산소길. 비행기가 떠난 자리에 아웃도어가 들어왔다.

 

 


무언가가 있던 자리에는 또 무언가로 채워지는 게 순리인 걸까? '비행기'가 떠난 자리에 '아웃도어 여행'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한 번, 두 번 떠난 여행이 쌓이고 쌓여 내 인생에서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더 솔직히 이야기를 하자면 아웃도어 여행으로 인해 인생의 지향점까지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동강 어라연에서의 일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비행기가 지나간 자리에 백두대간 걱정부터 하고 있지 않은가?

세상은 돌고 도는 법이다. 이러다가 아웃도어에 대한 애정도 '있다 없어'질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무엇이든 그것이 있었던 시간이 무척 소중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있었기에 그 빈자리가 느껴지는 것이고, 또 옛 기억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필자는 가끔 그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비행사 생텍쥐페리와 함께 '어린왕자'를 만나러 가던 그 시절, 그 동경의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아버지의 일기장

 

 

 

 

# 아내는 슈퍼우먼

이 책을 읽다보면 강한 부부애도 느껴진다. 부부의 인연이 이렇게도 강할 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박일호와 신봉선은 찰떡궁합이었다. 이들에게는 연리지나 비익조 같은 수식을 붙여도 될 정도였다. 연리지는 한 나무의 가지와 다른 나무의 가지가 서로 붙어있다는 뜻이고, 비익조는 암컷과 수컷이 각각 눈과 날개가 하나씩이라서 짝을 이루지 못하면 날 수 없다는 상상속의 새 이름이다. 연리지와 비익조는 둘 다 금실 좋은 부부를 지칭할 때 쓰이는 말들이다. 그런 찬사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부부는 서로에게 좋은 동반자였다.

병든 남편을 위해 신봉선은 매일 같이 보양식을 준비했고, 장사도 도맡아 했다. 신봉선은 '슈퍼우먼'이었는데 연탄배달, 빙수 만들기, 떡볶이 조리, 문구류 판매까지 못하는 일이 없었다. 거기다 남편을 대신해서 파출소까지 끌려가야 했다. 당시는 '불량식품' 근절이니 '유해만화 단속'이니 하는 강압적 단속이 철마다 시행됐는데 병든 남편을 대신하여 유치장 신세를 져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고달프고 힘겨운 생활이었지만 신봉선의 다짐은 '강철'과도 같았다. <아버지의 일기장>은 박일호의 일기 이외에 첨언 식으로 박재동과 신봉선의 기록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와 관련된 기록을 한 번살펴보자.

천한 장사한다고 사람까지 천하게 보는 일이 허다했다. 어떤 부모는 아이들이 만화책을 빌려왔다고 열 권이 넘는 책을 불태워버린다고 했다. 우리는 그 만화책이 살림 밑천인데 서슴없이 찢어서 불태워버린다고. 어떤 이는 우리집 양반이 옳은 소리를 하면 만화방 하는 주제에 하고 무시하고, 평생 만화방이나 해먹으라고 악담까지 한다. 내 자식만은 당신들 뒤지지 않게 훌륭하게 키우리라. 세상 사람들이 얕보고 무시할 때면 내 마음은 강철같이 다져진다. 우리의 희망은 오직 세 아이다. 76페이지.

 

 

 

 

* 박재동 화백: 독자들을 위해 캐리커처를 그려주고 있는 박재동 화백. 

직접 만나보면 실제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었다.

자세히 보면 '청년' 박재동이다.   

 

 

 

 


이렇게 가족을 위해 아내는 희생을 했고, 그런 아내를 박일호는 극진히 사랑하였다. 그런 부부애가 통했던 것일까? 발병 당시 얼마 못 산다는 의사의 진단을 비웃기라도 하듯, 박일호는 3남매를 다 시집·장가 보냈고, 손자·손녀까지 안아 봤다. 또한 아들 박재동의 손을 거쳐 자신이 18년간 써온 일기장을 세상에 내놓게 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아버지의 일기장>에서 박재동은 '타임머신'을 타고 청년 박재동으로 돌아가 그 시절의 아버지와 대화하고 있다. 매일같이 글쓰기가 버겁다는 아버지의 일기에 아들은 힘들어도 꾸준히 써야한다고 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쓴 일기장을 통해 현재의 박재동은 '철없던' 청년기의 자신과 만나고, 그 '철없던 아들'을 묵묵히 바라보는 아버지를 만나고 있던 것이다.

 

 

 

 

 

 

* 캐리커처: 필자의 캐리커처를 그려준 박재동 화백에 대한 답례로 박재동 화백의 캐리커처를 그려보았다. 박 화백이 그려준 그림에 필자의

그림을 덧붙였으니, 박재동 화백과 곽작가의 공동작업이 되는건가?  박재동 화백을 그린 캐리커처는  <손바닥아트>에 나온 모습을 응용해서 그려보았다.

 저 그림 그리는데 1시간이나 걸렸다. 이 참에 그림 공부 좀 열심히 해서, 나중에 시화전을 열어보고 싶다. 시화전도 나의 꿈이다.      

 

 

 

 

 

 # 아버지의 꿈

아버지에게도 꿈이 있었다. 특용작물을 기르는 농장 경영이 바로 그것이었다. 박재동의 할아버지는 박일호에게 농사를 지으라고 지게를 만들어줬지만 박일호는 그 지게를 부숴버린다. 자신에게는 꿈이 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공부를 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하지만 아버지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젊은 시절 들이닥친 병마 때문에 모든 것을 접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접어야 했던 아버지의 꿈은 고스란히 자식 세대로 넘어갔다. 부모세대의 꿈과 관련하여 박재동은 오마이뉴스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녀들의 꿈이 중요하듯 부모들의 꿈도 중요합니다. 자식들의 꿈을 위해 부모들이 자신의 꿈을 접는 일은 이제 없어야 할 것입니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자식들을 위해 일방적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아버지의 일기장>을 읽은 전후로 필자는 꿈이 하나 실현됐고, 새롭게 꿈이 하나  생겼다. 실현된 꿈은 평소에 존경했던 박재동 화백을 직접 만났고, 박 화백이 직접 필자의 캐리커처를 그려주었다는 것이다.

이번에 생긴 꿈은 결혼이다. 돈도 없고, 능력도 없어서 결혼 생각은 엄두도 안 났지만 이 책을 읽으니 당장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로생활도 좋다. 하지만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다보면 솔로 때와는 다른 희로애락이 생길 것이다. 그런 희로애락을 거치다보면 부모만이 깨달을 수 있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 캐리커처: 박재동 화백이 직접 그려 준 필자의 모습. 그런데 필자의 모습이 좀 껑뚱하게 나온 것 같다.

