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확 바꿀 무언가가 일어났으면 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무언가가 내 현실에서 확 일어났으면 했다. 큰 데미지를 입더라도 감수할 테니까 그런 일이 발생했으면 했다. 모 아니면 도,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처럼 말이다.

기적, 영적체험, 마법 등등... 어떤 식으로 표현해도 상관없다. 냉수 먹고 속 차리라는 손가락질이 뻔했지만 그런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것들에 더 관심이 커져갔던 게 사실이었다. 혹세무민한 미신을 동경한다고 욕을 먹어도 상관없었다.

오죽했으면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이나 귀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구나 하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었다. 귀신의 멱살을 잡고 다음주 로또 번호를 딸 생각이었지. 그런데 멱살 잡은 귀신이 나보다 더 멍청하면 어쩌지?^^

이런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사고에 마음을 두었던 건 현실의 삶이 녹녹치 않아서였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현실 생활이 술술 잘 풀리고, 통장 잔고가 넉넉한 사람들이 뭐하러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인 것들을 동경하겠는가? 현재의 삶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데 뭐하러 혹세무민한 미신을 동경하겠는가? 로또 번호도 모르는 멍청한 귀신의 멱살을 잡고 흔드느니 자신의 자산 관리사와 글로벌 증시에 대해서 환담을 나누는 게 더 남는 장사지.

불혹이 훨씬 넘었음에도 철딱서니 없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스스로도 웃기기는 했다. 하지만 코로나 때문인지 현재의 삶은 점점 더 빈곤해졌고, 그런 마법 같은 일이 발생했으면 하는 생각은 늘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내 능력치를 한 번에 확 뛰어넘을 수 있는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내 잠재적 능력치를 확 발현시킬 수 있는 기적 같은 일이 내 삶에서 일어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난 이미 마법을 체험했다. 또 앞으로도 계속 체험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걸 제대로 깨닫지 못했다. 이래서 사람이나 귀신이나 무식하면 안 된다니깐!

 

 

 

 

 

내가 체험한 마법은 숲길 걷기다. 숲길 걷기는 매우 손쉬운 활동이지만 내게는 큰 마법과도 같은 행위였던 것이다. 물론 한 번에 확 바뀌는 건 아니었고 역사트레킹처럼 느림보처럼 스며들었다. 역사트레킹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숲길의 매력에 빠졌었는데 예전에는 그 진가를 잘 몰랐던 것이다.

역사트레킹 코스를 세팅하면서 항상 숲길 비율에 신경을 썼었다. 아무래도 트레킹 참가자분들의 연령대가 높으니 숲길 걷기에 대한 갈망이 매우 높았던 것이다. 그리고 떠들썩한 것보다는 한적한 것이 좋으니 숲길로 세팅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인파에 밀리고 자동차 매연을 마셔가면서 걸을 거면 뭐하러 트레킹을 하시나.

 

그렇게 숲길을 우선해서 걸으니 참가자들만 좋은 것이 아니었다. 리딩을 하는 나도 좋았다. 이상하게 숲길을 걷고 오면 무언가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 들고 기분이 업이 됐다. 숲길을 걷고 난 후 거울을 보면 내 얼굴은 항상 방긋하게 웃고 있었다.

분명 내 삶은 녹녹치 않았다. 하지만 숲길에 다녀오면 마법에 걸린 것처럼 생글생글 웃고 있었던 것이다. 억지웃음이 아닌 생기가 있는 웃음이었다. 숲의 기운을 듬뿍 받은 그런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숲은 온갖 생명이 꿈틀대는 작은 우주이기에 그곳을 탐방하고 오면 생명의 기운이 내 몸 속으로 스며들었던 것이다. 숲이 주는 이런 마법을 늦게나마 깨달았던 것이다. 이제까지 괜히 엉뚱한 곳에서 멱살잡이나 하고 있었던 셈이다. 멱살 흔든다고 로또 번호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야.

 

숲에서 마법을 몸소 체험했으니 이제는 그 값을 조금이나마 하려고 한다. 복채를 낼 돈은 없으니 몸으로 해결할 것이다. 숲에 들어갈 때는 좀 더 신중하게 몸가짐을 할 생각이다. 숲을 더 아끼고 사랑할 생각이다.

숲의 정령들, 아니 한국이니까 한국식으로 하자. 산신령님의 진노를 사지 않게 숲에서는 경거망동 하지 않고 숲과 물아일체가 될 생각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산신령이라니! 혹세무민한 미신 같은 이야기를 설파한다고 욕을 해도 상관없다. 산신령이든 정령이든 숲을 지켜주는 존재는 내게는 너무나 소중할 뿐이니까.

 

 

 

 

 

 

 

 

 

 

 

 

 

11월 5일 목요일. 양평 역사트레킹 약식후기

 

고대하던 양평 트레킹을 행하는 날! 집을 나설 때는 꽤나 쌀쌀했는데 딱 트레킹을 행할 때가 되니 기온이 올랐다. 가을 트레킹을 하기에 트레킹하기 딱인 날씨였다. 처음 뵙는 분들도 오시고 해서 총 11명이 함께 걸었다. 이날 양평 역사트레킹도 벙개 형식으로 진행됐는데 벙개 치고는 많은 분들이 오셨던 것이다. 감사합니다!

 

양평역 -> 양강섬 -> 양근성지 -> 김종환 노래비 -> 물소리길 -> 갈산공원 -> 수변길

 

양평 역사트레킹은 이런 형식으로 진행됐다. 양평 트레킹은 완경사임에도 볼거리가 많아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이 장점이다. 강을 끼고 걷는 길이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코스는 아기자기한 요소들이 있어 지루할만 하면 새로운 아이템이 나타나곤 했다.

 

섬에 입도(?)를 하기도 하고, 가톨릭 성지를 방문하고, 노래비에서 노래도 듣고, 출렁다리도 건너고... 이러니 지루한 면이 확실히 덜한 것이다.

 

기온이 봄날같이 올라 신나게 걸을 수 있었다.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을 바라보면서 먹는 점심은 또 어떤가. 정말 꿀맛이었습니다!^^ 그렇게 트레킹팀은 재미나게 가을 소풍을 행하고 왔다. 모든 참가자들의 얼굴에는 함박 웃음이 피었다.

 

덕분에 나도 코에 제대로 바람 좀 넣고 왔다. 양평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유명한 용문산과 시원스럽게 펼쳐진 남한강을 바라보면서 눈도 호강하고, 코도 호강했다.

