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작가’라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글을 참 늦게 쓴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본인 이름 걸고 쓴 책다운 책이 없다. 물론 글을 빨리 쓴다고 좋은 건 아니다. 속필이 명필이 되는 경우는 흔하지가 않으니까. 그 느릿느릿한 글쓰기는 필자의 성격과 닮아 있다. 느긋한 문장에서는 빠릿빠릿함보다는 게으름이 잔뜩 묻어있다. 오후의 햇살 아래에서 배 쭉 깔고 단 잠에 빠져있는 누렁이의 모습이 그려진다.

 

하지만 필자는 의외로 꼼꼼하다는 소리도 많이 듣는다. 역사트레킹을 진행하려면 생각보다는 많은 지식이 필요로 한다. 그래서 지식노트를 만들었는데 우연하게 그 노트를 본 참가자 분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다.

 

“보기와는 다르게 참 꼼꼼하세요.”

 

사실 그런 꼼꼼함은 필자의 방어 기재다. 외부의 공격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의도에서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완벽주의. 그렇게 완벽주의에 물들어 있다 보니 삶이 진도가 안 나간다. 살다보면 앞뒤 안 재고, 확 치고 나갈 때도 분명 필요하다.

 

본성이 게으른데 완벽주의에까지 물들어 있으니 글을 빨리 못 쓰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다른 곳에 있다. 필자는 완벽주의자가 아니다. 완벽주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 완벽주의에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탈이 날 수밖에 없지!

 

 

 

 

 

 

* 정약용 선생 상

 

 

 

 

 

 

 

● 트레킹 강의명도 ‘섹시한 제목’이 필요하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역사트레킹도 제목을 잘 지어야한다. 눈에 확 띄는 ‘섹시한’ 제목으로 나가야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문화센터에서 트레킹 강의를 진행하는데 매학기 마다 제목 짓는 걸로 골머리를 썩어야했다.

 

수많은 쟁쟁한 강의들 사이에서 필자의 강의를 ‘잘 팔기’ 위해서는 제목으로 승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얼토당토않은 내용을 끌어다 쓸 수는 없었다. 내용성과 완전히 어긋나는 제목은 욕먹기 ‘딱’이기 때문이다.

 

“제 강의 커리큘럼 중에 가장 눈에 띄는 네이밍이 있나요?”

 

매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저렇게 물어보곤 했다. 그 중에서 단연 이 강의가 수강생들의 눈에 띄었던 것 같다.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이요!”

 

그렇다. 이번에는 경기도 남양주로 가본다.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 여유당: 정약용 선생 생가

 

 

 

 

 

 

 

● 2018년은 다산 정약용의 해배 200주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기 전에 2018년과 다산 정약용 선생과의 연관성에 대해서 잠시 언급해본다. 시간을 좀 돌려보자. 2018년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였던 전남 강진에서 해배(解配)된 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해배’는 유배에서 풀려나는 것을 말한다. 정약용 선생은 1801년 11월에 강진으로 유배를 갔다 1818년 10월에 고향인 마재(현 남양주)로 돌아온다.

 

정약용 선생은 유독 ‘18’이란 숫자와 연관이 많은 분이다. 유배를 18년 동안 당했고, 유배에서 풀려난 후 18년을 더 사신 후에 돌아가셨다. 또 관직 생활도 18년 동안 하셨다.

 

정약용 역사트레킹은 능내역에서부터 시작된다. 능내역은 중앙선에 있던 간이역이었다. 중앙선은 2008년에 복선화가 됐고, 능내역은 더 이상 열차가 서지 않게 됐다. 폐역이 된 것이다. 하지만 능내역은 휴식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간이역의 색깔을 그대로 남겨두어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공간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그런 정취를 쫓아 주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능내역으로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다.

 

단선철도 시절, 옛 중앙선의 일일 수송량보다 더 많은 인파가 주말이면 능내역 인근으로 몰려와 트레킹을 하고,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한결같이 다 즐거운 표정들을 하고서. 그래서인지 어떤 참가자는 이런 말까지했다.

 

“여기는 정말 딴 세상 같아요. 다들 즐거워 보여요.”

 

그런 딴 세상 같은 능내역을 뒤로 하고 트레킹팀은 천주교 성지인 마재성지로 향했다. 마재성지는 능내역에서 도보로 3분 거리에 있지만 그 주변 분위기는 능내역과는 완전히 다르다. 무척 차분했다. 성지는 성지였던 것이다.

 

 

 

 

 

 

 

 

* 능내역

 

 

 

 

 

 

 

● 정약종의 생가,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선생의 셋째형인 정약종의 생가다. 새남터, 절두산, 해미읍성 등등... 일반적인 천주교 성지는 거의가 순교, 즉 신자들의 죽음과 관련된 곳이 대대수지만 마재성지는 한 집안의 살림집이 성지가 된 독특한 사례다.

 

그럼 정약종은 누구인가? <자산어보>를 저술한, 정약용의 둘째형인 정약전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약종이란 이름 석 자는 처음 들어보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정약종은 정약용의 셋째형이었다. 바로 위형이었다. 도교에 심취해있던 정약종은 다른 형제들보다 늦게 천주교에 입문하게 된다. 하지만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진산사건으로 인해 다른 형제들이 천주교를 멀리할 때도 그는 강건하게 신앙을 지켜냈다.

 

1791년(신해년)에 발생한 진산사건은 윤지충이란 사람이 제례를 거부하고 위폐를 불사른 사건을 말하는데 이 사건의 파장으로 다산 선생도 벽파세력에 의해 공격을 받게 된다. 신유박해(1801년) 이후 또다시 피바람을 몰고 왔던, 황사영의 백서(帛書)에도 ‘신해년 박해 이후에 형제나 친구들로서 여전히 천주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나, 정약종만 홀로 조금도 동요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그렇듯 정약종의 신앙은 강건했다. 하지만 그런 정약종의 강건한 신앙을 그의 형제들은 환영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의 천주교는 외국 선교사에 의해 포교된 것이 아니라 남인 계열의 선비들이 서학을 토대로 자생적으로 발전시켰다. 기존의 유교적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혁명적 도구로 천주신앙을 이용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조상의 위폐를 불태운 진산 사건에 반발해 천주교를 떠난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배교를 한 이들은 조상의 제사도 지내지 않는 천주 교리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정약종이 계속 굳건하게 신앙을 지키면 지킬수록 집안 형제들과의 사이는 멀어져갔다. 그래서 나중에는 정약종만 홀로 강 건너 분원리(현 광주시 남종면)에 살게 됐을 정도였다.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가진 정약종은 신유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를 하게 된다.

 

 

 

 

 

 

 

* 마재성지

 

 

 

 

 

 

 

● 정조대왕과 정약용

 

트레킹팀은 다산 정약용 생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다산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은 마재성지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다.

 

여기서 잠깐 정약용 선생이 유배를 떠났던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1799년 당시 시파의 영수였던 체제공이 그해 1월에 서거를 하게 된다. 반대파였던 벽파로서는 체제공의 뒤를 잇는 시파 거물 정치인의 등장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막아야 했다.

 

벽파 입장에서는 누가 가장 위협적으로 보였을까? 정약용이 1순위였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체제공 서거 이후 정약용은 더 많은 모함과 박해를 받게 된다. 하지만 딱히 정약용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 없었다. 그만큼 정약용에게 흠결이 없었다는 것이다.

 

벽파는 꼼수를 쓰기에 이른다. 외곽 때리기를 했던 것이다. 정약용의 흠을 잡는데 실패한 그들은 둘째형인 정약전 때리기에 나섰다. 결국 정약전은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를 지켜본 정약용도 격분하며 고향인 마현(현 능내리)으로 낙향하게 된다.

 

체제공과 정약용이란 ‘원투펀치’가 조정을 떠난 두 달 후, 개혁군주였던 정조는 세상을 떠나게 된다. 정조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생은, 임금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크게 스스로를 책망했다고 한다. 그때가 1800년 6월이었다.

 

정조의 승하는 벽파에게는 더할 수 없는 호재였다. 벽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정조를 따르던 인사들을 축출하게 된다. 1801년 2월에 있은 신유박해가 바로 그런 빌미로 이용됐다.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남인 계열 시파 100여 명이 죽음에 이르게 됐고, 400여 명이 유배길을 떠나야 했다.

 

 

 

 

 

 

 

* 거중기: 다산 생가 앞에 전시되어 있음.

 

 

 

 

 

 

● 신유박해로 유배길에 올라야했던 정약용

 

이때 셋째 정약종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했고, 정약용과 정약전은 유배길에 나서게 된다. 처음 다산의 유배지는 경상도 포항 부근 장기였고, 정약전의 유배지는 전라도 완도 본섬 옆에 있는 신지도였다. 하지만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백사사건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정약용은 포항보다 더 궁벽한 강진 땅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이배되기에 이른다.

 

한편 강진에서도 다산 선생의 유배지는 고정되지 않았다. 읍내에 있는 주막거리에 거처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제자의 집에 머물기도 했다. 그러다 뜻있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 만덕산 기슭에 초막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다산초당이었던 것이다. 다산초당은 다산 선생이 1808년에서부터 해배되던 1818년까지, 10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그렇게 해배된 이후 다산 선생은 고향인 이 곳 마현으로 다시 오게 됐고,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에서 강진 시절에 마치지 못한 저술 작업에 더욱더 박차를 가하게 된다.

 

“다산 선생은 무려 500여 권의 서책을 저술한 조선시대 최고의 학자였습니다. 강진에서의 18년 동안, 또 여유당에서의 18년 동안 다산 선생은 묵묵히 저술과 학술작업에 매진하셨습니다. 그런 다산 선생의 뜻을 배우고자 우리는 여기에 온 것입니다.”

 

나름대로 설명을 잘했는지 필자의 말에 환호를 하는 참가자도 있었다. 그래서 내친김에 몇 마디 더 설명을 보탰다.

 

“아참 다산 선생은 40세에 유배됐다가 58세에 여유당으로 오시게 됩니다. 그러다 76세에 돌아가십니다. 그때 기준으로는 무척 장수를 하신 셈이죠.”

 

다산생가를 떠나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한 이후에도 필자는 트레킹팀과 함께 다산 선생과 정조대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다. 파란만장한 다산 선생과 그의 형제들의 삶, 참된 목민관이었던 다산 선생의 애민 정신,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의 일대기 등등... 트레킹의 명칭이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이었던 만큼 다산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래서인지 참가자 중에 한 분은 집에 가서 다산 선생과 관련된 공부를 해야겠다고 필자에게 슬며시 말을 건넨 분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필자와 같은 사람은 두꺼운 역사책의 머리말을 읽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도서관이 아닌 아웃도어이지만, 필드에서 트레킹을 하며 사람들을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리딩’하기 때문이겠다.

 

 

 

 

 

 

 

* 다산생태공원

 

 

 

 

 

 

 

 

● 귀에 확 꽂히는 이름,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

 

여유당을 뒤로 한 트레킹팀은 자전거도로 옆에 놓인 인도를 따라 운길산 방면으로 나아갔다. 이 길은 옛 중앙선 철로였다. 중앙선이 복선화되면서 옛날 단선 구간을 리모델링하여 자전거도로와 인도로 변신시킨 것이다. 이 길은 아름다운 한강변을 옆에 끼고 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자전거의 위협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는 단점도 있다.

 

무섭게 페달을 밟아대는 일부 자전거족들이 이 구간에 많기에 항상 경각심을 가지고 걸어야한다. 하긴 필자도 예전에 자전거를 탔을 때, 특히 한강변을 달릴 때는 무식하게 페달을 밟았었다. 그래서 이런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자전거 폭주족이냐! 그 고물자전거로 애쓴다 애써!”

 

임진왜란 당시 변응성 장군이 지켰다는 마진산성(터) 탐방을 끝으로 정약용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된다. 마진산성은 야트막한 산인데 그곳에 올라서면 양수대교를 비롯한 양수리 일대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 양수대교: 마진산성 터에서 바라본 양수대교. 강 건너편이 양수리다.

 

 

 

 

 

 

 

●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제는 완벽주의의 허울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완벽하지도 않은 인간이 완벽주의로 위장을 하고 있으니 정체성에 혼란만 올 뿐이다. 더군다나 나답게 살기를 원한다면서 자신을 완벽주의로 방어한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소리다.

 

이렇게 필자의 허울을 벗겨주시는데 정약용 선생의 역할이 컸다. 무슨 소리인가? 정약용 선생도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배에서 풀려나기 위해 당시 세도가문이었던 안동 김씨 쪽과 접촉했던 것, 제자들 중에 큰 사상가가 나타나지 않은 점 등이 바로 그것이다.

 

민족의 큰 스승인 정약용 선생도 이렇듯 개인적인 흠결이 있었다. 하물며 고만고만한 삶을 살고 있는 필자가 어설픈 완벽주의의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었으니 그저 우스울 따름일 뿐!

 

필자는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쓸 것이다. 느릿느릿하게라도 꾸준히 쓸 것이다. 열심히 쓰다 글이 어느 정도 무루 익으면 과감하게 원고를 출판사에 보낼 것이다. 전에는 완벽한 원고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허울에 빠져있던 예전의 내 자신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

 

“세상에 완벽한 원고가 있을까? 그렇게 했다가는 평생 책 낼 생각은 하지도 말아야지. 완벽한 원고만 찾다가는 완벽하게 평생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어야 할 걸!”

 

 

 

 

 

 

 

* 다산생태공원: 청명한 가을날의 다산생태공원

 

 

 

 

 

 


 

 

 

 

 

■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

 

1. 코스: 능내역 ▶ 마재성지 ▶ 다산생가(정약용묘) ▶ 다산생태공원 ▶ 마진산성(터)

2. 이동거리: 약 10km

3. 예상시간: 4시간(휴식시간 포함)

4. IN: 팔당역 ☞ 팔당역에서 능내리행 버스 탑승(약 15분간 이동) / OUT: 운길산역

 

 

 

 

 

 

 

 

* 남양주정약용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남양주정약용역사트레킹

 

 

 

 

 

 

 

 

 

 

6월 18일 목요일.

 

이날은 서대문 안산 벙개트레킹을 행하는 날. 원칙대로 하면 인원수 미달로 아웃됐어야 했지만... 뭐 세상사가 다 원칙대로 되겠습니까!

 

사실 저도 참가자분들과 함께 걷을 때가 참 좋거든요. 그래서 강행을 한 것이죠. 사실 요즘 제대로 활동을 못해서 그랬는지 저도 우울증에 걸렸다는...ㅋ

 

지난주 인왕산 트레킹 때는 햇살이 강해서 좀 애를 먹은게 사실이었죠. 대신 사진은 좀 잘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번 안산 트레킹 때는 날씨가 흐려 사진은 별로였지요. 대신 걷기에는 더 좋았습니다.

 

이렇게 한 여름에도 해가 구름에 가린 날에는 얼마든지 트레킹이 가능하답니다. 어쨌든 오늘 트레킹팀은 기분 좋게 안산 숲길을 걸었답니다. 아주 재미나게 잘 걷고 커피도 아주 맛나게 잘 마셨답니다.

 

서대문 안산은 키는 작아도 참 실하다고 할까요? 은근히 숲길이 울창합니다. 특히 서쪽편, 봉원사가 자리잡고 있는 서쪽편의 숲길은 왠만한 수목원 저리가라 할 정도지요. 

 

하여간 거리두기에 적합하게 딱 좋은 인원으로 딱 좋을 만큼 걸었습니다. 숲길도 딱 좋았구요~ 아 이 맛에 트레킹 하는 거 같아요. 덕분에 저도 우울증에서 좀 벗어났답니다. ^^

 

 

ps. 아참 여기에 등장하는 트레킹팀은 <역사트레킹 한국학개론> 커뮤니티 팀입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언젠가 트레킹 리딩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홀로 트레킹을 했을 때는 타인의 시선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역사트레킹 마스터라는 거창한(?) 직함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트레킹을 리딩하다보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더 짙게 다가오는 게 아닌가!

 

“곽 작가님, 좀 웃어요. 아침부터 찡그리고 있어요.”

 

역사트레킹은 주로 오전 10시 30분에 실시한다. 출근 시간을 피하고자 그 시간으로 정한 것이다. 좋아서 하는 역사트레킹이지만 얼굴에는 월요병에 걸린 회사원의 표정이 묻어났나보다.