박 화백께서는 이 그림을 불과 30초 만에 완성하셨다. 놀라울 정도의 속작 능력이다.

 

 

 

 

 

 

 

#  <아버지의 일기장>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앞서도 언급했듯이, 필자는 <아버지의 일기장>을 읽는 내내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떠올렸다. 생각해보니 두 책의 공통점이 하나 더 있었다. 둘 다 마지막 책장을 넘길 때까지 미소를 머금고 읽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일기장>은 30년 동안 병마에 시달린 사람의 기록이었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2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던 사람의 기록이었다. 병마와 감옥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진정한 삶의 의미를 기록했던 두 분께 박수를 보낸다. 또한 좋은 기록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해 준 박재동 화백에게도 감사를 보낸다.

 

 

 

 

 

 

 

 

 

*아버지의 일기장

 

 

 

 

 

 

 

아버지의 18년간의 기록

일기를 쓴 박일호는 '한국시사만화계의 대부'로 불리는 박재동 화백의 아버지이다. 처음 이 책이 출간됐을 때, 필자는 '일기장'이라는 부분에 눈길을 두었다. 그래서 박재동 화백이 자신의 일기장을 세상에 공개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어쩌다 박재동 선생 부친 되시는 어른의 일기장을 읽게 되었다'라는 안도현 시인의 말처럼, 이 책은 박일호의 일기를 엮은 것이다. 만화가게, 분식점 그리고 문방구 주인이었고, 또한 30년간 병마에 시달린 무명인의 일상적인 기록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고백할 것이 하나있다. 사실 필자는 이 책을 박일호 선생이 아닌 박재동 화백의 시선으로 읽었다. 아무리 책을 좋아한다고 해도 한 무명인의 일기를 엮은 책을, 흔쾌히 돈을 주고 구매하는 책벌레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독서 실력이 하찮은 필자 같은 독서인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다. 필자는 박일호 옆에 적힌 박재동이란 이름 석 자가 없었다면 이 책을 구매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기를 쓴 박일호 선생은 1929년 경남 울산 범서읍(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에서 태어나 언양중학교를 졸업한 뒤, 해방 직후 교편을 잡았다. 당시에는 교사가 부족하여 중학교를 졸업한 사람도 교단에 섰다고 한다. 한편 한국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군복무를 마쳤는데 군 당국이 관련 서류를 분실하여 재징집이 되어 군대를 두 번이나 가게 됐다고 한다.

제대 후에는 양사초등학교로 복직을 하게 됐고, 23세에 박재동의 모친인 신봉선 여사와 혼인을 하게 된다. 교단에 다시 선 박일호는 열정적으로 교직 생활을 하게 된다. 과로까지 해가며 학생들을 가르친 것이다. 학생들에게 자습을 시키며 대충 넘어갈 수도 있었겠지만 맡은바 소임을 다하겠다는 각오로 수업을 진행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과로가 쌓이다보니 폐결핵이 발병했고, 그 폐결핵 때문에 교단까지 떠나야 했다. 그렇게 병치레를 하다 간경화까지 얻게 된다. 그렇다. 박일호의 젊은 시절은 설상가상처럼 불운의 연속이었다.

 

 

 

 

 

* 두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아버지의 일기장>은 닮은 구석이 많은 책들이다. 둘 다 극한의 상태에서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희망을 노래했던 책들이다.  그래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함박 미소를 지으며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2003년도판이다.   

 

 

 

 

 

 

질병과 가난을 극복하게 해 준 가족사랑



<아버지의 일기장>을 읽다보면 건강, 질병, 병간호에 대한 언급이 꾸준히 나타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집안에 환자가 있으면 돈이 많이 드는 법! 더군다나 박일호는 교편을 떠나야 하지 않았던가. 산 입에 풀칠을 할 수 없었기에 박일호와 신봉선은 팔을 걷어 붙여야 했다.

부산으로 이주한 그들은 연탄배달, 풀빵장사, 팥빙수장사에 손을 댔다. 그러다 집주인이 하던 만화방을 인수하기에 이른다. 시사만화가 박재동을 탄생시킨, '천국의 도서관'인 그 만화가게를 넘겨받은 것이다. 이렇듯 <아버지의 일기장>에서는 1970~1980년대 한 가난한 도시 서민의 삶의 투쟁(?)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 책의 한 축이 박일호의 투병이었다면, 또 한 축은 생활고였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필자가 나열한 두 축을 기본으로 삼으면 이 책은 그저 '글루미 선데이'같은 우울한 기록물일지 모른다. 하지만 필자는 <아버지의 일기장>을 읽는 내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정겹고, 익살스러운 박재동의 삽화와 코멘트가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그랬기도 했지만, 그보다 투병과 생활고를 뛰어넘는 세 번째 축이 굳건히 서있었기에 필자는 즐거운 기분으로 책장을 사뿐히 넘길 수 있었다. 그럼 그 세 번째 축은 무엇일까? 바로 가족애(愛)였다.

오늘 재동이가 군복무 중 화실에 나가 받은 보수(월 4만원)를 내 약대(藥代)로 내놓았다. 난생처음 자식에게 받은 돈에 얼떨떨하다. 불효자인 내가 자식의 효심에 새삼 감동한다. 부디부디 재동에게 서광이 비치길 빌고 또 빈다. '자식에게 받은 돈' 1976년 6월 14일자, 78페이지.


 

 

 

 

* 박재동 화백: 오마이뉴스에서 강연 중인 박재동 화백

 

 

 

 

 

 

<아버지의 일기장>에서는 청년 박재동이 등장한다. 1976년 당시 방위 복무를 했던 박재동은 낮에는 자택 인근 부대에서 군복무를 하고 밤에는 화실에 나가 학생들을 지도했다고 한다. 그렇게 어렵게 번 돈을 약값에 보태라고 내놓으니 부모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특했겠는가.

이외에도 책 곳곳에서는 가족애가 넘쳐났다. 박일호 선생은 어버이날 딸(명이)이 달아준 카네이션에 환한 미소를 지었고, 둘째 아들(수동)이 달라는 동문회비를 주지 못해서 가슴을 쳐야 했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장서방(명이의 남편)의 칭찬에 침이 마를 정도였고, 큰 며느리(박재동의 부인)와 작은 며느리(수동의 부인)의 정성에 감동했다. 그렇다. 병치레의 고통과 저조한 매상 같은 암울한 기록들도 책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상쇄하고도 남을 행복한 기록들이 <아버지의 일기장>에서는 만발하고 있었다.