 

한편 호사마다라고 좀 아쉬운 점도 있었다. 이 양평 트레킹을 위해 약 반 년 정도를 준비를 했는데... 막상 현장에서는 준비한 걸 다 쏟아내지 못했다. 자료도 진짜 많이 준비했는데 그걸 다 못 풀어냈다. 뭐 어쩔 수 없지. 다음에 풀어내야지.

 

코로나 때문에 무척이나 어수선했던 2020년도도 이제 11월이다. 곧 있으면 송년회 시즌이 다가온다. 그넘의 코로나 땜시 트레킹 다운 트레킹을 못해 본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뭐 벙개트레킹으로 일정 부분 벌충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2021년에는 다시 정상적으로 트레킹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냥 보내기에는 이 순간들이 너무 아쉽다. 정형외과 신세를 질만큼 지난 몇년간 발에 땀나도록 답사를 다녔고, 이제 슬슬 그 결실을 맺으려고 하니까 '펑'하고 코로나가 터졌던 것이다.

 

돈을 못 버는 건 그렇다치고 제대로 악셀 한 번 밟아보려고 잔뜩 벼르고 있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1년을 낭비하니 정말 아쉬울 수밖에!

 

그럼에도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트레킹에 대한 애착이 더 많이 생겼다는 것이다. 서울과 인근 지역에 걷기 좋은 곳이 많다는 것이 고맙다. 내 두 다리로 그 곳들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고맙다. 부족한 나를 믿고 따라와 주는 트레킹팀이 고맙다. 그렇게 트레킹을 하면서 '고맙다'라는 말들을 새겨볼 수 있어 고맙다.

 

실내에서 작업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래도 난 야외 활동이 더 좋다. 아웃도어 활동을 통해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발산하니까. 그렇게 좋은 기가 감도니 트레킹을 더 많이 사랑할 수밖에...!

 

그나저나 코로나에 때문에 방구석에만 있으면 정말 우울증 걸릴 거 같더라. 언택트 시대가 각 개인들의 정신 지수를 급격하게 떨어뜨린 것이다. 그게 정말 무서운 거다. 그럴수록 트레킹이 더 고맙다.

 

우리 함께 역사트레킹 하러 떠나요! 이 와중에도 광고 때리고 간다^^;

 

 

 

 

 

 

 

 

 

 

 

 

 

 

 

 

 

 

늦게 올리는 금선사 트레킹 약식후기...

 

10월 29일 목요일.

 

이날은 우여곡절 끝에 모임이 성립된 금선사 벙개트레킹을 행하는 날이었다.

어지어찌하여 최소 인원이 달성됐고 트레킹팀은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과천골 트레킹이 추석 전에 행해졌으니 거의 한 달만에 트레킹을 행한 셈이다.

그런데!!! 이날 1년 만에 얼굴을 내비친 분들도 계셨다. 한 달도 아닌 거의 일 년 만에 얼굴을 뵙다니!

 

그넘의 코로나 땜시... 여러가지로 참 불편합니다. 반가운 얼굴도 자주 못 보니...

하여간 자주 나오세요. 마스크 쓰고 안전수칙을 지키면 트레킹만큼 좋은 야외활동도 없으니까요!

 

트레킹팀은 메인 탐방지인 금선사를 향해갔다. 금선사는 무학대사가 창건한 서울 구기동에 있는 작은 사찰이다. 북한산의 남쪽 봉우리가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그런 멋진 곳이다.

금선사를 가기 위해서는 3,6호선 불광역에서 하차한 후 구기동행 시내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이동해야 한다.

 

트레킹 전부터 금선사에 대해서 격찬을 했다. 그래서 트레킹팀도 큰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금선사의 단풍이 여물지 않았다. 이거 어쩌나~ 그리고 여름에는 콸콸콸 시원하게 흘렀던 계곡이 싹 말라있던 것이다. 되게 황량하더군. 트레킹팀의 기대치를 너무 높여드렸던 것이다. 난 구라쟁이! ㅋㅋㅋ

 

금선사를 벗어나 점심을 먹었다. 맛난 것들을 많이 싸오셔서 덕분에 아주 잘 먹었다. 아주 좋은 현상입니다. ^^

 

이후 트레킹팀은 탕춘대능선을 따라 이동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가을 운치를 느꼈다. 금선사에서 못 느낀 가을 분위기를 탕춘대능선을 따라 걸으면서 느꼈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북한산 자락길이었는데... 거기에 가보니 알록달록한 낙엽이 쫘악 깔려있었다. 누구는 그 낙엽을 하늘로 뿌리며 소녀 시대로 돌아갔다. ^^

 

그 단풍들이 너무 좋아서인지 집에 안 돌아가려고 하시더군. 그래서 제가 제발 집에 가시라고, 마을버스 바로 앞까지 안내해 드렸다. 그런데도 집에 안 가시려고 하더군. 혹시 지금도 집에 안 가시는 거 아니에요?ㅋ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금선사 트레킹은 무사히 종료가 됐다. 너무 신이 나서 집에 안 돌아가려고 하는 것만 빼놓고는 뭐...ㅋ

 

가을단풍이 뭐라고 사람들을 가출시키는지! 하긴 가출할만도 하죠. 그렇게 알록달록하고 예쁜데...

 

 

 

 

 


 

 

 

 

 

*** 아래는 금선사와 관련된 이야기:

https://brunch.co.kr/@historytrekking/213<= 전문을 보시려면 클릭

 

 

 

● 농산 스님이 정조의 아들?

 

1787년(정조11)에 수빈 박씨가 후궁으로 간택된다. 하지만 바로 순조를 낳지는 못했다. 왕위를 계승할 후손이 없었으니 정조는 얼마나 마음이 타들어갔겠는가. 그런 상황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순조의 탄생과 관련하여 주술적인 이야기가 등장한다.

 

용파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용파 스님은 당시 부과되는 부역이 너무 과하여 불교계가 피폐해지자 이를 타파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오셨다. 학수고대한 끝에 임금을 만났으니 그가 바로 정조였다. 대왕 앞에 나가 자초지정을 설명하니 그 부역을 면하게 됐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걸렸다. 왕위를 이을 왕자를 낳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정조께서는 용파가 보통 승려가 아니었음을 알아보았고 그에게 후사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했던 것이다.

 

문제가 해결됐지만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임금과의 거래의 산물이니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용파 스님은 이 일이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삼각산(북한산) 금선사에 있는 농산 스님을 찾아갔다. 자초지정을 들은 농산 스님은 금선사에 있는 목정굴에서, 용파 스님은 수락산에 있는 내원암에서 300일 관음기도를 올리게 된다.