 

사실 저런 말을 한 두 번 들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좀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표정관리를 한다고 했는데도 저런 소리를 들었으니까...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그렇다, 리딩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그렇다 등등... 나름대로 변명도 해보았지만 말 그대로 변명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필자의 직업도 서비스업이 아닌가. 말이야 있어보이게 역사트레킹 마스터지 여행가이드와 별 차이가 없다. 서비스업종에 있는 사람이 얼굴을 찡그린다? 업계 관행으로 봤을 때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오전에 찡그리던 모습은 시간이 지나갈수록 풀려간다. 어떻게 아느냐? 사진을 찍으면서 카메라 LCD창에 비쳐진 모습을 그때그때 체크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필자의 얼굴에는 함박웃음이 가득해진다. 역시 필자는 트레킹 팔자인 거 같다. 좀처럼 웃을 일이 없다는 요즘인데 트레킹만 하면 함박웃음을 얼굴에 걸고 있으니...

 

 

 

 

 

* 남자하동계곡

 

 

 

 

 

 

 

● 과천골 역사트레킹

 

이번편에는 과천골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과천골 역사트레킹은 말 그대로 경기도 과천시 일원에서 행해진다. 앞선 프롤로그에서도 언급됐듯이 이 원고의 원래 명칭은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다. 필자와 대화를 주고받는 트레킹팀도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 프로그램에서 모집하여 꾸려진 모임이다.

 

이번편 과천골 역사트레킹도 마찬가지고, 안양시에서 행한 정조대왕 역사트레킹도 경기도에서 행한다. 그렇다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이란 명칭과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과천시나 안양시가 경기도에 있지 서울에 있는 게 아니니까.

 

도성을 관할했던 한성부는 도성뿐 아니라 성 밖 십리지역(4km)까지 그 행정 영역 안에 두었다. 이를 두고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칭했다. 필자는 성저십리 개념을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에 적용했는데 지금의 서울에서 반경 40km까지를 서울학개론의 범위로 삼은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자. 필자는 수도권 전철이 닿는 곳을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의 영역으로 삼았다.

 

 

 

 

● 역사트레킹 한국학개론?

 

지금이야 필자가 무명이기에 과천을 가든, 남양주를 가든, 춘천을 가든 서울학개론이란 명칭을 써도 누구 하나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이 없다. 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다. 필자가 거물급(?)이 된다면 <역사트레킹 서울학개론>에 과천골 역사트레킹이 포함된다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곽 작가님, 왜 과천시에서 트레킹을 했으면서 서울학개론이라고 하세요? 그 말이 틀린 거잖아요.”

“맞습니다. 그 명칭은 분명 틀린 거예요.”

“그럼 빨리 고쳐주세요. 이름은 제대로 써야지요! 경기도청에서도 난리에요.”

“그래서 바꿨습니다.”

“뭘로요?”

“역사트레킹 한국학개론!”

 

이런 대화가 현실화 됐으면 좋겠다. 필자라고 거물급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그날이 빨리 다가왔으면 하는 바람뿐이다. 교통정리용 설명이 길어졌다. 빨리 진도를 나가자.

 

과천골 역사트레킹의 시작은 우면산 남쪽 면에서부터 시작된다. 소가 졸고 있다는 뜻의 우면산(牛眠山)은 해발 293m로, 이웃산인 관악산(632m)보다 훨씬 키가 작은 산이다. 해발이 높지 않은 산이라 그런지 관악산보다 오르기도 수월하고 코스도 짧다.

 

우면산의 북쪽은 서울 서초구이고, 남쪽은 과천시에 속하는데 확실히 남쪽면보다는 북쪽면이 편의시설이나 표식들이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우면산의 남쪽면은 방치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관리가 안 되어 있다. 편의시설도 전무하고 안내표식도 띄엄띄엄 있다. 그래서인지 우면산 남쪽면을 찾는 이들도 별로 없다. 무슨 이유일까? 우면산 남쪽면도 분명 좋은 트레킹 코스인데... 이유는 남태령과 관련 있다.

 

 

 

 

 

 

* 남태령옛길 표지석

 

 

 

 

 

 

 

● 남태령으로 개명한 여우고개

 

남태령(南泰嶺)은 관악산과 우면산 중간에 위치한 고개로 해발은 183m에 달한다. 우리나라에 워낙 해발이 높은 고개들이 많아 183m의 높이면 명함도 못 내미는 게 맞지만, 한자어에서도 보이듯 이 고개는 당당히 ‘남쪽의 큰 고개’로 명명되어 있다.

 

처음에 이 곳은 여우고개, 혹은 여시고개로 불렸다. 한자어 명칭도 ‘여우호’자를 써서 호현(狐峴)이라고 쓰이기도 했다. 그만큼 이 지역에는 여우가 많이 출몰했다고 한다. 그 옛날 관악산과 우면산의 울창한 수풀은 여우들이 서식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제공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일대에서는 여우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여우 굴들이 발견됐다. 그런 배경들 때문인지 이곳에는 천 년 묵은 여우가 사람을 홀리고 다녔다는 ‘전설의 고향’도 전승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곳은 왜 여우고개에서 남태령으로 개명을 하게 됐을까? 가장 유력한 설은 정조대왕 시대에 행했던 화산 능행차와 관련이 있다. 지난 정조대왕 역사트레킹편을 다시 복기하면서 읽어보자.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이장을 한 후, 정조대왕은 참배에 나섰다. 이를 ‘화산 능행차’라고 불렀다. 서울에서 수원으로 가기 위해서 꼭 넘어야 했던 이 고개의 이름을 정조대왕께서 물으셨다. 이때 과천현의 이방이 여우고개라는 이름 대신 남태령이란 명칭으로 대답을 했다고 한다. 상감께서 행차하는 고개가 ‘여우고개’라는 요망스러운 이름으로 불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그런 답변을 했다는 것이다.

 

여우고개가 토속적인 이름이기는 하지만 요망스러운 이름인지는 잘 모르겠다. 더불어 고개의 명칭이 한 사람에 의해 급작스럽게 변경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정조대왕 이전 시대부터 여우고개가 아닌 남태령으로 불렸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한강 이남에는 정조대왕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혹시 남태령도 그에 편승된 것이 아닐까? 정조대왕과 관련된 스토리텔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남태령은 이미 보통 이상의 고개가 될 수 있으니까.

 

정조대왕이 남태령을 넘은 것은 5년 밖에 되지 않았다. 1794년 이후부터 능행차 노선이 시흥-안양 방면으로 변경됐기 때문이다. 남태령 길이 협소하다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과천에 김상로와 그의 형 김약로의 묘가 있어 일부러 남태령-과천 코스를 버렸다고 한다. 김상로는 영의정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사도세자의 처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자이다.

 

현재 남태령에는 ‘과천루’라고 불리는 망루가 설치되어 있다. 남태령이 삼남지방으로 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던 만큼 망루를 설치하여 감시를 했던 것이다. 과천루는 현재 과천 8경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지역의 명물이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많은 이들이 찾지는 않는다.

 

 

 

 

 

 

*과천루: 남태령망루라고도 불린다.

 

 

 

 

 

 

● 군대생활 생각나게 하는 남태령 참호와 벙커

 

천년 묵은 여우가 사람을 홀리고(?), 정조대왕이 능행차를 하러 다녔던 남태령. 현재 남태령에는 곳곳에 참호가 놓여 있다. 벙커도 있다. 남태령처럼 서울 인근에서 그렇게 많은 참호와 벙커들이 정열 되어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안보(?)시설들을 가로질러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우면산의 남쪽면이다. 그 참호와 벙커들을 파고,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군인아저씨들이 땀과 눈물을 흘렸을까! 그런 시설들을 무심히 지나치기는 했지만 필자도 군대 생활이 생각나서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이렇게 우면산 남쪽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둘레길 여행자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전무하다. 팔각정은커녕 그 흔한 벤치조차도 찾기 어렵다. 화장실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이런 이유 때문에 우면산 남쪽 숲길은 많은 이들이 발걸음을 하지 않는다. 높아질 대로 높아진 도보여행자들의 눈높이로 보자면 이 코스는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둘레길 트렌드에 맞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반전이 있기 마련이다!

 

- 이 숲길 정말 울창한데요.

- 서초구쪽 우면산은 가봤는데... 여기는 처음이에요. 그런데 여기가 더 좋아요.

- 숲길도 좋고 사람도 거의 없어서 걷기에 더 좋은 거 같아요.

 

트레킹팀은 저렇게 환호성을 외쳤다. 거의 한 시간 이상 이어진 울창한 숲길에 박수갈채를 보냈던 것이다. 특히 이곳은 완경사로 계속 이어지다보니 사색을 하면서 걷기에 ‘딱’이었던 것이다. 묵언수행을 하기에도 제격인 곳이었다.

 

 

 

 

 

 

* 용마골: 일명 너럭바위 계곡

 

 

 

 

 

 

● 너럭바위와 온온사

 

이제 트레킹팀은 우면산에서 관악산으로 넘어간다. 용담골이라는 곳을 통해 관악산에 진입을 하게 되는데 무척 흥미로운 풍광을 맞이하게 된다. 카펫이 깔려 있듯 너럭바위가 보기 좋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누가 일부러 깎아놓은 것처럼 평평한 너럭바위가 길이 돼주기도 했고, 의자가 돼주기도 했다.

 

그 위에다 식탁보를 깔면 밥상이 되기도 한다. 그랬다. 트레킹팀은 너럭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맛있게 식사를 했다. 노닐기 좋은 곳에서 배를 채웠으니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너럭바위 계곡을 지난 트레킹팀은 과천현의 옛 객사였던 온온사(穩穩舍)를 탐방하게 된다. 객사는 한마디로 관사를 말한다. 유명한 전주 객사를 떠올리시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1649년(인조27)에 창건된 이 건물은 정조대왕에 의해 ‘온온사’라는 특이한 이름을 갖게 된다. 잠깐 한자를 살펴보자. ‘평안할 온(穩)’자가 하나도 아닌 두 개나 들어가 있다. 정조대왕은 평화, 아름다움, 휴식이라는 개념들을 이름에 담고 싶으셨던 것 같다.

 

실제로 정조대왕은 화산 능행차를 하러가면서 과천현 객사에 머물렀는데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휴식하기에 좋았다고 하여 ‘온온사’라는 현판을 친필로 하사하셨다. 그 현판이 지금도 온온사에 잘 붙여져 있다.

 

지금이야 일대가 많이 개발이 되어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휴식하기에 좋은 곳’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온온사 뒤편 숲길은 꽤 아름답고 산보하기에 좋다는 것이다. 그 숲길을 따라 트레킹팀은 마지막 탐방지인 자하동 계곡으로 향했다. 드디어 추사 선생 글씨를 만나게 된다.

 

 

 

 

 

 

* 온온사

 

 

 

 

 

 

 

● 자하 신위 선생과 추사 김정희 선생

 

돌산인 관악산에도 경치가 아름다운 계곡이 있다. 이 계곡은 자하동이라고 불리는데 조선후기 시·서·화에 능했던 자하 신위(1769~1847) 선생의 호를 따서 이름을 붙인 것이다. 자하(紫霞) 신위 선생은 어려서부터 신동이라고 불렸는데 그런 소문을 듣고 정조대왕이 궁궐로 불러 크게 칭찬을 했을 정도였다. 신위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전편인 관악산 역사트레킹에서 한 번 언급했었다. 역시 복습한다는 생각으로 읽어보자.

 

시(詩)·서(書)·화(畫) 모두에 능한 사람을 시·서·화 삼절이라고 부르는데 그 칭호를 얻었던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당연한 말일 것이다. 시와 글씨와 그림, 이 세 가지를 모두 다 잘하기가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신위 선생은 참 대단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왜 관악산에 신위 선생의 호를 딴 계곡이 있는 것일까? 신동이었으며 시·서·화 삼절로 불리기까지 한 신위 선생과 관악산이 무슨 연관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늘 그렇듯 천재의 삶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다. 신위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게 된다. 지방토호들의 횡포에 의해 파직 당하고, 당쟁의 여파로 인해 파직 당한다. 이에 세상의 환멸을 느낀 자하 신위 선생은 관악산에 은거하게 된다. 그렇게 하여 관악산에는 자하동이란 명칭이 생긴 것이다. 참고로 과천에 있는 자하동은 ‘남자하동’이라 부르고, 서울대 옆에 있는 자하동은 ‘북자하동’이라고 불린다.

 

 

 

 

 

* 남자하동계곡

 

 

 

 

 

 

● 천재가 천재를 알아봤다!

 

과천의 남자하동 계곡 바위면에는 단하시경(丹霞詩境), 자하동문(紫霞洞門), 백운산인 자하동천(白雲山人 紫霞洞天),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 등 4개의 바위글씨가 있다. 계곡을 따라 새겨진 이 바위글씨들은 예전에는 접근성이 많이 떨어졌다.

 

실제로 최근에 설치된 탐방데크와 흔들다리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문화재였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바위글씨들을 지나갔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알아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늦게나마 탐방시설들이 확충되어 바위글씨들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말 나온 김에 바위글씨에 대해서 살펴보자. 지면 관계상 단하시경(丹霞詩境) 하나만 이야기하겠다. 이 ‘단하시경’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글씨다. ‘단하’는 신위 선생의 다른 호로 추정되고, ‘시경’은 시흥을 불러일으키는 경지라는 뜻이다. 신위 선생이 관악산 계곡의 아름다움을 보고 지은 시를, 추사 김정희 선생이 ‘단하시경’이라는 바위글씨로 새겨 넣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추사 선생은 관악산에 은거했던 신위 선생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그런 돈독함이 ‘단하시경’이라는 바위글씨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니 추사 선생도 시·서·화 삼절이었다. 천재가 천재를 알아봤던 것이다.

 

자하동 계곡 탐방을 끝으로 과천골 역사트레킹도 종료가 된다. 트레킹 하느라 고생이 많으셨을 텐데 계곡물에 발 좀 담그고 바위에 새겨진 글씨도 감상해보자. 이런 것이 풍류 아니겠는가? 시·서·화에 능하지 않더라도 풍류는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법이지!

 

 

 

 

 

 

*단하시경(丹霞詩境) 각자바위

 

 

 

 

 

 

 

● 오늘도 즐겁게 역사트레킹해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 아니다. 타인과 끊임없이 호흡을 해야 벌어먹을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시선에 익숙해져야한다. 어쩌면 즐겨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시선에 노출되는 것이 나답게 살기와 배치되지도 않는다. 물론 여기서의 타인의 시선은 갑질의 시선이 아니다.

 

타인의 시선을 받아들여 스스로의 모습을 더 멋지게 하면 좋은 일이 아닌가. 필자의 출근 장소는 트레킹 집합장소인데 해당 집합지에 미소를 띠며 도착하면 더 좋지 않겠는가.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즐겁게 역사트레킹해요!”

 

 

 

 

 

 

*과천향교

 

 

 

 

 

 


 

 

 

 

 

과천골 역사트레킹

 

1. 코스: 남태령망루(남태령옛길) ▶ 너럭바위계곡 ▶ 온온사 ▶ 남자하동계곡(과천향교)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하

5. In: 선바위역 3번 출구(지하철4호선) / Out: 과천역(지하철4호선)

 

 

 

 

 

 

* 과천골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한때 필자의 제 3의 장소는 만화방이었다. 만화를 좋아해서라기보다는 만화방에서 먹는 라면이 일품이었기에 그곳을 즐겨찾기를 했었다. 삐거덕거리는 만화방 쇼파에 느긋하게 앉아 책장을 잡으려고 할 때였다. 항상 그 때였다. 콧속을 파고드는 그 진한 라면 냄새! 이 세상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도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옆 테이블의 라면 냄새! 그 냄새에 취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분명 만화방에 오기 전에 두둑하게 식사를 하고 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장님 라면 하나에 공기밥 추가요!”

미국의 사회학자인 레이 올든버그는 저서 <The Great Good Place>에서 제 3장소에 대한 개념을 제시했다. 집이 제 1장소라면, 직장은 제 2장소이다. 그렇다면 제 3장소는 무엇일까? 목적 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리는 공간을 제 3의 장소라고 설명한다.

집과 직장에서 충족될 수 없는 본원적인 욕구를 제 3의 장소에서 사회적 교류를 통해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레이 올든버그는 이런 교류들을 ‘비공식적 공공생활’이라고 칭했고, 그런 교류들을 위한 필수적인 공간을 제 3의 장소라고 명명했다. 대표적인 제 3의 장소는 어디일까? 아마도 도서관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The Great Good Place>에서 제시한 제 3의 장소는 지역사회의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는 공간으로 시민참여를 증대시키는 공공장소의 성격이 짙다. 하지만 제 3의 장소를 굳이 공공영역에서만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서의 제 3의 공간도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배불리 라면을 먹었던 만화방을 제 3의 장소로 언급한 것이다.

