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5편>

“에이 그게 말이 되나요? 서울에, 그것도 강남과 가까운 곳에 무슨 지뢰밭이에요?”

필자가 우면산에서 지뢰밭이야기를 하면 항상 저런 반응을 듣게 된다. 이구동성이다. 어떤 참가자분은 필자를 무척이나 한심하게 쳐다보기도 했었다. 무슨 사기꾼 보듯이... 설마 거짓말을 할까. 지뢰밭이 있으니까 있다고 하지.

하긴 필자도 처음에는 설마 했었다. 강남을 품고 있는 우면산에 지뢰밭이 있다는 걸 쉽게 못 받아들이겠더라. 더군다나 아직까지도 미확인 지뢰지대까지 있다고 하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무슨 비무장지대로 트레킹을 하러 가는 거 같다. 우리 강남에 있는 우면산으로 트레킹 하러 가는 거 아닌가요? 강남스타일 트레킹이요!

* 우면산 숲길

● 소가 졸고 있는 모습을 한 우면산

서두부터 참 요란스럽다. 사실 우면산 역사트레킹도 참 재미난 코스다. 위험하지도 않다. 그럼 왜 저런 자극적인 에피소드로 글을 시작했는가? 방심을 하지 말자는 의미에서 그랬다. 안전 없이 트레킹 없다. 이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다.

본격적인 트레킹에 앞서 우면산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자. 관암산이라고도 불린 우면산(牛眠山)은 소가 졸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래서인지 동서로 길게 뻗은 모습을 하고 있다. 남태령을 사이에 두고 있는 옆 산 관악산이 해발 632미터인데 비해 동서로 퍼져 있어서 그런지 우면산은 해발이 293미터이다. 관악산의 반도 못 미친다. 하지만 키가 작은 만큼 관악산보다는 오르기가 수월하다.

우면산 역사트레킹은 2호선 방배역 4번 출구에서 집합을 해 그 옆에 있는 청권사로 향한다. 4번 출구와 청권사까지는 약 50미터밖에 떨어져있지 않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첫 탐방지를 만나는 것이다.

* 효령대군 묘역으로 가는 길

● 효령대군을 모신 사당, 청권사

그럼 청권사(淸權祠)는 어떤 곳인가? 청권사는 세종대왕의 둘째형인 효령대군 이보를 기리는 사당과 함께 그와 후손의 묘가 있는 곳이다. 원래 효령대군의 묘는 임산원이라고 불렸었는데 1736년(영조12)에 왕명에 의해 경기감영이 사당을 짓게 됐다. 사당은 다음해에 완성됐고, 청권사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이후 1789년(정조13)에 사액된다.

‘청권’이란 이름은 <논어> 미자편에서 유래했는데 ‘신중청폐중권(身中淸廢中權)’이란 말에서 따왔다. 명칭이 복잡한데 그 내막을 알려면 효령대군의 삶을 되짚어봐야 한다.

중국에서 은나라가 쇠락하고 주나라가 흥기할 때인 주나라 태왕 때였다. 태왕은 세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태백, 둘째 우중, 셋째 계력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중 계력이 창(昌)을 낳으니 성군으로서의 큰 자질이 보였다. 이를 알고 첫째 태백과, 둘째 우중은 몰래 도읍에서 빠져나와 멀리 도망간다. 이에 왕위는 셋째 계력으로 전해졌고, 마침내 그의 아들 창에게로 이어졌다.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 아닌가? 성군의 자질이 가득했던 셋째 아우를 위해 도성을 떠났던 첫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렇다. 세종대왕의 왕위를 위해 도성을 등졌던 효령대군은 주나라 태왕의 둘째 우중에 비견된다. 우중은 이후 청빈하게 살았기에 청도(淸道)에 맞았고, 스스로 왕위 계승을 깨끗이 포기했으니 권도(權道)에 맞았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신중청폐중권’이라 했고, 여기서 ‘청권사’의 명칭이 나온 것이다.

어렵다. 하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계력의 아들 창은 이후 주나라 문왕(文王)이 된다. 무왕(武王)의 아버지이자 강태공과의 일화로 유명한 그 문왕이다. 주나라 무왕은 은나라를 멸망시킨다.

 

“보세요. 주위는 다 아파트와 건물들인데 효령대군 묘만 녹음을 품고 있습니다. 효령대군 묘가 쉼표를 찍어주는 거 같아요.”

“오, 정말 그런 거 같아요. 쌤, 적절한 표현!”

청권사와 효령대군 묘는 묘지이지만 한편으로는 공원 같다. 유치원 꼬맹이들도 소풍을 올 정도로 효령대군과 그의 후손들은 넉넉하게 주위를 품고 있는 듯하다.

효령대군은 유교 국가 조선에서 불교의 진흥과 보전에 많은 애를 기울이셨다. 우중처럼 어진 성품을 지니고 많은 이들과 두루두루 교류를 하셨다. 불교에 심취했다고 성리학자들이 비판을 하긴 했지만 그런 비판에도 괘념치 않으신 듯싶다. 그렇게 덕업을 쌓으며 살아갔던 효령대군은 크게 장수를 하시다 돌아가신다. 91세에!

* 효령대군 묘: 효령대군 묘를 지키는 문인석. 문인석 뒤로 아파트가 병풍처럼 펼쳐진 모습이 이채롭다.

 

● 봉은사보다도 300년이나 앞서 건립된 대성사

이제 트레킹팀은 반대편 매봉재산으로 향한다. 매봉재산은 우면산의 지산인데 백석대학교 서울캠퍼스 옆으로 난 산책로로 진입할 수 있다. 매봉재산은 동네 뒷산 정도이지만 숲이 울창해서 삼림욕을 하기에 적당하다. 트레킹팀은 남부순환로를 지나 본격적으로 우면산에 진입한다. 트레킹팀 앞에 서울둘레길 표지가 나타난다. 이곳은 서울둘레길 4코스인데 트레킹팀은 대성사로 방향을 잡고 이동한다.

서울 강남에서 가장 유명한 사찰은 단연코 봉은사일 것이다. 어쩌면 조계사보다도 봉은사를 더 익숙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조계사의 일주문을 본 사람들보다 봉은사의 일주문을 본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봉은사가 코엑스 사거리 옆에 위치해 있어 오며가며 바라볼 수도 있으니까. 평지에 있는 사찰의 장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수월한 접근성은 산사가 주는 고즈넉함과는 배치된다. 소음에 시달리고 번잡하고... 우리가 기대하는 사찰은 그런 것이 아니니까.

좀 사설이 길어졌다. 여기 봉은사보다 더 오래된 산 중 사찰이 있다. 트레킹팀의 탐방지인 대성사(大聖寺)가 바로 그곳이다. 봉은사가 794년(신라 원성왕 10)에 연회국사에 의해 창건된 것에 비하여 대성사는 384년(백제 침류왕 1)을 그 기원으로 두고 있으니 무려 400년이나 그 시기가 앞선다. 백제가 충남 공주(웅진)로 천도를 했을 때가 475년이니 대성사는 한성 백제시기의 지어진 사찰인 것이다. 한성 백제시기에 창건된 사찰이 서울 강남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여기 대성사는 무려 1700년 전에 만들어진 사찰이에요. 한국사책에 백제가 불교를 384년에 받아들였다고 적혀있는데요 그때 만들어진 백제 최초의 사찰이에요.”

“그게 정말이에요? 저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요.”

대성사가 백제 최초의 사찰이라는 게 놀라운 게 아니고, 대성사의 존재를 잘 모르는 분들이 대다수였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강남 지역에 거주하시는 분들도 대성사의 존재를 잘 모르셨다는 분들이 대다수였다.

* 대성사

 

● 1700년 전에 창건된 백제 최초의 사찰

 

그러니 대성사에 대해서 더 알아보자. 384년에 중국 동진을 통해서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로 들어온다. 이에 침류왕은 크게 환대하고 왕실에 머물게 했다. 서역과 중국 등 먼 길을 이동하느라 그랬는지 마라난타는 수토병에 걸려 고생을 하게 된다. 지금이야 편의점에서 손쉽게 생수를 사서 마실 수 있지만 예전에는 다른 지역에 가면 물이 안 맞는, 물갈이로 고생한 분들이 꽤나 많았다. 그 수토병이 물갈이다.

그렇게 수토병으로 고생을 했던 마라난타는 우면산 샘물을 마시고 치유가 된다. 이에 우면산에 초당을 짓고 수행을 하니 그곳이 바로 대성초당(大聖草堂)이 됐고, 대성사의 기원이 된 것이다. 그래서 대성사에는 백제 초전법륜성지(初轉法輪聖地)라는 설명이 꼭 따라 붙는다.

이렇게 놀라울 정도의 창건 배경을 가진 대성사지만 막상 그곳에 가보면 좀 허전한 느낌이다. 가람들도 근래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왜 그럴까? 대성사에는 삼일운동 당시 불교계를 대표했던 용성 스님이 계셨던 곳이다. 독립운동에 아지트로 쓰였다는 이유로 일제는 대성사에 불을 지른 것이다. 격노할 일이다. 이후 대성사는 한국전쟁 때 또 한 번 파괴가 되는 아픔을 겪는다.

대성사를 떠나기 전에 침류왕 이야기를 첨언해본다. 불교를 공인한 침류왕은 그 유명한 근초고왕의 손자였다.

근초고왕(재위 346~375) ☞ 근구수왕(375~384) ☞ 침류왕(384~385)

침류왕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재위 기간이 겨우 1년 정도다. 약 30년 가까이 보위에 오른 할아버지 근초고왕에 비해 너무 단명했다. 이와 관련해서 토착신앙을 중시하던 기존의 귀족세력이 불교를 공인한 침류왕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설이 있다. 왕위도 침류왕의 아들이 아닌 동생이 이어받게 된다. 그가 진사왕이다.

 

* 우면산 소망탑

 

● 끝까지 안전하게 트레킹합시다!