 

드디어 300일이 되던 날이었다. 이날 수빈 박씨는 한 스님이 나타나 음력 6월 18일에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일러주는 꿈을 꾸게 된다. 이때 금선사 목정굴에서 기도를 올리던 농산 스님이 가부좌를 튼 채로 열반에 들게 된다. 마침내 음력 6월 18일이 됐고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왕자 아기씨가 태어났다. 이를 두고 농산 스님이 환생을 하여 수빈 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이 설화로 따지면 농산 스님이 정조대왕이 아들이 된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어쨌든 왕위를 이을 왕자가 태어났고, 금선사에서는 매해 6월 18일에 순조의 탄신제를 올리고 있다. 더불어 금선사와 내원암은 정조 재위 기간에 크게 중창된다.

 

 

 

 

 

 

 

 

 

 

 

 

 

 

 

 

 

 

원고지 750매 짜리 트레킹 원고가 있습니다

-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쉽지만 이번엔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브런치를 통해 작가님의 귀중한 원고를 발견하였고, 출판시장을 고려하여

원고를 어떠한 방향으로 기획하여 출간해볼까 다양한 방안을 검토해보고

거듭 논의를 거쳤습니다만, 저희가 생각하는 출간의 방향과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출판사 에디터에게 받은 메일이다. 보다시피 내 원고는 퇴짜를 맞았다. 출판이 또 엎어진 것이다.

벌써 3번째다. 어차피 계약서도 안 쓴 처지라 뭐 크게 손해본 것은 없었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하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사실 이번에는 출판사에서 적극적으로 대시를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내 핸드폰 번호로 전화까지 했다. 이메일은 공개했지만 전화번호는 좀 숨겼었는데 그걸 찾아내서 전화를 해줬으니... 진도가 꽤 나갔던 셈이다.

담당 에디터는 트레킹 도서 발간에 강한 의지를 여러번 표명했었다. 그런 의지 표명이 좋았기에 일이 순탄하게 흘러갈 줄 알았다.

하지만!!!

무언가 꼬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중간에 메인 담당자가 바뀌었는데... 그때부터 좀 감이 이상했다. 그냥 계속 나아가야지 왜 중간에 바뀌지? 그 바뀐 담당자와는 계속 메일로만 의견 교환을 했다. 그런데 메일로만 의견을 나누면 한계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전화도 병행을 하는데... 그 바뀐 담당자와는 전화 통화 한 번을 못해봤다.

내가 전화를 할 때는 받지를 않았다. 또한 전화를 주겠다는 시간에 전화를 주지 않았다. 해당 시각을 넘겼을 때 전화가 아닌 메일을 보냈다. 여기서부터 확 꼬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뭐지? 일처리를 이렇게 하나?'

일이 안 되려니 애먼되서 꼬이더라. 하여간 그렇게 엎어졌고 참 거시기했다. 더이상 이야기하면 좀 구질구질할 거 같아서 여기서 멈추겠다. 그런데 마음이 이런 건 어쩔 수가 없다.

- 오빠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ㅋ

예전에 개그 프로그램 중에 이런게 있었지. 괜히 김칫국부터 마셨던 거야...ㅋ

- 우리는 역사서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내용을 보강해주세요.

- 적어도 30꼭지는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분량으로는 부족합니다.

- 트레킹에 중점을 둔 실용서가 우리의 방향입니다. 맛집이나 주변관광지를 포함하는 건 당연하고요.

- 글 앞뒤로 에세이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을 조절해주세요.

이제까지 내 원고와 관련된 의견들이다. 뭐 다른 말로 하면 원고가 '까인' 이유다.

3개의 각기 다른 출판사에서 들은 의견들이라 일률적이지가 않다. 어디서는 역사에 방점, 어디서는

실용서로 만들겠다... 아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거지!

그냥 내 스타일을 유지할란다. 그게 서로한테 더 나을 거 같군.

글을 마치기 전에 광고나 해본다. 광고하면서 거시기한 마음을 달래본다.

현재 총 25편의 역사트레킹 글이 있다. 대충 200자 원고지 750매 정도의 역사트레킹 글이 있다는 뜻이다. 750매에 사진 붙이고, 지도 붙이고 하면... 트레킹 단행본이 뚝딱 나온다는 것이다.

요즘 코로나 땜시 트레킹이 대세라는데... 혹시 역사트레킹 책에 관심있는 출판사 없수?

글의 퀄리티가 좋은지 나쁜지는 브런치에 직접 가서 확인할 수 있으니 가서 봐주시기라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트레킹은 생각창고> 는 산티아고 2편을 제외하고 16꼭지를 작성했어요. 200자 원고지 기준, 30~35매 정도로 작성했습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thinktrekking

<함께걷는역사트레킹>은 7꼭지입니다. 200자 원고지 기준, 30매 정도로 작성했습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withtrekking

한마디로 현재 역사트레킹 관련 글은 23편입니다. 산티아고 2편을 포함하면 총 25편이 됩니다. 바로 출판이 가능한 분량이지요. ^^

지금은 고요한 새벽.

모두가 다 잠들어 있는 새벽에 난 지도를 그렸다. 누가보면 무슨 대단한 지도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보시다피시 그림 솜씨가 초딩???

역사트레킹 원고를 쓰면서 항상 꺼림칙했던 것이 지도의 부재였다. 이동 경로를 시각화시켜주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는 무척 차이가 크다. 특히 그 길을 전혀 모르는... 초행길인 사람은 지명조차도 낯설다. 한마디로 감이 안 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구글 지도를 끌어다 쓰고 싶지는 않았다. 타블릿을 하나 구매해서 앱으로 그림을 그릴까 하다가 여러 사정이 있어 그것도 그만두었다. 사실 그림앱도 어떻게 사용하는지 잘 모른다.

별 수 없이 손으로 직접 지도를 그렸다. 그래 욕해라 욕해... 내 그림 솜씨는 초딩 수준이당...ㅋ

처음에는 이걸 어떻게 그리나 싶었는데 자꾸 그리다보니 은근히 재미가 있는게 아닌가! 시간도 처음에는 상당히 오래걸렸는데 지금은 좀 많이 줄었다. 공정도 3단계에서 2단계로 줄였다.