*화계사 일주문

 

● 흥선대원군과 화계사

이번편에는 화계사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화계사는 북한산 동쪽편에 있는 명찰이다. 경내가 크지는 않지만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고 주위 풍광이 수려하여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모으고 있는 곳이다.

원래 화계사는 고려 광종 때 창건된 보덕암이 그 시초였다. 이후 1522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며 이름을 화계사로 고쳐 불렀다. 화계사는 조선 후기에 크게 그 사세를 확장하게 됐는데 그 시점이 흥선대원군의 집권기였다. 이후 궁(宮) 절’이라고 불릴 만큼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데 지금 남아있는 대웅전, 명부전, 대방 등이 모두 19세기 후반에 중건되거나 만들어진 것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명부전의 편액을 쓰는 등 화계사 곳곳에 그 흔적을 남겼다. 화계사 경내에는 까마귀가 돌을 쪼아서 물이 나오게 했다는 오탁천(烏啄泉)이라는 샘물이 있다. 흥선대원군은 이 샘물에서 피부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 화계사: 화계사 대웅전. 오른쪽에 있는 건물이 명부전이다.

 

● 번잡한 화계사 범종루

일주문을 지나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큰 느티나무가 보이고, 그 옆으로 주차장이 있다. 주차된 차들 위쪽으로 범종루가 있는데 이곳이 화계사 탐방의 첫 번째 포인트다. 참고로 범종이 단층으로 이루어진 곳은 범종각(梵鐘閣)이고, 2층의 누각 형식으로 된 곳은 범종루(梵鐘樓)라고 부른다.

이곳의 범종루는 다른 사찰의 범종각이나 범종루보다 좀 더 번잡하게 보인다. 무언가 오밀조밀하게 밀집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번잡함을 이해하려면 먼저 불구사물(佛具四物)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불구사물은 범종각이나 범종루에 있는 범종, 법고, 운판, 목어 네 가지를 지칭한다. 법고는 북이고, 범종은 종이라 누구나 다 그 쓰임새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운판과 목어는 무엇일까? 먼저 대판(大版)이라고도 불리는 운판을 알아보자. 운판(雲版)은 구름운(雲)자에서 보듯 구름을 형상화하여 만든 것이다. 청동이나 철제로 만든 평판인데 두드리면 맑고 은은한 소리가 난다. 목어(木魚)는 어고(魚鼓) 또는 어판(魚板)으로도 불리는데 나무로 만든 물고기의 배를 파내고 그 부분을 두들겨서 소리를 낸다. 처음에는 그냥 물고기 형태가 많았다. 하지만 이후에는 몸은 물고기지만 머리는 용의 형상을 한 용두어신 형태가 대세로 자리를 잡아갔다.

통상적으로 불구사물은 각각 하나씩 있다. 하지만 화계사 범종루에는 범종이 두 개가 있고, 목어도 두 개가 있다. 그래서 트레킹팀에게 항상 숙제를 내준다.

“자 눈을 크게 뜨고, 범종 두 개와 목어 두 개를 찾아보세요! 특히 범종은 보물이에요.”

* 화계사 목어: 천년이 넘는 세월을 견디느라 많이 삭았다. 얼핏보면 무슨 외계인같다. 못 먹어서 바싹 마른...

● 2층에 걸려있는 사인비구의 동종

정확히는 보물 11-5이다. 11이면 11이지 왜 11-5인가? 그 이유를 알려면 화계사 범종을 제작한 사인비구에 대해서 언급해야 한다. 주종장이었던 사인비구는 조선 후기 숙종 시대에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승려였다. 그의 실력이 뛰어나서인지 그가 제작한 동종 8개가 보물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강화 동종만 1963년에 지정됐는데 이후 2000년에 나머지 7개가 일괄로 지정되어 총 8개가 된 것이다. 그중 화계사 동종은 보물 11-5로 지정받았다. 이 동종은 원래 경상북도 풍기(지금의 영주시) 희방사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고종 때 이곳 화계사로 옮겨지게 된다.

화계사 동종은 무게가 300근으로 무게도 덜 나가고 크기도 작다. 1근이 0.6kg이니 300근이면 180kg 정도가 된다. 기계적으로 비교하는데 무리가 있지만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이 19톤이니 그 크기가 크지 않다는 것을 단 번에 아실 것이다. 화계사 동종은 범종루 2층에 걸려있고 지금은 타종을 하지 않는다. 대신 이후에 제작된 크기가 큰 범종이 타종을 한다. 2층에 걸려 있고, 크기도 작아서인지 사인비구의 동종을 단 번에 찾지 못하는 분들이 많았다.

목어도 좀처럼 단 번에 두 개를 다 확실하게 알아채시는 분들이 많지 않았다. 목어 중 하나가 삭아서 으스러질 거 같은 형태로 걸려 있기 때문이다. 으스러질 거 같은 나무덩어리가 걸려있어 그것이 목어인지 아닌지 분간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저거는 도대체 왜 저렇게 팍 삭았어요? 누가 일부러 썩은 나무라도 걸어놨어요?”

“저 목어가 천년을 버틴 목어라서 그래요. 화계사의 시초가 고려 광종 때 만든 보덕암이거든요. 그러니 저 나무토막은 천년을 버틴 거에요.”

화계사 범종루에 걸린 불구사물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를 해봤다. 아직도 할 말이 더 많지만 이쯤에서 줄이겠다. 나머지는 마지막에 이야기하겠다. 글 서두에 언급된 제 3공간과 관련해서 꼭 언급해야 할 게 있으니까.

* 화계사 범종: 사인비구가 만든 보물 11-5 동종은 어느 것일까? 큰 종일까? 아니다. 2층에 걸려 있는 작은종이다.

 

● 안 가보면 서운한 화계사 명부전

화계사를 빠져나오기 전에 꼭 명부전에 들러보자. 명부전은 저승세계인 유명계의 교주 지장보살께서 계신 곳이다. 지장보살은 그린톤으로 염색한 것처럼 녹색 민머리를 드러낸다. 그래서 보관을 쓴 다른 보살들과는 확연히 구분이 된다. 지장보살 옆에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좌우로 협시한다.

그밖에도 사후세계에서 인간들의 죄의 경중을 심판하는 시왕(十王)이 있는데 우리가 잘 아는 염라대왕도 바로 그 시왕 중에 하나다. 열 명의 왕 중에 다섯 번째 왕이다. 영화 <신과 함께>를 보신 분이라면 지옥을 관장하는 열 명의 왕들이 눈에 그려질 것이다.

화계사 명부전이 이목을 끄는 것은 흥선대원군이 쓴 현판 때문만은 아니다. 그 안에 봉안되어 있는 불상과 시왕상이 더 주목을 받는다. 불상과 시왕상이 고려 말에 활동한 나옹화상이 조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옹화상이 누구인가? 바로 그 유명한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고려 말에, 그것도 나옹화상이 제작한 불상과 시왕상이 있으니 화계사 명부전을 빼놓고 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삼성암 일주문: 현판에는 삼각산 삼성사라고 적혀 있다. 북한산이 바로 삼각산이다.

● 홀로 깨달은 나반존자

이제 화계사 경내를 빠져나와 숲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곳은 북한산둘레길 3코스인 흰구름길 구간에 속하는데 트레킹팀은 둘레길을 따라가지 않고 산 위쪽으로 올라간다. 인적이 드문 오솔길을 따라 구불구불 올라가는 재미가 있다. 그렇게 한참 올라가다보면 갑자기 차도가 나온다. 산길을 열심히 올라왔는데 갑자기 차도가 나와 좀 당혹스러울 수도 있다. 그렇게 다음 탐방지인 삼성암에 당도하게 된다.

북한산 칼바위능선 아래에 자리 잡고 있는 삼성암은 나반존자를 위해 지어진 사찰이다. 독성수(獨聖修) 또는 독성존자(獨聖尊者)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나반존자는 소승불교에서 중시되는 인물로 홀로 깨달음을 얻은 분이라고 한다. 우리 사찰에서 나반존자는 독성각에 모셔지지만 중국과 일본에서는 독립된 신앙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같은 대승불교인데도 우리와 중국, 일본과는 차이가 나는 것이다.

나반존자는 중국이나 일본 불교에서는 그 이름 자체가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로 불경에도 그 이름이 없고, 부처님 제자 중에도 그런 인물이 없다. 그렇다면 왜 유독 우리 불교에서만 나반존자가 등장할까? 이와 관련하여 나반존자가 단군을 모시는 우리 고유 민족신앙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단군신앙을 나반존자에 대한 신앙으로 연결하려고 한 것이다.

물론 이 설에 대한 반론도 있다. 너무 늦게 신앙화 됐다는 것이다. 독성각이 본격적으로 지어진 시기는 조선 후기인데 단군신앙은 4천년이 넘고,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도 1천 7백년 정도 된다. 단군이 나반존자라면 조선 후기가 아닌 훨씬 그 이전 시기에 불교 신앙의 대상이 됐을 것이다. 시기상으로 너무 늦었다.

어쨌든 나반존자를 모시는 독성 신앙은 우리 불교의 고유한 면이다. 우리 불교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니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삼성암은 이런 독성 기도 도량으로서 매우 중시되는 곳이다. 삼성암 말고도 경북 청도에 있는 운문사의 부속암자 사리암이 나반존자 기도도량으로 유명하다.

 

* 삼성암 독성각: 다른 계절도 좋지만 가을에 가면 더 좋은 곳이다. 조용히 기도를 하기에도 좋다.

● 불교에 녹아든 우리의 고유 신앙

독성각 말고도 칠성각과 산신각은 우리 불교에만 있는 전각이다. 칠성각은 수명의 신인 칠성신을 모신 곳이고, 산신각은 여러분들도 다 아는 산신령을 모신 곳이다. 이들 전각이 독성각, 칠성각, 산신각으로 따로따로 3개의 독립 건물로 존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세 곳이 하나로 뭉쳐지기도 한다. 그러면 삼성각(三聖閣)이 된다. 그래서 삼성각은 독성, 칠성, 산신 신앙이 함께 공존한다. 복잡하다. 그래서 트레킹팀에게 이렇게 설명한다.

 

“독성각, 칠성각, 산신각 이 3개는 우리 불교에만 있는 것이죠. 우리 민족신앙이 불교에 흡수되면서 이런 형태로 나타났어요. 그런데 그 전각을 하나로 뭉쳐놓으면 삼성각이 됩니다.”

“무슨 소리에요?”

사실 해설하는 필자도 머리가 복잡하다. 그래서 매우 단순한 방법으로 설명했다.

 

“독성각, 칠성각, 산신각 이 세 건물을 삼성각 하나로 퉁칩니다!”

나반존자와 독성신앙, 불교에 흡수된 민족신앙 등등... 풀어내야 할 것이 많아 머리가 복잡하다. 하지만 정작 삼성암에 들어서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삼성암이 칼바위 능선 쪽에 있다 보니 주위 풍광을 둘러볼 수 있는데 아래쪽 화계사에서 바라보는 풍광하고는 또 다른 멋이 난다. 독성각을 탐방하는 것도 잊지 말자. 삼성암에 왔으니 당연히 독성각에 가봐야 한다.

생각해보니 화계사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는 항상 가을이었다. 알록달록한 단풍들이 바람을 타고 경내에 흩날릴 때의 모습들이 그려진다. 그런 산사의 풍광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고즈넉하게 만든다. 그런 감흥에 취하다보면 불자가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할 것이다.

* 빨래골: 빨래골 계곡

● 내 마음 속에 종소리가 울린다!

숲 속의 숲이라 불릴 수 있는 북한산 생태 숲 탐방을 끝으로 화계사 역사트레킹은 종료가 된다. 생소한 불교 용어들이 많이 언급되어 머리가 복잡해지는 느낌이다. 자 그럼 다시 제 3의 장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글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만화방은 한 때 필자의 제 3의 장소였다. 만화방에서 맡는 라면 냄새는 필자를 무아지경에 빠뜨릴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만화방에 가지 않는다. 굳이 만화방 라면 냄새가 아니더라도 무아지경에 빠질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종소리다. 산사의 범종소리.

서양종이 경쾌한 소리를 낸다면 동양종은 장엄한 소리가 난다. 그래서 서양종은 아침에 들으면 좋고 동양종은 석양이 지는 저녁 경에 들으면 인상적이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갈 때 산사에서 울려 퍼지는 범종 소리를 들으신 적이 있으실 것이다.

필자의 머릿속에 뭉쳐있던 번뇌들은 범종 소리를 타고 저 멀리로 사라져간다. 내 마음 속에 종소리가 울린다.

개인의 제 3의 공간을 굳이 물리적인 영역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제 3의 공간이 후각의 영역이 될 수도 있고, 청각의 영역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어떻게 쉼표를 찍느냐다. 제 3의 공간에서는 제대로 좀 기분을 전환해보자. 쉼표를 제대로 찍고 나오는 곳이 바로 제 3의 공간이니까.

 

 

 


 

■ 화계사 역사트레킹

1. 코스: 화계사 ▶ 삼성암 ▶ 빨래골 ▶ 북한산생태숲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IN: 경전철 우이신설선 화계역 2번 출구 / OUT: 북한산생태숲

 

 

*화계사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 나답게 살기

무소유만큼이나 법정 스님이 일깨워주신 큰 화두이다. 무소유나 나답게 살기, 둘 다 큰 울림이 있는 말씀들이다. 무소유는 실천의 문제라 할 수 있다. 또 결단과도 관계가 깊다. 이에 비해 나답게 살기는 삶을 바라보는 자세 혹은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나답게 살기를 자신의 신체보다 훨씬 더 큰 거울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울이 크니 자신만 보이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보이는 것이다. 자신의 머리를 다듬어야 하는데 타인의 헤어스타일부터 훔쳐본다. 자신의 옷차림을 단정하게 해야 하는데 다른이들의 패션스타일에 주눅부터 든다.

크게 보라고 큰 거울을 가져다 놓았는데 타인을 보느라 정작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을 나답게 살기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과연 나답게 사는 게 무엇일까? 무소유도 만만치 않았는데 이 화두도 만만치가 않다.

일단 나답게 살기를 하려면 스스로를 잘 파악해야 할 것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장점은 무엇이며 단점은 무엇인가 등등... 그렇게 스스로를 알아가야 뿌리를 잘 내릴 것이 아닌가. 그래야 휘둘리지 않고 중심이 잘 잡힐 것이다.





*아차산: 아차산성 가는길


● 팔자에 없는 욕을 먹어도 다음을 준비한다

역사트레킹 강의를 진행하다보면 다양한 에피소드가 발생된다. 그도 그럴 것이 적을 때는 5~6명에서 많을 때는 30명 가까이 되는 수강생들과 함께 트레킹을 행하다 보니 여러 가지 해프닝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암릉 구간이 있는 코스에 하이힐을 신고 와서 필자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수강생, 시작과 동시에 막걸리 잔부터 돌리는 수강생... 이런 분들과 부대끼다 보면 팔자에도 없는 욕을 먹게 되어 낙담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필자는 다음 트레킹 강의 준비를 했다. 나름대로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말이다. 욕을 먹으면서도 다음 일정을 준비할 때는 설레다니!





* 아차산성






● 너무나 중요했던 아차산, 너무나 시원한 아차산

이번편에는 아차산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아차산 역사트레킹이 행해지는 아차산은 해발 285m로 서울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해발 높이가 300미터도 되지 않으니 그리 높은 산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동네 뒷동산으로도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키가 작은 아차산이지만 예로부터 그 지정학적인 중요성은 엄청나게 컸다. 한강을 바로 옆에 끼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시대부터 한강유역을 지배하는 자가 한반도의 주인이지 않았던가?

“눈이 아주 시원하지 않습니까? 아차산에 올라와야 하는 이유가 아주 명쾌해지죠. 안 올라왔으면 이런 광경을 바라볼 수 있겠어요?”

아차산이 돌산이라 그런지 곳곳에 너럭바위들이 펼쳐져 있고, 또 곳곳에 전망대가 펼쳐져 있어 한강변 풍광을 바라보기에 더없이 좋다. 인근에 자리 잡은 구리시와 강 건너 하남시는 물론 시야가 좋으면 팔당댐 부근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필자는 전망대에 오르면 항상 저 멘트를 했었다. 고생스럽게 아차산을 오르느라 힘이 많이 들어갔을 수강생들의 마음을 달래드리기 위해서.