대성사를 벗어난 트레킹팀은 이제 우면산 소망탑을 향해서 이동한다. 숲길을 따라가는 길이라 참 좋다. 참나무 숲 구간이 있는데 향이 좋아 오래 머물고 싶을 정도다. 소망탑은 산 정상부 능선에 있어 오르막길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경사도가 아니니 역사트레킹의 취지에 맞게 느릿느릿 걷다보면 어느 순간 도착해있을 것이다.

소망탑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참 시원해서 좋다. 강남의 빌딩숲은 가깝게 보이고 멀리 북한산도 선명하게 보인다. 특히 이 소망탑 전망대는 강남과 가까이에 있어 야경보기 명소 중에 하나다.

소망탑에서 내려와 다시 방배역 방면으로 내려가면 우면산 역사트레킹이 종료된다. 하지만 내려오는 발걸음을 조심하시라! 지뢰밭이 있으니까. 우면산 정상 부근에는 군 기지가 있는데 그곳을 방어하기 위해서 1000여기의 지뢰를 매설했었다. 이후 여러 가지 이유로 지뢰의 효용성이 떨어지자 우면산의 지뢰도 제거가 된다. 하지만 10여기가 미확인 상태로 제거되지 못했다. 2011년도에 있었던 유명한 우면산 산사태로 인해 미확인 지뢰에 대한 공포심이 극에 달하게 됐다.

“지정된 탐방로만 다니시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

 

여러번에 걸쳐 우면산 트레킹을 행한 필자의 의견이다. 우면산에서는 꼭 지정된 곳으로만 다니자. 재밌게 우면산 역사트레킹을 행했으니 끝까지 안전을 지켜야 하는 법! 아울러 1997년 채택된 대인지뢰금지협약에 우리나라와 북한이 동시에 가입하지 않았는데 이참에 가입 좀 하자.

발효된 지 벌써 20년이 넘었는데 남북한은 아직까지도 가입을 하지 않고 있다. 대인지뢰는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는 잔인한 무기이다. 즐겁게 트레킹을 하는데 앞에 지뢰가 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 지뢰지대 표시판


■ 우면산 역사트레킹

1. 코스: 효령대군묘(청권사) ▶ 매봉재산 ▶ 대성사 ▶ 우면산소망탑 ▶ 방배역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휴식시간 포함)

4. IN: 지하철 2호선 방배역 4번 출구 / OUT: 방배역 1번 출구 ☞ 우면산에서 다시 방배역으로 회귀할 수 있음.

 

 

* 우면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4편>

처음 남산 역사트레킹 코스를 기획했을 때가 기억난다.

‘다른 좋은 곳도 많은데 굳이 남산까지 할 필요가 있나...’

서울사람들에게 남산은 너무 당연한 곳이다. 너무 당연하다보니 서울 사람들은 굳이 남산을 찾아가지를 않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지방이나 외국여행객들은 서울에 와서 63빌딩, 한강 유람선, 남산타워를 필수적으로 여행한다. 그래서인지 남산 역사트레킹을 행한다고 공지했을 때 이런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남산 뻔하지 않아요? 거기에 트레킹을 할 만한 곳이 있어요?’

그 뻔함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려고 열심히 답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연한 곳치고는 꽤 많이 사전답사를 했었다. 그 노력이 통했을까?

*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 중심부: 가까이는 북악산이 보이고, 멀리는 북한산이 보인다.

● 목멱대왕 남산

조선시대 남산은 목멱산(木覓山)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었는데 그 외에도 인경산, 종남산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남산은 키가 작은 산이다. 해발 265미터 정도이니 내사산(內四山) 중에서 세 번째로 작은 산이다. 복습해보자. 북악산(338미터), 인왕산(338미터), 남산(265미터), 낙산(125미터) 이중에서 남산이 뒤에서 두 번째다.

그렇게 야트마한 산이지만 남산은 조선시대 때 무척 귀한 대접을 받았었다. 궁궐에서 임금님이 보고 있는 산이라 하여 함부로 건물도 짓지 못하게 하고, 나무도 베지 못하게 했다. 그에 더해 목멱대왕(木覓大王)이라는 벼슬까지 내려진다. 해당 산의 산신령에게 관직을 주며 도성을 방어하라는 뜻이었다. 산신령을 도성방어에 끌어들이다니... 판타지 같은 소리인가? 산을 귀하게 여겼던 우리의 산악신앙은 유교 국가인 조선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당시 북악산도 진국백(鎭國伯)이라는 작위를 받게 된다. 백(伯)이라고 하면 백작이다. 경복궁의 뒷산인 북악산에게는 제후의 작위를 준 것이다. 제후의 서열을 나눈 오등작은 이렇다.

공작 > 후작 > 백작 > 자작 > 남작

북악산의 지위와 비교해보면 ‘왕’ 칭호를 받은 남산이 얼마나 귀하게 대접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소중하게 관리를 한 곳이라 그런지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잘 조성될 수 있었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애국가 가사에 나올 정도로 남산의 소나무는 우리민족의 정기를 담아내는 하나의 표상이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남산의 소나무들은 수난을 당하게 된다. 소나무를 함부로 잘라내고 그 자리에 아카시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이렇듯 남산은 일제강점기 때 엄청난 수난을 당하게 된다. 그 시초는 구한말로 올라간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 정부는 일본인 거류지로 남산 일대를 지정해주는데 궁궐에서 한 치라도 먼 곳을 지정하려고 그랬던 것이다. 그렇게 남산 일대는 일본인들이 자리를 잡게 됐고, 결국에는 조선 신궁도 만들어지게 된다.

 

* 남산의 야경

 

● 남산에도 둘레길이 있다

자 이제 길을 나서자. 복원된 ‘남산 위의 저 소나무’를 만나러가자. 남산 역사트레킹은 6호선 버티고개역에서부터 시작된다. 버티고개역이라는 명칭에도 나타나있듯이 트레킹팀이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버티고개이다. 버티고개는 그동안 차로로 끊겨져 있다 2012년 5월에 생태통로(생태다리)로 복원되었다. 버티고개와 관련된 이야기는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편에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이제 트레킹팀은 국립극장을 앞을 통해 드디어 남산에 들어선다. 이때 트레킹팀 앞을 남산순환버스가 지나가고 있다. 어떤 분이 농담 삼아 이런 말을 하신다.

“저 버스 잡아타고 갈까요? 아니면 케이블카?”

“아니오. 버스나 케이블카보다 더 좋은 남산둘레길을 따라 갈 겁니다!”

그렇다. 남산에도 둘레길이 있다. 2015년 11월에 개통된 남산둘레길이 바로 그곳이다. 기존에 있던 북쪽 순환로와 남쪽 숲길을 연결하여 총 7.5km의 도보여행길이 만들어진 것이다. 북측 순환로는 아스팔트 포장이 된 곳을 걷기에 큰 공원을 걷는 느낌이라면, 남쪽 숲길은 말 그대로 숲길을 걷는 코스다. 서울중심부인 남산에 울창한 숲길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그래서인지 트레킹팀은 이구동성으로 이런 반응을 보였다.

“어, 남산에 이렇게 멋진 숲길이 있었어요? 우리가 아는 남산이 아니었어!”

남산둘레길은 북쪽 순환로 구간보다는 남쪽 숲길 구간이 걷기에도 좋을뿐더러 휴식 공간도 더 넉넉하다. 팔도소나무 단지와 야외식물원 등 볼거리도 풍성하고, 관악산 방면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도 있어서 좋다.

* 성곽과 소나무

 

● 성곽과 소나무

남산둘레길은 완경사라 초보자들도 어렵지 않게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그렇게 한들한들 걷다보면 어느새 정상부에 다다른다. 그리고 앞에 나타난 성곽길을 보며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성곽 앞에 소나무 숲이 펼쳐지는데 그 모습에 감탄사가 나온 것이다.

“남산에 이런 소나무 숲이 있었어요? 성곽하고 소나무하고 너무 잘 어울려요!”

“그렇죠. 여기는 남산이 숨겨놓은 소나무 숲 같아요. 성곽하고 소나무하고 이렇게 잘 어울린답니다.”

성곽 바깥쪽에 소나무를 일정 간격으로 심어 솔밭을 만든 구간이다. 아래쪽에는 맥문동을 심어 운치를 더했다. 맥문동이 개화하는 여름철에 이 소나무 성곽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풍류객으로 변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몇 해 전 여름이었다. 소나기가 지나간 자리를 트레킹팀과 함께 걷고 있었다. 남산도 산이라고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것이 아닌가. 물안개를 머금고 있는 푸른 소나무와 보랏빛을 뽐내고 있는 맥문동꽃, 그리고 그 뒤를 병풍처럼 지키고 있는 성곽이 어우러진 모습이란...! 트레킹팀은 무슨 사극이라도 찍는 느낌이었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를 물안개하고 성곽길하고 같이 만나네요.”

“쉿! 강사님 운치 깨지 말고, 쉿!”

그렇다. 풍류를 즐기는 걸 방해하면 안 된다. 분위기 파악을 했어야했는데... 참고로 남산에는 태조 이성계 시대에 쌓은 석성(石城) 구간이 아직 남아있다. 태조 시기 한양도성은 토성(土城)이 70%였고, 석성이 30% 정도였다. 태조 시기에는 자연석을 거의 다듬지 않고 그대로 쌓아올려 성돌이 무척 거칠다. 한양도성이 전부 석성으로 바뀐 시기는 세종 때였다.

 

* 성곽과 소나무: 비 온 후의 모습

 

 

● 국사당과 봉수대

이제 국사당(國師堂)이 있던 자리로 발걸음을 옮긴다. 국사당은 <인왕산 역사트레킹>에서 언급했으니 따로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 옛 국사당 자리는 지금 남산 팔각정 자리다. 마치 이곳이 한국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한국 사람들보다 더 많은 외국인들이 보인다. 남산이 외국인들의 필수 관광 코스임을 다시 한 번 느낀다.

팔각정 옆으로는 복원된 봉수대가 보인다. 경봉수(京烽燧)라고도 불린 남산 봉화는 매일 병조에 보고될 정도로 무척 중요한 통신 수단이었다. 적의 위협에 따라 하나에서 다섯까지 횃불을 올렸는데 정리하면 이렇다.