이러다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후예가 되는건 아닌지...ㅋ

하여간 이거 나중에 취미생활로 할 수도 있을 거 같다. 물론 그러려면 그림 솜씨를 확 높여야겠지...ㅋ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7편>

잘 알려지다시피 조선의 건국자들은 관악산의 화기를 두려워했다. 또한 호랑이 기운도 두려워했다. 경복궁과 관악산 사이에 한강이 있었지만 그 걷잡을 수 없는 기운들이 도강을 하여 도성 안으로 미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이번편은 관악산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다. 관악산에 대한 이야기는 <관악산 역사트레킹>편에서 언급을 했었다. 이번편은 관악산의 지산인 호암산에 대한이야기다. 그래서 부제도 <호암산 역사트레킹>이다.

호암산 역사트레킹은 1호선 석수역에서부터 시작한다. 1번 출구로 나오면 1번 국도가 나온다. 이 구간은 경수대로라고도 불리는데 안양시 석수동부터 수원시 권선구 대황교동까지의 거리를 경수대로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참고로 1번 국도는 전라남도 목포에서부터 평안북도 신의주까지 1,068km에 달한다. 남북이 통일되면 1번 국도를 따라 달려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다. 필자도 통일이 되면 큰 배낭에 텐트 짊어지고 북쪽으로 트레킹을 하러 갈 셈이다. 그날이 언제 올까? 하여간 빨리 왔으면 좋겠다.

석수역을 뒤로하면 서울둘레길 표식이 보인다. 여기는 서울둘레길 5코스 관악산삼성산 구간이다. 도보여행자들이 표식을 따라 산으로 향한다. 주택가를 지나면 둘레길 초입이 나오는데 트레킹팀은 좀 더 이동한다. 대한신학대학교라는 곳이 나오는데 이곳에서 무언가를 하고 출발한다. 스트레칭. 많이 걸으니 스트레칭은 필수다.

 

 

* 호암산 잣나무숲: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다. 힐링하기에 딱이다.

● 호랑이 형상을 닮은 호암산

큰 산이라 그런지 관악산은 여러 지산을 거느리고 있다. 호암산도 그 지산 중에 하나다. 그 외에도 삼성산이 관악산의 지산으로 잘 알려져 있다.

금주산 혹은 금지산으로 불렸던 호암산(虎岩山)은 호(虎)자에서도 보이듯 산이 호랑이의 형상을 닮았다고 한다. 호암산은 서울 금천구의 주산으로 금천구와 관악산에 걸쳐있다. 호암산이 호랑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돌산인 관악산의 지산인 만큼 바위가 많다. 해발고도가 393미터라 그리 높지 않지만 곳곳에 펼쳐진 기암괴석들이 산행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저 바위가 무언가 있어 보이네요. 어떤 걸로 보이세요?”

“촛대바위인가요? 길쭉길쭉하네요.”

“길쭉하긴 한데요 촛대바위는 아니에요.”

“그럼 뭐죠...”

트레킹팀의 눈길을 사로잡는 바위가 나타났다. 바로 일명 사랑바위라고 불리는 신랑각시바위다. 신랑각시바위는 남녀 간의 사랑을 이루게 해준다하여 이 일대에서는 무척 유명한 바위로 통한다. 촛대바위처럼 늘씬한 암석 2개가 서로의 몸을 맞대고 입맞춤을 하는 형상이라 사랑바위라는 명칭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아랫부분은 단일 암석이다. 윗부분에 절단면이 생겨 바위가 두 개로 보이게끔 윤곽선이 생긴 것이다.

 

* 신랑각시바위

● 호암산판 로미오와 줄리엣, 신랑각시바위

명칭이 신랑각시바위인 만큼 그 속에 얽힌 이야기도 당연히 러브스토리다. 아랫마을에 선남선녀가 있었는데 그 둘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두 집안은 서로 철천지원수였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여자 집안에서는 다른 집으로 시집보내려고 했고, 이에 낭자는 호암산으로 도망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총각은 낭자를 찾아다녔고 지금의 신랑각시바위가 있는 곳에서 낭자를 찾게 됐다. 둘은 서로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고 다짐했고, 그 소원을 달님에게 빌었다. 달님은 그 둘을 영원히 떨어지지 않게 그 자리에 서로를 마주보게 하는 바위로 만들었다.

남녀간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존재한다. 그 이야기들의 상상력은 끝이 없다. 나무에 투영하여 연리지(連理枝)를 그려내고, 상상의 동물인 비익조(比翼鳥)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신랑각시바위는 그런 상상력에 무속신앙까지 더해진다. 그 바위를 보고 간절히 기원을 드리면 선남선녀들이 혼인을 할 수 있고, 거기에 더해 아들까지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랑은 바위조차도 달리 보게 해주는 큰 힘이 있는 거 같다.

참고로 연리지는 뿌리가 각각 다른 나무들의 나뭇가지가 서로 엉킨 것을 말한다. 서로 하나로 엉켜 있어 하나의 나무처럼 보인다. 비익조는 암컷과 수컷이 각각 하나의 눈과 날개만 있는 상상속의 새다. 눈도 하나요, 날개도 하나라 서로 짝을 짓지 못하면 날 수가 없다.

신랑각시바위를 비롯한 많은 바위들은 그 자체로 전망대 역할을 해준다. 이곳에서는 이웃 동네인 경기도 광명시를 비롯해 안양시, 군포시가 내려다보인다. 풍광이 시원시원해서 그런 걸까. 신랑각시바위 옆 전망대를 바라보고 있으면 괜히 누군가의 손을 잡고 싶어진다. 그리고는 사랑에 빠지고 싶어진다.

* 한우물: 제1한우물이다. 저기서 수영을 하고 싶을까?

● 호암산성과 한우물

이제 트레킹팀은 한우물과 석구상을 향해 간다. 정상부 능선길을 따라 이동하는데 오르막내리막이 있긴 하지만 어렵지 않게 움직일 수 있다. 이 길은 앞서 언급한 서울둘레길 5코스와는 다른 길이다. 서울둘레길이 산 중턱을 따라간다면 ‘신랑각시바위 - 한우물’ 구간은 호암산의 정상부 산마루를 따라 이동한다.

한우물은 호암산성 안에 있는 시설로 제1한우물과 제2한우물로 나뉜다. 호암산성은 호암산 최정상 아래 능선에 쌓은 성으로 길이가 약 1,500미터에 달하는데 마름모꼴로 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테뫼식은 산의 테두리를 둘러서 쌓았다는 의미다.