 

 

 

 

 

 

 

 

 

 

 

 

 

 

 

 

 

 

 

 

 

 

 

 

 

 

 

 

 

 

 

 

 

 

 

 

 

 

 

 

 

 

 

 

 

 

 

 

* 곽작가: 우물 물을 한 바가지 들이키는 설정 샷! 좀 껑뚱하게 나왔네요!ㅋ

 

 

 

 

 

 

* 삼남길: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삼남길에 대해서 방송을 했답니다. 사진에 등장한 분은 강나림 기자인데 이 분도 삼남길을 직접 걸었답니다.

그러면서 연신 감탄사를 내뱉더군요. 사진에 등장한 숲길은 전남 강진의 백운동 숲길입니다. 직접 걸어보면 화면보다도 더 큰 감흥이 있을 것입니다.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삼남길을 아십니까'라는 제목을 걸고 삼남길에 대해서 방송을 했습니다. 약 13분간 진행된 방송은 기승전결이 명확히 떨어지더군요. 삼남길에 대한 소개, 삼남길이 주목받는 점, 삼남길을 만드는 사람들, 삼남길의 과제 등등... 아름다운 영상과 함께 진행된 방송에서 삼남길은 자신의 자태를 드러내더군요.

 

이렇게 진행된 방송에 저도 출현을 하였기에 포스팅을 한 번 해봅니다. 사실 생각보다 제가 화면에 많이 등장해서 좀 놀라기도 했답니다~ㅋ

한가지 흡족한 점은 제가 예전에 삼남길과 관련된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게재를 한 적이 있었는데, 2580측에서 그 기사를 보고 손성일 대장에게 접촉을 했다고 하더군요. 뭐 저도 나름대로 삼남길 발전에 기여를 한 셈이니 정말 기분이 좋네요. ^ __ ^

 

이 사진들은 동영상 화면을 캡처한 것이라 화질이 떨어졌네요. 그게 안타깝습니다.

 

    

 

 

 

 

 

 

 

 

 

 

 

* 삼남대로: 삼남길은 조선시대 옛 삼남대로를 표본으로 개척되고 있는 도보여행 코스입니다. 아쉽게도 현재 삼남대로는 그 원형을 잃어버리거나 훼손된 곳이 많답니다. 산업화와 도로교통의 발달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지요. 삼남길에게도 이런 시대적 흐름 뿐아니라 도보여행길이라는 본질에 걸맞은 변화의 옷이

필요하겠지요. 즉, 옛 삼남대로를 기계적으로 삼남길에 옮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도보여행을 위한 트레킹 코스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스팔트를 걸으며 매연을 먹는 도보여행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 곽작가: 삼남길 전남구간 3코스 해들길에서 한 컷. 해들길은 해남군 북평면 옛 이진산성을 지나갑니다.

제가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는건가요? 저것도 연출인 듯~ㅋ

 

 

 

 

 

 

*우물: 이 우물은 옛 이진성 안에 있었던 것인데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이 우물을 충무공 이순신 장군도 드셨다고 하네요.

화면에 저를 포함한 손성일 대장 및 삼남길 개척단원들이 등장합니다.

 

 

 

 

 

 

* 함박골: 함박골은 현대식 한옥으로 만들어진 팬션입니다. 너무 예쁘게 치장하려고만 하는 현대식 팬션과는 격조가 다른 곳입니다. 이 곳에 가면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도 있고, 저렇게 흰둥이들도 만나볼 수 있답니다. 함박골 한옥팬션은 삼남길 전남구간 4코스 첫 시작점인 차경마을에 위치해 있답니다.

 

 

 

 

 

 

* 텐트: 손성일 대장과 함께 텐트를 세팅 중.

 

 

 

 

 

* 손성일 대장: '저는 몰라도 삼남길은 분명히 남을 거다'는 멘트가 의미심장합니다!

 

 

 

 

 

 

 

* 삼남길

 

 

 

 

 

* 삼남길: 맨 뒤에서 큰 배낭을 짊어지고 있는 곽작가. 배낭에 뭘 저렇게도 많이 짊어지고 계신가?ㅋ

 

 

 

 

 

 

 

 

 

 

 

 

 

 

 

 

 

 

심야 지리산 자전거 질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56일간의 백두대간자전거여행-마지막] 민족의 영산 지리산

13.03.21 18:21l최종 업데이트 13.03.21 18:21l

 

 

 

▲ 성삼재 성삼재에서 바라본 전남 구례. 앞에 보이는 도로가 지리산 관통도로이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인생사는 타이밍이다. 여행기의 작성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은 콘텐츠가 있다고 하더라도 발표 시기를 놓친다면 그 의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여행기는 묵혀 놓으면 놓을수록 가치가 상승하는 골동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행 기사는 시급을 다퉈 발표하는 성격의 뉴스가 아니다. 사진도 잘 선별해야 하고, 이동 중에 기록한 메모들도 잘 정리해야 한다. 그렇기에 기사를 송고할 때까지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장거리 여행에 대한 여행기이면 더더욱 그렇다.

문제는 그 지점에 있다. 시간의 소요가 느긋함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이다. 느긋함을 부리다가 기사 작성이 계속 뒤로 미뤄지고, 그러다 아예 전체 기사분에서 누락되는 원고가 생기게 된다. 내가 연재 아닌 연재를 하고 있는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 여행기에도 그렇게 누락분이 발생했다. 삼척·동해·예천·거창·김천 등등 시간에 쫓기다 보니 좀 더 오래 머물고, 좀 더 많은 에피소드를 경험한 지역을 취사선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뜀뛰기를 하듯 여행기를 작성했지만 한 번 꼬인 '스텝'은 잘 풀리지 않았다. 한여름에 다녀왔던 이야기가 엄동설한에 발표됐던 것이다. 계절감이 전혀 맞지 않게 된 것이다.


 


▲ 도계삼거리 달궁삼거리를 도계삼거리라고도 부른다. 저 표지판처럼 그 곳은 분명 아름다운 곳이지만... 필자에게는 너무나 험난한 곳이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한파주의보에 보는 반소매 사진

 

 

특정 주제를 놓고 공모를 하는 여행기 공모전이나 옛 추억을 회고하는 방식의 포토에세이라면 시간의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처럼 특정 시기에 행하고 동선이 명확한 여행기는 계절감이라는 족쇄에 묶일 수밖에 없다. 2012년 12월 31일에 발행된 <태백산 주목, 혹시 당신이 산신령?>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였다. 그 여행기를 본 지인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글도 사진도 꽤 쓸 만한데, 반소매 입은 사진은 좀 추워 보인다. 지금 한파주의보라는데…."