“강 건너편 몽촌토성 쪽 좀 보세요. 아니 거기는 제2 롯데월드 타워고요. 한성백제의 옛 수도로 추정되는 몽촌토성 쪽이요.”

- 찰칵찰칵

“그러니까 약 470여년 정도를 이어왔던 한성백제가 475년 9월 장수왕의 공격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때 백제왕이 개로왕이었는데...”

- 찰칵찰칵

풍광이 좋은 코스를 탐방할 때마다 겪는 일이다. 그런데 아차산 코스는 그 강도가 더하다. 아차산은 바로 옆에 있는 용마산과 함께 서울둘레길 2코스에 속하는데 서울둘레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코스로 꼽힌다. 사실 저렇게 마이크에 대고 이야기를 했지만 필자도 수강생이었다면 재미없는 강의에 집중하느니 사진기 셔터를 누르고 있었을 것이다.





* 아차산: 아차산 능선에서 한강쪽을 바라본 모습.





● 아차산과 바보온달

아차산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아끼산, 아키산, 에께산, 엑끼산 등등... 남쪽 한강변을 향해 솟아 오른 모양을 보고 남행산이라고도 불렸다. 지금은 이 일대 산들이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 봉화산 등으로 제각각의 이름으로 불리지만 예전에는 그냥 뭉뚱그려 아차산으로 불렸다. 앞서 언급한 서울둘레길 2코스는 아차산, 용마산, 망우산으로 이어진다. 봉화산만 빠져있는 것이다. 봉화산은 서울둘레길에서 아예 빠져있다.

산 이름과 관련하여 또 다른 스토리텔링이 있다. 아차산의 한자표기는 '阿嵯山', '峨嵯山', '阿且山' 등으로 다양하게 쓰인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아차(阿且)'와 '아단(阿旦)’ 2가지가 나타난다. 아차산으로 불리기도 하고 아단산으로 불리기도 했다는 뜻이다. 지정학적으로 무척 중요했기에 불리는 이름도 다양했던 것 같다.

아차산이든 아단산이든 우리 같은 도보여행자들에게 네이밍이 뭐가 중요하겠나? 하지만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에게는 무척 중요했을 것이다. 왜? 온달장군이 아단성에서 전사했기 때문이다. 온달장군이 출전을 했던 때는 고구려 영양왕 때였는데 그 시기 신라는 한강 유역을 차지했고, 그 위쪽으로 계속 세력을 팽창하려 했다. 이에 온달은

‘죽령 서쪽을 빼앗지 못한다면 결코 돌아오지 않겠다.’

이런 비장한 각오를 하고 출전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이 현재의 아차산성을 지칭하냐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위에 <삼국사기>에 언급한 것처럼 ‘아차(阿且)'와 '아단(阿旦)’으로 둘 다 불렸다면 현재의 아차산성이 아단성이라는 것이 아닌가? 뭐가 문제인가?

“평강공주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바보온달이 590년에 아단성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단성으로 불린 곳이 하나가 아니라는 겁니다.”

“아니 아단성이 또 있어요? 아차산이랑 이름도 비슷해서 헤깔리는데...”

“그렇죠. 말을 하고 있는 저도 헤깔립니다.”

“그래서 다른 한 곳은 어디인데요?”

“충북 단양에 있는 온달산성입니다.”

이 문제를 두고 수강생들과 이야기를 할 때는 온달산성에 대한 언급을 해야 겨우 실타래가 풀리게 된다. 한마디로 단양의 온달산성도 아차산처럼 아단성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더 정확히는 ‘을아단성’이라고 불렸다.




* 온달장군과 평강공주 조형물





● ‘아차’해서 아차산?

재미가 없다. 잘 쓰이지도 않는 한자나 남발하고. 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보자.

조선 명종 때였다. 홍계관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점을 잘 쳤다. 이에 명종이 그를 불러 시험을 해보았다. 홍계관에게 궤짝 하나를 보여줬는데 그 안에는 쥐가 있었다. 임금은 홍계관에게 궤짝 안에 든 쥐의 숫자를 맞춰보라고 했고, 만약 맞추지 못한다면 사형을 당한다고 엄포했다. 이에 홍계관은 궤짝 안에 세 마리의 쥐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궤짝 안에는 쥐가 한 마리뿐이었다. 결국 홍계관은 처형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왕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쥐의 배를 갈라보게 했다. 하지만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거기에 새끼 두 마리가 들어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 홍계관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이에 급하게 처형의 집행을 중지를 명했지만 이미 홍계관은 죽고 말았다. ‘아차’하고 늦었던 것이다. 이에 그 사형장 위쪽 산을 아차산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그냥 재미있는 야담이라고 보시면 된다. 조선시대의 공식 처형장은 서소문 밖이었다. 아차산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차산에서 죽은 사람은 홍계관이 아니라 앞서 언급했던 개로왕이었다. 백제의 왕 개로왕이었다. 참고로 서소문은 소의문이라고 불렸는데 서대문과 함께 일제강점기에 헐렸다. 그래서 서울의 서쪽에는 대문과 소문이 둘 다 멸실됐다.

아차산과 관련된 스토리텔링에 대한 소개를 하느라 정작 트레킹은 뒷전인 글이 되었다. 늦었지만 다시 트레킹에 집중해보자.

아차산 역사트레킹은 아차산생태공원에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등산로 초입에 자리 잡고 있는 아차산생태공원은 작은 야외식물원처럼 꾸며져 있다. 아래쪽에는 작은 호수가 있는데 여름에는 분수를 뿜고,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 호수 안에는 인어공주동상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인어공주 앞을 지날 때마다 동전 던지기를 하며 소원을 빌었다.

필자는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동상이 동상인 만큼 ‘로또대박’이 아닌 다른 소원을 빌었다.

- 우렁각시





* 아차산생태공원: 인어공주상이 있다.





● 보루를 걷다, 서울 최고의 풍광을 걷다

인어공주를 지나친 트레킹팀은 아차산성을 만나게 된다. 해발 200미터 고지에 자리 잡고 있는 아차산성은 둘레가 약 1km 정도인 테뫼식에 산성이다. 테뫼식이란 산 정상부를 둘러서 만든 성을 말한다.

아차산성은 한강이 손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다. 거기에 올라서면 백제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이 성은 백제가 수도 방어를 위해서 쌓았다고 전해진다. 그 이후에는 고구려로, 또 신라로 계속 주인이 바뀐다. 결국 아차산성은 백제, 고구려, 신라의 손길이 다 묻어있는 것이다.

아차산성을 지나면 고구려 보루군을 만나게 된다. 아차산을 위시하여 용마산, 망우산, 수락산에는 여러개의 보루군이 있다. 보루(堡壘)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쌓은 구축물인데 성(城)보다는 작은 요새이다. ‘최후의 보루’라는 말을 생각하시면 쉽게 납득이 될 것이다.

사실 아차산 역사트레킹의 백미는 이 보루군을 걷는 것이다. 아차산 정상부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보루군은 확 트인 시야를 선사한다. 완만하게 이어진 산책로 옆으로는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멀리는 북한산이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렇다고 한강이나 북한산 같은 자연물만 바라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서울의 동쪽편 시가지를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풍광들을 다각도로 볼 수 있으니 서울둘레길 중에서 가장 멋진 코스라는 별칭이 붙은 것이다.

이 보루군들은 남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고구려 유적들이다. 이 보루군을 통해서 고구려의 국경지대 요새에 대한 이해 및 남하과정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산들에 있는 보루들보다 아차산의 보루가 훨씬 더 잘 복원이 되어 있다. 확 트인 곳에서 트레킹도 하고 쉽게 볼 수 없는 고구려 유적들도 탐방할 수 있으니, 그거 정말 좋은 일 아닌가? 참고로 아차산 정상은 별다른 표식이 없었는데 최근에 표지석이 하나 생겼다.

이제 트레킹팀은 긴고랑길로 하산을 한다. 긴고랑길은 지형이 순하다. 그래서 올라오기도 편하고, 내려가기도 편하다. 그리고 옆에 계곡도 있다. 긴고랑길 계곡은 비가 와야 그 모습이 나타나는 건천에 가깝다. 하지만 비가 제대로 내려 그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면 꽤 매력적인 계곡으로 변신한다. 시원하게 물줄기를 뿌리는 폭포도 형성된다.






* 아차산: 아차산 4보루. 주능선을 따라 고구려 보루들이 산재해있다. 그 보루들은 용마산과, 망우산을 넘어 북한산까지 이어진다.





● 역사트레킹을 할 때만큼은 나답게 산다!

우리 조상들은 방위에 맞춰 여러 가지 것들을 배치해놓았다. 오행 같은 경우는 동쪽 나무(木), 서쪽 금(金), 남쪽 불(火), 북쪽 수(水), 중앙 흙(土)이다. 맛도 배치해놓았다. 동쪽 신맛, 서쪽 매운맛, 남쪽 쓴맛, 북쪽 짠맛, 중앙 단맛.

필자의 본명은 곽동운이다. 이름에 ‘동’이 있어서 그런지 동쪽과 좀 잘 맞는 듯싶다. 신맛 나는 과일을 무척 좋아하고, 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좋아하니까. 아차산이 서울의 동쪽에 있으니 아차산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마다 더 신나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같은 소리라고 힐난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필자는 이런 것들이 바로 내 자신을 알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를 배워가며 예전에는 잘 몰랐던 내 자신에 대해서도 파악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고 생각한다. 간간이 행하는 실내강의에 이런 것들을 써먹기도 한다. 전에 서울 은평구에서 실내 강의를 한 적이 있었다. 점심시간 즈음이었는데 은평구가 서울의 서쪽에 위치해 있으니 이런 말로 강의를 끝낸 적이 있었다.

“우리가 서쪽에 있으니까요, 오늘 점심은 매운탕으로 드세요. 제가 그 어렵다는 점심 메뉴를 골라드렸어요.”

반응은? 맵지 않았다. 썰렁했다

.

필자는 무소유와 함께 나답게 살기라는 화두를 계속해서 곱씹을 것이다. 나답게 살기는 결코 이기적인 삶이 아니다. 자기 삶의 중심추에 온전히 자기 자신을 올려놓는 행위다. 자기 자신을 알아야 나답게 살기에 나설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늦게 철이 들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깨달은 것이 있다. 진짜 좋아하면서 진짜 잘하는 거 한 가지는 확실히 안다. 나이가 먹어도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게, 진짜 잘하는 게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도 있다고 하지 않나.

그것이 무엇일까? 역사트레킹이다. 적어도 역사트레킹을 할 때만큼은 나답게 사는 산다!











* 아차산: 아차산 능선길을 걷는 트레킹팀







■ 아차산 역사트레킹

1. 코스: 아차산생태공원 ▶ 아차산성 ▶ 고구려정 ▶ 보루군 ▶ 긴고랑길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In: 아차산역 2번 출구(지하철5호선) / Out: 긴고랑길




* 아차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책을 좀 많이 구매한 적이 있었다. 당시는 지적 호기심도 왕성했었고, 책 욕심도 굉장했을 때였다. 없는 돈을 쪼개서 책을 샀고, 책장을 채워 넣었다. 차곡차곡 채워지는 책장을 볼 때마다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샀다. 역사, 철학, 사회과학, 문학 등등... 한 분야를 파고들 생각도 없었고, 학자가 될 수도 없었기에 그렇게 잡식성으로 책을 구매를 했던 것이다. 스페셜리스트보다 제네럴리스트에 더 어울리는 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집 규모에 비해서 책이 너무 많았다. 집은 작은데 책이 쌓이니 주체가 안 되었다. 더 큰 문제도 있었다. 그 책들을 잘 안 읽었다는 점이다. 필자의 지적호기심은 책장 안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허세를 떨기 위한, 보여주기용 책장이었다. 무언가 대책이 필요했다.





*성북동 역사트레킹





● 계절에 민감한 역사트레킹

당연한 이야기지만 역사트레킹도 계절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해당계절에 맞게 코스를 배치하는 것은 매우 기본이 되는 일이다. 나무 그늘 하나 없는 곳을 여름에 배치한다? 당연히 안 될 말이다.

계절에 민감하다보니 특정 시기에만 가는 코스도 있을 정도다. 봄꽃들이 군락을 이루는 곳은 봄에 가고, 단풍이 곱게 지는 곳은 가을에 간다. 숲길이 울창한 곳은 한여름에 가도 좋다. 역사트레킹도 엄연히 아웃도어 활동인 만큼 계절의 변화에 부응해야 하는 것이다. 봄꽃들의 화사함을 느끼며 문화재를 탐방하면 기쁨이 더 배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알록달록한 단풍들을 배경삼아 문화재를 탐방한다면 더 로맨틱할 것이다.

이번에 소개할 성북동 역사트레킹은 가을에 가장 적합한 트레킹 코스이다. 가을에 가야 더 로맨틱하게 즐길 수 있는 코스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성북동 역사트레킹을 광고할 때 꼭 이런 멘트를 사용했었다.

“서울 단풍의 메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서울 단풍의 진면목을 성북동 역사트레킹을 통해 맛볼 수 있기에 저런 과감한 멘트를 사용했던 것이다.





* 성북동 역사트레킹

● 법정스님과 길상사

춘녀사추사비(春女思秋士悲)라는 말이 있다. 봄에 여인들은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고, 가을에 선비는 비애를 느낀다는 뜻이다. 여자는 봄을 타고 남자는 가을을 탄다는 말로 다르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춘녀사추사비’처럼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지만 단풍을 감상하기 위해 길을 나선 트레킹팀은 늘 그랬던 것처럼 여성분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녀들은 봄꽃을 반겨하는 봄 처녀들처럼 곱게 물든 오색단풍 앞에서 크게 환호했다. 사실 형형색색의 단풍 앞에 남녀가 어디 있고, 노소가 어디겠는가? 그냥 즐겁게 즐기면 되지!

서론이 길어졌다. 성북동 역사트레킹의 첫 탐방지는 법정 스님의 자취가 남아 있는 길상사다. 길상사는 고급요정인 대원각 자리에 세워진 사찰로 북악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이후 리모델링을 실시했지만 사찰 건물의 대부분은 요정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대원각이 조계종에 등록됐을 때는 1995년 6월이었는데 당시는 ‘대법사’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러다 2년 후인 1997년에 시주자인 김영한(법명 길상화)의 법명과 비슷한 ‘길상사’로 명칭이 바뀌어 창건된다. 대원각을 운영하였던 길상화 김영한은 당시 시가로 천억 원이 넘던 대지와 건물을 시주했고, 그런 길상사에 법정 스님은 회주(會主: 법회를 주관하는 법사)로 임하게 된다.

아무리 시주 형식이라지만 천억 원이면... 로또를 몇 번 맞아야 하나? 더군다나 법정 스님은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셨던가? 그래서인지 법정 스님은 10년 동안 김영한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10년 동안 시주를 제안한 김영한도 10년 동안 그 제안을 거절한 법정 스님도 정말 대단한 분들인 것 같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실 것인가? 누군가 1천억을 준다고 하면 어떻게 화답하실 것인가? 필자는 속물이다. 그래서 전에 트레킹팀과 이렇게 이야기를 했었다.

“곽 작가님은 누가 천억 원을 시주한다고 하면 어떻게 하실 거에요?”

“그럼 저는 바로 ‘제소유’로 만들 겁니다. 무소유가 아닌 제소유!”

길상사는 성북동을 찾는 이들이 잊지 않고 탐방하는 명소가 되었다. 꼭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방문하면 좋을 장소가 된 것이다. 그렇게 좋은 길상사를 떠나기 전에 다시 한 번 키워드로 정리해본다.

1. 법정스님

2. 김영한

3. 대원각

4. 시인 백석

5. 종교화합



* 길상사: 길상사의 가을




● 1000억 원보다 시 한 줄이 더 낫다?

1,2,3은 다 언급이 됐는데 시인 백석과 종교 화합은 좀 낯설어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본명이 백기행이었던 백석 시인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등의 시를 썼는데 한국 시의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백석을 좋아했던 시인 안도현은 문학청년 시절에 그의 시를 여러 번 필사했다고 한다. 이후 2017년에는 <백석 평전>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진짜 시인 백석과 길상사가 무슨 상관이 있나? 관련이 아주 많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나타샤가 길상화 김영한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백석은 김영한에게 첫눈에 반했고, 그녀에게 ‘자야’라는 애칭을 붙여준다. 하지만 뜨겁게 타올랐던 그 둘의 사랑은 부모의 반대에 부딪히고 만다. 아들이 기생과 어울리는 게 마땅치 않았던 부모는 백석을 강제로 결혼시키려했던 것이다. 이에 백석은 자야(김영한)에게 만주로 도망가자고 제안을 했다. 하지만 자야는 자신이 시인의 앞길을 막을 것 같다는 생각에 제안을 거절했고, 결국 백석 홀로 만주로 넘어간다.