하나: 이상무

둘: 적이 나타남

셋: 적이 국경에 접근함

넷: 적이 국경을 침범함

다섯: 전투가 벌어짐

 

* 남산 팔각정: 옛 국사당 자리임.

 

 

● 서울 한복판에 제갈공명?

정상부에서 내려온 트레킹팀은 이제 북쪽 순환로를 따라 걷는다. 북쪽 순환로는 폭이 넓어서 좋기는 하지만 흙길이 아니라 걷는 맛이 좀 떨어진다. 이건 필자의 의견이 아니라 트레킹팀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렇게 걷다보면 남산한옥마을로 빠질 수도 있는데 트레킹팀은 와룡묘(臥龍廟)까지 가본다. 와룡묘라고 하니까 이런 질문들이 나온다.

“와룡묘요? 와룡묘라 하면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의 무덤이이에요?”

딩동댕~땡!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와룡이 제갈공명이라는 건 맞는 말이지만 무덤은 아니고 사당이다. 한자를 보시면 무덤묘가 아니라 사당묘(廟)다. 그렇다. 남산의 북서쪽에는 제갈공명을 기리는 와룡묘가 있다. 와룡묘에는 제갈공명과 함께 관운장의 석고상도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단군상과 삼성각도 있다. 그러고 보면 와룡묘는 중국의 도교신앙을 한국스타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 서울 한복판에 왜 와룡묘가 있는 것일까? 와룡묘는 고종의 후궁이었던 엄귀비(순헌황귀비)가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존의 질서체제가 뿌리째 흔들렸던 구한말, 사람들은 마음 둘 곳을 찾아야했다. 중국의 신령들까지 끌어올 정도로 당시는 다급했던 것이다. 와룡묘는 1924년에 큰 불로 소실됐던 전각들을 1934년에 복구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제갈공명은 맹격(盲覡)이 숭상하는 신이다. 맹격은 눈이 먼 무당들을 말한다. 그래서인지 북쪽 순환로에는 눈이 불편한 분들을 자주 뵙는다. 아마도 와룡묘에 치성을 드리러 가시는 분들일 거다.

이렇게 하여 남산 역사트레킹이 종료됐다. 서울사람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남산. 외국인들도 가는 그 길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안 가면 너무 섭섭하지 않은가. 그러니 당연히 가봐야 하는 거다.

 

 

* 와룡묘


■ 남산 역사트레킹

1. 코스: 버티고개 ▶ 남산둘레길 ▶ 소나무숲(성곽길) ▶ 팔각정(옛 국사당) ▶ 와룡묘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휴식시간 포함)

4. IN: 지하철 6호선 버티고개역 3번 출구 / OUT: 와룡묘 ☞ 와룡묘에서 소파로(돈가스거리)로 내려와 명동역 방면으로 이동할 수 있음.

 

 

 

 

* 남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3편>

 

 

역사트레킹을 행하다보면 필연이든 우연이든 역사적 라이벌과 관련된 테마를 언급하게 된다. <인왕산 역사트레킹>에서 다룬 무학대사와 정도전, 즉 불교세력 VS 유교세력 간의 라이벌 대결이 좋은 예이다. 인물이 아닌 자연지형물 간의 대결도 있다. <낙산 역사트레킹>에서 서울의 좌청룡(낙산)과 우백호(인왕산) 간의 대결이 바로 그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정릉 역사트레킹도 라이벌과 관련이 있다. 누구와 누구 간의 라이벌일까?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 씨의 무덤이다. 일단 한 명은 나왔다. 그럼 나머지 한 사람은 누구? 자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정릉: 필자가 탐방했을 때는 비가 많이 온 다음이어서 그랬는지 봉분에 방수포를 덮었었다. 보시다시피 정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무척 단출하다. 뺄셈을 당한 것이다.

 

 

 

 

 

 

● 이성계의 총애를 받은 신덕왕후

 

트레킹 팀이 첫 번째로 탐방한 곳은 정릉(貞陵)이었다. 정릉은 신덕왕후 강 씨의 무덤이다. 황해도 곡산 출신인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둘째 부인으로 이성계의 총애를 받게 된다. 1392년, 조선이 개국했을 때 태조의 옆에 서 있던 사람도 신덕왕후였다.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 씨가 그 전 해에, 조선의 개창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결국 강 씨는 현비로 봉해져 조선의 첫 번째 왕비에 오르게 된다.

 

조선왕조가 개창될 때 이성계의 나이는 58세였다.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세자 책봉에 나서야했다. 현비였던 신덕왕후로서는 자신이 생산한 왕자를 세자의 자리에 앉히고 싶어 했다. 이성계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그녀였기에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했으리라. 하지만 쟁쟁하게 버티고 있던 신의왕후 한 씨의 소생들이 문제였다. 방과(정종), 방원(태종) 등등... 신의왕후의 소생들은 조선 창업에 큰 공을 세운 이들이었다. 호락호락한 인물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신덕왕후는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정도전과 손을 잡게 된다. 정도전 입장에서도 이미 다 장성한데다 자기 주관이 뚜렷한 신의왕후 자제들보다는 아직 나이가 어린 강 씨의 소생이 세자가 되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재상중심의 왕도정치를 주창한 정도전이었으니까.

 

결국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이었던 방석(의안대군)이 1392년 8월 20일에 세자로 책봉된다. 그해 7월 17일에 조선이 개국했으니 약 한 달 만에 세자가 책봉이 된 것이다. 이에 이방원(정안대군)은 격분한다.

 

“정릉은 조선왕조가 개국한 후 처음으로 능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왕릉들에 비해서는 좀 허술해 보이지 않나요? 봉분을 둘러싼 봉분석(병풍석)도 없고요.”

 

그 말대로 정릉은 능의 격식에 맞지 않게 무언가가 빠져있다. 여백의 미학이 아닌 인위적으로 뺄셈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뺄셈을 한 사람은 바로 태종 이방원이었다.

 

신덕왕후는 자신의 소생이 왕위에 등극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396년(태조5)에 눈을 감고 만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신덕왕후가 죽자 이성계는 지금의 서울 중구 정동, 현재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능을 조성했다. 또한 흥천사라는 사찰을 지어 그녀의 명목을 빌었다. 이 흥천사를 두고 원찰(願刹)이라고 부르는데, 원찰은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어진 사찰을 뜻한다. 정조대왕과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융건릉 인근에 있는 용주사도 원찰이다.

 

 

 

 

 

 

 

* 정릉: 봉분에서 정자각 및 부속건물들을 내려본 모습.

 

 

 

 

 

 

 

● 뺄셈을 당한 정릉

 

1398년 8월, 이방원이 주도한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무인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불리는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정도전은 목숨을 잃게 된다. 세자였던 이방석도 목숨을 잃게 된다.

 

왕위에 오른 이방원은 도성 안에 무덤이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1409년(태종9)에 정릉을 지금의 위치인 성북동으로 이전시킨다. 본격적인 뺄셈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다음해에는 정릉의 봉분을 두르고 있던 석각신장 같은 석물들을 광통교 건설에 쓰게 했다. 광통교는 청계천에 있는 다리다.

 

능에서 가져온 귀한 석재들로 돌다리를 만드는 만큼 그것들을 제대로 이용했으면 좋았으련만 이방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부러 신장석을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광통교 하단을 보면 몇몇 신장석들은 머리가 바닥을 향해 있다. 이방원은 철저하게 신덕왕후를 짓밟았던 것이다.

 

“여기 이거 물구나무 선 거 같지 않나요?”

“진짜 그러네요.”

“청계천 복원할 때 뒤집어서 복원한 게 아니고, 광통교가 처음으로 만들어졌을 때부터 이렇게 물구나무를 세웠습니다. 광통교는 1410년, 태종 때 만들어졌지요. 이렇게 거꾸로 놓이게 된 건 제작자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됐다는 뜻이겠죠.”

“굳이 이렇게까지...”

“그나저나 이것들은 거의 600년 이상을 이렇게 거꾸로 세상을 보고 있었겠네요.”

 

이 대화들은 청계천 광통교를 탐방했을 때 이루어졌다. 이런 스토리텔링이 있기 때문에 정릉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광통교도 함께 탐방할 것을 추천한다.

 

신덕왕후의 능을 탐방한 후에는 정릉 숲길을 따라 걷는다. 정릉 자체보다 정릉 숲길이 더 좋다고 할 정도로 숲길이 참 빼어나다. 30분 정도 걸리는 코스가 있고 1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가 있는데 둘 다 좋다. 트레킹팀은 일부러 긴 코스를 걸었다.

 

이제 트레킹팀은 흥천사(興天寺)로 향한다. 정릉에서 나와 위쪽 주택가로 길을 잡으면 흥천사 표지판이 나온다. 왕릉의 정문을 통해 나오니 바로 주택가가 나오는 것도 정릉의 특징이다. 큰 주차장이 자리를 잡고 있는 동구릉이나 서오릉 같은 곳과는 차이가 확연하다. 숲길을 좋아하는 주민들은 아예 정릉 숲길에서 산책을 할 정도다. 정릉이 속해있는 성북구 주민들에게는 50% 할인이 적용된다. 성인 입장료가 1천 원이니 할인을 받으면, 500원으로 매일같이 정릉 숲길을 걷는 것이다. 무척 부럽더라.

 

 

 

 

 

 

 

* 석각신장: 청계천 광통교 교각 부분에 있는 석각신장. 머리 부분이 아래를 향하고 있다. 정릉의 봉분을 두루고 있던 병풍석이었는데 이렇게 엉뚱한 곳에서 이상한 자세로 세워져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정릉의 봉분이 단출할 수밖에...

 

 

 

 

 

 

● 정릉의 원찰 흥천사

 

흥천사는 정릉의 원찰이다. 신덕왕후에 대한 그리움이 지극했던 태조 이성계였기에 원찰을 크게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흥천사는 1397년에 170여 칸의 대가람으로 탄생했고, 창건과 동시에 조계종의 본산이 된다. 1년 후에는 부처님 사리를 모신 사리각(舍利閣)도 만들어진다.