아무리 좋은 글을 쓰고, 아무리 멋진 사진을 게재하더라도 한파주의보를 체감하고 있는 독자들에게 반소매 사진은 '아니올시다'를 유발시킬 것이다. 하지만 이제 필자도 이런 변명 아닌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이제 뜀뛰기를 하듯 여행지를 취사선택을 할 필요도 없게 됐다. 이번 편이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 마지막 편이기 때문이다.

 

 



# 2011년 여름에 만난 태풍의 기억

여행 43일 차 2012년 7월 26일

나는 경남 함양군을 출발했다. 이제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의 대미를 장식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리산!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민족의 영산. 나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의 마지막 관문인 지리산. 그렇게 필자는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마무리 짓기 위해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나는 이미 2011년에 관통도로를 통해 지리산을 넘은 적이 있었다. 그 당시는 국토종단 자전거여행 중이었는데 성삼재에서 태풍을 만났다. '죽음의 도로'라고 불리는 지리산 관통도로를 힘들게 올라갔는데 나를 반긴 것은 '덴무'라는 태풍이었다.

무척 억울했다. 여러 번에 걸친 위기를 넘기고 성삼재에 도착했더니, 태풍이 필자를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구절양장 같은 꾸불꾸불한 지리산 관통도로를 40시간에 걸쳐 이동을 했는데 말이다.

겨우 태풍이나 만나려고 그 고생을 하며 성삼재에 올랐던 것인가. 힘 좋은 4륜 구동 자동차로도 오르기 힘들다는 지리산 관통도로를 자전거로, 그것도 40kg나 되는 짐을 싣고 올라섰건만. 이름도 이상한 태풍이나 만났으니! 더군다나 당시 내 자전거의 브레이크는 둘 다 작동 불능 상태였다. 지리산 성삼재에서 태풍을 만났지, 자전거 브레이크는 망가졌지, 체력은 다 빠졌지.

 

 

 


 
▲ 지리산 관통도로 꼬불꼬불 구절양장 같은 지리산 관통도로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그런 면에서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의 종결점을 다시 지리산 성삼재로 잡은 것은 2011년의 '리벤지 매치'의 성격이 강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성삼재에 올라서 등산객들에게 제대로 환대와 격려도 좀 받고, 노고단에도 오를 생각이었다. 지리산 관통도로에서 블루야크(내 자전거의 애칭)를 끌고 가는 내내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푸하핫, 태풍도 안 오고 날씨 참 좋네. 이번에는 성삼재에 올라가서 목에 힘 좀 주고 다녀도 되겠군. 백두대간자전거 여행의 마지막이 지리산이라고 등산객들한테 자랑하고 다녀야지!'

나는 시간 계산을 잘못해, 야간주행을 하는 위험천만한 짓을 했지만 당시 마음은 뭔지 모를 뿌듯함이 넘쳤다. 불빛 하나 없는 산 한복판에서 오직 달빛에 의존해 주행하는 것도 '판타스틱'했고, 그런 '판타스틱'한 일이 벌어지는 곳이 지리산이라는 점도 내 마음을 기쁘게 했다. 당시 여행일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여행을 해서 그런지 몸이 무척이나 피곤하다. 그냥 눈이 감길 정도다. 하지만 기분은 좋다. 몸은 피곤해도 기분은 상쾌하다. 왜? 이곳은 지리산이니까! 민족의 영산 지리산이니까!"(7월 26일 오후 11시 뱀사골 야영장에서)

 

 

 

 


# 땀 뻘뻘 흘리며 페달 밟는데, 옆에서는 맥주가...

다음날. 지리산 산신령께서 단잠을 내려 주셔서 그랬는지, 나는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까지 잠이 들었다. 여행 막바지라고 여유를 좀 부렸던 것이다. 어차피 내가 그곳 지리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시간당 이동 거리도 가늠할 수 있었기에 그런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그 전년도의 경험도 한몫했다.

한여름의 지리산은 생기가 흘러넘쳤다. 덩달아 탐방객들이나 캠핑족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흘러넘쳤다. 달궁 캠핑장을 지날 때였다. 한무리의 가족들이 둘러앉아 수박을 쪼개 먹고 있었다. 시원한 맥주도 한 잔 걸치면서... 불타오르는 아스팔트의 열기를 온몸으로 느꼈던 나로서는 그런 광경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천하절경 속에서 음식과 술잔이 도니 이곳이 무릉도원이 아닌가? 하지만 술 한 잔 받아먹지 못하는 내 처지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렇게 느긋한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서편으로 해가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리산 지리를 안다고 하지만, 야간에 지리산 관통도로를 이동하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성삼재에 오르는 것이 급선무였다.


 


▲ 노고단에서의 아침 첩첩 산 중을 배경으로 한 컷! 일출 즈음이라 그런지 사진이 잘 안 찍혔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성삼재에서의 결심 '자랑 좀 해야겠다'

 

 

7월 27일 오후 7시


드디어 전라남도 구례군 산동면에 진입했다. 유명한 달궁 삼거리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 관통도로의 경사도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가팔라졌다.

보통 산행을 할 때 자신의 에너지 중 30%는 비축해놔야 한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아무리 비상시라도 체력이 남아 있다면 훨씬 더 생존 확률이 높아진다. 보다 더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산행 가이드'는 내게 적용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젖 먹던 힘까지 내뿜어야 할 시기였던 것이다.

그냥 등산 배낭을 메고 그 도로를 타고 오르는 것도 힘든데 40kg 정도 되는 짐을 실은 자전거를 끌고 그곳을 올라가야 하다니…. 어느 구간은 너무 경사도가 심해서 자전거가 뒤로 밀리기까지 했다. 닳고 닳은 신발을 신고 자전거를 밀어 올리는 순간에 내 에너지는 0%에 가까웠을 것이다. 에너지 30% 비축론은 지리산 관통도로에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는 사람들에게는 통하지 않는 법칙이다.

그렇게 나는 온몸으로 성삼재로 향했고, 지리산은 어둠으로 덮였다. 이제 슬슬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의 마지막도 보이기 시작했다.

'푸하핫, 드디어 내 여행도 끝이 보이는구나. 성삼재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분에게 인사하고 여행 자랑 좀 해야지!'