이때가 일제강점기였던 1939년이었다. 이후 자야는 다시는 백석을 보지 못한다. 그는 해방 후 북쪽을 택했는데 1958년에 숙청을 당해 국영농장에서 양치기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1996년에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게 된다.

백석 시인과 자야가 사랑을 한 기간은 불과 3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자야는 평생을 백석을 사모했으면 죽을 때까지도 그를 잊지 못했다. 노년에 김영한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1000억 원이라는 돈이 그 사람(백석) 시 한 줄만도 못하다”

쉽게 사랑하고, 쉽게 헤어지고. 그러다 또다시 쉽게 사랑하고, 또다시 쉽게 헤어지고... 너무 가벼운 ‘사랑의 시대’라 그런가? 자야가 간직한 그 사랑이 역설적으로 너무나 커 보인다.

마지막으로 5번, 종교화합을 살펴보자. 길상사에는 날씬한 관음보살상이 있다. 이 보살상은 천주교 신자인 최종태 교수라는 분이 직접 조각을 했다. 통상적으로 관음보살상은 ‘자비’라는 단어에 어울리게 후더분한 면이 강조되지만 길상사 관음보살상은 호리호리한 모습이다. 그런 특이한 모습 때문인지 몰라도 더 눈길이 간다. 길상사에는 기독교 신자인 영안 모자 백성학 회장이 기증한 7층 석탑도 있다.

이렇듯 길상사에는 불교, 천주교, 기독교가 서로 어우러져 있다. 서울에 이런 고요하면서도 종교적으로 화합을 이루는 장소가 있다는 게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 길상사 보살상



● 아픈 현대사를 만나다, 김신조 루트를 걷다

자, 이제 길상사 위에 있는 정법사를 지나 본격적인 트레킹에 나서보자. 정법사 경내에서 내려다보는 성북동 일대의 모습이 멋지니 꼭 잊지 말고 보셨으면 좋겠다.

정법사를 뒤로 한 후 북악스카이웨이를 지나 북악하늘길로 접어든다. 북악하늘길은 성북구에서 조성한 도보여행길로 총 4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 트레킹팀은 제2산책로를 이용하여 이동한다. 하늘다리를 넘게 되는데 하늘다리를 넘으면 깊은 산중에 온 느낌을 받을 것이다.

“이 곳은 북악하늘길 제2코스입니다. 일명 김신조 루트라고 불리는 곳이죠.”

“아, 여기가 그 유명한 그 김신조 루트...”

“예 맞습니다. 청와대 습격 사건이라고 불렸던 1·21사태를 일으킨 일당들이 여기서 우리 군경들과 총격전을 벌였죠.”

북악산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출입이 제한되다가 지난 2007년에 전면적으로 개방이 되었다.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이 바로 김신조 일당이었다. 필자는 호경암 앞에서 저렇게 설명을 했는데 호경암은 1·21사태 때 격전이 벌어진 곳이다. 당시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져 아직까지도 바위 곳곳에는 그날의 아픈 흉터가 선명하게 남아있다.

“당시 김신조를 위시한 무장공비들은 시간당 10km 이동을 했답니다. 그것도 산길을요. 건강한 성인이 4km로 정도로 이동하니까 그들이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이동을 했는지 알 수 있겠죠.”

구멍이 뻥뻥 뚫린 호경암을 앞에 두고 설명을 이어갔다.





* 호경암




● 격동의 시기, 1968년!

김신조 사태는 1968년 1월 21일에 발생한다. 그리고 그 이틀 후인, 1월 23일에는 미국의 정보선인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된다. 또 그해 10월경에는 울진, 삼척 지역에 무장공비 120명이 침투를 하기에 이른다. 1968년, 한반도는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있었다.

이야기를 좀 더 확장해보자. 1968년에는 전세계적으로 많은 일들이 발생한다. 베트남에서는 월맹군의 구정공세로 미군의 예봉이 꺾였고, 미국에서는 반전 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서구에서는 68혁명이라 하여 구체제 극복을 내세운 혁명이 일어났다. 또한 자유분방함을 강조하는 히피문화도 크게 기세를 떨쳤다.

당시 공산권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프라하의 봄이라는 혁명이 일어났다. ‘밀란 쿤데라’라는 소설가 아시는가? 그 작가가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프라하의 봄이 중요한 모티브였다. 하지만 그 봄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구소련이 탱크를 밀고 들어오며 강제 진압했기 때문이다. 어렵게 맞이한 ‘봄날’이 너무나 쉽게 사라지고만 것이다.

이렇듯 성북동 역사트레킹은 몇 안 되는 현대사, 그중에서도 세계사가 해설로 들어가는 곳이라 필자도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하고 간다. 준비를 많이 해서 그랬는지 말도 많이 한다. 하지만 말이 많으면 실수도 나오는 법! ‘밀란 쿤데라’를 ‘밀란 쿠데타’라고 했다가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그래도 끝까지 마이크를 놓지 않고 해설을 했었다.

-찰칵찰칵

하지만 이미 트레킹팀의 마음은 단풍나무에 가 있었다. 하긴 필자도 그랬을 거다. 재미없는 설명을 듣느니 알록달록한 단풍들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는 게 훨씬 더 남는 일이지!

그렇게 빛깔고운 단풍을 서울에서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무장공비의 루트였던 곳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고 있다니!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 북악하늘길: 북악하늘길 2코스는 일명 '김신조 루트'로 불린다. 그 김신조 루트는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길을 자랑한다.






● 무소유 조치가 내려진 내 책장

역사트레킹을 업으로 삼다보니 책을 역사서 위주로 읽게 됐다. 책장에는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있었지만 결국 생존 독서형식으로 책을 읽게 된 것이다. 사실 역사서만 읽기도 버거웠다. 한국사뿐 아니라 세계사까지 섭력해야하니 다른 분야의 책들에는 눈길을 줄 수가 없었다.

좁은 공간에 책들이 넘쳐나니 어느 순간부터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자기가 직접 돈을 주고 산 물건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꼴이라니! 정말 결단이 필요했다. 이때 법정 스님의 말씀이 죽비소리처럼 스쳐갔다.

- 무소유

자신이 너무나 좋아하는 것조차도 떠나보내야 할 때는 떠나보내야 하는 법이다. 마음을 두지 않고, 애정을 하지 않는 것이 무소유의 대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관심도 없는 것들이라면 굳이 ‘무소유’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법정 스님의 글들을 다시 읽으며 책장을 정리했다. 한 덩어리는 헌책방에 팔고, 다른 한 덩어리는 고물상으로 향했다. 버리기에 아까운 책들도 과감히 버렸다. 물론 먹고 살아야하기 때문에 역사서는 거의 다 그대로 놓아두었다.

‘무소유’ 조치를 당한 필자의 책장은 중간중간에 빈 곳이 꽤 많이 늘었다. 좀 허전한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책을 버릴 생각이다. 특히 성북동 역사트레킹을 행할 때면 법정 스님을 떠올리며 책들을 처분할 생각이다. 무소유를 실천하는 일이 쉽지 않다. 소유보다도 더 어려운 것이 무소유인 듯싶다.





■ 성북동 역사트레킹

1. 코스: 길상사 ▶ 정법사 ▶ 하늘교 ▶ 김신조 루트 ▶ 성북동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In: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 / Out: 성북동






* 성북동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우리나라만큼 답사여행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곳도 드물 것이다. 5천 년에 걸친 역사를 가지고 있고, 다양한 문화재가 국토 곳곳에 산재해있으니 답사여행에 ‘딱’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인프라가 갖추어져있다는 말이다.

사실 광활한 영토보다는 적당히 규모 있는 영토가 답사여행하기에는 더 낫다. 영토가 넓으면 그만큼 교통이나 숙박, 편의시설이 열악할 수밖에 없다. 수 백 킬로미터를 가야 겨우 마을을 만날 수 있는 곳에서는 답사여행이 원활이 진행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교육열이 높은 것도 답사여행이 활성화되는데 한 몫 했다. 역사와 문화에 목말라한 많은 소비자들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답사여행을 흥하게 하는 긍정적인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귀면: 오간수문에 조각되어 있다.

● 직접 가서 봐야지 그려볼 수 있다!

그럼 답사여행의 장점은 무엇일까? 텍스트상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그 중 하나의 장점으로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 안에서는 읽어낼 수 없는 지식들을 답사여행을 통해서 체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곽과 같은 축조물들은 해당 유적과 함께 주위 사방의 지형을 함께 둘러보아야 그 진면목을 명쾌하게 인지할 수 있다.

가파른 산줄기를 타고 내려온 성곽이 어떤 방면의 방어를 위해 축조되었는지를,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럼 탐방자는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가 적들의 예상 침입로를 짐작해보고, 해당 성곽이 그 침입을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게 축조됐는지 나름대로 ‘워게임 시뮬레이션’을 돌려볼 수도 있다.

이런 과정들은 역사책이나 위성지도 같은 텍스트로는 구현할 수 없는 것들이다. 현장에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을 해야 가능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답사여행은 ‘현장에 답이 있다’라는 격언을 가장 잘 실천하는 행위인 듯싶다.

이번에 소개할 탕춘대성 역사트레킹은 그런 격언에 잘 어울리는 답사 트레킹이라고 할 만하다. 그 길을 따라가면 탕춘대성은 물론 고려시대 마애불을 볼 수 있다. 또한 병풍처럼 펼쳐진 북한산의 남사면을 감상하며 걸을 수 있다. 탕수육을 잘하는 중국집이 아닌, 방어용 산성이었던 탕춘대성! 그 길을 따라 걸어가 본다.





* 옥천암: 왼쪽 첫번째 건물이 백불이 모셔진 보도각이다. 홍제천이 바로 앞에 흐르고 있다.


●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그리고 탕춘대성

탕춘대성 역사트레킹은 상명대 옆쪽에 자리잡은 홍지문(弘智門)에서부터 시작한다.

서울에는 큰 성곽이 두 개가 있다. 일명 서울성곽이라고 불리는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이 바로 그것이다. 한양도성은 북악산을 기점으로 동쪽의 낙산, 서쪽 인왕산, 남쪽 남산을 둘러쌓아 축조한 것이다. 이 네 개의 산은 내사산이라 불린다. 안쪽에 있는 네 개의 산이란 뜻이다. 전편에서도 계속 언급을 했었다.

한양도성이 도읍 방어의 최후의 보루였다면, 북한산성은 도성 방어의 전초기지라고 불릴 수 있다. 북한산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손꼽히는 요충지였다. 이 일대를 차지하기 위해 삼국은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고려시대에도 여러차례 북한산에 있는 산성을 수리·축조했다. 그만큼 북한산 일대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방어 거점이었던 것이다.

현재의 북한산성은 조선 숙종 시기에 축조된 것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혹독하게 치룬 조선은 국방력 강화와 도성 방어에 전력을 기울이게 된다. 그리하여 1704년(숙종 30)부터 1710년까지 도성 성곽을 재정비했다. 또한 다음해인 1711년에는 북한산성을 축조하게 됐다.

약 8km 달하는 북한산성은 기공에서 완공까지 6개월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규모에 비해 무척 빨리 축조된 것인데 청나라에게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공사를 서둘러 완료시켰다고 한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 강화조약에 의해 성의 축조와 수축에 큰 제약을 받고 있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서울성곽은 내사산을 둘러 만든 성이다. 북한산성은 북한산에 있는 성이고. 그래서 두 성곽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 두 성곽 사이가 좀 ‘붕 떠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간극을 메꾸기 위해 보조성이 축성됐는데 그것이 바로 탕춘대성(湯春臺城)이다. 성이 세워진 세검정 부근에 탕춘대(湯春臺)가 있다하여 그렇게 명명된 것이다. 탕수육을 잘하는 중국집이 아니고...

도성과 북한산성을 약 4km에 걸쳐 연결한 탕춘대성도 1719년, 조선 숙종 시기에 만들어졌다. 인왕산에서 가파르게 내려온 성벽은 홍제천(사천)에서 잠시 숨을 고르다 다시 북한산 쪽으로 숨 가쁘게 비탈을 탄다. 그러다 북한산 서남쪽 비봉 인근에서 북한산성과 합류된다. 북한산 비봉은 진흥왕 순수비(555년 건립)가 있던 곳이다.






* 홍지문





● 상처(?)가 많은 홍지문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이었다. 성벽이 숨을 골랐던 자리에 홍지문이 들어선 것이다. 그래서 홍지문 옆에는 홍제천이 흐를 수 있도록 수문 5개가 함께 세워져 있다.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이라고 불리는 이 수문은 홍예형(무지개)으로 이루어져 있다.

홍지문(弘智門)은 상처(?)가 많은 문이다. 사람들이 자꾸 4대문 중 북쪽에 있는 문으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 트레킹팀 멤버 중에도 그렇게 오해를 하신 분이 계셨다. 이번 편에서는 예전 트레킹팀과 동행한 이야기들이 종종 언급될 것이다. 대화체로 이야기를 풀어낼 것이다.

“이 근처에 북대문이 있다고 하던데... 이게 그 북대문이에요? ”

“북대문은 숙정문이라고 따로 있습니다. 홍지문은 북대문이 아니에요.”

한 번 더 이야기하지만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이다. ‘북대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북쪽의 대문은 서울성곽 북악산 구간에 있는 숙정문(肅靖門)이다. 4대문에 붙여진 인의예지(仁義禮智) 중 북쪽에 해당되는 ‘智’가 홍지문(弘智門)에 붙여져 그런 오해가 있는 것 같다.

홍지문은 그런 명칭의 혼용 같은 내적상처 뿐 아니라 외적상처도 있다. 성곽 일부가 잘려나간 것이다. 홍지문 바로 옆으로 세검정로가 놓여 있는데 성곽 일부를 잘라서 도로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홍지문은 자동차들의 매연과 소음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곳이다. 문화재가 자동차들에 의해 압도당하는 느낌이 든다.

그보다 더 큰 상처도 있었다. 1921년에 있은 대홍수로 아주 싹 쓸려 내려간 것이다. 옆에 있는 오간대수문도 그때 싹 쓸려 내려갔다. 지금의 홍지문은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대홍수 이후 방치되어오다 약 반세기만에 복원한 것이다.

이렇게 상처 많은 홍지문이지만 그 곳 일대를 탐방하다보면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이 어떻게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지를 관찰할 수 있다. 가파른 경사에 축조된 성곽이 어떻게 방어기지 역할을 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평소에는 수풀이 우거져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가을이 되면 성벽과 오색단풍이 어우러져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오간수문과 홍지문: 오간수문 아래로 통행이 가능하다.





● 컬러풀한 부처님? 컬러풀한 보도각 백불!

앞서도 언급했듯이 홍지문 아래로는 오간수문이 있다. 최근에 산책로가 정비되어 그 오간수문을 직접 통과해서 걸을 수 있다. 수문은 홍예문, 즉 아치형으로 되어 있다. 홍예문의 맨 위쪽 부분을 홍예종석이라고 부르는데 홍지문 오간수문에는 귀면이 장식되어 있다.

“저 아치의 꼭대기에 있는 돌에 괴상하게 장식된 것이 있죠. 저걸 귀면이라고 하는데 저는 편의상 치우천왕이라고 부릅니다.”

“저걸 왜 장식했어요?”

“물을 타고 들어오는 악귀가 저 괴상한 귀면을 보고 놀라서 도망가라고 그렇게 한 거죠?”

“풋, 정말 악귀가 도망갈까요?”

“글쎄요. 도망은 안 가도 한참 여기 서 있을 거 같아요. 무서운 거 같기도 하고, 웃긴 거 같기도 해서요. 절에 있는 사천왕을 생각해 보세요. 무서운데 우스꽝스럽잖아요.”

트레킹팀은 건강과 답사를 중시하는 ‘복덩이들’이기에 치우천왕의 보호(?)를 받으며 오간수문을 통과했다. 이제부터는 홍제천을 따라 걷는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이동을 하니 보도각 백불(白佛)을 만날 수 있었다. 정확한 명칭이 ‘옥천암 마애보살좌상’인 보도각 백불은 지난 2014년 3월 11일에 보물 1820호로 승격했다. 고려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백불이 2014년에 와서야 보물로 승격됐다는 건 좀 늦은 감이 있다. 그 전에는 서울시지정문화재였다. 옥천암은 백불 바로 옆에 위치한 사찰이고, 보도각은 백불을 보호하기 위해 올린 기와 건물을 말한다.