 

하지만 흥천사도 정릉처럼 우여곡절이 많았다. 흥천사는 정릉처럼 중구 정동에 세워졌다. 정릉이 현재의 자리인, 성북구로 옮겨진 후로도 계속 그 자리를 지키게 된다. 이때에는 원찰이 아닌 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는 왕실 사찰이 된다. 하지만 성종 이후에는 쇠락해졌고 1504년(연산군10)에는 큰 화재가 나서 사리각을 제외한 건물 전체가 불에 타는 아픔을 겪는다.

 

그러다 1510년(중종5)에는 남아있던 사리각까지 불타 없어진다. 이렇게 사찰이 쇠락하니 그 안에 있던 기물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그중 대표적인 게 보물 1460호로 지정된 흥천사 동종이다. 이 동종은 현재 덕수궁에 전시되어 있다. 범종이 사찰이 아닌 궁궐에 있는 것이다.

 

흥천사는 1569년(선조2)에는 왕명에 의해 정동 생활을 마감하고 ‘함취정’이라는 정자터에 다시 세워진다. 이때는 이름을 바꿔 신흥사(新興寺)로 불렸다. 그러다 1669년(현종10)에 신덕왕후가 복권됐고, 1794년(정조18)에 지금의 자리인 성북구 돈암동으로 이전하여 중창된다.

 

신흥사에서 흥천사로 제 이름을 다시 찾게 된 건 1865년(고종2) 때였다. 흥선대원군은 대방을 짓고, 그 대방의 현판을 쓰는 등 흥천사의 중창에 큰 역할을 한다.

 

어렵지 않은가? 연도도 많이 나오고, 여기 갔다 저기 갔다. 솔직히 정릉골 역사트레킹을 하면서 참 많이 애를 먹었다. 위에 저 내용을 트레킹팀 앞에서 해설을 했다고 생각해보시라! 가뜩이나 머리도 안 좋은데... 그래서 정리를 해본다.

 

1. 1397년 정릉과 흥천사 만들어짐

2. 1409년 정릉, 성북동으로 천장됨

3. 1569년 흥천사가 신흥사로 이름을 바꿔 옛 함취정 자리에 들어섬

4. 1669년 신덕왕후 복권됨

5. 1794년 신흥사가 지금의 자리로 이전, 중창됨

6. 1865년 흥선대원군이 중창을 하고, 흥천사로 이름을 다시 고침

 

흥천사는 사찰 탐방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꼭 한 번 방문해 볼만한 곳이다. 본당인 극락전을 비롯해 대방, 명부전 등의 가람들이 조선 후기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 흥천사 대방의 겨울

 

 

 

 

 

 

 

● 이름값 하는 산사 가는 길

 

이제 트레킹팀은 북악스카이웨이의 동쪽편을 따라 걷는다. 차로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북악하늘길을 걷는 것이다. 계속 북악하늘길을 따라 걷다 북악골프연습장이 나오면 숲길로 들어선다. 이 숲길은 ‘산사 가는 길’이라는 도보여행길이다. 북악산 북쪽편에는 작은 사찰들이 많은데 그 사찰들을 연결한 길이다. 북악하늘길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차가 다니는 길이라 산사 가는 길보다 못하다. 산사 가는 길은 진짜 이름값을 한다. 직접 걸어보시길 권한다.

 

역사의 라이벌은 참 많이도 있었다. 싸움 구경이 재미나듯이, 역사가들에 의해 싸움 붙여진 라이벌들도 많을 것이다. 라이벌은 선의의 경쟁관계로 있어야 서로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상대방을 찍어 누르려는 라이벌은 비극만을 초래할 뿐이다. 특히 권력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는 더 그렇다. 도대체 권력이 무엇이기에!

 

 

 

 

 

 

 

* 흥천사의 본당 극락전

 

 

 

 

 

 

 

 

* 정릉 숲길

 

 

 

 

 

 


 

 

 

 

■ 정릉골 역사트레킹

 

1. 코스: 정릉 ▶ 흥천사 ▶ 북악하늘길 ▶ 산사가는길 ▶ 전망대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휴식시간 포함)

4. IN: 경전철 우이신설선 정릉역 2번 출구 / OUT: 국민대 ☞ 국민대에서 버스편을 이용하여 다시 정릉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 태릉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2편>

 

 

역사트레킹 리딩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불만 섞인 지적을 받게 된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필자에게 쏟아내는 욕구들도 다양했던 것이다. 역사트레킹을 시작하면서 팔자에도 없는 욕을 먹게 될 거라는 건 각오를 했다. 하지만 서로가 충돌하는 욕구들을 쏟아낼 때는 참 난감해진다.

 

- 코스의 물리적 난이도가 너무 높다 혹은 너무 낮다

- 이동 속도가 너무 빠르다 혹은 너무 느리다

- 해설의 수준이 너무 높다 혹은 너무 낮다

- 막걸리를 못 마시게 해서 너무 싫다

 

일부 수강생분들 중에는 엄청난 여행 경력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 엄청난 등산 경력을 가지고 계신 분들도 있다. 그런 베테랑들에게 역사트레킹은 성이 안 찰 수도 있다. 7~8km 밖에 되지 않는 구간을 4시간에 이동을 하니 그 분들이 보기에 너무 느린 것이다. 평지 기준으로 보통 성인이 한 시간에 4km 정도를 이동하니 그 분들은 2시간 남짓이면 해당 코스를 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트레킹은 테마를 따라가는 느림보 트레킹입니다. 소걸음 걷듯이 아주 느긋하게 소풍 맞은 아이들처럼 그렇게 재밌게 걸을 겁니다.”

 

이렇게 사전에 계속 안내를 하지만 ‘너무 느리다’라는 컴플레인은 꾸준히 제기됐다. 그런 컴플레인을 제기했던 분들은 다음번 강의에서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그 불만이 다는 아닐 거다. 아무래도 막걸리를 못 마시게 해서 그런가...

 

 

 

 

 

 

* 이말산의 봄

 

 

 

 

 

 

● 이름도 독특한 이말산

 

이번에는 삼천사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삼천사 역사트레킹은 이말산(莉茉山)에서 시작된다. 이말산은 3호선 구파발역에서 바로 올라갈 수 있는 곳인데 산이라고 칭하지만 작은 언덕배기에 불과하다. 해발이 겨우 132미터 정도니까. 구파발역 옆에 있는 통일로를 건너가면 앵봉산으로 갈 수 있는데 앵봉산 남쪽에는 유명한 서오릉이 자리를 잡고 있다. 반대로 구파발역에서 이말산을 계속 타고 가면 북한산 서쪽편이 나온다. 즉 이말산은 앵봉산과 북한산의 중간에 있는 작은 산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말산은 이름이 참 독특하다. 명칭이 독특해서인지 동명이산도 없다. 실제로 검색을 해봐도 구파발 이말산이 유일하다. 그럼 이말(莉茉)은 무슨 뜻일까? 재스민을 한자로 풀면 '이말'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이말산은 재스민이 만발한 산이라는 뜻이다. 이말산에 재스민이 많이 피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산에는 무언가가 확실히 많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무덤이다.

 

특히 이말산에는 내시를 비롯한 궁인들의 무덤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북한산의 지산인 이말산은 한양도성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지만 성저십리 밖이라 무덤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성저십리(城底十里)는 도성에서 십리(4km)까지의 거리를 뜻하는데 성저십리까지는 무덤을 쓰지 못하게 했다. 북한산의 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이말산은 해발이 높지 않은 산이라 무덤을 쓰기에 적당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의주로를 따라 비교적 편하게 당도할 수 있었으니 금상첨화가 아니겠는가. 의주로는 지금의 통일로다.

 

삼천사 역사트레킹은 이전에 소개한 <진관사 역사트레킹>과 여러 면에서 겹쳐진다. 동쪽편과는 다른 북한산 서쪽편의 이야기, 거기에 잠들어 있는 궁궐사람들의 이야기 등등... 실제로 진관사와 삼천사는 북한산 응봉을 사이에 두고 서로 자리를 잡고 있다. 두 사찰 사이의 직선거리가 1km도 안 될 정도로 아주 가깝다. 그러니 이번편 삼천사 역사트레킹과 <진관사 역사트레킹>을 교차해서 살펴보시면 더욱더 좋을 것이다.

 

 

 

 

 

 

* 이말산: 주인을 잃은 석물들이 방치되어 있다.

 

 

 

 

 

 

● 죽어서까지 서럽다

 

거대한 암봉들이 우뚝우뚝 서있는 북한산은 골산(骨山)의 면모를 보인다. 이와 달리 해발 130미터 정도의 이말산은 육산(肉山)이라고 할 수 있다. 푸근한 동네 뒷산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현재 이 산의 무덤들은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다. 쓰러진 문인석, 뒹굴고 있는 묘비, 잘려나간 망주석 등등... 자신들의 '씨앗'을 남길 수 없었던, 그래서 후손들을 둘 수 없었던 내시들이었기에 그런 황량함이 더 애절하게 느껴진다. 물론 예전 내시들 중에는 양자를 드려 자신의 제사를 받들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양자도 후손을 둘 수 없는 이들이었기에 그 한계가 분명했던 것이다.

 

후손이 없는 무덤은 버려진 것과 다를 바 없다. 봉분은 깎여 나가 평평해지고, 그 주위에 세워둔 석물들은 쓰러진다. 그 중 잘 생긴 문인석은 누군가의 손에 들려 나가기도 한다. 한마디로 도둑을 맞는 것이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서러운데 더 서러운 일도 있다. 2010년을 전후로 해서 이말산 부근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 유명한 은평 뉴타운이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아파트 입주민들이 이곳에 있는 무덤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민원을 넣은 것이다. 아파트 창문을 열면 바로 무덤들이 보이니 무섭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들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뉴타운보다 무덤이 더 오래됐다. 그 무덤들이 먼저 들어섰고, 몇 백 년 후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뉴타운이 굴러온 돌인 것이다. 그리고 이말산에 있는 궁인들의 무덤은 그자체로 학술적인 가치가 있다.