내 발걸음과 블루야크의 바퀴질도 더 분주해졌다. 빨리 가서 커피라도 한 잔 마시고 싶었다. 몸은 힘들었으나 노고단이 눈앞에 있으니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 성삼재 드디어 성삼재에 도달했다. 어두운 시각에 도착했던 터라 사진도 잘 안 찍혔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7월 27일 오후 8시


성삼재에 도착했다. 드디어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의 종착지에 도달한 것이다. 난 해냈다. 결국 여행의 끝을 본 것이다. 어둠 속 성삼재는 고요했다. 밤이라 그런지 오가는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필자는 성삼재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려고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지금 성삼재 이곳에서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마쳤습니다. 여행을 마치자마자 처음으로 뵙는 분이 선생님이십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으로 보이는 분이 주차관리소에서 급히 나오셨다. 난 먼저 인사를 건넸다.

 

 



# 자랑은 고사하고 꾸지람부터 듣다니

"안녕하세요."
"아니 이 밤에 여기는 뭐하러 올라와?"

그렇게 퉁명스럽게 말을 뱉고는, 서둘러 쇠사슬로 자동차 진입로를 걸어 잠그는 것이었다.

"뭐해요. 당장 가요."
"……."

역시 또 퉁명스러운 목소리였다. 난 당혹스러웠다. 힘든 여행을 종결짓자마자 가장 먼저 접한 소리가 퉁명스러운 꾸짖음이라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겨우 이런 괄시나 당하려고 그 고생을 하면서 지리산에 왔단 말인가? 내 여행이 이렇게 멸시를 당할 정도로 하찮았단 말인가?'

2011년에 태풍을 맞았던 것보다 훨씬 더 억울했다. 그나마 태풍을 맞았을 때는 관리소 직원이 직접 커피를 타주며 필자의 '무사귀환'을 염려해줬다. 그런 고마운 기억이 있었기에 일부러 국립공원 직원분을 찾아 먼저 인사를 드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내 작은 소망은 퉁명스러운 꾸짖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버렸다.

'그래 무슨 대단한 자랑거리라고 그렇게 혼자 오버 하냐. 뭐 대단한 여행이라고…. 대충 정리하고 빨리 서울 갈 생각이나 해야겠다.'

심신이 다 지쳤다. 그냥 빨리 복귀하고 싶었다. 심야고속버스라도 있으면 잡아타고 곧장 서울로 출발하고 싶었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지리산 관통도로를 타고 내려간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제동이 좋은 자동차도 골짜기로 굴러떨어진다는 '죽음의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고 야간에 그곳을 내려간다면?

나는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가야 했다. 그 직원이 퇴거 요구를 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렇게 멸시를 당했더니 그 자리에 계속 머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이걸 어쩌지? 가긴 가야 하는데, 내려갔다가는 바로 골로 갈 텐데….'



▲ 노고단 탐방소 노고단 탐방소에 갔더니, 저렇게 노고 할매가 반겨주었다. 사진에서 보여지듯 내 자전거는 해발 1,380m까지 올라갔다. 짐을 주렁주렁 매달고 참 멀리도 간 셈이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이러다가 딱지 맞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내려갈 수 없으면 올라가면 되지 않던가? 그냥 노고단으로 가면 되지 않던가?


현재 노고단-성삼재 구간은 임도로 돼 있다. 그래서 1톤 트럭도 통행이 가능하다. 하지만 자전거는 통행할 수 없다. 게다가 일몰 후 야간에는 산행도 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두 개의 규칙을 어기고 노고단으로 향했다.

한밤중 지리산은 고요했다. 적막감이 들 정도였다. 나는 랜턴을 끄고 달빛에 의존해 노고단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지난 시간을 회고해봤다. 한밤중 지리산에서 여행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그렇게 두 시간 동안 자전거를 끌고 가니 노고단에서 빛나는 불빛을 만날 수 있었다. 노고단 탐방소에 갔더니 어떤 젊은 국립공원 직원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야간 산행에, 자전거까지…. 이러시면 안 돼죠. 과태료 딱지를 맞으실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말에 수긍했다. 그 직원이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다음부터는 규칙을 꼭 지켜주십시오. 어쨌든 여행이 완료된 건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해 나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은 무사히 종료됐다. 성삼재에서 빰 맞고 노고단에서 화풀이 한 경우이지만, 어쨌든 지리산에서 무사히 여행을 종료했으니 그것으로 충분했다.

 

 


▲ 육십령 지리산과 남덕유산 사이에 있는 육십령 고개. 육십령도 백두대간에 자리잡은 고개이다. 지리산까지의 여행 일정을 마치고 지선 개념으로 육십령을 거쳐 남덕유산까지 달려보았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그동안 재미는 없고, 분량만 긴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전하고 싶다.

덧글. 내 자전거 블루야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고지대인 노고단 탐방소(1380m)에 오른 여행 자전거로 기록될 것이다. 만약 그 주차관리소 직원 아저씨가 아니었으면 블루야크의 고지대 기록은 성삼재(1090m)에서 멈췄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를 가지고 가장 높이 올라갈 수 있는 곳은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만항재(1330m)다. 한마디로 자전거도 만항재까지밖에 못 올라간다.

 

 

 


 

 

 

 

 

 

 

 

 

 

 

 

 

 

 

 

 

 

 

 

 

 

 

 

 

 

 

 

 

 

 

석불 앞에 서니 웃음이 절로 나오네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 12] 안동 이천동 석불 앞에서 '깔깔'거리며 웃다

 

 

13.02.21 13:43l최종 업데이트 13.02.21 18:20l
▲ 국제탈춤공연장 안동 시내에 국제탈춤공연장이 있다. 그 입구에 하회탈 석상이 방문객들을 환영해 주고 있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2012년 7월 14일: 여행 31일차


# 안동 이천동 석불 앞에서 크게 웃어댔다!

누구는 여행을 직접 할 때보다 여행 계획을 꾸릴 때가 더 흥분된다고 한다. 지도를 보며 동선을 그리고 검색을 통해 탐방지에 대한 사전 정보를 습득하는 행위 자체가 즐겁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행 계획을 꾸리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다. 한정된 시간과 뻔한 예산을 가진 가난뱅이 여행자들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다녀보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느껴보고 싶으나 시간과 경비 제약 때문에 가보고 싶은 탐방지를 뺄 수밖에 없었던 아픔을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가난뱅이 여행자들이라면 더 많은 뺄셈을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여행자들이 그렇듯, 필자도 절경과 유적지를 양대 축으로 삼아 여행 계획을 수립한다. 한편에서는 아름다운 풍광에 매혹되고, 또 한편에서는 찬란한 우리 문화유산에 감탄사를 내뱉는다는 말이다. 양대 축을 동시에 누리면 금상첨화겠지만 따로 따로 체험한다고 해도 큰 불만은 없다. 이번 여행기에 소개할 안동 이천동 석불은 후자 쪽에 속할 것이다. 이천동 석불은 감탄사를 유발시키는 훌륭한 우리의 문화유산이었던 것이다.