호암산성의 축조 시기는 6~7세기경이었고, 한강유역을 차지한 신라가 쌓았다. 앞서 신랑각시바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호암산 일대에 서면 서쪽 지역들을 관찰하기가 용이하다. 안양천을 따라 펼쳐진 평지는 물론 그 뒤쪽에 있는 광명, 시흥까지 잘 관찰된다. 날씨가 좋으면 그보다 더 먼 서해바다까지 조망할 수 있다. 또한 양천을 비롯한 한강유역도 잘 보이니 호암산성은 한강 서남부의 요충지였던 것이다.

당시 신라로서는 서해바다를 통해 한반도로 침입했던 당나라를 막아내야 했다. 그러니 서해와 한강유역을 동시에 관찰할 수 있었던 호암산에 축성을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조일전쟁(임진왜란) 시기에도 조선군이 주둔하는 등 이후에도 호암산성의 전략적 가치는 여전했었다.

한우물은 그런 호암산성의 물 공급지였는데 산 정상부에 있는 ‘우물’치고는 상당히 크다. 동서로 22미터, 남북으로 12미터에 달하는데 작은 저수지처럼 보일 정도다. 물이 귀한 산정부에 큰 우물이 있다는 것이 신기해 보인다.

천정(天井)이라고도 불리는 한우물의 최초 축조 시기는 신라 시대로 보고 있다. 현재의 한우물은 조선 초기에 축조된 것인데 신라 시대에 만든 우물 위에다 축을 어긋나게 해서 올려쌓은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제1한우물이다. 제2한우물은 복원이 되지 않아서 그랬는지 자연상태의 늪지처럼 보인다. 석축이 둘러져있지 않으면 그냥 습지로 알고 넘어갔을 거 같다.

* 석구상

● 돌로 만든 개, 석구상

제2한우물에서 조금만 더 가면 돌로 만든 조형물이 있다. 재미삼아 트레킹팀에 물어본다.

“이거 조선시대 때 만든 건데요, 어떤 동물로 보이세요?”

“호랑이요.”

“양인가요.”

“돼지처럼 생겼어요. 돼지에요.”

호랑이에서 돼지까지 나왔다. 하지만 모두 땡.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석구상(石狗象)이다. 돌로 만든 개다.

이 돌로 만든 개는 예전에 해치상으로 오해를 받았다. 관악산의 화기를 누르기 위해 관악산 인근에 해치상을 만들어 놓았다는 도읍설화와 관련된 이야기 때문이었다. 아시다시피 해치는 화재와 재앙을 막는 상상의 동물이다.

하지만 이 석구상은 해치보다는 개에 가까운 형상이다. 아무리 해치가 상상 속의 동물이라지만 저런 형태의 해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 <시흥읍지> ‘형승조’편에도 돌로 만든 개라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기록이 있다.

석구상은 집 지키는 개처럼 홀로 외롭게 호암산성 일대를 지키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지킴이 역할을 할 거 같다. 세월의 흔적을 비켜갔는지 석구상은 아직까지도 이목구비가 뚜렷하다. 닳지가 않았다. 개사료 한 알 먹지도 않았는데 길이 1.7미터, 폭 0.9미터, 높이 1미터로 오통통하다. 그 모습이 참 듬직해 보인다.

서술 때문에 탐방 순서를 바꿨는데 호암산성 내에서의 탐방은 아래와 같다.

 

제2한우물 → 석구상 → 제1한우물(불영암)

호암산성 탐방을 마친 트레킹팀은 호압사를 향해간다. 그런 트레킹팀 앞에 울창한 잣나무 숲이 펼쳐진다. 그 길이가 약 1km에 달할 정도다. 워낙 숲이 울창한데다 편의시설까지 잘 갖추어져 있어, 일부러 멀리서도 이 잣나무숲을 보러올 정도다. 필자도 그런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아예 트레킹팀 앞에서 이런 말까지 했었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우리 사실 이 잣나무 숲길 걸으러 온 거에요. 신랑각시바위나 석구상보다 이 숲이 더 좋아요.”

예전에 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심어놓은 잣나무들이 이제는 사람들의 힐링을 위해 이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들은 나무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공짜로 받고 있다. 그러니 나무한테 고맙다는 말 정도는 건네자.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잣나무 삼림욕장에서 몸과 마음을 힐링한 트레킹팀은 이제 마지막 탐방지인 호압사로 향한다.

* 호압사 법고: 호랑이가 깔려있다.

● 호압사에서는 호랑이가 대접을 못 받는다

호압사(虎壓寺)는 호압(虎壓:호랑이를 누른다)이라는 한자어에도 나타나듯이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창건된 사찰이다. 이런 사찰을 두고 비보(裨補)사찰이라고 칭한다. 지형지세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사찰을 세웠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언급했지만 조선의 건국자들은 관악산의 화기와 호랑이 기운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그 기운들을 꺾어야했다. 호랑이는 꼬리를 밟으면 꼼짝을 못한다고 말이 있어 그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호압사를 짓게 한 것이다. 호압사의 법고는 호랑이 등 위에 올려져있다. 법고 밑에 호랑이가 깔려 있는 형상이다. 그렇듯 호압사는 철저하게 호랑이 기운을 누르기 위해 기획된 사찰이다.

호랑이가 다른 사찰에 가면 산신각에서 산신령 대접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호압사에서는 대접이 완전히 꽝이다. 그러고보면 호랑이도 번지수를 잘 찾아가야 한다. 아무 곳이나 갔다가는 본전도 못 찾는다.

호압사 탐방을 끝으로 호암산 역사트레킹도 종료가 된다. 기암괴석, 잣나무 숲길, 한우물, 석구상, 호압사의 호랑이 등등... 호암산 역사트레킹과 연관된 키워드가 풍성하다. 이렇듯 호암산 역사트레킹은 아기자기한 멋이 넘치는 코스이다. 가보면 너무나 좋은 곳이다.

* 호암산: 기암괴석들을 만날 수 있다.


■ 호암산 역사트레킹

1. 코스: 신랑각시바위 ▶ 호암산성 ▶ 잣나무숲길 ▶ 호압사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4시간(휴식시간)

4. IN: 지하철 1호선 석수역 1번 출구 / OUT: 호압사 ☞ 호압사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2호선 신림역으로 갈 수 있음.

 

 

 

 

* 태종이방원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6편>

이번 편에는 센(?) 분을 만나러 간다. 부제부터 파워가 느껴지지 않는가? 태종 이방원 역사트레킹이니까!

태종 이방원 역사트레킹은 할미산이라고도 불리는 대모산 일대에서 진행된다. 대모산의 남쪽에서 시작해서 북쪽으로 넘어가 광평대군 묘역에서 종료가 된다. 산을 하나 넘어가는 형태지만 물리적으로 그리 어려운 코스는 아니다. 대모산의 해발고도가 293미터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상을 찍지도 않는다. 역사트레킹은 숲길을 찾아 산을 향해가지만 정상을 찍지는 않는다. 역사트레킹은 등산모임이 아니니까.