고려 전기시대에는 이스턴 석상을 빰칠 정도로 큼직큼직한 석불들이 많이 등장하는 시기다. 발걸음이 많이 오가는 곳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던 석불들은 지나가는 이들의 수호신이자 이정표 역할을 해주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석불들은 돌장승이라는 이름까지 얻게 됐다. 고려 전기시대에 유명한 석불들은 논산 관촉사 은진미륵, 안동 이천동 석불, 파주 쌍미륵 등이 있다.

길이가 약 5미터에 달하는 보도각 백불도 홍제천을 따라 분주히 발걸음을 옮겼던 이들의 이정표이자 수호신 역할을 했다. 또한 많은 이들의 기도처이기도 했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부처님과 달리 ‘화이트컬러’를 한 부처님인데 당연히 많은 이들이 왔겠지!

“그런데 왜 백불이에요? 흰색이 아닌데요. 회색인데요.”

“그렇죠. 화이트가 아니죠. 호분이라는 안료를 바른 건데요. 조개껍질에다 흰 색 성분이 섞인 안료로 바위에 칠을 했습니다. 목걸이나 팔찌, 보관들은 적색이고요.”

보도각 백불은 정확히 부처님 상도 아니다. 머리에 쓴 보관이 눈에 띄는 관음보살상이다. 부처상이 남성적인 면으로 그려졌다면 보살상은 여성적인 면으로 그려진다. 보관, 목걸이, 팔찌들에 색깔이 입혀져서 그런지 백불은 다른 보살상들보다도 더 여성적으로 보인다.

흰색이든 회색이든 무슨 상관인가? 또 부처상이든 보살상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중요한 건 거기에 거대한 돌장승 같은 마애불이 있다는 것이고, 그곳을 지날 때마다 나그네들은 잠시 시름을 달래며 기원을 드렸다는 점이다.

그렇게 컬러풀한 백불 아래 많은 이들이 합장을 하고 기도를 올렸다. 그 중에는 태조 이성계도 있었다.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할 때쯤에 이곳에 와서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트레킹팀도 각자 하나씩 기원을 올렸다. 무슨 기원을 드렸을까? 궁금해서 물어봤다.

“뭘 비셨어요? 로또 대박?”

사실 로또 대박은 필자의 기원이었다. 1편 선바위에서도 똑같이 빌었던 기원이었다.





* 보도각 백불




● 방치되어 있는 탕춘대성 암문


이후 트레킹 팀은 탕춘대성 암문을 향해 이동했다. 암문은 말 그대로 적 몰래 은밀하게 성 밖으로 나가는 출구이다.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고, 특공대를 파견하고, 식량을 조달하는 통로이다. 그래서 암문의 존재는 일급비밀이었다. 지도상에도 그려 넣지 않았다. 탕춘대성 암문은 한양도성 암문과 달리 좀 방치된 느낌이다. 한편으로는 아직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탕춘대성 암문을 지난 후부터는 드문드문 북한산의 남쪽면이 나타난다. 북한산 남쪽면의 가장 높은 봉우리는 보현봉이다. 북한산의 원래 이름은 삼각산인데 세 개의 봉우리가 삼각뿔 형태를 나타낸다고 해서 삼각산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그 세 개의 봉우리는 만경대, 백운대, 인수봉인데 북한산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해 비해 보현봉을 위시한 비봉 등은 남쪽에 위치해 있다.


그렇게 트레킹 팀은 병풍처럼 펼쳐진 북한산의 남쪽면을 바라보면서 걸었다.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면서...



“북한산 남쪽 봉우리들이 진짜 손에 잡힐 거 같아요. 정말 멋지네요!”




* 탕춘대성 암문





● 현장에 답이 있다!


홍지문과 오간수문, 보도각백불, 탕춘대성 암문 등등... 그리고 본문에서 언급하지 않은 마당바위 전망대까지. 탕춘대성 역사트레킹은 답사패키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많은 곳을 탐방한다.


탕춘대성 역사트레킹은 교통카드 비용만으로 고려와 조선시대의 유물을 만날 수 있는데다 숲길 탐방도 행할 수 있어 참 매력적이다. 전망은 또 어떤가. 트레킹이 마무리될 즈음에 방문하는 마당바위의 전망은 산과 도심지가 서로 어우러진 모습이라 독특한 풍광을 선사한다. 마당바위에 앉아 포즈를 취하면 그것 자체가 인생샷이다. 그런 면에서 서울 사람들은 참 복 받은 사람들이다.


탕춘대성 역사트레킹 코스를 만들기 위해 필자는 그 인근을 수십 번씩 오갔다. 물론 사전답사는 숙명 같은 것이다. 10km 코스를 만들기 위해 100km 이상을 오가야 하는 것이 필자의 임무인 것이다. 갔던 길 또 가고, 또 갔다가 다시 고치고. 이런 식으로 수없이 발걸음을 하다 보니 결국 호평 받는 코스가 나오더라.


발바닥에 땀나도록 걸어 다녀야 제대로 된 결과물을 얻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런 말이다.


“현장에 답이 있다!”






*탕춘대성 성벽





■ 탕춘대성 역사트레킹


1. 코스: 홍지문(오간수문) ▶ 보도각백불 ▶ 탕춘대성 암문 ▶ 마당바위 ▶ 실록어린이공원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In: 홍지문 / Out: 실록어린이공원 ☞ 3호선 경복궁역에서 상명대행 버스 탑승, 상명대 하차 / 실록어린이공원에서는 3호선 홍제역이 가까움.






* 탕춘대성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파랑새가 정말 있을까?’

 

불혹을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철이 들지 않아서인가? 요즘도 가끔가다 저런 동화 같은 상상을 해본다. 그렇다고 필자만 파랑새를 찾고 있지는 않은 듯싶다. 우리사회가 무한경쟁 속에 놓이다보니 역설적으로 파랑새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더 짙어지고 있는 듯싶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더 많이 입에 오를수록 파랑새도 더 많이 언급될 것이다.

잠깐 정리를 해보자. <파랑새>는 벨기에 출신인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Maurice Maeterlinck)가 쓴 동화이다. 주인공인 틸틸과 미틸의 꿈속에 요정 할매가 나타났다. 할매는 자신의 아픈 딸을 위해 행복의 상징인 파랑새를 찾아달라고 틸틸과 미틸에게 부탁을 했다. 이제까지 치르치르와 미치르로 알고 있었는데 정확히는 틸틸(tyltyl)과 미틸(mytyl)이더라.

틸틸과 미틸은 파랑새를 찾아 여러나라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파랑새는 어디에도 없었고, 그들은 지친나머지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그건 꿈이었다. 그 꿈에서 깨어나 집에 있던 새장을 보니 기르던 새가 파랑새였던 것을 깨닫는다. 행복의 상징인 파랑새를 찾아 온갖 고생을 하며 여러나라를 돌아다녔는데 정작 파랑새는 자신의 집에 있었던 것이다.

필자는 이제까지 <파랑새>가 안데르센의 작품인 줄 알았다. 여기서 필자의 독서 실력이 확 노출된 셈이다. 그러고 보면 필자의 어렸을 때 친구들 중에 ‘책’은 없었던 것 같다. 어쨌든 간간이 파랑새를 입에 올리기는 했지만 원작자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냥 단순하게 ‘명작동화=안데르센’이라는 등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파랑새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대신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해본다.

 

 

 

 

 

* 안산자락길: 로고

 

 

 

 

● 경기도 안산? 아니 서대문 안산!

누구나 다 아는 사실 하나! 인구 천 만 명이 모여 사는 서울이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이라는 사실! 하지만 사람들이 잘 인지하지 못하는 사실 하나! 서울에 정말 산이 많다는 사실!

초고층 빌딩들이 하나둘씩 들어서고 있지만 서울 스카이라인의 최고점은 인공물이 아니다. 최고점은 항상 북한산과 관악산이 차지했다.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랬으면 한다. 이렇듯 산은 서울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였다. 현무 역할을 하고 있는 북한산과 주작 역할을 하고 있는 관악산이 두드러졌지만 키가 작은 산들도 자기 나름대로의 역할을 해왔다.

이번에 소개할 곳은 서대문 안산이다. 이번 편에서는 이동순서에 따라 기술하지 않았다. 그래서 코스 상으로는 맨 뒤쪽에 놓이는 무악재하늘다리가 앞부분에 소개됐다.

문화센터에서 안산역사트레킹 강의 공지를 올렸을 때, 종종 이런 말을 듣게 된다.

 

“안산 트레킹이요? 서울학개론이라면서 경기도 안산까지 가요?”

“아닙니다. 서대문 안산으로 갑니다. 서대문 안산(鞍山)하고 경기도 안산(安山)은 위치도 다르고 한자도 다릅니다.”

그렇다. 서대문 안산은 ‘안장안(鞍)’ 자를 사용한다. 산이 말 안장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런 명칭을 얻은 것이다. 실제로 안산은 완경사를 타고 가다가 정상부근에서 불쑥 튀어나와 있다. 멀리서보면 얼핏 말안장처럼 보인다. 그런 안산의 윤곽을 확인하려면 건너편에 있는 인왕산에서 바라보는 게 좋다.

안산은 인왕산과 무악(毋岳)재를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다. 그래서인지 안산과 인왕산은 지질구조가 비슷한 점이 많다. 지난 1편에 등장한 인왕산 선바위를 기억하시는가? ‘기도빨이 잘 받는’ 스님바위 말이다. 선바위를 보면 구멍이 뻥뻥 뚫려 있다. 기이한 형태의 그런 구멍들은 풍화혈이라고 부른다. 벌집구조 형태로 작용하는 풍화혈은 화강암이 차별침식을 받았을 때 생성된다. 이 풍화혈은 타포니(taffoni)라고도 불리는데 ‘타포내라’라는 코르시카의 말이 그 어원이다.

“타포니는 프랑스 코르시카에서 나온 말입니다. 코르시카는 나폴레옹의 출생지고요. 하여간 이런 벌집 구조는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서울에서 이런 지형을 볼 수 있는게 참 고마운 일이죠.”

 

애꿎은 나폴레옹까지 끌어오면서 타포니 지형을 설명하지만 필자의 전달력이 딸려서 그러는 건지 수강생들의 표정은 ‘뚱’해 있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서울에서 지질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 몇 군데나 있겠는가? 아무리 수강생들이 하품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야기할 건 이야기해야지.

“인왕산에서 봤던 타포니 지형을 이곳 안산에서도 볼 수 있답니다. 안산에도 해골바위가 있거든요. 구멍이 뻥뻥 뚫리는 타포니 지형이 그런 해골바위를 만들었지요. 인왕산에도 해골바위가 있고, 안산에도 해골바위가 있고...”

 

 

 

 

 

* 무악재하늘다리

 

 

 

 

 

● 사람들이 더 좋아하는 생태다리, 무악재하늘다리

그렇게 비슷한 점이 많은 안산과 인왕산은 1972년 통일로 확장으로 인해 녹지축이 끊기게 된다. 무악재 위를 달리고 있는 도로가 바로 통일로다. 통일로 이전에는 의주길이었다. 의주길을 따라 명나라와 청나라 사신들이 왔고, 조선의 문무백관들이 중국으로 향했다. 그 길은 매우 중요한 기간 도로였던 셈이다.

그렇게 약 40년 이상 끊겨있던 두 산에 생태다리가 놓였다. 무악재하늘다리가 놓인 것이다. 그 다리가 놓임으로서 두 지역을 오가는 코스가 다양해졌다. 생태다리 하나 때문에 트레킹 코스가 풍부해진 셈이다. 동물들보다 사람들이 더 즐겁게 된 것이다.

한편 무악재는 무학재로도 불린다. 이처럼 한끝의 차이는 왜 나타났을까? ‘무악’이나 ‘무학’이나 똑같아 보이는데. 조선이 개국할 즈음에 천도 예정지로 거론된 곳은 한양, 계룡산, 안산 세 곳이었다. 당시 경기도 관찰사 하륜은 안산 주산론을 펼치며 안산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었다.

만약 하륜의 주장대로 안산을 주산으로 삼았다면 한강의 이용가치는 훨씬 더 커졌을 것이다. 한강을 중심으로 한 경강상인들의 상행위는 더욱더 활발했을 것이다. 그렇게 됐다면 조선이 교조적인 성리학에 묶이지 않고 훨씬 더 개방적인 나라가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선은 엄격한 신분제의 나라였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하여 상업활동을 천시하던 사회였다.

 

어쨌든 안산 주산론은 안산의 남쪽이 지나치게 협소하다는 이유로 폐기되고, 무학대사의 의견에 따라 북악산 남쪽이 도읍지로 결정된다. 이런 스토리텔링이 있어서인지 무악재가 무학재로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한편 무악재는 말안장 같은 안산 기슭을 따라 넘는 고개라고 하여 길마재라고도 불렸다.

 

 

 

 

 

*메타세쿼이아 숲

 

 

 

 

● 서대문형무소와 다크투어리즘

안산 역사트레킹의 출발점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다. 서대문형무소는 처음 일제에 의해 경성감옥(1908년)으로 출발했는데 이후 서대문감옥(1912년), 서대문형무소(1923년)로 개명을 한다. 이름을 바꿨다고 해도 그 기능은 뻔했다. 독립지사들에 대한 탄압과 수감이 그 역할이었던 것이다.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조국독립을 외치며 피눈물을 흘렸던 아픈 역사의 현장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서울형무소(1945년), 서울교도소(1961년), 서울구치소(1967년)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 감옥의 기능은 계속됐다. 드라마틱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반영하듯 이곳은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투옥됐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작고한 김근태 의원 같은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분들이 바로 그런 분들이었다.

형무소의 담장이 걷어지고 주변지역이 공원화 된 것은 1992년이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포함한 이 일대가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명명된 것이다. 시설이 잘 정비가 되어서 그런지 서대문독립공원은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다. 많은 이들이 피눈물을 흘렸던 서대문형무소에는 체험학습 나온 초등학생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다. 재개발 문제로 말이 많았던 서대문 옥바라지 골목 일대는 이제 고급아파트가 들어섰다. 현재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일대는 확실히 어두운 색채가 옅어져있다.

어두운 면을 찾아볼 수 없다고 역사의 교훈까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럴 때는 다크투어리즘으로 접근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다크투어리즘은 전쟁이나 학살, 천연재해(쓰나미) 등을 당한 곳을 방문하는 것을 말한다. 다크투어리즘은 아픈 기억을 가진 지역을 탐방함으로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인데, 199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테마 여행의 한 형태다. 아우슈비츠, 체르노빌, 히로시마 같은 곳을 탐방한다면 다크투어리즘 여행을 행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서대문 형무소가 다트투어리즘(dark tourism)의 대표적인 장소로 손꼽힌다.

다크투어리즘을 확대해보면, 서울도 곳곳이 다 그 탐방지에 속할 수가 있다. 조선총독부가 들어섰던 경복궁, 한국전쟁 중에 폭파가 됐던 한강철교 등등... 서울만 그러겠는가? 다른 곳들도 다크 투어리즘 천지다. 제주 4·3, 5·18 민주화운동, 노근리 학살 등등... 동학농민군이 몰살을 당한 공주 우금티도 다크투어리즘의 최적지일 것이다.

 

 

 

 

 

* 서대문형무소

 

 

 

 

● 나무데크는 이제 그만!

도보여행자들에게 안산은 상당히 인기가 있는 곳이다. 안산자락길이 있기 때문이다. 무장애길이라 하여 유모차나 휠체어도 통행할 수 있다는 게 안산자락길의 특징이다. 나무데크를 사용하여 경사도를 완곡하게 해 이동권 약자들의 접근성을 향상시키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정말 유모차나 휠체어도 부담 없이 다닐 수 있을까? 필자는 수 십 차례에 걸쳐 안산 역사트레킹을 진행했었다. 그런데 안산자락길에서 휠체어나 유모차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아무리 안산(296m)이 키가 낮은 산이라고 해도 산은 산이다. 아무리 무장애길이라고 칭해도 경사도가 있기 마련이다.

‘무장애’라는 말에 부합하기 위해서 그랬는지 안산자락길에는 나무데크가 과도하게 사용됐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텅텅’거리는 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이동권 약자들이 더 손쉽게 트레킹을 할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수단이 나무데크의 과도한 사용이라면 곤란하다. 나무데크도 적재적소의 원칙에 따라 최소한으로 그쳐야한다. 도보여행자들은 흙길을 걸으려고 길을 나서는 것이지 나무데크를 걸으려고 발걸음을 떼는 것이 아니니까.