 

 

 

▲ 안동 이천동 석불 멀리서 보면 이천동 석불은 망토를 두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천동 석불은 몸통에 따로 제작한 머리를 올린 형상이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한편 필자는 이천동 석불 앞에서 '깔깔깔'하고 연신 웃음보를 터뜨렸다. 석불 앞에서 경망스럽게 웃었더니, 주위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필자를 보고 손가락질을 하기도 했다. 그럼 필자는 왜 그렇게 부처님 앞에서 망동된 행동을 했던 것일까? 혹시 필자는 불교에 대한 존중심이 없던 것이 아닐까?

 


# 거인 같은 고려 전기시대 석불들

전편인 경북 봉화 여행기에서 필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처님을 만나 뵙고 왔다고 했다. 청량산에 있는 청량사에서 세상을 시원스럽게 굽어보시는 석불 좌상을 두고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그 말에 빗대보자면 안동 이천동 석불은 세상을 즐겁게 해주시는 부처님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멀리서 보았을 때 이천동 석불은 망토를 두른 모습이었다. 큰 망토를 두르고 얼굴을 불쑥 내민 형상이었다. 그런 독특한 형상의 석불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런 엉뚱한 생각이 스쳐지나 갔다.

'부처님이 누더기 같은 도포를 두르고 불쌍한 중생들을 위해 고행의 길을 가시다 안동 이천동에서 석상이 되신 것이 아닐까?'

 

▲ 안동 이천동 석불 망토를 두르고 수풀 속에서 그 앞을 지나는 중생들을 굽어 보시는 것 같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안동 이천동 석불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만든 석불이다. 몸통 부분과 머리 부분이 별개의 암석으로 제작된 독특한 형상을 갖고 있는 것이 이 석불의 특징이다. 몸통 부분, 즉 필자가 망토를 둘렀다고 지칭한 큰 바위 상단 중앙에 머리 부분을 조각한 별개의 돌을 얹었다는 것이다. 단지 머리 부분만 조각하여 올렸을 뿐인데도 자연석인 몸통 부분이 서로 어우러져 일체형의 거대한 석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석불 제작자의 지혜와 구성 감각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대목이다.

안동 이천동 석불은 고려 전기 작품이다. 파주 용미리마애이불입상(일명 파주 쌍미륵 석불)이나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등이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석상들이다. 이 시기에 세워진 석불들은 하나 같이 다 엄청난 크기들을 자랑하고 있다. 신체비례에 맞춰 정교함을 구현하는 방식이 아닌, 선이 굵은 방식으로 '키다리 아저씨' 같은 큰 석불을 조각했던 것이다. 일례로 대조사 석불은 인체비례로 따지면 4등신에 가깝고, 얼굴은 '얼큰이'다. 정교성보다는 투박함이, 조화미보다는 개성이 넘치는 석불들이 탄생했던 시기가 바로 고려 전기였던 것이다.

그럼 왜 고려 사람들은 선이 굵으면서 개성이 넘치는 큰 석불들을 제작했을까?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사람들보다 세공기술이 덜 해서 그런 식으로 석불을 제작했단 말인가? 고려 전기 시대에는 마을의 안녕에서부터 개인적 기복까지 다 받아주는 수호신과 같은 '키다리 아저씨'가 대표적인 석불로 자리 잡게 된다. 이런 대형 석불들은 해당 지역의 민간 신앙이 접목된 형태라고 한다. 마치 큰 장승을 세운 것처럼 거인 같은 수호신이 마을 입구나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으니 해당 지역 사람들은 얼마나 든든했겠는가?

 

▲ 안동 이천동 석불 안동 이천동 석불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파주 쌍미륵과 안동 이천동 석불


더불어 파주 쌍미륵은 잉태까지 '책임'져 준다고 하지 않던가? 파주 쌍미륵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남녀 쌍미륵 형상이라 잉태와 관련된 기도들이 많이 올려진다는 것이다. 즉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부부들이 많이 와서 기원을 드리고 간다고 한다. 실제로 이 쌍미륵과 관련된 설화도 잉태와 관련이 있었다.

파주 쌍미륵도 안동 이천동 석불처럼 자연석을 몸통으로 이용하였고, 얼굴 부위도 따로 제작하여 올렸다고 한다. 쌍미륵이 있는 용미사를 방문했을 때, 필자는 쌍미륵을 보면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경내에서 그것도 석불 앞에서 큰 소리를 내며 웃는다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 짓이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스님이었다. 누가 뒤에 있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웃었던 것이다.

"쌍석불을 보니까 좋네요. 그냥 보기만 해도 복이 오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 파주 용미리마애이불입상 일명 파주용미리석불입상 또는 쌍미륵석불이라고도 불린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쌍둥 석불 형식을 띄고 있다. 왼쪽에 원립불을 쓰고 있는 상은 손에 연꽃을 들었는데 남성을 뜻한다고 한다. 오른쪽 방립불을 쓰고, 손을 합장한 상은 여성을 뜻한다고 한다. 원립불은 말그대로 둥근 모자 형태이고, 방립모는 그에 비해 각이 진 모자 형태라고 한다. 용미리마애이불입상은 보물 93호로 등록되어 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안동 이천동 석불 이천동 석불이 있는 곳은 제비원이라는 하여, 조선시대 국영여관이 있었던 곳이다. 즉 석불이 세워진 제비원 일대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교통의 요지였던 것이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불경한 짓을 했지만 웃음소리가 나쁘지 않게 들렸는지, 스님은 필자를 꾸짖지 않고 그냥 거처로 돌아가셨다. 필자는 그런 큰 웃음을 안동 이천동 석불 앞에서도 터뜨리고 만 것이다. 망토를 두른 듯한 모습이 재밌었고, 수풀 사이로 몸을 쑤욱 내민 듯한 모습도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하느라 심신이 다 지쳐있었지만 석불을 보고 있을 때만큼은 근심 걱정을 다 내려놓고 크게 웃었다.

그런 '불경'한 모습을 보고 어떤 불심이 깊은 분이 손가락질을 해댔지만 필자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마을의 수호신에게 안녕을 기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석불 앞에서 경망스럽게 '깔깔'거리며 웃었던 것은 예의에 어긋난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런 안동 이천동 석불이 준 큰 기쁨 덕택에 나는 백두대간 자전거여행을 계속 해서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천동 석불을 보기 위해 거의 20Km 이상을 돌아갔지만 200Km 이상을 갈 수 있는 에너지를 자연스럽게 충전시킨 느낌이었다.