태종 이방원 역사트레킹의 첫 번째 탐방지는 헌인릉이 있는 강남구 내곡동이다. 하지만 트레킹팀은 지하철 3호선과 신분당선이 만나는 양재역에서 집합을 한 후 헌인릉행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헌인릉을 가보시면 알겠지만 여기가 강남이 맞나 싶을 정도로 좀 허한 느낌이다. 그 흔한 편의점 하나가 안 보인다. 길이 엇갈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예 양재역에서 함께 모여 이동하는 것으로 정했다. 버스를 약 20분 정도 타고 가는데 차창 밖 풍경이 지루하지 않아서 좋다.

 

● 자식 복이 없었던 정조

주차장을 지나 매표소로 향하는데 홍살문이 보이고 그 너머에 봉분이 보인다. 들어서자마자 태종 이방원이 잠든 헌릉을 마주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곳은 인릉이다. 인릉은 조선의 23대왕인 순조와 그의 부인인 순원왕후의 능이다. 이방원을 만나러왔는데 뜻밖에 인물부터 마주하게 된 것이다. 태강릉을 생각해보시라. 문정왕후가 잠든 태릉을 보러 왔는데 그의 아들인 명종이 잠든 강릉까지 탐방하지 않았던가.

순조는 정조의 차남으로 1790년에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수빈 박 씨였는데 성품이 온화하고 검소한 생활을 하여 현빈(賢嬪)이라고 불렸다. 순조는 정조가 어렵게 얻은 아들이었는데 그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성군이라 불리는 정조대왕이었지만 자식복은 무척이나 없었다. 총 5명의 부인으로부터 2남 2녀를 얻었는데 그마저도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어려서 죽게 된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정비였던 효의왕후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어 후궁인 원빈 홍씨와 화빈 윤씨를 연이어 들이게 된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후사를 얻지 못한다.

그러다 오래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의빈 성씨를 후궁으로 맞이하게 된다. 의빈 성씨는 원래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자식같이 대하던 궁녀였었다. 성씨가 정조보다 1살 많았는데 10살 경에 입궁을 했으니 정조와는 어렸을 때부터 자주 마주쳤던 것이다. 그러다 나이가 찼고 성숙한 여인으로 거듭났을 것이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선남선녀들이 한 공간에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법이다. 불꽃이 팍팍!

의빈 성씨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그 아들이 문효세자였다. 문효세자는 정조의 첫 번째 자식으로 1782년에 태어났다. 그러나 박복하게도 다섯 살도 안 된 1786년에 홍역을 걸려 요절을 한다. 자식을 먼저 보낸 아픔 때문인지 당시 임산부였던 의빈 성씨도 몇 개월 후에 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나마 있던 딸인 옹주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마감한다. 연이어 이어진 부인과 자식들의 죽음에 정조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 인릉 정자각

 

● 농산 스님이 정조의 아들?

1787년(정조11)에 수빈 박씨가 후궁으로 간택된다. 하지만 바로 순조를 낳지는 못했다. 왕위를 계승할 후손이 없었으니 정조는 얼마나 마음이 타들어갔겠는가. 그런 상황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순조의 탄생과 관련하여 주술적인 이야기가 등장한다.

용파 스님이라는 분이 계셨다. 용파 스님은 당시 부과되는 부역이 너무 과하여 불교계가 피폐해지자 이를 타파하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오셨다. 학수고대한 끝에 임금을 만났으니 그가 바로 정조였다. 대왕 앞에 나가 자초지정을 설명하니 그 부역을 면하게 됐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걸렸다. 왕위를 이을 왕자를 낳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정조께서는 용파가 보통 승려가 아니었음을 알아보았고 그에게 후사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했던 것이다.

문제가 해결됐지만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임금과의 거래의 산물이니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용파 스님은 이 일이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삼각산(북한산) 금선사에 있는 농산 스님을 찾아갔다. 자초지정을 들은 농산 스님은 금선사에 있는 목정굴에서, 용파 스님은 수락산에 있는 내원암에서 300일 관음기도를 올리게 된다.

드디어 300일이 되던 날이었다. 이날 수빈 박씨는 한 스님이 나타나 음력 6월 18일에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고 일러주는 꿈을 꾸게 된다. 이때 금선사 목정굴에서 기도를 올리던 농산 스님이 가부좌를 튼 채로 열반에 들게 된다. 마침내 음력 6월 18일이 됐고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왕자 아기씨가 태어났다. 이를 두고 농산 스님이 환생을 하여 수빈 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이 설화로 따지면 농산 스님이 정조대왕이 아들이 된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다. 하지만 어쨌든 왕위를 이을 왕자가 태어났고, 금선사에서는 매해 6월 18일에 순조의 탄신제를 올리고 있다. 더불어 금선사와 내원암은 정조 재위 기간에 크게 중창된다.

정조의 자식과 그의 부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길게 나열해봤다. 개혁군주였던 정조가 승하하자 조선은 급격하게 퇴보를 하게 된다. 세도정치로 인해 사회는 극심하게 혼탁해지고 민초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 정조대왕이 좀 더 길게 사셨으면...

- 순조가 좀 더 일찍 태어났으면...

 

순조가 11살이 아닌 좀 더 성장한 후에 왕위에 올랐으면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을까? 부질없지만 그런 상상을 해본다. 세도세력이 덜 맹위를 떨쳤을 거 같고, 서양 열강들과의 관계도 좀 더 슬기롭게 대처했을... 말 그대로 쓸데없는 역사적 가정인가? 하지만 아쉬운 것은 아쉬운 거다.

* 목정굴: 북한산 금선사에 있는 목정굴. 계곡 옆에 있어 여름철에는 무척 시원하다. 대모산이 아니라 북한산에 있다.

 

● 한 번 옮겨진 인릉

순조가 잠들어 있는 곳에서 그의 탄생이야기를 너무 길게 하였다. 자 이제 순조가 잠들어있는 인릉을 살펴보자. 원래 인릉은 1835년,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장릉(長陵) 곁에 모셔졌었다. 장릉은 인조의 능이다. 그러다 20년 후에 능지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이곳 헌릉 옆으로 천릉(遷陵)하게 된다. ‘옮길천(遷)’자에서도 보듯 천릉은 이장(移葬)을 뜻한다. 그래서 천장(遷葬)이라고도 부른다. 천릉을 해서 그런지 인릉의 비각 안에는 구표석과 신표석 2기가 있다.