어쨌든 안산은 경사도가 완만하여 초급자들도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다. 2달 과정의 강의가 있을 때, 수강생들의 체력을 알기 위해 테스트 과정이 필요한데 안산은 좋은 테스트장이 되어준다.

● 누구나 로맨티스트가 되는 그 곳!

이제 정상을 향해 가야한다. 안산자락길이 평지처럼 순한 길이었다면 정상을 향해 가는 길은 좀 험할 수 있다. 이 부근은 암반이 노출되어 있는데 앞서 말한 타포니 지형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조심스럽게 정상을 향해가다 보면 해골바위를 만날 수 있다.

안산 정상에는 동봉과 서봉이 있는데 이곳에는 예전에 봉화가 설치됐던 곳이다. 동봉수대는 평안도 강계에서 시작된 봉수를 받았고, 서봉수대는 평안도 의주에서 시작된 봉수를 받았다. 둘 다 최종목적지는 남산 봉수대였다. 현재는 동봉수대만 복원이 됐다. 서봉수대 자리에는 통신 회사의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다.

안산 봉수대에 올라서면 사대문 안쪽의 모습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인왕산의 성곽길이 선명하게 보이고, 뒤쪽의 북한산의 봉우리들도 파노라마처럼 한 눈에 들어온다. 인왕산이나 북악산에서 바라보는 광경과는 또 다른 멋이 있는 것이다. 특히 한강을 함께 볼 수 있다는 게 안산의 매력인데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서울시내,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한강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어 더욱더 매력적이다.

그렇게 한강쪽을 바라다보면서 왜 경기관찰사였던 하륜이 안산 주산론을 펼쳤는지 생각해보자. 필자는 가끔 수강생들에게 그 숙제를 내줬다. 하지만 그 숙제에 관심 있는 분들은 거의 없었다. 대신 이런 말씀들을 많이 하셨다.

“여기 낙조가 장난이 아니겠는데요. 노을 질 때 한강에 유람선이라도 다니면 정말 판타스틱 하겠네요!”

말 그대로다. 안산에서 바라보는 낙조는 정말 일품이다. 낙조가 진후에도 멋있다. 야경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낙조와 야경을 본 사람은 누구라도 로맨티스트가 될 것이다. 그만큼 매력적인 광경이 펼쳐진다.

정상에서 내려오면 하늘높이 쭉쭉 뻗어 있는 메타세쿼이아 숲이 트레킹팀을 맞이한다. 서울에서 그렇게 울창한 메타세쿼이아 숲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게 정말 고마울 따름이다. 이렇게 안산역사트레킹은 지루할 틈이 없다. 300미터도 안 되는 작은 산이 이렇게 많은 것들을 안겨줄 수 있다니! 도보여행자로서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 안산봉수대

 

 

 

 

● 가장 트레킹하기 좋은 곳은 어디?

“트레킹하기 가장 좋은 곳이 어디에요?”

은근히 많이 저런 질문을 받는다. ‘어디가 여행하기 좋아요?’ 이런 질문도 많이 받는다. 트레킹 강사인 필자에게 저런 질문들은 항상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콕 집어 달라는 것이다. 트레킹을 하기에 가장 좋은 곳을 알려달라는 것이다.

전에 생태 공부가 하고 싶어서 숲체험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었다. 숲체험 교실도 현장이 중요하다. 그래서 강사분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숲 체험하기 가장 좋은 곳이 어디에요?”

수강생 분들에게 들었던 질문을 필자가 그대로 따라하고 있었다. 이 질문을 했을 때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좀 놀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트레킹을 하기 가장 좋은 곳은 바로 여러분이 사시는 동네 뒷산이에요.”

필자가 내놓은 대답은 동네 뒷산이었다. 그렇다면 숲체험 강사분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그 대답을 들었을 때는 더 제 발이 저렸던 것 같다.

“숲 체험을 하기 가장 좋은 곳은 바로 여러분이 사시는 동네 뒷산이에요.”

숲체험을 하려면 창덕궁의 비원이나 수목원 정도는 가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트레킹도 마찬가지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가장 좋은 트레킹 코스일까? 아니다. 바로 발걸음을 뗄 수 있는 동네 뒷산이 가장 좋은 곳이다. 파랑새는 멀리 있지 않다. 가까이에 있다.

그런 면에서 서대문구에 사는 사람들은 참 복 받았다. 안산이 바로 동네 뒷산이니까. 전망, 숲길, 역사 등등... 안산이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다 가지고 있으니까.

 

서대문 사람들은 파랑새를 제대로 기르고 있는 셈이다.

 

 

 

 

 

* 서대문 안산 숲길

 

 

 

 

 

 

 

■ 안산역사트레킹

1. IN: 지하철3호선 독립문역 5번 출구

2. OUT: 홍제천

3. 세부코스: 서대문독립공원 ▶해골바위 ▶ 봉수대 ▶메타세쿼이아숲길 ▶ 서대문독립공원(순환형태)

4. 길이: 약 8km

5. 예상소요시간: 약 3시간 30분

 

 

 

 

 

* 안산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안산 자락길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변형해서 이동함.

 

 

 





세 번째 산티아고 순례길을 갔을 때였다. 사리아(sarria)라는 도시에서 순례길을 중단했는데 사리아는 순례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동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당시 필자의 왼쪽 다리 상태는 썩 좋지가 않았다. 햄스트링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트레킹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 다리에 이상이 있다니! 그래서 고민 끝에 사리아에서 기차를 타고 산티아고콤포스텔라로 넘어가기로 했다. 이미 그전에 순례길 800km를 완주한 적이 있었기에 과감히 결단을 내린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도보여행가인데 기차 ‘점핑’이라니. 갈등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거기서 더 무리를 했으면 내 왼쪽 다리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넜을 지도 모른다. 이미 그때도 파스로 범벅을 하고 있었으니까. 돌아가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하루 이틀하고 트레킹을 그만 둘 것도 아니기에 그렇게 한 것이다. 길게 보고 돌아가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돌아가는 길이라고 다 순탄할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적어도 필자의 경험은 그랬다. 기차를 잘못 탔는지 엉뚱한 곳에 도착을 했다. 오우렌세(ourense)라는 도시였다. 이곳은 산티아고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남동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다.


순례길에서 이미 체력을 많이 소진한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기차를 잘못 탔고 뜻하지 않은 곳에 발걸음을 하게 된 것이다. 다음 기차까지 배차 시간도 꽤 길어서 역 밖으로 나와야했다.      


‘왜 이렇게 돌아가는 길이 어려운가. 왜 내 여행은 항상 이런 식일까?’     






* 남산성곽길: 단풍이 잘 물든 가을날에 촬영했다.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서 성곽이 잘 보이지 않는다. 대신 뒤에 북한산은 시원스럽게 보인다. 






● 트레킹 코스도 이름을 잘 지어야한다     


이제까지 인왕산, 낙산, 백사실계곡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았다. 백사실계곡이 백악산(북악산)에 있으니 내사산 중 남산만 제외하고 다 언급한 것이다. 그럼 4편은 남산 역사트레킹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다. 제목처럼 돌아간다. 대신 많이는 안 돌아간다. 이번편은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이다.       


“원래 이 코스의 이름이 <서울 내부트레킹>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으로 강제 개명을 시켰어요.”

“왜요?”

“이름이 서울내부트레킹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감을 못 잡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감을 잡나요?”

“그건 모르겠는데 최소한 예전보다 장사는 좀 되네요. 사람들이 조금 더 많이 와요.”     


트레킹 코스도 이름을 잘 지어야한다. 해당 명칭에서 사람들의 발걸음을 확 이끌 수 있는 무언가를 전달해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은 예전 명칭인 <서울 내부트레킹>보다는 훨씬 더 낫다. 적어도 사람들의 발걸음을 확 이끌었으니까.  


그렇다고 서울 내부트레킹이라는 이름이 아예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본 코스는 ‘서울숲 - 남산’을 연결하여 걷기 때문이다. 서울의 내부를 가로질러 가기 때문에 예전에 저런 네이밍을 했던 것이다. 한편 종료지점이 남산의 끄트머리인 장충단공원이라서 돌아간다고 표현한 것이다. 남산을 가기는 하지만 살짝 찍으니까.     




● 매 사냥터였다는 매봉산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의 시작점은 지하철 5,6호선 청구역이다. 청구역에서 첫걸음을 뗀 후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은 금호산이라고도 불리는 매봉산이다. 조선시대 왕들이 매를 풀어 사냥을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매봉산은 응봉근린공원의 한 축으로 속해 있다. 그 응봉근린공원은 남산과 서울숲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이야 도심지의 확장으로 중간 중간 녹지축이 잘려 나갔지만 예전에는 남산에서부터 응봉산까지 하나의 능선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응봉산은 조선 초기 동빙고(東氷庫)가 있던 산으로 지금은 개나리 축제로 유명한 작은 산이다. 사냥감을 노리는 ‘매’서운 눈빛이 사라진 매봉산이지만 그곳에 올라서면 눈이 크게 떠지게 된다. 시원스럽게 한강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강을 가깝게 전망할 수 있는 곳은 매봉산 팔각정이다. 이 곳에 올라서면 서울을 흐르고 있는 한강의 동쪽편을 관찰할 수 있다. 


여기서 잠깐 한강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 한강은 예전부터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광개토대왕비문에는 '아리수'라고 기재되어 있고, 고려시대에는 '열수'라고 불리기도 했다. 지역적으로 다른 이름을 가지기도 했는데 경기도 여주 지역은 '여강'이라고 불렸고, 임진강과 합수되는 한강 하류 일대는 조강이라고 불렸다.


매봉산 팔각정 앞에 있는 동호대교는 '동호'라는 옛날 그 지역의 명칭을 따서 지었다. 동호는 서울의 동쪽 지역 한강을 일컫는 말이다. 한강이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게 보인다고 하여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팔각정에 올라서면 강남 방면으로 꺾여 나가는 한강의 역동적인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인근에 있는 아차산은 물론 멀리 팔당대교 부근까지 조망할 수도 있다. 


연이어 놓여 있는 한강다리들의 이름을 맞춰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동행한 사람들과 한강다리 맞추기 놀이를 해볼 수도 있다. 필자도 동행한 트레킹팀과 함께 한강다리 맞추기 놀이를 했다. 결과는? 비밀!     





* 한강: 매봉산 팔각정에서 서울의 동쪽 지역을 바라본 모습.






● 버티고개에 앉아 있는 놈이 되지 말자     


“밤중에 버티고개에 가서 앉을 놈이다.”   

  

이런 속담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 저 속담은 사람들한테 사기나 치고, 민폐나 끼치는 못된 놈들을 욕할 때 쓰는 말이다. 버티고개는 약수동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버터고개, 번터고개라고도 불린 이 고개는 길이 좁은데다 도둑들까지 들끓는 터에 악명이 높았다. 그 도둑들을 옛날 순라꾼들이 ‘번도’라고 외치며 추격을 했는데, 그 말이 변하여 ‘번티’라 불렸다가 다시 ‘버티’로 바뀌었다고 한다. 


예전 한 밤 중에 버티고개에 앉아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아마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니 남들에게 민폐나 끼쳐서 ‘밤중에 버티고개에 앉을 놈’과 같은 욕을 먹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론 지금의 버티고개는 걷기에 좋은 길이 됐다. 안전한 생태다리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 길을 따라 남산의 동쪽 방면을 보며 걸을 수 있다. 그렇게 버티고개를 넘으면 동남쪽 서울성곽길과 만나게 된다. 이 구간의 성곽길은 신라호텔 후면을 돌아간다. 이 구간은 신라호텔의 사유지였던 곳이 개방된 터라 비교적 성곽의 흔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 매봉산 팔각정






●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장충단 공원     


가수 배호의 노래 ‘안개 낀 장충단 공원’으로 유명한 장충단(奬忠壇)은 원래 제례를 드리는 공간이었다. 이곳은 어영청의 분소인 남소영(南小營)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남소영은 도성의 남부지역을 방비하는 군영이었다. 


이 자리에 장충단이 들어서게 된 건 1900년 9월경이었다. 고종은 을미사변(1895년)으로 살해된 명성왕후와 신하들의 넋을 추모하고자 장충단을 세웠다. 처음에는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장병들만 제사를 지냈으나 이후에는 이경직 같은 궁내부 대신들도 배향되었다. 더불어 임오군란, 갑신정변 당시에 순직한 문신들도 배향되면서 많은 문무관들이 장충단제향신위(奬忠壇祭享神位)에 봉안됐다.  


공원 중심부에 서 있는 장충단(奬忠壇) 비석의 앞면은 순종이 직접 쓴 글씨를 세긴 것이다. 순종은 명성왕후의 둘째 아들이었으니 글자를 써내려가면서 울분을 토했을 것이다. 


장충단은 1910년, 일제에 의해 폐사된다. 1920년대 일제는 장충단을 공원화하면서 그곳의 정신을 앗아가게 된다. 마치 ‘종묘사직’ 할 때의 ‘사직단’이, 1922년 사직단 공원이 된 것과 같이 격하된 것이다. 


을미사변 희생자들의 넋들이 빠져(?)나간 장충단에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추모시설들이 그 자리를 채워나갔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을 당해 죽었을 때인 1909년에 일본은 장충단에서 추도대회를 열었다. 이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도하기 위해 박문사(博文寺)가 세워졌고, 상해사변(1932년) 때 폭탄을 안고 적진(?)을 향해 갔던 육탄삼용사를 기리는 동상도 세워졌다. 


육탄삼용사는 가미카제의 원형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중국군의 철조망을 제거하기 위해 그들은 폭탄에 불을 댕겼는데 생각한 것보다 심지가 빨리 탔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됐을까? 그냥 폭사했다. 그런 3인을 위해 일제는 동상을 세웠던 것이다. 그런 일제가 만든 시설들은 광복 후에 다 철거가 됐다.      





* 수표교





● 정치집회 장소로 쓰였던 장충단공원     


광복 이후 장충단 공원은 정치집회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수많은 정치집회 연설 중 두드러진 연설이 하나 있었다. 1971년 4월 18일,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의 선거 유세가 바로 그것이다. 그해 4월 27일에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선거 와중에 행해진 김대중의 연설은 무척 파격적이었다.   

   

“이번에 우리가 집권하지 못하면 박정희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온다”     


그의 연설처럼 1972년에 유신헌법이 제정됐고,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꿈꾸게 된다. 1979년 10월 26일에 한 발의 ‘총탄’이 있기 전까지 박정희는 실질적으로 총통이었다. 3권 분립은 그저 교과서에서만 존재했다. 


이외에도 김대중은 향토예비군 폐지, 남북간 비정치적 영역 교류 실시, 지방자치제 도입 등을 언급했다. 지금이야 새로울 것이 없지만 당시의 시각으로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들이었다. 장충단 공원에 모인 100만 가까운 인파들 앞에서 저런 ‘센세이셔널’한 내용들이 확성기를 타고 퍼져나갔으니 당시 집권세력은 얼마나 긴장을 했겠는가?      



● 청계천 복원의 핵심수표교 


장충단공원에는 수표교(水標橋)도 있다. 청계천에 세워져 있던 수표교는 1958년, 청계천이 복개가 될 때 철거되어 홍제동으로 이전했다가 1965년부터 장충단공원 입구에 자리 잡게 됐다. 수표교는 세종 2년(1420)에 처음 세워졌는데 그때 이름은 마전교(馬廛橋)였다. 마전교가 수표교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변경되게 된 건 세종 23년(1441)의 일이다. 그해 강수량을 측정하기 위해 다리 아래에 양수표(量水標) 세우게 됐는데 그것을 계기로 수표교(水標橋)로 개칭이 된 것이다.  


수표교의 매력은 다리 난간에 있다. 난간이 있는 다리는 궁궐에서나 쓰였다. 조선시대 민간의 다리는 징검다리나 섶다리 수준이었다. 그래서 수해가 나면 다리가 흔적조차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수표교는 튼튼한 돌다리인데다 고급스러운 난간까지 더해졌다. 백성들이 이용하는 다리들 중에 수표교처럼 궁궐의 양식으로 격조 높게 축조된 다리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편 수표교의 돌기둥에는 경진지평(庚辰地坪)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영조 36년(1760), 그해에 있은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 과정에서 새겨진 것이다. 이렇듯 수표교는 역사적으로 건축학적으로 무척 중요한 다리다. 하지만 청계천 복원이 된 지금도 원래 위치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현재의 청계천 자리에는 ‘짝퉁 수표교’가 세워져 있다. 