글을 마치기 전에 4대강과 관련된 이야기를 잠깐 언급해 보겠다. 이미 실패한 정책임이 만천하에 드러난 4대강에 대해서, 필자까지 나서서 왈가불가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필자가 스스로 느낀 감상 정도만 언급해 보겠다.

필자는 경북 안동에서부터 구미까지 낙동강 자전거도로를 타고 이동을 했다. 필자는 예전부터 국토를 종단하는 자전거 도로가 하나 개설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자전거도로든 도보여행길이든 무동력 여행을 하는 여행자들이 안전하게 이동을 할 수 있는 길이 개설됐으면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4대강의 부속시설로 만들어진 현재의 4대강 자전거도로 방식은 반대한다. 필자가 직접 주행을 한 결과 4대강 자전거도로는 안전성이 결여된 구간이 상당히 많았다. 4대강을 중심축에 두고 억지로 설계를 해서 그랬는지 급경사가 다반사였다. 기존의 산길과 농로길을 끌어 와서 4대강 자전거도로 탈바꿈을 시키느라 그런 무리수가 나왔던 것으로 판단된다. 급경사가 진 농로길은 굴곡이 심한 일반국도 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도로폭이 좁을뿐더러 안전시설물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를 가장 당혹시켰던 것은 강 중간에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보였다. 그런 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아름다운 이곳에 이런 시설물이 있어야 하지? 굳이 이런 시설물이 여기 있을 필요가 있을까?'

자연석을 이용하여 석불을 제작함으로써 주위사물들과 혼연일체가 된 안동 이천동 석불을 보다 '쌩뚱맞게' 낙동강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입맛이 무척 씁쓸했다.

 
▲ 낙단보 경북 군위군에 위치한 낙단보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낙동강 낙동강 상류의 사진이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두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보를 쌓고, 콘크리트를 바르면서 4대강이 친환경적이라고 하면 그걸 누가 믿겠는가?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처님을 만나다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11] 경북 봉화 여행기②

13.02.02 09:56l최종 업데이트 13.02.02 09:56l
▲ 청량사 청량산 중턱에 있는 청량사. 사찰 한 가운데에는 석탑과 함께 부처님이 계셨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청량사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청량산 하늘다리에서 스릴을 즐기다!

 

다음날.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정신없이 잠에 빠져 있었는지 늦잠을 잔 것이다. 세면을 하고 난 후에 어제 내가 '물아일체'를 했던 곳을 찾아보았다. 기억을 더듬어 그 곳을 찾았는데, 자세히 보니 거기는 좀 움푹 파인 곳처럼 보였다. 선녀탕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충의 틀은 나왔다. 그래서 난 내식대로 이름을 지어보았다. 신선탕으로.

그런데 신선탕 주변에 쓰레기가 눈에 띄는 게 아닌가! 누군가가 먹다 남은 술병과 안주거리들을 그대로 놓고 간 것이다. 어제밤에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었다. 난 좀 짜증이 났다. 자연은 가만히 있는데 사람들이 와서 '유명관광지 티'를 내고 갔기 때문이었다. 어떤이들이 '유명관광지 티'를 내던 곳에서 난 좋다고 물아일체를 했던 것이다.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 청량사 산들이 병풍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있지만 부처님이 계신 곳은 주위가 확 트여 있어, 풍광이 시원스럽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청량산까지 와서 등산을 하지 않고 그냥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전거와 텐트를 잘 놓아두고 등산 버전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등산을 하기 전에 신선탕 근처에 있는 쓰레기들을 수거하고 갔다. 내가 전날 물아일체를 했지만, 한편으로는 풍기문란도 했기에 그 벌로 환경미화를 자청했던 것이다. 내가 재미있게 즐겼던 만큼 남들도 재밌게 놀 수 있게 뒷정리를 깨끗이 하면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청량산도 국립공원 클럽의 물망에 오를 정도로 절경을 뽐내는 산이다. 낙동강 상류와 어우러진 청량산의 모습은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또한 산 중턱에 있는 청량사에 가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처님도 만나 뵐 수 있다.

한편 청량산에는 하늘다리가 있다. 그 곳에 서면 자신의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산바람이 세게 분다. 스릴을 느끼고 싶지만 번지점프를 할 용기가 나지 않는 분들은 청량산 하늘다리를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필자가 구름다리를 통과할 때, 갑작스럽게 돌풍이 불었는데 '삐그덕' 소리를 내면서 다리가 요동을 쳤다. 스릴 만점이었다.

 

 

▲ 청량산 하늘다리 저 하늘다리를 건너는 것만으로도 스릴이 넘친다. 다리를 건널때 강력한 횡풍이 불면 그 스릴감은 공포감으로 바뀔 수도 있으니 조심하시길!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청량산 하늘다리 선학봉과 자란봉을 연결하는 청량산 하늘다리는 해발 800m 고도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바람이 세차게 분다. '바람의 계곡'에 하늘다리를 걸어놓은 셈이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어제는 물귀신, 오늘은 고기귀신의 유혹에 넘어가다!


즐겁게 청량산 산행을 마치고 난 후, 필자가 다시 베이스캠프로 돌아왔을 때는 저녁 경이었다. 그런데 내 베이스캠프 옆쪽에 승용차와 함께 작은 텐트가 하나 쳐져 있었고, 수염을 기른 어떤 아저씨가 분주하게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삼겹살을 굽는지 고소한 냄새가 솔솔 내 코를 자극시켰다. 어제는 물귀신이 나를 유혹하더니만 오늘은 고기귀신이 나를 유혹하나?

"자전거여행 다니시나 봐요? 여기 와서 같이 식사 하시겠어요?"

서울에서 봉화군으로 귀농을 하셨다는 분이셨다. 자신도 젊었을 때 자전거여행을 많이 다녔던 터라 자전거 여행족들의 마음을 잘 안다고 했다.

"아참, 아까 저 아래에서 쓰레기를 줍던데..."
"그거요. 제가 먹은 건 아니고요. 그냥 보기 흉해서 제가 환경미화 좀 했죠."
"아, 역시 그랬구나! 진짜 자전거여행 하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단 말야."

별 뜻 없이 쓰레기를 주었을 뿐인데, 그 덕에 난 푸짐하게 삼겹살과 술을 얻어 마실 수 있었다. 착한 일을 해서 내가 상을 받았던 것일까? 그 귀농아저씨도 그날 같이 캠핑을 했다. 젊은 시절 캠핑을 자주했던 분이라 귀농 이후에도 종종 캠핑을 해오셨다고 한다.

"그 팔각정 명당자리에요. 그 자리 내가 좋아하는 자리인데..."