인릉은 순조와 함께 정비 순원왕후가 함께 묻힌 합장릉이다. 단릉과 같은 형식이라 단출한 모습을 띄고 있다. 옆에 있는 태종 이방원의 헌릉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차이가 난다. 소박해보일 정도다.

순조가 1834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재위 기간은 34년이나 됐다. 적지 않은 기간이다. 아버지 정조보다 10년이나 더 왕위에 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용상에 있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왕위는 손자인 헌종에게로 전해졌다.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던 아들 효명세자가 일찍 죽음을 맞이했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여기서 간단한 퀴즈 하나.

 

“조선 역사에서 가장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왕은 누구?”

단종이라고 많이 말씀하실 거 같은데 틀린 말이다. 답은 바로 헌종이다. 헌종은 8살 나이에 즉위하였다. 할아버지인 순조보다도 더 어린 나이에 용상에 오른 것이다. 참고로 단종은 12살에 즉위를 했다.

 

* 인릉: 옆에서 본 모습.

 

 

● 진짜 쎈 분을 만나러 간다!

 

이제 진짜 ‘쎈’분을 만나러 갈 차례다. 인릉에서 숲길을 따라 잠깐 걸으면 헌릉이 나온다. 헌릉 홍살문에 가기 전에 이런 멘트를 날렸었다.

 

“이제 진짜 센 분 만나러가니 옷 좀 잘 추스르세요.”

“네?”

“잘못하면 그 분한테 혼날 수도 있으니까요.”

“...”

농담 삼아 이런 말을 했지만 확실히 인릉보다는 헌릉을 탐방할 때 좀 더 긴장을 했던 거 같다. 기가 더 세게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조선 왕 중에서 가장 순(純)했던 왕을 만나고 뒤이어 가장 ‘쎈’ 왕을 알현하니 필자의 몸에서 기가 파도를 치는 느낌이었다.

헌릉은 조선의 3대 왕인 태종과 그의 정비인 원경왕후가 잠들어있는 곳이다. 인릉처럼 봉분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봉분이 나란히 안치된 쌍봉 형태로 이루어졌다. 대신 곡장은 트여있어 두 개의 봉분을 가지런히 감싸고 있다. 곡장은 무덤 뒤에 쌓은 낮은 담을 말한다.

헌릉에 먼저 무덤을 쓴 사람은 원경왕후 민씨였다. 원경왕후는 1420년(세종2)에 이곳에 묻히게 된다. 당시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상태였는데 원경왕후가 이승을 떠난 2년 후인 1422년(세종4)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고 헌릉에 묻히게 된다.

원경왕후는 1398년에 있었던 1차 왕자의 난 때 크게 도움을 주는 등 이방원이 권력을 쟁취하는데 큰 공헌을 한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 태종은 왕권강화를 위해 외척세력을 제거하기에 이른다. 이 때문에 원경왕후의 남동생 4명은 죽음을 당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원경왕후도 폐위에 위기에 몰렸다. 트레킹팀에게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연산군 때처럼 세종대왕도 생모가 폐위가 됐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런 가정은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요.”

어쨌든 극과 극을 달렸던 태종과 원경왕후는 현재는 나란히 누워 고이 잠들어 있다. 살아생전의 태종의 모습처럼 헌릉은 에너지가 넘쳐난다. 옆에 있는 인릉의 석물들이 소박한 모습이라면 헌릉의 석물들은 기개가 넘치는 모습이다.

* 헌릉: 정자각 방면에서 바라본 헌릉. 뒤로 대모산 정상부가 보인다.

● 원래 세종대왕의 능이 헌릉 옆이었다고?

 

이 헌릉 근처에 원래는 세종대왕도 묻혔었다. 효자였던 세종대왕은 헌릉 서편에 왕비였던 소헌왕후와 함께 합장되었다. 이를 두고 영릉(英陵)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현재 영릉은 경기도 여주시에 자리 잡고 있다. 경강선 세종대왕릉역에 내려서 탐방할 수 있다.

그럼 왜 영릉은 대모산에 있다가 저 멀리 여주땅으로 옮겨갔을까? 세종이 승하한 후 흉사가 연이어 일어난다. 문종이 일찍 숨을 거두고, 단종이 안타까운 일을 당한다. 단종을 죽음에 이르게 한 세조도 그 흉사를 피해가지 못한다. 장남인 의경세자가 20살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모산의 영릉 자리가 나쁘다며 1469년(예종1)에 여주땅으로 천장하게 된 것이다.

헌릉의 서쪽에는 희릉(禧陵)도 있었다. 희릉은 중종의 제1계비였던 장경왕후의 능이다. <태릉 역사트레킹>편에서도 언급됐듯이 장경왕후는 1515년(중종10)에 아들을 낳다 산통으로 목숨을 잃게 된다. 그때 낳은 아들이 인종이다. 인조 말고 인종. 장경왕후 이후 왕비가 된 이는 그 유명한 문정왕후이다. 이후 희릉은 풍수상 안 좋다는 의견이 있어 1537년(중종32)에 고양 서삼릉 능역으로 천장한다.

* 헌릉: 헌릉 바로 옆에서 찍은 모습. 화려한 석물들이 눈길을 끈다.

 

● 조선의 초기와 후기를 동시에 만나다!

 

태종 이방원은 함부로 자신의 옆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것 같다. 순조의 인릉이 들어선 것도 의아할 정도다. 철권 통치자와 유약한 통치자, 서로 잘 어울릴 거 같지 않은 동거를 뒤로 하고 헌인릉을 빠져나왔다.

대모산을 넘어 세종의 5남인 광평대군 묘역까지 탐방을 하면 태종이방원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된다. 이때 대모산 숲길을 걸어가는데 이 숲길도 정말 좋다. 명품 숲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종 이방원 역사트레킹이라고 해놓고선 순조를 비롯한 조선 후기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한 거 같다. 이방원의 네임 파워를 이용해 먹은 것이다. 꼼수를 썼다고 너무 질책하시지는 마시라. 이런 식으로라도 조선 후기 시대를 정리해보고 싶었다.

이렇듯 태종 이방원 역사트레킹에서는 조선 전기와 후기를 동시에 만나볼 수 있다. 또한 할머니 같은 대모산의 숲길도 태종 이방원 역사트레킹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 중에 한 가지다. 그러니 안 가면 너무 섭섭할 거에요!