 

 

 

 

 

 

 

* 문인석: 머리가 잘려나간 문인석. 누군가 일부러 머리 부분을 자른 것처럼 절단면이 반듯해보인다. 주인이 없는 무덤가라 그런지 문인석들도 크게 훼손됐다.

 

 

 

 

 

 

 

● 북한산의 고봉들이 반겨주는 삼천사

 

이제 트레킹팀은 삼천사로 향한다. 삼천사는 661년(문무왕1)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이웃한 진관사가 천년고찰이면서 서울의 4대 명찰로 불리지만 창건연대에서는 삼천사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진관사는 1010년, 고려 현종 때 건립됐으니 삼천사가 그보다 400년이나 앞서 세워진 것이다.

 

삼천사는 한때 3000명의 수도자가 불도를 닦았을 정도로 크게 융성했다고 한다. 하지만 수많은 전란을 겪으면서 크게 손상을 입는다. 한국전쟁 때도 크게 불에 타는데 지금의 전각들은 1960년대 이후에 세워진 것들이다. 그때 복원을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터를 잡은 것이다. 오리지널 삼천사 터는 계곡을 따라 약 30분 정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현재의 삼천사에 들어서면 북한산 서쪽편의 고봉들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계곡을 따라 장군봉, 나한봉, 나월봉, 보현봉... 그 다음에 뭐였더라? 그렇게 우뚝우뚝 서있는 고봉들을 보고 있노라면 도심지 빌딩숲에 펼쳐진 인공의 스카이라인이 밋밋하게 여겨진다.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눈을 정화했다면 이제 부처님을 향해 갈 차례다. 삼천사에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마애불이 있는데 그 부처님을 만나 뵈러 가는 것이다. 보물 657호로 지정된 ‘서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을 뵈러 가는 것이다.

 

고려 전기시대에는 개성미가 넘치는 석불들이 많이 등장한다.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 안동 제비원 석불, 파주 용미리 쌍미륵 등등... 이 시기에 등장한 석불들은 거대한 사이즈를 자랑하는데 은진미륵 같은 경우는 약 18미터에 달할 정도다. 그렇게 어마어마하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불로 자리매김했다. 1등이라는 말이다.

 

돌장승같이 석불들이 큼직큼직하니 균형미나 비례미는 떨어졌다. 신체비율에 안 맞게 얼굴을 크게 부각하여 3~4등신으로 만들어진 석불도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개성미가 넘치게 된 건 그 당시 정치상황과 연관이 있다. 고려 전기시대에는 호족세력들이 지방에서 위세를 떨쳤는데 그런 사회상황이 석불 제작에도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 삼천사: 뒤쪽으로 북한산의 고봉들이 펼쳐져 있다.

 

 

 

 

 

 

 

● 같은 고려 전기에 제작됐지만 삼천사 마애불은 다르다

 

11세기경에 제작됐으니 삼천사 마애불도 고려 전기에 만들어졌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된 고려 전기에 제작된 석불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세련미와 균형미가 잘 갖추어졌다는 뜻이다. 격식을 파괴한 듯 자유분방한 모습을 보이는 거대한 석불과는 차이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대웅전을 돌아 위쪽으로 올라가면 마애불을 만날 수 있다. 마애불(磨崖佛)은 벼랑애(崖) 자에서 보듯 바위에 새긴 불상을 말한다. 위에서 언급한 은진미륵 같은 경우는 환조(丸彫) 형식의 석상으로 되어 있다. 좀 어렵다. 학창시절에나 배웠던 미술용어도 나오고, 그보다 더 어려운 한자도 나왔으니까. 트레킹팀도 어려워하셨다. 그래서 이렇게 설명을 했다. 해설을 질을 떨어뜨렸다고 하지 마시라. 오죽하면 그랬겠는가!

 

“마애불은 벽에다 그리는 그래피티라고 생각하시고요, 환조는 이순신 장군 동상 생각하세요. 물론 동상은 금은동 할 때 그 동으로 만들었어요. 석상은 돌, 그러니까 스톤이고요. 오케이?”

 

삼천사 마애불은 신체의 비례가 잘 표현됐고, 승각기 등의 법복이 잘 그려졌다. 약 3미터 정도인 삼천사 마애불은 양각, 음각, 부조까지 다양한 기법들이 조화롭게 잘 스며들어 있다. 양각과 음각은 아실 것이다. 그럼 부조는? 부조(浮彫)는 돋을새김이라고도 하는데 평면에 형상이 도드라지게 만든 것을 말한다. 삼천사 마애불의 얼굴 부분을 보시면 부조로 잘 조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애불 앞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는 넓은 공간이 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치성을 드린다. 이곳 아래로는 삼천사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다리 형식으로 복개를 하여 부처님에게 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게 됐다.

 

제작된 지 거의 천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삼천사 마애불은 별로 마모가 되지 않고 뚜렷하게 자신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석불 좌우에 뚫린 가구공(架構孔)에 당장이라고 목재를 끼워 지붕을 달 수 있을 정도로 가구공도 그 빤듯함을 유지하고 있다.

트레킹팀도 공손하게 합장을 하고 기원을 드렸다.

 

“여러분 무슨 기원을 올리셨나요? 어쨌든 소중한 기원이 잘 성취됐으면 좋겠네요.”

 

글 서두에도 언급했듯이 역사트레킹은 테마를 따라가는 느림보트레킹이다. 쭉쭉 치고 나가는 걸 좋아하시는 분들은 역사트레킹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 의미로 삼천사 역사트레킹과 진관사 역사트레킹은 따로따로 행하셨으면 좋겠다. 느긋하게 따로따로 행하는 게 더 기억에 남을 테니까.

 

 

 

 

 

 

* 삼천사 마애불: 고려 전기시대 작품

 

 

 

 

 

 

 

* 삼천사 마애불: 천 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음.

 

 

 

 

 

 


 

 

 

 

■ 삼천사 역사트레킹

1. 코스: 이말산 ▶ 진관근린공원 ▶ 삼천사 ▶ 삼천사계곡

2. 이동거리: 약 7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휴식시간 포함)

4. IN: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2번 출구 / OUT: 진관한옥마을 ☞ 삼천사계곡까지 탐방한 후 은평한옥마을에서 버스편을 이용하여 다시 구파발역으로 이동할 수 있다.

 

 

 

 

* 삼천사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함께 걷는 역사트레킹 1편>

 

 

 

 

* 철도공원

 

 

 

 

 

 

간단한 퀴즈로 시작해본다.     

 

- 태릉선수촌을 모르시는 분?    

 

없을 것이다. 두 번째 문제.   

  

- 그럼 태릉이 뭐하는 곳인지 아시는 분?     

 

문제를 못 맞히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 태릉 옆에 강릉도 있는데 강릉은 뭐하는 곳인지 아시는 분?     

 

일단 죄송하다. 독자들의 머리를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책은 덮지 마시라. 정답은 아셔야 할 것 아닌가.     

 

 

 

 

* 옛 화랑대역: 역사트레킹 팀

 

 

 

 

 

 

● 커피 한 잔이 어울리는 간이역, 옛 화랑대역     

 

그렇다. 이번에는 태릉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태릉 역사트레킹은 철길을 걸으며 시작한다. 진짜는 아니고, 지금은 폐선이 된 경춘선 옛 철길을 걸으며 시작하는데  약 5분 정도 걷다보면 옛 화랑대역에 도착할 수 있다.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에 자리 잡고 있는 옛 화랑대역은 거대도시 서울과는 어울리지 않게 작고 아담한 간이역이다. 가을 낙엽이 떨어질 때는 커피 한 잔과 시집 한 권을 들고 서성이는 여인의 뒷모습이 그려지는 그런 곳이다. 

 

화랑대역은 1939년에 개통된 경춘선의 한 역으로 상업운영을 시작한다. 하지만 처음 역이 들어섰을 때는 화랑대역이 아닌 태릉역이었다. 그러다 1958년 화랑대역으로 이름이 바뀐다. 바로 옆에 있는 육군사관학교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역명이 변경된 것이다. 육군사관학교의 별칭이 화랑대다. 

 

목조건물로써 약 80년의 세월을 거친 옛 화랑대역은 좀 특이한 외형을 가지고 있다. 좌우가 다른 비대칭 삼각형 형태의 지붕이 바로 그것이다. 정면에서 봤을 때 왼쪽보다 오른쪽이 더 길게 내려왔다. 일반적인 목조 간이역은 책을 뒤집어 놓은 박공지붕 형태를 취한다. 맞배지붕이라고도 불리는 박공지붕은 좌우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 보통이나 옛 화랑대역은 오른쪽이 쭈욱 더 내려와 있는 것이다. 건축용어로는 이어내림지붕이라고 말한다. 이런 독특한 모양을 갖춘 옛 화랑대역은 2006년에 국가등록문화재(300호)로 지정된다.  

 

2010년 경춘선은 복선화됐고, 옛 화랑대역은 더 이상 기차가 달리지 않는 역이 된다. 폐역이 된 것이다. 하지만 화랑대역이라는 명칭이 아직도 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건 지난 2000년에 개통된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이다. 경춘선과 지하철 6호선은 다른 노선이다. 

 

기차가 달리지 않자 사람들의 발걸음도 끊겼다. 그러다 다시 옛 화랑대역을 사람들이 찾게 된다. 2018년에 철도테마공원인 화랑대 철도공원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의 기차들이 선로에서 사람들을 반기고 있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청춘의 시절로 돌아간 듯 기차를 배경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모두 다 행복한 표정이다. 달리지 못하는 그저 전시된 기차지만 이미 그들은 그 기차를 타고 춘천으로 떠난 것 같았다. 필자는 답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물어봤다.      

 

“여러분 행복하세요?”

“네! 당연하죠!”     

 

그렇게 행복한 옛 화랑대역에서 달콤한 커피 한 잔 마시고 다시 발걸음을 이어갔다. 이제 트레킹팀은 경춘선 옛 철길을 따라 태릉으로 향한다. 옛 화랑대역에서 태릉까지는 화랑천이라고도 불리는 묵동1천을 따라 걷는다. 작은 하천이지만 물과 함께 걸어서 참 좋은 길이다. 