알고 보니 내가 아저씨의 명당자리를 '선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량산 등반에서 오는 피로감에다 푸짐한 저녁 식사까지 대접받았더니 노곤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날은 자리에 눕자마자 그냥 눈이 감겼던 것 같다.

다음날.

 


그토록 예쁘게 안개가 낀 산을, 난 난생처음 보았다. 낙동강에서 피어오르는 안개가 청량산 봉우리들을 휘감고 있는 모습은 장관중의 장관이었다. 마치 한 폭의 진경산수화를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 맛에 강변 캠핑을 하는 거구나!

그렇게 진기하고 재밌는 에피소드들을 뒤로 하고 나는 계속 자전거여행을 이어갔다. 외롭고 힘든 길이었지만 아름다운 우리나라를 마음껏 느낄 수 있었으니, 난 행운아였던 셈이다.

 

▲ 차 한 잔 청량사 같은 고즈넉한 사찰에서 느긋하게 차를 한 잔 마시고 싶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청량사 청량사 석탑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아차, 해가 졌네"... 이럴 때 최고의 야영지는?

[56일간의 백두대간 자전거여행10] 경북 봉화 여행기①

 

13.02.01 11:01l최종 업데이트 13.02.01 13:24l

 

 

 

 

 

 

 

▲ 낙동강과 청량산 필자가 봉화를 방문했을 때는 장마철이라 그랬는지 무척 유량이 풍부했다. 물소리가 아주 거세게 들렸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낙동강 낙동강은 청량산을 굽이쳐 흘러간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강변을 바라보면서 잠이 드는 것처럼 로맨틱한 '굿나잇'이 또 있을까? 나는 바다도 좋아하지만 강변에서의 하룻밤을 더 선호한다. 그 이유는 강변이 갖고 있는 아기자기함 때문이다. 난 광활한 망망대해를 인간의 한계를 일깨워 주는 각성의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유유히 흐르는 강물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다독여 주는 입체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강물을 끌어와 농사를 짓고, 강촌으로 친구들과 즐겁게 모꼬지를 가고, 캔 맥주 하나 들고 홀로 한강에 나가 실연의 아픔을 강물에 실어 보내고...


이런 강변에 산이 어우러지면 그 입체성은 더욱더 강조될 것이다. 경쾌하게 흐르는 강물 소리에 산 새 소리가 어우러지면, 최소한 사운드면에서는 이미 무릉도원에 도달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 이번 여행기는 강변 캠핑에 대한 이야기이다. 필자는 백두대간 자전거 여행을 하면서 매일같이 텐트를 쳤다. 한계령 도로 정상에서 텐트를 쳤고, 울릉도 북면 천부항에도 쳤다. 또 수많은 초등학교와 폐교, 개활지에도 쳤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최고의 캠핑지에 대한 순위가 매겨졌다. 그럼 최고의 캠핑지 1순위는 어디일까.

 

 





▲ 청량산 베이스캠프 낙동강가에 세운 청량산 베이스캠프. 청량산을 병풍 삼고, 낙동강 끌어 안을 수 있었던 최고의 캠핑지였다! 한편 저렇게 정자 아래에 텐트를 치니 밤새 비가 내려도 물난리를 겪을 일이 없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청량산 베이스캠프

 

당시 나는 경북 봉화를 거쳐 안동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강원도 태백을 통해 봉화군으로 입성을 했는데, 내가 보기에 봉화는 행정상으로는 경상북도이지만 지형적으로는 강원도와 별반 다르지 않아보였다. 그렇게 험준한 지형을 가지고 있는 곳이어서 그런지 봉화지역은 '심산유곡'의 절경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명소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명호면에 있는 낙동강시발지공원에서부터 청량산 도립공원 입구까지의 길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병풍처럼 서 있는 청량산을 따라 낙동강이 시원하게 내달리는 모습은 장관 중에 장관이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 근처에 캠핑장이 있나요?"

나는 조금 다급한 목소리로 도립공원 관리사무소에 도움을 청했다. 낙동강과 청량산이 뽐내는 절경을 카메라로 담아내느라 나는 시간 가는 줄도 몰랐고, 그러다 덜컥 일몰 시간을 맞았기 때문. 설상가상이라고 그때 빗줄기가 한 두 방울씩 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어, 여기는 근처에 캠핑장이 없는데... 여유가 있으면 민박을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비수기라 민박 요금이 비싸지는 않을 텐데요."

자신도 아웃도어를 무척 좋아한다고 밝힌, 관리사무소의 한 젊은 직원은 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비수기에는 민박 요금이 비싸지 않다고 하지만, 내게는 비쌌다. 하루를 만 원으로 버텼던 내게 5만 원 짜리 펜션 숙박은 사치였기 때문이었다.

"아참, 이렇게 하면 되겠네요. 여기에서 쭈욱 가다보면 주차장이 나오는데 거기 보면 비를 막을 수 있는 오두막이 있거든요. 거기다가 텐트를 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장마철이라 사람도 거의 없으니까요."

 

 


 

▲ 청량산 도립공원 주자창 필자가 청량산을 방문했을 때는 장마철이라 그랬는지 주자창이 텅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필자는 최고의 캠핑을 즐길 수가 있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역시 아웃도어 하는 사람은 다르다!


그러면서 손수 커피 한 잔을 타서 내게 건네주었다. 역시 아웃도어를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다르긴 다른 듯싶었다.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자칫하면 숙소도 못 잡고 노숙을 할 판이었는데 말이다. 시골 인심에 아웃도어 인심까지 더해진 행운이었다.

가로등 불빛에 의존하여 그 직원이 알려준 곳을 찾아갔다. 그 곳은 팔각정 같은 곳으로 나무 의자와 테이블을 설치해두고 있었다. 좋은 풍광을 바라보면서 도시락을 먹으면 딱 좋을 것 같은 장소인 듯싶었지만 내 시야는 가로등 불빛 너머를 넘지 못했다. 그래서 어둠 속에서 주위 풍광만 지레짐작 할 수밖에 없었다. 난 서둘러 의자와 테이블을 한 쪽으로 몰아 텐트 칠 공간을 마련했다. 그것들이 돌처럼 무거워서 힘을 좀 쓴 후에야 그럭저럭 비가 들치지 않을 정도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야 드디어 나의 '청량산 베이스캠프'가 완성될 수 있었다.

 

▲ 청량폭포 등산로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청량폭포가 있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래프팅 낙동강 상류는 물살이 급해 래프팅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실제로 청량산 도립공원 인근에는 래프팅 업체들이 산재해 있었다.

ⓒ 곽동운

관련사진보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