한강도 보고, 버티고개도 넘고, 장충단도 탐방하는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 그렇게 서울 내부를 가로질러 가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곳들을 탐방하게 된다. 생각지도 못한 울창한 숲길에 매료되게 된다. 



* 한강정망대 역사트레킹: 한양도성 남산구간






● 가야할 길이라면 우리는 가야한다     


서두에 언급한 오우렌세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보자. 돌아가는 길이 순탄하지 않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길을 헤매는 것도 여행의 일부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도 여행의 일부니까. 


그런데 뜻밖의 장면을 목격하게 됐다. 로마시대에 건설된 다리를 만나게 된 것이다.  ponte roman de ourense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는 로마시대의 다리인데 현재도 현역으로 쓰이고 있다. 또 한 가지가 있다. 도시자체가 무척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 로마다리 밑으로는 미뉴강이라는 강이 흐르고 있는데 수변과 어우러진 도심지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직진을 하든 돌아서 가든 가야할 길이라면 우리는 가야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숙명이다. 그렇게 묵묵히 걷다보면 위와 같은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런 에피소드를 이렇게 부른다.     


- 전화위복     





■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     


1. 코스: 금호산 ▶ 매봉산팔각정 ▶ 버티고개 ▶ 한양도성  ▶ 장충단공원 

2. 이동거리: 약 8km 

3. 예상시간: 약 3시간 30분(쉬는 시간 포함)

4. 난이도: 하

5. In: 지하철5,6호선 청구역 / Out: 장충단공원(지하철3호선 동대역)    





* 한강전망대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역사트레킹


 

박수를 받든 안 받든 그냥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무대에 서 있을 때만큼은 정말 행복합니다.”

 

예전에 우연히 만난 연극인이 이런 말을 했었다. 연극인이 겪어야 하는 생활고, 캐스팅에 대한 불안감...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고단한 연극판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는 해맑은 미소로 저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대행복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는 더 힘줘서 이야기를 했었다.


방송에서 인기가 떨어진 가수나 배우들이 무대가 너무 그립다는 말들을 할 때는 마음에 와 닿지 않았었다. 그냥 한물간 연예인들의 인기회복용 멘트라고 생각했다. 시청자들의 감수성을 건드리려는 작업용 멘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연극인과의 대화 이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가식적인 방송용 멘트가 아니라 진짜 무대에 대한 간절한 갈증을 마이크에 대고 표출한 것이라고.


무대라고 하니까 가수나 배우들에게만 초점이 맞춰지는데, 무대를 그라운드로 바꿀 수도 있다. 시즌 중에 부상을 당한 한 여자배구 선수가 있었다. 재활 과정 중에 인터뷰를 했었는데 코트가 그립다며 눈물까지 보이더라. 배구가 너무 하고 싶었다는 이야기다. 그녀에게 배구는 존재 이유였던 것이다.


바람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은 야구선수 이종범도 인터뷰에서 비슷한 말을 했었다. 부상 이후에 찾아온 슬럼프 때문에 너무 괴로웠고, 다시 그라운드에 서기 위해 더 열심히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루키시절보다 더 열심히 타격과 수비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는 곳이 바로 그라운드였으니까


결국 그는 다시 그라운드에 섰고, 2009년 소속팀인 기아 타이거즈가 한국시리즈를 우승할 때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 당시 이종범의 나이는 40살이었다. 이미 은퇴를 해야 할 나이였지만 그는 그라운드 위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실히 입증했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무대가 있을 것이다. 자신만의 그라운드가 있을 것이다. 그곳에 올라서면 자신도 모르게 화색이 돌고 말에 힘이 넘치게 된다.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는 힘에 부쳐하다가도 그곳에 올라서면 얼굴색이 달라진다. 마치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렇다면 필자의 무대는 어디일까? 그렇게 화색이 돌고, 말에 힘이 넘치는 무아지경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 어디일까? 길이다. 더 정확히는 숲길.

 



* 북악팔각정: 북악팔각정에서 바라본 북한산. 






세검정(洗劍亭)보다 고향집 팔각정이 더 낫다?

 

3편에서는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을 소개한다. 서울의 숨어 있는 비경이라고도 불리는 백사실계곡은 북악산에 자리 잡고 있다. 백악산이라고도 불리는 북악산은 서울의 내사산(內四山) 중 가장 키가 큰 산이다. 그 높이가 340m이다. 전편에서도 계속 언급했듯이 한양도성은 내사산을 연결하여 만들어졌다. 북악산-인왕산(338m)-남산(270m)-낙산(125m)을 연결하여 18.6km의 성곽을 쌓았다.


법궁이었던 경복궁이 그 아래에 자리 잡고 있듯, 북악산은 궁궐의 주산으로서 조선시대 내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 군주제에서 공화정으로 바뀐 지금도 그 역할은 계속되고 있다. ? 청와대가 있으니까.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은 상명대입구에 있는 홍제천에서부터 시작한다. 3호선 경복궁역에서 상명대행 시내버스를 타고 약 15분 정도 이동하면 시작점에 도달한다.


홍제천은 모래가 많아 사천(沙川)이라고도 불렸다. 그 홍제천을 따라 백사실계곡으로 방향을 잡고 가면 세검정을 만날 수 있다. 세검정은 칼을 씻었다(洗劍)’는 의미인데 광해군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광해군을 몰아내고자, 인조반정을 획책한 이귀, 김류 등이 칼을 갈아 씻었다고 해서 세검정(洗劍亭)이라고 명명됐기 때문이다. 정자정()에서도 보듯 세검정은 계곡 옆에 지어진 정자다.


세검정 일대(종로구 부암동)는 예부터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였다.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이 주위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홍제천이 너럭바위 위를 유유히 흐르고 있으니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데 안성맞춤이었던 셈이다


다산 정약용과 겸재 정선도 그렇게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린 이들이었다. 다산 선생은 <유세검정(遊洗劍亭)>이란 시를 지었고, 겸재 선생은 <세검정도>라는 부채 그림을 그려 세검정을 칭송했다.


현재의 세검정은 1977년에 지어졌다. 1941년에 인근에 있던 종이공장에서 화재가 났는데 불이 옮겨 붙어 주춧돌만 남기고 완전히 소실됐다가 이후 36년 만에 복원된 것이다. 겸재 선생의 부채 그림을 많이 참조하여 복원됐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크다고 한다


필자가 봐도 복원된 세검정과 겸재 선생의 그림 속의 세검정은 닮아 있지 않았다. 현재의 세검정은,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한 동네 정자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트레킹팀의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 고향 마을회관에 있는 팔각정이 더 좋아 보이는데요...”


부채에 그려진 수려한 주위풍광은 되돌릴 수 없겠지만 문화재 복원만큼은 보다 더 정교하게 이루어졌으면 한다.

 




* 세검정





비밀의 화원 같은 백사실계곡

 

북악산은 많은 부분이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다. 그래서인지 1급수에서만 산다는 도롱뇽이 살고 있단다. 그곳이 정확히 어디냐? 바로 백사실계곡이다. 북악산의 북사면에 위치한 백사실계곡은 비밀의 화원같다고 표현할 수 있다.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중심가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그렇게 한적한 장소가 있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사실 백사실 계곡은 말이 계곡이지 거의 건천에 가깝다.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을 때를 거의 본적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인지 백사실 계곡은 계곡 자체보다는 숲길이 더 각광을 받는 곳이다. 울창한 숲이 터널처럼 산책로를 감싸고 있어 삼림욕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저 한들한들 걷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랄까.


산책로를 따라 백사실계곡 위쪽으로 올라가면 큰 연못 자리와 함께 별서터가 나온다. 주춧돌만이 남아 있는 그곳은 오성대감 이항복 선생의 별서터였다고 전해졌다. 그래서 필자는 예전에 이런 식으로 해설을 했었다.

 

예전에 이곳은 백사 이항복 선생의 별장터였어요. 이항복 선생은 오성과 한음 할 때, 그 오성이었죠.”

 

하지만 몇 해 전에 추사 김정희 선생이 그곳의 주인이었다는 고문서가 발견됐고, 백사실계곡의 별서는 추사 선생의 소유라는 게 정설이 되었다. 하지만 그 곳이 이항복 선생 소유든 김정희 선생 소유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오히려 오성대감과 추사 선생이 함께 묶여 있으니 더 풍부한 스토리텔링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식으로 해설을 한다.

 

예전에는 이곳이 오성대감 별장터라고 말했는데요. 이제 추사 선생의 문서가 발견됐으니 저는 이렇게 가정해봅니다. 이곳이 오성대감 소유였다가 나중에 추사 선생이 매입했다, 이런 식으로요. 오성대감은 조선 중기 때 인물이고, 추사선생은 후기 때 인물이니까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요?”

 

과거의 행한 해설 오류를 만회하려고 나름대로 꼼수(?)를 써본 것이다.

백사실계곡 일대는 백석동천(白石洞天)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동천은 풍광이 수려한 곳을 지칭하는데 어떤 풍류객이 白石洞天네 글자를 보기 좋게 각자를 해두었다. 그 백석동천 바위는 탐방객들의 포토존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누구나 그 곳을 탐방하면 그 바위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카메라를 꺼내고 멋진 포즈를 취하게 될 것이다. 찰칵!

 




* 백사실계곡: 계곡 초입에 있는 현통사






서울 한복판에 능금마을이?

 

백석동천을 탐방하다 보면 능금마을이라는 곳을 만나게 된다. 능금마을은 군사보호구역으로 묶여 있어서 그런지 전원적인 모습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서울 도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비료포대가 쌓여진 농촌 마을을 보고 있자니 생경한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왜 능금마을이 북악산 서북쪽 부암동 부근에 있는 것일까? 아시다시피 능금이면 우리나라의 고유 사과종을 말하는데 능금으로 유명한 지역은 대구·경북 쪽이 아닌가? 이런 의문이 드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실제로 예전에 트레킹에 참가한 사람들도 그렇게 묻고 있었다.

 

서울 한복판에 왜 사과마을이 있는 거에요?”

 

현재 창의문 밖, 부암동 일대는 능금마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사과나무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능금마을이라는 마을 명칭만이 옛 흔적(?)을 확인해 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40여 년까지만 해도 창의문 밖 능금은 경림금(京林檎)이라 하여 서울의 유명한 특산물이었다. 능금이 출하되는 가을 때쯤에는 전국에서 몰려온 상인들로 창의문 인근이 들썩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창의문 밖에 능금나무가 많이 심어졌을까? 먼저 산지 형태를 띠는 부암동 일대의 토양이 척박하여 논농사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로 들어질 수 있겠다. 그럼 두 번째 이유는? 두 번째 이유는 창의문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 두 번째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창의문의 역사를 더듬어 가야 한다.

 




* 백석동천: 각자바위






인조반정과 능금마을

 

1623313.

창의문 밖 홍제원(지금의 서대문구 홍제동)에 집결한 의군(義軍)’들은 창의문을 부수고 창덕궁으로 진격한다.


반정군의 원두표가 도끼로 문을 부셨다. 당시 창의문은 문루가 없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탔기 때문이다. 높은 위치에서 활도 쏘고 해야 하는데 문루가 없으니 효과적인 방어가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반정군은 창덕궁을 점령했고, 광해군은 폐위된다.


능금마을 이야기를 하다 뚱딴지 같이 왜 인조반정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일까? 그렇다. 창의문 밖 능금마을은 인조반정과 무척 관련이 깊다. 인조는 반정에 협조했다 하여 창의문 밖 백성들에게 능금나무와 자두나무를 나눠주었다. 그게 부암동 능금마을의 시초가 된 것이다.


숙종 때에는 정책적으로 묘목을 더 많이 심어 부암동 일대에 무려 20만 그루의 능금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가을이 되면 빨갛게 달아오른 사과들이 푸른 잎들 사이에서 대롱대롱 거렸을 것이다. 아주 멋진 장관이 펼쳐졌을 것 같다. 거기에 인왕산 서편으로 석양이 지는 모습까지 어우러지면!


창의문 밖 능금, 경림금은 그렇게 서울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되었다. 추석 차례상에 빠지지 않고 오르는 제례물품이 되었던 것이다.

 




* 수각터: 수각터에서 바라본 별서터. 물에 세운 정자를 수각이라고 한다. 백사실계곡 별서터 옆에는 수각이 세워졌던 기단들이 이렇게 남아 있다. 현재 수각은 사라졌고, 연못은 매말랐다.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 다음날에는 저 연못이 물이 차기도 한다. 





북악스카이웨이와 북악산 산책로

 

능금마을을 돌아가면 약수터가 나온다. 산길도 계곡 이어진다. 백사실계곡 숲길보다는 덜하지만 이 산길도 정말 걷기에 좋은 길이다. 걷다보면 어깨춤을 추거나 콧노래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필자는 둘 다 했다. 어깨춤을 추며 콧노래를 불렀다.


이제 북악스카이웨이를 따라간다. 북악팔각정을 향해가는 것이다. 일명 북악스카이웨이로 불리는 북악로는 19689월에 완공됐다. 이 도로는 그해 121일에 있었던 청와대습격사건(일명 김신조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다. 서울방어목적으로 개통됐던 것이다.


무장공비에 의한 청와대습격이라는 엄청난 사건의 여파로 만들어졌지만 이 도로는 관광용으로 더 많이 애용됐다. 도로 정상부에 북악산 팔각정이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서울을 한 눈에 다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사산은 물론 멀리 관악산과 아차산 등 외사산까지도 다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북악산 팔각정이다.


북악산 팔각정은 석양이 질 무렵이 가장 낭만적이다. 뒤쪽 북한산 서편으로 펼쳐진 붉은 노을을 감상한 후에 앞쪽으로 이동을 하여 서울의 야경을 보는 것이다. 노을도 감상하고, 뒤이어 야경도 감상하는 것이다.


이렇듯 자연과 도시의 낭만을 동시에 품고 있는 북악스카이웨이는 60~70년대 신혼여행지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당시에는 택시를 타고 북악스카이웨이나 남산을 한 바퀴 도는 것이 신혼여행의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해외여행이 흔한 일상이 된 요즘과 비교해보면 정말 격세지감이다.


한편 북악산 산책로는 한양도성 북악산 구간과는 다르다. 성곽 구간을 포함하여 북악산 일대는 안보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됐다 2006년 이후 일반인들에게 개방됐다.

팔각정에서 성북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군인들의 보초로이다. 그 길을 걷다보면 지금 자신이 서울 중심부에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게 될지 모른다. 그만큼 그 길 주변은 때 묻지 않은 자연 경관을 유지하고 있다.

 




* 백사실계곡: 울창한 여름숲도 좋고, 이렇게 단풍이 지는 가을도 좋다. 이렇게 좋은 길을 걸으니 어깨춤이 들썩이고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거겠지!





숲길에 서면 무아지경에 빠진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필자의 무대는 길이다. 길 위에 서서 트레킹을 행하다보면 모든 근심걱정에서 벗어난다. 평소에 거울을 보면 항상 해있는데 숲길에서 트레킹을 할 때는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렇게 해맑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다


좋은 기가 발산 되서 그런지 숲길에서는 해설도 잘 된다. 마이크를 잡고 이러쿵저러쿵 두서없이 이야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박수로 갈무리된다그렇게 숲길은 필자의 존재가치를 확실히 입증해주는 무대다. 가끔 그 위에 올라서면 어느덧 무아지경에 빠지기도 한다.


누구나 다 자신만의 무대가 있을 것이다. 그 무대가 누구에게는 실험실일수도 있고, 누구에게는 그라운드일수도 있다. 또 누군가에게는 주방일수도 있다. 누구의 무대가 더 좋고 나쁜지는 굳이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다. 그저 묵묵히 무대에 올라 자신만의 에너지를 발산하면 되는 것이다.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지만 숫자는 한 번 따져보고 싶다. 숫자는 확실히 필자의 무대가 압도적이다. ? 전국방방곡곡에 있는 숲길이 다 필자의 무대니까.

 

 



* 백사실계곡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

 

1. IN: 부암동

2. OUT: 성북동

3. 세부코스: 세검정 백사실계곡 능금마을 북악산팔각정 성북동

4. 이동거리: 7km

5. 예상시간: 3시간 30

 

 


* 백사실계곡 역사트레킹 지도: 이해를 돕기 위한 참고용 지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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