 

일반적으로 서울에 있는 옛 철길들은 고층 빌딩에 둘러싸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옛 경의선 철길을 생각해보시면 된다. 도심지가 확장되니 기존에 있던 지상 철길 구간은 지하화 되고, 나중에는 공원으로 꾸며진다. 그래서 기차처럼 길쭉한 형태의 공원이 들어서는 것이다. 그런 철길 공원은 도심지에 폐철로가 있다는 점 이외에는 다른 공원들과 차이점이 별로 없다. 소음과 인파들 때문에 걷는 맛도 덜하다. 

 

하지만 화랑천을 끼고 걷는 옛 경춘선 철길 구간은 고독을 씹으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걷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소음도 별로 들리지 않고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다. 그렇게 호젓하게 걷다보면 태릉에 도착한다.      

 

 

 

 

*옛 화랑대역: 사진에서도 보이듯 지붕이 비대칭이다.

 

 

 

 

 

 

● 태릉을 알려면 중종시대를 알아야 한다     

 

태릉이 뭐하는 곳인지 몰라도 태릉선수촌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태릉은 1565년에 들어섰고, 선수촌은 1966년에 개촌 했으니 무려 400년이나 앞서 능이 조성된 것이다. 그래서 태릉(泰陵)이 뭐하는 곳인지 모른다고 하면 문정왕후가 크게 노여워하실지 모른다. 그렇다. 태릉에는 중종의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께서 잠들어 계신다. 

 

태릉에 들어서기 전에 입간판을 먼저 살펴보자. 태강릉이라고 적혀있다. 태릉에 왔는데 강릉? 강원도 강릉? 아니다. 강릉은 문정왕후의 아들인 명종과 그의 부인 인순왕후가 묻힌 곳이다. 이로써 앞서 제시한 퀴즈들의 답이 얼추 언급됐다. 퀴즈를 풀었다고 여기서 책을 덮으시면 섭섭하다. 이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태릉에 들어서면 의리의리한 그 넓이에 혀를 내두르실 것이다. 불암산 남쪽에 위치한 태릉은 단일릉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의리의리한 능역을 통해서 주인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위세를 실감할 수 있을 정도다. 

 

윤지임의 딸인 문정왕후는 열일곱의 나이인 1517년(중종12)에 중종의 셋째 부인이 된다. 1515년에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가 왕자를 낳은 후 산후통증으로 죽음을 맞이하였기 때문이다. 장경왕후가 낳은 왕자는 이후 인종이 된다. 남한산성에서 굴욕을 당한 인조 말고 인종. 

 

좀 어렵다. 이 부분에서 교통정리 좀 들어간다. 일단 용어 정리부터. 문정왕후는 제2계비, 장경왕후는 제1계비이라고 했는데 그럼 계비의 정확한 뜻은 무엇인가? 계비(繼妃)는 ‘임금이 다시 장가가서 얻은 부인’이다. 새어머니를 계모라고 부르듯이 왕의 새로운 부인을 계비라고 부른다. 

 

그럼 중종은 문정왕후, 장경왕후 이전에도 부인이 있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있었다. 단경왕후가 바로 중종의 첫 번째 부인이다. 중종이 조강지처라고 칭할 정도로 중종과 단경왕후는 금슬이 좋았다. 하지만 단경왕후의 아버지인 신수근이 연산군의 매부였기에 중종반정 세력들은 단경왕후를 폐서인으로 만들어 궁궐에서 쫓아냈다. 

 

신하들에 의해 왕으로 세워진 중종이었기에 그렇게 자신의 조강지처를 떠나보내야 했던 것이다. 이후 단경왕후는 평생 중종만을 그리워하다 삶을 마감한다. 경복궁 옆에 있는 인왕산에는 단경왕후가 치마를 흔들며 중종을 그리워했다는 치마바위가 있다.      

 

단경왕후(1739년 복위) - 장경왕후 문정왕후      

 

중종의 여인들이 이들 뿐이겠는가.  오죽했으면 ‘여인천하’라는 사극까지 있었을까.      

 

 

 

 

* 태릉: 정자각

 

 

 

 

 

 

● 문정왕후는 중종 옆에 묻히지 못했다     

 

다시 태릉이야기. 앞서도 언급했지만 태릉의 능역은 크지만 단릉이다. 문정왕후 홀로 잠들어 계신다. 아들인 명종 재위시절 약 20년 동안 큰 권력을 휘두른 문정왕후가 아닌가? 그렇다면 지아비인 중종 곁에 묻혀 있는 것이 맞지 않나?

 

문정왕후가 경원대군을 생산했을 때는 1534년이었다. 입궁을 한지 무려 17년 만에 왕자를 출산한 것인데 30대 후반인 나이에 낳았으니 그때 당시의 기준으로는 노산이었다.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왕자를 생산했음에도 문정왕후의 앞길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이미 세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 세자는 앞서 언급한 장경왕후가 낳은 인종이었다. 

 

왕통을 이을 세자가 있는 마당에 중전의 몸에서 또 다른 적자(嫡子)가 탄생을 했다는 건 왕위계승과 관련하여 정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수 있게 된다. 인조반정의 원인이 되었던 광해군의 인목대비 유폐와 영창대군 사사를 생각해보시라. 

 

1544년 문정왕후의 지아비인 중종이 숨을 거둔다. 왕위는 인종이 잇게 됐다. 그런데 인종은 재위 9개월 만에 죽음을 맞이한다. 이를 두고 야사에서는 문정왕후가 자신의 아들인 경원대군을 왕으로 삼으려고 인종을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쨌든 경원대군이 1545년 왕위를 이어받아 조선 13대왕, 명종으로 등극한다. 이때 명종의 나이 12살이었다. 그러니 실제적으로 권력은 누가 휘둘렀을까?

 

중종은 죽고 나서 장경왕후와 함께 고양 서삼릉에 묻혔다. 그러다 명종 17년(1562) 지금의 자리가 길지라 하여 천장(遷葬)된다. 아버지 성종이 묻힌 선릉(강남구 삼성동) 옆으로 옮겨온 것이다. 사후에 자신의 지아비인 중종 옆에 묻히고자 문정왕후가 그렇게 한 것이다.   

 

그렇게 공을 들였지만 문정왕후는 지아비와 함께 묻히지 못한다. 옮긴 중종의 능이 지대가 낮아 여름철에 비가 오면 그 일대가 다 잠겼기 때문이다. 결국 문정왕후는 중종과 멀리 떨어진 불암산 남쪽에 잠들게 된다. 홀로!    

 

 

 

 

* 연결숲길: 태강릉 연결 숲길.

 

 

 

 

 

 

● 태릉과 강릉을 연결하는 숲길을 따라     

 

자 이제 명종과 그의 비 인순왕후의 능이 있는 강릉을 향해 가보자. 강릉은 태릉과 언덕을 사이에 두고 배치되어 있는데 그 두 곳을 연결하는 숲길이 참 좋다. 말 그대로 왕릉의 숲이다. 산책로도 잘 정돈되어 있고, 나무들도 잘 가꾸어져 있다.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숲길이다. 산책로가 시원시원하고 널찍해서 그런지 언뜻 문경새재 길 분위기도 났다.

 

태릉에 비해 강릉은 무척 단출하다. 능역이 무척 소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명종은 죽어서까지도 문정왕후의 품에서 못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문정왕후가 1565년에 생을 마감했고, 명종은 1567년에 숨을 거두었다. 명종은 12살에 왕위에 올라 22년 간 용상에 앉아있었지만 실제로 그의 치세 기간은 문정왕후 사후 2년이라고 불릴 정도로 재위 기간 내내 어머니의 치마폭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자식 사랑도 적당히 해야 한다. 과유불급!

 

그렇게 태강릉을 탐방한 트레킹팀은 산 중 호수인 제명호를 만나게 된다. 제명호는 미국인 선교사가 만든 인공호수인데 불암산 중턱부에 위치해 있어 산과 물이 어우러진 평화로운 모습을 선사한다. 크지 않은 호수지만 그저 한 바퀴 도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된다. 호수에 비친 불암산 봉우리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다.

철도테마공원에서 행복해지고, 태강릉 숲길 힐링하고, 제명호에서 물에 비친 불암산을 바라보고. 아~ 좋다! 태릉 역사트레킹!          

 

 

 

 

 

* 강릉: 강릉의 참도

 

 

 

 

 


 

 

 

■ 태릉 역사트레킹

 

1. 코스: 옛 화랑대역 ▶ 경춘선철길 ▶ 태릉 ▶ 태강릉 연결숲길 ▶ 강릉 ▶ 제명호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4시간(휴식시간 포함) 

4. IN: 6호선 화랑대역 / OUT: 삼육대학교 ☞ 삼육대학교 앞에서 6호선 화랑대역 방면으로 시내버스를 타고 갈 수 있음.                    

  

 

 

 

* 태릉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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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일 숲길 따라 걷는 길, 진관사 역사트레킹 (서울/독바위역)

서울에 이렇게도 한적한 사찰이 있었나요? 북한산과 어우러진 진관사의 모습이 절경입니다!

www.myrealtrip.com

 

 

 

 

역사트레킹과 관련된 글을 많이 쓰다보니 역사트레킹에 참여하고 싶다는 분들이

연락을 주신다. 그동안 내가 영업(?)을 잘 했나 보다.

근 몇 년 동안 난 5060세대들을 타깃 삼아 역사트레킹 강의를 진행했었다. 실질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트레킹을 가장 많이 향유하는 세대들이 바로 5060세대들이니까... 이분들과는 서울시50플러스센터를 통해서 만났고 함께 트레킹을 행했었다. 많게는 일주일에 세 번 이상 트레킹을 행할 정도로 5060세대들의 열의는 뜨거웠었다. 서울50플러스센터 강의는 특성상 주로 주중에 이루어졌다.

그럼 다른 세대는? 또 주말에만 시간이 나는 사람은?