 


■ 태종이방원 역사트레킹

1. 코스: 헌인릉 ▶ 대모산숲길 ▶ 수서동가마터 ▶ 광평대군묘역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4시간(휴식시간 포함)

4. In: 지하철 3호선 양재역 9번 출구 / OUT: 광평대군묘역 ☞ 출발시 ‘헌인릉’행 버스탑승 / 약 15분 정도 소요됨.

 

 

 

 

* 태종이방원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9월 24일 목요일.

 

숲길을 찾아 떠난 과천골 역사트레킹. 솜털 구름이 청명한 가을하늘을 더 돋보이게 해주는 날이었다. 이렇게 좋은 가을날이라서 그런지 벙개트레킹치고는 많은 분들이 오셨다.

 

- 역시 숲길 걷기에 대한 갈증들이 많으셨던 거 같아요. 사실 저조차도 숲길에 대한 갈증이 아주 크거든요.

 

1년 만에 다시 찾은 과천골... 그런데 좀 변했다. 눈쌀을 찌푸리게하는 '사유지 출입통제' 입간판. 또 사라져버린 과천 망루... 과천 망루가 철거된 것은 정말 어안이 벙벙했다. 이 부분은 차후에 좀 확인을 해봐야 할 거 같다.

 

어쨌든 기대를 크게 하고 온 과천골이었는데 갑자기 상황변인이 생기니 좀 당혹스러웠다. 좀 분위기가 다운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급반전됐다. 용마계곡 너럭바위에서 맛나게 식사를 했더니

아주 화기애애해진 것이다. 역시 트레킹도 식후경!^^

 

관악산의 남자하동 계곡도 탐방하고, 거기에 석각된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도 보고... 늘 그렇지만 트레킹팀은 언제나 풍류객처럼 잘 노닐었답니다~^^

 

아참 사진 중간에 맨발 사진이 있는데... 남자하동 계곡을 가기 전에 공터에서 몇몇 분들이 맨발의 청춘이 되었다. 맨발로 걷기 모임을 하는 분들이 계셨는데... 그 분들을 따라 우리 트레킹팀도 맨발 걷기에 나서셨다. 맨발로 걷기가 만병통치약이라나 뭐라나...ㅋ

 

숲길도 걷고, 맨발의 청춘도 되고... 그렇게 초 가을날의 과천골 역사트레킹도 잘 마무리가 됐다.

 

 

ps. 맨발 걷기든 아니면 역사트레킹이든... 어쨌든 트레킹을 하고 나니 몸이 아주 가뿐해졌습니다. 며칠 전부터 속이 더부룩해서 애를 먹었거든요. 그게 싹

사라졌네요. 허리도 좀 욱신거렸는데 그것도 좀 좋아졌습니다. 역시 걷기는 만병통치약인 거 같습니다. 트레킹은 허준이어라...ㅋ

 

 

 

 

 

 

 

 

 

 

 

2020년 9월 19일 토요일.

코로나19가 아무리 맹위를 떨친다고 해도 트레킹에 대한 열의를 꺾을 수 없는법! 더군다나 날씨도 화창한데 이런날 그냥 있을 수가 있는가!

그래서 길을 나섰다. 누구와? 중학생 5명과 초등6년 1명, 그리고 그들의 엄마들(5명)과.

한마디로 학생 6명과 그들의 엄마 5명이 모여 함께 트레킹을 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부모님 한 분이 올 여름경에 메일을 보내주셨다. 학생들이 역사트레킹을 행하고 싶다고... 처음에는 학교 소모임이나 체험학습 차원의 프로그램을 요청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저 아이들이 서로 친목을 더하는 것을 원하셨고, 그게 트레킹을 통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셨다. 자연을 느끼며 운동도 하고, 역사체험을 하면 좋겠다는 취지였다.

사실 좀 의아했다. 아이들의 친교를 위한 트레킹? 이런 식의 요청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러다 당일날 의문이 풀렸다. 아이들은 하키팀이었는데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학교가 나눠졌고, 그래서 모일 계기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트레킹이 모임의 장을 제공한 것이네~ 어쨌든 내 프로그램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기특하다고 토닥토닥...ㅋ

그건 그렇고 이렇게 부모님 동반 트레킹을 행하면 자연스럽게 팀이 갈라진다. 아이들팀 / 부모님팀... 물론 여기서는 아이들이 메인이다. 하지만 그건 명목상이다. 사실 역사트레킹은 아이들보다 부모님들이 더 좋아하신다. 오늘 오신 어머니들도 열심히 사진을 찍으셨다. 또한 곳곳에서 웃음꽃을 피우셨다.

코로나 때문에 너무 갑갑하셨던 것이다. 그러다 풍광이 수려하고 걷기 좋은 인왕산 트레킹에 나서셨으니 얼마나 좋으셨겠는가! 그렇다. 메인인 아이들보다 더 재미나게 즐기셨던 것이다.

주말이고, 날씨가 화창해서 그랬는지 인왕산에는 등산과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평소 실내에서만 묶여 있었으니 엄청 갑갑했을 것이다. 사회적거리 두기를 유지하고,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킨다면 안전하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그렇게 트레킹이라도 해서 갑갑함을 좀 날려버려야지!

하루라도 빨리 코로나가 사라져 많은 이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으면 좋겠다. 마음껏 트레킹을 행하며 마음껏 웃고 떠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20년 9월 17일 목요일.

오랜만에 커뮤니티 회원들과 함께 벙개트레킹을 행했다. 불광골 역사트레킹(벙개 버전)!

온라인에서는 안부인사를 전하지만... 그래도 오프라인에서는 거의 1년 만에 뵌 분도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런 멘트를 했었다.

좀 더 자주 만나뵙고 싶습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오늘 오신 분들 모두 숲길 걷기에 대한 갈증이 심하신 것 같았다. 아니다. 이분들만 갈증이 있겠는가...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로 왠만한 사람들 다 숲길에 대한 갈증이 엄청나지!

그런면에서 이날 각황사 계곡 숲길은 참가자분들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다. 유량도 풍부했고, 숲길도 좋았으니까. 또 경사도 완경사라 걷기에 무리가 없었다.

덕분에 나도 코에 바람 좀 제대로 넣었다. 전날 무기력증에다 소화도 안되고 해서... 아침까지도 애를 먹었는데 그날 트레킹을 하고 나니 싹 다 해소된 느낌이었다.

하여간 숲길 걷기는 만병 통치약! 트레킹은 허준이로세~^^

내가 이러니 트레킹을 안 할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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