몇 년째 이 물음들은 나를 머쓱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 힐링 혹은 쉼표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은 주말에만 시간이 나는 사람들일지 모른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쳇바퀴 도는 생활을 하다 주말을 맞지만... 그 주말도 의미없이 허비해버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나는 주말에만 시간이 나는 사람들과 함께 역사트레킹을 행하려한다. 예전 모 문화센터에서 주말반을 개설한 적이 있었는데 사정이 생겨 그만 둔 이후로는 주말반을 만들지 못했었다. 이제 다시 만들어보려고 한다.

내 개인 SNS에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이리얼트립>이라는 플랫폼에다 모임을 개설을 했다. 오늘 소개된 진관사 역사트레킹 이외에도 다른 코스들도 있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가이드 투어로 진행되고 최대 인원은 10명을 넘지 않을 예정이다.

코로나19로 실내 문화활동이 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그나마 둘레길을 걷는 트레킹은 비교적 안전하다. 숨 좀 제대로 내쉴 수 있는 공간으로만 찾아갈 예정이다. 내가 이런 것은 정말 잘한다.

9월 5일 토요일 오전 10시 30분에 진관사 역사트레킹 가실 분들~ 손 한 번 들어주세요!

ps. 진관사 역사트레킹 이외에도 많은 코스들을 올려놓았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가해주시면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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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일 숲길 따라 걷는 길, 진관사 역사트레킹 (서울/독바위역)

서울에 이렇게도 한적한 사찰이 있었나요? 북한산과 어우러진 진관사의 모습이 절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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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2020년 7월 31일.

예전 기준으로는 한창 휴가철이다. 하지만 장맛비가 아직까지도 계속된다. 작년이었으면 나도 배낭을 꾸리며 휴가 계획을 짜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올해는 휴가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계속되는 장마 때문만은 아니다.

'아직까지도 코로나가 맹위를 떨치고 있는 이 시국에 무슨놈의 휴가?'

이런 식으로 자기검열(?)을 하고 있는 것이다. 휴가 검열인가...^^ 코로나19로 인해 모든게 다 꼬이게 된 것이다.

난 2020년 새해를 스페인에서 맞았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2020년을 어떻게 잘 보낼까, 그런 계획들을 세웠다.

'anno nuevo(아뇨 누에보,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스페인어로 'anno'는 '해', 'nuevo'는 '새로운'이라는 뜻이다. 안되는 발음 굴려가면서 스페인 사람들과 새해 덕담을 주고 받았다.

'2020년은 원더키티의 해! 새해에는 더욱더 원더풀하게 나아가는 거야!'

1. 새로운 트레킹 코스 런칭하기

2. 트레킹 원고 작성 완료하기

3. 역사트레킹 100회 이상 실시하기

4. 돈 많이 벌기

5. 투잡하기

산티아고 순례길 종료 후 이어진 배낭여행까지 무사히 잘 마치고 2월 11일에 한국에 잘 도착했다. 하지만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코로나19가 전세계를 강타했고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코로나 공포로 인해 사람들이 모이지를 않았다. 그런 상황인데 무슨 트레킹이며, 무슨 여행인가! 귀국 후 지금까지 약 6개월이 흐르고 있는데 그간 의미있게 한 일이 딱 두 가지 뿐이다.

1. <트레킹은 생각창고> 원고 작성 완료 및 브런치북 발간

2. 2020 위대한 여정 희망걷기

2020 위대한 여정 희망걷기는 파킨슨병 환우인 정만용 선생이 600km 국토종단을 행하는 행사였다. 나는 거기에 스태프를 참가하여 정만용 선생의 국토종단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그 행사는 내가 주인공은 아니었다. 스태프는 스태프일 뿐이다.

그런 의미로 <트레킹은 생각창고> 의 브런치북 발간은 내 스스로 생각해도 참 기특한 일이었다. 코로나가 준 시간 선물이라고 해야 하나? 트레킹은 못하더라도 트레킹 원고는 쓰자라는 생각에 열심히 노트북 앞에서 엉덩이 싸움을 했었다. 그 결과로 지난 6월 30일에 브런치북을 발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020년이 '원더'하긴 하다. 물론 이런 식으로 원더하리라고는 정말 생각도 못했지만. 지난 며칠간 기분도 별로여서 미뤄두었던 사진기 수리와 노트북 점검을 했다. 사진기를 맡기고, 노트북을 포맷하고. 이제 장비 점검도 끝났으니 다시 시작해야겠다.

한 여름이지만 사실 아직까지도 내 마음은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는 한 겨울같다. 그래도 여기서 얼어붙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마음 속의 동장군은 이제 매콤한 비빔면으로 비벼서 보내드리고 싶다. 두 손 두 발 놓고 있기에는 지금의 시간이 너무나 아깝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지 않은가!

앞으로 남은 2020년은 더 기운차게 보내고 싶다. 브런치북을 간행한 노력이 헛된 것이 아니었는지 출간 제의도 왔다. 가능하면 정식 출간도 하고, 더 나아가 베스트셀러에도 등극하고 싶다. ^^

어쨌든 남은 2020년은 확실하게 원더하게 살아볼 생각이다. 나 스스로에게 외친다. 아자아자 파이팅!

ps. 예전에 <2020 원더키티>라는 국산 만화영화가 있었다. 2020년의 기대감 때문에 난 1~2년 전부터, '2020 원더키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었다. 어쨌든 그 말대로 원더하긴 원더했네...ㅋ

 

 

 

 

 

 

 

 

 

 

지난 6월 30일에 <트레킹은 생각창고>라는 브런치 북을 발행했다.

아직 일주일도 되지 않은 시점에 무슨 대단한 변화가 있으랴!

하지만 그래도 지난 일주일 동안의 변화를 기록해 봐야겠다는 생각이들어 이 포스팅을 작성한다.

1. 조횟수가 많이 늘어났다.

2. 10년 묵은 체증이 날라갈 정도로 속이 시원했다. 한편으로는 허탈감이 밀려왔다.

3. 아직 '제안하기' 메일함은 텅 비어있다.

4. 계속 해오던 원고 쓰기가 종료되니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느낌이들었다. 글쓰기 금단 현상이라도 있는 걸까? 초초함 같은 것이 밀려왔다. 무언가를 써야하는데 쓰지를 못하니 손까지 떨리더라.

이 정도의 변화가 있었다. 아는 지인이 Daum 메인 화면에 <트레킹은 생각창고>가 떴다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는데... 금방 내려가더라! 어쨌든 평소에는 파리가 날렸던 내 브런치가 좀 들썩들썩 해졌다. 좋은 일이다.

10년 묵은 체증이 날라갈 정도로, <트레킹은 생각창고>에는 약 10년 전에 쓴 글도 있다. 10년 동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따로 놀았던 꼭지들이 브런치북으로 제대로 묶였던 것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데... 10년 동안 널브려뜨렸던 구슬들을 이참에 잘 꿰어둔 것이다.

그렇게 보배를 만들어놨는데 아직까지도 제안하기 메일함은 텅~ 비어있다. 사실 난 브런치 초기 유저다. 2015년인가에 브런치를 시작했는데 이제껏 제안다운 제안을 받아본 적이 없다. 누구는 브런치를 하자마자 받았다고 하던데... 얼마나 부럽던지. 뭐 이제까지 기다렸는데 좀 더 기다려보자. 언젠가는 나도 제안다운 제안 받아보겠지.

사실 본 포스팅은 마지막 4번 때문에 작성하는 것이다. 브런치북을 완성, 이후 후속작업까지 마무리지었다. 이제는 느긋하게 즐기기만 하면 될 줄 알았다. 노트북 앞에 앉을 때까지만 해도 룰루랄라였다. 그런데 갑자기 초초함 답답함 이런 감정들이 밀려왔고 식은땀도 나더라. 무슨 금단현상처럼 느껴졌다.

거의 9개월 정도 밤마다 원고와 씨름을 해와서 그랬던가, 그 루틴에서 벗어나니 무엇을 해야할지 갑자기 콱 막혀버린 느낌이었다. 물론 중간에 지방 출장 같은 뜀뛰기 시간도 있긴 했다.

어쨌든 더이상 공을 들인 대상이 사라지니, 더이상 에너지를 쏟을 대상이 사라지니 당혹스러웠던 것이다. 분명 금단현상이었다.

담배나 술을 끓을 때 금단현상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봤어도 글쓰기가 중단이 됐다고 금단현상이라니...ㅋ

빨리 다른 연재를 시작해야하나. 원고 하나 다 썼다고 별 일을 다 겪네~

 

 

 

https://brunch.co.kr/brunchbook/thinktrekking

 

[브런치북] 트레킹은 생각창고

저에게 트레킹은 단순히 걷는 행위만이 아니었습니다. 트레킹을 행할 때마다 주옥같은 사색들이 떠올랐답니다. 바쁜 일상에서는 피어오르지 못했을 사색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꽃망울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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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트레킹은 생각창고>가 브런치북으로 발간됐다. 첫 프롤로그가 2019년 9월 30일에 발행됐고, 완성을 2020년 6월 30일에 했으니 장장 9개월이란 시간이 걸린 셈이다.

 

프롤로그, 본편, 에필로그... 총 20편이 실린 <트레킹은 생각창고>는 역사트레킹을 행하면서 느낀 생각들을 담아내었다. 역사와 트레킹, 그리고 사색을 서로 어우러지게 했다. 

 

분량이 A4로 약 100매 정도다. 적은 분량은 아니다. 그럼에도 작성에서 발간까지 9개월이나 소요될 거라는 건 생각지도 못했다. 순수하게 A4 100매짜리 원고를 새로 썼다면 그 정도 시간이 걸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프롤로그에도 언급했는데 <트레킹은 생각창고>는 예전 원고를 재작성한 것이다. 그래서 애초에는 한 달 정도면 

브런치북으로 발간할 수 있을지 알았다. 그러나!!! 

 

세상일이 그렇게 딱딱 떨어지던가! 브런치북이든 종이책이든 세상에 결과물을 내놓으려고 하니,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허점들이 눈에 띄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재작성 수준으로 다시 글을 쓰기로 했다. 아예 몇 편은 처음부터 새로 쓴 것도 있다. 초등학생 실력의 그림 솜씨로 지도도 만들어 넣었다. 

 

긴 글, 여러장의 사진, 안 예쁜 지도... 기존 브런치북들과는 많이 좀 다르다. 뭐 이렇게 길게 썼냐고, 핀잔을 들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핀잔도 이미 다 각오하고 있다. 사실 종이책까지 염두해두고 원고를 썼으니까. 

 

<트레킹은 생각창고>에 실린 글 중에는 첫 작성을 7년 전에 한 것도 있다. 꽤 오랫동안 제자리를 찾지 못했던 원고들이 

<트레킹은 생각창고> 브런치북에서 자기의 위치를 잡게됐다. 이점 필자로서 참 뿌듯하다. 글만 썼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집산하고 작품화시키는 것도 작성자의 큰 역할인데 이제서야 그 역할을 해낸 것이다. 

 

이제 브런치북도 만들었으니 많은 곳에서 희소식이 들려왔으면 좋겠다. 종이책도 만들고, 강연도 하고, 인터뷰도 하고... 필자가 역사트레킹 마스터인만큼 북토크는 실내가 아닌 아웃도어에서 하고 싶다. 역사트레킹을 행하면서 독자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 

 

벌써부터 김칫국인가? 그래도 좋다. 김칫국을 한 사발 들이켜도 좋을 만큼 오늘은 기분이 좋다. 

 

오늘밤의 엔터키는 그 어느때보다도 더 기분 좋게 눌러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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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트레킹은 생각창고

저에게 트레킹은 단순히 걷는 행위만이 아니었습니다. 트레킹을 행할 때마다 주옥같은 사색들이 떠올랐답니다. 바쁜 일상에서는 피어오르지 못했을 사색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꽃망울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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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화는 전편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의 두 번째 이야기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이란 제목에서처럼, 필자는 통상적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상당히 도발적인 내용을 담았다고 할 수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산티아고’를 ‘지우개’로 지워버린 셈이 됐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작성한 건 산티아고 순례길을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필자는 여전히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동경심이 있고, 기회가 닿는다면 계속 방문을 할 예정이다. 다른 순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 길을 걸으며 많은 감흥을 얻었고, 큰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그만큼 필자도 ‘산티아고 앓이’를 했던 셈이다.

그렇다면 왜 ‘산티아고 순례길에 산티아고가 없다면?’이란 도발적인 글을 썼을까? 간단하다. 제대로 알고 가자는 의미에서 글을 썼다. 기왕 돈 들여, 시간 들여가는 길이라면 제대로 알고 가야하는 게 아닐까? 그래야 더 알찬 트레킹을 할 수 있을 테니까.

 

* 피스테라 가는길

●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피스테라(Fisterra)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서쪽으로 약 9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스페인의 땅끝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의 시신은 나룻배에 실려 에스파냐 땅에 닿게 됐는데 그 첫 번째 장소가 바로 피스테라였다고 한다.

많은 여행책자들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다. 어쨌든 그런 역사적인 스토리텔링에다 땅끝이라는 지정학적인 의미가 더해진 곳이기에 피스테라는 순례여행이 아니더라도 꼭 한 번 방문해 볼 가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필자도 그렇게 피스테라를 향해 길을 떠났다. 피스테라로 가는 시작점은 산티아고 대성당이다. 대성당은 순례길의 종료점이기도 했지만 땅끝으로 가는 시작점이 되기도 했다.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곳을 보고 있자니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새삼스레 인생은 끝없는 여정이라는 말도 떠올랐다.

‘시작 할 때는 이게 언제 끝나나, 하고 막막해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마침표를 찍게 되고, 그러다 또 다른 시작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예전 국내여행을 할 때도 그랬다. 시작할 때는 막막했지만 여행이 종료가 될 때는 성취감을 느끼는 동시에 이미 다음 여행의 경로를 머릿속으로 그리곤 했었다.

 

                        * 피스테라 위치: 구글 지도 변형

●해양과 산맥이 공존하는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

피스테라로 가는 길은 인적도 드물었지만 마을 자체도 듬성듬성 있었다. 조금은 척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개발이 덜 된 곳도 있었다.

피스테라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속한 갈리시아 지방은 스페인의 북서부에 위치해 있는데 서쪽으로는 대서양, 위쪽으로는 비스케이만에 둘러싸여 있다. 지형은 산지 형태를 띠고 있는데 험준한 산악지형이라기보다는 구릉형 산지가 층층이 쌓여있는 형태였다.

전편에도 언급했듯이 이 지역은 이베리아반도가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을 때도 그 침략의 사슬에서 벗어나 있던 곳이다.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온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은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고, 이에 서고트 왕국의 옛 귀족들은 반도의 서북부에서 아스투리아스(Asturias)를 건립하여 가톨릭 왕국의 재건에 나서게 된다.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서북부 지역의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들어선다. 이곳은 첩첩산중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산악지형을 띠고 있기에 효과적인 방어가 가능했던 곳이다.

대서양에 가까워지는 만큼 기후변화가 더 심해졌다. 비가 더 심하게 오락가락했다. 우리나라 여름철 날씨도 변덕스럽지만 여기에 오면 명함도 못 내밀 것 같았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호랑이가 장가’를 갈 정도였으니까. 그래서인지 무지개도 무척이나 많이 볼 수 있다. 평생 본 무지개보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본 무지개가 훨씬 더 많았을 정도였다.

 

 

* 피스테라 표지판

 

● 피스테라와 야고보

앞서 언급한 것처럼 피스테라는 스페인의 땅끝이다. 하지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대개 그곳을 유럽대륙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피스테라를 소개하는 일부 책자에 그렇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스테라는 필자가 반복해서 기술한대로 스페인의 땅끝이지 유럽 대륙의 땅끝은 아니다.

정확히 유럽 대륙의 땅끝은 호카 곶(Cabo de Roca)이다. 호카 곶은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 서쪽으로 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깎아질 듯 서 있는 해안절벽이 일품인 곳이다.

육지에서 바다쪽으로 툭 튀어나온 지형을 말할 때 두 가지로 분류를 해서 말한다. 튀어나온 규모가 크면 ‘반도’가 되고, 작으면 ‘곶’이 된다. 유명한 포항의 호미곶을 연상하시면 될 것 같다. 북한 쪽에서는 장산곶이 유명하다.

피스테라에 대한 환상(?)을 한 가지 더 깨볼까 한다. 전편에 ‘야고보 성인은 이베리아반도에 복음을 전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서술했다. 그 서술을 따라가 보면, 야고보의 시신이 담긴 배가 예루살렘에서 피스테라까지 옮겨왔다는 이야기도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뻔한 당시의 항해 기술은 둘째 치고, 사역을 하지도 않은 곳에다 자신의 시신을 묻어 달라는 전도자는 없을 테니까.

 

 

* 스페인의 땅끝 피스테라

그렇다면 피스테라가 왜 야고보와 연결이 됐을까? 아무래도 야고보의 존재를 더욱더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 피스테라가 동원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로마인들은 피스테라를 세상의 끝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세상의 끝에서 야고보 성인의 시신이 도착하여 별들의 들판이라는 산티아고 콤프스텔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다는 식으로 스토리텔링이 정리될 수 있겠다. 이런 전개 과정 자체가 여행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로마인들이 세상의 끝을 호카 곶으로 판단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럼 호카 곶과 야고보가 서로 연결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환상이 다 깨졌다고 해도 피스테라는 그 자체로 무척 매력적인 곳이다. 넘실대는 파도와 해안절벽들을 따라 가다보면 땅끝 등대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바라보는 대서양의 모습은 일품 중에 일품이다. 이곳의 노을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피스테라에 도착한 순례자들은 자신의 신발이나 옷가지를 태워 대서양에 띄우는 의식을 행한다. 더 이상 갈 수 없으니 자신의 것들을 불태우는 것이다. 실제로 등대 근처 곳곳에는 순례자들이 태운 신발과 옷가지의 흔적들이 널려 있었다.

피스테라는 그런 장소였다. 무언가 의식을 행하거나 다짐을 하게 만드는 장소였다는 것이다. 마치 해남 땅 끝에 가면 무언가 마음을 다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필자도 대서양 바다를 보면서 한 가지 다짐을 했다.

‘하루하루 잘 사는 것이 진정한 챔피언!’

난생 처음 보는 대서양 앞에서 다짐을 한 말치고는 무척 소박한가? 그래도 상관없다. 작은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큰일도 못한다고 하지 않던가. 허상과도 같은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바로 앞에 있는 일들을 척척해내는 사람이 진정한 승리자라는 것이다. 지나간 과거를 괴롭게 되새기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억지로 끌어와서 현재를 낭비하지 말자는 뜻이기도 하다.

 

 

* cee: 피스테라를 가기 전에 만나는 cee라는 항국 도시. 매력적이다.

●남북한 순례자들이 함께 산티아고 길을 걷는다면?

순례길은 화합의 길이었다. 지역감정으로 유명한 마드리드, 카탈로니아, 바스크 사람들이 서로 정답게 트레킹을 하는 곳이 산티아고 순례길이었다. 스페인 내국인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앙숙이었던 아일랜드와 영국, 그리고 러시아와 에스토니아(발트3국) 청년들이 서로 의지를 하며 걷는 곳이 바로 순례길이었다. 도보여행을 하는데 국적이니 지역이니 하는 것들은 다 소용이 없을 테니까.

서로 격려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 그게 바로 순례길에 녹아 있는 정신일 것이다. 그런 정신들이 길 위에 뿌려지고, 뿌려지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사랑하는 것일테고.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북한 순례자들을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무척 흥미로울 것 같다. 남한과 북한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순례길을 걷는다면 그것 자체로 좋은 일일 될 것이다. 함께 격려하며 돕고, 먹을 것을 나누고... 힘들 때는 함께 아리랑도 부르고! 상상만으로도 참 흥미롭다.

 

 

 

* 피스테라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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